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을축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재궁(梓宮)133) 에 ‘상(上)’자(字)를 쓸 때에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승지(承旨) 송성명(宋成明)의 소(疏)로 인하여 모두 인입(引入)하고 참여하지 않으니, 임금이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정언(正言) 김용경(金龍慶)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저으기 살펴보건대 전하께서는 너무 침정(沈靜)하시어 혹은 사리의 분별이 부족하고 너무 너그러우시어 과단성이 도리어 모자라니, 일을 종합하여 분석해 분발하는 효과는 볼 수 없고 점차 인순(因循)하고 쇠퇴한 습관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입을 모아 진언(進言)해도 듣는둥 마는둥 하시고 달리 문난(問難)하심이 없으니, 이와 같이 하여 그치지 않으신다면, 아마도 품의하고 전령하는 바가 없어 나라 일이 장차 날로 잘못될 것입니다."
하고, 또 진휼(賑恤)을 베풀 때에 장정(壯丁)을 구별하지 말 것과 진휼곡(賑恤穀)을 방매(放賣)하여 모리하는 폐습을 금지하지 않을 수 없음을 논하였는데, 혹은 절목(節目)을 개정하여 내리도록 청하기도 하고, 혹은 상의하여 선처(善處)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끝에 논하기를,
"송성명(宋成明)의 소를 경알(傾軋)134) 로 지적하였으니, 청컨대 비지(批旨)를 도로 거두어 들이고 특별히 견벌(譴罰)을 시행하소서. 명일은 재궁(梓宮)을 결과(結裹)135) 하는 날이니 대신이 입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밝게 변석(卞釋)을 내리고 더욱 돈면(敦勉)을 더하소서."
하니, 비답에 이르기를,
"소에다 진달한 일은 다시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송성명은 특별히 그 관직을 파면하라."
하였다. 송성명이 처음에 우악한 비답을 받았는데, 김창집과 이건명이 이로써 인입하였으며, 김용경이 재궁의 결과(結裹)를 빙자하여 말했기 때문에 임금도 마지 못해 들어주었으나, 비지를 도로 거두어 들이는 데 대해서는 가부를 언급하지 않았다. 헌납(獻納) 송필항(宋必恒)이 또 소를 올려 송성명을 배척하였는데 말이 지극히 패만(悖慢)하였으며, 비지를 도로 거두어 들이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9월 2일 병인
대행 대왕(大行大王) 재궁(梓宮)의 결과례(結裹禮)를 시행하였다. 이때 결과의 시각이 곧 닥치는데, 김창집(金昌集)과 이건명(李健命)이 여러 차례 불러도 들어오지 않았다. 정원(政院)에서 계품(啓稟)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막중한 시각을 물릴 수 없으니, 원임 대신(原任大臣)이 먼저 입시(入侍)하게 하라."
하였다. 김창집과 이건명이 이에 추후로 명을 받들고 입참(入參)하니, 바야흐로 재궁을 결과하였다. 임금이 찬궁(攢宮)136) 의 서쪽에 한참 동안 서 있으니,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 자리에 앉기를 청하였으나, 듣지 않고 그대로 서서 일을 마쳤다.
관학 유생(館學儒生) 이기중(李箕重) 등이 소를 올려 선조(先朝)의 성명(成命)에 의하여 하번(何蕃)·진동(陳東)·구양철(歐陽澈)137) 의 사당을 세우기를 청하니, 【계해년(1683 숙종 9년)에 선왕의 사당을 세우라는 하교가 있었으나 미루다가 거행하지 못했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하라 비답하였다. 해조에서 복계(覆啓)하여 드디어 반촌(泮村)138) 에 사당을 세웠다.
9월 4일 무진
심수현(沈壽賢)·한중희(韓重熙)를 승지(承旨)로, 홍우전(洪禹傳)을 집의(執義)로, 이중협(李重協)을 장령(掌令)으로, 김고(金槹)를 정언(正言)으로, 유척기(兪拓基)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9월 6일 경오
간원(諫院) 【헌납(獻納) 송필항(宋必恒)·정언(正言) 김고(金槹)이다.】 에서 아뢰기를,
"선침(仙寢)이 빈소(殯所)에 있어 온 조정이 슬퍼하고 황황해 하는데, 지난번에 전(前) 승지(承旨) 송성명(宋成明)이 때를 틈타 소를 올린 것은 오로지 뒤흔들고 쓰러뜨리려는 꾀에서 나왔고, 뜻이 참독(憯毒)하여 거의 고변(告變)하는 급서(急書)와 같았으니, 파직에 그칠 수 없습니다. 청컨대 관작을 삭탈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7일 신미
태학(太學)의 재생(齋生)들이 권당(捲堂)139) 하였다. 대사성(大司成) 황귀하(黃龜河)가 여러 유생들을 불러 그 연유를 물으니, 장의(掌議)140) 윤지술(尹志沭)이 소회(所懷)를 써서 올렸는데, 이르기를,
"신(臣)은 지문(誌文) 가운데 신사년141) ·병신년142) 두 해의 미진한 일에 대하여 개정하기를 청할 뜻으로 발론(發論)하였는데, 한 사람도 호응(呼應)하는 사우(士友)가 없었고 하재생(下齋生)143) 들도 거의 모두가 모피(謀避)하였습니다. 신이 이미 재임(齋任)144) 으로서 이 일을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낭패를 당했으니 어떻게 태연하게 입당(入堂)하겠습니까? 그러나 신이 진달하고자 하는 바를 이로 인하여 모두 밝히겠습니다.
아! 우리 선대왕(先大王)의 정교(政敎)와 훈계는 언제나 법칙에 꼭 맞았으며, 전후의 사업은 뭇 임금보다 뛰어났으니, 신사년과 병신년에 있었던 일과 같은 경우 그 처변(處變)의 중도(中道)를 얻은 것과 정성을 다하여 정도(正道)를 호위한 것은 실로 천고(千古)에 없었던 일입니다. 그런데 이제 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頤命)이 지어 올린 유궁(幽宮)145) 의 지문(誌文)을 보면, 신사년의 일은 숨기고 쓰지 않았으며, 병신년의 일은 그 말을 은밀하게 표현하여 옳고 그른 것을 뒤섞이게 만들었으니, 신은 통분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무릇 신사년의 변고(變故)는 은밀하여 헤아리기 어려웠는데, 선대왕께서 밝게 기미(幾微)를 통촉하여 환난을 미연에 방지하였고, 과단성을 발휘하여 헌장(憲章)을 밝게 시행함으로써 궁중(宮中)을 엄숙하게 하고 여러 사람의 울분을 풀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 처분의 엄정함과 염려의 심원(深遠)함은 옛 간책(簡策)을 상고하더라도 또한 보기 드문 바입니다. 병신년의 일은 선대왕의 고명(高明)한 성학(聖學)으로 옳고 그름을 밝게 분변하여 이미 윤증(尹拯)이 스승을 배반한 죄를 바로잡았고, 또 우리 전하께 경계하시어 흔들림이 없게 하였으니, 무릇 우리 선왕의 신자(臣子)가 된 자라면 누군들 후세(後世)에 본보기가 됨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이명은 흰 머리의 늙은 나이에 이해(利害)만을 살피고 갖은 계교(計巧)를 다 써서 선왕의 융숭한 은혜를 잊어버린 채 후일 참적(讒賊)의 구실거리를 만들었으니, 이 어찌 인신(人臣)으로서 차마 할 일이겠습니까? 공의(公議)가 떠들썩하자 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어버이를 위하여 숨김이 옳다는 말로 의리를 삼고, 전하께 참으로 어버이를 위하여 숨길 일이 있으며, 신자(臣子)된 자도 당연히 숨길 의(義)가 있는 것처럼 하였으니, 아! 이 무슨 말입니까? 오직 우리 선대왕께서 조종(祖宗)의 소중한 부탁을 받아 전하에게 전하였고, 전하께서는 새로 보위(寶位)에 올라 사직(社稷)과 백성의 주(主)가 되었으니, 전하께서 다시 사친(私親)을 돌볼 수 없는 것은 지극히 명백한 의리입니다. 하물며 신사년의 처분은 선왕께서 국가 만세(萬世)를 염려한 데에서 나온 것이며, 전후 장주(章奏)의 비답에 해와 별같이 밝은 성의(聖意)를 보이셨으니, 전하께서 다시 마음에 다른 뜻을 품을 수 없는 것이며, 또 그것이 도리에도 당연한 일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빨리 다른 대신에게 명하여 유궁(幽宮)의 지문(誌文)을 고쳐 지어 통쾌하게 사실을 밝히고, 선왕의 성덕(盛德)과 대업(大業)이 끝내 인멸(湮滅)됨이 없게 한다면 실로 국가의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황귀하가 소회(所懷)를 받아 계사(啓辭) 가운데에 실어 알리고 이내 들어가도록 권면하기를 청하니, 빨리 권면하여 들어가게 하라고 비답하였다.
9월 9일 계유
정원(正言) 김고(金槹)가 윤지술(尹志述)이 써 올린 소희(所懷)로 인하여 인피(引避)하기를,
"지문(誌文) 가운데에 신사년146) 에 관한 한 조항은 완전히 빠뜨려 버렸고, 선대왕의 지업(志業)을 흐리게 한 것도 또한 많으며, 사문(斯文)의 시비에 이르러서는 자못 명백하게 분별함이 결여되었습니다. 신이 이 몇 가지 일로 처분을 앙청하고자 했으나, 듣건대 지석(誌石)을 새기는 역사(役事)가 닥쳤다 하므로, 주저하고 발론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에 반유(泮儒)의 기롱이 이에 이르렀으니, 말하지 않은 허물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청컨대 신의 관직을 체척(遞斥)하소서."
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김고가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리지 않고 앞서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고 지문을 고쳐 짓는 데 관한 계사를 올리니, 단지 말단의 일만 윤허하였다.
9월 10일 갑술
헌납(獻納) 송필항(宋必恒)이 윤지술(尹志述)의 소회(所懷) 때문에 인피(引避)하니, 답하기를,
"지문(誌文)은 대신이 각별히 찬술(撰述)하여 이미 빠뜨림이 없었고, 착오되었다는 곳의 문자는 이미 돌에 옮겨졌는데, 각석(刻石)의 공역(工役)이 끝날 즈음에 윤지술이 악독한 수단으로 몸소 앞장서서 발론하되, 지문을 빙자하여 큰 일을 저해하고 대신을 무함하여 말이 사친(私親)에 미쳐 뜻이 음험하였다. 이러한 풍습은 막지 않을 수 없으니, 먼 변방에 정배(定配)하라. 그리고 그대는 혐의할 바가 없으니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승지(承旨) 조명봉(趙鳴鳳)이 비지(批旨)를 작환(繳還)147) 하고 윤지술을 신구(伸救)하여 변방에 정배하라는 명을 정지할 것을 청하였으나,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일본(日本) 대마 도주(對馬島主)의 조위 차왜(弔慰差倭)148) 가 나오니, 접위관(接慰官)을 차송(差送)하였다. 예로부터 국상(國喪)이 있을 때에는 통부(通訃)하는 규례가 없었고, 다만 역관(譯官)으로 하여금 왜관(倭館)에 전달하였으며, 관수왜(館守倭)149) 가 대마도에 보고하였다. 그러면 도주(島主)는 차왜를 보내어 향(香)과 폐백(幣帛)을 가지고 나와 예조(禮曹)에 서계(書契)를 올렸고, 우리 나라에서는 접위관을 보내어 접대하였으며, 차왜는 전패(殿牌)150) 에 향을 올리고 겸하여 부의(賻儀)를 바쳤으니, 이는 옛부터 전해오는 규례였다. 진하 차왜(進賀差倭)도 또한 같았다.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차자(箚子)를 올렸다. 대략 이르기를,
"지문(誌文)을 개찬(改撰)하는 일에 대하여 도감(都監)으로 하여금 품지(稟旨)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지문은 곧 신의 종형(從兄) 이이명(李頤命)이 지어 올린 바인데 이제 어찌 감히 혐의를 돌아보지 않고 그 사이에 참섭(參涉)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총호사(摠護使)151) 의 임무를 갈아주고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복주(覆奏)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지문은 대신이 뜻을 다하여 지은 바로 원래 빠뜨린 곳이 없고 또한 착오된 말도 없으니, 결코 개찬(改撰)할 필요가 없다. 어찌 복주해야 할 리가 있는가? 경은 안심하고 사퇴하지 말라."
하였다.
9월 11일 을해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헌부(憲府) 【집의(執義) 홍우전(洪禹傳)이다.】 에서 앞서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고, 또 윤지술(尹志述)을 먼 변방으로 정배(定配)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는 일로 청하기를,
"대신이 지은 바 지문은 참으로 빠뜨림이 없지 않았으니, 윤지술은 반유(泮儒)의 몸으로서 선대왕의 큰 계책과 거룩한 공덕이 지문 가운데 행여나 누락됨이 있을까 염려해 물의(物議)를 채택하여 소회(所懷)를 써 올린 것으로, 오로지 선열(先烈)을 선양(宣揚)하는 뜻에서 나왔으니, 가볍게 꺾는 것은 결코 옳지 않습니다. 하물며 갑자기 변방에 정배하는 중전(重典)을 베풀 수 있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정언(正言) 김고(金槹)가 또한 소를 올려 윤지술을 신구(伸救)하여 말하기를,
"윤지술은 말을 가리지 않고 망령되게 격동함이 비할 바 없으니, 그 본정(本情)을 살펴본다면 오로지 큰 일을 완성시키고자 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유신(儒臣)의 소에 초고(草藁)도 얽지 못했다는 등의 말을 끌어넣어 스스로 과장(誇張)했으니, 이같은 추태(醜態)를 신은 바로 보고 싶지 않습니다."
하였으니, 유신이란 수찬(修撰) 유척기(兪拓基)를 가리킨 것이었다. 임금이 비답하기를,
"윤지술은 큰 일을 저해하였기에 정배의 벌을 내린 것이니, 정지해야 한다는 말은 올바른지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유척기는 윤지술의 소회(所懷) 가운데 ‘경연(經筵)에서 상소를 갖추었다.’는 말에 대해 소를 올려 스스로 해명(解明)하기를,
"소를 얽어놓고 미처 올리지 못한 것도 오히려 두려워하여 움츠렸다는 죄를 면하지 못하는데, 신과 같이 유약하여 애초에 초고(草藁)도 얽지 못한 자가 더욱 어떻게 말하지 않은 죄목에서 벗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김고는 바야흐로 시론(時論)의 앞잡이가 되어 윤지술을 힘써 두둔했으므로 아울러 유척기를 배척한 것이며, 이에 이어 정언(正言) 김용경(金龍慶)·대사성(大司成) 황귀하(黃龜河)·장령(掌令) 이중협(李重協)이 서로 잇따라 소를 올려 윤지술을 신구(伸救)했으나 임금이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윤지술의 죄는 임금을 핍박하고 모욕한 데 있었으나 김용경과 이중협 등은 윤지술을 칭찬하고 추켜세우기를 마지 않았고, 다만 이이명(李頤命)을 헐뜯은 것만 그르다 하였다. 윤리(倫理)의 퇴폐함이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 통탄을 금할 수 있겠는가?
성균관(成均館) 재생(齋生)들이 윤지술(尹志述)을 원방(遠方)에 정배하였다 하여 권당(捲堂)하였다.
9월 12일 병자
천둥하였다.
9월 13일 정축
고부사(告訃使) 이이명(李頤命) 등이 심양(瀋陽)에 다다라 연로(沿路)의 소문을 치계(馳啓)하기를,
"청(淸)나라 임금은 아직 열하(熱河)에 있고, 태자(太子)에 관한 일은 예전과 같으며 다른 소문은 없습니다. 그리고 연경(燕京) 지방에 지진(地震)이 일어나 가옥이 무너지고 압사(壓死)한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서정(西征)한 군병들은 주둔(駐屯)한 지 여러 해가 지났는데, 서달(西㺚)152) 이 멀리 도망쳐 교전(交戰)은 하지 못했고, 병사자(病死者)가 속출(續出)한다 합니다."
하였다.
9월 14일 무인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약방도제조(藥房都提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예전부터 반유(泮儒)들은 말이 비록 과격하더라도 죄를 주지 않았으니, 이는 대개 사기(士氣)를 기르는 때문이었습니다. 윤지술(尹志述)이 비록 망령된 거조를 하기는 하였으나, 사기를 꺾는 것은 옳지 않으니, 특별히 생각을 돌려 처분하신다면 성덕(聖德)이 빛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마땅히 유의(留意)하겠다."
하였다. 제조(提調) 조태구(趙泰耉)는 말하기를,
"지문(誌文)을 지어 올린 대신의 말에는 어버이를 은휘(隱諱)하는 뜻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의리도 또한 있는 것인데, 윤지술은 이 뜻을 전혀 몰랐으니, 말이 매우 요망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너무 기탄(忌憚)이 없다고 하여 막고자 하였으니, 성의(聖意)가 있는 바는 참으로 지나친 것이 아닌데, 일시(一時)에 여러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신구(伸救)했으니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대신은 비록 태학 유생(太學儒生)이라고 말하였으나, 스스로 그 이름을 삭제하고 거조가 해괴했으니, 이는 태학의 소유(疏儒)와는 다릅니다. 그리고 또 공재(空齋)한 유생들은 장의(掌議)가 자기 이름을 삭제하고 나간 뒤 입재(入齋)하였으니 그 의견이 다른 듯하며, 또 윤지술이 정배를 당하였다 하여 공당(空堂)한 것도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김창집은 말하기를,
"윤지술이 소를 올리고자 하였으나 성사되지 아니하므로 소회(所懷)를 써서 올렸으니, 비록 상소와는 다릅니다. 그러나 이미 재임(齋任)으로 있었으니, 꺾어버리는 것은 옳지 못한 듯합니다. 이로 인하여 성묘(聖廟)153) 가 공재(空齋)되었으니, 들어가도록 권면하는 방도를 강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이어 질병 때문에 상신(相臣)의 직책을 해면해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지나치게 사양하지 말고 안심하고 행공(行公)하라."
하였다. 조태구가 또 재정(財政)의 탕갈로 인하여 용도(用途)를 절약하여 재물을 여유있게 하는 도리에 대해 누누이 말하기를,
"위 문공(衞文公)이 초구(楚丘)에 도읍을 정하고 거친 포백(布帛)으로써 의관(衣冠)을 만들어 몸소 검약(儉約)의 시범을 보여154) 마침내 준마(駿馬) 3천 필을 얻었고, 한 문제(漢文帝)는 노대(露臺)155) 를 지을 경비(經費)를 아껴 또한 창고의 곡식이 썩을 정도의 부(富)를 이루었으니, 성상께서 만약 한결같은 마음으로 절약을 잊지 않으신다면 거의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이에 앞서 조태채(趙泰采)·송상기(宋相琦) 등이 서로 잇따라 호판(戶判)이 되었는데, 구관(句管)을 잘못한 나머지 재정이 크게 줄어들어 병신년156) 부터 이에 이를 때까지 저축했던 것에서 10분의 7, 8분이 감축되었다고 한다." 조태구가 또 아뢰기를, "인산(因山)157) 때의 막차(幕次)158) 는 마포(麻布) 및 면포(綿布) 2백 70여 동(同)이 소요됩니다. 청컨대 사약방(司鑰房)에 저치(儲置)해 둔 새로 만든 유막(帷幕)을 그대로 사용하여 경비를 줄이도록 하고, 영휘전(永徽殿)159) 에 소속된 궁인(宮人)은 영소전(永昭殿)160) ·경녕전(敬寧殿)161) 의 예에 의하여 참작하여 감생(减省)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3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137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사(宗社) / 사법-행형(行刑) / 인사-임면(任免) / 재정-국용(國用) / 역사-편사(編史)
[註 153] 성묘(聖廟) : 문묘(文廟).[註 154] 거친 포백(布帛)으로써 의관(衣冠)을 만들어 몸소 검약(儉約)의 시범을 보여 : 춘추(春秋) 때 위 문공(衞文公)이 적인(狄人)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게 되었는데, 제 환공(齊桓公)이 도와 회복시키고 문공을 세워 군(君)으로 삼으니, 문공은 굵은 베옷에 굵은 명주 관을 쓰고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는 고사(故事).[註 155] 노대(露臺) : 영대(靈臺)를 말하는 것으로, 천자(天子)의 관광소(觀光所). 한 문제(漢文帝)가 노대를 지으려고 장인(匠人)을 불러 그 비용을 묻자, 1백 금(一百金)이 든다 하므로, 1백 금이면 중류 백성 10가(家)의 재산과 맞먹는다 하여 중지하였음.[註 156] 병신년 : 1716 숙종 42년.[註 157] 인산(因山) : 국장(國葬).[註 158] 막차(幕次) : 임시로 막(幕)을 쳐서 임금이나 귀족·고관들이 머무는 곳.[註 159] 영휘전(永徽殿) : 단의 왕후(端懿王后)의 혼전(魂殿).[註 160] 영소전(永昭殿) : 인경 왕후(仁敬王后)의 혼전.[註 161] 경녕전(敬寧殿) : 인현 왕후(仁顯王后)의 혼전.
사신(史臣)은 논한다. "이에 앞서 조태채(趙泰采)·송상기(宋相琦) 등이 서로 잇따라 호판(戶判)이 되었는데, 구관(句管)을 잘못한 나머지 재정이 크게 줄어들어 병신년156) 부터 이에 이를 때까지 저축했던 것에서 10분의 7, 8분이 감축되었다고 한다."
조태구가 또 아뢰기를,
"인산(因山)157) 때의 막차(幕次)158) 는 마포(麻布) 및 면포(綿布) 2백 70여 동(同)이 소요됩니다. 청컨대 사약방(司鑰房)에 저치(儲置)해 둔 새로 만든 유막(帷幕)을 그대로 사용하여 경비를 줄이도록 하고, 영휘전(永徽殿)159) 에 소속된 궁인(宮人)은 영소전(永昭殿)160) ·경녕전(敬寧殿)161) 의 예에 의하여 참작하여 감생(减省)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9월 15일 기묘
사학 유생(四學儒生) 조징(趙澂) 등이 소를 올려 윤지술(尹志述)을 신구(伸救)하여 이르기를,
"윤지술의 소회(所懷)는 의리가 분명하고 사기(辭氣)가 통쾌하여 사기(士氣)를 감발(感發)할 수 있으니, 우리 선왕의 선비를 배양(培養)한 효과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우리 선왕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덕과 공렬(功烈)은 만세(萬世)의 법도(法度)가 아님이 없으며, 옳고 그름에 대하여 내리신 큰 처분에 이르러서는 성려(聖慮)의 넓고 아득함과 성학(聖學)의 고명(高明)한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공덕(功德)을 서술(敍述)하는 도리에 있어서 문자를 쓰는 데에 삼가고 정밀히 하여 행여나 민몰(泯沒)됨이 있을까 두려워해야 할 것인데, 이제 도리어 빠지고 모호한 곳이 있으니, 물정이 일제히 울분하고 사론(士論)이 무리를 지어 일어나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일입니다. 윤지술이 한낱 어린 소년으로서 개연히 분발하여 여러 선비를 앞장서 이끌고 곧장 궐문에 호소하려 하였다가, 실패를 당하고서도 오히려 격절(激切)하고 강개(慷慨)한 소회를 써 올렸으니, 이는 진실로 퇴폐한 세속 가운데에서 강한 뜻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선왕께서 배양(培養)하신 거룩한 뜻을 생각하시어 윤지술을 원방(遠方)에 정배하라는 명을 빨리 거두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윤지술의 일이 발생하자 시배(時輩)들이 오히려 놀라고 의심하며 두려운 나머지 움츠려 감히 드러나게 칭찬하고 추켜세우지 못하였으며, 간혹 헐뜯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임금의 처분이 준엄하지 않은 것을 보고 괴귀(怪鬼)한 무리들이 제멋대로 까치처럼 일어나 떠들며 방자하여 조금도 꺼림이 없었고, 감히 의리와 강개가 있다는 말로써 윤지술을 크게 칭찬했으니, 기강이 해이해지고 의리가 땅에 떨어짐이 이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다.
지평(持平) 김진상(金鎭商)이 한지(韓祉)의 소로 인하여 소를 올려 대변(對辨)하였는데, 전익대(全翼戴)의 일은 김환(金煥)에게 돌리고, 영기(令旗)를 주어 보낸 일은 허무 맹랑하다고 하였으며, 군뢰(軍牢)를 주어 보낸 일은 밤길을 호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핑계하면서 도리어 한태동(韓泰東)을 여지없이 꾸짖으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렸다.
9월 16일 경진
박휘등(朴彙登)·김상원(金相元)을 승지(承旨)로, 이봉익(李鳳翼)을 사간(司諫)으로, 홍용조(洪龍祚)를 장령(掌令)으로, 신방(申昉)을 정언(正言)으로, 이택(李澤)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김재로(金在魯)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조태억(趙泰億)을 경상 감사(慶尙監司), 김운택(金雲澤)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삼았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이조 참판(吏曹參判) 심택현(沈宅賢)은 비록 송성명(宋成明)의 소척(疏斥)을 받았으나, 개석(開釋)한 뒤에도 한결같이 명령을 어기니, 분의(分義)로 보아 온당하지 않습니다. 그 직임을 체차하소서. 그리고 정언(正言) 김고(金槹)는 갑자기 유척기(兪拓基)에게 예사롭지 않은 능욕을 가하였습니다. 대각(臺閣)에 이러한 풍습이 있을 줄이야 생각지도 않았던 일입니다. 그 직책을 파면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지평(持平) 신절(申晢)과 집의(執義) 홍우전(洪禹傳) 등이 소를 올려 김고를 신구(伸救)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9월 18일 임오
총호사(摠護使) 이건명(李健命)이 입대(入對)하여 아뢰기를,
"신릉(新陵) 표석(表石)의 음기(陰記)162) 에는, 청컨대 《선원보략(璿源譜略)》에 실린 바에 의하여 탄생(誕生)·즉위(卽位)·승하(昇遐)의 연월일 및 재위(在位) 몇 년, 춘추(春秋) 몇 년을 아울러 새겨 넣어 오랜 뒤에도 상고할 수 있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9월 19일 계미
김운택(金雲澤)을 승지(承旨)로, 신절(申晢)을 정언(正言)으로, 유척기(兪拓基)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9월 20일 갑신
달이 정성(井星)으로 들어갔다.
헌부(憲府)에서 앞서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고, 도승지(都承旨) 조명봉(趙鳴鳳)의 자질과 명망이 적절하지 아니하므로 물정이 해괴하게 여긴다 하여 탄핵하고 개차(改差)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조명봉(趙鳴鳳)은 바야흐로 좌승지(左承旨)로 있었는데, 김운택(金雲澤)이 들어가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자 조명봉이 차서에 의해 장석(長席)에 오르니, 온 세상이 놀라고 비웃었으므로, 이런 계사(啓辭)가 있었던 것이다.
관학 유생(館學儒生)이 여러 날 권당(捲堂)하였는데, 동성균(同成均) 이의현(李宜顯) 등이 들어가기를 권면하였으나 듣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이 계사(啓辭)를 빙자해 윤지술을 원방(遠方)으로 정배하라는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마지못해 하교하기를,
"여러 날 공재(空齋)하여 사체상 미안하니, 정배의 명을 도로 정지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윤지술의 능핍(淩逼)하고 거리낌이 없는 죄는 참으로 죽어도 용서받을 수 없었으나, 대신(大臣)과 삼사(三司)에서 떠들썩하게 신구(伸救)하였고, 반유(泮儒)들이 권당(捲堂)으로써 위협하였으며, 이의현이 또 중간에서 조종하여 임금으로 하여금 손을 쓰지 못하게 하였으니, 마침내 원방으로 정배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고야 말게 하였다. 이에 온 나라 사람들이 시배(時輩)들의 방자함을 분통하게 여기고 임금의 형세가 날로 외로와지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4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137면
【분류】왕실-종사(宗社)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사법-행형(行刑)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윤지술의 능핍(淩逼)하고 거리낌이 없는 죄는 참으로 죽어도 용서받을 수 없었으나, 대신(大臣)과 삼사(三司)에서 떠들썩하게 신구(伸救)하였고, 반유(泮儒)들이 권당(捲堂)으로써 위협하였으며, 이의현이 또 중간에서 조종하여 임금으로 하여금 손을 쓰지 못하게 하였으니, 마침내 원방으로 정배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고야 말게 하였다. 이에 온 나라 사람들이 시배(時輩)들의 방자함을 분통하게 여기고 임금의 형세가 날로 외로와지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이정신(李正臣)·권엽(權熀)을 승지(承旨)로, 조상건(趙尙健)을 교리(校理)로, 김상옥(金相玉)을 수찬(修撰)으로, 홍치중(洪致中)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삼았다.
대신(大臣) 및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호서(湖西)의 재황(災荒) 때문에 각 고을의 군향(軍餉) 및 상당성(上黨城)으로 수송할 안흥(安興)의 미곡(米穀)을 우선 반액은 진곡(賑穀)으로 남겨 두고 반액만 수납(輸納)할 것을 청하고, 또 상고(商賈)와 역관(譯官)에게 대출(貸出)한 평안 감영(平安監營) 천류고(泉流庫)의 은화(銀貨)를 잡물(雜物)로 대상(代償)하지 못하도록 금지할 것을 청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공조 판서(工曹判書) 민진원(閔鎭遠)이 허록(虛錄)한 자는 5년을 한정하여 금고(禁錮)의 영을 내릴 것을 다시 아뢰니, 그대로 따랐다.
9월 21일 을유
헌부(憲府)에서 앞서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포도 대장(捕盜大將) 이홍술(李弘述)이 술사(術士) 육현(陸玄)을 장살(杖殺)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육현은 추수(推數)163) 에 능하여 김창집(金昌集)이 처음에 친밀하게 지냈는데, 은밀한 일을 알려 주었다가 돌아서서 그 말을 누설할까 두려워하여 이홍술을 시켜 멸구지계(滅口之計)164) 로 박살(撲殺)했으니, 정상이 괴상하고 은밀하여 사람들이 모두 의혹을 가졌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4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137면
【분류】사법-치안(治安) / 역사-편사(編史)
[註 163] 추수(推數) : 운명학(運命學).[註 164] 멸구지계(滅口之計) : 죽여서 말을 못하게 하는 계획.
사신은 논한다. "육현은 추수(推數)163) 에 능하여 김창집(金昌集)이 처음에 친밀하게 지냈는데, 은밀한 일을 알려 주었다가 돌아서서 그 말을 누설할까 두려워하여 이홍술을 시켜 멸구지계(滅口之計)164) 로 박살(撲殺)했으니, 정상이 괴상하고 은밀하여 사람들이 모두 의혹을 가졌다."
9월 24일 무자
이덕수(李德壽)를 지평(持平)으로, 김상원(金相元)을 강원 감사(江原監司)로 삼았다.
9월 25일 기축
밤에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대신(大臣) 및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강도(江都)의 흉황(凶荒) 때문에 신환곡(新還穀)은 정해진 수량에 의하여 징수(徵收)하고 구환곡(舊還穀)은 정봉(停捧)할 것을 청하였으며, 또 어영청(御營廳)의 초관(哨官)은 금위영(禁衞營)의 예에 의하여 38원(員)으로 감축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황해 병영(黃海兵營)의 수영패(隨營牌)에 원액(元額) 밖에 함부로 투속(投屬)한 자를 금지하여 모두 본고을에 되돌려 줄 것과 양보(良保)는 군역(軍役)에 옮겨 보충(補充)하고 그 대신에 공사천(公私賤) 2명을 정급(定給)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9월 26일 경인
천둥하였다.
김운택(金雲澤)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조상건(趙尙健)을 부응교(副應敎)로, 오명항(吳命恒)을 승지(承旨)로, 이삼(李森)을 수원 부사(水原府使)로 삼았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천둥의 변괴로써 차자(箚子)를 올려 사면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천둥의 변괴가 예사롭지 않음은 허물이 실로 나에게 있으니,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9월 28일 임진
홍문관(弘文館) 신록(新錄)165) 에 조문명(趙文命)·정석오(鄭錫五)·이기진(李箕鎭)·신절(申晢)·김민택(金民澤)·김제겸(金濟謙) 등 6인이 피선(被選)되었다.
사신은 논한다. "국조(國朝)의 고례(故例)에 옥당(玉堂)의 신록(新錄)을 선발할 때에는 완의(完議)를 먼저 하고 권점(圈點)166) 을 뒤에 하였으며 부제학(副提學)이 기일(期日)에 앞서 영(令)을 내려 중외(中外)로 하여금 모두 알게 하였으니, 이는 대개 그 일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었다. 조상건(趙尙健)·김상옥(金相玉) 등은 청의(淸議)에 배척을 당했고, 유척기(兪拓基)도 또한 김고(金槹)에게 탄핵을 받아 모두 인입(引入)하고 나오지 않았는데, 이 날 몰래 서로 약속하고 돌연히 나와 회의(會議)에 참석하여 급급히 권점을 마친 다음 이어 곧 관(館)을 비우고 흩어졌으니, 거조가 해괴하여 듣는 자들이 모두 비웃었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4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137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註 165] 신록(新錄) : 홍문관(弘文館)의 교리(校理)나 수찬(修撰) 벼슬에 새로 뽑힌 사람.[註 166] 권점(圈點) : 홍문관(弘文館)의 관원을 뽑을 때 후보자들의 성명을 죽 적어 놓고 전선관(銓選官)이 각기 뽑고자 하는 사람의 성명 아래에 찍는 둥근 점. 점수가 많은 사람이 뽑히게 되는 것으로, 지금의 투표와 비슷함.
사신은 논한다. "국조(國朝)의 고례(故例)에 옥당(玉堂)의 신록(新錄)을 선발할 때에는 완의(完議)를 먼저 하고 권점(圈點)166) 을 뒤에 하였으며 부제학(副提學)이 기일(期日)에 앞서 영(令)을 내려 중외(中外)로 하여금 모두 알게 하였으니, 이는 대개 그 일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었다. 조상건(趙尙健)·김상옥(金相玉) 등은 청의(淸議)에 배척을 당했고, 유척기(兪拓基)도 또한 김고(金槹)에게 탄핵을 받아 모두 인입(引入)하고 나오지 않았는데, 이 날 몰래 서로 약속하고 돌연히 나와 회의(會議)에 참석하여 급급히 권점을 마친 다음 이어 곧 관(館)을 비우고 흩어졌으니, 거조가 해괴하여 듣는 자들이 모두 비웃었다."
9월 29일 계사
김연(金演)을 도승지(都承旨)로, 한세량(韓世良)·홍석보(洪錫輔)를 승지(承旨)로, 김상옥(金相玉)을 사간(司諫)으로, 조상경(趙尙絅)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이의현(李宜顯)을 우참찬(右參贊)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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