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27권, 정조 13년 1789년 4월

싸라리리 2025. 8. 2.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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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정해

소대하였다. 분 병조 참지 박효삼(朴孝參)이 상소하기를,
"지방 고을에서는 대체로 환곡(還穀)이 백성들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마는 그 중에서도 가장 심한 곳이 거창(居昌)·함양(咸陽)·산청(山淸)·안의(安義)·삼가(三嘉)입니다. 이 다섯 고을은 각각 곡식의 총수가 거의 10만 석에 이르지만, 세 영(營)의 곡식이 절반을 차지하고 또 빈 쭉정이가 3분의 2나 됩니다. 받아들인 실곡(實穀)은 모두 아전들의 절취와 농간으로 들어가고, 이 밖에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곡식은 순전히 빈 쭉정이이므로 백성들 중에는 아예 버리고 빈손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빈 쭉정이만 있는 벼 한 섬의 값이 6, 7푼전[分錢]에 불과하기 때문에 관원과 아전들이 앞다투어 사서 그대로 창고에 쌓아두었다가 가을이 되어 환곡을 받아들일 때에 미쳐서는 전에 사서 쌓아두었던 빈 쭉정이들을 이미 받아들인 것으로 문서에 올리고서, 새로이 받아들일 실곡은 돈으로 대신 받아들입니다.
환곡을 받아들일 때면 한 말의 곡식도 마련하기 어려운 실정인데도 장차(將差)들이 마을들을 두루 수색하기 때문에 쌀독이 이미 바닥이 나서 추위와 굶주림에 신음하는 남녀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계속되고, 부자·형제 같은 지친(至親) 사이에도 은정(恩情)이 상하고 한 마을의 친족 사이에도 원한이 쌓이기까지 하였으니, 이 모두가 조적(糶糴)의 소치입니다. 그리고 근년 이래로 본 고을들로 하여금 작전(作錢)해서 곡식이 적은 연해(沿海)의 고을들로 보내도록 하고 있는데, 빈 쭉정이여서 시장에 내다 팔 수가 없기 때문에 경내의 형편이 조금 넉넉한 자들을 골라내어 혹은 1백 석, 혹은 5, 60석씩 배당시켜 한 섬에 1냥으로 값을 정해서 엄하게 독려하여 강제로 받아내고 있습니다. 돈이 귀한 이때를 당하여 배정된 돈을 다 바칠 방법이 없기 때문에 더러는 마소를 팔기도 하고 더러는 전장(田庄)을 팔기도 하므로 점차 가산(家産)이 탕진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로써 볼 것 같으면 빈부를 막론하고 함께 그 재앙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이 폐해를 영원히 제거하고자 한다면 빈 쭉정이 3석을 실곡 1석으로 환산해서 가을에 받아들일 때에 미쳐 곧바로 정밀하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이 양이 비록 4, 5만 석에 불과하지만 백성들의 고통을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고나서 또 곡식의 총수(摠數)를 정하되 큰 고을에는 8만 석, 중간 고을에는 5만 석, 작은 고을에는 3만 석으로 하소서. 원회 부곡(元會付穀)으로 말하면 절반을 환곡으로 나누어주고 절반은 창고에 보관해 두는 것이니 감영의 곡식에 비해 갑절이나 더 많습니다. 감영의 곡식은 원래 다 나누어주는 것이므로 고을마다에 감영곡을 1만 석씩으로 한정하면 71고을에서 받아들이는 모곡(耗穀)이 7만 1천 석이 될 것이니 이는 매우 풍부한 양입니다. 병사영(兵使營)과 통제사영(統制使營)의 곡식도 알맞게 헤아려 한정하되, 매 고을마다 4, 5천 석씩을 두면 충분할 것입니다.
이렇게 제도를 정한 뒤에 원회 부곡의 모곡은 봄을 기다려 작전(作錢)해서 호조에 바쳐 경비에 보충하고, 세 영의 곡식에서 나온 모곡은 당해 영으로 보내어 용도에 따라 쓰게 하소서. 그리고 모곡을 작전하는 데는 산읍(山邑)이나 연읍(沿邑)을 막론하고 통틀어 발매(發賣)하게 하고, 편벽되이 남겨 두는 곳이 있어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게 하소서. 그렇게 한다면 이런 태평한 세상을 만나 어찌 이리저리 떠도는 백성이 있겠습니까."
하고, 이어 거창 부사 원택진(元宅鎭)과 전 함양 부사 이득준(李得駿)의 탐혹(貪酷)한 정상을 논하고, 또 각 고을의 아전들을 액수(額數)를 정하여 정선(精選)할 것을 언급하였다. 비답하기를,
"오늘날의 급한 일로는 백성들을 안정시켜 보호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으니, 진실로 안정시켜 보호하고자 하면 먼저 탐관(貪官)을 징계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대체로 관리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아 청렴하다는 명성이 들리지 않으니, 이것이 내가 항상 매우 개탄스럽게 여기는 바이다. 이러한 즈음에 너의 상소를 보았다. 거창 부사 원택진과 전 함양 부사 이득준의 일이 과연 너의 말대로라면 팽아(烹阿)의 형전(刑典)011)  을 이런 무리에게 시행하지 않고 어디에다 쓰겠는가.
그래서 도백(道伯)과 그 당시의 어사(御史)를 불러 물어 보았더니 모두 도리어 ‘법을 두려워하고 진휼(賑恤)을 잘하여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있다.’고 말하였다. 이에 두 말이 모순됨을 면치 못하니 밝게 사실을 조사해서 죄를 처단하지 않을 수 없다. 원택진과 이득준은 우선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다가 반복해 엄히 신문하여 기어이 실토를 받도록 하겠다. 그리고 당시의 도백으로 하여금 규례에 상관말고 자세히 조사해서 장계로 아뢰게 하되, 만약 소루함이 있을 때에는 다시 따로 어사를 보내어 조사시킬 것이다. 진술한 곡식의 총수와 아전의 정원에 대한 일은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해 처리하게 하겠다. 너는 소원한 사람으로서 이렇게 상소하는 일을 하였으니 그 마음이 가상하다."
하였다.

 

4월 2일 무자

차대하였다.

 

조원진(曺遠振)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팔도의 유생(儒生) 심익현(沈翼賢) 등이 상소하여 문정공(文靖公) 김인후(金麟厚)를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내가 문정공에 대해서 크게 느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조정의 신하들이 다 함께 아는 바이다. 그러나 종향(從享)은 중대한 전례(典禮)이니, 결코 가벼이 의논하기 어렵다."
하였다.

 

조심태(趙心泰)를 좌포도 대장으로, 이한풍(李漢豊)을 우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4월 3일 기축

경모궁에 전배(展拜)하였다.

 

소대하였다.

 

4월 5일 신묘

소대하였다.

 

김광묵(金光默)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4월 6일 임진

영우원(永祐園)에 가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상언(上言)한 19건에 대해 판하(判下)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광주(光州)에 사는 유학(幼學) 김치옥(金致玉)이 상언하기를 ‘6대 방조(傍祖)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에게 시호가 내리고 제사가 내림으로 인하여 다시 신주(神主)를 만들어서 예를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만든 신주를 이내 매안(埋安)하는 것은 인정으로 보나 예로 보나 박절함이 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에 없는 일이라서 조정에서 지휘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묵살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예제(禮制)에는 경도(經道)도 있고 권도(權道)도 있다. 전례를 참고하면 성삼문(成三問)과 김천일(金千鎰) 등의 일이 혹 의거할 만한 단서가 될 것이다. 이미 만들었다가 이내 매안하는 것도 변례(變禮)에 속한다. 사손(嗣孫)이 없는 경우에 주제자(主祭者)를 정하여 주는 것은 일찍이 그런 예가 많았다. 특별히 그 문중(門中)으로 하여금 따로 제사를 주관할 사람을 정해서 향화(香火)가 끊이지 않게 하라."
하였다.

 

4월 7일 계사

차대하였다. 예조 판서 이재간(李在簡)이 아뢰기를,
"삼가 《상례보편(喪禮補編)》을 상고하건대, 고동련제(告動輦祭)에는 단헌(單獻)하고 이안제(移安祭)에는 삼헌(三獻)한다고 하였는데, 이번 문희묘(文禧廟)의 고동련제 때에도 마땅히 《보편》을 따라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친림(親臨)하기로 하였으니 삼헌해야 할 것이고 폐백도 있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의강(李義綱)을 전라도 관찰사로, 엄사만(嚴思晩)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4월 9일 을미

소대하였다.

 

좌의정 이성원이 상차하기를,
"신이 어제 듣건대, 영건청(營建廳)의 도청(都廳) 김이성(金履成)이, 신이 호남 도백을 천의(薦擬)한 일을 가지고 공당(公堂)에 회좌(會坐)한 좌중에서 큰소리로 헐뜯으면서 한 도감(都監)에서 행공(行公)하고 싶지 않다고까지 하였다 합니다. 신이 이 사람을 천거한 것은 지위나 재지(才智)를 기준으로 한 것으로서 흉역(凶逆)의 친사돈이라 해서 벼슬길을 막는 예가 원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이 연약한 탓으로 한 낭관에게 곤욕을 당해 조정의 체통을 무너뜨리고 손상시킨 것이 이에 이르렀으니, 속히 견책을 내려 주소서."
하였다. 이성, 이의강(李義綱)은 바로 조시위(趙時偉)의 친사돈인데도 호남 도백으로 보낸다 하여 묘당을 침범하는 말을 하였기 때문에 성원이 상차해 자인(自引)한 것이다. 비답하기를,
"조정에서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서는 이런 일에 구애되지 않으니, 호남 도백으로 천의한 경의 뜻도 아마 여기에서 나왔을 것이다. 도청의 일은 크게 경솔하였으니 체례(體例)로 헤아려 볼 때 그 허물을 처벌하는 것이 마땅하다. 경은 안심하고 일을 보기 바란다."
하고, 김이성을 파직시키고, 형조 참의 이의강은 그대로 유임시키고, 호남 도백으로 대신 보낼 사람을 다시 천거해 의망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이성원이 사사로운 의리로 볼 때 안심하기 어려워 천망(薦望)할 수 없다고 상소하니, 비답하기를,
"무엇 때문에 이처럼 지나치게 불평스러움을 보이는가. 경은 안심하고 의천하여서 중무(重務)가 오래도록 폐해지지 않도록 하라."
하고, 전교하기를,
"전 도청 김이성의 거조가 조정의 체통을 훼손한 것은 진실로 좌상이 차자에서 말한 대로이다. 이 때문에 정목(政目)을 묻기 전에 먼저 견책해 파직하는 전형을 시행하였으므로 나는 일이 이미 끝나고 죄도 이미 처벌된 것으로 잘못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좌상의 두 번째 차자가 올라오고 전당(銓堂)이 추천할 사람을 묻기 위해 갔다가 재차 빈손으로 돌아온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처분이 너무 헐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정의 체통이 이로 인해 더욱 훼손되어 대신이 나오기 어려워하고 불안해 하는 일이 있게 하였으니, 내가 대신을 공경하는 도리에 어두운 것이 이러하다. 이에 밤새도록 부끄러워하고 탄식하다가 아침이 되기를 기다려 입으로 이 전교를 불러 받아쓰게 하는 것이다. 지금 일을 끝내려면 이성에게 가율(加律)하여 좌상이 나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만한 것이 없으니 이성에게 삭직(削職)의 전형을 더 시행하여 훼손된 조정의 체통이 정리될 수 있게 하라."
하였다.

 

윤행원(尹行元)을 전라도 관찰사로, 서용보(徐龍輔)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정언 강문회(姜文會)가 상소하기를,
"평안 병사 조규진(趙圭鎭)과 부안 현감(扶安縣監) 이우진(李羽晋)이 대간의 탄핵을 만났을 적에 전하께서 조화(造化)의 권능(權能)을 다하시어 강제로 일을 덮어두게 하심으로써 한 번 펴질 수 있었던 의리가 끝내 이루어질 수 없게 하셨습니다. 대간의 탄핵이 긴박했건 느슨했건 또는 관직이 내직이건 외직이건을 막론하고 한 번이라도 대간의 탄핵을 입은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감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지 못하는 것은 염치상 부득이하기 때문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조규진에게 맡긴 평안 병사와 이우진에게 맡긴 부안 현감 자리를 아울러 체직해 바꾸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의 도학과 매운 절개는 실로 백대(百代)가 우러러 보는 바이고 열성조(列聖朝)가 숭앙해 표창한 바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적자(嫡子)가 없어서 첫째 서자(庶子)로 승적(承嫡)시켜서 제사를 받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수백 년 뒤에 자손들 사이에서 변란이 일어나서 끝내 종통(宗統)이 지서파(支庶派)로 옮겨가기에 이르렀습니다. 연전에 한 대신(臺臣)이 이 일을 장소(章疏) 사이에 거론하자, 대신과 의논하여 품처하라는 명까지 계셨는데도 아직까지 거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다시 대신들에게 물으시어 빨리 종파와 지파를 정상으로 되돌림으로써 다툴 수 있는 꼬투리를 영원히 막게 하소서.
고 통제사 조이중(趙爾重)이 평안 병사로 있을 때의 일로 고 병사 백시구(白時耉)·이상집(李尙)과 함께 죄를 받았다가 을사년에 이르러 함께 신원(伸冤)되었고, 그 아들 학생(學生) 조흡(趙洽)도 증 집의(執義) 서덕수(徐德修)와 함께 형벌을 받다가 죽었는데 역시 동시에 신원되었습니다. 대신에게 물으시고 그 사적(事蹟)을 상고하시어 조이중에게도 한결같이 백시구·이상집의 예에 따라 증시(贈諡)하시고, 그 아들 조흡에게도 서덕수의 예에 따라 포장(褒章)하여 증직(贈職)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첫머리에 진술한 일로 말하면 내가 어찌 한 아장(亞將)과 한 종신(從臣)을 위해 법을 굽혀가며 비호한 것이겠는가. 통렬히 개혁하고 엄하게 금하고자 하는 것이 당사(黨私)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무슨 큰일이라고 이처럼 단호히 구는가. 무신(武臣)이 처신하는 의리는 본래 크게 다르기 때문에 행견(行遣)과 같이 본다는 뜻으로 특별히 전교를 내렸었다. 너의 말은 남의 결점을 찾아내는 데 가까우니 자못 타당하지 않다.
조 문열공(趙文烈公)의 가계(家系)에 대해 품처하라는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겠다. 고 통제사 조이중 부자의 일도 해조로 하여금 대신에게 물어 품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문회가 인피(引避)하여 체직시켜줄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너처럼 일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을 오래 언지(言地)에 두는 것은 관원의 잘못을 바로잡는 데는 도움이 없고 한갓 동료끼리 서로 협심 협력하는 정사만을 어지럽힐 뿐이니, 아뢴 대로 하겠다."
하였다.

 

4월 11일 정유

교리 오정원(吳鼎源)이 김이성을 변호하는 소를 올렸는데, 아직 등철(登徹)되기 전에 상이 승지가 아뢴 말을 듣고 전교하기를,
"고질적인 풍속이 바로 임금의 의중을 엿보아 더듬는 데 있다. 아까 연석(筵席)에서 이른 ‘그림자를 살핀다.’는 분부가 불행하게도 들어맞았다. 이런 폐단이 있을 것이 염려되어 바야흐로 전교를 써서 내리려 하였는데 과연 오정원이란 자가 한 장의 소를 올렸다 하니, 세상 일에는 없는 일이 없다고 하겠다. 속담에 솥 밑이 가마솥 밑을 비웃는다 하였으니 이 말은 바로 정원을 위해 준비된 말이다. 가령 참으로 변호할 마음이 있었다면 어제나 그제 그끄제 좌상의 일이 뒤얽히기 전에는 무엇 때문에 팔짱만 끼고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가 사세가 점차 기우는 것을 보고는 이렇게 틈을 노려 파고드는 짓을 한단 말인가. 이런 태도는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의 짓이라 하더라도 바로 보아줄 수가 없는데 하물며 정원에 있어서이겠는가. 그가 실력도 없으면서 멋대로 지위를 차지하고 있도록 한 것도 나는 좌상이 자초했다고 생각한다. 지금 나의 일념은 오직 시속을 교정해서 함께 조용한 정치를 해나가는 데 있을 뿐인데 정원 따위가 감히 사악한 기운이 되어 더럽힌단 말인가. 오정원을 관적(館籍)에서 영원히 삭제하여 조정의 신하들로 하여금 권병(權柄)이 아래로 옮겨갈 수 없고 위복(威福)을 감히 멋대로 휘두를 수 없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알게 하라."
하였다.

 

관상감이 아뢰기를,
"금년 기유년 칠정력(七政曆)에 12월 30일 신사의 사(巳) 자가 유(酉) 자로 잘못 쓰여져 있으니 다시 세분(洗粉)으로 닦아내고 써넣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일력(日曆)이 얼마나 막중한 것인데 이렇게 간지(干支)를 잘못 써 놓고는 몇 달이 지난 지금에 와서 번거롭게 초기(草記)한단 말인가. 관상감의 일이 지극히 해괴하니, 해당 관원은 법에 따라 죄를 징벌하고 제조는 무거운 쪽으로 추고하라."
하였다.

 

4월 12일 무술

소대하였다.

 

4월 13일 기해

이조원(李祖源)을 이조 참의로, 이경일(李敬一)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준천(濬川)하였다. 준천사의 여러 신하에게 전교하기를,
"요사이 날씨가 삼복 더위와 다름없는데, 역부(役夫)들이 뙤약볕 밑에서 진흙탕을 뒤집어 쓸 것을 생각하니 가엾기 그지없다. 특별히 반찬과 쌀을 내릴 것이니 밥도 짓고 술도 빚어, 역사를 마치는 날에 경이 도청(都廳) 이하 장교와 역군(役軍)들을 거느리고 넓게 트인 곳에서 풍악을 벌이고 음식을 나누어주어, 한편으로는 고사(故事)를 따르고 한편으로는 힘든 일을 해낸 데 대해 보답하고 칭찬해주라."
하였다.

 

부수찬 서매수(徐邁修)가 상소하여 첫머리에 역적을 토죄해서 원수를 갚는 의리를 진술하고, 이어 아뢰기를,
"우리 전하께서는 춘추가 한창이시고 지기(志氣)가 근면하시어 크고 작은 일을 몸소 살피시느라 밤낮으로 겨를이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전에 신이 병조 낭청으로 몇 달 동안 금중(禁中)에 입직했을 적에 속으로 흠앙한 바가 있었습니다마는 이어 우려되는 바도 있었습니다. 매일 밤 시각이 자정을 향하는데도 합문(閤門)에서 부르는 소리가 계시고 새벽이 아직 밝기도 전에 기무(機務)를 응접(應接)하시니 하룻밤 사이를 계산해 보면 침수에 드시는 것이 한두 시각에 지나지 않으십니다. 성탕(成湯)이 아침을 기다리고 주왕(周王)이 밤을 물은 것이 어찌 이보다 더하겠습니까마는 어찌하여 밤이 되면 편히 쉬라는 《주역(周易)》의 훈계와 야기(夜氣)로써 보양하라는 선유(先儒)의 잠언(箴言)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바라건대 대체만을 총람(摠攬)하시고 잗단 업무까지 겸해 보지 마시어 장중한 가운데 무위(無爲)의 교화를 펴소서.
근년 이래로 큰일을 여러 번 겪은데다가 간간이 흉년까지 만나 나라 재정이 거의 소모되었으니 긴급하지 않은 경비와 재물을 손상하는 일에 관계된 것들은 힘써 줄이도록 하소서. 전하께서도 몸소 절약과 검소를 행하시어 비용을 줄이고 상 주는 것을 삼가시어 재물을 풍부하게 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넉넉하게 하는 방도로 삼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첫머리에 진술한 일은 번거롭게 굴지 말라. 덧붙여 진술한 두 조항에서는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볼 수 있다. 이번에 새로 뽑힌 교리와 수찬 가운데 이렇듯 면려하는 말을 진술한 자가 없는데 너만이 이렇게 하였으니 더욱 가상하다."
하였다.

 

4월 14일 경자

소대하였다.

 

고 부제학 정경세(鄭經世)의 후손을 찾아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다.

 

도승지 이형규(李亨逵)가 죽었다. 전교하기를,
"그 재주를 다 쓰지 못하였으니, 매우 애석하다."
하고, 치제문(致祭文)에 이런 내용으로 말을 만들라고 명하였다.

 

4월 15일 신축

월식이 있었으나 채 1분도 지속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하식(地下食)의 예에 따라 재계만 하고 구식(救食)의 의식은 하지 않았다.

 

4월 16일 임인

홍병찬(洪秉纘)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4월 17일 계묘

춘당대에 거둥하여 초계 문신(抄啓文臣)의 친시(親試)와 시사(試射), 선전관의 전강(殿講)과 시사를 행하였다.

 

4월 19일 을사

소대하였다.

 

4월 20일 병오

차대하였다.

 

전 판서 윤시동(尹蓍東)을 문희묘 영건 당상(文禧廟營建堂上)으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본 사건의 어구(語句)는 인용한 것이 사실과 틀리니, 의거하여 들은 말이 거짓말에 또 거짓말이 보태져서 전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물며 정승의 차자와 대간의 장소에 이미 먼저 이 말을 쓴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니 중신(重臣)이 이 문제에 대해 혼자 책임을 담당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다만 어구의 글자가 많음으로 인하여 혼자 처벌을 면치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더구나 처음부터 문희묘의 영건을 감독한 공로가 있어 사당의 의용(儀容)이 거의 이루어져서 옮겨다가 봉안(奉安)할 날이 다가왔음에랴."
하고, 이어 이 명을 내린 것이다.

 

4월 21일 정미

김재찬(金載瓚)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박천형(朴天衡)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4월 22일 무신

관학 유생 박창수(朴昌壽) 등이 상소하여 역적을 성토하니, 비답하기를,
"언관(言官)도 아니면서 매양 언관의 일을 하고 나서니, 이러고서야 언제 글 읽을 겨를이 있겠는가. 너희들은 물러가서 유생의 일에나 전념하라."
하였다.

 

장령 성정진(成鼎鎭)이 상소하여 윤시동을 도로 감독으로 차임한 명을 환수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법을 굽혀가며 그를 비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러하다. 만약 대신을 침범한 원소(原疏)의 말이 아니었다면 어찌 지금에서야 서용하고 지금에서야 다시 차임하였겠는가. 너의 말은 편벽되고 사사로운 데 가깝다. 설령 환수를 청하고 싶다 하더라도 네가 빈대(賓對)한 반열에서 윤음(綸音)을 반포하는 것을 눈으로 보고도 아무 말없이 물러가 놓고서 며칠이 지나서야 이러구저러구 할 수 있는가. 그러나 두 사람을 다 진정시키고 싶어 처분을 내리지 않는다."
하였다.

 

유강(柳焵)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4월 23일 기유

이성규(李聖圭)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영건청 당상 윤시동이 상소하기를,
"신이 전에 올린 상소문의 어구는 단지 이윤욱(李允郁)이 영남 사람이면서도 능히 이런 언론을 하였기 때문에 그때의 전교가 계셨던 것으로만 알았을 뿐입니다. 그때 여러 역적들의 그지없이 흉악한 정상은 보통 사람의 생각으로서는 도저히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으니, 도깨비나 물여우의 심보를 가지고서 역적에 붙어 서로 얽힌 자가 아니라면 누가 그 정상을 알 수 있겠습니까. 상서(上書)를 상소로, 상소를 상서로 바꾸어 말하고, 비답을 전교로, 전교를 비답으로 잘못 알았으니, 알지도 못하고서 함부로 덤벙댄 짓이라는 것을 이로써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윗사람의 의중을 살피고 엿보아 신을 억제해서 꼭 속시원히 공격하고야 말려 하는 자들에게만은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전에는 조정상(趙貞相)·이헌경(李獻慶)이 있었고 뒤에는 유항주(兪恒柱)가 있어 공격의 강도가 갈수록 더욱 심각했기 때문에 기세에 눌려 두려운 마음이 아직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신칙하는 전교가 엄중하시고 일이 끝날 날도 머지 않으므로 당돌하게 명을 받들고 어전(御前)까지 나왔더니, 과도하게 감싸 보호하시고 위로해 도와주셨습니다. 지나친 복은 화를 부른다 하더니 과연 성정진의 상소가 나왔습니다. 그 뜻이 매우 긴박하고 물고 늘어지는 것이 한층 더 급박하였는데, 복계(覆啓)해 힐난한 승지 또한 다른 사람이 아니고 보면 남을 해치려는 그 마음이 서로 같아 사람으로 하여금 대처할 겨를이 없도록 한 것이 마치 한판에 찍어낸 것 같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의 이름을 조적(朝籍)에서 삭제해 주소서."
하니,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않았다.

 

군산(群山)·법성(法聖) 두 곳의 첨사(僉使)를 봉세 도차사원(捧稅都差使員)으로 정하였다. 전 전라 감사 서용보(徐龍輔)의 장청(狀請)을 따른 것이었다.

 

4월 24일 경술

지중추부사  이명식(李命植) 등이 일찍이 춘방(春坊)·계방(桂坊)을 거친 사람으로서 연명해 상소하여 김우진(金宇鎭)·조시위(趙時偉)와 유모(乳母)를 성토하니, 비답하기를,
"의리가 아닐 뿐만이 아니라, 어찌하여 나에게 슬픔을 끼치는 짓이라는 것을 생각지 않는가."
하였다.

 

4월 25일 신해

문희묘가 완성되었다. 상이 왕림하여 재실에서 영건청(營建廳)의 당상과 낭관을 불러 보았다. 경희궁(慶熙宮)에 가서 문효 세자 혼궁(文孝世子魂宮)에 다례를 행하고서 이어 효창묘(孝昌墓)와 의빈묘(宜嬪墓)에 가서 다례를 행하였다.

 

4월 26일 임자

문효 세자의 신위(神位)를 문희묘로 옮겨 봉안하였다. 상이 친히 구묘(舊廟)에서 고동련제(告動輦祭)를 행하고, 옮겨 봉안한 뒤에는 신묘(新廟)에서 봉안제(奉安祭)를 행하고 또 별다례(別茶禮)를 행하였다. 이어 의빈묘로 가서 별다례를 행하였다. 중궁전(中宮殿)은 문희묘에 갔다가 예가 끝나자 환궁하였다.

 

문희묘 영건청(文禧廟營建廳)의 감동 대신(監蕫大臣) 이성원에게는 구마(廐馬)를 보는 앞에서 내어주고, 영건청 당상 겸 공조 판서 구윤옥(具允鈺)·호조 판서 서유린(徐有隣)에게는 숙마(熟馬)를 보는 앞에서 내어주고, 행 부사직(行副司直) 윤시동(尹蓍東)에게는 반숙마(半熟馬)를 주고, 예방 승지 김광묵(金光默)과 도청 낭청(都廳郞廳)인 장령 김이성(金履成)과 신주를 모셔내고 모셔들일 때 대축(大祝)이었던 부사과 한용귀(韓用龜)에게는 모두 가자(加資)하는 상전(賞典)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4월 27일 계축

차대하였다. 우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윤시동이 전에도 이미 신을 논죄(論罪)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번의 상소문 가운데 ‘의중을 살피고 엿본다.[承望]’는 두 글자는 바로 전후로 논죄에 참여한 자들이 모두 신의 의중을 살피고 엿보아서 발론했다는 것을 이름입니다. 일전에 대간의 상소에 대해 내리신 비답에 ‘편벽되고 사사롭다.[偏私]’는 말씀이 계셨고, 또 ‘말이 나온 출처가 있다.’는 분부가 계셨으니, 대간의 말을 만약 편벽되고 사사로운 것으로 돌리신다면 신이 전후에 아뢴 바도 역시 모두 편벽되고 사사로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이 나온 출처도 신이니 신은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시동의 죄명이 가벼워지느냐 무거워지느냐 하는 것은 오로지 생각을 가지고 한 짓이냐 뜻하지 아니한 가운데 한 짓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가 만약 생각을 가지고 그런 말을 했다면 어찌 사시(肆市)의 전형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전하께서는 천지같으신 도량으로 반드시 그의 행위를 뜻하지 아니한 가운데 한 짓으로 돌리고자 하셨습니다만, 그가 뜻하지 아니한 가운데 한 짓이라는 것은 상서와 상소, 비답과 전교를 착오한 것으로 증거를 대는 데 불과합니다. 그의 상소에 이미 ‘장고(掌故)의 집안에서 구해 보았다.’고 하였는데, 사가(私家)의 이런 책자에 있어서야 어찌 아무 구절·아무 글자를 생략해 깎아내고 썼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가 이미 구해 보았다면 그 속에서 스스로 줄이고 빼버렸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이 훤한 일인데, 이로써 북면(北面)하는 자리에 써서 올렸으니, 이런 짓을 차마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인들 차마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리고 선조(先朝) 때에 배윤명(裵胤命)이 이관후(李觀厚)의 상소문을 지어주었는데, 그 가운데 두 글자의 흉언(凶言)이 있었습니다. 윤명이 의도를 가지고 그런 말을 썼는지 아니면 뜻하지 아니한 가운데 썼는지를 알 수 없고 보면 관후가 데면데면 보아넘겼는지의 여부를 또 어떻게 간파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윤명은 형장(刑狀)을 맞다 죽고 관후는 천극(荐棘) 속에서 평생을 마쳤습니다. 대체로 관후의 입장에서는 설령 뜻하지 아니한 가운데 벌어진 일이었다 하더라도 상소문 속에 쓴 것이 그의 이름이었으니 누가 뜻하지 아니한 가운데 벌어진 일이라 하여 그를 변호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시동은 그 상소로 말하면 그의 상소이고 그 글로 말하면 그가 스스로 지은 것인데, 어찌 관후에게만 국법을 사용하고 시동에게는 사용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스스로 부끄럽다고 말하였는데, 지금 경의 말을 들으니 내가 실로 부끄럽다."
하였다.

 

춘당대에 거둥하여 별시사(別試射)를 행하였다.

 

승지 김이성(金履成)이 상소하기를,
"신의 숙부(叔父)의 이름이 일찍이 어사(御史)의 장계(狀啓)에 든 적이 있는데, 그때의 어사가 바로 좌승지 이정운(李鼎運)입니다. 가령 신의 숙부에게 실지로 이런 범죄가 있었다면 신이 어찌 감히 혐의를 말하겠습니까마는, 없는 사실을 꾸며 날조해서 원한을 속시원히 갚으려고 한 짓이었습니다. 그러니 신이 어찌 차마 정운과 같은 정원에서 동료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정운으로 말하더라도 그 또한 아비가 있는데 무슨 면목으로 신과 자리를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숙부도 아비와 일반이니 다른 사람이 혹시 사실도 아닌 것으로 탄핵해 배척한다면 아들이나 조카 된 자가 어찌 통분한 마음이 없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사정(私情)이다. 더구나 이 상소로 인해서 그때 어사의 장계 등본(謄本)을 가져다 보건대, 죄목(罪目)을 나열해 논한 것과 적용한 법률의 명목이 크게 중하지 않았으니, 혐의가 있다고는 할 수 있겠으나 원수라는 말이 어찌 가당키나 하겠는가. 그렇다면 사직소 가운데 한두 구절의 말은 속된 거리의 욕설과 다름이 없다. 조정의 체용에 크게 어그러질 뿐만이 아니라 풍속을 도탑게 하고 폐단을 막는 도리에 있어서도 엄하게 처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옥관자(玉貫子)를 단 지 겨우 하룻밤이 지났다는 점과 공사를 감독한 공로를 특별히 생각하여 우선 불서(不敍)의 전형을 시행하라."
하였다.

 

4월 30일 병진

홍문영(洪文泳)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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