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기해
별강하였다.
2월 2일 경자
소대하였다.
별강하였다.
2월 5일 계묘
영의정 김재찬에게 유시하여 하교하기를,
"경이 소를 올려 사퇴를 청한 뒤 일을 보지 않은 지가 벌써 여러 날이니, 나의 기다리는 마음이 갈증보다도 더하다. 그런데도 경은 어째서 이를 생각지 않는가? 설을 전후로 하여 아직껏 한 번도 차대를 행하지 않아서 서무(庶務)가 공백 상태이니, 경은 한 번 생각해 보라. 이럴 때에 경은 단지 짐을 벗어날 생각만 하니, 나랏일에 대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그저 형식적으로 경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니, 경은 응당 국사의 어려움을 깊이 생각하여 즉시 조정에 나와서 나의 간절한 소망에 부응토록 하라."
하였다.
2월 9일 정미
소대하였다.
부호군 한시유(韓始裕)가 상소하여 전관(銓官)의 간택에 대하여 논하였는데, 공기(公器)를 사사로운 목적에 이용한다는 말이 있으므로, 이조 판서 김희순(金羲淳)과 병조 판서 서영보(徐榮輔)가 소를 올려 인피하여 체면(遞免)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는다고 비답하였다.
박종경(朴宗慶)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2월 10일 무신
소대하였다.
이석구(李石求)를 함경남도 절도사로 삼았다.
여주(驪州)의 유학(幼學) 신광태(申光台) 등이 상소하여 고 감역(監役) 박윤원(朴胤源)과 충헌공(忠獻公) 박준원(朴準源)의 사당을 세워 함께 제향할 것을 청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충헌공이 일찍이 말한 것이 있다. ‘입신(立身)하여 임금을 섬기는 일은 근신하는 데 있을 따름이다.’ 하였다. 내가 그 말에 감탄하여 지금까지 그 말이 귀에 남아 있다. 만약 그대들의 소청을 듣게 된다면 살고 죽음에 관계없이 틀림없이 깜짝 놀랄 것이다. 전에 이를 허락하지 않은 것은 내가 충헌공의 본 마음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충헌공에게 보답하는 길이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많은 선비들의 여러 번의 상소를 기다리겠는가?"
하였다.
2월 11일 기유
소대하였다.
별강하였다.
2월 15일 계축
차대(次對)하였다. 대신(大臣)이 함경 감사 김이양(金履陽)의 아룀에 따라 갑산부(甲山府)의 절호(絶戶)의 환미(還米) 2천 60석 영(零)을 매년 나누어 받아 들일 것을 청하니, 특별히 탕감하도록 명하였다.
서영보를 선혜청 제조로 차임하고, 신홍주(申鴻周)를 좌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2월 17일 을묘
영화당에 나아가 인일제(人日製)를 행하였다.
2월 18일 병진
이집두(李集斗)를 공조 판서로, 김계락(金啓洛)을 예조 판서로, 이만수(李晩秀)를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2월 19일 정사
영화당에 나아가 춘도기 유생(春到記儒生)024) 에 대한 시험을 보였는데, 강(講)에 수석을 차지한 이동적(李東迪)과 제술(製述)에 수석을 차지한 이진화(李鎭華)를 모두 직부 전시(直赴殿試)025) 하도록 하였다.
2월 21일 기미
영화당에 나아가 전경 문신강(專經文臣講)을 행하였다.
2월 22일 경신
영화당에 나아가 전경 무신강(專經武臣講)을 행하였다.
신상록(申相菉)의 복과(復科)026) 를 명하였다. 신상록은 곧 정종을묘년027) 윤 2월의 화성 문과(華城文科)에서 발방(拔榜)당한 사람인데, 그 아들의 상언에 따라 대신과 의논하여 회복시킨 것이었다.
2월 24일 임술
영화당에 나아가 문신에게 제술(製述)시험을 행하였다.
2월 25일 계해
차대하였다. 영의정 김재찬이 말하기를,
"정유년028) 의 진주 싸움에서 가장 용맹을 떨친 자는 이노(李魯)로서 곧 세상에서 말하는 촉석루 삼장사(矗石樓三壯士)의 한 사람입니다. 청컨대 한 품계의 가증(加贈)을 특별히 허락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말하기를,
"임진년의 왜란 때에 안동(安東) 사람 권응심(權應心)이 그의 종형인 증 찬성(贊成) 권응수(權應銖)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쳤는데, 크고 작은 수십 차례의 전투에서 그때마다 공을 세웠습니다. 대동(大同)과 한천(漢川)의 적병을 연달아 쳐부수고 전전하여 박연소계(朴淵召溪)에 이르러 또 쳐부수었으며, 영천(永川)에 다닥뜨려서는 화공(火攻)의 계책을 써서 적병을 무수히 태워 죽이고 드디어 영천을 수복하였습니다. 뒤쫓아가면서 힘껏 싸워 문경(聞慶)과 안동의 적병을 크게 무찌르고 또 경주(慶州)에서 적병을 쳐부수었으므로 경상우도가 드디어 개통되었습니다. 조정에서 여러 번 벼슬을 제수하여 병마 우후(兵馬虞候)에 이르고, 이어서 양경리(楊經理)029) 의 휘하에 소속되어 도산(島山)에서 적병을 치다가 유탄에 맞아 죽었습니다. 명나라 장수는 글을 지어서 애도하기를, ‘한단(漢壇)030) 을 부질없이 설치했구나. 주거(周車)031) 에 싣지 못함이여.’ 하였습니다. 전후의 일의 공적이 전인(前人)들의 기록에 모두 기재되어 있습니다. 대개 권응수와 권응심은 형과 아우인 친척 사이로 공적은 같은데,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다릅니다. 권응수는 이름이 기상(旂常)032) 에 오르고 영화가 벼슬과 시호(諡號)에 미쳤습니다. 그런데 권응심은 싸워서는 반드시 이기고 죽어서 용명(勇名)을 남겼으나 유독 파묻혀서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연전에 비로소 읍장(邑狀)으로 인하여 겨우 한 등급을 추증하였었는데, 특별히 아경(亞卿)의 벼슬에 추증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말하기를,
"무오년033) 심하(深河)의 싸움 때에 출신(出身) 최영원(崔永元)이 관서에 부방(赴防)하고 있었는데, 김응하(金應河)를 찾아가 보고 싸움에 따라가기를 자원하므로, 김응하가 말하기를, ‘전쟁이란 죽음에 이르는 곳이다. 그대는 관리의 직책도 없으면서 무엇 때문에 죽을 곳을 가려 하는가?’ 하자, 최영원이 분개하듯이 말하기를,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나라를 위하여 죽는 것이 소원이다.’ 하였습니다. 마침내 김응하와 함께 심하에서 싸우게 되었는데, 크게 소리를 지르며 달려나가서 수없이 적병을 살상하였으나, 마침 큰 바람이 불어 앞이 흐리어 전군(全軍)이 함께 궤멸되고 말았습니다. 이튿날 죽은 곳을 살펴보니 김응하와 함께 버드나무 밑에 쓰러져 있었다고 합니다. 저와 같은 충절이 계속 자취를 잃는다면 실로 성조(聖朝)의 궐문(闕文)이 되는 일입니다. 청컨대 특별히 병마 절도사를 추증하고 겸하여 정려(旌閭)의 은전을 내리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고 대사헌 이직보(李直輔)에게 치제(致祭)를 명하였다. 상기(祥期)가 끝난다고 대신(大臣)이 아뢰었기 때문이다.
동지 정사 심상규(沈象奎) 등이 연경에서 출발한다고 치계(馳啓)하였다.
2월 26일 갑자
사은 정사 이상황(李相璜), 부사 임희존(任希存), 서장관 홍기섭(洪起燮)을 불러 보았다. 하직 인사차이다.
박종래(朴宗來)를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2월 27일 을축
이집두(李集斗)를 판의금부사로, 안숙(安橚)을 함경북도 절도사로 삼았다.
2월 28일 병인
인정전에 나아가 한학 문신강(漢學文臣講)을 행하였다.
2월 29일 정묘
주강하였다.
우의정 김사목에게 하유하기를,
"내가 결단코 경의 지극한 뜻을 버린 것이 아니므로 경도 또한 나의 마음을 이해할 것이다. 그런데 자리를 비켜 얼마를 기다려도 경이 조정에 나오는 것을 볼 수가 없구나. 경이 비록 나이가 많지마는 정력이 왕성하니 한때 병이 있더라도 부합(府閤)034) 에 누워서 일을 상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내가 허락하려 하는데 왜 이처럼 버티는가? 이때의 보상(輔相)에 대하여 까닭 없이 경 같은 노성(老成)한 자를 그만두게 할 수 있겠는가? 경은 내가 기어코 버리지 않을 생각이란 것을 알아서 다시는 그렇게 버티지 말고 즉시 나와 일을 보아 나의 이 갈증과 같은 바람에 부응토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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