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17권, 순조 14년 1814년 3월

싸라리리 2025. 6. 27.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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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4일 을미

성균관에서 삼일제를 설행하였다.

 

정상우(鄭尙愚)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3월 5일 병신

약원에서 입진하였다. 대신과 각신을 불러 보았다.

 

제주 찰리사(濟州察理使) 이재수(李在秀)가 치계하기를,
"앞서 신이 왕명을 받들고 섬에 들어갔을 때, 하교하심을 따라 80세 이상 노인에게 잔치를 베풀어 대접하고 쌀과 고기 및 수건목(手巾木)을 내렸습니다. 이것은 모두 성세(聖世) 때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과 섬 백성들을 곡진히 구제하는 은혜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번 정의현(旌義縣)에서 잔치를 베풀었을 때는 80세 이상이 1백 30인이었고, 대정현(大靜縣)에서 잔치를 베풀었을 때는 80세 이상이 1백 25인이었으며, 본 제주목에서 잔치를 베풀었을 때는 80세 이상이 4백 5인이었습니다. 잔치 음식은 각자마다 여섯 그릇씩 마련하였고 소미(小米)는 두 말씩 나누어 주었으며 쇠고기는 두 근씩 지급하였는데, 90세 이상자에게는 한 근을 더 주었습니다. 수건목은 석 자씩을 구장(鳩杖)034)  에 매달아 주었습니다. 잔치 비용과 나누어 준 곡물 등은 제주목의 보민고(補民庫)와 호고(戶庫)에 저축되어 있던 무명[木]에서 취용(取用)하였습니다."
하였다.

 

3월 6일 정유

정지지황탕(定志地黃湯)을 정지하고, 삼령백출산(蔘苓白朮散)을 올렸다.

 

3월 7일 무술

이호민(李好敏)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우진(李羽晉)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3월 9일 경자

한용탁(韓用鐸)을 예조 판서로, 박종래(朴宗來)를 좌부빈객으로 삼았다.

 

3월 11일 임인

춘당대에 나아가 합경 정시 문무과(合慶庭試文武科)를 설행하였는데, 문과에는 조기영(趙冀永) 등 20인을 뽑고, 무과에는 권호병(權虎秉) 등 1백 73인을 뽑았다.

 

3월 12일 계묘

봉모당(奉謨堂)에 나아가 전배하였다.

 

박종경을 홍문관 제학으로, 남공철을 우부빈객으로 삼았다.

 

3월 13일 갑진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궐내에 입직한 문관과 음관의 응제(應製)를 행하였다.

 

3월 14일 을사

인정전에 나아가 궐외에 입직한 문관과 음관의 응제와, 입직한 무신의 강(講)을 행하였다.

 

3월 15일 병오

약원에서 입진하였다.

 

식년 감시 복시(式年監試覆試)를 설행하였다.

 

명정전에 나아가 궐내에 입직한 문관과 음관의 응제를 행하였다.

 

3월 16일 정미

인정전에 나아가 정시 문무과의 방방(放榜)을 하였다.

 

김계온(金啓溫)을 전라도 관찰사로 삼았다.

 

3월 17일 무신

영화당(映花堂)에 나아가 문무과 신은(新恩)의 사은(謝恩)을 받았다.

 

명정전에 나아가 궐내에 입직한 문관과 음관의 응제를 행하였다.

 

3월 19일 경술

김희순(金羲淳)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권상신(權常愼)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3월 20일 신해

약원에서 입진하였다. 차대(次對)하였다. 영의정 김재찬이 아뢰기를,
"관서의 도신이 장계하기를, ‘도내의 군포에 대하여 계유년 조로 권감(權減)한 것이, 감영은 1만 9천 1백 냥 영(零)이고, 병영은 2만 1천 2백 냥 영이며, 각 고을은 2만 9천 8백 냥 영입니다. 감영은 회록(會錄)·별비(別備)·배삭(排朔) 등에 쓰일 것은 비록 줄었지만 공용(公用)과 지방(支放)에는 모두 부족이 없고, 병영은 공용과 지방을 충분히 꾸려갈 수 있으며, 배삭에 대해서는 이미 본영의 별비조(別備條) 6천 냥으로 충액하려고 청하여 첨보(添補)하였으니, 역시 이것으로 배비(排比)할 수 있습니다. 각 고을은 민고(民庫)와 관름(官廩)이 줄어들기는 하지만, 경사(京司)에 예납(例納)하는 본영의 복정(卜定)035)  을 이미 권감하였으니, 자체의 용도는 꾸려갈 것입니다. 다만 광량(廣梁)·노강(老江)·선사(宣沙) 3진의 수포(收布)가 줄어드는 것이 9백여 냥이므로 이에 대해서는 절반 정도를 편의에 따라 대신 지급하여 준다면 거의 폐단이 없이 분배할 수 있겠습니다.’ 하였습니다. 본도의 군총(軍摠)이 유포(有布)와 무포(無布)를 막론하고 원액(原額)이 이에 줄어들어서 허오(虛伍)가 많다는 것은 도신의 장계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조정에서 이미 익히 알고 있는 일입니다. 만약 복총(復摠)되기 전에 응봉(應捧)하는 수효를 꼭 채우려 한다면 남은 백성들마저 모조리 흩어져서 원총(原摠)이 점차 줄어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관과 민이 모두 다 보전할 수 없게 될 것이니, 형편상 우선 허록(虛錄)의 수효를 줄여 주어서 실제 수효대로 받아들이는 방도를 강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뒤 한두 해 동안에 차츰 모여들기를 기다려서 구총(舊摠)을 다시 복구한다면, 몇 해 동안만 우선 줄여 주는 것이 될 것입니다. 금년에 1분을 복구하고 명년에 1분을 복구하고 한다면 여러 해가 안 가서 저절로 복구될 것입니다. 청컨대 장청(狀請)한 대로 윤허하여 시행토록 하고, 이어서 전결의 진전(陳田)과 기전(起田)은 수계(修啓)하는 예에 따라, 매년 세초(歲初)에 다시 모여든 유민이 얼마이고, 어떤 종류의 공납의 복총이 얼마라는 식으로 일일이 열록(列錄)하여 계문(啓聞)토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시강원에서 아뢰기를,
"왕세자의 서연에서 《천자문》의 강의를 마친 다음 이어서 강의할 책자에 대하여 사부와 빈객에게 문의하였던 바, 모두들 《효경(孝經)》·《소학(小學)》·《동몽선습(童蒙先習)》 등의 책 중에서 진강(進講)하여야 한다고 아뢰었습니다."
하자, 《효경》을 이어서 강의하라고 명하였다.

 

3월 22일 계축

규장각에서 정종 대왕 어제 《홍재전서(弘齋全書)》 1백 책과 《경모궁예제(景慕宮睿製)》 3책을 각 30건 씩 인쇄하여 올렸다. 하교하기를,
"선조의 어제를 봉모당(奉謨堂)·주합루(宙合樓)·망묘루(望廟樓)·화녕전(華寧殿)·문헌각(文獻閣)·다섯 곳의 사고 외에, 규장각 내각·옥당·춘방에 각각 1건 씩 봉장(奉藏)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경모궁예제》도 봉모당·주합루·망묘루·화녕전·문헌각 다섯 곳의 사고 외에 규장각 내각·옥당·춘방에 각 1건 씩 봉장하라."
하고, 이어서 교정·감인한 각신(閣臣) 이하를 차등 있게 시상하라고 명하였다.

 

3월 23일 갑인

전라 감사 김계온(金啓溫)이 소를 올리기를,
"숙부 김명진(金明鎭)이 지금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있으니, 신이 만약 부임한다면 당연히 바뀌어야 하기 때문에 사적인 의리로 보아 편안치 않습니다."
하고는 바꾸어줄 것을 청하자, 비답하기를,
"나주 목사는 다른 도와 바꿀 터이니 경은 사퇴하지 말라."
하였다.

 

3월 26일 정사

삼령백출산(蔘苓白朮散)을 정지하고, 가미삼신탕(加味三神湯)을 올렸다.

 

3월 27일 무오

인정전에 나아가 생진시(生進試)의 방방(放榜)을 하였다. 회방(回榜) 【과거에 급제하여 만 60년이 되는 해.】 한 노인 한대유(韓大裕)를 불러 보고 풍악을 내렸다.

 

3월 28일 기미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생진시 입격자(入格者)의 사은을 받았다.

 

3월 29일 경신

김이교(金履喬)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보천(李普天)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3월 30일 신유

약원에서 입진하였다. 대신과 각신을 불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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