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임술
사헌부(司憲府)에서 아뢰기를,
"지난날 세 대신(臺臣)을 삭직(削職)하고 파출(罷黜)한 견책(譴責)은 진실로 전에 없던 지나친 거조이므로, 후사(喉司)의 신하가 마땅히 반복해 개진하여 소청을 얻어내도록 기약했어야 할 것인데, 몇 차례 헤아려 진계(陳啓)한 바 끝내 초초(草草)637) 한 데 돌아감을 면치 못하였으며, 한 번 온당하지 못하다는 비답(批答)을 받자, 바로 받들어 행하기에 급급하여 드디어 성상께서 몹시 괴로와하시는 일을 끝내 제때에 바로잡지 못하였으니, 왕명의 출납을 오직 진실하게 한다는 도리가 과연 어떠합니까? 일이 이미 지나갔다 하여 마침내 규핵(糾劾)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해당 승지(承旨)를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11월 2일 계해
예조(禮曹)에서 자의전(慈懿殿) 주갑(周甲)에 진하(陳賀)하는 한 가지 일을 대신들에게 의논하니, 김수항(金壽恒)·김수흥(金壽興) 등은 말하기를,
"이제 해조(該曹)의 계사(啓辭)를 보건대, ‘국휼(國恤) 3년 안에는 무릇 경하(慶賀)에 관계되는 것은 일체 모두 임시로 정지하였으며, 신묘년638) 에 자전(慈殿)의 환후(患候)가 평복(平復)되신 뒤에도 하례를 행하지 아니하고, 대신 반교(頒敎)하였다.’ 하였습니다. 국휼 3년 안에 성상께서 하례(賀禮)를 받는 것이 비록 편치 못하다 하나,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에 경하(慶賀)하는 데 있어서는 어찌 절목(節目)·복색(服色) 때문에 방애(妨碍)되고 불편(不便)한 바가 그러하겠습니까? 그러나 전례(前例)가 이와 같고, 달리 의거할 만한 것도 없는데, 지금 와서 창행(創行)하는 것은 감히 가볍게 의논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정지화(鄭知和)·민정중(閔鼎重)·이상진(李尙眞) 등은 말하기를,
"국휼 3년 안에 경하(慶賀) 등의 일을 일체 정지해 폐하는 것은 곧 예(禮)의 상도(常道)인데, 이는 전하께서 친히 하례를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군신(群臣)이 동조(東朝)에 진헌(陳獻)하는 것도 아울러 함께 정지하는 것은 마땅치 못할 듯합니다. 군신이 입는 것은 기복(朞服)이며, 또 압존(壓尊)이 되니 어찌 그 기쁜 정성을 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에게 다시 의논토록 하였다.
승지(承旨) 윤반(尹攀)이 명을 받들고 지평(砥平) 땅에 가서 성지(聖旨)를 봉조하 송시열(宋時烈)에게 전유(傳諭)하자, 송시열이 병세(病勢)가 더하여 스스로 힘을 낼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다시 다른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11월 3일 갑자
임금이 편찮은 지 열흘이 가까우므로, 약방(藥房)을 주원(廚院)으로 옮겨 입직(入直)하게 하고, 대소(大小)의 관원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도제조(都提調) 김수흥(金壽興)이 아뢰기를,
"지금 긴급한 공사(公事) 외에 칙사(勅使)가 올 때에 전례에 따라 수응(酬應)하는 일과 같은 것은 대신과 상의하여 거행하게 하고, 성상의 환후(患候)가 평복되시기를 기다려서 조용히 아뢰게 하여 조섭(調攝)을 편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11월 4일 을축
대왕 대비(大王大妃)가 언서(諺書)로 약방에 하교하기를,
"대전(大殿)의 미령(未寧)하신 환후가 여러 날 미류(彌留)639) 하고, 또 재이(災異)가 있으니, 더욱 염려된다. 이어(移御)하실 것을 권하려고 한 것이 오래인데, 주상의 뜻이 기꺼이 따르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이어하시기에 마땅한 곳도 없으나, 지금 병환이 이와 같으시니, 속기(俗忌)640) 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창경궁(昌慶宮) 내반원(內班院)으로 옮기시도록 권하려고 한다."
하였는데, 약방에서 구전(口傳)으로 아뢰기를,
"내간(內間)의 일은 비록 신 등이 감히 알지 못하나, 이러한 때에 이어하시는 것은 진실로 중난(重難)합니다. 성상의 환후(患候)가 결단코 노동(勞動)하시기 어려우니, 며칠 살펴보았다가 다시 의논해 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인하여 궁내(宮內)에서 내린 언교(諺敎)를 도로 바쳤다.
김환(金煥)을 삼수군(三水郡)에 정배(定配)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역(逆) 허새(許璽)를 고발한 자가 김환이니, 그 공이 진실로 크나, 전익대(全翊戴)를 달래고 위협한 자도 김환이니, 죄 또한 용서할 수 없다. 먼저 그 죄를 밝힌 다음 그 공을 의논하였더라면 혹시 가하겠지만, 이제 그 죄는 묻지 아니한 채 먼저 그 공을 시상(施賞)하여 무고(誣告)의 율(律)이 유독 협종(脅從)641) 한 전익대에게만 미쳤으니, 어떻게 인심을 복종시키고, 또한 어떻게 국가를 다스리겠는가?"
【태백산사고본】 17책 15권 35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18면
【분류】사법-행형(行刑) / 역사-사학(史學)
[註 641] 협종(脅從) : 위협을 받아 따름.
사신(史臣)은 말한다. "역(逆) 허새(許璽)를 고발한 자가 김환이니, 그 공이 진실로 크나, 전익대(全翊戴)를 달래고 위협한 자도 김환이니, 죄 또한 용서할 수 없다. 먼저 그 죄를 밝힌 다음 그 공을 의논하였더라면 혹시 가하겠지만, 이제 그 죄는 묻지 아니한 채 먼저 그 공을 시상(施賞)하여 무고(誣告)의 율(律)이 유독 협종(脅從)641) 한 전익대에게만 미쳤으니, 어떻게 인심을 복종시키고, 또한 어떻게 국가를 다스리겠는가?"
11월 5일 병인
화성(火星)과 목성(木星)이 서로 범하였다.
11월 6일 정묘
예조에서 자의전(慈懿殿) 주갑 탄일(周甲誕日)에 진하(陳賀)하는 일을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에게 문의(問議)하니, 말하기를,
"공손히 생각하건대, 성상께서는 효성이 무궁하셔서 자의전(慈懿殿) 주갑(周甲)의 해에 경하(慶賀)의 예식(禮式)을 설행(設行)하려고 하시니, 무릇 보고 듣는 자로서 누가 흠앙(欽仰)하고 감복하지 아니하겠습니까? 다만 가만히 생각하건대, 말에 이르기를, ‘한 사람이 구석을 향하여 슬퍼하면 온 집안에 가득한 사람이 즐거워하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성상께서는 상하 신인(神人)의 주인으로서 바야흐로 슬퍼하시는 가운데 계시고, 겸하여 또 영모(永慕)하는 혼전(魂殿)이 지척(咫尺)의 땅에 가까이 있는데, 자의전의 자애(慈愛)하시는 덕으로 미루어 생각하시더라도 어찌 경하의 예식을 받으시는 데 편안하시겠습니까? 자의전의 마음이 이와 같으신데, 성상께서 지극하신 정(情)에 절박하여 그 미안해 하시는 바를 억지로 행하시는 것 또한 마음에 순종하고 뜻을 받드는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인하여 삼가 생각하건대, 풍정(豐呈)642) 을 양궁(兩宮)에 겸하여 베푼다는 논의는 예전부터 이미 있었는데, 오늘날 욕의(縟儀)를 홀로 받으시면, 자의전께서는 반드시 추억하여 차마 할 수 없는 마음이 계실 것이며, 신료(臣僚)에 있어서도 경사스러워하는 마음은 적고 슬퍼하는 심정이 많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성상께서 이 날에 진실로 매연(昧然)하게 지나치지 않고자 하시면 별도로 공헌(供獻)하는 것이 있어서 기쁘게 경하하는 뜻을 드리고, 아직은 영모전(永慕殿)의 부묘(祔廟)643) 를 기다린 뒤에 좋은 날을 가려서 추행(追行)하면 회갑의 해를 넘겨도 오랠수록 더욱 기쁘고 경사스러울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그 의논에 따랐다.
11월 7일 무진
자의전(慈懿殿)의 주갑 탄일(周甲誕日)이므로, 교서(敎書)를 반포하고 사유(赦宥)를 베풀었다. 그러나 명성 왕후(明聖王后)의 상기(喪期)가 아직 다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진하(陳賀)는 권정(權停)하였다. 그 교문(敎文)에 이르기를,
"육순(六旬)이 금년에 다시 시작하니 자성(慈聖)께서 주갑의 때를 당하였고, 칠일(七日) 만에 복(復)이 이 달에 돌아오니644) , 상서로운 경사가 탄생하신 날에 이르도다. 무릇 복육(覆育)645) 하는 가운데 있는 자로서 누가 그 아래에서 기뻐하지 아니하겠는가? 이에 용서하는 은택을 베풀어 크게 윤음(綸音)을 펴노라. 공경히 생각하건대, 자의 공신 휘헌 대왕 대비 전하(慈懿恭愼徽獻大王大妃殿下)께서는 마음가짐이 깊고도 성실하시고, 덕이 넓고도 두터우셔서 만백성을 자식처럼 보셨고, 절약으로 은혜를 삼아 삼조(三朝)에 모범을 보이시며 곧고 고요함을 법도로 삼으셨다. 하물며 내가 어리고 약한 자질(資質)로 일찍이 어렵고 큰 기업(基業)을 이어받았는데, 화란(禍亂)과 위의(危疑) 속에 옹호해 도우신 공을 함께 우러러 보았고, 질병(疾病)과 근심 속에 보호하시는 그 사랑은 더욱 돈독하셨다. 이에 보령(寶齡)의 주갑이 거듭 돌아옴을 당하여 천휴(天休)646) 가 거듭 이름을 크게 받으셨도다. 조그마한 정성에 상수(上壽)할 마음이 스스로 간절하여 풍정(豐呈)을 양궁(兩宮)에 올리려고 하였는데, 장신궁(長信宮)647) 께서 갑자기 승하(昇遐)하셔서 팔역(八域)에 슬픔을 당하였으므로, 욕의(縟儀)를 마침내 궐(闕)하였으니, 지극한 슬픔을 어찌 다하겠는가? 갑자(甲子)는 역기(曆紀)의 시원(始元)인데, 바로 61세가 되돌아왔고, 이때에 탄강(誕降)하신 절기(節期)가 이르렀으니, 새로 백천만 년을 헤아리리라. 비록 곤궁한 여염(閭閻)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이 기쁜 마음을 지닐 것인데, 하물며 지존(至尊)의 큰 경사를 어찌 차마 헛되게 지내겠는가? 내간(內間)에서 박하게 갖추어 간략하게 닦았으니, 경하하는 술잔을 드는 행사를 이루지 못하였으나, 많은 의식을 특별히 상수(常數)보다 더하여 오직 폐백을 드리는 정성을 다하노라. 시혜(施惠)가 시위(侍衞)하는 무리에게도 미치게 하고, 아울러 반사(頒賜)의 은전을 더하였으며, 다시 덕의(德意)를 미루어 널리 죄수를 석방한다. 이달 초7일 매상(昧爽)648) 이전부터 잡범(雜犯)의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용서하여 죄를 면제하고, 관(官)에 있는 자는 각각 자급(資級)을 더하되 자궁(資窮)649) 인 자는 대가(代加)650) 하도록 하라. 아! 나라는 효(孝)로 다스리는 것을 우선으로 삼고, 백성은 이륜(彛倫)으로 소중함을 삼는다. 일주(一周)하여 다시 시작하니, 바야흐로 만수무강(萬壽無疆)을 빌며 함께 유신(維新)하려는 것이니, 자주 사유(赦宥)하는 것을 다행으로 삼지 말도록 하라. 그래서 이를 교시(敎示)하니, 마땅히 자세히 알 것으로 생각한다."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이민서(李敏敍)가 지어서 바쳤다.】
【태백산사고본】 17책 15권 36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18면
【분류】사법-행형(行刑) / 왕실-의식(儀式)
[註 644] 칠일(七日) 만에 복(復)이 이 달에 돌아오니 : 《주역(周易)》 복괘(復卦)의 ‘칠일내복 천행야’[七日來復 天行也]’에서 온 말로, 사물과 인사(人事)의 변화는 대개 7일을 한 주기(周期)로 하는데, 이것은 천지 자연의 운행 법칙을 반복하는 것이라 함. 복괘(復卦)는 바로 양기(陽氣)가 되살아나 다 사라져 버렸던 강한 기운이 되돌아오므로, 어디를 나가거나 들어오거나 아무 탈이 없다고 함.[註 645] 복육(覆育) : 천지가 만물을 덮어 기름.[註 646] 천휴(天休) : 하늘의 아름다운 명령.[註 647] 장신궁(長信宮) : 한대(漢代)에 장락궁(長樂宮) 안에 있던 태후(太后)가 거처하는 궁전(宮殿)인데, 여기에서는 왕대비(王大妃)였던 명성 왕후(明聖王后)를 가리킨 말임.[註 648] 매상(昧爽) : 날이 셀 무렵.[註 649] 자궁(資窮) : 당하관(堂下官)의 품계가 더 올라갈 자리가 없게 되었다는 뜻으로, 당하 정3품(正三品)이 됨을 일컫는 말임.[註 650] 대가(代加) : 품계를 올려 줄 사람을 대신하여 그 아들·사위·동생이나 조카들에게 대신 품계를 올려 주던 일.
임금이 하교하기를,
"이제 대왕 대비전의 주갑 탄일(周甲誕日)을 마침 이때에 당하였으나, 경하(慶賀)하는 예는 폐지 못하고 다만 반사(頒赦)하도록 하였다. 옛말에 이르기를, ‘내 노인(老人)을 공경하되, 남의 노인에게도 미쳐야 한다’ 하였으니, 특별한 은전을 추급(推及)하여 상하(上下)가 함께 경사스러워하는 뜻을 보이지 않을 수 없다. 조신(朝臣)과 서민, 공사천(公私賤)을 물론하고 나이 80세 이상은 특별히 가자(加資)하고, 인조조(仁祖朝)에 일찍이 시종(侍從)을 지낸 인원에게는 아울러 식물(食物)을 주게 하라."
하였다. 뒤에 또 인조조 상신(相臣) 이행원(李行遠)·이시백(李時白)·이후원(李厚源)의 아내가 아직 살아 있는데, 대왕 대비전에 외명부(外命婦)가 되므로 아울러 식물을 주게 하였다. 그 나머지 고(故) 대신(大臣)·재신(宰臣)의 아내로 나이가 70세 이상인 자는 일체로 존휼(存恤)케 하였는데, 영부사(領府事) 김수흥(金壽興)의 청에 따른 것이었다.
금부(禁府)의 시수(時囚) 6인과 금부와 형조(刑曹) 소관의 유배(流配)된 죄인 68인을 사면(赦免)하였다.
11월 8일 기사
유성(流星)이 성성(星星) 아래에서 나와 오거성(五車星) 위로 들어갔다.
경상도 암행 어사(慶尙道暗行御史) 김창협(金昌協)이 복명(復命)하고, 서계(書啓)를 올렸는데, 이를 해조(該曹)에 내려 복주(覆奏)케 하여 안동 부사(安東府使) 유지발(柳之發) 등을 파면하고, 나머지는 차등을 두어 논벌(論罰)하였다.
김진귀(金鎭龜)를 승지(承旨)로, 박세채(朴世采)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11월 9일 경오
밤에 도승지(都承旨) 안진(安縝)이 약방(藥房)에 입직(入直)하였다가, 갑자기 병이 나서 위급하니, 임금이 유문(留門)651) 하여 내보내게 하고는 의원을 보내어 병을 보살피게 하였으며, 또 사알(司謁)로 하여금 그 병을 묻게 하여 염려하는 뜻을 유시(諭示)하였다.
11월 10일 신미
윤지선(尹趾善)을 도승지(都承旨)로, 김우형(金宇亨)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엄집(嚴緝)을 교리(校理)로, 이상(李翔)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삼았다.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이 현도 진소(縣道陳疏)하여 병을 핑계대고 이르지 아니하는데, 대략 이르기를,
"두 번 승지를 보내시어 병중에 상견(相見)하는 뜻을 유시(諭示)하셨으므로, 비로소 성후(聖候)가 편찮으심을 살펴 알았습니다. 먼 외방에서 받들어 듣고는 놀라고 염려스러움이 갑절 간절합니다. 곧 예궐(詣闕)하여 문안하고 조금이라도 견마(犬馬)의 정성을 펴는 것이 마땅하지만, 쇠잔하여 거의 다한 목숨이 조금도 올라갈 형세라고는 없습니다. 아! 신이 자손의 병에는 근력(筋力)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망령되게 수백 리 밖까지 가면서 군부(君父)의 병환에는 도리어 사생(死生)을 헤아려서 7, 8사(舍)652) 사이에서 머뭇거려 경중(輕重)이 뒤바뀌고 의리(義理)를 온전히 잃었으니, 슬픈 한(恨)이 가슴을 메워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습니다. ‘병중에 생각한다.’는 하교를 세 번 되풀이하시니, 진실로 눈물이 옷깃을 적심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위유(慰諭)를 갖추어 더하였다.
11월 12일 계유
임금이 창덕궁(昌德宮) 태화당(泰和堂)으로 이어(移御)하였다.
11월 13일 갑술
식년 문과 전시(式年文科殿試)653) 에 홍수점(洪受漸) 등 36명을 뽑았다.
11월 14일 을해
달이 필성(畢星)으로 들어갔다.
11월 15일 병자
예조(禮曹)에서 말하기를,
"연제(練祭) 후에 내관(內官)의 외출하는 복색을 상교(上敎)에 의하여 대신에게 의논하였더니, 영의정 김수항(金壽恒) 등이 말하기를, ‘내시(內侍) 이하는 모두 성상의 복색을 따라 3년을 마치는 것으로, 군신(群臣)과는 스스로 다름이 있으며, 《오례의(五禮儀)》에 정한 바도 대개 이를 모방한 것인데, 이제 와서 가볍게 고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다.’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식물(食物)을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에게 주도록 명하였는데, 영부사(領府事) 김수흥(金壽興)의 청에 따른 것이었다.
11월 17일 무인
금성(金星)이 저성(氐星) 가운데로 들어갔다.
정지화(鄭知和)를 좌의정(左議政)으로 삼았다.
11월 19일 경진
상후(上候)가 편안해지자, 약방의 윤직(輪直)을 파하도록 명하고,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김수흥(金壽興) 이하에게 차등 있게 상(賞)을 내렸다.
11월 21일 임오
권시경(權是經)을 승지(承旨)로, 이이명(李頤命)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삼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신필청(申必淸)을 삭거 사판(削去仕版)할 것을 청하고 두 번 아뢰니, 그대로 따랐다.
11월 22일 계미
이혼(李焜)·이엽(李熀) 등을 방면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조용히 영부사(領府事) 김수흥(金壽興)에게 이르기를,
"혼·엽을 당초에 편배(編配)한 것은 죄가 있다고 여긴 것이 아니라 진실로 보전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에 앞서 여러 번 석방하려고 하였으나, 대신들의 지난(持難)함으로 인하여 이제까지 실행하지 못하였다. 혼·엽이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에게는 바로 자손이므로, 이제 주갑에 은전을 베푸는 날을 당하여 석방하려고 하는데 어떠한지 알지 못하겠다."
하였는데, 김수흥이 대답하기를,
"국가(國家)의 처치(處置)는 단지 보전(保全)하려는 것이니, 연하(輦下)에 방환(放還)하는 것은 결코 불편(不便)할 것으로 압니다."
하고,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좌의정 정지화(鄭知和)는 말하기를,
"연하(輦下)에 방환(放還)할 필요는 없고, 조금 가까운 곳에 옮겨 두어서 은전을 베풀고 효성을 넓히는 뜻을 보이소서."
하고, 판부사(判府事) 이상진(李尙眞)은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전석(前席)에서 석방하시도록 청하였는데 지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하고, 판부사 민정중(閔鼎重)은 말하기를,
"종전의 보전케 하고 환란을 염려한다는 말씀도 비록 의견이 없지 아니하나, 성상의 하교가 이와 같으시니 감히 순종하지 아니하겠습니까?"
하니, 드디어 석방하도록 명하고, 인하여 올라올 때 양도(兩道)의 감사(監司)로 하여금 말을 주고 공궤(供饋)하게 하였다.
11월 23일 갑신
비변사(備邊司)에서 관향 모미(管餉耗米) 1천 5백 석과 관서(關西)654) 의 요군 면포(遼軍綿布) 7백 50필과 본사(本司)에서 구관(句管)하는 병영 면포(兵營綿布) 7백 50필을 해서(海西)655) 에 획급(劃給)하여 칙수(勅需)에 보태게 하고, 진휼청(賑恤廳)의 미두(米豆) 5, 60석과 고양(高陽) 등 고을의 회부 미두(會付米豆) 각 20석을 경기(京畿) 역(驛)의 인마(人馬)에게 내어 주어 칙사의 행차에 인마가 서울에 머물 때 기르는 것과 송도(松都)에 왕복할 때의 양식으로 삼도록 청하였는데, 모두 양도(兩道) 도신(道臣)의 청에 따른 것이었다.
11월 24일 을유
유성(流星)이 천중(天中)에서 나와서 북쪽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지난번 금부(禁府)에서 석방하고 석방하지 않은 단자(單子)를 보건대, 방질(放秩)이 너무 많았다. 그 가운데 홍구서(洪九敍)는 특별히 나추(拿推)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때 아직 처분하지 아니하였고, 이일삼(李日三)은 어사(御史)의 서계(書啓)로 인하여 겨우 갇혔으나 미처 공초(供招)받지 아니하였으니, 수령된 자를 어떻게 징계하겠는가? 해부(該府)의 처사가 매우 적당하지 못하니 금부의 해당 당랑(堂郞)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
하였다.
11월 25일 병술
박징(朴澂)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11월 26일 정해
한구(韓構)를 발탁(拔擢)하여 승지(承旨)로 삼고, 이여(李畬)를 집의(執義)로 삼았다.
11월 27일 무자
하교하기를,
"금년 흉황은 팔도(八道)가 똑같으니, 구호하고 무마(撫摩)하는 정사를 조금도 늦출 수 없다. 만일 빨리 거행할 일이 있으면, 진휼청(賑恤廳)에서 먼저 묘당(廟堂)에 나아가서 의논한 뒤에 품처(稟處)하여 늦추어서 때에 미치지 못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29일 경인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都提調) 김수흥(金壽興)이 말하기를,
"인조조(仁祖朝)에 시종신(侍從臣)과 대신(大臣)·재신(宰臣)의 아내로 나이가 70세 이상인 사람에게는 식물(食物)을 주었는데, 그 때 시종관으로 대신과 재신(宰臣)의 반열(班列)에 이른 자의 아내로서 현재 살아 있는 자는 3, 4인에 불과하니, 나이가 비록 70에 차지 아니하였더라도 일체로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고(故) 필선(弼善) 정뇌경(鄭雷卿)과 고 부윤(府尹) 황일호(黃一皓)의 아내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나이도 80인데, 이들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아내는 조가(朝家)에서 더욱 진휼(軫恤)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뇌경·황일호 두 사람이 억울하게 죽은 정상은 지금 생각하여도 오히려 가엾고 슬프다. 특별히 식물을 주고, 나머지도 모두 아뢴 바에 의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부제조(副提調) 윤지선(尹趾善)이 말하기를,
"고(故) 판서(判書) 박장원(朴長遠)에게 시호(諡號)를 내리라는 명이 있었는데, 자손이 유명(遺命)이라 하여 시장(諡狀)을 올리지 아니하고 있으니, 마땅히 시장을 올리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김세정(金世鼎)을 헌납(獻納)으로, 남필성(南弼星)을 장령(掌令)으로, 신완(申琓)·송규렴(宋奎濂)을 승지로 삼았다.
11월 30일 신묘
유성(流星)이 천중(天中)에서 나와 남쪽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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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종실록15권, 숙종 10년 1684년 12월 (1) | 2025.11.16 |
| 숙종실록15권, 숙종 10년 1684년 10월 (0) | 2025.11.16 |
| 숙종실록15권, 숙종 10년 1684년 9월 (0) | 2025.11.16 |
| 숙종실록15권, 숙종 10년 1684년 8월 (0) | 2025.1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