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18권, 숙종 13년 1687년 8월

싸라리리 2025. 11. 17.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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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정미

유성(流星)이 묘성(昴星) 위에서 나와 오거성(五車星) 아래로 들어갔다.

 

8월 2일 무신

윤계(尹堦)를 좌참찬(左參贊)으로, 여성제(呂聖齊)를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삼았다.

 

8월 4일 경술

임금이 대제학(大提學) 남용익(南龍翼)을 명소(命召)하고, 또한 승지(承旨)·옥당(玉堂)·한원(翰苑)·병조(兵曹)의 낭관(郞官)을 승정원(承政院)에 모이도록 명하여, 어필(御筆)로 글제를 써서 제술(製述)하여 올리게 하였다. 이어 남용익도 같이 지어 올리도록 하여 주필(朱筆)로 비점(批點)을 찍고서 특별히 말[馬]을 내리도록 하였다. 이어 남용익으로 하여금 여러 신하들이 제술할 것을 과차(科次)하도록 하여, 차등이 있게 상을 내렸다.

 

8월 6일 임자

유성(流星)이 오거성(五車星) 위에서 나왔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여성제(呂聖齊)가 일찍이 본직(本職)에 있으면서 거듭 대관(臺官)의 논박을 받은 것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하고 나오지 않자, 임금이 말하기를,
"심각하게 논란한 것 때문에 깊이 인혐(引嫌)할 필요는 없다."
하고 유시(諭示)하였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선(李選)이 상소하기를,
"지난날 헌장(憲長)으로 있을 적에 동료(同僚)들이 정관(政官)213)  을 참주(參奏)214)  하자는 의논을 내어 놓았었는데, 그들이 논집(論執)하는 바는 곧 유현(儒賢)을 존대하고 옳음과 그름을 구별하는 것이었습니다. 논한 말이 한때 규계(規戒)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고, 그 사이에 심각한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닌데, 여성제가 전후하여 전조(銓曹)의 판서로 있으면서 갑자기 사체(辭遞)하려고만 합니다. 비록 전배(前輩)들이 이미 지난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탄핵받아 체직되었다가 여러 차례 복직된 사람이 많이 있었으니, 그들의 처신하는 바가 대체로 어찌 극진하지 못한 데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지금 여성제는 전배들과 달리하려고 힘쓰니, 또한 어찌 너무 지나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의 진퇴(進退)가 어떠함을 논할 것 없이 신(臣)이 이미 심각하게 일을 논계(論啓)한 잘못이 있었으니, 어찌 감히 전관(銓官)의 자리에 그대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전관(銓官)이 주의(注擬)를 공론에 맞게 하지 못하면, 일의 경중에 따라 체직을 청하거나 파직을 청함이 옳지 못할 것이 없지마는, 일전의 대론(臺論)은 사면하지 않는 것을 들어 지목했었다. 대간(臺諫)의 비평이 있은 이래로 이처럼 우습기도 하고 괴이하기도 한 일은 들어보지 못했었다. 좌이(佐貳)215)  는 장관(長官)에게 있어 일의 대체가 구별이 있는 것인데, 자신의 앞서의 소견을 옳게 여겨 드러나게 침해와 모멸을 가했다. 몸이 재상(宰相)의 반열에 있으면서 서로 공경하는 풍습이 이처럼 캄캄하다면, 젊은 사람이 어른을 능멸하는 풍습 또한 괴이하게 여길 것 없겠다. 경(卿)의 말이 이러하니, 본직(本職)의 체직을 윤허한다."
하였다. 여성제가 이 때문에 더욱 불안하게 생각하며, 다시 소장(疏章)을 올려 해면(解免)을 청하였다.

 

8월 8일 갑인

유성(流星)이 묘성(昴星) 밑에서 나와 서쪽으로 들어갔다.

 

8월 10일 병진

전(前)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 허빈(許彬)이 상소하기를,
"장릉(長陵)의 용혈(龍穴)이 사수(砂水)로 허물어진 데가 많으니, 마땅히 지리(地理)를 잘 아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서 살펴보고 잘잘못을 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이어 하교(下敎)하기를,
"지금 허빈의 상소를 보건대, 방숙제(方淑齊)가 상소한 뜻과 똑같다. 능침(陵寢)은 일의 대체가 지극히 중대(重大)한 것이다. 널리 물어보고 의논해보아 잘 처리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니, 현직 대신과 육경(六卿)·판윤(判尹) 및 삼사(三司)의 장관(長官)과 도승지(都承旨)가 경외(京外)의 지사(地師) 중에 술업(術業)이 정밀하고 밝은 사람을 많이 거느리고 장릉에 나아가 봉심(奉審)한 다음에 품처(稟處)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후정(李后定)을 집의(執義)로, 김홍복(金洪福)을 정언(正言)으로, 박태보(朴泰輔)를 수찬(修撰)으로, 이선(李選)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삼았다.

 

8월 11일 정사

정언(正言) 김홍복(金洪福)이 상소하여 허빈(許彬)의 상소를 배척하기를,
"허빈의 무리들이 모두 윤사(胤嗣)216)  가 번성하지 않는 것을 성조(聖祖)의 능침(陵寢)이 편치 못한 이유로 돌렸기 때문에, 성상께서도 듣고 놀라시게 되고 조신(朝臣)들도 의아심을 가져 혹은 이 때문인가 여기는데, 신(臣)은 크게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장릉(長陵)은 자리를 잡아 봉분(封墳)한 지 4기(紀)217)  가 넘는데, 출진(出震)의 경사와 유황(流潢)의 상서가 전후에 잇달았었습니다. 만일에 허빈의 무리들 말대로라면 어찌 진실로 지도(地道)가 앞서서는 이롭다가 나중에는 이롭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까? 능침은 일이 중대하고 신도(神道)는 안정을 앞세워야 하는 것인데, 어찌 별안간에 길흉(吉凶)을 가지고 말을 하여, 중외(中外)가 의아하게 하고 일의 대체가 전도(顚倒)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능침은 일의 대체가 중대한 것인데, 널리 의논하여 잘 처리할 도리를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날을 보내는 것이 과연 일의 대체에 맞는 것이겠느냐? 이는 아무라도 감히 경솔하게 의논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8월 12일 무오

달무리가 졌는데 화성(火星)에도 둘렀다.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상(宰相)을 인견(引見)하였다.

 

금위영(禁衞營)에 따라 설치한 제조(提調)를 혁파하고 도로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겸하여 살펴보도록 하였다.

 

비국(備局)의 제조(提調) 1명과 당하(堂下) 문신(文臣) 2, 3명에게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과 《열성수교(列聖受敎)》를 거두어 모아 품재(稟裁)하여 간행(刊行)하도록 하였다.

 

지평(持平) 이정익(李禎翊)이 상소하기를,
"지난번에 일을 말하는 한 두명의 신하가 있었는데, 너무 심하게 꺾어 버리시고 은덕을 베푸는 낙점(落點)도 여러 차례나 아끼고 계십니다. 오직 전하(殿下)께서 좋지 않은 말도 받아 주시고 나쁜 병폐도 숨겨 주시어, 억울한 대중의 심정이 펴지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원성(原城) 각림사(覺林寺)의 위전(位田)은 이미 향교[儒宮]의 대대로 전해내려오던 것이므로 내탕(內帑)의 사저(私儲)로 옮길 수 없는 것인데, 전하께서 장보(章甫)들의 상소에 대하여 오직 고집하시고 윤허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도리어 적당하지 않은 분부를 내리시므로, 신은 그윽이 개탄스럽게 여겨집니다. 또한 전하께서 특별히 도로 돌려주도록 하시어 사도(斯道)를 옹호하시는 훌륭한 뜻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또 갑자년218)   이전의 여러 도(道)의 포흠(逋欠)을 특별히 감해주고, 호서(湖西)의 양전(量田)을 시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위전(位田)의 일은 들어주지 않고 다른 일들은 묘당(廟堂)에 계하(啓下)했는데 시행하지 않았다.

 

8월 16일 임술

임금이 친림(親林)하여 종신(宗臣)들에게 강(講) 시험을 보여, 여산 도정(礪山都正) 방(枋) 등 16인을 가자(加資)하도록 명하고, 그 나머지에게는 차등있게 말을 내렸다.

 

박태보(朴泰輔)를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심유(沈攸)를 부제학(副提學)으로, 윤지선(尹趾善)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송주석(宋疇錫)을 홍문관 박사(弘文館博士)로 삼았다.

 

8월 17일 계해

대사간(大司諫) 이규령(李奎齡)·사간(司諫) 심평(沈枰)·헌납(獻納) 심사홍(沈思泓)·정언(正言) 김홍복(金洪福) 등이, 동평균(東平君) 이항(李杭)의 혜민서제조(惠民署提調)를 도로 거두도록 청한 논계(論啓)를 정지하니, 물의(物議)가 떠들썩해지고, 대신(大臣) 남구만(南九萬)도 잘못임을 말하고서 드디어 인피(引避)하였다.
답하기를,
"혜민서는 다른 관사(官司)와는 다른 점이 있다. 한때 종신(宗臣)에게 특별히 제수(除授)한 것은 우연한 뜻으로 한 일이 아닌데, 석 달 동안 고집스럽게 논쟁하고 있어 이미 지루함을 견딜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인피하는 말을 보건대, ‘물의가 떠들썩해지며 극력 논쟁하지 않는 것을 가지고 말을 한다.’고 했다. 이와 같이 이기려고만 하는 의논은 비록 어떠한 괴이하고 망령된 사람에게서 나오게 된 것인지는 알지 못하겠지마는, 나의 뜻이 굳게 정해져 있어 마침내 변동하여 들어줄 수 없는데야 어찌하겠는가? 경(卿)들은 절대로 이런 경박한 의논에 놀라서 동요되어 일의 대체를 손상하지 말도록 하라."
하고, 이어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형상(刑賞)과 출척(黜陟)은 임금의 큰 권한인 것이다. 이에 있어서 한 번 흔들리게 된다면 장차 어디에 수족(手足)을 쓰게 되겠느냐? 나라의 일을 해나가는 도리는 정승을 두는 일보다 중요한 것이 없는 법인데, 지난 가을의 일을 보건대, 과연 신중하게 선택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올여름에 정승을 정할 때 여러 차례 더 선택해보라는 명을 내렸던 것이고, 당초에 더 선택했던 사람들이 삼사(三事)219)  에 합당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었다. 대개 옛사람들의 차례차례 선택하던 제도를 본받으려 했던 것인데, 일찍이 한 달도 되지 못해서 시끄러운 단서가 크게 일어나고 지절(枝節)이 층층으로 생겨나 대신이 그 자리에 안정되지 못하도록 한 다음에야 그만두었었다. 그 연유한 바를 따져보면, 임금의 권세가 존엄(尊嚴)하지 못하므로 국가를 경멸한 소치가 아닐 수 없기에 내가 진실로 통탄스럽게 여겼었다. 지난번에 동평군(東平君)에게 혜민서 제조(惠民署提調)를 특별히 제수한 것도 단지 친족(親族)을 친애하는 뜻에서 한 일인데, 일종의 괴이하고 망령된 무리들이 석 달 만에야 비로소 정지하게 된 대론(臺論)을 가지고 너무 성급하게 수습하는 것이라 하여 대신(臺臣)들을 격동(激動)시켜 이기려고만 꾀하고 있으니, 그들의 마음이 있는 데를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대개 임금의 뜻에 물의가 김수항(金壽恒)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와 같이 적당하지 않은 분부를 내리게 된 것이다. 조사석(趙師錫)의 일은 동평군(東平君) 항(杭)의 일과 상관이 없는 것인데도 연관지어서 아울러 언급했으니 어찌 물정(物情)이 더욱 의아스럽게 여길 일이 아니겠는가?

 

승지(承旨) 성호징(成虎徵)·윤세기(尹世紀)가 교주(繳奏)하기를,
"이번에 성상께서 내리신 분부는 격분하신 데에서 나온 것이기에 말씀 내용에 신하된 사람으로서는 차마 듣기 어려운 바가 많이 있었고, 지난 가을 무렵의 일을 제기한 데에 이르러서는 적당하지 않다는 뜻을 드러내어 보이신 것이어서, 진실로 대신을 우대하는 도리가 아니게 됩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신하된 사람도 군상(君上)의 잘못을 말할 수 있는데, 하물며 임금이 대신들에게 대해서 이미 그의 거조가 적당하지 않은 것임을 알고도 끝내 감히 그 사이의 일을 옳다 그르다 하지 못하겠는가? 이런 흐름의 폐단은 필경에는 감히 그들의 그름을 바로잡을 수 없게 될 것인데, 그대들은 이에 모호하고 구차한 태도로만 군부(君父)에게 권면하고 있느냐?"
하였다. 성호징 등이 재차 아뢰면서 매우 강력하게 도로 거두기를 청하고, 전계(傳啓)하게 될 때에 윤세기가 또한 아뢰기를,
"대신이 진실로 큰 죄과가 있었다면 귀양보내도 되고 내쳐도 되고 삭직(削職)하거나 파직(罷職)하더라도 또한 되거니와, 본래 그런 것이 아니라면 설사 한때의 실수가 있었다 하더라도 경솔하게 싫어하거나 박대를 가함은 합당치 않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처럼 격분하신 거조가 있으시어 잇달아 준엄한 분부를 내리셔서, 사기(辭氣)가 너무 급작스러우므로 듣는 사람들이 모두 당혹하게 되니, 근심스럽고 개탄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밤을 새우며 여러 차례 논쟁하는 뜻을 중사(中使)에게 말해서 덧붙여 진달하게 하니, 임금이 더욱 진노(震怒)하여 말하기를,
"새벽까지 번거롭게 떠들어대어 방자한 짓을 기탄없이 한다."
하여 책망하고, 또 말하기를,
"준례에 맞추어 전계(傳啓)하는 이외에, 문자(文字)로는 생각하고 있는 바를 다하지 못했다는 핑계로 쓸데없이 다른 말을 진달함은 뜻이 이기기에만 힘쓰는 데에 있는 것이다."
하고, 특별히 윤세기를 파직하였다. 이튿날 승지(承旨) 우창적(禹昌績) 등이 또한 비망기(備忘記) 중에 적당하지 않은 어구(語句)와 윤세기를 파직하도록 한 명을 도로 거두도록 청하였는데, 임금이 준엄한 비답을 내려 들어주지 않았고, 이어 하교(下敎)하기를,
"내가 마땅히 대면하여 타이르겠으니, 여러 승지(承旨)들은 모두 입대(入對)하라."
하였다. 이에 승지들과 옥당(玉堂)의 여러 신하가 서로 이어 논쟁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여름 무렵에 정승을 차례차례 선택하게 되었을 때 대신들이 구차(久次)220)  라고 핑계했었는데, 방목(榜目)을 고찰하여 선후(先後)를 비교해보건대, 그렇지 않은 자가 있었다. 이러고서도 군상(君上)에게 신임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여러 신하들의 진달하는 말이 이러하니, 비망기 중에 두어 구절의 말을 산개(刪改)하라."
하였다. 김수항(金壽恒)·이단하(李端夏)가 이 때문에 조정에 있기가 불안하게 되었고, 남구만(南九萬)이 또한 차자를 올려 적당하지 못한 분부를 도로 거두도록 청했으나, 임금이 그래도 들어주지 않았다. 대관(臺官)들이 또한 윤세기를 파직하도록 한 명을 도로 거두도록 청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8월 18일 갑자

좌의정(左議政) 이단하(李端夏)가 해면(解免)하였다.

 

서문유(徐文𥙿)를 헌납(獻納)으로, 김우항(金宇杭)을 정언(正言)으로, 신양(申懹)을 승지(承旨)로, 강현(姜鋧)을 응교(應敎)로, 한태동(韓泰東)을 사간(司諫)으로, 이제민(李濟民)을 지평(持平)으로, 송규렴(宋奎濂)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김수항(金壽恒)과 이단하(李端夏)가 다같이 거취가 불안스럽게 되므로 도성(都城) 밖으로 나갔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이세백(李世白)을 추천하여 광주 유수(廣州留守)로 삼았다.

 

8월 22일 무진

경상도(慶尙道) 단성(丹城)·창원(昌原) 등의 고을에 지진하였다.

 

8월 23일 기사

이익(李翊)을 대사헌(大司憲)으로, 김구(金構)를 사간(司諫)으로, 이익상(李翊相)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박지(朴贄)·유명일(兪命一)을 승지(承旨)로, 이현기(李玄紀)를 수찬(修撰)으로, 한범제(韓范齊)를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이때 능(陵)에 행행(幸行)할 때 어편(御鞭)의 품질이 나빴기 때문에 특별히 공조(工曹)의 당상관(堂上官)을 파직하였는데 참의(參議) 김석연(金錫衍)도 파직되었었다. 사간 김구(金構)가 상소하기를,
"경재(卿宰)와 근척(近戚)인 신하에게는 성상께서 예모(禮貌)를 차려야 하는 바이므로, 한 가지 미미한 일로 인해 너무 무겁게 견별(譴罰)하심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경재와 근척이란 말은 진실로 가소롭다. 논자(論者)들이 말하기를, ‘옛적에 진(秦)나라 임금은 노거(路車)221)  와 승황(乘黃)222)  을 자기 장인에게 주었다.’고도 했었는데, 지금 미미한 어편(御鞭) 하나라 하여 일찍이 존속(尊屬)에게도 고려하지 않으려고 하니, 진실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8월 27일 계유

임금이 강릉(康陵)에 행행(幸行)하여 전알례(展謁禮)를 거행하고 돌아오다가, 전교(箭郊)에 이르러 훈련도감(訓鍊都監)·어영청(御營廳)·금위영(禁衞營)·총융청(總戎廳)의 네 영으로 하여금 진(陣)을 치도록 하여 교병(校兵)223)                  하였다. 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세 영의 군용(軍容)이 정련(精鍊)했음을 이유로, 훈련 대장(訓鍊大將)        신여철(申汝哲)·어영 대장(御營大將)        서문중(徐文重)·금위 대장(禁衞大將)        이사명(李師命)에게 각각 내구마(內廐馬) 1필(匹)씩을 상으로 내리고, 진형(陣形)을 잘못 편 것을 이유로 훈련 중군(訓鍊中軍)        이빈(李穦)과 총융 중군(總戎中軍)        장시규(張是奎)를 잡아내어 모두 그들의 죄를 다스렸으며, 날이 저물어서야 비로소 환궁(還宮)하였다.

 

8월 28일 갑술

김만중(金萬重)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이세화(李世華)가 폐사(陛辭)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했다. 이세화가 아뢰기를,
"경상도는 온도의 절반이 왜관(倭館)에서 쓰는 것을 책임하여 수응(酬應)해야 하는데, 요사이는 또한 왜인(倭人)을 접대하는 일을 해가야 하니, 이는 진실로 약조(約條) 이외의 일입니다. 한 번이라도 혹시 약조를 무너뜨리게 된다면 뒷날의 폐단이 더욱 커지게 될 것인데, 이러한 일을 동래부(東萊府)에서 직접 상문(上聞)하고 있습니다. 이 뒤로는 도신(道臣)과 함께 상의해서 치계(馳啓)하게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아뢰어서 처리하도록 하였다.

 

8월 29일 을해

영의정(領議政) 남구만(南九萬)이 육조(六曹) 및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와 감여(堪輿)224)  를 잘 아는 사람 13명과 함께 장릉(長陵)에 가서 형국(形局)을 봉심(奉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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