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16권, 숙종 11년 1685년 1월

싸라리리 2025. 11. 16.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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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신유

엄집(嚴緝)을 사간(司諫)으로, 이익상(李翊相)을 우참찬(右參贊)으로, 윤지선(尹趾善)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1월 3일 계해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이 청대(請對)하였다. 그때 마침 약방(藥房)의 입시(入侍)가 있어 같이 들어오기를 명하였다. 김수항이 말하기를,
"예조 참판(禮曹參判) 서문중(徐文重)이 연전(年前)에 소를 올려 청백리(淸白吏) 뽑기를 청하였습니다만, 사람의 명절(名節)은 처음부터 끝까지 잘 보전(保全)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옛 상신(相臣) 정태화(鄭太和)는 ‘이미 죽은 자 중에서 뽑아서 선택(選擇)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지금의 여러 대신들의 뜻도 혹은 이와 같습니다만, 만일 죽은 자만을 뽑는 것은 곧 옛 사례(事例)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그러니 죽은 이나 산 이들을 통틀어서 함께 뽑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김수흥(金壽興)에게 물었다. 김수흥도 또한
"산 자나 죽은 자를 가리지 말고 같이 뽑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수항이 또 말하기를,
"청백리로서 전사(戰死)한 자의 자손(子孫)들은 반드시 제사를 받드는 자만을 녹용(錄用)001)  하였습니다만, 제사를 받드는 자라 하여 반드시 다 녹용할 수는 없었으므로 전관(銓官)이 진달한 것으로 인하여 그 자손들 가운데서 합당한 자만을 가려 뽑아서 관직(官職)을 제수(除授)하였습니다. 그런데 공(公)이 사(私)를 이기지 못하여 혹 요행으로 입사(入仕)한 자가 있습니다. 그러니 모두 다 사람을 얻지 못하기보다는 차라리 다만 제사를 받드는 사람만을 녹용하는 것이 낳을 듯합니다."
하였다. 김수흥도 또한 그것을 말하니, 임금이 옛 사례(事例)에 의하여 다만 제사를 받드는 사람에게만 관직을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통제사(統制使) 변국한(邊國翰)이 나이 많은 어머니가 서울에 있는데 병(病)이 중(重)하다는 것으로 상소하여 돌아가 병구완하기를 빌었다. 이를 해조(該曹)에 내리니, 병조(兵曹)에서 방계(防啓)002)  하였다. 임금이 그의 정리(情理)를 듣고서 특별히 체차(遞差)하였다.

 

밤에 유성(流星)이 나타나 3일 만에 사라졌다.

 

1월 5일 을축

특지(特旨)로 김세익(金世翊)에게 좌윤(左尹)을 제수(除授)하였다. 전일(前日)에 김수흥(金壽興)이 무신(武臣)으로 좌윤과 우윤을 제수(除授)할 것을 청하였고, 이어서 김세익(金世翊)의 사람됨과 그의 활쏘는 기예(技藝)를 칭찬하였다. 그러기에 이 명이 있었다. 윤반(尹攀)·김재현(金載顯)을 승지(承旨)로, 송규렴(宋奎濂)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소두산(蘇斗山)을 공홍 수사(公洪水使)로 삼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에 아뢴 것을 다시 말하니, 답하기를,
"김중하(金重夏)에게 당초에 죽음을 용서한 것은 그럴 만한 뜻이 있었다. 그런데 너희들은 뒤에 있을 폐단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한갓 법을 바르게 하는 것만이 쾌한 줄 알아서 이미 4년이 지났는데도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다. 이는 사체에 크게 손상(損傷)될 뿐 아니라, 그를 만일 윤종(允從)할 것이라면 어찌 양사(兩司)에서 교대로 소장(疏章)을 올리어 힘써 항쟁(抗爭)하기를 기다렸겠느냐? 단연코 윤유(允兪)하지 않겠으니, 무익(無益)한 의논을 빨리 그만두도록 하라."
하였다.

 

1월 9일 기사

한성부(漢城府)에서 아뢰기를,
"요행(僥倖)을 바라는 백성이 더욱 많아지자 잔약(殘弱)한 백성들이 더욱 곤궁(困窮)하여집니다. 경성(京城)의 수만호(數萬戶)가 일찍이 한 되 한 말이라도 공납(貢納)하여 국가의 부세(賦稅)를 돕는 것이 없고 방역(坊役)003)  에 이르기까지도 다 빠지는 형편입니다. 이제부터는 대군(大君)과 왕자(王子)와 공주(公主)와 옹주(翁主)와 대신들의 집 이외에는 사부(士夫)로서 역(役)이 있고 없는 것을 논(論)하지 말고 각각 1정(丁)씩을 내보내도록 하여 정식(定式)을 삼게 하소서."
하였다. 묘당(廟堂)의 의논도 또한 그러하였기에, 임금이 이를 따랐다. 이로부터 도민(都民)들이 크게 의뢰하여 야경(夜警)만을 맡았을 뿐이었으나, 방민(坊民)들이 편역(偏役)당하는 고통을 다 고쳐 없애지는 못하였다. 한성부(漢城府)에서 또 말하기를,
"지패(紙牌)는 닳아 없어지기 쉽습니다. 그러니 목각(木角)으로 바꾸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그를 따랐으나, 흉년이 들어 소요(騷擾)하기 때문에 다만 도하(都下)에서만 먼저 시행하였다.

 

종각(鍾閣)에 불이 났다. 임금이 경동(警動)하여 사관(史官)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고, 3일 안으로 고쳐 세우기를 명하였다.

 

대사성(大司成) 송규렴(宋奎濂)이 소를 올려 사직(辭職)하여 말하기를,
"반궁(泮宮)004)  의 소임을 맡고서 재실(齋室)을 지키는 일을 능히 규솔(糾率)하지 못하여 폐각(廢閣)에 일임(一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생(儒生)들의 건(巾)과 복(服)을 변통(變通)하는 일에 대하여는 전번에 아뢰어 올린 바가 있습니다만, 해가 지나도 복주(覆奏)가 없었습니다. 반궁에 있으면서 장보(章甫)005)  에게 존중받지 못하고, 일을 말하였는데도 조정에서 쓰여지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퇴척(退斥)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곧 복계(覆啓)하지 않은 것은 과연 느슨한 일이다. 해조(該曹)의 당상(堂上)을 추고(推考)하겠으니 사직하지 말고 직책을 다하기에 힘쓰라."
하였다.

 

호군(護軍) 김신중(金信重)이 병사(兵事)의 주획(籌劃)으로 소를 올린 것이 수천마디 말이었는데, 그 대요(大要)는 북한 산성(北漢山城)을 수축(修築)할 것과, 관방(關防)을 조령(鳥嶺)·죽령(竹嶺)·철령(鐵嶺)·청석동(靑石洞) 등지에 설치할 것과 팔로(八路)의 승려(僧侶)들을 모두 거두어 군병(軍兵)을 삼을 것과, 자천(自薦)하는 규칙(規則)을 베풀어서 불기(不覊)006)  의 선비들을 거두어 쓸 것과, 천주(薦主)를 연좌(連坐)하는 법을 펴서 밝힐 것과 문신(文臣)으로 병법(兵法)을 아는 자를 군사(軍師)로 삼아서 《무경(武經)》과 《좌전(左傳)》 등의 글을 가르칠 것을 청한 것이다. 임금이 가상하게 여긴다는 하교를 하고 해조(該曹)에 명하여 그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1월 10일 경오

달이 필성(畢星)에 들어갔다.

 

예조 참판(禮曹參判) 서문중(徐文重)이 소를 올려 말하기를,
"견위(汧渭)007)  의 소임은 우로(優老)에게 많이 돌아갑니다만, 목지(牧地)의 조세(租稅)는 한갓 관리(官吏)들의 주머니만 살지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만일 과조(科條)를 엄중하게 세워서 버린 경토(耕土)를 진고(陳告)하면 10년을 지나지 않아서 효과(効果)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무사(武士)에 이르러서는 인재(人才)가 너무나 적으니 이는 다만 융막(戎幕)에 그럴 만한 사람이 없다는 근심뿐만이 아닙니다. 조종조(祖宗朝)의 옛 사례(事例)에 의하여서, 삼조(三曹)008)  와 여러 관사(官司)들을 무신(武臣)으로 비의(備擬)009)  하여 조사(朝士)들로 더불어 같은 반열(班列)에 주선(周旋)하게 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몸을 잘 가지어 스스로 처리하는 도리를 알게 하기를 청합니다. 그리 되면 인재가 적은 것을 또한 염려할 것이 없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주상(周詳)하라고 장려(奬勵)하고 이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묘당에서 청하기를,
"호조와 형조와 공조의 낭관(郞官)과 금부 도사(禁府都事) 1과(窠)만은 무신(武臣)으로 의차(擬差)하여 시험을 거쳐 저양(儲養)하는 곳이 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이석(李晳)이 졸(卒)하였다. 이석은 젊어서 청현직(淸顯職)을 역임(歷任)하였었으나 중년(中年)에는 그의 아우 이증(李曾)의 연루(連累)된 일로 자못 뜻대로 되지 않았다가, 대질(大耋)010)  로 관질(官秩)이 올랐었다. 이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 83세였다.

 

1월 11일 신미

종각(鍾閣)을 개수(改修)하여 세웠다.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하여 홍만용(洪萬容)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조성보(趙聖輔)를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이민서(李敏叙)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신계화(申啓華)를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김만길(金萬吉)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엄집(嚴緝)을 교리(校理)로, 신엽(申曅)을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옥당(玉堂)에서 종각(鍾閣)의 회록(回祿)011)  의 재앙(災殃)을 가지고 차자를 올려 계칙(戒飭)할 것을 아뢰었다. 임금이 우악(優渥)하게 비답하고 차본(箚本)은 금중(禁中)에 머물려 두었다.

 

1월 12일 임신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하여 이이명(李頤命)을 부수찬(副修撰)으로, 남용익(南龍翼)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이여(李畬)를 부응교(副應敎)로, 김만길(金萬吉)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1월 15일 을해

이인환(李寅煥)을 대사간(大司諫)으로, 남필성(南弼星)을 장령(掌令)으로, 이정영(李正英)을 판의금(判義禁)으로, 신엽(申曅)을 응교(應敎)로, 신계화(申啓華)와 윤덕준(尹德駿)을 부교리(副校理)로, 이후정(李后定)을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1월 16일 병자

판윤(判尹) 이익(李翊)이 소를 올려 사직(辭職)하였다. 그 대략(大略)에 말하기를,
"가세(家世)가 외롭고 한미(寒微)하여 본래 친당(親堂)이 없었으며 성품이 또한 게으르고 옹졸하였기에 교유(交遊)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니 어찌 영진(榮進)할 생각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전형(銓衡)의 장(長)인 형이 갈리자 아우가 이었으니, 차고 넘친 재앙(災殃)이 이치로 보아 반드시 이를 것입니다. 방금 조정의 의논들이 횡으로 무너지고 뜬 말이 엇갈리어 어지럽습니다. 그러기에 만일 조화(調和)하여 보합(保合)하지 아니하면 마침내는 반드시 분리(分離)되어 괴격(乖隔)하는 데에 이르러 수습(收拾)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주의(注擬)할 즈음에 십분 신중하지 않아서는 아니되겠습니다. 그런데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각기 다르기에 지적(指摘)이 먼저 가(加)하여져서 해괴한 기회가 한번 발생하면 봉적(鋒鏑)012)  이 모아 듭니다. 그리하여 간신(諫臣)들의 소에 정사가 한집에 몰려 있다고 지목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로써 신을 안죄(按罪)하여 귀양보내고 죽이더라도 그 죄의 만분의 일도 속바치지 못합니다. 대관(臺官)들의 의율(擬律)한 것이 지나치게 경(輕)할 뿐만 아닌데 전하께서는 이미 불초(不肖)한 이 몸을 물리치지 아니하셨고, 또한 이 일을 말한 신하들에게 견책(譴責)을 주셔서 직언(直言)의 기상이 꺾이고 막히었기에 여러 사람의 심정(心情)이 불울(怫鬱)하고 있습니다. 신 때문에 성덕(聖德)에 누(累)를 끼치게 되었으니, 참으로 다시 조정에 있을 면목(面目)이 없습니다. 사적(仕籍)에서 삭제(削除)하여 남은 일생(一生)이나마 절조(節操)를 온전하게 하여 주시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답하기를,
"세상이 점점 내려올수록 풍속(風俗)이 말세(末世)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이 예와 같지 못하구나. 지난번에 대신(臺臣)들의 평(評)은 원한(怨恨)을 쌓은 나머지에서 나온 것이다. 사(私)를 따르고 당(黨)을 두호하려는 습관(習慣)으로 헐뜯음을 만들어 사람을 모함(謀陷)하는 태도는 차마 바로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이와 같이 부박(浮薄)하여 바르지 못한 의논들은 오직 마땅히 일소(一笑)에 붙일 것이니 무엇을 그리 입에 올릴 것이 있겠느냐? 안심하고 사직(辭職)하지 말고 빨리 직무에 충실하라."
하였다.

 

1월 17일 정축

황해도(黃海道)에서 문화(文化)와 안악(安岳) 등의 읍(邑)에 염병과 우역(牛疫)이 치성(熾盛)하여 번지는 일로 계문(啓聞)하였다.

 

낭원군(郞原軍) 이간(李偘)이 소를 올려 영래 도정(瀛萊都正) 이숙(李洬)의 효행(孝行)을 정표(旌表)하여 주기를 청하였다. 이를 예조(禮曹)에 내려 보냈다. 예조에서는 종부시(宗簿寺)로 하여금 그의 행적을 자세하게 갖추어 보고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1월 18일 무인

윤이도(尹以道)를 승지(承旨)로, 이덕성(李德成)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이세백(李世白)이 아뢰기를,
"수안(遂安)과 곡산(谷山)과 서흥(瑞興) 등의 읍(邑)은 포구(浦口)와의 거리가 가장 멀어서 전세(田稅)를 운반하는 비용이 원 물건값보다 거의 3, 4배나 됩니다. 그러기에 비록 풍년이 든 해에도 백성들이 오히려 괴로와하고, 흉년이 든 해에 이르러서는 더욱 견디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이를 면포(綿布)로 대신 바치게 한 것이 또한 전례(前例)가 있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이것을 항식(恒式)으로 정하여 주시면 곧 조가(朝家)에 있어서도 손해가 없으면서 백성들에게는 은혜가 됨이 이보다 큰 것이 없겠습니다."
하였다. 호조(戶曹)에서 말하기를,
"금년에는 본도(本道)가 재해(災害)를 입은 것이 너무 혹심(酷甚)합니다. 그러니 면포로 대신 바치게 함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나 뒤에 이를 예(例)로 삼지는 말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월 19일 기묘

달이 태미원(太微垣)에 들어갔다.

 

집의(執義) 김세정(金世鼎)과 지평(持平) 이두악(李斗岳)이 아뢰기를,
"조성보(趙聖輔)가 그의 족숙(族叔) 조여운(趙汝耘)과 산소 문제로 다투어 틈이 생겨서 서로 헐뜯고 있습니다. 조성보는 말하기를 ‘조여운이 그 어미의 상구(喪柩)를 따라가지 아니하였다.’ 하고, 조여운은 말하기를, ‘조성보가 그 애비의 병을 구원하지 않았다.’ 하여서 지친(至親)의 사이인데도 서로 숨은 잘못을 지적(指摘)하고 있으니, 박악(薄惡)한 습성(習性)은 참으로 너무나 놀랍고 이상하여 한번 끝까지 안핵(按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성보와 조여운을 나란히 나포(拿捕)하여 죄를 물어 처치하기를 청합니다. 조성보가 이렇게 당하고 있는 것이 심상(尋常)한 일이 아닌데도 그가 문득 의망(擬望)되어 선명(宣命)013)  을 받았으니, 이는 사체(事體)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이조(吏曹)의 당해 당상 낭청(當該堂上郞廳)들을 아울러 중죄(重罪)로 추고(推考)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이를 따랐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상진(李尙眞)이 나이 많은 것을 들어 휴치(休致)014)  를 빌었다. 임금이 비답하기를,
"황발(黃髮)에게 물으며 오래된 사람에게 맡기기를 도모하라 한 것은 곧 옛사람의 밝은 교훈이었으니, 온갖 정성을 다해 진력하여 죽은 뒤에야 그만두는 것은 인신(人臣)의 큰 절의(節義)이다. 그런데 경은 어찌하여 이를 척연(惕然)하게 생각이 미치지 아니하고 휴퇴(休退)하기에만 급급(汲汲)하여 겨를이 없느냐?"
하고, 특히 승지(承旨)를 보내 유시를 전하였다.

 

1월 20일 경진

사간원(司諫院)에서 아뢰기를,
"내금장(內禁將) 나홍좌(羅弘佐)가 무인(武人) 박태선(朴泰宣)의 첩이 미색(美色)이 있음을 알고서 사람을 보내 약탈(掠奪)하여 갔습니다. 이는 풍교(風敎)에 손상(損傷)됨이 있으니, 그를 사판(仕版)에서 삭제(削除)하여 버리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를 나포(拿捕)하여 문초하기를 명하였다.

 

이상진(李尙眞)이 또 휴치(休致)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간곡하게 유시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이상진이 이로부터 다시는 청하지 아니하였다.

 

1월 21일 신사

토성(土星)이 태미원(太微垣)을 범하였다.

 

신계화(申啓華)를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1월 22일 임오

대사헌(大司憲) 홍만용(洪萬容)이 처음으로 정사(呈辭)하였다. 전교하기를,
"근래에 양사(兩司)의 장관(長官)들은 열흘마다 보름마다 행공(行公)하는 사람이 없어서 문득 한만(閑漫)하여 빈자리같이 되었으니 진실로 한심(寒心)하다. 그런데 홍만용이 막 새로운 명을 받아 사례하자 마자 곧 장단(長單)을 올렸으니 일의 체통으로 보아 매우 미안하다."
하고, 도로 내주었다.

 

1월 23일 계미

화성(火星)이 방성(房星)을 범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대왕(大王)의 초상 3년 안에는 중사(中祀)에 음악을 쓰지 아니합니다. 그리고 내상(內喪)은 대왕(大王)의 초상과는 구별되어 소상(小祥)을 지낸 뒤에는 신하와 백성들이 다 길복(吉服)을 입습니다. 그러니 음악 쓰는 것을 정폐(停廢)하는 것은 미안한 듯하니, 그 일을 대신들에게 의논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이 말하기를,
"온 나라가 길복(吉服)을 입는데 유독 음악쓰는 것만을 폐지하는 것은 아마 미안한데 관계될 듯합니다."
하였고, 영부사(領府事) 김수흥(金壽興)의 의논도 또한 그러하므로 임금이 그 의논에 따르게 하였다.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이 쓸데없는 비용을 절약(節約)하여 줄여야 한다는 뜻을 아뢰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여느 해에 있어서도 진실로 절용(節用)하는 것이 마땅하거늘 하물며 크게 흉년이 든 해를 당하여서이랴? 진달한 것이 절실(切實)하니, 마땅히 척념(惕念)하겠다."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이인환(李寅煥)과 집의(執義) 김세정(金世鼎)과 부제학(副提學) 최석정(崔錫鼎)이 다 김중하(金衆夏)를 참작(參酌)하여 처치한 것이 옳지 아니함을 힘써 아뢰었으나, 임금이 이를 따르지 아니하였다.

 

정언(正言) 이덕성(李德成)이 소를 올려 말하기를,
"비년(比年) 이래로 조정의 의논이 둘로 갈라져서 위와 아래가 틀리고 막혔기에 사리(事理)의 맞는지를 묻지 아니하고 말이 대각(臺閣)에서 나온 것이면 오직 거절하여 막는 것으로 능사를 삼습니다. 그래서 나라 사람들이 다 옳다는 의논과 온 세상의 공공(公共)스러운 의논들을 오히려 교격(矯激)한 것으로 의심하고 당벌(黨伐)이라고 지목(指目)합니다. 한 말씀이라도 마음에 거슬리고 한가지 일이라도 약간 권귀(權貴)한 자에게 관련되는 것이면 문득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리는 죄로써 더하여 단연코 충성하지 아니하고 의롭지 못한 사람으로 여깁니다. 한번 뜻을 거슬리면 문득 은혜로 낙점(落點)하시기를 아끼어서 장차는 바른 선비들이 점점 멀어지고 아유(阿諛)하고 첨영(諂侫)한 자들이 다투어 나오게 되는 데 이를 것입니다. 그리되면 전하께서는 스스로 독단(獨斷)을 써서 아무런 꺼리는 도리가 없게 될 것이니, 홀로 나라의 일만이 날로 글러져서 난망(亂亡)이 서로 따라와도 구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생각지 않습니까? 말하고 의논하는 권리는 오직 한결같이 대각(臺閣)에 위임(委任)해야 하는데 이제 대각에서 말하기를, ‘대신들 중 기가 꺾이지 않은 사람이 드물다’고 합니다. 한 번 옳고 그름을 겪은 의론은 문득 단안(斷案)이 되어 해를 넘기고 세월이 가면 주청하기도 어려운데 끝내 윤허를 입으려면 또한 대신들의 방조(傍助)함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 때문에 대각들이 가벼운 대우를 받는 것이 날로 심합니다. 이것이 어찌 대각(臺閣)을 두게 된 본의(本意)라 하겠습니까? 설령(設令) 대각(臺閣)이 반드시 옳지 못하다 하더라도 옥당(玉堂)은 논사(論思)하는 공론(公論)의 귀숙(歸宿)을 맡았으니, 그 지위가 없는 것을 근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홀로 애석한 것은 지난 날에 상신(相臣)이 전조(銓曹)의 장(長)을 구제하려는 차자는 그 말의 빠르기가 사마(駟馬)도 따르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 쟁론(爭論)한 것이 맞고 안 맞는 것은 그대로 두고 논하지 말더라도 훗날에 귀척(貴戚)이나 대신들이 바야흐로 뻗어나가는 의논을 저격(沮擊)하여서 일이 이보다 큰 것이 있으면 문득 이를 빙자하여 예(例)로 삼을까봐 그윽이 두렵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의논한 것이 거의 대부분 준엄(峻嚴)하고 과격(過激)하여 진실로 화평(和平)한 데에 모자랐었다. 대신들을 규정(糾正)한 차자에 이르러서는 전조의 장을 신구(伸救)한다고 배척하였으니 사체에 있어서 어찌 이러할 수가 있겠느냐? 참으로 놀랬고 그리고 또 괴이(怪異)하구나."
하였다.

 

1월 28일 무자

신계화(申啓華)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서종태(徐宗泰)를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조여운(趙汝耘)과 조성보(趙聖輔)를 잡아 가두고 두 번이나 추문(推問)하였으나 나란히 한 말도 헐뜯어 비방한 적이 없다고 공술하였다. 의금부에서 놓아 보내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정제선(鄭濟先)의 일로 복주(覆奏)하기를,
"봉명(奉命)하여 사람을 죽인 것은 일찍이 그의 목숨으로 보상하지 아니하였으니, 대신들에게 의논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이 말하기를,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양인(良人)이었고, 또 죽은 자를 검시(檢屍)하였던 문안(文案)이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을 잘못 죽인 죄는 더 핑계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봉명하여 사람을 죽인 것은 목숨으로 보상하기를 면제한다는 것이 과연 법례(法例)의 근거(根據)할 것이 있습니다. 그런즉 참고하여 처치하는 것도 혹은 하나의 방도(方道)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해조(該曹)에 명하여 참고하여 아뢰게 하였다. 의금부에서 권우(權堣)와 강석규(姜錫圭)의 일로 아뢰었다. 전교하기를,
"정제선이 죄를 지고 법을 범한 것이 이미 중한데 전일에 유사(有司)의 신하가 취복(取服)하기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곧바로 임금의 재가(裁可)를 청한 것은 자못 옥(獄)을 맡아 다스리는 체통이 아니었다. 그래서 경책(警責)한 것이다. 정제선이 비록 봉명(奉命)하고 대각(臺閣)을 겸하였다고 말하지만, 일이 공사(公事)가 아닌데도 한때의 혈기(血氣)로 분함을 참지 못하여 함부로 사람의 목숨을 죽이기를 여섯 사람에 이르렀고 비부(婢夫)인 양인(良人)이 이미 그 가운데에 있었다. 그런즉 왕법(王法)으로 다스리면 용서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양조(兩朝)에서 이러한 것들의 옥사(獄事)를 재량(裁量)하여 처치한 것은 이미 의거할 만한 예(例)가 있으니 그 일들의 사이에는 혹은 경하고 중함과 많고 적음의 구별이 없지 않겠지만 사(私)를 인하여 사람을 죽인 죄는 같으니 참작(參酌)할 도리가 없을 수 없다. 특별히 감사(減死)015)  하고 유(流) 3천리(三千里)에 처하라."
하였다. 정제선이 드디어 강진현(康津縣)에 유배(流配)되었다.

 

1월 29일 기축

청하(淸河)의 해부(海夫)가 바람을 만나 배가 뒤집혀서 물에 빠져 죽은이가 일곱명이었다. 임금이 구휼(救恤)하는 법전을 베풀어 주기를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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