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17권, 순조 13년 1813년 9월

싸라리리 2025. 6. 25.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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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일 을축

이당(李溏)을 좌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9월 4일 정묘

함경 감사                     김이양이, 8월 초2일에 바람이 불고 비가 와 경성(鏡城)·회령(會寧) 등 고을의 민가가 무너지고 떠내려간 것이 1백 82호이고, 엄사(渰死)한 사람이 37명이라고 아뢰었으므로, 특별히 구제하도록 명하였다.

 

9월 5일 무진

주강하였다.

 

차대하였다. 영의정                     김재찬이 아뢰기를,
"동지 정사                     서용보(徐龍輔)의 사임을 허락하고, 이 뒤로 정사를 차출할 때, 대신이 사고가 있으면 종친과 의빈(儀賓)의 2품 이상 중에서 의입(擬入)하되, 이를 기록하여 정식으로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김재찬이 또 아뢰기를,
"평안 감사                     정만석이 장계하기를, ‘본영의 군제는 장십부(壯十部)와 순별초(巡別哨) 및 좌우 마별(左右馬別)이 있어서, 해마다 겨울 두 달 동안 번을 나누어 입방(入防)하고 있으나 노약자로 겨우 충원만 한 것이어서 한가지도 믿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영교(營校)의 자손들 중에 용맹[驍健]한 자 3백 52인을 뽑아서 3개 초(哨)로 나누어 장십부의 중루(中壘)에 소속시켜 이름을 장중위(壯中衛)라 하고, 별장(別將) 1인과 영장(領將) 3인을 두어 통솔토록 하고는 약간의 급료를 계속 지급하고, 군장(軍裝)을 만들어 주어 한 달에 세 번 조련하고, 또 월말에는 총과 창으로 시험하여 그 요과(料科)를 가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료(衣料)에 대한 밑천은 영문(營門)의 경비 중에서 잉여분을 취하고, 또 약간의 재물을 얻어 둔전과 환곡을 설치하였으나, 요식(料食)이 매우 적어서 충분한 대우가 여전히 모자랍니다. 본영의 별무사(別武士)와 타도의 친기위(親騎衛)의 예에 따라 도시(都試)를 설행하도록 윤허하여 주소서.’ 하였습니다. 성부(城府)의 놀고 먹는 무리들을 모집하여 정장(精壯)한 3개 초(哨)를 만들어서 조련함에 각각 법도가 있고 지방(支放)에도 경비를 번거롭게 하지 않으니, 그것이 먼 장래를 생각하고 시초를 계획하는 뜻에 실로 적절합니다. 시행을 허락하시고, 봄과 가을에 별도로 두 번 도시를 설행하여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도록 하여 주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9월 6일 기사

주강하였다.

 

9월 9일 임신

이상황을 홍문관 제학으로, 박종경을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9월 10일 계유

증광 문무과 초시를 설행하였다.

 

9월 11일 갑술

성균관에서 구일제(九日製)를 설행하였다.

 

9월 14일 정축

주강하였다.

 

9월 15일 무인

차대하였다. 영의정                     김재찬이 말하기를,
"영남 유생 김성련(金星鍊) 등이 상소하여 증 도승지                     김영(金坽)의 도학과 절의의 실상을 아뢰고 이어서 가증(加贈)과 시호[易名]를 청하였습니다. 김영은 선정(先正)에게 수업(受業)하고 혼조(昏朝)065)                                              때에 자신을 깨끗이 지켜서 옛 임금을 위하여 절조를 온전히 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하물며 유몽인(柳夢寅)도 증시(贈諡)하였는데, 이미 선조 때에 의기(義起)의 성전(盛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김영이 아직까지 표현(表顯)되지 못하였으니, 의당 많은 선비들이 억울해 하는 것입니다. 증 도승지                     김영에게 정경(正卿)을 특증(特贈)하고 시호에 대한 청도 윤허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김재찬이 말하기를,
"선을 권면(勸勉)하고 악을 징계하는 것은 세도(世道)를 면려(勉礪)하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의주 부윤                     오한원(吳翰源)은 염근(廉謹)하고 융통성이 있어서 군민(軍民)이 모두 복종했으며, 강계 부사(江界府使)                     김계하(金啓河)는 개연(慨然)히 자신이 부담하여 종리(綜理)하고 근면하였으며, 가산 현감(嘉山縣監)                     정주성(鄭周誠)은 강핵(剛核)하게 다스려 성력(誠力)을 다하였으며, 선천 현감(宣川縣監)                     김희(金爔)는 고을을 세운 것이 황무지를 개간한 것이나 다름없고 기민을 구제함에 있어 죽은 자를 살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한 자급씩 특별히 가자 하소서. 전 함종 부사(咸從府使)                     윤욱렬(尹郁烈)은 치적이 칭찬할 만하고 군공이 가장 현저합니다. 싸움에는 문득 앞장섰고, 공은 언제나 우수하였으나 다만 허항(許沆)을 구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세운 공로만큼 상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숙천 부사(肅川府使)                     이유수(李儒秀)는 그 군공을 논하여 이력(履歷)을 허시(許施)하였습니다. 순천 군수(順川郡守)                     오치수(吳致壽)와 개천 군수(价川郡守)                     유상필(柳相弼)은 혹은 전수(戰守)의 공적도 있고 혹은 군량을 운반한 공로도 있으나 다른 죄로 인해서 모두 지금 귀양가 있습니다. 모두 분간(分揀)하여 풀어 주소서. 치적 때문에 계속 그대로 근무케 하였던 바, 요즈음 듣건대 더욱 부지런히 노력한다고 하니, 윤욱렬과 이유수를 아울러 방어사(防禦使)의 이력을 승용(陞用)하여 전례를 뛰어넘어 가상(加賞)하는 뜻을 보여 주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상주(尙州) 전 목사                     이장소(李章紹), 황주(黃州) 전 목사                     홍대연(洪大淵), 황주 목사                     이주헌(李周憲)은 모두 음관(蔭官)의 준직(準職)으로서 또 승서(陞敍)함을 입었습니다. 연석(筵席)에서 아뢰어 가자하는 것이 이미 근례(近例)가 되었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정원성(定原城)에서 싸우다 죽은 장사(將士)에 대해서는 사제(賜祭)하라는 명이 이미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듣건대, 도신(道臣)이 성 한가운데에 비를 세워 공적을 기록하려 한다고 합니다. 비문은 문한(文翰)을 맡은 관원으로 하여금 지어서 내려 보내어 도신이 써서 새기도록 하고, 평양의 민충단(愍忠壇)과 동래의 의사총(義士塚)의 예에 따라 비석 옆에 단을 설치하고 언제나 성을 파괴한 날이 되면 제사를 지내고 뇌주(酹酒)하는 것을 매년 상례로 하되, 도신이 그 일을 주관하고 지방관이 체행(替行)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제문(祭文)은 도신으로 하여금 지어서 영구히 축식(祝式)으로 하고 제수(祭需)는 공곡(公穀)에서 회감(會減)토록 하되, 이런 전말(顚末)을 읍지에 기재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때맞추어 시체를 묻어 주는 것은 인정(仁政)에서 먼저 할 일입니다. 관서의 한 도는 흉년이 들고 염병이 돌거나 난리가 났을 때 굶어죽은 시체들이 길에 쓰러져 낭자하게 널려 있었습니다. 듣건대 본도에서 신칙하여 묻어 주었다고는 하나 연읍(沿邑)이나 벽읍(僻邑)을 막론하고 모든 고을이 일일이 골고루 묻어 주었을 것을 기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각각 해당 수령들로 하여금 직접 두루 살펴서 잘 묻어 주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허항(許沆)이 용맹을 떨치고 죽은 뒤 그 아들을 수록하도록 특별히 명을 내렸었습니다. 그런데 상기(喪紀)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남아 있는 처자들이 심히 곤궁하다고 합니다. 본도로 하여금 별도로 존휼(存恤)하도록 하고 달마다 미포(米包)를 지급하여 나라의 덕의(德意)를 보이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각도의 절미(折米) 2만 석을 호조에서 나누어 주도록 명하였다. 경비가 부족하여 대신(大臣)이 청했던 것이다.

 

9월 16일 기묘

인정전에서 추도기 유생(秋到記儒生)에 대하여 시험하였는데, 강경(講經)에서 수석을 차지한 이제학(李齊學)과 제술(製述)에서 수석을 차지한 이약우(李若愚)를 모두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9월 17일 경진

김희순(金羲淳)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김우순(金愚淳)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9월 19일 임오

우박이 내렸다.

 

효자인 종성(鍾城)의 고 참봉                     한여두(韓汝斗)에게 증직하였다. 예조에서 부수찬                     김후(金𨩿)의 상소에 따라 복계(覆啓)한 것이다.

 

9월 28일 신묘

증광 감시(增廣監試)의 복시(覆試)를 설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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