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13권, 현종 6년 1665년 9월

싸라리리 2025. 12. 4.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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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갑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장령 이동명, 지평 신후재·신명규, 대사헌 박장원 등이, 봉상시 초기(草記)에 침척한 말이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처치하여 출사시키도록 청하였다.

 

9월 2일 을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9월 3일 병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제신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후릉(厚陵)019)  을 개봉(改封)하는 일은 그만둘 수 없을 것 같습니다만 일이 매우 중대한 데에 관계됩니다. 사대석(莎臺石)을 제거하고 개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고, 우의정 허적(許積)은 아뢰기를,
"이미 1백 50여 년이나 되었는데 지금 개봉한다면 의당 쿵쿵 다지면서 축조하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니, 어찌 매우 미안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대석을 쓰지 않는다면 쿵쿵 다지면서 축조하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되겠는가?"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단지 바닥을 고르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난간석(欄干石)만을 쓰고 개봉할 능의 터를 구릉(舊陵)의 규모보다 조금 넓게 다듬도록 하라."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이번에 온양(溫陽)에다 새로 축조한 어실에는 자전께서 입어(入御)하셔야 하고 전에 축조해 놓은 어실에는 상께서 입어하셔야 하는데, 백관의 임시 처소가 새로 축조한 어실과 너무 가까워서 매우 불편합니다. 도형(圖形)을 그려 내려보내서 내관(內官)으로 하여금 주관하여 분부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조 판서로 하여금 주관하여 하도록 하라."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일로의 관사 중에 자전이 거처했던 방에는 다른 날에 사객(使客)이 거처할 수 없을 듯하니 별도로 침실을 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갑자년에 인목 왕후가 공주(公州)에 행차했을 때 거처했던 방을 그 뒤에 사객이 사용했던 일이 있었으니 별도로 침실을 지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대교(待敎) 이세장(李世長)이 이미 《시정기》를 찬수하여 춘추관(春秋館)에 보관하여 두었습니다만 거기에 누락된 일이 있어 추가로 기록하려고 하는데 사고(史庫)는 마음대로 여닫을 수가 없으니, 세장에게 상·하번(上下番) 사관(史官)과 함께 사고를 열고 첨서(添書)하여 보관하게 하소서. 세장이 방금 입시(入侍)해 있으니 하문하여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세장에게 하문하고 허락하려 하자, 부제학 조복양이 아뢰기를,
"세장이 이른바 누락되었다는 것이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사람들이 만일 이번 일을 끌어대어 전례로 삼아 멋대로 사고를 열어 마음대로 내용을 삭제하거나 고친다면 그 폐단을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세장이 감히 다시 청하지 못하였다.

 

원자(元子)가 보양관(輔養官) 송준길(宋浚吉)과 희정당(熙政堂) 서쪽 별당(別堂)에서 상견례(相見禮)를 행하였다.
원자의 배위(拜位)를 동벽(東壁) 아래 설치하여 서쪽을 향하도록 좌석을 만들었으며 보양관의 배위는 동쪽을 향하도록 좌석을 만들었다. 보양관이 서당(書堂)에 이르러 흑단령(黑團領)을 갖추자 내시(內侍)가 꿇어 앉아 내엄(內嚴)을 찬청(贊請)하였고, 보양관이 궁문 서쪽에서 동쪽을 향하여 서니 내시가 외비(外備)를 아뢰었다. 원자가 동계(童髻)·옥잠(玉簪)·아청 단령(鴉靑團領)·흉배(胸褙)·옥대(玉帶)를 갖추고 나아오니 내시가 배위(陪衛)하고 내려와 동쪽 뜰 아래 서고, 보양관은 서쪽 뜰 아래로 와서 먼저 올라가고 원자는 동쪽 뜰에서 뒤에 올라갔다. 보양관이 자리로 나아가자 원자가 자리로 나아가서 머리 조아리고 두 번 절하니 보양관도 머리 조아리고 두 번 절하여 답하였다. 상견례를 마치고 보양관이 뜰에 내려오자 원자도 내려와서 동쪽 뜰 아래에 섰다. 보양관이 문을 나가자 내시가 꿇어 앉아 예가 끝났다고 아뢰니, 원자는 대내(大內)로 들어갔다.
이때 원자의 나이 겨우 5세였는데도 행례할 적에 마치 성인(成人)과 같아 행동 하나 하나가 조금도 예에 어긋나지 않으니 보양관과 내시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이 달 18일에 춘당대(春塘臺)에서 관무재(觀武才)를 설행할 것을 결정했는데 이는 문신(文臣)의 정시(庭試)에 대한 대거(對擧)이다.

 

행 부호군 조경이 소장을 올려 월봉(月俸)을 사양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은 굳이 사양하지 말고 안심하고 받으라."
하였다.

 

9월 4일 정해

김만기(金萬基)를 집의로, 남이성(南二星)을 이조 좌랑으로, 윤집(尹鏶)을 이조 참의로, 이시술(李時術)을 우부승지로, 이유상(李有相)을 수찬으로, 이세장(李世長)을 봉교로 삼았다.

 

원자가 좌상 홍명하, 우상 허적과 상견례를 행하였다. 상이 특명을 내려 대신들과 상견례를 행하게 했는데 영상 정태화가 병 때문에 휴가 중에 있었으므로 좌·우상이 먼저 행한 것이다.

 

9월 5일 무자

원자가 보양관 김좌명(金佐明)·김수항(金壽恒)과 상견례를 행하였다.

 

좌참찬 송준길이 소장을 올려 온천(溫泉)에 가서 목욕하게 해줄 것을 청하니, 상이 인견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다행히 원자를 뵙게 되었습니다. 종사와 신민의 큰 경사가 실로 여기에 있으니 기쁜 마음을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신만 유독 그런 것이 아니고 조정 밖의 여러 신하들도 모두 기뻐하고 있습니다. 상께서 몸을 다스리고 가정을 다스리는 법을 다하여 원자로 하여금 취하여 본받게 한다면 어찌 국가의 복이 아니겠습니까. 보양하는 책임이 제신들에게 있기는 합니다만 신하들이 나아가 뵙는 것이 때가 있으니 십한(十寒)020)  의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항상 슬하에 두고 일에 따라 교유하는 것은 오직 전하께 달려 있습니다. 신은 노병(老病)이 날로 깊어져 가고 있으므로 지금 서늘해져 가는 시기에 맞추어 휴가를 얻어 목욕을 하러 가고 싶어 감히 이렇게 거듭 청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천기(天氣)가 이미 서늘하여 졌으니, 경이 내려간다고 해도 반드시 목욕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경이 내려간다면 누구와 함께 원자를 교도(敎導)하란 말인가. 원자가 전에는 수염이 있는 사람을 만나기 싫어했는데 경을 만나고 난 뒤부터 항상 다시 만나보고 싶어했다. 오늘도 경이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지금 나와서 만나보려 하고 있다."
하고 원자를 나오게 하라고 명하니, 원자가 당계·옥잠에 남색 도포(藍色道袍)·홍사대(紅絲帶)·흑화(黑靴) 차림으로 나와서 북쪽을 향하여 재배하고 어좌(御座)의 왼쪽에 앉았다. 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압존(壓尊)되어 답례(答禮)를 할 수 없기에 매우 황공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원자에게 이르기를,
"좌참찬을 본 적이 있느냐?"
하자, 원자가 보았다고 대답하였다. 상이 웃음을 머금은 채 원자를 눈여겨 바라보았다. 원자는 미목(眉目)이 청아하고 신기(神氣)가 빼어났는데 단정하게 손을 마주 잡고 정좌하여 제신들을 둘러보았다. 입시했던 신하들이 모두 은근히 기뻐하였다. 조금 있다가 상이 원자에게 대내(大內)로 들어가라고 명하니, 원자가 일어나서 재배하고 들어갔다. 준길이 아뢰기를,
"삼가 원자께서 행례(行禮)하는 것을 살펴보니 읍양하고 배궤(拜詭)하는 것이 법도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궁중(宮中)에서 예습을 했다고 하더라도 타고난 자질이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부터 힘써 학문을 강론하게 함으로써 품성을 개도하여 증익시켜야 하는데 강해야 할 글은 의당 《효경(孝經)》으로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음(字音)을 필시 알지 못할 것이니 먼저 《훈몽자회(訓蒙字會)》를 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자, 준길이 아뢰기를,
"《효경》을 강하면서 겸하여 자서(字書)도 강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강학(講學)하는 규정을 지금 정해야 합니다. 날마다 개강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루씩 걸러 하시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하루씩 걸러 하도록 하라. 개강시 보양관의 인원수는 규례대로 한 사람을 입참하게 하되 일이 없을 경우에는 나란히 들어와도 된다."
하였다. 준길이 또 목욕하러 가게 해줄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면유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준길이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머지않아 진연(進宴)을 거행할 것이라고 하는데, 시세를 상고하여 보면 해서는 안 될 점이 있습니다. 지금 성밖에는 풍상의 재해가 잇따라 발생하여 백성들의 일을 기대할 수가 없으며 지난번 천재도 마음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이런 때를 당하여 이렇게 성대한 행사를 거행한다면 외방 사람들이 듣고 장차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더구나 제왕(帝王)의 효도는 구체(口體)를 봉양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종사를 공고하게 하고 백성들이 안락(安樂)을 누리게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내년 봄에 자전을 모시고 온천으로 목욕하러 가신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자전의 건강이 회복되고 농사도 풍년이 든 뒤에 성례(盛禮)를 거행한다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국상(國喪)이 있은 뒤로 잇따라 흉년이 든 탓에 아직 한 번도 두 자전께 진연을 올리지 못하였다. 임인년021)  에는 연사(年事)가 조금 풍년이 들었으므로 장차 설행(設行)하려 했으나 만수전(萬壽殿)의 상제(喪制)를 당하였던 탓에 또 설행하지 못하고 말았다. 만수전의 상제가 겨울에 끝났기 때문에 이에 대신들과 상의하여 겨울 끝이나 초봄에 설행하려 했다. 만일 1년, 2년 자꾸 미루다 보면 아마 끝내는 설행할 때가 없게 될 것이다. 여러 사람의 의견에는 풍정(豊呈)을 행하자고 하는 이도 있었으나 이는 대단히 풍성한 행사가 될 것이므로 단지 간략하게 진연(進宴)을 설행하여 조금이나마 지극한 마음을 펴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대저 임금의 거조가 조금이라도 천의(天意)와 민심(民心)에 합치되지 않는 점이 있게 된다면 이는 아마도 제왕의 효도가 아닐 것입니다. 일찍이 선조(先朝) 정유년간에 진연을 설행하려 했었는데 마침 겨울에 우레가 치는 변이 발생하여 신이 탑전에서 진달하였더니 선왕께서는 즉시 물려서 설행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을 두려워하는 도리에 부합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식이 되어 날짜가 가는 것을 아끼는 마음으로, 흐르는 세월은 기다려 주지 않기 때문에 후회해도 소용이 없는 지경에 이를까 해서 부득이하여 거행하려는 것이다."
하자, 준길이 아뢰기를,
"신들도 부모가 있는데 이런 성교(聖敎)를 듣고 어떻게 감히 다시 진달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신의 의견에는 제왕의 효도가 여기에 있지 않다고 봅니다. 먼저 큰 것을 행한다면 이런 일은 비록 행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효도에 무슨 손상이 되겠습니까."
하였다.

 

9월 6일 기축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장령 이동명(李東溟), 지평 신명규(申命圭)가 아뢰기를,
"신들이 지난번 태상(太常)022)  의 일 때문에 번독스럽게 함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처치할 즈음에 전례에 따라 출사하게 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애써 재숙(齋宿)하고 소명(召命)이 내리면 달려가려고 했었는데 처치한 지 4일이 지나서야 소패(召牌)가 내려졌습니다. 스스로 의혹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만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신들을 하찮게 여기셨다면 처음부터 분수에 넘는 자리에 두어 명기(名器)에 하자가 있게 하지 말았어야 하며, 인피한 일이 성상의 마음에 합치되지 않아서라면 진실로 분명한 유지(有旨)를 내려 지척했어야 하며, 긴요하지 않은 일이라고 핑계하고 방과(放過)하여 그렇게 된 것이라면 이는 명주(明主)가 대간(臺諫)을 설치하여 이목의 임무를 맡기는 도리가 아닙니다. 이것이 어찌 신료들이 전하에게 기대한 것이겠습니까. 이는 모두 신들이 불초하여 천대와 모욕을 자초한 소치이니 어떻게 감히 구차스럽게 무릅쓰고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이민구(李敏求)가 강도(江都)에서 일을 그르친 죄에 대해서는 신들이 번거롭게 누누이 아뢸 필요가 없겠습니다만, 민구에게는 이보다 더 큰 죄가 따로 있습니다. 그가 귀양가 있을 때에 정명수(鄭命壽)가 데리고 있던 여자의 아우를 취하여 첩으로 앉히고 명수와 교결(交結)하여 감히 협박하여 풀려나기를 도모할 계교를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청인(淸人)이 나올 때를 당하여 은밀히 명수에게 촉탁을 넣어 마구 공갈을 가하게 하였으므로 인조 대왕께서 당초 즉시 왕법(王法)에 의거 정형(正刑)에 처하지 않았던 탓으로 이런 욕을 당하게 되었다고 크게 한스럽게 여기고서 부득이 우선 이배(移配)하게 했었습니다. 가령 민구가 조금이나마 사람의 마음이 있다면 의당 스스로 책형(磔刑)을 받아도 부족할 것처럼 여겨야 할 것인데 끝내는 창녀(娼女)를 첩으로 앉혀 놓고 스스로 좋은 계교로 여겼으니, 고금 천하에 남의 신하가 되어 이웃 나라에 있는 역적과 교결해서 군부에게 협박을 가하는 것을 민구처럼 한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의 전후 죄상을 따져본다면 지금까지 천지 사이에 숨쉬고 있게 한 것도 더 없는 실형(失刑)인 것입니다. 더구나 직첩을 주고 거두어 서용하여 다시 작록의 반열에 끼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이민구를 서용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다가 뒤에 따랐다. 또 아뢰기를,
"기보(畿輔)는 보장(保障)이어서 중임(重任)이라고 할 수 있지만 곤임(閫任)에 견주어 본다면 진실로 대등한 반열이 아닙니다. 지난번 수원 부사의 천망(薦望)이 있을 적에 삼로(三路)의 절도사를 아울러 의망함으로써 결국 새북(塞北)의 곤수에게 귀착시켰으니 관방(官方)과 정체(政體)를 이렇게 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그리고 수원(水原)과 북청(北靑)의 거리는 십수 일의 노정이므로 교체되어 오갈 즈음에 필시 달을 넘기게 될 것이며 서로 맞이하고 보내는 데서 발생하는 폐단도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전 남병사(南兵使) 구문치(具文治)는 그대로 전임(前任)에 제수하고 수원 부사는 다시 일이 없는 가합한 사람 가운데서 잘 가려 차송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충청 감사 임의백(任義伯)이 폐사(陛辭)하니, 상이 인견하고 본도의 농사에 대해 하문하였다. 의백이 아뢰기를,
"처음에는 풍년을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만 곧이어 풍상(風霜)과 장마 때문에 벼농사가 손상되었으며 밭곡식도 매우 부실하다고 합니다. 온천에 집을 짓는 역사에 대해서는 신이 내려가서 헤아려 처리하겠습니다. 지난번에 우의정 허적과도 상의했고 또 어실(御室)의 도형(圖形)을 받아가지고 가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도형은 바로 자전께서 임어하실 집이다. 옛터의 계단이 너무 높아서 바람의 피해를 받게 될까 염려되니 두 계단을 제거하고 한 계단만 두도록 하라. 그리고 어실의 규모를 너무 넓게 할 것은 없으니 두 칸을 터서 네 칸이 되게 하면 좋을 것이다."
하자, 임의백이 아뢰기를,
"그렇게 하면 너무 비좁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간가(間架)를 넓게 하면 너무 비좁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전에 거처했던 방은 다시 더 그 규모를 넓게 할 필요는 없다. 앞 기둥을 달아 낸다면 여러 신하들이 입시할 때 용접(容接)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내린 이번 거조는 부득이하여 내린 것이므로 백성들을 거듭 고달프게 하고 싶지 않다. 경은 모쪼록 유념하여 잘 처리해서 반드시 백성들의 원망이 없게 하라."
하였다. 의백이 아뢰기를,
"신이 전에 경상 감사로 있을 적에 도내의 절효(節孝)가 탁이한 자와 재행(才行)이 있어 녹용(錄用)하기에 가합한 자를 기록하여 계문했었습니다. 그 가운데 영천(榮川) 사인(士人) 정도창(鄭道昌)은 아비가 반노(叛奴)의 적당들에게 살해당하자 원수를 갚을 것을 맹세하고 7년 동안 상복(喪服)을 입고 날마다 관문(官門)에 나아가 울부짖으면서 통곡하였고 적괴(賊魁)를 체포하였으나 여당(餘黨)을 죄다 체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오히려 최마(衰麻)를 벗지 않자 장현광(張顯光)이 ‘선왕(先王)이 만든 예법을 무시하고 마음내키는 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했기 때문에 비로소 최마를 벗고 심상(心喪)을 하였으며 적도들을 모두 제거하고 나이 50이 되어서야 아내를 얻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그의 효성에 감동하여 효자리(孝子里)라는 세 글자를 마을 앞에다 새겼습니다. 이 같은 사람에게는 의당 특별히 포장(褒奬)하는 법전을 시행해야 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에 이르라."
하였다.

 

달이 토성(土星)을 범하였다.

 

9월 7일 경인

전주(全州) 등 다섯 고을에 황충이 발생하였다.

 

9월 8일 신묘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9월 9일 임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이유상(李有相)을 이조 좌랑으로, 홍처후(洪處厚)를 병조 참의로, 홍처대(洪處大)를 판결사로 삼았다.

 

집의 김만기 등이 아뢰기를,
"각도의 조적과 신역을 징납할 수 없게 된 부류들을 초출(抄出)하여 계문하게 한 것은 성상께서 하늘의 뜻에 따라 백성을 구휼하려는 성의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도신(道臣)이 된 자는 의당 조정의 덕의를 몸받아서 실제의 혜택이 아래에 미치게 해야 하는데 전 충청 감사 김시진(金始振)은 각 고을에서 초출할 즈음에 태반을 감하게 하여 곤궁한 백성들이 탄식하게 함으로써 조정의 명령이 부실하다는 원망을 사기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인색하게 하는 습성에 굳어져 덕의(德意)를 잘 봉승(奉承)하지 못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큰 기대를 완전히 잃게 만들었으니, 일반적으로 저지른 잘못과는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김시진을 추고하여 무겁게 다스리소서. 그리고 신 감사에게 각 고을에 분부(分付)하여 다시 더 초출하게 함으로써 똑같이 계문하게 할 여지를 만들어 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원자에게 《효경》을 강하기 시작하였다. 보양관이 1인씩 돌려가면서 진강(進講)하게 하였는데 아직 나이가 어리므로 단배(單拜)만 하게 하였다. 매일 《효경》 한 대문(大文)을 강하고 대자(大字) 한 자(字)를 쓰게 했는데 이를 일상의 과제로 삼게 하였다. 입는 복색(服色)은 편의에 따라 편복(便服)으로 접견하게 하였다.

 

9월 11일 갑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9월 12일 을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사간 이유 등이 아뢰기를,
"국가에서 저축해 두는 것은 가뭄과 장마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며 유사시의 경우에 견준 것입니다. 지금 팔로(八路)에 저축되어 있는 숫자를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만 양서(兩西)의 경우는 가호가 얼마 안 되는 작은 고을일지라도 수만 석(石)을 밑돌지 않고 있고 기타 각도 여러 고을에 저축된 것도 숫자의 다소가 고르지 않습니다. 곡식이 많은 고을은 조적(糶糴)을 하는 즈음에 백성들이 지탱하지 못하여 포흠의 근심을 면하지 못하며, 곡식이 적은 고을은 혹 흉년이라도 만나면 백성들이 모두 먹여 주기만을 바라서 다른 고을로 적곡을 받으러 가기에 이르고 있으니, 실로 널리 은택을 베푸는 데 병통이 있다는 탄식이 있습니다. 지금 각 고을의 전결의 다과(多寡)를 가져다 조사하여 그 원수를 참작하여 결정해 놓고 매년 적곡을 나누어 주되 모곡(耗穀)과 아울러 거두어 들이고 그런 다음 원래 정한 실수 이외에 여유가 있게 된 부분은 경창(京倉)으로 운송해다가 군수(軍需)에 대비하도록 한다면, 제도의 민력을 조금이나마 펴지게 할 수 있고 대농(大農)023)  의 경비에도 보탬이 되는 점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묘당에 나아가 의논하여 각 고을의 조적을 그 고을 전결의 다과에 따라 원수를 일정(一定)하게 함으로써 민간의 폐단을 조금이나마 제거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13일 병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대사간 이상진(李尙眞)이 소장(疏章)을 올렸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지금의 온갖 폐단은 각기 그에 대한 이유가 있는데 그 책임은 전적으로 군상(君相)에게 있습니다. 전하께서 진작시킬 의지가 없고 강극한 위엄이 적기 때문에 국가의 기강이 날로 무너지고 온갖 일이 점점 실추되었지만 신하들은 성상의 건강이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지금은 건도(愆度)가 평상으로 회복되셨으므로 신하와 백성들이 다같이 경하하였고 더욱 정신을 가다듬어 좋은 정치를 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지난번 유신의 소장을 인하여 즉시 고리를 굴리듯이 따르시는 아름다움이 있었고 허다한 주독(奏牘)을 일시에 모두 판하(判下)하였으므로 원근이 함께 축하하면서 구름을 헤치고 하늘을 본 듯이 통쾌하게 여겼습니다. 그랬는데 얼마 안 되어 다시 전일과 같아져 버렸으니, 이 한가지 일로 다시 지치(至治)를 기대할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비국과 제사의 공사(公事)가 적체되어 달이 지나고 해를 넘긴 것이 얼마인지 모릅니다. 따라서 전하께서 어떻게 대신을 책하실 수 있겠으며 대신은 어떻게 전하를 바룰 수 있겠습니까. 군신 상하가 이렇게 그럭저럭 세월을 보낸다면 장차 나라를 어떤 지경에 두게 되겠습니까. 더구나 대신은 오로지 고식책(姑息策)만을 힘쓰기 때문에 백성의 일을 마치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는 남의 일을 보듯이 하고 있어 변괴가 계속 발생하는가 하면 기근이 잇따라 닥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끝내 백성을 위로하고 재변을 해소시킬 방책을 생각지 않고 있습니다. 간혹 이에 대해 말하는 자가 있으면 방계(防啓)하기만을 일삼기 때문에 전하께서 백성을 구휼하는 덕의(德意)로 하여금 중간에서 막혀 아래까지 미쳐가지 못하게 하고 있으니, 대신의 죄가 무겁지 않습니까.
백성들의 원망이 발생한 이유를 따져보면 실로 치병(治兵)과 염재(斂財)의 문로(門路)가 몹시 번거로운 데 연유합니다. 각 관서에서 스스로 법식을 정하여 독촉하는 탓으로 그 분요로움을 견디지 못한 지친 백성들에게 매질을 낭자하게 하는가 하면 잡아다 가둔 죄수가 감옥에 가득한데, 이렇게 하는 자들을 유능한 관리라고 말하면서 취하여 승진 발탁하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인(仁)한 마음을 가진 자가 차마 독촉하고 핍박하지 못하면 명예를 노리는 행위라고 비방하고 죄벌이 뒤따릅니다. 그러므로 지금 풍력(風力)과 간재(幹才)가 있다고 이름난 자들은 거개가 재능을 팔고 벼슬을 잃을까 걱정하는 비열한 자들로, 자신을 위하여 도모하기만을 힘쓸 뿐 백성의 고통은 돌보지 않고 있으니, 백성이 어떻게 곤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성의(聖意)에 유념하시어 민폐를 통렬히 제거하시고 염재의 외람됨과 치병의 번거로움에 대해 변통시킬 방도를 생각하소서.
그리고 금년의 농사는 흉년을 면하기 어려우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유사(有司)의 1년 비용을 헤아려 남는 것에 해당되는 숫자를 양감(量減)하며 급하지 않은 것은 독촉을 정지함으로써 일푼이나마 너그럽게 하여 죽음을 면하게 해준다면 백성들의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계(進戒)한 내용은 절실한 것이어서 내가 마땅히 유념하도록 하겠으며 또한 유사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겠다."
하고, 소장을 비국에 내렸다. 그래서 대신들이 모두 자기 잘못으로 간주하고 체차시켜 줄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위유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좌참찬 송준길이 상소하여 돌아가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두어 구절 문자로 나의 회포를 쓰기가 어렵다. 면유하도록 하겠다."

 

9월 14일 정유

김석주(金錫冑)를 부교리로, 이두진(李斗鎭)을 남병사로 삼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경상 좌도의 거자(擧子)인 권백희(權百憙)는 곧 전일에 권황(權榥)이라고 한 사람입니다. 죄를 진 유림(儒林)이 벌을 받은 후에 이름을 바꾸고서 과거에 응시하여 방수(榜首)를 점거한 것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방(榜)에서 삭제하여 선비들의 습성을 징계하소서."
하니, 따랐다.

 

김여신(金礪臣)이란 자는 안악(安岳) 사람이다. 그의 어미 홍씨(洪氏)는 처음 철원(鐵原) 사람 신광만(申光晩)의 아내였는데 광만이 죽은 뒤에 김의결(金義潔)의 첩이 되어 여신을 낳았다.
이 때에 이르러 장백운(張白雲)이라는 자가 광만의 6촌인 최량(崔樑)과 노비 때문에 쟁송했는데 최량이 홍씨를 겁박하여 간음했다고 무고하였다. 강원 감사가 홍씨를 추문하려 하자 백운이 홍씨가 나아가서 변명하게 되면 자신의 정적(情跡)이 탄로날까 두려워하여 이에 의결과 여신을 꾀어 홍씨는 이미 죽었고 여신은 바로 적자라고 사칭하게 하였다. 의결이 그의 말대로 하였고, 여신은 심지어 홍씨가 아버지의 첩인데 잉태한 지 3, 4개월 후에 아기를 낙태하고 쫓겨나 죽었으며 자신의 어미는 의결의 아내로 안악 사람 정대기(鄭大基)의 딸이라고까지 하였다.
강원 감사가 황해도에 이문(移文)하여 정씨에 대해 사문하게 했더니 여신은 과연 정씨의 소생이 아니라 홍씨의 아들이며 홍씨는 지금 의결의 집에 살아 있다고 하였다. 감사가 드디어 이런 사실을 장문(狀聞)하였고, 형조에서 의결과 여신을 추문하자, 모두 변명하지 못한 채 취복(就服)하였다. 형조가 청하여 의결은 장 일백 도 삼년에 처하고 여신은 전가 사변시키게 하니, 상이 전일 평안도의 죄인 무진(武進)의 전례에 의거하여 여신을 일죄(一罪)로 논하게 하였으나 여신이 결안(結案)하는 공초에서 자복하지 않았으므로 2차의 형신을 받았고, 그 뒤 소결(疏決)하는 거조가 있을 적에 마침내 감사(減死)되어 삼수(三水)에 정배되었다.

 

9월 15일 무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장령 이동명(李東溟)이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강릉(江陵)의 옥사(獄事)에 대한 사계(査啓)가 들어왔는데 그 때의 수령이 그저 멍하니 있으면서 살피지 못했다는 등등의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신이 체직되어 돌아온 것이 금년 2월이고 지난해는 신이 관직에 있을 때이니, 신이 바로 사핵에 들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감히 태연스럽게 무릅쓰고 대직(臺職)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심재를 수찬으로, 민여로를 장령으로 삼았다.

 

좌참찬 송준길을 인견하고 하유하기를,
"원자가 이미 강학을 시작했는데도 좌찬성은 오지 않고 경만이 머물러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경이 또 버리고 가려 하니 개도(開導)하는 공부를 장차 의뢰할 데가 없게 되었다. 경은 어찌 차마 내려갈 수 있겠는가."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신은 병든 잔약한 몸으로 이런 추운 계절을 당하여 결코 여사(旅舍)에 머물러 있기가 곤란합니다. 온천에 가서 목욕하고 이어 전리(田里)로 돌아갔다가 겨울을 지내고 나서 다시 오려 합니다. 신이 어찌 차마 원자와 영원히 헤어질 수 있겠습니까. 삼가 조종조의 고사를 보건대 보양관이 중국에 갈 경우에는 보양관을 더 차출하여 진강하게 했었습니다. 현재 조정 신하들 가운데 적격자가 없지 않으니 대신에게 하문하시어 더 차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에게 병이 있기는 하나 여기에서 치료하고 조섭하면서 서서히 내년 봄을 기다렸다가 온천에 가서 목욕한다면 실로 양쪽이 모두 온편할 것이니 그렇게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하니, 준길이 또 간청하여 마지 않았다. 상이 이르기를,
"원자를 보양할 책임을 내가 이미 경에게 부탁하였고 경도 이미 스스로 담당했는데 만일 강학을 폐하게 된다면 그 해가 어떻겠는가. 경은 모쪼록 사정을 돌아보지 말고 머물러 있도록 하라."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성교가 이러하니 어떻게 감히 다시 진달할 수 있겠습니까. 전에 선조(先朝) 때에는 신이 서연(書筵)에 입시할 적마다 선왕께서 신이 들어온 것을 알고서 서연이 파한 뒤면 매번 머물러 기다렸다가 소대(召對)하게 했기 때문에 신이 서연이 있는 날에는 빈번이 대조(大朝)를 모실 수 있었습니다. 신이 근일에도 매번 이런 성거가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마는 아직까지 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성상께서 편찮으셔서 그런 것이기는 하지만 걱정스런 생각과 감개스런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상께서 온천에 갔다온 뒤로 백성들의 기대가 전보다 만 배나 더한데도 근일의 갖가지 거조를 살펴보건대 전보다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금년 농사가 처음에는 무성했다가 결국에는 흉황이 든 것이 어찌 감응의 이치에 의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근년 이래 혜성(彗星)·풍재(風災)·해일(海溢)과 경주(慶州)·강릉(江陵)에서의 변괴가 잇따라 한때에 나타났고 태백이 낮에 나타나는 것은 없는 날이 없으니, 지금이 어찌 군신 상하가 각자 두려워하고 면려하고 경계해야 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좌참찬 이 말한 보양관을 차출하라는 등의 일에 대해 대신들과 의논하여 반드시 노성(老成)한 사람을 가려서 차출하게 하라."
하고, 또 준길에게 이르기를,
"원자가 무척 허약하고 또 이제 해가 점점 짧아져 가니, 이에 하루씩 걸러 강학하게 하고 싶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원자의 나이가 아직 어리니 보양이 중요합니다. 강학은 서두를 필요가 없으므로 하루씩 걸러 해도 불가할 것은 없습니다만 때로는 연일 강학하게 하여 중단하는 일이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이른바 불시에 접견하겠다는 것이 이를 말한 것이다."
하였다.

 

경주(慶州)·흥해(興海) 등 20고을에 황충이 발생하였다.

 

9월 16일 기해

간원이 황헌(黃瀗)을 서용하라는 명을 환수하라는 일로 연계하니, 상이 따랐다.

 

지평 신명규(申命圭)가 아뢰기를,
"새로 제수된 성주 목사(星州牧使) 이휴징(李休徵)은 인품이 괴팍하고 망령스럽습니다. 지난번 삼척(三陟)에 부임했을 적에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소문이 도내에 파다했을 뿐만 아니라 추하고 비루한 일을 한 것이 끝이 없었으니, 다시 큰 고을을 제수하여 백성들에게 폐해를 끼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아침에 이에 대한 간통(簡通)을 보내어 왕복했는데 장관(長官)만이 곤란하게 여기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모두 신이 미더움을 받지 못한 소치이니 어떻게 감히 태연스럽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사헌 박장원은
"휴징의 인품과 벼슬살이에 대해서 상세히 아는 것이 없으므로 억지로 따름으로써 모순을 야기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신이 남에게 미더움을 받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하고, 집의 김만기는
"동료가 이휴징을 체직으로 논핵할 뜻으로 간통을 발하였기에 범연하게 소문을 들은 것이 아닐 것이라고 여겨 신이 즉시 잘 알았다고 써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동료가 장관과 의견이 합치되지 않았다고 서로 잇따라 인피하니, 신이 어찌 감히 편히 있겠습니까."
하고 모두 인혐하니, 지평 신후재가 처치하여 아울러 출사시키기를 청하였다. 장원 등이, 둘 다 출사하게 하도록 처치한 것이 크게 체례(體例)에 어긋난다는 것으로 재차 인피하였으며, 후재도 공척(攻斥)받았다는 것으로 인피하였다. 간원이 처치하여 장원과 후재는 체직시키고 명규와 만기는 출사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9월 17일 경자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대사간 이상진(李尙眞)이 아뢰기를,
"아, 오늘날의 국사가 안전합니까, 위태롭습니까. 안전한 것도 군상(君相) 때문이고 위태로운 것도 군상 때문인 것입니다. 국사를 논하면서 군상을 거론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 책임을 지겠습니까. 대신의 도량에 있어서는 의당 남의 말을 받아들여 더욱 면려할 일이지 기어이 인혐하면서 차자를 진달할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성상의 비답이 위유하는 데에 그치고 면려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며 실제와 어긋나는 말을 억지로 가하였다는 내용의 하교가 있기에 이를 줄은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대신에게 사실이 아닌 말을 강제로 가한 죄가 어떤 죄에 해당되는 것입니까. 신을 파직시키라고 명하소서."
하니, 상이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간원이 처치하여 출사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9월 18일 신축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9월 19일 임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온천에 행행할 때 수행했던 여러 신하에게 상을 내렸다. 영중추 이경석,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홍명하, 청풍 부원군 김좌명, 약방 도제조 허적 등에게는 안구마 1필을 하사하고 자제 중 한 사람에게 관직을 제수하였으며, 허적에게는 아다개 1좌를 하사하였다. 병조 판서 홍중보, 어영 대장 유혁연, 이조 판서 김수항, 판윤 오정일, 지중추 정지화, 예조 참판 남용익, 정리사 김좌명, 유도 대장 이완, 승지 이성징·장선징·송시철, 약방 제조 이일상·박세모 등에게 가자하고, 그 외에게는 각각 차등있게 논상하였다.

 

9월 20일 계묘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집의 김만기 등이 아뢰기를,
"성주(星州) 고을은 본디 다스리기 어렵다고 말해오고 있으므로 적격자가 아니면 외람되이 제수해서는 안 됩니다. 목사 이휴징은 지난번 삼척에 부임했을 적에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비난과 추하고 비루한 일을 저지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다시 큰 고을을 제수하여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게 해서는 안 되니, 파직시키소서.
국가에서 작상(爵賞)을 설치한 것은 공로에 보답하기 위한 것인데 반드시 상이 그 공로에 알맞게 된 뒤에야 헛되이 제수하고 외람되이 받았다는 데로 귀결되는 일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제신에게 가자하여 6품으로 천전시키라는 명은 실로 상을 신중히 한다는 의의에 어긋나는 점이 있습니다. 약방(藥房)의 제신들이 성궁(聖躬)을 보호하여 국가에 큰 경사가 있게 한 데 대해 상전(賞典)을 시행하여 온 것은 이미 전례가 있습니다. 이밖의 제신들이 배종하기도 하고 거수(居守)하기도 했는데 이는 직분상 당연히 해야 될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기록할 만한 공로가 있다고 아울러 은혜롭고 특이한 은전을 베풀어 품계를 건너뛰어 승진시키기에 이르게 한단 말입니까. 약방에게 내리는 상전 외에 제신들에게 가자하여 6품으로 천전시키게 한 명은 아울러 환수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휴징의 일은 따랐다.

 

경안군(慶安君) 이회(李檜)가 졸(卒)하였다. 회는 곧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아들이다. 소현의 자녀(子女)가 모두 죽었고 유독 경안군만이 살아 있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온천에 목욕하러 갔다가 병이 나서 실려 돌아와 죽었다. 상이 매우 애도하여 정원에 하교하기를,
"경안군의 상사(喪事)는 뜻밖에 발생한 일이어서 내가 매우 비통하게 여기고 있다. 선조(先朝)에서 돌보아 기르고 어루만져 보살핀 것은 천고에 탁월하니 이는 진실로 후세 자손들이 의당 본받아야 할 일이다. 말과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눈물이 옷깃을 적시는 것을 깨닫지 못하겠다."
하고, 특별히 예장(禮葬)할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의관(醫官) 박군(朴頵)은 삼가서 구호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잡아다가 신문한 다음 형장을 가하고 먼 곳으로 정배시켰다.

 

전 참판 이행진(李行進)이 졸(卒)하였다. 행진은 제법 문명(文名)이 있었으나 인품이 경망하고 지론(持論)이 부박하여 청의(淸議)에 버림받았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졸하였다.

 

9월 21일 갑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윤문거(尹文擧)를 대사헌으로, 이경과(李慶果)를 지평으로, 윤경교(尹敬敎)를 주서로 삼았다.

 

사간 이유 등이 아뢰기를,
"각 고을에서 조적(糶糴)을 수납할 즈음에 반드시 모곡(耗穀)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것이 전부터 유래되어 온 정식(定式)이라고는 하지만 근년 이래 흉년이 잇따라 발생하였으므로 원곡(原穀)도 간신히 준비하는 상황에 대해서는 진실로 논할 겨를도 없고 모곡에 이르러서도 충비(充備)할 수 없는 지경이니 곤궁한 백성들이 부르짖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지난번 본원(本院)의 계사를 인하여 관향곡(管餉穀)의 모곡(耗穀)은 이미 양감(量減)했습니다만 기타 제도의 피해를 입은 곳에 대해서도 똑같이 진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도 가운데 피해가 더욱 극심한 고을에 대해서는 금년의 모곡을 특별히 감제시켜 조정에서 은혜롭게 돌본다는 뜻을 보이게 하소서."
하니, 상이 해조에게 그 가운데 더욱 극심한 고을을 초출하여 품처하게 하였다.

 

9월 22일 을사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달이 귀수(鬼宿)를 범하였다.

 

9월 23일 병오

평안도 가산(嘉山)·귀성(龜城)·태천(泰川)·박천(博川)·안주(安州)·의주(義州) 등지에 큰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계란만 하였으며 벼가 크게 손상되었다. 도내에 염병이 크게 번져 사망자가 잇따라 발생하였다.

 

전라도에 우역(牛疫)이 점점 번져 죽은 소가 매우 많았다.

 

9월 24일 정미

사간 이유 등이 아뢰기를,
"이번에 제신들에게 가자한 것과 6품으로 천전시키라는 명은, 실로 상(賞)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도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헌부가 환수할 것을 청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인 것입니다. 약방(藥房)은 성궁을 보호하는 것이 직분이고 다행히 신명(神明)의 도움을 받아 성후(聖候)가 평상으로 회복되었으니, 전례에 의하여 상전을 베푸는 것은 그래도 전거가 있으나, 기타 제신들이 배종도 하고 유도도 하여 일을 보았던 것은 본디 직분에 있어 당연한 것인데 상을 주어야 될 일이 무엇이 있기에 구분하지 않고 은전을 베풉니까. 속히 환수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지난번 연석(筵席)에서 진연(進宴)할 때의 기생들 가운데 기생이 아닌데도 선발되어 올라온 사람은 즉시 도로 내려보내게 하라고 하교하였습니다. 이는 실로 성상께서 폐단을 진념하고 민원을 돌보는 성대한 뜻에서 나온 조처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들리는 바에 의하면 악원(樂院)에서 막 방송하여 미처 내려가기도 전에 곧이어 침선비(鍼線婢)로 상방(尙方)에 예속시켰다고 합니다. 상방의 침선비를 어찌 다른 데서 초출할 사람이 없기에 그렇게 서둘러 한편으로 이속(移屬)시켜 끝내 성명(成命)을 헛된 데로 귀결시킨단 말입니까. 상방의 해당 제조를 추고하여 무겁게 다스리소서."
하니, 따랐다.

 

좌참찬 송준길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강연(講筵)을 정지한 지가 지금 몇 달 며칠이 지났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상의 덕망은 천성적으로 타고나신 것이어서 훈도(薰陶)의 보익에 도움받을 것이 없기는 합니다. 그러나 깊숙한 궁중에서 하시는, 마음을 성실하게 하는 공부에 대해서는 참으로 외신(外臣)이 감히 엿보아 헤아릴 수 없는 노릇이고, 보통 사람의 마음은 남을 대할 적에는 근엄한 자세를 하지만 혼자 있을 적에는 방사하기 마련이며, 자신보다 나은 사람과 함께 있게 되면 공경심이 생기게 되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교만한 마음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부시(婦寺)들만 대할 뿐 신하들은 접견하지 않으신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또한 태만하고 해이되고 즐기고 허물을 범하는 마음이 발생되지 않았다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삼가 생각건대 오늘날 강연을 정지한 것은 실로 옥체가 미령하신 데에 연유된 것이기는 합니다만 그렇더라도 미령하신 것이 대단한 지경에 이르지 않을 적에는 어찌 조금 편안한 때에 유신들을 인접할 겨를이 없겠습니까. 아, 질병을 앓는 것은 진실로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만 또한 전하께서 조양(調養)하는 도리에 있어 그 방도를 극진히 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깊은 걱정과 지나친 우려를 여러 가지로 해봅니다.
신이 종전에 감히 선조(先朝)의 양심합(養心閤)에 대한 이야기를 진달한 것은 본래 의도가 있는 것이었는데 삼가 생각건대 성명께서도 반드시 말밖의 뜻을 깨달으셨을 것입니다. 신은 원컨대 전하께서는 선조께서 이미 행한 전례를 준행하시며 성인이 질병을 삼간 도리를 유념하시어 항상 소합(小閤)에 거처하시면서 맑은 마음으로 조용히 조섭하소서. 그리고 자주 승지들로 하여금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하게 하실 것은 물론 또 강관(講官)을 불러서 경사(經史)를 진강하게 한 다음 전하께서는 궤석(几席)에 의지하여 들으소서. 밤에는 방에 병풍을 치고 밖에다는 불을 밝혀 놓고서 승지와 강관들을 불러들여 함께 고금을 논하고 치도(治道)를 상의하소서. 서늘한 계절 고요한 밤에는 그 취미가 더욱 심원(深遠)하여 진수(進修)와 조양(調養) 두 가지 모두 마땅하게 될 것이니, 이를 춘당대(春塘臺)에서 열무(閱武)하느라 혹 더쳐서 건강을 손상시키는 것과 견주어 본다면 이해(利害)와 난이(難易)가 너무도 현격한 정도일 뿐만이 아닙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무슨 까닭에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않으려 하십니까.
지금 하늘이 경계를 보이고 흉년이 또 극심하여 백성들이 장차 떠돌다 죽게 되었는가 하면 걱정스러운 일이 눈에 넘치고 있습니다. 큰 근본이 확립되지 않은 것이 이러하니, 성명께서는 경척하는 마음으로 살펴 받아들이소서."
하니, 상이 은혜로운 답을 내렸다.

 

9월 25일 무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박장원(朴長遠)을 우참찬으로 삼았다.

 

대사간 이상진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약방 제조와 의관으로서 수가(隨駕)한 자들은 침약(鍼藥)의 공이 없다고 하더라도 원래 성궁(聖躬)을 보호하는 일에 관계된 것이니, 전례를 적용하여 그래도 상을 줄 수 있습니다만, 도성에 머물러 지킨 자들도 구분하지 않고 상을 주는 것은 절대로 이런 이치는 없는 것이고, 호가한 대소 관원에 이르러서도 말고삐를 잡은 공로가 있다 하여 아울러 상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만일 이보다 더 기간이 오래 된 경우에는 그에 대한 상을 어떻게 주겠습니까.
그 가운데 정리사(整理使)와 병방 승지(兵房承旨)는 총관(摠管) 등의 관원이나 다른 승지에게 견줄 수 있는 것이 아닌데 그들에 대한 상도 가자(加資)에 이르는 것은 부당합니다. 더구나 이 두 신하는 모두 앞서 가자된 지가 오래되지 않았는데 또 다시 승자(陞資)시켰으니 이는 관자(官資)를 아끼고 신중히 한다는 도리에 매우 어긋나는 처사입니다. 여항(閭巷)에서 여러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전하는 말에 의하면 전하께서 척완(戚畹)에게만 후하게 한다고 합니다. 전하께서는 무엇 때문에 안타깝게도 상을 주지 않아도 될 사람에게 상을 줌으로써 스스로 성덕에 누를 끼치고 비방하는 의논이 나오도록 길을 열어주려 하십니까.
군대를 거느린 자를 가지고 논하여 보건대, 신이 지난번 남쪽 지방을 왕래할 적에 도로에서 듣고서 상을 주어야 될 사람과 상을 주지 않아야 될 사람을 알았습니다. 어영군(御營軍)은 군령이 엄명하여 하나도 폐단을 끼치지 않았으므로 곳곳의 고을과 마을에서 지금까지 칭송하고 있습니다. 이는 유혁연(柳赫然)이 자신의 임무를 잘 수행한 결과인 것으로 격려하는 방도에 있어 의당 상을 주어야 할 것은 물론 한 자급을 가자하는 것이 조금도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훈국(訓局)과 금군(禁軍)은 멋대로 꺼림없이 말썽을 일으켜 피해를 끼친 것이 적지 않았으므로 일로(一路)의 사람들이 분노하여 원망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장관(將官)을 매도하기에 이르렀으니, 장관은 죄를 주어야 할 것이요 상을 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대장(大將)이 평상시 절제(節制)를 잘하지 못했다는 것은 또한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완(李浣)에게 상을 주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은 유도(留都)만 한 데에 있는 것이 아니며, 대사마(大司馬)로서 금군의 횡포를 제대로 금지시키지 못했으니 홍중보(洪重普)에게 상을 주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은 공이 없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벌을 주어야 하는데도 벌을 주지 않고 상을 주는 것이 부당한데도 도리어 상을 주었으니 어찌 성조를 위하여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소장이 들어간 지 여러 날이 되었어도 비답이 내리지 않았다.

 

사간 이유 등이 아뢰기를,
"지평 이경과는 공론에 흡족하지 않아 대망(臺望)에 참여하지 못한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지난번 정사에서 잘 모르는 채 의망하고 심지어 낙점을 받기까지 하였으니, 이조의 당해 당상은 추고하고 이경과는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27일 경술

양사가 약방의 여러 신하들 중에서 수가(隨駕)한 자 외에 가자하였거나 육품으로 천전(遷轉)한 경우에 대하여 환수하기를 청한 일로 잇따라 아뢰니, 상이 답하기를,
"약방 및 병조 판서, 어영 대장, 정리사, 병방 승지, 내관 육후립(陸後立)·문철(文轍)·김성휘(金聲輝) 등에게 가자하고 사관을 육품으로 천전한 외에는 모두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밤에 달이 태미원 단문(太微垣端門) 안으로 들어갔다.

 

9월 28일 신해

어진익을 지평으로, 윤경교를 검열로 삼았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는데, 강화 유수 서필원도 입대하였다. 좌의정 홍명하가 아뢰기를,
"신들이 전번에 원자를 알현하니 단지 성도(聖度)만 천성적일 뿐만이 아니라 예수(禮數)도 절도에 착착 맞았습니다. 이는 실로 종묘 사직의 큰 경사이므로 신들은 넘치는 기쁨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원자가 이렇게 영특하니 책례(冊禮)를 속히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고, 우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원자가 현재 어려서 책례를 진행하지 못할까 염려스러웠으므로 신들이 미처 진달하여 청하지 못했습니다마는 나아가 뵙고 나서 원자께서 이렇게 숙성한 것을 알았습니다. 명년에는 거행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하고, 홍명하가 아뢰기를,
"원자의 책봉은 전례에 비추어보면 연초에 있었으니 예관(禮官)과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전례를 상고해내서 거행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자가 숙성한 듯하지만 명년 봄에는 면복(冕服) 차림으로 예를 행할 수 없을 듯하다. 나의 책례는 가을에 있었다. 이것도 전례이니 명년 가을에 혹시 행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마는 영상이 출사하거든 의논토록 하겠다."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전일에 이상진이 상소하여 ‘백성들의 고통에 대하여 변통하는 거조가 있어야 합니다. 금년 농사가 흉년든 곳이 많은데 기전(畿甸)이 가장 심하고 대두(大豆)가 더욱 결실을 맺지 못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금년 세두(稅豆)는 적당량을 견감해 주어서 백성들에게 작은 혜택이나마 주었으면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각도의 세두를 반으로 줄이도록 하라."
하니, 해조에서 상세하게 마련하여 아뢰었다.
서필원이 강도의 군무(軍務)에 대하여 변통해야 할 13개 조항을 진달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정족 산성(鼎足山城)은 다시 보수하여 축조하지 말 것, 두 번째는 정포진(井浦鎭)을 교동(喬桐)으로 옮기고 거기에 소속된 수군(水軍)을 전적으로 본부에 소속시킬 것, 세 번째는 중군(中軍)은 혁파하고 거기에 소속되어 있던 군병을 신지(信地)에 각각 예속시키는 것, 네 번째는 별파진(別破陣)·마대(馬隊)와 같은 유들은 모두 파하여 육군으로 삼게 하는 것, 다섯 번째는 내노(內奴)를 단속하여 초군으로 만든 후에는 비록 사변이 생겨 피란을 하게 되더라도 궁가에서는 부릴 수 없게 할 것, 여섯 번째는 월곶(月串) 등 사진(四鎭)의 수군 첨사 만호를 병마 첨사 만호로 바꾸어서 계하하되 소속된 토병(土兵)은 모두 이속시켜 육군으로 삼도록 할 것, 일곱 번째는 덕포진(德浦鎭)을 통진(通津)으로 옮기고 철곶진(鐵串鎭)을 교동(喬桐)으로 옮기되 그 군병은 본부에 이속시키게 할 것, 여덟 번째는 봉수군(烽燧軍)을 혁파하여 정군(正軍)으로 돌려 보낼 것, 아홉 번째는 본부에서 군기(軍器)를 보는 자가 많은데 지금부터는 대비하는 자는 회록하지 말고 전적으로 훈련하는 데 쓰게 할 것, 열 번째는 본부에 활과 총 등을 만드는 장인(匠人)이 없으니 활과 총을 만드는 장인 각각 두 사람에게 전세미(田稅米)로 급료를 주고 모집하여 들여 영원히 살게 할 것, 열한 번째는 본부 조곡의 원수 16만 6천여 석을 영원히 한정하여 다시는 수량을 더하지 말고 매년 환자곡 및 이전 모곡을 수량을 계산하여 치부해 두었다가 다른날 줄어든 수량을 채우도록 하고, 유수 이하 삼관(三官) 및 하인에게 응당 지급해야 할 쌀을 전결 수미(田結收米)로 내려준 후에 나머지 수량은 종전 모곡의 명목없는 수량에 회록하고, 군미(軍米)는 정장(丁壯)·정군(正軍)을 제외하고 연로한 자에게는 거두어 들이지 말게 하되, 노제(老除)에 해당하지 못하거나 나이가 16세가 되었으나 왜소하여 정남이 못 된 자에게는 헤아려서 쌀을 받게 하여 조련할 때에 군기를 무역할 비용으로 쓸 것 등의 일이었는데, 상이 모두 따랐다. 열두 번째는 본부의 교생(校生)을 모두 군역에 충정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고강을 실시한 후에 낙강자에 한하여 강등시켜 충정시키게 하였다. 열세 번째는 섬에 있는 마장(馬場)을 혁파하여 백성들에게 경작토록 하고 섬 안에 있는 목자(牧子)를 모두 본부에 이속시키게 하기를 청하는 것이었다. 이에 상이 목장을 혁파하는 것은 허락하지 아니하고 원래부터 살고 있던 목자로서 본부의 입작(立作)을 지급받는 목자인 경우에는 그 목장에 소속시키도록 명하였다. 필원이 아뢰기를,
"마장을 혁파하지 않으면 비록 목자를 얻는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신이 진달한 일을 모두 윤허받았는데 유독 마장에 관한 일만을 끝내 들어 주지 않으시니 어찌 성덕에 흠이 되지 않겠습니까. 신은 감히 상의 명을 받들고 물러가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승지 이경억이 아뢰기를,
"목장에 관한 일에 대하여 비록 명을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어찌 성덕에 흠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서필원은 외신(外臣)으로 감히 외잡스런 말을 하였으니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웃으면서 추고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9월 29일 임자

상이 희정당에서 소대하였다. 참찬관 조복양에게 《통감(通鑑)》 당태종기(唐太宗紀)를 읽게 하고 상은 안석(案席)에 기대어 들었다. 좌참찬 송준길이 강설이 끝나자 나아가 아뢰기를,
"지난번 강한 《심경(心經)》을 아직 끝내지도 않았는데 어찌하여 《통감》을 강하게 하셨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눈병 때문에 직접 문자를 볼 수 없는데 사기(史記)는 다른 서책과는 달라서 말하는 것과 같은 점이 있기 때문에 이를 강하게 한 것이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사기를 강한다고 해도 전혀 아무 것도 강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하고, 준길이 이어 병이 들었음을 진달하고 춥기 전에 돌아가게 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조리하고 올라오려 하는 것을 내가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소아(小兒)를 경에게 부탁하였고 내가 경에게 추위를 무릅쓰고 수고롭게 출입하라고 책하지 않으니, 조용히 있으면서 조섭한다면 고향에 가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지금 원자를 모시고 있으므로 실로 차마 떠날 수 없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처지로서는 꼭 돌아가야만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부탁한 일이 있고 경은 꼭 떠나가야 할 의리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신은 겨울철에는 결단코 출입할 수 있는 기대가 없습니다. 따라서 서울에 있다 하더라도 무익한 일입니다."
하자, 복양은 아뢰기를,
"근래 강연을 여는 거조가 있자 나라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이런 때 이런 사람을 어떻게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병을 조리하는 방도로 말하더라도 시골이 반드시 서울만 못할 것입니다."
하고 우의정 허적은 아뢰기를,
"준길이 내려가기를 청하는 이유를 신은 알 수가 없습니다. 선비가 학문을 한 것은 그 의도가 도(道)를 행하는 데 있는 것인데 경연에 출입하게 되었고 지위가 빈사(賓師)이며 그가 진달하는 것을 상께서 많이 따라주고 있는 데다가 지금은 원자(元子)에 대한 부탁을 받았으니 그 책임의 소중함이 어떠합니까. 상께서 기필코 떠나지 않기를 바라신다면 단지 성의를 보이는 일에 달렸을 뿐입니다."
하니, 상이 준길에게 이르기를,
"지금까지 경이 서울을 떠난 지가 5년이었는데 우연히 올라왔다가 반 년도 못 되어 또 내려가려 하니, 이렇게 되면 서로 헤어져 있는 날이 많고 서로 만나는 날은 적은 것이 된다. 경에게 떠나야 할 의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 허락한다면 성실하게 하는 데 흠이 되기 때문에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신의 작위가 높고도 중하며 은례는 견줄 데가 없는 상황입니다. 귀신이 집을 엿본다는 옛말도 있거니와 만일 오래 머물러 있게 되면 반드시 후회할 일이 생길 것입니다."
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준길이 아뢰기를,
"근래 민풍(民風)과 세교(世敎)가 날로 상패(傷敗)된 탓으로 경주(慶州)와 강릉(江陵)에서의 변이 있기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매우 놀랍고도 참담합니다. 조정에서 악을 징계하는 형전(刑典)을 이미 거행했습니다만 선을 표창하는 일도 반드시 아울러 시행한 연후에야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는 바가 있게 될 것입니다. 이에 앞서 임의백(任義伯)이 경상 감사로 있을 적에 절효(節孝)와 행의(行誼)가 있는 사람을 찾아가 물은 다음 열거 기록하여 계문한 적이 있고 지난번 등대했을 적에도 또 진달했었는데 효행이 더욱 탁이한 사람은 우선 정표(旌表)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각도에서 신보(伸報)한 효자(孝子)·열부(烈婦)의 부류들을 해조에서 정부로 이보(移報)한 것이 매우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6, 7년 동안 적체되어 있는 채 전혀 거행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또 해조에 적체되어 있는 것도 등제(等第)를 매기지 않은 것이 또한 많다고 하니, 정부와 예조로 하여금 즉시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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