12월 1일 임진
소대하였다.
예조 판서 이면긍(李勉兢), 참판 윤치성(尹致性)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명년은 곧 우리 자궁께서 관례(冠禮)를 치른 지 회갑(回甲)이 되는 해이다. 존호(尊號)를 올리고 경사를 치르는 것이 진실로 당연한데, 자심(慈心)이 매번 겸양(謙讓)을 고집하시니, 그 뜻을 받드는 도리에 있어서 우선 또 받들어 따랐었다. 정월 22일은 곧 관례를 치른 회갑이 되는 달과 날이 되므로, 바야흐로 궐내에서 소작(小酌)을 베풀어 잔치하는 일을 하고자 한다. 선조(先朝) 을묘년135) 의 고사(古事)를 돌이켜 생각하건대, 또한 이미 전례가 있었으니, 진찬(進饌)하고 표리(表裏)를 바치는 의주(儀註)를 해조에서 마련해 들이도록 하라. 한결같이 연희당(延禧堂)의 전례를 준수할 것이니, 거행하는 절차 또한 장대(張大)하게 하지 말고 힘써 간약(簡約)한 데 따라서 조금이나마 정례(情禮)를 펼 수 있게 하라. 의장(儀章)은 표리를 바치고 행례(行禮)할 때에는 강사포(絳紗袍)를 착용하되, 진찬할 때에는 곤룡포(袞龍袍)를 바꾸어 착용함이 마땅할 것이니, 그 절차를 상세히 상고하여 마련해 들일 것이며, 백관(百官)의 진하(陳賀)는 권정례(權停禮)로 함이 옳겠다. 혜경궁(惠慶宮)·대전(大殿)·중궁전(中宮殿)은 마땅히 양산선(陽繖扇) 등의 의장을 써야 하며, 음악을 연주하는 데 이르러서는 비록 갖추어 거행하지 않는다 하나, 송축(頌祝)하는 가사(歌詞)는 또한 악장(樂章)에 올리는 것이 마땅하다. 포진(鋪陳) 및 여러 도구는 마땅히 궐내에서 옛날에 쓰던 것을 그대로 쓰되, 만약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있으면 마땅히 하교하겠다. 의주(儀註)는 오늘 안에 초를 잡아 들이되, 언문(諺文)으로 번역한 의주 1통을 또한 써서 들여올 것이며, 홀기(笏記) 또한 있어야 마땅하다."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치사문(致詞文)을 검교 직각 심상규(沈象奎)로 하여금 지어서 바치게 하였는데, 진찬할 때와 표리를 바칠 때에는 마땅히 각각 치사가 있어야 한다. 내명부(內命婦)는 숙선 옹주(淑善翁主)가 마땅히 반수(班首)가 되어야 하고, 의빈(儀賓)은 영명위(永明尉)가 마땅히 반수가 되어야 하니, 이것을 자세히 알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명년 정월은 곧 우리 자궁께서 관례를 치른 지 회갑이 되는 해와 달이다. 관례의 회갑은 우리 집안에서 칭도(稱道)하는 예(禮)가 없으나, 춘휘(春暉)136) 를 갚고자 하는 것은 인자(人子)의 지극한 정(情)이고 만년(萬年)을 기축(祈祝)하는 것은 저절로 우러나는 작은 정성인 것이다. 임술년137) 에 자궁께 휘호(徽號)를 가상(加上)하기를 청한 적이 있었는데, 성의(誠意)가 천박하여 자심(慈心)을 돌이킬 수가 없었다. 오로지 뜻을 받들어 순종하는 것이 효(孝)가 되는 줄 알고 방례(邦禮)를 거행할 겨를이 없어서 자나 깨나 가슴이 맺힌 듯한 채 이제 7년이 되었는데, 천휴(天休)가 더욱 지극하고 경록(景籙)이 무궁하여 자궁의 보령(寶齡)이 높을수록 자궁의 기후(氣候)가 더욱 강녕(康寧)하므로, 나 소자의 한번 기뻐하고 한번 두려워하는 마음이 날로 더욱 갑절이나 되었다. 다행히 장차 명년이 됨을 당하였으니, 진실로 이는 하늘의 뜻이 우연한 것이 아니다. 의리를 일으키는 예(禮)를 이에 생각하여 잔치를 베푸는 소원을 이루게 되었으니, 강릉(岡陵) 같은 자궁의 장수(長壽)를 축원하며 애일(愛日)하는 데 작은 정성을 부치는 일을 어찌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 있어 그만둘 수 있는 것이겠는가? 다만 자심(慈心)이 매번 겸양함에 있어서 감히 일을 장대(張大)하게 할 수 없으나, 명년 정월 22일에 자궁께 진찬(進饌)하고 궐내에서 표리를 바치는 예(禮)를 겸하여 행할 것이니, 의절(儀節)을 마련해 들이도록 하라. 진찬은 선조(先朝) 때 연희궁(延禧宮)에 진찬했던 예사(例事)를 한결같이 준행할 것이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자세히 알도록 하라. 옛날의 지극한 효도를 우러러 생각하여 자궁을 섬기는데, 이 일이 어찌 옛날의 효성에 만분의 일이나마 미칠 수 있겠으며, 자궁의 한없이 넓고 크신 은혜를 갚을 수 있겠는가? 단지 소자가 여러 해 동안 가슴속에 맺힌 듯했던 정을 드러내는 것일 따름이다."
하였다.
12월 2일 계사
소대하였다.
12월 5일 병신
소대하였다.
12월 6일 정유
소대하였다. 《시전(詩傳)》 낭발장(狼跋章)을 강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주공(周公)은 대성인(大聖人)으로서 마땅히 관숙(管叔)·채숙(蔡叔)의 화(禍)를 초래하지 않았어야 했는데, 끝내 감화(感化)시키지 못하였다. 주공은 애초에 관숙·채숙이 이와 같음을 알지 못하고 그들로 하여금 은(殷)나라를 감독하게 하였는가?"
하니, 검토관 홍면섭(洪冕燮)이 말하기를,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주공의 허물은 또한 마땅한 것이 아니었겠는가?’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성인은 형제간의 우애에 독실하여 단지 형제 사이에서는 반드시 이와 같을 리가 없을 것이라고 믿고 그들을 부린 것이니, 관숙·채숙에게 재능이 있는지의 여부는 논할 수 없는 것이다. 주공의 처지가 아니고서 주공의 일을 행할 경우에는 도리어 은정(恩情)을 손상시키는 데로 돌아갈 것이니, 만약 은정을 손상시킨 것으로 혐의를 삼는다면 나라를 위한 도리가 아닌 것이다. 성왕(成王)이 처음에는 주공을 의심하였으나 마침내 뉘우쳐 고친 것은 어려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창업(創業)은 어렵고 수성(守成)은 쉽다.’고 하였는데, 성왕은 40여 년 동안 형조 불용(刑措不用)138) 의 치화(治化)를 이루었으니, 성왕의 치적은 또한 문왕(文王)·무왕(武王)에 밑돌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혜경궁(惠慶宮)의 진찬(進饌)을 내년 3월 초10일로 늦추도록 명하였다.
12월 7일 무술
소대하였다.
12월 8일 기해
소대하였다.
12월 9일 경자
소대하였다.
12월 10일 신축
차대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민생(民生)의 질고(疾苦)는 몰라서는 안되는 것이다. 옛날 영묘조(英廟朝) 때에는 제도(諸道)의 수령들에게 특별히 명하여 더러 시를 지어 백성들의 농사에 대한 상황과 곤췌(困瘁)한 형편을 갖추어 진술하게 하였고, 선대왕께서도 또한 음관(蔭官)으로 하여금 책자(冊子)를 만들어 바쳐서 여러 폐단을 진계하게 하였었다. 지금 양조(兩朝)의 고사(故事)를 본받아 열읍(列邑)의 수령들로 하여금 시문(詩文)을 지어 바치게 함으로써 성람(省覽)하는 바탕을 삼고자 하는데, 어떻게 하면 명을 받드는 자로 하여금 대양(對揚)하는 실효(實效)가 있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좌의정 김재찬(金載瓚)이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이에 이르니, 이것은 실로 백성들의 복입니다. 3백 명의 수령들로 하여금 일일이 시문을 짓게 할 필요는 없고, 그 가운데 마음속에 품은 것이 있는 자들로 진소(陳疏)하게 하여, 해당 도신으로 하여금 모아서 주문(奏聞)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은 대양(對揚)하는 것을 아름답게 여기는 뜻인데, 만약 문구(文具)로 여긴다면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하니, 김재찬이 말하기를,
"오늘날을 돌아보건대, 백성들이 모두 살 수가 없어서 장차 거꾸로 매달린 듯한 위급한 형편에 놓이게 되었는데, 수령이 된 자 가운데 어찌 진실된 마음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자가 일찍이 있었습니까? 만약 백성을 구휼(救恤)하는 도리를 말한다면, 비록 되풀이하여 늘어놓는 진부(陳腐)한 말에 가깝겠으나 수령을 가려야 한다는 데 지나지 않을 따름입니다. 수령을 가린 후에야 백성이 살고, 백성이 산 후에야 예악(禮樂)을 일으킬 수 있고 형정(刑政)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옛날 우리 성묘조(成廟朝) 때에는 문에 나아가 전좌(殿座)하고 죄가 있는 수령을 인견하니, 대부분 두려워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견하기에 이르러서는 죄를 주되, 죄가 큰 자는 꾸짖고 작은 자는 타일러 보내니, 그후 그 사람들이 은혜에 감격하여 모두 어진 관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진실로 본받을 만한 것입니다."
하였다.
해서(海西)의 장산(長山) 이북 11고을은 훈국(訓局)에 바치는 보미(保米)를 돈으로 대신 바치도록 허락하라고 명하였는데, 응교 여동식(呂東植)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박윤수(朴崙壽)를 이조 참판으로, 이호민(李好敏)을 참의로, 이문회(李文會)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12월 11일 임인
춘당대에 나아가 감제(柑製)를 행하고 수위를 차지한 윤상규(尹庠圭)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호군 신대현(申大顯)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산천의 험조(險阻)함이 천하에 으뜸이어서 산을 의지하여 성을 쌓는다면 영구히 성을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남쪽으로 죽령(竹嶺) 및 추풍령(秋風嶺)·팔량치(八良峙) 등지, 서쪽으로 좌현(左峴)·대관(大關)·완항(緩項)·구계(九溪)·차령(車嶺)·우현(牛峴)·적유(狄踰) 등지, 북쪽으로 철령(鐵嶺) 등지는 산에 의지하여 겹겹이 암석이 쌓여 있으므로, 단지 타첩(垜堞)만 설치해도 되고, 그 나머지 전부 쌓을 곳도 심히 넓고 먼 곳이 없으니, 무릇 경비에 있어서 들인 힘은 적고 성과는 갑절이나 될 것입니다. 여러 도의 환곡(還穀)은 명색(名色)이 각각 다르지만, 아울러 모곡(耗穀)을 회록(會錄)하고 이듬해에 인하여 나누는 곡식이 있으니, 만약 이러한 명색 가운데에서 그 모조(耗條)를 수년 동안 한정해서 그것을 가져다 쓰게 하고, 일을 마치면 전과 같이 조적(糶糴)하게 하는 것은 불가(不可)하지 않을 것입니다. 각도에서 조련(操練)을 대부분 정폐(停廢)하고 있으니, 봄·가을로 전례에 의거하여 조련을 행하게 하는 일 또한 정식(定式)을 삼으소서. 경외(京外)의 백성 가운데 재산을 가진 자가 많으니, 장령(將領)의 부(部)·사(司)의 초(哨)에 분속(分屬)시켜 각종 기계(器械)와 복색(服色)을 수보(修補)하도록 허락하되, 그 인물과 지망(地望)에 따라 그 사공(事功)을 견주고 특별히 칭량(稱量)을 더하여 다른 사람보다 노고[勞勩]가 갑절이나 되어 인기(人器)가 임용하기에 합당한 자는 비록 주목(州牧)과 변어(邊禦)를 맡기기에 이른다 하더라도 또한 불가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각도의 직로(直路) 또한 산이 험준하고 골짜기가 깊은 곳이 많이 있으니, 또한 모두 군사를 배치하여 둔전(屯田)을 베풀게 하되, 해변의 오랫동안 비워 있던 땅과 산골짜기 궁벽하고 황무(荒蕪)한 땅에 조정에서 혹 제언(堤堰)을 쌓거나 혹은 보[洑]를 막아서 새 둔전에 붙이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성을 쌓는 일은 진실로 각 변경을 방어하는 중요한 방책이 되겠지만, 그 경비를 만약 많은 사람들과 자세히 더 의논하지 않는다면, 갑자기 할 수 없을 것이다. 조련에 대한 일은 근래에 군정(軍政)이 진실로 한심해져서 황구 첨정(黃口簽丁)·백골 징포(白骨徵布) 등 한 도(道)도 그렇지 않은 곳이 없다. 기계와 성첩(城堞)에 이르러서는 전혀 신칙하지 않았으므로, 모아 놓고 점열(點閱)할 때를 당하여 적간(摘奸)해서 등문(登聞)하게 하면, 한번 공함 추문(公緘推問)하고는 문득 예사 신칙하는 데로 돌아가니, 먼저 묘당으로 하여금 이러한 뜻으로 각도에 신칙하여 실효(實效)가 있도록 하겠다. 군사를 모집하는 한 조항은 다시 소상하게 작정(酌定)하여 계문(啓聞)하도록 하라. 둔전을 설치하는 일은 만약 경의 말과 같이 시행한다면, 양쪽이 편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니, 또한 묘당으로 하여금 상확(商確)하여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12월 14일 을사
소대하였다.
김명순(金明淳)을 이조 참판으로, 윤노동(尹魯東)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송계간(宋啓榦)·김직순(金直淳)을 사헌부 지평으로 삼았다.
12월 16일 정미
소대하였다.
12월 17일 무신
소대하였다.
경기 암행 어사 홍의영(洪儀泳)이 서계(書啓)하여, 양주 목사(楊州牧使) 송면재(宋冕載), 장단 부사(長湍府使) 유상엽(柳相燁), 인천 부사(仁川府使) 송윤재(宋倫載), 고양 군수(高陽郡守) 서교수(徐敎修), 교하 군수(交河郡守) 이규신(李奎新), 용인 현령(龍仁縣令) 이형수(李馨秀), 통진 부사(通津府使) 성진은(成鎭殷), 파주 목사(坡州牧使) 이인식(李寅植), 풍덕 부사(豊德府使) 장현택(張鉉宅), 광주 판관(廣州判官) 홍대형(洪大衡), 개성 경력(開城經歷) 홍병신(洪秉臣), 양천 현령(陽川縣令) 이공무(李功懋), 진위 현령(振威縣令) 박영수(朴榮壽), 양성 현감(陽城縣監) 정재중(鄭在中), 포천 현감(抱川縣監) 허임(許)이 잘 다스리지 못한 실상을 논하니, 경중(輕重)에 따라 감죄(勘罪)하게 하였다. 또 마전 군수(麻田郡守) 이백(李)의 치적을 말하니 승서(陞敍)의 은전(恩典)을 베풀게 하였다. 또 전 개성 유수(開城留守) 유한모(兪漢謨)에 대해 논하기를,
"본도(本都)의 유안(儒案)은 예로부터 이두(利竇)139) 로 일컬어져 왔으므로, 스스로 몸을 깨끗이 하는 자들은 범수(犯手)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른바 유안궤(儒案櫃)를 항상 머리맡에 두고서 고을 안의 간사한 장교·교활한 아전과 부내(府內)의 거간꾼[駔僧]·모리배(謀利輩)들을 빠짐없이 끌어들이어 무수하게 첨입(添入)하여 은밀한 길을 통해 청촉(請囑)을 꾀하였고 암지(暗地)에서 뇌물을 요구하였으니, 일신의 뇌물을 탐내는 것은 버려두고 논하지 않더라도 조정에 오욕(汚辱)을 끼치는 것이 마땅히 다시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또 수원 유수(水原留守) 이집두(李集斗)에 대해 논하기를,
"《서경(書敬)》 이훈(伊訓)의 상품 십건(三風十愆)140) 을 대체로 범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기악(妓樂)은 더러 폐지하는 때가 없이 행궁(行宮)의 엄숙하고 깨끗한 곳에서 시끄럽게 하고, 사후(射帿)는 어디나 불가(不可)한데도 선조(先朝) 때 봉식(封植)한 나무를 베어냈으며, 별효청(別驍廳)을 폐하여 교방(敎坊)을 만들자 거듭 살아 남는 구신(舊臣)들이 한탄하며 상심(傷心)함이 되었고, 도회시(都會試)에서 외람되게 상민(常民)과 천민(賤民)들을 선발하여 사림(士林)의 추담(醜談)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총애하는 기생이 정사(政事)에 간여하여 아문(牙門)의 기율(紀律)이 전도되었고 간사한 비장(裨將)이 재산과 뇌물을 제멋대로 농간을 부려 영고(營庫)의 저축이 판탕(板蕩)되었으며, 성안에 신사(神祠)를 관명(官名)으로 창설함은 이미 저절로 의리가 없는데도 전패(殿牌) 앞에서 사은(謝恩)하였으니, 대저 무슨 거조가 이렇게 경솔하고 외람되기만 합니까? 경내의 백성들이 우박으로 인한 재해를 호소함이 어찌 마음 아프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장두(狀頭)인 백성에게 결곤(決棍)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근심을 나누는 체면이겠습니까?"
하였는데,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유한모는 어사의 서계에서 이와 같이 논열하였으니, 일이 속한 해가 오래 되었다 하여 버려 두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다 감단하게 하소서. 이집두는 연좌된 바가 백성을 가혹하게 다스린 것이 아니고 논한 바가 핵실(核實)이 부족하지만, 그 처지에서 이런 제목(題目)을 얻은 것 또한 이미 죄가 되니, 파직(罷職)의 전형을 시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별단(別單)을 올려 전정(田政)이 잘못되어 재실(災實)·양호(養戶)·방결(防結)·조적(糶糴)을 범하는 여러 폐단과, 저치미(儲置米)를 남하(濫下)하여 군정(軍政)이 사고를 범한다는 일을 말하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좋은 데 따라 채택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12월 19일 경술
원재명(元在明)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전 경상 감사 윤광안(尹光顔)은, 어사가 서계한 여러 조목을 도에서 조사하는 일에 대해 판부(判付)한 것에 의거하여 대신들에게 문의(問議)하였더니, 모곡(耗穀)을 가분(加分)하여 쓴 것과 속전(贖錢)이 외람되게 많은 일을 가지고 본율(本律)에 비추어 엄중히 감단(勘斷)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율을 의논하기에 미쳐 배소(配所)에 돌려보냈다. 또 아뢰기를,
"전 평안 감사 조득영(趙得永)의 일은 안핵사가 조사하여 아뢰기를, ‘어사가 서계하여 조목조목 열거한 것이 비록 모두 묘맥(苗脈)이 있으나, 정실(情實)을 참고해 보건대, 혹 타당하지 못한 점이 없지 않습니다.’ 하였습니다."
하고, 인하여 유(流) 3천 리의 율(律)을 의언(擬讞)하였는데, 하교하기를,
"어사의 서계 가운데 아래 조항의 배척하여 언급한 지목은 지난번 연석(筵席)에서 이미 상하가 수작(酬酢)한 적이 있었는데, 어사도 또한 이미 처분한 후에 스스로 탈공(脫空)하는 데로 돌아갔고 의관인(衣冠人)들은 조사를 행한 후에 또 모두 낙공(落空)141) 하였으니, 더욱 의심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런데 이 세 조목 가운데 위의 두 조목은 잘못을 답습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애초에 입기(入己)하지 않은 일은 또한 감림 자도(監臨自盜)와는 다름이 있으니, 의율(擬律)한 것이 타당하지 못한 듯하다.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처분하도록 하라."
하자, 대신이 말하기를,
"칙전(勅錢)·사대(私貸) 및 남속(濫贖)·남형(濫刑)은 본율로 감단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윤허하고 서흥부(瑞興府)에 정배하였다.
12월 21일 임자
강계 부사(江界府使) 김희(金爔)를 소견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강계는 본래 관방(關防)의 중지(重地)인데, 근래에 민생(民生)이 골수에 사무친 폐단이 있으므로, 이번에 묘당에서 가려서 차임(差任)하여 보내니, 내려간 후에 잘 교혁(矯革)하고 마음을 다해 대양(對揚)함이 옳다. 전에 정주(定州)에 재임하였을 때 반드시 강계의 폐단을 자세히 들었을 것인데, 무슨 폐단이 심한가?"
하였는데, 김희가 말하기를,
"인삼의 폐단, 환곡의 폐단, 방수(防守)의 폐단 등 세 가지가 가장 심하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려가거든 더욱 교혁하는 도리에 유념함이 옳다."
하였다.
12월 22일 계축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도정(都政)을 행하였다. 【이조 판서 남공철(南公轍)·참의 이호민(李好敏), 병조 판서 김이익(金履翼)이다.】
【태백산사고본】 11책 11권 41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617면
【분류】왕실(王室) / 인사(人事)
12월 25일 병진
차대하였다. 송계간(宋啓榦)·김직순(金直淳)에게 경연관을 임명하도록 명하였는데, 좌의정 김재찬(金載瓚)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김재찬이 또 아뢰기를,
"판돈녕 이언식(李彦植)은 지위가 종친(宗親)이고 자급이 또 1품이니, 청컨대 종묘 향관(宗廟享官)에 융통성 있게 차의(差擬)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효자·열녀에 대해 상언(上言)한 것을 본도에 돌려 보내어 식년(式年)을 기다렸다가 초계(抄啓)할 것을 드러나게 정식(定式)을 삼도록 명하였는데, 예조 판서 이면긍(李勉兢)이 임금이 거둥하는 길에서 은혜를 간구하는 것은 매우 외람된 데 관계된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양사(兩司) 【대사간 윤노동(尹魯東), 집의 김희화(金熙華)이다.】 에서 윤치행(尹致行)의 일에 대해 합계(合啓)하였다. 그리고 사헌부에서 아뢰었던 조진정(趙鎭井)의 일은 물고(物故)되었다 하여 정계(停啓)하였다.
12월 26일 정사
김이익(金履翼)을 수원부 유수로, 이시원(李始源)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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