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정미
유성(流星)이 위성(危星) 밑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이제민(李濟民)·정시한(丁時翰)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6월 2일 무신
심유(沈攸)를 대사간(大司諫)으로, 강현(姜鋧)을 집의(執義)로, 김구(金構)를 사간(司諫)으로, 이수언(李秀彦)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이선(李選)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서문유(徐文𥙿)를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이태룡(李台龍)·심평(沈枰)을 장령(掌令)으로, 김덕기(金德基)·이삼석(李三碩)을 정언(正言)으로, 김만길(金萬吉)을 응교(應敎)로, 황흠(黃欽)을 교리(校理)로, 원진택(元振澤)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혜민서 제조(惠民署提調)의 천망(薦望)은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을 첫머리로 의망(擬望)했었는데, 특지(特旨)에 따라 동평군(東平君)185) 이항(李杭)을 제수(除授)하였다. 이비(吏批)186) 가 아뢰기를,
"신들의 견문이 넓지 못하여 비록 조종조(祖宗朝)의 고사(故事)가 어떠한지를 잘 알지 못합니다마는, 이목(耳目)으로 보거나 기억하고 있는 바로는, 각사(各司)의 제조(提調) 중에 사옹원(司饔院)과 종부시(宗簿寺) 이외에는 일찍이 종반(宗班)으로 제수한 예가 없었습니다. 이번의 중비(中批)는 관제(官制)에 어긋남이 있어 신들이 해조(該曹)에 대죄(待罪)하고 있으면서 감히 전례대로 받들어 거행하지 못하겠기에 황송하여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사옹원은 이미 법전(法典)에 정해진 이외에 특별히 제수하는 것이다. 이번의 제수도 또한 옳지 못할 것이 없으니, 하비(下批)한 것이 합당하다."
하였다.
충위(忠衞)에 함부로 소속한 사람 김신종(金信宗) 등 13명이 흰 옷을 입고 대궐 문 밖에서 큰 소리로 울부짖었는데, 병조(兵曹)에서 계달(啓達)한 바에 의하여 잡아 가두고 무거운 죄로 다스렸다.
6월 3일 기유
옥당(玉堂)의 관원들을 소대(召對)했다. 검토관(檢討官) 김성적(金盛迪)이 아뢰기를,
"전일에 연신(筵臣)이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의 장수(葬需)187) 를 낭비한 일을 가지고 진달(陳達)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흉년인 때를 당하여 쇄례(殺禮)188) 해야 하는 뜻을 갖추 진달한 것은 그가 말을 한 까닭이 진실로 옛적의 예법을 따르려 한 것인데, 성상께서 음성과 안색이 자못 엄하셨다고 하니, 성덕(聖德)에 해가 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예장(禮葬)의 장수(葬需)를 전례에 따라 했을 뿐인데 낭비라고 말을 했기 때문에 특별히 그렇지 않음을 밝혔을 뿐이고 음성과 안색을 대단하게 한 일은 별로 없었다."
하였다. 참찬관(參贊官) 조성보(趙聖輔)가 아뢰기를,
"신이 양주(楊州)에서 대죄(待罪)하고 있을 적에 마침 청성 부원군(淸城府院君)의 이장(移葬) 때를 만났었는데, 중사(中使)가 보살피며 재물을 각 고을에 나누어 배정하면서 제수의 적(炙)을 1백 꽂이로 한정하기에 신(臣)이 이상하게 여겨 중사(中使)에게 물었더니, ‘원래 분부한 일은 없고, 중간에서 하배(下輩)들이 한 바이다.’ 하므로, 그때에 절반으로 감하여 사용했었습니다. 이번 광성 부원군의 장사 때의 제수(祭需)가 너무 풍성했다는 것도 조가(朝家)에서 일찍이 정해 놓은 규정이 없기 때문이니, 이 뒤로는 규정을 정해 놓음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제수의 적(炙)이 1백 꽂이라는 말은 필시 중간 하배들의 소행일 것이니, 이 뒤로는 간략하게 차리라고 분부하겠다."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조사석(趙師錫)이 첫 번째로정사(呈辭)189) 를 하니, 특별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심중(心中)을 다 털어놓는 말을 여러 차례 전유(傳諭)하는 비답(批答)에서 했었기에, 나의 성심(誠心)을 헤아리고서 며칠 안으로 조정에 나오리라 여겼었다. 그런데 이제 한가로이 있게 해 주기를 바라는 소장(疏章)을 보고서 처음에는 놀랐다가 이내 부끄러워져 진실로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 이처럼 간난(艱難)한 일이 많은 때와 민생들이 곤궁한 날을 당해서는 대소(大小)의 신료(臣僚)들이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쳐 함께 왕실(王室)의 일을 해가더라도 오히려 실패를 면하지 못하게 될까 두려운 것이다. 하물며 대신은 임금의 고굉(股肱)이고 국가의 주석(柱石)인 것이니 소자(小子)의 의지하며 성공해 주기를 바라는 것과 조야(朝野)의 기대하는 희망이 어떠하겠는가? 어찌하여 전복되고 위태함을 붙잡아가며 국궁 진췌(鞠躬盡瘁)190) 하는 의리는 생각하지 않고서, 출사(出仕)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만 하찮은 협의 때문에 급급하게 나를 버리고 물러가기를 바라기에만 겨를이 없는가? 이것이 어찌 일체가 되어 서로가 필요하게 여기는 도리이겠는가? 너무도 평소에 경(卿)에게 바라던 바가 아닌 일이다. 경과 같은 큰 도량으로 이에 있어 생각해본다면 어찌 나의 상세한 말을 기다릴 것이 있겠는가? 이에 근시(近侍)를 보내어 나의 지극한 뜻을 거듭 이르는 것이니, 경은 마음을 안정하여 사직하지 말고 시급하게 소장(疏章) 올리는 것도 그만두고서 빨리 나와 도(道)를 논하여 나의 목마른 듯한 소망에 부응(副應)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도승지(都承旨)에게 명하여 전유(傳諭)하고 그와 함께 오도록 하였다. 하룻동안에도 여러 차례를 돈유(敦諭)하여 재촉했지만, 조사석이 정세와 병 증세를 들어 사양하고 마침내 명에 응하지 않았다.
호남(湖南)의 후영장(後營將) 이하정(李夏禎)과 제원 찰방(濟源察訪) 이우진(李宇晋)이 산놀이[遊山] 모임에서 술을 마시고 서로 욕설을 퍼부는 일을 들어 도신(道臣)이 모두 파출(罷黜)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영장(營將)을 두게 된 당초에 따라 사목(事目)을 만들어 조금이나마 할 일과 권한을 맡겼으므로 결코 일개 우관(郵官)191) 이 능멸하여 짓밟을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이러한데도 그대로 놓아 둔다면 장차는 영장이 도내(道內)에서 호령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우진을 잡아다가 추문(推問)하여 정죄(定罪)하라."
하였다.
6월 4일 경술
전교(傳敎)하기를,
"이번에 동평군(東平君)이 연경(燕京)에 갈 때의 의자(衣資)192) 및 반전(盤纏)193) 과 일행에 대한 모든 일을 한결같이 청평위(靑平尉)194) 의 예대로 거행할 것을 분부한다."
하였다.
사간(司諫) 김구(金構)가 아뢰기를,
"전날의 정사(政事) 때에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을 혜민서 제조(惠民署提調)로 특별히 제수하신 명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합당하지 못하게 여겨집니다. 중비(中批)로 관원을 제수함은 본래 일정한 법이 아니고 종반(宗班)과 조신(朝紳)은 임용(任用)하는 길이 다르니, 새 규례(規例)를 만들어 옛법이 가벼워지게 함은 합당하지 못합니다. 또한 이 혜민서는 이전부터 제수할 적에 대체로 문관(文官) 재상(宰相)을 임용하였고, 종반이 겸임하는 이런 사례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이런 길이 한번 열리면 후일의 폐단을 막기 어려울 것이니, 명을 도로 거두시기 바랍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동평군 항(杭)은 왕실(王室)의 지친(至親)으로서 내폐(內嬖)195) 들과 결탁하여 세상에서 미워하며 보게 된 지 오래 되었는데, 이에 이르러서는 나라 사람들의 말이 갈수록 더욱 떠들썩하게 되었다.
6월 5일 신해
강세귀(姜世龜)를 승지(承旨)로, 윤지완(尹趾完)을 우참찬(右參贊)으로, 강현(姜鋧)을 부응교(副應敎)로, 심평(沈枰)을 집의(執義)로, 김호(金灝)를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아뢰니, 답하기를,
"끝부분에 말한 혜민서 제조(惠民署提調)에 관한 일은 다른 관사(官司)의 제조와는 다른 점이 있으니, 이번의 특별 제수는 옳지 못할 것이 없다. 하물며 두 의사(醫司)의 제조 또한 의빈(儀賓)이 겸임하는 예가 있었는데, 어제의 계사(啓辭) 중에 ‘의생(醫生)의 과시(課試)에는 대체로 문관 재상을 쓴다.’는 등의 말은 실지와 어그러짐을 면하지 못한 것이니, 시급히 정지하고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귀성군(龜城君) 준(浚)196) 을 신원(申冤)하고 복관(復官)하였다. 이에 앞서 이선(李選)이 상소하여 신원하고 복관해 주기를 청했고, 대신(大臣)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당초에 그 자신이 부도(不道)한 죄를 범한 일이 없습니다. 비록 권맹희(權孟禧) 등의 난언(亂言) 때문에 복주(伏誅)되고 조정의 신하들이 극력 안치(安置)하여 죽게 하기를 청했었지만, 근세(近世)의 회은군(懷恩君) 덕인(德仁)197) 의 일에 비하면 더욱 애매하게 된 것인데, 지금까지 신리(伸理)받지 못하여 진실로 원통하고 억울하게 되었습니다."
하였으며, 다른 대신들도 복관해야 한다고 했으므로, 드디어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이때 사헌부(司憲府)에서 서로(西路)의 변방원[倅]들을 이름있는 관원으로 임명하여 보내기를 청했었는데, 이조(吏曹)에서 이를 가지고 품계(稟啓)하니, 전교하기를,
"적임자를 얻는 데에는 문관(文官) 무관(武官)이 상관없는 법이니, 그전대로 무신(武臣) 중에 명망이 있는 사람을 각별히 가려서 임명하라."
하였다. 사헌부에서 또 아뢰어 쟁집(爭執)하니, 답하기를,
"사람이 청렴하고 탐오(貪汚)함은 문관 무관에 상관이 없는 것이다. 어찌 무변(武弁)의 이름을 띠었다고 해서 거의 모두 탐오하고 포학하여 자기만 살찌울 리가 있겠느냐?"
하였다.
병조(兵曹)에서, 서도(西道)에 실시할 무과(武科)를 감액(減額)하는 일로 초기(草記)한 것을 가지고 전교하기를,
"북도(北道)에 무과를 실시하였을 때 이미 참작하여 정한 것인데, 이제 또 다시 감함은 서북(西北)도 똑같이 대우하는 뜻에 어그러지게 되니, 일체로 백 명을 뽑도록 하라."
하였다.
6월 6일 임자
정언(正言) 이삼석(李三碩)이 상소하기를,
"삼가 살피건대, 성명(聖明)한 세상에 말을 하다가 견책(譴責)을 받은 사람이 전후하여 적지 않은데, 우선 요사이의 일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징명(李徵明)이 작년에 올린 상소 하나는 대략 궁금(宮禁)에 대해 언급했었는데, 위엄과 노여움이 그만 진동하여 전후의 주의(注擬) 때에 마침내 은혜를 베푸시는 낙점(落點)이 인색하시다가 외방(外方)의 고을에 제수하게 되므로 사람들이 모두 놀라며 슬퍼하였습니다. 한성우(韓聖佑)의 상소도 일반적인 것이었는데 즉시 기성(騎省)198) 에 제배(除拜)하므로, 당시의 물정(物情)이 성명께서 그의 말을 죄로 여기지 않으시는 것으로 여겼었습니다. 그러나 언책(言責)의 자리에는 수용(收用)되지 못한 지 이제 이미 반 년이나 되었고, 며칠 전의 헌납(獻納) 천망(薦望)에 이르러서는 지난날에 대성(臺省)에 드나들던 신하가 아닌 사람이 없었는데도 반드시 더 의망(擬望)하도록 명하셨습니다. 무릇 이 두어 신하들은 일찍이 사람들이 말하기 어렵게 여기는 일을 말한 것이 아닌데도 처리를 이렇게 하셨으니, 만일에 혹시라도 견거(牽裾)199) ·절함(折檻)200) 하는 것이 귀에 거슬려서 비린(批鱗)201) 하기를 옛적의 강직한 신하처럼 하는 사람이 있게 된다면, 성명께서 마땅히 어떻게 대처하시겠습니까? 민진주(閔鎭周)가 올린 상소로 인하여 대신에게 ‘골치 아프다.’는 비답을 하게 되셨으니, 어찌 돈유(敦諭)하여 나오도록 재촉할 말이 없을까 염려하여 이런 화평하지 않은 일을 하셨습니까? 성명께서 언자(言者)들을 싫어하고 박하게 대하시기 때문에 조정에서 대각(臺閣)을 대우함도 그러합니다. 허윤(許玧)이 받은 대관(臺官)의 탄핵은 진실로 심상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급급하게 다시 대관에 의망(擬望)했습니다. 조의징(趙儀徵)·한범제(韓范齊)같은 사람은 일개 임대년(任大年)을 논핵(論劾)했었는데, 오래도록 대각에 주의(注擬)하지 않다가 이내 두 언관을 하나의 부민(富民)과 바꾸게 되었었으니, 알 수 없지만 이것이 어찌 일의 대체가 될 수 있겠습니까? 지난날에 조상우(趙相愚)는 임규(任奎)를 탄핵하여 아뢰었다가 도리어 그가 상소하여 들춤을 받아 죄를 입었고, 이상익(李商翼)은 도사(都事)에게 감정을 가지고서 공술(供述)하는 말을 할 적에 머리를 감추고 못되게 헐뜯었습니다. 만일 이런 풍습이 조장된다면 뒷날의 폐단이 한이 없을 것이니, 이런 점에 있어서는 또한 마땅히 엄중하게 방지해가야 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 내용에 진달한 말들은 대의(大意)가 진실로 좋은 것이었다. 허윤의 일에 있어서는 대신이 그의 모함받은 실상을 진달했기에 이미 수용(收用)하라는 명을 내렸었으니, 전조(銓曹)에서 해가 바뀐 뒤에 통청(通淸)시킨 것은 조금도 옳지 못할 것이 없는 일이다. 그런데 요사이 자신을 옳게 여기며 이기기를 좋아하는 풍습이 날로 더욱 심해져, 비록 사실과 어그러짐이 있는 일이다 하더라도 한번 탄핵을 거치게 되면 종시 굳이 배척하게 되고, 급급하게 다시 의망(擬望)한다는 것으로 전관(銓官)을 책망하기까지 하였다. 이와 같은 행동은, 자기와 다르면 너무 심하게 공격하게 됨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내가 매우 분개한다."
하였다.
6월 7일 계축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는데, 이 뒤에도 자주 나타났다.
6월 8일 갑인
남필성(南弼星)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좌의정(左議政) 이단하(李端夏)가 이삼석(李三碩)이 상소하여 허윤(許玧) 및 한범제(韓范齊) 등을 논계(論啓)한 일 때문에 차자를 올려 허윤의 원통한 실상을 들어 아뢰기를,
"허윤 형제가 최신(崔愼)이 화(禍)를 당할 때를 유독 돌보아주었으므로, 최신이 의사(義士)들이라고 했었습니다. 지금 듣건대 허윤이 그 때의 권문(權門)에 드나들었다고 비방한다는데, 이는 허윤과 성(姓)도 같고 이름자의 음(音)도 같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고, 또 임대년(任大年)의 글과 행동을 들어 칭찬하니, 임금이 너그럽게 답하였다.
옥당(玉堂)의 관원을 소대(召對)하였다.
6월 9일 을묘
금중(禁中)의 소나무에 벼락이 쳤다.
사간(司諫) 김구(金構)가 상소하기를,
"요사이 사람들이 대각(臺閣) 피하기를 함정 피하듯이 하여, 정사(政事)를 하게 되는 날에 이름이 의망(擬望)의 첫머리에 있게 되면 몸을 빼어 도망하여 시골로 내려가 상소를 올리고, 체직(遞職)된 뒤에는 그 이튿날 바로 돌아오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심한 경우에는 더러 낙점(落點)이 이미 내렸는데 돌이켜 뒷문으로 해서 도망하는 수가 있기도 합니다. 강현(姜鋧)이 집의(執義)가 되고 이제민(李濟民)이 지평(持平)이 되었을 때 모두 다 낙점한 뒤에 도망갔으니, 일의 대체를 염두에 두지 않고 언로(言路)를 기피한 것입니다. 이는 진실로 여러 신하들의 과오이기는 합니다마는, 또한 전하(殿下)께서 대각을 대우함에 있어 다시는 너그럽게 용서하여 장려하지 않으시는 까닭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 아량을 넓히시어 언자(言者)들을 용납하시고, 무너진 기강(紀綱)을 진작(振作)하여 폐습(弊習)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진달한 말을 내가 가상하게 여긴다. 강현과 이제민 등의 행위는 모두 다 적당하지 못한 것이므로, 모두 추고(推考)하여 경책(警責)하겠다."
하였다.
6월 11일 정사
달이 저성(氐星)으로 들어갔다.
6월 12일 무오
영릉(英陵)의 석물(石物)에 못된 짓을 한 죄인 수호군(守護軍) 안계리(安繼李)가 복주(伏誅)되었다.
6월 13일 기미
유명일(兪命一)을 승지(承旨)로, 김우항(金宇杭)을 정언(正言)으로, 최관(崔寬)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이사영(李思永)을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삼았다. 이사영은 74세의 어버이가 있으므로 상소하여 면직을 바라니, 임금이 체직(遞職)을 윤허하고, 드물게 있는 일이라 하여 의복과 음식물을 넉넉하게 내려 노인을 우대하는 뜻을 보였다.
우의정(右議政) 조사석(趙師錫)이 사직하는 차자를 모두 다섯 차례나 올리니,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였으나 역시 나오지 않았다.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했다. 사헌부(司憲府)에서 간간이 문관(文官)을 임명하는 일을 거듭 아뢰니, 임금이 이르기를,
"지금 시종(侍從)하는 신하도 사람이 모자라서 걱정인데, 허다한 고을에다 어떻게 하나하나 가려서 임명할 수 있겠는가? 만일에 피폐(疲弊)한 문관으로 구차하게 채운다면 따로 무변(武弁)을 선택하는 것만도 못하다."
하였다. 사간원에서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의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좌의정(左議政) 이단하(李端夏)가 제조(提調)를 특별히 제수함은 잘못임을 극력 진달하고, 또 아뢰기를,
"우상(右相)의 뜻도 또한 그러했으니, 대각(臺閣)의 의논대로 따르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사간(司諫) 김구(金構)가 또한 생각하고 있는 바를 진달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법전(法典)대로 말한다면 종부시 제조(宗簿寺提調) 이외의 주원(厨院)202) 은 역시 특별 제수(除授)인데, 혜민서(惠民署)와 주원은 별로 다를 것이 없고, 의빈(儀賓) 중에는 또한 혜민서에 제수된 사람이 있다. 이번에 종반(宗班)을 특별히 제수한 것은 진실로 친애(親愛)하는 도리에서 나온 것인데, 어찌 이 때문에 번번이 준례를 들기만 할 수 있겠는가? 한때의 특은(特恩)으로 한 것이므로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이달에 큰 수해(水害)가 났다. 외방(外方)에서 장문(狀聞)한 것으로 수재의 참상이 여러 도(道)가 똑같았는데, 강양도(江襄道)에 있어서 원성(原城) 읍내(邑內)는 급하게 내리는 비가 막 쏟아져 기세(氣勢)가 강(江)을 뒤집어 놓은 것 같았기 때문에, 집이 물에 잠기어 파괴된 것이 1백 64호나 되도록 많았고 살림살이도 남김없이 떠내려갔으며 민중들이 도망하여 피할 적에 물에 휩쓸려 죽은 사람이 또한 매우 많아, 예전에 없던 큰 이변이었다. 옛적의 역사에 큰 수해를 여총(女寵)의 징조라고 했었다. 이때 장씨(張氏)의 폐총(嬖寵)이 바야흐로 융숭했었으니, 이번의 수재가 생긴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다른 도(道)들도 역시 큰 수해로 잇달아 장문(狀聞)했는데, 사람과 가축이 죽거나 부상하고 집들이 떠내려가고 분묘(墳墓)가 무너진 것이 매우 많았으며, 또한 벼락맞아 죽은 사람이 많았다.
6월 15일 신유
우의정(右議政) 조사석(趙師錫)이 또 차자를 올려 사면(辭免)하기를 바라니, 임금이 답하기를,
"경(卿)은 재질과 덕이 일찍부터 나타났었다. 이번의 등용은 비록 선발을 내 마음대로 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미 인망(人望)이 대중의 심정에 흡족했었으니, 전일의 민진주(閔鎭周)의 상소는 곧 하나의 경박하고 망령된 의논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경과 같이 아름답고 포용할 수 있는 아량으로 어찌하여 지나치게 사면하기를 바라기만 하고, 나의 근간(懃懇)한 뜻은 깊이 생각하지 않기를 이처럼 박정하게 하는 것인가? 몹시 놀라와 어찌하지 못하며 마치 좌우의 손을 잃은 것 같다."
하고, 또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였으나 역시 나오지 않았다.
6월 16일 임술
심재(沈梓)를 도승지(都承旨)로, 심사홍(沈思泓)을 헌납(獻納)으로, 김호(金灝)를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임금이 명안 공주(明安公主)의 장지(葬地)를 양주(楊州) 서면(西面) 염산(廉山)에 정하도록 명했다. 염산은 곧 서울에서 10리 이내인 금표(禁標) 안의 땅이므로, 특별히 세조조(世祖朝)에 의숙 공주(懿淑公主)203) 를 양주(楊州) 개좌동(价佐洞)에 장사하도록 명하였던 옛일을 인용하여 분부하게 된 것인데, 승정원에서 법에 의거하여 논쟁하고 재차 아뢰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대사헌(大司憲) 이수언(李秀彦)이 상소하기를,
"삼가 듣건대, 전(前) 교리(校理) 민진주(閔鎭周)가 전일의 복상(卜相)에 관한 일로 논하여 열거하게 되자, 전하께서 특별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대신을 침해하여 몰아붙였다.’는 엄중한 말씀으로 준엄하게 책망하시게 되었다고 하니, 지극히 개탄(慨歎)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민진주는 대신이 합당하지 않다고 한 것이 아니라, 특히 거조(擧措)가 합당하게 되지 못했음을 들어 말했었습니다. 이는 어찌 유독 민진주만 그렇게 여긴 것이겠습니까? 갑자기 보자 놀라고 당혹하게 되었던 것은 중외(中外)가 모두 그러했었습니다. 어찌하여 억눌러서 실정 이외의 분부를 내리시어 이처럼 좌절시킬 수 있겠습니까? 만약 언자(言者)를 좌절시키는 것을 가지고 대신을 위안시키는 길로 여기신다면, 더욱 그렇지 않은 바가 있습니다. 문언박(文彦博)204) 은 송(宋)나라의 어진 정승이었습니다. 당개(唐介)가 논계(論啓)한 일이 당초에 명백하게 증거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문언박이 다시 들어왔을 적에 받아들여 등용하도록 극력 청하여 간관(諫官)의 직책을 도로 주게 했었습니다. 하물며 이번에 말을 한 일은 또한 당개가 논척(論斥)한 것에 비할 일이 아니니, 이로 인해 좌절시킨다면 어찌 대신의 마음에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또 이징명(李徵明)과 한성우(韓聖佑)의 상소가 설사 성상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진언(進言)을 한 성의는 각기 나라 일을 근심하고 임금을 아끼는 정성에서 나온 것인데, 한결같이 배척해 버리고 오래도록 은덕을 베푸는 낙점(落點)을 아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모두 가리켜 말하기를, 강직한 말로 성지(聖旨)를 거스리는 사람인데 아량 있게 받아들이지 않으시는 것이라고 하니, 도리어 성상의 덕에 누(累)가 되고 있으므로, 신(臣)은 그윽이 애석하게 여깁니다. 무릇 이 두어 신하에 대해서는 통쾌하게 용서해 주시고 겸하여 수용(收用)하시어 다시 언관(言官)의 자리에 둔 다음에야 언로(言路)가 넓어지게 되고 성상의 덕이 커지게 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진달함은 비록 신하로서 임금을 섬기는 도리이기는 하지만, 은덕을 베푸는 낙점을 오랫동안 아낌은 이제 시작된 것이 아닌데, 경(卿)이 이에 수용(收用)하도록 몰아붙이고 있으니, 이는 진실로 이전에 듣지 못하던 일이다. 이와 같다면 전조(銓曹)에 일임하여도 족할 것인데 어찌 삼망(三望)을 갖출 필요가 있겠는가? 전일에 여러 차례 정승을 더 정하게 했던 일은 이미 사사로운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고, 내세운 정승이 또한 과연 대중의 기대에 맞았으니, ‘놀라와 괴이하게 여기고 근심스러워 한탄한다.’는 말은 이미 너무도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경의 상소 내용에 ‘중외(中外)의 대소(大小) 〈신하가〉 모두 그렇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말을 하여 한 마디가 한층 더해져 대신이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으니, 이는 진실로 무슨 마음이고 또한 무슨 도리인가?"
하였다. 당초에 후궁(後宮) 장씨(張氏)의 어미는 곧 조사석(趙師錫)의 처갓집 종이었는데 조사석이 젊었을 때에 사사로이 통했었고, 장가(張家)의 아내가 된 뒤에도 오히려 때때로 조사석의 집에 오갔었다.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은 또한 조사석의 종매(從妹)의 아들이었는데, 조사석이 정승에 제수되자, 온세상이 모두 궁중 깊은 곳의 후원에 의한 것으로 여겼었다. 이수언(李秀彦)이 문언박(文彦博)의 일을 인용한 것은 반드시 뜻이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바로 기휘(忌諱)에 저촉하게 되었고, 이징명과 한성우는 또한 장씨를 논계한 사람들인데 연관지어 언급했기 때문에, 임금이 더욱 노여워 하여 비답(批答)의 뜻이 그처럼 화평하지 못했었다. 당초에는 ‘태아(太阿)205) 를 거꾸로 들었다.[太阿倒特]’라는 네 글자가 있었는데, 승정원에서 계품(啓稟)하여 삭제하였다. 이수언이 황송하게 여겨 상소하여서 인책하자, 임금이 즉각 체직하였다.
6월 17일 계해
장맛비가 멎지 않으므로 기청제(祈晴祭)를 지내도록 명하였다.
6월 19일 을축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전일에 비망기를 쓸 때 비문(碑文)을 대충 보아 미처 연월(年月)을 고찰하지 못하고서 세조조(世祖朝)의 일로 착각했었는데, 다시 비문 및 《고사촬요(攷事撮要)》를 고찰해 보건대, 의숙 공주(懿淑公主)의 졸서(卒逝)는 성화(成化) 13년 정유(丁酉) 즉 성종 대왕(成宗大王) 8년(1477)이었고, 《대전(大典)》의 반포(頒布)는 성화 10년에 있었다. 또 하성 부원군(河城府院君) 정현조(鄭顯祖)가 연산군(燕山君)갑자년206) 7월에 졸(卒)하고, 중종(中宗) 37년(1542) 임인년(壬寅年)에 역시 개좌동(价佐洞)으로 이장(移葬)하도록 명했었다. 두 조정에서 장사하도록 윤허한 명이 모두 세조조의 일이 아니고, 금령(禁令)을 이미 반포한 뒤에 있었던 것이 명백하여 의심이 없기에, 그 때의 비망기 말을 고쳐 써서 내린다."
하였다.
옥당(玉堂)의 김만길(金萬吉)·황흠(黃欽)·김성적(金盛迪)·홍수헌(洪受瀗)·송상기(宋相琦)가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비망기(備忘記)를 보건대, 명안 공주(明安公主)의 장지를 특별히 염산(廉山)에 정하였으므로 후사(喉司)에서 두 차례 아뢰었으나 마침내 윤허받지 못했습니다. 의숙 공주(懿淑公主)의 일은 한 때의 사사로운 은혜에 지나지 않는 일입니다. 조종조(祖宗朝)의 아름다운 법칙과 좋은 규모는 본받아야 할 것이 매우 많은데도 이번에 여러 대의 조정에서 바꾸지 않던 법을 어기고서 한 때의 사정(私情)에 따른 사례만을 인용하니, 취사(取捨)와 공사(公私)의 구분이 또한 매우 전도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제부터는 귀근(貴近)한 가문들이 더러는 5리나 3리 이내의 거리에 땅을 잡게 된다 하더라도 전하(殿下)께서 장차 거절할 말이 없게 되어, 앞으로는 도성(都城) 사방에 분묘(墳墓)가 서로 바라보이게 되고 매장(埋葬)할 때 곡하는 소리가 시가(市街)에까지 들리게 될 것이니, 상서롭지 못함이 무엇이 이보다 크겠습니까? 오직 국법[邦憲]은 지극히 엄격하고 성법(成法)은 변동하기 어려운 것이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국가의 법제는 넘을 수 없고 사사로운 은혜는 외람되어서는 안 됨을 깊이 생각해 보시고서, 염산(廉山)에 장사하도록 윤허하신 일을 특별히 정지하고 다시 좋은 땅을 가리게 하소서. 또 강도(江都)에서의 채석(採石) 금지는 겨우 성명(成命)이 있으셨다가 도로 공주(公主)의 상사(喪事)에 따라 돌을 떠 주라는 명을 내리셨고, 대신(臺臣)이 논집(論執)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윤허하지 않고 계십니다. 한편에서는 논계(論啓)하고 있고 한편에서는 돌을 떠내고 있어, 법을 세운 지 얼마되지도 않아 성상께서 먼저 범하셨으니, 장차 어떻게 사람들이 사사로이 떠가는 것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동평군(東平君) 항(杭)에게 특별히 제조(提調)를 제수한 것은 또한 일찍이 있지 않던 일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종반(宗班)들이 직사(職事)를 맡지 못하도록 한 것은 대개 뜻이 있는 것으로서, 진실로 방한(防閑)이 한 번 무너지면 뒷날의 폐단을 막기 어렵기 때문이었습니다. 중비(中批)로 특별히 제수함은 조신(朝紳)에게 있어서도 오히려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인데, 하물며 종척(宗戚)인 근신(近臣)이겠습니까? 오직 전하께서 시급히 대신(臺臣)의 계청(啓請)을 윤허하시어, 공론이 신장(伸張)되고 국법이 엄격해지게 하소서. 또 이수언(李秀彦)의 상소에 대한 비답(批答)을 삼가 보건대, 말씀의 뜻이 지극히 엄중하시어 ‘억지로 수용(收用)하게 하니, 내가 진실로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진다.’고까지 하셨습니다. 이수언의 상소는, 두서너 신하에게 은덕을 베푸는 낙점(落點)을 오래도록 아끼심은 혹시 선(善)을 받아 들이셔야 하는 성명(聖明)의 아량에 방해될까 염려한 것인데, 이에 그러한 분부가 계셨습니다. 아! 오늘날의 국사는 위급하다 하겠으니, 오직 마땅히 자신의 사심(私心)을 극복하여 제거하고 공정한 도리를 회복하여 넓히며, 법도(法度)를 삼가 지키고 서정(庶政)을 닦아서 밝히며, 또한 반드시 언자(言者)들을 너그럽게 용납하여, 모든 선(善)이 모인 다음에야 바야흐로 일분(一分)이라도 바로잡아지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 한 편에 치우치는 생각을 하시어 가는 곳마다 병폐가 되고 있어, 법에 의거하여 논집(論執)하는 말들을 한 마디도 받아들이지 않으시니, 신들은 국가 일이 장차 어디에서 멈추게 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성종조(成宗朝)에 의숙 공주(懿淑公主)를 금표(禁標) 안에 장사하도록 윤허하셨던 것은 진실로 친애(親愛)하는 훌륭한 덕에서 나온 일로서, 바로 오늘날의 일과 서로 부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들이 방자하게 왕성한 기운으로 이에 이르도록 근거없는 비유를 인용하여 경솔하게 망령된 짓을 할 줄은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사정을 따른 것이다.’라는 등의 말이 위로 조종(祖宗)에까지 미치게 되었으니, 어찌 마음아픈 일이 아니겠느냐? 아! 열성(列聖)들이 특별히 내렸던 분부에 의거하여 하나의 외로운 영혼이 서울에 가까이 있으면서 향사(享祀)가 폐해지지 않는 것이 무슨 손상될 것이 있다고 패만(悖慢)한 말을 하기를 어찌 이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냐? ‘5리나 3리가 되어, 장사할 때에 곡하는 소리가 시가에까지 들리게 된다.’는 등의 말에 있어서는 더욱 괴탄(怪誕)스럽고 공동(恐動)하는 것이 심한 말이다. 대개 위복(威福)을 내리고 여탈(與奪)을 함은 곧 임금의 큰 권한인 것이니, 이수언의 도리로서는 오직 마땅히 생각하고 있는 바를 진달해야 할 뿐인데, 어찌 감히 수용(收用)하는 일에 대해서 제멋대로 지휘할 수 있겠느냐? 이런 길이 한 번 열리면 다음날의 폐해를 이루 말할 수 없게 될 것인데, 그대들은 어찌하여 이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급급하게 이처럼 신구(伸救)만 하는 것이냐? 동평군(東平君)의 일과 강도(江都)의 석물(石物)에 관한 일은 이미 경연(經筵)에서 나의 뜻을 말했었고, 결코 윤허할 수 없다."
하였다. 조금 있다가 임금이 승정원(承政院)에 명하여 차자(箚子)를 지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수(自首)하게 하며 말의 뜻이 절박하고 준엄했는데, 승정원에서 극력 간하여 이 명을 정지했다. 이어 옥당(玉堂)의 여러 신하들을 모두 관직을 삭탈하도록 명하므로, 승지(承旨) 심재(沈梓)·이언강(李彦綱)·민진장(閔鎭長)·신양(申懹)·유명일(兪命一) 등이 청대(請對)하여 아뢰어서, 관직 삭탈을 감(減)하여 파직(罷職)으로 하였다.
6월 20일 병인
임홍익(任弘益)을 장령(掌令)으로, 김홍정(金弘楨)을 정언(正言)으로, 김구(金構)를 수찬(修撰)으로, 심평(沈枰)을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6월 21일 정묘
도목정(都目政)을 하여, 조형기(趙亨期)를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특별히 이언강(李彦綱)을 승진시켜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으로, 특별히 심재(沈梓)를 승진시켜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으로, 이현기(李玄紀)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임상원(任相元)을 도승지(都承旨)로, 이세백(李世白)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윤세기(尹世紀)를 승지(承旨)로, 남치훈(南致熏)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사헌부(司憲府)·사간 원(司諫院)에서 명안 공주(明安公主)를 금표(禁標) 안에 장사하도록 윤허한 명을 정지하기를 청하고, 또 김만길(金萬吉) 등을 파직하도록 한 명을 거두도록 청했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그 뒤에 명안 공주를 광주(廣州) 월곡(月谷)에 장사했으니, 대신(臺臣)의 논계(論啓)가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좌의정(左議政) 이단하(李端夏)가 차자를 올려 김만길 등을 구원하고, 이어 이수언(李秀彦)의 일도 언급하니, 답하기를,
"옥당(玉堂)의 차자가 만일 조종조(祖宗朝)에 금표(禁標) 안에다 장사하도록 윤허한 일을 한 때의 특별한 분부에서 나온 것이라 하여 이를 인용하여서 준례를 삼을 수는 없다고 말을 했다면 옳지만, 이번에 ‘사정을 따른 것이다.’라는 등의 말을 방자하게 장주(章奏)의 내용에 써 놓았으니, 그 본뜻을 따져 보건대 주의하지 않은 것 같다. 일이 열성(列聖)들에게 관한 것이고 말이 어긋난 일에 관계되어 조금이나마 경책(警責)을 보이는 일을 결코 그만둘 수 없다. 너그럽게 용납하여 도로 그전의 직책에 두라는 말을 나는 진실로 이해하지 못하겠다. 비답의 뜻을 연신(筵臣)이 진달하는 말에 따라 이미 산개(刪改)한 것이다."
하고, 이수언에 관한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
우의정(右議政) 조사석(趙師錫)이 사직하는 차자를 올리니, 임금이 도승지(都承旨)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6월 23일 기사
사헌부(司憲府)에서 심재(沈梓)·이언강(李彦綱)을 특별히 제수(除授)한 명을 거두도록 청했으나, 임금이 들어주지 않았다.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올해의 더없는 수해는 이전에는 없던 것으로서, 물동이가 엎어지고 바다가 뒤집힌 듯한 물이 산을 둘러싸고 구릉(丘陵)을 넘어서므로, 집채들이 떠내려가고 사람과 가축이 빠져 죽게 되었다. 이미 그 놀랍고 참혹함을 견딜 수 없거니와, 농사의 피해가 자못 가뭄보다 심하겠으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다시 영제(禜祭)207) 를 지내도록 하라."
하였다.
6월 24일 경오
사대문(四大門)에서 비가 개기를 비는 영제(禜祭)를 지냈다.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이 병을 이유로 정사(呈辭)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세 차례나 내렸다.
6월 28일 갑술
전라도(全羅道)의 흥덕(興德) 등 11고을에 해일(海溢)이 일었다.
6월 29일 을해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이 졸(卒)했는데, 나이가 58세이었다. 민유중은 성격이 강직하여 방정하고 총명하여 통달했었는데, 형 민정중(閔鼎重)과 함께 경술(經術)을 가지고 진출하여 사림(士林)들의 두터운 인망(人望)을 지녔다. 조정에 벼슬하면서는 언론이 준엄하고 단정하여 업적이 융성하게 나타났고, 집에 있을 적에는 행의(行誼)에 독실하여 예법(禮法)으로 자신을 제어하였으니, 임금이 왕비(王妃)를 그의 가문에서 정하였음은 대개 그의 가법(家法)이 올바름을 살폈기 때문이다. 이때 민유중이 바야흐로 서전(西銓)의 장관(長官)으로 있으면서 위계(位階)가 보국(輔國)에 올랐으므로 아침저녁 사이에 대배(大拜)208) 하게 되었었는데, 국가의 제도에 얽매여 기밀(機密)한 요직을 모두 내놓고 마침내 등용하지 못하게 되므로 여론이 애석하게 여겼었다. 부고(訃告)가 오자, 하교(下敎)하기를,
"겨우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의 상사(喪事)에 곡하고 나자 또 이 상사에 곡하게 되니, 놀랍고 비통한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고 국가를 위해서도 불행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하고, 이어 3년 동안 녹봉(祿俸)을 주도록 명하고서 희정당(熙政黨)에서 거애(擧哀)했다. 뒤에 시호(諡號)를 문정(文貞)이라고 하였다.
대신을 보내어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서 기청제(祈晴祭)를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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