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8일 계묘
숙종 대왕(肅宗大王) 46년(1720) 【청(淸)나라 강희(康熙) 59년이다.】 경자(庚子) 6월 8일 계묘(癸卯)에 숙종 대왕이 경덕궁(慶德宮) 융복전(隆福殿)에서 승하(昇遐)하였다.
6월 13일 무신
이날에 성복(成服)하였다. 대신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천담포(淺淡袍)와 오사모(鳥紗帽)·흑각대(黑角帶)를 착용(着用)하고 아침에 숭정전(崇政殿) 뜰에서 곡(哭)을 마친 후에 천담포와 오사모·흑각대를 벗고 참최(斬衰)의 복제(服制)를 입었다. 관량(冠梁)은 품질(品秩)에 따라 증감했는데, 달관(達官)의 장(長)은 모두 상장(喪杖)을 받았고, 전정(殿庭)에서 성복(成服)했으니, 대개 갑오년001) 에 대행 대왕(大行大王)002) 이 특별히 대신과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미리 의정(議定)한 바를 준행한 것이었다.
복제 절목(服制節目)
왕세자(王世子)는 참최 3년(斬衰三年)003) 이니, 의(衣)·상(裳) 【지극히 거친 생포를 쓴다.】 ·관(冠)【약간 가는 생포를 쓰되 마승(麻繩)으로 무(武)004) 와 영(纓)을 만든다.】 ·수질(首絰)·요질(腰絰)·교대(絞帶) 【모두 생마(生麻)로 만든다.】 ·죽장(竹杖)·관리(菅履)를 착용한다. 왕위(王位)를 이어받고 면복(冕服)을 입으며, 졸곡(卒哭) 후에 시사복(視事服)은 백포(白袍)·소익선관(素翼善冠) 【입(笠)은 흰 빛깔을 쓴다.】 ·면포(綿布)로 싼 오서대(烏犀帶)·백피화(白皮靴)를 착용한다.
무릇 상사(喪事)에는 최복(衰服)을 입는다. 13개월이 연제(練祭)이니 연관(練冠)을 쓰고, 수질(首絰)·부판(負版)·벽령(辟領)·최(衰)를 제거하며, 25개월이 상제(祥祭)이니 참포(黲袍)·익선관·오서대·백피화를 착용하고, 27개월이 담제(橝祭)이니 현포(玄袍)·익선관·오서대·백피화를 착용하고, 담제 후에는 곤룡포(袞龍袍)와 옥대(玉帶)를 착용한다.
왕비(王妃)는 참최 3년이니, 대수(大袖)·장군(長裙) 【지극히 거친 생포를 쓴다. 대수는 본국(本國)의 장삼(長衫)이요, 장군은 곧 치마[裳]이다.】 ·개두(蓋頭)·두수(頭𢄼) 【약간 가는 생포를 쓴다.】 를 착용하는데, 개두 대신에 본국(本國)에서는 여립모(女笠帽)를 쓰고, 두수 대신에 본국에서는 수파(首帊)를 쓰며, 죽차(竹釵) 【전계(箭筓)이다.】 ·포대(布帶) 【거친 생포를 쓴다.】 ·포리(布履) 【백면포(白綿布)로 만든다.】 를 착용한다. 졸곡(卒哭) 후에는 백포(白布)로 만든 대수·장군·개두·두수 및 띠[帶]·백피화를 착용한다. 25개월 대상(大祥) 후에는 짙은 옥색(玉色)으로 된 대수·장군·흑개두·두수 및 띠·백피화를 착용하고, 금(金)·주옥(珠玉)·홍수(紅繡)는 쓰지 않으며, 27개월 담제 후에는 길복(吉服)을 입는다.
왕세자빈(王世子嬪)은 참최 3년이니, 대수(大袖)·장군(長裙) 【지극히 거친 생포를 쓴다.】 ·개두(蓋頭)·두수(頭𢄼) 【약간 가는 생포를 쓴다.】 ·죽차(竹釵)·포대(布帶) 【거친 생포를 쓴다.】 ·포리(布履) 【백면포로 만든다.】 ·개두·두수 【약간 거친 생포를 쓴다.】 ·죽차(竹釵)·포대(布帶) 【다음가는 거친 생포를 쓴다.】 ·포리(布履) 【백면포로 만든다.】 를 착용하고, 졸곡 후에는 백포(白布)로 만든 대수·장군·개두·두수 및 띠·백피화를 착용한다.
내명부(內命婦)의 빈(嬪) 이하의 복제는 왕비의 복제와 같으며, 친자(親子)의 복제는 왕세자의 복제와 같다. 졸곡 후에는 임시로 백의(白衣)와 면포(綿布)로 싼 사모(紗帽)·각대(角帶)와 백피화를 착용한다.
무릇 상사(喪事)에는 최복(衰服)을 입는다. 13개월이 연제(練祭)이니 연관(練冠)을 쓰고 수질·부판·벽령·최(衰)를 제거하며, 25개월이 상제(祥祭)이니 짙은 옥색으로 된 의복과 오사모·흑각대·백피화를 착용하고, 27개월이 담제(禫祭)이니 흑의(黑衣)·오사모·흑각대·백피화를 착용하며, 담제 후에는 길복(吉服)을 입는다. 친자(親子)의 처(妻)의 복제는 왕세자빈의 복제와 같다.
종친(宗親) 1품 이하 및 문무(文武) 당상관(堂上官)의 처(妻)는 자최 기년(齊衰期年)005) 이니, 대수·장군 【다음가는 거친 생포를 쓴다.】 ·개두·두수 【약간 거친 생포를 쓴다.】 ·죽차(竹釵)·포대(布帶) 【다음가는 거친 생포를 쓴다.】 ·포리(布履) 【백면포로 만든다.】 를 착용하고, 졸곡 후에는 백면포로 만든 대수·장군·개두·두수 및 띠·백피화를 착용한다.
문무(文武) 3품 이하의 처(妻)는 백면포로 만든 대수·장군·개두·두수 및 띠·백피화를 착용하고, 졸곡에 제거한다. 각도의 대소 사신(大小使臣) 및 외방 관원의 복제는 백관의 복제와 같으며, 그 아내의 복제는 종친 및 백관의 처의 복제와 같다.
동성(同姓)·이성(異姓)에 대한 시마(緦麻)006) 이상의 친척과 내시(內寺)·산질(散秩) 3품 이하의 처의 복제는 종친의 처의 복제와 같고, 동성·이성에 대한 시마(緦麻) 이상의 딸[女]의 복제는 친손녀(親孫女)의 복제와 같으며, 친손녀의 복제는 친녀(親女)의 복제와 같다.
수릉관(守陵官) 및 시릉 내시(侍陵內侍)는 참최 3년이니, 최·질(衰絰)의 제도(制度)와 연제(練祭)·상제(祥祭)·담제(禫祭)의 복제는 친자(親子)의 복제와 같다.
별감(別監)의 각 차비인(差備人)은 지극히 거친 생포(生布)로 만든 직령의(直領衣)·두건(頭巾)·마대(麻帶)·백승혜(白繩鞋)를 착용하고, 졸곡 후에는 백의(白衣)·흑두건·흑대(黑帶)를 착용하여 3년을 마친다.
직사(職事)의 전함(前銜)이 있는 각 품관(品官) 및 성중관(成衆官) 【내금위(內禁衞)·충의위(忠義衞)·충찬위(忠贊衞)·충순위(忠順衞)·별시위(別侍衞)·족친위(族親衞)의 등속이다.】 은 백의(白衣)와 백면포로 싼 사모(紗頂)·각대(角帶)와 백피화를 착용하고, 졸곡 후에는 백의·오사모 【입(笠)은 흰 빛깔을 쓴다.】 ·흑각대를 착용하여 3년을 마친다.
녹사(錄事) 서리(書吏)는 백의·백평정 두건(白平頂頭巾) 【뿔이 있는 것은 철각(鐵角)을 없애고 면포로 대(帶)를 만들어 드리운다.】 ·마대(麻帶)·백피화를 착용하고, 졸곡 후에는 흑평정 두건(黑平頂頭巾) 【입(笠)은 흰 빛깔을 쓴다.】 ·흑대(黑帶)를 착용하여 3년을 마친다.
사직서(社稷署)·종묘서(宗廟署)의 관원 및 여러 능(陵)·전(殿)의 참봉(參奉) 등 관원은 입직(入直)할 때에는 모두 상복(常服)인 오사모·흑각대를 착용하고, 밖에 나갈 때에는 백관의 복제와 같다. 갑사(甲士)와 정병(正兵)은 백의·백립(白笠)·마대(麻帶)·백피화를 착용하고, 졸곡에 제거한다.
백관 복제 별단(百官服制別單)
종친 문무 백관은 참최 3년이니, 포관(布冠) 【양(梁)은 3품 이상은 3량(梁)이고, 5품 이상은 2량이며, 9품 이상은 1량이요, 마승(麻繩)으로 무(武)와 영(纓)을 만든다.】 ·포건(布巾)·포삼(布衫) 【지극히 거친 생포를 쓴다.】 에 최(衰)·벽령(辟領)·부판(負版)·엄임(掩袵)·대하척(帶下尺)·포군(布裙) 【지극히 거친 생포를 쓴다.】 ·마요질(麻腰絰)·수질(首絰)·마대(麻帶)·관구(菅屨)·죽장(竹杖)을 가하고 망건(綱巾)는 전대로 두며 【후면(後面) 가에 흰 선(線)을 두르고 금·옥 관자(金玉貫子)는 제거한다.】 , 문·무·음(文武蔭)의 내외 백관은 실직(實職)과 전함(前銜)을 물론하고 모두 같다. 종친 종2품(從二品) 이상과 육조(六曹)·삼사(三司)·승정원(承政院)·한성부(漢城府)·성균관(成均館)·장례원(掌隷院) 이상 장관(長官)과 양도 유수(兩都留守), 외방의 제도 감사(諸道監司) 및 무변(武弁)의 시임 대장(時任大將)과 외방의 통제사(統制使)·통어사(統禦使)·문무 음관의 시임(時任) 및 일찍이 정경(正卿)을 지낸 자 이상은 모두 상장(喪杖)이 있다.
동성(同姓)·이성(異姓)에 대한 시마(緦麻) 이상의 친척은 시임(時任)·전함(前銜) 및 무직인(無職人)을 물론하고 백관과 더불어 최·질(衰絰)과 복제가 같다.
내시(內侍)·사알(司謁)·사약(司鑰)·서방색(書房色)·반감(飯監)은 백관의 실직자(實職者)와 같은데, 상장(喪杖)은 없다.
문무 백관과 시산관(時散官)은 공복(公服) 단령의(團領衣) 【지극히 거친 생포로 가를 두른다.】 ·면포(綿布)로 싼 사모(紗帽), 【거친 생포로 사모(紗帽)를 싸고 철각(鐵角)을 제거하여 면포로 띠를 만들어 뒤로 드리운다.】 면포로 싼 각대(角帶)와 백피화를 착용하고, 졸곡 후에는 백의(白衣)·백모(白帽) 【입(笠)은 흰 빛깔을 쓴다.】 와 면포로 싼 각대(角帶)를 착용한다. 13개월이 연제(練祭)이니 연포(練布)로 싼 사모를 착용하며, 25개월이 상제(祥祭)이니 짙은 옥색(玉色)으로 된 의복과 오사모·흑각대를 착용하며, 27개월이 담제(禫祭)이니 흑의(黑衣)를 착용하고, 담제 후에는 길복(吉服)을 입는다.
생원·진사·유학(幼學)은 백립(白笠)과 생포(生布)로 지은 의복·마대(麻帶)를 착용하고, 생도(生徒)는 백의(白衣)·백대(白帶)·백피화를 착용하여 【생원·진사·생도가 입학(入學)하면 백두건(白頭巾)을 쓰고, 졸곡 후에는 흑두건을 쓴다.】 3년을 마친다.
처음에 우리 나라의 복제는 오로지 《오례의(五禮儀)》를 준용(遵用)했는데,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개연히 복고(復古)할 뜻이 있어 갑오년007) 에 환후(患候)가 계신 중에서 조정의 신하들에게 널리 묻고 고금(古今)을 참작하여 백 년을 광폐(曠廢)한 나머지 최·질(衰絰)의 제도(制度)를 다시 시행하게 되어 의문(儀文)과 예절(禮節)이 크게 갖추어졌으니, 한 세대(世代)의 문치(文治)를 흠송(欽頌)함과 천추(千秋)에 덕업(德業)을 추앙(推仰)함이 또한 이 한 번의 거조(擧措)에 있었던 것이다.
5일을 앞선 갑진008) 에 예조(禮曹)에서 사위 절목 단자(嗣位節目單子)를 입계(入啓)하였는데, 하령(下令)하기를,
"하늘이 무너진 듯한 망극한 중에 이 단자를 보니, 오장(五臟)이 불타는 듯하여 정신을 가눌 수 없다. 이 단자를 도로 내어 주라."
하였다. 원상(院相)009)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육승지(六承旨)010) 를 거느리고 진달하기를,
"올린 절목(節目)은 실로 고금(古今)의 제왕(帝王)이 차서(次序)를 이은 법전(法典)이요, 우리 조정의 열성조(列聖祖)께서 이미 시행한 전례(典禮)이니, 한결같이 애통한 정리에 맡겨 물려준 업적(業績)의 중대함을 생각지 않는 것은 결코 옳지 못합니다."
하고, 곧 단자를 도로 들여보내니, 답하기를,
"애통하고 망극한 중에 연달아 이 말을 들으니, 마음과 창자가 끊기는 듯하다. 절목을 도로 내어 주라."
하였다. 다음날 김창집 등이 또 진달하기를,
"사군(嗣君)은 반드시 성복일(成服日)에 즉위(即位)하는 것이 고금(古今)의 바꿀 수 없는 전례(典禮)입니다. 비록 열성조(列聖祖)의 순수한 효성으로도 여러 신민(臣民)의 정리에 힘써 따르지 않을 수 없었으니, 진실로 왕위(王位)는 하루도 비워둘 수 없으며 종사(宗社)는 하루도 의탁이 없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찌 한갓 효성만을 따라 옛 헌장(憲章)을 준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또 절목을 도로 들여보냅니다."
하니, 답하기를,
"사위(嗣位)의 거조(擧措)를 성복하는 날에 인자(人子)의 정리(情理)로서 어찌 차마 할 수 있으며, 애통함을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예(禮)는 인정(人情)에서 우러나는 것이니, 결코 따를 수 없다. 예조로 하여금 다시 의정(議定)하게 하라."
하였다. 김창집이 백관을 거느리고 정청(庭請)011) 하니, 답하기를,
"여러 해를 두고 시탕(侍湯)하던 나머지 반호(攀號)012) 의 망극한 애통을 당하니, 오장(五臟)이 끊기는 듯하다. 다만 바라건대 여러 경(卿) 등은 나의 지극한 마음을 양해하여 빨리 정침(停寢)하고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양사(兩司)013) 에서 합계(合啓)하고, 옥당014) 에서 차자(箚子)를 올리고, 백관이 정청(庭請)하고, 삼사(三司)015) 에서 복합(伏閤)016) 하여 날마다 두세 차례 계청하니, 11일 병오에 이르러 비로소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경덕궁(慶德宮)에서 즉위(即位)하였다. 정원(政院)·옥당·춘방(春坊)의 관원이 조복(朝服)을 갖추고 자정문(資政門) 밖 동쪽 뜰에서 열지어 앉아 욕위(縟位)를 설정(設定)하였다.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사위(嗣位)할 때에 명보(明寶)를 쓰는 것은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유교(遺敎)입니다."
하고, 드디어 중궁전(中宮殿) 승전색(承傳色)을 불러 아뢰게 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관명(李觀命)이 여차(廬次)에 나아가 최복(衰服)을 벗고 면복(冕服)을 갖추기를 청하였다. 통례(通禮)가 집화문(集和門) 밖에서 나오기를 청하니, 사왕(嗣王)이 평천 구류관(平天九旒冠)을 쓰고 흑면복(黑冕服)을 착용하고, 큰 띠[帶]를 띠고 붉은 신을 신고 청규(靑圭)를 가지고 걸어서 집화문을 나갔다. 사왕(嗣王)이 욕위(縟位)에 나아가 사배(四拜)한 후에 향안(香案) 앞에 오르니, 김창집이 빈전(殯殿)에 나아가 대보(大寶)를 가져다 바쳤다. 사왕이 대보를 받아 도승지(都承旨)에게 주고 욕위에 나아가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는 걸어서 숭정문(崇政門) 동쪽 협문(夾門)을 나갔다. 정문(正門)의 중앙에 어좌(御座)를 베풀었는데, 사왕이 어좌의 동쪽에 서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다가, 승지와 대신이 앞으로 나아가 힘써 청하니 비로소 어좌에 올랐다. 3품 이상은 조복(朝服)을 갖추어 입고 3품 이하는 흑단령(黑團領)을 갖추어 입었다. 백관이 머리를 조아리고 산호 천세(山呼千歲)를 부르니, 환궁(還宮)하였다.
숭정문(崇政門)에서 교서(敎書)를 반포하였다. 그 교서에 이르기를,
"왕(王)은 말하노라. 선왕(先王)께서 조정의 여러 신하를 버리니 갑자기 큰 상사(喪事)를 만났고, 소자(小子)가 왕위(王位)에 올랐으니 옛 헌장(憲章)을 부득이 따랐도다. 가슴을 치며 부르짖어도 미치지 못했으니, 이에 널리 교서를 전포(傳布)하노라. 열성조(列聖祖)께서 대통(大統)을 드리웠으니, 많은 역년(歷年)을 누리었네. 조종(祖宗)의 공덕은 삼대(三代)017) 의 융숭함을 능가하였고, 다스리는 제도가 이루어져 백세(百歲)의 후손을 계도(啓導)해 주었도다. 오직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는 크게 이어받고 널리 나타내시어 지극한 조행(操行)은 하늘에서 품부(稟賦)했으니, 효성(孝誠)이 신명(神明)에 통하였고, 다스리는 방도가 날로 승평(昇平)하여 풍교(風敎)가 온 나라에 미쳤도다. 유도(儒道)를 숭상하여 문화가 크게 밝아지고, 윤리(倫理)를 닦아 기강(紀綱)이 바로 섰도다. 곤궁한 백성을 불쌍히 여겨 혜택을 널리 입혔고, 하늘을 공경하여 반성하고 수양하니 응답이 어김없었다. 40년의 근고(勤苦)는 쌓이어 영위(營衞)018) 가 손상되었고, 10년 동안 병으로 신음하다가 마침내 약도 효험이 없었다. 금등(金縢)의 열쇠를 열어 복서(卜筮)의 해로움 없기를 바랐는데, 옥궤(玉几)에서 유명(遺命)를 내렸으니 몽조(夢兆)의 징험 없음을 차마 말할손가? 어찌 하늘을 탓하리요, 나에게 재앙이 내렸노라. 얼굴 뵈올 날이 없으니 빈 궁전(宮殿)에 대하여 마음만 아팠고, 문안 올린 지 새벽을 격했으니 음성은 오히려 귀에 남아 있구나. 하물며 거적자리에서 거처하는 날을 당하여 어찌 어좌(御座)에 앉아 보새(寶璽)를 받는 의식(儀式)에 편안할손가? 크고 어려움을 몸에 더하였다 생각하니 종사(宗社)의 책임이 더 무거운데, 뜻과 일을 계술(繼述)하는 의(義)에 힘쓰라고 신료(臣僚)의 간청이 더욱 굳었네. 자성(慈聖)019) 의 말씀을 우러러 본받았고, 옛 주(周)나라의 전장(典章)020) 을 좇았도다. 옥새(玉璽)를 맡으며 슬퍼하였고, 어좌(御座)에 임하여 애통했노라. 곤룡포(袞龍袍)를 몸에 걸치니 의탁할 데 없는 듯하고, 백관의 반열이 뜰에 추창하니 나의 슬픔만 더하도다. 전위(傳位)의 차서가 내 몸에 있으니 어떻게 기업(基業)을 이을 것이며, 어려운 일이 눈앞에 가득하니 어떻게 국가를 안정(安定)하리? 오직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을 것을 생각하고 왕업(王業)에 무너뜨림이 없기를 바라노라. 이미 칙명(勅命)의 유지(諭旨)를 선포(宣布)했으니, 어찌 은혜로운 사전(赦典)이 없겠는가? 아! 깊은 연못에 떨어지는 듯하니 어찌 공(功)을 도모하는 데 소홀하리? 이제 다행히 정교(政敎)를 시행하는 초두(初頭)에 있으니, 만물과 더불어 함께 공생(共生)할 것을 생각하노라. 이에 교시(敎示)하노니, 마땅히 모두 알지어다."
하였는데, 대제학(大提學) 이관명(李觀命)이 지어서 바친 것이다.
원상(院相)에게 명하여 여러 승지(承旨)와 더불어 함께 입직(入直)하도록 하고 공제(公除)021) 전에는 상사(喪事) 밖의 온갖 공사(公事)를 모두 출납(出納)하지 말도록 하였다.
헌부(憲府)와 간원(諫院)에서 의관(醫官)의 죄에 대하여 논계하기를,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여러 해 동안 미령(靡寧)하셨는데, 내국(內局)022) 의 여러 의관들이 병의 증세에 따라 약을 쓰지 못하여 마침내 승하(昇遐)의 애통함이 있기에 이르렀으니, 시약(侍藥)하던 여러 의관을 청컨대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이명(李頤命)을 고부 청시 승습 상사(告訃請諡承襲上使)로, 이조(李肇)를 부사(副使)로, 박성로(朴聖輅)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총호사(摠護使)가 아뢰기를,
"신사년023) 국상(國喪)024) 때에 산릉(山陵)의 우편(右便)을 비워 두었는데, 한결같이 장릉(長陵)025) 의 제도에 따르라는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유교(遺敎)가 이미 있었으므로 돌을 새겨 치표(置標)하였으니, 곧 능소(陵所)에 나아가 봉심(奉審)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6월 14일 기유
유명웅(兪命雄)을 경기 감사(京畿監司)로, 조성복(趙聖復)을 집의(執義)로, 서종섭(徐宗燮)·신절(申晢)을 정언(正言)으로, 홍현보(洪鉉輔)를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6월 15일 경술
내의원도제조(內醫院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연경(燕京)에 가는 기일이 촉박하다 하여 체직(遞職)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김창집(金昌集)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대신 2품 이상이 빈청(賓廳)026) 에 모여 아뢰기를,
"인조(仁祖)의 국상(國喪) 때에 장릉(長陵)의 호(號)를 잉용(仍用)했으니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능호(陵號)도 이제 또한 그대로 명릉(明陵)이라 칭호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인하여 대행 대왕의 시호(諡號)를 장문 헌무 경명 원효(章文憲武敬明元孝)로 올렸으니, 법도 대명(法度大明)을 장(章)이라 하고, 도덕 박문(道德博聞)을 문(文)이라 하고, 상선 벌악(賞善罰惡)을 헌(憲)이라 하고 강강 이순(剛强以順)을 무(武)라 하고, 숙야 경계(夙夜儆戒)를 경(敬)이라 하고, 조림 사방(照臨四方)을 명(明)이라 하고, 입의 행덕(立義行德)을 원(元)이라 하고, 대려 행절(大慮行節)을 효(孝)라 하였다. 묘호(廟號)는 숙종(肅宗)이니 강덕 극취(剛德克就)를 숙(肅)이라 하고, 전호(殿號)는 효령(孝寧)이라 하였다. 단의빈(端懿嬪)027) 을 봉(封)하여 단의 왕후(端懿王后) 【빈(嬪) 심씨(沈氏)는 숙종 44년(1718) 무술에 졸(卒)했으니, 이에 이르러 추봉(追封)하여 왕후(王后)를 삼았다.】 를 삼았으니, 전호(殿號)는 영휘(永徽)요, 능호(陵號)는 혜릉(惠陵)이라 하였다.
총호사(摠護使)가 아뢰기를,
"도감(都監)의 온갖 수용품(需用品)은 전례에 의하여 외방(外方)에 분정(分定)함이 마땅하나, 왕대비전(王大妃殿)께서 특별히 은자(銀子)를 내려 보용(補用)하게 했으니, 만일 부족하거든 호조(戶曹)로부터 먼저 당겨 쓰고 그 가격을 각 고을에 분정(分定)하면 거의 폐단을 덜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때에 왕대비전에서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남긴 뜻이 오늘날에 미쳐 백성의 힘을 손상시킬까 염려스럽다고 효유하고, 내탕(內帑)에 저축된 은자(銀子) 3천 7백 냥을 내려 주어 도감의 수용(需用)에 쓰게 하였으니, 이에 중외(中外)에서 모두 힘입었다. 아! 병환으로 신음하는 중에도 생각이 이에 미쳤으니, 어진 성덕(聖德)이 전대(前代)에 뛰어남을 볼 수 있었다.
6월 17일 임자
김상원(金相元)을 승지(承旨)로, 조태구(趙泰耉)를 판윤(判尹)으로, 이집(李㙫)을 경기 감사(京畿監司)로 삼았다.
정언(正言) 신절(申晢)이 상소하여 상제(喪制)에 대하여 논하기를,
"성복(成服)한 후에 조신(朝臣)들의 조석 곡림(朝夕哭臨)은 마땅히 궐(闕)할 수 없는데, 삭망(朔望)에 배제(陪祭)한 외에는 비록 금성(禁省)028) 에 입직(入直)했던 자도 한 번 곡림하지 못하였습니다. 황조(皇朝)029) 에서는 3일 동안 조석 곡림이 있고 7일 동안 아침에 곡림하는 제도가 있었으니, 예관(禮官)에게 순문(詢問)하여 곡림하는 절차를 빨리 결정하소서. 각사(各司)의 장관(長官) 이외에는 재신(宰臣)의 반열에 있는 자들도 모두 상장(喪杖)받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일찍이 시종(侍從)의 반열에 있었거나 진주(陳奏)의 일에 전대(專對)하던 관원들은 모두 상장을 받게 한다는 것이 주자(朱子)의 정론(定論)이니, 이제 이를 변통하는 것은 그만둘 수가 없을 듯합니다. 선정전(宣政殿)에 빈전(殯殿)을 설정(設定)하는 것은 실로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유교(遺敎)가 있었으니, 인산(因山)030) 전에 길일(吉日)을 택하여 옮겨 봉안(奉安)하면 〈선왕(先王)의 뜻과 사업을〉 계술(繼述)하는 효도에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세초 문서(歲抄文書)031) 가운데 김세흠(金世欽)·박태춘(朴泰春) 같이 관계가 매우 중한 자들은 혼동하여 직첩(職牒)을 돌려주는 은전을 입었으니, 이 같은 자들은 도로 회수(回收)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위로 자전(慈殿)의 하교를 받들어 빈전을 옮겨 봉안하는 것은 중대한 일이니, 대신에게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곡림(哭臨)과 상장(喪杖)을 받는 일은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할 것이며, 아래 조항(條項)의 일은 이미 대사령(大赤令)을 거쳤으니 논하지 말라."
하였다. 예관(禮官)이 대신에게 헌의(獻議)하기를 청하니,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헌의하기를,
"조신(朝臣)들의 조석 곡림의 절차는 예경(禮經)과 전의 일에 이미 의거할 만한 문안(文案)이 있으나, 백관이 각기 맡은 바 일이 있어 여가(餘暇)가 없는데 〈곡림에 참여하면〉 사무를 광폐(曠廢)하게 되기가 쉬우니, 다만 궐내(闕內)에 입직(入直)한 관원으로 하여금 조석 곡림에 참여하게 하되 공제(公除) 때까지 한정하게 하소서. 상장을 받는 일은 주자(朱子)의 의논에 이른바, ‘일찍이 시종(侍從) 이상을 지낸 자와 진주(陳奏)의 일에 전대(專對)한 자는 모두 상장 받는 것을 허락한다.’는 말이 있으니, 이제 일찍이 당상 시종(堂上侍從)을 지낸 자와 대관(臺官)으로서 시종 이상에 있던 자들은 상장 받기를 허락함이 무방(無妨)할 듯합니다. 주자(朱子)는 군수(君守)도 상장을 받는 중에 참여한다고 하였으니, 지금의 수령(守令)은 옛날 군수와는 같지 않지만 병사(兵使)·수사(水使) 또한 상장을 받도록 허락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이명(李頣命)은 헌의하기를,
"금성(禁省)에서 입직(入直)하는 중에 병조(兵曹)·총부(摠府)의 당상(堂上)도 또한 숙위 근신(宿衞近臣)이니, 나란히 정원(政院)·옥당과 함께 참여한다면 반열(班列)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약방(藥房)의 문안하는 관원과 삼사(三司)의 2품 이상으로서 공사(公事)로 인하여 궐문(闕門)에 들어온 자와 무릇 숙배 사은(肅拜謝恩)하는 자와 배사(拜辭)하는 자는 모두 아침 곡반(哭班)에 함께 입참(入參)하게 할 것이며, 마침 저녁때가 되면 또한 곡림(哭臨)을 허락하되, 인산(因山) 전으로 한정하는 것이 참작하는 데 마땅할 듯합니다. 주자(朱子)가 또 일찍이 시종(侍從) 이상에 임명된 자와 진주(陳奏)의 일에 전대(專對)한 자는 모두 상장을 받도록 허락한다는 의논이 있었으니, 지금 당상(堂上) 이하로서 일찍이 시종(侍從)을 지낸 자는 다 상장을 받는 반열에 둘 것이요, 중국(中國)의 군수(君守)도 또한 상장을 받았으니 지금의 병사·수사 또한 상장을 받음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분부하기를,
"상장을 받는 것은 영상(領相)의 의논에 따르고, 곡림에 관한 일은 판부사(判府事)의 의논에 따라 시행하라."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또 빈전(殯殿)을 옮기는 절차로써 대신에게 의논하니, 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頣命)이 의논하기를,
"이제 임종(臨終)의 유명(遺命)을 어긴 것은 사세(事勢)에 따른 것이니, 빈전(殯殿)을 열고 초빈(草殯)을 모시는 것은 그렇게 할 때가 아닙니다. 만일 끝내 변개할 수 없다면 사유(事由)를 추고(追告)함은 아마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분부하기를,
"자전(慈殿)에 품의하였더니, ‘선왕(先王)의 유교(遺敎)는 자정전(資政殿)이 좁은 것을 염려하였으므로 선정전(宣政殿)에 봉안(奉安)하라고 한 것인데, 지금에 이르러 재궁(梓宮)032) 을 옮기는 것은 사체가 중난(重難)하다. 대신의 뜻이 내 의향에 맞는다.’ 하셨으니, 판부사의 의논에 따라 시행하라."
하였다.
지평(持平) 홍현보(洪鉉輔)가 상소(上疏)하기를,
"능침(陵寢)에 소제(素祭)033) 를 올리는 것은 오로지 고려(高麗) 때에 불교(佛敎)를 숭상하는 풍속에서 나온 것인데, 하물며 상식(上食)에 소찬(素饌)을 쓰는 것은 더욱 의의(意義)가 없는 일입니다. 지금부터 빈전(殯殿)의 조석전(朝夕奠)과 그 나머지 사전(祀典)에 한결같이 예경(禮經)의 뜻을 따라서 육선(肉膳)으로써 설행하고, 각릉(各陵)의 절사(節祀)와 기신제(忌辰祭)에도 또한 변통(變通)함이 마땅합니다. 이제 이 참최(斬衰)의 복제(服制)는 실로 수천 년 동안 없었던 거조(擧措)이니, 신민(臣民)의 복제에 대하여 일찍이 전일이 미비(未備)된 고사(故事)를 이끌어 전례(前例)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삭망(朔望)의 성대한 제수를 올리는 날에 파산관(罷散官) 및 관학 유생(館學儒生)이 외반(外班)에서 망곡(望哭)하는 절차는 성복(成服)의 의식(儀式)처럼 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예관이 인하여 대신에게 문의하니,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의 의논하기를,
"혼전(魂殿)에 소선(素膳)을 올리는 것은 진실로 고례(古禮)에 합당하지 않은 듯하나, 안에서 이미 공상(供上)의 어육(魚肉)을 썼으니, 소선을 겸용(兼用)함이 어찌 큰 해로움에 이르겠습니까. 능침(陵寢)에 소선을 올리는 것은 선신(先臣)들이 일찍이 헌의(獻議)하여 수백 년 동안 준행하던 예절로서, 하루아침에 변경하기 어려운 뜻을 반복하여 진달한 것이니, 어찌 감히 다른 의견이 있겠습니까? 삭망(朔望)의 제전(祭奠)을 올리는 날에 파산관 및 관학 유생들이 외반(外班)에서 망곡(望哭)하는 것은 정리(情理)와 예절에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頤命)은 의논하기를,
"빈전(殯殿)과 혼전(魂殿)은 문소전(文昭殿)034) 의 옛 전례(典例)를 참조(參照)할 수 있으며, 또 듣건대 안에서 공상(供上)의 어육(魚肉)을 겸용(兼用)한다 하는데, 이는 또한 송(宋)나라 때 종묘(宗廟)가 제향(祭享)에 아반식(牙盤食)035) 을 아울러 올린 뜻에 의거한 것이니, 우선 변통함을 허락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외반(外班)에서 망곡(望哭)하는 것은 비록 전례(前例)가 없으나, 예절은 돈후(敦厚)함을 좇는 것이 좋으니, 또한 인산(因山) 전까지 시행하도록 허락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행 대왕의 효성으로서는 선조(先朝)에서 시행하지 않던 육선(肉膳)을 지금에 이르러 시행한다면, 하늘에 계신 영혼이 반드시 불안해 할 것이니, 조종조(祖宗朝)의 전례(前例)에 의하여 시행할 것이며, 망곡(望哭)은 영상(領相)의 의논에 따라 시행하라."
하였다.
6월 18일 계축
이재(李縡)를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삼았다.
임금이 산릉 제조총호사(山陵提調摠護使) 이건명(李健命)을 인견(引見)하니, 아뢰기를,
"산릉(山陵)의 매표(埋標)를 살펴보니 갑좌 경향(甲坐庚向)이었습니다. 인현 왕후능(仁顯王后陵)의 분금(分金)036) 은 경인(庚寅)·경신(庚申)인데, 표석(標石)에 새긴 것은 병인(丙寅)·병신(丙申)이었으니, 대개 경인·경신은 대왕(大王)의 연갑(年甲)에 구기(拘忌)가 되어 이렇게 서로 어긋나게 된 것입니다. 일찍이 숭릉(崇陵)037) 을 살펴보았더니, 유좌 묘향(酉坐卯向)은 두 능이 모두 같았으나 대왕 능(大王陵)은 계유(癸酉)·계묘(癸卯) 분금이요, 왕후 능(王后陵)은 신유(辛酉)·신묘(辛卯) 분금이었는데, 외향(外向)은 두 능이 똑같았습니다. 대개 지가(地家)들은 외향으로써 큰 관계를 삼지 않으므로, 이제 이 분금이 왕후 능과 더불어 조금 다르나 외향은 숭릉의 예(例)에 의하여 전에 있던 능(陵)을 좇았습니다. 일찍이 장릉(長陵)038) 의 가 정자각(假丁字閣)을 보니 체양(體樣)은 약간 작은데, 왕비(王妃)의 능(陵)이 먼저 있었고 대왕(大王)의 능이 뒤에 있었으므로, 새로운 재궁(梓宮)을 옛 정자각(丁字閣)에 배설(排設)하고 왕비의 신위(神位)·상탁(牀卓)은 가 정자각에 옮겨 봉안(奉安)하였다가 3년 후에 훼철(毁撤)하였습니다. 지금도 장릉의 예(例)를 따라 왕비의 신위·상탁을 가정자각에 옮겨 봉안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6월 21일 병진
대비전(大妃殿)께서 언서(諺書)로 하교(下敎)하기를,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생존하셨을 때 하교에 ‘선원전(璿源殿)039) 에는 참봉을 차출하지 말고 대내(大內)에서 삭망(朔望)에 분향(焚香)하며, 내가 만약 불행히 〈세상을 떠난다면〉 장녕전(長寧殿)040) 에 있는 어진(御眞)을 펴서 봉안(奉安)하게 하라.’ 하셨는데, 나라가 불행하여 갑자기 오늘의 일을 당했으니, 장녕전의 어진을 어찌하여야 하겠는가?"
하였는데, 원상(院相) 김창집(金昌集)이 아뢰기를,
"장녕전의 어진을 평상시에는 궤 속에 봉안하였는데, 지금은 사체가 전일과 다르니 벽상(壁上)에 펴서 봉안함이 마땅할 듯하며, 화상(畫像)에 향사(享祀)하는 절차 또한 영희전(永禧殿)041) 의 예에 따라 하는 것이 마땅하니, 날을 가려 거행하되 국장(國葬)의 졸곡(卒哭)이 지난 후에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청컨대 해조(該曹)로 하여금 이에 의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6월 22일 정사
김연(金演)을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삼았다.
6월 23일 무오
헌부(憲府) 【집의(執義) 조성복(趙聖復)이다.】 에서 아뢰기를,
"원주 목사(原州牧使) 심정보(沈廷輔)는 왕실(王室)의 지친(至親)으로서 선조(先朝)의 돈후(敦厚)한 은총을 입었는데, 저번 성후(聖候)의 위독한 날을 당하여 여러 대신과 함께 불러 들이라는 하교(下敎)를 받았는데도 지레 궐문 밖에 나가 여러 차례 재촉하여 간신히 찾았으며, 운명(殞命)한 후에야 비로소 입시했으니, 소홀하고 근신하지 않은 일이 지극히 한심합니다. 청컨대 심정보의 관작을 삭탈하소서. 박태춘(朴泰春)·여필중(呂必重)·강이상(姜履相)·김세흠(金世欽)·이언명(李彦明)·홍석귀(洪錫龜) 등은 혹 흉언(凶言)을 전파하고 혹은 흉인(凶人)을 소를 올려 구호(求護)했으며, 혹은 음모(陰謀)를 비밀리에 협조하여 모두 변원(邊遠)으로 추방되는 형률(刑律)을 당했다가, 오랜 후에 비로소 사면(赤免)을 입었으나, 범죄가 지중(至重)하니 가볍게 옛 직첩을 돌려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직첩(職牒)을 돌려 주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6월 24일 기미
헌부(憲府)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6월 25일 경신
헌부(憲府)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6월 26일 신유
임금이 약방(藥房)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약방도제조(藥房都提調) 김창집(金昌集)이 아뢰기를,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시지(諡誌)를 이제 바야흐로 찬진(撰進)하려 하는데, 정원 일기(政院日記) 및 시정기(時政記) 외에 무릇 외인(外人)이 알지 못하는 어렸을 때의 일과 내간(內間)의 일을 전번에 행록(行錄)에 첨입하여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저번에 대비전(大妃殿)께서 어제(御製)로 써 둔 것을 곧 내리겠다고 하교하셨는데, 어제 중에는 반드시 시지(諡誌)에 첨입할 문자가 있을 것입니다. 청컨대 빨리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이건명(李健命)이 아뢰기를,
"명릉(明陵)의 오른쪽 비어 둔 곳에 석각(石刻)을 묻어 두었고, 이미 초단(草單)에 회격(灰隔)의 척수(尺數)를 써서 들였으니, 석각의 문서에 의하여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또 퇴광(退壙)은 척수를 감하라는 하교가 있었는데, 그렇게 한다면 퇴광의 제도가 너무 협소할 듯합니다. 예로부터 퇴광에 저장(貯藏)하는 명기(明器)가 매우 많으니, 이제 이 퇴광이 넓지 않다면 형세에 있어 장차 변통하는 바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 석각에는 유의복(遺衣服) 외에 서책과 의대(衣襨)는 넣지 말라는 하교가 실려 있었습니다. 기해년042) ·갑인년043) 의 국상(國喪)044) 에는 의대(衣襨)와 서책을 모두 퇴광에 넣었으나, 신사년045) 전교(傳敎)에 의하여 의대와 서책을 모두 넣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6월 29일 갑자
밤 5경(五更)부터 새벽까지 안개 기운이 있었다.
좌의정(左議政) 이건명(李健命)이 충훈부(忠勳府)의 진향(進香)은 《오례의(五禮儀)》에 실려 있지 않고, 또 친공신(親功臣)046) 이 없다 하여 정파(停罷)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여러 대신에게 의논하기를 명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頤命)이 의논하기를,
"충훈부에서 진향하는 일은 수백 년 동안 한 번도 폐지한 일이 없었으며, 반드시 시행하고자 청하는 것은 망극한 뜻을 조금이나마 펴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니, 거행하도록 허락할 것이요, 찬품(饌品)은 한결같이 관진향(官淮香)의 예에 의하여 행여나 넘치는 일이 없게 하여 대행 대왕의 경비를 줄이라는 유의(遺意)를 준행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6월 30일 을축
묘시(卯時)부터 진시(辰時)에 이르기까지 안개 기운이 있었다. 밤 5경(五更)에 유성(流星)이 오거성(五車星) 위에서 나와 간방(艮方)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형상은 바리때와 같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 가량 되었으며, 빛깔은 붉었는데, 빛이 땅을 비추었다.
헌부(憲府)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니,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전옥(典獄)에 현재 갇혀 있는 명화적(明火賊)으로 이미 승복(承服)한 16명이 서로 작당하여 옥문(獄門)을 깨뜨려 부수고 돌출(突出)하여 도망쳐 숨었는데, 형조에서 옥관(獄官) 및 순라장(巡邏將)을 나문(拿問)할 것을 계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형옥(刑獄)이 해이(解弛)하여 이졸(吏卒)들이 뇌물을 받고 죄수를 늦추어 주어 이 변고를 일으키게 되었으니, 듣는 자들이 한심하게 여겼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경종실록1권, 경종 즉위년 1720년 8월 (0) | 2025.10.20 |
|---|---|
| 경종실록1권, 경종 즉위년 1720년 7월 (0) | 2025.10.20 |
| 경종수정실록5권, 경종 4년 1724년 12월 (0) | 2025.10.20 |
| 경종수정실록5권, 경종 4년 1724년 9월 (0) | 2025.10.20 |
| 경종수정실록5권, 경종 4년 1724년 8월 (0) | 2025.10.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