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13권, 순조 10년 1810년 9월

싸라리리 2025. 6. 18. 10:58
반응형

9월 1일 계축

산실청(産室廳)을 설치하였다.

 

9월 2일 갑인

조득영(趙得永)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김회연(金會淵)을 경상도 관찰사로 삼았다.

 

9월 3일 을묘

효자로 순창(淳昌)의 고(故) 사인(士人) 김영만(金永萬), 장기(長鬐)의 고 사인 허기(許琦)에게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우라고 명하고, 허기의 두 자부(子婦) 최씨(崔氏)와 최씨(崔氏)에게는 효행으로 급복(給復)하였다. 효자인 포천(抱川)의 고 첨지(僉知) 조수관(趙守寬)에게는 증직(贈職)하였는데, 예조에서 유생의 건의로 인하여 청하였기 때문이었다.

 

9월 5일 정사

차대하였다. 좌의정 김재찬이 아뢰기를,
"이번의 행행 때에 여러 승지를 파직하라고 명하신 것은 잘 거행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의 전교 가운데 비록 횃불을 세우지 말라는 명이 계셨으나, 아랫사람의 도리로는 마땅히 대령(待令)해 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만약 대령하지 않았다고 벌을 준다면, 민폐(民弊)를 더는 본의(本意)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견감하라는 은혜로운 하교가 전대로 있는데 아래에서 여전히 대령하였다면, 참으로 교령(敎令)이 일치되지 않아 둘 다 어기기가 어렵게 될까 염려됩니다. 이후에는 비록 칙교(飭敎)가 있더라도 저 어리석은 백성들은 이 일에 징계되어 불신하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니, 어찌 매우 두렵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승지가 사전에 아뢰지 않아서 명령이 전도된 것이다."
하자, 김재찬이 말하기를,
"일찍이 삼가 보건대, 선조(先朝)에서 원침(園寢)을 참배하고 돌아오실 때마다 사모를 금하지 못하여 ‘지지(遲遲)’란 두 글자로 대(臺)의 이름을 삼기까지 하였고, 또 시를 지어 ‘지지대 위에서 또 머뭇거리네[遲遲臺上又遲遲]’라고 하였습니다. 여기는 주구(珠邱)141)  의 가까운 곳이니 하룻밤을 지낼 때 오경(五更)도 짧을 것인데, 어찌 반드시 깊은 밤 어둠 속에서 이처럼 급급히 환궁(還宮)하는 일이 있어야 하겠습니까? 다행히 성상께서 다시 깨달아 곧바로 명을 거두어 하늘이 개이고 날이 저물 때까지 말고삐를 잡고 천천히 행차하여 위의(威儀)가 정돈되고 한가로움으로써 사민(士民)이 기쁘게 바라보았습니다. 이는 바로 이른바 머지않아 마음을 돌리고, 대성인(大聖人)께서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는 아량으로서, 신이 참으로 존경하기에 겨를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일에 환궁하겠다는 영(令)은 단지 민폐를 조금이나마 덜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나의 슬피 사모하는 정으로는 비록 10일을 머물러 있더라도 어찌 더디다고 말하겠는가?"
하자, 김재찬이 말하기를,
"이번의 시사(試士)는 미리 알리지 않아서 사자(士子)들이 대부분 기일에 맞추어 모이지 못하였습니다. 성상의 뜻에 만일 시사(試士)하고자 하셨다면, 어찌 미리 명을 내리시어 많은 선비들로 하여금 모두 과거장에 모이도록 하지 않으셨습니까? 시사하는 법은 군령(軍令)처럼 엄하여 뒤늦게 온 자는 절대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바로 과거를 중히 하는 뜻인데, 심지어는 다른 시제(試題)를 다시 걸고 추후에 시험을 보여 뽑은 일까지 있었습니다. 대저 한 과장에 두 시제(試題)를 내는 것은 거의 희롱(戱弄)과 같습니다. 어찌 과차(科次)를 매긴 후 두 사람이나 사제(賜第)할 줄을 뜻하였겠습니까? 비록 절일(節日)의 응제(應製)라 하더라도 원래 사제하는 예가 없기 때문에 지난 영묘조 때 서호수(徐浩修)를 칠석제(七夕製)에서 차등(次等)으로 사제하자, 그때의 옥당 이명환(李明煥) 또한 상소하여 빼어버리자고 청하였습니다. 이는 본디 일의 체면을 중히 하고 과제(科第)를 신중히 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고 보면, 이번의 시사에는 비록 지필묵(紙筆墨)으로 시상하더라도 넉넉히 기쁘게 할 수 있으니, 두 사람씩이나 사제한 것은 참으로 지나쳤습니다. 또 더군다나 당일에 대가(大駕)가 만일 성묘(聖廟)를 들르고자 하셨다면, 더욱 마땅히 기일 전에 하령하여 학궁(學宮)의 많은 선비로 하여금 분주히 달려오게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지 않고 갑자기 들렀으니, 또한 당일의 흠전(欠典)이었습니다. 또 대저 상전(賞典)은 지극히 중한데, 이번의 가자(加資)는 하루 안에 무려 8인이나 하였으니, 신의 생각에는 역시 너무 지나치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비에게 시사하는 일은 비록 곧바로 시험보이겠다는 명을 내리지는 않았으나, 전에 이미 승선(承宣)에게 전례를 물었다. 그리고 또 선조(先朝)에서도 일찍이 승선을 보내 시험보여 뽑은 예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시관(試官)을 차출하여 조금이나마 일의 체면을 두었고, 두루 들른 일에 대해서는 옛날 선조에서도 일찍이 행하였었다. 또 당일의 복색(服色)이 이미 군복(軍服) 차림이었기 때문에 사전(祀典)을 거행하지 못한 것이다. 가자(加資)의 일은 전년에 영릉(永陵)에 친히 제사를 올린 후에도 이러한 뜻을 보인 일이 있었기 때문에, 금번 여러 곳에서 시상하는 즈음에 자연 8인 정도로 많아진 것이다."
하였다. 호조 판서 심상규가 말하기를,
"신이 마침 승정원에 가서 보니 구전 하교(口傳下敎)를 벽에다 걸어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이후 능에 거둥하실 때에 어거를 수행하는 군병(軍兵)에게 줄 상의 격식을 곧바로 승정원에서 전교를 써내어 사례를 상고해서 시상하라는 뜻이었습니다. 대저 형벌과 포상은 매우 신중히 하여야 하기 때문에 비록 추고(推考)하는 하찮은 벌이라도 반드시 전교가 계신 후에 전지(傳旨)를 써 들이고, 전지를 계하(啓下)한 후에야 비로소 거행합니다. 그리고 상전(賞典)에 이르러서는 비록 한 장의 하찮은 아마첩(兒馬帖)이라 하더라도 또한 전교와 전지가 있어야만 하지, 전례의 유무에 따라 경솔히 거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대저 은상(恩賞)이란 것은 특전(特典)인데, 어찌 사례를 상고하여 응당 행하는 규정이겠습니까? 앞으로는 비록 군교배(軍校輩)의 목포(木布) 상전(賞典)이라 하더라도 본원에서 전대로 하게 문안을 작성하여 입계(入啓)하고 매양 전교를 내려 특별히 나온 은혜임을 알게 한 후에 비로소 거행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 싶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승지에게 말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심상규(沈象奎)·박종경(朴宗慶)을 통신사(通信使)의 행 이정 당상(行釐正堂上)으로 차출하였는데, 대신의 말을 따른 것이다.

 

9월 6일 무오

주강하였다.

 

9월 9일 신유

박종경(朴宗慶)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9월 10일 임술

만형자산(蔓荊子散)의 복용을 중지하고 가미건비탕(加味健脾湯)을 전의 처방대로 달여 들이라고 명하였다.

 

고려(高麗) 찬성사(贊成事) 박문수(朴門壽)를 표절사(表節祠)에 소급해 배향하라고 명하였는데, 유림의 상소로 인해서 대신에게 수의(收議)하여 이 명을 내린 것이다.

 

9월 11일 계해

경희궁(慶熙宮)에 나아가 재숙(齋宿)하였다.

 

이면긍(李勉兢)을 병조 판서로, 이조원(李肇源)을 이조 참판으로, 이희갑(李羲甲)을 참의로 삼았다.

 

9월 12일 갑자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함흥(咸興)·영흥(永興) 두 본궁(本宮)의 의폐(衣幣)와 향촉(香燭)을 전하였다.

 

9월 13일 을축

주강하여 《시전(詩傳)》 곡풍장(谷風章)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은 옛날 사람을 구하지만 그릇은 오래 된 것을 구하지 않는다. 사람을 등용하는 방도는 본디 마땅히 옛날 사람 쓰기를 도모해야 하는데, 예로부터 노성(老成)한 사람은 소원하기가 쉬우나 친하기는 어려우며, 신진(新進)의 사람은 친하기는 쉬우나 멀리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인정은 어찌하여 옛것을 싫어하고 새것만 좋아하는가? 젊고 예쁜 여자를 사모할 뿐만 아니라 으레 이런 병통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그 까닭은 무엇인가?"
하니, 시독관(侍讀官) 조봉진(曹鳳振)이 말하기를,
"기쁘게 하고 아첨하는 신하는 나오기는 쉬워도 물러가기는 어려우며, 충직한 선비는 나오기는 어렵고 물러가기는 쉽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박종래(朴宗來)·이면응(李冕膺)을 의정부 좌·우 참찬으로, 신대현(申大顯)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비국에서 과장(科場)에 사람이 따라 들어오는 폐단을 거듭 엄히 금지할 것을 청하니, 하교하기를,
"과장의 폐단은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 열성조의 금과 옥조(金科玉條) 같은 법이 본디 국헌(國憲)에 있고, 왕부(王府)의 관석 화균(關石和鈞)142)  이 더욱 과장에 엄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위에서 종전에 주의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비록 유신(儒臣)의 상소가 있더라도 많은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은 그 뜻이 있었던 것이니, 단지 사자(士子)들을 단속하지 않는 것이 도리어 단속하는 것보다 중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나머지는 오로지 사자들이 반성해야 한다. 내가 말한 바는 바로 대공 지정(大公至正)을 말한 것뿐이니, 이런 말로써 신칙하라. 번거로운 글과 잗단 절차는 내가 결코 구구하게 거론하지 않겠다."
하였다.

 

9월 14일 병인

주강하였다.

 

경상 감사 김회연(金會淵)을 불러 보았는데, 하직 인사를 드렸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영남은 다른 곳과 다르니, 경은 내려가거든 마음을 다해 선양하고, 모든 폐단에 관계된 것은 힘껏 제거해야 한다."
하였다.

 

9월 15일 정묘

차대하였다. 좌의정 김재찬이 아뢰기를,
"재해를 입은 북도(北道)의 다섯 고을에 대해 본도에서 전후로 아뢴 것이 극진하여 남김이 없었는데, 이제 선전관(宣傳官)의 서계(書啓)를 보건대, 고을을 하나씩 들어 조목으로 진달하여 더욱 자세하였으니, 구제하는 모든 방도에 관계된 것은 어찌 혹시라도 소홀히 하겠습니까? 더군다나 어제 구두로 전한 하교에서 성상의 마음이 이처럼 간절하셨으니, 받들어 선양하는 도리에 있어서 더욱 극도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구제하는 것은 목전의 일은 진대(賑貸)하는 것이고, 후에는 안접(安接)시키는 것이고, 전결(田結)을 바로잡아 감하는 것이고, 환곡(還穀)을 영원히 견감하는 것입니다. 무릇 이 네 조목은 모두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시급하고, 공적에 있어서는 지극히 중합니다. 그 조치하고 분배하는 데에도 각기 분수(分數)와 절차가 있고, 일의 체면으로 헤아려 봐도 단지 선전관의 한 서계만을 근거로 하여 갑자기 단행해서는 안됩니다.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견문(見聞)을 참고하여 그 사정을 채집하고, 또 이 고을 저 고을 민세(民勢)의 완급(緩急)과 곡부(穀簿)의 다소(多少)를 자세히 구별하여 등수를 나누게 해야 합니다. 또 재물과 곡물을 구획(區劃)할 계책에 대한 의견을 석왕사(釋王寺)를 중수(重修)할 방도까지도 보고하라는 뜻으로 말을 만들어 분부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면응(李冕膺)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정관수(鄭觀綏)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한만유(韓晩裕)를 공조 판서로, 오재소(吳載紹)를 판돈녕부사로, 김희순(金羲淳)을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9월 16일 무진

주강하였다.

 

반궁(泮宮)143)  에서 구일제(九日製)144)  를 시행하였다.

 

동래 부사 윤노동(尹魯東)이 아뢰기를,
"통신사가 거행할 조목을 속히 강정(講定)하라는 뜻을 강정 역관(講定譯官) 현식(玄烒)·현의순(玄義洵) 등에게 각별히 신칙하소서. 계미년145) 등록(謄錄)을 상고해 보았더니, 통신사의 행차를 호위하는 차왜(差倭)가 나온 후 본도의 도사(都事)가 미리 접대하고 차비 역관(差備譯官)은 없었으므로, 차왜 평공지(平公志)는 예에 의해서 본도의 도사가 청해다가 접대할 계획이며, 차왜가 가지고 온 예조·동래·부산에 보낸 서계(書啓)는 도해 역관(渡海譯官)이 호환(護還)합니다. 재판왜(裁判倭) 등공교(藤公喬)를 그대로 통신사 호행 재판왜로 정하였습니다. 서계 등본을 올려 보냅니다."
하였다.

 

9월 18일 경오

비국에서 아뢰기를,
"이번 과장에는 경향(京鄕)에서 응시한 선비가 매우 많아서 1소(一所)·2소(二所) 안에 반드시 다 수용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1소는 중추부(中樞府)를 터서, 2소는 명륜당(明倫堂)을 터서 각 차비(差備)가 거행하되, 적당히 헤아려서 더 차출해 편리할 대로 분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9월 19일 신미

식년 감시(式年監試)의 초시(初試)를 설행하였다.

 

9월 20일 임신

박윤수(朴崙壽)를 의정부 우참찬으로 삼았다.

 

9월 21일 계유

오재소(吳載紹)를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삼가 형조의 감사(減死) 정배한 죄인 정약용(丁若鏞)의 아들 유학(幼學) 정후상(丁厚祥)이 격쟁(擊錚)하여 바친 공초(供招) 계목(啓目)에 대한 판부(判付)에 의하여 대신에게 의논해 보았습니다. 좌의정 김재찬(金載瓚)은 말하기를 ‘국문의 뜰에서 진상을 찾아내지 못하여 그때에 과연 감사(減死)하였습니다. 그 감사한 것 역시 특별한 은혜에서 나온 것인데 지금 편배(編配)까지 벗어나고자 하니, 참으로 무엄합니다. 특별히 사건(四件) 안의 일은 비록 논죄하지 않더라도, 원공(原供)은 시행하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신의 의논이 이와 같으니, 버려 두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옥사(獄事)가 확실한 진상이 없는데 감사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은 도리어 형정(刑政)의 공평에 어긋나니, 〈정약용을〉 특별히 향리로 추방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정약용을 향리로 추방하라고 하명하셨으나, 지금 대간의 계사(啓辭)에 거론되고 있어서 거행할 수 없습니다."
하고, 옥당과 대간이 번갈아가며 명을 취소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양주(楊州)의 진사 윤의도(尹義度)가 글을 올려 그의 아비 윤상후(尹象厚)의 죄명(罪名)을 씻어달라고 청하였기에, 대신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좌의정 김재찬이 말하기를, ‘만약 네 자(字)의 설이 참으로 그의 입에서 나왔다면 대질에서 어찌 진상이 탄로나지 않고 논죄할 때 방면으로 끝났겠는가? 옥에 붙잡혀 와서 적발된 것이 없었지만 그가 죽었기 때문에 모호하게 되어 마치 살리는 것도 아니고 죽이는 것도 아닌 것처럼 되었으니, 억울함을 호소할 단서가 있을 만도 합니다. 그러나 국문의 내막에 관계된 일이므로 갑자기 의논하기 어렵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신의 의논이 이와 같으니, 성상께서 재결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사건의 진상이 잡히지 않았으니, 신변(伸卞)할 단서가 있다. 마땅히 참작하여 용서할 의의가 있으니, 특별히 죄명을 씻어주도록 하라."
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서장보(徐長輔)가 진달한 고사(故事)에 대해 답하기를,
"그대가 진달한 고사를 살펴보니, 〈송(宋)나라〉 인종(仁宗)은 선(善)을 하는 것을 좋아하였으나, 진퇴의 잘잘못과 현우(賢愚)를 판별할 때에 그 치도(治道)를 극진히 하지 못하였다. 이는 참으로 인자하고 명철한 가운데 쾌히 분발하고 뇌락(磊落)146)  한 기상(氣像)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록 그렇더라도 제 선왕(齊宣王)의 인(仁)147)  에 비유하자면, 그가 차마 죄없는 소를 죽이지 못한 것은 바로 일시의 천리 공심(天理公心)이 애연(藹然)히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싹텄다가 곧 사라진 것이다. 만약 처음부터 이런 마음이 없는 사람이라면, 백성들이 그 혜택을 받을 수 없고 도(道)는 왕도(王道)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또 실로 다름이 아니라, 참으로 선유(先儒)가 이른바 ‘사람이면 너나없이 그런 성품이 없지 않으나, 물욕(物欲)에 가리운 바가 되어서이다.’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대저 제나라 선왕은 욕심이 많고 인(仁)은 적으며, 송나라 인종은 인은 많고 강(剛)은 적은 것이다. 또 인종이 불에 구운 양(羊)을 먹지 않은 한 가지 일148)  을 보건대, 불쌍하게 여기는 인이 밖으로 발로된 것으로서, 인의(仁義)를 가차(假借)한 하나의 제나라 선왕과는 동일시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고 보면 송 인종의 인은 어찌 후세 왕이 본받아야 할 것이 아니며, 임금과 신하가 기어코 서로 동심 일덕(同心一德)으로 태평을 이룩하려면 어찌 오늘날에 더욱 간절히 본받아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진달한 바는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9월 22일 갑술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시독관 서장보(徐長輔)가 진달한 고사에 대해 답하기를,
"네가 진달한 고사를 살펴보니, 그 요점을 알았다고 하겠다. 위의(威儀)를 높이는 것은 첨시(瞻視)를 보는 것이고, 용모(容貌)를 엄히 하는 것은 장경(莊敬)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혼자 있을 때에도 부지런히 힘써서 옥루(屋漏)149)  에서도 부끄럽지 않게 하여 사벽(邪僻)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본디 학문의 요점으로서, 여기에서 수신(修身)의 도(道)를 차례로 볼 수 있으며, 격치(格致)의 공부가 효험이 있는 것이니, 어찌 깊이 생각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무릇 일동 일정(一動一靜) 모두 내 자신이 스스로 단속해야 할 바이다. 옛날 제(齊)나라의 선왕(宣王)은 정성을 들여 맹 부자(孟夫子)를 초치하지 못했기 때문에 맹 부자가 심지어는 ‘정말 원하기는 하나 감히 요청하지는 못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아! 천하의 일은 기미(幾微)를 보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없다. 새는 미물이지만 날아오른 후 모일 줄을 안다. 비유하자면 마치 태산(泰山)이 무너지려면 지사(志士)가 먼저 눈물을 흘리는 것과 같다. 이는 왜 그런가? 태산은 천하의 명악(名岳)이어서, 이 산이 무너지려고 하는데 다른 것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참으로 이러하기 때문에 처음을 알면 그 끝을 알 수가 있으며, 움직이는 것을 알면 조용히 있을 때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일체의 요점은 대개 하나의 심계(心界) 위에서 나온 것으로, 스스로 태만했는지의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게 분명하다. 나는 ‘의(儀)가 송조(宋祖)를 간한 것은 기미를 보아서 말한 것이다.’라고 하는데, 또한 그렇지 않은가? 훌륭하게도 송조는 말을 듣고 감격하여 선뜻 개오(改悟)하였으니, 역시 후일에 가면 갈수록 더욱 성(聖)스러워지는 일단의 기미를 미루어 헤아릴 수가 있겠다. 가령 송주(宋主)가 여기에 한때 소홀하여 마치 예사로운 것으로 보아 넘겼더라면, 앞으로의 폐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었겠는가? 아! 우리 열성조의 풍성한 공렬(功烈)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골수에 젖어들어 잊지 못할 생각을 품지 않은 자가 없는데, 이는 요(堯)·순(舜)의 인(仁)과 문(文)·무(武)의 선(善)으로 말미암아 양양(洋洋)하게 정령(政令)을 시행하는 즈음에 넘쳐흘러 신민들이 은택을 입어 모두 조화(造化)의 하늘을 이고 있는 것처럼 한 것이니, 아! 훌륭하다. 또 성모(聖謨)와 미규(美規)는 어느 것이나 내가 주야로 본받아 마음에 둘 것이 아니겠는가? 그 중 신하를 예로 접하는 것이 더욱 오늘날에 힘써야 할 일이니, 어찌 하나의 송조(宋祖)가 그 높은 덕(德)을 엿볼 수 있겠는가? 때마침 그대의 말을 보니, 경각심이 배나 더해졌다. 진달한 바를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9월 24일 병자

시독관 서장보가 진달한 고사에 대해 답하기를,
"그대가 진달한 고사를 보고 매우 감탄하였다. 대저 하늘이 낸 재화(財貨)는 한정이 있고 나라에서 재화를 사용하는 데에는 방도가 있다. 만약 사용하는 자가 절약하려는 마음이 없이 한때의 넉넉함만 믿고서 아끼는 뜻이 없다면, 백성을 해치고 나라를 병들게 하는 것을 한마디 말로 논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한정이 있는 재물로 끝이 없는 용도에 마치 땅에 거름을 뿌리듯 한다면, 어찌 백성들을 위하는 의의이겠는가? 그러므로 세상을 다스려 이끄는 법은 먼저 기강을 세워 백성을 기르는 수령으로 하여금 각자 독려하고 힘써서 재화를 생산하고 백성들을 돕는 요령에 특별한 실효(實效)가 있게 하는 데에 불과하다. 이에서 재화가 풍족한 근본이 나타나고 백성들이 힘입게 될 것이다. 우리 열성조의 지극히 인자(仁慈)한 덕은 먼저 ‘절검(節儉)’이란 두 글자에서부터 말미암아서 내가 항상 가슴속에 부지런히 새겨 두고 있는 바이다. 송나라 진서(陳恕)의 일로 말하자면 송주(宋主)의 아직 발로되지 않은 사치심을 경계하여 꺾어버렸으니, 비록 오만한 뜻이 있는 듯하나, 이는 참으로 충성에서 나온 것이었으므로 송주가 가상히 여긴 것이다. 이 가상히 여기는 아름다움을 미루어 후일까지 미치게 하였더라면, 어찌 더욱 훌륭하지 않았겠는가? 송주는 이런 도리를 몰랐던 것이다. 진달한 바는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9월 25일 정축

차대하였다. 의주부(義州府)의 실상이 없는 전지 3백 52결을 특별히 감해 주라고 명하였는데, 대신이 위유 어사(慰諭御史)가 연석(筵席)에서 아뢴 것으로 인해 청했기 때문이다.

 

김이재(金履載)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박종래(朴宗來)를 예조 판서로, 김희순(金羲淳)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9월 28일 경진

교리 홍명주(洪命周)가 상소하여 사직하면서 정약용(丁若鏞)을 전리(田里)로 추방하라는 명을 정지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정약용의 일은 이미 옥당의 차자에 대한 비답에서 유시하였다. 사도(邪徒)를 엄히 배척하는 것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만, 만약 이러한 죄에 관계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면 역시 일체 사도로 몰아붙일 것이 뭐가 있겠는가? 이후에 만일 날뛰는 흔적이 있으면 나라에 금석 같은 법이 있으니 반드시 전일의 일보다 10배나 더 엄히 벌을 줄 것이다. 정약용 하나쯤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그리고 이렇게 한 후에도 사도가 예전처럼 함부로 날뛰면서 엿보려고 꾀한다면 조정에 자연 공론이 있을 것인데, 내가 왜 말을 허비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시독관 서장보가 진달한 고사에 대해 답하기를,
"그대가 진달한 고사를 보았는데, 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힘써야 할 큰 관건이다.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단단해야 나라가 편안하다.’고 하였는데, 이는 의미 심장한 말로써 참으로 천하 백성들에게 복된 말이라 하겠다. 오직 하늘이 만방(萬邦)을 굽어살피시어 자상하게 경계하는 것이 아비가 아들을 가르치는 것보다 더하다. 아! 임금이 된 자는 마땅히 하늘의 뜻을 본받아 만백성을 보살펴서 마치 하늘이 우로(雨露)를 고르게 내리는 것처럼 하고, 백관에게 임하기를 하늘의 해와 달이 운행하는 것처럼 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로가 베풀어져 만물이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고, 해와 달이 운행하여 만물이 통하지 않음이 없는 것처럼 되면, 억조 백성들이 모두 추대하여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따르듯이 할 것이다. 그러면 천심(天心)이 기뻐하고 인정(人情)이 화목해져 치도(治道)가 저절로 그 가운데 있게 되어 태평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아! 후세의 혼군(昏君)은 이런 도리를 몰라 백성들에게 사납게 굴고 거리낌 없이 방치해 두는가 하면, 사치가 날로 심해지고 음사(淫邪)가 날로 더하며, 때 아닌 때에 백성들을 부려 노소(老少)가 모두 달려가 사망(死亡)이 서로 이어지는 지경에 이르러 원망이 길에 가득해 망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역대의 일이 분명하게 사책(史冊)에 실려 있다. 대저 사해의 부(富)로써 일신을 봉양하니 부족하지 않지만, 팔진(八珍)의 좋은 음식과 백척(百尺)의 넓은 집도 오히려 마음에 차지 않는다고 여겨, 심지어 백성들의 재산을 긁어모아 멋대로 자신을 봉양하기에 겨를이 없는데, 한 사람에게만 천하를 구제하라고 책망하고 있으니, 어찌 그리도 잘못되었는가? 그렇다면 그 폐단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 왜냐하면 천지 사이에는 한 이치일 뿐인데, 만약 인욕이 공리(公理)에 막히게 한다면 이는 공리가 이기는 천리(天理)이고, 이와 반대로 인욕이 그 공리를 이기면 하늘에서 받은 한 개의 ‘성(性)’ 자가 소멸되니, 이는 인욕이 이기는 인심(人心)이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없게 되고, 저쪽으로 달려가면 이것이 해롭게 된다. 후세의 혼군(昏君)은 바로 저 인욕에 찬 사람이다. 사사(奢邪)의 조짐이 날마다 더하고 달마나 자라나 실로 말로 하기 어려운 근심이 있으니, 임금이 된 의의가 어디에 있겠는가? 더군다나 이미 성역(聖域)에 돌아가지 못하면 그대로 본연(本然)의 성(性)을 잃고 종신토록 인욕의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니, 자신이 선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백집사(百執事)가 일을 제대로 수행하고 백료(百僚)와 만백성이 우러러보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만백성이 안도(安堵)하는 것은 사해(四海)의 흐름을 이어받은 것이다. 근본이 이미 튼튼하지 않은데 나라가 편안할 수 있겠는가?
아! 우리 열성조께서는 훌륭한 분들이 계승하여 백성들의 일에 부지런히 마음을 써서 낮에서 밤까지, 밤에서 아침까지 여러모로 힘을 다 기울여 요·순·우·탕(堯舜禹湯)이 전수한 심법(心法)을 조금이라도 느슨히 하지 않아 규모가 높고 광대하였으므로, 거듭 빛나고 누차 젖은 인(仁)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오늘날 생민의 한 개의 털이나 머리털이 모두 하늘 같은 성덕(聖德)과 성화(聖化)에서 비롯되었는데, 나 소자(小子)가 어찌 감히 거기에 끼겠는가? 그러나 힘써 마음속에 새겨야 할 것은 실로 계술(繼述)에 있으니, 다른 것이야 많은 말을 할 것이 있겠는가?
아! 성조(聖祖)의 유택(遺澤)이 아직까지 팔방(八方)에 두루 젖어 있는데, 근년 이래로 걱정을 분담한 수령들 중에 구중 궁궐에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을 본받아 조정에서 돌보아 주는 뜻을 보답한 자가 전혀 없고 오직 탐욕을 부리는 것을 능사로 삼고 있다. 그 사이에 참으로 나의 뜻을 선양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이는 10명 가운데 한둘이다. 내가 매양 생각하다가 깜짝 놀라운 생각이 들어 속으로 자문 자답하기를, ‘나에게 성실한 도리가 없어서 스스로 그 치도(治道)를 극진히 하였다고 생각하지만 극진히 하는 가운데 혹 미진하지 않은가?’ 하고, 또 ‘사람을 골라서 하는 정사를 행하였다고 하지만 가리는 가운데 혹 가리지 못함이 있지 않은가?’라고 반복하여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일마다 합당하게 되지 않았다고 할 수 없고, 민국(民國)의 정사에도 과실이 없는데, 어찌하여 기강이 날로 문란해지고 풍속이 날로 퇴폐해져 마치 강물이 터져 구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되었단 말인가? 어떻게 해야 이런 폐단을 없앨 수 있으며, 어떻게 해야 이런 폐단을 제거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재삼 말해 봐도 깨닫기 어려웠었는데, 하루는 마침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올린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살펴보다가 ‘정신이 이르는 곳은 금석(金石)도 꿰뚫는다.’는 등의 글을 보고서 깨닫기 어려운 것을 황연(怳然)히 깨달았다. 성(誠)이란 것은 상하로 통용되는 공부이니, 성을 버리고서 무엇을 취하겠는가? 지금의 사세는 위에서부터 성실하게 해나가 정령(政令)과 일을 하는 데 성으로 밀고 나가면 백 가지 일이 성실하게 될 것이다. 내가 또 전해오는 옛 내적(內蹟)을 보니, ‘왈성왈성혜 성지성의(曰誠曰誠兮 誠之誠矣)’라고 하였는데, 주해(註解)에 ‘네 성자를 합해서 보면 성을 폐지할 수 없다는 것을 볼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또한 깊이 경계한 말을 남긴 것이다. 또 ‘전가지보(傳家至寶)’라고 썼는데, 이것이 어느 때에 나온 것인지 모르겠으나, 비록 궁중에 잡되게 쌓여 있는 문적도 이런 깊은 뜻을 볼 수 있으니, 여기에서도 성을 버리기 어렵다는 것이 분명하다. 내가 수령들에게 하루의 책무로 말하지 않고 스스로 반성하는 조목에 언급하면서 겸하여 본받아 선양하라는 뜻을 유시한다. 진달한 바는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