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18권, 숙종 13년 1687년 7월

싸라리리 2025. 11. 17.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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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정축

경상도(慶尙道)·공홍도(公洪道) 두 도에 암행 어사(暗行御史)를 보내어 수령(守令)들을 염탐해 오도록 하였다.

 

7월 3일 기묘

경상도(慶尙道)에 홍수가 나서, 예천군(醴泉郡)에서는 민가(民家)가 90여 채나 떠내려가고, 모든 고을에서 사람들이 압사(壓死)하거나 익사(溺死)하거나 벼락에 죽은 사람이 15명이나 되었다.

 

7월 4일 경진

유성(流星)이 여성(女星) 밑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한은(韓垽)을 집의(執義)로, 한범제(韓范齊)를 헌납(獻納)으로, 김구(金構)를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한성부(漢城府)에서 서울 근처의 익사(溺死)한 사람들에게 휼전(恤典)을 내리기를 청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7월 5일 신사

달이 태미 동원(太微東垣) 둘째 별을 침범하였다.

 

7월 6일 임오

지아비를 시해(弑害)한 죄인 계승(桂承)과 숙모(叔母)를 음증(淫烝)209)  한 죄인 김영갑(金榮甲)을 목베었다.

 

7월 7일 계미

박원도(朴元度)를 승지(承旨)로, 이정익(李禎翊)을 지평(持平)으로, 이규령(李奎齡)을 대사간(大司諫)으로, 권시경(權是經)을 강양도 관찰사(江襄道觀察使)로, 이세백(李世白)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삼았다.

 

7월 10일 병술

유성(流星)이 나타났다.

 

7월 11일 정해

박태만(朴泰萬)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7월 12일 무자

달이 남두(南斗)로 들어갔다.

 

사덕(士德)을 정문(旌門)하도록 명했다. 사덕은 강화(江華) 백성의 딸인데, 나이 14세 때에 그의 아버지와 함께 갯가에 나갔다가 그의 아버지가 발이 미끄러져 물에 빠지자, 물에 뛰어들어 아버지를 구출하려다가 하지 못하고 같이 익사(溺死)했었다. 일이 알려지자 임금이 아름답게 여겨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7월 13일 기축

강현(姜鋧)을 사간(司諫)으로, 이세화(李世華)를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김우항(金宇杭)을 정언(正言)으로, 한태동(韓泰東)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7월 14일 경인

황해도(黃海道) 평산부(平山府)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들이 부러지고 지붕이 날아갔다.

 

사비(私婢) 명춘(命春)을 정려(旌閭)하도록 명했다. 명춘은 대구(大丘) 사람인데 그의 지아비가 이웃 사람에게 맞아 죽게 되자, 자신의 손으로 그 이웃 사람을 쳐 죽이고 주(州)의 관가(官家)에 고하니, 주의 관가에서 의롭게 여겨 불문에 붙였었다. 나이 60세가 넘도록 굳게 절의(節義)를 지키므로 도신(道臣)이 치문(馳聞)하니,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임홍망(任弘望)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7월 15일 신묘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행행(幸行)하여 칙사(勅使)를 맞이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역관(譯官) 한유상(韓有相)을 가자(加資)하라는 명을 거두도록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고, 역관 한석조(韓錫祚)·정충원(鄭忠源) 등을 잡아다가 죄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당초에 한유상이 동지사(冬至使)가 갈 적에 따라가 약간의 공로가 있었으므로, 임금이 말[馬]을 내려 주도록 명했었고, 마침 칙사(勅使)가 오게 되어 한유상의 아들 한석조와 정충원이 칙사를 맞는 역관으로 차출(差出)되었었다. 금석산(金石山)에 갔다가 돌아와서 이단하(李端夏)에게 말하기를,
"통관(通官)이 작년의 방물 역관(方物譯官)의 가자(加資) 여부를 묻기에, 이미 가자하는 특전(特典)을 받았다고 답변했습니다."
하므로, 이단하가 이를 가지고 임금에게 아뢰어, 그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한석조 등이 또 이단하에게 말하기를,
"가자의 여부를 그들이 이미 물었으므로 자세하게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므로, 이단하가 허락했었다. 승정원에서 논쟁(論爭)하게 되자, 임금이, 그가 저들을 핑계하며 속셈은 상전(賞典)을 요구하는 것임을 알아차리고서 즉각 그 명을 정지하게 된 것이다. 이어 하교(下敎)하기를,
"무릇 국가의 일을 계품(啓稟)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임의로 지휘(指揮)함은 진실로 해괴한 일이다. 역관을 가자하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 일이라고 급급하게 언급한 것인가? 이런 길이 한 번 열리면 뒷날의 폐단이 한없게 될 것이다. 해당 역관을 잡아 국문(鞫問)하라."
하였다. 명이 내리자, 이단하가 불안하여 차자를 올려서 인책하고, 승지들이 또한 임금의 하교 내용에 대신을 몰아붙이게 된 말을 고치도록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최석정(崔錫鼎)·이민철(李敏哲)에게 선기옥형(璿璣玉衡)을 수리하도록 명하였다.

 

7월 16일 임진

권상하(權尙夏)를 지평(持平)으로, 강현(姜鋧)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서문유(徐文𥙿)를 수찬(修撰)으로, 심평(沈枰)을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7월 17일 계사

임금이 남별궁(南別宮)에 행행(幸行)하여 음식을 차리고 무악(舞樂)을 갖추어, 칙사(勅使)를 대접하였다.

 

이단하(李端夏)가 처신이 불안스러워 거가(車駕)를 따르지 않았었는데,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관소(館所)로 나오도록 유시(諭示)하니, 이단하가 흰옷 차림으로 나오자, 임금이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함께 들어오도록 하였다.

 

6월에 강계부(江界府)에 눈이 내렸다고 도신(道臣)이 계문(啓聞)하였다.

 

7월 18일 갑오

민진주(閔鎭周)·목임일(睦林一)·박태만(朴泰萬)·이현기(李玄紀)를 여러 도(道)에 나누어 보내 암행(暗行)하며 염탐하도록 하였다.

 

7월 19일 을미

옥당(玉堂)의 관원을 소대(召對)하였다.

 

7월 20일 병신

옥당의 관원을 소대하였다.

 

7월 23일 기해

호사(胡使)가 돌아가므로,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행행(幸行)하여 전송했다. 이날 비가 쏟아붓듯이 내려 기치(旗幟)가 줄을 이루지 못했었는데, 임금이 담당 기랑(騎郞)을 잡아다가 죄를 다스리도록 명하였다.

 

유득일(兪得一)을 정언(正言)으로, 여성제(呂聖齊)를 좌참찬(左參贊)으로, 임홍망(任弘望)을 공홍도 관찰사(公洪道觀察使)로, 엄집(嚴緝)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7월 24일 경자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과 우의정(右議政) 조사석(趙師錫)이 여러 차례 정사(呈辭)하니, 임금이 체직(遞職)하도록 윤허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임금이 김수항에게 정승을 정하라고 명했을 적에, 임금이 바야흐로 조사석에게 뜻을 두고 있었는데, 김수항이 의망(擬望)하여 정하지 않았다. 임금이 세 차례를 더 정해 보도록 명하게 된 뒤에야 품지(稟旨)하여 정하게 되므로, 임금의 뜻도 유쾌하지 못했고 김수항도 역시 마음이 편치 못하게 되어, 병을 핑계로 해면(解免)하기를 바랐었다. 조사석이 정승을 제배(除拜)하게 될 적에 특별히 더 정해 보도록 명하기를 여러 차례나 하였으므로, 중외(中外)에서 의심하여 비방하기를, ‘조사석이 궁액(宮掖)에 연줄을 대어 남몰래 정승 자리를 도모한 것이다.’ 했었다. 이 때문에 조사석이 인피(引避)하고 들어앉아 계속해서 글을 올려 면직하기를 바랐었다."


【태백산사고본】 20책 18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106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임금이 김수항에게 정승을 정하라고 명했을 적에, 임금이 바야흐로 조사석에게 뜻을 두고 있었는데, 김수항이 의망(擬望)하여 정하지 않았다. 임금이 세 차례를 더 정해 보도록 명하게 된 뒤에야 품지(稟旨)하여 정하게 되므로, 임금의 뜻도 유쾌하지 못했고 김수항도 역시 마음이 편치 못하게 되어, 병을 핑계로 해면(解免)하기를 바랐었다. 조사석이 정승을 제배(除拜)하게 될 적에 특별히 더 정해 보도록 명하기를 여러 차례나 하였으므로, 중외(中外)에서 의심하여 비방하기를, ‘조사석이 궁액(宮掖)에 연줄을 대어 남몰래 정승 자리를 도모한 것이다.’ 했었다. 이 때문에 조사석이 인피(引避)하고 들어앉아 계속해서 글을 올려 면직하기를 바랐었다."

 

7월 25일 신축

유성(流星)이 누성(婁星) 밑에서 나와 동쪽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전일의 복상 단자(卜相單子)를 들여오도록 명하여, 남구만(南九萬)을 영의정(領議政)으로,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숙(李䎘)을 우의정(右議政)으로 제수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좌상(左相)이 바야흐로 인피하고 들어앉아 있기는 하지만, 좌상에게 묻지도 않는 것은 이전의 규례에 어그러지게 되어 일의 대체에 적당하지 않은 일이라고 말을 하니, 임금이 비로소 명초(命招)하도록 하였다. 이때 좌의정(左議政) 이단하(李端夏)가 바야흐로 대명(待命)하고 있으면서 두 차례를 불러도 오지 않았다.

 

김구(金構)를 부응교(副應敎)로 삼았다.

 

7월 26일 임인

좌의정(左議政) 이단하(李端夏)가 병을 이유로 정사(呈辭)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세 차례나 내렸다.

 

영남(嶺南) 사람 황준량(黃俊良)은 이황(李滉)의 문인(門人)이다. 일찍이 이황의 서원(書院)에 배향(配享)했었는데, 배척하는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 ‘기묘년210)  에 사류(士類)들이 화(禍)를 입게 된 뒤에 강유선(康惟善)은 항장(抗章)을 올려 조광조(趙光祖)를 신원(伸冤)하도록 청했지만, 황준량은 학정(學正)의 관직에 있으면서 당로(當路)에게 아첨하여 강유선을 배척하며 벌을 내리게 한 일이, 노수신(盧守愼)·심희수(沈喜壽)가 지은 문자(文字)에 있다.’ 하며, 출향(黜享)하자고 의논하였다. 두둔하는 사람은 말하기를 ‘황준량은 독실한 뜻으로 학문에 힘써 이황의 장허(奬許)를 크게 받았었다. 강유선을 배척하여 벌받게 한 것이 비록 두 사람의 글에 실려 있기는 하지만 전후의 일을 고증(考證)해 보건대 연원(年月)의 차이가 많다.’ 하고, 또한 이황이 황준량에게 치제(致祭)한 제문(祭文)을 인용하여 밝히었다. 옳으니 그르니 하는 의논이 오래 될수록 더욱 격렬해지자, 도신(道臣) 박태손(朴泰遜)이 이를 가지고 계문(啓聞)하며 출향의 여부를 정하도록 청하였다. 임금이 이 의논을 대신(大臣) 및 유신(儒臣)들에게 내리니, 모두 말하기를,
"강유선을 배척하여 벌받게 한 일이 두 신하들이 저술한 글에 분명히 실려 있으니, 선정(先正)의 사당에 도로 배향함은 합당하지 못합니다."
하므로, 임금이 재가(裁可)했었다. 영남의 유자(儒者) 김세추(金世錘) 등이 또한 소장(疏章)을 올려 신변(伸辨)했으나, 임금이 말하기를,
"조정에서 이미 정한 의논이므로 변동할 수 없다."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7월 27일 계묘

홍우원(洪宇遠)이 적소(謫所)에서 죽었다. 홍우원은 판서(判書) 홍가신(洪可臣)의 손자인데, 입조(立朝)할 때 발끈발끈하기 좋아하여 정직하다는 명성이 있었으나, 내면의 행동이 어긋나서 그의 인간성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취하지 않았었다. 성상(聖上)의 초년에 윤휴(尹鑴)·허목(許穆)과 함께 진출하여 간당(奸黨)의 영수(領袖)가 되어, 괴이하고 각박한 의논을 주장하지 않는 것이 없다가 말이 동조(東朝)211)  를 범하게 되었었다. 경신년212)   이후에 귀양가 이때에 이르러서 죽었는데, 나이는 83세이었다.

 

승지(承旨) 이언강(李彦綱)이 아뢰기를,
"영녕전(永寧殿) 각방의 왕비(王妃) 자리의 축문(祝文)에 모두 ‘조비(祖妣)’라고 쓰는데, 유독 정종(定宗)·문종(文宗)·덕종(德宗)·예종(睿宗)의 왕비의 자리에는 ‘조비’라 쓰지 않고 단지 휘호(徽號)만 썼으니, 마땅히 개정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남구만(南九萬)이 아뢰기를,
"종묘(宗廟) 및 영녕전 각방의 축문에 모두 ‘효증손 사왕 신(孝曾孫嗣王臣)’이라 쓰는데 유독 정종(定宗)·문종(文宗)·예종(睿宗) 세 분의 방에는 단지 ‘사왕 신’이라고만 하였으며, 덕종의 자리에는 ‘국왕 신(國王臣)’이라 쓰고, 인종(仁宗)의 자리에는 ‘효증질 사왕 신(孝曾姪嗣王臣)’이라고 썼습니다. 열성(列聖)들께서 이미 계통을 이으셨고 추숭(追崇)되었으니, 사당에 모셔 들인 이후에는 모두 ‘효증손 사왕 신’이라고 쓰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대신(大臣) 및 유신(儒臣)에게 묻도록 하자 모두들 말하기를,
"일의 대체가 중대하여 경솔하게 의논드리기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다시 조용하게 의논하도록 하였다.

 

7월 29일 을사

우창적(禹昌績)·성호징(成虎徵)을 승지(承旨)로, 남필성(南弼星)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7월 30일 병오

유성(流星)이 규성(奎星) 위에서 나와 동쪽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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