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경종수정실록4권, 경종 3년 1723년 11월

싸라리리 2025. 10. 20.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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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6일 임오

청(淸)나라의 사신이 도성(都城)으로 들어왔다.

 

11월 8일 갑신

김일경(金一鏡)을 발탁하여 반송사(伴送使)로 삼았는데, 이는 이광좌(李光佐)가 추천(推薦)한 것이다.

 

11월 12일 무자

청(淸)나라의 사신이 도성(都城)을 떠났다.

 

11월 17일 계사

초복(初覆)090)  을 행하였다.

 

11월 21일 정유

호남(湖南)에 찬적(竄謫)된 사람 12인을 제도(諸道)에 이배(移配)하였다. 이희조(李喜朝)는 영암(靈巖)에서 철산(鐵山)으로 옮기고, 어유룡(魚有龍)은 영암에서 사천(泗川)으로 옮기고, 김여(金礪)는 영암에서 하동(河東)으로 옮기고, 이중협(李重協)은 해남(海南)에서 경원(慶源)으로 옮기고, 박사익(朴師益)은 태인(泰仁)에서 청하(淸河)로 옮기고, 조도빈(趙道彬)은 옥구(沃溝)에서 안음(安陰)으로 옮기고, 이병상(李秉常)은 부안(扶安)에서 함양(咸陽)으로 옮기고, 권응(權譍)은 부안에서 개령(開寧)으로 옮기고, 이익명(李益命)은 광주(光州)에서 길주(吉州)로 옮기고, 민창도(閔昌道)는 장수(長水)에서 문경(聞慶)으로 옮기고, 황선(黃璿)은 무장(茂長)에서 양덕(陽德)으로 옮기고, 신무일(愼無逸)은 김제(金堤)에서 영원(寧遠)으로 옮겼다.

 

11월 23일 기해

삼복(三覆)을 행하였다.

 

11월 27일 계묘

지평(持平) 신치운(申致雲)이 아뢰기를,
"종래에 흉역(凶逆)들이 대대로 국권(國權)을 잡고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휘둘렀는데, 일종(一種)의 음사(陰邪)하고 불령(不逞)한 무리가 유명(儒名)을 가차(假借)하여 조정의 권한을 움켜쥐기 위해 정신과 술법을 전해 가면서 교대로 조술(祖述)했습니다. 이를테면 권상하(權尙夏)·이희조(李喜朝)·정호(鄭澔)의 동아리가 그것인데, 그 무리가 매우 번성해 있습니다. 권상하에 이르러서는 본디 한낱 용렬한 음관 산질(蔭官散秩) 출신으로 전혀 취할 것이 없는 자인데, 특별히 거활(巨猾)091)  을 의지하여 위명(僞名)을 주워모았으며, 조정에 있는 흉적들이 소리를 같이하여 어질다고 칭송한 것입니다. 간사하고 음험한 이희조와 참독스러운 정호가 흉덕(凶德)을 지닌 자와 서로 모여 아울러 이 세상에서 얼화(孽禍)를 빚어냈는데, 은밀히 패론(悖論)을 견지하는가 하면 드러나게 흉위(凶威)를 찬조함으로써 결국에는 의리(義理)가 막혀 없어지고 이륜(彛倫)이 무너져 버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악역(惡逆)이 행해짐에 따라 종사(宗社)가 거의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그들의 세상을 속이고 나라에 화(禍)를 끼친 재앙이 홍수(洪水)와 맹수(猛獸)의 피해092)  보다도 더했습니다. 정호와 이희조에게는 이미 변방으로 내치는 형전을 시행했지만, 권상하의 관질(官秩)은 그대로 있어 사림(士林)이 일제히 분노하고 공의(公議)가 갈수록 격렬해지고 있으니, 그 사람이 이미 죽었다는 것을 이유로 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고(故) 상신(相臣) 권상하의 관작을 추탈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수일(數日) 뒤에 또 잇따라 아뢰면서 극력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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