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일 무진
개성부의 불탄 민가 1백 99호와 평산부(平山府)의 불탄 민가 1백 76호에 대하여 특별히 구휼하는 조처를 취하도록 명하였다.
5월 7일 계유
박종래(朴宗來)를 예조 판서로, 이만수(李晩秀)를 판돈녕부사로 삼았다.
5월 10일 병자
북원(北苑)에 나아가 황단(皇壇)045) 에 대한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다.
5월 11일 정축
이때 자못 가뭄을 애처롭게 여겨 선전관을 나누어 보내 네 교외(郊外)의 농사 형편을 적간(摘奸)하고, 이어서 기우제 지낼 날을 가려 잡을 것 없이 오는 13일에 정성껏 설행할 것을 명하였다.
5월 13일 기묘
비가 왔다.
첫번째 기우제를 삼각산(三角山)·목멱산(木覓山) 및 한강에서 지냈다.
5월 14일 경진
비가 왔다.
평안도 암행 어사 이서(李垿)의 서계(書啓)에, 전 병사 신홍주(申鴻周), 평양 전 서윤 심응규(沈應奎), 의주 전 부윤 조흥진(趙興鎭), 귀성(龜城) 전 부사 조은석(趙恩錫), 용천(龍川) 전 부사 이호식(李祜植), 초산(楚山) 전 부사 최신엽(崔信燁)·홍시부(洪時溥), 희천(熙川) 전 군수 김문기(金文基), 영원(寧遠) 전 군수 나동욱(羅東旭), 태천(泰川) 전 현감 백경해(白慶楷) 등의 잘못 다스린 실상에 대하여 논하였으므로, 모두 경중에 따라 감죄하도록 하였다. 또 숙천 부사(肅川府使) 이유수(李儒秀)의 치적에 대하여 말하였으므로, 승서하여 조용하였다. 별단에는 고채(庫債)의 탕감·군액의 감축·염가(鹽價)의 증액 등을 청하였으므로, 모두 묘당으로 하여금 장점을 따라 채택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
5월 15일 신사
비가 왔다.
이상겸(李尙謙)을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로, 박기풍(朴基豊)을 좌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5월 16일 임오
비가 왔다.
5월 19일 을유
박종경(朴宗慶)을 한성부 판윤으로, 서영보(徐榮輔)를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5월 25일 신묘
차대하였다. 영의정 김재찬이, 역마(驛馬)의 남기(濫騎)와 가파(加把) 및 무과 출신 수령의 승교(乘轎)의 폐단을 신칙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호남의 유생 이도형(李道亨) 등이 증 참판 안방준(安邦俊)에 대하여 증직과 시호를 내릴 것을 소청하였으며, 영남 유생 김택명(金宅溟) 등이 증 승지 이영도(李泳道)에 대하여 가증하고 시호를 내릴 것을 소청하였습니다. 안방준은 학문에 힘써 의리를 밝혔으니 여러 선정(先正)들이 이미 인정한 바이며, 의병을 모아 국난에 달려나갔으므로 《창의록(倡義錄)》이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척화(斥和)에 관한 한 편의 상소는 선정신 조헌(趙憲)의 봉사(封事)에 비해서도 부끄러움이 없는데, 명편(名編)을 혼합해 정하여 성조(聖祖)의 석실(石室)의 글을 정리하였으니, 그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성덕(聖德)을 빛낸 공이 의당 백세에 꼭 보답하는 조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정경(正卿)을 증직하소서. 이영도는 선정(先正)의 가문을 지킨 손자로서 선정이 마음으로 전한 학문을 받았으며, 명나라 장수를 응접할 때는 계획하고 조처한 것이 모두 절도에 맞았고, 흉도(凶徒)를 엄중히 물리쳤을 때는 권간(權奸)들 모두가 간담이 떨어졌습니다. 여러 사자(士子)들이 청한 바에는 공의(公議)를 알 수 있습니다만, 한 품계를 가증하고 시호를 내리는 일은 중대한 특전인 만큼 아울러 우선 그냥 두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영도는 곧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손자이다.
장령 남달손(南達孫)이 상소하여 8개 조목을 아뢰기를,
"뜻을 세우고, 실질에 힘쓰고, 풍속을 돈독히 하고, 기강을 진작하고, 직임을 무겁게 하고, 과규(科規)를 엄격히 하고, 적정(糴政)을 공평히 하고, 군정을 제대로 다스리소서."
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5월 27일 계사
황해 감사 한용탁(韓用鐸)이, ‘이달 20일에 황주(黃州)에 우박이 내렸는데, 큰 것은 주발만 하고 작은 것은 달걀만 하였으며, 쌓인 것이 넉넉히 반 자[半尺]나 되고, 지나간 곳의 길이는 50리, 넓이는 7, 8리로 모든 곡식이 망가졌다.’고 아뢰었다.
조정철(趙貞喆)을 충청도 관찰사로, 조종영(趙鐘永)을 황해도 관찰사로, 심상규(沈象奎)를 좌빈객으로 삼았다.
5월 29일 을미
양서(兩西)·삼남(三南)·관동(關東) 및 강화(江華)의 진휼(賑恤)을 마쳤다. 【해서는 해주(海州) 등 22개 읍진의 기민(饑民) 30만 9천 9백 45구(口)에 대하여 각종 곡물 1만 2천 58석을 나누어 진제하였으며, 관서는 안주(安州) 등 32개 읍진의 기민 23만 6천 5백 83구에 대하여 절미(折米) 8천 5백 30석을 나누어 진제하였으며, 관동은 철원(鐵原) 등 5개읍의 기민 12만 4천 8백 16구에 대하여 곡물 1만 2백 40석을 진제하였으며, 영남은 대구(大邱) 등 1백 1읍진의 기민 92만 8백 6구에 대하여 각종 곡물 7만 5천 3백 71석을 나누어 진제했으며, 호서는 홍양(興陽) 등 35개 읍진의 기민 18만 7천 8백 45구에 대하여 각종 곡물 1만 7천 2백 96석을 나누어 진제하였으며, 호남은 영광(靈光) 등 36읍진의 기민 69만 4천 7백 37구에 대하여 각종 곡물 4만 5천 8석을 나누어 진제하였으며, 강화의 기민 2만 2백 55구에 대해서는 절미 6백 25석을 나누어 진제하였다.】 철원 부사 임성고(任聖皋), 상주 목사(尙州牧使) 이장소(李章紹), 만경 현령(萬頃縣令) 유호원(柳鎬源), 임자도 첨사(荏子島僉使) 김종식(金鍾軾) 등에게는 승서(陞敍)의 은전을 베풀고, 사민(士民)으로서 진제를 도운 사람에게는 시상하였다.
홍수만(洪秀晩)을 동래 부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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