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17권, 순조 13년 1813년 8월

싸라리리 2025. 6. 25. 09:02
반응형

8월 2일 병신

남공철을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8월 4일 무술

박종래를 판의금부사로, 송전(宋銓)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8월 5일 기해

비가 왔다.

 

박종래를 이조 판서로, 남공철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8월 6일 경자

비가 왔다. 이때 가을 비가 잦으므로 선전관을 나누어 보내 사교(四郊)의 비 온 뒤의 농사 형편을 살펴보도록 하였다.

 

8월 8일 임인

서영보를 좌부빈객으로 삼았다.

 

8월 11일 을사

부수찬                     김후(金𨩿)가 상소하여 북관의 여러 폐단을 아뢰고, 이어서 청하기를,
"평사(評事)가 매년 입북(入北)하여 열 고을 수령들의 치부(治否)를 염찰(廉察)하여 수계(修啓)해서 출척(黜陟)의 기초로 삼고, 북관의 친기위(親騎衛)도 순영(巡營)이나 남곤(南閫)의 예에 따라 별도로 구근(久勤)하는 자리 하나를 설치하소서."
하였다. 또 말하기를,
"경원(慶源)의 전 부사                     신굉(申紘)이 좌죄(坐罪)된 장오(贓汚)라는 추한 이름은, 여론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결같이 억울하다고 하니, 응당 참작하여 용서하는 조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비답을 내려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8월 15일 기유

종묘와 경모궁에 나아가 전배하였다.

 

8월 17일 신해

밀양부(密陽府)의 무너지고 떠내려간 민가 1백 45호에 대하여 특별히 구제하는 조처를 취하도록 명하였다.

 

8월 18일 임자

최신엽(崔信燁)을 고원현(高原縣)에 정배하였다. 처음에 관서의 어사                     이서(李垿)가 서계에 논하기를,
"초산 부사(楚山府使)                     최신엽은 본래 무뢰한 자로 신미년062)                                             ·임신년063)                                             의 난리 때에 강도(强盜)에 들어가서 백성들의 재산을 약탈하였고, 미곶[彌串]의 적을 잡은 것은 그의 부하 기사(騎士)의 공이며, 용골(龍骨)을 수복한 것도 적도들이 도망간 뒤에 있었는데도, 의주의 군교 김취규(金就奎)와 부동(符同)하여 주장(主將)에게 속여 보고하여 공이 없으면서 상을 받았습니다……."
하였으므로, 본도에 조사하게 하였던 바, 도신                     정만석(鄭晩錫)이 급히 계문하기를,
"어사가 열거한 것이 하나도 틀림이 없습니다. 미곶의 적을 잡은 것은 곧 그의 부하 나정록(羅正菉)의 공인 바, 자기가 한 것인 양 한 것은 혹시 이상할 것이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였는데, 의금부에서 논죄한 바에 따라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명한 뒤, 약탈한 죄를 적용한 것이다.

 

8월 20일 갑인

9월 16일에 건릉(健陵)과 현륭원(顯隆園)을 전알(展謁)하려 하자, 영의정 김재찬이, 임금의 병환이 나은 지도 얼마 안되고 무더위가 아직 극성이므로 차자를 올려 친행(親幸)하겠다는 명을 중지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비답하기를,
"선침(仙寢)064)                                             을 배알하지 못한 지가 벌써 여러 해이다. 올해에도 행하지 못한다면 마음에 몹씨 걸리나 전궁(殿宮)에서 간곡히 만류하고 대신의 생각도 이와 같으니 우선 중지하겠다."
하였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정주(定州)의 군공(軍功)이 있는 현인복(玄仁福)은 대군이 출전할 처음에 상중(喪中)에 일어나 나와서 종군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세운 공이 아주 많아서 논공 행상할 때에 선사 첨사(宣沙僉使)에 특별히 제수했었습니다. 그러나 상전(賞典)을 극력 사양하고 상제(喪制)를 마치기를 원하므로 그 원에 따라 직명(職名)을 환수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듣건대 이미 상제를 마쳤다고 하니 6품에 상당하는 실직(實職)으로 자리가 나거든 즉시 수록(收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귀성(龜城)의 군공이 있는 김지환(金志煥)은 송림(松林)과 곽산(郭山)의 전투에서 적의 괴수를 잡아서 바치고, 정주의 승전에도 있는 힘을 다하여 공을 세워 특별히 천마 첨사(天摩僉使)에 제수하였던 것인데, 부임한 지 얼마 안되어 어사의 서계에 들게 되어서 공초를 받았던 바, 본사(本事)는 벗어나게 되었으나 끝내 무고(無故)를 면하지 못하여 벼슬이 떨어지고 말았으니, 조정에서 공로에 보답하는 의리가 아닙니다. 다른 진(鎭)의 첨사의 자리가 나기를 기다려서 차송(差送)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8월 25일 기미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접때 사행(使行)을 수검(搜檢)할 때에 상인의 폐단을 바로잡아 고치는 방안에 대하여 상세히 검토하여 보고하라는 뜻으로 연석(筵席)에서 아뢰어 행회(行會)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해당 감사인 정만석이 보고한 것을 보니, 의주 7진의 진장(鎭將)을 고정적으로 차송(差送)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진장은 영읍의 교열(校列)이 많아서 그 위엄은 만상(灣商)들에 두려움을 보일 만한 것이 못되고, 연경(燕京)으로 가는 짐을 철저히 수검할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도신(道臣)이 말한 것은 단지 목전의 책임에만 힘쓰려는 것이요, 장래에 발생할 폐단은 생각지 않은 것입니다. 의주 부윤이 수검하는 임무를 영구히 관장토록 하는 것을 기록하여 정식으로 삼으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8월 27일 신유

경과(慶科) 증광 감시(增廣監試)의 초시(初試)를 설행하였다.

 

8월 28일 임술

성균관에서 칠석제(七夕製)를 설행하였다.

 

효자인 상주(尙州)의 고 참봉        김직(金), 영흥(永興)의 고 이속(吏屬) 김세만(金世萬), 종성(鍾城)의 고 사인(士人) 주진복(朱鎭福)과, 열녀인 고성(固城)의 고 사인        이덕로(李德老)의 처 박씨, 북청(北靑)의 고 무인(武人) 박필동(朴必東)의 처 이씨, 함흥(咸興)의 고 통덕랑        위건철(魏健喆)의 처 한씨(韓氏)에게는 정려하고, 효자인 덕원(德源)의 고 사인        조윤제(趙允濟)와 문천(文川)의 고 현감        박동준(朴東俊)에게는 증직하고, 효자인 통영(統營)의 장교 염협권(廉協權), 문화(文化) 사람 견몽상(甄夢祥)과 효부인 하동(河東)의 고 사인        정간(鄭間)의 처 박씨와 열녀인 안변(安邊)의 토민 이중빈(李重彬)의 처 한성(韓姓)에게 부역을 면제해 주도록 명하였다. 예조에서 제도(諸道) 어사의 별단을 복계하였던 것이다.

 

8월 29일 계해

양완(梁垸)을 경상좌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