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일 임진
문형(文衡)의 회권(會圈)을 행하였는데, 【우의정 김사목(金思穆), 예조 판서 한만유(韓晩裕), 호조 판서 전 대제학 이만수(李晩秀), 좌참찬 김문순(金文淳), 한성 판윤 한용택(翰用鐸)이다.】 5점(點)을 받은 사람은 서영보(徐榮輔)·남공철(南公轍)·심상규(沈象奎)이고, 4점(點)을 받은 사람은 김조순(金祖淳)·이만수(李晩秀)이다.
2월 2일 임진
서영보(徐榮輔)를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으로, 이경운(李庚運)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2월 3일 계사
좌의정 김재찬(金載瓚)이 차자(箚子)를 올려 관서(關西)의 민사(民事)가 걱정스럽고 안타까운 정상에 대해 진달하고 나서 전 감사 서영보(徐榮輔)를 유임시킬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이제 경이 진달한 내용이 바로 나의 뜻과 합치된다. 문형(文衡)이 중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민사(民事)는 더욱 긴급한 것이다. 어제 기백(箕伯)에게 점하(點下)한 것은 바로 회권(會圈)을 중히 여기는 뜻에서였다. 전 평안 감사 서영보는 본직(本職)에 유임시키고 문형의 대임(代任)은 전망(前望)을 들여오라."
하였는데, 남공철(南公轍)을 점하(點下)하였다.
한용택(韓用鐸)을 광주부 유수로 삼았다.
2월 4일 갑오
박종래(朴宗來)를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2월 5일 을미
승지를 보내어 충헌공(忠獻公) 박준원(朴準源)에게 치제(致祭)하게 하였는데, 상일(祥日)이 임박했기 때문이었다.
2월 6일 병신
전라 감사 이면응(李冕膺)이 보성군(寶城郡) 읍창(邑倉)이 실화(失火)하여 곡식 2천 9백 14석(石)을 소실(燒失)하였으므로 법에 의거 나누어 징수하게 할 것을 아뢰니 특별히 탕감(蕩減)시키라고 명하였다.
2월 8일 무술
주강(晝講)하였다.
대제학 남공철(南公轍)이 상소하여 사직(辭職)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문망(文望)으로 무슨 불가할 것이 있겠는가? 당록(堂錄)은 일이 중한 것이니, 즉시 들어와서 거행토록 하라."
하였다.
2월 9일 기해
주강(晝講)하였다.
2월 10일 경자
주강하였다.
2월 11일 신축
주강하였다.
오정원(吳鼎源)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심상규(沈象奎)를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우의정 김사목(金思穆), 선공감 제조 이만수(李晩秀), 예조 판서 한만유(韓晩裕), 관상감 제조 김희순(金羲淳)을 소견하였는데, 원릉(元陵)의 국내(局內)에 불이 난 곳을 봉심(奉審)한 뒤 복명(復命)하였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국내에 불이 났으니 너무도 놀라운 일이다. 연소(延燒)된 곳이 대단(大段)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는가?"
하니, 김사목이 말하기를,
"연소된 척수(尺數)를 아울러 서계(書啓)에 기재하였습니다. 왕후(王后)의 능상(陵上)에 있는 곡장(曲墻)의 뒷면에서 대왕(大王)의 능상에 있는 곡장 서쪽편까지의 사초(莎草)가 불에 탔는데, 뒷면의 남북이 1백 6척(尺)이고 동서가 1백 76척이고 서쪽편의 남북이 1백 46척이고 동서가 66척이고 남쪽으로 정자각(丁字閣)까지가 98척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초를 만일 수개(修改)하지 않을 경우 지금 보기에 어떠할 것 같던가? 오래되면 저절로 무성하여질 것이다."
하니, 김사목이 말하기를,
"조금 기다리면 봄에 사초가 저절로 무성해질 것이라는 하교가 지당하십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호판의 소견은 어떠한가?"
하니, 한만수가 말하기를,
"사체(事體)로 말한다면 수개할 것을 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능상(陵上)의 지척인 땅을 손을 움직여 개수한다는 것은 도리어 황송스런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불에 탄 다음의 봄에는 사초가 더욱 쉽게 무성하여 집니다."
하였다. 이어 수복(守僕)과 산직(山直)을 엄히 조사하여 유배(流配)시키라고 명하였다.
2월 13일 계묘
의릉(懿陵)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친제(親祭)하였다.
2월 14일 갑진
형조 판서 김이도(金履度)가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어제 격쟁(擊錚)한 사람들 가운데 남원(南原)의 장몽서(張夢瑞)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있었는데 그의 원장(原狀)을 보니 모두가 흉언(凶言)이어서 놀랍고 통분스런 마음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밤이 깊어서 이제야 비로소 와서 아룁니다."
하니, 임금이 원장을 들여오라고 명하였다. 전편(全篇)이 지의(旨意)가 너무도 흉패스러웠는데, 그 내용에 이르기를,
"선왕(先王)이 미처 하지 못한 뜻을 계승하고 선왕이 이루지 못한 일을 계술하여 경모궁(景慕宮)의 존호(尊號)를 올려 태묘(太廟)에 부묘(袝廟)하소서."
하였고, 또 ‘날마다 궁묘(宮廟)를 바라보니 사정(私情)이 응어리져 있고 좌우를 돌아보며 정력(精力)을 헛되이 수고롭게 한다.’는 등등의 말이 있었다. 임금이 다 열람하고 나서 하교하기를,
"더없이 놀라운 일이다. 그 언사(言辭)가 매우 흉힐(凶黠)한 것은 물론, 선조(先祖)를 무핍(誣逼)하였으니, 당연히 임문(臨門)하는 거조가 있어야 한다."
하고, 이어 판의금을 체직시키고 이집두(李集斗)로 대신시키라고 명하였다. 북영(北營)에 나아가 그의 더없이 흉측한 정절(情節)을 친국(親鞫)하였는데, 지휘하고 사주한 자를 직초(直招)하지 않으므로 왕부(王府)로 옮겨 국문하라고 명하였다.
동지 정사(冬至正使) 심능건(沈能建) 등이 사칙(赦勅)을 순부(順付)했다는 것으로써 치계(馳啓)하였다.
만수 은조(萬壽恩詔)가 내렸는데, 그 내용에 이르기를,
"봉천 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는 조서(詔書)를 내린다. 짐(朕)이 큰 서업(緖業)을 이어받아 환구(寰區)에 임어하였는데 이렇게 변변찮은 몸으로 억조 창생의 위에 군림할 부탁을 받고나서는 원하는 것이라고는 만방(萬方)의 신서(臣庶)들이 다같이 평안하고 즐겁고 화친(和親)하게 되는 것뿐이다. 이런 때문에 주야로 조심하고 두려워하면서 감히 편안할 겨를이 없이 부지런히 지치(至治)를 추구하였다. 이제 춘추(春秋)가 바야흐로 50에 이르렀지만 정성스런 마음으로 힘써 행하는 것을 날마다 부지런히 하여왔다. 그러나 어떻게 감히 조금이나마 자만하는 마음을 지니고 큰 아름다움을 겉치레로 가식(假飾)할 수 있겠는가? 생각건대, 짐이 도록(圖籙)을 받아 통서(統緖)를 이은 뒤 우러러 상천(上天)이 돌보아 명하고 열성(列聖)이 은혜를 전하여 주어 경건하고도 공고한 큰 복을 받은 것이 실로 통상적인 것에서 월등히 뛰어난 점이 있다. 회고하건대, 건륭(乾隆)061) 38년062) 황고(皇考) 고종 순황제(高宗純皇帝)께서 정일(精一)의 심법(心法)을 부탁하기 위해 곧 짐의 이름을 묵묵한 가운데 호천(昊天)에 고한 다음 이어 성경(盛京)으로 나아가 삼가 세 능(陵)에 전알(展謁)하였으며, 다시 직접 짐을 데리고 열조(列祖)의 신위(神位) 앞에 머리 조아려 절하였었다. 그때는 저사(儲嗣)로 세우겠다는 뜻을 분명히 보이지 않았었지만 대통(大統)의 귀속(歸屬)에 대해서는 충막(沖漠)하여 아무런 조짐이 없는 가운데 도탑게 도와주심을 받든 지 이미 20여 년이 되고 나서 병진년063) 에 이르러 대정(大廷)에서 전수해 주는 옥새(玉璽)를 경건히 받들었는데, 훈정(訓政)064) 3년간은 더욱 천고(千古)에 없었던 융숭한 은우(恩憂)였다. 때마침 승평(承平)한 지 오래인데 낭유(稂莠)065) 가 싹이 트는 시기를 만나 삼성(三省)에 백련교(白蓮敎)066) 의 비도(匪徒)들에 의한 부정(不靖)한 일이 발생하였으므로 짐이 날마다 예모(睿謨)를 품정(稟定)하고 주필역(籌筆驛)에 군대를 보내니 모두 본받아 따를 바를 알게 되었다. 친정(親政)한 이후의 법대로 시행하고 상도(常道)를 밝혀 왔으므로 드디어 이들을 무찔러 거괴(渠魁)를 잡고 군추(群醜)들을 소탕하게 되었다. 이제는 억조 창생이 생업(生業)을 즐기고 있고 모든 일이 다 제대로 잘 되어가고 있는데, 다시 다행스러운 것은 네 계절의 기후가 조화로워 우양(雨暘)이 순조롭고 삼령(三靈)067) 이 상서로워 수토(水土)가 잘 다스려져 풍성함을 누리고 있다는 그것이다. 짐이 삼가 큰 복을 받았으나 가득 차면 두려움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근래 내외(內外)의 신공(臣工)들이 축하를 올리면서 정성을 바쳐 왔으나, 일체 번거로운 예문(禮文)과 화려한 의절(儀節)을 일률적으로 물리치는 쪽으로 따랐다. 그런데 고훈(古訓)을 생각하니 천자(天子)는 하늘을 대신하여 만민(萬民)을 무양(撫養)할 책임이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나 한 사람이 굳게 겸손을 고집하여 은덕(恩德)이 아래로 내려가 닿지 못하게 한다면 해내(海內)에서 은택(恩澤)을 바라는 뜻이 모두 응결되어 펴지지 않을 것이니, 짐은 이 점을 마음속으로 흡족하게 여기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삼가 무전(茂典)에 의거하여 여정(輿情)을 굽어 따라서 신민(臣民)들을 가혜(嘉惠)롭게 할 수 있는 일을 거행하도록 영(令)을 반포하게 하고 이에 따른 추은(推恩)에는 아끼는 것이 있지 않겠다는 것으로 전에 이미 유지(有旨)를 내렸다. 그리고 특별히 은방(恩榜)을 열어서 나의 많은 뛰어난 선비들이 응시하게 하라. 이에 경사로운 정월에 윤음(綸音)를 반하하여 중외(中外)와 원근(遠近)으로 하여금 모두 은택에 젖어 기쁨을 누리고 널리 상서로운 화기(和氣)를 맞이하게 하였는데, 짐은 이것으로 천은(天恩)에 앙답(仰答)하는 바이다. 그리고 널리 은택을 조사하여 이 백성들을 인수(仁壽)의 지경으로 끌어올리게 한다는 뜻에 부합시키기 위해 응당 행해야 하는 사의(事宜)를 뒤에다 열거하여 개록(開錄)한다. 아! 나 한 사람이 많은 복을 받았으니 이를 만백성들에게 널리 내려서 억조 창생으로 하여금 인덕(仁德)을 생각하게 함으로써 나의 광명(光命)을 대양(對揚)하게 하기 위해서 천하에 포고(布告)하여 모두 들어서 알게 하노라."
하였다.
2월 15일 을사
추국(推鞫)하였다. 【위관(委官)은 영부사 이시수(李時秀), 우의정 김사목(金思穆), 판의금 이집두(李集斗), 지의금 김희순(金羲淳), 동의금 임희존(任希存)·임한호(林漢浩)이다.】 대역 부도(大逆不道) 죄인 장몽서(張夢瑞)를 정형(正刑)에 처하였다. 결안(結案)하기를,
"그는 흉패스럽고 간사스러운 성품으로 원망하면서 엿보려는 마음을 지니고 흉모(凶謀)를 경영(經營)하여 흉서(凶書)를 지어놓고서 기회를 이용하고 때를 노려 온 지 오래였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이번 행행(幸行)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몰래 숨어서 올라와서 위외(衛外)에서 격쟁(擊錚)하여 기필코 그 흉서를 노정(露呈)하고 그 흉모를 부리려 하였습니다. 우리 선조(先朝)께서는 영묘(英廟)의 유훈(遺訓)을 받들었으므로 처음 등극하였을 적의 윤음(綸音)이 일성(日星)처럼 환히 빛났습니다. 그러므로 이덕사(李德師)·조재한(趙載翰)의 흉소가 한 번 올라오자마자 당일로 양암(諒闇)068) 중임에도 불구하고 국청(鞫廳)을 설치하였으니, 이는 우리 선조(先朝)의 탁월하신 덕이요 간절하신 효성인 것입니다. 대저 동토(東土)에서 국가를 북면(北面)하여 섬기는 사람은 만에 하나 이 의리를 위배한다면 이는 극악한 역적이 되는 것인데, 이러한 사리(事理)는 비록 먼 시골 외진 곳의 지극히 어리석고 지극히 미열한 부류들이라 할지라도 환히 알고 있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효경(梟獍) 같은 심장을 지니고서 흉패(凶悖)스러움이 지나쳐 원망하기에 이르렀고 원망이 지나쳐 무핍(誣逼)하기에 이르렀으며, 이에 감히 이를 글로 쓸 마음을 먹게 되었고 방자하게 임금의 지척(咫尺)인 연로(輦路)에서 봉정(奉呈)하였는데, 종이에 가득한 사의(辭意)가 흉패스럽지 않은 것이 없어서 차마 들을 수 없고 감히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년(某年)에 삼자(三字)를 내렸다느니 울결(鬱結)이라느니 안정(安靜)이라느니 하는 등등의 구어(句語)는 더욱 망측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으며, ‘좌우를 돌아보며 정력을 헛되이 수고롭게 한다.[顧望左右虛勞精力]’는 여덟 글자에 이르러서는 더할 수 없이 흉패스러운 것이어서 무핍한 속마음이 환히 드러나서 숨길 수가 없습니다. 이런 흉언(凶言)을 그가 손수 써서 바쳤으니, 흉악스럽기 그지없어 만번 죽이는 것도 오히려 가벼운 것이 됩니다. 이렇게 대역 부도(大逆不道)가 분명하다고 지만(遲晩)하였습니다."
하였다.
양사에서 연차(聯箚)를 올려 장몽서(張夢瑞)를 이괄(李适)·신치운(申致雲)의 예(例)에 의거 시행하고 이어 그 지속(支屬)들을 조사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19일 기유
한림(翰林)의 도당 회권(都堂會圈)을 행하였는데, 【감춘추(監春秋) 김사목(金思穆), 대제학(大提學) 남공철(南公轍), 예문 제학(藝文提學) 심상규(沈象奎), 동춘추(同春秋) 홍석주(洪奭周)이다.】 4점(點)을 얻은 사람은 이엽(李墷)·이영곤(李永昆)·이희준(李羲準)·박기수(朴綺壽)·이광문(李光文)이다.
2월 21일 신해
하교하기를,
"원릉(元陵)의 사초(莎草)에 탈이 난 곳은 의당 역사(役事)를 시작해야 하지만 막중한 지척(咫尺)의 땅에서 일시에 역사를 하는 것은 도리어 송구스러운 일이 된다. 그리고 선조(先朝) 때 능관(陵官)으로 하여금 편의에 따라 파식(播植)하게 한 전례가 있으니, 이번에도 삼가 따르는 것이 좋겠다. 예판(禮判)을 제관(祭官)으로 내보내어 봉심(奉審)한 뒤 곡장(曲墻)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다 간간이 파식하게 한 뒤에 복명(復命)하게 하라. 그 나머지는 본릉(本陵)의 능관으로 하여금 구례(舊例)에 의거하여 편의한 대로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2월 24일 갑인
진찬(進饌)을 27일로 앞당겨 정하라고 명하고 나서 동돈녕(同敦寧) 홍낙윤(洪樂倫), 사옹 주부(司饔主簿) 홍세주(洪世周)에게 엄히 신칙하여 올라오게 하였다.
2월 27일 정사
경춘전(景春殿)에 나아가 혜경궁(惠慶宮)에 진찬(進饌)하였다.【왕대비전(王大妃殿)이 적의(翟衣)를 갖추고 수식(首飾)을 더하면 상궁(尙宮)이 전도(前導)하여 나와서 소차(小次)로 들어간다. 여집사(女執事)가 의빈(儀賓)과 척신(戚臣)을 나누어 인도하고 들어와서 배위(拜位)로 나아가고, 전빈(典賓)이 좌우 명부(左右命婦)를 나누어 인도하여 들어와서 배위로 나아간다. 상의(尙儀)가 위차로 나아갈 것을 계청(啓請)하면 상궁이 인도하여 배위로 나아가 북쪽을 향하여 선다. 여집사가 위차로 나아갈 것을 계청하면 임금이 소차에서 나오는데 여집사가 인도하여 배위로 나아가 북쪽을 향하여 서고, 상궁이 받들어 인도한다. 상의가 위차로 나아갈 것을 계청하면 왕대비전이 위차로 나아가는데 상궁이 인도하여 배위로 나아가 북쪽을 향하여 선다. 상의가 내엄(內嚴)을 찬청(贊請)하고 나서 조금 있다가 또 외비(外備)되었음을 아뢰면 혜경궁(惠慶宮)이 적의(翟衣)를 갖추고 수식(首飾)을 더하고 나서 상궁이 전도(前導)하여 나온다. 여집사가 꿇어앉아 부복(俯伏)하고 휘(麾)를 든 다음 일어나면 헌가(軒架)가 여민령(與民令)의 음악을 연주하고 등가(登歌)가 여민령(與民令)의 음악을 연주한다. 전좌(殿座)로 오르면 여집사가 휘(麾)를 누이고, 음악이 그친다. 헌가가 여민락(與民樂)을 연주하고 등가가 여민락을 연주하는데, 음악은 사성(四成)069) 이다. 전찬(典贊)이 재배할 것을 외치면 왕대비전이 재배하고 음악이 그친다. 상궁이 왕대비전을 인도하여 염(簾) 안으로 나아가 동쪽을 향한 위차에 앉는다. 헌가가 여민락을 연주하고 등가가 여민락을 연주하면 전찬(典贊)이 재배할 것을 외친다. 그러면 임금과 내전이 재배하고 음악이 그친다. 헌가가 여민락을 연주하고 등가가 여민락을 연주하면 상궁이 임금과 내전(內殿)을 인도하고 왕대비전의 전좌(殿座) 앞을 향하여 사배(四拜)하며 음악이 그친다. 상궁이 임금을 인도하여 염(簾) 안으로 나아가 서쪽을 향한 위차에 앉게 하며, 내전을 인도하여 염(簾) 안으로 들어가 동쪽을 향한 위차에 앉게 한다. 헌가가 낙양춘곡(洛陽春曲)을 연주하면 전찬(典贊)이 재배(再拜)할 것을 외친다. 그러면 좌우 명부·의빈·척신 등이 재배하고 음악이 그친다. 전빈(典賓)이 좌우 명부를 나누어 인도하고 여집사가 의빈·척신을 나누어 인도하여 왕대비전의 전좌(殿座) 앞을 향하게 하고 다음으로 어좌(御座)의 앞을 향하게 하고 다음으로 내전의 전좌를 향하게 하는데 헌가(軒歌)가 낙양춘곡(洛陽春曲)을 연주하면 좌우 명부·의빈·척신이 사배(四拜)하고 음악이 그친다. 상궁이 임금과 내전을 인도하여 도로 배위(拜位)로 나아가고 왕대비전을 인도하여 도로 배위로 나아간다. 왕대비전이 꿇어앉고 임금과 내전이 꿇어앉고 좌우 명부·의빈·척신이 꿇어앉으면 헌가가 여민령(與民令)의 음악을 연주한다. 상식(尙食)이 꽃을 올리면 음악이 그친다. 등가가 여민령의 음악을 연주하면 상식이 휘건(揮巾)을 올리고 음악이 그친다. 헌가가 여민령의 음악을 연주하면 상식이 염수(鹽水)를 올리고 음악이 그친다. 헌가가 화명악(和明樂)을 연주하면 상식이 별행과(別行果)를 올리고 음악이 그친다. 헌가가 옹희악(壅熙樂)을 연주하면 상식이 찬안(饌案)을 올리는데 이것이 끝나면 음악이 그친다. 왕대비전이 부복하고 있다가 일어나 몸을 펴면 임금과 내전도 부복하고 있다가 일어나 몸을 펴며, 좌우 명부·의빈·척신도 부복하고 있다가 일어나 몸을 편다. 왕대비전이 꿇어앉고 임금과 내전이 꿇어앉으면 헌가가 청화악(淸和樂)을 연주하는데 상식(尙食)이 소선(小膳)을 올리면 음악이 그친다. 왕대비전이 부복하고 있다가 일어나 몸을 펴고 임금과 내전이 부복하고 있다가 일어나 몸을 펴면 상궁이 왕대비전을 인도하여 도로 염(簾) 안으로 나아가 동쪽을 향한 위차에 앉게 하고, 임금을 인도하여 서쪽을 향한 위차에 앉게 하고 내전을 인도하여 동쪽을 향한 위차에 앉게 한다. 헌가가 여민락(與民樂)을 연주하면 상식이 꽃을 올리고 음악이 그친다. 헌가가 여민락을 연주하면 휘건(揮巾)을 올리고 음악이 그친다. 헌가가 여민락을 연주하면 찬안(饌案)을 올리는데, 이것이 끝나면 술을 올리고 음악이 그친다. 헌가가 여민락을 연주하면 상복(尙服)·상식(尙飾)이 동서로 나뉘어 각각 좌우 명부에게 꽃을 반하(頒下)하고 상전(尙傳)이 각각 의빈·척신에게 꽃을 반하하고 음악이 그친다. 여집사 2인이 동서로 나뉘어 북쪽을 향하여 서서 악장(樂章)을 외치기를, ‘상서로운 원추리풀 무성하여 환히 빛나는 것 해마다 옥계(玉階) 앞에 하리로다. 기쁨을 연장시키기 위해 구장(舊章)을 거행하니 아름다운 봄 즐거운 연회로세. 육가(六珈)는 백복(百福)의 시작이요 구작(九爵)은 만년(萬年)의 경사로다. 만년의 경사이니 더욱 수를 누리고 평안하리로다. 선녀인 서왕모(西王母)가 와서 술잔을 올리니 요지연(瑤池宴)의 복숭아 안주 알알이 향기가 진동하도다.’ 한다. 검교 직각(檢校直閣) 심상규(沈象奎)가 지었다. 외치는 것을 끝내고 나서 등가가 경운연악(慶雲延樂)을 연주하고, 이 음악이 그치면 헌가가 경운연악을 연주한다. 음악이 그치면 상궁이 임금과 내전을 인도하여 다시 배위(拜位)로 돌아간다. 왕대비전을 인도하여 다시 배위로 돌아와 꿇어앉으면, 임금과 내전도 꿇어앉는다. 헌가가 여민락을 연주하면 상식(尙食)이 만두(饅頭)를 올리고 음악이 그친다. 왕대비전이 부복하였다가 일어나서 몸을 펴면 임금과 내전도 부복하였다가 일어나서 몸을 편다. 등가가 천년 만세곡(千年萬歲曲)을 연주하면 상궁이 왕대비전을 인도하여 서쪽의 수주정(壽洒亭)에서 북쪽을 향하여 선다. 상식이 수주(壽洒)를 따라서 제일작(第一爵)을 꿇어앉아 왕대비전 앞으로 올리면 왕대비전이 잔을 받아서 효강 자희 정선 휘목 혜빈 저하(孝康慈禧貞宣徽穆惠嬪邸下) 좌전(座前)으로 올린다. 임금과 내전은 꿇어앉는다. 왕대비전이 잔을 상식에게 주면 상식이 이를 전봉(傳捧)하여 꿇어앉아 좌전(座前)에 놓는다. 왕대비전이 부복하였다가 일어나서 몸을 펴면, 임금과 내전도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몸을 펴고 음악이 그친다. 상궁이 왕대비전을 인도하여 도로 배위(拜位)로 나아가 꿇어앉으면, 임금과 내전도 꿇어앉는다. 전언(典言)이 좌전으로 나아가 북쪽을 향하여 꿇어앉아 대신 치사(致嗣)하기를 ‘왕대비전 김씨(金氏)는 삼가 가경(嘉慶) 14년 2월 27일 효강 자희 정선 휘목 혜빈 저하의 구경(舊慶)을 새로 기뻐하는 좋은 달 길한 날을 만나서 향기로운 예주(醴洒)를 올리고 함께 송축하면서 노래자(老萊子)의 춤을 올립니다. 보훤(寶萱)에 봄볕이 계속되고 금도(金桃)가 상서로움을 잉태하여 아! 바다 같은 많은 수(壽)를 누리시면, 한(漢)나라 장락궁(長樂宮)에서 만년을 즐겼던 아름다움을 길이 받들어 올리겠습니다. 삼가 천천세(千千歲)의 수(壽)를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한다. 검교 직각(檢校直閣) 심상규(沈象奎)가 지었다. 치사가 끝나고 나면 왕대비전이 부복하였다가 일어나서 몸을 펴고, 임금과 내전도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몸을 편다. 상궁이 왕대비전을 인도하여 혜빈 저하(惠嬪邸下)의 좌전(座前)으로 나아가 꿇어앉으면 임금과 내전도 꿇어앉는다. 상의(尙儀)가 좌전으로 나아가 꿇어앉아 선지(宣旨)할 것을 아뢰고 물러나와 서쪽을 향하여 꿇어앉는다. 선지(宣旨)하기를, ‘잔을 올린 날에 왕대비와 함께함을 기쁘게 여긴다.’ 한다. 헌가(軒架)가 청평악(淸平樂)을 연주하고 등가(登歌)가 청평악을 연주하는데, 잔을 들면 상식(尙食)이 나아와 빈잔을 받아서 주정(洒亭)에 다시 가져다 놓는다. 왕대비전이 부복하고 있다가 일어나서 몸을 펴면 음악이 그친다. 상궁이 왕대비전을 인도하여 도로 염(簾) 안으로 나아가 동쪽을 향한 위차(位次)에 앉는다. 등가가 오운개서조악(五雲開瑞朝樂)을 연주하면 상궁이 임금을 인도하여 전(殿)의 동쪽에 있는 수주정(壽洒亭)으로 나아가 북쪽을 향하여 선다. 상식이 수주를 따라서 제이작(第二爵)을 꿇어앉아 임금에게 올리면, 임금이 잔을 받아 혜빈 저하의 좌전(座前)으로 나아가 꿇어앉는데 내전(內殿)도 꿇어앉는다. 임금이 잔을 상식에게 주면 상식이 이를 전봉(傳捧)하여 꿇어앉아 좌전에 가져다 놓는다. 임금과 내전이 꿇어앉았다가 일어나 몸을 펴면 음악이 그친다. 상궁이 임금을 인도하여 도로 배위로 나아가 꿇어앉고 내전도 꿇어앉는다. 전언(典言)이 좌전(座前)으로 나아가 북쪽을 향하여 꿇어앉아 대신 치사(致詞)하기를, 운운(云云)하는데, 위와 같다. ‘길한 날에 술잔을 들어 구경(舊慶)의 해가 다시 돌아온 것을 송축합니다. 화락함은 주(周)나라의 작례(酌醴)보다 더 무르녹았고 즐거움은 한(漢)나라의 즐거움을 이었습니다. 큰 복을 서왕모(西王母)에게서 받았으니 경사(慶事)가 본지(本支)의 후손들에게 계속될 것을 기다립니다. 삼가 천천세(千千歲)의 수(壽)를 올립니다.’ 한다. 검교 직각 심상규가 지었다. 치사를 끝내고 나서 임금과 내전이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몸을 펴면, 상궁이 임금을 인도하여 혜빈 저하의 좌전(座前)으로 나아가 꿇어앉고 내전도 꿇어앉는다. 상의가 좌전(座前)으로 나아가 꿇어앉아 선지(宣旨)할 것을 아뢰고 물러나 동쪽을 향하여 꿇어앉는다. 선지(宣旨)하기를, ‘잔을 드는 날에 전하와 함께하는 것을 기쁘게 여긴다.’ 한다. 헌가가 환환곡(桓桓曲)을 연주하고 등가가 환환곡을 연주하면, 술잔을 들고 왕대비전이 위차를 떠나 몸을 굽힌다. 올리기를 끝마치고 나서는 다시 위차로 돌아온다. 아래도 이와 같다. 상식이 나아가 빈잔을 받아서 주정(洒亭)에 가져다 놓으면, 임금과 내전이 부복하고 있다가 일어나 몸을 펴고 음악이 그친다. 상궁이 임금을 인도하여 도로 배위로 나아가면 등가가 보허자령(步虛子令)의 음악을 연주한다. 상궁이 내전을 인도하여 전(殿)의 서쪽에 있는 수주정(壽洒亭)으로 나아가 북쪽을 향하여 선다. 상식이 수주(壽洒)를 따라 제삼작(第三爵)을 꿇어앉아 내전에게 올리면, 내전이 잔을 받아 혜빈 저하의 좌전(座前)으로 나아가 꿇어앉는다. 왕대비(王大妃)의 치사의(致詞儀)와 같다. 상의(尙儀)가 좌전(座前)으로 나아가 꿇어앉아 선지(宣旨)할 것을 아뢰고 나서 물러나와 서쪽을 향하여 꿇어앉는다. 선지하기를, ‘잔을 드는 좋은 때를 왕비와 함께하게 되어 기쁘다.’ 하였다. 헌가가 하운봉악(夏雲峯樂)을 연주하고 등가가 하운봉악을 연주하면 상식(尙食)이 빈 잔을 받아서 주정(洒亭)에 가져다 놓는다. 임금과 내전이 부복하고 있다가 일어나서 몸을 펴면 음악이 그치는데 상궁이 내전을 인도하여 도로 배위(拜位)로 나아가며, 등가가 여민락(與民樂)을 연주하면 상궁이 임금을 인도하여 왕대비전이 있는 주정으로 나아가 북쪽을 향하여 선다. 상식이 술을 따라서 꿇어앉아 임금에게 올리면 임금이 잔을 받아 왕대비전의 좌전(座前)으로 나아가 잔을 올리는 것을 위에서의 의식(儀式)과 같게 한다. 그리고 나면 음악이 그친다. 헌가가 여민락(與民樂)을 연주하면 잔을 드는데 상식이 나아가 빈 잔을 받아서 다시 주정(洒亭)에 가져다 놓는다. 임금과 내전이 부복하고 있다가 일어나 몸을 펴면 음악이 그친다. 상궁이 임금을 인도하여 도로 배위로 나아가 꿇어앉고 내전도 꿇어앉는다. 상기(尙記)가 치사함(致詞函)을 받들어 꿇어앉아 왕대비전의 위좌(位佐) 오른쪽에 가져다 놓는다. 치사(致詞)하기를, ‘국왕(國王) 신(臣)은 삼가……만났습니다.’ 운운(云云)하며, ‘왕대비 전하께서는 자효(慈孝)가 지극히 크시어 직접 옥(玉) 술잔을 받들고 태평한 세상 아름다운 기회를 만나 끝없이 높은 수(壽)를 누릴 것을 송축(頌祝)합니다. 칠작(七酌)을 이미 이루었으니 삼현(三絃)도 조화를 이루게 되어, 아름다운 봄볕이 영원히 변치 않고 온갖 상서로움이 다 모여들어 다투어 경하(慶賀)하게 되기 바랍니다. 이는 참으로 우리 동방의 천년에 한번 있는 경사인 것으로 이에 연회를 베푸는 경사로운 날을 당하여 그지없이 기쁜 마음 견딜 수 없습니다. 삼가 천천세(千千歲)의 수(壽)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한다. 임금이 지었다. 임금과 내전이 부복하였다가 몸을 펴면 상궁이 임금을 인도하여 도로 염(簾) 안으로 나아가 서쪽을 향한 위차(位次)에 앉는다. 등가가 연민락을 연주하면 상궁이 내전을 인도하여 왕대비전의 주정(洒亭)으로 나아가 북쪽을 향하여 서면 상식(尙食)이 술을 따라 꿇어앉아 내전에게 올린다. 내전이 잔을 받아 왕대비전의 좌전(座前)으로 나아가 잔을 올리는 것을 위에서의 의식과 같게 한다. 음악이 그친다. 등가가 여민락(與民樂)을 연주하면 잔을 들고 임금이 위차를 떠나 몸을 굽히고 있다가 올리기를 끝마치면 위차로 돌아간다. 아래도 이와 같다. 상식(尙食)이 나아가서 빈 술잔을 받아 다시 주정(洒亭)에 가져다 놓으면 내전이 부복하고 있다가 일어나 몸을 펴고 음악이 그친다. 상궁이 내전을 인도하여 다시 배위로 나아가 꿇어앉으면 상기(尙記)가 치사함(致詞函)을 받들어 왕대비전 위좌(位座)의 오른쪽에 가져다 놓는다. 임금이 지었다. 치사(致詞)의 내용은 위와 같다. 내전이 부복하고 있다가 일어나 몸을 펴면 상궁이 인도하여 도로 염(簾) 안으로 들어가 동쪽을 향한 위차에 앉는다. 상궁이 임금과 내전을 인도하고 배위(拜位)로 나아가 왕대비전의 좌전(座前)을 향한다. 전빈(典賓)이 좌우 명부를 나누어 인도하고 여집사(女執事)가 의빈(儀賓)·척신(戚臣)을 나누어 인도하여 왕대비전의 좌전(座前)을 향하게 한다. 헌가가 여민락을 연주하면 임금과 내전(內殿)이 사배(四拜)하고 좌우 명부·의빈·척신이 사배(四拜)하면 음악이 그친다. 상궁이 임금과 내전을 인도하여 도로 염(簾) 안으로 들어가 위차에 앉는다. 제사작(第四爵)에서 제칠작(第七爵)에 이르기까지 좌우 명부와 의빈·척신의 반수(班首)가 차례로 꿇어앉아 치사(致詞)를 올리고나면 선지(宣旨)는 의식대로 거행한다. 전빈(典賓)이 좌우 명부를 나누어 인도하고 도로 배위(拜位)로 나아가고 상궁이 왕대비전을 인도하여 도로 배위로 나아가 꿇어앉는다. 임금과 내전이 도로 배위로 나아가 꿇어앉자 세 번 머리 조아리고 손을 맞잡아 이마에 대고 외치기를, ‘천세(千歲)! 천세(千歲)! 천천세(千千歲)!’ 한다. 좌우 명부·의빈·척신과 전정(殿庭)에 있는 사람들도 일제히 소리를 함께 하여 외친다. 헌가가 여민락을 연주하고 등가가 여민락을 연주하면, 왕대비전이 재배(再拜)하고 임금과 내전도 재배하고 음악이 그친다. 상궁이 왕대비전을 인도하여 위좌(位坐)로 나아가고 전빈이 좌우 명부를 나누어 인도하고 여관이 인의와 척신을 나누어 인도하여 위좌로 나아간다. 헌가가 낙양춘곡(洛陽春曲)을 연주하면 상식이 탕(湯)을 올린다. 음악이 그친다. 헌가가 낙양춘곡을 연주하면 상식이 왕대비전에 별행과(別行果)를 올리고 임금과 내전에게 별행과를 올린다. 음악이 그친다. 헌가가 낙양춘곡을 연주하면 상식이 왕대비전에 탕을 올리고 임금과 내전에게 탕을 올린다. 음악이 그친다. 등가가 순안악(順安樂)을 연주하면 상궁이 왕대비전을 주정(洒亭)으로 인도하여 잔에 술을 따라 꿇어앉아 헤빈 저하(惠嬪邸下)의 좌전(座前)으로 올리면 혜빈 저하가 잔을 받아 상식에게 준다. 상식이 꿇어앉아 잔을 받아서 다시 꿇어앉아 왕대비전에 올리면 왕대비전이 잔을 받아들어서 마신다. 잔을 다 마신 뒤에는 부복하고 있다가 일어나 몸을 펴고 주정(洒亭)으로 간다. 임금과 내전이 부복하고 있다가 일어나 몸을 펴고 주정(洒亭)으로 간다. 임금과 내전이 부복하고 있다가 일어나 몸을 굽히고 있으면 상식이 꿇어앉아서 빈 잔을 받아서 주정에 다시 가져다 놓는다. 상궁이 왕대비전을 인도하여 도로 위좌로 나아가고 임금과 내전도 위좌로 나아간다. 음악이 그친다. 등가가 태평년악(太平年樂)을 연주하면 임금과 내전이 잔을 받아 들어서 마시는 것을 위의 의식과 같게 하고 도로 위좌로 돌아간다. 음악이 그친다. 전선(典膳)이 각각 좌우 명부에게 찬탁(饌卓)을 올리고 술을 돌리며, 여집사가 각각 의빈·척신에게 찬탁을 올리고 술을 돌린다. 헌가가 태평년악을 연주하는데 음악이 그치면 헌가가 태평년악을 연주한다. 상식이 소선(小膳)을 물리고 대선(大膳)을 올리면 음악이 그친다. 여집사 2인이 동서로 나누어 북쪽을 향하여 서서 창(唱)을 한다.】 창하는 악장(樂章)의 내용에 이르기를,
"요지(瑤池)의 선도(仙桃)로 안주를 삼으니 알알이 향기가 진동하고 3천 년에 한 번 익는 선리(仙李)070) 가 나타났습니다. 선리가 나타났으니 상서로운 즐거움 끝이 없도다. 옛날 주(周)나라의 강원(姜嫄)이 백세(百世)토록 본손(本孫)과 지손(支孫)이 번성함을 누렸는데, 자덕(慈德)께서도 훌륭한 후손이 계속되는 복을 받으셨기 때문에 후손이 모두 장수(長壽)하게 되었습니다. 자손(子孫)들이 많은 복을 받았으므로 길이 영고(寧考)071) 를 기리는 시(詩)를 읊습니다."
하였다. 【검교 직각(檢校直閣) 심상규(沈象奎)가 지었다. 창을 끝내고 나면 등가(登歌)가 태안악(太安樂)을 연주하고 헌가(軒架)가 태안악을 연주한다. 음악이 그치면 헌가가 낙양춘곡(洛陽春曲)을 연주하고 등가가 낙양춘곡을 연주한다. 상식이 나누어 혜빈 저하(惠嬪邸下)·왕대비전(王大妃殿)의 앞으로 나아가 안(案)을 거두고 임금과 내전 앞으로 나아가 안을 거두면 음악이 그친다. 전선(典膳)이 각각 좌우 명부(左右命婦)의 선탁(膳卓)을 철거하고 여집사(女執事)가 각각 의빈(儀賓)·척신(戚臣)의 선탁을 철거한다. 여집사가 의빈·척신을 나누어 인도하고 전빈(典賓)이 좌우 명부를 나누어 인도하여 내려와 배위(拜位)로 나아간다. 상궁(尙宮)이 왕대비전을 인도하여 도로 배위로 나아가고 임금과 내전도 도로 배위로 나아간다. 헌가가 여민락(與民樂)을 연주하고 등가가 여민락을 연주하면 왕대비전이 재배(再拜)하고 임금과 내전이 재배한다. 음악이 그친다. 헌가가 낙양춘곡을 연주하면 좌우 명부, 의빈·척신이 재배한다. 음악이 그친다. 행례(行禮)가 끝나면 헌가가 여민령의 음악을 연주하고 등가가 여민령의 음악을 연주한다. 혜빈 저하는 전좌(殿座)에서 내려와 대내(大內)로 들어가는데 상궁이 전도(前導)한다. 상기(尙記)가 각각 치사함(致詞函)을 받들고 대내(大內)로 들어간다. 음악이 그친다. 상궁이 왕대비전을 인도하여 나가고 임금과 내전을 인도하여 나간다. 전빈(典賓)이 좌우 명부를 나누어 인도하고 여집사가 의빈·척신을 나누어 인도하여 나간다.】
【태백산사고본】 12책 12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623면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註 069] 사성(四成) : 성(成)이란 무악(舞樂)의 1단락을 말함.[註 070] 선리(仙李) : 표리(縹李)·담청색(淡靑色) 오얏으로 그 크기가 주먹 만하여 이를 선리라고 불렀다는 《술이기(述異記)》의 풀이가 있음.[註 071] 영고(寧考) : 천하를 안정시킨 조고(祖考)를 뜻하는 말로, 문왕(文王)·무왕(武王)을 가리킴. 여기에서는 영조(英祖)·정조(正祖)를 비롯한 선왕(先王)을 가리키는 뜻으로 썼음.
진찬(進饌)한 당상·낭청과 반열에 참여한 의빈(儀賓)·척신(戚臣)에게 시상(施賞)하고 예방 승지(禮房承旨) 이문회(李文會)에게 가선 대부(嘉善大夫)를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2월 28일 무오
임희존(任希存)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황단(皇壇)의 향관(享官)을 의빈(儀賓)·종친(宗親)으로 차정(差定)하였다. 대신(大臣)이 모두 유고(有故)하기 때문이었다.
2월 30일 경신
함경 감사 조윤대(曹允大)가 영하(營下) 7리(里)의 민가(民家)가 불에 탄 것이 1천 7백 98호(戶)이고 불에 타서 죽은 인명(人命)이 2명이고 공해(公廨) 세 군데도 또한 불에 탔다고 장계(狀啓)하니, 하교하기를,
"6,7년 사이에 계속 화재가 발생하였으니, 불쌍한 저 함경도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잠을 이룰 수가 없다."
하고, 이어 승지 박종훈(朴宗薰)을 위유사(慰諭使)에 차하(差下)하여 내일 아침에 내려가게 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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