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33권, 순조 33년 1833년 1월

싸라리리 2025. 7. 18.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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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계유

권농(勸農)의 윤음(綸音)을 내리기를,
"팔도(八道)와 사도(四都)001)                  의 방백(方伯)002)                  ·수신(守臣)003)                  과 수재(守宰)004)                  와 백성들은 나의 가르침을 똑똑히 들으라. 아! 작년의 민사(民事)는 더 어찌 말하겠는가? 내가 부덕하여 능히 천심(天心)을 누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위벌(威罰)을 내렸는데도 내몸에는 간여되지 않고 아무 죄도 없는 너희들에게 도리어 걸리게 하였다. 세 도(道)에 흉년이 들어 경기(京畿)가 더욱 혹심하였는데, 가을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신음하는 소리가 계속되어 끊이지 않았다. 만약 춘궁(春窮)005)                  이 닥치게 되면 백성들이 다 쓰러질 것이니, 내가 이것을 두려워하여 침식(寢食)이 편안하지 않다. 진대(賑貸)006)                  하는 의논과 견탕(蠲蕩)007)                  하는 정사를 비록 극진하게 하지 않음이 없었다 하여도 몇 만명이 넘는 백성들에게는 한 잔의 물과 수레에 실은 땔나무와 거의 한가지이니, 어찌하겠는가?
다행히 열읍(列邑)의 여러 사람들이 의연재(義捐財)를 내어서 미봉척으로나마 꾸려나가 눈앞의 위급한 일을 펴게 하였으니, 여러 사람들에 있어서는 진실로 가상히 여길 일이나 조정으로서는 실로 부득이한 일이었다. 진실로 나라에서 예비한 것이 있었다면 어찌 이와 같이 구차하고 어려움을 용납하였겠는가? 생각하면 몹시 슬프고 말하자니 부끄럽다. 아! 나라는 백성에게 의지하고 백성은 먹는 것에 의지하는데, 먹는 것의 근본은 농사에 있다. 수재(水災)와 한재(旱災)는 비록 하늘에 관계된다고 하지만 부지런하고 게으른 구별은 오로지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만약 전답에 나아가 힘써 일하고 사람으로서 하여야 할 일을 닦지 않고서 한번 재앙을 만나면 갑자기 하늘에다 전가하니, 천심도 또한 어찌 달갑게 여겨 편안함을 내려 주며, 곡식이 잘 결실을 맺게 하겠는가? 이제 봄철의 따뜻한 볕이 감돌아 농사를 시작할 때인데, 세 도의 참혹한 흉년의 여파로 굶주리고 헐벗어 거의 죽게 된 백성들이 앞으로 어떻게 실농(失農)의 근심을 면할 수 있겠는가? 비록 초실(稍實)하다는 곳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식량을 실어나르는 데 피폐하고 조세를 거두는 데 고달프며, 시장의 곡식 값이 뛰어올라 공사(公私)가 다 고갈되었는데 떠돌아다니는 민호들을 먹이느라고 주인과 손이 모두 병들었으니, 농민의 재력(財力)이 두루 넉넉지 못한 것도 또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이다. 올가을에 거둘 일도 뜻이 잡히지 않으니, 염려되는 것이 지금의 황급한 마음보다 더 심하다.
감사와 수령이 된 자는 진실로 정성을 다하여 농사철을 권장하고 양식을 주어서 부족한 것을 보태어 주고, 소를 빌려 주어서 그 힘을 돕게 하며, 군사를 점고하여서 못과 방죽을 수축하고, 들판을 순시하여서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즐겁게 일하여 공효를 이루며, 농사일을 어기지 않게 한다면, 모두가 권농하는 뜻을 알게 되고 풍년을 바랄 수 있을 것이다. 백성의 생명을 사지에서 다시 살리는 것도 진실로 여기에 있고, 나라의 계책이 위태로운 경지에서 안정되게 함도 또한 오직 여기에 있으니, 오늘의 걱정되는 모든 일 가운데에 무엇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겠는가? 이에 아픔과 두려운 생각을 가지고 마음을 털어놓고 유시하는 것이니, 여느 해의 정례적으로 행하는 칙유로 여기지 말고, 각각 진실한 마음으로 봉행(奉行)하여 나의 소한(宵旰)008)                  의 소망에 부응하게 하라."
하였다.

 

노인(老人)들에게 별세찬(別歲饌)을 내리고, 이어서 위문하게 하였으니, 연례(年例)인 것이다.

 

1월 2일 갑술

응당 가자(加資)할 노인(老人)에게 하비(下批)009)  하였으니, 1백 세 된 이가 90인이었다.

 

1월 6일 무인

홍희필(洪羲弼)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월 7일 기묘

경기 감사 정기선(鄭基善)이 아뢰어 나라에서 진휼할 고을의 대동 결전(大同結錢)과 급히 구원해야 할 고을의 결전(結錢)010)  은 모두 추수때를 기다려서 수납하기를 청하였는데, 비국(備局)에서 정식 공납은 사체(事體)가 엄중한 것이라 하여 복계(覆啓)에서 허락하기를 꺼려하니, 하교하기를,
"경기 감사의 소사(疏辭)를 묘당(廟堂)011)  에서 복계(覆啓)하여 정침하기를 청한 것은 사체가 당연하다. 하지만 올해 경기(京畿) 안의 백성들의 실정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특별히 청한 대로 시행토록 허락한다."
하였다.

 

숭정전(崇政殿)의 월대(月臺)에 나아가 사직 기곡 대제(社稷祈穀大祭)에 쓸 향과 축문을 전하였다.

 

1월 11일 계미

반궁(泮宮)012)                  에서 인일제(人日製)013)                  를 베풀었다.

 

여러 도의 춘조(春操)014)  를 정지하였으니, 진휼하는 정사가 바야흐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1월 15일 정해

광주 유수(廣州留守) 박기수(朴綺壽)가 치계(馳啓)하여 이르기를,
"헌릉(獻陵)015)   경내의 수목을 함부로 베는 폐단이 있으니, 신이 몸소 가서 살펴보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능침(陵寢) 경내의 수목을 이와 같이 함부로 베어낸다는 것은 매우 놀랍고 송구스러운 일이니, 어찌 능관(陵官)들이 수직(守直)하는 뜻이 있다고 하겠는가? 살펴보고 장계하기를 기다려 마땅히 처분하겠다. 다른 능에도 또한 이러한 근심이 없다고 보장하기 어려우니, 경내의 두 능을 다같이 살펴보고 장계하게 하라."
하였다. 박기수가 달려가서 두루 살펴보니, 새로이 베낸 나무 뿌리가 소나무·회나무·잡목(雜木)을 합하여 2천 1백 24주(株)나 된다고 아뢰니, 능관을 해부(該府)에 잡아다 신문하고, 베어낸 능에 딸린 하인들은 엄하게 핵실하여 죄상을 감안하여 처단하라고 명하였다. 의금부에서 조율(照律)하여 능관 임백수(任百秀)·김태현(金台鉉)을 모두 귀양 보내었다.

 

조병구(趙秉龜)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경중의 각사(各司)와 각영(各營)에서 임진년016)  의 회계부(會計簿)를 올리었다. 【시재(時在)는 황금(黃金)이 1백 80냥 영(零), 은(銀)이 35만 2천 4백 20냥 영, 돈[錢]이 88만 9천 1백 80냥 영, 면주(綿紬)가 1백 54동(同), 면포(綿布)가 2천 2백 98동 영, 저포(苧布)가 88동, 마포(麻布)가 1천 23동 영, 쌀이 20만 5천 7백 90석(石) 영, 전미(田米)가 4만 7천 7백 70석 영, 황두(黃豆)가 2만 3백 20석 영, 피잡곡(皮雜穀)이 3만 1천 5백 90석 영이었다.】


【태백산사고본】 33책 33권 1장 B면【국편영인본】 48책 389면
【분류】재정-국용(國用)


[註 016] 임진년 : 1832 순조 32년.

 

1월 17일 기축

태묘(太廟)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이어서 창덕궁(昌德宮) 선원전(璿源殿)과 경우궁(景祐宮)에 나아가 전배하였다.

 

1월 18일 경인

김성연(金盛淵)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1월 19일 신묘

차대(次對)하였다. 영의정 남공철(南公轍)이 아뢰기를,
"오늘의 국사(國事)는 흥발(興發)할 기반(基盤)이 없어서 안일함을 즐기는 데 점점 익숙하며, 격려하고 권장하는 방도가 없으니, 태만한 버릇이 더욱 고질이 되었습니다. 시험삼아 지금의 일을 가지고 말씀드린다면 서울과 경기 안에 민심의 소동(騷動)은 기묘년과 갑술년의 흉년 때보다 더 심하니, 이렇게 된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저들은 지극히 어리석으나 신통한 자들이니, 모두 나라에 저축한 것이 없고, 어진 정사를 하는 관리가 없어서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전부터 호조[度支]의 수입이 1년의 지출을 감당할 수 없을 경우에는 선혜청과 각 영문(營門)에서 넉넉히 취하였지만, 지금은 선혜청과 각 영문도 오히려 자급(自給)하지 못하는 것을 근심합니다. 무릇 재물을 다스리는 도리는 개방하고 저축하며 절약하는 것입니다. 이미 개방할 수 없게 되었다면 마땅히 저축하고 절약하여야 하거늘, 여러 해를 두고 전례를 그대로 좇아, 드디어 확연한 효험이 없는 것입니다. 《주역》에 이르기를, ‘절약으로 제도를 삼으면 재물을 상하지 않고 백성을 해롭히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절약으로써 제도를 삼지 않으면 사치함이 재물을 상하고 백성을 해롭힌다는 것입니다. 지금 주군(州郡)의 수령들은 기묘년과 갑신년에 비교하여 그 사이가 그다지 멀지는 않으나, 재능은 역시 아래로 떨어지는 자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말하기를, ‘지금 세상에는 크게 탐욕스럽고 크게 포학한 사람이 없다.’고 하는데, 이 말은 그럴 듯하지만, 만약 어진 정사를 펴는 수령은 적고 백성의 재물을 수탈(收奪)하는 자가 많다고 하여도 또 심한 의논은 아닐 것입니다. 이후에는 암행 어사를 보내어 살펴보면 저절로 그 진휼하는 정사의 잘하고 잘하지 못한 것과, 출척(黜陟)을 명확히 하고 명확히 하지 못한 것을 증험하겠지마는, 오히려 제일 정사를 잘하는 사람을 특례로 탁용(擢用)하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그런 뒤에야 어진 자는 변하지 않게 되고 불초한 자는 더욱 면려하게 되어 백성들이 혜택을 받는 것이 자연히 오래가고 또 영원할 것입니다.
대저 흉년을 구휼하려면 마땅히 재용(財用)을 절약하고 어진 관리를 얻는 두 가지를 먼저 할 일이며 요긴한 방도가 되옵니다. 그런데 그윽이 보건대, 전하께서 비록 백성을 금심하는 성덕은 있지마는 실지의 혜택이 끝내 밑에까지 미치지 못하는 것은, 격려하여 권장하고 일으키는 것이 부족하여 안일하고 태만한 버릇이 여기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신이 늘 전대의 사서(史書)를 읽었는데, 송나라가 남쪽으로 〈장강(長江)을〉 건너간 뒤로부터 여러 신하들이 나라를 회복할 계책은 없이 낮은 말과 느즈러진 말로써 서로 미루면서 아무 일이 없는 것과 같이 여기고 편안하게 지냈습니다. 명나라 만력(萬曆) 때에는 상하가 응대하는 도리는 잠잠히 침묵만 지키고 접견(接見)이 드물었으며, 일을 만나면 세월만 천연(遷延)시키면서 날마다 각부(閣府)017)  에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의논하는 일이 지극히 난처하게 되면 문득 파하고 흩어지면서 하는 말이 다시 의논할 때까지 기다리자 하고는 얼마 있다가 다시 그러하였습니다. 혹시 마땅히 개혁하여야 한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문득 일을 만들어낸다고 중지하였습니다. 신이 오늘을 보면 그 때와 같지 않은 것이 거의 드뭅니다. 이것은 모두 신들의 죄인데, 또한 어찌 우리 임금의 잘못된 것을 책난(責難)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진달한 것이 절실하며, 오늘날 병폐의 근원을 깊이 적중(適中)하였다. 이는 바로 상하가 서로 힘써야 할 때이니, 감히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권장하고 징계하는 방도에 대해서는 전조(銓曹)로 하여금 자세히 알아서 나의 뜻을 선양(宣揚)하도록 하라."
하였다. 남공철이 또 진주성(晉州城)이 함락된 구갑(舊甲)이 또다시 돌아왔다고 하여, 순절한 여러 신하들에게 작년의 노량(露梁) 등지의 예에 의하여 단(壇)을 설치하여 제사를 지내주고, 김해(金海)의 표충사(表忠祠)에도 한결같이 제사를 내리기를 계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조 판서 이지연(李止淵)이 계언하기를,
"이번에 진휼하는 재물을 보태준 데에 대해 시상(施賞)하신 것은 모두 정상적인 격례(格例)에서 나왔고, 그 소원대로 곡진하게 부응하는 것은 대개 격려하고 권장하는 방도와 영(令)을 믿게 하는 도리 때문이었습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수령의 임무는 백성을 다스리는 데 그 책임이 있으니, 중군(中軍)이나 변장(邊將)에 비할 것이 아닙니다. 한 관직에 오래 근무시켜 시험을 해보지 않고 경솔하게 수령을 제수함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또 지나간 전례를 상고하여도 근거할 만한 것이 드무니, 말류(末流)의 폐단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미 승전(承傳)을 받은 자는 진실로 마땅히 빈자리가 나는 대로 시행하여야 하겠지만, 이 뒤로는 좀더 구별하여서 관방(官方)018)  을 엄하게 함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각 도의 제언(堤堰)을 엄중히 신칙하여 수축하라고 명하였으니, 제언 당상(堤堰堂上) 조인영(趙寅永)의 계청을 따름이었다.

 

경성(京城)에 있는 거지들에게 노자를 주어 원적지 고을에 돌려보내고 굶주리는 인구를 추가하여 등록하라고 명하였으니, 비국의 계청을 따름이었다.

 

1월 22일 갑오

이완식(李完植)을 삼도 통제사로 삼았다.

 

1월 23일 을미

홍석주(洪奭周)를 좌부빈객으로, 김학순(金學淳)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삼았다.

 

1월 25일 정유

김홍근(金弘根)을 이조 참판으로, 엄도(嚴燾)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월 28일 경자

이광문(李光文)을 우부빈객(右副賓客)으로, 이승권(李升權)을 황해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1월 29일 신축

약원(藥院)019)                  의 여러 신하들을 소견(召見)하였다. 제조(提調)        조만영(趙萬永)이 계언하기를,
"본원에서는 삼정(蔘政)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강원도 공삼(貢蔘)에 온갖 거짓이 점점 더해지고 있는데, 지난번의 간사한 무리에 이르러서는 더욱 극심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로지 공용(公用)의 본 물건의 근수를 줄여서 내다 파는 길을 열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본 물건에 응당 근수를 덜어줄 4근과 공용의 1근과 납약(臘藥)020)                  에 쓸 삼(蔘) 2근을 합한 7근을 서울의 공납인들이 값을 받는 예에 따라 돈으로 대납하되 봄과 가을로 나누어 직접 본원에 납부하게 하여 의관(醫官)과 원역(員役) 들의 생활 밑천으로 삼게 할 것입니다. 그 밖에 각양의 예에 따라 내주는 것은 다 서울의 공납인들이 가져다 쓰고 다시는 본 물건을 올리고 내리지 말게 함으로써 엄격히 지켜나가는 방도로 할 것입니다. 그리고 7근의 수량을 줄였으면 가을과 납일(臘日) 두 번에 나누어 바칠 필요는 없을 것이니. 이로써 일체의 정식(定式)을 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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