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경종수정실록4권, 경종 3년 1723년 12월

싸라리리 2025. 10. 20. 08:38
반응형

12월 8일 계축

전(前) 현감(縣監) 황하신(黃夏臣)이 옥중에서 죽었다. 이에 앞서 어떤 사람이 어비(御批) 1본(本)을 위조(僞造)하여 호서(湖西)에 전파한 일이 있었는데, 대개 그 어의(御意)로 말하면,
"임금이 마음속으로 국옥(鞫獄)에 외람된 것이 많고 찬적(竄謫)이 너무 지나친 것을 뉘우쳐 혹은 문안(文案)을 몰입(沒入)하라고 명하기도 하고, 혹은 여러 신하를 사유(赦宥)하여 방면할 것을 허락하기도 했으며, 또 삼환(三宦)을 축출할 것이다."
하였다. 이만근(李萬根)이 처음 읍자(邑子)를 통하여 얻어 보았는데, 대신(臺臣) 이진순(李眞淳)이 듣고서 먼저 이만근을 사핵(査覈)할 것을 청하였다. 국청(鞫廳)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는데, 황하신이 공초(供招)하기를,
"금년 9월에 전혀 아는 바 없는 상한(常漢) 하나가 동노(童奴)를 인하여 만나보기를 청하기에 병이라 핑계하고 거절했더니, 곧바로 창문 밖에까지 와서는 죄를 지고 정배(定配)된 병조(兵曹)의 서리(胥吏)라고 하면서 조보(朝報) 가운데 비지(批旨)를 등사(謄寫)한 것을 가져다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자획(字畫)이 황잡하기 때문에 고쳐 등사하여 아우 황하민(黃夏民)에게 보였던 바 점차 그것이 수상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으므로, 이어 즉시 불태워버렸습니다. 그 전파된 것은 곧 조카 황상질(黃尙質)이 등사한 것입니다. 전해준 사람의 성명(姓名)은 전연 잊었습니다만, 면목(面目)은 아직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 이웃에 사는 남중로(南重老)가 마침 참여하여 보았었습니다. 나 자신이 이를 위조했다면 무엇 때문에 황하민의 집에다 물어보았겠으며, 황상질 또한 무엇 때문에 또 조용석(趙龍錫)에게 질문했겠습니까?"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누차 온갖 방법으로 신문하고, 또 황상질·남중로(南重老)를 잡아왔는데, 황하신의 공초와 조금 어긋나는 점이 있었다. 드디어 황하신이 그 사람의 성명(姓名)을 현출(現出)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1차 형신(刑訊)을 가하였으나, 대답은 전과 같았다. 이진순(李眞淳)이 소장을 올려 우선 형신을 정지하고 와서 보여준 사람을 기포(譏捕)할 것을 청하였는데, 미처 비답(批答)이 내리기 전에 그의 아들이 격고(擊鼓)093)  하여 억울함을 송변(訟辨)했으나 황하신은 이미 죽어버렸다. 이때 호서(湖西)에 사족(士族)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흉당(凶黨)들이 이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한 계책으로 위조된 비망기(備忘記)를 만들어 사람을 시켜 유전(流傳)시키고 나서는 이어 또 적발하였는데, 이는 장차 단련(鍛鍊)하여 대대적인 도륙(屠戮)을 자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황하신이 죽자 옥사(獄事)는 끝내 무실(無實)한 것이 되고 말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억울하게 여겼다. 영조(英祖) 초에 이르러 그 일을 추후 다스림에 따라 흉당들이 설계(設計)한 것임이 비로소 모두 드러났다.

 

12월 15일 경신

윤헌주(尹憲柱)를 용천부(龍川府)에 정배하였다.

 

12월 17일 임술

장령(掌令)        윤빈(尹彬)이 아뢰기를,
"사흉(四凶)의 죄범은 모두 역적입니다. 따라서 이들을 다스림에 있어 이동(異同)이 없어야 하는데, 조태채(趙泰采)만이 노륙(孥戮)하는 형전(刑典)을 면하였습니다. 조관빈(趙觀彬)이 김제겸(金濟謙)에 투합(投合)한 것은 세상이 다 알고 있는 것이고 조태채가 역모에 빠진 것도 대개 또한 조관빈이 계도(啓導)한 것입니다. 선인문(宣仁門)에 대한 한 가지 일은 누군들 사직(社稷)을 부지시킨 성대한 일이었음을 칭송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조태채의 아들들은 이 일에 대해 분노를 품고 친척을 원수처럼 여겨 대신(大臣)094)                  과 절의(絶誼)했으며, 또 대신의 상사(喪事) 때에 친척들 가운데 성복(成服)한 사람과는 대부분 관계를 끊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라를 원망하고 임금을 원수로 여기면서 주야로 보복을 획책하여 왔는데도 지금까지 편안히 거처하고 있으므로 여정(輿情)이 모두 통분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청컨대 조태채의 세 아들을 절도(絶島)에 나누어 정배(定配)시키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고(故) 사인(士人) 이정영(李廷煐)의 처는 곧 조태채의 딸입니다. 자기 아비가 역모에 빠져 죽음을 받게 되자 그 원망을 사직(社稷)을 부지시킨 대신(大臣)에게          【조태구(趙泰耉)를 가리킨 것이다.】         돌려 늘 작은 수레에다 허수아비를 만들어 실어놓고 주륙(誅戮)을 가하는 짓을 하고 있습니다. 또 토역(討逆)한 제신(諸臣)의 형상을 그려서 바람벽에 걸어놓고 손으로 활을 당겨 쏘았으며, 또 자기 계집종을 시켜 남편의 자형(姉兄)인 김동필(金東弼)        집의 두 계집종과 교결하게 하여 동모(同謀)해서 흉한 물건을 김동필의 집에 묻어 저주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시아버지인 임원군(林原君) 표(杓)와 남편의 동기(同氣)인 집안들에도 그런 짓을 하게 한 정상(情狀)이 다 드러났고, 그 흉한 물건들을 발굴해 낸 것이 낭자합니다. 이런 흉역스런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본디 내력이 있는 것으로 어찌 이루 다 주토(誅討)할 수 있겠습니까? 세 계집종은 이미 죽어버렸으므로 옥사를 성립시킬 계제(階梯)가 없으니, 청컨대 절도(絶島)에 정배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12월 19일 갑자

조정빈(趙鼎彬)을 정의현(旌義縣)에, 조관빈(趙觀彬)을 흥양현(興陽縣)에, 조겸빈(趙謙彬)을 거제부(巨濟府)에, 이정영(李廷煐)의 처를 흑산도(黑山島)에 정배하였다.

 

12월 28일 계유

유학(幼學) 홍우저(洪禹著) 등이 소장을 올려 권상하(權尙夏)에 대해 신변(伸辨)하였다. 정원(政院)에서 처음에 봉입(捧入)하지 않자 홍우저 등이 승지(承旨)에게 드디어 침욕(侵辱)을 가하였으므로, 부득이 계품(啓稟)하기를,
"홍우저 등이 소장 가운데 권상하를 선정(先正)이라고 칭하기까지 했으니, 이미 너무도 무엄한 짓이었습니다. 그리고 본원(本院)에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추욕(醜辱)을 가하니, 한결같이 계속 퇴각(退却)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봉입(捧入)하라고 명하였다. 그 소장에 대략 말하기를,
"윤휴(尹鑴)와 허목(許穆)이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의 여술(餘術)을 답습하여 끝내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에게 혹독한 참화를 입혔는데, 지금에 와서는 더욱 사문(斯文)의 화(禍)가 갈수록 더욱 맹렬하여져 송시열을 사우(祠宇)에서 출향(黜享)시킨 반면, 흉목(凶穆)095)                  의 원우(院宇)는 우뚝하게 서 있으니, 세도(世道)와 인심(人心)에 대해 다시 말할 것이 없습니다. 또 신치운(申致雲)이란 자가 있어 전혀 근사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가지고 날조 부회하여 선정신(先正臣) 권상하에게 무욕(誣辱)을 가하면서 선조(先朝)에서 총애(寵愛)하여 내린 작명(爵名)을 추탈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권상하는 도덕이 정수(精醉)하고 덕행이 순정(純正)하여 선현(先賢)의 정맥(正脈)을 이어받아 사문(斯文)의 종주(宗主)가 되었으므로 지난 선조(先朝) 때부터 예우(禮遇)가 갖추 지극하였음은 말할 것도 없고, 행전(行殿)096)                  에서 소대(召對)할 적에 직접 손을 잡았고 뒷수레에 태우시려고까지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도 일찍이 성례(誠禮)를 다하여 총애하였고 원로(元老)로 대우하셨는데, 이제 신치운이 비록 사사로운 혐의와 시기 때문에 죄를 얽어내어 해치려 하지만, 선조(先朝)께서 현철(賢哲)을 본받은 명철함을 손상시키고 성상(聖上)께서 현인(賢人)을 좋아하는 덕에 누를 끼치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거활(巨猾)에 의부(依附)했다는 것은 반드시 적면(賊冕)이          【신면(申冕)을 가리킨다.】 김자점(金自點)에게 빌붙고 신종화(申宗華)가 역적 허견(許堅)에게 의탁한 것같이 한 연후에야 이런 등등의 말로 지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권상하가 소년 시절부터 대현(大賢)을 사사(師事)하였으므로 기필코 아울러 전해 내려온 연원(淵源)까지 독해(毒害)를 가하려 하는 것입니다. 이는 갑인년097)                  ·기사년098)                  에 정현(正賢)을 독해하던 무리들도 오히려 감히 이런 간악(奸惡)한 이름을 가하지 못했는데, 신치운이 아무리 흉패(凶悖)스럽기로서니 어떻게 감히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이희조(李喜朝)는 젊은 나이에 학문에 뜻을 두고 어진 스승을 친히 하였으며, 정호(鄭澔)는 경술(經術)이 박아(博雅)하고 충정(忠正)·강극(剛克)한 사람인데, 신치운이 간하사고 음험하며 참독스럽다는 것으로 대역 부도(大逆不道)의 죄악이라 지목하여 전혀 돌보아 꺼리는 기색이 없이 억지로 이를 선정(先正)에게 가하였으니, 신은 죄에 얽어넣은 앙화가 다시 성세(聖世)에서 일어날까 걱정스럽습니다.
정유년099)                  의 일에 이르러서는 권상하가 스스로 변해(辨解)한 소장에서 말하기를, ‘신은 궁벽한 시골에 거처하고 있기 때문에 가장 늦게야 일월(日月)이 고쳐짐이 때를 넘기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감히 초야에 묻힌 천루(賤累)한 자취로 이미 지나간 일을 추후 제기하여 논열(論列)할 수 있겠습니까? 고묘(告廟)하기 위해 수의(收議)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이 욕되게 참여하는 것은 천만 옳지 못한 것이니, 어떻게 대신(大臣)이라 자처하면서 헌의(獻議)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으니, 이로써 살펴본다면 선정(先正)께서 스스로 조처한 의리에는 각기 근거한 것이 있으므로 아무리 무함하려 해도 과연 그것이 성설(成說)이 될 수 있겠습니까? 신치운은 역적 신면(申冕)의 증손(曾孫)이고 역적 허견(許堅)의 압객(狎客)인 신종화가 할아비이고 적통(嫡統)을 빼앗아 인륜을 문란시킨 신유(申輶)가 아비이니, 어떻게 감히 스스로 인류(人類)에 견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이에 흉역(凶逆)이니 부도(不道)이니 하는 등의 말을 방자하게 함부로 선정에게 가할 수 있단 말입니까? 더구나 ‘나라를 원수로 여기고 임금을 배반하고 부자가 절의(絶義)했다.[讎國叛君絶父子]’는 일곱 글자는 바로 이른바 그의 3세(世)의 죄악을 형용해 낸 것입니다. 이제 신치운이 이런 말을 발한 것은 기회를 이용하여 선정(先正)에게 추욕(醜辱)을 가함으로써 시의(時議)에 아첨하기 위한 계책이니, 진실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찌 성명(聖明)께서 위에 계시는데 그 말에 요혹(撓惑)되어 양조(兩朝)에서 예우(禮遇)한 현인(賢人)으로 하여금 지하에서 죄를 받게 되는데도 살피지 않을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바라건대 선정신·권상하의 관작을 추탈하라는 명을 중지하여 현인을 무함한 죄를 분명히 바로잡으소서."
하였다.

 

12월 30일 을해

조성집(趙聖集)을 율법에 의거하여 다스리라는 청을 따랐다. 조성집이 자기의 아우를 독살(毒殺)하려 했으므로 대신(臺臣)이 잡아다가 핵실할 것을 청하였고, 형조(刑曹)에서 조사하여 사실을 밝혀 낸 다음 이어 대신(大臣)과 의논하여 정률(定津)할 것을 청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최석항(崔錫恒)이 《대명률(大明律)》을 인용하여 응당 죽어야 할 죄에 해당되는 것이 없다고 말하니, 임금의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였다. 대관(臺官)이 간쟁하니 임금이 처음에는 정형(正刑)에 처할 것을 허락했었으나, 최석항이 또 임금에게 아뢰니 도로 중지시켰다. 그러나 대관이 다시 극력 간쟁하니, 임금이 마침내 그대로 따랐다.
조성집이 바야흐로 배소(配所)에 있을 적에 도사(都事)를 보내어 교형(絞刑)에 처하였다. 조성집은 풍양(豐壤) 사람인데, 기절(氣節)을 좋아했다. 조성복(趙聖復)이 정의현(旌義縣)에 안치될 적에 고문을 받아 거의 죽게 되었는데, 다리의 상처가 극심했었다. 조성집이 눈물을 흘리면서 그 고름을 입으로 빨아주면서 부호(扶護)하여 갔었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이때 적신(賊臣)들이 조성복이 끝내 굴하지 않을 줄 알고 이에 곧바로 정형(正刑)에 처할 것을 청하였다. 조성복이 조성집에게 서한(書翰)을 보낼 적에 옛사람의 자정(自靖)한 의리에 대해 물었으므로 조성집이 소태부(蕭太傅)100)  의 고사(故事)로서 대답하고서 독약을 보냈는데, 독약이 도착하기 전에 조성복은 이미 죽었다. 그러고 나서 대계(臺啓)에서 그의 죄를 얽어내었으므로 조성집을 하옥(下獄)시키고 구문(鉤問)하니, 조성집이 대답하기를,
"나의 아우가 죄도 없이 대륙(大戮)의 함정에 빠졌는데, 내가 차마 몸과 머리가 분리되는 것을 볼 수가 없어서 내 아우로 하여금 자진(自盡)하게 하려고 하였다. 나도 결연히 한 번 죽어 함께 가서 지하에 계신 부모를 만나뵙겠다."
하였는데, 이 말을 들은 사람은 모두 슬퍼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