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경종실록1권, 경종 즉위년 1720년 8월

싸라리리 2025. 10. 20. 10:15
반응형

8월 1일 을미

조상건(趙尙健)을 교리(校理)로, 김상옥(金相玉)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이재(李縡)를 함경감사(咸鏡監司)로, 조태억(趙泰億)·박휘등(朴彙登)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헌부(憲府)에서 전번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8월 2일 병신

김재로(金在魯)·황선(黃璿)·한세량(韓世良)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헌부(憲府)에서 전번의 계사를 거듭 아뢰고, 또 이르기를,
"선대왕(先大王)께서 환후가 날로 위독하여 묘사(廟社)와 산천(山川)에서 재차 기도(祈禱)를 올렸는데, 호조 정랑(戶曹正郞) 홍중범(洪重範)은 스스로 제관(祭官)이 되어 끝내 진참(進參)하지 않았고, 승하(昇遐) 후에도 수일(數日)을 경과한 후에 비로서 곡반(哭班)에 들어왔으니, 정례(情禮)가 쓸어서 다한 듯합니다. 청컨대 호조 정랑 홍중범을 파직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다만 홍중범의 일만 따랐다.

 

8월 3일 정유

지평(持平) 홍용조(洪龍祚)가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간원(諫院)에 있을 때에 산군(山郡)의 수령(守令)으로 있던 박휘등(朴彙登)의 체차(遞差)할 일을 풍자해 논한 바가 있습니다. 박휘등의 사직소(辭職疏)에는, ‘농병 쇠모(聾病衰耗)’ 네 글자를 점출(拈出)하여 자신을 매우 힘껏 변명하였는데, 귀먹은 병은 경중(輕重)의 사이에 버려 두고 쇠모는 백발(白髮)의 형상으로 돌렸습니다. 그리고 백 사람이 감심(甘心)하려 한다는 등의 설(說)에 이르러서는 입버릇이 패망(悖妄)하고 말뜻이 음참(陰慘)하였습니다. 신이 당초에 체차(遞差)하기를 논한 것은 백성을 위한 뜻에서 나왔는데, 필경에는 도리어 욕설을 퍼부어 모략 중상(謀略中傷)한 죄목으로 몰아넣었으니, 이 일 만으로도 마음이 불안합니다. 그런데 홍중범(洪重範)의 파직을 논한 후에 추후하여 들으니, 선대왕께서 승하(昇遐)하시던 날에 곡반(哭班)에서 홍중범을 보았다는 사람이 있으니, 수일(數日)을 경과한 후 비로소 곡반에 들어왔다는 한 구절 말은 차착(差錯)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청컨대 체직을 명하소서."
하니, 임금이 사면(辭免)하지 말라고 답하였었는데, 홍용조(洪龍祚)는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리니, 처치(處置)하여 체차시켰다.

 

8월 4일 무술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099)  이 상소하기를,
"신이 나이 늙고 풍증(風症)에 걸려 정신이 혼모하고 건망증(健忘症)이 심합니다.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승하(昇遐)하시던 날에 갑자기 대내(大內)에 들어와 일을 보살피라는 명을 받들고 경황 망조(驚惶罔措)하여 천식(喘息)으로 신음하던 중에 궐문이 이미 닫혀 금중(禁中)에서 밤을 지새우고 생기(省記)100)  의 한 가지 일은 전연 잊어버렸습니다. 죽을 시기가 박두하여 스스로 큰 죄를 저질렀는데 유사(有司)의 계청으로 인하여 다만 파직에 그쳤고, 이제 또 서용(敍用)의 명이 내렸으니, 여정(輿情)이 반드시 해괴하게 여길 것입니다. 원컨대 율(律)에 비추어 정죄(定罪)하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렸다. 정재륜은 원래 검소와 절약으로써 칭송이 있었고, 또 조가(朝家)의 전장(典章)에 연달(練達)한 것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대행 대황이 승하하던 날에 의빈(儀賓)101)  으로서 들어와 염습(斂襲)의 예(禮)를 받들었으나, 이미 물러 나와서 생기(省記)에 이름을 올리지 않은 채 이내 금중(禁中)에서 유숙하였으므로, 대간(臺諫)의 말이 있었으니, 사람들이 그의 노모(老耄)함이 심한 것을 알았다.

 

동부승지(同副承旨) 김일경(金一鏡)이 상소하기를,
"신(臣)이 이정익(李禎翊)의 핍존(逼尊)한 죄를 탄핵했는데, 10년이 지난 후에 이정익이 갑자기 옛 직첩을 도로 받아 도리어 낭자(狼藉)하게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신이 그 죄악을 성토(聲討)했던 것은, ‘은혜를 베풀어 복을 맞이하였다.[市恩徼福]’는 네 글자의 긴요한 문안인데, 이정익의 소에는, ‘이에 은혜를 베풀어 복을 맞이한 것을 외람되게 〈나라를 위한〉 깊은 근심과 지나친 염려로 허여(許與)하였다.[乃以市恩徼福猥許以深憂過慮]’는 13자(字)로써 여러 대신의 죄를 억지로 얽어 만들었습니다. 원로(元老) 여러 신하들의 근심이 깊고 염려가 지나친 것은 다만 〈임금〉 한 사람을 위한 것인데, 이정익이 ‘시은 요복(市恩徼福)’ 네 글자로써 위아래를 지적(指摘)하여 핍박한 죄상에 대하여는 여정(輿情)이 모두 분통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또 이정익의 말에, ‘흉악한 이잠(李潛)이 일찍이 김일경이 말을 구실(口實)로 삼았다.’고 하였는데, 이잠의 원소(原疏)와 공사(供辭)가 모두 공가(公家)의 문자에 실려 있으니, 돌아보건대 어찌 털끝만치도 신의 아뢴 말과 비슷한 점이 있었습니까? 이정익이 이에 감히 터무니없는 말을 스스로 지어내어 은연중에, ‘상유소(嘗有所)’라는 세 글자로써 어렴풋이 윤곽(輪廓)만을 드러냈으니, 참으로 이른바 ‘막수유(莫須有)102)  ’란 것입니다. 선대왕(先大王)께서 일찍이 신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이르기를, ‘이정익의 지난해에 있었던 한 소장(疏章)에는 마음가짐이 온당치 못한 곳이 있었다.’ 하셨고, 또 전관(銓官)에 대한 비답에는, ‘이정익을 청환(淸宦)에 의망(擬望)함은 옳지 않다.’고 하셨는데, 그는 이에 기회를 타서 멋대로 날뛰고 있습니다. 신은 이미 이 지극한 무망(誣罔)을 받았으니, 어떻게 출납의 자리에 안연(晏然)히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흉악한 사람이 상소한 말을 어찌 족히 입에 올릴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는데, 승지(承旨) 황선(黃璿)이 은밀히 품하여 비답을 개정(改正)하였다. 무릇 이정익의 소(疏)는 참으로 해괴한데, 이제 김일경의 소로 인하여 비답을 내린 후에 황선이 작환(繳還)한 것은 지극히 무엄한 일이다. 그리고 김일경은 흉악한 사람으로서 평일의 행동이 비루(鄙陋)하고 패악(悖惡)했으며, 항상 환로(宦路)에 뚫고 나아감을 급선무로 삼았다. 지난날에 이정익과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오늘날에 이르러 ‘시은 요복’ 네 글자를 끄집어 내어 은연 중에 아첨하여 은총을 받으려는 뜻이 있었으니, 사람들이 이로써 이미 그 마음씨가 음험함을 알았다.

 

병조 참의(兵曹參議) 홍석보(洪錫輔)가 상소하기를,
"정배 죄인(定配罪人) 이택(李澤)이 그 종을 시켜 격고(擊鼓)하였으니, 안연(晏然)하게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이 호남 도백(湖南道伯)으로 있을 때에 신의 아우 홍현보(洪鉉輔)가 문과(文科)에 등제(登第)한 후 노경(老境)에 있는 편모(偏母)를 보려고 와서 기쁜 마음으로 풍악(風樂)을 사용한 것은 인정에 당연한 일인데, 이에 근심과 경황(驚惶) 등의 말로써 온갖 트집을 꾸며내어 풍악을 갖출 날이 아닌 때에 사용한 것처럼 하였습니다. 그 이른바 채붕(彩棚)은 어떠한 물건인지 알지 못하며, 선기(選妓) 70명이 입을 전복(戰服)을 새로 만들었다는 것은 또한 매우 허황된 말입니다. 각도(各道)의 영고(營庫)는 문득 도신(道臣)의 사장(私藏)과 같은데, 어버이를 공봉(供奉)함에 있어 영고에서 취판(取辦)하더라도 무슨 허물됨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민호(民戶)에서 거두어 쓰는 것과 같다는 말은 그 뜻이 더욱 심각하여 억제(抑制)하는 말이니, 언관(言官)을 후욕(詬辱)하고도 부족하여 신에게까지 미친 것입니다. 원컨대 신의 이 소를 유사(有司)에 내려 낱낱이 안문(按問)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의하여 조처하게 하였다. 홍석보는 원래 교만하고 사치함이 한도가 없었는데, 전라도관찰사로 있을 때에 마침 그 아우가 문과에 등재하매 문희연(聞喜宴)을 크게 베풀어 사치가 극도에 달했으니,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이른바 이택이 홍현보에게 앙갚음을 하고자 하여 그 종으로 하여금 홍석보를 헐뜯게 한 것은 비록 무엄하다 하겠으나, 그 말은 거짓을 꾸민 것이 아니었으니, 사람의 방자하고 질탕(佚蕩)함이 이와 같고서야 어찌 패망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소를 올려 임금을 속인데 이르러서도 또한 거리낌이 없다 할 것이다.

 

집의(執義) 조성복(趙聖復)이 상소하기를,
"백성이 고통을 근심하여 요역(徭役)을 너그럽게 함은 오늘날의 급선무입니다. 그러나 유사(有司)의 신하들이 매양 경비(經費)를 염두(念頭)에 두어 무릇 도신(道臣)의 요역을 감하고 포흠(逋欠)을 늦추자는 청에 있어서는 일체 중난(重難)하게 여겨 들어주지 않으며, 비록 수령(守令) 가운데 오로지 각급(刻急)을 일삼아 백성의 재물을 빼앗아서 윗사람을 섬기는 자라도 묘당(廟堂)에서는 능리(能吏)라 하여 문득 포장을 가(加)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목민(牧民)의 임무를 맡은 자는 대부분 원망을 들어가며 봉공(奉公)함을 능사(能事)로 삼아 백성의 곤궁함을 관련없는 듯이 보면서 근심할 줄을 알지 못하니, 이것이 오늘날의 큰 고폐(痼弊)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수령을 차출할 즈음에 반드시 자상(慈祥)하고 단아(端雅)한 자를 가려 무마(撫摩)의 책임을 다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옛사람의 말에, ‘하늘은 실상(實狀)으로써 응(應)하고 형식으로써 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옛날 우리 선대왕께서 즉위(卽位)하시던 초두에 쌓여 온 포흠을 견제(蠲除)하라 명하고, 당년의 조세(租稅) 또한 양감(量感)하셨으니, 50년 승평(昇平)의 휴운(休運)을 누린 것은 실로 이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마땅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곧 상량(商量)하여 여러 해 쌓인 포흠을 비록 일시에 전감(全減)할 수는 없으나, 그 가운데 가장 오래 되어 수봉(收捧)하기 어려운 것은 적당히 탕감하여 초정(初政)의 덕의(德意)를 보이소서.
안성 군수(安城郡守) 박창윤(朴昌潤)은 한갓 윗사람을 잘 섬긴 것으로써 발신(發身)하여 해변의 곤수(閫帥)로 승진되었으니, 물론(物論)이 더욱 해괴하게 여깁니다. 대신(臺臣)의 탄핵함이 불가할 것이 없는데도 자신을 논평함에 노여워하여 감히 반서(反噬)할 계책을 품고 지방민(地方民)를 위협하여 언관(言官)에게 뇌물을 바쳤다는 등의 말로써 억지로 초사(招辭)를 받기까지 하였으니, 그 설계(設計)의 음험함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않는 전법을 시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상의하여 품처(稟處)하게 하라. 아랫 조항의 논한 바는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8월 5일 기해

심수현(沈壽賢)을 승지(承旨)로, 김태수(金台壽)를 장령(掌令)으로, 신사철(申思喆)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아뢰기를,
"경리청 도제조(經理廳都提調)가 저번에 자모 산성(慈母山城)의 창고에 유치(留置)한 은(銀) 1만 냥(兩)을 북한 산성(北韓山城)으로 옮길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자모 산성도 또한 서관(西關)의 요충 지대(要衝地帶)인데, 이제 만약 1만 냥을 수송(輸送)한다면 남는 바가 수천 냥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북한 산성 안에 이미 각 아문(衙門)의 창사(倉舍)를 설치했으니, 경고(京庫)에 쌓아둔 봉부동 은화(封不動銀貨)103)                   및 다른 재백(財帛)을 우선 실어들여 완급(緩急)에 대비(對備)하게 하고, 만일 용처(用處)가 있으면 도로 가져옴이 무방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서쪽 변방은 변란(變亂)에 대비하는 중요한 지대(地帶)이니, 무릇 군정(軍政)에 관련된 일은 말끔히 정돈해야 할 것이요, 군수품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미리 저축하여야 완급(緩急)에 쓸 수 있을 것입니다. 평안도에는 비국(備局)에서 구관(句管)하는 요군목(遼軍木)104)                  이 있는데, 혹은 진정(賑政)에 혹은 성역(城役)에 모두 충용(充用)하고 있으니, 낭비를 면할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 대부(貸付)하는 일을 일체 금지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공조 판서(工曹判書)        민진원(閔鎭遠)이 아뢰기를,
"진정(賑政)을 베푸는 해에 외방의 수령(守令)들의 이른바 백급(白給)105)                  의 자료(資料)는 경사(京司)와 영문(營門)의 전문(錢文)과 포목(布木)을 얻어서 본액(本額)은 살려두고 이자(利子)를 취하는 데 지나지 아니하므로, 대강대강 실호(實戶)에 나누어 주고 추수 후에 배액(倍額)을 징수하니, 토지를 가진 자들이 이로 인하여 파산(破産)합니다. 공명첩(空名帖)106)                  도 또한 큰 폐단이 있는데, 심한 자는 간혹 사사로운 수응(酬應)에 쓰고 그 값을 거짓 기록하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나이 60세 이상과 15세 이하 굶주려 쓰러지게 된 자는 수령이 혹은 월름(月廩)을 덜어내고 혹은 모곡(耗穀)107)                  을 청하여 가끔 무상(無償)으로 지급(支給)할 것이며, 장정(壯丁)은 남녀를 물론하고 혹 품팔이를 하고 혹 나무를 하더라도 생계를 이어갈 수 있을 것이요, 그 나머지 게을러서 백급(白給) 가운데 들기를 도모하였다가 진휼(賑恤)이 끝남에 미쳐서는 혹 흩어져 도적이 되고 혹은 구렁텅이에 쓰러지는 자도 있는데, 이같은 무리들은 백급(白給)하지 말 것이며, 다만 의지할 곳 없는 노약(老弱)만을 추려서 구제해 주는 것이 옳을 것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환곡(還穀)의 수효가 적은 고을에는 이전곡(移轉穀)을 청하여 농민에게 고루 나누어 주어 폐농(廢農)의 환난을 면하도록 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심택현(沈宅賢)이 아뢰기를,
"이른바 가설 공명첩(加設空名帖)은 그 값이 가장 많으므로 추증(追贈)의 규례(規例)를 잘못 열어 놓았는데, 곡식을 바친 자에게 추증의 은전(恩典)을 가하는 것은 매우 외잡(猥雜)한 데 관련됩니다. 지금부터 다량(多量)의 곡식을 내어 사사롭게 진휼한 자 이외에는 동지첩(同知帖)을 가설(加設)하여 추증하는 것을 일체 금지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사간(司諫)        김제겸(金濟謙)이 아뢰기를,
"저번 성상(聖上)께서 걸어서 보좌(寶座)에 납실 때에 정원·옥당의 서리(書吏)들이 그 사이에 끼어 감히 오르지 못할 자리에 뒤섞여 올라갔는데, 금훤 낭청(禁喧郞廳)이 금지하지 않았으니, 직책에 소홀함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해당 병조 낭관(兵曹郞官)은 추고(推考)하고 서리(書吏)는 조사하여 치죄(治罪)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8월 7일 신축

정택하(鄭宅河)를 지평(持平)으로, 홍치중(洪致中)을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홍계적(洪啓迪)을 호조 참의(戶曹參議)로, 한지(韓祉)를 전라 감사(全羅監司)로 삼았다.

 

사간(司諫) 김제겸(金濟謙)이 상소하기를,
"혼전(魂殿)의 진향(進香)은 신자(臣子)의 추모(追慕)하는 정리에서 나왔으나, 또한 물건의 풍성으로써 예를 삼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듣건대 각 아문(衙門)과 여러 궁가(宮家)에서 마련하는 비용이 수백 냥에서 천 냥에 이르러 서로 시샘을 하여 구차한 일과 바르지 않은 음식이 많이 있다고 하니, 오직 예경(禮經)의 간소(簡素)함을 귀중히 여기는 뜻이 아닐 뿐만이 아닙니다. 선대왕의 검소한 덕의(德義)는 전고(前古)에 뛰어나서 계사년108)   여름에 어진(御眞)을 모사(摸寫)할 때 날마다 드시는 찬품(饌品)이 지극히 간소하여 입시한 여러 신하들이 지금까지 흠탄(欽歎)하고 있는데, 오늘날 스스로 그 정성을 다하는 자가 대행 대왕의 평일 간직한 마음에 어긋남이 있으니, 각처의 진향과 찬품을 마땅히 삭감하게 하소서. 오늘날 능(陵)·전(殿)에 배치한 참봉이 조종조(祖宗朝)에 비교하면 그 수효가 갑절이나 많으며, 나이 젊은 유생들이 모두 벼슬길에 들어와 분경(奔競)109)  이 날로 심합니다. 지난해에 각릉(各陵)에 직장(直長)과 봉사(奉事)를 임시로 설치하였다가 얼마 후에 혁파하였으니, 바라건대 다시 각능에 참봉 한 자리를 취하여 혹은 직장(直長)을 삼고 혹은 벼슬을 옮겨 승륙(陞六)110)  하는 계제(階梯)를 삼을 것이며, 음관(蔭官)과 승문원(承文院) 및 성균관(成均館)의 참하관(參下官)으로서 융통하여 차제(差除)111)  하소서. 또 승문원관 성균관의 참하관으로서 차출(差出)한 찰방(察訪)의 자리를 취하여 전함(前銜) 음관의 견복(牽復)하는 자리를 만든다면 그 순편한 점은 한 가지뿐이 아닐 것입니다. 만일 시행할 일이라면 해조(該曹)에서 마땅히 다소(多少)의 절목을 마련할 것이니, 바라건대 재처(裁處)를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진향(進香)에 대하여는 선대왕(先大王)의 성덕(盛德)을 알지 못함이 아니며, 또한 오늘날 시작한 것이 아니니, 조종조(祖宗朝)에서 이미 시행한 법을 비록 전보다 더 할 수는 없으나, 또한 삭감해서도 안될 것이며, 여러 궁가(官家)에서 진향하는 일은 밖에서 참견할 바가 아니다. 아랫 조항의 일은 전조(銓曹)로 하여금 복주(覆奏)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8일 임인

주청 정사(奏請正使) 이이명(李頤命)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문(誌文)을 찬진(撰進)한 후에 물정(物情)이 협흡(浹洽)하지 아니하여 평판이 점차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행(使行)의 도중(道中)에서 소문을 들으니, ‘지문 가운데 누락된 일이 있고 말도 온당치 못하다 하여 흠을 삼는다.’고 하였는데, 신이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에 출사(出使)한 후에 대신 및 사신(詞臣)에게 명하여 마음을 기울여 수정(修正)하게 할 것을 청하였으며, 이미 윤허를 받았던 것입니다. 물의에 이른바 누락이라고 한 것은 원래 신이 우연히 빠뜨린 것이 아니라, 옛사람이 어버이의 허물을 숨기는 뜻에 붙이고자 한 것인데, 미천한 의견이 사리에 합당한지 또한 어찌 알겠습니까? 오직 빨리 죄벌을 가하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 지문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도록 명하시고 문자의 온당치 않은 데에 이르러서는 산개(刪改)함이 무방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지문 가운데 온당치 못한 문자는 전번의 차사(箚辭)에 의하여 묘당(廟堂)에 순문(詢間)해서 마음을 기울여 수정하게 하라."
하였다.

 

8월 9일 계묘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어영 대장(御營大將) 김석연(金錫衍)으로부터 삼가 듣건대, ‘효묘(孝廟)께서 꿈을 꾸었는데, 세자빈(世子嬪)의 침실에 이불로 덮어 놓은 물건이 있어서 열어 보니 그 가운데에 용(龍)이 있었으므로, 효묘께서 꿈을 깨어서 기뻐하여 말씀하시기를, 「이는 반드시 원손(元孫)을 낳을 기이한 조짐이다.」 하고 미리 원손의 자(字)를 명보(明普)로 정했다.’ 하였습니다. 그 말이 반드시 적실할 것이니 마땅히 지문(誌文)에 기록해야 할 듯합니다. 찬진(撰進)한 대신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기 전에 오히려 왕복하여 일을 완결지을 수 있습니다. 도감(都監)으로 하여금 빨리 변통하여 수록(收錄)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箚子)로 진달한 일을 도감으로 하여금 변통하게 하라."
하였다.

 

8월 10일 갑진

김민택(金民澤)을 정언(正言)으로, 김재로(金在魯)를 부제학(副提學)으로, 조상경(趙尙絅)을 헌납(獻納)으로, 홍계적(洪啓迪)을 강화 유수(江華留守)로 삼았다.

 

헌부(憲府)에서 전번의 계사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동부승지(同副承旨) 김일경(金一鏡)은 조정에 있어서는 언의(言議)가 청류(淸流)에 버림 받은 지 오래 되었고, 여러 고을을 역임(歷任)하여서는 또 탐오(貪汚)의 꾸지람이 많았습니다. 일전에 이정익(李禎翊)의 소를 도리어 꾸짖기에 이르러서는 마음씀이 위험하여 마치 고변(告變)하는 급서(急書)와 같았습니다. 만약 이정익의 죄범이 과연 김일경의 말과 같다면 누구인들 그 죄악을 성토(聲討)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선대왕께서 또한 어찌 청현(淸顯)의 반열(班列)에 복직시키고 심지어는 승탁(陞擢)하는 일까지 있겠습니까? 이제 김일경이 선조(先朝)의 처분을 모르는 체하고 사람을 곧장 악역(惡逆)의 죄목에 몰아넣었으니, 청컨대 파직시키고 길이 청선(淸選)에 의망(擬望)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산릉(山陵)의 후맥(後脈)이 무너진 곳에 돌을 나누어 운반해서 승도(僧徒)를 시켜 보축(補築)하되, 효릉 참봉(孝陵參奉)으로 하여금 감동(監蕫)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또 선조(先朝) 어제(御製)는 사체(事體)가 중대하므로, 따로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하고 당상(堂上)과 낭관(郞官)을 차출하여 목판으로써 간행(刊行)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며칠 뒤에 대비(大妃)께서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어서(御書) 1책을 임금에게 전하며 말하기를,
"이제 어서(御書)를 보니, 성의(聖意)에는 이를 모두 간행(刊行)하고자 하지 않은 듯하니, 대신들이 알지 않아서는 안된다."
하였다. 어서(御書)에 이르기를,
"《자신만고(紫宸漫稿)》는 지음에 따라 수록(隨錄)할 뿐이었으니, 원래 자손에게 간행(刊行)하게 할 뜻은 아니었다. 후일 조신(朝臣)들이 혹 나의 저술(著述)이라고 하여 열조(列朝)의 어제(御製)에 첨간(添刊)할 의논이 있거든 등서(謄書)하여 내려 줌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봉람(奉覽)한 후에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에게 보이니, 김창집이 아뢰기를,
"유교(遺敎)에는 비록 간행하고자 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후일 첨간(添刊)한다는 등의 말로써 본다면 전혀 간행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청컨대 유교를 교정청에 내보이소서."
하니, 임금이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8월 11일 을사

홍석보(洪錫輔)를 승지(承旨)·조상건(趙尙健)을 부응교(副應敎)로 삼았다.

 

8월 13일 정미

전교(傳敎)하기를,
"이조 판서(吏曹判書) 조태구(趙泰耉)는 잇따라 올린 상소에 대한 비답과 별유(別諭)를 내렸으나, 한결같이 버티고 나와서 숙배(肅拜)할 뜻이 없으니, 그 분의(分義)에 있어 매우 미안한 일이다. 서사(書寫)의 임무가 지극히 중대하고 정사(政事)의 천연(遷延)됨이 또 염려되니, 다시는 정세(情勢)로써 말하지 말고 마음을 돌려 길에 오르도록 각별히 하유(下諭)하라."
하였다. 이때에 조태구의 사직소(辭職疏)가 바야흐로 정원(政院)에 도착하였으나 또 한 도로 내려보내라고 명하였는데, 조태구가 또 기어이 사면하고자 하니, 본직(本職)을 체차(遞差)시키고 시책(諡冊)을 써 올리도록 명하였다.

 

8월 16일 경술

홍치중(洪致中)을 도승지(都承旨)로, 윤양래(尹陽來)·권엽(權熀)을 승지(承旨)로, 조명겸(趙鳴謙)을 집의(執義)로 삼았다.

 

장령(掌令) 박필정(朴弼正)이 소를 올려 송시열(宋時烈)을 효종(孝宗)의 묘정(廟庭)에 추후하여 배향(配享)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묘정에 배향하는 청은 비록 해를 넘겨 하더라도 윤허할 수 없다."
하였다.

 

8월 17일 신해

민진원(閔鎭遠)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조태구(趙泰耉)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조성복(趙聖復)을 헌납(獻納)으로, 김상옥(金相玉)·조상경(趙尙絅)을 교리(校理)로, 조상건(趙尙健)을 부응교(副應敎)로 삼았다.

 

8월 19일 계축

해에 양이(兩珥)112)  가 있었다.

 

8월 20일 갑인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아뢰기를,
"청은군(淸恩君) 한배하(韓配夏)는 저번에 탄핵을 입어 파직되었는데, 대간(臺諫)이 논의한 가운데 배반(盃盤)이 낭자(狼藉)한 일에 대하여는 남들이 매우 억울하다고 말합니다. 또 훈부(勳府)에서 진향하는 일도 주관하는 당상(堂上)이 없을 수 없으니, 한배하를 서용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서용함이 옳다."
하였다. 또 진달하기를,
"이덕영(李德英)은 해서(海西)에 있을 때의 치적(治績)으로 인하여 북백(北伯)에 발탁(拔擢)되었는데, 명론(名論)이 원래 가볍다는 대계(臺啓)의 탄핵을 받았으니, 너무 애석합니다. 내려 준 자급(資級)을 도로 거두지 말도록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자급을 도로 거두지 말고 그대로 두도록 함이 옳다."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아뢰기를,
"도정(都政)113)  의 천연(遷延)됨이 염려되는데, 이조 판서(吏曹判書) 민진원(閔鎭遠)은 척완(戚畹)114)  으로서 인혐(引嫌)하여 행공(行公)할 뜻이 없습니다. 비록 척신(戚臣)이라 하더라도 만약 재능과 명망이 있다면 채용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데, 하물며 즉위(卽位)의 초두(初頭)에 첫머리로 탁용(擢用)되었으니, 의지하여 믿는 마음이 우연하지 않은 듯합니다. 오직 성상(聖上)께서 각별히 권면하여 기필코 행공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재촉하여 임무를 살피도록 함이 옳다."
하였다. 또 진달하기를,
"김연(金演)이 곡반(哭班)에서 술을 마셨다 하여 탄핵을 받았는데, 김연이 원래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것은 온 조정이 모두 아는 바입니다. 마침 그때에 신기(身氣)가 불평하여 한 잔 술로써 기운을 소통시켰다 하니, 너그러이 용서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일체 서용(敍用)하라고 분부하였다. 김창집이 또 진달하기를,
"김상옥(金相玉)·조상건(趙尙健) 등에게 별달리 재촉하여 신록(新錄)115)  을 빨리 완성(完成)함이 좋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빨리 완성하도록 신칙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장령 박필정(朴弼正)이 한배하(韓配夏)를 탄핵하였다가, 대신이 구해(救解)하였다 하여 인피하였는데, 다음날 처치(處置)하여 출사(出仕)하게 하였다. 한배하와 김연에 대한 일은 전혀 자신과 취향(趣向)이 다른 자를 취모 멱자(吹毛覔疵)116)  한 데에서 나와 말이 모두 사실과 어긋나지마는, 바야흐로 국상(國喪)이 나서 미처 염습(殮襲)도 하지 않은 날인데, 한배하가 비록 한 그릇 박찬(薄饌)이라 하더라도 관부(官府)로부터 징공(徵供)하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니며, 김연은 비록 한잔 술로써 불평한 신기(身氣)를 소통시켰다 하지마는 곡반(哭班)에서 술을 마시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인데, 무정(無情)한 허물을 같이 무식한 데로 돌리니, 애석한 일이다. 이덕영은 북백(北伯)에 발탁되었다가 이미 대간(臺諫)의 탄핵으로 인하여 자급(資級)이 회수(回收)되었는데, 이는 또한 사실이 없는 일이지마는, 김창집이 사정에 끌려 자급을 되돌려 주기를 청하기까지 하면서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으나 대각(臺閣)에서는 묵묵히 한 마디 말조차 없었으니, 또한 해괴한 일이다.

 

8월 23일 정사

승지(承旨)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入侍)하였다. 승지가 김상옥(金相玉)·조상건(趙尙健)의 사직소(辭職疏)을 읽고 먼저 별달리 엄칙(嚴飭)하기를 청하여 재삼 그치지 않으니, 임금이 대답하지 않고 비답을 내려 이르기를,
"너희는 사직하지 말고 빨리 임무를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에 시배(時輩)들이 신록(新錄)을 완성하기에 급급하여 조상건 등의 출사(出仕)할 것을 협박하였는데, 이 두 사람은 소비(疏批)에서 개석(開釋)을 얻은 후 출사하고자 하여 모두 궐문 밖에 나아갔으나 임금이 끝내 재촉하지 않으니, 모두 낭패하고 물러갔다.

 

8월 24일 무오

이조 판서(吏曹判書) 민진원(閔鎭遠)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옛날 우리 인현 왕후(仁顯王后)께서 매양 신(臣) 형제의 명위(名位)가 점차 현달하는 것을 걱정하였는데, 그 말은 선왕께서 손수 지은 지문(誌文) 가운데 실려 있습니다. 신사년117)   후에 신의 형제가 모두 재상의 반열에 올랐으나 동반직(東班職)118)  에는 일찍이 한 번도 낙점(落點)이 내리지 않았으니, 이는 성비(聖妃)의 본뜻을 생각하여 극진히 보호를 더해 보전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판(吏判)의 직무를 끝내 사면(辭免)함은 너무 지나친데 관련된다. 경(卿)은 안심하여 사임하지 말고, 빨리 행공(行公)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대정(大政)119)  이 천연(遷延)된다 하여 차자(箚子)를 올려 체차(遞差)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8월 25일 기미

송상기(宋相琦)를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조태구(趙泰耉)를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조상경(趙尙絅)을 헌납(獻納)으로, 이인복(李仁復)을 수찬(修撰)으로, 윤헌주(尹憲柱)를 함경 감사(咸鏡監司)로 삼았다.

 

8월 27일 신유

간원(諫院)에서 전번의 계사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공물 연조(貢物年條)120)  의 매매(買賣)는 도민(都民)이 피폐(疲弊)해진 원인이 되었습니다. 선조(先朝) 때에 금지함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경리청(經理廳) 차인(差人)들이 조금도 거리낌없이 전날의 폐습(弊習)을 오히려 답습(踏襲)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차인 및 매매를 주관하는 공물 주인(貢物主人)121)  을 모두 가두어 치죄하소서."
하였는데, 다만 말단의 일만 윤허하였다.

 

8월 28일 임술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청대(請對)하여 입시하였다. 이건명이 아뢰기를,
"국조(國朝)의 각릉(各陵)에 표석(表石)이 없었는데, 계축년122) 영릉(寧陵)123)  을 천봉(遷奉)할 때에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표석을 세우기를 청하였고, 각능에도 또한 모두 세우기를 청하였습니다. 영릉에는 표석을 세웠으나 각능에는 머뭇거리다가 시행하지 못하였으니, 신릉(新陵)에 세우는 표석은 영릉의 제도와 모양을 따르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고, 김창집은 말하기를,
"이제 신릉의 입석(立石)을 계기(契機)로 하여 숭릉(崇陵)124)  ·익릉(翼陵)125)  에도 연달아 세우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신릉으로부터 차례로 세우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8월 29일 계해

송성명(宋成明)을 승지(承旨)로, 민진원(閔鎭遠)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송필항(宋必恒)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8월 30일 갑자

우부승지(右副承旨) 송성명(宋成明)이 상소하여 근래의 일을 논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일에 옥당(玉堂)을 차출(差出)하는 정사가 매우 한심스럽습니다. 일시(一時)의 재사(才士)들이 아무 죄과도 없이 공연히 묶여져 있는데, 최상리(崔尙履) 같은 자가 이미 전조(銓曹)의 낭관(郞官)에 의망(擬望)되었으면 어찌 한 자리 청환(淸宦)을 아낄 것이 있습니까? 그러나 그 사람은 이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조상건(趙尙健)·김상옥(金相玉) 같은 경우에는 염의(廉義)와 도리로써 헤아려 볼 때에 결코 출사(出仕)할 정세(情勢)가 아닌데도 오히려 얽매고 구박하여 반드시 그 자리에 앉히고야 말려고 하면서 오늘 파직하면 다음날 서용하기를 청하고, 다른 날에 또 파직하면 그 다음날 또 서용하기를 청하여, 옥당의 차출함에 있어 문득 이 두 사람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신은 알지 못하건대 이 두 사람 이외에는 하나도 옥당에 충원(充員)할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까? 이뿐이 아닙니다. 혹은 별달리 개석(開釋)의 말씀이 없는데도 억지로 탑전 하교(榻前下敎)라고 하면서 장황하게 써내고, 혹은 대신의 건의(建議)로 인하여 금추(禁推)126)  의 명령이 분명히 있는데도 끝내 승전(承傳)을 받들어 거행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거조(擧條) 가운데에는 임금의 분부에 없는 ‘당(當)’자(字)를 제멋대로 내려 구차하게 메꾸어 나가고, 또다시 태연하게 정관(政官)의 서용을 청했으니, 외간에 전하여 듣는 자들이 해괴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이는 바로 이른바 우리 임금에게 무례(無禮)한 자이니, 신은 그윽이 통분합니다."
하고, 또 논하기를,
"입직(入直)한 승지(承旨)가 은밀히 품하여 김일경(金一鏡)에게 내린 소비(疏批)의 개정(改正)을 청하였고, 서리(胥吏)에게 누설하지 말라고 경계하였으니, 인하여 견파(譴罷)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소(疏)를 살펴보고 소상히 알았다. 진달한 일은 뜻이 매우 좋으니, 어찌 마음에 유의(留意)하지 않겠는가? 황선(黃璿)을 견파(譴罷)하라는 청은 마땅하니, 그대는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승지(承旨) 권엽(權熀)·조명봉(趙鳴鳳) 등이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어 들이기를 계청(啓請)하기를,
"삼가 우부승지 송성명의 소를 보니 그 논열(論列)한 바가 오로지 조정을 어지럽힐 계책에서 나왔으며, 황선을 끌어들여 논박한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 매우 교묘하고 비참합니다. 그 당시 소비(疏批)가 내려오자 황선이 동료들과 더불어 상의하여 품지(稟旨)하였고, 곧 개정하여 내리는 비답을 만들었으니, 그 암암리에 은밀히 하지 않은 정상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그 말이 남몰래 은밀한 죄목으로 억지로 몰아넣었으니, 이것으로도 대개 그 마음씀이 참독(慘毒)함을 짐작할 수 있는데, 전하께서 그 어지럽히고 미혹하려는 정상을 미처 살피지 못하셨으니, 그윽이 통탄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이때에 임금이 유약하여 과단성이 없으니 시배(時輩)들이 더욱 거리낌없이 쥐고 펴는 것을 제멋대로 하였으며, 소비(疏批)에 대해서도 은밀히 품하여 개정(改正)을 청하는 데 이르렀으니 예전에 없었던 일이었다. 이는 대개 이정익(李禎翊)을 위하여 ‘흉인(凶人)’ 두 글자를 숨기려 한 것인데, 그 도리어 은밀히 농락한 죄목에 스스로 빠지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송성명이 소에 논열한 것은 모두 그 실상에 의거한 것인데, 심지어는 참독하고 미혹했다는 배척을 가했으니, 참으로 놀랄 일이다. 그러나 군자(君子)는 말하고 침묵함이 각기 그 때가 있는 것이다. 이때에 시배(時輩)를 공격한 것은 비록 분통한 데서 나왔으나, 자칫 시험해 본다는 의심을 받았으며, 이를 이어 분운(紛紜)하게 상소한 자들은 더욱 그 군박(窘迫)함을 당했으니, 군자(君子)가 어찌 가히 혐의를 멀리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전라 감사(全羅監司) 한지(韓祉)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무술년127)   가을에 김진상(金鎭商)이 권세항(權世恒)의 소어(疏語)로 인하여 한 소장(疏章)을 올려 그 할아비 김익훈(金益勳)의 억울함을 호소(呼訴)하면서 신의 아비를 참혹하게 무함(誣陷)하였으므로, 신이 소를 올려 〈무망(誣罔)한〉 사실을 밝혀서 이미 너그러운 비답을 받았습니다. 김진상이 또 소를 올려 신의 글 가운데, ‘김익훈이 터무니없는 무옥(誣獄)을 꾸며냈다.’고 날조(捏造)한 한 구절 말은 허새(許璽)·허영(許瑛)을 지적하기 위하여 발론한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선대왕(先大王)이 이에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허새와 허영을 두둔했다고 하여 사지(辭旨)가 지극히 준엄했으며, 신의 아비에까지 사단이 미쳤으니, 지금에 와서 생각하더라도 마음이 아픕니다.
무릇 임술년128)   옥사(獄事)는 두 가지 조항이 있으니, 하나는 허새·허영 등 역당(逆黨)을 죽인 옥사요, 하나는 전익대(全翊戴)의 무고(誣告)한 옥사이니, 두 가지 일은 조관(條貫)이 각기 다릅니다. 이른바 전익대의 무고란 것은 전익대가 스스로 고(告)한 것이 아니요, 김익훈이 은밀히 아방(兒房)129)  【일이 숙종 8년(1682) 임술(壬戌)에 있었다.】 에 고한 것으로서 그 사이의 정절(情節)이 허다한 과오(過誤)가 있었으니, 이것이 김익훈의 죄가 되는 것입니다. 신의 아비가 논계(論啓)한 것은 오로지 김익훈의 무고(誣告)에 관련될 뿐이요, 당초에 허새·허영의 옥사(獄事)에는 간여(干與)된 바가 없었습니다. 허새·허영은 옥사에 관하여는 신의 아비의 소에 일찍이 말하기를, ‘허새·허영의 역옥(逆獄)은 누구인들 통렬히 미워하지 않겠는가?’라고 했으니, 신이 비록 무옥(誣獄)이라 말하고자 하더라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의 이른바 터무니 없는 무옥을 꾸몄다는 것은 다만 전익대의 무옥을 꾸며냈다는 것이요, 허새·허영에게 간여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김진상의 이른바, ‘허새·허영의 옥사(獄事)를 무망(誣罔)으로써 이루었다.’는 것은 자연히 백지(白地)로 돌아간 것입니다. 무릇 김익훈이 전익대의 옥사를 꾸며냈다는 것은 허새에게 고하기 하루 전날 밤에 김환(金煥)에게 군뢰(軍牢)와 영기(令旗)를 주어 전익대를 달래고 협박하여 잡아다가 공초(供招)를 받고 가두었으며, 여러 날 동안 숨겨두었다가 국청(鞫廳)을 설치한 지 오랜 후에 비로서 전익대의 공초로써 아방(兒房)에 밀고(密告)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고한 바가 실상이 없었고, 전익대와 김환이 면질(面質)할 때에 미쳐 그 달래고 협박한 정상이 모두 드러났으니, 이로써 보건대 그 장황하게 꾸면낸 자취는 진흙 속에서 싸우는 짐승과 같을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김진상 부자의 자신을 변명하는 말에는 매양 이르기를, ‘전익대는 당초에 김익훈이 시킨 것이 아니라 제가 스스로 와서 발고(發告)한 것이니, 그 말의 허실(虛實)은 억측(臆測)할 수 없는 것이며, 여러 대신에게 문의한 끝에 【대신은 김수항(金壽恒)과 민정중(閔鼎重)을 가리킨 것이다.】  자신이 아뢰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알지 못하건대 김익훈이 김환을 보내지 않았고 영기와 군뢰도 보내지 않았는데, 전익대가 무단히 스스로 왔다는 말입니까? 김익훈은 반드시 전익대를 시켜 발고하게 하고자 했는데, 여러 대신들이 김익훈을 억제하여 발고하도록 했다는 말입니까? 김익훈은 또 즉시 발고하고자 했는데 여러 대신들이 반드시 여러 날을 숨겨두도록 했다는 말입니까? 또 달래고 협박한 한 조항에 대하여 매양 김익훈의 알 바가 아니라고 하였으나, 군뢰와 영기를 보낸 자는 곧 김익훈이었으니, 그 달래고 협박한 것은 과연 누가 시켰겠습니까? 김환에게 영기를 주어 전익대에게 보낸 자는 김익훈이요, 영기를 가지고 전익대를 낚아채어 김익훈에게 잡아온 자는 김환이며, 필경 전익대를 대신하여 발고한 자도 김익훈이었으니, 세 사람이 서로 안팎이 되었고, 서로 시종(始終)을 함께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데도 그 허실은 억측할 바가 아니며 달래고 협박한 것도 그의 알 바가 아니라고 했으니, 누구를 속이겠습니까? 하늘을 속이겠습니까? 그 터무니 없는 짓을 꾸며 일이 이룩되면 자신의 공로가 되고, 일이 실패하면 전익대에게 돌리려 한 것은 남들이 모두 아는 바입니다. 무릇 이것은 김익훈이 무옥(誣獄)을 터무니없이 꾸며낸 골자(骨子)이니, 김진상이 당연히 변명할 것도 다만 이에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다만 전후의 연주(筵奏) 및 아무런 관련도 없는 서주(書奏)의 문자를 널리 주워모아 동서(東西)로 늘어놓고 이리저리 얽어 메꾸었으나 오직 제가 변명해야 할 골자에 있어서는 감히 일언 반구(一言半句)도 지적하여 논변하지 못했으며, 또 ‘다른 날의 여지를 삼는다.[爲他日地]’는 네 글자로써 하나의 큰 패병(欛柄)130)  을 삼았으니, 말의 순서가 없음이 어찌 이에 이를 수가 있겠습니까?
선신(先臣)이 김익훈을 논할 때 피사(避辭)에 이르기를, ‘갑인년131)   이후에 간흉들이 나라의 권세를 잡았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욕됨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적당(賊黨) 허적(許積)에게 붙었다.’ 하였으니, 과연 털끝만큼이라도 간사한 자를 돌보고 의뢰함이 있어서 이와 같이 말을 했겠습니까? 저들이 사실에 의하여 변론한다면 허물에서 벗어날 길이 없으므로 이와 같은 말을 하여 그 추악한 권세를 유지하려 했으나, 하늘이 밝게 조림(照臨)하여 백세(百世) 후에 속이기 어려움을 알지 못했으니, 이들은 올바른 윤리로써 책망할 수도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신의 이 소(疏)를 유사(有司)에게 내려 곧 처분을 가하소서."
하니, 비답에 이르기를,
"이미 지난 일은 추후하여 제기(提起)할 필요가 없다. 경은 사면(辭免)하지 말고 직무에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아! 김익훈의 무고(誣告)는 곧 사론(士論)이 분할되는 원인이 되었으며, 옳고 그른 것이 밝게 드러나 백세(百世)을 기다리지 않고도 결말이 났으니, 효자(孝子)와 자손(慈孫)도 이를 변개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한지(韓祉)의 처음 소장(疏章)에는 ‘익대(翊戴)132)  ’의 두 글자는 거론하지 않았으므로 김진상이 이에 감히 두 가지 조항을 주워모아 곧장 무옥(誣獄)이라 하여 허새·허영의 옥사(獄事)에 돌리어 선왕(先王)께서 격노(激怒)한 엄교(嚴敎)가 있게까지 하였으니, 만약 이 소가 선조(先朝) 때에 있었더라면 김진상의 간교한 무함과 한지의 상소 내용을 남김없이 통촉했을 것이다. 선왕이 세상을 떠난 지 이미 오래 되어 마침내 충신 지사(忠臣志士)의 영혼이 저승에서 원한을 품게 되었으니, 애석한 일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