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0일 을유
윤각(尹慤)이 자복(自服)하지 않고 죽었다. 윤각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무신 겸 선전관(武臣兼宣傳官)에 보임되었다. 숙종(肅宗)이 일찍이 원중(苑中)에 임어하여 무사(武士)들을 사열하다가 윤각의 풍의(風儀)를 보고 지목하여 이르기를,
"저기 수염이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였는데, 드디어 차서에 구애없이 탁용(擢用)하여 벼슬이 총융사(總戎使)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까지 이르렀다. 박상검(朴尙儉)이 이미 용사(用事)하자 윤각이 탄핵을 받아 삼화부(三和府)로 찬배(竄配)되었었는데, 목호룡(睦虎龍)이 무옥(誣獄)을 일으킴에 이르러서는 체포되어 옥에 갇혔고, 온갖 방법으로 죄를 만들어 얽어 넣으려 했으나 다만 죄를 성립시킬 수가 없었으므로, 작처(酌處)하라고 한 것이 일곱 번이나 되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대관(臺官)에게 저지당하였다. 고문이 말할 수 없이 혹독했지만 전혀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는데, 드디어 옥중(獄中)에서 병들어 죽었으니, 이때 나이 60세였다. 영조(英祖) 원년(1725)에 설원(雪怨)시키고 인하여 하교하기를,
"윤각의 경우는 매우 원통하고 또 다른 무신(武臣)과는 자별한 점이 있으니, 특별히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하고 그 자손(子孫)을 녹용(錄用)하도록 하라."
하였다.
1월 11일 병술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백관의 조참(朝參)001) 을 받았다. 우의정(右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이진유(李眞儒)에게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겸임시킬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월 28일 계묘
전 찬선(贊善) 이희조(李喜朝)가 정주(定州)에서 졸(卒)하였다. 이희조의 자(字)는 동보(同甫)인데, 문정공(文貞公) 이단상(李端相)의 아들이다. 젊어서부터 학문에 힘을 써서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을 사사(師事)하였고, 또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에게 나아가 공부하면서 경술(經術)을 연마하였다. 송시열이 거제부(巨濟府)에 안치(安置)되기에 이르러서는 이희조가 영지동(靈芝洞)에 은거(隱居)하면서 대귀설(大歸說)을 저술하여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어 보였다. 숙종(肅宗)경신년002) 에 서연관(書筵官)에 천배(薦拜)되었다는 것으로 유현(儒賢)으로 대우하였다. 윤증(尹拯)이 배사(背師)하기에 이르러서는 이희조가 이에 송시열이 윤증 부자(父子)에 대해 논한 것을 기록하여 두 편으로 엮어서 아들 이양신(李亮臣)을 시켜 가져다가 올리게 하였다. 이 때문에 윤증의 당여가 이희조를 증오하여 그 원한(怨恨)을 보복하려 하였다. 금상(今上) 원년(1721)에 이희조를 불러 세제(世弟)를 위하여 찬선(贊善)·성균관 좨주(成均館祭酒)를 삼으니, 이진유(李眞儒)가 극력 비난하고 나섰다. 이희조가 처음에는 영암(靈巖)에 찬배되었다가 곧이어 철산(鐵山)으로 이배(移配)되었는데, 이희조가 정주(定州)에 이르러 점사(店舍)에서 졸하였으니, 이때 나이 70세였다. 죽기 하루 전에 무지개 같은 흰 운기(雲氣)가 뻗쳤는데, 그 광망(光芒)이 땅을 밝힐 정도였다. 영조(英祖) 원년(1725)에 그 관작(官爵)을 회복시키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하였으며, 시호(諡號)는 문간(文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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