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무자
유성(流星)이 하고성(河鼓星) 위에 나왔다.
10월 3일 경인
공홍도(公洪道)의 유생(儒生) 이시극(李時克) 등이 상소하여 홍수주(洪受疇)의 패망(悖妄)한 실상(實狀)을 분변하니, 답하기를,
"그대들이 선현(先賢)을 위하여 힘을 다해 신변(伸辨)하는 성의(誠意)를 내가 매우 가상(嘉尙)하게 여긴다."
하였다.
10월 4일 신묘
송규렴(宋奎濂)을 대사간(大司諫)으로, 한범제(韓范齊)를 장령(掌令)으로, 박세채(朴世采)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송창(宋昌)을 승지(承旨)로, 이숙(李䎘)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삼았다.
밤에 유성(流星)이 천원성(天轅星)의 위에 나왔다.
부수찬(副修撰) 김구(金構)가 상소하기를,
"신이 엎드려 전후(前後)의 비망기(備忘記)를 보건대, 매양 묵은 폐단을 통렬(痛烈)하게 버리고 탕평(蕩平)을 능히 넓혀야 한다는 전교가 있었으니, 이는 진실로 여러 신하들의 죄이며 오늘날의 극심(極甚)한 폐단입니다. 조정의 위에는 마음을 공평(公平)하게 가지는 사람이 어찌 없겠습니까마는, 온 세상이 아무 하는 일도 없이 바람에 쓸리듯 물에 젖어들 듯하여 비난이 함께 일어나고 의심이 더욱 깊어져서 세도(世道)가 험하고 좁으며 기상(氣象)이 좁고 촉급(促急)하여집니다. 이렇게 풍파(風波)가 뒤흔드는 때에는 온전한 사람이 있을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민우(民憂)와 국계(國計)와 같은 것은 서로 잊어버리는 지경에 두게 되니, 이렇게 해(害)가 됨은 반드시 나라를 망치는 데에 이른 뒤에야 그칠 것이니 어찌 상심(傷心)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모두 풍속이 경박(輕薄)하여지고 조정이 높지 못한 소치(所致)이며 또한 전하께서 처리하시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한 것에 말미암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진실로 마음을 먼저 바로 가지시어 위에서 표준을 세워서 표솔(表率)하는 방법을 삼으시고, 또 여러 방면으로 포용(包容)하여서 화평(和平)을 다하기를 힘쓰시고 무릇 언론(言論)이 분나(紛拏)에 관계되는 것은 한결같이 공의(公議)에 붙여서 그의 시비에 따라 일에 임하여 공평하게 결정하면서도 조금도 계착(繫着)됨이 없어야 하며, 그 까다롭고 잘난 것은 생략하고 대체(大體)만을 보존한다면 거의 풍속이 후(厚)하여지고 근거없는 의논이 저절로 지식될 것입니다. 근일(近日)의 일에 이르러서는 시비가 이미 결정되었고 처분(處分)이 이미 해결되었습니다. 그러한데도 유생(儒生)들의 장소(章疏)가 번갈아 나오고 들어오면서 한 절(節)이 겨우 끝나게 되면 다른 한 절(節)이 또 생기니 신은 속으로 민망하게 여깁니다. 시비가 분명하지 못하고 처분이 결정되지 않으면 곧 장소(章疏)를 연이어 올리고 간독(簡牘)을 여러 번 올려서 기필코 신원되고 나서야 그만둘 것입니다. 요즈음은 시비가 이미 정하여졌고 처분(處分)이 이미 분명하여진 뒤입니다. 그러니 이를 이어서 말을 올리는 자들은 문득 상(床) 위에 상(床)을 포개 얹고 지붕 위에 집을 또 짓는 격(格)이 되는데, 하물며 그것이 세 번 네 번에 이르면서도 그칠 줄을 알지 못함이겠습니까? 신이 지난날에도 일찍이 이 일로써 어탑(御榻) 앞에서 아뢰었습니다. 유생(儒生)들이 조정의 의논에 간여하는 것은 비록 근일(近日)의 폐단이 되고 있더라도 신이 주장하는 뜻은 대개 가리킨 것이 있으며, 유생들이 상소를 모두 채택(採擇)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신은 공소(空疎)하오나 영재(英才)들이 공부한 곳에 자취를 두었기에 변변치 못한 생각을 끝내 잠자코만 있을 수 없어서 이렇게 우러러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의 말을 내가 가상(嘉尙)하게 여기니, 체념(體念)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부교리(副校理) 이이명(李頤命)이 상소하기를,
"신이 가만히 보건대, 세도(世道)가 날로 내려가 남과 조급히 권세(權勢)를 다투는 것이 풍속을 이루어서 염정(恬靜)하게 스스로 지키는 사람이 드무니, 이는 진실로 성세(聖世)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세속이 번거로워졌는데 재능(才能)이 없으며 비천(卑賤)한 행실이 있어서 명교(名敎)를 손상시키면서 허명(虛名)을 걸고서 영현(榮顯)을 취하는 사람들이 진신(搢紳)들 사이에 자취를 같이 하려고 한다면 망령되이 이로써 청명(淸明)한 조정의 사대부(士大夫)된 이의 지극한 치욕(恥辱)으로 여겨서 항상 개연(慨然)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난날에 간관(諫官)의 직책(職責)에 참여하여 문득 스스로 논열(論列)했던 것은 일찍이 그러한 사람들이 해와 달의 말광(末光)을 의지하여 젊어서부터 현부형(賢父兄)에게 알아줌을 받았으며 노성(老成)하고 정평(正平)한 자세로써 나라에 보답하기를 도모하고 임금께 충성하기를 원하는 정성을 가지고 있음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신의 식견(識見)이 혼미(昏迷)하고 용렬(庸劣)하여 언의(言議)하는 것이 매우 잘못되었기에 당세(當世)에 소중히 여기는 선비를 무욕(誣辱)하여 성조(聖祖)의 명철(明哲)하신 밝음을 손상시켰습니다. 다만 이 한 가지 일만으로도 일찍이 견척(譴斥)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니 어찌 다시 청선(淸選)에 갖추겠습니까?"
하였다. 이는 대개 박세채(朴世采)의 상소 안의 말 때문에 인혐(引嫌)한 것이었다.
임금이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고 직책(職責)을 잘 살피라."
하였다.
10월 6일 계사
어사(御史) 유명일(兪命一)이 명을 받들어서 강화부(江華府)에서 시재(試才)하였다. 입격(入格)한 자를 혹은 제택(第宅)을 주거나 혹은 변장(邊將)에 임명하거나 혹은 활과 화살을 주었으며, 공천(公賤)이나 사천(私賤)은 면천(免賤)하였다.
10월 7일 갑오
성호징(成虎徵)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성호징은 문식(文識)이 없고 혼미(昏迷)하고 우둔(愚鈍)하였다. 전에 승지(承旨)가 되었는데, 능히 직무(職務)를 처리하지 못하고서 다만 이서(吏胥)들의 입만을 바라보니,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이 때문에 오랫동안 막혔다가 이때에 이르러 다시 임명되니, 성호징이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여 여러번 패초(牌招)를 어기었다. 그래서 취리(就理)하여 체직(遞職)되었다.
10월 8일 을미
이후항(李后沆)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집의(執義) 이굉(李宏)과 장령(掌令) 유명일(兪命一)이 아뢰기를,
"전 장령(掌令) 홍수주(洪受疇)는 본래 죄를 진 사람으로 감히 영화(榮華)를 얻겠다는 계획을 내어 이에 한 장의 상소를 올리면서 고(故) 상신(相臣) 장유(張維)의 《만록(漫錄)》의 말을 끌어내어 근거없는 말로서 저쪽은 누르고 이쪽은 칭찬하여 제 마음대로 끌어다 맞추었으며, 이에 감히 문성공(文成公) 신(臣) 이이(李珥)를 무욕(誣辱)함에 미쳐서는 문원공(文元公) 신(臣) 김장생(金長生)을 끌어다가 사실을 증명(證明)하는 터전으로 삼기에 이르렀으니, 그의 마음씀을 헤아리기 어려운 것과 말에 차례가 없는 것이 심한 편입니다. 장유가 저술한 것은 대개 일찍이 한때에 터무니없이 전하여 오던 말로 인한 것이며, 다만 선정(先正)을 위하여 변명(辨明)하려는 뜻이었는데, 홍수주는 감히 위 아래 문자들을 걷어 버리고 사설(辭說)을 변환(變幻)하여서 온 세상을 협지(脅持)하는 계획을 삼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김장생이 일찍이 주의하거나 어렵게 여기지 않고 마치 참으로 그런 일이 있는 것 같이 하였으니, 그의 말이 패망(悖妄)한 것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설령 홍수주의 본뜻은 무욕(誣辱)하는 데에 있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의 방자하고 무엄(無嚴)하게 사문(斯文)에 욕(辱)을 끼친 죄는 일종(一種)의 선정(先正)을 추욕(醜辱)하는 무리들보다 더 심합니다. 그를 삭탈 관작(削奪官爵)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홍수주(洪受疇)가 선현(先賢)을 무욕(誣辱)한 죄는 실로 세도(世道)에 관계되는 큰 변고(變故)이므로 몸이 의논하는 지위에 있는 자들이 그를 법을 준수(遵守)하려는 의논이 있을 줄로 여기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이 나쁜 데 빠지고 의리(義理)가 어둡고 막히어서 한 사람도 강개(慷慨)하여 일을 말하는 자가 없기에 상시(常時)로 매우 한탄하였다. 그런데 근일(近日)에 먼 지방의 많은 선비들이 정성을 다하여 봉장(封章)하는 것이 한둘에 그치지 않았으니, 공의(公議)가 울분(鬱憤)하고 있음을 이에서 볼 수가 있다. 더구나 대로(大老)157) 의 상소가 이에 대하여 더욱 명정(明正)하고 통쾌하였으니 악을 징계(懲戒)하는 도리에 있어서 마땅히 변방으로 물리치는 형률(刑律)을 베풀어야 하겠다. 그래서 겨우 초(草)를 잡아 선사(繕寫)하는 즈음에 그대들의 상소를 보게 되니, 이는 한 가닥 공의(公議)가 없어지지 않았음을 매우 가상(嘉尙)하게 여긴다. 그런데 다만 지난날에 박성의(朴性義) 등이 선현(先賢)을 추잡하게 헐뜯은 죄로써 찬축(竄逐)되었으니, 지금 홍수주의 상소에 ‘머리를 깎았다’는 등의 말은 실로 한쪽의 사람들도 일찍이 발설(發說)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를 엄하게 다스리지 아니하면 장차 부정(不正)한 말을 종식(終熄)시켜서 시비를 정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런데 삭탈 관작하고 문외 출송하라는 그대들의 청은 죄는 무거운데 형률(刑律)의 경함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니 홍수주를 극변으로 귀양보내라."
하였다. 이에 장령(掌令) 유명일이 인피(引避)하고 물러가 기다렸다.
밤에 달무리가 화성(火星)을 둘렀으며, 유성(流星)이 북두성(北斗星) 위에 나왔다.
10월 9일 병신
병조 판서(兵曹判書) 김만중(金萬重)이 여러 차례 사퇴(辭退)하고 나오지 않았다. 임금이 이를 묘당(廟堂)에 묻고서 그의 체차(遞差)를 윤허하였다. 김만중(金萬重)은 문아(文雅)로 칭송(稱頌)을 받았고 재간(才幹)과 국량(局量)으로 자임(自任)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조정에 나선 뒤로 일찍이 사무(事務)가 있는 직책(職責)을 맡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문득 중한 임무를 위임받게 된 것을 혐오(嫌惡)한 것이다. 또 문호(門戶)가 융성(隆盛)해짐을 보고서 깊이 스스로 겸손[挹損]한 것이다. 또한 일찍이 ‘김좌명(金佐明)이 외척(外戚)으로서 병권(兵權)을 맡는 것이 옳지 못하다’고 논하기도 하였으므로 힘써 사퇴(辭退)하여 임명되지 않았다.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어제 대간(臺諫)에게 비답한 가운데 홍수주(洪受疇)에 대하여 그를 이미 극변(極邊)으로 귀양보내게 하였으니, 해부(該府)에서 어찌 감히 10일 노정(路程)의 강진현(康津縣)을 그의 배소(配所)로 정하였느냐? 매우 놀랍다. 의금부(義禁府)의 당상관(堂上官)과 낭관(郞官)들을 모두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
하고, 이어서 특별히 경흥(慶興)으로 고쳐 부표(付標)하고서 당일(當日)로 그를 압송(押送)하기를 명하였다.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에 압록강(鴨綠江) 삼도구(三道溝)의 사람이라고 일컫는 자가 우리 나라 사람의 창(槍)에 상처(傷處)를 입었다고 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삼도구란 이름은 일찍이 듣지 못하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역관(譯官)을 급히 봉황성(鳳凰城)에 보내서 삼도구가 어느 곳이며 창에 상처입은 날짜가 언제인가를 탐문(探問)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그 자문(咨文)을 보니 기일(期日)에 앞서 엄중하게 붙잡아 심리(審理)하기를 기다리라는 말이 있으니, 사사 차관(査使差官)이 장차 나올 듯합니다. 그들을 접대(接待)하는 등의 일을 반드시 미리 정치(整治)하여야 하겠습니다. 감사(監司) 박태상(朴泰尙)이 바야흐로 강변(江邊)을 순찰(巡察)하고 있으니, 그의 순찰을 정지하고 속히 돌아와서 모든 일을 검칙(檢飭)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집의(執義) 이굉(李宏)이 의율(擬律)한 것이 마땅치 못했다는 이유로 인피(引避)하였다. 정언(正言) 김성적(金盛迪)은 홍수주(洪受疇)를 논핵(論劾)하지 않은 것 때문에 엄중한 분부를 받고서 인피하여, 모두 물러가 기다렸다.
10월 10일 정유
비변사(備邊司)에서 청(淸)나라 사람이 전한 ‘백두산(白頭山)과 영고탑(寧古塔) 사이에서 우리 나라 사람들을 만났는데 조총(鳥銃)을 많이 가지고 있더라’는 말로 함경도(咸鏡道)의 남병사(南兵使)와 북병사(北兵使)로 하여금 비밀히 기찰(譏察)하여 주문(奏問)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이숙(李䎘)이 또한 홍수주(洪受疇)를 논핵(論劾)하지 않은 일로 인피(引避)하였는데, 말하기를,
"홍수주의 상소 내용이 비록 매우 패망(悖妄)하였습니다마는, 성명(聖明)께서 이미 그 정상(情狀)을 환히 살펴서 시비를 명백히 분변하였으니, 이는 넉넉히 온 세상의 의혹(疑惑)을 깨뜨린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반드시 그의 죄를 논핵(論劾)한 뒤에야 바야흐로 옳은 것을 돕고 그른 것을 억누르는 도리를 다하였다고 하겠습니까? 하물며 지금은 조정의 의논이 거침없이 무너지고 세도(世道)가 크게 어긋나서 조금이라도 서로 부딛침이 있으면 문득 의심과 시기를 내어서 서로 알력이 생기니, 끝내 파란(波瀾)만 더 일게 되고 말 것입니다. 신이 끝내 한마디 말도 없었던 것은 반드시 이에 말미암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조금 있다가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옮기고, 이상(李翔)이 대신 대사헌이 되었다.
10월 11일 무술
유담후(柳譚厚)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수찬(修撰) 서종태(徐宗泰)와 부수찬(副修撰) 김구(金構)가 처치(處置)하여 양사(兩司)가 출사(出仕)하기를 청하니, 논자(論者)들이 ‘김성적(金盛迪)은 논핵할 것을 당하여 논핵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그를 빼야 할 텐데 함께 출사(出仕)하기를 청한 것은 구차스러움을 면하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10월 12일 기해
유성(流星)이 동정성(東井星) 위에 나왔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특별히 경관(京官) 2원(員)을 차출(差出)하여 속히 양계(兩界)에 나누어 보내서 조사하는 일을 신칙(申飭)하게 하소서."
하니, 조형기(趙亨期)를 함경도(咸鏡道)로, 이언강(李彦綱)을 평안도(平安道)로 가게 하였다.
10월 13일 경자
비변사(備邊司)에서 또 특별히 나이 젊은 무신(武臣) 4원(員)을 빨리 양계(兩界)에 나누어 보내서 그들로 하여금 삼수(三水)·갑산(甲山)·강계(江界) 등지에 달려가서 직접 수괄(搜括)하여 변고(變故)를 일으킨 사람들을 찾아내기를 청하였다.
좌의정(左議政) 남구만(南九萬)이 정고(呈告)하고 인입(引入)하여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다. 임금이 조사하는 일이 바야흐로 시작되었다는 것으로 그를 돈유(敦諭)하여 나오기를 재촉하였으나, 남구만(南九萬)이 끝내 나오지 아니하였다.
10월 14일 신축
대신(大臣) 김수항(金壽恒)·김수흥(金壽興), 도승지(都承旨) 이사명(李師命)을 인견(引見)하고서 범죄인(犯罪人) 조사하는 일을 묻고 의논하였다. 김수항 등이 삼수 군수(三水郡守) 이관국(李觀國)을 붙잡아 오기를 청하였는데 그것은 범월인(犯越人)158) 의 지방관이었기 때문이다. 또 경기(京畿) 백성들의 부역이 무거워서 감당하기 어려운 폐해를 아뢰니, 임금이 직로(直路)에 있는 세 개의 역참(驛站)과 풍덕(豊德) 등 고을의 수미(收米)를 감(減)할 것을 의논하게 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또 청하기를,
"무신(武臣)을 보내어 수괄(搜括)하는 일을 정지하고, 다만 안핵사(按覈使)로 하여금 군관(軍官) 3인을 데리고 가서 그들을 마음대로 임사(任使)하게 하고, 범인을 포고(捕告)한 자에게는 공사천(公私賤)은 면천(免賤)하고 양인(良人)은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시켜 실직(實職)을 제수(除授)하소서."
하였다.
사신(史臣)을 말한다. "나라의 기강(紀綱)이 해이(解弛)해져서 간사한 백성들이 법금(法禁)을 범하니 묘당(廟堂)의 계획이 소란해져서 어떻게 할지를 알지 못한다. 사변(事變)에 임하여서도 오히려 이러했으니 혹시 큰 사변(事變)과 큰 환난(患難)을 만난다면 임기(臨機)하여 변고(變故)를 제어(制御)하고 국가를 보위(保衞)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18책 16권 46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47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사법-치안(治安) / 신분-신분변동(身分變動)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을 말한다. "나라의 기강(紀綱)이 해이(解弛)해져서 간사한 백성들이 법금(法禁)을 범하니 묘당(廟堂)의 계획이 소란해져서 어떻게 할지를 알지 못한다. 사변(事變)에 임하여서도 오히려 이러했으니 혹시 큰 사변(事變)과 큰 환난(患難)을 만난다면 임기(臨機)하여 변고(變故)를 제어(制御)하고 국가를 보위(保衞)할 수 있겠는가?"
10월 15일 임인
임상원(任相元)을 도승지(都承旨)로, 안세징(安世徵)을 정언(正言)으로, 서문유(徐文𥙿)를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함경 북도(咸鏡北道) 유학(幼學) 김정창(金鼎昌) 등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응교(應敎) 기준(奇遵)·문절공(文節公) 유희춘(柳希春)·문숙공(文肅公) 정엽(鄭曄)·충정공(忠貞公) 정홍익(鄭弘翼)·대제학(大提學) 조석윤(趙錫胤)·참판(參判) 유계(兪棨) 등을 위하여 서원(書院)을 종성(鍾城)의 부계(涪溪)에 세웠으니 사액(賜額)을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뒤에 해조(該曹)의 복계(覆啓)로 그에 의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10월 17일 갑진
신완(申琓)을 승지(承旨)로, 이홍적(李弘迪)을 사간(司諫)으로, 심유(沈攸)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최석정(崔錫鼎)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삼았다.
선혜청(宣惠廳)에서 ‘신유년159) 에 감(減)한 각전(各殿)에 올리던 5도(道)의 삭선(朔膳)과 경신년160) 에 감(減)한 대전(大殿)과 중전(中殿)에 올리던 경기(京畿)의 월령 물종(月令物種)을 그전대로 회복할 것’으로 계품(啓稟)하니, 임금이 이들을 모두 명년 가을까지를 기한으로 우선 감(減)해 주되 다만 산사슴[生鹿]의 진상(進上)만은 회복하게 하였다.
옥천(沃川) 땅의 한 소나무가 7월 무렵에는 바람에 뿌리가 뽑혔던 것이 9월에 도로 일어섰다.
달이 동정성(東井星)을 범하였다.
10월 20일 정미
조종저(趙宗著)를 헌납(獻納)으로, 신익상(申翼相)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삼았다.
정언(正言) 안세징(安世徵)과 김성적(金盛迪)이 아뢰기를,
"강계 부사(江界府使) 이효원(李孝源)은 정령(政令)이 해이(解弛)하여 장사들이 용사(用事)함으로써 해독이 양민(良民)에게 미쳐서 온 경내(境內)가 시끄러우니, 이를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변경(邊境)의 일을 잘못한 것으로 그를 파직(罷職)하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효원은 치적(治績)이 자못 훌륭하였으므로 논자(論者)들이 그의 억울함을 일컬었다.
10월 21일 무신
사헌부(司憲府)에서 아뢰기를,
"해조(該曹)의 결정에 의하여 내수사(內需司)에 투속(投屬)된 노비(奴婢)들을 본주(本主) 방진해(方振海) 등에게 돌려줄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방진해는 온양(溫陽) 사람인데, 노비를 내사에 빼앗겼으므로 공홍도(公洪道)에 나아가 소송하자, 본도(本道)에서 판결해 줄 것을 계문(啓聞)하였다. 해조(該曹)에서 이를 복주(覆奏)하여 윤허를 받았는데 내사에서는 ‘추쇄(推刷)161) 한 뒤에는 청리(聽理)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수교(受敎)를 끌어다 방계(防啓)하여 윤허하지 말게 하였다. 임금이 내주지 말라고 명하니, 이에 방진해가 법부(法府)에 원통한 사정을 호소한 까닭으로 이렇게 아뢰었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의 조본(照本)에,
"이조 참의(吏曹參議) 윤경교(尹敬敎)가 문비(問備)에 공답(供答)하기를, ‘이선부(李善溥)는 진실로 경솔(輕率)하였던 과실(過失)이 있었지마는, 처음부터 공의(公議)에 죄를 얻은 것은 아니니 결코 이로 인하여 그를 폐하여 버릴 이유는 없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대신의 배척이 뜻밖에 나왔으니 비록 매우 황공(惶恐)하오나 진실로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이선부가 당초(當初)에 한 짓은 실로 보통 잘못에 비길 것이 아니다. 참의(參議)가 혼자 정사(政事)하여 태연하게 그를 청직(淸職)에 통하게 한 것은 지극히 근거가 없었는데도 그가 스스로 반성(反省)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이기기를 힘쓴 모양은 진실로 매우 방자하다. 윤경교를 파직(罷職)하라."
하였다.
10월 22일 기유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증(李增)이 치계(馳啓)하여 두 칙사(勅使)가 나온다는 것을 보고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조사하는 일이 긴급(緊急)하니 북로(北路)의 파발(擺撥)은 역마(驛馬)를 갈아가면서 전하게 하고, 윤계(尹堦)를 원접사(遠接使)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함경 감사(咸鏡監司) 이수언(李秀彦)이 범월인(犯越人)을 잡은 일로 장계(狀啓)하여 아뢰었다.
비변사(備邊司)에서 함경 감사(咸鏡監司) 이수언(李秀彦)·남병사(南兵使) 윤시달(尹時達)을 개차(改差)하여 그들로 하여금 칙사(勅使)가 아직 서울에 들어오기 전에 와서 기다리게 하고, 삼수군(三水郡)의 전(前) 군수 이관국(李觀國)·갑산부(甲山府)의 전 부사 박상형(朴相馨)·혜산진(惠山鎭)의 전 첨사(僉使) 안후길(安厚吉) 등은 급히 밤낮을 가리지 말고 서울로 올라오게 하라고 청하였다. 이는 대개 범월인의 공초(供招)에 나왔기 때문이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청(啓請)을 거듭 아뢰니, 이하진(李夏鎭)의 일만을 윤허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청(啓請)을 거듭 아뢰니, 다만 이효원(李孝源)의 일만 윤허하였다. 뒤에 어사(御史)의 칭찬하는 계문(啓聞)이 있었기 때문에 잉임(仍任)되었다.
10월 23일 경술
눈이 오고 번개가 쳤다.
박신규(朴信圭)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이지익(李之翼)을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유상운(柳尙運)을 승진시켜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삼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청(啓請)을 거듭 아뢰니, 방진해(方振海)의 일만을 윤허하였다. 방진해가 내사(內司)와 더불어 서로 송사(訟事)하니, 임금이 그 사리(事理)를 살펴서 마침내 대간(臺諫)의 계청(啓請)을 윤허하였으니, 이는 성덕(聖德)에 빛남이 있다고 이를 만하다.
연기(燕岐)의 유학(幼學) 박선일(朴善一) 등이 상소하여 송준길(宋浚吉)을 봉암 서원(鳳岩書院)에 향사(享祀)하기를 청하니, 해조(該曹)에서 복계(覆啓)하여 그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10월 25일 임자
좌의정(左議政) 남구만(南九萬)이 서른 한 차례나 정사(呈辭)하니, 임금이 마지못하여 이를 들어주었다.
임홍망(任弘望)을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윤지선(尹趾善)을 광주 유수(廣州留守)로, 이여(李畬)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밤에 번개가 치고 달이 태미 동원(太微東垣)에 들어갔다.
10월 26일 계축
사옹원(司饔院)에서는 무우[蘿葍] 뿌리에 벌레가 나왔기 때문에 잠정적으로 진공(進供)을 정지하기를 청하였다. 근일(近日)에 송충이 성하게 번졌고 또 무우의 벌레까지 있어서 잘못 먹은 자는 반드시 죽으니 이로 또한 변이(變異)라 이를 만하다.
밤에 유성(流星)이 장성(張星) 위에 나왔다.
10월 27일 갑인
비망기(備忘記)에 이르기를,
"전부터 비록 혹시 국경을 넘어가서 산삼(山蔘)을 캐었어도 몇 사람이 몰래 넘어간 것에 불과한데 진보(鎭堡)의 변장(邊將)들은 배를 나누어서 대어주고 토졸(土卒)들은 전부 국경을 넘어가서 설치고 다니며 난(亂)을 일으킨 것이 어찌 오늘날처럼 난잡(亂雜)한 적이 있었겠는가? 그런데도 도신(道臣)162) 은 이를 살피지 못하여 끝내 국가에까지 욕(辱)을 끼치게 하였다. 이는 본직(本職)만을 갈 것이 아니니 함경도(咸鏡道)의 전 감사(監司) 이수언(李秀彦)을 나문(拿問)하여 죄를 정하라."
하였다.
장령(掌令) 유명일(兪命一)이 아뢰기를,
"함경 감사(咸鏡監司) 이지익(李之翼)의 음흉하고 바르지 못한 태도는 이미 갑인년163) 의 피사(避辭) 가운데에 드러나 있습니다. 그가 여러 소인(小人)들에게 아부(阿附)하여 대로(大老)164) 를 터무니 없는 사실로 죄를 얽어맨 것은 공의(公議)에 용납되지 못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이제 그에게 번병(藩屛)의 중임(重任)을 제수(除授)하였음은 인재가 모자라는 소치였는데 이지익은 그것을 부끄러워할 줄을 모르고 잘못을 뉘우쳐 고치려는 뜻이 없으면서 사소(辭疏)를 올리기를 ‘세상에 아부함을 배우지 못하였기에 그들의 고체(固滯)된 것을 돌리지 못한다’는 등 방자하게 말하여 마치 자기가 옳은 것처럼 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가장 미워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를 파직(罷職)하고 서용(敍用)하지 말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조사하는 일이 바야흐로 펼쳐지고 있기에 개차(改差)를 명하였으니 속히 나가 대신하도록 내일 안으로 사조(辭朝)하라."
하였다.
형조 판서(刑曹判書) 박신규(朴信圭)가 김만길(金萬吉)의 상소 내용 때문에 소를 올려 인혐(引嫌)하니, 답하기를,
"지난날 유신(儒臣)의 상소는 말의 뜻이 심각(深刻)하였으니 이는 결코 화평(和平)의 길은 아니다. 하물며 사구(司寇)165) 의 소임은 본래 유연(柔軟)하고 나약(懦弱)한 자로서는 감당할 수 없으니, 인정을 벗어난 사납고 혹독한 배척을 어찌 마음속에 두겠느냐? 경은 안심하고 사퇴하지 말라."
하였다.
10월 28일 을묘
이돈(李墩)을 교리(校理)로, 이단석(李端錫)을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삼았다.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과 우의정(右議政) 정재숭(鄭載嵩)이 차자를 올려 이수언(李秀彦)을 나문(拿問)하는 것이 지나침을 아뢰면서, ‘칙사(勅使)의 행차(行次)가 도착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과중(過重)한 일을 하는 것은 부당(不當)하다’고 하니, 임금이 전의 명령을 도로 정지하기를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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