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16권, 숙종 11년 1685년 2월

싸라리리 2025. 11. 16.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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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일 임진

옥당관(玉堂官)을 소대(召對)하여 《강목(綱目)》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선제(宣帝)의 ‘아들이 부모를 숨겨주고, 아내가 남편을 숨겨주고, 손자가 할아버지를 숨겨주는 것은 다스리지 말라.’ 한 조서(詔書)를 보았다. 이는 참으로, 전대(前代)의 아름다운 일이었다. 여러 법률의 글을 참고하여 보니 또한 ‘자손(子孫)과 처첩(妻妾)으로서 부모나 가장(家長)을 고발하는 자는 교형(絞刑)에 처한다.’는 글이 있다. 그런데 근자에 형옥(刑獄)의 문안(文案)들을 보면, 어떤 것은 자손으로 하여금 그의 부모(父母)를 증거하게 하였고, 처첩(妻妾)으로 그의 가장을 증거하게 하였으니, 이는 매우 말할 것이 못된다. 또 외방(外方)의 옥수(獄囚)들이 엄체(淹滯)되어서 여러 번 해를 겪는 자까지 있다. 이와 같은 의옥(疑獄)은 마땅히 곧 계문하여 재량(裁量)하여 처단(處斷)하게 해야 한다. 이를 만일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처단(處斷)하기 어려운데 천취(遷就)하게 하느냐? 이 뒤에는 속히 처결(處決)하게 하라. 이 두가지의 일을 특별히 유지(諭旨)를 만들어서 팔로(八路)에 신칙하라."
하였다.

 

2월 3일 계사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이 말하기를,
"근래에 달이 태미원(太微垣)에 들어간 것이 여러번이었습니다. 예부터 이러한 괴변(怪變)은 궁금(宮禁)이 엄숙하지 못한 데서 생기는 반응(反應)이었습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성명께서 더욱 경척(警惕)하셔서 사기(邪氣)로 하여금 그 사이에 간범함이 없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의 말이 간절하고 지극하다. 내가 마땅히 더욱 척념(惕念)하겠다."
하였다. 김수항(金壽恒)이 말하기를,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은 인조(仁祖) 때에 시종신(侍從臣)으로서 먹는 물건을 제급(題給)하는 중에 하루를 공직(供職)하지 않았으면 스스로 그것을 받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니 그를 억지로 강박(强迫)하는 것은 예사(禮使)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그러니 먹는 물건은 도로 거두시고 주급(周急)하는 방도(方道)로 따로 사급(賜給)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지사(知事) 이단하(李端夏)가,
"사창(社倉)의 저축된 곡식은 1만 냥(兩)의 은(銀)이 됨직합니다. 그러니 관서(關西)에 먼저 1만냥을 보내게 하여 두어 해의 저축을 갖추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민서(李敏敍)가 말하기를,
"엎드려 영소전(永昭殿)의 제향(祭享)을 보았습니다. 희생(犧牲)을 사용하지 아니함이 자못 의아스럽습니다. 막중한 제사의 전례(典禮)에는 이를 빠뜨릴 수가 없습니다.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품정(稟定)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예(例)를 참고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이민서(李敏敍)가 또 말하기를,
"정제선(鄭濟先)을 감사(減死)하여 주는 것이 옳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전의 사례(事例)에 인하여 이렇게 한때에 참작(參酌)하여 처치함이 있었다. 그런데 봉사(奉使)한 이로서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자들이 이를 끌어다가 예(例)를 삼는다면 그 폐단이 무궁(無窮)할 것이다. 이 뒤에는 사사로운 것으로 사람을 죽이는 자는 또한 그의 목숨을 보상(報償)해야 하는 일을 법식(法式)을 정하여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김수항이 말하기를,
"유생(儒生)들은 으레 홍단령(紅團領)을 입습니다만, 친시(親試)에는 반드시 흑단령(黑團領)을 입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마음대로 백색과 흑색을 입어서 잡스럽고 어지러워 법도(法度)가 없습니다. 지금부터는 홍단령 입는 것을 엄하게 단속하여 이를 어기는 자에게는 시장(試場)에 들어옴을 허락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2월 4일 갑오

김우항(金宇杭)을 정언(正言)으로, 김두명(金斗明)을 헌납(獻納)으로, 윤이(尹理)를 승지로 삼았다.

 

보은(報恩)의 유학(幼學) 이진안(李震顔)이 소를 올려 말하기를,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는 도덕과 학문이 진실로 동방(東方)의 정자(程子)·주자(朱子)로 일컬을 만한 분이요 백세(百世)의 사표(師表)입니다. 그런데 채진후(蔡振後)와 유직(柳稷) 등이 구태여 이이가 젊었을 적에 산에 들어갔던 것을 지적(指摘)하여 흠만 잡으니 올바른 것을 추하게 만드는 형상이 또한 참혹합니다. 주자(朱子) 같은 아성(亞聖)으로도 초년에는 오히려 이와 같았으니, 이이의 젊었을 때의 일이 어찌 의논할 단서(端緖)나 되겠습니까? 선현(先賢)을 무욕(誣辱)한 말이 또 다시 유사(儒士)로 이름하는 자의 입에서 나와서 일후(日後)에 구실삼을 자료(資料)가 될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지난해에 윤증(尹拯)이 어떤 이에게 준 편지에 말하기를, ‘이제 강도(江都)의 일을 가지고 선인(先人)016)  을 헐뜯어 병으로 여기는 자가 있으니, 이는 곧 율곡(栗谷)의 이망색비(以妄塞悲)017)  의 상소를 가리키며 자도(自道)가 다하였다고 이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나 율곡은 오히려 참으로 산에 들어갔던 과실(過失)이 있음을 면하지 못하지만 선인(先人)은 처음부터 죽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하였습니다. 그의 말이 무륜(無倫)한 것이 어찌 하나같이 이에 이르렀습니까? 윤증의 아비 윤선거(尹宣擧)가 병자년018)  과 정축년019)  의 호란(胡亂)에 죽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사소(辭疏)에 말하기를, ‘사우(士友)들이 모두 뜻을 저버리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이 같이 죽지를 못하여서 아내가 자결(自決)을 하고 자식이 버렸는데도 홀로 노예(奴隷)가 되어 구차스럽게 면하였습니다.’ 하였으니, 윤선거가 이를 죄로 여긴 것이 이러하였습니다. 그러한데 이제 윤증은 그의 아비가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하였으니 그 또한 이상합니다. 그의 아비에게 과실(過失)이 없다고 이르면서 선현(先賢)을 끌어다가 그 아비에게 비의하여 뒤섞어서 일과(一科)로 삼은 것은 이미 그릇된 것인데 이제는 비의하였을 뿐 아니라, 선정(先正)은 참으로 과실이 있었다고 이르고 그의 아비는 죽을 만한 이유가 없다고 하여 그의 아비는 과실이 없는데에 두고, 선정은 배척하여 과실이 있다고 일렀으니, 선정을 모욕하고 업신여겨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채진후 등이 사설(邪說)을 부르짖어 무릇 시비(是非)하는 날이 있게 된 것을 뉘라서 마음 아파하며 변명하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요사이 학유(學儒) 김성대(金盛大) 등이 통문(通文)으로 그들의 죄를 성토(聲討)하여 중외(中外)에 전파(傳播)하여 고한 것은 오늘날의 사기(士氣)가 오히려 볼 만한 것이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봉교(奉敎) 김홍복(金洪福) 등이 윤증을 위하여 원수를 갚으려 하였기에 정거(停擧)020)  하는 벌(罰)을 내리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인심의 자못 괴벽(乖僻)함과 사설의 횡류(橫流)함이 어찌 이에 이르렀습니까?"
하였다. 상소가 정원(政院)에 이르렀다. 윤증의 당(黨)이 승지(承旨) 윤이도(尹以道) 등을 부추켜서 진계(陳啓)하여 윤증(尹拯)을 구제하기를 매우 힘써서 말하기를,
"어찌 일호(一毫)인들 선현(先賢)을 모함할 뜻이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윤증이 이이(李珥)를 무함(誣陷)함은 상리(常理)로는 미칠 수 없는 것으로 여기어서 비망기(備望記)021)  를 내려 말하기를,
"이제 이진안(李震顔)의 소사(疏辭)를 보니 윤증(尹拯)의 오래 된 사사 편지를 들춰 내어 선현(先賢)을 멋대로 무함(誣陷)하였다는 죄를 덮어씌워서 은연(隱然) 중에 현란(眩亂)한 계획을 날조(揑造)하였으니 참으로 놀라움을 이길 수가 없다. 사람들의 마음의 투박(渝薄)함과 선비들의 풍습의 불미(不美)함이 한결같이 이 지경이 되었구나. 만일 이러한 위험스러운 말이 행해지면 곧 말류(末流)의 폐단은 장차 나라가 나라답지 못한 데에 이를 것이니, 좋고 나쁜 것을 명시(明示)하지 않을 수 없다. 이진안은 정거(停擧)하고 이 상소는 도로 내 주어라."
하였다. 대교(待敎) 심권(沈權)과 검열(檢閱) 유상재(柳尙載)가 김홍복(金洪福)이 유사(儒士)를 벌 준 일에 동참(同參)하였기 때문에 이진안에게 배척을 받은 일로 소를 올려 스스로 변명하였다. 임금이 또 우악(優渥)하게 비답을 내리었다.

 

2월 5일 을미

전교(傳敎)하기를,
"옛사람이 이르기를, ‘양민(良民)을 보전하려면 먼저 장법(贓法)을 엄정(嚴正)하게 하라.’ 하였다. 조씨(趙氏)의 송(宋)나라는 인후(仁厚)함을 숭상(崇尙)하였지마는, 오직 장리(贓吏)만은 기시(棄市)하였다. 우리 나라의 장법은 엄하지 못하여서 일찍이 아 대부(阿大夫)를 삶아 죽이던 것022)  과 같은 엄한 법률은 쓰지 아니하여 혹 사유(赦宥)를 받기도 하고 혹 죽일 형(刑)인데도 형률(刑律)을 잘못하였으니 관리(官吏)들은 멋대로 하고 소민(小民)들은 곤궁(困窮)한 것이 괴이(怪異)할 것이 없다. 이제부터는 직질(職秩)의 높고 낮음을 가릴 것 없이 탐장(貪贓)이 현저한 자는 엄하게 문초(問招)하고 끝까지 죄를 조사하여 법을 엄정(嚴正)하게 하기를 기약(期約)하라. 그래서 비록 대사(大赦)를 만나 심리(審理)하더라도 영원히 녹계(錄啓)하지 말아서 장법(贓法)을 엄하게 다스림으로써 양민(良民)들을 편안하게 하라."
하였다.

 

장령(掌令) 이국방(李國芳)이 아뢰기를,
"동부승지(同副承旨) 윤이(尹理)는 인망(人望)이 본래부터 경(輕)하여서 승선(承宣)의 책임(責任)에는 합당하지 못합니다. 그를 체차(遞差)하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2월 6일 병신

옥당관(玉堂官)을 소대(召對)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이 또한 입시(入侍)하게 되었다. 임금이 윤이(尹理)에 대하여 김수항에게 물었다.
김수항이 말하기를,
"신은 그의 사람됨을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요사이 은대(銀臺)에 처하여 있는 자들과 비교하여 보면 그에 미치지 못할 자가 없는 듯합니다. 대간의 아룀은 신은 그것이 합당한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일찍이 이 사람을 보았다. 대간(臺諫)이 아뢴 것이 진실로 합당하지 못하다."
하였다. 김수항이 이어서 아뢰기를,
"어제 이진안(李震顔)의 소가 이르렀을 적에 정원(政院)에서 앞질러 먼저 진계(陳啓)하였기에 특히 정거(停擧)하라는 벌을 내리셨습니다만 이 처분(處分)은 합당하지 못하므로 사람들의 여론(輿論)이 답답해 하고 있습니다. 대개 실록(實錄)을 고쳐서 수찬(修撰)하였을 때에 이단하(李端夏)가 강도(江都)에 있었던 일을 알고자 하여 사사로이 윤증에게 물었었는데 윤증이 이이(李珥)의 일을 끌어다가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유학(儒學)을 배우는 자가 이제 와서 그 문제를 제기(提起)하여서 통문(通文)을 돌리는 데에까지 이른 것은 타당(妥當)하다고는 이르지 못하겠습니다만, 그들의 마음가짐이 있는 데가 있었으니 그를 깊이 공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관(史官)들이 몸을 바쳐 담당하여 문득 그들에게 유벌(儒罰)을 더하였고, 조정에까지 추급(推及)한 것은 매우 잘못되었습니다. 윤증의 편지에 ‘율곡(栗谷)이 참으로 산에 들어갔었던 과실(過失)이 있다.’고 하였고, 이러한 망발(妄發)로부터 ‘선인(先人)은 처음부터 죽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고까지 말한 것은 더욱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말의 뜻을 보면 ‘이이(李珥)는 참으로 과실이 있었고 그리고 그의 아비는 원래 과실이 없는 것같이 되었으니 어찌 그를 변파(辨破)하지 않겠습니까? 강도(江都)의 일에 대하여는 벌써 그의 아비가 임금에게 고하여 스스로 구차스럽게 면하였다고 말하였는데 그의 아들이 말하기를,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하였으니,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또는 전혀 사실이 아닌 일을 끌어다가 편지에 쓰기를 아무개는 참으로 산에 들어갔었던 과실이 있었다고 했으니 참으로 선현(先賢)을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뜻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윤증이 근자에는 비록 일을 잘못하고 있습니다만 그는 본래 중한 명망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러한 말을 증명하여 이루어주면 훗날에 사악한 의논들이 반드시 이를 가지고 구실삼게 될 것이니, 선현을 해침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진안의 상소는 정거(停擧)할 죄가 못되고 단지 선정(先正)을 위하여 변명하고 배척하였던 것인데 여러 승지(承旨)들이 말을 하여 윤증을 두둔하기를 마치 전혀 과실이 없는 것같이 하였습니다. 또 윤선도(尹善道) 등의 소장(疏章)을 받들어 들였을 때만 하여도 앞질러서 먼저 진계(陳啓)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는데, 이번 것은 유자(儒者)의 소에 관계되는 것인데도 먼저 저격(沮格)하였기에 성상의 교명이 ‘위험하므로 특히 정거의 벌을 베풀라’고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좋아하고 미워함이 마땅함을 잃었음을 면하지 못하겠습니다. 또 사관(史官)들이 윤증을 위하여 나누어 소를 올리면서 송시열(宋時烈)이 무함(誣陷)받았던 일을 끌어다가 윤증이 오늘날 당하고 있는 일에 비유하였습니다만 어찌 다르지 않겠습니까? 송시열에게는 당시 여러 소인(小人)들이 역률(逆律)로 얽어 매었으니, 이 일과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윤증(尹拯)은 그 아비의 일로 이이(李珥)에게 비유하였으니, 이는 이미 말할 것도 못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관(史官)들은 오늘날의 일로써 송시열이 당하였던 것에 비유하려 하였으니, 이는 더욱 근거가 없습니다."
하였다. 부제학(副提學) 최석정(崔錫鼎)이 극렬히 말하기를,
"윤선거(尹宣擧)는 죽어야 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이진안(李震顔)의 상소가 매우 정당(正當)하지 못하니, 죄를 다스리지 아니할 수 없으며 성상께서 처분(處分)하신 것이 지나친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으나, 김수항(金壽恒)이 이어서 말하기를,
"그 때의 무리들이 전적으로 송시열(宋時烈)을 배척하여 물리치고자 하였기에 모두 윤증(尹拯)의 편이 되어서 그의 잘못을 말하는 자가 있지 않았습니다. 송시열(宋時烈)이 내려가는 날에 옥당(玉堂)과 태학(太學)에서 그가 머물러 있기를 청하지 아니하여서 대우(待遇)하기를 도리어 자기들 가운데에 소위(所謂) 맑은 명성(名聲)과 곧은 절조(節操)를 가졌다고 하는 이만도 같지 못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개연(慨然)할 일입니다. 이진안(李震顔)에 대한 벌은 도로 거두어들이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논을 주동(主動)한 사관(史官)은 마땅히 파직(罷職)의 벌을 베풀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윤허하였다. 소대(召對)를 파한 뒤에 정언(正言) 김경(金澋)이 아뢰기를,
"사관(史官)을 파직(罷職)하는 명을 도로 거두어들이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2월 7일 정유

비망기(備忘記)에 이르기를,
"특지(特旨)로 외임(外任)에 보직(補職)된 사람은 해조(該曹)의 예(例)로서 감히 청직(淸職)의 선(選)에 함부로 의망(擬望)하지를 못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지난날의 정령(政令)에 울진 현령(蔚珍縣令) 오도일(吳道一)을 의망한 것은 매우 온당하지 못하였다. 그러니 이조(吏曹)의 당상(堂上)과 낭청(郞廳)을 모두 추고(推考)하라."
하였다. 또 비망기에 말하기를,
"양사(兩司)에서 법대로 집행(執行)하여야 한다는 의논이 다만 무변(武弁)에게만 행하여지고 명류(名流)들에게는 시행되지 아니하니 그러한 습관은 놀랄 만하다. 그리고 정제선(鄭濟先)의 사건에 대하여는 이목(耳目)의 관원들이 반드시 쟁론(爭論)함이 있을 줄 여기었는데, 이제에 이르도록 잠자코 있으니, 내가 참으로 한심스럽게 여긴다."
하였다. 정원(政院)에서 진계(陳啓)하여 그를 신구(伸救)하였으나, 임금이 들어주지 않았다.

 

2월 8일 무술

날이 저물게 개정(開政)하여 특별히 정관(政官)을 추고(推考)하였다.

 

엄집(嚴緝)을 사간(司諫)으로, 이돈(李墩)을 헌납(獻納)으로, 박신규(朴信圭)를 판윤으로, 조성보(趙聖輔)·이동명(李東溟)·송창(宋昌)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예조(禮曹)에서 지난날에 희생(犧牲)을 쓰는 일로 대신들에게 의논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과 영부사(領府事) 김수흥(金壽興)이 모두 이정(釐正)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니, 임금이 의논한 대로 시행하기를 명하였다.

 

대사헌(大司憲) 홍만용(洪萬容)과 대사간(大司諫) 이인환(李寅煥)과 정언(正言) 김경(金澋)과 장령(掌令) 이국방(李國芳)이 나란히 정제선(鄭濟先)의 일로 엄한 교명이 있었기에 인피(引避)하고 물러나 기다렸다.

 

옥당관(玉堂官)을 소대(召對)하였다.

 

우승지(右承旨) 윤이도(尹以道)와 우부승지(右副承旨) 한구(韓構)가 소를 올려 말하기를,
"어제 대신은 신 등이 아뢴 것에 대하여 깊이 물리쳤기에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눈으로 바르지 못한 소를 보고서도 끝내 한마디의 말도 하지 못하고 오직 상소를 받들어들이는 것만 직책(職責)으로 여겨서 마치 말이나 전달하는 늙은 여종과 같다면 출납(出納)하는 도리가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윤증(尹拯)의 한 구절의 말이 망발(妄發)이라고 한 데에 이르러서는 신 등이 어리석고 암매(闇昧)하여 미처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을 죄라고 하면 도망하여 피할 바가 없습니다. 그러니 신 등의 직위(職位)를 삭제(削除)하여 주기를 빕니다."
하였다. 비답하기를,
"사퇴(辭退)하지 말고 직책(職責)을 보살피라."
하였다.

 

응교(應敎) 신엽(申曅)이 소를 올려 스스로 변명하기를,
"송시열(宋時烈)이 내려갔을 적에 임금의 유시가 간절하였기에 아랫사람으로서 더 청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을 듯하여 과연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이어서 사관(史官)을 죄주신 것은 합당하지 못한 듯하다고 논(論)하였다. 비답하기를,
"옛부터 유현(儒賢)이 나라를 떠나갔을 적에는 비록 돈독하고 면려하는 비답이 있었더라도, 옥당(玉堂)은 으레 차자를 올려 머물기를 청하였다. 그러한즉 오늘날 한 짓은 대단히 실오(失誤)한 것임을 면하지 못하겠다. 사관(史官)이 견책(譴責)을 입은 데에 이르러서는 실지로 그들이 스스로 취한 것이다. 나는 그것이 지나친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2월 9일 기해

집의(執義) 김세정(金世鼎), 지평(持平) 양중하(梁重厦)·이두악(李斗岳)이 나란히 정제선(鄭濟先)의 사건 때문에 인피(引避)하고 물러가 기다렸다.

 

부제학(副提學) 최석정(崔錫鼎)이 소를 올려 윤증(尹拯)을 신구(伸救)하면서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을 침해하여 배척하였다. 그 소에 말하기를,
"신이 엎드려 신엽(申曅)의 소에 대한 비답을 보았습니다. 지난날에 유현(儒賢)이 조정을 떠나갔을 적에 옥당(玉堂)에서 차자를 베풀어 그에게 머물기를 청하지 아니한 것은 대단히 실오(失誤)한 짓이다 하셨으니, 신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전부터 유현(儒賢)이 조정을 떠나가는데는 대개는 정세(情勢)가 불안(不安)함을 인하였거나, 혹은 예우(禮遇)가 조금 쇠하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옥당(玉堂)의 신하들이 차자를 올려 머물기를 청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날에 송시열이 성(城)에 들어왔을 적에는 겨우 대궐의 섬돌에 오르자 곧 돌아갈 길을 찾았기에 비록 소장(疏章)을 베풀어 머물기를 청하고 싶어도 이미 미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주상께서 은례(恩禮)의 융성함이 멀리 상례(常例)와 달랐습니다. 그러한즉 또 한갓 문구(文具)만을 일삼을 필요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러기에 떠나는 말을 잡아매는 문장을 과연 위에 아뢰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어제 경연(經筵)에 있던 대신이 윤증(尹拯)의 서찰(書札)의 일에 대해 논(論)하였고, 이어서 사관(四館)023)  이 유생(儒生)에게 벌을 베풀었던 행동에 미쳤기에 파직(罷職)하라는 명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조가(朝家)의 처분(處分)에는 반드시 그 일의 옳고 그른 것을 먼저 논(論)하여 일이 진실로 글렀으면 죄를 주어 물리침은 옳지 아니함이 없겠습니다만 만일 혹 그러하지 않아서 일의 시비(是非)를 논(論)하지 아니하고 먼저 꺾어버려서 진정시키는 방책(方策)으로 삼는 것이라면 신은 곧 시비가 더욱 혼효(混淆)해지고 인심(人心)이 더욱 답답하여져서 마침내 진정하는 효과(效果)가 없어질까 두렵습니다. 지난날 김성대(金盛大) 등이 윤증의 서찰(書札)의 한 구절의 말을 따가지고 선현(先賢)을 무욕(誣辱)하였다고 일러서 죄를 성토(聲討)하는 글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윤증은 곧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의 외손자이고,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는 실로 성혼과는 덕을 이웃하여서 외롭지 아니합니다. 윤증이 두 분의 선현을 높여 사모한지 여러 해가 되었은즉 이제 이이를 모욕(侮辱)하였다는 것이 과연 이치에 가깝겠습니까? 하물며 그의 편지는 선현을 끌어다가 그의 아비의 일을 인증(引證)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 어찌 일분인들 날조한 것에 근사(近似)한 말이 있었겠습니까? 대저 남의 사사로운 편지를 끌어내어 횡(橫)으로 죄안(罪案)을 더하는 것은 이미 성세(聖世)에는 당연히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론(士論)이 어그러지고 막혀서 서로 헐뜯고 알력이 있는 날을 당하여 오래 묵은 서척(書尺)을 주워 모아서 별건(別件)의 죄명(罪名)을 얽어 만들어서 반드시 선현을 무욕(誣辱)하였다는 죄과(罪科)에 빠지게 한다면 이는 또한 불인(不仁)이 심하다 하겠습니다. 이제 만일 윤증으로 하여금 진실로 선현을 무욕한 죄가 있을 것 같으면 이 일은 사문(斯文)024)  에 관계되는 것이니, 사람들이 한가지로 질시(嫉示)하여 많은 선비들이 함께 분하게 여겨 꾀하지 않아도 말이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러하지 않아서 다만 김성대(金盛大) 등 몇 사람의 손에서 나왔을 뿐이니, 그것은 사림(士林)의 공론(公論)이 아니고 함정에 빠뜨리려는 사의(私意)인 것이 또한 분명합니다. 이렇게 선비들의 습관(習慣)이 단정(端正)하지 못하니 이를 규정(糾正)하는 것은 자연히 사관(四館)의 직책(職責)입니다. 들으니 편지를 발송(發送)한 뒤에 삼가 알았다고 써보낸 자가 20여 인에 이르렀다 하니 공의(公議)의 소재를 대개 알아보겠습니다. 이렇게 일을 날조(揑造)하여 남을 무함(誣陷)하여 스스로 부정(不靖)을 만드는 이는 실지로 김성대 등이 한 일인데도 그런데 대신들은 도리어 먼저 부정의 단서(端緖)를 야기한 것을 사관(四館)의 죄로 여기고 있으니, 신은 참으로 그 뜻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에 대하여 대각(臺閣)이 같이 들어와서는 한 말이라도 이를 광구(匡救)하는 이가 없었고, 겨우 물러가서야 도로 거두어들이라고 아뢰었다는 것이 초초(草草)하여 말이 되지를 않았으니 신이 속으로 애석(哀惜)하게 여깁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성명(聖明)께서 더욱 환히 살피셔서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다. 임금이 정원(政院)에 전교하기를,
"이 상소(上疏)는 도로 내주어라."
하였다. 이어서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말하기를,
"이제 부제학(副提學) 최석정(崔錫鼎)의 소본(疏本)을 보았다. 저쪽을 억누르고 이쪽을 드날려서 치우치게 사당(私黨)을 옹호(擁護)하는 태도가 드러나서 이를 덮기 어려웠으니 진실로 경악(驚愕)함을 이길 수가 없다. 지금 조정[朝著]이 부정(不靖)함을 보고 사습(士習)이 예같지 아니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마는 자기들 가운데의 논의(論議)를 능히 다 밝히지 못하였기에 처분이 합당치 못하였었다. 그런데 대신(大臣)이 경연(經筵)에서 논렬(論列)한 것은 시비(是非)를 바로잡고 호오(好惡)를 밝히려는 뜻이 아닌 것이 없다. 그러니 어찌 먼저 들어온 것을 위주로 하여 나온 땀을 도로 들어가게 할 수 있겠느냐? 최석정이 도리어 이로써 지나친 처치(處置)라고 하였음은 진실로 알지 못하겠다. 더구나 대신을 흔들려는 계획은 차마 바로 볼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임금과 정승을 멸시(蔑視)하여 기탄없이 방자하기가 한결같이 이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몹시 마음아프고 또한 놀랄 일이다. 최석정은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말라. 그리고 이 뒤에는 이와같은 장소(章疏)는 받아들이지 말라."
하였다. 이에 응교(應敎) 신엽(申曅)과 부교리(副校理) 윤덕준(尹德駿)과 수찬(修撰) 신계화(申啓華) 등이 청대(請對)하여 최석정을 파직시킨 명을 도로 거두어들이기를 청하고 교대로 알현하며 다시 간(諫)하여, 신엽이 ‘김창협(金昌協)은 옥천(沃川)의 유생(儒生)을 【즉 김엽(金曄)인데, 그 소는 갑자년(甲子年) 7월에 보인다.】  무상(無狀)하다고 여기었으니 아버지와 아들의 논의(論議)가 반드시 다르고 같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신의 뜻도 또한 김성대(金盛大) 등을 옳다고 여기지는 않을 것을 알 수 있습니다.’라고까지 하였다. 대개 김창협은 사론(士論)이 어긋나는 것을 민망하게 여겨서 진정(鎭定)하려는 말을 낸 것이니, 오늘의 시비(是非)와는 아무런 관계도 있지 아니하다. 그런데도 신엽이 이를 끌어다가 주합(湊合)하여 한편으로는 김수항(金壽恒)을 협지(脅持)하고 한편으로는 김창협을 조절(操切)하였으니, 공의(公議)가 이를 매우 해괴하게 여겼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날 대신이 윤증(尹拯)에게 크게 망발(妄發)이라고 한 것은, 대개 사당(邪黨)에서 이를 인하여 핑계되므로써 선현(先賢)을 침욕(侵辱)할까 염려한 것이었다. 이 말이 매우 옳은데도 그러나 최석정은 윤증을 전연 과실(過失)이 없는 곳에 두고자 하였다. 이것이 사사롭게 비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또 대신이 윤증에게 선현(先賢)을 무함(誣陷)하였다고 이르지 않았고, 다만 망발이라고만 말하였다. 그런데 최석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신구(伸救)하였다. 그가 말한 ‘남의 사사 편지를 끌어내어 함부로 죄안(罪案)을 만들었다.’ 한 것은, 이는 이진안을 배척한 말이었으며, 그리고 ‘사론(士論)이 어그러지고 막힘을 당하여서는 불인(不仁)에 이름이 심하다.’ 한 것은 현저(顯著)하게 대신을 침노하여 헐뜯는 뜻이 있다. 그가 어찌 감히 이와 같은 짓을 하느냐?"
하였다. 신엽 등이 또한 사관(四館)에서 배우는 유생(儒生)에게 벌을 준 것은 과실(過失)이 없다고 여기었으며, 그리고 파직한 것은 합당하지 못하게 여기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관(史官)이 몸을 바쳐서 마땅히 간섭하지 않아야 할 일을 담당하여 위로 조정에까지 미치게 되었으니 그를 어찌 죄주지 않겠느냐? 너희들의 말은 구차(苟且)스러움을 면하지 못하겠다. 최석정이 파직당하는 데에 거듭 격동되고 사관(史官)이 파직된 벌을 도로 거두어들이기를 청한 데 이르러서는 더욱 미안(未安)하다."
하였다. 신엽이 또 간원(諫院)의 계사(啓辭)는 말을 이루지 못하였음을 진달하였고, 이어서 정원(政院)에서는 최석정이 죄를 입은 데 대하여 한 말도 없었음을 배척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최석정은 이미 그러한 죄가 있기에 승지(承旨)가 왕명(王命)을 출납하지 않았던 것이니, 그에게 과실(過失)이 있음을 내가 알지 못한다."
하였다.

 

2월 10일 경자

유헌(兪櫶)을 승지(承旨)로, 박세당(朴世堂)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임금이 뜸질을 받았다. 도제조(都提調) 김수흥(金壽興)이,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의 봉사손(奉祀孫) 이후시(李厚蒔) 부부가 다 죽고 그의 아들도 죽었으니 이후시의 종형 이후수(李厚樹)의 아들 이연(李綎)을 후사(後嗣)로 삼을 뜻으로 아뢰니, 임금이 이를 윤허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최석정의 일에 대하여 옥당(玉堂)에서는 그가 전적으로 과실(過失)이 없다고 여기어서 사담(私談)으로 번거롭게 아뢰는 데 이르렀으니, 사체(事體)에 미안하다."
하니, 김수흥이 말하기를,
"최석정의 상소에서는 끝내 윤증이 한 짓을 망발(妄發)로 여기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그가 말하기를, ‘송시열에게 머물기를 청하지 아니한 것은 그 분을 높이고 사모하지 않음이 아니라, 전부터 반드시 뜻이 편안치 못하고 예(禮)가 극진하지 못하게 된 뒤에라야 바야흐로 머물기를 청하였습니다.’ 하였으나, 효종(孝宗)께서 정성스럽게 대우하기를 매우 융숭하게 하였었고 정세(情勢)가 달리 편안하기 어려운 것도 없었지만 조정을 떠나갈 때에는 다 머물기를 청하였습니다. 최석정의 말은 매우 정직(正直)하지 아니하여 겉으로는 높이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배척하니 온 세상이 다 그러합니다. 그것은 송시열이 중한 이름을 짊어졌고 융숭한 대우를 받고 있기 때문에 감히 드러나게 배척하지 못하여서 겉으로는 존경하고 사모하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그렇지 아니한 것이 닿는 곳마다 탄로났으므로 말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옛말에 ‘사람은 오직 나이든 사람을 구하라.’ 하였으며, 또 ‘황발(黃髮)에게 물으라’ 하였습니다. 지금의 사람들은 노성(老成)한 분을 존경하여 사모하지 아니합니다. 세도(世道)가 이에 이르렀음은 작은 근심이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최석정의 상소의 말은 겉으로는 존경하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배척하는 것이 탄로나 숨기기 어렵다."
하였다. 김수흥이 말하기를,
"신엽은 오히려 윤증의 한 말을 망발(妄發)로 여기었습니다만, 최석정은 ‘전적으로 과실(過失)된 것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또 윤증의 편지 가운데의 ‘참으로 있었다[眞有]’는 두 글자를 고쳐서 ‘면하지 못한다[未免]’고 하였으니, 이는 더욱 잘못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 옥당(玉堂)에서 청대(請對)하여 최석정을 영구(營救)한 것은 일이 매우 바르지 못하였다. 그리고 또 붕제(朋儕)들 사이의 말을 끌어들여 나의 귀를 번거롭게 한 것은 사체가 엄하지 못하여 외설(猥褻)하고 난잡(亂雜)함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은 없었다. 그들을 모두 추고(推考)함이 옳겠다."
하였다. 이는 신엽이 김창협의 말을 끌어온 것을 가리킨 것이다.

 

우승지(右承旨) 김진귀(金鎭龜)와 좌부승지(左副承旨) 이동명(李東溟)이 소를 올려 말하기를,
"대신이 사관(史官)에게 죄주기를 청한 것은 시비(是非)를 가리고 호오(好惡)를 밝히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기에, 성상(聖上)께서 이를 받아들이신 것은 진실로 처분(處分)이 마땅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최석정이 감히 소를 올려 구제하기에 힘썼고 성명께서는 그를 책벌(責罰)하였음이 중도(中道)에 지나친 것이라고 볼 수 없었으므로 쟁집(爭執)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런데 옥당(玉堂)의 여러 신하들이 이를 매우 그르다고 배척합니다. 이 일을 쟁집(爭執)해야 할지의 여부는 자연히 공의(公議)가 있을 것이므로 신 등이 시끄럽게 더 변명하고자 아니합니다만, 이미 헐뜯기고 배척당하였으니, 여기에 그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체직시켜 주기를 청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최석정(崔錫鼎)이 사당(私黨)을 구제하기에 힘써서 대신을 침핍(侵逼)한 소에 대하여 전적으로 과실(過失)이 없다고 이른 것은 그들이 사사로운 뜻에 가리어서 옳고 그른 뜻을 잃어버림이 매우 심하다 하겠다. 그러니 너희들은 조금도 인혐(引嫌)할 것이 없다. 사직(辭職)하지 말고 속히 직책(職責)에 충실하라."
하였다. 이에 신엽(申曅) 등이 소를 올려 인혐하였다. 답하기를,
"최석정이 부범(負犯)한 것은 이미 비망기(備忘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더구나 그의 소 가운데 머물기를 청하지 아니하게 된 한 건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니 송시열을 겉으로는 존경하는 체하면서도 속으로 배척하였음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느냐? 그런데 너희들이 신구(伸救)하는 것은 도리어 뜻밖에 나온 것이라 이를 내가 깊이 책망(責望)한다."
하였다.

 

밤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에 들어갔다.

 

2월 11일 신축

이후정(李后定)을 수찬(修撰)으로, 정면(鄭勔)·윤반(尹攀)·이유(李濡)를 승지(承旨)로 삼고, 집의(執義) 김세정(金世鼎)을 승진시키어 승지(承旨)에 임명하였고, 이선보(李善溥)를 집의(執義)로 삼았다.

 

사간(司諫) 엄집(嚴緝)이, 사관(史官) 및 최석정(崔錫鼎)을 파직(罷職)시키는 명을 도로 거두어 들이기를 계청하고, 또 후사(喉司)가 최석정이 죄를 입었을 때에 왕명을 제대로 출납하지 아니한 것을 가지고 그들을 추고(推考)하기를 청하였으며, 또 양사(兩司)에서 정제선(鄭濟先)의 일로 인피(引避)한 자들을 ‘쟁집(爭執)하지는 않았으나 이미 의견(意見)이 있었으니 임금의 교지(敎旨)가 비록 엄하지마는 반드시 인혐(引嫌)이나 사직할 것이 없다.’는 것으로 처치하게 하니, 답하기를,
"사관(史官)과 경악(經幄)이 죄를 입는 것은 대개 시비(是非)를 가리고 호오(好惡)를 밝히는 데서 나온 것이니, 이제 이들의 계사(啓辭) 가운데에 혹은 뜻이 숨김이 없는데 있다고 하거나 혹 처치가 편중(偏重)되었다고 일렀으니 그 뜻을 실로 알기 어려운데 심지어 대신을 침핍(侵逼)한데 대하여는 실로 그러한 자취가 없다는 등의 말까지 하니, 반드시 사당(私黨)을 엄호(掩護)하려 한 것이어서 더욱 관계가 구차(苟且)한 것이다. 그러니 빨리 정지하여 번거롭게 말라. 처치하라는 일은 아뢴 대로 하겠다."
하였다. 엄집(嚴緝)이 비지의 엄한 책망 때문에 인피(引避)하고 물러가 기다리었다.

 

2월 12일 임인

이후정(李后定)을 교리(校理)로, 이돈(李墩)을 부교리(副校理)로, 윤빈(尹彬)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임금이 뜸질을 받았다. 도제조(都提調) 김수흥(金壽興)이 말하기를,
"정제선(鄭濟先)의 일은 대각(臺閣)의 신하들이 논집(論執)하지 않았기에 임금으로부터 특별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리셨으니, 말의 뜻이 엄정(嚴正)하여서 대각(臺閣)의 신하들이 죄를 기다리는 외에는 마땅히 다른 말이 없어야 하는데도 처치(處置)할 때에 모두 나오기를 청하였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 ‘임금의 교지(敎旨)가 비록 엄하지마는 반드시 인혐(引嫌)할 것은 아니다.’ 하였으니 이는 이를 것이 못됩니다. 임금께서 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책망하신 것은 진실로 적의(適宜)한 것입니다. 비록 붕제(朋儕)들의 사이에 있어서도 법을 집행하는 의논은 마침내는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하물며 임금의 교지(敎旨)이겠습니까? 대각(臺閣)의 처치(處置)는 진실로 아주 잘못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법을 지키지 아니하는 대관(臺官)이 어찌 나오기를 청할 이치가 있겠느냐? 이러한 처치(處置)는 진실로 아주 마땅하지 못하다."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이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지난번에 신이 입시(入侍)하였을 적에 망녕되게 아뢴 것이 있었던 것은 다만 성상(聖上)께서 호오(好惡)의 마땅함을 얻게 하려는 것이었으며, 그리고 또 핑계대고 계속하여 일어나는 사설(邪說)을 막으려는 것이었습니다. 망발(妄發) 두 글자는 윤증(尹拯)에게 가담한 자들도 감히 내리지 못하였으니, 뜻이 그를 애호(愛護)하는 데 있었으므로 혹 그를 상(傷)할까 두려워한 데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일 망발이 아니라고 여기면 이는 마치 윤증의 말을 사실로 여기어서 윤증의 허물을 무겁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의논들이 대저 이와 비슷하여서 특히 최석정(崔錫鼎) 한 사람만이 아니니 어찌 반드시 위로(威怒)를 무겁게 베풀어 화평(和平)의 법칙(法則)을 잃게 하겠습니까? 신이 또 그윽이 들으니 옥당(玉堂)에서 청대(請對)하였을 때에 신의 자식을 들어서 그 다름과 같음을 증거(證據)로 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비록 형옥(刑獄)에 관계되는 일이오나 자식으로써 아비를 증거하는 것은 윤리(倫理)에 크게 상(傷)합니다. 이러한 것이 이제 유신(儒臣)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만일 조정으로 하여금 약간이라도 체통이 있으면 이 말이 어찌 주광(黈纊)025)   밑에 외람되게 전하겠습니까? 신의 한마디 말을 인연하여 점점 시끄러움을 일으키었고 경악(經幄)의 장(長)이 엄한 견책(譴責)을 받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사람들에게 중시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자식을 들어서 아비를 증거하는 의논이 있기에 이르렀습니다. 청명한 조정을 부끄럽고 욕되게 하는 것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은 없으니, 하루라도 구차스럽게 차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최석정(崔錫鼎)을 파직한다는 명을 거두시고 이어서 신의 직위를 체차(遞差)하기를 윤허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하였다. 답하기를,
"경연(經筵) 앞에서 진달(陳達)한 것은 시비를 가리려는데 지나지 아니한데 최석정(崔錫鼎)의 상소는 말이 매우 정당(正當)하지 못하였기에 일시에 견책(譴責)하여 벌을 줌을 어찌 그만두겠느냐? 유신(儒臣)이 청대(請對)하여 아들을 들어 아비를 증거(證據)하게 한 데에 이르러서는 이를 듣고 크게 놀랬다. 이러한 일은 조정이 존엄(尊嚴)하지 못한데서 생긴 것이다. 경이 어찌 반드시 인구(引咎)하기를 이와 같이 하느냐? 안심하고 사퇴(辭退)하지 말라."
하였다.

 

2월 13일 계묘

대사간(大司諫) 이인환(李寅煥)이 소를 올려 말하기를,
"대신이 진달(陳達)한 것이 말과 일이 서로 틀리고 옳음과 그름이 서로 얽혀서 윤증(尹拯)은 선현(先賢)을 무함한 사람이 되었는데 그의 죄를 반증(反證)하여 이루었으니 저것을 억누르고 이것을 드날리게 되어 편중(偏重)됨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이진안(李震顔)을 과실(過失)이 없는 데로 받아들이고 사관(四館)에게는 사당(私黨)을 보호하였다는 죄를 베풀어서 시비(是非)가 이로 말미암아 전도(顚倒)되고 인심이 이를 인하여 답답해 합니다. 후사(喉司)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그 직위(職位)에서 갈렸고, 경악(經幄)의 장관이 또 견책(譴責)을 받아 파직되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효상(爻象)이며 이것이 무슨 거조입니까? 그리하여 진정(鎭靜)시킨다는 것이 또한 거의 파란(波瀾)을 조양(助揚)하는 것은 없는지요. 만일 윤증의 편지로 선정(先正)을 무욕(誣辱)하였다고 이른다면, 이 일은 원래 송시열과는 관계가 없는데, 이진안이 대로(大老)026)  를 함께 들었기에, 이어서 윤증을 억울하게 일컫는 자들이 대로(大老)를 침공(侵攻)하는데로 돌리었습니다. 부회(傅會)하고 억지로 맞추어 중권(重權)을 빌어 협박하였으니 그의 마음가짐은 아! 또한 위험합니다."
하였다. 답하기를,
"대신의 뜻도 또한 윤증이 선현(先賢)을 무욕하였다고 여기지도 아니하였으며, 이진안에게 과실이 없다고도 여기지 않았다. 그런즉 죄를 증거하여 이룸으로써 과실이 없는 데로 들여보낸다는 말은 실로 정과 뜻이 막힌 데서 생긴 것이다. 진실로 개탄(慨嘆)스럽다."
하였다.

 

2월 15일 을사

한범제(韓范齊)를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집의(執義) 이선보(李善溥)가 전에 아뢴 것을 신명하여 이두진(李斗鎭)이 아뢴 것을 정지시키고 또 이진안을 그전대로 정거(停擧)할 것과, 후사(喉司)로서 최석정(崔錫鼎)이 죄를 입을 때에 왕명을 제대로 출납하지 아니한 자들을 모두 파직시키기를 청하였으며, 또 처치(處置)하여 양사(兩司)에서 정제선(鄭濟先)의 일 때문에 인피(引避)하였던 여러 대간(臺諫)들을 모두 나오게 할 것을 청하였고, 【김수흥이 경연에서 물리쳤던 양사가 모두 인피하였다.】  또 엄집(嚴緝)을 나오게 할 것을 청하였다. 답하기를,
"이제 이 여러 신하들을 견책(譴責)한 것은 뜻이 본래 시비(是非)를 가리는 데 있었다. 그런데 무릇 사람들의 논의(論議)가 각각 스스로 같지 아니하구나. 도로 거두어 들이라는 청은 그래도 혹 가하다 하겠지마는 반드시 유생(儒生)들에게 모두 다시 유벌(儒罰)을 베풀고자 하는 것은 또한 너무 심하지 않겠느냐? 처치 한 건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해괴함을 깨닫지 못하겠다. 같음과 다름의 혐의(嫌疑)를 면하고자 하여서 일면으로는 이두진(李斗鎭)의 계(啓)를 급히 정지하게 하고 일면으로는 응당 인피(引避)해야 할 관원(官員)들을 나오게 할 것을 청하여서 전연 과실이 없는 것같이 하는구나. 일의 근거(根據)가 없는 것이 뉘라서 이보다 심하겠느냐? 아! 슬프다. 오늘의 한 일의 잘못은 대각(臺閣)에게 있었다. 그러한즉 한번 체차(遞差)하기를 청하는 것에 무슨 어려운 일이 있기에, 거조(擧措)에 두서가 없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 의논을 정지시키는 일을 담당하여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있으니, 이는 공도(公道)가 윤상(淪喪)된 것이 어찌 이렇게 극도에 이르렀느냐? 참으로 한심스럽다. 사간(司諫) 엄집과 장령(掌令) 이국방(李國芳)과 지평(持平) 이두악(李斗岳)과 대사헌(大司憲) 홍만용(洪萬容)과 지평(持平) 양중하(梁重厦)를 모두 체차(遞差)하라."
하였다.

 

2월 16일 병오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이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신이 대사간(大司諫) 이인환(李寅煥)의 소본(疏本)을 얻어 보았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장황(張皇)하게 오로지 신에 대한 공격(攻擊)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말뜻이 어긋나고 잘못되어 헐뜯어 배척함이 깊고 긴밀한 것은 다른 사람에 비하여 더욱 심한 것이 있습니다. 신이 배척당하는 것은 진실로 말할 것이 못됩니다만 시비(是非)가 있는 것이기에 변명하지 않음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 상소의 주장한 뜻은 윤증의 편지 가운데의 문자(文字)는 윤증이 스스로 지어낸 것이 아니고 곧 선정(先正)이 스스로 겸손해 하던 말이라는 것입니다. 이이(李珥)의 사직(辭職)하는 소에 스스로 겸손하였던 것은 진실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말하는 자는 참의(參議)를 증직(贈職)하였던 윤선거(尹宣擧)가 효종(孝宗)에게 올린 소에 ‘죽지 못하였던 것을 스스로 허물로 여깁니다.’ 한 것은 서로 비슷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윤증은 그의 아비가 스스로 겸손하였던 말을 가지고 죽었어야 할 의리로 단정(斷定)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의리(義理)가 정당(正當)하여 옳지 아니함을 보지 못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진실로 그가 말한 것과 같으면 어찌하여 홀로 선현(先賢)이 스스로 겸손하였던 말만을 가지고 참으로 있었던 과실(過失)이라고 단정하겠습니까? 자제(子弟)로서 부형(父兄)을 위하는 것이나 후학(後學)으로서 선정(先正)을 위하는 것은 비록 은(恩)과 의(義)의 구별은 있지만 어찌 경중을 달리 보아서 그 사이에 여탈(與奪)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주장하는 자들이 한갓 윤증을 구제하는데만 급급하여 그것이 의리(義理)에 크게 거슬림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그 말의 파탄(破綻)이 스스로 덮어두기 어려움이 있겠기에 신이 더 여러 말을 하고자 아니합니다. 윤증이 망녕되게 선정(先正)을 끌어서 말한 것은 비록 무욕(誣辱)하려는 뜻이 있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욕하는 자들의 효시(嚆矢)가 된 것은 큽니다. 옛적에 증자(曾子)가 자하(子夏)에게 서하(西河)의 백성들을 부리게 하였더니 공부자(孔夫子)로 의심되었기에 그의 죄를 헤아려 꾸짖으니, 자하가 죄를 받고 감히 변명하지 않았다 합니다. 더구나 윤증과 같이 불륜(不倫)한 것을 끌어와서 사당(邪黨)이 바른 것을 해치는 말을 돕게 된다면 그 죄를 어찌 도피(逃避)하겠습니까? 그리고 죄가 있고 없는 것은 스스로 공론(公論)이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신의 말을 기다려 증거를 이루겠습니까? 신이 경연(經筵)앞에서 아뢴 것은 그 뜻이 오로지 조정(調停)하는 데에만 있지 아니하여 다만 성조(聖朝)를 위하여 호오(好惡)를 바로잡으려 하고 사림(士林)을 위하여 시비(是非)를 밝히려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시비(是非) 가운데에는 또한 스스로 경한 것과 중한 것의 곡절(曲折)이 있습니다. 윤증의 과실은 오로지 사론(邪論)의 구실(口實)이 되는 데에 관계되어서 잘못된 것이 작지 아니합니다. 그러니 어찌 고의로 선현(先賢)을 무욕(誣辱)하지 않았다 하여 그의 말이 망령된 것을 밝히지 않겠습니까? 이진안의 소는 다만 선현(先賢)을 위하여 신변(伸辨)한 것입니다. 그런즉 큰 뜻이 스스로 옳았는데 어찌 윤증의 허물을 배척하였다 하여 문득 정거(停擧)하는 벌을 주어야 되겠습니까? 신이 두 가지 단서(端緖)를 잡아서 개진(開陳)하는 뜻이 실로 여기에 있음이요, 한 사람의 이진안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이인환이 말이 일과 더불어 서로 틀리고 시비가 서로 뒤섞였다는 것으로 신을 헐뜯습니다만, 신이 비록 피로(疲勞)하고 용렬하여도 이인환 무리들이 한 가지 뜻으로 치우쳐서 옳음만 있고 그름은 없다고 하는 짓은 본받고 싶지 아니합니다. 그리고 또 이인환이 ‘윤증의 이번 일은 봉조하(奉朝賀) 송시열에 관계되는 것이 아닌데도 이진안의 소에 나란히 대로(大老)를 든 것은 중권(重權)을 빌어 협박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이 어탑(御榻) 앞에서 또한 대로의 일을 언급(言及)하였습니다. 그런즉 이인환의 배척이 어찌 다만 이진안에게만 있다 하겠습니까? 그런데 신이 지금의 윤증(尹拯)을 찬양하는 자들을 보니, 거의 다 대로를 배척하여 물리치는 사람들입니다. 만일 온 세상이 존상(尊尙)하는 것이 전일과 다름이 없었으면 이진안의 말과 같은 것이 어디로부터 이르겠습니까? 이는 마땅히 스스로 반성(反省)하기에도 겨를이 없어야 하는데 어찌 남에게 성내는 것이 이에 이르렀습니까?"
하였다. 답하기를,
"세도(世道)가 크게 변하고 인심(人心)이 크게 무너져서 시비(是非)를 현란(眩亂)시키는 무리들이 얼굴을 바꾸어 교대하여 나오고 있으니 진실로 마음 아프다. 이러한 무리들을 비록 전부 죄줄 수는 없지마는 시비의 분별은 진실로 이미 굳게 정하여졌다. 그러니 저 일종의 편파적이고 속이는 말들이 어찌 감히 자취를 대고 마음대로 행하겠느냐? 경의 넓은 도량(度量)으로 이를 입에 담아서 나라의 일을 돌보지 않고 한결같이 면직(免職)되기를 바라는가?"
하고, 이어서 특명으로 승지(承旨)를 보내 유시를 전하였다.

 

전교하기를,
"이선보(李善溥)가 홀로 중론(重論)을 정지하려 하였고, 강제로 출사(出仕)하기를 청한 것은 그의 거조(擧措)가 놀랍고 괴이(怪異)하여 대간(臺諫)의 체통이 근거가 없게 되었으니, 그를 체차하라."
하였다.

 

2월 17일 정미

임금이 특별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고 도승지(都承旨) 심재(沈梓)를 보내어 김수항(金壽恒)에게 유시하기를,
"속히 출사(出仕)하여 도(道)를 의논하고 때의 어려움을 구제하라."
하였다.

 

2월 18일 무신

옥당관(玉堂官)을 소대(召對)하였다.

 

심유(沈攸)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이숙(李䎘)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이후정(李后定)을 사간(司諫)으로, 홍수주(洪受疇)를 장령(掌令)으로, 홍수헌(洪受瀗)을 정언(正言)으로, 민진주(閔鎭周)·황흠(黃欽)을 지평(持平)으로, 이돈(李墩)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남치훈(南致熏)을 교리(校理)로, 한은(韓垽)을 집의(執義)로 삼았다. 한은의 집은 대대로 남인(南人)이었다. 별로 학술을 일컬을 것이 없었는데 윤휴(尹鑴)와 허목(許穆)의 시대에 음관(蔭官)으로 발탁되어 대헌(臺憲)에 임명되었다. 일찍이 나와서 공직(供職)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언의(言議)가 표나게 드러난 것이 없었다. 그러나 경신년027)  에 경화(更化)할 때에 예전 윤휴의 당으로서 금고되어 있다가, 이에 이르러 김수흥(金壽興)이 차자를 올려 그가 염정(恬靜)하여 쓸 만하다고 추천하였기에 드디어 이 직임을 제수하였다.

 

성균관(成均館)에서,
"학유(學諭) 박징만(朴徵晩)은 적신(賊臣) 윤휴(尹鑴)가 맹위를 떨칠 적에 그에게 붙여서 칭송하기를, 제갈공명(諸葛孔明)에 비기기까지 하였으니, 성균관의 직임에 둘 수가 없습니다. 학유 박만정(朴萬鼎)은 사사로이 박징만을 두호(斗護)하여 다른 주장을 내세워 시끄럽게 하였으니, 그들을 모두 도태(淘汰)할 것을 청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2월 19일 기유

옥당관(玉堂官)을 소대(召對)하였다.

 

지평(持平) 민진주(閔鎭周)가 전에 아뢴 것을 아뢰되 【사관(四館) 및 최석정(崔錫鼎)이 아뢴 ‘영구(營救)’라는 말은 깎아없애고 사체(事體)로 보아 대략 도로 거두기를 청하기만 하였다.】  아첨하고 말이 많아서 대간(臺諫)의 체통을 상실(喪失)하였다는 것으로 이선보(李善溥)를 파직(罷職)할 것을 청하고, 이두진(李斗鎭)이 아뢴 것을 다시 발언하여 정제선(鄭濟先)을 감사(減死)하라는 명을 거둘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이진안(李震顔)을 다시 정거(停擧)하고, 승지(承旨)를 파직시키라는 아룀은 모두 정지시켰다.

 

2월 20일 경술

안규(安圭)를 장령(掌令)으로, 김창협(金昌協)을 부교리(副校理)로, 이후정(李后定)을 수찬(修撰)으로, 김두명(金斗明)을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지평(持平) 민진주(閔鎭周)가 전에 아뢴 것을 아뢰었으나, 임금이 다만 이선보(李善溥)의 일만을 윤허하였다. 【사관(四館)을 파직(罷職)시킨 일을 도로 거두라는 일은 정지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8책 16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29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2월 22일 임자

지평(持平) 황흠(黃欽)이 아뢰기를,
"사람을 죽인 자가 죽는 것은 왕법(王法)이 진실로 엄한 것이지만 대각(臺閣)의 일을 행하여 교명(敎命)을 받드는 사체도 또한 중합니다. 특히 감사(減死)하라는 율(律)은 심량(審量)하는 데 해롭지 아니하지만 미욱한 소견으로는 지금 변개(變改)하기가 어려우니 어떻게 그대로 대각(臺閣)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정제선(鄭濟先)이 사람을 죽인 것은 사사로운 분노에서 나왔으니, ‘대각(臺閣)의 일을 행하여 교명(敎命)을 받드는 사체 또한 중하다.’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다. 지평(持平) 민진주(閔鎭周)를 탄핵(彈劾)하여 체직하라."
하였다.

 

부교리(副校理) 김창협(金昌協)은 신엽(申曅)이 증거로 삼은 데 대해 소를 올려 인피(引避)하였다. 임금이 답하기를,
"잘못된 것은 저쪽에 있으니, 너에게 무슨 혐의(嫌疑)가 있겠는가?"
하였다.

 

2월 23일 계축

사간(司諫) 김두명(金斗明)이 아뢰기를,
"남의 사사 편지를 들추어서 사람을 함정(陷穽)에 빠지게 한 것은 속마음을 덮어 두기 어려운 것인데 이를 변무(辯誣)한 것으로 허락하였고, 몸이 사관(四館)에 있으면서 선비들의 습속(習俗)을 규탄하여 경책하는 것은 직분(職分)으로서 당연한 것인데 소요를 일으켰다는 것으로 죄를 주셨으므로, 후사(喉司)가 교묘하게 임금의 허물을 옹호하고 대각(臺閣)에서는 오직 임금의 뜻을 받드는 것만 일삼습니다. 때를 타서 영합(迎合)하며 억누름과 드날림에 뜻을 써서 손과 다리가 망란(忙亂)하고 변태(變態)가 겹쳐서 나옵니다. 그래서 드디어 청명하게 사물(事物)에 응하는 대성(大聖)의 공심(公心)으로 하여금 차츰차츰 격뇌(激惱)하여 끝맺음을 잘하지 못하고 호오(好惡)가 어그러지며 거조(擧措)가 전도(顚倒)되게 하였으니, 보고 듣기에 두려워서 기색(氣色)이 착잡(錯雜)합니다. 이러한 때에 있어서는 비록 충(忠)과 신(信)과 직(直)과 방(方)으로서 온 세상의 감복(感服)을 받는 자가 언론(言論)의 지위(地位)에 있더라도 오히려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아 성덕(聖德)으로 하여금 바른 의논을 넓히고 관리의 부정을 규찰(糾察)하게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어찌 신과 같이 우둔하고 용렬한 자가 적임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이두진(李斗鎭)의 일에 있어서는 우매한 소견이 변화시키기 어려우니, 어찌 감히 편안히 있겠습니까?"
하였다. 답하기를,
"대신은 인주(人主)의 팔과 다리로서 국가에서 의지하여 중히 여기는 자이다. 그런데 너는 어떠한 사람이기에 감히 그를 헐뜯어 배척하기를 이와 같이 무엄하게 하는가? 더구나 인피하는 말 가운데 ‘때를 타고 영합(迎合)하여 변태(變態)가 거듭 나온다.’는 등의 말에 이르러서는 후사(喉司)와 대각(臺閣)의 신하들을 능멸(凌蔑)하여 여지없이 짓밟아 마치 훈(薰)028)  과 유(蕕)029)  처럼 얼음과 숯처럼 사(邪)와 정(正)이 판연(判然)한 것처럼 하니, 어찌 그리 사의(私意)에는 용맹스러워서 떳떳한 양심(良心)을 없앰이 이 지경이 되었느냐? 진실로 놀랍다.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정언(正言) 홍수헌(洪受瀗)이 처치(處置)하여 체직을 청하되 ‘그가 말한 것이 혹 중도(中道)에 지나쳤어도 반드시 그르다고 할 수는 없는데, 변치 않고 고집하므로 형세가 구차스럽게 무릅쓰고 있기 어렵다.’는 것으로 사직하니, 사람들은 그의 말이 너무나 완약(緩弱)하다고 기롱하였다.

 

2월 24일 갑인

지평(持平) 민진주(閔鎭周)가 아뢰기를,
"엎드려 김두명(金斗明)의 인피하는 말을 보았습니다. 신을 헐뜯고 욕하는 것이 이르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신이 실로 놀랍습니다. 윤증(尹拯)이 옮긴 편지 한 건은 처음에는 망녕된 착각(錯覺)에서 나왔던 것인데 선현(先賢)을 무욕(誣辱)하였다고 단정하여 그의 죄를 성토(聲討)하고 통문(通文)을 돌린 것은 유생(儒生)의 잘못이었습니다. 그러나 말한 것은 대개 후일(後日) 구실(口實)이 될 것을 염려한 것이니, 그의 거조(擧措)가 비록 잘못된 것이라 해도 관계되는 것은 또한 중한 것이어서, 사관(四館)이 좌우(左右)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부하는 마음으로 쥐를 잡으려다 그릇이 깨질지도 모르는 혐의조차 잊어버리고 문득 벌을 베풀어서 조금도 돌아보고 꺼린 것이 없었으며, 마침내는 차츰 격렬(激烈)하여져서 조정에 소요를 일으키게 되었으니 어찌 그 죄를 변명하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뜻은 대개 이와 같았습니다만, 출사(出仕)하는 날에 문자(文字)를 고쳐서 내렸기에, 이어서 파직(罷職)을 도로 거두기를 청한 것인데, 이미 죄가 있다고 하였으면 이는 원래 위와 아래가 서로 버틸 일이 아니기에 즉시 정계(停啓)하였습니다. 그러니 편호(偏護)하였다는 의논에 배척당한 것은 마땅하겠습니다만, 오직 임금의 뜻을 받들기만 한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한번 웃음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일이 진실로 잘못 되었을 적에는 마땅히 쟁집(爭執)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니, 어찌 군상(君上)의 명령은 반드시 어기고 달리하여야 하겠습니까? 명령(命令)과 교훈(敎訓)이 위에서 나온 것을 하나같이 피혐하면 장차 바로잡아 구하는 의리를 따르려는 것이 모두 성경(聖經)에 실려 있지 않았어야 할 것입니다. 협지(脅持)의 계획에서 나와서 무리(無理)한 말을 창도(倡導)하니 사람의 무식(無識)이 이 지경이 되었을 줄 미처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너는 피할 만한 혐의(嫌疑)가 없으니 사퇴(辭退)하지 말라."
하였다.

 

2월 25일 을묘

신정(申晸)을 판의금(判義禁)으로, 이후정(李后定)을 사간(司諫)으로, 김창협(金昌協)을 헌납(獻納)으로, 서문유(徐文𥙿)를 지평(持平)으로, 유명일(兪命一)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이조 판서(吏曹判書) 여성제(呂聖齊)·판윤(判尹) 박신규(朴信圭)·지사(知事) 이단하(李端夏)가 청대(請對)하고 입시(入侍)하여 진휼청(賑恤廳)에서 재량하여 줄이는 일을 품정(稟定)하였으니, 위로 궁인(宮人)·환시(宦侍)로부터 아래로 조례(皂隷)·공장(工匠)에 이르기까지 감손(減損)된 것이 많았다. 김수항이 말하기를,
"신의 뜻은 윤증(尹拯)이 이이(李珥)를 무욕(誣辱)하였다고 이른 것은 아니고 다만 윤증의 말이 이이에게 해로움이 있었기 때문인데 성상께서 처분(處分)하신 것이 지나치셨기에 감히 잠자코 있을 수 없었습니다. 신이 윤증의 편지를 망발(妄發)이라 한 것은 이론(異論)들이 이를 구실(口實)로 계속하여 일어날까봐 염려되어 진달(陳達)하였던 것인데 윤이도(尹以道)와 한구(韓構)의 소에 ‘말없이 소를 받들어 올리기를 마치 말 전하는 늙은 여종과 같이 한다’고 하였으니, 임금께 이같이 고하는 말을 어찌 용납하겠습니까? 후사(喉司)는 왕명의 출납을 맡았으므로 비록 윤선도(尹善道)·유세철(柳世哲)의 소와 같은 것도 또한 다 받들어들여서, 오직 임금께서 처분(處分)하시기를 기다리고 논계(論啓)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과연 말 전하는 나이 많은 여종이 하겠습니까? 어리석은 소견으로 보면 망발이라 한 것을 윤증을 치우치게 두호(斗護)한 것 때문에 이같이 잘못된 것인 줄 알지 못한 것입니다. 두 사람의 한 짓이 모두 근거가 없는데 김두명(金斗明)이 피혐(避嫌)한 것은 오로지 분격(憤激)한 데서 나온 것이어서 말이 되지 아니합니다. 옳고 그름을 서로 다투는 것은 옛부터 그러하였습니다만, 만일 피차(彼此)가 공심(公心)이었으면 곧 말씨가 불손(不遜)한 것이 어찌 이와 같은 데에 이르겠습니까? 이는 한두 사람만을 책망할 것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다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심유(沈攸)가 소를 올려 말하기를,
"윤증(尹拯)의 아비 윤선거(尹宣擧)가 강도(江都)에서 죽지 아니한 것 때문에 비방을 받고 있는데 의리를 태산(泰山)같이 여기고 죽음을 홍모(鴻毛)같이 여기는 사이에서 죽음을 피하여 온전하게 산 자가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 이것을 영원히 하자(瑕疵)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후생(後生)들의 망론(妄論)을 신이 몹시 개탄(慨嘆)합니다. 상신(相臣)이 윤증의 편지를 망발(妄發)로 돌린 것은 실은 조제(調劑)의 뜻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헌부(憲府)의 신하들이 유신(儒臣)을 파직시키지 말게 하여 전에 아뢴 것을 정지하기를 청한 것은 또한 지론(持論)이 화평(和平)에 있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김두명(金斗明)이 뛰쳐 일어나 시비를 현란(眩亂)시켜 다시 소요를 일으키어 자기의 사심(私心)으로 이기기를 힘쓴 것은 책임이 돌아갈 데가 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본원(本院)의 처치(處置)가 능히 그의 잘못을 지적(指摘)하여 물리치지 못하였음은 신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소의 말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2월 26일 병진

흰무지개가 태양을 꿰뚫었다. 하교(下敎)하여 경외(敬畏) 수성(修省)하는 뜻을 심각하게 진술(陳述)하였으며, 또 논의(論議)가 어그러지고 막혔음을 경계하였다.

 

2월 27일 정사

윤경교(尹敬敎)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윤빈(尹彬)을 장령(掌令)으로, 강현(姜鋧)을 지평(持平)으로, 윤성교(尹誠敎)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옥당관(玉堂官)을 소대(召對)하였다.

 

부교리(副校理) 윤덕준(尹德駿)이 차자를 올려서 민진주(閔鎭周)·홍수헌(洪受瀗)을 체직하기를 청하면서 말하기를,
"민진주는 사관(四館)을 깊이 그르다 하면서도 도로 거두어들이기를 강청(强請)하고서는 이어서 곧 논계(論啓)를 정지한 것은 저쪽이나 이쪽이 모두 만족하지 못한 것으로서 언의(言議)가 구차스러웠습니다. 홍수헌은 김두명을 처치함에 있어서 처음에는 반드시 잘못된 것이 아니라 하였다가 심유(沈攸)의 소로 배척을 당하고서는 이에 사과하는 말을 스스로 늘어놓아 저쪽이나 이쪽에 모두 어긋났고 말에 일정한 방향(方向)이 없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민진주가 한 번 아뢰었다가 곧 그만둔 것은 대각(臺閣)의 체면에 손상(損傷)될 것이 없다. 그러니 무슨 구차스러운 일이 있겠느냐? 그대로 출사(出仕)하라. 홍수헌의 일에 대하여는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2월 28일 무오

옥당관(玉堂官)을 소대(召對)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좌의정(左議政) 정지화(鄭知和)가 무지개의 변고로 면직(免職)하기를 빌었으나, 임금이 위유(慰諭)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부교리(副校理) 윤덕준(尹德駿)·부수찬(副修撰) 이이명(李頤命)이 무지개의 변고로 차자를 올려 진계(陳戒)하니, 임금이 유심(留心)하겠다고 답하고 원 차자는 궁중에 머물러 두었다.

 

2월 29일 기미

궁녀(宮女) 25인을 내보냈으니, 이는 가뭄 때문이었다.

 

2월 30일 경신

전교하기를,
"영변부(寧邊府)의 철옹 산성(鐵瓮山城)은 지난해에 이미 수축(修築)을 끝냈으니, 산성의 형지(形止)를 상세(詳細)하게 그려서 올려보낼 일을 본도(本道)에 분부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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