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무신
최석항(崔錫恒)을 좌참찬(左參贊)으로, 이성조(李聖肇)를 필선(弼善)으로, 조석명(趙錫命)을 문학(文學)으로, 한중희(韓重熙)를 헌납(獻納)으로, 노세하(盧世夏)를 장령(掌令)으로, 이정주(李挺周)를 지평(持平)으로, 홍우서(洪禹瑞)를 부교리(副校理)로, 이병상(李秉常)을 수찬(修撰)으로, 윤봉조(尹鳳朝)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일전에 정언(正言) 곽만적(郭萬績)이 사직소를 올렸는데, 곽만적은 바로 기묘년228) 파방과(罷榜科)에서 복과(復科)된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그 소에 이르기를,
"호군(護軍) 이진검(李眞儉)이 지난해에 올린 소에서 이른바 양권(兩卷)을 찾아 내지 못했다는 말이 비록 신이 몸을 가리킨 것은 아니라고 했지만, 분명한 말로 구별 해내지 않고 있으니, 아직도 더러운 결과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하고 또 그 아우의 말과 이진검(李眞儉)이 편지 왕복한 일을 거론(擧論)하였다. 임금이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품처(稟處)케 하니, 이진검이 다시 상소하여 변명하기를,
"신이 연전에 상소하여 기묘과(己卯科)를 추복(追復)한 것이 불가하다는 것을 논했는데, 김유(金楺)와 곽만적(郭萬績)의 소가 전후해서 번갈아 나와서 말한 사람을 꾸짖고 욕을 했으니, 이와 같은 풍습은 전에도 드문 일입니다. 조정에서 전방(全榜)을 특파(特罷)한 것은 대개 간악함을 징계(懲戒)하고 뒷 폐단을 막자는 것인데도 10년이나 지난 뒤에 좌우에서 선동을 하고 백반으로 회복을 도모하여 결국에는 그 계책을 이루고야 말았습니다. 옥안(獄案) 중에 두 장을 내놓았다는 말은 서로 미루고 핑계를 대어 사람들의 의혹을 사고 있는데 다 조사해 내지를 못하고 있으니, 어찌 신의 말을 기다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진실로 시권(試券)이 간 곳을 다 조사해 낼 수가 있다면 그때 대신(大臣)들이 수의(收議)한 중에 ‘발각되지 않은 것이 또 몇 사람이나 되는지 알 수 없다.’는 말이 왜 나왔겠습니까. 그 뒤에 헌신(憲臣)이 이상주(李相周)를 논핵(論劾)한 계사(啓辭)에 이르기를, ‘당초에 파방(罷榜)을 한 것은 대개 그때에 엄중히 국문(鞫問)하여 사실을 알아내지 못한 이유로써 많은 사람의 시권(試券)을 도둑을 맞은 것도 분명하게 밝혀서 이름을 지적하지 못하였으니, 과거 급제를 잃은 사람도 비록 매우 억울한 일이지만 그래도 시권을 잃어 버린 사람만큼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으니, 대계(臺啓) 속에도 많은 사람의 시권이 없어졌다고 한 것은 다만 두 시권(試券)뿐이 아니란 것인데, 어째서 유독 신의 소에 대해서만 이토록 원망하며 노하여 그치지 않는 것입니까."
하였는데, 해조(該曹)에서 복주(覆奏)하기를,
"당초의 문안(文案)을 가져다 상고해 보았더니 대신(大臣)들의 수의(收議)중에, ‘발각되지 않은 것이 몇 사람인지 알 수 없다.’는 말은 옥사가 한창 벌어져 미처 다 조사하기 전에 나온 말이요, 사헌부에서 이상주를 논핵한 계사(啓辭)에, ‘많은 사람은 시권이 도둑 맞은 것을 분명하게 조사하여 이름을 밝히지 못했다.’는 것은 대개 급제를 도둑질한 자가 사실을 고백하지 않은 것과 시권을 잃은 사람이 억울한 일이 많다는 것을 논한 것이고, 방중(榜中)의 여러 사람들을 지적해 말한 것은 아닙니다. 대저 기묘과(己卯科)의 요악한 변고는 밉고도 분개스러운 일로서 온 나라가 똑같은 심정이니, 당초에 파방을 한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해가 오래 된 뒤에 조정에서 죄도 없이 급제를 잃어버린 사람의 억울함을 생각하여 특명으로 복과(復科)를 시켜준 것이니, 곽만적이 비록 이진검의 전소(前疏) 때문에 불안한 점이 있더라도 이진검의 소 중에서 끌어댄 바는 대개 분하고 미운 것이 극도에 달하여 전후의 곡절을 미처 세밀히 상고하지 못한 소치이니, 방중(榜中)에 든 여러 사람들이 이것 때문에 자꾸만 인혐(引嫌)할 필요는 없으며, 소 안의 사연(辭緣)을 특별히 다시 조사할 사단(事端)도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복주(覆奏)가 명백하여 이제 다시 조사할 것이 없으니, 그만두라."
하였다.
4월 2일 기유
일전에 좌의정 이이명(李頤命)이 경연(經筵)에서 아뢰기를,
"예전부터 내려온 관례에는 비국(備局)의 당상관은 각기 소관(所管)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각도(各道)를 분장(分掌)하는 규정이 없기 때문에 문부(文簿)가 많이 적체되어 있고 일을 착실히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황조(皇朝)에서는 어사(御史)로 하여금 십삼성(十三省)을 나누어 관장케 하고 있으니, 이 법이 가장 좋습니다. 이제 또한 비국의 당상관으로 팔도(八道)를 나누어 관장하게 하여 각도의 장문(狀聞)과 문보(文報)를 반드시 구관 당상(句管堂上)으로 하여금 논제(論題)를 복계(覆啓)토록 하고, 의논할 만한 일이 있으면 대신(大臣)이 다른 당상관(堂上官)들과 더불어 서로 의논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 때에 이르러 비국(備局)에서 각 도에 한 사람씩을 분배하여 써 올리도록 하고, 또 유사 당상(有司堂上) 네 사람으로 하여금 한 사람마다 두 도(道)를 겸하여 살피고 본 당상관에 사고가 있을 때에는 겸해서 살피도록 하자고 청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고(故) 혜빈 양씨(惠嬪楊氏)와 그 아들 영풍군(永豊君) 이전(李瑔) 등을 일전에 그 관봉(官封)을 회복해 주기로 허락을 했었는데, 【양씨 등의 사실(事實)은 위에 대략 보인다.】 이때에 와서 그 후손들의 상언(上言)으로 인하여 또 시호(諡號)를 내리고 봉묘(封墓)할 것을 명하였다.
4월 3일 경술
태백성(太白星)이 사지(巳地)에 나타나고 밤에 지동(地動)을 했다.
4월 4일 신해
약방(藥房)에서 들어가 진찰을 했다.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아뢰기를,
"이번에 보낼 사신(使臣)의 일을 대신(大臣)들과 서로 의논한 결과 모두 하는 말이, ‘서책과 방물(方物) 두 가지에 대하여는 마땅히 사은사(謝恩使)를 보내야 하는데, 저쪽에서 역저(易儲)229) 하고 칙사(勅使) 보내기를 기다렸다가 그 칭호를 개정(改定)하는 것이 늦지 않다고 하며, 또 일찍이 계미년230) 에도 나이 50세라 하여 칙사를 보냈었는데, 이번에는 또 60세라고 칙사를 보낼 일이 있을 듯하니, 또한 마땅히 잠정적으로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교리(校理) 여광주(呂光周)가 정시 고관(庭試考官)이었다 하여 사직소를 올리고,
또 이돈(李墩)의 억울함을 대단히 논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이 정시(庭試) 하루 전에 이돈을 찾아가 보았더니, 이돈이 신에게 하는 말이, ‘정시(庭試)나 알성시(謁聖試)의 시관은 일찍이 패초(牌招)하는 규정이 없고, 각자 대령(待令)하고 있으란 말을 듣고 수점(受點)을 하게 되면 쫓아가서 문을 열고서 시소(試所)로 들어갔는데, 지금은 승정원(承政院)에서 대개 그 때에 임박하여 군색스러울 것을 생각하여서인지 경신년231) 전례에 따라 패(牌)를 청하는데, 나는 패를 따라 대궐에 나갔다가 돌아올 것이요, 만약 수점(受點)을 하게 되면 마땅히 다시 들어갈 것이다.’고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패를 받고는 형편상 곧 바로 돌아오기가 어려울 것이니, 수점(受點)을 못한 뒤에 돌아오는 것이 옳을 듯하다.’고 하니, 이돈이 말이, ‘시관은 밖에서 임시로 거처하게 된 곳을 얻는 규정이 없다.’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조금 있다가 이돈을 부르는 명패(命牌)가 이미 도착 했으므로, 신은 미처 말을 다하지 못하고 바쁘게 집으로 돌아와 보니, 천패(天牌)가 이미 문에 와 있었습니다. 신이 패를 따라 승정원에 도착하니, 이돈은 이미 패를 바치고 돌아가 버렸습니다. 앉아서 조금 있으니, 대제학(大提學)과 대사성(大司成)의 패를 올리지 않았다는 보고가 연달아 이르고 조금 후에 낙점(落點)도 내렸습니다. 이런 사정으로써 살펴본다면 이돈이 패를 바치고 돌아갈 뜻이 이미 패를 받기 전에 정해졌던 것이고, 그가 다시 나가버린 것도 또한 대제학이 패를 올리기 전에 정해졌던 것이 어찌 분명하지 않습니까."
하니, 임금이 예비(例批)를 내렸다.
4월 5일 임자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김두남(金斗南)을 장령(掌令)으로, 어유귀(魚有龜)를 정언(正言)으로, 홍석보(洪錫輔)를 문학(文學)으로 삼았다.
대사간(大司諫) 이관명(李觀命)이 상소하여 안동(安東)의 민폐(民弊) 3조(三條)를 진달하였다. 【이관명이 안동의 임소(任所)로부터 대사간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진소(陳疏)한 것이다.】 그 첫 번째 진달하기를,
"안동(安東)은 물가에 있는 곳이라 참혹하게, 수재(水災)를 당하여 백성의 힘은 이미 수재를 보수하는 목석(木石)의 역사에 피곤해졌고, 인근(隣近)에 있는 여러 고을들은 그 범람(汎濫)하는 환란을 구제할 길이 없습니다. 봉축(封築)하는 공사는 어느 때나 그칠 사이가 없고 침닉(沈溺)당하는 사태는 해마다 없는 경우가 드무니, 본부(本府)의 대동목(大同木)232) 수십 동(同)233) 을 그 지방을 지키는 신하에게 내려 주어 장정(壯丁)들을 모집하여 큰 돌로 쌓고 총포(叢苞)로써 보호하도록 하다면 민생(民生)은 아마 안정된 생활을 누리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고, 그 두 번째는 황장목(黃膓木)234) 을 봉진(封進)하는 폐단에 대해 진달하기를,
"안동(安東)·봉화(奉化)·예천(醴泉) 세 고을은 비록 황장산(黃腸山)이라는 명칭은 있었으나, 애당초 금양(禁養)235) 을 하지 않다가 경신년236) 에 이르러 비로소 봉진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대저 소나무가 자라려면 반드시 몇 갑자(甲子)를 지난 후에야 황장(黃膓)에 합당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 만일 연수(年數)를 한정하여 조금 자라기를 기다려 봉진(封進)하도록 한다면, 산골 백성들이 아마 초미(焦眉)의 다급함을 해결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으며, 그 세 번째는 곧 경사(京司)의 절수(折受)237) 하는 사찰(寺刹)의 폐단을 말한 것이었다. 임금이 우비(優批)를 내리어 말단(末端)의 일은 시행을 허락하고 위의 두 가지 사항에 대해서는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토록 하였다. 후에 묘당에서 복주(覆奏)하기를,
"대동목(大同木)과 같은 유정지공(惟正之供)238) 은 청컨대 허락하지 마시고 황장목(黃膓木)은 연도를 한정하여 봉진(封進)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연천현(漣川縣)에 있는 주자 서원(朱子書院)에 임장(臨漳)이라 사호(賜號)하고 예관(禮官)을 보내 치제(致祭)토록 하였는데, 축문(祝文) 첫머리의 글에 ‘국왕(國王)이 신(臣) 아무개를 보내어 운운(云云)’이라 썼다. 예관(禮官)이 이미 출발하여 떠났는데 예조 참판(禮曹參判) 민진원(閔鎭遠)이 경연(經筵)에서 아뢰기를,
"청컨대 계성묘(啓聖廟)239) ·선무사(宣武祠)의 준례에 따라 ‘조선 국왕(朝鮮國王)이 삼가 신하를 보내어 운운(云云)’이라고 칭하였으니, 이것으로써 정식(定式)을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허락하여 고쳐 써서 보냈다.
4월 6일 계축
밤에 검은 기운 한 가닥이 곤방(坤方)에서 일어나 손방(巽方)을 가리켰다.
이의현(李宜顯)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이만견(李晩堅)을 응교(應敎)로 삼았다.
4월 7일 갑인
밤에 유성(流星)이 각성(角星) 위에서 나와 진성(軫星) 아래로 들어가고, 또 남두성(南斗星) 위에서 나와 하늘의 끝으로 들어갔다.
4월 8일 을묘
밤에 유성(流星)이 천봉성(天棓星) 아래에서 나와 서방(西方)으로 들어갔다.
영희전(永禧殿) 제2실(室)의 영정(影幀)에 터진 곳이 있어서 도감(都監)에서 봉심(奉審)하여 재실(齋室)에 옮겨 내어서 수보(修補)한 뒤에 다시 봉안(奉安)하였다.
2품(二品) 이상의 관원으로 일찍이 옥당(玉堂)의 직임을 역임한 인원과 승지(承旨)·사관(史官) 등을 모아 어용(御容)을 모화(模畫)한 초본(草本)을 내어 보이고, 봉심(奉審)하여 각가 소견(所見)을 적어서 올리도록 명하였는데, 모두 능히 ‘진선(盡善)’하지 못하다고 말하였다. 이날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할 때에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화상을 그리는 일을 감독할 것과 임금이 자주 임시(臨視)하여 주실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4월 10일 정사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유(李濡)가 병술년240) 칭경(稱慶)할 때 추은(推恩)241) 한 전례(前例)에 따라서 사대부(士大夫) 80세와 상한(常漢) 90세에게 모두 가자(加資)하도록 할 것을 청하고, 또 백두산(白頭山)의 정계(定界)한 곳에 고산(高山)·심곡(深谷)을 물론하고 모두 돌을 쌓고 성책을 세워서 뒷날의 걱정이 없게 할 것을 청하였다. 또 역관(譯官) 가운데 북경(北京)으로 갈 때에 문서(文書)를 구입해 와서 바친자는 약간의 경중(輕重)을 구분해서 상(賞)을 논할 것을 청하고, 또 사신이 행차할 때 쇄마(刷馬)242) 구인(驅人)이 책문(柵門)에서 봉점(逢點)243) 하지 않아 비록 다 발각되진 않았으나 구류를 당한 자가 30여 명으로서 오랫동안 가두어 두는 것은 폐단이 있으므로 형문(刑問)을 가하여 정배(定配)를 시킬 것을 청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호군(護軍) 권상유(權尙遊)가 말하기를,
"데리고 같이 간 단련사(團練使)244) 의 소통사(小通事)245) 등도 또한 마땅히 형장(刑杖)으로 추문(推問)해야 합니다."
하니, 좌의정(左議政) 이이명(李頤命)이 말하기를,
"사면령(赦免令)이 이미 내렸으니, 추죄(追罪)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이명이 또 변장(邊將)으로 단련사(團練使)를 골라 보낼 것을 청하니, 그대로 허락하였다. 이유가 또 말하기를,
"근래에 익위사(翊衛司)의 관원(官員) 김재해(金載海)가 《중용(中庸)》을 진강(進講)하였는데 자못 착실(着實)하니, 지금 마땅히 전조(銓曹)에 신칙(申飭)하여 익위사(翊衛司)의 관원을 택차(擇差)하여 서연(書筵)에 입참(入參)토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고, 또 호서 사인(湖西士人) 이간(李柬) 등 한두 사람을 등용할 만하다고 추천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이유가 앞서 이미 능관(陵官)을 변통시키는 방도를 소진(疏陳)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다시 그 말을 거듭하면서 누누이 진품(陳稟)하기를,
"한조(漢朝)의 여러 능(陵)에 영(令)·승(丞)·감(監)을 두었는데, 우리 나라의 종묘(宗廟)·사직(社稷)에도 또한 영(令)이 있습니다. 영은 바로 5품관(品官)인데 능관(陵官)을 만일 5품으로 한다면 경비(經費)에 방해가 있습니다. 강등(降等)시켜서 6품으로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이이명이 말하기를,
"품계(品階)는 비록 5품이더라도 다만 그 녹봉(祿俸)만 감소(減少)시키는 것이 적당할 것입니다."
하였다. 판윤(判尹) 민진후(閔鎭厚)는 말하기를,
"마땅히 사용(司勇)246) 의 급료로 지급해야 합니다."
하였다. 지돈녕(知敦寧) 김진규(金鎭圭)는 극력 불가하다고 주장하기를,
"비록 소통(疏通)시킨다고 하지만, 도리어 혼란(混亂)만 증가시킬 뿐입니다. 한(漢)나라의 여러 능(陵)은 읍(邑)을 설치하였기 때문에 영(令)을 두었으니, 우리 나라의 경우와는 같지 않습니다. 그러고 또 5품을 6품으로 강등시키는 것이나 동반직(東班職)에게 군직(軍職)의 급료를 지급하는 것은 두 가지가 모두 구차스러운 일입니다."
하였다.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은 혹은 이유(李濡)의 말이 옳다고 하고 혹은 그것이 불가하다고 하니, 임금이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소통(疏通)시키는 것이 진실로 좋으나, 만일 영(令)을 두게 되면 자주 체직시키는 것도 또한 염려스러운 일이니, 뒷날의 폐단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다시 상의하여 품처하는 것이 옳겠다."
하고, 임금이 하교하기를,
"지돈녕(知敦寧)은 본래 그림의 품격(品格)을 알고 있으니, 어용 모화 도감(御容模畫都監)의 당상관(堂上官)으로 임명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송상기(宋相琦)가 도감(都監)의 당상관(堂上官)은 으레 호조(戶曹)·예조(禮曹)·공조(工曹) 3조(三曹)의 장관(長官)으로 임명하는 준례를 진품(陳稟)하니, 임금이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체직시켜서 바꾸어 대신 나오도록 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에 공조 판서가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김진규(金鎭圭)가 상주(上奏)하기를,
"탕춘대(蕩春臺)에 창고(倉庫)를 설치하고 또 익성(翼城)을 쌓기로 논의하였는데, 마땅히 오늘에 있어서 다시 그 가부를 살펴보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大臣)에게 가서 살펴보도록 명하였다. 후일에 연중(筵中)에서 이이명이 상주하기를,
"성(城)을 비록 쌓는다 하더라도 또한 아울러 수비하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굳이 다시 살펴볼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단지 창고만 설치하라고 명하고 성을 쌓는 일은 정지시키었다. 대사간(大司諫) 이관명(李觀命)이 전계(前啓)를 진달한 뒤에 상주(上奏)하기를,
"명종(明宗)·선조(宣祖) 무렵에는 유풍(儒風)이 크게 진작되었고, 효종(孝宗) 때에는 어진 선비를 연접(延接)하였는데, 근래에 선비의 기풍이 옛날과 같지 않은 것은 오로지 유현(儒賢)이 조정에 있지 않은 데 연유한 것입니다. 권상하(權尙夏)는 이미 특별한 유지를 받았으니, 만일 더욱 성례(誠禮)를 돈독히 한다면 또한 어찌 결단코 세상을 잊어버리겠습니까. 이희조(李喜朝)는 본래 학술(學術)이 있고 시무(時務)에 단련이 되어 통달하니, 이들을 똑같이 소치(召致)한다면 반드시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이밖에 청환(淸宦)이 될 만한 사람들을 또한 마땅히 각별히 조용(調用)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이유가 인대(引對)가 끝나지 않았는데 병이 발작해서 먼저 물러나와 사직하는 차자를 올리니, 우비(優批)를 내리고 의원(醫院)에게 병을 보살피도록 명하였다.
김진규(金鎭圭)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이이명(李頤命)을 어용 도사 도감 도제조(御容圖寫都監都提調)로, 김우항(金宇杭)·조태구(趙泰耉)·김진규(金鎭圭)를 제조(提調)로 삼고, 또 낭청(郞廳) 이만견(李晩堅)·심택현(沈宅賢) 등을 차임(差任)하였다.
4월 11일 무오
도감 제조(都監提調) 이이명(李頤命) 등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니, 어용(御容) 화본(畫本)을 출초(出草)하는 일을 위해서였다. 임금이 익선관(翼善冠)·곤룡포(袞龍袍) 차림으로 나와 있는데, 먼저 일전에 기초(起草)한 이본(二本)을 어좌(御座)에 걸었다. 여러 신하들이 들어가 초본(草本)을 본 뒤에 화공(畫工) 진재해(秦再奚)도 따라 들어가 그림 그리는 도구를 앞에 펼쳐 놓고 유지(油紙)를 가지고 초본(草本)을 개출(改出)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품지(稟旨)하여 진재해와 함께 모두 앞으로 가까이 가서 바라보며 각각 의견으로써 진재해를 일깨워 주었는데, 김진규(金鎭圭)가 더욱 특별히 주의(注意)하였다. 조태구(趙泰耉)가 의자(椅子)에서 내려가 평상(平床)에 앉아서 바라보기에 편리하도록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이명(李頤命)이 2본(二本)을 정사(精寫)하여 한 벌은 대내(大內)에 봉안(奉安)하고 한 벌은 강화(江華) 장녕전(長寧殿)에 봉안하되, 장녕전에 봉안된 구본(舊本)은 그 즉시로 세초(洗草)247)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의사도 또한 그러하다."
하였다. 【뒤에 임금이 한 벌은 대내(大內) 선원전(璿源殿)에 보관하라고 분부하였다.】 임금이 내시(內侍)에게 내장(內藏)되어 있는 을해년248) 에 조세걸(曺世傑)이 그린 본(本)을 가져다가 여러 신하들에게 보여 줄 것을 명하였다. 모두들 그것이 미진(未盡)하다고 말하니, 임금이 도로 그대로 가져다 넣어두라고 명하였다. 이이명(李頤命) 등이 다른 화사(畫士)와 방외(方外)의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을 불러 재능을 시험하여 그림 그리는 일에 참여토록 할 것을 청하고, 또 무진년249) 조지운(趙之耘)의 전례에 따라 전(前) 현감(縣監) 정유승(鄭維升)을 감조관(監造官)에 차임하여 바로 녹봉(祿俸)을 주어서 그림 그리는 일을 함께 의논하도록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허락하였다. 진재해가 초본(草本)을 완성한 뒤에 여러 신하들이 모두 ‘전본(前本)에 비해서 훨씬 낫다.’고 말하였다. 이이명이 이 본(本)에 의거해서 초본(綃本)에 옮겨 그려 채색을 할 때에 임금이 다시 임시(臨視)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이번에 사신이 갈 때에 목면(木綿)이 본래의 수효에서 부족이 생겨 많게는 24필(匹)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만일 과연 도중에서 도적을 맞은 것이라면 방호(防護)를 소활(疏濶)하게 한 죄가 없지 않습니다. 청컨대 사신이 데리고 간 역관(譯官)을 잡아다 문초하여 정죄(定罪)토록 하소서. 공주 목사(公主牧使) 강언(姜言)은 정령(政令)이 사리에 어긋났으며, 사리(私利)를 도모하여 자기만 살찌게 하였으니, 청컨대 파직(罷職)시키소서."
하였는데, 단지 역관을 잡아다 심문하는 일만 윤허하였다.
4월 12일 기미
정호(鄭澔)를 부제학(副提學)으로, 이의현(李宜顯)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채이장(蔡以章)을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로 삼았다.
유생(儒生) 김경(金儆)을 장(杖) 1백 대, 유(流) 3천 리에 처할 것을 명하였다. 김경은 태학(太學)의 재생(齋生)으로서 하재생(下齋生)에게 모욕을 당하니, 대사성(大司成) 민진원(閔鎭遠)이 김경(金儆)을 재사(齋舍)에서 축출(逐出)하였다. 김경이 이에 분노하여 무욕(誣辱)하기를, ‘하재생이 지전(紙錢)으로써 민진원(閔鎭遠)에게 뇌물을 주었다.’고 하기에 이르렀다. 민진원이 이에 인해 누차 사직소를 올렸고, 동지관사(同知館事) 조태채(趙泰采)는 사습(士習)이 아름답지 못하다 하여 그를 잡아다 가두고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였다. 뒤에 사면을 받아 석방되었는데, 곧바로 대계(臺啓)로 인하여 다시 붙들려 갇히어 심문을 당하자, 즉시 자복(自服)을 하였기 때문에 이런 분부가 있었다.
4월 13일 경신
도감 제조(都監提調) 이이명(李頤命) 등이 여러 화사(畫師)를 인솔하고 입시(入侍)하여 어용(御容)이 상초(上綃)한 신본(新本)에 채색을 하였다. 이이명이 상주(上奏)하기를,
"화사(畫師)의 말을 들으니, 연잉군(延礽君)250) 이 그림의 이치에 대해 꽤 이해하고 있다 합니다. 마땅히 연잉군에게 내어다 보이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드디어 임금의 승낙을 얻어 들어가 참여하였다. 채색을 칠하는 일이 끝나자,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전본(前本)에 비해서 훨씬 실물(實物)에 가깝습니다."
하고, 김진규(金鎭圭)가 말하기를,
"비록 다른 본(本)을 다시 만든다 하더라도 반드시 이 본(本)보다 낫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선 외방(外方)의 화공(畫工)들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또 진재해(秦再奚)로 하여금 조용히 생각해 보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제조(提調) 민진원(閔鎭遠)이 상주(上奏)하기를,
"병자 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난 뒤에 의주(義州) 사람 최효일(崔孝一)이 천조(天朝)251) 에 내부(內附)할 때에 관서(關西) 사람 차예량(車禮亮)이 뜻을 같이하는 선비 수십인(數十人)과 힘을 합해 자송(資送)252) 하며 그와 더불어 언약하기를, ‘최효일이 저들 나라에 들어가서 천조(天朝)와 더불어 심양(瀋陽)을 합공(合攻)하게 되면 청(淸)나라가 반드시 우리 나라에 원병(援兵)을 요청할 터인데, 우리 나라는 반드시 청나라의 북병(北兵)을 징발(徵發)시킬 것이니, 너희들 뜻을 같이하는 자들이 응모(應募)하여 들어가서 이윽고 내응하여 대사(大事)를 도모하자.’ 하였습니다. 그 뒤에 차 예량이 정탐(偵探)이 되어 심양에 몰래 들어갔다가 정명수(鄭命壽)로 인해 일이 발각되어 동지(同志) 10여 인이 함께 화(禍)를 당하였습니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황일호(黃一皓)도 이 일 때문에 죽었고, 최효일과 차예량은 북경(北京)에서 화를 당하였습니다. 그 뒤에 조정에서는 누설(漏泄)될 것을 염려하여 미처 정포(旌褒)를 하지 못하였었으나, 이미 황일호에게 증직(贈職)과 사시(賜諡)를 하였으니, 차예량에게도 또한 마땅히 정포(旌褒)를 하여야 합니다. 청컨대 본도(本道)로 하여금 그 당시에 화를 당한 사람들의 성명(姓名)과 전후의 사적(事蹟)을 상세히 조사하여 계문(啓聞)토록 한 뒤에 등급을 구분하여 품처(稟處)케 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민진원이 또 말하기를,
"효행(孝行)과 절의(節義)는 중도를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버이의 상(喪)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죽은 사람이거나 과부가 지나치게 슬퍼하다가 따라 죽은 경우는 비록 사람마다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나, 끝내 중도에 지나침을 면치 못하니, 바로 정포(旌褒)를 허락하는 것은 아마 과중(過中)한 듯합니다. 이것도 마땅히 정식(定式)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이명이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토록 할 것을 청하였다. 뒤에 영의정(領議政) 이유(李濡)가 헌의(獻議)하기를,
"이것은 바로 천백 명 가운데 1명만이 있는 경우로서, 비록 권려(勸勵)하더라도 반드시 사람마다 다 본받을 수는 없으나, 정려(旌閭)로써 허락하는 것은 격려(激勵) 권면(勸勉)하는 도리에 방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여러 대신(大臣)들이 이유(李濡)의 의논을 많이 따르니, 임금이 이유의 의논에 따라 시행할 것을 명하였다. 임금이 왕세자(王世子)에게 지금 강(講)하는 《중용(中庸)》에 한해서만 배강(背講)253) 을 하고 그 나머지 다른 책은 다 임강(臨講)254) 한 것을 명하였다. 대개 제조(提調) 조태구(趙泰耉)가 세자(世子)가 다리의 질환(膣患)이 비록 조금 나아지기는 하였지만 본래 습기가 많아서 강송(講誦)하는 데 불편한 점이 있을까 염려하기 때문에 임강(臨講)할 것을 청하였고, 이이명 또한 《중용》에 한해서 배강(背講)토록 하자는 건의가 있었으므로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강화(江華)에서 암돼지가 새끼 한 마리를 낳았는데, 입이 둘이고 눈이 넷이고, 귀가 넷이고 다리가 여덟이며, 꼬리가 둘이었다.
4월 16일 계해
제주(濟州)의 종이 된 죄인 이성휘(李聖輝)의 종 계남(季南)이 격쟁(擊錚)255) 하였으므로 형조(刑曹)에 내리니, 납공(納供)하기를,
"이성휘는 세종 대왕(世宗大王)의 십세손(十世孫)이고, 또 정사 공신(靖社功臣) 이후원(李厚源)의 증손(曾孫)이니, 마땅히 그 음덕을 입어야 합니다."
하였다. 이윽고 이수철(李秀哲)의 전례를 원용(援用)하여 종이 된 명칭을 제거해 줄것을 청하고, 또 휴가를 주어서 편모(偏母)를 귀근(歸覲)256) 케 할 것을 원하였다. 형조(刑曹)에서 의금부(義禁府)로 이관시키니, 【당초에 종으로 만든 것은 바로 의금부에서 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의금부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종을 면제하는 한 사항은 경솔히 의논할 수 없으나, 귀근(歸覲)하는 일은 성상의 재가를 품의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죄명(罪名)이 비상(非常)하니, 결코 휴가를 줄 수 없다."
하고, 그대로 둘 것을 명하였다. 당시의 의논이 모두 말하기를, ‘이성휘(李聖輝)가 기은(祈恩)257) 을 빙자한 것은 방자하고 무엄하지만, 해부(該府)가 논주(論奏)하여 재가를 품의한 것도 또한 매우 잘못한 것이다.’ 하였으니, 임금의 하교가 어찌 제방(提防)을 엄중하게 하는 지극한 뜻이 아니겠는가.
4월 18일 을축
안개 기운이 있고 태백성(太白星)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김유(金楺)를 사간(司諫)으로, 신사철(申思喆)과 홍계적(洪啓迪)을 수찬(修撰)으로, 홍석보(洪錫輔)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이우항(李宇恒)을 통제사(統制使)로, 백시구(白時耉)를 황해 병사(黃海兵使)로 삼았다.
경상도(慶尙道) 유학(幼學) 노대휘(盧大徽) 등이 상소하여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선정(先正)의 도덕(道德)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마는, 사안(事案)이 중대하기 때문에 이렇게 유난(留難)하는 비답을 내리는 것이다."
하였다. 노대휘 등이 재차 상소하여 거듭 청하였으나, 그래도 허락하지 않았다.
4월 19일 병인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핵하기를,
"사은사 서장관(謝恩使書長官)인 서명우(徐命遇)는 명망과 여론이 본래 가벼워서 탄압(彈壓)할 것이 없으니, 청컨대 체차(遞差)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4월 20일 정묘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공조 판서(工曹判書) 김진규(金鎭圭)가 상주(上奏)하기를,
"북한 산성(北漢山城) 밖에 창고를 설치한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어떤 위급한 변란을 당한다면 어느 겨를에 곡식을 운반해 들여오겠습니까."
하고, 예조 판서(禮曹判書) 김우항(金宇杭)은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도적에게 양식을 가져다 주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여겨지지 않습니다."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이이명(李頤命)은 말하기를,
"당사자(當事者)도 이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성내(城內)가 협착(狹窄)하여 용납하기 어렵기 때문에, 성 밖에 창고를 설치한 것은 대개 이런 연유에서입니다. 지금 모름지기 조속히 곡식을 운반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함경 감사(咸鏡監司) 이광좌(李光佐)가 사조(辭朝)258) 하니, 같이 입시(入侍)할 것을 명하였다. 이광좌가 상주(上奏)하기를
"무관(武官)이 육진(六鎭)의 수령(守令)을 역임하지 않으면 병사(兵使)나 수사(水使)를 허락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이것이 하나의 법칙이었는데, 폐기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지금 만일 옛법을 다시 밝힌다면, 또한 싫어하거나 회피하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전조(銓曹)로 하여금 더욱 가려서 보내도록 하였다. 이광좌과 또 말하기를,
"개시(開市)259) 때에 북평사(北評事)가 만일 검찰(檢察)을 한다면 반드시 실효(實効)가 있을 것이니, 지금부터 개시(開市) 때에 한해서 평사의 수유(受由)260) 를 허락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헌납(獻納) 한중희(韓重熙)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어 유혁연(柳赫然) 등의 일에 이르자, 지평(持平) 김운택(金雲澤), 부교리(副校理) 홍우서(洪禹瑞)도 또한 잇따라 진달하였다. 이이명(李頤命)이 말하기를,
"이것은 공의(公議)이니, 윤종(允從)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이내 극력 말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김우항·이광좌 및 행 사직(行司直) 김석연(金錫衍)이 모두 우물쭈물하며 명백하게 말하지 못하니, 임금이 의금부(義禁府)에 다시 경신년261) 의 문안(文案)을 살펴 품처(稟處)할 것을 명하였다. 이이명이 또 말하기를,
"요즘에 삼가 보건대, 성상께서 수라(水剌)를 드실 때에 반찬의 가짓수가 많지 않으십니다. 성상의 자봉(自奉)하심이 이와 같으시니, 신하들이 어찌 감히 사치스러울 수 있겠습니까. 외방(外方)의 사객(使客)에 대한 공궤(供饋)가 근래에 매우 사치스러워 이로 인해 폐단을 끼치는 것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으니, 마땅히 엄중하게 신칙하는 방도가 있어야 합니다."
하고, 이광좌도 또한 진달하니, 임금이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신칙(申飭)할 것을 명하였다.
4월 21일 무진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大臣)과 여러 승지(承旨)와 도감(都監)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또한 입시(入侍)하였는데 어용(御容)을 그린 초본(草本)을 함께 살펴보고는 모두 초본으로써 방불(彷彿)하다 하니, 임금이 이 본(本)을 모방하여 정본(正本)을 그려서 내도록 명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그림을 다 그린 뒤에 우선 대내(大內)에 봉안(奉安)하였다가 농한기(農閑期)를 기다려서 강도(江都)로 모셔갈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그 이튿날 또 여러 종신(宗臣)들과 2품 이상으로서 일찍이 옥당(玉堂)의 직임(職任)을 역임한 사람은 일체 봉심(奉審)할 것을 명하였으나, 모두 이론(異論)이 없었다. 마침내 이것으로 정본(定本)을 삼고 외방에서 온 여러 화공(畫工)들을 파견(罷遣)하였다.
처음에 형조(刑曹)에서 진소(陳疏)한 사람 조정호(趙挺豪)를 가두고 공초(供招)를 받았는데, 조정호가 방례(邦禮)의 한 사항으로 50년 동안 유래(流來)하는 말이라 하면서 범범하게 말을 가려서 하지 않은 것으로 말을 하며, 사주한 사람도 드러내어 고하질 않으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이 무리들이 일찍이 이 일로써 고묘(告廟)를 청하기에 이르렀으니, 용의(用意)가 아주 흉참(凶慘)하다. 신자(臣子)된 자가 어찌 감히 다시 제론(提論)할 수가 있겠는가. 이번에 이 투소(投疏)를 한 것은 반드시 그렇게 하도록 사주한 자가 있을 터인데, 범범히 말을 가려서 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니, 각별히 엄형(嚴刑)을 가하라."
하였다. 조정호(趙挺豪)가 이로 인해 1차(次)의 형벌을 받았다. 일전에 형조 판서(刑曹判書) 이건명(李健命)이 경연(經筵)에서 아뢰기를,
"조정호의 정상(情狀)이 절통(絶痛)하니 지금 마땅히 형벌(刑罰)을 가하여야 하지만, 그가 이미 소유(疏儒)라고 칭하였으니 사주한 사람을 다그쳐 묻게 되면 뒷날의 폐단에 관계됨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김진규(金鎭圭)는 그 형벌을 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초의 의도는 반드시 그 사주한 사람을 묻고자 하는 것이니, 한결같이 자복(自服)하지 않아서 끝내 곤장[杖] 아래에서 쓰러져 죽게 된다면 이는 또한 지나친 일인 듯하다."
하였다. 이윽고 극변(極邊)으로 멀리 귀양보낼 것을 명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사헌부(司憲府)에서 【지평(持平) 김운택(金雲澤)이다.】 논계(論啓)하여 정배(定配)하라는 명령을 환수(還收)하고, 전례에 따라 판부(判付)262) 하여 형벌을 가하여 사실을 밝혀낼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4월 22일 기사
도감(都監)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화사(畫士) 진재해(秦再奚)·장태흥(張泰興) 등도 같이 들어왔는데, 진재해로 하여금 어용(御容)의 전신(全身) 한 벌을 그려내도록 하였다.
처음에 성균관(成均館)의 거재생(居齋生)이, 재임(齋任) 김시형(金始烱)이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종향(從享)하자는 소의(疏議)에 응하지 않는다고 하여 권당(捲堂)을 하고 소회(所懷)를 진달하니, 임금이 김시형을 정거(停擧)263) 하도록 명하였다. 여러 유생들이 분부를 받들고 다시 들어갔는데, 재임(齋任) 이덕순(李德淳)이 또 당소(當疏)의 일에 나오지 않았다. 여러 유생들이 이때에 와서 또 권당(捲堂)을 하고 여러 번 소회(所懷)를 진달하니, 임금이 매양 들어가도록 권고하게 하였으나, 여러 유생들이 명령에 응하지 않고 3일 동안 성균관을 비웠다. 임금이 이에 하교하기를,
"종사(從祀)하자는 청은 사체(事體)가 가볍지 않다. 이덕순이 시종 응하지 않은 것은 몹시 미편한 일이니 정거(停擧)시키고 다시 개유(開諭)하여 들어가도록 권고하라."
하니, 여러 유생들이 마침내 다시 들어갔다.
4월 23일 경오
태백성(太白星)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가 3일 만에 사라졌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핵하기를,
"형조 좌랑(刑曹佐郞) 이만근(李萬根)은 탐욕스럽고 교활하여 뇌물을 받고 사정(私情)을 따랐으니, 청컨대 태거(汰去)시키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4월 24일 신미
밤에 유성(流星)이 북두성(北斗星) 위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곽만적(郭萬績)을 정언(正言)으로, 이병상(李秉常)을 수찬(修撰)으로, 송성명(宋成明)과 신사철(申思喆)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유숭(兪崇)을 문학(文學)으로 삼았다.
4월 25일 임신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유(李濡)가 말하기를,
"흉년든 해에 수령(守令)들이 재해를 보고해 오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이로 인해서 부역을 면제받는 자가 있기도 하지만, 선심을 쓰거나 명예를 요구하는 결과를 면치 못하기도 합니다. 앞으로는 어사(御史)가 염문(廉問)할 때에 마땅히 따로 살피고 물어보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이 뒤로는 어사(御史)의 봉서(封書) 가운데 이 일조(一條)를 써내어서 염문(廉問)하도록 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조태구(趙泰耉)가 경차관(敬差官)264) 으로 경시관(京試官)을 겸임시켜 전기(前期)해서 내려보내 먼저 실지로 조사하도록 할 것을 청하니, 이유(李濡)와 좌의정(左議政) 이이명(李頤命)은 모두 경차관은 폐해만 있고 실효가 없음을 말하였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만일 각도(各道)의 더욱 극심한 곳에 불시(不時)에 경차관을 마치 암행 어사(暗行御史)의 예와 같이 보낸다면 보탬이 있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유가 또 탕춘대(蕩春臺)에 창고를 설치하는 일을 누누이 진백(陳白)하기를,
"지금은 성(城)을 쌓는 공사를 비록 정지시켰으나, 창고를 설치하여 수비하는 일에 있어서는 결단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상께서 이러한 형세를 상세히 살피시키를 바라고자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
4월 26일 계유
일전에 연중(筵中)에서 이유(李濡)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판부사(判府事) 이여(李畬)는 오랫동안 머무를 의사가 없으니, 마땅히 돈면(敦勉)하는 거조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이이명(李頤命)도 또한 그렇게 말하니, 임금이 승지(承旨)에게 유시(諭示)하기를,
"내가 면류(勉留)하는 뜻으로써 이 판부사(李判府事)에게 직접 유시하고자 하니, 내일 들어오게 하라."
하였다. 이날 이여(李畬)가 명을 받들어 입시(入侍)하니, 임금이 면류(勉留)하는 뜻으로 반복해서 친절하게 타이르기를,
"갑자기 시골로 돌아갈 계획을 세우기를 신묘년265) 의 일처럼 하지말라."
하니, 이여가 대답하기를,
"신은 오래 머물러 보아야 도움이 없고 질병은 조석(朝夕)의 우려가 있으니, 혹시 살아서 왔다가 죽어서 돌아가 국가(國家)에 수치를 끼치게 될까 두렵습니다. 성상의 하교가 이에 이르렀으니, 병세가 만일 억지로라도 부지할 수만 있다면 어찌 감히 서둘러 돌아가겠습니까."
하였다. 승지(承旨) 남취명(南就明)이 상주(上奏)하기를,
"지난번에 대신(大臣)의 진백(陳白)으로 인하여 나이가 90이 된 이는 추은(推恩)하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일찍이 시종(侍從)을 역임하여 나이가 70이 넘은 이에 대해서도 마땅히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恩典)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해조(該曹)에 초계(抄啓)할 것을 명하였다.
4월 27일 갑술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할 때 도사 도감 제조(圖寫都監提調) 김진규(金鎭圭)도 같이 들어와 주달(奏達)하기를,
"어용(御容) 두 벌을 일전에 주상께서 하교하시기를, ‘모두 익선관(翼善冠)·곤룡포(袞龍袍) 차림으로 그리라.’고 분부하셨는데, 바깥 의논들은 모두 말하기를, ‘원유관(遠遊冠)·강사포(絳紗袍) 차림이 더욱 성복(盛服)이 되니 한 벌은 마땅히 이것으로 그려야 한다.’고 하고 있으니, 이 말이 좋을 듯합니다."
하고, 약방(藥房)의 여러 신하들도 모두 김진규의 말이 옳다고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부제학(副提學) 정호(鄭澔)가 향리(鄕里)에 있으면서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은 삼가 여러 신하들이 정청(庭請)한 계사(啓辭)를 보고 잇따라 춘궁(春宮)이 앙청(仰請)한 소(疏)를 보매, 특별히 존주(尊周)의 의리를 들어서 거룩한 덕(德)과 위대한 공업(功業)을 조목으로 삼았으니, 신은 기뻐 날뜀과 감탄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는 천지(天地)가 번복(翻覆)된 시기를 당하여 《춘추(春秋)》의 존주(尊周)의 의리를 밝혀서 영웅 호걸을 자나깨나 생각하고 와신 상담[薪膽]266) 으로 의지를 가다듬으시었으며, 임금과 같은 덕행이 있는 신하가 있어 은밀히 모유(謨猷)를 도와 일심(一心)으로 수리(修理)하고 양척(攘斥)하여 장차 위대한 일을 이루려 하였습니다. 하늘이 이 나라를 돕지 않으시어 지업(志業)이 이루어지지 못하니, 슬픔은 온 나라에 퍼지고 대의(大義)는 장차 어두어지려 하였습니다. 우리 전하께서 깊이 앙모(仰慕)하는 마음을 가지시고 능히 계술(繼述)의 의리를 천명(闡明)하셨습니다. 여러 사람의 의심을 타파하고 전하의 마음으로부터 결단을 내려 효종(孝宗)의 세실(世室)267) 을 확정하여 만들고, 또 대보(大報)의 황단(皇壇)을 설치하니, 이미 어두워졌던 의리(義理)가 다시 밝아지고 펴지지 않았던 지업(志業)이 더욱 드러나서 장차 천하 후세에 떳떳하게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앞서의 효종 대왕과 뒤의 전하가 그 법도는 동일하니, 아! 아름답습니다.
이내 삼가 생각건대 하늘은 홀로 운행하는 이치가 없고 땅은 홀로 성취시키는 도리가 없으니, 비록 어질고 성스러운 임금이 있더라도 반드시 같은 덕행(德行)이 있는 신하를 기다려야만 그 뜻을 이루고 그 명예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지난날에 소열제(昭烈帝)268) 가 비록 대의(大義)를 천하에 밝히려고 하더라도 만일 제갈양(諸葛亮)의 국궁 진체(鞠躬盡瘁)269) 가 아니었다면 혼자서 이루기는 어려웠을 것이며, 성조(聖祖)270) 께서 비록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를 밝히려고 하더라도 만일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의 진충갈력(盡忠竭力)271) 이 없었다면 누가 능히 받들어 순종하였겠습니까. 신은 매양 성조(聖祖)의, ‘지극한 분통이 마음에 있는데 날은 저물고 길은 멀다’는 하교와 송시열(宋時烈)의, ‘원한을 머금고 분통을 참으며 박부득이하다’는 가르침을 생각합니다. 지금에 와서 엄숙히 외어 보아도 감격의 눈물이 스스로 저절로 흐르는 바로서, 실로 귀신에 질정(質正)할 수 있고 백세(百世)에 증거할 만합니다. 그러므로 임금과 신하가 계합(契合)하여 물고기와 물처럼 서로 떼어놓을 수 없어야 할 것인데, 앞에는 소열제(昭烈帝)와 제갈양(諸葛亮)의 경우가 있었고, 뒤에는 효종 대왕과 송시열의 경우가 있었으니, 이는 실로 시대는 다르나 경우는 동일합니다. 표장(表章)·숭보(崇報)하는 전례(典禮)는 마땅히 고금의 차이가 없어야 할 것이니, ‘일체(一體)인 군주와 신하는 같이 제물(祭物)을 올려 제사지낸다.’는 두보(杜甫)272) 의 시어(詩語)에서도 징신(徵信)할 수 있습니다. 대의(大義)를 밝게 드높이는 오늘에 있어서 의당 송시열을 효종의 세실(世室)에 추배(追配)한다면 정리나 예의로 볼 때 거의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겸하여 김익희(金益熙)·민정중(閔鼎重)에게 특별히 추장(追奬)과 증시(贈諡)를 가해서 포이(褒異)를 보일 것을 청하였다. 말미에 또 말하기를,
"주자(朱子)가, ‘피폐(皮幣)·금주(金珠)가 오고 가는 가운데 와신 상담(臥薪嘗膽)의 뜻이 진실로 그 속에 표현되어 있었다.’고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오늘의 군신(君臣) 상하(上下)가 마땅히 패복(佩服)273) 하여 조심하고 힘써야 할 바입니다. 하지만 지난해 6리(里)의 청산(靑山)의 분할을 허락한 것이 어찌 우리에게 이롭겠습니까. 실제로는 걱정스러운 기미가 있는데, 조야(朝野)에서는 안일하게 생각하여 그것이 우려할 만한 일인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절사(節使)를 접대함에 있어서 보통보다 특별했던 것은 우리에게 무슨 영화로움이 있었습니까. 실제로는 수치스러운 단서가 되는데, 원근(遠近) 지방에서 다투어 전하여 그것이 수치스러움이 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일이 깊은 원수를 망각하고, 원대한 계획을 소홀히 함이 이보다 심한 일이 없는 것이며, 따라서 종전에 이른바 ‘《춘추(春秋)》 존주(尊周)의 의리’라는 것이 다시 어떤 일이 되는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항상 성조(聖祖)의 ‘지통재심(至痛在心)’의 교훈으로써 더욱 성려(聖慮)를 돈독히 하시고, 또 송시열의 ‘인통함원(忍痛含冤)’이라는 말로써 여러 관직(官職)을 책려(責勵)해서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태만히 하지 마시어 시종 변함없게 하소서. 그리하여 안으로는 시비(是非)를 밝히고 호오(好惡)를 바르게 하고 기강(紀綱)을 진작시키시며, 밖으로는 민생(民生)을 보호하고 군정(軍政)을 정돈하고 방어(防禦)에 유념하소서. 그리고 또 항상 ‘중원(中原)의 융마(戎馬)는 축출(逐出)하기 쉬우나 한마음에 있는 사욕(私慾)은 제거하기 어렵다.’는 것을 오늘날의 약석(藥石)으로 삼는다면, 시세(時勢)에 억눌려서 비록 성조(聖祖)의 지업(志業)은 능히 크게 신장시킬 수 없다 하더라도, 시기를 보아 틈을 엿본다면 어찌 끝내 의리를 높여 명분을 바르게 할 날이 없겠습니까."
하였는데, 답하기를,
"선정(先正)을 묘정(廟庭)에 추배(追配)하는 일은 마땅히 묘당(廟堂)에 물어서 처리할 것이다. 상소 끝에 진달한 바는 몹시 간절하니,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긴다."
하였다.
일전(日前)에 지평(持平) 김유경(金有慶)의 상소로 인해서 고(故) 판관(判官) 유정기(兪正基)의 처(妻) 신태영(申泰英)을 이혼시키는 것이 적당한가 않은가의 문제를 가지고 여러 대신(大臣)들에게 문의(問議)하니, 여러 대신들이 모두 역적의 집안이나 실신(失身)한 이외에는 이혼하는 법이 없다는 것으로써 대답하였는데, 유독 판부사(判府事) 이여(李畬)는 의논하기를,
"부부(夫婦)는 오륜(五倫)의 시작이요 삼강(三綱)의 근본입니다. 부부가 올바르게 된 이후에야 오륜과 삼강을 펼칠 수가 있습니다. 만일 부인이 나쁜 행실이 있는데도 남편이 감히 버리지 못하고, 비록 패륜(悖倫)·난상(亂常)에 이를지라도 다만 서로 이혼하지 않는 것으로만 도리를 삼는다면 윤리와 기강에 손상됨이 있지 않겠습니까. 동국(東國)의 풍속은 여자가 정조와 신의가 있어서 한 번 시집가면 개가(改嫁)를 하지 않고 비록 축출(逐黜)을 당하더라도 종신토록 스스로 수절(守節)을 하였기 때문에, 국법(國法)에서 가볍게 이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나, 만일 그 죄악이 법률에 관계된 경우에도 또한 일찍이 그 이혼을 허락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대명률(大明律)》에 기재된 것은 바로 국전(國典)인데, 이혼하는 법률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신은 옳은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태영(申泰英)의 옥사는 사실 윤상(倫常)의 변고(變故)입니다. 부부가 있은 이후로 거의 들어보지 못했던 일인 것입니다. 그들이 피차(彼此)에 서로 들추어낸 말은 이미 남녀(男女)가 안방에서 거처하는 데 관계되는 일이므로, 신이 진실로 그 허실(虛實)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단지 의금부(義禁府)의 공사(供辭)만 가지고 논하더라도 신태영은 그 남편을 원수처럼 생각하여 반드시 날조·무함해서 사람축에 끼지 못하게 하려 하였으니, 그 정상이 몹시 패려(悖戾)함은 다만 ‘칠거지악(七去之惡)274) ’이 될 뿐 아닙니다. 근본을 더 이상 캐어볼 것 없이 여기에서 그 죄를 단정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조정에서 이미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서도 오히려 이혼하는 것을 어렵게 여긴다면, 이는 아내가 스스로 그 남편을 절연(絶緣)해도 남편은 감히 절연할 수 없다는 것이 됩니다. 예(禮)로 보나 법(法)으로 보나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이혼하는 법은 남편이 스스로 고하기를 기다려서 이에 죄를 입게 되는데, 유정기(兪正基)는 이미 어가(御駕) 앞에서 스스로 고하였습니다. 지금 비록 이미 죽었지만 부부의 윤리는 생사(生死)에 관계되지 않는 것이니, 이런 경우에 이혼하지 못한다면 부부를 바로 하고 풍교(風敎)를 맑게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고, 판부사(判府事) 김창집(金昌集)의 의논도 이여(李畬)와 같았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이 판부사(李判府事)의 의논이 진실로 그 적당함을 얻었으니,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공조 판서(工曹判書) 김진규(金鎭圭)가 겸대금오(兼帶金吾)275) 로서 상소하여 이혼시킬 수 없다고 강력히 논의하기를,
"유정기(兪正基)와 신태영(申泰英)이 서로 사이가 나쁜 것은 인륜(人倫)의 변고(變故)라 할 수 있는데, 죄인이 범죄 사실을 진술하는 말에 유정기의 집안에서의 몸가짐을 갑자기 들추어낸 것이 몹시 패악(悖惡)하였기 때문에 상신(相臣) 신완(申完)이 말하기를, ‘이혼하는 것은 나라의 법전(國典)이 아니니, 현재 발설된 패악한 말로써 죄를 의논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옥관(獄官)이 드디어 남편을 구타하고 남편을 욕설한 것 등의 법률을 인용하여 앙품(仰稟)하자, 먼 지방에 유배(流配)시킬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 뒤에 유정기가 또 상언(上言)하여 《대명률(大明律)》 가운데 있는 ‘남편이 이혼하기를 원하면 들어준다.’고 한 내용을 구실로 삼았는데, 이는 바로 남편을 구타한 경우를 가리킨 것이므로, 신태영(申泰英)의 죄상(罪狀)과는 진실로 다릅니다. 그리고 조종조(祖宗朝)에 있었던 한 두 가지 고사(故事)는 일시적인 특명(特命)이므로 아마 이를 원용(援用)하여 준례로 삼을 수는 없을 듯합니다. 성비희(成非喜)의 죄는 신태영에 비교해서 더 무거운데도 그 당시의 상신(相臣)인 이경석(李景奭)의 의논에서 예에 있어서는 마땅히 버려야 한다는 점을 비록 약간 언급하긴 하였으나, 또한 질정(質正)하여 말한 것과는 다릅니다.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의 의논은 단지 법률을 적용하는 경중(輕重)에 있을 뿐이고, 원래 버릴 거[去] 자(字)는 하나도 없으니, 이것이 과연 신태영의 이혼과 방불(彷彿)하겠습니까. 노성(老成)한 대신(大臣)들이 미처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윤강(倫綱)의 중대한 것으로 단정하여 반드시 상격(常格)을 깨뜨리고 이혼을 허락하려 합니다.
대저 그 남편의 과오를 들추어내어 고소한 것은 마땅히 남편을 매도한 것에 비유해야 합니다. 남편을 욕설한 것은 남편을 구타한 것보다 죄가 가벼운데, 이에 남편을 구타한 경우에 이혼을 허락하는 법률을 가지고서 남편을 욕설한 경우에 적용시킨다면, 삼척(三尺)276) 을 낮추었다 높였다 하면서 일정(一定)하지 않은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처첩(妻妾)이 질투하고 애교 부리는 사이에 사랑함과 미워함이 일정하지 않으니, 한 번 이 길을 열어 놓는다면 진실로 장래에 무죄(無罪)한 부인(婦人)이 원한을 품게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 염려됩니다. 신태영은 진실로 패악하지만 유정기도 또한 잘못이 있습니다. 대저 유정기의 부모(父母)가 과연 평소에 신태영이 불순(不順)한 것을 몹시 원망하였다면 어찌 신태영이 친히 낳지도 않은 자식의 혼취(婚娶)에 방해가 있을 것을 염려해서 처단하지 않았겠습니까. 진실로 그를 대우하기를 다정하게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뒤에 자녀(子女)를 많이 출산(出産)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또 구수(仇讎)로 지목을 하여 사당에 고하고 내쫓아 버렸다면, 또 어찌 그를 왕래하도록 하였겠습니까. 그리고 또 이미 아내를 내쫓아서 죄가 마땅히 이혼을 해야 된다고 여겼다면, 1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예조(禮曹)에 소장(訴狀)을 올린 것은 또 어찌 그다지도 느린 것입니까. 더구나 그 비첩(婢妾)을 가까이 하고 귀여워하여 신태영이 들추어내어 고소한 것은 대개 그러한 결과를 초래하도록 한 바가 있는 것이니, 반목(反目)하는 것이 좌복(左服)277) 에 연유하지 않았다고 핑계댈 수가 있겠습니까.
대저 ‘남편이 아내의 벼리가 되는 것’은 능히 가정의 모범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유정기가 일찍이 스스로 반성은 하지 않고 수치를 무릅쓰고 이혼을 청하였는데, 조정에서 부당하게 그 소원을 따른다는 것은 올바른 일이라고 보여지지 않습니다. 거기다가 지금 유정기 자신은 죽었으니, 이혼의 법을 어느 곳에다 시행하겠습니까. 그리고 유정기의 아들에 있어서는 일찍이 신태영을 어미로 대우하여 왔는데 이런 변고를 당하고 보니, 그가 변고를 대처하기가 진실로 곤란합니다. 진실로 이혼을 허락하게 된다면, 이는 바로 이른바 ‘공급(孔伋)278) 의 처(妻)가 되지 않았더라면 공백(孔白)279) 의 어머니가 되지 않았을 것을 알 수 있다.’는 경우라 할 것입니다. 이 일로 미루어 본다면 유정기의 부처(夫妻)를 갈라 놓는 것은 사실은 그 자식의 윤의(倫義)를 끊어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정기가 반드시 이혼을 하려고 하였던 것도 그 아들의 처지를 위한 까닭이었습니다. 대저 법(法)을 외면하고 남의 부부를 이혼시키는 것도 오히려 불가한 일인데, 더구나 모자(母子) 간의 윤의(倫義)를 단절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또 더구나 신태영의 모자(母子)간의 윤의(倫義)를 단절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또 더구나 신태영의 공사(供辭)에는 그 아들에 대한 언급이 있기도 합니다. 이것은 본디 분하고 원망스러운 데서 나온 것이니, 꼭 이런 일이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그 체단(體段)은 가볍지가 않습니다. 지금 신태영을 대도(大都)에 그대로 두어도 관대(寬大)함에 해롭지 않은데, 이에 죄가 윤상(倫常)에 관련되었다고 하여 나라의 법전에도 없는 법률을 시행한다면, 저 모자(母子)와 적첩(嫡妾)은 유독 윤상에 관계되지 않는 것입니까."
하였다. 이어서 밖에 있는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에게 다시 문의하고, 또한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그 의견을 진달하도록 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상소 진달한 바도 또한 의견(意見)이 있으니, 소사(疏辭)에 따르도록 하라."
하였다. 뒤에 예관(禮官)이 가서 외부에 있는 대신(大臣)과 유신(儒臣)들에게 문의하니, 판부사(判府事) 최석정(崔錫鼎)과 윤증(尹拯)은 헌의(獻議)하지 않았고, 영부사(領府事) 윤지완(尹趾完)은 김진규(金鎭圭)의 말이 타당하다고 대답하였다. 대사헌(大司憲) 권상하(權尙夏)는 이여(李畬)의 의논이 옳다고 하였고, 판의금(判義禁) 김우항(金宇杭), 동의금(同義禁) 남치훈(南致熏)·이선부(李善溥), 예조 참판(禮曹參判) 민진원(閔鎭遠)은 국전(國典)에 위배된다고 하여 이를 어렵게 여겼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신태영(申泰英)의 전후 공사(供辭)가 아주 패악하니, 그것이 윤강(倫綱)을 바로 잡는 도리에 있어서는 진실로 마땅히 이혼을 시켜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이혼을 시키는 것은 다만 법전(法典)에만 위배될 뿐 아니라, 또한 후일에 무궁한 폐해를 열어 놓을 염려도 없지 않다. 경솔히 의논하기가 어려울 듯하니 그대로 두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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