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53권, 숙종 39년 1713년 3월

싸라리리 2025. 11. 28.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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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무인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는데, 이 뒤에도 자주 나타났다.

 

3월 2일 기묘

평안도(平安道) 평양(平壤)에 지진(地震)이 일어나서 가옥(家屋)이 흔들리고, 마치 천둥 치는 소리가 들렸다.

 

3월 3일 경진

장령(掌令) 김만주(金萬胄)가 상소하여 과옥(科獄)을 다시 조사하는 일을 논하기를,
"은밀하고 비밀스런 일이라 비록 밝혀내기 어렵다고는 하지만, 만일 반복해서 추고하여 엄밀하게 신고하고 자세히 캐어 묻는다면 실정을 알아내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에 몇 차례의 평문(平問)112)  으로써 그 굳게 숨겨진 자취를 밝혀내려 한다는 것은 또한 소홀한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신은 다시 상세히 조사하여 사실을 알아내어 왕법(王法)을 바로잡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고, 또 이정익(李禎翊)의 일을 논핵하기를,
"지난해에 인피(引避)하며 올린 계사(啓辭)는 의리(義理)의 중대함을 변명(辨明)하고 함정을 만드는 말을 배척한 것이었습니다. 김일경(金一鏡)의 구함(構陷)한 계사(啓辭)는 곧 하나의 변서(變書)였습니다. 어구(語句)를 뽑아내고 자의(字義)를 주석(註釋)하여 반드시 남을 망측(罔測)한 지경에 빠뜨리려 하였던 것은 아! 역시 너무 지나친 짓이었습니다. 그가 아무리 남을 모함하는 데 급급하였다고 하더라도 유독 임금을 속이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하고, 말미에 가서 논하기를,
"승문원(承文院) 참하(參下)113) 김중희(金重熙)와 김유(金濰)는 바로 조언신(趙彦臣)의 좌료(左僚)인데, 빨리 자리를 바꾸기에 급급해서 전조(銓曹)에 거짓으로 보고하여 차서를 뛰어넘어 빨리 승진하였으니, 청컨대 삭직(削職)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끝난 옥사(獄事)를 가지고 굳이 다시 조사할 필요는 없다. 김일경(金一鏡)의 그 당시 계사(啓辭)의 내용은 자못 옳지 못한 바가 있었다. 김중희(金重熙) 등의 일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토록 하라."
하였다. 해조(該曹)에서 복주(覆奏)하여 김만주(金萬胄)의 말을 시인하였는데, 김유는 좌파(坐罷)되어 직명(職名)이 없었기 때문에 김중희만 부정자(副正子)의 직에서 체직되었다.

 

3월 4일 신사

충청도(忠淸道) 진사(進士) 정동장(鄭東章) 등이 상소하여 좨주(祭主) 권상하(權尙夏)를 돈소(敦召)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우비(優批)를 내렸다.

 

3월 5일 임오

이덕영(李德英)을 승지(承旨)로, 홍호인(洪好人)을 장령(掌令)으로, 김상원(金相元)을 지평(持平)으로, 정찬선(鄭纘先)을 수찬(修撰)으로, 권변(權忭)을 부수찬(副修撰)으로, 한영조(韓永祚)를 사간(司諫)으로, 이문흥(李文興)을 필선(弼善)으로, 홍우서(洪禹瑞)를 겸문학(兼文學)으로 삼았다.

 

3월 6일 계미

예조(禮曹)에서 선무사(宣武祠)의 추향(秋享)을 생략하는 문제의 가부(可否)를 가지고 【바로 조태채(趙泰采)가 경연(經筵)에서 아뢴 말로서, 위에 보인다.】  여러 대신(大臣)들에게 문의하니, 판부사(判府事) 이여(李畬)가 의논하기를,
"대보단(大報壇)의 시설을 묘(廟)로써 하지 않고 단(壇)으로 하여 한 해에 한 번 향사(享祀)를 올리는 것은 대개 교천(郊天)114)  의 의미를 본뜬 것입니다. 그 예(禮)가 지극히 존엄(尊嚴)하여 일상적인 제사의 시절(時節)로써 행사(行事)하는 것과는 비교하여 논할 수 없습니다 고금(古今)의 사전(祀典)에는 풍운뇌우(風雲雷雨)·악독(岳瀆)·산천(山川)과 같은 데는 모두 춘추(春秋)로써 제사지내지만, 환구(圜丘)115)  ·방구(方丘)116)  의 예(禮)에 있어서는 한 해에 다만 한 번만 제사를 지내어 드물게 하고 자주 함이 같지 않았으니, 이 어찌 공경이 더욱 지극할수록 제례는 더욱 간결히 하는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선무사(宣武祀)의 제사에는 사(祀)가 있고 판(版)이 있어 일상적인 제사에 배열되어 체모(體貌)가 대보단(大報壇)과는 절연(截然)할 뿐만이 아니니, 비록 한 해에 두 차례 향사(享祀)를 드린다 하더라도 그것이 대보단의 한 번 제사지내는 것에 혐의가 될 것으로 여겨 지지는 않습니다."
하고, 이이명(李頤命)은 의논하기를,
"대보단의 제사는 의리에서 발달된 것이고 예절에는 없는 것입니다. 묘(廟)로 하지 않고 단(壇)으로 하여 한 해에 한 번 제사를 지내니, 그 의리가 지극히 엄하고 그 예절이 비할 데 없어 아마 교사(郊祀)에 견주어 의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래 타사(他祠)와는 그 소삭(疏數)·선후(先後)를 비교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것이며, 또 전대(前代)에 제왕(帝王)을 제사하며 그 신하를 함께 배향(配享)시킨 것과도 스스로 차별이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대일통(大一統)117)  의 의리로써 논한다면 우리 종사(宗社)의 온갖 제사가 모두 그 존엄에 압도당할 터인데, 어찌 유독 선무사(宣武祠)에 있어서만 특별히 그 예절을 줄이겠습니까. 양호(楊鎬)118)  ·형개(邢玠)119)   이공(二公)에 대해서는 그들이 죄를 입은 뒤로부터 화상을 그려 봄 가을로 제사를 지내어 나라의 백성들이 그들의 공덕(功德)을 추모(追慕)하는 생각을 가져 온 지 이미 백년(百年)이 됩니다. 지금 마땅히 갑자기 그 향사(享祀)하는 방식을 변경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두 제사의 예절(禮節)을 가지고 말한다 하더라도 대무(大武)120)  와 강렵(剛鬣)121)  의 희생(犧牲)은 이미 귀천(貴賤)이 다르고 친히 향사(享祀)하고 제관(祭官)을 파견하는 것은 또한 등위(等威)122)  가 판이합니다. 따라서 대보단(大報壇)에 혐의가 구별될 수 있고, 신도(神道)에 있어서도 불안이 없을 것입니다. 아마 굳이 드물게 하고 자주 하는 것으로써 혐의할 필요는 없을 듯하니, 이는 바로 주고(周誥)123)  의 이른바, ‘큰 예절을 두터이하여 사전(祀典)에 기재되지 않은 것까지도 다 질서를 차려서 제사한다.’는 것입니다."
하고, 영의정(領議政) 이유(李濡)와 판부사(判府事) 서종태(徐宗泰)의 의논도 또한 동일하니, 임금이 그대로 두고 줄이지 말도록 명하였다. 또 능침(陵寢)을 수개(修改)할 때 이안(移安)·환안(還安)하는 제사의 명칭을 마땅히 고쳐야 될 것인가의 여부를 가지고 【연설(筵說)은 위에 보인다.】  대신(大臣)에게 의논하니, 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頤命)이 의논하기를,
"그러한 사실이 없는데도 그러한 명칭을 적용하는 것은 비록 사소한 일에 있어서도 오히려 바로잡아야 할 것인데, 하물며 능침(陵寢)의 제사의 경우이겠습니까. 능상(陵上)을 수개(修改)할 때에 이안하거나 환안하는 절차가 없는데, 제사에 그 명칭이 있고 축문(祝文)에도 그 말이 있으니, 이것이 자못 의의(意義) 없는 것임은 진실로 성상의 하교와 같습니다. 이것이 비록 《오례의(五禮儀)》의 ‘산릉(山陵)도 동일하다.’는 조문(條文)에 의거해서 그대로 답습해 온 지가 오래이긴 하지만, 이미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으면 도리상 마땅히 수정해야 할 것이니, 지금부터는 능상(陵上)의 사토(莎土)·석물(石物) 등을 수개(修改)하여 역사(役事)를 시작할 때는 고유제(告由祭)라 칭하고, 축문(祝文)에는 ‘이안(移安)’이라는 말을 쓰지 않아야 하며, 공사를 끝마친 뒤에는 일시(一時)에 동역(動役)을 해서 크게 진경(震驚)시킴이 없으니, 제사를 위안제(慰安祭)라 칭하는 것도 또한 과중(過重)한 듯합니다. 고안제(告安祭)라 칭하여 축문에 ‘환안(還安)’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기수(旣修)·기안(旣安)’의 의미만 진술한다면 아마 변통하는 시의(時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다. 서종태(徐宗泰)의 의논이 이이명과 같았고, 영의정(領議政) 이유(李濡)의 의논도 또한 마땅히 고쳐야 한다는 것을 말하면서 중난(重難)한 일임을 조금 표시하니, 임금이 이이명(李頤命)의 의논에 따라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3월 8일 을유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가고, 유성(流星)이 천강성(天江星) 위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3월 9일 병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가서 존호(尊號)를 받았다. 왕세자(王世子)가 영의정 이유(李濡) 등을 인솔하고 하례(賀禮)를 베풀었으며, 다음에는 영소전(永昭殿)과 경녕전(敬寧殿)에 나아가 존호 책보(尊號冊寶)를 올리고 다시 중궁전(中宮殿)에 나아가 또한 그와 같이 하였다.

 

대전(大殿)에 올린 책문(冊文)에 이르기를,
"천명(天命)이 구방(舊邦)에 유신(維新)되니, 진실로 형가(亨嘉)124)  의 기회에 속하는 것이고, 명예는 반드시 대덕(大德)에서 얻어지니 마땅히 휘현(徽顯)의 칭호를 게시해야 합니다. 이것은 조종(祖宗)의 의장(懿章)을 따른 것이며, 신자(臣子)의 사사로운 정성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삼가 생각건대 주상 전하께서는 하늘이 내신 뛰어난 자품이시고, 도덕은 날로 높은 지경에 올랐습니다. 군사(君師)로 삼으니, 소중히 여기신 것은 민리(民彛)와 물측(物則)이었고, 정교(政敎)에 시행하는 것은 모두가 마음에서 알고 몸소 행한 데에 근본하였습니다. 선조(先祖)를 받드는 데 이미 정성을 다하였고, 부부(夫婦) 관계를 바로 하는 데 더욱 융성함을 극진히 하였습니다. 장릉(莊陵)125)  의 백년(百年) 동안의 광전(曠典)126)  을 거행하니 신인(神人)이 협화(協和)하였고, 중전의 6년 동안의 결렬(決裂)되었던 의식(儀式)을 회복시키니 일월(日月)이 광휘(光輝)를 더하였습니다. 대궐(大闕) 안에 황단(皇壇)127)  을 마련한 것에 있어서는, 이는 바로 지난 사첩(史牒)을 보더라도 번복(藩服)128)  으로는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나라를 임진129)  의 환란에서 재건(再建)시켜 주었으니 은혜가 부모와 같고, 뜻과 사업은 깊이 효종(孝宗)을 추종하였으니 의리가 《춘추(春秋)》에 빛납니다. 운어(雲馭)130)  는 묘망(渺茫)하나 내려와 흠향하는 이치가 격절되지 않았고, 문물(文物)이 윤상(淪喪)된들 어찌 조종(朝宗)의 정성을 망각하겠습니까. 그래서 일세(一世)를 풍동(風動)시켜 인심(人心)에 감격을 주었으니, 곧 천년을 전하여 천하에 떳떳한 말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제왕(帝王)의 거룩한 절목이며 실로 국가의 아름다운 빛입니다. 위대한 요·순(堯舜)의 정치도 돈륜(惇倫)의 지극함에 지나지 않습니다. 순연(純然)히 의리의 올바름으로 능히 일을 처리하는데 마땅함을 다하였습니다. 비록 성덕(聖德)이 겸양하여 자처하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돌아보건대, 뭇사람들의 발양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어찌 억제할 수 있겠습니까. 신 등은 대원(大願)을 견디지 못하여 삼가 보책(寶冊)을 받들어, ‘현의 광륜 예성 영렬(顯義光倫睿聖英烈)’이란 존호(尊號)를 올리옵니다.
삼가 바라건대 주상 전하(主上殿下)께서는 힘써 여러 사람의 말에 답하시어 더욱 큰 계획을 펼치셔서, 바로잡고 곱게 하여 만품(萬品)을 화락의 경지로 이끌어 주시고, 높고 두터움은 양의(兩儀)131)  에 배합하여 영원하도록 하옵소서."
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여(李畬)가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61책 53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487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


[註 124] 형가(亨嘉) : 좋을 때를 만남.[註 125] 장릉(莊陵) : 단종(端宗)의 능.[註 126] 광전(曠典) : 광고(曠古)의 성전(盛典).[註 127] 황단(皇壇) : 대보단(大報壇)을 말함.[註 128] 번복(藩服) : 제후(諸侯)의 나라를 말함.[註 129] 임진 : 1592년 선조 25년.[註 130] 운어(雲馭) : 운사(雲使)를 말함.[註 131] 양의(兩儀) : 천지(天地)를 말함.

 

영소전(永昭殿)에 올린 책문(冊文)에 이르기를,
"중신(重宸)의 현저한 공렬(功烈)을 찬양하여 성대한 의식을 이에 거행하고, 원비(元妃)의 가지런한 아름다움을 우러러 생각하여 가호(嘉號)를 추천(追薦)하나이다. 이전(彛典)이 이에 있으니, 성덕(盛德)이 더욱 빛나옵니다. 삼가 생각건대 인경 왕후 전하(仁敬王后殿下)께서는 높은 가문에 상서로움이 생겨서 즉위하시기 전에 배위(配位)가 되시었습니다. 의범(懿範)은 일찍이 거룩하여, 그로 인해 숙목(肅穆)132)  한 기풍이 이루어졌고, 남모르는 공력으로 내조를 하여 그를 힘입어 영장(靈長)의 경사가 이룩되었습니다. 선령(仙齡)이 감소되어 궁중(宮中)을 다스리는 일을 끝까지 못하셨으나, 보명(寶命)이 새로우매 성덕(聖德)이 더욱 숭고합니다. 거룩한 아름다움을 찬양(讚揚)하여 큰 칭호를 올리는 것은 실로 고사(故事)에 따른 것이요, 지존(至尊)을 짝하시어 현책(顯冊)을 받는 것은 이에 상규(常規)가 있습니다. 어찌 감히 아름다움을 찬양하여 형용하겠습니까. 임금의 높은 공과 빛나는 덕에 아울러 빛내는 것이 진실로 마땅할 것입니다. 뭇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다 기뻐하여 성대한 예(禮)를 이에 거행하나이다. 신 등은 대원(大願)을 견디지 못하여 삼가 보책(寶冊)을 받들어 ‘광렬(光烈)’이란 존호(尊號)를 올립니다.
삼가 바라건대 왕후 전하(王后殿下)께서는 부디 명림(明臨)을 하시어 굽어 융성(隆盛)함을 받으셔서, 큰 복을 종사(宗祀)에 펼쳐 만년 무강(萬年無彊)토록 하시고, 유순한 덕화가 궁중에 영원히 전하여 이남(二南)133)  과 동일한 법칙이 되게 하소서."
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서종태(徐宗泰)가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61책 53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487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


[註 132] 숙목(肅穆) : 삼가하고 유순함.[註 133] 이남(二南) : 《시경》의 주남(周南)·소남(召南) 두 편명(篇名).

 

경녕전(敬寧殿)에 올린 책문(冊文)에 이르기를,
"땅은 하늘을 받들어 유순한 덕을 행하니 지극한 덕을 잊기가 어려우며, 달은 태양을 짝하여 광휘를 더하니 남기신 공렬(功烈)을 마땅히 천양해야 합니다. 이에 의호(懿號)를 높이어 이장(彛章)134)  을 빛내나이다. 삼가 생각건대 인현 왕후 전하(仁顯王后殿下)께서는 성품이 유순하고 자질이 침착하였습니다. 자성(慈聖)의 묘선(妙選)135)  을 입으시어 이어서 중전(中殿)에 오르시었습니다. 잠시 폐위(廢位)된 어려움에서 다시 복위(復位)된 길함을 얻으셔서 재차 내치(內治)를 바르게 하셨으며, 은밀한 가르침을 멀고 가까운 데 온당하게 베풀어 희사(熙事)136)  를 종묘(宗廟)에 협찬(協贊)하시었습니다. 제명(齊明)137)  의 정성은 대개 기쁜 마음과 깊은 사랑에 근본하였고, 근외(謹畏)하는 생각은 항상 경계(儆戒)하여 도와 이루는 데 간절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좋은 평판이 시종토록 쇠퇴하지 않았으니, 돌아보건대, 아름다운 칭호가 어찌 유현(幽顯)에 차이가 있겠습니까. 이에 성대한 의식을 새로 거행함에 있어서 다시 비책(丕冊)을 더 높이는 바이옵니다. 신 등은 대원(大願)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삼가 책보(冊寶)를 받들어 ‘효경(孝敬)’이란 존호를 올립니다.
삼가 바라건대 왕후 전하께서는 숙령(淑靈)을 돌리시어 굽어 흠윤(歆允)을 내리셔서, 동사(彤史)138)  에 꽃다운 이름을 남겨 길이 백대(百代)에 성덕(盛德)을 전하시고, 요도(瑤圖)에 경사를 펼치시어 오히려 이남(二南)의 풍화(風化)를 힘입게 하소서."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송상기(宋相琦)가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61책 53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488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


[註 134] 이장(彛章) : 법칙.[註 135] 묘선(妙選) : 인선(人選)을 썩 잘함.[註 136] 희사(熙事) : 복(福)된 일.[註 137] 제명(齊明) : 재계 명결(齋戒明潔)함.[註 138] 동사(彤史) : 옛날 여사(女史)의 이름. 붉은 빛의 붓대를 가지고 사건을 기록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임. 주로 궁중(宮中)의 정령(政令)과 후비(后妃)의 일에 대하여 기록하는 책임을 맡았음.

 

중궁전(中宮殿)에 올린 책문(冊文)에 이르기를,
"궁위(宮闈)에서 왕화(王化)의 터전을 마련하여 큰 명(命)을 맞이하였으며, 완염(琬琰)139)  에다 모의(母儀)를 찬송하며 큰 이름을 올리나이다. 큰 전례(典禮)를 비로소 행하게 됨에, 훌륭한 계획을 이에 드리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왕비 전하께서는 지위는 높아 내전(內殿)을 바로잡으시고, 학문(學文)은 귀중하게 마음에 간직하셨습니다. 일심(一心)은 보상(輔相)하여 이루는 데 두시어 언제나 제시(齊詩)140)  처럼 밤낮으로 경계하셨으며, 성대한 공렬은 유의(遺義)대로 도우시어 한후(漢后)141)  처럼 《춘추(春秋)》를 깊이 이해하였습니다. 나라의 운수는 그로 인해 능히 창성하고, 궁중의 법도는 그로 인해 더욱 드러났습니다. 화풍(和風)이 만물을 기르듯이 온화하는 은택이 사람들에게 스며들었으며, 중후(重厚)한 땅이 하늘을 받드는 이치를 본받으시었고, 유순한 덕은 천성(天性)에 근본하시었습니다. 이미 양극(兩極)142)  이 그 휴미(休美)를 짝하셨기에 두 글자를 가지고 이렇게 함께 찬양하나이다. 조종(祖宗)의 행하신 바가 있으니 마땅히 조야(朝野)의 지극한 기대에 부응하셔야 합니다. 신 등은 큰 소원을 견딜 수가 없기에 삼가 책보(冊寶)를 받들어 ‘혜순(惠順)’이란 존호(尊號)를 올립니다
삼가 바라건대 왕비 전하께서는 현책(顯冊)을 잘 받으시어, 홍도(弘圖)143)  를 도와 천양하소서. 가르침을 구빈(九嬪)144)  에게 펴셔서 동사(彤史)의 빛나는 기록을 남기시며, 경사를 백세에 넘치게 하시어 보조(寶祚)가 장구히 전해 가도록 도와주소서."
하였다. 【우참찬(右參贊) 김진규(金鎭圭)가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61책 53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488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


[註 139] 완염(琬琰) : 아름다운 옥돌.[註 140] 제시(齊詩) : 《시경(詩經)》 제풍(齊風)의 계명장(鷄鳴章)을 말한 것으로, 이 시에서는 어진 후비(后妃)가 왕에게 일찍 일어나서 정무(政務)를 보살필 것을 권면한 내용임.[註 141] 한후(漢后) : 후한(後漢) 명제(明帝)의 후(后)의 마 황후(馬皇后)를 이름. 그는 《역경(易經)》을 외고 《춘추(春秋)》를 익혀 대의(大義)를 대략 기억했다고 함.[註 142] 양극(兩極) : 왕과 왕비를 말함.[註 143] 홍도(弘圖) : 왕의 대업.[註 144] 구빈(九嬪) : 부관(婦官)임. 《예기(禮記)》 혼의(昏義)에 ‘옛적에 천자(天子)의 황후(皇后)는 육궁(六宮) 삼부인(三夫人)·구빈(九嬪)·이십칠세부(二十七世婦)·팔십일어처(八十一御妻)를 세운다.’하였음.

 

대전(大殿)의 악장(樂長)은 유천지곡(維天之曲)이라 하였는데, 이르기를,
"하늘이 성인을 내셨으니,
옛분보다 높으십니다.
우리 곤위(坤位)를 회복하셨으니,
이륜(彛倫)이 펼쳐졌도다.
우리 종사(宗祀)를 존숭(尊崇)하시어,
전에 없는 법을 이에 거행하셨도다.
엄숙한 궁묘(宮廟)를
사방(四方)이 믿게 됐도다.
또한 의로운 질문(質問)이 있다면,
존주(尊周)를 분명히 내세우겠네.
하늘의 기강을 수립(樹立)하셨으니,
크게 은혜 베푼 영왕(寧王)이로다.
진실로 우리 임금이시여
아름답게 환한 빛이 있도다.
후인(後人)들을 인도하고 도와주시어,
만세(萬世)토록 창성케 하옵소서."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송상기(宋相琦)가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61책 53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488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

 

영소전(永昭殿)의 악장(樂長)은 순성곡(順成曲)이라 하였는데, 이르기를,
"하늘이 현숙(賢淑)한 덕을 명하시어,
왕의 초년에 배합되었도다.
나라의 비운(否運)을 거쳤으나,
마침내 태운(泰運)으로 회복되었습니다.
하늘을 돌로 기우시어,145)  현기(玄機)146)  가 이에 돌아갑니다. 함묵(含默)하시나 빛이 나서 그 정렬(貞烈) 순히 이루었네. 비록 자취는 감추셨으나, 전하는 은택은 길기만 하네. 아! 소명(昭明)에 만년(萬年)을 두고 우리 종사 도와주소서." 하였다. 【우참찬(右參贊) 김진규(金鎭圭)가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61책 53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488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


[註 145] 하늘을 돌로 기우시어, : 중국의 여와씨(女堝氏)가 오색석(五色石)으로 하늘을 기웠다는 전설(傳說)을 인용한 것임. 《회남자(淮南子)》 남명훈(覽冥訓)에 ‘여와연오색석 이보창천(女禍鍊五色石 以補蒼天)’이라 보임.[註 146] 현기(玄機) : 현묘(玄妙)한 이치.
현기(玄機)146)  가 이에 돌아갑니다.
함묵(含默)하시나 빛이 나서
그 정렬(貞烈) 순히 이루었네.
비록 자취는 감추셨으나,
전하는 은택은 길기만 하네.
아! 소명(昭明)에 만년(萬年)을 두고
우리 종사 도와주소서."
하였다. 【우참찬(右參贊) 김진규(金鎭圭)가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61책 53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488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


[註 145] 하늘을 돌로 기우시어, : 중국의 여와씨(女堝氏)가 오색석(五色石)으로 하늘을 기웠다는 전설(傳說)을 인용한 것임. 《회남자(淮南子)》 남명훈(覽冥訓)에 ‘여와연오색석 이보창천(女禍鍊五色石 以補蒼天)’이라 보임.[註 146] 현기(玄機) : 현묘(玄妙)한 이치.

 

경녕전(敬寧殿)의 악장(樂長)은 영범곡(永範曲)이라 하였는데, 이르기를,
"단정하신 우리 왕후여,
온순하고 공손하였도다.
성자(聖慈)147)  에 순종하시나,
간위(艱危)를 당하셨도다.
마치 달이 그믐이 되었다가,
다시 둥근 그 빛이었네.
시종(始終) 밤낮으로,
겨울이나 가을 제를 받들었네.
오직 이에 이른 것은,
덕이 근본이 되었습니다.
아! 효성과 공경은,
길이 궁중에 모범이 되겠습니다."
하였다. 【우참찬(右參贊) 김진규(金鎭圭)가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61책 53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488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


[註 147] 성자(聖慈) : 왕대비.

 

중궁(中宮)의 악장(樂長)은 사제지곡(思齊之曲)이라 하였는데, 이르기를,
"단정하신 성녀(聖女)시여,
우리 왕의 배필이 되시었도다.
지극하게도 하늘을 받드시니,
만물을 감싸주어 빛을 같이하였도다.
궁중의 법도 닦으시니,
그 풍도(風度) 온화하도다.
나라를 도와 다스리는데,
음공(陰功)이 아님이 없네.
오직 은혜롭고 유순하심은,
그 덕이 두터움이라.
유순한 법도를 영원히 하시어,
하늘이 주는 복록을 받으소서."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송상기(宋相琦)가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61책 53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488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

 

팔방(八方)에 반사(頒赦)하고 교문(敎文)을 반포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옛 전례(典禮)를 따르고 여러 사람의 마음을 따라서 마지못해 휘호(徽號)를 받았으니, 새로운 은덕을 찬란히 하여 대폭 사면(赦免)을 단행하는 것은 큰 기쁨을 나누는 것이다. 이에 윤음(綸音)을 반포하여 나의 속마음을 털어놓는 바이다. 생각해보면 부족한 사람이 외람되게 성신(聖神)의 업을 이어받았도다.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를 내세웠으나 감히 선대의 뜻을 계승했다 할 수 있겠는가. 광전(曠典)을 종묘에서 수행(修行)하니, 이는 천도(天道)가 반드시 펴지는 데 연유한 것이다. 중전(中殿)의 체모가 다시금 빛나게 된 데 있어서는, 단지 지난 잘못을 뒤늦게나마 고친 것이 다행일 뿐이로다. 왕의 지위를 욕되게 한 지 40년이 되었는데, 돌아보건대 잘못된 정사를 한 두 가지로 말하기 어렵다. 왕공(王公)에게는 고(孤)·과(寡)의 칭호가 있으니 억제와 겸손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고, 신민(臣民)은 애대(愛戴)의 염원이 간절하여 오히려 존숭(尊崇)하려 하였다. 내 진심이 신뢰를 받지 못하는 것을 개탄(慨歎)하여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거듭 호소하였다.
생각건대 선왕(先王)은 도(道)가 높고 덕이 성대하였으니 칭송을 하는 것이 진실로 마땅하고, 생각건대 중흥(中興)을 하여 정치가 안정되고 공업이 이룩되었으니 드러내어 찬양하는 것이 옳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자신을 돌이켜 볼 때 부족함이 있다. 크게 나타나고 크게 계승해 온 대업(大業)을 오직 능히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는데, 대경(大經) 대법(大法)을 또한 어찌 빠짐없이 밝히겠는가. 겸양하는 뜻을 수차에 걸쳐 표현한 것이 허위와 가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으나, 간곡한 정성이 더욱 지극하기에 끝까지 사양해도 되지 못하였다. 이미 볼 만한 사업이 없으니, 이름과 실상이 부합되지 않을까 깊이 두려워한다. 비록 마음은 풍화(風化)에다 두었지만 족히 말할 것이 없으니, 마치 조종(祖宗)에 아름다움을 짝하는 것이야 어찌 감히 이를 감당하겠는가. 성인(聖人)은 공자(孔子)께서도 오히려 자처(自處)하지 않으신 바요, 공렬(功烈)은 곧 무왕(武王)보다 더한 분이 없는데, 이것을 나에게 외람되게 더한다면 나의 부덕(不德)을 더하는 것이 된다. 이장(彛章)이 비로소 빛나니, 현책(顯冊)을 받아도 영화롭지 않도다. 성대한 의식을 친히 보게 되니, 초심(初心)을 돌아봄에 부끄러움이 많도다. 그러나 아름다운 데로 귀결되는 성거(盛擧)를 당하여 어찌 동경(同慶)148)  하는 상규(常規)가 없을 수 있겠는가.
이에 일시지인(一視之仁)149)  을 미루어 크게 사방으로 은택을 미치게 하노라. 이달 초9일 매상(昧爽)150)   이전으로부터 잡범(雜犯)으로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용서하여 풀어주고, 벼슬에 있는 자는 각각 한 자급(資級)씩 올려 주도록 하며 자궁자(資窮者)는 대가(代加)하도록 하라. 아! 군자(君子)는 태만함이 없어져야만 나라의 운명이 새로워 질 수 있는 법이다. 표준을 세우고 나아가 다스리는 것은 서정(庶政)의 더욱 힘씀을 기약하는 것이니, 허물[垢]을 씻고 허물을 씻어 주어서 모두를 감싸 안아 함께 살려한다. 그래서 이렇게 교시(敎示)하는 것이니, 생각건대 마땅히 잘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송상기(宋相琦)가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61책 53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488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 / 사법-행형(行刑) / 인사-관리(管理)


[註 148] 동경(同慶) : 같이 기뻐함.[註 149] 일시지인(一視之仁) : 누구나 차별없이 똑같이 사랑함.[註 150] 매상(昧爽) : 날이 새려고 막 먼동이 틀 무렵.

 

홍우서(洪禹瑞)를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삼았다.

 

3월 10일 정해

홍치중(洪致中)을 교리(校理)로, 이만견(李晩堅)을 사인(舍人)으로 삼았다.

 

대사(大赦)로 인하여 정배(定配)된 사죄인(死罪人) 이돈(李墩)과 원찬 죄인(遠竄罪人) 이세덕(李世德)과 문출 죄인(門黜罪人) 권무경(權懋經)을 방면하였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이돈(李墩)의 여러 가지 죄상은 사증(詞證)이 모두 분명하여 당초에 부처(付處)한 것도 이미 관전(寬典)에서 나온 것인데, 또 대경(大慶)으로 인하여 갑자기 석방을 해준다면 죄 있는 자들을 어떻게 징계하겠는가.


【태백산사고본】 61책 53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488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사법-행형(行刑)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논한다. 이돈(李墩)의 여러 가지 죄상은 사증(詞證)이 모두 분명하여 당초에 부처(付處)한 것도 이미 관전(寬典)에서 나온 것인데, 또 대경(大慶)으로 인하여 갑자기 석방을 해준다면 죄 있는 자들을 어떻게 징계하겠는가.

 

이세덕(李世德)을 곧바로 방질(放秩)에 두었다 하여 경상 감사 이탄(李坦)을 추고(推考)하라고 명하였다.

 

3월 11일 무자

눈이 내렸다.

 

전교하기를,
"바야흐로 계춘(季春)의 달을 당하여 양기(陽氣)가 발설할 때인데, 때를 맞추어 내리던 비의 끝에 눈이 잇따라 내려 미시(未時)로부터 유시(酉時)까지 이르니, 추운 겨울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재앙이 이르게 된 것을 추구하여 보면 진실로 부덕한 데 연유한 것이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하늘의 성냄을 공경하여 감히 희롱하고 즐기지 말라.’ 하였으니, 재이(災異)가 이와 같은데도 연례(宴禮)를 그대로 행한다면 어찌 매우 미안하지 않겠는가. 진연(進宴)을 정지토록 하라."
하였다.

 

3월 12일 기축

눈이 내렸다.

 

정언(正言) 홍계적(洪啓迪)이 상소하기를,
"보책(寶冊)을 끝마치고 의식을 거행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종사의 큰 경사입니다. 다만 신이 곁에서 삼가 듣건대 4, 5일 전에 궁중에서 노래 부르는 소리가 외정(外庭)까지 들려나왔다 하니, 이것이 사실이라면 옛 성인의 정성(鄭聲)151)  을 물리친다는 경계에 어긋남이 있는데, 하자(瑕疵)가 되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약 관약(管龠)152)  의 소리를 듣고자 하신다면 악관(樂官)의 팔음(八音)153)  이 있고, 만약 무도(舞蹈)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다면 광정(廣庭)의 육일(六佾)154)  이 있습니다. 하물며 구문(九門)155)  의 안이 얼마나 엄숙한 곳인데, 떠들고 시끄러운 소리에 듣는 자마다 이상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신은 그곳에 설치한 것이 무슨 놀음이고 재주를 부린 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습니다마는, 설혹 그날의 놀음이 전하께서 듣지 못하시는 곳에 있었다 하더라도 외인들이 다만 그 소리가 대궐로부터 흘러나옴을 들었다면 어찌 전하께서 나와 보시지 않았으리란 것을 알길래 염려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성상께서 국사에 대하여 점차 게으른 생각이 있으셔서 이목(耳目)의 욕구에 혹시 능히 자제(自制)를 못하셨다면 걱정스러움이 매우 적지 않습니다. 바야흐로 봄날 싸락눈의 때아닌 경계에도 재이(災異)라고 아니할 수 없으니, 이는 큰 경사의 끝에 경계할 것을 일러 주어서 우리 전하로 하여금 두려워하여 불안하게 한 것이니, 하늘의 인애(仁愛)하는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곧 지금 삼가 비지(備旨)를 보았는데, 진연(進宴)을 멈추라는 명이 있으시니, 전하께서 일심(一心)으로 하늘에 대하여 천견(天譴)에 보답하심이 지극하십니다. 다만 외면(外面)에 보여 주신 바가 비록 팔도(八道)에 널리 알리는 교지에서 여러 사람의 귀를 쫑긋하게 할 만한 말씀이 있더라도 내심(內心)으로 간직하고 계신 바가 소홀하기 쉬운 곳에서 출입(出入)을 삼가지 못하신다면, 재이(災異)를 당하여 경계하신다는 것은 공언(空言)에 불과하고 서울과 지방에 알린 말씀도 형식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하늘의 마음에 맞아 영원히 무궁한 복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앞으로는 구사(丘史)156)  가 대궐의 뜰에 출입하는 것이나 성악(聲樂)이 사람의 마음을 방탕케 하는 것은 일체 금하여 끊으시고 몹시 배척하여 거절하신다면, 거의 내외(內外)가 엄숙해지고 사음(邪淫)이 멀어질 것입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그대가 언관의 지위에 있는 몸으로서 임금이 잘못이 있을까 하여 들은 대로 아뢰니,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겨 감탄하는 바이다. 만약 간신(諫臣)의 말이 아니었다면 이런 해괴한 일을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상소를 보고 나니 매우 놀라운 일이다. 모여서 노래부른 자들을 유사(攸司)로 하여금 조사해 내도록 해야 할 것이며, 구사(丘史) 등을 엄격히 징계해야 한다는 것도 사리에 매우 맞는 말이니, 어찌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하고, 곧 표피(豹皮) 1령(令)을 내려주어 가상히 여기는 뜻을 표하였다.

 

도당(都堂)에서 홍목록(弘文錄)을 뽑았는데, 송성명(宋成明)·홍계적(洪啓迪)·이병상(李秉常)·김보택(金普澤)·김상원(金相元)·심택현(沈宅賢)·홍만우(洪萬遇)·홍정필(洪廷弼)·황귀하(黃龜河)·한지(韓祉)·윤봉조(尹鳳朝)·신정하(申靖夏)·홍석보(洪錫輔)·어유귀(魚有龜)·이진유(李眞儒)·신사철(申思喆)·김유(金楺) 등 18인을 뽑았다.

 

3월 13일 경인

지사(知事)        이광적(李光迪)이 상소하기를,
"신의 견마(犬馬)157)                  의 나이가 86세인데 다행히 잠시라도 앞당겨 죽지 않았던 탓으로 숭호(嵩呼)의 반열에 참여할 수 있었으니, 감히 봉인(封人)의 축수(祝壽)158)                  를 본받아 조금 연하(燕賀)의 정성을 펴고, 또 고요(睾陶)의 갱가(賡歌)159)                  로 진계(進戒)한 뜻으로써 외람되게 양심(良心)의 잠(箴)을 드리나이다."
하였는데, 그 소(疏)에 맨 먼저 ‘천지(天地)가 그 덕을 합하고 일월(日月)이 그 밝음을 합한다.’는 말을 인용하였고, 사(辭)를 붙였는데, 그 사에 이르기를,
"높은 저 하늘은 명(命)이 깊고 아득하도다. 강건(剛健)하고 망령됨이 없으니, 잠시도 지식(止息)됨이 없도다. 성군께서 건도(乾道)로 인하여 하늘을 본받으셨으니, 포용하고 넓고 빛나고 커서 아래를 내려보시기를 밝게 하셨었습니다. 인덕(仁德)이 천하를 덮으시니 덕의 베풀어짐이 넓도다. 성상(聖上)께서 왕위(王位)에 계셔서 국운(國運)이 만억 년을 누리실 것이며, 수명(壽命)이 하늘과 같으시기를 신은 절하고 비나이다. 땅의 형세는 곤(坤)이 되나니, 그 덕은 후하시도다. 부드럽고 고요하여 널리 퍼져 있도다. 성후(聖后)가 법을 본받아 건극(乾極)160)                  에 짝하셨습니다. 만물을 보호 간직하며 모든 것을 열어놓았도다. 유(柔)와 강(剛)으로 지도(地道)가 서게되며, 경(敬)과 의(義)로써 바야흐로 정대(正大)하고 정직(正直)하셨으니, 지도(地道)에 응하여 무강(無彊)하시기를 신은 절하고 비나이다. 태양은 하늘에 달려 있어, 환히 내려 비추니 달린 형상(形象)은 훤하게 여러 사람의 눈으로 보게 하였도다. 성후(聖后)는 밝고 밝으시어 다가가면 해와 같도다. 밝게 마음을 비추시니 사정(邪正)이 분명히 분석되고, 임금의 감식(鑑識)이 밝은 해와 같으시니 도깨비[魑魅]들을 물리쳤습니다. 빛이 사방에 비치고 위와 아래에 이르렀으니, 하늘이 오래도록 비춰주시기를 신은 절하고 비나이다. 달은 음(陰)의 영(靈)이니, 감(坎)161)                  의 덕을 본떴습니다. 밤이면 갈음하여 밝혀서 날 빛을 이어주셨습니다. 성후(聖后)의 밝으신 덕은 옥촉(玉燭)으로 밝게 비추어 어두운 듯하면서 밝으시니, 사방의 말을 밝게 들으셨으며, 초하루와 그믐, 혹은 초승달로서 성상의 실수하심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삼무사(三無私)162)                  를 받들어서 공도(公道)가 열렸으니, 달처럼 항구(恒久)하기를 신은 절하고 비나이다."
하고, 그 잠(箴)에 이르기를,
"오직 하늘이 충심(衷心)을 내린 것은 이치로 사람에게 주어졌습니다. 마음은 태극(太極)이 되어서 일신을 주재하게 됩니다. 허령(虛靈)하고 어둡지 않아 감응(感應)하여 마침내 통합니다. 외물이 형체에 부딪혀서 그 중심(中心)을 움직이게 됩니다. 나가고 들어옴이 일정함이 없으므로, 놓이기는 쉽고 잡기는 어렵습니다. 얼음이 아닌데도 차갑고 불이 아닌데도 타게 됩니다. 올라가서 더러는 하늘에 날으고, 내려와서 더러는 못에 빠집니다. 날카로운 칼날로도 막기 어렵고 사나운 말[馬]로도 길들이기 어렵습니다. 진실로 그 수양(修養)을 얻게 되면 청명(淸明)함이 몸에 있게 되어 얼굴이 청수해지고 등에도 윤택하며 정신이 왕성하고 기운이 충만합니다. 진실로 그 수양(修養)을 잃게 되면 형체(形體)에게 사역(使役)되어 생(生)을 잊고 욕(慾)을 따라 그 덕을 잃게 됩니다. 범부(凡夫)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군주이겠습니까. 다만 이 방촌(方寸)이 만화(萬化)의 근원이 됩니다. 썩은 새끼는 끊어지기 쉽고 육마(六馬)는 부리기가 어렵습니다. 한 생각을 착하게 가지면 경운(慶雲)이 뜨고 감로(甘露)가 내리며, 한 생각을 나쁘게 가지면 상서롭지 못한 기운과 요괴(妖怪)한 천변(天變)이 나타나게 됩니다. 방구석의 은밀한 곳에서 이 마음이 소홀하기가 쉽고, 집안의 깊고 넓은 곳에서 이 마음이 방사하기 쉬우며, 희(喜)·노(怒)·애(哀)·락(樂)과 성(聲)·색(色)·취(臭)·미(味)가 사이에 뛰어들고 틈을 비집고 들어 와서 그 마음의 병이 되니, 나의 진원(眞元)163)                  을 녹이고 나의 본성(本性)을 해치게 됩니다. 육기(六氣)164)                  가 허(虛)함을 틈타 들어오고, 이수(二豎)165)                  가 번갈아 침노하게 되는데, 약으로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아니요, 다스리는 법은 마음에 있습니다. 본원(本源)을 가라앉혀 기르는 것이 이것이 신묘(神妙)한 비결이 됩니다. 수양하기를 어떻게 하겠는가 하면 정하게 살피고 전일하게 가져야 합니다. 마음을 곧게 먹고 행실을 정직하게 하며, 사심(邪心)을 막고 성심(誠心)을 보존해야 합니다. 노력할 것을 잊지도 말고 억지로 돕지도 말아서, 마치 움튼 싹을 보호하듯 하며, 이를 생각하고 마음을 여기에 두어 공벽(拱璧)166)                  을 두 손으로 받들 듯이 해야 합니다. 욕심은 나의 적(敵)이 되는 것이니 구렁을 메우듯 막고, 분노(忿怒)는 나의 해가 되는 것이니 산(山)을 꺾듯이 징계해야 합니다. 사물(四勿)167)                  을 기(旗)를 휘두르듯이 하고, 사단(四端)168)                  을 샘물 통하듯 해야 합니다. 요염(妖艶)한 얼굴이 눈을 기쁘게 하면 미혹하는 악인(惡人)처럼 대하고, 진한 맛이 입을 상쾌하게 하면 침독(酖毒)169)                  같이 두려워하소서. 찌꺼기가 녹아 없어지게 하여 나의 옥연(玉淵)을 수양하고 의리(義理)로 물을 주어 나의 단전(丹田)을 배양(培養)하소서. 천군(天君)170)                  이 태연하면 백체(百體)가 명령을 따르게 되고, 정기(正氣)가 주인이 되어야 객기(客氣)가 물러나게 됩니다. 감(坎)171)                  ·리(离)172)                  가 서로 도우면 태우(泰宇)173)                  는 언제나 봄기운이 되며 도(道)의 진수(眞髓)가 몸을 살찌게 하고 덕의 빛이 몸을 윤택하게 할 것입니다. 삼팽(三彭)174)                  이 녹아 없어지고 육맥(六脈)이 화창하게 되며, 영위(榮衛)가 탈이 없고 기혈(氣血)이 모두 왕성하여 뜻밖의 병은 약을 쓰지 않아도 될 것이요, 강녕(康寧)하고 장수(長壽)하여 하늘이 오복(五福)을 내릴 것입니다. 아! 우리 임금께서는 이를 힘쓰지 않겠습니까. ‘양심(良心)’이란 두 글자는 말은 비근(卑近)하나 뜻은 심장(深長)하니, 병을 치료하거나 나라를 다스리거나 그 방도는 동일합니다. 이미 중화(中和)만 이룩하신다면야 어찌 위육(位育)175)                  이 어렵겠습니까. 춘대(春臺)의 수역(壽域)은 이렇게 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늙은 신하가 잠(箴)을 지어서 감히 단의(丹扆)176)                   앞에 드리나이다."
하였다. 임금이 답하기를,
"노신(老臣)의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성이 매우 가상하다."
하고, 호피(虎皮) 1령(令)을 주어 가상히 여기는 뜻을 표하게 하였다.

 

3월 14일 신묘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지사(知事) 민진후(閔鎭厚)가 아뢰기를,
"성주(星州)의 옥사(獄事)는 참으로 큰 변고이니, 조사를 조금이라도 늦출 수 없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보내는 어사를 연달아 체개(遞改)하여 아직도 내려가지 못하고 있으니, 자못 염려스러운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오늘의 정사(政事)에서 차출(差出)하여 속히 내려가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부제학(副提學) 권상유(權尙游)를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고 하교하기를,
"대사헌(大司憲)  【바로 권상유의 형 권상하(權尙夏)이다.】 이 여러 번 소지(召旨)를 받고도 한 번도 명에 응하지 않으므로 평생에 그 얼굴을 모르고 있으니, 서운함을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국사가 이러하니 이런 때에 유현(儒賢)이 경연(經筵)에 출입을 한다면 진실로 다행한 일이다. 대사헌은 세록(世祿)의 신하로서, 애당초 몸만 깨끗이 하려고 고상한 길만 걷던 사람이 아니니, 끝까지 고집만 부릴 것이 아니라고 본다. 경(卿)은 모름지기 나의 이 뜻을 전하여 반드시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권상유(權尙游)가 사례(謝禮)하기를,
"신의 형이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세록의 신하로서 유일(遺逸)의 선비와는 다르지만, 이제 나아갈 수 없는 까닭이 두 가지가 있다. 내가 조년(早年)에 병을 얻어 고향으로 물러나와 있었는데, 조정에서 혹시 학문의 공부라도 있는가 하여 여러번 정초(旌招)177)  를 하여 높은 작질(爵秩)에 이르렀다. 이제 만약 나가서 명에 응하면 실로 겸퇴(謙退)로써 출사(出仕)를 도모한 혐의가 있을 것이니, 이것이 나아갈 수 없는 한 가지 이유이다. 그리고 나이가 지금 73세가 되어서 근력이나 정신이 이미 모조리 소모되어 버렸으니, 그전에 벼슬하던 사람들도 이 나이가 되면 고로(告老)178)  를 하고 일을 그만두는 것인데, 하물며 재야(在野)의 몸으로서 어찌 무턱대고 조정에 나갈 수 있겠는가. 이것이 나아갈 수 없는 두 번째 이유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삼가 성상의 명령대로 신의 형에게 자세히 말하겠습니다마는, 그의 주장은 이와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윗 조항의 말은 지나친 겸사이고, 아랫 조항의 말은 늙은이 우대하는 도리상 진실로 직사(職事)로써 유현(儒賢)을 책언(責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려서 배워 장성하여 행하려는 것이 그 본디 뜻이니, 마음을 돌려 조정으로 나와주기를 나는 바라노라. 만약 올라오면 도헌(都憲)179)  을 마땅히 체직해 주려니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역시 그의 청을 억지로 들어줄 수 없다. 경은 모름지기 이런 뜻으로 전하라."
하였다. 부교리(副校理) 이택(李澤)이 말하기를,
"권상유가 비록 성유(聖諭)를 직접 받았지만 승정원으로 하여금 또 별도로 개유(開諭)하게 하시면 더욱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부제학(副提學)으로 특진(特進)시켜 효유(曉諭)한 뜻은 대개 특별한 대우에서 나온 것이다. 대사헌(大司憲)이 뒤에 반드시 진소(陳疏)하게 되면 그 때에 내가 마땅히 타이를 것이다."
하였다. 민진후(閔鎭厚)가 권설(權卨)의 일 때문에 방애(妨碍)가 있다 하여 판의금(判義禁)을 해직해 주기를 청하자, 임금이 명령하여 권설의 일은 차관(次官)이 거행하도록 하라고 했다. 이때에 김우항(金宇杭)이 마침 지의금(知義禁)을 겸직하고 있었는데, 새로 승자(陞資)의 명이 있자 특진관(特進官) 윤덕준(尹德駿)이 말하기를,
"김우항을 만약 가자(加資)하라는 하비(下批)가 있게 된다면 당연히 판의금(判義禁)이 될 것이니, 그러면 자연히 차관이 대행할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판의금을 두 사람을 둔 전례가 있는가."
하자, 윤덕준이 여성제(呂聖齊)와 조사석(趙師錫)의 고사(故事)로써 대답을 했다.
민진후(閔鎭厚)가 또 아뢰기를,
"남한산(南漢山)에 새로 세운 묘사(廟社)를 마땅히 뭐라고 일컬어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왼쪽은 전(殿)으로 하고 오른쪽은 실(室)로 하라고 이미 교지(敎旨)를 내렸다."
하였다. 임금은 판부사(判府事) 이여(李畬)의 소(疏)에 ‘전리(田里)로 돌아가서 죽겠다.’는 말이 있었으므로, 승지를 명하여 보내어 타일러 만류하게 했다.

 

일전에 태학의 거재(居齋)하는 유생들이 권당(捲堂)180)  을 한 일이 있었는데, 그들이 소회(所懷)를 써서 바치기를,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성묘(聖廟)181)  에 종향(從享)하자는 일을 재중(齋中)에서 이미 소의(疏議)가 나와서 재임(齋任)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재임인 이덕순(李德淳)과 이의연(李宜衍)이 자꾸만 핑계를 대고 미루더니, 그 뒤에 김시형(金始烱)이 이의연을 대신하고도 또 응하지 아니하여, 사문(斯文)의 중대한 일이 폐각(廢閣)되기를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또 나라의 큰 경사가 있기에 당하여 진전(進箋)과 진하(進賀)도 재임이 나오지 않음으로 인하여 끝내 빠져 버렸으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편안히 당으로 들어가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그들을 타일러 도로 들어가게 하라 하므로, 여러 유생들에게 여러 번 들어가라고 권했으나 끝내 명령에 응하지 않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에 어떻게 처리했던가."
하니, 성균관에서 회계(回啓)하기를,
"임술년182)  에는 예관(禮官)을 특별히 보내어 들어가기를 권하였고, 무인년183)  에는 다른 유생들을 들어가도록 권하는 명령이 있었고, 갑신년184)  에도 예관(禮官)을 보내어 들어가도록 권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나, 그 일들은 이번 일과는 다름이 있었습니다. 기축년185)  에는 반유(泮儒)가 소론(疏論)을 냈다가 재임(齋任)이 나오지 않아서 권당(捲堂)을 했는데, 이때에 두 재임을 정거(停擧)시키고 재유(齋儒)를 들어가도록 권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나, 이는 특별한 교지에서 나온 것으로서 아랫사람들이 전례를 삼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혹시 상소(上疏)한 일로 인하여 재임이 스스로 처리하기를 기다리지 않고서 곧바로 먼저 체임(遞任)을 하게 한다면, 다만 물의(物議)가 그르게 여길 뿐만 아니라 또한 당상관(堂上官)의 변통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종사(從祀)의 일로써 소론(疏論)을 내었다면 재임이 어찌 감히 나오지 않겠는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하였다. 성균관에서 전교를 가지고 여러 번 김시형에게 왕복(往復)을 했으나, 김시형은 병을 핑계하고 또 하는 말이 ‘재유(齋儒)들에게 내쫓겼다.’고 하면서 끝내 나오지 않았고, 재유들도 당(堂)에 들어갈 뜻이 없었다. 본관(本館)에서 이런 실정으로써 임금에게 아뢰자, 임금이 김시형의 정거(停擧)를 명하고 여러 유생들에게 들어 갈 것을 권유하니, 재생(齋生)들이 비로소 명령을 받들어 도로 들어갔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태학(太學)이 쟁탈(爭奪)의 장소가 된 지 오래 되었다. 저 재임의 무리들이 선정(先正)을 등한시하여 상소(上疏)의 일을 약삭빠르게 피한 것은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여러 유생들이 이 일로써 권당(捲堂)을 한다는 것은 이미 경솔한 짓이기도 하려니와, 그 중에는 겉으로 선정의 이름을 핑계하고 속으로 자기와 맞지 않은 사람을 내쫓으려는 마음을 포함하고 있는 것도 진실로 스스로 가릴 수가 없었다. 더구나 나라의 경사를 맞이하여 하전(賀箋)을 폐지했다는 말은 현관(賢關)186)  에 큰 수치를 끼친 것이다. 일찍이 조종(祖宗)의 배양(培養)한 기풍(氣風)이란 것이 곧 이와 같은 것인가. 거듭 개탄할 일이다.


【태백산사고본】 61책 53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489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사상-유학(儒學) / 사법-탄핵(彈劾)


[註 180] 권당(捲堂) :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들이 불편(不平)이 있을 때에 일제히 관을 비우고 물러나가는 일. 공관(空館).[註 181] 성묘(聖廟) : 문묘(文廟).[註 182] 임술년 : 1682 숙종 8년.[註 183] 무인년 : 1698 숙종 24년.[註 184] 갑신년 : 1704 숙종 30년.[註 185] 기축년 : 1709 숙종 35년.[註 186] 현관(賢關) : 성균관.
사신(史臣)은 논한다. 태학(太學)이 쟁탈(爭奪)의 장소가 된 지 오래 되었다. 저 재임의 무리들이 선정(先正)을 등한시하여 상소(上疏)의 일을 약삭빠르게 피한 것은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여러 유생들이 이 일로써 권당(捲堂)을 한다는 것은 이미 경솔한 짓이기도 하려니와, 그 중에는 겉으로 선정의 이름을 핑계하고 속으로 자기와 맞지 않은 사람을 내쫓으려는 마음을 포함하고 있는 것도 진실로 스스로 가릴 수가 없었다. 더구나 나라의 경사를 맞이하여 하전(賀箋)을 폐지했다는 말은 현관(賢關)186)  에 큰 수치를 끼친 것이다. 일찍이 조종(祖宗)의 배양(培養)한 기풍(氣風)이란 것이 곧 이와 같은 것인가. 거듭 개탄할 일이다.

 

낙창군(洛昌君) 이탱(李樘)과 한산 부정(韓山副正) 이욱(李澳) 등이 상소하여, 《선원보첩(璿源譜牒)》을 속간(續刊)하여 존호(尊號)와 십수년 동안 다 수록(收錄)하지 못한 것을 추서(追書)하기를 청하고, 이어 수집(蒐輯)한 한 책자를 올리고는 종부시(宗簿寺)에 명하여 고증(考證)하여 인쇄케 하되 주문(主文)187)  의 신하로 하여금 다시 발문(跋文)을 지어 올리게 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3월 15일 임진

신임(申銋)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유태명(柳泰明)을 집의(執義)로, 조명봉(趙鳴鳳)·한이원(韓以原)을 장령으로, 김운택(金雲澤)과 김상옥(金相玉)을 지평으로, 이택(李澤)을 헌납(獻納)으로, 곽만적(郭萬績)을 정언으로, 오명항(吳命恒)을 부응교로, 권변(權忭)을 교리(校理)로, 이병상(李秉常)을 부교리로, 송성명(宋成明)과 홍계적(洪啓迪)을 수찬(修撰)으로, 윤봉조(尹鳳朝)를 부수찬으로, 남도규(南道揆)를 문학으로, 윤양래(尹陽來)를 사서(司書)로, 서명균(徐命均)을 겸설서(兼說書)로, 홍치중(洪致中)을 겸사서(兼司書)로 삼고, 증(贈) 좌찬성(左贊成) 정문부(鄭文孚)에게 충의(忠毅)란 시호를 내렸다.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이유(李濡)가 청하기를,
"진연(進宴)은 전일 면종(勉從)하겠다던 하교대로 가을을 기다려 거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연사(年事)를 봐서 하겠다."
하였다. 정언 황귀하(黃龜河)가 말하기를,
"대신이 진연(進宴)을 물려 행하자고 거듭 청한 것도 혹은 한 가지 방도가 되기는 하겠습니다마는, 재이(災異)를 만나 수성(修省)하는 것은 소중함이 성실히 하는 데에 있으니, 이미 정지하기로 했다가 즉시 물려 행하기를 논의함은 일심으로 천견(天譴)에 응답하는 도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내 뜻은 본시 천천히 연사(年事)를 보아 가면서 하자는 것이고 꼭 가을 무렵에 거행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대간(臺諫)의 말이 절실하니,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이유(李濡)가 또 함경도 감사 이선부(李善溥)의 장계로써 나아가 아뢰기를,
"백산(白山)188)  에다 푯말을 설치하는 일은 일찍이 허양(許樑) 등에게 【바로 그때 차사원(差使員)인데, 사실이 위에 보인다.】  사문(査問)한 뒤에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다시 조사케 했는데, 이제 이 장계를 살펴보건대, 허양(許樑)의 말과 같으니, 다시 살펴볼 필요가 없습니다. 또 사신의 장계 중에, ‘목차(穆差)가 전언(傳言)하기를, 「이제 다시 살펴볼 것이 없으니 모름지기 염려할 필요가 없으며, 푯말을 세우는 일도 농사 틈을 기다려서 하고, 백성을 혹시라도 상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하였으니, 더욱 서둘러 끝내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땅히 전일에 푯말을 설치했던 곳에 따라 천천히 일을 끝마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저 나라에서 이미 준례(準例)의 방물(方物)189)  을 보내 왔고 또 서책(書冊)을 보내 왔으니 마땅히 사은사(謝恩使)를 보내야 하는데, 칙사(勅使)의 행차가 만약 나오게 되면 그들이 돌아가기를 기다려서 절사(節使)190)  를 겸하여 보내도록 하여야 합니다. 또 황제(皇帝)가 우리 동국(東國)의 시부(詩賦)를 보고 싶어한다는데 근세의 글은 혐애(嫌碍)가 많으니, 마땅히 오래 된 문집 중에서 저촉(抵觸)이나 기휘(忌諱)된 것이 없는 것을 골라 뽑아서 쓰거나 인쇄해서 사신의 행차에 보내도록 하되, 옥당(玉堂)으로 하여금 뽑아내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3월 16일 계사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지사(知事) 민진후(閔鎭厚)가 아뢰기를,
"민가(民家)의 첩자(妾子)는 그 어미에 앞서 죽으면 그 어미가 죽었을 때 장손(長孫)이 대신 3년의 상복을 입는 것이 옛날에 있어 통행했던 법입니다. 이는 선정신(先正臣)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이나 신의 외조부(外祖父)인 송준길(宋浚吉)의 논한 바가 모두 그렇습니다. 그러나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은, ‘이는 승중(承重)191)  이 아니니, 마땅히 3년 상복을 입을 수 없다.’ 하였고, 대사헌(大司憲) 권상하(權尙夏)도 또한 그 스승의 말을 옳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지금은 3년 상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많은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승중(承重)이 아니면 3년 상복을 입지 않는다는 말이 진실로 엄중하기는 하지만 통행해 온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어떻게 갑자기 변할 수가 있겠는가.’ 하며, ‘예(禮)는 마땅히 후(厚) 한 쪽을 따라야 한다.’는 의리로써 그대로 3년 상복을 입는 자가 있습니다. 3년의 상복은 상례 중에서 가장 무거운 복인데, 각기 자기 마음대로 하여 혹은 상복을 입기도하고 혹은 상복을 입지 않기도 하니, 일이 매우 미안합니다. 마땅히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대신(大臣)들과 논의해서 품정(稟定)하여 일대(一代)의 제도를 만들도록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양녕 대군(讓寧大君)의 사손(嗣孫)이 중간에 끊어져서 다른 종친(宗親)을 취하여 후사(後嗣)를 세웠는데, 이제야 비로소 알고 살펴본 바 형제(兄弟)의 항렬(行列)이 부자(父子)가 되었는데, 그 부(父)와 계자(繼子)가 모두 이미 죽었다고 합니다. 이미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알고서는 그대로 두는 것은 부당한 듯합니다. 하물며 양녕 대군은 다른 종친(宗親)과는 다름이 있는데, 어찌 주사(主祀)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윤서(倫序)를 밝히지 않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마땅히 종부시(宗簿寺)로 하여금 대신(大臣)과 의논하여 품처(稟處)하도록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사노(私奴)가 주인을 배반하고 이대(二代)를 연달아 양역(良役)을 한 자는 양민(良民)으로 시행을 해 왔는데, 고(故) 상신(相臣) 정태화(鄭太和)가 말하기를, ‘이른바 이대(二代)란 것은 바로 종신토록 군역(軍役)에 응했던 사람을 말한 것인데 그 처음에 투속(投屬)하였거나 지금 입송(立訟)을 한 사람에 미쳐서는 마땅히 대수(代數)의 속에 들 수가 없으니, 만약 이들까지 합쳐서 계산을 한다면 실은 사대(四代)가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이 형관(刑官)이 되었을 적에 번번이 이 예(例)를 사용하여 청송(聽訟)하였습니다. 다만 이것이 명문(明文)이 없기 때문에 외방(外方)에서는 연수(年數)가 많지 않은데도 부자(父子)가 군역에 든 자들은 모두 연달아 이대(二代)가 양역(良役)을 했다 하여 결정해 주고 있다고 하니, 이것도 마땅히 법식을 정하여 분부하여 서울과 지방으로 하여금 통행토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옳게 여겼다.

 

이이명(李頤命)을 좌의정으로, 김유(金楺)를 교리로, 홍계적(洪啓迪)을 부교리로 신사철(申思喆)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판부사(判府事) 이여(李畬)에게 전유(傳諭)하게 한 승지(承旨)의 서계(書啓) 때문에 임금이 또 우비(優批)를 내려 다시 가서 전유하게 하니, 이여가 드디어, ‘차마 죽어서라도 오래 기다리고 있겠다.’고 대답을 했다.

 

충청도의 유생 조정호(趙挺豪) 등이 상소하기를,
"지금 이 휘칭(徽稱)은 큰 공렬(功烈)을 찬양한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습니다마는, 다만 방례(邦禮)의 일관(一欵)에 대하여는 일찍이 거론하지 않았으니, 유독 무슨 뜻입니까. 옛날 선조(宣祖)는 종계 변무(宗系辨誣)192)  로써 존호(尊號)를 올렸으니, 방례를 바로 잡은 것이 종계 변무와는 사면(事面)은 비록 다르지만 종통(宗統)을 밝히고 민지(民志)를 정하는 것은 전성(前聖)193)  과 후성(後聖)194)  의 동일한 법도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는 예론(禮論)을 통촉하시고 복제(服制)를 바로잡으셨으며, 이제 우리 전하께서도 선왕의 뜻을 따르시고 선왕의 일을 이으시어 공(功)은 조종(祖宗)을 빛내시어 업은 후손(後孫)에게 전하였습니다. 이제 휘칭(徽稱)에서 찬양할 바가 마땅히 장릉(莊陵)195)  을 추복(追復)한 일보다 못하지 않을 것인데, 조정의 고관(高官)들이 한 사람도 입을 열어 말하는 사람이 없고, 연곡(輦轂) 곁에 있는 재보(宰輔)조차 한 사람도 합전(閤前)에 아뢰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는 위엄에 질린 나머지 인심이 함닉(陷溺)되어 그런 것입니까. 신 등이 발을 싸매고 올라와서 이제야 대례(大禮)가 이미 정해진 날에 비로소 호소를 하오니, 아! 너무나도 늦었습니다. 이제는 뚜렷이 새겨버린 옥책(玉冊)을 비록 추보(追補)할 수는 없지만, 붓을 잡은 사관(史官)은 또한 장대(張大)할 수는 있을 것이니, 바라건대, 신의 소(疏)를 묘당(廟堂)에 내리시어 널리 묻고 의견들을 채택하여 옥책(玉冊)의 글 속에다가 반드시, ‘선지(先志)를 따라 방례(邦禮)를 바로 잡았다.’는 말을 첨입(添入)하여 고쳐 짓고 이내 사관(史官)에게 분부하여 천추 만세에 명백히 보여 주도록 하소서.
신 등이 듣건대 조신(朝臣)들이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은 자가 매우 많다고 하는데, 선조조(宣祖朝) 때에도 명신 석보(名臣碩輔)들이 처음에는 더러 주상의 뜻을 따르려는 의논이 있었으나, 나중에는 합사(合辭)하여 함께 청해서 천의(天意)196)  를 감격(感格)한 뒤에야 그만 두었다고 하니, 신하의 분의(分義)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합니다. 다만 생각한 바가 있다면 일이 발생하기 전에 상소하여 의논하는 것이 그대로 옳겠지만, 발생한 뒤에도 끝내 참여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자기 당(黨)을 지키려는 사심이 너무 드세어서 그런 소문이 미치는 곳마다 머리들을 맞대고 휩쓸려서 그것이 잘못임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아! 애석한 일입니다. 아! 중요한 지위에 있는 여러 신하 중에 혹은 굳이 춘관(春官)197)  을 사양하고 혹은 곧바로 시골집으로 물러가서 전후(前後)의 대론(大論)을 기어코 회피하려고 하며, 김유경(金有慶)의 소(疏)는 성명(成命)이 내려진 뒤에야 올려 전혀 성궁(聖躬)만을 탓하고 스스로 미명(美名)을 취하였으니, 이는 영달(榮達)을 매개(媒介)하는 빠른 길을 택한 것이요 임금을 사랑하는 성심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이상주(李相周)의 사직소(辭職疏)에서 부진(附陳)한 것이 비록 매우 초초(草草)하기는 하지만, 이것도 또한 대각(臺閣)의 규경(規警)인데도 후사(喉司)198)  에서 물리쳐버리고 즉시 다른 일을 이유로 하여 서둘러 탄핵을 했으니, 그것이 전하의 총명을 가리어 막고 사람의 입에 재갈을 물려 〈말을 못하게 하고〉 방자하게 거리낌없이 놀아나며 오직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함이 어찌 이러한 극단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까.
아! 전하께서는 나라 일에 근심하시고 근로하신 지 40년 만에 비로소 하나의 휘호(徽號)를 받으셨는데, 조정의 위에 경색(景色)이 그러하니, 선유(先儒)의 이른바 임금을 존경하는 의리가 흔적도 없게 되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신충(宸衷)199)  에서 결단을 내리시어 기강(紀綱)을 정돈하시되, 반드시 옳고 그름을 밝히어 조정을 바로잡는 일을 급선무로 삼으시어 오늘날의 조정 신하들로 하여금 나라의 일을 체득하고 임금을 높이는 뜻을 알게 하소서."
하였다. 이 상소를 승정원(承政院)에다 바쳤으나 받아주지 않자, 조정호(趙挺豪) 등이 나중에는 승정원까지 공척하니, 승정원에서 이에 조사(措辭)하여 들어가 아뢰었다. 임금이 전교하기를,
"이제 조정호 등의 소를 보니 방례(邦禮)한 조항을 즉시 거론하지 않았다 하여 인심이 함닉(陷溺)되었다 하였고, 그 밖에 장황하게 나열(羅列)한 말들은 모두 조정의 신하들을 없는 사실을 꾸며서 무함하고 조정의 고관(高官)들에게 화(禍)를 떠넘기려는 계책으로 마음씀이 음험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조정호(趙挺豪)를 변방의 먼 곳으로 귀양보내고 이 소는 돌려주도록 하라."
하였다. 다음날 집의(執義) 유태명(柳泰明)과 장령(掌令) 조명봉(趙鳴鳳)·한영휘(韓永徽)가 논계(論啓)하기를,
"방례(邦禮)란 말은 오래 전부터 흉도(凶徒)들이 나라에 화를 일으키는 밑천의 도구로 삼아 왔는데, 이제 조정호가 또한 핑계대어 한 번 시험해 보려는 계략을 쓴 것이니, 그 마음씀을 규명한다면 실상 전일의 고묘(告廟)한 의논과 동일한 기축(機軸)인 것입니다. 대개 예론(禮論)을 가지고 현호(顯號)를 올린 데까지 이르렀으니, 차례대로 미쳐 가는 것이 장차는 못할 짓이 없을 것입니다. 조정을 경함(傾陷)한 죄는 오히려 여사(餘事)이니, 청컨대 조정호를 우선 엄하게 국문하여 사실을 알아낸 다음 형률(刑律)을 더하고 죄를 정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3월 17일 갑오

평안 병사(平安兵使) 윤각(尹慤)을 인견(引見)하고 권면하라고 타일러 보냈다. 임금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조정호가 기회를 타서 소를 올려 조정의 고관(高官)들에게 화를 떠넘기려 했던 정상(情狀)은 아주 마음 아픈 일이다. 이러한 소장(疏章)은 다시는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올리고, 또 호군(護軍) 박봉령(朴鳳齡)·이교악(李喬岳)·이진검(李眞儉)은 준직(準職)200)  을 지내지 않았음을 논하면서 가자(加資)의 명을 환수(還收)하기를 청하였으나, 【박봉령 등은 존호(尊號)를 올릴 때 보책(寶冊)을 읽었으니 승자(陞資)하라는 명이 있었다.】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개성부(開城府)에 눈이 내렸다.

 

3월 19일 병신

흰 구름 한 줄기가 손방(巽方)에서 일어나 바로 곤방(坤方)으로 향하였다.

 

사헌부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청하기를,
"일전에 감찰(監察)의 서경(署經)201)                  을 할 때에 감찰        이몽엽(李夢曄)은 헌납(獻納)        이정(李禎)의 아들로서 일찍이 수령(守令)을 지냈고 또 과명(科名)까지 회복되어 다른 허물이 없는데도 무단히 월서(越署)202)                  가 되어 듣는 이를 놀라게 했습니다. 자세히 알아본 바 감찰        이격(李格)이 한 짓이라고 하니, 청컨대 잡아다가 신문하여 정죄(定罪)하소서."
하고, 또 논하기를,
"준원전 참봉(濬源殿參奉)        남붕익(南鵬翼)은 그 유래(由來)와 파계(派系)를 알 수 없는 사람으로서 전혀 행검(行檢)이 없어 향곡(鄕曲)에서 버림을 받고 현관(賢關)203)                  을 더럽힌 사람인데, 외람되게 전랑(殿郞)으로 임명되어 물의(物議)가 시끄러우니, 청컨대 내쫓아버리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그 뒤에 이격(李格)이 잡혀들어가 공초(供招)를 바쳤는데, 의금부에서 의논해 아뢰기를 이격을 ‘거짓으로 속였다’고 하였고, 또 아뢰기를,
"서경(署經)을 본청(本廳)에 맡긴 것은 이것이 옛날부터 내려오는 관례인데, 가부(可否)를 따지는 중 혹시 물의(物議)와 맞지 않은 것이 있으면 적발해서 논한다는 것이 입법(立法)의 뜻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 이를 분간(分揀)하라고 명하였다.

 

유숭(兪崇)을 지평(持平)으로, 김상원(金相元)을 수찬(修撰)으로 삼고, 가선 대부(嘉善大夫) 이유생(李有生)은 나이 1백3세가 되었다 하여 자헌 대부(資憲大夫)로 관계(官階)를 뛰어넘어 임명하였으니, 일전에 민진후(閔鎭厚)가 경연(經筵)에서 아뢰었기 때문에 이런 명령이 있었던 것이다.

 

3월 20일 정유

사헌부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논핵하기를,
"부사직(副司直) 홍치중(洪致中)이 전주(銓注)하였을 때에 이정익(李禎翊)을 호막(湖幕)204)  에 가로막았고, 이의현(李宜顯)이 천거되어 대망(臺望)으로 올렸을 적에도 소척(疏斥)205)  을 몹시 심하게 했는데, 전조(銓曹)의 여러 당상관들이 그가 애당초 호막(湖幕)에서 대망(臺望)에 부르지 않았다는 실상(實狀)을 상소하여 말하면서 장황하게 다시 거론하여 반드시 이기려고 우겨대고 있으며, 또 정청(政廳)에서 승지가 참여해서 들었던 바를 조정의 고관(高官) 사이에서 한 말이 여러 당상관의 소(疏)와 서로 맞으니, 다투고 있는 곡직(曲直)은 이것으로 판정할 수 있습니다. 청컨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3월 21일 무술

주강(晝講)에 나아갔는데, 강(講)이 끝난 뒤에 윤대관(輪對官)을 인견(引見)하였다.

 

사헌부 【지평(持平) 김운택(金雲澤)이다.】 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올렸다. 또 논하기를,
"강진(康津)에 안치(安置)된 죄인 오시복(吳始復)의 음흉한 실정은 명의(名義)에 관한 죄를 범했으니 당초에 정상을 참작하여 조처한 것도 이미 실형(失刑)을 면키 어려운 터인데다, 지난 여름에 곧 그가 나이도 늙고 자식도 없다는 이유로써 해도(海島)로부터 육지(陸地)로 옮겨졌으니, 마땅히 황공해 하고 감격해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도리어 교만 방자한 마음을 품고 무릇 사람을 대하여 하는 말이 모두 머뭇거리며 기회만 엿보는 이야기가 아닌 것이 없으며, 귀양살이를 옮길 즈음에 돌아오는 행장이 너저분하여 마필(馬匹)이 거의 백 필이나 되었고, 그 밖의 재물들도 백여 바리나 되었습니다. 그리고 강제로 해남(海南)·강진(康津) 두 고을 사람들로 하여금 그 우소(寓所)로 운반해 오도록 했는데, 해남에서는 뜻을 받들어 행하기를 더욱 조심하여 행여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했고, 강진에서는 인부와 마필을 내세우기가 어렵다는 이유로써 가서 보고 완곡하게 변명을 하니, 오시복(吳始復)이 면전에서 꾸짖고 욕지거리를 하며 그의 사나운 종을 시켜 목덜미를 잡아 내쫓게 했다고 합니다. 그는 그 관하에 있는 죄인으로서 그곳 수령(守令)을 이렇게 능멸하여 욕을 보였으니, 청컨대 오시복을 절도(絶島)로 옮겨 유배하소서."
하고, 인하여 논하기를,
"해남 현감 이증록(李增祿)을 관작을 삭탈하고 강진 현감 정이규(鄭以規)를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하였다. 또 논하기를,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 민순(閔純)은 오로지 탐욕만 부려 불법을 많이 행하였고, 또 오시복(吳始復)에게도 아첨을 부려 물품을 주며 뒷날에 은덕을 입을 계획을 하였으니, 청컨대 잡아다가 신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겸필선(兼弼善)인 오명항(吳命恒)이 현도(縣道)로부터 소를 올려 홍문 본관록(弘文本館錄)의 불공평(不公平)함을 논했다. 대략 말하기를,
"영관(瀛館)206)  의 신록(新錄)에서 배류(輩流)들 가운데 뚜렷하게 뛰어난 사람이면서도 뽑히지 못한 자가 손꼽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하고, 이내 조익명(趙翼命)·김동필(金東弼)·권익관(權益寬)·윤성시(尹聖時)·이단장(李端章)을 낱낱이 들면서 말하기를,
"이 몇 사람들을 어찌 버려진 인물로 용납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이진망(李眞望)에 이르러서는 명문(名門)의 자손으로서 본디 문명(文名)이 있고 성화(聲華)가 높아 세상의 추허(推許)를 받고 있으니, 진실로 사람을 뽑으려고 한다면 이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없는데도 시의(時議)에 거슬린다 하여 한결같이 몰아내는 데 힘을 쓰고, 심지어는 신정하(申靖夏)가 천거(薦擧)로 한원(翰苑)207)  으로 들어갈 때에는 어찌 한 마디도 서로 논란이 없다가 이제 이진망이 나오자 이렇게 함께 막는단 말입니까. 비록 당동벌이(黨同伐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 말하더라도 사람들이 누가 이를 믿겠습니까.
도당(都堂)의 완록(完錄)208)  이 마땅히 멀지 않은 시일에 있을 것이니, 그 때에 가려서 뽑는 것이 과연 어떨지 알 수 없지만, 물정(物情)이 시끄러워 오래도록 진정이 되지 않고 있으니, 삼가 바라건대 본관(本館)에 특별히 명하여 우선 개록(改錄)하여 억울한 인심을 안정시키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비답을 내리지 않고 하교하기를,
"이번의 관록(館錄)에서 그 취사(取捨)가 불공평함을 나는 보지 못하였다. 설령 당연히 기록될 사람인데 기록되지 않은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곧바로 많은 사람의 성명을 들어 개록(改錄)을 청하기에 이르렀는데, 오늘 오명항(吳命恒)의 한 짓과 같은 것은 듣지 못하였다. 뚜렷하게 사심(私心)에 따른 흔적이 있는 것은 적합하지 못한 데 관계된다 하겠고, 더구나 개록(改錄)은 전에 없었던 일이니, 이 길이 한 번 열리면 말류(末流)의 폐해를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결코 그냥 버려 두고 논하지 않을 수 없으니, 오명항(吳命恒)을 파직시켜라.
하였다.

 

우참찬(右參贊) 김진규(金鎭圭)가 조정호(趙挺豪)의 소(疏) 때문에 상소하여 대변(對辨)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일찍이 복제(服制)를 고친 뒤에 여러 간흉(奸凶)들이 방례(邦禮)를 핑계삼아 군부(君父)를 깎아 내렸다는 이유로써 헌의(獻議)한 유신(儒臣)들을 처벌(處罰)했는데도 그 욕구가 차지 않아 마침내 고묘(告廟)의 의논을 발론하여 갑인년209)  의 회의(會議)한 여러 신하들까지 모두 해치려고 했으며, 이어서 위로 장추전(長秋殿)210)  에까지 미치려고 했으니, 무릇 이런 실정은 경신년211)  의 역안(逆案)에 실제로 기재되어 있습니다. 당시에 만약 일월(日月) 같은 조림(照臨)이 없었다면 종사(宗社)의 위태로움이 틀림없이 이르게 될 형편이요, 사문(私門)의 백구(百口)212)  의 어육(魚肉)도 그 여사(餘事)였을 것입니다. 이제 이들이 엿보고 노리다가 췌마(惴摩)213)  하여 경영하는 자가 따로 있었기 때문에 그가 사람을 사주한 까닭으로 느닷없이 내놓은 것이 또 예론(禮論)에 두게 된 것입니다. 아! 만약 이 말을 들어주기로 한다면 그 사태의 중대함이 고묘(告廟)보다 더함이 있을 것이니, 고묘를 가지고도 오히려 그를 빙자하여 흉계를 부리려고 했는데 하물며 이것보다 더 중대한 일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우비(優批)를 내렸다. 이때에 여러 신하들이 조정호의 소 때문에 서로 잇따라 소를 올렸는데, 유독 김진규(金鎭圭)의 소가 분명하고 간절했다고 한다.

 

3월 22일 기해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려고 했는데, 옥당관(玉堂官) 이병상(李秉常)·윤봉조(尹鳳朝)가 오명항(吳命恒)의 소 때문에 모두 물러나가 있었고, 밖에 있던 여러 사람들도 모두 부름을 어기고 나오지 않았으므로, 드디어 정지할 것을 명하였다.

 

부제학(副提學) 권상유(權尙游)가 오명항(吳命恒)의 소 때문에 사직소(辭職疏)를 올렸는데, 대략 말하기를,
"오명항이 낱낱이 든 여러 사람을 비록 대단히 칭찬을 했지만 공론을 들어 본 바 모두가 그렇다고 하지는 않았고, 이진망(李眞望)으로 말하더라도 전년에 한 통의 상소가 선정(先正)을 꾸짖고 무함하며 더러운 욕설을 공공연히 자행하여 몹시 놀랄만큼 패만(悖慢)했을 뿐더러 대성(臺省)의 의망(擬望)에서도 막혀버렸으니, 이제 어찌 공론을 저버리고 갑자기 극선(極選)을 의논하겠습니까. 신정하(申靖夏)는 선정(先正)에 대하여 평생토록 사모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 뒤지지 않았는데, 그 소사(疏事)가 그 선세(先世)와 관계가 있다 하여 끌어들어 소 가운데 성명(性名)을 뒤섞어 기재함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그 마음은 비록 이진망과 다르지만 형적(形迹)을 갖고 논하는 사람이 또한 간혹 있기도 합니다. 이것이 신은 취사(取捨)하는 즈음에 약간의 공의(公議)를 보여 준 것입니다."
하고, 끝에 또 말하기를,
"비국(備局)의 여러 당상관(堂上官)들이 양사(兩司)214)  와 옥당(玉堂)215)  의 관직에 있을 수 없는 것은 의리(義理)에 차이가 없는 것인데, 전날 차대(次對)216)  할 때에 여러 재신(宰臣)들을 따라 입시(入侍)를 했고, 또 주사(籌司)217)  의 문부(文簿)에도 참가하여 간섭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면서도 멍청하게 깨닫지 못하였으니, 아울러 이것도 사실을 자백합니다."
하자, 답하기를,
"관록(館錄)의 취사(取捨)는 공평하지 못한 것을 볼 수 없는데, 뜻밖에 시끄러움을 일으켰다. 그러나 나에게 무슨 혐의가 있겠는가. 부제학은 양사(兩司)의 장관과는 다르니 차대(次對)에 입시(入侍)를 하고 주사(籌司)의 문부에도 모두 구애될 일이 없다. 다만 차대(次對)하는데 유신(儒臣) 한 사람이 별도로 입시(入侍)하게 된 것은 경(卿)에게도 잘못이 없다."
하였다. 이 뒤로 겸문학(兼文學) 홍우서(洪禹瑞)와 헌납(獻納) 이택(李澤)이 또 소를 올려 논변(論辨)을 하였으니, 두 사람이 모두 참권(參圈)을 했기 때문이었는데, 임금이 일례(一例)로 우비(優批)를 내렸다.

 

3월 24일 신축

황해도(黃海道)에 비와 눈이 내렸다.

 

3월 25일 임인

태백성(太白星)이 사방(巳方)에 나타났다.

 

임금이 가슴 속이 시장한 듯하면서도 시장하지 않고 손발이 마비되는 등류의 증상이 나타나 약방(藥房)에서 들어가 진찰을 하고, 좌의정 이이명(李頤命)이 도제조(都提調)의 직책으로서 이날 숙배(肅拜) 입시(入侍)하고 청하기를, ‘명일부터 중완혈(中腕穴)에 뜸질을 받으소서.’ 하고, 또 탕제(湯剤)를 올렸다. 이때에 영의정 이유(李濡)가 청대(請對)하여 함께 들어갔는데, 옥당(玉堂)의 여러 신하들이 여덟 번이나 소패(召牌)를 어긴 것을 들추어 우선 파직을 시켰다가 뒤에 다시 서용(敍用)하되 유독 부제학(副提學) 권상유(權尙游) 만은 지위가 높으니 파직시키지 말자고 청하고, 이어 정관(政官)으로 하여금 개정(開政)을 시켜 궐원(闕員)을 차출(差出)케 하라고도 청했으며,
또 말하기를,
"조정호(趙挺豪)를 의금부에서 형조(刑曹)로 옮겼는데, 장관이 없어서 아직도 추문(推問)을 못하고 있으니, 일이 몹시 미안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명하기를,
"오늘의 정사(政事)에서 형조 판서를 차출하되, 그로 하여금 다시 인혐(引嫌)하지 말게 하고 즉시 패초(牌招)218)  하여 일을 보살피게 하라."
하였다. 이이명(李頤命)이 말하기를,
"조정호(趙挺豪)는 호서(湖西) 사람인데, 배소(配所)를 호남(湖南)으로 정한 형관(刑官)의 일도 대단히 그릅니다. 마땅히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전라도 임실(任實)·진안현(鎭安縣)에 비와 눈이 내렸다.

 

3월 26일 계묘

임금이 중완혈(中腕穴) 뜸질을 받았다. 도제조(道提調) 이이명(李頤命)이 아뢰기를,
"전부터 시호(諡號)를 의논하는 법은 원래 적체(積滯)되는 폐단이 없었는데, 근래에는 미루고 끌면서 즉시 거행하지 않으므로 그 사이에 행장(行狀)을 지은 사람이 더러 죽거나 혹은 직명(職名)이 없어서 들어와 아뢰기가 어려웠는데, 현재도 이와같은 일이 많이 있다고 하니, 어떻게 처리하면 적당한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행장을 지어 예조(禮曹)에 낼 때에 죽지 않았다면 시일이 오래된 뒤에 행장을 지은 이가 비록 죽었더라도 구애받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이명이 청하기를,
"그러면 지금부터 정식(定式)을 삼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이만견(李晩堅)을 부응교(副應敎)로, 여광주(呂光周)를 교리(校理)로, 홍중휴(洪重休)와 심택현(沈澤賢)을 부교리로, 어유귀(魚有龜)를 수찬(修撰)으로, 홍석보(洪錫輔)와 황귀하(黃龜河)를 부수찬으로, 이건명(李健命)을 형조 판서로, 이태좌(李台佐)를 이조 참의로, 남도규(南道揆)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3월 27일 갑진

밤에 유성(流星)이 섭제성(攝提星)의 아래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다.

 

성주 안핵 어사(星州按覈御史) 홍치중이 오랫동안 내려가지 않은 일로써 하교를 하여 명일 안으로 조정을 떠나가라고 명(命)하였으나, 홍치중이 또 다시 정세(情勢)로서 사직소(辭職疏)를 올리니, 【바로 이정익(李禎翊)을 의망(擬望)한 일인데, 위에 나왔다.】  임금이 어사(御史)의 직임(職任)을 체직토록 명하였다.

 

명하여 예문관 제학(禮文館提學) 최석항(崔錫恒)을 부르게 하였으니, 대개 삼일제(三日製)219)  를 추설(追設)했기 때문이다. 대신(大臣)들이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 김진규(金鎭圭)도 패초(牌招)하여 함께 참가하도록 계청(啓請)했으나, 김진규가 소를 올려 말하기를,
"이미 설장(設場)을 한 뒤에 나아가서 참가한다는 것은 법례(法例)에 없는 것을 새로 만들어 간폐(奸弊)를 열어 주는 일이니 불가합니다."
하니, 임금이 참가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최석항이 안정(安䋊) 등 6인을 뽑았는데, 안정에게는 급제(及第)를 내리고 나머지 사람에게는 급분(給分)220)  을 했다.

 

대사헌 권상하(權尙夏)가 현도(縣道)로부터 사직소(辭職疏)를 올리니, 이는 권상유(權尙游)가 면유(面諭)한 뒤에 처음 올린 상소였다. 임금이 비답을 내리기를,
"전번에 경연(經筵)에서 부제학(副提學)을 특별히 불러서 앞으로 오도록 하여 나의 지극한 뜻을 타이르면서 경에게 전한 것은 행여 경이 내 마음을 살펴서 선뜻 오기를 바랐던 것인데, 이제 경의 소를 살펴보고서 크게 실망을 하였으니, 어찌 뜻이 서로 통하지 않기가 한결같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인가. 놀랍고도 부끄러워 개유할 말을 알지 못하겠다. 아!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 어려서 배우는 것은 장성해서 행하려고 하는 것이다. 더구나 경은 세록(世祿)의 신하로서 사림(士林)의 중망(重望)을 받고 있으니, 나라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할 의리가 있으므로 본시 결단코 세상을 잊고 살 사람이 아닐 것인데, 이렇게 매우 어려운 시기를 당하여 내가 어찌 경을 놓겠으며 경도 어찌 나를 버리고 무관심할 수가 있겠는가. 끝까지 동강(東岡)221)  의 뜻만 굳게 지킬 일이 결코 아니니, 경(卿)은 어리석은 나의 꼭 보고야 말겠다는 성의를 헤아리고 겸손만 고집부리지 말 것이며, 안심하고 조정에 나와 연석(筵席)에 출입하여 나의 부족함을 돕도록 하라."
하고, 사관(史官)을 명하여 가서 타이르게 했다.

 

판부사(判府事) 김창집(金昌集)이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황주(黃州)에 이르러, 과사(科査)222)   뒤에 여러 고관(考官)들이 모두 파직을 당했는데 자기만 홀로 면한 일로써 불안하게 여겨 사직소(辭職疏)를 올렸는데, 임금이 우비(優批)를 내렸다.

 

3월 28일 을사

장령(掌令) 조명봉(趙鳴鳳)이 소를 올려 논하기를,
"본부(本府)의 전일 계사(啓辭) 중에 말했던 황순중(黃順中)은 조금도 용서해 줄것이 없으니, 청컨대 엄중히 신문하여 법을 바로잡으소서."
하고, 또 이헌영(李獻英) 형제의 발방(拔榜)223)  한 일을 논하기를,
"거자(擧子)가 시권(試券)을 쓸 때에는 한결같이 제판(題板)의 글자 모양에 의거하여 혹시 한 획이라도 틀림이 있을까를 두려워하는 것은 인정(人情)이 모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헌영 등은 홀로 많은 선비들이 쓰지 않는 괴상한 글자를 써가지고 모두 급제를 차지했으니, 표시를 하여 간계를 쓴 자취가 분명하여 숨길 수 없습니다. 저희들은 비록 고체(古體)라고 하지만 사람들이 누가 이를 믿겠습니까. 이진급(李眞伋)은 시권을 바친 것이 시한(時限)을 넘긴 이유로써 발거(拔去)토록 특명(特命)을 하면서 이헌영 등은 뚜렷이 드러나게 위배된 단서를 가지고도 오히려 과명(科名)을 띠고 있다면, 저 이진급은 홀로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또 논하기를,
"광주 부윤(廣州府尹) 황일하(黃一夏)는 연한(年限)이 이미 지나 쇠모(衰耗)함이 너무나도 심하고, 안주 목사(安州牧使) 성숙(成璹)과 진위 현령(振威縣令) 이노성(李老成)도 또한 늙고 병들어 정신이 어두워 일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춘천 부사(春川府使) 오중주(吳重周)는 오로지 탐욕만 부려 주택(住宅)이 굉장히 사치스럽다고 하니, 청컨대 이 네 고을의 수령(守令)들을 체개(遞改)하든지 또는 파삭(罷削)을 하소서."
하고, 끝으로 북한 산성(北漢山城)의 군량을 도성(都城)에서 운반해 주는 폐단을 논하고 청하기를,
"각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미리 사람과 말을 징발(徵發)하여 먼저 운반해 가고, 그 나머지의 수량은 전년에 성을 쌓을 때의 예(例)를 따라 각호(各戶)에게 약간씩 돈을 받아 해청(該廳)에서 말을 세내어 운반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앞에 아뢴 두 사건은 나의 뜻을 이미 전일의 비답에서 다 말하였다. 묘당(廟堂)의 천거는 연한에 구애받지 않으며, 쇠모(衰耗)가 너무 심하다는 것 또한 실상(實狀)이 아니다. 오중주(吳重周)의 일은 상세히 살펴서 처리할 것이고, 성숙(成璹) 등의 일과 소의 끝에 말한 바는 해사(該司)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3월 30일 정미

밤에 유성(流星)이 남두성(南斗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다.

 

약방(藥房)에서 들어가 진찰을 하고 임금의 중완혈(中腕穴)에 뜸질을 정지하고, 다시 외관혈(外關穴)에 뜸질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제조(提調) 조태구(趙泰耉)가 영희전(永禧殿)224)  의 영정(影幀)을 사체(事體)로 보아 홀로 봉심(奉審)할 수 없다 하여 대신(大臣)들과 함께 나아갈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말하기를,
"장녕전(長寧殿)225)  의 어용(御容)은 과연 전신(傳神)226)  이 되었는지 알 수가 없으나, 천만세(千萬世)나 전해갈 본(本)에 어찌 조금이라도 미진(未盡)한 곳이 있어야 되겠습니까. 다시 그려서 봉안(奉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자, 임금이 매우 옳게 여겼다.

 

사은 겸 동지사(謝恩兼冬至使) 김창집(金昌集)·윤지인(尹趾仁)과 서장관(書狀官) 노세하(盧世夏)가 복명(復命)을 하니, 임금이 그들을 인견(引見)하여 위로하고 그 곳의 사정을 묻자, 김창집 등이 대답하기를,
"청(淸)나라 황제는 절약 검소하여 재물을 아끼고 백성에게 수취(收取)하는 것이 법제가 있었으며, 토목의 일을 일삼지 않으므로 백성들이 모두 사는 곳에서 편안히 지내며 근심하고 원망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서책(書冊)을 보낸 준 데 대하여는 마땅히 사은(謝恩)을 해야 하겠으며, 요청하는 시문(試文)도 응해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땅히 절사(節使)의 앞에 별사(別使)를 보내시되, 꼭 문형(文衡)227)  을 시켜 가려 뽑도록 하면 일이 쉽게 성취될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신천 군수(信川郡守) 이하성(李厦成)은 우리가 가고 오는 길에 한 번도 나와서 대접하지를 않았고, 또 듣건대, 관직에 있으면서 잘한 것이 없다고 하니, 마땅히 파출(罷黜)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승지에게 명하기를,
"올해의 처음에 이미 권농(勸農)의 뜻을 일렀지만 때를 맞추어 비가 내리고 난 뒤이므로, 마땅히 더욱 신칙하여야 하니, 백성들 중에 게으른 자는 단속을 하고 종자(種子)가 없는 자는 대주어서 때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뜻을 팔도(八道)와 양도(兩道)의 유수(留守)에게 신칙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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