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53권, 숙종 39년 1713년 5월

싸라리리 2025. 11. 28.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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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정축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논핵하기를,
"이증록(李增祿)의 공사(供辭) 가운데 오시복(吳始復)을 위해 자장(資裝)을 수송했던 일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하고, ‘관대(官垈)에 사는 사람으로서 이대휴(李大休)의 집에 운반해 줬다.’고 하였습니다. 이대휴의 집으로부터 유배된 곳에 수송하기까지는 도로가 멀리 뻗쳐 있으니, 본현(本縣)의 품관(品官) 민중세(閔重世)와 사령(使令) 산금(山金)이 이 일의 실상을 상세히 알 것입니다. 청컨대 각 사람들한테 물어 보고, 본도(本道)로 하여금 각별히 강직하고 현명한 수령(守令)을 정해서 잡아다 엄중히 조사한 뒤 계문(啓聞)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예조(禮曹)에서 민진후(閔鎭厚)가 경연(經筵)에서 아뢴 말로 인해 첩의 손자가 그 아비가 죽은 뒤에 그 조모(祖母)의 3년 상복을 입는 것의 가부(可否)를 여러 대신(大臣)들에게 문의하니, 판부사(判府事) 이여(李畬)가 의논하여 말하기를,
"《예기(禮記)》에 ‘첩의 어미는 대대로 제사지내지 않는다.’ 하였는데, 주(註)에 ‘그 바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였고, 또 ‘공자(公子)280)  는 그 어미를 위해서 누인 명주로 만든 관(冠)을 쓰고 삼베옷을 입으며 실로 옷가의 선(線)을 하였다가, 이미 장사지내면 이를 벗는다.’ 하였으니, 적모(嫡母)에게 눌리기 때문입니다. 사(士)의 사자(嗣子)는 그 어미를 위해서 자최(齊衰) 3년의 상복을 입고 서자(庶子)의 아들은 아비의 어미를 위해 1년의 상복을 입어 여러 다른 사람들과 동일합니다. 대개 첩의 신분은 천하므로 살아서는 가족의 자리에 동렬(同列)하지 못하고 죽어서는 사당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니, 비록 사(士)의 예(禮)에 있어 그 자식과 손자에 그 상복(喪服)을 입고 제사지냄을 허락하나, 다만 그 자식의 종신(終身)에 그칠 뿐이요, 손자에 이르도록 제사지내는 것은 예절에 어긋납니다. 대저 아들이 아비를 대신해서 상복을 입는 것은 아비의 중(重)함을 승계하기 때문인데, 첩의 자식은 아비에게 계통을 이어 적모(嫡母)로써 어미를 삼으니, 그 생모(生母)는 승중(承重)의 의리에 더불어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손자에 있어서는 제사조차 지내지 못할 바인데, 승중으로 상복을 입는 것이 옳겠습니까. 후세로 내려오면서 옛적의 예절이 밝지 못하여 첩의 아들의 어미를 각각 그 사실(私室)에서 세습(世襲)해 제사지내어 드디어 일상적인 예절이 되어버렸고, 그 승중(承重) 대복(代服)의 절차는 옛부터 이제까지 확정되지 않은 예절이 되어 여러 학설이 서로 다름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통전(通典)》에 기재되어 있는 서자(庶子)의 후사(後嗣)가 되어 서조모(庶祖母)를 위해 상복을 입는 데 대한 의논에서 송(宋)나라의 유울지(庾蔚之)가 말한, ‘소후복(所後服)은 만약 할아비의 후계를 이었다면, 자기는 서조모(庶祖母)의 상복을 입을 수가 없고, 아비가 승중(承重)하지 않았다면 자기는 서조모를 위해 1년 상복을 입는다. 하지만 첩의 자식들은 이어지는 제사가 없기 때문에 3년 상복은 입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니, 이는 아마 가장 확실한 의논이 될 것입니다.
근세(近世)에 여러 선현들이 의논한 바가 또한 각기 같지 않은데, 문원공(文元公)281)  도 처음에는 또한 말하기를, ‘마땅히 3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였다가, 뒤에 이르러 정론(定論)을 하여 그의 《의례문해(疑禮問解)》에 기재되어 있는 내용 가운데는, ‘첩모(妾母)는 대대로 제사지내지 않으니 원래부터 승중(承重)의 의리가 없는 것으로, 「마땅히 3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한 것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김장생(金長生)이 죽은 뒤에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이 여러 문인(門人)들과 함께 평상시에 묻고 대답한 것을 모아 수록하고 서로 고증해서 이 책을 편집하여 예가(禮家)의 표준으로 삼았습니다.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에 이르러서는 그 논한 바가 더욱 엄중하고 정확하여, 이르기를, ‘만약 승중(承重)하는 서자(庶子)의 자식이라면 아버지가 있고 없고를 따질 것 없이 다 마땅히 상복을 입지 않아야 하지만, 승중하는 자의 자식이 아니라고 단지 본복(本服) 3년을 입는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없다. 만약에 「그 아비가 마땅히 3년 상복을 입어야 하기 때문에 아비를 대신해서 3년 상복을 입어야 된다.」라고 말한다면 절대로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무릇 손자가 조부모(祖父母)를 위해 3년 상복을 입는 것은 바로 승중(承重)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첩일 뿐이니 그 손자가 어떻게 또한 승중(承重)을 한다고 하여 3년 상복을 입을 수가 있겠는가.’고 하였으니, 그 의리가 더욱 분명합니다. 또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도 또한 일찍이 첩조모 승중복 당부의(妾祖母承重服當否議)를 지어 옛부터 이제까지의 이동(異同)의 학설을 상세히 의논하였는데, ‘대대로 제사지내지 않는다.’는 의미로써 중요함을 삼았으니, 지금 참고하여 증거할 수가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주자(朱子)의 가르치신 설명도 또한 초년과 만년의 차이가 없지 않으니, 이제 김장생의 말에서 마땅히 따라야 할 것은 《의례문해(疑禮問解)》에 있습니다. 그리고 송시열·박세채의 설명은 더욱 분명하고 자상하니, 이것으로써 결정을 한다면 거의 옛날의 예절에 어긋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영의정 이유(李濡), 판부사(判府事) 김창집(金昌集)·서종태(徐宗泰), 좌의정 이이명(李頤命)이 모두 이여(李畬)의 의논을 옳다고 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조상우(趙相愚)는 의논하기를,
"신의 선사(先師)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이 일찍이 첩의 손자가 상복을 대신 입는 일로써 그의 스승인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에게 질문한 일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번에 강박사(姜博士)에게 답하신 가르침을 보니, 「첩손(妾孫)이 그 할아버지의 후계(後繼)가 됐을 경우 자기의 아비를 나은 어미를 위해서는 상복을 입을 수 없고, 할아버지의 후계가 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자기의 할머니를 위해 마땅히 자최(齊衰) 3년 상복(喪服)을 입어야 된다.」…… 하셨는데, 이것은 첩손(妾孫)으로 할아버지의 후계가 된 자는 그 아비를 낳은 어미를 위해서는 비록 상복을 입지 않지만, 또한 마땅히 승중(承重) 3년 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 됩니다. 마땅히 첩의 자식은 그 어미를 위해 시마복(緦麻服)282)  을 입고 심상(心喪)283)  하는 준례에 의거해서 심상(心喪) 3년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자 김장생(金長生)이 답하기를, ‘비록 상복은 입지 않으나 어찌 성급하게 보통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할 수가 있겠는가. 여러 손자가 기년(朞年) 상복을 입는 제도에 의거해서 심상(心喪)하는 것과 같이 하는 것이 옳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신의 선사(先師)의 이른바, ‘응당 승중(承重) 3년 상복을 입어야 한다.’라고 한 것은 이것이 자기가 지어낸 의논이 아니고, 다만 김장생 편지에 말한 바, ‘그 할머니를 위해 마땅히 자최(齊衰) 3년 상복을 입어야 된다.’라고 한 것에 의거하여 그렇게 말한 것이고, 질문의 주의(主意)는 전적으로 ‘할아버지의 후계가 된 사람의 심상(心喪)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 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김장생(金長生)도 또한 심상(心喪)의 물음에만 답변하고, 할아버지의 후계가 되지 않은 자의 자최(齊衰) 3년의 의미에 대해서는 다시 거론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문답의 편지가 모두 신의 선사(先師)의 별집(別集)에 기록되어 있는데, 《의례문해(疑禮問解)》를 편찬함에 이르러서는 신의 선사가 질문한 것은 ‘자최 3년(齊衰三年)……’ 이상의 두 줄을 빼버리고, 김장생의 답한 것에는 또, ‘첩모(妄母)는 대대로 제사 지낼 수 없으니, 원래 승중(承重)의 의(義)가 없으므로, 응당 3년상을 입어야 한다고 한 것은 그렇지 않다.’라는 21글자를 보태어 기입하였으니, 이것은 도리어 ‘응당 3년 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으로써 신의 선사(先師)가 스스로 창안한 설을 답한 것으로 삼아 그것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 것이 됩니다. 그것을 보태고 빼고 한 곡절은 신이 비록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신의 선사(先師)의 자손들이 아직까지 3년의 제도를 시행하고 있으니, 신의 선사가 평상시에 일찍이, ‘마땅히 상복을 입지 않아야 된다.’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따라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찌 ‘대대로 제사지내지 않는다.’는 의리가 후대에 행해지기 어렵고, 3년을 대신 상복을 입는 것이 이미 나라의 풍속으로 행해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사문(師門)의 결정한 바가 이와 같은데, 신(臣)이 어찌 감히 그 사이에 의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 뒤에 예관(禮官)이 또 밖에 있는 대신(大臣)과 유신(儒臣)들에게 가서 물으니, 판부사(判府事) 최석정(崔錫鼎)과 윤증(尹拯)은 모두 의논을 올리지 않았고, 영부사(領府事) 윤지완(尹趾完)은, 대신(大臣)의 의견을 올림이 이미 명백하고 구비되어 더 이상 의논할 것이 없다.’라고 대답하였다. 대사헌(大司憲) 권상하(權尙夏)는 의논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일찍이 말하기를, ‘손자로서 상복을 대신 입는 것은 그 할아버지의 계통을 잇기 때문이다. 첩의 아들의 자식이 이미 계승하는 계통이 없다면 당연히 단지 본래 정해진 상복만을 입어야 될 것이다. 사람들이 이 예절로써 묻는 경우가 있으면 이렇게 대답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그 말을 익히 듣고 그것이 정당하여 바꿀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아는 친구나 일가(一家)들 사이에 이러한 상(喪)을 당했을 적마다 그로 하여금 3년 상복을 입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신의 망령된 뜻은 단지 스승의 말씀을 굳게 지키는 데에 지나지 않았는데, 지금 여러 대신(大臣)들의 헌의(獻議)가 서로 다름이 있음을 면치 못하니, 신이 어찌 감히 자신의 의견만을 옳다고 여겨 다시 진변(陳辨)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이 판부사(李判府事)의 의논에 의거해서 시행하라고 분부하였다.

 

함경도(咸鏡道) 육진(六鎭)의 여러 고을에 비와 눈이 내리고, 전라도(全羅道) 남원(南原) 등 고을에 비와 우박이 내렸다.

 

5월 2일 무인

유성(流星)이 천변성(天弁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강원도(江原道)는 전계(田界)가 확정되지 않고 징렴(徵斂)이 법도가 없어서 양전(量田)284)  하지 않았을 때의 일결(一結)의 토지(土地)가 다른 도(道)에 비해서 여러 결이나 됩니다. 그러므로 전세(田稅)를 거두는 것도 또한 따라서 훨씬 많아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양전(量田)한 뒤에도 오히려 여러 곱절의 전세를 징수하여 양전하기 이번보다 줄여준 것이 없으니, 청컨대 본도(本道)로 하여금 열읍(列邑)의 징세(徵稅)의 수량(數量)을 상세히 조사하여 한결같이 일정한 법식에 따라 시행하도록 하소서. 홍천 현감(洪川縣監) 이명세(李命世)는 한 가지도 착한 실상은 없이 오로지 탐욕스럽고 비루한 일만 일삼아서 읍비(邑婢)에게 깊이 고혹(蠱惑)되어 말하는 것마다 모두 들어주며, 정사는 대부분 백성을 학대하여 백성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니, 청컨대 파직시켜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부수(副率) 김재해(金載海)는 자신이 포로로 잡혀온 여자의 시양(侍養)이 되어가지고 그 상(喪)을 주관하기까지 하였고, 또 스승을 배반한 일이 있어서 동료들에게 버림을 당하였으며, 향학(向學)이라는 명분을 거짓으로 핑계대어 간선(簡選)의 직임을 등급을 건너뛰어 취하였으니,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하였으나, 단지 강원도의 전세(田稅)를 징수하는 일에 대해서만 윤허하였다.

 

5월 3일 기묘

유성(流星)이 북두성(北斗星) 아래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처사(處士) 김창즙(金昌緝)이 졸(卒)하니, 나이는 52세였다. 창즙은 고(故) 정승 김수항(金壽恒)의 다섯째 아들로서, 사람됨이 담정(澹靜)285)  하여 욕심이 적었고, 문장 능력은 조금 있었으나 학문에 방해되고 공부를 끝마치지 않았다 하여 상사(上舍)286)  에 이름을 올려놓고 곧바로 다시는 과거에 응시(應試)하지 않은 채 성리서(性理書)에 전심(專心)하며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으니, 그 형 김창협(金昌協)이 감탄하기를, ‘각고(刻苦)의 공부는 내가 미치지 못할 바라.’ 하였다. 추천으로 교관(敎官)·사부(師傅)·주부(主簿) 등의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사림(士林)이 몹시 애석하게 여겼다.

 

5월 4일 경진

개성부(開城府)에 우박(雨雹)이 내렸다.

 

5월 5일 신사

도감(都監)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여러 화공(畫工)들도 또한 같이 들어와서 어용(御容)의 익선관(翼善冠) 정본(正本)에 채색을 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상주(上奏)하기를,
"그림 그리는 작업을 마친 뒤에는 마땅히 표제(標題)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에는 마땅히 존호(尊號)를 써야 하는데, ‘모왕(某王)의 어진(御眞)’이라 하고, 그 밑에 연월(年月)은 간지(干支)만 대충 써서는 안되니, 마땅히 황명(皇明)의 연호(年號)를 쓰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숭정(崇禎)287)   기원(紀元) 후 몇 년이라고 써야 한다."
하였다. 인하여 조신(朝臣)의 글씨 잘 쓰는 자로 하여금 표제(標題)를 쓰도록 명하였다. 이이명(李頤命)이 또 말하기를,
"강도(江都)로 모시고 갈 때에는 마땅히 무진년288)  의 등록(謄錄)에 의거하여야 합니다. 군병(軍兵)은 전후대(前後隊)를 갖추되, 혹은 숫자를 감소할 수는 있으며, 백관(百官)은 마땅히 강두(江頭)에서 공손히 전송해야 하는데, 공암(孔巖)은 길이 머니 혹은 대궐 밖에서 공경히 전송하는 준례에 따라 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군병(軍兵)을 절반으로 감소시킬 것과 백관(百官)들은 대궐 밖에서 공손히 전송할 것을 명하였다. 이이명이 또 아뢰기를,
"어복(御服) 가운데서 법식에 어긋난 것은 마땅히 바로잡아야 합니다."
하니, 제조(提調) 김진규(金鎭圭)와 민진원(閔鎭遠)도 모두 거기에 찬동하였으며, 임금이 옳게 여겼다. 뒤에 예관(禮官)이 상방(尙方)289)  의 제조(提調)와 함께 상세히 살펴보고 다만 대대(大帶)의 제도만을 고쳐서 겉은 희고 속은 붉게 하여 도식(圖式)을 본떠서 만들도록 하였다. 【소소하게 틀린 것은 낱낱이 바로잡기에 어려움이 있는 까닭이었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그림 그리는 작업을 끝마친 뒤에는 여러 대신(大臣)들이 다시 마땅히 봉심(奉審)을 해야 합니다."
하니, 승지(承旨) 김덕기(金德基)는 말하기를,
"마땅히 2품으로 한정해야 합니다."
하고, 민진원(閔鎭遠)은 말하기를,
"삼사(三司)도 마땅히 같이 들어가야 합니다."
하였다. 【뒤에 김덕기(金德基)가 다시 일찍이 양사(兩司)의 직임을 역임한 자들도 들어가 봉심하도록 할 것을 품의(稟議)하니, 윤허하였다.】 이이명이 품의하기를,
"납입(納入)하기 하루 전에 봉심을 해야 하는데, 그 의절(儀節)은 초본(草本)을 바라볼 때와는 차이가 있으니, 마땅히 뜰 아래에서 사배(四拜)를 드려야 합니다."
하고, 제조(提調) 조태구(調泰耉)는 품의하기를,
"마땅히 흑단령(黑團領)을 입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통신사(通信使)의 배가 돌아와 정박한 이후에는 곧바로 서계(書契)를 대마도(對馬島)에 보내어 잘 돌아왔다는 것을 알려주면 대마 도주(對馬島主)가 강호(江戶)로 가지고 가서 일을 무사히 잘 끝마쳤다고 보고를 하는 것이 구례(舊例)인데, 이번에는 통신사(通信使)가 배에서 내리자마자 곧바로 잡아오라는 분부가 있었기 때문에 서계(書契)를 궐(闕)하였습니다. 요사이 와서 대마 도주가 그 까닭을 물으니, 동래부(東萊府)에서 ‘추후에 작성해 보낸다는 뜻으로써 답하였다.’ 하는데, 저들은 반드시 의아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마땅히 지금 동래부에서 대신 서계(書契)를 작성하여 사신(使臣)이 죄를 입어 감히 서계를 보내지 못했다는 의미로써 문장 내용을 서술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조태구가 청하기를,
"먼저 동래부에서 대신 서계(書契)를 보내겠다는 뜻으로써 대마도(對馬島)에 물어 보아서 왜(倭)가 좋다고 하면 그때 가서 대신 서계를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김진규가 말하기를,
"이것도 마땅히 동래부의 의사로써 먼저 그들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뒤에 이이명이 다시 품의하기를,
"굳이 우리 쪽에서 먼저 물어 볼 것이 없으며, 대마 도주가 질문이 있기를 기다려 그때 가서 마땅히 답변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겨 마침내 물어 보지 않았다.

 

어진(御眞)을 장녕전(長寧殿)에 봉안(奉安)한 뒤 매년 사맹삭(四孟朔)290)                  에 봉심(奉審)할 것을 명하였다.

 

처음에 수령(守令)이 환상(還上)291)  을 허위로 기록한 자는 모두 10년 동안 금고(禁錮)292)  를 시키도록 하고, 후관(後官)으로 발각(發覺)을 하지 않은 자나 겸관(兼官)으로 일시에 마감(磨勘)을 한 자도 같은 법률을 적용하도록 하였는데, 갑신년293)  에 이여(李畬)가 좌의정(左議政)이 되어 그것이 너무 과중하다고 하여 5년으로 줄일 것을 청하였다. 이유(李濡)가 또한 말하기를,
"5, 6석(石) 정도를 허위로 기록한 자들에게도 또한 이런 법률을 시행한다는 것은 너무 짐작(斟酌)함이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복주(覆奏)하기를,
"법식을 정하여 10석(石) 이하는 모두 불문에 붙이고, 후관(後官)이 발각을 하지 않았거나 겸관(兼官)이 일시(一時)에 마감한 것은 다만 도배(徒配)만 시행하고, 사면 전에는 간선(揀選)하지 마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대사헌(大司憲) 권상하(權尙夏)가 현도(縣道)에서 사직소(辭職疏)를 올리니, 임금이 우비(優批)를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조도빈(趙道彬)을 대사간(大司諫)으로, 박성로(朴聖輅)를 지평(持平)으로, 윤봉조(尹鳳朝)를 부교리(副校理)로, 홍석보(洪錫輔)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조익명(趙翼命)을 문학(文學)으로 삼았다. 이때에 이조 판서(吏曹判書) 송상기(宋相琦), 참판(參判) 이만성(李晩成)이 일전의 홍치중(洪致中)의 상소로 인해서 인혐(引嫌)하고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이만성이 더욱 극력 사양하여 개정(開政)하라는 명령이 내린지 무릇 7일이었는데도 오히려 거행하지 않았다. 임금이 연이어 엄지(嚴旨)를 내리니, 이때에 이르러 이만성이 비로소 분부에 응하여 정사를 열었으나, 그 뒤에 정고(呈告)하였다가 결국 체직되었다.

 

5월 6일 임오

도감(都監)의 여러 신하들이 화공(畫工)을 인솔하고 입시(入侍)하여 또 어용(御容)의 원유관(遠遊冠) 정본(正本)에 채색을 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 이하의 여러 신하들이 처음에 그린 소본(小本)을 선원각(璿源閣)294)                  에 봉안할 것을 청하였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봉안(奉安)한 뒤에는 반드시 따로 다른 방을 만들자는 의논이 있을 것이니, 친필(親筆)로 기문(記文)을 지어 그렇지 않다는 의사를 표시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임금이 《삼재도회(三才圖會)》295)                  에 있는 명(明)나라 세 황제의 화상과 중국인이 그린 고(故) 문정공(文貞公) 김육(金堉)의 화상          【바로 임금의 외증조(外曾祖)이다.】        에 대해 논급하였다. 이이명이 인하여 김육이 창안(創案)한 대동법(大同法)에 대하여 논하기를,
"이것은 진실로 좋은 법입니다. 문정공(文貞公)이 이를 몸소 스스로 맡아서 중의(衆議)를 배제하고 시행하였는데, 가령 이제는 좋은 법이 있더라도 어찌 문정공과 같이 국사(國事)를 담당할 사람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자칫하면 믿을 수 없는 의논에 요탈(撓奪)될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당면한 오늘의 양역(良役)296)                  의 폐단에 대해 말하기를,
"지난날에 문정공(文貞公)이 효종 대왕(孝宗大王)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대동법(大同法)도 또한 따라서 시행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성명(聖明)께서 바야흐로 위에 계시니, 양역(良役)을 변통하는 일을 오늘에 미처 도모하지 않는다면 다시 어느 시기를 기다리겠습니까. 신(臣)의 전일 상소 중에 있는 구전(口錢)·호포(戶布) 등의 말에 대해서는 진실로 이론(異論)이 많겠지만, 여러 신하 가운데서 골라 그 일을 관장하도록 하고, 성상께서 깊이 생각하여 힘써서 하신다면, 이것도 또한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제조(提調)        민진원(閔鎭遠)·김진규(金鎭圭)가 잇따라 면계(勉戒)의 말을 진달하니, 임금이 모두 가납(嘉納)하였다.

 

전라도(全羅道) 생원(生員) 이제송(李齊松) 등이 상소하여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조금 더 후일을 기다려도 미안함이 없을 듯하다."
하였다. 뒤에 이제송 등이 또 거듭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5월 7일 계미

판부사(判府事) 이여(李畬)가 상소하여 귀향(歸鄕)하기를 청하고, 또 김진규(金鎭圭)의 상소를 대변(對辨)하였는데, 대락 말하기를,
"금당(禁堂)297)  이 신태영(申泰英)의 일을 소론(疏論)하여 말하기를 ‘대신(大臣)이 증오하는 바는 오직 그 남편의 과오를 들추어내어 고소한 데에 있을 뿐이라.’고 한 말이 있습니다. 조목마다 논한 바가 다만 신태영의 혹시라도 원통하게 될까 하는 점만을 염려하고, 적첩(嫡妾)·모자(母子)의 윤리로써 말을 하기까지 하여, 신(臣)의 윤강(倫綱)을 바로잡고자 하였던 바는 윤상(倫常)을 무너뜨리는 결과가 됨을 면치 못하였으니, 참으로 놀라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모르긴 하지만 금당(禁堂)은 과연 아내가 남편을 무함하는 것이 윤리에 무관하다고 여기는 것입니까. 아내가 그 남편을 무함하고 자식이 그 아비를 무함하는 경우는 그것이 비록 사실(私室)의 말일지라도 오히려 그 마땅히 죄를 바로잡아 인간의 윤리를 세워야 합니다. 더구나 왕부(王府)298)  의 공대(供對)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신태영이 그 남편의 과오를 들추어낸 것은 그 실정을 논한다면 남편을 구타한 것보다 중대할 뿐이 아닌데, 금당(禁堂)이 이에 그것을 서로 욕설한 것에 비교하려 하였으니, 어찌 그다지도 부부(夫婦)의 윤리를 보기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입니까. 이혼은 본디 국가의 법전에서 경솔히 허락하지 않는 바이나, 만일 이혼할 만한 점이 있다면 또한 일찍이 허락하지 않지도 않았습니다. 신태영의 죄상은 그 남편의 말은 비록 믿을 것이 못된다 하더라도 그가 공초(供招)한 바에 나아가서 충분히 그의 성행(性行)을 추단(推斷)할 수가 있습니다. 아내가 이미 그 남편을 남편으로 여기지 않는데, 남편으로 하여금 그 아내를 끊지 못하게 하려고 한다면, 성왕(聖王)의 윤리를 바르게 하고 풍속을 균일(均一)하게 하는 정치는 결코 마땅히 이와 같이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신태영은 고금에 걸쳐 듣기 드문 패악한 부인입니다. 그의 패악은 세상에 마땅히 두 번 있어서는 안될 것인데, 이제 그가 이혼을 당하는 것을 가지고 뒷날에 폐단이 있을까 염려하는 것은 또한 지나친 일이 아니겠습니까. 성인(聖人)은 ‘질투하면 버린다.’는 훈계를 지어 적첩(嫡妾)의 분간에 혐의하지 않았고, 자사(子思)는 공백(孔白)의 어머니를 축출하여 모자(母子)의 윤리에 구애(拘碍)하지 않았으니, 다만 그 성행(性行)이 버릴만 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부인이 설령 패악한 행실이 있더라도 그를 버리는 것은 적첩(嫡妾)·모자(母子)의 윤리에 손상됨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신이 들은 바와는 다릅니다. 부부(夫婦)가 배합(配合)하는 의리는 사생(死生)에서 갈라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남편이 비록 죽었더라도 그 아내가 그대로 있으면 장사에는 당연히 무덤을 같이 하고 사당에는 마땅히 독(櫝)을 같이 해야 하는 것인데, 이혼을 시행할 바가 없다고 말하는 것도 신은 그 의미를 알 수가 없는 바입니다. 성비희(成非喜)에 있어서는 그 시어미가 그로 인해 죽은 관계로 성국(省鞫)을 설치하기까지 하였지만, 유신(儒臣)이 헌의(獻議)하기를, ‘해후(邂逅)가 불행했던 것이며, 그가 기만한 것은 아니었다.’고 하였으니, 그 정상이 신태영(申泰英)의 경우와는 현격히 다릅니다. 또 그 남편이 고소했던 바가 아닌데도 조정의 의논한 바가 법을 바르게 하는 데에 있었고 이혼시키는 데에 있지 않았으니, 아마 이는 신태영을 이혼시키는 것이 부당하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상법(常法)은 오히려 굽힐 수 있으나 윤강(倫綱)은 엄정히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관계가 매우 중대하기에 거듭 논하지 않을 수가 없어 이에 이르렀습니다."
하니, 임금이 우비(優批)를 내려 말하기를,
"금당(禁堂)의 상소는 각각 소견을 진달한 데에 지나지 않을 뿐이니, 특별히 미안(未安)한 단서가 없다."
하고, 이내 안심하고 머물러 있을 것을 명하였다.

 

황해도(黃海道)의 토산(兔山) 등 여러 고을에 서리가 내리고, 배천(白川)·연안(延安) 등의 고을엔 우박(雨雹)이 내렸다.

 

5월 8일 갑신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판부사(判府事) 이여(李畬)를 돈유(敦諭)하였는데, 이여의 의사가 반드시 귀향(歸鄕)하려는 데 있는 까닭이었다.

 

평안도(平安道) 평양(平壤) 등지에 민가(民家)에서 잘못하여 불을 내어 불길이 이웃으로 번져서 탔으므로, 구휼하는 은전을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경상도(慶尙道) 현풍(玄風) 등지에 바람이 몰아치며 우박이 내렸다. 대구(大邱) 등지에는 서리가 내렸다. 함양군(咸陽郡)에는 산중턱 이상에 눈이 겨울처럼 쌓였다.

 

5월 9일 을유

임금이 친필(親筆)로써 어제(御製)를 도감(都監)에 내렸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이 비단에 그린 것은 바로 영자(影子)가 처음 나온 소본(小本)인데, 여러 신하들에게 내보였더니, 모두 말하기를, ‘〈실물(實物)과〉 닮았다.’고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이것으로 모방해 정본(正本)을 올리도록 한 것이다. 정본이 이미 완성되었으니, 이 본(本)은 마땅히 세초(洗草)를 하여야 할 것이나, 이제 도사 도감(圖寫都監) 제거 대신(提擧大臣)의 말을 따라서 조그마한 족자로 만들어 선원각(璿源閣) 가운데 보관하니, 여기에는 심장(深長)한 생각을 둔 것이다. 뒷날 만일 따로 일전(一殿)을 지어서 봉안하자는 논의가 있다면 이것은 나의 본의(本意)가 아니니, 이 점을 몰라서는 안될 것이다. 이 소기(小記)를 표제 서사관(標題書寫官) 김진규(金鎭圭)로 하여금 소본(小本)의 위에 쓰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일전(日前)에 집의(執義) 유태명(柳泰明)이 본부(本府)의 신계(新啓) 가운데 이명세(李命世)·김재해(金載海)에 관한 일에 대해 의견이 동일하지 않다는 이유로써 인피(引避)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이명세의 일은 탐비(貪鄙)·불법(不法) 아닌 것이 없으므로, 마땅히 잡아다 조사하여 사실을 밝혀내야 하는데 바로 파직(罷職)으로 처리하였으니, 경솔하고 성급한 처사인 듯합니다. 김재해(金載海)는 사로잡혀간 여인이 바로 그 고모(姑母)인데, 이미 거두어 길러주는 은혜를 받았으니, 기년(期年)의 상복을 입어 거기에 보답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김재해는 박세채(朴世采)의 문도(門徒)로서 문생(門生)의 소변(疏辨)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과연 의방(疑謗)이 있는 것이나, 스승을 배반했다는 죄목(罪目)이야 쉽사리 단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장령(掌令) 한영휘(韓永徽)가 처치(處置)하여 체차(遞差)시켰다. 지평(持平)·김운택(金雲澤)도 또한 인피(引避)하니, 대략 말하기를,
"이명세(李命世)의 범법(犯法)한 실상은 잡아다 심문하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알 수가 있는데 바로 법률을 적용하는 것이 무슨 경솔하고 성급한 점이 있겠습니까. 김재해(金載海)는 사로잡혀간 여인의 시양(侍養)이 되었으니, 이미 스스로 실신(失身)을 한 것입니다. 또 스스로 인연을 끊은 남편의 집에 추탁(推托)하고자 하여 송사를 일으키기까지 하였으니, 의리에 대처함이 더욱 몹시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그 스승을 배반한 한 가지 사항은 ‘문생(門生)의 소변(疏辨)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과연 의방(疑謗)이 있다.’고 한 것은 단지 변명일 뿐입니다. 신의 계어(啓語)가 이와 같은데, 스승을 배반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한영휘(韓永徽)가 또 처치(處置)하여 출사(出仕)시켰다.

 

도승지(都承旨) 유명웅(兪命雄)이 판부사(判府事) 이여(李畬)에게 돈유(敦諭)하였으니, 이여의 대답하는 바가 머물려는 의사가 없었다. 왕세자(王世子)가 또 수찰(手札)을 내려 필선(弼善) 이성조(李聖肇)로 하여금 가서 개유(開諭)하기를,
"근래에 대신(大臣)이 매양 돌아갈 뜻이 있음으로 인해서 성상의 마음이 매우 섭섭하게 여기신다. 누차에 걸쳐 돈면(敦勉)한 것이 정녕(丁寧)할 뿐이 아닌데, 대신(大臣)은 기꺼이 오래 머물려고 하지 않으니, 성상께서 매양 탄식하시기를, ‘옛날의 군주와 신하는 정지(情志)가 서로 믿음이 바탕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 마디 말로도 능히 그 마음을 돌릴 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나는 성의가 천박하여 전후의 비지(批旨)로 효유(曉諭)한 것이 모두 빈말로 돌아가게 되니, 몹시도 부끄럽고 면목 없는 이 심정을 무어라고 표현하겠는가.’ 하였다. 심지어는 ‘억울(抑鬱)하여 병이 생긴다.’는 하교까지도 있으셨는데, 매양 성상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일찍이 그 의사가 만류(挽留)하려는 데 있지 아니함이 없으므로,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동하게 하였다. 더구나 나는 옛날에 수학(受學)을 한 처지로서 다른 대신들과는 차이가 있는데, 성상의 만류하려고 하는 성의가 보통의 경우보다 아주 특별하니, 대신은 필시 이를 제대로 다 알지 못하는 점이 있을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궁관(宮官)299)  을 보내어 나의 수찰(手札)을 전하니, 대신은 우러러 성상의 뜻에 부응하여 떠나려는 마음을 빨리 돌이키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였는데, 이여가 감격하여 대답하기를,
"어찌 감히 다시 돌아갈 생각을 마음에 가질 수 있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떠나갈 계획을 중지하였다.

 

5월 10일 병술

충청도(忠淸道) 남포(藍浦) 유학(幼學) 임세기(任世機)의 아내 백씨(白氏)가 한 태에서 네 아들을 출산(出産)하였는데, 백씨는 세 아들과 함께 이내 죽었다.

 

5월 11일 정해

옥당관(玉堂官)을 소대(召對)하였다.

 

심택현(沈宅賢)을 집의(執義)로, 황귀하(黃龜河)를 수찬(修撰)으로, 윤양래(尹陽來)를 문학(文學)으로 삼았다.

 

지평(持平) 김운택(金雲澤)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선공 감역(繕工監役) 송하적(宋夏績)은 그 아비 때부터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 출입하였는데, 예전의 은의(恩義)를 생각지 않고 침욕(侵辱)의 패론(悖論)에 몸소 참여하였으며, 심지어는 그 자식을 시켜 공공연히 헐뜯고 비난하게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상서 직장(尙瑞直長) 황위(黃霨)는 일찍이 계해년300)  에 있어서 반소(泮疏)를 거짓으로 핑계하여 고(故) 상신(相臣) 김석주(金錫胄)를 무함하였습니다. 황위의 참독(慘毒)·위험(危險)한 것은 성명(聖明)께서도 이미 통촉(洞燭)하신 바입니다. 아! 유현(儒賢)과 훈상(勳相)이 어찌 다만 구원(九原)에서 움직이지 못할 뿐이겠습니까. 유풍(流風)이 점차 멀어져가고 후사(後事)가 처량한데, 그 사람들은 이에 사환(仕䆠)으로 의기 양양(揚揚)한 나날을 보내며 마치 버릴 만한 허물이 없고 마땅히 등용될 만한 재능이 있는 자들처럼 하고 있습니다. 빨리 이 두 사람을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도록 명하여 구신(舊臣)을 후대(厚待)하는 도리를 다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는 형률은 가볍지가 않으니 사람을 논죄하는 즈음에 자세히 살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황위(黃霨)의 일은 30년이 지난 뒤에 와서 추론(追論)하니,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더욱 너무 심한 일이니, 내가 실로 취하지 않는다."
하였다. 김운택(金雲澤)이 엄한 비답으로 인하여 인피(引避)하니, 사간원(司諫院)에서 처치(處置)하여 출사(出仕)케 하였다. 그 뒤에 사간(司諫) 김유(金楺)가 황위를 위해 상소하여 논구(論救)하니, 대략 말하기를,
"황위의 상소는 대개 신의 스승인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를 위하여 신변(伸辨)한 바가 있었는데, 이는 실로 태학(太學)의 공론(公論)이었으며 황위 한 사람의 견해가 아니었습니다. 옛날로부터 훈척(勳戚)을 반박하여 논죄한 자가 어찌 한정이 있었겠습니까마는, 이것으로써 종신(終身)의 허물을 삼는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김운택(金雲澤)이 대각(臺閣)에 있는 몸으로서 이에 훈척(勳戚)을 숭봉(崇奉)하여 유현(儒賢)에 비륭(比隆)하려고 하였으니, 이러한 의논이 어찌 깨끗한 조정의 큰 수치가 아니겠습니까."
하고, 인하여 김운택을 책벌(責罰)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우비(優批)를 내려 말하기를,
"30년이 지난 이후에 추론(追論)한 것은 실로 너무 지나친 일이지만, 책벌(責罰)까지 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이여(李畬)가 상소하여 휴치(休致)301)  하기를 요구하니, 우비(優批)를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형조 참의(刑曹參議) 이희조(李喜朝)가 향리(鄕里)에 있으면서 사직소(辭職疏)를 올리니, 임금이 우비(優批)를 내렸다.

 

정언(正言) 어유귀(魚有龜)가 국사(國事)를 의논하는 소(疏)를 올렸는데, 대략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몸소 대덕(大德)을 이룩하시어 마지못해 휘칭(徽稱)을 받으셨으니, 이는 진실로 정신을 분발하여 선치(善治)를 도모할 하나의 출발점입니다. 그런데 하루 이틀 세월만 보내는 것이 종전이나 똑같습니다. 어용(御容)을 심도(沁都)302)  에 봉안(奉安)하는 일은 애초에 성세(聖世)의 아름다운 일이 아닌데, 이제 또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그 일을 떠벌려서 어진이를 인대(引對)하는 것은 도본(圖本)을 살펴보는 일에 지나지 않고, 대신(大臣)에게 자문하는 바는 정치의 방법을 강론하는 것을 듣지 못하였으니, 신은 전하께서 항상 억제하고 두려워하는 자세를 가지시어 겸양하는 태도를 보였던 것은 외식(外飾)이요 내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삼가 깊은 궁중(宮中)에서 한가롭고 편안한 가운데 경계(警戒)하는 마음은 이미 해이해지고, 게으르고 소홀히 하는 마음이 점차 거기 편승하여 마침내 실덕(實德)을 이루고 실효(實効)를 나타내지 못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허위와 가식(假飾)을 숭상하지 마시고 더욱 겸양하는 마음을 가지시어 성학(聖學)을 진수(進修)하고 심신(心神)을 제철(提綴)해서 순수(純粹)·정일(精一)하고 표리(表裏)가 형철(瑩徹)케 하여 마치 방훈(放勳)303)  의 흠명(欽明)304)  과 대순(大舜)305)  의 준철(濬哲)306)  과 문왕(文王)의 목목집희(穆穆緝熙)307)  와 같게 하신다면, 천하 후세(天下後世)에 치군(治君)·명주(明主)로 우러르며 대성인(大聖人)의 기상(氣像)을 상상하여 반드시 흠탄(欽歎)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어찌 채색으로 그림을 그려 빛나는 영정(影幀)에 전하는 것과 같은 날에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그림 그리는 일을 끝마친 이후에는 2품 이상의 관원과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에게 첨배(瞻拜)하라는 분부가 있으셨는데, 이것은 비록 사체(事體)를 소중히 여기는 의미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대소(大小)의 신료(臣僚)들이 떠들썩하니 혼잡하게 나아가 마치 관광(觀光)이나 하는 것처럼 한다는 것은 이미 과시(誇示)하는 결과가 됨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법좌(法座)308)  에 친히 나오시고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나온 자리에서 이에 도리어 초상화에 첨배(瞻拜)한다는 것은 더욱 미안한 바가 있습니다. 바라건대 간단히 입시(入侍)하여 한결같이 봉심(奉審)할 때의 준례에 따르도록 하고, 첨배하는 절차는 제거케 하소서. 그리고 또 삼가 들으니, 초본(草本)을 오대산(五臺山)에 장치(藏置)하는 일로 해서 정탈(定奪)309)  한 바가 있었다 합니다. 어진(御眞)을 비장(秘藏)하여 오래 전하는 것이 진실로 덕업(德業)이 후세에 빛나는 데에 무슨 이익이 있기에 반드시 금궤(金櫃)·석실(石室)에 보관하여 영구의 계획으로 삼으려 하는 것입니까. 송(宋)나라 신하 구양수(歐陽脩)가 말한 ‘스스로 그 명예를 좋아함이 지나치면 나중에는 무궁한 우려가 된다.’고 한 것에 거의 가깝다 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의견이 있어서 상소로 진달하는 것은 진실로 불가할 것이 없으나, 다만 도상(圖像)의 일에 대한 ‘위겸(撝謙)’ 두 글자는 제목에 맞지 않는 듯하다. 이미 초본(草本)을 내보였으니 도감(都監)을 설치한 것은 사체(事體) 사이의 일에 지나지 않을 뿐이며, 본래 떠벌려서 그런 것이 아니다. 정본(正本)은 초본과는 다르니, 첨배(瞻拜)하는 절차를 제거하도록 하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도 또한 이해가 되지 않는 바이다. 선원각(璿源閣)에 장치(藏置)한 것은 스스로 그 곡절(曲折)이 있으니, 이번의 이 소론(疏論)은 그 본지(本旨)를 상실함을 면치 못한 것이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어유귀(魚有龜)의 상소는 진실로 없을 수 없는 것인데, 임금의 하교에서 현저히 좋아하지 않는 기색을 보였으니, 어떻게 마음에 거슬리는 말을 받아들일 수가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61책 53권 37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498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사(宗社) / 역사-사학(史學)


[註 302] 심도(沁都) : 강화도(江華島)를 일컬음.[註 303] 방훈(放勳) : 요(堯)임금을 지칭함.[註 304] 흠명(欽明) : 덕성이 공경스럽고 통명(通明)함.[註 305] 대순(大舜) : 순임금.[註 306] 준철(濬哲) : 덕성이 깊고도 지혜가 있음.[註 307] 목목집희(穆穆緝熙) : 덕이 심원(深遠)하여 계속해서 밝음.[註 308] 법좌(法座) : 예식을 갖추고 임금이 신하를 접견하는 자리.[註 309] 정탈(定奪) : 임금의 재결.
사신(史臣)은 논한다. 어유귀(魚有龜)의 상소는 진실로 없을 수 없는 것인데, 임금의 하교에서 현저히 좋아하지 않는 기색을 보였으니, 어떻게 마음에 거슬리는 말을 받아들일 수가 있겠는가.

 

5월 12일 무자

좌의정(左議政) 이이명(李頤命)이 어유귀(魚有龜)의 상소로 인해서 사직 차자를 올리기를,
"화상(畫像)을 그린 일은 전대(前代)의 제왕(帝王)들도 또한 많이 있었으니, 그것이 어찌 모두 부과(浮夸)310)  의 뜻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사람들이 바깥 사물에는 일마다 좋게 하려고 요구하면서도 다만 자신의 마음과 몸에 대해서는 문득 좋게 하기를 요구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일찍이 본원(本源)을 증청(澄淸)하시라는 말씀을 전하께 간곡히 아뢰지 못했었습니다. 어진(御眞)에 이르러서는 사체(事體)가 비록 중대하지만, 성상의 몸에 있어서는 오히려 바로 바깥 일이어서 신이 전하를 위하여 좋게 하기를 요구하는 것이 바로 본말(本末)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말하는 직위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허문(虛文)으로 말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고, 또 그 정본(正本)을 첨배(瞻拜)하는 한 사항에 대해 변론하기를,
"고례(古禮)에는 임금이 타는 말에도 또한 경의를 표했습니다. 오늘날의 준례로는 문·무과(文武科)의 전시(殿試)에서 빈 좌석에도 또한 절을 하니, 이것이 무슨 혐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말미(末尾)에 초본(草本)을 선원각(璿源閣)에 보관하는 것에 관하여 논하기를,
"햇볕을 비록 자주 쬐어도 산에서 떠오르는 남기(嵐氣)에 쉽게 빛깔이 변합니다. 의논이 또한 여러 가지였으니, 다만 대신(臺臣)은 안팎으로 이름과 실상이 부합하는 말이 아닐 뿐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간신(諫臣)의 상소 가운데 ‘장대(張大)’·‘부과(浮夸)’등의 말은 자못 정도에 지나친 바 있다. 초본(初本)은 조그마한 족자(簇子)로 장식해 만들어서 납입(納入)하는 것이 적당하겠다."
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조태구(趙泰耉), 예조 참판(禮曹參判) 민진원(閔鎭遠), 응교(應敎) 이만견(李晩堅)  【도감(都監)의 당상관과 낭관(郞官)이다.】  등도 또한 모두 사직소를 올리니, 임금이 모두 우답(優答)하였는데, 이만견의 상소에 대한 비답(批答) 가운데는, ‘어유귀(魚有龜)가 사체(事體)를 모른다.’고 하였다. 어유귀가 비지(批旨)로 인하여 인피(引避)하니, 사간원(司諫院)에서 처치(處置)하여 출사(出仕)케 하였다. 어유귀가 연달아 불러도 직임에 나아가지 않으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말은 비록 정도에 지나쳤으나, 대개 숨김이 없는 데서 나온 것이다. 이것으로써 소패(召牌)를 어기는 것은 또한 지나친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그 다음날 이만견(李晩堅)과 부교리(副校理) 홍우서(洪禹瑞)가 그 비답 내용의 미안(未安)함을 연석(筵席)에서 아뢰니, 임금이 이만견의 소비(疏批) 가운데에서 ‘불식사체(不識事體)’란 네 글자를 삭제해 버리도록 명하였다. 동경연(同經筵) 이만성(李晩成)이 잇따라 진달하기를,
"대궐 안에서 첨배(瞻拜)하는 것은 장녕전(長寧殿)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흑단령(黑團領)을 사용하는 것은 역시 의리로 하는 일이니, 다시 도감(都監)으로 하여금 품정(稟定)하도록 하는 것이 적당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경기(京畿) 여주(驪州)에 서리가 내렸다.

 

5월 13일 기축

평안도(平安道) 삭주(朔州)에 서리가 내리고 영변(寧邊) 등지에 눈이 내렸다. 강계(江界)에서는 내와 개천이 함께 얼어붙기를 몇날 동안 하였고, 전라도(全羅道) 보성(寶城) 등지와 강원도(江原道)의 원주(原州)·간성(奸城) 등지에는 서리가 내렸다.

 

집의(執義) 심택현(沈宅賢)이 어유귀(魚有龜)의 상소로 인하여 사직소를 올리고, 【심택현도 또한 도감(都監)의 낭청(郞廳)이다.】  또 논하기를,
"본부(本府)의 신계(新啓) 가운데 이명세(李命世)에 대해 잡아다 심문할 것을 청하지 않고 곧바로 파직(罷職)을 적용한 것은 그것이 정당한 일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또 김재해(金載海)에 대한 계사(啓辭)에 미쳐서도 또한 평윤(平允)311)  한 논의가 아닙니다."
하니, 답하기를,
"요사이 보건대, 헌신(憲臣) 【김운택(金雲澤)이다.】 이 사람을 논하는 즈음에 적당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 내가 일찍이 그것을 병통으로 생각했는데, 이제 이 소론(疏論)은 매우 평윤(平允)한 도리를 얻었다."
하였다. 지평(持平) 김운택(金雲澤)이 또 이것으로써 인피(引避)하고, 심택현(沈宅賢)이 또 인피하여 대변(對辨)하니, 사간원(司諫院)에서 처치(處置)하여 김운택을 출사(出仕)시키고 심택현을 체직시켰는데, 답하기를,
"김운택의 논계(論啓)는 자못 평윤(平允)의 의미가 결여되었고 심택현의 상소 내용은 그 의도가 자세히 살펴보자는 데 있는데, 이제 이러한 결과를 보게 된 것은 그것이 적당하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하였다. 김운택이 이로 인하여 소패(召牌)를 어기니, 파직당하였다.

 

5월 14일 경인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공조 판서(工曹判書) 김진규(金鎭圭)가 상소하여 이여(李畬)의 상소에 대해 신태영(申泰英)의 일을 극론(極論)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태영의 일은 윤상(倫常)에 관계된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부부(夫婦)·모자(母子)·적첩(嫡妾)입니다. 그런데 대신(大臣)이 편벽되게 그 한 가지만 들고 그 두 가지를 소홀히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애석한 일입니다. 더구나 신태영이 들추어내어 고소한 것은 대개 그 죄를 면하려고 한 데에서 연유한 것이므로, 무단히 남편의 과실을 고발한 것과는 차이가 있는데, 어떻게 곧바로 남편을 무함한 것으로 단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신태영이 여기에 이른 까닭이 본래는 예일(禮一)이 비첩(婢妾)으로서 참간(讒間)하고 능욕(凌辱)한 데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공초(供招)한 가운데 아들과 며느리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비록 그 허실(虛實)을 보장할 수가 없지만, 유정기(兪正基)가 반드시 이혼(離婚)을 하고자 하였던 것은 아들을 위한 처지에서 나온 것이니, 지금 유독 신태영(申泰英)에게만 깊이 죄벌(罪罰)을 가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결국 자식을 위해서 어미를 절연(絶緣)하고 비첩(婢妾)으로 인하여 주모(主母)를 폐기(廢棄)하는 결가가 될까 두렵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남편의 과실을 들추어내어 고소한 것은 남편을 욕설한 것에는 비교할 수 있으나, 남편을 구타한 것에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대개 기뻐하고 욕설하는 것은 모두 입에서 나오는 것이고, 구타하는 것은 수족(手足)으로 하는 것이니, 이것은 진실로 경중(輕重)이 있는 것인데, 대신(大臣)은 이에 남편을 구타한 것보다 중하다고 말하여 ‘호종 적형(怙終賊刑)’312)  으로 증거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대저 호(怙)는 믿는 바가 있는 것이고 종(終)은 재차 범죄(犯罪)를 하는 것인데, 신태영은 진실로 믿는 바가 없었고, 또한 재범(再犯)도 하지 않았으니, 이것을 과연 예(例)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그 남편을 남편으로 여기지 않은 것은 진실로 먼저 남편의 도리를 상실한 데에 연유한 것인데, 이에 그 근본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법률에도 없는 이혼을 시행한다고 하는 것은 다만 모자(母子)와 적첩(嫡妾)의 윤리를 손상시킬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윤리를 바르게 하고 풍속을 가지런히 한다고 말한 것은 신이 이해할 수 없는 바입니다.
《예기(禮記)》에 이른바 ‘질투하면 버린다.’는 것은 그것이 가정을 어지럽히는 것을 위한 것이며, 대저 어찌 비첩(婢妾)에게 미혹되어 그 본처(本妻)를 축출하는 것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자사(子思)가 아내를 축출한 경우는 축출할 만한 죄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찌 모자(母子)가 화합하지 않다고 해서 자식을 위해 어미의 정을 끊은 일이 있으며, 그리고 이에 성문(聖門)의 제가(齊家)의 바른 것으로써 유정기(兪正基)의 가도(家道)에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이혼이란 실제로 그 동실(同室)을 위해서 설시한 것으로서, 만일 실행(失行)을 한 것이 아니라면 그 남편이 죽은 뒤에는 진실로 시행할 만한 곳이 없는데, 대신(大臣)은 이에 동혈(同穴)·공독(共櫝)313)  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써 이혼해야 된다는 단서를 삼았습니다. 근세(近世) 선유(先儒)의 집에서 연고가 있는 이에 대하여 또한 별장(別葬)·별묘(別廟)를 하고 이혼을 청하지 않은 경우가 있으니, 여기서 합장(合葬)하고 합독(合櫝)하는 것은 이혼하고 이혼하지 않는 것에 관계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조정에서 사가(私家)를 부당하게 염려하여 그 처리하는 바가 법전(法典)에도 없는 것을 시행할 수가 있겠습니까. 성비희(成非喜)는 그 시어미를 오역(忤逆)하여 결국 죽음에 이르도록 만들었으니, 그 불순(不順)함이 이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부모에게 불순한 것은 ‘칠거지악(七去之惡)’에 있어서 으뜸이 되는데도 유현(儒賢)이 헌의(獻議)한 바나 조정의 처분한 바가 이혼에 미치지 않았는데, 이제 이에 신태영(申泰英)이 남편의 과실을 들추어내어 고소한 것을 가지고 성비희보다 무거운 죄로 생각하여 이혼을 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유정기(兪正基)가 처음에 불효(不孝)로써 신태영이 죄상을 성토함에 있어서 어떤 대관(臺官)이 조사할 것은 청하지 않고 곧바로 이혼시키도록 청했다가, 동료 대관(臺官)과 예관(禮官)의 박의(駁議)로 인하여 마침내 조사를 시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조사를 하여 옥사(獄事)가 성립되지 않으면 종전에 청한 것은 허위로 돌아가는데, 유정기가 또 ‘구욕(構辱)’의 죄목을 첨가하여 억지로 이혼할 것을 청해서 한 사람의 몸을 가지고 그 죄명(罪名)을 변경하였습니다. 김유경(金有慶)이 또 유정기가 죽은 뒤에 법례(法例)를 돌아보지 않고 굳이 다시 논의할 것을 청하였으니, 이는 다 한 일이 없는데도 그러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말미에 또 어유귀(魚有龜)의 상소로써 인혐(引嫌) 【김진규(金鎭圭)도 또한 도감 당상(都監堂上)이기 때문이다.】  하여 말하기를,
"지금 간신(諫臣)이 그 떠벌린 일을 비난하고, 게으르고 소홀히 하는 것을 경계하였으니, 신은 여기에서 성주(聖主)에게 바른말 하는 이가 있는 것을 우러러 하례하는 바이오며, 유사(有司)는 그 죄를 면할 수 없다는 점을 더욱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양 건(兩件)의 인혐(引嫌)은 모두 대단한 것이 아니니,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충청도(忠淸道) 옥천(沃川) 등의 고을에 서리가 눈처럼 내리고, 공주(公州)에서는 우박이 내렸다.

 

5월 15일 신묘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지사(知事) 조태채(趙泰采)가 상주(上奏)하기를,
"북한 산성(北漢山城)의 군량미는 도민(都民)이 일차 수상(輸上)한 뒤로 잇따라 수송할 계책이 없습니다. 청컨대 공명첩(空名帖)314)   약간(若干)의 장을 얻어서 백성 중에 받기를 원하는 자를 모집하여 수상(輸上)했으면 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5월 16일 임진

밤에 유성(流星)이 항성(亢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유집일(兪集一)이 칙사(勅使)의 패문(牌文)315)  이 출래(出來)한 일로써 계문(啓聞)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흠차 정사 두등 시위 아제도 호렵 총관(欽差正使頭等侍衛阿齊圖護獵摠管) 목극등(穆克登)이 봉명(奉命)하여 앞으로 조선국(朝鮮國)에 가는데, 5월 초2일에 출발함. 조서(詔書) 1통, 어장(御杖) 1쌍, 흠차패(欽差牌)316)   2면(貳面), 회피 숙정패(回避肅靜牌) 4면(四面), 황산(黃傘) 2병(貳柄), 오관 사력(五官司曆)317)  【전례(前例)에 없던 것이다.】  육품 통관(六品通官) 3원(三員), 근역(跟役)318)   19명." 이라 하였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좌의정(左議政) 이이명(李頤命)이 같이 들어가 아뢰기를,
"중국에서 사신이 나오게 되면 성상께서는 다리 질환으로 교외(郊外)에 나가 영접하실 수가 없으니, 미리 원접사(遠接使)로 하여금 주선(周旋)하도록 하는 것이 적당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혹 피인(被人)에게 의심을 살까 해서 난처하게 여겼다. 이이명과 지사(知事) 조태구(趙泰耉)가 서로 잇따라 진백(陳白)하니, 임금이 원접사로 하여금 먼저 다리에 질환이 있음을 말해서 오르고 내리는 한 가지 절차를 변통하도록 하였다.

 

처음에 의금부(義禁府)에서 권설(權卨)의 공사(供辭)로써 곽기(郭基)를 추문(推問)한 뒤에 아뢰기를,
"권설의 공사(供辭) 가운데 김부차(金夫差)의 숙질(叔姪)에 대한 설은 곽기(郭基)의 공초(供招)로 볼 때 지금 갑자기 창안(創案)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은적(銀賊)을 포착(捕捉)했다는 것도 허망(虛罔)한 것이 아니니, ‘허황한 사실을 가지고 기만하여 선동하고 퍼뜨렸다.’는 한 사항은 이미 신변(伸辨)이 된 셈입니다. 김부차(金夫差)의 있고 없음과 고목(告目)319)  에 진실과 허위는 지금 마땅히 다시 조사하여야 하는데, 김부차가 현재 나타나기 어렵다는 것은 사세(事勢)가 진실로 그러합니다. 김부차가 출현하기 이전에는 고목(告目)의 진위(眞僞)를 실로 증빙해 조사할 방도가 없습니다. 이미 3차에 걸쳐서 형벌(刑罰)을 시행했는데, 이제 또 형신(刑訊)을 가한다는 것은 자세히 살펴서 조사하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마땅히 참작해 처리함이 있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여 마침내 북청(北靑)으로 유배(流配)시켰다. 그 뒤에 대사간(大司諫) 조도빈(趙道彬)이 연중(筵中)에서 유배시키라는 명령을 환수(還收)하고, 다시 엄중한 심문을 가할 것을 계청(啓請)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장령(掌令) 김두남(金斗南)이 현도(縣道)에서 진소(陳疏)하여 먼저 대소(大小) 관원들이 직무에 게을리하여 유유 범범(悠悠泛泛)320)  하는 것이 풍습을 이루는 폐단을 논하고 또 이돈(李墩)이 두루 찾아다녔다는 원통함을 말하기를,
"여광주(呂光周)의 상소 가운데 곡절을 상세히 진달하여 명백할 뿐이 아니니, 집으로 돌아오려는 의사가 집에 있던 처음에 이미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진념(軫念)하는 도리에 있어서 마땅히 한 번 개석(開釋)하는 하교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또 정필동(鄭必東)이 소론(疏論)한 ‘통신사(通信使)의 짐바리가 과람(過濫)하다.’는 설을 배척하기를,
"통신사가 모두 연소(年少)한 명관(名官)으로서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아랫사람을 단속하여 이국(異國)에 봉사(奉使)하였는데, 불행한 여건에 만나 뜻하지 않게 오멸(汚衊)321)  의 죄과(罪科)에 빠지게 되었으니, 그것도 또한 원통한 일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명세(李命世)는 몸가짐이 간약(簡約)하고 정사를 함이 강명(剛明)하여 자못 산골 백성에게 칭송받았습니다. 그러나 대계(臺啓)에서 나열한 바 다른 사람을 논하면서 상세히 살피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병술년322)  에는 진연(進宴)한 뒤에 일찍이 혜감(惠減)323)  의 은전(恩典)이 있었으니, 또한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토록 해야 합니다."
하고, 말미에 말하기를,
"지난번 김유경(金有慶)의 상소는 의도가 임금을 높이려는 데 있었고, 오늘 어유귀(魚有龜)의 논의는 숨김이 없는 데서 나왔으니, 모두 우용(優容)을 가하는 것이 어찌 국가의 복(福)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이돈이 두루 찾아다닌 것이 명백할 뿐이 아니니, 무슨 개석(開釋)을 거론할 만한 점이 있겠는가. 정필동(鄭必東)이 통신사에 대해서 논핵한 것은 진실로 적당하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오늘날 헌신(憲臣)이 이명세(李命世)에 대해 논핵한 것 또한 평윤(平允)의 방도에서 나온 것인 줄을 알지 못하겠다. 혜감(惠減)의 한 가지 사항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토록 하겠다."
하였다.

 

5월 17일 계사

전라도(全羅道) 임피현(臨陂縣)의 민가(民家)에서 암말이 새끼를 낳았는데, 몸뚱이 하나에 다리가 여덟이었다.

 

고(故) 학생(學生) 박상화(朴相華)에게 증직(贈職)을 명하였다. 박상화는 효행(孝行)이 있어서 아버지의 질병을 구호하면서 의복의 혁대를 풀지 않았고, 형수(兄嫂)가 여역(癘疫)에 걸리자 몸소 탕약(湯藥)을 다리며 하늘에 축원하여 부르짖었다. 기사년324)  에 인현 황후(仁顯王后)가 사제(私第)에서 손위(遜位)하였을 때에는 도끼를 차고 봉소(封疏)하였는데, 상소를 세 번이나 올려도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이내 울부짖으며 맨발로 삼주야(三晝夜)를 사제(私第)의 대문 밖에서 엎드려 있다가 관(冠)과 의상을 찢어버리고 집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지 않으며 매일 통곡을 하였다. 갑술년325)  에 인현 왕후가 다시 대내(大內)로 들어오게 되자, 비로소 마을 사람에게 관상(冠裳)을 빌어 입고 욕의(縟儀)326)  를 우러러 바라보고는 돌아왔다. 어떤 사람이 혹시 기사년(己巳年)의 일을 칭도(稱道)하는 이가 있으면 번번이 손을 저으며 저지하였으며, 절대로 입으로는 스스로 선전하지 않았다. 유학(幼學) 최서익(崔瑞翼) 등이 상소하여 포증(褒贈)을 청하였기 때문에 그대로 허락한 것이다.

 

5월 18일 갑오

박필명(朴弼明)을 도승지(都承旨)로, 권수(權𢢝)를 집의(執義)로, 권엽(權熀)을 지평(持平)으로, 유태명(柳泰明)을 사간(司諫)으로, 김유(金楺)를 교리(校理)로, 홍호인(洪好人)을 필선(弼善)으로 삼았다.

 

호조 참의(戶曹參議) 임방(任埅)이 김진규(金鎭圭)가 신태영(申泰英)을 논한 상소에서 한 대관(臺官)을 이끌어 언급한 일이 있다는 것을 가지고 인혐(引嫌)하여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이 왕년에 신태영(申泰英)의 죄악을 상세히 듣고 과연 이혼을 청하였었는데, 한번 계사(啓辭)를 올리자 즉시 윤허하시었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예관(禮官)이 조사를 청함으로 인해서 도로 중지시켰습니다. 남편이 이혼하기를 원하면 들어주는 것이 이미 율문(律文)으로 되어 있으니, 마땅히 이혼을 시켜야 하며, 금지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조사하여 심문한다는 것은 누구에게 심문하려는 것입니까. 그 자녀(子女)에게 심문을 하겠습니까. 그 노비(奴婢)에게 심문을 하겠습니까. 그 문족(門族)들이 이미 모두 장고(狀告)를 하였으니, 물을 만한 사람이 없으며 단지 그 부처(夫妻)를 가두어 놓고 대변(對辨)을 하는 방법 밖에는 없는데, 이것이 어찌 윤강(倫綱)에 크게 손상됨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곧바로 이혼을 청하고 재차 계사(啓辭)를 올려 강력히 고집한 까닭입니다. 그러다가 조사를 하게 됨에 있어서 신태영(申泰英)이 유정기(兪正基)를 무함한 것이 끝이 없었으니, 그의 평소의 성행(性行)이 패란(悖亂)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신태영은 이미 스스로 남편을 절연(絶緣)하였는데, 유정기로 하여금 끝내 그 아내를 거절하지 못하게 한다면, 부부(夫婦)의 윤리가 어찌 사생(死生)으로써 차이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혼시킬 수 있다는 것은 예전(禮典)과 법문(法文)에서 상고하고 정도(政道)와 의리(義理)로 헤아려 볼 때에 매우 명백하여 조금도 의심할 만한 점이 없는데, 조정의 의논이 분기(分岐)되어 시비(是非)가 결정되지 않고, 성상(聖上)의 영단(英斷)으로써도 이미 명령을 하였다가 다시 정지를 시키어 지금까지 결정이 되지 않고 있으니, 신(臣)은 삼가 개탄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신태영의 언행(言行)이 패악하여 윤기(綸紀)가 없다는 것은 떠들썩하게 소문이 퍼져서 모두 팔뚝을 걷어 붙이며 놀라 분개하고 있습니다. 신이 이를 아주 상세히 듣고서 마음속으로 몹시 분개하여 이 직책을 맡고 맨먼저 이 논의를 내주었으니, 조금도 사심(私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을 비방하는 자는 신과 유정기가 서로 절친하기 때문에 그 말을 치우치게 듣고 이런 계사(啓辭)를 올렸다고 말하였습니다. 지금 김진규(金鎭圭)의 어의(語意)의 내맥(來脈)은 대개 신을 비방하는 여론(餘論)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알지도 못하고서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 것입니까."
하니, 답하기를,
"당초에 이혼을 청한 것은 윤강(倫綱)을 바로잡자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니, 공조 판서의 상소 내용을 어찌 굳이 혐의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5월 19일 을미

사헌부(司憲府)에서 【장령(掌令) 정동후(鄭東後)이다.】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다. 이명세(李命世)를 파직(罷職)시키라는 계사(啓辭)를 나문(拿問)으로 고치겠다고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5월 20일 병신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유(李濡)가 주언(奏言)하기를,
"송도(松都)에 예전에 총융청(摠戎廳)의 아병(牙兵)327)  이 있었는데, 신이 일찍이, ‘그 아병(牙兵)을 본부(本府)에 소속시키고 총융청은 군수보(軍需保)를 이급(移結)할 것’을 청하여 명령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들으니, 아병(牙兵) 4백여 명이 거둔 쌀이 7백여 석(石)에 이르는데, 이를 모두 장관(將官)의 급료(給料)의 자금과 긴요하지도 않은 여러 가지 수용으로 삼았다 합니다. 이제 마땅히 급료의 규정을 폐지하고 이를 취해 관용(官用)에 보태되, 강도(江都)의 예(例)와 같이 하도록 명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경리청(經理廳)이 때로는 전포(錢布)가 없어 그 규모(規模)를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변사(備邊司)나 호조(戶曹)·병조(兵曹)의 미포(米布)를 마땅히 대용(貸用)하여야 하는데, 평안도(平安道)에서 전하여온 은전(銀錢)이 있으니, 이를 또한 마땅히 먼저 빌어 써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좌의정(左議政) 이이명(李頤命)이 주언(奏言)하기를,
"고(故) 부제학(副提學) 유계(兪棨)가 편집한 《가례원류(家禮源流)》는 자못 상밀(詳密)하니, 진실로 마땅히 간행(刊行)하여야 합니다. 그 손자인 유상기(兪相基)가 지금 용담 현령(龍潭縣令)이 되어 간포(刊布)하려 하고 있는데, 고을의 재력(財力)이 넉넉치 못한 형편이니, 마땅히 본도(本道)에 명하여 그 재력을 보조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김우항(金宇杭)이 고(故) 현감(縣監) 이지함(李之菡)에게 증시(贈諡)하도록 청하기를,
"이지함은 선조조(宣祖朝)의 명신(名臣)입니다. 선정신(先正臣) 조헌(趙憲)이, ‘그는 마음이 깨끗하고 사욕이 적어서 고결한 행실은 세상에 모범이 되었다.’고 칭찬하여 관작과 시호를 추증할 것을 청한 바가 있습니다. 이제 마땅히 역명(易名)328)  의 은전을 베풀어야 합니다."
하고, 이유(李濡)와 이이명(李頤命)도 모두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조태로(趙泰老)가 군기시(軍器寺)에 소장된 조총(鳥銃)을 통진(通津)의 속오군(束伍軍)329)  에게 나누어 줄 것을 청하고, 또 본부(本府)에 있는 총융청(摠戎廳) 창고를 북한 산성(北漢山城)에 이속(移屬)시키지 말 것을 청하니, 모두 허락하였다. 이유(李濡)와 이이명(李頤命)이, ‘공조 참판(工曹參判) 권성(權𢜫)이 청간(淸簡)하고 계려(計慮)가 있어 크게 임용할 만하다.’고 함께 추천하니, 임금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 그런데 이날 권성의 사직하는 상소가 마침 현도(縣道)로부터 올라오니, 임금이 답하기를,
"신하가 임금을 섬기게 되면 몸은 자기의 소유가 아니니, 그로 하여금 올라와 공무를 집행하게 하라."
하였다.

 

5월 21일 정유

어진(御眞) 2본(二本)을 표제(標題)를 쓴 뒤에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이 함께 들어가 봉심(奉審)하였고, 도감(都監)에서 받들고 대내(大內)로 들어갔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논핵하기를,
"나주(羅州)에 정배(定配)시킨 죄인 임홍(林泓)은 죄명(罪名)이 매우 무거워서 결코 가볍게 석방을 의논할 수 없는데, 도신(道臣)이 곧바로 방질(放秩)에 두었으니, 진실로 매우 해괴한 일입니다. 청컨대 전라 감사(全羅監司) 유봉휘(柳鳳輝)를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이여(李畬)가 사직소로 인하여 또 신태영(申泰英)의 일을 논하면서 김진규(金鎭圭)를 대변(對辨)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이 경솔히 헌의(獻議)하는 바람에 다른 사람의 반박을 당하였는데, 그가 의리(義理)를 말한 것이 신이 들은 바와는 자못 서로 어긋납니다. 지금 만일 부부(夫婦)가 삼강(三綱)에 나열되지 않았다면 그만이겠지만, 아내가 남편의 죄악을 고소하는 것은 왕법(王法)에 있어서 ‘반드시 처형하는 죄’가 되는 것이니, 그래도 그 단서(端緖)가 있고 없는 것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그 성난 기회를 이용해서 감추어진 사특한 일들을 폭로한 그 정상이 명확인데, 무함하여 해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신은 이해할 수가 없는 바입니다.
대저 부자(父子)가 서로 고소하면 죄는 그 자식에게 있고, 부부(夫婦)가 서로 사이가 나쁘면 죄는 그 부인에게 돌아가는 것은 고금(古今)의 공통된 의리입니다. 이제 신태영(申泰英)이 의금부에 올린 패악한 공사(供辭)에 대해서는 다만 의논하는 법률이 너무 무거울까 두려워하고, 유정기(兪正基) 부자(父子)의 집안에서의 숨겨진 행동에 있어서는 감정적으로 한 말을 가지고 그 죄안(罪案)을 결단하려고 하니, 성왕(聖王)의 형벌로써 교화를 돕는 의리에 있어서는 아마도 옳지 못한 듯합니다. 신태영이 정처(正妻)는 이혼을 금지시킨다는 것을 믿고 함부로 패악한 행동을 하였으니, 믿는 데가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한 번 남편의 죄악을 고소하는 것으로는 오히려 부족하여 재차 고소하기에 이르렀으니, 재차 범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 남편이 능히 집안을 바르게 다스리지 못한 것은 진실로 죄가 있기는 하지만, 그 아내의 패악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반드시 그와 더불어 배합(配合)을 시키려고 한다면, 어찌 남편은 남편 구실을 하고 아내는 아내 구실을 하는 교화를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병자 호란(丙子胡亂)이 있은 뒤에 처음에는 포로로 붙잡혀간 여자가 실절(失節)한 것을 실행(失行)과는 다르다고 하여 이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효종조(孝宗朝)에 이르러서 여러 유현(儒賢)들이 조정에 모여 생존하였거나 사망한 것을 따지지 않고 모두 이혼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여러 유현들이 아직까지 살아 계신다면, 이 일에서 과연 이혼을 시키는 데 두겠습니까, 이혼을 시키지 않는 데 두겠습니까. 신은 실로 편견(偏見)을 주장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며, 대륜(大倫)에 관련된 바이므로 종시(終始)를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우비(優批)를 내려 말하기를,
"경(卿)의 말은 윤리와 기강을 바로잡으려는 의도에서 나왔으니, 내가 마땅히 헤아려서 처리할 것이다."
하였다.

 

고(故) 병사(兵使)        이지효(李止孝)를 정려(旌閭)하도록 명하였다. 이 지효는 광해군(光海君)계축년330) 영창 대군(永昌大君)이 화(禍)를 당하였을 때에 충청병사(忠淸兵使)로서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 진소(陳疏)를 했으나, 저지(沮止)당하자 곧바로 수상(首相)인 박승종(朴承宗)의 집으로 가서 책망하기를,
"사람들은 모두 어머니가 있는데 그대만은 유독 어머니가 없도다. 지금 만일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을 살해하고 대비(大妃)를 폐위시킨다면 내가 반드시 한칼로써 그대와 이이첨(李爾瞻)을 찔러 죽일 것이다."
하였다. 이이첨이 역모를 했다고 무함하여 옥에 잡아 가두니, 이지효(李止孝)가 눈을 부릅떠 하늘에 맹세하고 머리를 찧고 가슴을 치며 먹지 않은 지 7일 만에 피를 토하고 죽었다. 계해년331)                  에 대비(大妃)가 복위(復位)되자 조복 한 벌과 주목(紬木) 50필(疋)을 하사하고 특별히 판서(判書)를 증직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유생(儒生) 박광세(朴光世) 등이 정려(旌閭)할 것을 소청(疏請)하니, 허락하였다.

 

경기(京畿) 여주(驪州) 등지에 우박(雨雹)이 내렸는데, 크기가 밤알만 하였고, 하루가 지나도 곧 녹지 않았다.

 

5월 22일 무술

어용 도사 도감(御容圖寫都監)의 도제조(都提調) 이하의 관원을 모두 서계(書啓)하라고 명하여 논공 행상에 차등이 있었다.

 

5월 23일 기해

윤덕준(尹德駿)을 판윤(判尹)으로, 유명응(兪命凝)을 필선(弼善)으로, 어유귀(魚有龜)를 교리(校理)로, 윤양래(尹陽來)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5월 24일 경자

이에 앞서 좌의정(左議政) 이이명(李頤命)이 차자로 도감(都監)의 상전(賞典)을 참작하되, 무진년332)  의 전례(前例)를 따라서 하지 말 것을 청하기를,
"성명(聖明)의 겸손하신 덕은 마땅히 차별을 보여야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본디 이미 마음에 재량을 하고 있었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이이명(李頤命)이 차자를 올려 상전을 사양하고 앞서의 차자를 인용(引用)하여 말을 하니, 임금이 우비(優批)를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5월 25일 신축

신사철(申思喆)을 교리(校理)로, 이정제(李廷濟)를 문학(文學)으로 삼았다.

 

헌납(獻納) 박희진(朴熙晉)의 상소로 인해서 임진년333)  에 사의(死義)한 사람 고경형(高敬兄)의 증직(贈職)을 명하였다. 고경형은 고(故) 충렬공(忠烈公) 고경명(高敬命)의 서제(庶弟)로서, 고경명이 금산(錦山)에서 전사(戰死)하자, 고경형은 고경명의 아들 고종후(高從厚)와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복수(復讐)하다가 진주(晋州)에서 전사(戰死)하였다. 뒤에 고종후 등 여러 사람은 모두 포상(褒賞)의 은전이 있었으나, 유독 고경형만이 측미(側微)334)  한 사람이라 하여 참여하지 못했었다. 그러므로 박희진(朴熙晉)이 이를 소론(疏論)하여 이런 분부가 있게 된 것이다.

 

5월 26일 임인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논하기를,
"조신(朝臣)은 군인의 직함을 겸무하고 하향(下鄕)할 수가 없는 것인데, 연위사(延慰使)를 차견(差遣)할 때에는 번번이 외방에 있다고 일컬으면서 여러 번 부표(付標)를 바꾸었으니, 이는 문비(問備)335)  로서만 그칠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파직시키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지평(持平) 권엽(權熀)이 사직 상소로 인해서 관서(關西)의 민폐(民弊)와 근일(近日)의 일을 겸하여 진달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대동(大同)·어천(魚川) 두 역(驛)의 옛 규정을 전(前) 감사(監司) 이제(李濟)가 계문(啓聞)해서 변통시키어, 마위전(馬位田)336)   절반과 역졸(驛卒) 복호전(復戶田)337)  에서 바친 것과 찰방(察訪)이 바친 것과 노비(奴婢)가 공납한 것 절반을 영문(營門)에서 취납(取納)하여 감영(監營)의 비장(婢將)으로 하여금 맡아 관리케 하고, 입마(立馬)338)  할 때에 값을 지불하는 것이나, 사신의 행차 또는 도사(都事)·찰방(察訪) 등이 왕래하는 비용을 모두 영문(營門)에서 계산해서 지급하니, 번거로움이 심합니다. 이제 마땅히 그 마위전(馬位田)·복호전(復戶田) 및 각항(各項)의 바치는 것들을 되돌려 주어 찰방(察訪)으로 하여금 맡아 관리토록 해야 하며, 가난하여 입마(立馬)할 수 없는 경우에는 노비의 여공(餘貢)으로써 충분한 수량을 첨가하여 지급한다면, 마정(馬政)을 정비할 수 있고 역졸(驛卒)을 보호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삭주(朔州)는 종전에 출참(出站)339)  한 일이 없었는데, 작년부터 갑자기 만상(灣上)340)  에 출참하는 부역을 당하게 되니, 변방의 백성들이 원통함을 부르짖고 쇠잔한 고을이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빨리 다시 품처(稟處)하도록 하소서."
하고, 말미에 논핵하기를,
"무주 부사(茂朱府使) 한배하(韓配夏)는 일찍이 호백(湖伯)341)  을 맡아 불법(不法)한 일이 많았고, 본부(本府)에 부임하고 나서는 고을 기생들을 많이 데리고 금지된 육류를 가득 싣고서 멀리 속리산(俗離山)으로 유람하는 행차를 하였습니다. 선생(先生)을 빙자해 역마(驛馬)를 조발(調發)시키고는 음악과 여색을 싣고서 산방(山房)에 오랫동안 체류하며 음식(飮食)과 거마(車馬)를 열읍(列邑)에 요구하였습니다. 방자하여 기탄하는 바가 없었으니, 마땅히 논벌(論罰)의 조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황위(黃霨)의 일은 들은 대로 논핵하는 것이 대간(臺諫)의 체모가 바로 그러한 것이니, 간신(諫臣) 【곧 김유(金楺)이다.】 이 다만 가부(可否)만 논하였다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책벌(責罰)을 청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언로(言路)를 여는 방도가 아닙니다."
하니, 답하기를,
"두 건(件)의 일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토록 하고, 한배하(韓配夏)는 파직시키는 것이 옳다. 간신(諫臣)이 책벌(責罰)을 청한 것은 과연 정당한 것이 될 수 없다."
하였다. 뒤에 묘당(廟堂)에서 복주(覆奏)하기를,
"두 건의 일은 모두 본도에 맡겨서 상세히 살펴 계문(啓聞)하게 하겠습니다."
하였다.

 

공조 판서(工曹判書) 김진규(金鎭圭)가 상소하여 상전(賞典)을 사양하고, 이어서 또 이여(李畬)와 임방(任埅)의 상소로써 신태영(申泰英)의 일을 대변(對辨)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대신(大臣)이 부부(夫婦)와 부자(父子)를 가지고 삼강(三綱)에 같이 나열하여 일체로 단정하려고 하는데, 여기에도 같은 점과 같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앞서 말했던 것을 가지고 적용한다면, 남편을 꾸짖고 남편을 구타하는 것을 아비를 꾸짖고 아비를 구타한 것과 비교할 때는 경중(輕重)이 서로 현격하여 일례(一例)로 논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남편을 고소한 것과 아비를 고소한 경우에 그 죄가 진실로 동일하다면 이것은 장형(杖刑)과 도형(徒刑)이며, 그 무고(誣告)한 경우에 있어서는 사죄(死罪)입니다. 지금 장형(杖刑)과 도형(徒刑)을 시행하려고 한다면 신태영은 앞서 이미 멀리 유배되었어야 할 것이고, 무고(誣告)라고 하여 왕법(王法)에 있어 반드시 처단할 바라 한다면 마땅히 대벽(大辟)342)  을 거행해야 할 것인데, 오히려 어찌 간신(艱辛)히 국법에도 없는 이혼에다가 억지로 맞추는 것입니까.
유정기(兪正基) 부자(父子)의 내행(內行)에 대해서는 신이 일찍이 그 죄안(罪案)을 절단하지 못하였으나, 이제 만일 강상(綱常)으로 논한다면, 신태영의 공사(供辭)에 이미 그 아들과 며느리를 언급하였으니, 이것은 어찌 윤상(倫常)의 관련된 바가 아니겠습니까. 지금 이혼하는 것이 비록 부부(夫婦)의 윤리를 밝히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결국은 자식을 위하여 어미를 끊는 결과가 됩니다. 더구나 그 비첩(婢妾)과 주모(主母)의 윤리가 그 중간에 개재되어 있는데, 아무래도 대신(大臣)이 여기에 대해서도 너무 편벽되게 보는 듯합니다. 대신이 진실로 풍교(風敎)에 뜻이 있다면 어째서 모자(母子)와 적첩(嫡妾)의 윤리를 아울러 밝힐 것을 청하지 않는 것입니까. 신태영은 참소를 받고 축출을 당하여 이미 그 정실(正室)이 된 보장을 얻지 못하였는데, 여기에 과연 믿을 만한 지세(地勢)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들추어내어 고소한 바는 동일(同一)한 안(案)의 공대(供對)한 것인데, 이 또한 처음 공초(供招)한 것과 다시 공초한 것으로써 재차 범죄한 것으로 인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과연 ‘믿는 데가 있어서 재차 범죄 행위를 한 것’이라면, 또한 마땅히 ‘믿는 데가 있어서 재차 범죄 행위를 할 경우는 사형에 처한다.’는 경문(經文)을 증거로 하여 처형시켜야 할 것인데, 또 어째서 이혼에다 해당되는 것입니까. 그가 유정기의 가정을 어지럽힌 경우는 예일(禮一)이 으뜸이 되는데, 이제 신태영을 이혼시키지 않는 것을 가지고서 악처(惡妻)와 패부(悖婦)가 남편의 가정을 혼란시키는 것을 경계할 줄 모른다고 염려할 수가 있겠습니까. 포로로 붙잡혀갔다 온 여자들은 이미 실절(失節)한 것으로 남편의 몸을 짝할 수가 없었으나, 지금 신태영이 밤중에 길을 간 것은 이미 실행(失行)한 것과는 다른데, 이에 포로로 붙잡혀 갔다 온 여자로써 예(例)를 삼을 수가 있겠습니까. 임방의 상소에 대해서는 많은 변명을 할 필요가 없으나, 신이 이야기한 바 ‘한 일이 없는데도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하였던 것은 대개 여론(輿論)에 의거한 것인데, 그 자신이 스스로 유정기(兪正基)가 서로 아는 사이라고 말하였으니, 신의 말이 무함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전하는 말에서 얻어 들은 것을 인용하였는데, 대저 전하는 말이 모자(母子)와 적첩(嫡妾)의 윤리에 언급된 것이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이 있었으나, 신은 사체(事體)를 애석하게 여겨서 옥안(獄案)에 기재된 것 이외에는 일찍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미가 비록 착하지 않다 하더라도 이미 그 자식에 대해서 언급하였다면 묻지 않아도 충분한 것인데, 점차 어미를 거절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가령 이것이 그 남편을 욕되게 했기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그 일이 이미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 그 자식의 변고(變故)에 대처하는 데에 편리하도록 한 것은 바로 그 윤의(倫義)를 해친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신태영(申泰英)의 일은 스스로 마땅히 재량해서 처리할 것이다. 대신(大臣)의 차자 내용도 또한 윤강(倫綱)을 바로잡는 의사에서 나왔으니, 경(卿)이 여러가지 말을 하여 스스로 변명하는 것은 사체(事體)에 손상됨이 있다."
하였다.

 

강원 감사(江原監司) 박태항(朴泰恒)이 상소하기를,
"성종조(成宗朝)에 일찍이 목조(穆祖)343)  의 능(陵)은 노곡(蘆谷)에 있고 황비(皇妃)의 능은 동산 사곡(東山寺谷)에 있다 하여 다만 벌채(伏採)만 금지하도록 하고 축조(築造)는 하지 않았습니다. 대개 의심할 만한 단서가 없지 않지만, 매년 봉심(奉審)하고 양민(良民)을 배치하여 수호(守護)해 온 지가 오래인데, 박여호(朴如豪)·김계수(金戒守) 등이 은택(恩澤)을 희망하여 두 능(陵)이 모두 황지(黃池)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근거없는 말이 나온 뒤로부터 노곡(蘆谷)과 동산(東山)을 수호하는 일이 바로 소략(疏略)하게 되었는데, 이 두 곳에 온전하게 뜻을 두어 수호하고 금벌(禁伏)하기를 고사(故事)와 같이 하는 자만 못합니다."
하고, 예조(禮曹)에서 복주(覆奏)하여 구례(舊例)에 따라 경건히 수호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5월 27일 계묘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논핵하기를,
"사직 직장(社稷直長) 이세진(李世璡)은 전에 평시서(平市署)의 직임을 맡았을 때 난전(亂廛)을 빙자하여 불의(不義)를 많이 행하였고, 삼시(三時)에 명령을 내리는 것이 일체 속전(贖錢)을 징수하는 일이어서 시민(市民)들이 타매(唾罵)해 마지 않았으니, 청컨대 파면시키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처음에【  경인(庚寅)344) 이다.】  왜역(倭驛) 이석린(李碩麟)·정만익(鄭晩益)·이덕기(李德基) 등이 훈도 별차(訓導別差)가 되어 재판왜(裁判倭)와 더불어 서로 약정(約定)하였는데, 왜인(倭人)의 일공(日供)과 청구하는 잡물(雜物)은 모두 쌀로써 값을 결정하여 정당(停當)한 데 이르지도 않았으나, 이석린(李碩麟)이 마침 자리를 떠났다. 뒤에 이석린이 다시 수역(首驛)이 되어 정만익(鄭晩益) 등과 다시 이 일을 의논하였는데, 재판왜(裁判倭)가 말하기를, ‘마땅히 도중(島中)에 보고하여 허락을 받으면 그대로 시행하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석린 등이 대마도의 보고를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부사(府使) 권이진(權以鎭)에게 고하여 장문(狀聞)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서로 약정(約定)했던 왜인(倭人)이 죽게 되자, 관왜(館倭) 등이 본색(本色)으로써 다시 추궁하였고, 역배(驛輩)들은 사사로이 스스로 임시변통으로 계책을 맞추었다. 이때에 이르러 왜인이 또 본색(本色)을 징추(徵推)하니, 훈도(訓導) 한후원(韓後瑗)이 다투다 못하여 부사(府使)에게 고하였고 부사 이명준(李明浚)이 낱낱이 열거해 장문(狀聞)하니, 이석린 등을 잡아 가두라고 명하여, 이석린은 도배(徒配)시키고, 정만익은 정배(定配)시키고, 이덕기(李德基)는 삭직(削職)하였다. 또 대신(大臣)이 경연(經筵)에서 아룀으로 인하여 정만익의 가자(加資)345)  와 이덕기의 논상(論賞)을 회수하니, 모두 이 일로써 상전(賞典)을 받았기 때문이다. 권이진(權以鎭)도 또한 이 일로 인해서 중죄로 추고(推考)할 것을 명하였다.

 

5월 28일 갑진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이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핵하기를,
"제주 목사(濟州牧使) 신한장(申漢章)은 가정에 있을 때는 패륜(悖倫)하고, 고을에 있을 때는 취렴(取斂)하여 고을을 맡거나 곤외(閫外)를 다스릴 때에 오로지 탐오(貪汚)만 일삼으니, 청컨대 파직시키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핵하기를,
"간성 군수(杆城郡守) 김시보(金時保)는 경사(京司)에서는 가쇄(茄瑣)하다는 비난을 받았고 고을에 있을 적에는 떠나고 난 뒤의 비방을 초래하였습니다. 그 전 습관을 고치지 않으므로 이민(吏民)들이 모두 괴로와하니, 청컨대 파직시키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파주(坡州)의 유생(儒生) 조익주(曹翊周) 등이 상소하여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의 자운 서원(紫雲書院)  【파주(坡州)에 있다.】 에 배향(配享)하고,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의 합향(合享)을 폐지하여 배향(配享)으로 강등시킬 것을 청하였다. 이는 대개 박세채가 일찍이 이미 자운 서원에 합향되었는데, 김장생(金長生)이 이제 또 배식(配食)을 하게 되면 박세채의 합향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김우항(金宇杭)과 참판(參判) 민진원(閔鎭遠)이 복주(覆奏)하니, 아뢴 대로 시행하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파주 유생(儒生) 문후창(文後昌)이 상소하기를,
"당초에 박세채(朴世采)를 이이(李珥)에게 배향을 시켰다면 불가할 것이 없지만 병향(並享)한 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하루아침에 폄강(貶降)을 한다는 것은 그것이 출향(黜享)이나 그다지 차이가 없습니다."
하고, 이어서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가 아울러 향사된 예(例)를 낱낱이 들어서 말하기를,
"조익주(曹翊周) 등의 의도가 과연 김장생(金長生)을 높여서 향사하려는 데 있다면, 어째서 스승과 제자를 병향(並享)에는 예(例)를 버리고 이에 도리어 배열(配列)에 급급하여 박세채의 오랜된 신위를 변동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까."
하였다. 이어서 말하기를,
"본주(本州)의 남계(南溪)는 바로 박세채가 은거하며 거닐던 곳이니, 이 곳에다 따로 사원(祠院)을 세워서 이리로 옮겨 봉안(奉安)을 하는 것이 적당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상소를 예조(禮曹)에 내리니, 김우항(金宇杭)과 민진원(閔鎭遠)이 연명(聯名)하여 사직소를 올려 말하기를,
"자운 서원(紫雲書院)은 이이(李珥)를 위하여 설립한 것인데, 문인(門人)인 김장생(金長生) 같은 이가 향사에 참여되지 못했다는 것은 끝내 흠전(欠典)이 되었습니다. 이미 추향(追享)하자는 논의가 있었는데, 어깨를 나란히 하여 병열(並列)하는 것은 미안(未安)한 바가 있고, 박세채가 비록 이미 합향(合享)이 되었지만 이제 김장생을 위하여 배위(配位)를 옮기는 것이 위차(位次)로 보아도 적당하고, 정례(情禮)로 보아도 유감이 없습니다. 이제 문후창(文後昌) 등이 그 폄강(貶降)을 의심하여 이렇게 침범하여 비난하였습니다. 처음에 이미 복주(覆奏)를 잘하지 못하여 반박하는 의논이 있게 만들었는데, 이제 어찌 그 당초의 의견을 변경시킬 수가 있으며, 또한 어찌 감히 그대로 답습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당초에 복주(覆奏)한 것은 진실로 의견(意見)이 있었으니, 다사(多士)의 상소를 어찌 반드시 불만족하게 여길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뒤에 해조(該曹)에서 문후창의 상소에 대해 복주(覆奏)하기를,
"따로 의견을 낸 것은 진실로 그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그대로 종전의 처리한 바에 따라 강배(降配)토록 하고, 사우[祠]가 건립되기를 기다려 위판(位版)을 옮겨 봉안(奉安)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평안도(平安道) 운산(雲山)·삭주(朔州) 땅에 우박(雨雹)이 내렸다.

 

5월 29일 을사

하교하기를,
"어지럽게 정고(呈告)하므로, 여러 차례 신칙(申飭)하였으나 사헌부(司憲府)의 추함(推緘)346)  은 한 번도 조감(照勘)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일찍이 이미 하교(下敎)를 하였는데, 그 뒤의 시추(時推)347)  를 한 것도 또한 한 번 개좌(開坐)348)  하여 조감(照勘)을 한 데 불과하였으니, 이는 자못 미안한 일로서 다시 신칙(申飭)을 가하도록 하라. 요사이 각사(各司)의 개좌하고 개좌하지 않은 단자(單子)를 보았는데, 개좌한 날이 많지 않았으니, 각별히 잘 타이르도록 하라. 비국(備局)의 자리에 당상관(堂上官)으로서 병(病)을 핑계대고 나오지 않는 자가 매우 많기 때문에 신칙하기를 한두 번에 그치지 않았는데도 끝내 두려워하는 생각에서 받들어 행하는 뜻이 없으니, 아! 《시경(詩經)》의, ‘왕사(王事)를 견고(堅固)하게 하지 못하여 집에 들어앉아 편안히 있을 겨를이 없다.’는 것은 비록 기대할 수 없겠지만, 유독 ‘힘써 국사(國事)에 종사하여 감히 수고로움을 고하지 못한다.’는 의미 정도도 염두에 두지 않아야 하겠는가. 나는 실로 개탄스럽게 여기는 바이다. 지금부터 이후에는 특별히 신칙(申飭)을 가하여 이러한 습관을 고치고 각각 직무를 다하도록 하라."
하였다.

 

보덕(輔德) 양성규(梁聖揆)가 상소하여 김재해(金載海)를 신구(伸救)하기를,
"김재해는 성현(聖賢)의 책을 많이 읽어 학술(學術)과 견식이 사우(士友)들 사이에서 드러나게 칭송받아 온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서연(書筵)에 들어가 참여하여 경의(經義)를 밝혀내어 정성을 다해 보도(輔導)하는 것으로 임무를 삼아 왔는데, 뜻밖에 구설(口舌)를 만나 낭패를 보고 떠나갔으니, 매우 애석한 일입니다."
하고, 또 그 스승을 배반했다는 지목이 억지인 것임을 변명하며 따로 개석(開釋)하고 특별히 거둘어 쓸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김재해의 일에 대해서는 이미 대간(臺諫)의 말이 틀린 것임을 알았으니, 조정에서 수용(收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찌 자폐(自廢)시킬 이치가 있겠는가."
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이여(李畬)가 김진규(金鎭圭)의 삼소(三疏)로 인해서 인혐(引嫌)하여 진소(陳疏)하기를,
"신의 상소에 논한 바는 ‘윤강(倫綱)’ 2자(二字)에 벗어나지 않았는데, ‘간신히 부회(傅會)하였다.’ 말하는 것은 무엇을 가리킨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공조 판서의 상소는 자못 화평(和平)을 잃어버렸으니 매우 미안한 일이지만, 하어(下語)하는 즈음에 말이 짐량(斟量)이 결여된 것은 그의 본래의 병통이니, 하나의 웃음거리에 붙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함경도(咸鏡道)의 여러 고을에 서리가 내리어 혹은 눈처럼 두껍게 쌓였으며, 혹은 눈과 우박이 번갈아 내리기도 하였다.

 

5월 30일 병오

이대성(李大成)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논핵하기를,
"의주 연위사(義州延慰使) 홍경선(洪慶先)은 지체와 명망이 본래 가벼운데 구차스럽게 차견(差遣)하였고, 또 차견하려고 할 즈음에 약삭빠르게 피하기를 멋대로 하였으니, 경책(警責)이 없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해당 승지(承旨)를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동래 부사(東萊府使) 이명준(李明浚)이 치계(馳啓)하기를,
"일본(日本)의 새 관백(關白) 가계(家繼)가 뒤를 계승하여 경축을 고하는 차왜(差倭) 평륜구(平倫久)가 나왔습니다. 청컨대 그의 말에 따라 이 뒤로부터는 서계(書啓) 가운데 ‘계(繼)’자(字)를 쓰지 마소서."
하니, 새 관백(關白)의 이름이 가계(家繼)인 까닭에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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