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병인
일식(日食)이 있었다.
임금이 친히 삭전(朔奠)을 거행하였다.
7월 2일 정묘
헌부(憲府)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형조 판서(刑曹判書) 유집일(兪集一)은 벼슬이 높은 품질(品秩)에 있으면서 문후(問候)의 반열에 참여하지 않았고, 몸이 곡반(哭班)에 있으면서 술병이 뒤에 딸려 있어 동료들이 나무랐고 물정(物情)이 놀라며 한탄했으니, 청컨대 관작을 삭탈하소서. 삼도감(三都監)047) 에서는 외방에 복정(卜定)048) 한 물품이 없으니 이는 성고(聖考)의 남기신 뜻을 준행한 것인데, 종친부(宗親府)의 진향(進香)은 지극히 풍성(豐盛)하고 사치하는 데에 힘써 여러 도(道)에 구청(求請)했으니, 청컨대 별진향(別進香)에 대한 구청의 절차는 빨리 도로 정지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임금이 따르지 않고, 다만 말단의 일만 윤허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頤命)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臣)이 선조(先朝)에 큰 은혜를 받은 것은 하해(河海)와 같아 헤아릴 수 없으니, 이제 산릉(山陵)의 역사에 있어 몸소 흙과 돌을 지고 벌레 같은 목숨을 바치는 것도 소원이었습니다. 이에 다시 임금의 하늘 같은 공덕을 찬술(撰述)하여 간책(簡冊)에 이름을 의탁하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이겠습니까? 시장(諡狀)의 문자를 찬집(纂集)함이 겨우 끝나자 외람되게 찬지(撰誌)의 명을 받들어 시장이 나오기를 앉아서 기다렸는데, 사행(使行)의 기일이 박두하였으니, 노둔한 재주를 가지고 빨리 이루기가 반드시 어려울 것입니다. 바라건대 성명(成命)을 거두시고 조정에 있는 유능한 자에게 맡기소서. 또 청인(淸人)들의 뇌물을 요청함이 날로 심하여 그 요청에 조금만 어긋나면 반드시 사단(事端)을 일으키니, 갑인년049) 에 문자를 적결(摘抉)한 것과 정축년050) 에 《회전(會典)》을 끌어댄 따위의 일로써 미루어 보더라도 그 기량(伎倆)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행(一行)의 원역(員役)이 빈손으로 갔다가 만약 뜻밖의 일이 있으면 실로 주선할 길이 없으니, 바라건대 정축년 사행(使行)에게 지급한 예에 의하여 허락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지문(誌文)의 찬진(撰進)은 사체가 중대하여 지나치게 사양함은 옳지 않으니, 빨리 지어 올리도록 하라. 아래 조항의 일은 묘당(廟堂)051) 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하유(下諭)하였다.
7월 4일 기사
이날 공제(公除)가 끝났다. 정원(政院)에서 아뢰기를,
"공제가 끝나는 날 원상(院相)은 파출(罷黜)하고 본원에서는 또한 전례에 따라 윤직(輪直)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원상은 파출하지 말고, 윤회(輪回)하여 입직하라."
하였다.
원상(院相)이 여러 승지를 인솔하고 아뢰기를,
"예로부터 국상(國喪)이 있을 때에 원상은 본래 성복(成服)하는 날을 한도로 하였습니다. 공제(公除)가 끝나기까지 입직하는 것은 원래 정해진 규례가 아닌데, 이미 공제가 지났는데도 그대로 원상의 칭호를 띠는 것은 더욱 미안한 일이니, 신 등도 파출을 허락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시보(諡寶)·개명정(改銘旌)·우주(虞主)의 식(式)을 계하(啓下)함이 마땅한데, 태묘(太廟)의 의궤(儀軌)를 상고해 보았더니, 성종실(成宗室)·중종실(中宗室)과 정종실(定宗室)·예종실(睿宗室)·인종실(仁宗室)의 금보(金寶)에는 묘호(廟號)와 시호(諡號)를 썼고, 각실(各室)의 금보에는 모두 묘호는 없고 시호만 썼었습니다. 을유년052) 금보(金寶)를 수보(修補)할 때에 각실의 금보 가운데 묘호(廟號)를 쓰지 않은 곳이 많았으므로 명묘(明廟)의 금보 또한 이 예에 의하여 써 넣어 개조(改造)하였습니다. 또 본조(本曹)의 등록(謄錄)을 상고해 보았더니, 기축년053) ·기해년054) ·갑인년055) 에는 다만 시호만 썼었습니다. 이제 이 시호 또한 태묘(太廟)의 각실(各室)에 다만 시호만 쓰는 예와 기축년 이후 이미 시행한 예에 의하여 묘호는 쓰지 말고 시호만 쓸 것이며, 명정(鉻旌)과 우주(虞主)의 식에는 존호(尊號)와 시호를 아울러 쓰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7월 5일 경오
송상기(宋相琦)를 동지 정사(冬至正使)로, 이교악(李喬岳)을 부사(副使)로, 조영세(趙榮世)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이조(李肇)를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조태구(趙泰耉)를 지춘추(知春秋)로, 송성명(宋成明)를 부응교(副應敎)로, 유척기(兪拓基)를 부수찬(副修撰)으로, 홍치중(洪致中)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조영복(趙榮福)을 충청 감사(忠淸監司)로, 김유경(金有慶)을 황해 감사(黃海監司)로 삼았으며, 증(贈) 우의정(右議政) 심호(沈浩)는 청은 부원군(靑恩府院君)에 추봉(追封)하였고, 어유귀(魚有龜)는 함원 부원군(咸原府院君)에 봉(封)하였다.
지평(持平) 홍현보(洪鉉輔)가 상소(上疏)하기를,
"오늘날 기강이 해이해져 만가지 일이 떨치지 아니하고, 백의(白衣)056) 가 관아에 출입하기를 예사(例事)로 알고 있으며, 당하관이 교자(轎子) 타는 것을 당연한 제도로 여기고 있습니다. 곡반(哭班)이 어떠한 자리인데, 혹 대낮에 일산(日傘)을 펼쳐 놓거나 혹은 술잔을 방자하게 돌리거나 혹은 담뱃대를 거만하게 뻗치며 다니는 것입니까? 전정(殿庭)에서 아침 저녁에 행하는 의식(儀式)과 빈전(殯殿)을 향해 망곡(望哭)하는 절차에 혹은 가장 늦게 당도하였다가 의식이 파(罷)하기도 전에 지레 돌아가는 자도 있는데, 종친(宗親)으로서 예법에 어두운 자와 미관 말직으로서 한갓 편안함을 도모하는 자가 더욱 심합니다. 군신(君臣) 상하가 서로 권면하여 조치(措置)가 합당하고 처리함이 중도(中道)를 얻는다면 기강이 떨치기를 기대하지 않더라도 자연히 떨쳐질 것입니다.
조정의 사이에 공론이 행해지지 아니하여 명문 거족들은 청현(淸顯)의 벼슬에서 임의로 활개를 치고, 한문 냉족(寒門冷族)들은 거개 환로(宦路)에 막히고 있으며, 방백(方伯)의 선임(選任)과 곤수(閫帥)057) 의 제수(除授)에 이르러서도 간혹 인재를 선택하지 않으니, 어렵게 여기고 삼가는 도리에 어그러지는 것입니다. 초사(初仕)의 길과 수령(守令)의 자리에 앞을 다투어 사사로이 청촉함이 날로 심하여 재능의 유무를 물론하고 권력이 있는 자는 문득 좋은 벼슬을 차지하고 세력이 없는 자는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위에서부터 참으로 좋아하고 미워하며 주고 빼앗는 것을 한결같이 공정한 시비에 따른다면 아래에 있는 자들도 또한 반드시 마음을 청렴결백하게 가질 것이니, 어찌 사사로움을 따르고 공도(公道)를 멸시하는 근심을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 나라의 군제(軍制)는 옛날과 달라서 외방의 속오(束伍)058) 는 더욱 몹시 허술합니다. 사천(私賤)으로서 본주인에게 사역(使役)된 자와 유민(流民)으로서 촌민(村民)에게 품팔이하던 자들이 거의 항오(行伍)에 편입되어 동작에 어두웠고 전투의 요령에도 소홀하였습니다. 임진년059) 이후에 별달리 훈국(訓局)060) 을 설치하여 진실로 양정(良丁)이 아니면 감히 예속(隷屬)되지 못하였는데, 사노(私奴)가 함부로 들어가 양인(良人)의 적(籍)을 거짓 일컬었으나 앞뒤의 수신(帥臣)들이 이를 조사하여 바로잡는 자가 없었으니, 교련관(敎鍊官)과 지구관(知彀官)061) 의 임무(任務)는 문득 백도(白徒)062) 들이 멋대로 나오는 첩경(捷徑)이 되었고, 구차하게 그 숫자만 채워 전혀 일을 일답게 하지 않았습니다. 빨리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좋은 방도를 변통하여 모두 바로잡는다면, 반드시 충실한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금중(禁中)의 직숙(直宿)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데 저번에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은 임금이 승하(昇遐)하는 날을 당하여 궁중(宮中)에서 연일(連日) 유숙(留宿)하며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으며, 예조 참판(禮曹參判) 김연(金演)은 반차(班次)에서 소변(小便)을 보고 그 사이에서 술을 마셨으니, 여러 사람들이 보고 놀라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모두 삭탈 관작(削奪官爵)의 벌을 내리소서. 상인(喪人) 이택(李澤)은 대가(大家)의 후예(後裔)로서 성품과 행실이 괴팍하였는데, 국상(國喪) 전에 백립(白笠)을 많이 만들어 두었다가 높은 가격으로 이익을 도모했으니, 그 정상이 통분합니다. 변원(邊遠)으로 추방하는 형전(刑典)을 결단해 내리소서. 남세진(南世珍)이 논한 이정사(李廷帥)의 죄범은 진실로 그 피사(避辭)와 같으나, 차례로 추론(追論)함이 무슨 불가함이 있기에 이에 홀로 누락되었다는 등의 말을 돌연히 나열(羅列)하여 우료(右僚)로 하여금 인혐(引嫌)하게 하려 한 것을 마땅하다 하는 것입니까? 빨리 견벌(譴罰)을 내려 공의(公議)를 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리고 가납(嘉納)하여 정재륜과 김연은 모두 파직하였으며, 남세진은 체차(遞差)하고 조진(條陳)한 사건은 묘당으로 하여금 상의하여 처치하게 하였다.
좨주(祭酒) 이희조(李喜朝)가 상소하여 임금이 덕(德)을 쌓기를 권면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신이 지난해에 편집(編輯)한 바 《동현주의(東賢奏議)》를 올리면서 아울러 기록한 선정신(先正臣) 이언적(李彦迪)의 《구경연의(九經衍義)》 가운데에 논설(論說)한 바로 인하여 가까운 장래에 진강(進講)할 것을 청하니, 연의(衍義) 본서는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정절(情切)을 가지고 포장하셨습니다. 듣건대 명종·선조 양조(兩朝)에서 국상(國喪)의 졸곡(卒哭) 전에 또한 경연(經筵)에 납시었다고 하는데, 오늘날 비록 예절을 갖추어 경연을 열 수는 없으나, 만약 유신(儒臣)을 인접(引接)하여 이 서책을 진강한다면 반드시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려 가납(嘉納)하였다.
7월 6일 신미
임금이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아뢰기를,
"정사(正使) 이이명(李頤命)이 올린 차자(箚子)의 말에, ‘청인(淸人)의 뇌물을 탐색(探索)함이 날로 심하여 조금만 요청한 바가 있어도 문득 사단을 일으킨다.’고 하였는데, 금번 사행(使行)은 승습(承襲)과 청시(請諡)의 두 가지 큰 일이니, 저들이 혹 조종(操縱)하는 환난이 있을 것입니다. 군문(軍門)의 은화(銀貨)는 다시 남아 있는 저장(貯藏)이 없을 것이니, 만 냥(兩)을 나누어 주어 보내어서 수용(需用)에 대비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아뢰기를,
"송상기(宋相琦)가 사신(使臣)으로 차정(差定)되었는데, 병약(病弱)하면 먼 길을 갈 수 없습니다. 변통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체차(遞差)하도록 명하였다. 김창집이 또 품질(品秩)을 변통하여 의망(擬望)해 들이기를 품의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건명이 아뢰기를,
"지석(誌石)은 대개 위에 큰 글자로 새겨야 되는데, 산릉 등록(山陵謄錄)이 각기 다릅니다. 기해년063) 에는 다만 묘호(廟號)만 썼고, 산릉(山陵)을 옮길 때 및 갑인년064) 춘간(春間)에는 모두 시호(諡號)를 썼으며, 갑인년 가을 국휼(國恤)065) 에는 묘호와 시호를 아울러 썼고, 경신년066) ·계해년067) ·신사년068) 에는 시호(諡號)와 휘호(徽號)를 아울러 썼습니다. 지금 외방의 의논에, ‘글자가 많고 작으면 마멸(磨滅)되기가 쉬우니, 시호와 휘호를 다 쓸 필요가 없고 다만 묘호만 쓰자.’고 모두 말하는 것은 자획(字劃)을 크게 하고 일을 생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정언(正言) 신절(申晢)이 아뢰기를,
"저번 정청(庭請)할 때에 좌윤(左尹) 윤취상(尹就商)은 몸이 궐내(闕內)에 있으면서 사차(私次)에 물러앉아 정반(庭班)에 나오지 않으므로, 대감(臺監)069) 이 사람을 보내어 나오기를 재촉했으나 도리어 꾸짖으며 편안하게 움직이지 않았으니, 청컨대 윤취상을 파직하소서. 일전에 형조(刑曹)의 죄수들이 옥(獄)을 깨뜨리고 도망쳤으니, 이는 전고(前古)에 없던 변고입니다. 옥관(獄官)들이 업중히 방비하지 못한 것이 지극히 해괴하며, 포청(捕廳)의 이졸(吏卒)들이 야간(夜間)의 통행을 금지할 때에는 무인지경처럼 제멋대로 쏘다녔습니다. 청컨대 좌우 포도 대장(左右捕盜大將)은 모두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해당 부장(部將)은 유사(攸司)로 하여금 치죄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7월 7일 임신
김운택(金雲澤)을 대사간(大司諫)으로, 박필정(朴弼正)을 장령(掌令)으로, 이의현(李宜顯)을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김중기(金重器)를 우윤(右尹)으로, 이희조(李喜朝)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삼았다.
헌부(憲府)에서 전번의 계사를 거듭 아뢰니 임금이 따르지 않고, 다만 유집일(兪集一)을 파직시켰다.
7월 8일 계유
이의현(李宜顯)을 동지 정사(冬至正使)로 삼았다.
임금이 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頤命)을 인견(引見)하였다. 이이명이 나아가 아뢰기를,
"소대(召對)에는 《강목(綱目)》을 강(講)할 것이니, 치도(治道)의 낮고 높은 것과 정령(政令)의 득실(得失)이 모두 이 책에 실려 있습니다. 옛사람이 거상(居喪)할 때에는 반드시 상례(喪禮)를 읽었으니, 이제 졸곡(卒哭) 전에 《예기(禮記)》에서 상례에 관한 것을 초출(抄出)하여 진강(進講)하면 예절을 익히는 도리에 이로울 듯합니다. 청컨대 옥당으로 하여금 영사(領事)에게 문의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이명이 아뢰기를,
"지문(誌文)은 곧 천추(千秋)에까지 유전(流傳)할 문자인데, 사행(使行)의 떠날 날이 멀지 않았으니, 산과 같이 노둔한 재질로서는 결코 기일 안에 지어 올리기가 어렵습니다. 다른 대신 중에도 찬술(撰述)할 사람이 있으니, 만약 체임(遞任)을 허락하신다면 선왕(先王)의 성덕(盛德)을 선양(宣揚)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다른 대신으로 하여금 찬진(撰進)하도록 명하였다. 이이명이 아뢰기를,
"금번에 상복(喪服)의 의절(儀節)을 여러 차례 개정하였으나, 일이 전도(顚倒)되어 오히려 미진(未盡)한 바가 있습니다. 졸곡 후에 상하의 복색(服色)을 모두 백포(白袍)와 백모(白帽)로써 계하(啓下)하였는데, 《오례의(五禮儀)》에는 졸곡 후에 상하가 오모(烏帽)와 오대(烏帶)와 백의(白衣)를 착용(着用)한다고 하였습니다. 일찍이 선조조 때에 민순(閔純)이 오모(烏帽)와 오대(烏帶)는 미안한 바가 있다고 하여 백포(白袍)와 백모(白帽)로써 개정하기를 청하여 지금까지 이를 준행하여 법식(法式)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여러 신하가 이미 최복(縗服)을 입었으니 소상(小祥) 때에는 그 최복을 당연히 갈아 입어야 할 것입니다. 최복이 시사복(視事服)과는 비록 다르나, 최복을 갈아 입기 전에 시사복을 지레 백포(白布)로 쓴다면 미안할 듯합니다. 상복(喪服)을 크게 변개(變改)한 후에도 오히려 중간에 조금 변개한 절차를 준용(遵用)하는 것은 이미 《오례의(五禮儀)》에 실려 있는 바도 아니요, 또 오늘날의 상복의 제도도 아닙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졸곡 후에 상하의 시사복(視事服)은 포모(布帽)와 포의(布衣)와 포대(布帶)를 착용(着用)하고, 소상(小祥)을 기다려 백포(白袍)와 백모(白帽)를 착용함이 옳을 듯하니,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여러 대신에게 문의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이명이 아뢰기를,
"국상의 졸곡 전에 사부(士夫)의 집에서 기제(忌祭)를 혹은 간략히 설행하는 자도 있고 혹은 설행하지 않는 자도 있으며, 묘제(墓祭)도 혹은 폐지하는 자가 있고, 삭망(朔望)의 참배도 또한 혹은 행하거나 혹은 행하지 않습니다. 이는 비록 국가의 전례(典禮)에는 관계가 없으나 일정한 제도가 있어야 할 것이니, 또한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작정하여 품처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이명이 아뢰기를,
"금번 사행(使行)에 있어 공화(公貨) 1만 냥(兩)을 주어 보냈으니, 이로써 수용(需用)에 족할 듯 합니다만, 저들이 은화(銀貨)의 다소(多少)에 따라 사행 접대의 후박(厚薄)을 삼았으므로, 매양 사행이 들어갈 때에 공화를 빌려 가고, 즉시 환상(還償)하지 않아서 각 아문(各衙門)의 축적(蓄積)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제 획급(劃給)한 1만 냥(兩)은 정축년070) 에 비교하면 이미 반액(半額)이 감손되었는데, 이제 만약 부족하다면 달리 취용(取用)할 곳이 없으니, 비록 정축년의 액수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공화 4, 5만 냥을 더 보내는 것은 형편상 부득이한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예조(禮曹)에서 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頤命)이 복색(服色)에 관한 일을 건의(建議)하면서 시사복(視事服)과 아울러 여러 대신에게 문의하기를 청한 것으로 인하여 드디어 대신에게 문의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오늘날에 상복(喪服)의 제도가 이미 정해져 있어 상하가 최복(縗服)을 입었으나, 소상(小祥) 때에 당연히 갈아 입을 것이니, 시사복도 이동(異同)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국상(國喪)의 졸곡(卒哭) 전에 사가(私家)의 기제(忌祭)·묘제(墓祭) 및 삭망 참알(朔望參謁)의 절차에 관하여는 우리 나라 제현(諸賢)의 의논이 또한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가 사사로이 기록한 바에 의하면, 기제와 묘제에 관해서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은 모두 당연히 행해야 한다고 말했고,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은 또 말하기를, 그 스승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이 매양 국상(國喪)을 만나면 묘제는 폐지하고 기제는 단헌(單獻)으로 거행했다.’고 하며, ‘참작하여 변통함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예가(禮家)의 번거롭고 간소(簡素)한 절차를 모두 똑같이 할 수는 없으니, 조가(朝家)에서 일정한 제도를 세울 필요는 없고, 각자가 생각하여 그 마음에 편안한 것을 구하여 한다면 모두 선정(先正)의 의논에 벗어나지 않아서 거행하는 바가 인(仁)에 가까우며 폐지하는 바가 의(義)에 가까울 것이니, 이와 같이 조처하면 아마도 어그러짐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여러 대신의 의논도 모두 같으니, 임금이 의논한 바에 의하여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홍문관(弘文館)에서 아뢰기를,
"진강(進講)할 서책을 영사(領事)에게 문의하였더니, 김창집(金昌集)은 이르기를, ‘옛사람이 거상(居喪)할 때에 예경(禮經)을 읽는 것은 대개 뜻한 바가 있어서이니, 이것이 원임 대신(原任大臣)이 청하게 된 까닭이다. 그런데 《예기(禮記)》는 편질(篇帙)이 너무 호번(浩繁)하고, 그 사이에는 또한 긴요하지 않은 편목(篇目)도 있으니, 악기(樂記) 등의 편(篇)과 같은 것은 또 오늘날의 진강(進講)해야 할 바가 아니다. 그리고 그 1질(帙)을 초사(抄寫)함에 이르러서는 창졸간에 마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진강에 합당한 편목을 경연(經筵)의 신하로 하여금 충분히 의논하여 이를 초출(抄出)하여 진강하게 함이 마땅할 듯하다.’ 하였으며,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은 이르기를, ‘《예기》 가운데에서 상례(喪禮)에 관련된 것을 뽑아 내어 진강함은 실로 옛사람이 거상(居喪)할 때 예경(禮經)을 읽는 뜻에 합당하다. 다만 편질(篇帙)이 호번하고 또 상례(喪禮)를 논설(論說)함이 여러 편(篇)에 뒤섞여 나왔으니, 1질(帙)을 초출(抄出)하면 어람(御覽)하는 데에 편리할 것이다. 그리고 《독례수초(讀禮隨抄)》 1책은 선정신(先正臣) 김상헌(金尙憲)이 초록(抄錄)한 것인데, 매우 요약(要約)하여 《예기(禮記)》의 중요한 말이 모두 실려 있으니, 이로써 진강함도 옳을 듯하다.’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영상(領相)의 의논을 따르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오늘 청대(請對)할 때에 지문(誌文)를 찬술(撰述)하는 일을 다른 대신에게 지어 올리도록 하였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체개(遞改)하지 말고 이 판부사(李判府事)로 하여금 제진(製進)할 일로써 전유(傳諭)하라."
하였다.
7월 11일 병자
홍치중(洪致中)을 도승지(都承旨)로, 송성명(宋成明)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이광좌(李光佐)를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이의현(李宜顯)을 판윤(判尹)으로, 조도빈(趙道彬)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홍계적(洪啓迪)을 호조 참의(戶曹參議)로, 민진원(閔鎭遠)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윤석래(尹錫來)를 사간(司諫)으로, 이덕영(李德英)을 함경 감사(咸鏡監司)로, 이재(李縡)를 강화 유수(江華留守)로 삼았다.
헌부(憲府)에서 전번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행록(行錄)을 찬출(撰出)하고자 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임어(臨御) 전의 일은 내가 알지 못하고 임어하신 후 40여 년 동안에 있었던 공덕(功德)에 관한 일은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소상히 알고 있으며, 또 망극한 중에 정신이 혼매(昏昧)하여 찬집(撰集)할 수 없다. 어제(御製)를 등서(謄書)하여 찬진(撰進)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7월 12일 정축
임금이 서울에 거주하는 90세 노인 세 사람을 불러들여 장차 인견(引見)하려 하였다. 마침 소대(召對)로 인하여 옥당(玉堂) 홍정필(洪廷弼)·유척기(兪拓基)가, ‘지금 임금이 거상중(居喪中)에 있어 군국 중사(軍國重事)와 강학(講學) 등의 일은 비록 폐지할 수 없으나 노인을 불러 볼 때는 아니다.’고 하여 번갈아 정침(停寢)하기를 청하니, 드디어 내보내라고 명하였다.
7월 13일 무인
또 소대(召對)071) 에서 진강(進講)할 책자를 여러 경연관(經筵官)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는데, 홍문관(弘文館)에서 아뢰기를,
"지경연(知經筵) 송상기(宋相琦)는 ‘《예기(禮記)》가 오경(五經)에 들어 있고, 소대(召對)는 또 법강(法講)과 다르며, 그 글이 또한 애매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데가 많으니, 인하여 강목(綱目)을 진강한다면 대단히 미안한 데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다.’ 하였고, 지경연 신임(申銋)은 ‘소대(召對)의 진강은 우선 인산(因山)의 역사(役事)가 마치기를 기다린 후에 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니, 만약 정치(政治)의 체제에 관련된 일이 있거나 혹 상례(喪禮)에 대하여 시급히 질문할 일이 있다면, 가끔 유신(儒臣)을 인접(引接)하여 강론함이 옳을 듯하다.’ 하였으며, 동경연(同經筵) 권상유(權尙游)는, ‘오경(五經)의 글은 반드시 반복(反復)하여 궁구(窮究)한 연후에야 비로소 득력(得力)할 것이므로, 널리 찾아 읽어서 보아넘길 수 없을 것이니, 만일 정(程) ·주(朱)072) 의 서적 가운데에서 긴요한 것을 선택하여 진강한다면 몸을 수양하고 사람을 다스리는 공효(功效)에 도움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였고, 동경연 이만성(李晩成)은, ‘예경(禮經)은 유가(儒家)의 여러 서적 및 사기(史記)와 다른 점이 있고, 소대(召對)의 사체는 또 법강(法講)과는 같지 않으니, 또한 구애되는 점이 없지 않다.’ 하였으며, 동경연 이관명(李觀命)은, ‘예서(禮書)의 글이 한만(汗漫)하고 심오(深奧)하여 강(講)에 임(臨)하여 듣고 흘린다면 실로 효력을 얻기 어려우니, 인하여 강목(綱目)을 진강함이 옳을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동경연(同經筵)의 의논을 따르도록 명하였다. 홍문관(弘文館)에서 또 아뢰기를,
"이미 영상(領相)의 의논에 의하여 시행하라는 하교가 있었고, 이제 또 동경연의 의논에 의하여 시행하라는 하교가 있는데, 동경연 세 사람의 의논이 각기 다르므로 전교가 내렸음에도 감히 하나를 지적하지 못하였으니, 어느 서적으로 결정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동경연 권상유의 의논에 의하여 주자(朱子)의 서적으로써 진강하라고 명하였다. 홍문관(弘文館)에서 여러 대신에게 의논하기를 청하였는데,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이르기를,
"주서(朱書)의 명목이 가장 많은데, 일찍이 선조(先朝)에는 매양 소대(召對)할 때에 《절작통편(節酌通編)》을 취하여 진강하였으며, 지금도 또한 이 서적으로 진강합니다. 그런데 이 서적은 일시(一時)에 여러 가지를 널리 읽을 수 없으니 매양 진강할 때에 6, 7판(板)을 넘지 말고 의리를 강구하는 데에 힘쓴다면, 성학(聖學)에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도록 명하였다.
권엽(權熀)을 좌승지(左承旨)로, 이정신(李正臣)을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윤석래(尹錫來)를 동부승지(同副承旨)로, 홍우전(洪禹傳)을 헌납(獻納)으로, 홍용조(洪龍祚)를 지평(持平)으로, 조태구(趙泰耉)를 지돈녕(知敦寧)으로, 조상건(趙尙健)을 부응교(副應敎)로 삼았다.
7월 14일 기묘
교리(校理) 홍정필(洪廷弼)이 상소(上疏)하기를,
"예로부터 제왕(帝王)이 즉위(卽位)하는 초두에 여러 신하들의 진계(進戒)하는 말이 많았으나, 오직 사상부(師尙父)073) 의 경승태(敬勝怠)074) 라는 한 마디 말과 질경덕(疾敬德)075) 세 글자가 천하 만고(天下萬古)의 제일 가는 요도(要道)이니, 덕을 새롭게 하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근본을 어찌 이 밖에 달리 구할 수 있겠습니까? 선유(先儒)의 말에, ‘한 마음의 공경에서 만 가지 선행(善行)이 선다.’고 하였는데, 대저 공경하면 마음이 지키는 바가 있어 하나를 주장하고 다른 데에 쏠리는 바가 없으므로, 의리의 경중(輕重)과 사물(事物)의 시비를 자연히 터득할 수 있는 것이니, 이른바 경(敬)이란 것이 또한 어찌 의관(衣冠)을 바르게 하고 첨시(瞻視)를 높이는 데에 그치겠습니까? 다만 항상 깨닫는 법리(法理)가 이것뿐일 것이니, 크게는 정령(政令)을 선포(宣布)함에 있어 반드시 생각을 거듭하여 정신을 가다듬고 작게는 일언 일동(一言一動)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몸을 돌이켜 살펴본다면, 이치에 밝지 않음이 없고 일은 이룩되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아! 《시경(詩經)》의 방락(訪落)·경지(敬之) 등 여러 편(篇)은 모두 성왕조(成王朝) 때에 지은 것인데, 그 수장(首章)에 이르기를, ‘공경하고 공경하라. 천도(天道)는 밝아서 그 명(命)을 보전하기가 쉽지 않도다.’ 하였고, 그 아래 장(章)에 이르기를, ‘나날이 이루고 다달이 나아가 학문이 계속하여 빛나고 밝음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제 우리 전하의 소대(召對)하는 거조(擧措)도 또한 이미 공경하고 또 배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번 유신(儒臣)의 상소 끝에 명종(明宗)·선조(宣祖) 양조(兩朝)의 일을 이끌어 말하였는데, 그 사이에는 아마도 차별(差別)의 단서가 없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무릇 명종이 즉위(卽位)하던 날에 연세가 12세였으니, 그 때에 임금이 바야흐로 나이 어려 학문이 가장 급했기 때문에 졸곡(卒哭) 전에 강연(講筵) 열기를 청하였고, 선조의 즉위한 초두(初頭)에 이르러서는 나이 겨우 16세였으니, 오늘날에 이끌어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성학(聖學)은 진실로 처음부터 끝까지 힘써야 하겠지마는, 어린 나이에 하루가 시급한 데에 비교한다면 오히려 차이가 있습니다. 이제 공제(公除)가 겨우 지났는데, 갑자기 강연(講筵)을 열어 한편으로는 곡벽(哭擗)을 그치지 않고 강독(講讀)을 아울러 행한다면 정례(情禮)로 참작하건대 어찌 미안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효종(孝宗)께서 거상(居喪)하던 날에 예조(禮曹)에서 세자(世子)의 졸곡(卒哭) 전 서연(書筵)의 복색을 의논하여 아뢰니, 하교(下敎)하기를, ‘경(經)은 만세(萬世)의 상도(常道)이니 한때의 연고(緣故)로서 문득 권도(權道)를 사용할 수 없다. 하물며 효제(孝悌)의 도리(道理)이겠는가? 말세(末世)에 오로지 권도를 사용함을 내가 미워한다.’ 하고, 드디어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전하께서 경연(經筵)에 임하여 진강함은 비록 오로지 권도를 사용한다고 할 수는 없으나, 또한 상례(喪禮)에 대한 떳떳한 법은 아닙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한결같이 예경(禮經)에 따라 졸곡을 조금 기다렸다가 강연(講筵)을 열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려 가납(嘉納)하였다.
7월 15일 경진
대사헌 이희조(李喜朝)가 상소하여 상복(喪服)의 제도를 논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일찍이 보건대 주자(朱子)가 송 효종(宋孝宗)의 국상(國喪) 후에 영종(寧宗)의 부름에 나아가 차자(箚子)를 올려 군신(君臣)의 복제(服制)와 아울러 군민(軍民) 남녀의 상중(喪中)에 대한 예제(禮制)를 논하였고, 이미 벼슬을 떠나서는 그 문인(門人) 여정보(余正甫)와 더불어 왕복한 논설(論說)에 이르기를, ‘연거(燕居)076) 의 복제(服制)에는 백견건(白絹巾)·백양삼(白涼衫)을 착용(着用)하고, 선인(選人) 및 소사신(小使臣)은 이미 부제(祔祭)를 지낸 후에 최복(衰服)을 벗고 조건(皁巾) 백양삼(白涼衫)·청대(靑帶)를 착용하여 3년상(三年喪)을 마치며, 서인(庶人)과 이졸(吏卒)은 3년 동안 홍색(紅色)과 자색(紫色)이 의복을 착용하지 않는데, 이와 같은 경우에는 면체(綿蕝)077) 를 하여도 또한 마땅할 듯하다. 초상(初喪)에는 옛 상복(喪服)을 지어 입고 상(喪)에 임(臨)하며, 조회(朝會)에는 별달리 포복두(布幞頭)·포공복(布公服)·포혁대(布革帶)를 만들어 착용함이 예(禮)에 합당하다.’고 하였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국가에서 만약 이 의논을 준행하여 신하들이 모두 최복(縗服)으로써 성복(成服)한다면 연거복(燕居服) 또한 이에 따라 준행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복제 절목(服制節目)을 살펴보았더니, ‘선대왕(先大王)의 유교(遺敎)를 받들고 주자(朱子)의 의논을 준용하여 천고(千古)의 누습(陋習)을 말끔히 씻어 버렸다.’ 하였는데, 유독 연거복(燕居服)의 한 조항에 대하여는 끝내 거론한 바가 없었습니다. 곡반(哭班)에서 성복(成服)하고 돌아갈 때에 이미 그대로 최·질(縗紜)을 착용하지 않았으니 연거복으로 출입하지 않을 수 없는데, 정한 법식(法式)이 없어서 사람들이 각기 자기의 의견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다른 띠[帶]를 처음으로 착용한 것은 주자(朱子)의 의거할 만한 정론(定論)이 있으므로, 드디어 백생포(白生布)의 띠를 만들어 착용하였습니다. 추후하여 들으니 조정의 사대부로부터 유생(儒生)과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연거 및 출입할 때에는 대부분이 마대(麻帶)를 착용하므로, 당초에 포대(布帶)를 착용하던 자들도 왕왕 마대로 바꾸어 착용하고 있습니다. 또 신이 포대를 착용함을 그르다고 하였는데, 대개 신이 주자(朱子)를 신봉(信奉)하지 않고 여러 사람을 따라 마대를 착용했다면, 사람들의 말이 반드시 이와 같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인하여 생각하건대 이 일은 만약 조정에서 일정한 명령이 없다면 분운(紛紜)하고 박잡(駁雜)하여 마침내 귀일(歸一)될 때가 없을 것이니, 원컨대 주자의 여러 논설을 참고하고 연거의 복색(服色)을 마련해 반포(頒布)하여 중외(中外)로 하여금 밝게 알도록 하소서. 또 예로부터 국상(國喪) 때에 신하로서 부모 상중(喪中)에 있는 자는 그 복제와 평시(平時)에 입는 복제에 대하여 논의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으며, 사가(私家)의 대소 제향(大小祭享)에 관하여 도 선현(先賢)의 논한 바가 또한 다른 점이 많습니다. 지난 신사년078) 간에 대신의 진달로 인하여 사가(私家)의 우제(虞祭)·졸곡(卒哭)·소상(小祥)·대상(大祥)·탈복(脫服) 등의 일을 조가(朝家)에서 이미 정식(定式)하였으니, 이 〈연거의 복제에 대하여도〉 또한 일체로 강정(講定)하여 지휘(指揮)하는 바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예조(禮曹)에서 대신 및 예절을 아는 여러 신하에게 의논하기를 청하니,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이르기를,
"주자(朱子)의 논한 바 상복(喪服)의 제도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옛 상복이니 지금의 최복(衰服)과 같고, 하나는 포복 두건(布幞頭巾)이니 지금의 시사복(視事服)과 같으며, 하나는 백견건(白絹巾)과 백대(白帶)이니 곧 이른바 연거복(燕居服)입니다. 금번 복제를 마련할 때에 연거복의 한 절차에 대하여는 당초에 거론하지 않았으므로, 조신(朝紳)과 사서인(士庶人)들이 모두 마대(麻帶)를 착용하고 있으나, 연거복은 원래 중대한 것이 아닙니다. 흑최(黑縗)와 같은 것은 어찌 주자(朱子)의 착용했던 바가 아니겠습니까마는, 지금의 예가(禮家) 가운데 일찍이 착용한 자가 없었으니, 특히 백견건(白絹巾)만을 준행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닙니다. 마대를 백대에 비교하면 경중(輕重)이 없지는 않으나, 가벼운 것을 버리고 소중한 것을 착용함은 어긋난 것이 아닙니다. 친상중(親喪中)에 있는 상인(喪人)에 이르러서는 예(禮)에, ‘임금의 상복(喪服)이 몸에 있으면 사사로운 복제를 입지 못한다.’ 하였으나 옛날의 의(義)로써 은정(恩情)을 끊는 제도를 갑자기 다시 시행할 수는 없으니, 다만 성복(成服)하는 날에 한결같이 벼슬의 품질(品秩)에 따라 규례대로 최복(衰服)을 받고, 삭망(朔望)·발인(發靷)·장사(葬事)·소상(小祥)·대상(大祥)에 해당하는 날에는 국상(國喪)에 임하여 그 복제(服制)를 입고, 사가(私家)에 있거나 사사로이 출입할 때에는 사상(私喪)을 입도록 함이 아마도 무방할 듯합니다."
하였고,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은 이르기를,
"주자(朱子)의 논설한 백견건(白絹巾)·백양삼(白涼衫)·백대(白帶)는 그 때의 상제(喪制)가 모두 복고(復古)하지 않은 데에서 말미암은 듯합니다. 오늘날에 이르러 상례(喪禮)가 확정(確定)된 후에 조사(朝士)로서 최복(衰服)을 받는 자는 연거(燕居)할 때에 비록 백대(白帶)로 바꾸어 착용하더라도 최·질(衰絰)이 오히려 있는 것이지만, 유생(儒生)은 최복을 받는다 하나 단지 마대(麻帶)의 한 절차만 있으니, 출입하거나 연거할 때에 모두 백대를 착용한다면 장차 어디에서 최복을 받는 제도를 표하겠습니까? 상인(喪人)의 성복(成服) 및 평상시 착용하는 복제(服制)에 있어서는 수상(首相)의 의논을 짐작(斟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행 사직(行司直) 정제두(鄭齊斗)는 이르기를,
"주자서(朱子書)에 백건(白巾)·백대(白帶) 및 포공복(布公服)·포혁대(布革帶)에 관한 여러 논설이 이와 같았고, 기해년079) ·갑인년080) 에도 또한 연거복(燕居服)에 마대(麻帶)는 없었으므로, 드디어 포대(布帶)를 착용하는데 의심하지 않았으니, 이는 실로 도헌(都憲)081) 의 소진(疏陳)과 같은 일입니다. 유생(儒生)과 사족(士族) 이하는 모두 포립(布笠)과 마대(麻帶)로써 성복(成服)을 하되, 연복(燕服)의 절차는 달리 없는데, 마대를 평상시(平常時)에 착용한다면 연복의 포대와 더불어 드디어 뒤죽박죽이 됩니다. 그러나 오늘날 조정의 공복(公服)에도 또한 포모(布帽)와 포과대(布裹帶)를 착용하니, 이것도 또한 주자(朱子)의 논설에서 근원한 것입니다. 이제 연복의 포대를 괴이하게 여긴다면, 조반(朝班)의 포과대는 홀로 유생과 서인(庶人) 등의 마대와 더불어 도리어 전도(顚倒)되지 않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융통성(融通性) 있게 제도를 정한다면 작고 큰 것이 서로 알맞게 될 것으로 여깁니다.
친상중(親喪中)에 있는 상인(喪人)의 성복(成服)에 이르러서는 전일에는 전함(前銜)의 사인(士人)이 최마(衰麻)가 없었으므로 복제(服制)에 대하여 의심을 하였으나, 이제 이미 최마를 법령으로 정했으니, 그 성복(成服)에 있어 최마를 착용함이 어찌 여러 사람과 다르겠습니까? 그 평상시에 착용하는 복제에 대하여는 고례(古禮)에 대부(大夫)와 사(士)는 벼슬에 있는 자와 변함이 없었습니다. 증자문(曾子問)082) 에 이른바, ‘임금의 상복(喪服)이 몸에 있으면 감히 사사로운 상복(喪服)을 입지 못하고, 빈소(殯所)나 장례(葬禮)에도 항상 임금이 계신 곳에 가 있다.’고 한 것은 이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후세(後世)에는 비록 공경 대부(公卿大夫)라 하더라도 만약 하루아침에 친상(親喪)을 당하면, 곧 벼슬을 버리고 집에 돌아가 다시 공무(公務)에 나가는 일이 없어 한낱 선비와 같았으니, 이 예절은 다시 쓸 데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친상을 만나 벼슬을 버리고 집에 돌아오면 사가(私家)에서 사상(私喪)을 입는 것은 사인(士人)과 더불어 다름이 없을 듯합니다. 오늘날 전함(前銜)이 있는 사서인(士庶人)은 비록 최복(衰服)을 입었다고 하더라도 실상은 증자문(曾子問)에 서술한 벼슬이 있는 자와는 같지 않으니, 만약 온 나라로 하여금 모두 옛날 대부(大夫)의 벼슬에 있는 자의 예(禮)와 같이 감히 사복(私服)을 복제를 입지 못하게 한다면, 주자(朱子)의 군신복(君臣服)을 의논한 그 전례(典例)가 어찌 이와 같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영상(領相)의 의논을 따르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공조 판서(工曹判書) 민진원(閔鎭遠)이 아뢰기를,
"선왕(先王)의 성덕(盛德)은 대략 하늘을 공경하고 치민(治民)에 부지런하며 어진이를 높이고 유도(儒道)를 숭상하며 도의(道義)를 소중히 여기고 검소(儉素)함을 숭상하며 용도(用度)를 절약하는 것이었으니, 전하께서 반드시 근면(勤勉)을 더한 연후에야 백성의 도탄(塗炭)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고, 계술(繼述)하는 효도에 합당할 것입니다. 선혜청(宣惠廳) 공물(貢物) 가운데 이른바 기인(其人)083) 은 각처의 제향(祭享) 및 궐내(闕內)의 각전(各殿)과 여러 상사(上司)에 진배(進排)하는 공물을 맡은 자입니다. 갑인년084) 에 선왕(先王)이 즉위한 후 세자궁(世子宮)과 빈궁(嬪宮)에 진배(進排)하는 시탄(柴炭)을 특히 혁파하지 말라고 명하였으니, 대개 그 때에 궁중의 용도가 부족한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전하께서 사위(嗣位)한 후에 세자궁과 빈궁의 시탄을 그대로 진배하게 하였는데, 앞뒤에 진배한 값이 자그마치 쌀 1만 1천 석에 이르렀으니, 그 형세가 반드시 장차 백성에게 더 부과(賦課)하여야 될 것입니다. 세자궁과 빈궁의 진배는 다만 시탄 뿐만이 아니라 어느 물건을 물론하고 모두 감제(減除)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감제하도록 명하였다. 집의(執義) 조성복(趙聖復)이 전번의 계사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서릉 도정(西陵都正) 이욱(李煜)은 하루 걸러 소를 잡아 한 도사(屠肆)를 만들면서 나라에 큰 상사(喪事)가 있는 날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으니, 그 몸가짐이 패악(悖惡)하여 사람 축에 낄 수도 없습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청컨대 멀리 정배(定配)하소서."
하니, 임금이 따르지 않고, 다만 심정보(沈廷輔)만 파직시켰다. 대사간(大司諫) 김운택(金雲澤)이 아뢰기를,
"은대(銀臺)085) 의 직책은 다만 명령을 받들어 시행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일에 따라 바로잡는 것이 그 임무입니다. 일전에 백세 노인을 불어들이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성상(聖上)께서 바야흐로 거상(居喪)의 슬픔 가운데 있으므로 이런 명령은 때가 아닌데도 출납(出納)의 자리에 있는 자가 몽연(矇然)히 받들어 행했으니, 논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해당 승지(承旨)를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7월 16일 신사
한중희(韓重熙)를 우승지(右承旨)로, 민진원(閔鎭遠)를 겸 판의금부사(兼判義禁府事)로, 이중협(李重協)을 정언(正言)으로, 김상옥(金相玉)을 수찬(修撰)으로, 조상경(趙尙絅)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헌부(憲府)에서 전번의 계사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청은군(淸恩君) 한배하(韓配夏)는 궐문(闕門) 밖 사차(私次)에서 술자리를 낭자(狼藉)하게 베풀었으니, 정례(情禮)를 손상시킨 바는 이미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저번 혼전 충의(魂殿忠義)에 그 조카 및 당질(堂姪)을 방자하게 차출(差出)하였다가, 여러 사람들의 말이 떠들썩하자 단지 그 조카만을 체직했으니, 그 예절에 어긋나고 사정에 얽매임이 지극히 해괴합니다. 청컨대 한배하를 파직시켜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좌윤(左尹) 김중기(金重器)는 윤취상(尹就商)이 탄핵받은 일에 대하여 소(疏)를 제출하고 이를 이끌어 나아가기 어려운 단서로 삼았습니다. 저번 정청(庭請)할 때에 김중기가 반열(班列)을 떠난 것은 사람들이 모두 통분하게 여기는 바인데, 간신(諫臣)이 미처 아울러 논박하지 못했다가 이제 소를 올려 승부를 다투듯 하였으니, 청컨대 김중기를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7월 18일 계미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졸곡(卒哭) 후 상하(上下)의 시사복색(視事服色)을 대신의 진달로 인하여 의논을 거두어 판하(判下)086) 하였으므로, 이제 개부표(改付標)087) 하여 들입니다. 《오례의(五禮儀)》에 왕비(王妃)와 왕세자빈(王世子嬪)과 친자(親子)의 처(妻), 여관(女官) 및 문무 백관(文武百官)의 처(妻)의 복색(服色)은 졸곡(卒哭) 후에 모두 백색의(白色衣)를 착용하였으므로 성상의 복색에 따라 생포(生布)로써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액속(掖屬) 및 직사(職事)의 전함(前銜)이 있는 성중관(成衆官)·녹사(錄事)·서리(書吏)와 생원(生員)·진사(進士)·생도(生徒)에 이르러서는 졸곡(卒哭) 후의 백의(白衣)를 또한 소상(小祥) 후의 백의로 개정하였습니다. 액속(掖屬) 이하 조례(皁隷)·나장(羅將)에 이르기까지 졸곡 후에 흑건(黑巾)·흑대(黑帶)와 오모(烏帽)·오대(烏帶)와 흑평정 두건(黑平頂頭巾)은 《오례의(五禮儀)》의 제도를 준행함이 마땅하나, 선조조(宣祖朝)의 백의(白衣)·백관(白冠)·백대(白帶)로 개제(改制)한 뜻에는 어긋나니, 이 예절을 크게 바로잡는 날을 맞아 그대로 인순(因循)할 수 없으므로 모두 백색으로 개정하였습니다. 그리고 갑사(甲土)·정병(正兵)·서인(庶人)의 복색 및 백관(百官)의 복제(服制)와 별단(別單) 가운데 상장조(喪杖條)는 의논을 거두어 판하(判下)함에 의하여 개부표(改付標)하여 들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정언(正言) 서종섭(徐宗燮)이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정사(政事)에 임어(臨御)하시고부터 오직 연묵을 주장하고, 의심스러운 사단이 있어도 문난(問難)하기를 싫어하며, 무릇 진달하는 바가 있으면 다만 유의(留意)하겠다고 대답할 뿐이요, 말을 꺼낼 즈음에는 신중함이 지나쳐서 발설하지 못하는 듯하니, 좌우에서 가까이 모신 신료(臣僚)들도 알아듣지 못하는 폐단이 많습니다. 신은 원컨대 옥음(玉音)을 널리 선포(宣布)하시고, 의심이 있으면 반드시 하문(下問)하시고, 하교(下敎)를 명백히 내리소서. 박태춘(朴泰春) 등은 범죄가 지극히 중하고 대계(臺啓)가 준엄하였는데도 성청(聖廳)은 더욱 아득하니, 신은 참으로 의혹스럽습니다. 이택(李澤)은 헌신(憲臣)의 소론(疏論)으로 인하여 격고(擊鼓)088) 하면서 자신을 변명하고 대관(臺官)을 얽어 매어 욕했으니, 풍습이 통분합니다. 엄중히 징치(懲治)하소서.
전(前) 참판(參判) 이광좌(李光佐)는 작년부터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옥후(玉候)가 위중하여 연달아 후반(候班)을 베풀었으나, 몸이 재상의 반열에 있으면서 한 번도 진참(進參)하지 않았으며,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함에 미쳐서도 조금도 동념(動念)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정세(情勢)를 핑계대지마는, 원래 대단치 않으므로 금번에 돈장(敦匠)089) 의 명에 응했으나, 의(義)에 처함이 근거가 없으니 책벌(責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정주(李挺周)는 원래 성품이 추잡하여 몸을 검속(檢束)하는 데 어두웠고,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잠깐 있었으나 청렴하다는 소리가 없었으며, 본직(本職)을 제수(除授)함에 미쳐서는 오로지 탐학을 일삼았으니, 그대로 둘 수가 없습니다. 원컨대 빨리 나문(拿問)하소서. 함경 감사(咸鏡監司) 이덕영(李德英)은 명망이 원래 가벼운데도 발탁(拔擢)이 너무 빨랐으니, 제목(除目)의 아래에 물정(物情)이 미흡(未洽)해 합니다. 마땅히 체개(遞改)를 명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애(憂愛)의 정성이 참으로 가상(嘉尙)하니, 어찌 체념(體念)하지 않겠는가? 박태춘 등의 죄범은 비록 무거우나,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직첩(職牒)을 내림은 불가할 것이 없다. 상인(喪人) 이택의 소위(所爲)는 심히 해괴하니, 특히 도배(徒配)를 시행하라. 이광좌는 의(義)에 처함이 근거가 없어서 경책(警責)하지 않을 수 없으니, 특히 그 관직을 파면하라. 이정주에 대하여는 논박함이 마땅하니 그대로 거행하라. 아랫 조항의 너무 빠르다는 논설은 마땅한지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조태구(趙泰耉)를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홍계적(洪啓迪)을 우부승지(右副承旨)로, 박태항(朴泰恒)을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조태억(趙泰億)을 판결사(判決事)로, 권상유(權尙游)를 지돈녕(知敦寧)으로 삼았다.
오랫동안 가물어서 기우제(祈雨祭)를 거행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국상(國喪)에서 성복(成服)을 치른 후에 새로 직명(職名)을 제수한 자는 당시에 추복(追服)의 여부(與否)를 정탈(定奪)한 일이 없었는데, 의논하는 자로서 혹자는 이르기를, ‘사서인(士庶人)이 이미 포립(布笠)과 마대(麻帶)로써 복제(服制)를 입어 최복(衰服)의 형식을 보존하였으니, 관직에 제수된 후에 비록 최복을 입더라도 실로 추복(追服)의 혐의는 없다.’ 하였고, 혹자는 이르기를, ‘예종조(睿宗朝) 때에 「상복(喪服)을 추후(追後)하여 만들 수는 없으니, 새로 제직(除職)된 자는 소복(素服)으로써 출사(出仕)하라.」는 명령이 있었고, 주자(朱子)가 상복의 개제(改製)를 허락하지 않았고, 고례(古禮)에 또 상복은 보충(補充)하지 않는다는 글이 있으니, 이미 성복(成服)을 치른 후에 계속 추개(追改)함은 옳지 않다.’ 하였습니다. 청컨대 대신 및 예절을 아는 신하에게 의논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의논하기를,
"사서인(士庶人)은 이미 포의(布衣)와 마대(麻帶)의 복제를 입었으니, 실로 참최(斬衰)와 더불어 다름이 없습니다. 새로 입사(入仕)하는 자는 따라서 최복(衰服)을 받더라도 또한 추복(追服)의 혐의는 없을 듯하나, 다만 연제(練祭)가 지난 후에도 입사(入仕)하는 자가 있을 것인데, 일체로 최복을 받는다면 아마도 너무 늦은 데에 관련될 것입니다. 만약 연제의 전후로써 구별한다면 또한 박잡(駁雜)할 듯하니, 새로 입사(入仕)하는 자는 비록 최복을 받지 않더라도 큰 결함은 없을 것입니다."
하고, 사직(司直) 정체두(鄭齊斗)는 의논하기를,
"국상(國喪)의 졸곡(卒哭) 전에 전함(前銜)에 복직(復職)한 자와 처음으로 벼슬에 제수된 자는 모두 백포(白布)로써 모자(帽子)와 공복(公服)을 만들고 숙마(熟麻)로써 띠[帶]를 마련하니, 무릇 상복(喪服)은 다시 만들 수 없는데, 당초에 최마(衰麻)의 복을 입지 않은 것은 사체(事體)가 문상(聞喪)090) 과 달라서 추후(追後)하여 복을 입지 못하는 까닭입니까? 그런데 모두 이미 최마의 복을 입었습니다. 다만 사인(士人)은 정복(正服)의 관(冠)·상(裳)이 없지마는, 관·상을 다시 만들기는 어려우니, 달관(達官)이 추후하여 상장(喪杖)을 만들지 못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부득이 구복(舊服)을 그대로 하되, 다만 평상시에 착용하는 공복(公服)을 더할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영상(領相)의 의논을 따르도록 명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번의 계사를 거듭 아뢰니, 임금이 따르지 않고, 말단의 두 가지 일은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간원(諫院) 【헌납(獻納) 홍우전(洪禹傳)이다.】 에서 아뢰기를,
"새로 제수(除授)된 선산 부사(善山府使) 신곡(申轂)은 일찍이 고을을 맡아 치정(治政)이 없었는데, 이제 갑자기 부사(府使)로 승진되었으니, 진실로 물정에 적합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저번에 선혜청 낭관(宣惠廳郞官)으로부터 다른 벼슬로 옮겨져 선혜청의 일이 다른 사람에게 넘겨졌는데, 염치를 무릅쓰고 그대로 쭈그리고 앉아 떠나지 아니하면서 두어 고을의 쌀을 감봉(監捧)했으니, 이같이 구차하고 염치없는 사람에게 큰 고을을 맡길 수 없습니다. 청컨대 선산 부사 신곡을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7월 19일 갑신
정언(正言) 서종섭(徐宗燮)이 아뢰기를,
"박태춘(朴泰春) 등의 일은 전하께서 그 죄범이 지극히 무거움을 이미 알았으니, 세월이 오래 되었다고 하여 결코 관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만약 이 무리들의 죄상이 자질구레한 것이라면 선대왕(先大王)의 너그러운 덕의(德義)로서 10여 년의 오랜 동안에 어찌 직첩(職牒)을 돌려주지 않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전하께서 즉위(卽位)하는 초두에 먼저 석방시키기를 명하였고 직첩도 도로 돌려주셨으며, 대계(臺啓)가 준엄하게 발론하였으나 오래도록 유음(兪音)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또 함경 감사(咸鏡監司) 이덕영(李德英)에 대한 일은 윤허를 내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마땅한지 알지 못하겠다고 하교(下敎)하셨습니다. 대개 북쪽 방백(方伯)의 임무는 다른 도(道)와 다른데, 이덕영은 명론(名論)이 드러나지 않았고 이력(履歷)이 얕으니, 이제 체직(遞職)을 논함은 실로 공의(公議)를 채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땅한지 모르겠다는 하교를 받들었으니, 이는 신이 신진(新進)으로서 어긋나는 말이 신임(信任)을 받지 못한 데 말미암은 소치(所致)입니다. 청컨대 신의 직책을 체척(遞斥)하라 명하소서."
하고, 인하여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는데, 간원(諫院)에서 처치하여 출사(出仕)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7월 21일 병술
조관빈(趙觀彬)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윤헌주(尹憲柱)를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유명홍(兪命弘)을 좌윤(左尹)으로, 이동암(李東馣)을 우윤(右尹)으로, 김재로(金在魯)를 호조 참의(戶曹參議)로, 권업(權𢢜)을 평안 감사(平安監司)로, 조상건(趙尙健)을 부응교(副應敎)로, 조상경(趙尙絅)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유학(幼學) 조중우(趙重遇)가 상소하기를,
"제왕(帝王)의 덕의(德義)는 효행(孝行)에 지나침이 없고, 추보(追報)의 도리는 예경(禮經)의 밝은 훈계이며, 어미가 아들로써 존귀(尊貴)하게 되는 것은 《춘추(春秋)》의 대의(大義)입니다. 이제 전하께서 종사(宗社)와 신인(神人)의 주(主)가 되었는데, 낳아 주신 어버이는 오히려 명호(名號)가 없이 적막한 마을에 사우(祠宇)는 소조(蕭條)하고 한 줌의 무덤에는 풀만 황량(荒涼)합니다. 문무 조신(文武朝臣)의 2품관도 오히려 증직(贈職)의 영전(榮典)이 있는데, 전하께서는 당당한 천승(千乘)의 존귀한 몸으로써 유독 낳아서 길러 준 어버이에게는 작호(爵號)를 더함이 없으니, 무엇으로써 나라의 체통을 높이고 지극한 정리(情理)를 펴겠습니까? 신이 기억하기로는 지난날 선대왕(先大王)께서 전하의 정리를 통촉하여 특히 천장(遷葬)을 허락하셨고, 전하의 뜻을 살피셔서 다시 망곡(望哭)하게 했으니,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선대왕의 척강(陟降)하는 영혼이 오늘날의 거조에 대하여 반드시 어긋났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이 삼가 《선원보략(璿源譜略)》 1책을 보니, 전후의 찬집(纂輯)에 있어 모두 품의하여 예재(睿裁)하였는데, ‘희빈(禧嬪)’ 두 글자를 일찍이 삭제하지 않았으니, 선대왕의 은밀한 뜻이 어찌 그 사이에 있지 않겠습니까? 엎드려 원하건대 특히 예관(禮官)에게 명을 내려 빨리 명호(名號)를 정하여 지극한 정리를 펴고 나라의 체통을 높이소서."
하였다.
승지(承旨) 홍치중(洪致中)·권엽(權熀)·한중희(韓重熙)·홍계적(洪啓迪)·윤석래(尹錫來) 등이 아뢰기를,
"유학(幼學) 조중우(趙重遇)가 와서 한 소장(疏章)을 올렸는데, 신 등이 그 소본(疏本)을 보니, 위에는 자성(慈聖)의 복선(復膳)091) 을 청하였고 아랫 조항에는 어미가 아들로써 존귀하게 된다고 말하였으며, 선대왕의 오르내리는 영혼이 오늘날의 거조에 대하여 반드시 어긋났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선대왕의 은밀한 뜻이 그 사이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 이 어찌 오늘날 신자(臣子)가 차마 입 밖에 낼 수 있는 것입니까? 선대왕께서 당초 처분(處分)이 계신 후에 전후의 하교가 엄중할 뿐만이 아니어서 지난번 병술년092) 비망기(備忘記)에 이르기를, ‘암행 어사(暗行御史)의 서계(書啓) 가운데에 감히 작호(爵號)를 썼으니, 일의 해괴함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다.’ 하고 인하여 파직을 명하였으며, 또 정유년093) 함일해(咸一海)의 상서(上書)에 감히 작호(爵號)를 썼다 하여 또한 매우 절통(絶痛)하다고 하교하셨습니다. 성의(聖意)의 있는 바가 해와 별같이 밝아 사람의 이목(耳目)에 명시하였으니, 무릇 우리 신서(臣庶)들이 누가 감히 의논을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재궁(梓宮)이 빈소(殯所)에 있고 선침(仙寢)이 채 식지도 않은 날에 이미 이같은 간사한 무리들이 있어 그 현혹시켜 시험해 보려는 계책을 이루고자 하여 선왕의 뜻을 속인 것이 음험하고 간특하였습니다. 만일 이 무리들이 진실로 선왕의 뜻을 염두(念頭)에 두고 선조(先祖)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감히 무망(誣罔)한 말로써 감히 가(加)하지 못할 자리에 함부로 가하여 조금도 거리낌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귀역(鬼蜮)의 무리들을 만약 엄중히 징계하고 통렬하게 배척하지 않는다면, 다만 후일에 기강이 점차 해이(解弛)해질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 성상(聖上)께서 선왕의 법을 준행하여 변개하지 않는 도리에도 결함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신 등이 지극히 놀란 나머지 감히 예에 따라 봉입(捧入)하지 못하고 소회(所懷)를 덧붙여 진달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이제 조중우(趙重遇)의 소본(疏本)을 보니, 일편(一篇)의 주의(注意)가 오로지 빨리 명호(名號)를 바로잡는 데에 있으면서 그 아랫 조항에는 어미가 아들로써 존귀(尊貴)하게 된다고 말하였고, 감히 선대왕의 오르내리는 영혼이 오늘날의 거조에 대하여 반드시 어긋났다고 하지 않을 것이라 하였으며, 또 감히 선대왕의 은밀한 뜻이 그 사이에 있다고 말하였으니, 이 어찌 신자(臣子)로서 참마 입에 올릴 말이겠는가? 또한 처분하신 뜻에도 어긋난다. 하물며 지금 선침(仙寢)이 채 식지도 않은 날에 어찌 감히 무망(誣罔)한 말로써 이와 같이 자행(恣行)하겠는가? 통렬히 배척하지 않을 수 없으니, 조중우를 변방에 정배하고, 이 소는 도로 내어 주도록 하라."
하였다.
7월 22일 정해
헌부(憲府) 【집의(執義) 조성복(趙聖復)과 장령(掌令) 박필정(朴弼正)이다.】 에서 전번의 계사를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조중우(趙重遇)의 소는 자성(慈聖)의 복선(復膳)에 대한 청을 칭탁하며 일편의 정신은 오로지 아랫 조항에 있었는데, 하나는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라 하고 하나는 선왕의 은밀한 뜻이라 하였으니, 아! 이 무슨 말입니까? 어미가 아들로써 존귀하게 된다는 것은 《춘추(春秋)》 공양(公羊)의 논설인데, 호씨(胡氏)094) 는 그 그른 것은 극론(極論)하였고, 정(程) 주(朱)의 훈계도 또한 심히 엄중하였습니다. 선왕의 은밀한 뜻이라느니 오늘날의 거조는 어긋나지 않았다느니 등의 논설은 더욱이 절통(絶痛)합니다. 전에는 박만정(朴萬鼎)·박정(朴涏)에게 내린 비답이 있었고, 뒤에는 특별히 암행 어사(暗行御史)를 특별히 파직시키고 함일해(咸一海)를 통척(痛斥)하라는 하교가 있어 처분의 엄정함이 금석(金石)같이 굳고 의향(意向)을 게시(揭示)하심이 해와 별같이 밝았으니, 오늘날 신자(臣子)된 자가 어찌 감히 이런 무망(誣罔)한 말을 한부로 입에 올릴 수 있겠습니까? 일종(一種)의 간흉(奸凶)의 잔당(殘黨)들이 몰래 결탁(結托)하여 틈을 타 일어나 선침이 채 식기도 전에 차마 무망(誣罔)한 말로써 감히 가(加)하지 못할 자리에 감히 가하여 성상(聖上)이 선왕의 법에 따라 변개함이 없는 효에 누(累)를 끼치고, 간당(奸黨)이 현혹시켜 시험해 보려는 계책을 이루고자 하였는데, 다행히 성상께서 간사한 정상을 통촉함을 힘입어 특히 변방에 정배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다만 이 음특(陰慝)한 소는 결코 보잘것 없는 한낱 조중우가 혼자 마련한 것이 아닐 것이니, 청컨대 조중우를 엄중히 형신하여 끝까지 추문하소서."
하였으니,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간원(諫院) 【헌납(獻納) 홍우전(洪禹傳)과 정언(正言) 서종섭(徐宗燮)이다.】 에서 전번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충청 병사(忠淸兵使) 이태망(李台望)은 저번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하던 날에 영중(營中)의 이속(吏屬)을 시장(市場)에 보내어 폐양자(蔽陽子)095) 를 매점(買占)하고, 영중에 실어들여 때를 타서 모리(謀利)할 계획을 세웠으며, 본부(本府)의 객사(客舍)에 곡반(哭班)을 설치함에 미쳐서는 감히 견여(肩輿)를 타고 곧장 삼문(三門) 밖에 다다랐으니, 거조(擧措)가 해괴합니다. 청컨대 충청 병사 이태망을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대사간(大司諫) 조관빈(趙觀彬)이 상소하기를,
"그윽이 보건대 성명(聖明)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한결같이 선왕의 뜻을 따르셨는데, 어제의 처분은 계술(繼述)의 아름다움과 징토(懲討)의 엄중함이 위로는 하늘에 계신 선왕의 영혼을 기쁘게 하셨으며, 아래로는 간사한 무리들의 틈을 엿보는 계책을 깨뜨려 버렸습니다. 조중우(趙重遇)의 무리들이 이 말로써 오늘날에 시험해 보려 한 것은 대개 망령된 마음으로 감히 말하기 어려운 자리를 의논하여 국가에 앙화를 끼치는 계책을 이루고자 하셨으니, 이 어찌 사람으로서 차마 할 일이며, 또한 어찌 조중우 한 사람이 홀로 저지른 일이겠습니까? 저 흉당(兇黨)들의 흑심(黑心)을 품고 간사한 꾀를 지어낸 지 오래 되었으니, 그 장차 얼굴을 바꾸어 번갈아 나와 성상의 총명을 현혹함은 특히 여윈 돼지가 뛰려는 조짐[羸豕蹢躅之漸]096) 만이 아닐 것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과단성(果斷性)을 더욱 발휘하고 방비를 엄중히 하여 이러한 소(疏)는 다시 받아들이지 말도록 명을 내려 간사한 무리로 하여금 뒤를 이어 일어나지 못하게 하소서. 후설(喉舌)097) 의 직책은 오로지 출납(出納)을 성실히 하는 데에 있으니, 조중우의 상소의 내용이 이같이 절통(絶痛)하다면 한 아문(衙門)에 있는 자는 마땅히 말을 합하여 엄중히 배척하여야 할 것입니다. 승지(承旨) 송성명(宋成明)이 진정(陳情)한 소가 마침 이 날에 있었는데, 비록 친병(親病)의 경중(輕重)이 어떠한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잠깐 나왔다가 바로 들어가 기미를 알고 규피(規避)한 자취가 드러나 있으니, 이같은 풍습은 실로 사부(士夫)의 수치입니다. 마땅히 경책(警責)을 가하여 백관을 신칙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 처분이 이미 결정되었는데, 그대의 소에 논열(論列)함이 또한 매우 명쾌(明快)하다. 아랫 조항의 일은 추고(推考)하도록 하라."
하였다.
7월 23일 무자
임금이 약방(藥房)의 여러 신하를 인견(引見)하였다. 약방도제조(藥房都提調) 김창집(金昌集)이 아뢰기를,
"정언(正言) 서종섭(徐宗燮)이 함경 감사(咸鏡監司) 이덕영(李德英)의 명론(名論)이 원래 가벼웠는데 승진(陞進)이 너무 빠르다고 논박하였으나, 이덕영이 해서(海西) 고을을 맡아 치정(治政)은 훌륭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았으니, 도리에 있어 함부로 부임하기가 어렵습니다. 청컨대 체차(遞差)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덕영은 인망(人望)이 원래 가벼웠으나, 북백(北伯)에 발탁(拔擢)됨은 오로지 한때 사당(私黨)의 이끌어줌을 힘입었던 것이다. 대간(臺諫)의 말은 공의(公議)의 울분함에서 나온 것인데, 김창집이 수식(修飾)하는 말을 늘어놓았으니 또한 심히 군색한 일이다.
7월 24일 기축
헌부(憲府)에서 전번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고 다만 조중우(趙重遇)에 관한 일만 윤허하였다. 형조(刑曹)에서 드디어 조중우를 형장(刑杖)으로써 신문하니, 그 끌어댄 초사(招辭)에 사인(士人) 박경수(朴景洙)는 상의하여 초(草)를 얽었다 하였고, 이수점(李受漸)은 문의(問議)했다 하였으며, 윤천운(尹天運)은 권고하여 이루게 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박경수가 다만 초고(草稿)의 두어 곳에 약간 수정(修正)을 가했다고 자복했으므로 형장을 가하여 신문하니, 초고의 전반(全般)에 걸쳐 고쳐 얽었다고 승복(承服)하였다. 이에 형조(刑曹)에서 대신에게 의논하기를 계청(啓請)하였다. 조중우는 전번의 배소(配所)로 향해 가다가 평구역(平丘驛)에 이르러 물고(物故)되었고, 박경수는 변방에 정배되었으며, 이수점·윤천운은 모두 감등(減等)하여 정배(定配)하였다. 이때에 뜻을 잃고 옆에서 틈을 엿보던 무리들이 기회를 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시골의 무식한 조중우를 사주(使嗾)하여 방자하게 투서(投書)해 시험해 보려는 계책을 행했으니, 그 정상을 헤아려 보건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과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아뢰기를,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의시(議諡)는 사행(使行) 편에 보내는 뜻으로 전번에 이미 정탈하셨으므로, 삼망(三望)098) 을 의정(議定)하여 별단(別單)에 경헌(敬獻) 【숙야 경계(夙夜警戒)를 경(敬)이라 하고 청명 예철(聽明睿哲)을 헌(獻)이라 한다.】 ·장헌(章憲) 【법도 대명(法度大明)을 장(章)이라 하고 행선 가기(行善可紀)를 헌(憲)이라 한다.】 ·충헌(忠憲) 【추능 진충(推能盡忠)을 충(忠)이라 하고 행선 가기(行善可紀)를 헌(憲)이라 한다.】 을 써 들입니다."
하였다.
7월 26일 신묘
홍석보(洪錫輔)를 병조 참지(兵曹參知)로, 홍치중(洪致中)을 부제학(副提學)으로, 김상옥(金相玉)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7월 27일 임진
유명홍(兪命弘)을 도승지(都承旨)로, 홍석보(洪錫輔)를 병조 참의(兵曹參議)로 조명봉(趙鳴鳳)을 병조 참지(兵曹參知)로 삼았다.
7월 28일 계사
이의현(李宜顯)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윤헌주(尹憲柱)를 지의금(知義禁)으로, 이택(李澤)을 한성 좌윤(漢城左尹)으로 삼았다.
7월 29일 갑오
오랫동안 가무니, 임금이 대신과 금부(禁府) 및 형조(刑曹)의 당상(堂上)을 불러 당시의 죄수 및 편관(編管)된 여러 죄인을 소결(疏決)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번의 계사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교리(校理) 홍정필(洪廷弼)은 조중우(趙重遇)의 소어(疏語)로써 지나치게 스스로 인혐(引嫌)하여 금직(禁直)에서 지레 나갔습니다. 조중우의 소에 대신과 삼사(三司)를 끌어들인 것은 오로지 터무니 없는 말로 농간을 부리고 조정을 어지럽히려는 계획에서 나온 것인데, 홍정필은 도리어 나아가기 어려운 단서를 삼아 최사(摧謝)의 기색(氣色)을 드러내 보이며 남몰래 두둔한 자취가 있으니, 청컨대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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