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기유
정언(正言) 박성로(朴聖輅)가 인피(引避)하여 김유경(金有慶)을 구원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이른바 ‘강직(剛直)함을 좋아하면서도 가려진 것은 굽은 것이고 정직함을 좋아하면서도 그 가려진 것은 어리석움이다.’라는 것으로서, 만일 그 본심(本心)이 조정을 괴란(壞亂)시키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진실로 마땅히 너그럽게 포용하고 관대하게 받아들여 언로(言路)를 넓혔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백관(百官)의 장(長)인 영의정이 망령되게 지은 문자(文字)를 끄집어 내어 반드시 엄중한 법으로써 다스리고자 하니, 신은 마음에 개탄스러운 생각이 없지 않은 바이며, 거기다가 성비(聖批)084) 의 사지(辭旨)가 지극히 엄격하시니, 삼가 널리 만물을 포용하시는 도량에 어긋남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윤세유(尹世綏)도 또한 인피(引避)하며 말하기를,
"김유경(金有慶)의 상소 내용이 전도되고 망령된 점은 요대(僚臺)가 또한 이미 낱낱이 진달하였습니다. 요대인들 어찌 반드시 그 본심이 괴란(壞亂)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신이 처음에 올린 상소는 단지 그가 말한 바에 의거하여 약간의 경책(警責)을 두어서 분의(分義)와 도리(道理)의 엄중함을 보였을 뿐입니다. 엄중한 법으로 무겁게 추궁하라는 말은 무엇 때문에 발설하였겠습니까."
하였다. 이때 양사(兩司)에 공무를 집행하는 사람이 없어 여러 날 동안 처치(處置)하지 못하였다.
2월 2일 경술
유성(流星)이 화개성(華蓋星)밑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홍계적(洪啓迪)을 정언(正言)으로, 홍치중(洪致中)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삼고, 이광좌(李光佐)를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승진 임명하고, 박봉령(朴鳳齡)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교리(校理) 홍우서(洪禹瑞)와 부교리(副校理) 이교악(李喬岳)이 차자를 올리기를,
"김유경의 상소는 존호가 이미 결정되어 의식을 장차 거행하려는 즈음에 올렸으니 이는 시기를 지난 뒤인 것이며, 대신을 비난하고 배척하여 표현이 너무 과격하였으니 이는 망령하고 경솔한 것으로서 그것이 사체(事體)에 있어서는 진실로 매우 미안한 일입니다. 다만 그 한 두 글귀의 내용은 시폐(時弊)를 대충 논한 데 불과하여 본래 배척하거나 알력(軋轢)을 부려서 곤경에 빠뜨리려는 의도는 없었으며,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에 숨김이 없는 것은 거룩하신 덕을 더욱 힘쓰게 하는 데에 스스로 부합되는데, 심지어는 ‘정태(情態)가 다 드러났으니 반드시 말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라는 하교를 하시기까지 하였고, 또 ‘다만 족히 그 괴란(壞亂)시키려는 계책에 빠지게 될 뿐이다.’고 비답을 하시었으니, 이는 자못 위대하신 왕언(王言)의 체모에 어긋나는 것이며, 또한 대성인(大聖人)의 함구(含垢)085) 의 도리에도 부족함이 있는 듯합니다. 진실로 만일 말한 사람의 말이 과연 현저히 배척해야만 될 것이라면 어찌 일의 성상의 몸에 관련되었다고 하여 그대로 방치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상의 하교에서는 ‘나 자신의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삼가 도량이 넓지 못한 것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질까 두렵습니다. ‘내가 비록 덕이 부족하지만’이라고 하신 하교에 있어서는 실로 신자(臣子)로서 감히 들을 바가 아닙니다."
하고, 이어서 전후의 비지(批旨) 가운데 미안(未安)한 하교를 고쳐서 내려 줄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그대들의 차자를 보건대, 나를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왔으니, 매우 가상(嘉尙)하게 여긴다. 비지(批旨) 가운데 미안한 곳은 개정하여 내리겠다."
하였다. 이윽고 윤세유(尹世綏)의 상소에 대한 비답을 고쳐서 내리기를,
"대신(大臣)의 차자에 대한 비답에서 이미 나의 의사를 밝혔다. 대저 이 일은 분의(分義)와 사체(事體)로써 말한다면 자못 미안한 일이며, 그가 복과(復科)한 사람을 청로(淸路)에 등용한 일을 논한 것도 또한 매우 사리에 어긋난 일이다."
하였고, 또 조태채(趙泰采)의 상소에 대한 비답을 개정하기를,
"김유경(金有慶)의 상소는 처분(處分)이 이미 결정된 뒤에 나왔으니, 이는 전에 들어 본 적이 없는 일이요, 가려서 표현하지는 않은 말이니, 굳이 지나치게 스스로 혐의할 것이 없는 것인데, 이제 또 인책하여 사면을 하는 것은 나는 사체(事體)를 크게 손상시키는 것으로 여긴다."
하였다.
2월 3일 신해
교리(校理) 홍우서(洪禹瑞)가 비로소 처치(處置)하여 대간(臺諫)에 박성로(朴聖輅)와 윤세유(尹世綏)를 모두 체직시키고 유독 이정주(李挺周)만 출사(出仕)시켰다. 이때에 존호(尊號) 올리는 일로 인해서 조정의 의논이 분기(分岐)될 조짐이 있었기 때문에 홍우서가 둘을 다 체직시켜야 한다는 의논을 하였으니, 조정(調停)하려고 한 것이라 하겠다.
2월 4일 임자
옥당관(玉堂官)을 소대(召對)하였다.
2월 5일 계축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유(李濡)가, 병조 좌랑(兵曹佐郞) 이광도(李廣道)가 일전에 정청(庭請)할 때 내수사(內需司)에 입직(入直)한다는 것으로써 무단(無端)히 불참하였다 하여, 태거(汰去)시키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유가 말하기를,
"정호(鄭澔)는 사람됨이 강직하고, 또 그 문학(文學)과 견식(見識)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수합니다. 성상께서 이미 영원히 버릴 의사가 없으시면 거두어 서용(敍用)하는 것이 실로 성덕(聖德)이 빛날 것입니다."
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 조태채(趙泰采)는 말하기를,
"지난번 유생(儒生)의 상소에서 정호(鄭澔)가 지주(指嗾)한 것으로써 말하였으나, 이것은 실상이 아닙니다. 정호의 염결(廉潔)·강개(剛介)함과 문학(文學)·풍절(風節)은 실로 유배(流輩)086) 보다 출중합니다.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하여 옛자리에다 다시 등용하신다면, 아마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부교리(副校理) 이택(李澤)과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만성(李晩成), 헌납(獻納) 김보택(金普澤)도 같은 말로 아뢰니, 임금이 서용(敍用)하도록 명하였다. 이유(李濡)가 또 말하기를,
"지난해에 한영휘(韓永徽)의 ‘한 목패(木牌)’의 말은, 언사(言辭)의 사이에 비록 실수한 바가 있었으나, 처음에 이미 조사를 실시해 보니 현저한 단서는 있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 한영휘의 집에서 신주(神主)를 고쳐 쓸 때에 김진규(金鎭圭)가 이를 보았는데, 그 분면(粉面)에 쓴 것은 분명히 한영휘의 숙부(叔父)인 한제유(韓濟愈)의 글씨였고, 한제유의 아들인 전(前) 헌납(獻納) 한영조(韓永祚)도 또한 그 아비가 쓴 것이라 말했다 합니다. 한영휘(韓永徽)가 과연 그 신주를 개조(改造)하였다면 이미 죽은 지 오래 되는 한제유가 어떻게 그 분면(粉面)을 쓸 수 있었겠습니까. 이 한 가지 사항으로 그것이 무함받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고, 이만성(李晩成)·이택(李澤) 및 승지(承旨) 윤헌주(尹憲柱)가 모두 따라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이 말을 들으니, 나도 의심이 확 풀렸다."
하였다. 이만성이 말하기를,
"전쟁으로 사망했거나 원통하게 죽은 사람과 선현(先賢)의 자손(子孫)은 지손(支孫)과 적손(嫡孫)을 논할 것 없이 뒤섞어 녹용(錄用)을 더하여 제한(制限)이 없으니, 이는 마땅히 일정한 제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령 청백리(淸白吏)자손으로서 사대(四代)가 지난 뒤에는 지손·적손을 따지지 말고 그 중에 현명한 자를 골라서 매양 일대(一代)마다 다만 한 사람씩만 뽑는 것으로 일정한 규식을 삼는다면 사로(仕路)를 깨끗이 하는 방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본조(本曹)에 있는 청백리 등의 여러 문서(文書)를 다시 수정해서 초록(抄錄)하여 영구히 준행(遵行)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직손(直孫)을 등용해야 할 것이나, 만일 직손이 없을 경우에는 일대(一代)마다 한 사람씩 수용(收用)할 것이며, 청백리 등의 여러 문서는 수정(修正)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만성(李晩成)이 또 말하기를,
"의관(醫官)·역관(譯官)이나 중인(中人)·서인(庶人)의 무리의 증직(贈職)을 참판(參判) 겸총부(兼摠府)로 증직하는 경우도 허다하니, 이는 매우 외람(猥濫)된 일입니다. 다만 동중추(同中樞)나 또는 좌·우윤(左右尹)으로 증직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조태채(趙泰采)는 말하기를,
"좌·우윤을 증직하는 것도 또한 부당합니다. 다만 동지(同知)로 허락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되."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의관(醫官) 박성서(朴星瑞)에게 참판(參判)·총부(摠府)로 증직하는 것을 보고 나 또한 괴이하게 여겼었다. 아뢴 대로 하되, 동지(同知)의 등류(等類)를 가설(加設)하는 경우에는 좌·우윤으로 증직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였다. 이만성이 이내 박성서(朴星瑞)의 증직을 개수(改授)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만성이 말하기를,
"‘영원히 서용(敍用)하지 말라’는 등류(等類)를 을축년087) 무렵에 대신(大臣)의 진백(陳白)으로 인하여 3년을 경과한 뒤에 사면(赦免)을 당하면 서입(書入)하라는 분부가 있었는데, 이는 아마도 너무 지나친 듯합니다. 비록 3년이 경과하지 않았더라도 크게 은택을 내릴 때에는 한결같이 세초(歲抄)088) 에 적어 올리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
하고 이유(李濡) 또한 그 말을 옳다고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정언(正言) 홍계적(洪啓迪)이 상소하기를,
"윤세유(尹世綏)가 상소하여 김유경(金有慶)을 배척한 것은 실로 대각(臺閣)의 수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유경의 상소가 비록 추의(追議)한 실수가 있었으나, 그 이해(利害)를 돌보지 않고 대의(大義)가 이미 결정된 뒤에도 항론(抗論)을 하며 숨기지 않았던 것과 같은 것은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한는 격절(激切)한 정성이 없었다면 능히 이와 같이 할 수 있었겠습니까. ‘벼슬을 얻으려고 근심하여 아첨을 한다’는 말은 쇠퇴한 풍속의 폐단을 대충 논의한 데 불과한 것인데, 어구(語句)를 끄집어내어 정신(廷臣)을 저척(詆斥)하였다는 말로 부합시켜서 조정을 괴란(壞亂)시키려 했다는 죄목을 억지로 씌웠으니, 이는 이미 상식 밖의 일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전적으로 신하들만 나무랄 수 없다는 등의 문자(文字)를 거론(擧論)하여 위협하고 버티는 계책으로 삼은 것은 더욱이 매우 사리에 어긋난 일입니다. 자신이 간관(諫官)이 되어 가지고 비록 능히 스스로 충언(忠言)을 올리진 못한다 하더라도 어찌 차마 그 말의 잘못 표현된 부분을 가지고 죄안(罪案)을 구성하여 이 지경에 이를 수가 있겠습니까.
대개 김유경이 윤세유에게 깊이 죄를 얻은 까닭은 바로 ‘권도(勸導)’ 두 글자에 있습니다. 지금 그 말한 사람을 저격(狙擊)하여 곧바로 죄를 줄 것을 청하니, 이를 과연 임금을 의리로써 인도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이 군부(君父)에게 신임을 받지 못하자 따라서 무함을 하였으니, 이를 또한 임금을 정도(正道)로써 인도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행히도 우리 성상께서는 도량이 크기가 하늘과 땅과 같으시고 허물을 고치기는 일식(日食)·월식(月食)과 같이 하시어 전후의 비지(批旨)를 한결같이 반한(反汗)089) 하였으니, 한낱 윤세유의 들추어내어 참소한 말은 저절로 결국 대덕(大德)을 더럽힐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아! 커다란 아름다움을 발양시키는 것이 어찌 여러 신하들의 융성함을 이루게 하는 정성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조정 뜰에 가득 모여서 한결같은 말로 전혀 이론(異論)이 없다면 또한 성세(聖世)의 아름다운 일은 아닙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대신(大臣)의 차자(箚子)는 이에 ‘죄를 다스리지 말라.’는 것으로써 청하였으니, 이는 실로 조제(調劑)의 방도에서 나온 것이나, 다만 ‘죄를 다스리지 않는 것이 바로 깊이 다스리는 것’이라면 어디에 그 진정(鎭定)시킨다는 본뜻이 있겠습니까. 지금 만일 이와 같이 할 뿐이고, 끝내 곡직(曲直)을 명백하게 변별(辨別)하지 않는다면, 그 말류(末流)의 폐해는 장차 이루 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 말한 사람을 너그럽게 포용한다는 도리에 있어서는 마땅히 유세유를 견파(譴罷)하여 그 시비(是非)를 밝혀야 할 것으로 여깁니다."
하니, 답하기를,
"대의(大意)는 진실로 좋으나, 견파(譴罷)하라는 청은 옳은 것으로 보지 않는다."
하였다.
2월 6일 갑인
도목정(都目政)090) 을 행하여 홍우서(洪禹瑞)를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오명항(吳命恒)을 교리(校理)로, 권상유(權尙游)를 부제학(副提學)으로, 이관명(李觀命)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교악(李喬岳)을 장령(掌令)으로, 홍석보(洪錫輔)를 정언(正言)으로, 정호(鄭澔)를 대사성(大司成)으로, 홍우녕(洪禹寧)을 집의(執義)로, 조상경(趙尙絅)을 설서(說書)로, 이만견(李晩堅)을 겸보덕(兼輔德)으로, 정찬선(鄭纘先)을 수찬(修撰)으로, 유명웅(兪命雄)을 도승지(都承旨)로 삼았다.
2월 8일 병진
존숭 도감(尊崇都監) 도제조(都提調) 이유(李濡)와 제조(提調) 조태구(趙泰耉)·김우항(金宇杭) 등이 청대(請對)하여 진연(進宴)을 극력 청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이유가 또 말하기를,
"영소전(永昭殿)091) ·경녕전(敬寧殿)092) 양전(兩殿)의 신주(神主)를 고쳐 쓰는 한 가지 사항에 있어서는 고사(故事)를 살펴보니, 태조(太祖)께서 휘호(徽號)를 진상(進上)하셨을 때에는 신주를 깎아내는 것이 미안(未安)하다 하여 개제(改題)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종(定宗)과 정안 왕후(定安王后)의 위패(位牌)는 고쳐 썼다."
하였다. 이유(李濡)가 말하기를,
"선조(宣祖)갑진년093) 에 존호(尊號)를 올렸을 때에는 왕비(王妃)의 위패도 고쳐서 썼습니다."
하였다. 김우항이 고쳐 쓰는 것을 어렵게 여기며 고쳐 쓰지 말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갑진년에 고쳐서 쓴 예가 있으니, 지금도 고쳐 쓰는 것이 옳다."
하였다. 김우항이 이내 양전(兩殿)에 책보(冊寶)를 올릴 때에 왕세자(王世子)가 친히 거행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상직(金相稷)과 남취명(南就明)을 승지(承旨)로, 홍치중(洪致中)과 이교악(李喬岳)을 수찬(修撰)으로, 한영휘(韓永徽)와 홍호인(洪好人)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2월 10일 무오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헌납(獻納) 김보택(金普澤)이 유혁연(柳赫然)·이원정(李元禎)에 대해 환수(還收)하라는 계사(啓辭)를 발의(發議)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양사(兩司)에 대하여 함께 발의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다."
하고, 따르지 않았다.
황귀하(黃龜河)를 정언(正言)으로, 최석항(崔錫恒)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삼았다.
2월 11일 기미
밤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외방(外方)에서도 연속하여 장문(狀聞)하였다.
2월 12일 경신
박사익(朴師益)을 검열(檢閱)로 삼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계론(啓論)하기를,
"전적(典籍) 권무경(權懋經)은 문묘 종사(文廟從祀)의 헌관(獻官)으로 차출되었으나, 끝내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의 신위(神位)에 헌작(獻酌)하지 않았고, 다른 헌관(獻官)인 박태삼(朴泰三)이 이를 대행하였습니다. 헌관이 된 신분으로서 함부로 선현(先賢)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가진 정상(情狀)이 절통(絶痛)하지만 박태삼이 사사로이 스스로 대행한 것도 또한 매우 해괴한 일입니다. 청컨대 모두 파직(罷職)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2월 14일 임술
정래상(鄭來祥)을 승지(承旨)로 삼고, 홍우녕(洪禹寧)을 승지(承旨)로 승진 임명하고, 심택현(沈宅賢)을 집의(執義)로, 이교악(李喬岳)을 부교리(副校理)로, 홍우서(洪禹瑞)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2월 15일 계해
유성(流星)이 태미 동원(太微東垣)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신사철(申思喆)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2월 16일 갑자
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頤命)이 차자를 올리기를,
"성상의 질환(疾患)은 비록 통증을 지적할 만한 곳은 없으나, 다리 부위가 힘이 없으므로 보행(步行)과 기립(起立)에 방해가 있으니, 이를 억지로 하면 반드시 증세가 더할 것입니다."
하고, 이내 대보단(大報壇)에 친히 제사하겠다는 분부를 중지할 것을 청하였다. 【조참(朝參)할 때에 임금이 대보단(大報壇)에 친히 제사한다는 분부를 하였기 때문에 이이명(李頤命)의 말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또 영소전(永昭殿)과 경녕전(敬寧殿)에 존호를 올린 뒤에 신주를 고쳐 쓰는 것이 미안한 것을 논하여 말하기를,
"정종(定宗)의 위판(位版)은 묘호(廟號)가 없으니 고쳐 썼고, 신의 왕후(神懿王后)094) 와 원경 왕후(元敬王后)095) 의 위판은 오직 태자(太字)만 있어서 고쳐 썼으니, 이것은 바로 고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경우입니다.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은 존호(尊號)를 추가로 올렸기 때문에 위판(位版)은 고쳐 쓰지 않고 다만 책축(冊祝)에만 썼으니, 이는 바로 고치지 않아도 되는 경우입니다. 그것이 아주 곤란한 까닭은 글자를 첨가하고 깎아내는 것이 미안한 데 있는 것으로, 사가(私家)에서 분(粉)을 바르는 것을 쉽사리 고칠 수 있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연대(年代)의 오래 되고 가까운 것으로써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라건대, 널리 물어서 처리하소서."
하니, 임금이 우비(優批)를 내려 대보단(大報壇)의 향사(享祀)는 대행하도록 허락하고, 아래 사항의 일에 대해서는 ‘지금의 신주를 고쳐 쓰는 문제는 곡절(曲折)이 이전과 차이(差異)가 없지 않다.’고 유시(諭示)하여 대신(大臣)과 의논해 품처(稟處)토록 하였다.
2월 19일 정묘
여광주(呂光周)를 장령(掌令)으로, 윤봉조(尹鳳朝)를 사서(司書)로, 홍치중(洪致中)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지사(知事) 조태채(趙泰采)가 말하기를,
"제언사(堤堰司)를 혁파(革罷)한 뒤로 물을 모아 두지 않아서 백성들이 수리(水利)의 혜택을 입지 못하니, 마땅히 따로 신칙(申飭)을 가해서 수거(修擧)하는 바탕을 삼아야 합니다."
하고, 승지(承旨) 홍우녕(洪禹寧)도 이어서 말하기를,
"마른 제방으로 물갈이가 안되는 곳을 마땅히 별도로 몰래 알아보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특진관(特進官) 윤취상(尹就商)이 수원(水原)에 어사(御史)를 특별히 파견하여 시험보이는 일을 시행해서 군정(軍情)을 위로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토록 하였다. 교리(校理) 홍우서(洪禹瑞)가 권무경(權懋經)이 문묘(文廟)에 종향(從享)된 유현(儒賢)에 대하여 감히 모만(侮慢)한 버릇을 부리면서 공공연히 술잔을 올리지 않았는데, 대간(臺諫)이 파직(罷職)으로 논죄한 것은 적용한 법률이 너무 경미하다고 강력하게 말하고, 조태채(趙泰采)도 잇따라 진달하니, 임금이 삭출(削黜)을 명하였다. 헌납(獻納) 김보택(金普澤)이 이 일로써 인피(引避)하니, 그 뒤에 처치(處置)하여 체직시켰다.
2월 20일 무진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유(李濡)가 또 진연(進宴)하는 일을 극력 청하고, 여러 신하들도 모두 잇따라 진달(陳達)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대보단(大報壇)의 제사는 계춘(季春)에 지내는데, 선무사(宣武祠)의 봄제사를 중춘(仲春)에 먼저 지내는 것으로써 미안하게 생각하여 【선무사(宣武祠)는 바로 양호(楊鎬)의 사당이다. 구례(舊例)에 매양 2월에 봄제사를 지냈었다.】 이제부터는 대보단의 제사를 지낸 이후로 물려서 지낼 것을 명하였다. 조태채(趙泰采)는 말하기를,
"대보단(大報壇)을 이미 일년(一年)에 한 번 제사를 지내니, 이 선무사(宣武祠)도 추향(秋享)을 마땅히 없애어서 군신(君臣)을 다르게 제사하는 혐의096) 를 면하게 해야 합니다."
하였다. 이유(李濡)가 불가하다고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의사도 병판(兵判)의 말과 같으니, 여러 대신(大臣)에게 물어서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유가 조지서(造紙署)를 문수봉(文殊峰) 아래 조금 평평한 곳에 이전할 것과 탕춘대(蕩春臺)의 창사(倉舍)를 해동(解凍)이 될 시기에 가서 영건(營建)할 것을 청하고, 또 평안도(平安道) 덕지동(德池洞)을 경리청(經理廳)에 이속(移屬)시켜 수용(需用)을 보조케 할 것을 청하였다. 조태채(趙泰采)가 말하기를,
"북한 산성(北漢山城)의 모입(募入)한 자 가운데서 활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수첩 군관(守堞軍官)’이라 명명하여 매월 초하루마다 활쏘기 시험을 보여 입격(入格)된 자에게는 급료를 지불해서 접제(接濟)097) 하는 방도로 삼고, 또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충군(充軍)의 예를 본받아 죄를 범하여 마땅히 전가족을 변방으로 이주시켜야 할 사람들에 대해서는 산성(山城) 가운데 편치(編置)하였으면 합니다."
하고, 이유(李濡)는 또 찬동을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정언(正言) 황귀하(黃龜河)가 아뢰기를,
"오수원(吳遂元)을 다시 탄핵하라는 요청이 바야흐로 일어나고 있는데, 번신(藩臣)098) 이 갑자기 사면령으로 인하여 바로 방질(放秩)에 두었으니, 일의 무엄함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경기 감사(京畿監司) 홍만조(洪萬朝)를 무거운 죄로 추고(推考)하고서."
하고, 또 논핵하기를,
"통제사(統制使) 이석관(李碩寬)은 사람됨이 어리석고 패려한데다 또 주사(酒邪)가 있습니다. 일찍이 남도 병사에 부임하여 오로지 술주정을 일삼아 거조(擧措)가 해괴하므로 군인과 백성들이 수심과 원한에 차 있으니,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이석관(李碩寬)이 취용(取用)할 만한 사람이라 하여 허락하지 않으니, 이유(李濡)가 따라서 구원하였다. 황귀하(黃龜河)가 또 쟁론(爭論)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2월 21일 기사
예조(禮曹)에서 이이명(李頤命)이 영소(永昭)·경녕(敬寧) 이전(二殿)의 위판(位版)을 고쳐 쓰는 일을 차론(箚論)한 것을 가지고 여러 대신(大臣)들에게 의견을 물으니, 영의정(領議政) 이유(李濡)가 의논하기를,
"선조(宣祖)갑진년099) 존호(尊號)를 올릴 때에 효경전(孝敬殿)100) 의 위판을 고쳐 쓰는 한 가지 사항에 대해서 이항복(李恒福)은 깎아내는 것을 미안한 일로 여기지 않았고, 이원익(李元翼)도 참작하여 잘 고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으니, 아마도 굳이 이 점을 염려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이여(李畬)·서종태(徐宗泰)·조상우(趙相愚) 등은 모두 이이명(李頤命)의 차자를 옳다고 여겨 고쳐 쓰지 말기를 청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계해년101) 과는 차이가 있으니, 일전의 하교한 바에 따라 고쳐 쓰도록 하라."
하였다.
2월 22일 경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김만주(金萬胄)와 김보택(金普澤)을 장령(掌令)으로, 이교악(李喬岳)을 헌납(獻納)으로, 홍호인(洪好人)을 필선(弼善)으로, 민진후(閔鎭厚)를 판윤(判尹)으로, 최석항(崔錫恒)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홍우서(洪禹瑞)를 교리(校理)로 삼았다.
일전(日前)에 부수찬(副修撰) 홍치중(洪致中)이 전랑(銓郞) 때의 일로써 사직소를 올려 말하기를,
"호막(湖幕)102) 의 의망에 미루어 오던 자를 곧바로 대망(臺望)103) 에 통과시키고, 병조의 의망에서 저지(沮止)당한 자를 곧바로 영막(嶺幕)104) 에 의망하는 것은 낭관(郞官)의 허락하지 않는 바로서, 당상관(堂上官)이 억지로 통과시키지 못하고, 저해(沮害)하는 말도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독정(獨政)105) 하는 날에 의망하였으니, 이는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바입니다."
하였다. 대개 호막에 미루어져 왔던 자는 이정익(李禎翊)을 가리킨 것이며, 병조(兵曹)에서 저지를 당하였다는 자는 바로 임형(任泂)이다. 이조 참의(吏曹參議) 이의현(李宜顯)이 대변소(對辨疏)를 올려 말하기를,
"이른바 호막에 대해 미루어 왔다는 것은 반복해서 고검(考檢)해 보아도 끝내 기억하여 알 수가 없으며, 그 당시 동참(同參)하였던 두 당상관에게 서신으로 물어보아도 또한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병조(兵曹)에서 저지(沮止)당했다고 한 것에 있어서는 지난번 대정(大政)에서 홍치중(洪致中)이 비록 우선 천천히 하자는 말은 있었으나, 이미 결함을 지적하는 일은 없었고, 막임(幕任)106) 은 청망(淸望)에 비해서 크게 차이가 있기 때문에 신이 과연 맨앞에 의망하여 의심치 않았습니다."
하였다. 홍치중(洪致中)이 또 정석(政席)107) 에서 수작(酬酌)한 이야기를 들어서 기억하여 아는 데에 잘못이 있는 것이라고 하여 이의현(李宜顯)과 여러 번 상소를 통해 쟁변(爭辯)하였다. 이런 뒤로 참판(參判) 이만성(李晩成)이 또한 이것으로써 사직소를 올려 말하기를,
"대정(大政)에서 강계 부사(江界府使)를 차출할 때에 수당(首堂)108) 이 맨끝의 의망에 이정익(李禎翊)을 불렀는데, 낭관(郞官)이 우선 천천히 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으로 대신하였습니다. 혹시 홍치중(洪致中)이 이를 호막으로 잘못 알고 이런 말을 한 것입니까."
하고, 판서(判書) 송상기(宋相琦)도 또한 일찍이 호막(湖幕)의 의망(擬望)에서 이정익(李禎翊)의 이름을 부른 적이 없음을 상소로 변명하였다. 홍치중이 이로 인해 누차 소패(召牌)를 어기고 이의현(李宜顯)도 또한 정고(呈告)109) 하니, 체직시키었다.
2월 25일 계유
부제학(副提學) 권상유(權尙游) 등이 홍문록(弘文錄)110) 을 하여 권수(權𢢝)·김보택(金普澤)·김상원(金相元)·심택현(沈宅賢)·홍만우(洪萬遇)·홍정필(洪廷弼)·한지(韓祉)·송성명(宋成明)·윤봉조(尹鳳朝)·홍석보(洪錫輔)·어유귀(魚有龜)·이진유(李眞儒)·조석명(趙錫命)·홍계적(洪啓迪)·신사철(申思喆)·남도규(南道揆)·김유(金柔)·이병상(李秉常) 등 19인을 뽑았다.
2월 26일 갑술
은진(恩津) 유학(幼學) 한건(韓楗) 등이 상소하여 고(故) 정랑(正郞) 김수남(金秀南)과 홍명형(洪命亨)을 다같이 충열사(忠烈祠)에 추배(追配)할 것을 청하여 말하기를,
"김수남과 홍명형이 남문(南門)의 초루(譙樓)111) 에 같이 올랐고, 김상용(金尙容)과 함께 분사(焚死)하였는데, 지난해에 연신(筵臣)이 홍명형을 추향(追享)하는 일로써 경연(經筵)에서 아뢰기를, ‘똑같이 이 절의(節義)를 세운 사람인데, 어떤 이는 들어가고 어떤 이는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진실로 고르지 못합니다.’ 하였습니다. 아! 연신(筵臣)이 바야흐로 고르지 못하다고 말을 하면서 단지 홍명형 만을 거론(擧論)하고 김수남은 거론하지 않아서 또 고르지 못한 결과가 됨을 면치 못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임금이 해조(該曹)에 품처(稟處)하도록 명하였다. 해조에서 복계(覆啓)하기를,
"김수남(金秀南)과 홍명형(洪命亨)이 같이 사절(死節)했는데, 하나는 들어가고 하나는 들어가지 못하였으니, 결국 고르지 못함이 된다고 한 것은 진실로 상소의 내용과 같습니다. 하지만 한 번 이 길을 터놓아 계속적으로 추배(追配)한다면 일찍이 앞서 배향(配享)을 논의한 여러 사람들이 반드시 장차 분운(紛紜)하게 진청(陳請)하는 폐단이 있을 것이니,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고르지 못함이 되고 모두 허락한다면 신중(愼重)하지 못함이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계속적으로 추배(追配)한다면 신중(愼重)히 하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고, 하나는 허락하고 하나는 허락하지 않는 것은 고르지 못한 결과를 면하지 못하니, 홍명형(洪命亨)을 추배하라는 분부를 도로 중지하고 소사(疏辭)는 그대로 두도록 하라."
2월 27일 을해
영의정(領議政) 이유(李濡), 판부사(判府事) 이여(李畬)·서종태(徐宗泰)·이이명(李頤命), 병조 판서(兵曹判書) 조태채(趙泰采), 예조 판서(禮曹判書) 김우항(金宇杭), 참판(參判) 민진원(閔鎭遠), 참의(參議) 이대성(李大成) 등이 청대(請對)하고 입시(入侍)하였는데, 여러 대신(大臣)들이 진연(進宴)하는 일을 누누이 진청(陳請)하였다. 이때 이여(李畬)가 새로 여주(驪州)에서 도성(都城)에 들어왔는데, 이여가 말하기를,
"신이 병을 무릅쓰고 억지로 올라왔으나 등대(登對)할 길이 없었는데, 여러 대신(大臣)들이 진연(進宴)의 일로써 합사(合辭)하여 진청(陳請)을 하고자 하기 때문에 고달픈 몸으로 부축을 받으면서 들어왔습니다."
하니, 임금이 위유(慰諭)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강력하게 말하기를,
"30년을 경축(慶祝)할 때에는 오히려 진연(進宴)을 하였는데, 더구나 지금 40년을 맞이함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소소한 비용에 구애되어 거행하지 않아서 전례(典禮)에 결함이 있게 하여서는 아니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 등의 청이 이에 이르니, 힘써 허락하기는 하나 가을을 기다려서 거행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이유(李濡) 등이 또 앞당기면 몰라도 뒤로 미뤄서는 안된다는 뜻으로 서로 잇따라 진청(陳請)하니, 임금이 마지 못해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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