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15권, 숙종 10년 1684년 12월

싸라리리 2025. 11. 16.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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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임진

유성이 대각성(大角星) 아래에서 나와 익성(翼星) 위로 들어갔다.

 

지평(持平) 황흠(黃欽) 등이 상소하여 최석항(崔錫恒) 등이 받은 죄가 지나침을 논하고, 도로 거두기를 청한 것을 빨리 준허(准許)할 것을 청하고, 또 호서(湖西)656)  의 연해(沿海) 일곱 고을은 재해를 입은 것이 더욱 심하니, 호남·영남의 가장 심한 고을과 같이 일체로 부역(賦役)을 견감(蠲減)할 것을 청하여 진달하였으며, 또 서북 관물(西北官物)의 솔축(率畜)을 금하도록 전후에 거듭 내렸는데도 범하는 자가 잇따라서 폐단이 여전하니, 수(數)대로 모두 조사해 내어 본 고을에 쇄환(刷還)하게 하고, 그 솔축한 자는 종중 과죄(從重科罪)할 것을 청하여 논하였는데, 답하기를,
"최석항 등이 범한 바는 작은 일이 아닌데, 어찌 언관(言官)인 까닭으로써 지나치게 용서할 것인가? 상소 말단의 일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12월 2일 계사

예조(禮曹)에서 청하기를,
"연제(練祭)의 신주(神主)를 개제(改題)할 때에 성성께서 참석하지 못하시면, 대신(大臣) 및 예관(禮官)과 봉상시 제조(奉常寺提調)가 산릉 제주(山陵題主) 때의 예(例)에 의하여 흑단령(黑團領)·오사모(烏紗帽)·흑각대(黑角帶)로써 조금 멀리 입시(入侍)하여 봉심(奉審)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이를 윤허하였다.

 

12월 3일 갑오

유성(流星)이 천창성(天倉星) 아래에서 나와 남쪽으로 들어갔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都提調) 김수흥(金壽興)이 말하기를,
"병판(兵判) 조사석(趙師錫)이 일찍이 북경(北京)에 갔을 때에 곽조서(郭朝瑞)란 자가 일찍이 오삼계(吳三桂)의 관하(管下)가 되었다 하여 주류하(周流河)에 분배(分配)되었는데, 거리가 심양(瀋陽)에서 하루 노정(路程)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글을 알아서 조사석이 더불어 서로 친숙하였으므로, 지난번 재자관(齎咨官) 천영선(千永善)이 갈 적에 글을 보내어 안부를 묻고, 그쪽 사정을 알려줄 것을 청하였는데, 천영선이 돌아와서 그 답장을 전하였습니다. 성상께서 바야흐로 정섭(靜攝)하고 계시므로, 조사석과 영상(領相)이 들어와 뵙지 못하고 신이 감히 대신 올립니다."
하고, 인하여 그 글을 읽었는데, 글에 이르기를,
"강희(康熙)657)  가 희봉구(喜峰口)에 나가서 피서(避暑)하였는데, 다음날 조정 안의 경천주(擎天柱)라고 이름하는 대전(大殿)의 가운데 기둥이 벽력 같은 소리를 내면서 5척(尺)쯤 무너졌으므로, 북경에 있던 대신(大臣)이 이를 아뢰자, 곧 보수(補修)하게 하였습니다. 또 근일에 궁중(宮中)에서 밤에 귀신이 우는 기이한 소리가 들려서 재앙을 일으키는 것이 예사롭지 아니하니, 이 또한 요얼(妖孼)658)  의 일입니다. 또 사냥을 할 때에 갑자기 광풍(狂風)이 크게 일어나서 새벽에서 낮까지 이르는가 하면, 바람이 그친 뒤에 모래와 돌이 약 한 자 가량이나 있었는데, 강희(康熙)의 입은 옷이 날려가서 아득하게 종적이 없었으며, 그 나머지 관원(官員)들의 장방 의모(丈房衣帽)도 날려간 것이 매우 많았습니다. 8월 안에 북경에 돌아왔는데, 유 순무(劉巡撫)의 가신(家臣)으로 진씨(陳氏) 성(姓)을 가진 자가 진본(進本)한 속에 이르기를, ‘천변(天變)은 족히 두려워할 것이 못되고, 인사(人事)도 족히 근심할 것이 못된다는 등의 일곱 가지 조목에, 「지금 백성은 정수(征輸)에 피곤하고 관병(官兵)은 순행(巡幸)에 괴로와하니, 마땅히 안으로는 성색(聲色)을 멀리하고 밖으로는 유전(遊畋)을 끊어서 군사를 쉬게 하고 백성을 기르면, 인사(人事)의 계책을 얻어 천변을 돌이킬 수 있다….」’라고 하였는데, 강희가 크게 노여워하여 조정에서 매를 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또 친히 매를 잡고 치니, 몸이 온전한 데가 없었으나, 곧 오라(烏喇) 지방에 보내어 수자리살게 하였습니다. 운남(雲南)을 정벌하던 목 장군(木將軍)이 평서왕(平西王)의 가기(歌妓) 주보(珠寶)를 은닉(隱匿)한 일로 인하여 위협받아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는데, 지금 의이(薏苡)의 의심659)  으로 인하여 수색하는 자가 아직 두어 사람 있습니다. 운남 총독(雲南摠督) 채육(蔡毓)도 수색하는 가운데 있는데, 비록 이미 상소하여 밝혔으나 장래 어떤 결과를 이룰지 알지 못합니다.
운남 18가(家) 토사(土司)는 잘 무수(撫綏)하지 못하여 모두 부고(負固)660)  할 마음을 가졌는데, 또 유망(流亡)하는 자를 불러 들이니, 평서왕(平西王) 밑에 있던 옛사람을 거두어 머물러 둔 것도 다시 많으며, 이는 때를 기다려서 움직일 뜻입니다. 또 섬서 제독(陝西提督) 장용(張勇)은 이미 병들어 죽었고, 이제 칙명으로 흥안진 총병(興安鎭摠兵) 손사극(孫斯克)에게 그 일을 대신 맡게 하자, 서적(西狄)이 매우 다행스럽게 여겨 이미 변경 안 황초평(黃草坪)에서 목마(牧馬)를 점유해 가서 중원(中原)을 엿보니, 장차 내침(內侵)할 거사(擧事)가 있을 것입니다. 광동(廣東) 바다 안에는 아직 평서왕(平西王) 밑의 수사 장군(水師將軍) 사궐복(謝厥福)의 아들 사창(謝昌)이 군사 3천을 거느리고 해상에 출몰(出沒)하고 있는데, 금년 5월 안에 광동(廣東)의 복산(福山) 일대(一帶)에서 크게 겁략(刼掠)을 행하고 갔으나 풍도(風濤) 만리에 종적이 일정하지 아니합니다. 대만(台灣) 정씨(鄭氏)로 청조(淸朝)에 귀순한 자가 10에 7, 8이 있었는데, 그래도 2, 3의 기개(氣槪) 있는 자가 있어서 가구(家口)를 데리고 바다를 건너 갔으나,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합니다.
곽조서(郭朝瑞)는 망국(亡國)의 신복(臣僕)으로서 몸이 진흙 속에 빠졌는데, 역려(逆旅)661)  에서 고명(高明)을 만나 마음속을 털어놓고 대담한 때가 많았으니, 또한 뜻밖의 해후(邂逅)였습니다. 다만 가는 걸음이 총총함을 어찌하겠습니까? 작별한 뒤에 마음속에 맺힌 그리움이 찧는 듯하여 떠도는 나그네가 머리를 들어 운천(雲天)을 바라보니, 오직 서풍(西風)에 원숭이의 슬피 우는 소리만 들려올 뿐입니다. 사자(使者)가 이르러 가르침을 받들고, 삼가 알고 들은 가장 확실한 것들을 비밀히 기록하여 받들어 보시도록 하고, 그 나머지 풍문은 감히 덧붙여 넣지 아니합니다.
일찍이 듣건대, 선비는 지기(知己)를 위하여 죽는다고 합니다. 곽조서의 마음은 이미 지기에게 허락하였으니, 어찌 이 비천한 사정(私情)을 가지고 귀국 임금에게 전달해 아뢰어 곽조서로 하여금 일을 정탐하는 사람으로 삼되, 조금은 구휼을 더하여 학철(涸轍) 속의 물고기662)  를 구제하지 아니하시겠습니까? 예전부터 큰 덕을 베푸는 자는 작은 비용을 아끼지 아니하고, 견문(見聞)을 넓히는 자는 이목(耳目)을 이방(異邦)에 의뢰합니다. 알지 못하지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를 자우(子雨)·원중(圓仲) 두 분 이 선생(李先生)께 올리니, 다시 이름을 꾸짖기 바라며, 대종백(大宗伯) 조 노선생(趙老先生) 합하(閤下)께 뜻을 다 밝히는 바입니다. 고(故) 주통정사 좌통정(周通政司左通政) 곽조서(郭朝瑞)는 머리를 조아려 절합니다.
강희(康熙)가 9월 24일에 산동(山東)에 거둥하여 태산(泰山)에 봉선(封禪)하였는데, 호필(扈蹕)하는 무리가 수만이나 되고 공응(供應)이 호번(浩繁)하였습니다. 봉선의 일을 마치자, 곧 양주(楊州)로 올라가서 대강(大江)을 건너 남경(南京)으로 나아갔다가, 소주(蘇州)·항주(杭州)를 경유하여 돌아왔는데, 스스로 왕복 4개월을 한정하였습니다. 도중에 모려산(茅廬山) 법보(法寶)가 있었고, 유망(流亡)한 자를 불러 모은 것이 약 1만 명이 되는데, 그대로 모려산에 반거(盤踞)하여 그 험한 요해지를 지키고 스스로 농사지어 먹으면서 때를 기다려 움직인다 합니다."
하였다. 【곽조서의 글은 이에 그쳤다. 자우(子雨)는 고부사(告訃使) 이유(李濡)의 자(字)이고, 원중(圓仲)은 서장관(書狀官) 이시만(李蓍晩)의 자(字)이며, 조 노선생(趙老先生)은 바로 조사석(趙師錫)을 가리킨 것이다.】 김수흥이 읽기를 다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이 글을 비록 다 믿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또한 허망한 데 이르지는 아니하니, 이 사람의 정리(情理)가 진실로 불쌍하고도 가엾습니다. 또 저쪽 사정을 탐문하는 방도에도 이와 같은 사람을 얻기가 어려우니, 비록 공공연하게 서로 궤유(饋遺)하여 청문(聽聞)을 번거롭게 할 수는 없으나, 후일 사신의 행차 때 반전(盤纏) 가운데 물품으로 넉넉하게 주휼(賙恤)을 더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정성이 진실로 가긍하니, 사신의 행차 때 반전을 넉넉하게 주어서 그 급함을 주휼(賙恤)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부제조(副提調) 윤지선(尹趾善)이 말하기를,
"당초에 천영선(千永善)을 재자관(齎咨官)의 행차에 들여보낸 것은 오로지 저쪽 사정을 정탐하기 위한 것인데, 강을 건넘에 미쳐서 수본(手本) 가운데에 이미 거론한 바가 없었고, 입경(入京)한 뒤에도 정납(呈納)한 일이 없으니, 매우 기이할 만합니다."
하니, 김수흥이 말하기를,
"황력 재자관(皇曆齎咨官)663)  의 행차는 차례를 바꿀 수 없으나, 그 위임한 바가 있기 때문에 차례를 바꾸어서 들여보냈으니, 돌아온 날에 그 사정을 정탐해 얻었거나 얻지 못하였거나 물론하고 마땅히 수본(手本) 가운데 거론했어야 할 것인데, 단지 약간의 긴요하지도 않은 문서를 찾아서 책임을 다한 바탕으로 삼았습니다. 그가 매수당한 것은 진실로 책할 것이 못되지만, 그가 유의(留意)해서 형찰(詗察)하지 아니한 것을 알 수 있으니, 지극히 통해(痛駭)합니다. 또 그가 만약 착실히 정탐하였으면, 그 주선할 즈음에 또한 어찌 곡절(曲折)과 사설(辭說)이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전혀 언급한 바가 없으니, 더욱 무상(無狀)합니다. 지금 객사(客使)가 바야흐로 이르렀으니, 비록 곧 논죄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사역원(司譯院)에서 삭명(削名)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그가 이미 맡은 일이 있는데 수본(手本) 가운데 거론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서울에 들어오던 날에 차비문(差備門) 아래에 불러서 물었더니, 비로소 그 문서를 얻어 온 일을 말하였으며, 단지 초초(草草)하고 허랑(虛浪)한 것으로써 책임을 다하려 하니, 일이 지극히 놀랄 만하다. 칙사의 행차가 돌아간 뒤에 나문(拿問)하여 죄를 정할 것이나, 먼저 삭명(削名)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대저 천영선(千永善)이 얻은 문서는 바로 청국의 당보(搪報)로서, 우리 나라 조지(朝紙)664)  와 같은 것이었다. 청국 글자로 썼는데, 청나라 역관(譯官)으로 하여금 그 글을 번역하게 하였더니, 바로 우리 나라 남(柟)과 허견(許堅)의 옥정(獄情)을 저들에게 보고한 것들이었다.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이 상소하여, 나라의 연제(練祭)에 나아가려고 하였으나, 병으로 미처 입참(入參)하지 못하였으니, 장차 능하(陵下)에서 곡림(哭臨)하겠다는 뜻을 진달하고, 인하여 인조조(仁祖朝)의 시종(侍從)에게 식물(食物)을 주라고 한 명을 사양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어제 도신(道臣)의 장문(狀聞)으로 인하여 비로소 경이 먼 길에 올라온 것을 알고는 마음으로 다행스럽게 여기고 날을 꼽아 기다렸는데, 뜻밖에 병이 이와 같다 하니, 염려스러움을 어찌 비유하겠는가? 식물(食物)을 준 것은 진실로 우연한 일이 아니니,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 것이며, 조용히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돌이켜 길에 올라 상하(上下)가 바라는 바에 부응(副應)하도록 하라."
하였다.

 

총융사(摠戎使) 김석익(金錫翼)이 장계(狀啓)하기를,
"본청(本廳)에 소속된 통진(通津) 등 12고을의 군병(軍兵)은 이미 강화(江華)에 갈라 준 것 이외에 아직 남은 군사가 2천 4백여 명이 있는데, 만약 그대로 본청에 소속시키면 두 곳을 구관(句管)하는 데 폐단이 없지 아니할 것이니, 청컨대 그 남은 군사를 수원(水原)·장단(長湍) 두 방영(防營)에 분속(分屬)시키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비변사(備邊司)에서 복주(覆奏)하기를,
"당초 강도(江都)에 군병(軍兵)을 갈라 소속시키도록 마련하여 계하(啓下)할 때에 단지 그 원군(元軍)의 실수(實數)만 상고하여 분배해 이속(移屬)하고, 표하군(標下軍)·잡색군(雜色軍)은 거론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남은 군사가 여러 고을에 흩어져 있게 된 것입니다. 한 고을의 군병을 두 곳에 분속(分屬)하면 진실로 불편하니, 청컨대 다시 군안(軍案)을 상고하여 12고을의 원군(元軍)과 잡색군(雜色軍)의 총수[都數]를 참작하여 마련해서 계하(啓下)하여 반포(頒布)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12월 4일 을미

비변사(備邊司)에서 말하기를,
"겨우 평안 감사(平安監司)의 장계(狀啓)로 인하여 재해(災害)를 입은 고을에서 거두는 쌀을 헤아려 감하도록 허락하였으나, 강변 여섯 고을은 생활이 간고(艱苦)한데다가 금년에 더욱 심하게 재해를 입었으니, 거두는 쌀 6두(斗)를 특별히 전감하여 조정에서 변민(邊民)을 우대해 구휼하는 덕의(德意)를 보이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12월 5일 병신

명성 왕후(明聖王后)의 연제(練祭)를 행하였다. 밤 4시경(四更)에 임금이 침전(寢殿)에 곡림(哭臨)하였다. 곡을 그치고는 임금이 네 번 절하고 나서 도로 침실에 들어가서 연복(練服)으로 바꾸어 입었다. 승지(承旨) 이하는 모두 밖에 나가서 천담복(淺淡服)·오사모(烏紗帽)·흑각대(黑角帶)로 바꾸어 입었다. 임금이 도로 나가서 침전에 나아가니, 승지 이하가 다시 입시(入侍)하여 따랐다. 임금이 곡하며 슬픔을 다하고, 곡을 마치자 또 네 번 절하니, 승지 이하가 추창해 나갔다.

 

12월 6일 정유

김세정(金世鼎)을 집의(執義)로, 김두명(金斗明)을 헌납(獻納)으로, 이여(李畬)를 사인(舍人)으로 삼았다.

 

대사헌(大司憲) 이상(李翔)이 나라의 연제(練祭)에 나아가기 위해 도성에 들어왔다가 이튿날 소장을 남기고 고귀(告歸)하였는데, 답하기를,
"경이 나를 버리지 아니하고 마음을 돌려 올라왔으므로, 마음에 기쁘고 다행함이 간절하였는데, 앉은 자리가 미처 따뜻해지지 아니하여 소장을 남기고 곧장 돌아가서 행색(行色)이 매매(邁邁)665)  하니, 서운하고도 부끄러움을 비할 바를 알지 못하겠다. 멀리 가려는 마음을 빨리 돌이켜서 속히 돌아오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을 인견(引見)하고, 이르기를,
"경으로 하여금 와서 기다리게 한 것은 오래 서로 보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혹시 진정(賑政) 등의 일로 급히 품정(稟定)할 만한 것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 때문이다."
하니, 김수항이 말하기를,
"지난번 특교(特敎)를 받들건대, 빨리 의논해 처리하게 하셨는데, 신 등이 어찌 감히 태만하고 소홀하게 하겠습니까? 지금 가장 급한 역(役)을 견감(蠲減)한 수요(需要)는 마땅히 진휼청(賑恤廳)에서 요리하여 보상해 주어야 할 것인데, 경외(京外)에 모두 남아 있는 것이 없고, 단지 관서(關西)의 유천고(流泉庫)에 약간 남아 있는 것이 있으나, 형세가 장차 이 물건을 취해 써야 할 것입니다. 칙사(勅使)의 행차는 점점 임박해 오는데, 교외(郊外)의 거둥은 결단코 하실 수 없으니, 원접사(遠接使)로 하여금 미리 언급하게 해야 할 것이며, 또한 중신(重臣)을 중로(中路)에 보내어 이 뜻을 효유(曉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김수항이 또 말하기를,
"지난번에 지패(紙牌)를 보내온 것은 무슨 일을 위한 것인지 알지 못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살펴보건대, 지극히 긴요하지 아니하니, 저 나라의 하는 바가 또한 오로지 허문(虛文)을 숭상한다고 이를 만합니다. 자문(咨文)을 가지고 갔던 역관(譯官)이 돌아와 말하기를, ‘저 나라에 장차 태자(太子)를 세우는 일이 있다.’ 하였으니, 만약 그렇다면 또 장차 칙사의 행차가 있을 것인데, 이 흉년을 당하여 더욱 지극히 걱정스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내에서 물으니, 흑사나씨(黑斜那氏)가 죽은 뒤에 장차 후(后)를 세우려고 한다고 한다. 일찍이 영부사(領府事) 김수흥(金壽興)이 올린 곽조서(郭朝瑞)의 편지를 보면 저 나라에 재이(災異)가 예사롭지 아니하고, 청나라 황제가 순유(巡遊)하는 데 절도가 없으며, 또 서달(西㺚)이 또한 때를 틈타 내침(內侵)할 근심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두려워할 만하다."
하였다. 김수항이 말하기를,
"서달의 근심은 매우 절박하나, 저 사람들이 해방(海防)을 수칙(修飭)하는 것은 비록 스스로 남우(南虞)를 염려한다고 이르지만, 그 뜻은 대개 광녕(廣寧)의 해변을 경유하여 귀소(歸巢)할 때 길을 취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곽조서가 스스로 곤고(困苦)한 정상을 진술한 것은 족히 불쌍하게 여길 만함이 있으니, 후일 사신의 행차 때에 특별히 주휼(賙恤)을 가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김수항이 말하기를,
"곽조서의 사람됨이 자못 준수(俊秀)하나, 곤궁함이 몹시 심하여 낚시질로 일을 삼는데, 이제 통보한 바를 보건대, 또한 전혀 허무맹랑한 말은 아닙니다. 영평부(永平府)에 일찍이 방씨(房氏) 성(姓)을 가진 사람이 있어서 저쪽 일을 탐문할 수 있었는데, 지금 방씨(房氏)가 이미 죽었으니, 곽조서를 후하게 구휼하여 정탐하는 계제로 만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이 이제 장차 들어와서 문안 드리려 한다고 하니, 이제 만약 조정에 머물게 하여 직무를 맡긴다면 진실로 받들어 감당하기는 어렵겠지만, 만약 단지 경기(京畿) 근처에 머물러 있게 한다면 국가에서 의뢰하여 믿는 바가 있을 것이며, 온 세상이 존경하여 본받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그 자처(自處)하는 의(義)로서도 별로 혐의롭고 구애될 일이 없으니, 혹시 접견하실 때에 이 뜻으로써 권면하시면 좋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에 올라오지 아니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몹시 서운하였는데, 그 상소를 보건대, 마땅히 성 안에 들어올 것이라고 하였으니, 지극히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만약 상견(相見)하면 마땅히 이를 위해 면유(勉諭)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송시열에게 말이 미치면 말하는 사이에 그 존경함이 지극하였다.

 

봉조하 송시열(宋時烈)이 능하(陵下)로부터 조정에 들어와서 문안하니, 임금이 와내(臥內)에서 인견(引見)하였다. 송시열이 말하기를,
"세월이 물처럼 흘러서 성모(聖母)의 초기(初朞)가 문득 지나가니, 효사(孝思)의 망극하심이 거듭 새로우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병이 미류(彌留)666)  하여 대제(大祭)도 친히 행하지 못하였으니, 추모(追慕)하는 마음의 망극함을 더욱 무엇이라 말하겠는가?"
하니, 송시열이 말하기를,
"공자(孔子)의 삼가한 바는 재계와 전쟁과 질병인데, 지금 이 섭행(攝行)이 질병을 삼가하시는 도리에 어찌 마땅한지 아니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바야흐로 조섭(調攝)하는 중에 있으므로, 설복(褻服)667)  으로 유현(儒賢)을 접견하니, 지극히 미안하다. 만약 소회(所懷)가 있으면 모두 말하는 것이 좋겠다."
하자, 송시열이 말하기를,
"신은 별로 진달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오직 성궁(聖躬)을 삼가 보호하셔서 천만번 스스로 아끼시고, 더욱 성학(聖學)에 힘쓰셔서 억만 년 무궁한 아름다움을 영구히 보전하시기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성학을 힘쓰려고 하시면 마땅히 사람을 쓰고 일을 처리하는 도리를 다해야 할 것이며, 사람을 쓰고 일을 처리하는 도리를 다 하려고 하시면 격물치지(格物致知)668)  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는 바로 《대학》에서 맨 처음 공부하는 것으로, 《사기(史記)》를 보고 옛사람의 행한 일을 평론하는 것과 같은 일이 바로 격물치지를 다하는 대요(大要)입니다. 요즈음 듣건대, 전하께서 《강목(綱目)》을 진강(進講)하신다고 하니, 반드시 주자(朱子)의 필법(筆法)을 자세히 살피셔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지난번에 승지(承旨)를 보내어 올라오도록 효유(曉諭)하였으나,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돌이키지 아니하므로, 지극히 서운하였는데, 이제 다행히 상견(相見)하니 기쁘고 다행스러운 마음을 어찌 감당하겠는가? 늙은 사람에게 직무를 맡길 필요는 없고, 만약 경저(京邸)에 머물러 긍식(矜式)669)  하는 바가 있게 하면, 비유하건대, 산악(山岳)이 그 움직이는 것은 볼 수는 없다 하더라도 만물에 미치는 공리(功利)가 큰 것과 같을 것이다."
하니, 송시열이 말하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예의염치(禮義廉耻)는 이를 사유(四維)라고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사람으로 하여금 청렴함을 기르고 부끄러움을 멀리하게 하는 것인데, 신이 만약 은권(恩眷)을 탐련(貪戀)하여 사리를 가리지 아니하고 오래 머물면, 이는 《예경(禮經)》에 죄를 얻는 것입니다. 만약 명령을 받들지 못하여 전하께 죄를 얻는 것은 오히려 용서받을 수 있지만, 《예경》에 죄를 얻게 되면 반드시 장차 후세에 비난을 끼칠 것이니, 이와 같으면 이는 바로 누조(累朝)에서 권우(眷愚)하신 뜻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신은 이로써 감히 오래 머물 계책을 삼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당초에 휴치(休致)670)  할 것을 굳이 청하므로, 나는 한결같이 허락하지 아니하였으나, 대로(大老)를 위안하는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마지못하여 이를 따랐었다. 이제는 이미 구애될 만한 것이 없으니, 원하건대, 오래 머물러서 소자(小子)의 미치지 못하는 것을 돕도록 하라."
하니, 송시열이 말하기를,
"신은 특별히 부끄럽고 불안한 것이 있습니다. 옛사람이 그 치사(致仕)한 것을 뉘우쳐 그 근력(筋力)의 강장(强壯)함을 보인 자가 있었는데, 신이 절박한 사정(私情) 때문에 마침 근기(近畿)에 이르렀다가, 지난번 복상(卜相) 때에 수망(首望)671)  에 주의(注擬)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반드시 그 사람과 같이 신을 볼 것입니다. 신은 밤낮으로 부끄러워서 더욱 조금도 감히 연하(輦下)에 머물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날 석덕(碩德)과 중망(重望)이 경의 위에 나올 사람이 없기 때문에 전에 이미 옛 예(例)를 끌어 주의(注擬)하였고, 지금도 전례에 따라 다시 주의하였을 뿐인데, 무슨 불안한 일이 있겠는가?"
하고, 임금이 또 말하기를,
"부득이하다면 그대로 교경(郊坰)672)  에 있으면서 자주 출입하여 국사를 돕는 것이 바로 나의 소망이다."
하니, 송시열이 말하기를,
"다행히 교외에 나가 머물도록 허락하시니, 천은(天恩)이 망극합니다. 신은 마땅히 형세를 보아 진퇴(進退)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위유(慰諭)하고, 매우 지극하게 머물도록 권면하니, 송시열이 말하기를,
"오랫동안 번거롭게 수작(酬酢)하여 조섭(調攝)에 방해될까 두렵습니다. 신은 물러가기를 청합니다. 신의 병이 이와 같아서 아침 저녁을 믿기 어려우니, 다시 천안(天顔)을 받들어 뵙기는 기약할 수가 없습니다. 제갈 양(諸葛亮)은 잠깐 임금 곁을 떠나면서도 오히려 말하기를, ‘표문(表文)을 올림에 임하여 흐느껴 웁니다.’ 하였는데, 지금 신은 장차 영원히 천폐(天陛)와 막힐 것이니, 구구(區區)한 견마(犬馬)의 심정을 스스로 누르지 못하겠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근력이 아직 강건한데, 어찌 이와 같은 데 이르겠는가? 간절히 권애(眷愛)하는 뜻을 저버리지 말기를 끝까지 경에게 바란다."
하였다.

 

12월 7일 무술

봉조하 송시열(宋時烈)이 궐하(闕下)에게 돌아와 곧 교외로 나가니, 임금이 또 사관(史官)을 보내어 돈유(敦諭)하여 가는 것을 만류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이상(李翔)이 이르지 아니하자, 임금이 다시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돈유(敦諭)하게 하였다.

 

12월 8일 기해

호조(戶曹)에서 주상의 명령으로 봉조하 송시열(宋時烈)에게 양식·반찬·땔나무·숯을 보냈는데, 송시열이 받지 아니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월름(月廩)과 다르니, 다시 실어 보내라."
하였다.

 

황해도 해주(黃海道海州)의 사노(私奴) 한남의(韓南義)와 배천(白川)의 사노 검송(檢松) 및 그 아내가 효우(孝友)와 절행(節行)으로 향리(鄕里)에서 칭찬이 자자하므로, 도신(道臣)이 장문(狀聞)하니, 이를 해조(該曹)에 내려 복주(覆奏)하여 정표(旌表)하게 하였는데, 차등이 있었다.

 

12월 9일 경자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이 사양하고 이르지 아니하고, 식물(食物)을 굳이 사양하니, 임금이 다시 사관(史官)을 보내어 매우 지극하게 위유(慰諭)하였다.

 

12월 10일 신축

임금이 전라도에서 월식(月食)한 장계를 보고 하교하기를,
"그날 여기서 바라보니, 구름 때문에 어두워서 구식(救食)673)  하지 못하였다. 첨성대(瞻星臺)에서 보고한 것과 제도(諸道)에서 장문(狀聞)한 것 또한 완전하지 못한 모양이 있었다는 데 지나지 않을 뿐인데, 오로지 이 도형(圖形)은 반이 넘게 먹혔으니, 본도(本道)는 도리(道里)가 조금 멀어서 보는 데 이동(異同)이 있었던 것인가? 혹은 저곳만 청명(淸明)하여 바라보고 착오가 없었던 것인가? 속히 다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11일 임인

유성(流星)이 여상성(女牀星) 아래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신계화(申啓華)를 교리(校理)로, 조사석(趙師錫)을 판의금(判義禁)으로, 홍만수(洪萬遂)를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사학 유생(四學儒生) 이성좌(李聖佐) 등이 상소하여, 정성과 예(禮)를 다하여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을 불러 돌아오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답하기를,
"나라를 위해 유현(儒賢)을 머물게 하려는 정성을 깊이 가상(嘉尙)하게 여긴다. 어찌 체념(體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 태학(太學) 재임(齋任)의 무리가 모두 시론(時論)에 붙어서 송시열을 위해 기꺼이 머물게 할 것을 청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오로지 사학 유생만 상소한 것이었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정명 공주(貞明公主)는 나이가 많고 존속(尊屬)이기 때문에 특별히 식물(食物)과 의자(衣資)를 제급(題給)하게 하였는데, 이제 자의전(慈懿殿)의 주갑 경사를 당하여 무릇 자손의 서열에 있는 자는 일체로 추은(推恩)하지 아니할 수 없다. 숙안(淑安)·숙명(淑明)·숙휘(淑徽)·명안(明安) 네 공주와 경순 군주(慶順郡主)·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낙선군(樂善君) 이숙(李潚) 또한 정명 공주의 예에 의해 식물(食物)과 의자(衣資)를 모두 제급하고,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 금창위(錦昌尉) 박태정(朴泰定)과 졸(卒)한 경안군(慶安君)의 부인(夫人)에게도 등급을 나누어 제급(題給)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12일 계묘

청사(淸使) 내대신(內大臣) 가일급(加一級) 근모(靳某) 등이 도성(都城)에 들어왔다. 역(曆)이 갑자년(甲子年)을 만났고, 세상이 승평(昇平)하다 하여 천하에 반사(頒赦)하기 위한 것이다. 이때 상후(上候)가 아직 회복되지 못하여 교영례(郊迎禮)를 없애고 태화당(泰和堂)에서 접견하였다. 이날 아침에 백관(百官)이 모화관(慕華館)에 이르러 흑단령(黑團領)을 갖추고 반서(班序)를 나누어 서서 칙서(勅書)를 맞이하기를 의식과 같이 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말하기를,
"전에 얼음을 저장할 때에는 으레 가미(價米)를 방민(坊民)과 시민(市民)에게서 받는데, 혹시 흉년을 만나면 진휼청(賑恤廳)에서 요리하여 충당해 준 것이 한두 번에 그치지 아니하였습니다. 작년에 이르러서는 특교(特敎)에서 나온 것으로서 도성의 백성을 위로해 기쁘게 할 바탕으로 삼은 것입니다. 금년에도 흉년을 면치 못하고, 또 칙사(勅使)의 행차를 당하여 백성의 역(役)이 평상시의 갑절이나 되니, 진휼(軫恤)이 없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상년(上年)의 예(例)에 의하여 거두어들이지 말고 진휼청으로부터 충당해 주게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12월 13일 갑진

윤이도(尹以道)를 승지(承旨)로, 안규(安圭)를 장령(掌令)으로, 김우항(金宇杭)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청나라 칙사(勅使)가 온 것으로써 반교(頒敎)하고 도류(徒流) 이하를 사면(赦免)하였다.

 

임금이 뜸질을 받았는데, 약방 여러 신하가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전 지평(持平) 정제선(鄭濟先)의 사안(査案)을 앞에 놓고, 곧 하교하기를,
"정제선의 일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명확하게 조사하여 계문(啓聞)하게 하였는데, 이제 사본(査本)을 보건대, 비부(婢夫) 2인과 양민(良民) 1인을 반노(叛奴)와 함께 일시에 함부로 죽였으니, 속담에 비록, ‘자식이 있는 비부는 상명(償命)674)  하는 일이 없다.’고 하였으나 원래 법문(法文)은 아니다. 하물며 양민 1인을 또 함부로 죽였으니, 진실로 살인의 율(律)을 면하기 어렵다. 효묘조(孝廟朝)에 이증(李曾)이 살인한 일로 마침내 장폐(杖斃)되는 데 이르렀는데, 근래에는 공(公)이 사(私)를 이기지 못하고 법이 엄하지 못하여 해부(該府)에서 상재(上裁)를 범연히 품계(稟啓)하니, 자못 방자함이 지극하다. 판의금(判義禁)을 체차(遞差)하고 다음 당상(堂上) 이하를 추고(推考)할 것이며, 이 공사(公事)를 도로 내어 주도록 하라."
하였는데, 도제조(都提調) 김수흥(金壽興)이 말하기를,
"이증(李曾)의 일은 이와는 다른 바가 있습니다. 강석규(姜錫圭)가 일찍이 사람을 죽여서 여러 해 동안 귀양갔었는데, 이는 강석규의 일과 서로 같습니다."
하고, 부제조(副提調) 윤지선(尹趾善)은 말하기를,
"이증은 송척(訟隻)675)  을 몰래 죽였으니, 정상(情狀)이 미워할 만하기 때문에, 조정에서도 법으로 처치하였는데, 정제선의 일은 이에 비해 차이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은 살인의 율(律)을 시행하는 것이 합당한데, 금오(金吾)의 복계(覆啓)가 이와 같이 헐후(歇後)676)  하니, 지극히 괴이하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정제선(鄭濟先)은 비록 서장관(書狀官)으로서 대관(臺官)을 겸하므로, 형장(刑杖)을 쓸 수 있다 하나, 추노(推奴)677)  의 사사로움으로 인하여 하루 아침의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여 6인의 많은 사람을 죽이는 데 이르렀고, 양민도 그 가운데 있으니, 국법을 만약 시행하면 진실로 상명(償命)의 율(律)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오직 그 형세가 있는 터이라 해부(該府)에서도 집법(執法)할 것을 논하지 못하였는데, 임금이 노여워하여 꾸짖은 뒤에 이르러 대신(大臣)과 재신(宰臣)이 모두 우물쭈물하며 논의만 분분하여 사(私)가 공(公)을 이기지 못함이 이와 같으니, 어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만약 법부(法府)에서는 법에 의거하여 형벌을 의논하고, 임금은 일찍이 시종(侍從)에 임용한 것과 정법(情法)을 참작하여 혹시 그 죽음을 용서함이 가할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7책 15권 42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21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의약-의학(醫學) / 사법-탄핵(彈劾) / 역사-사학(史學)


[註 674] 상명(償命) : 사람을 죽인 자를 죽임.[註 675] 송척(訟隻) : 소송(訴訟)의 상대자.[註 676] 헐후(歇後) : 예사로와서 대수롭지 않음.[註 677] 추노(推奴) : 도망한 노비를 찾아냄.
사신(史臣)은 말한다. "정제선(鄭濟先)은 비록 서장관(書狀官)으로서 대관(臺官)을 겸하므로, 형장(刑杖)을 쓸 수 있다 하나, 추노(推奴)677)  의 사사로움으로 인하여 하루 아침의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여 6인의 많은 사람을 죽이는 데 이르렀고, 양민도 그 가운데 있으니, 국법을 만약 시행하면 진실로 상명(償命)의 율(律)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오직 그 형세가 있는 터이라 해부(該府)에서도 집법(執法)할 것을 논하지 못하였는데, 임금이 노여워하여 꾸짖은 뒤에 이르러 대신(大臣)과 재신(宰臣)이 모두 우물쭈물하며 논의만 분분하여 사(私)가 공(公)을 이기지 못함이 이와 같으니, 어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만약 법부(法府)에서는 법에 의거하여 형벌을 의논하고, 임금은 일찍이 시종(侍從)에 임용한 것과 정법(情法)을 참작하여 혹시 그 죽음을 용서함이 가할 것이다."

 

12월 14일 을사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약방(藥房)에 하교하기를,
"무릇 뜸질을 받을 때에는 각사(各司)에서 으레 반드시 폐좌(廢坐)678)  하였으나, 금년 봄에는 특별히 폐하지 말도록 하였으니, 지금도 전에 의하여 분부하라."
하였다.

 

밤에 중궁전(中宮殿) 차비문(差備門) 안에서 불이 일어났는데, 곧 박멸(撲滅)하였다.

 

12월 16일 정미

임금이 뜸질을 받았다.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김수흥(金壽興)이 말하기를,
"각 군문(軍門)의 장관(將官)으로서 삭시사(朔試射) 때에 유엽전(柳葉箭) 25개 이상 명중시킨 자와 잇따라 세 차례 수위(首位)를 차지한 자는 별도로 시상(施賞)할 일을 마땅히 병조(兵曹)로 하여금 다시 정식(定式)을 품지(稟旨)하게 하여 격려하고 권장하는 바탕으로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군사가 없는 장관(將官)으로서 시사(試射)에 수위를 차지한 자에게는 일찍이 논상(論賞)한 일이 없었는데, 기미년679)   사이에 비로소 정탈(定奪)하여 논상하였다. 이제부터 유엽전(柳葉箭) 25개 이상 명중시킨 자는 전례에 의하여 말을 내려 주고, 26개 이상 명중시킨 자는 변장(邊將)을 제수할 것이며, 잇따라 세 차례 수위(首位)를 차지한 자는 단자(單子) 가운데 기록하여 별도로 논상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인하여 말하기를,
"무신(武臣)은 마땅히 사예(射藝)를 우선으로 하여야 할 것인데, 근래에 직질(職秩)이 높은 무신들이 사예를 부끄러운 일로 여겨 기꺼이 익히려 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매양 삭시사 때에 명중시키는 수(數)가 장관(將官)의 무리에게 미치지 못하니, 일이 매우 잘못된 것이다. 무변(武弁)에게 신칙하여 종전의 풍습에 따르지 말도록 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김수흥(金壽興)이 말하기를,
"신이 효묘(孝廟) 때에도 일찍이 하교를 받들었는데, 직질이 높은 무인(武人)들이 무예(武藝)를 완전히 포기하고 오직 주색(酒色)으로 능사(能事)를 삼는 것을 깊이 개탄(慨嘆)하셨었으니, 별도로 경칙(警飭)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신의 조부의 첩(妾)이 바로 옛 명장(名將) 변양걸(邊良傑)의 딸인데, 매양 말하기를, ‘아비가 살았을 때에는 항상 활을 벌여서 베개 옆에 두었었는데, 그 아들 흡(潝)에 이르러서는 이미 그렇지 못했다.’고 하며 부녀도 탄식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조총(鳥銃)도 병가(兵家)의 장기(長技)인데, 무인(武人)의 무리가 포수(砲手)의 업으로 여기고 기꺼이 학습(學習)하지 않으므로, 인묘(仁廟)께서 일찍이 양국(兩局)의 대장(大將)으로 하여금 어전(御前)에서 방포(放砲)하게 하셨으니, 대개 또한 권과(勸課)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효묘(孝廟)께서도 일찍이 유혁연(柳赫然)에게 하교하시기를, ‘조대수(祖大壽)680)  는 손가락에 항상 깍지를 끼었으므로, 깍지와 손가락이 문득 합하여 하나가 되었다. 그는 대장(大將)이면서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였는데, 우리 나라 무인(武人)들은 작질(爵秩)이 조금만 높아지면 문득 사예(射藝)에 해이하니, 진실로 통탄할 만하다.’고 하셨는데 지금은 이 폐단이 더욱 심하다. 별도로 거듭 하교한 뒤에도 당상관(堂上官)인 무인들이 옛날과 같이 명중시키는 것이 적으면, 이는 조정의 명령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사예를 익히지 아니하는 것이니, 마땅히 별도의 경책(警責)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신정(申晸)을 판의금(判義禁)·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감자(柑子)를 나누어 주고 반궁(泮宮)에서 선비를 시험하여 수석을 차지한 사람 박태순(朴泰淳)에게 급제(及第)를 내려 주었다.

 

12월 17일 무신

유성(流星)이 헌원성(軒轅星) 아래에서 나와서 진성(軫星) 위로 들어 가고, 화성(火星)이 저성(氐星) 안으로 들어갔다.

 

약방(藥房)에서 입시(入侍)하였다. 도제조(都提調) 김수흥(金壽興)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객사(客使)가 장차 돌아가면, 으레 통관(通官) 등에게 비밀히 주는 일이 있는데 이번 김대헌(金大憲)  【바로 대통관(大通官)이다.】 은 자못 힘써 주선한 일이 있으며, 그 또한 스스로 공(功)을 자랑하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임술년681)  에는 비록 교영(郊迎)을 없애지 못하였으나, 김대헌에게 오히려 1천 5백 금(金)을 주었었으니, 지금은 더 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1백 냥(兩)을 더 주도록 명하였다. 뒤에 또 김수흥의 말로 인하여 다시 1백 금(金)을 더하였으니, 대개 임술년(壬戌年)에 대통관(大通官) 김거군(金巨軍)에게 비밀히 준 수(數)에 준(準)한 것이었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우리 나라의 백성이 곤궁하고 재물이 고갈된 것이 근세(近歲)보다 심한 적이 있지 아니하였는데, 또 탕갈(蕩竭)한 재물을 덜어서 한없는 욕심을 채운다면, 이는 참으로 육국(六國)682)  이 땅을 베어 진(秦)나라를 섬기는 것으로 땅은 다함이 있어도 진나라의 요구는 그침이 없는 것이니, 통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17책 15권 43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22면
【분류】왕실-사급(賜給) / 외교-야(野) / 역사-사학(史學)


[註 681] 임술년 : 1682 숙종 8년.[註 682] 육국(六國) : 춘추 전국 시대의 여섯 제후국인 초(楚)·한(韓)·위(魏)·연(燕)·조(趙)·제(齊) 등을 가리킴.
사신(史臣)은 말한다. "우리 나라의 백성이 곤궁하고 재물이 고갈된 것이 근세(近歲)보다 심한 적이 있지 아니하였는데, 또 탕갈(蕩竭)한 재물을 덜어서 한없는 욕심을 채운다면, 이는 참으로 육국(六國)682)  이 땅을 베어 진(秦)나라를 섬기는 것으로 땅은 다함이 있어도 진나라의 요구는 그침이 없는 것이니, 통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헌납(獻納) 홍만수(洪萬遂)가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임어(臨御)하신 이래로 상전(賞典)이 분수에 넘치고 관작(官爵)이 너무 지나쳐서 수령(守令)의 제수(除授)도 신중하게 고르지 못함이 많으니, 이는 대병(大柄)을 잡고 세도(世道)를 가다듬어서 생민(生民)을 구휼하는 거룩한 뜻이 아닙니다. 중비(中批)의 제수가 번거롭고 잦아서 전관(銓官)의 선발하는 권한(權限)이 가벼워졌고, 하직(下直)하는 법이 폐지되어 대신(臺臣)의 거핵(擧劾)하는 법이 떨어졌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관방(官方)683)  을 엄하게 하시고, 상전(賞典)을 중하게 하시며, 자목(字牧)의 선임을 신중하게 하시면, 제치(制治)하는 도(道)에 또한 조금의 도움이 없지 아니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수년(數年) 이래로 옥후(玉候)가 여러 번 편찮으셨는데, 신명(神明)이 도우셔서 약(藥)을 쓰지 않고도 나으신 기쁨이 있었습니다. 옛사람은 병을 다스림에 있어 먼저 마음을 다스리는 것을 귀하게 여겼는데, 임금의 처한 형세는 필부(匹夫)와 달라서 만기(萬機)가 지극히 번거롭고 백책(百責)이 함께 모이나, 간략함으로써 번거로움을 제어하는 것 또한 그 술책이 있습니다. 진실로 선심(善心)을 다잡아 성찰(省察)하여 이 마음을 다스린다면 사물(事物)이 이르러도 순응하여 치무(馳騖)684)  하는 바가 없고, 일이 번거롭고도 잗단 염려가 없을 것이며, 정사는 수명(修明)685)  의 유익함이 있어서 영위(榮衛)의 조화를 잃거나 주리(腠理)의 병을 받게 되는 것은 족히 근심할 것이 못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우장(優奬)하였다.

 

12월 18일 기유

약방에서 입시(入侍)하였다. 도제조(都提調) 김수흥(金壽興)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대간(臺諫)이 바야흐로 최석항(崔錫恒) 등의 삭직(削職)·파직(罷職)을 환수(還收)하는 일로써 달이 지나도록 논의를 고집하여 장차 금년을 넘기려 하니, 주상께서 만약 참작을 더하시어 단지 이 두 사람만 대직(臺職)에 두지 아니하시면 족합니다. 이와 같이 하면 거의 수습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장차 생각해 헤아려서 이를 처리하겠다."
하였다. 이 뒤에 대계(臺啓)에 답하여 최석항(崔錫恒)과 윤세희(尹世喜)는 말감(末減)하여 파직하고, 박세준(朴世𤎱)은 체차(遞差)하도록 명하였는데, 헌부(憲府)에서 논계(論啓)하여 또 도로 거두기를 청하기를,
"비록 가벼운 벌(罰)이라 하더라도 대각(臺閣)에서 일을 말하였다가 죄를 얻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하자, 임금이 답하기를,
"말감한 뒤에도 한결같이 고집하니, 나는 그 온당한 줄을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문무(文武)의 인재가 매우 모자라는데, 통제사(統制使)와 서북 병사(西北兵使) 외에 나머지 곤수(閫帥)는 천망(薦望)하는 규정이 없기 때문에, 일찍이 적합한 사람을 초택(抄擇)하도록 명하였었다. 음관(蔭官) 가운데 치적(治績)이 현저하게 드러나고 계려(計慮)686)  가 심원(深遠)한 자를 만약 곤임(閫任)에 둔다면 보통 임용하는 무변(武弁)보다 반드시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자, 김수흥이 말하기를,
"신 등도 일찍이 이런 의논이 있었습니다. 음관(蔭官) 가운데 치적이 드러난 자를 골라서 곤임을 주면 어찌 불가함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상(堂上)·당하(堂下)를 물론하고 어떤 사람이든 정밀하게 가려서 조용(調用)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12월 19일 경술

밤에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 안으로 들어갔다.

 

청사(淸使)가 돌아갔다.

 

김진귀(金鎭龜)를 승지(承旨)로, 이민서(李敏敍)를 판윤(判尹)으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양조(兩朝)687)  에서 여러 부마(駙馬)를 권애(眷愛)하시는 바가 보통에 뛰어나게 하셨는데, 인평위(寅平尉) 【정제현(鄭齊賢)이다.】 와 익평위(益平尉) 【홍득기(洪得箕)이다.】  두 도위(都尉)가 불행히 잇따라 요서(夭逝)하니, 선왕(先王)께서 항상 더욱 비통하여 슬퍼하셔서 모두 내사(內司)에서 사우(祠宇)를 만들어 주게 하셨었다.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이다.】 의 사당(祠堂)도 재기(再朞)에 가서 또한 일체로 지어 주려고 하는데, 내사의 세입(稅入)이 흉년으로 인하여 크게 줄었고, 또 국휼(國恤)을 만나 갑절 탕갈(蕩渴)하였으니, 부득이 해조(該曹)로 하여금 익평위(益平尉)의 사당을 지을 때의 예(例)에 의하여 쌀 50석과 목면(木綿) 2백 50필을 조성소(造成所)에 실어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처음에 강화 유수(江華留守) 윤계(尹堦)가 자연도(紫燕島)의 형승(形勝)을 진달하고 수영(水營)을 옮겨 설치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조정에서 통어사(統禦使)  【경기 수사(京畿水使)가 의례 삼도 통어사(三道統禦使)를 겸한다.】 로 하여금 형편을 살펴보고 아뢰게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비국(備局)에서 통어사의 장문(狀聞)에 의거하여 복주(覆奏)하기를,
"본도(本島)의 형세가 보장(保障)으로 적합함은 교동(喬桐)보다 나을 뿐만 아니라, 또한 강도(江都)보다 낫지만, 민호(民戶)와 전결(田結)이 교동에 비하여 그 많고 적음이 현격하게 달라서 모든 수용(需用)에 관한 것은 장차 모양을 갖출 수 없을 것이니, 수영을 옮기는 일은 가볍게 의논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청컨대, 후일을 기다려서 자세히 헤아려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이를 허락하였다.

 

12월 20일 신해

이익상(李翊相)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이국방(李國芳)을 장령(掌令)으로, 양중하(梁重廈)·이두악(李斗岳)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이 인조조(仁祖朝) 시종(侍從)의 은례(恩例)의 식물(食物)을 굳이 사양하고, 곧 수원(水原)으로부터 남쪽으로 돌아가니, 임금이 공홍도(公洪道)에 명하여 식물을 실어 보내게 하고, 또 승지(承旨)를 보내어 달려가서 돈유(敦諭)케 하였다.

 

12월 21일 임자

봉조하 송시열(宋時烈)이 돌아가기에 임하여 상소하여, 성학(聲學)을 더욱 힘쓰고 어진이를 가까이하고 간사한 자를 멀리할 것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유시(諭示)하기를,
"매복(枚卜)의 한 가지 일은 전석(前席)에서 이미 유시(諭示)하였는데, 사학(四學)의 상소한 말이 무슨 크게 불안한 혐의가 있기에 급급하게 멀리 가려고 하는가? 다만 스스로 부끄러워서 마음 둘 바가 없다. 소장 말단에 경계하여 가르친 바가 간절하고 지극하여 깊이 감탄하고 있으니, 마땅히 생각하는 뜻을 체득하여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빨리 돌이켜서 나의 미치지 못하는 바를 돕도록 하라.
하였다.

 

영부사(領府事) 김수흥(金壽興)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오늘날 국가 형세는 오직 마땅히 인재(人才)를 수습(收拾)하는 것인데, 권무청(權武廳)에서 권입(權入)한 자 또한 상조(常調)688)  한 데 지나지 아니합니다. 신여철(申汝哲)의 형의 아들 신확(申瓁)은 침중(沈重)하고 계려(計慮)가 있으며, 고(故) 상신(相臣) 홍명하(洪命夏)의 손자 홍득귀(洪得龜)는 재간(才幹)이 뛰어납니다. 두 사람은 모두 유사(儒士)이므로, 권무청에 붙일 수 없으니, 효묘조(孝廟朝) 때의 신여철(申汝哲)·구문치(具文治)의 예(例)에 의하여 먼저 벼슬을 제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윤허하였다. 김수흥이 또 영장(營將)을 극진히 가리되, 일찍이 곤수(閫帥)를 지냈거나 곤임(閫任)에 적합한 자로 차임해 보낼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찍이 곤수를 지낸 자는 비록 차임해 보내기가 어려우나, 이제부터는 극진히 가려서 주의하여 제수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김수흥이 말하기를,
"예전에는 특별히 무신(武臣)으로 좌윤(左尹)·우윤(右尹)에 임명되어 이내 판윤(判尹)에 승진한 자가 많이 있었고, 조종조(祖宗朝)에서는 간혹 도헌(都憲)689)  에 임명된 자도 있었으니, 지금 인물이 비록 적다 하더라도 무신(武臣) 가운데 약간의 사람을 가려서 경조(京兆)690)  의 벼슬을 제수하여 평상시에 쌓아 기르면 완급(緩急)에 또한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승문원(承文院)은 오로지 사대 교린(事大交隣)의 문서를 맡고 있는데, 주문(奏文)·자문(咨文)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이문(吏文)을 쓰기 때문에, 조종조 이문 정시(吏文庭試)691)  를 베풀어 논상(論賞)하고 격려하여 권장하기까지 하였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연소(年少)한 문관(文官)으로서 학습하는 자가 전혀 없어서 보통의 주문·자문도 매우 어긋나니, 이 뒤로는 매달 월과(月課)692)  에 반드시 주문·자문 가운데 한 문제를 내어 유의하여 지어 올리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12월 22일 계축

영부사(領府事) 김수흥(金壽興)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천영선(千永善)의 일은 비록 다시 묻게 하더라도 공초(供招)하는 바는 반드시 앞서 한 말에 벗어나지 아니할 것인데, 객사(客使)가 경내(境內)에 있어서 청문(聽聞)이 번거로울 것입니다. 또 듣건대, 그가 돌아가면서 책(柵) 밖에 이르러 이(利)로운 값으로 역마[馹]를 팔고는 간신히 걸어갔다고 하니, 나라를 욕되게 함이 심합니다. 이로써 논단(論斷)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천영선(千永善)의 죄는 몹시 통해(痛駭)할 일이므로, 장차 중하게 다스리려고 하였는데, 이제 이 일을 들으니, 더욱 무상(無狀)하다. 곧 멀리 정배(定配)하게 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12월 24일 을묘

유성(流星)이 동정성(東井星) 아래에서 나와 서쪽으로 들어갔다.

 

12월 25일 병진

이숙(李䎘)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삼았다.

 

지평(持平) 이두악(李斗岳)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재물을 손상하고 백성을 병들게 하는 폐단을 없애고, 위를 덜어서 아래에 보태주는 정치를 강구하고, 명선(明善)·명혜(明惠) 두 공주(公主)의 사우(祠宇)를 수진궁(壽進宮)에 옮겨 세워서 제사를 받들게 하되, 저축한 재물과 곡식은 모두 유사(有司)에게 돌려서 내년 봄 진구(賑救)하는 데 쓰게 하고, 각 아문(衙門)의 둔전(屯田)은 소재(所在)한 고을로 하여금 그 곡물(穀物)의 수량을 기록해서 진휼청(賑恤廳)에 일체 위임하여 주관하게 하되, 본 아문(衙門)의 1년 비용을 아울러 적당하게 주고, 그 나머지를 계산하여 진제(賑濟)에 대비하게 하고, 전관(銓官)에게 밝게 타일러서 수령(守令)을 신중히 택용(擇用)하게 하고, 감사(監司)를 칙려(飭勵)하여 거듭 고과(考課)를 밝히게 하고, 어사(御史)가 염문(廉問)하였을 때에 혹시 수령으로서 불법(不法)이 가장 많은 자가 있으면 감사도 아울러 죄주게 하고, 별도로 추천한 사람이 적당하지 못하면 이를 물리칠 뿐만 아니라 또한 거주(擧主)693)  도 잘못 천거한 율(律)로 다스리게 하소서. 김중하(金重夏)는 죄가 이미 환히 드러났는데 양사(兩司)에서 번갈아 다투어도 모두 윤허하지 아니하시고, 최석항(崔錫恒) 등은 당직(戇直)694)  함이 숭상할 만한데 도리어 최절(摧折)함을 더하시니 마땅히 사랑하고 미워하심이 치우친 데 얽매여 있음을 경계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가(可)하다. 의논하여 처리할 일을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두 공주(公主)의 궁장(宮庄)을 그대로 두고 따로 사우(祠宇)를 세우는 것은 진실로 선조(先朝)의 유의(遺意)로서 하교가 정녕(丁寧)하여 아직까지 귀에 생생한데, 사헌부에서 혁파할 것을 청한 논의에 이 뜻을 자세히 갖추어 말하였는데, 미처 들어 알지 못한 것이 아닌가? ‘사랑하고 미워함이 치우친 데 얽매었다’는 등의 말은 마땅한지 알지 못하겠으나, 극진하게 말하고 숨김이 없으니 내가 가상하게 여긴다."
하였다.

 

12월 26일 정사

임금이 창경궁(昌慶宮)의 요화당(瑤華堂)으로 이어(移御)하였다.

 

12월 27일 무오

전 선천 부사(宣川府使) 이홍술(李弘述)은 장(杖) 1백을 수속(收贖)하고 고신(告身)을 빼앗고, 전 청강 만호(淸江萬戶) 이경건(李景建)은 장 1백, 도(徒) 3년에 정배(定配)하였다. 처음에 이경건이 둔민(屯民) 전자회(田自會)가 밭에서 묻혀 있던 은(銀)을 얻었다는 말을 듣고 군관(軍官) 김영직(金永稷)으로 하여금 수색하게 하였으나 얻지 못하자, 이경건은 김영직이 고의로 전자회를 놓아 보냈다고 노여워하여 이홍술에게 거짓 알소(訐訴)하여 빚을 징수한다고 칭탁하고, 혹독하게 주뢰(周牢) 【주뢰는 우리 나라 도둑을 다스리는 극형(極刑)이다.】 를 베풀어 김영직이 이미 죽었다. 이경건 또 김영직의 아비 김명철(金明哲)이 역(役)을 피하고 그를 욕하였다고 칭탁하여 한 차례 혹독한 형벌로 곧 죽었다. 과부가 된 고부(姑婦)가 반송사(伴送使) 신정(申晸)에게 길을 막고 호소하니, 신정이 돌아와서 임금에게 아뢰어 본도(本道)로 하여금 안사(按査)하게 하여 저죄(抵罪)하였다.

 

12월 28일 기미

유성(流星)이 각성(角星) 아래에서 나와 남쪽으로 들어갔다.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이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다는 뜻을 전유(傳諭)한 승지(承旨)의 서계(書啓)에 부쳐 아뢰니 임금이 다시 승지를 보내 위유하기를 부지런하고 지극하게 하였으나, 송시열이 마침내 사양하고 오지 아니하였다.

 

12월 29일 경신

좌의정(左議政) 정지화(鄭知和)가 다섯 차례 정사(呈辭)하자, 임금이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고 나오도록 권면하였으나, 정지화가 병을 핑계하고 명령에 응하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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