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계축
상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백관의 상참을 받았다. 집의 김만기(金萬基)가 나아와 아뢰기를,
"근래 예방(禮防)이 날로 무너져 상제(喪制)가 점점 혼란스러워지고 있습니다. 창평(昌平)에 사는 전 현감 고두흥(高斗興)은 자기 어미의 상여가 발인(發靷)할 적에 병을 핑계대고 집에 있으면서 따라가지 않았는데 손님을 접대하는 언동(言動)에 병든 정상을 볼 수 없었습니다. 남평(南平)의 사인(士人) 홍종발(洪鍾發)은 자기 아내의 병을 간호하느라 부모의 산소를 천장(遷葬)할 적에 가지 않았으므로 본도의 물정이 놀라워하고 있습니다. 본도로 하여금 사문(査聞)해서 율(律)에 의거 죄를 부과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사간 이유가 아뢰기를,
"이번 정후계(鄭後啓)에게 시상(施賞)할 적에 특별히 자제에게 관직을 제수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대저 보국(輔國)의 품계도 참람스러워 감히 경솔하게 제수해서는 안 되는데 도리어 대신을 대우하는 예로 대우하는 것이 또한 참람하지 않습니까. 명기(名器)를 문란하게 하는 것이 이보다 심할 수 없으니 환수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다시 아뢰니, 이에 따랐다. 도승지 이경억이 아뢰기를,
"어제 소대를 파한 뒤에 송준길이 신들에게 말하기를 ‘위에서 지성으로 면려하여 머물게 하기 때문에 여지껏 지체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정세가 결코 조금도 지체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배사하지 않고 곧바로 돌아갈 마음이 있는 듯하였습니다. 준길이 당초 올라올 적에는 오로지 경연의 진강(進講)을 위해서였는데 이미 경연을 열지 않았고 소대도 또한 드물기 때문에 준길이 스스로 머물러 있어도 무익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또 불안스런 일이 많기 때문에 떠나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자주 사대(賜對)하고 날마다 연방(延訪)한다면 만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슨 일로 불안해 한단 말인가?"
하였다. 경억이 아뢰기를,
"들리는 바에 의하면 경상도의 경시관(京試官) 오시수(吳始壽)가 책제(策題)를 내어 선비들을 시험보일 적에 ‘임하(林下)에서 경술(經術)을 연마한 인사를 조정에서 기용했었는데 과연 효과가 있었는가.’ 하는 등의 말로 문제를 내어 현저하게 조롱하고 비난하였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불안해 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밤에 크게 천둥 번개가 쳤다.
10월 2일 갑인
약방이 문안하니, 상이 답하기를,
"어제 비바람이 불면서 천둥 번개가 쳤는데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과 뼛골이 함께 차갑게 하였다. 아, 천지(天地)와 삼강(三綱)의 변이 잇따라 거듭 발생하니 놀랍고 두려운 마음이 항상 가슴에 절실하였다. 그런데 지금 또 이런 변이(變異)를 만나니 너무도 송구하여 조처할 바를 모르겠다."
하였다.
삼사가 천둥친 변괴 때문에 청대하였으나, 상이 마침 감기를 앓아 두통이 있었던 탓으로 인접하지 못하고 하교하기를,
"별안간 겨울에 천둥친 변을 당하니 너무도 놀랍고 두려워 조처할 바를 모르겠다. 지금 청대하는 일이 있다고 하는데 만일 소득이 있게 된다면 즉시 인접해야 하겠으나 어제 감기가 들어 오늘 새벽에 땀을 내느라고 두통이 일어서 접견할 수가 없으니 내가 매우 안타깝게 여긴다. 소회는 즉시 써서 아뢰고, 면대하여 진달하려거든 1, 2일쯤 기다려라."
하였다.
부제학 조복양 등이 아뢰기를,
"신들은 갑자기 천둥치는 변을 당하니 놀랍고 두려운 마음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입대하여 우려(憂慮)를 다 진달함으로써 성상께서 수성하시는 데 만분의 일이나마 보탬이 되게 하려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성교를 받으니 걱정스런 마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신들이 하고 싶은 말은 다소 일이 많아서 창졸간에 모두 상세히 써서 아뢸 수가 없으니, 의당 성상의 하교에 따라 성후가 평복(平復)되기를 기다리겠습니다만 그 가운데 우선 급히 진달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좌참찬 송준길이 돌아갈 계획을 이미 결정했다고 들은 것 같습니다. 근일 떠도는 이야기에 불안스러운 단서가 있기는 합니다만 근거없는 뜬소문은 본래 입에 올릴 것이 못 됩니다. 성상께서 만일 지난번 불러올 때의 하교를 잘 실천하여 날마다 경연에 나아가 학문에 힘쓰시면서 전적으로 보도(輔導)를 책임지우는 동시에 이에 의거 분명한 지휘를 내리시고 지성으로 머물도록 하유하신다면 어찌 마음을 고쳐 먹기를 바랄 수 없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 마음의 걱정스러움을 어떻게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진달한 내용에 대해서는 경들의 정성을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하였다.
정원이 겨울에 천둥친 지난 밤의 변괴 때문에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살피건대, 전하께서 혜성(彗星)의 변이 발생한 처음에는 척연히 경동하시어 조정에서 걱정하시는 것이 사색(辭色)에 나타나고 도와주기를 요구하는 뜻이 신서(臣庶)에게 미더움을 받았으므로 조금이나마 하늘의 견책에 답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이런 마음이 계속되지 못하고서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점점 해이해져 일이 없는 때처럼 으레 그런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정령(政令)을 미루어 보아도 한결같이 구투(舊套)를 따르는 것을 면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진기되지 못하는 현상이 날이 갈수록 더 극심해지고, 위태로운 형세가 물이 더욱 빨리 흐르는 것과 같아서 온갖 일이 방만하고 전도되어 뭇 폐단이 마구 생겨나고 있는 탓으로 백성의 걱정과 군대의 원망이 오늘날에 이르러 극도에 달했습니다. 그러니 인애하는 하늘이 어찌 다시 재이를 내려 크게 경계시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역(周易)》 진괘(震卦) 전(傳)에 ‘군자는 거듭 천둥이 쳐 위압적인 진동이 일어나는 상(象)을 살펴 수성한다.’고 했으니, 전하께서는 삼가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시고 진동하는 상(象)을 살피시어 마음을 다져먹고 진작하시어 통렬한 성괄(省括)을 가함으로써 구습을 고치소서. 그리하여 선단(善端)을 개발하고 자주 강연을 열어 더욱 언로(言路)를 넓히시며 신공(臣工)을 책려하여 상하가 서로 수성하게 하소서. 청명(淸明)한 마음이 몸에 있으면 지기(志氣)가 신령스러워지는 것이니 시종 한결같은 자세를 지녀 전일처럼 간단(間斷)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그러면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켜 돌릴 수 있고 나라를 아름답게 안정시킬 수 있게 될 것이니, 이것이 어찌 종사와 신민의 복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놀란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깊은 연뭇에 떨어진 것만 같았다. 이제 계사를 살펴보건대 마음의 근원을 맑게 하려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마음에 새겨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10월 3일 을묘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좌상 홍명하, 우상 허적이 차자를 올려 자신들을 책면시킴으로써 하늘의 견책에 답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아, 천재 지이(天災地異)의 참담함과 삼강 오상(三綱五常)의 변괴가 잇따라 나타나고 있었는데 더구나 이번에 비바람이 불면서 천둥 번개가 친 변이 다시 순음월(純陰月)인 10월에 발생하였으니, 걱정스러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마치 깊은 연못에 떨어진 것 같은 심정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고요히 그 이유를 생각하여 보건대, 오로지 내가 과매(寡昧)한 탓이니 다시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경들은 더욱 힘써 덕을 연마하여 신하들을 책려하는 한편, 힘껏 화합하여 과인의 부족한 점을 보좌하고 위태로운 국가를 부지하여 나의 기대에 부응토록 하라."
10월 4일 병진
김익렴(金益廉)을 장령으로, 이시매(李時楳)를 좌윤으로, 이정기(李廷夔)를 우윤으로, 정만화(鄭萬和)를 좌승지로 삼았다.
좌참찬 송준길이 소장을 남겨 두고 곧바로 돌아갔다. 그리고 겨울에 천둥친 변은 하늘이 경고한 것이라고 경계하였는데, 상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따라가서 중로(中路)에서 들어와 서로 만나보자는 뜻으로 효유하게 하였다. 가 주서 신정(申晸)이 따라가 과천(果川)에서 준길을 만나 성비를 전하고 효유하니, 준길이 이미 한강(漢江)을 건넜으므로 참으로 감히 다시 들어가서 거듭 사람들의 비방을 받을 수 없다는 것으로 사양하고 드디어 떠나갔다.
영의정 정태화가 열여덟 번째 정사하니, 승지를 보내어 돈유하였다.
서민(西民) 가운데 북지(北地)로 옮겨가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잠시 쇄환하지 말게 하였다.
이에 앞서 관서(關西)와 관북(關北)에 거주하는 백성으로 다른 도에 이주하여 살고 있는 자들을 모두 본토(本土)로 쇄환시키게 했었다. 병조 참판 유혁연(柳赫然)이 아뢰기를,
"북쪽 땅은 춥고 고통스러워 사람들이 모두 살기 싫어하기 때문에 민호(民戶)가 점점 공허한 지경에 이르고 있으니, 이제부터는 서민 가운데 함경 북도와 삼수(三水)·갑산(甲山) 등 변보(邊堡)에 이접(移接)하고 있는 자들을 당분간 쇄환하지 말아서 북쪽 땅을 채우는 발판으로 삼으소서."
하였는데, 상이 비국으로 하여금 상의하여 품처하게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관서와 북지의 백성들 가운데 서로 유리되어 있는 자들을 반드시 원적(原籍)으로 쇄환시키게 한 것은 그 의도가 범연한 것이 아니어서 고칠 수 없는 것입니다만, 근래 함경 북도의 육진(六鎭)과 함경 남도의 삼수·갑산에는 거처하는 백성이 적고 유리된 사람은 매우 많으니 변통시키는 방도가 없을 수 없습니다. 혁연의 말에 따라 10년을 기한으로 쇄환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5일 정사
약방이 상이 편찮다는 이유로 춘당대(春塘臺)에서의 관무재(觀武才)를 물려서 행할 것을 청하니, 상이 해조에 명하여 모화관에서 설행하고 대신으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좌참찬 이 떠난 것은 참으로 뜻밖의 일이어서 나는 매우 서운하게 여기고 있다. 이번에 떠나는 것을 갑자기 정지시킬 수 없었고 멀어진 마음을 선뜻 돌이킬 수 없었다. 이런 추운 계절을 당하여 쇠약한 사람이 서리를 밟고 찬바람을 쐬었으니, 병이 들까 참으로 우려스럽다. 어의(御醫) 최성임(崔聖任)을 보내어 약물을 가지고 중로에 뒤따라 가게 하고 또 양도의 감사에게 말을 지급하게 하라."
하였다.
집의 김만기 등이 아뢰기를,
"세도(世道)가 날로 투박해지고 인심이 갈수록 위험해져서 조정이 안정되지 않고 국체(國體)가 존엄해지지 않으니, 진실로 한심스럽습니다. 좌참찬 송준길은 과거 선조(先朝) 때부터 제우(際遇)의 융숭함이 천고에 뛰어났었으며 전하께서 임어하신 이래로 처음과 다름없이 은총을 베푼 것이 더욱 깊었습니다. 온천에서 정성스런 마음으로 예(禮)를 갖추어 초치했는데 성학(聖學)을 계도(啓導)하고 원자를 보도(輔導)함에 있어 그를 의지하는 중함이 과연 어떠했습니까. 그런데 영남(嶺南)의 고시관(考試官)이 시험을 빙자하여 책제(策題)를 내어 시사(試士)할 적에, 드러내어 공척함으로써 물러가는 것을 쉽게 여기는 마음으로 하여금 끝내 구차스럽게 머물지 못하게 하였으니, 성상의 섭섭한 마음과 조야(朝野)의 실망이 어떠하겠습니까. 힘써 성의를 극진히 하여 다시 올라오게 하는 것은 진실로 성명께 달려 있는 것입니다만, 시관(試官)의 처심(處心)·용의(用意)가 부박스럽고 위험스러워 참으로 통분하고 놀랍기 그지 없습니다. 경상 좌도의 별시(別試) 시관(試官)을 아울러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관학 유생 이기상(李箕相) 등이 소장을 올려 송준길이 떠나가는 것을 중지시키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한강을 건넜다는 말을 듣고부터 좌우의 손을 잃은 것만 같은 심정이다. 이제 그대들의 소장을 보니 나의 성례(誠禮)가 부족한 것이 부끄럽다."
하였다.
장령 김익렴도 송준길이 떠나는 것에 대하여 상소하기를,
"오늘날 유신이 이미 물러간 자는 나아오지 않으려 하고 이미 나온 자는 또 물러가 버리니 이것은 아무래도 전하께서 그들을 대하는 정성과 예절이 부족한 때문인 듯합니다. 양성하고 억제하는 일이 타당성을 잃어서 드디어 방관하는 무리들로 하여금 전하의 마음을 엿보아 조금도 꺼려하지 않고 비방하는 말을 심지어 책제(策題)에 언급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성상께서 미연에 방지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송준길이 지금까지 아뢴 것은 순전히 본심에서 우러난 것이었습니다마는, 조정에서 그 말을 채택할 즈음에 비록 사람마다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지 못했던 것이 있었으나 이것이 어찌 준길의 잘못이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장일(張佚)이 광무(光武)에게 간언한 일을 가지고 준길을 책망한다고 하는데 이것이 어찌 책임을 준길에게 돌릴 일이겠습니까. 유독 성상께서 처음부터 깊이 살피지 못하신 것이 애석합니다."
하니, 상이 너그럽게 답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상소하여, 면직하여 하늘의 견책에 보답하기를 청하니,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함경 감사 민정중이 치계하기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오례의(五禮儀)》·《대명률(大明律)》·《경국대전(經國大典)》 등의 책과 사서 삼경(四書三經)·《성리대전(性理大全)》·《통감(通鑑)》, 선유(先儒)의 문집(文集)을 다수 인출하여 보내서 이를 본도에 반포하여 본도의 사자(士子)들로 하여금 국조(國朝)의 전례(典禮)를 익혀 알게 하고 경전(經傳)을 읽어 본받을 줄 알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효자인 영천(榮川)의 사인(士人) 정도창(鄭道昌)에게 정려하였다. 감사 임의백(任義伯)의 청에 따른 것이다.
열부 윤씨(尹氏)·이씨(李氏)·임씨(任氏)의 문(門)에 정표하였다.
윤씨는 승지 오정원(吳挺垣)의 어미인데 젊은 나이에 남편이 죽자 칼로 스스로 목을 찔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스스로 유서(遺書)를 써서 질자(姪子)인 정원(挺垣)을 양자(養子)로 정할 것을 청하여 구고(舅姑)에게 고하고 나서 독약을 먹고 죽었다. 이씨는 장령 정식(鄭植)의 자부(子婦)이고 임씨는 학생(學生) 이준평(李浚平)의 아내인데 모두 자결하여 따라 죽었다. 송준길이 상의 앞에서 아울러 정표하여 그 절행(節行)을 드러낼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예조에 명하여 여문(閭門)에 정표하게 하였다.
10월 6일 무오
상이 정원에 비망기를 내려서 사관을 보내 좌참찬 송준길에게 전유하기를,
"아, 온천에서 재회(再會)함으로부터 4, 5년간 막혀있던 마음을 일체 풀었으니, 경이 나의 회포를 묵묵히 양지(諒知)한 줄을 내가 진실로 알고 있다. 경이 병이 나서 성환(成歡)에 머물러 있었는데 진실로 지성이 없었다면 어떻게 장마 더위를 무릅쓰고 서울까지 올 수 있었겠는가. 경이 서울로 들어온 뒤부터 사고(事故)와 질병(疾病)이 불행하게도 잇따르게 되어 경과 자주 접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보양하는 임무를 경에게 부탁한 다음부터 내가 경에게 기대하는 것이 매우 깊고 중하였지마는 추운 날씨에 출입하기 어려울 것으로 우려했었는데 오늘날 떠나갈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인심(人心)과 세도(世道)가 날로 비하해지고 있으니 근거없는 망령된 말을 개의할 것이 뭐 있겠는가. 내가 한스러운 것은 홀연히 감기를 만난 경과 서로 만나지 못한 지 며칠이 지났는데 갑자기 경의 유소(留疏)를 보게 되었다. 나의 생각에는 경이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어서 경이 가는 길을 오히려 중지시킬 수 있을 것으로 여겼으며 혹시 그렇지 못하더라도 경과 대면하여 석별의 정을 나누고 싶었다. 이윽고 한강을 건넜다는 말을 듣고나니 이 마음의 놀라움이 오랫동안 안정되지 않는다. 아, 이것이 어찌 경이 하고 싶어서 한 일이겠는가. 그저 나의 성의가 미진함을 한할 뿐이다.
어제 사관(史官)이 돌아왔으나 내가 기대하는 뜻에 부응하지 못했으므로 다시 사관을 보내어 거듭 나의 뜻을 고하게 한다. 경이 떠나는 것을 중지시키지는 못했다마는, 경이 탑전에서 한 말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니 날씨가 따뜻해지면 다시 만나기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한 말을 경은 잊지 말라. 아, 국세가 위태로운데 하늘의 노여움은 더욱 중첩되고 있으니 재야(在野)의 인사라 하더라도 모두 예(禮)를 갖추어 초치하려 하는데 더구나 이미 초치한 경이야 말할 것이 뭐 있겠는가. 날씨는 차고 눈보라가 몰아치는데 갈 길은 아득하기만 할 것이니, 이번 길에 잘 보존하여 가서 겨울 석 달 동안 조용히 조섭한 다음 봄에 만나자는 기약을 어기지 말기 바란다. 아, 경은 유념하라."
하였다. 사관을 보내어 준길에게 전유하게 했는데 가 주서 조사석(趙師錫)이 따라가 광주(廣州)의 사근천(沙斤川)에서 만나 유시(諭示)를 전하고 돌아왔다.
10월 7일 기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정지화(鄭知和)를 대사헌으로, 박세성(朴世城)을 형조 참의로 삼았다.
상이 정원에 비망기를 내리기를,
"내가 감기가 든 것이 이제 5, 6일이 지났다. 이렇게 재변을 만난 때를 당하여 삼사가 여러 날 청대했는데도 아직도 가부를 말할 수 없으니 참으로 미안하다. 삼사로 하여금 각기 소회를 써서 아뢰게 하라."
하였다.
영중추부사 이경석이 겨울에 천둥친 변으로 인하여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거듭 발생한 뇌변(雷變)을 특별히 만나게 되어 매우 두렵습니다. 이미 지난 재변에 대해서는 그 경계한 바가 《춘추》에 상세히 갖추어져 있습니다. 홍변(虹變)과 성변(星變), 가뭄으로 인한 재해와 홍수로 인한 재해 등 천지의 온갖 큰 변이는 모두 군사와 백성의 누적된 원망에 연유한 것입니다. 원망이 누적되면 여기(戾氣)가 응집됩니다. 여역과 괴질이 중외에 잇따라 발생하여 도처에서 요절 사망하는 자가 근년처럼 극심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아, 재변을 만나 죄수를 석방하면서 죄수에게 백금(白金)을 받는 것은 유독 무슨 의도입니까? 요즘 세상에서 말하는 수은(囚銀)이란 무엇입니까? 제사(諸司)의 관원 중에 물력이 조금 있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은화(銀貨)를 모아들이고 있으니 시장이 곤란을 겪고 물가가 오르는 것은 모두 여기에서 연유한 것으로 백성을 부유하게 한다는 도리에 있어서 역시 요원하지 않겠습니까.
상평창(常平倉)을 설치한 것은 신이 일찍이 청했던 것으로 본래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것인데, 지금은 반대로 백성을 위태롭게 하고 심지어 각읍에서 모곡을 걷는 숫자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제도의 모곡을 모두 호조에서 관리하고 있으니 이는 조그만 이득까지 남기지 않고 거두어 간다는 폐단에 가깝지 않습니까. 상평창의 모곡은 파기하고 거두지 말 것이며 각도의 모곡은 각읍의 수령에게 맡겨서 쇠잔한 고을을 돕게 하고 민역에 보충하게 함으로써 국가의 구례를 회복하고 왕정의 대체를 밝히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강원도는 토지가 척박하고 백성들이 가난하니 재해로 인한 세금을 면제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15세 이하의 어린 아이에게는 아울러 군포(軍布) 거두는 것을 정지하고 공주(公主)의 저택 및 궁인의 질병가(疾病家)를 사치스럽게 하지 말고 온천의 영선도 너무 규모가 크게 하지 말도록 하신다면 가까스로 완전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끝에는 송준길이 떠난 것을 애석하게 여기는 내용이었다. 상이 답하기를,
"인심이 험악하고 국사가 심히 어려운데 하늘의 노여움도 덩달아 발생하니 걱정스러운 내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지금 경의 차자의 내용을 보건대 나라를 걱정하는 경의 정성은 늙어갈수록 더욱 독실하니 참으로 감탄스럽다. 경계하여 일러준 일에 대해서는 마땅히 유념하도록 하겠고 또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집의 김만기, 지평 신명규 등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근년 이래 상께서 계속 편찮으시어 비록 날마다 경연을 열어 정신을 가다듬고 잘 다스려 보고 싶어도 억지로 할 수가 없었던 것은, 성상께서 근면하지 못한 잘못이 아니었다고 온 나라 사람들이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하늘이 굽어 살피시고 조종이 묵묵히 도와 주신 덕분에 온천에서 목욕하고 효험을 얻어 약을 쓰지 않아도 되는 경사를 보게 되자, 온 나라 사람이 기뻐서 춤을 추면서 다들 성명께서 분발 진작하여 성탕이 새벽부터 부지런하여 큰 공을 이룬 것을 법으로 삼고, 문왕이 해가 지도록 다른 일에 겨를하지 못했던 것을 스승으로 삼을 것으로 여겼었습니다. 그런데 어가가 돌아온 후에 여러 달 동안 귀를 기울이고 들어 보았지만 한 가지 일도 신하들을 위로하여 기쁘게 해주는 일은 없었습니다. 경연에 드물게 나아가는 것도 전일과 같고 처결할 일을 쌓아 놓은 것도 전일과 같아, 지체되고 답답한 것이 한결같이 전일의 구습을 답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하들이 기대하는 소망이 공허한 것으로 귀결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전하께서 안일한 습성을 버리지 못한 것인가 의심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어떻게 백성들에게 설명하시렵니까.
오늘날 내폐(內嬖)가 마음을 좀먹게 하는 일이 있는지에 대하여 신들이 알 수는 없습니다마는, 경연에 드물게 나아가시고 처결할 일을 쌓아놓는 것이 유독 편찮으실 때와 다를 바 없으니 신들이 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여항(閭港)에서 서로 전하는 말을 듣건대, 후원의 별당에 아름다운 곳이 많아서 정무를 살피는 여가에 수시로 궁인과 내시들을 데리고 가서 노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내전의 일은 비밀스러운 것이어서 전하는 말을 그대로 믿기도 어렵거니와 전하같이 현명하신 분이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마는, 혹시라도 그런 마음을 가지셨다면 완물(玩物)로 인한 상심(喪心)을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근본이 되는 심지(心地)를 이미 수립하여 쇄신하는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백관(百官)이 해체되고 모든 일이 무너지는 것을 괴이하게 여길 것도 없고 하늘이 노여워하는 것도 실로 당연한 것입니다.
초야에 묻혀 있는 현인의 경우 진퇴 문제는 의리에 입각하여 결정합니다. 근일 송준길이 조정에 나온 것이 비단 은례(恩禮)가 성대해서만은 아닙니다. 그가, 이이(李珥)가 선묘의 건강이 회복된 뒤에 부름을 받고 나아갔던 것으로 탑전에서 진달했던 것은 그 의도를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사에 머물러 있는 몇 달 동안 연석에 입시한 날은 5, 6일에 불과했으니 상께서 학업을 연마하는 날은 적고 그렇지 않은 날이 많은 걱정에 대하여 어떤 효과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상께서 어진이를 높이고 도를 즐기는 마음에 실상이 있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미 올라온 사람도 머물게 할 수 없다면 재야의 어진이들이 서둘러 오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아, 재변에 대응하는 도리로는 반드시 해내기 어려운 일을 하도록 노력해야만 조금이라도 하늘의 노여움을 만회할 수 있습니다. 그전 선조(先朝) 병신년에 자성(慈聖)께 잔치를 올리려고 날까지 받아 놓고 유사까지 정해 놓았었는데 하늘이 경계를 보임으로 인하여 즉시 중지하라고 명하였으니, 어찌 오늘날 마땅히 본받아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제왕의 효도는 일반 사람들의 효도와 같지 않습니다. 위로는 하늘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불쾌한 감정을 풀어 주어서 온 나라가 안정되게 하고 국가의 형세를 공고히 하는 것이 곧 큰 효도인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두 자전의 깊으신 마음으로 전하께 바라는 것은 오직 제왕의 큰 효도에 있을 것이니 이 점을 힘쓰시는 것이 옛사람이 이른바 ‘능히 그 뜻을 봉양한다.’는 경우일 것입니다. 거창한 음악을 연주하고 술잔을 들어 수(壽)를 올리는 의식은 결코 오늘날 행할 일이 아니니, 우선 정지했다가 행할 만한 날을 기다려 보는 것이 실로 재변에 대응하는 도리일 것입니다."
하고, 또 호남 산군(山郡)에 대동법(大同法)을 행하는 것이 불편하다는 것과 여러 궁가에서 떼어받은 것과 각 아문의 둔전(屯田)이 여러 대 동안 백성이 전해 오던 세업을 빼앗는 폐단에 대해 진달하면서 이를 일체 변통시켜 백성들의 원망을 풀게 해줄 것을 청하였다. 또 아뢰기를,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본원의 심지에 유의하여 경외하는 도리를 극진히 함으로써 성실하게 하기를 힘써 현사(賢士)들을 초청하고 폐단을 개혁하여 곤궁한 백성에게 혜택이 미치게 하소서. 그리하여 일마다 면려하고 생각마다 서로 도와서 항상 번쩍이는 번갯불과 천둥치는 소리를 귀와 눈에 접한 것처럼 한다면, 오늘날의 재변은 바로 우리 전하를 훌륭한 분으로 만드는 계제가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일전에 천둥 번개가 치는 변이 순음월(純陰月)에 발생했으므로 나의 마음이 놀라고 당황하여 마치 깊은 골짜기에 떨어진 것과 같았는데 불행하게도 병을 앓게 되어 아직 사대(賜對)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병을 앓는 가운데 마음이 참으로 편치 못하다. 차자의 내용은 은근하고도 간절하여 과궁(寡躬)을 경계시키기도 하고 시정(時政)을 논하기도 하였으니, 내가 마땅히 체념할 것은 물론 묘당과 의논하여 조처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10월 8일 경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이때 양사가 온천에 수행한 제신들에게 내린 상을 환수하라고 청하였는데, 대사간 이상진도 상소하여 ‘제신들의 상가에는 의당 구분이 있어야 합니다.’ 하여 그 의견이 간원의 계사와 같지 않았다. 그런데 사간 이유, 헌납 윤변, 정언 홍만형은 장관과 상회례(相會禮)를 행하지 않았다 하여 인피하지 않았다. 얼마 후에 물의가 이를 옳지 않게 여기자, 모두 인피하니, 상진도 동료들의 인혐은 자신의 상소에 연유한 것이라 하여 역시 인혐하였다. 응교 이민서 등이 처치하여 공의가 현재 확장되고 있는데 억지로 구별하는 것은 구차스러움을 면할 수 없다 하여, 상진은 체직하고 이유 등은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10월 9일 신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청(淸)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왔는데 태황태후(太皇太后)·황태후(皇太后)를 존숭한 것과 후(后)를 책봉한 일로 와서 고하였다.
사간 이유, 헌납 윤변, 정언 정재희·홍만형 등이 상차하여 시무 십조(時務十條)를 논하였다. 첫번째는 공사가 지체되는 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두 번째는 상전(賞典)이 참람하다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세 번째는 호남의 산군에서 작포(作布)하는 것이 불편하다는 것을 언급하고, 네 번째는 공천을 추쇄한 것이 태반이 허위라는 것을 언급하고, 다섯 번째는 구언을 하고도 실지로 채택한 일이 없는 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여섯 번째는 현인을 대우하는 데 끝까지 잘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일곱 번째는 신구(新舊) 조적곡 및 당해년도의 부세를 견감하여 백성들의 궁핍한 생활이 펴지도록 해줄 것을 청하였으며, 여덟 번째는 훈국의 병제(兵制)를 변통하여 어영청에서 번을 나누는 규례에 따라 늠료를 줄여 주기를 청하였으며, 아홉 번째와 열 번째는 양전(兩殿)에 잔치를 올리는 것을 우선 내년 봄까지 기다리고 행궁을 수리하는 일을 외람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진달하였는데, 상의 비답은 헌부에 답한 내용과 같았다.
10월 10일 임술
윤문거(尹文擧)를 대사간으로, 장선징(張善澂)을 병조 참지로, 김만기(金萬基)를 사인으로, 윤선거(尹宣擧)를 집의로 삼았다.
부제학 조복양, 응교 이민서, 교리 오두인, 수찬 홍만용·이정 등이 상차하기를,
"아, 지금이 어느 때입니까. 지금까지 흔하지 않은 천재와 물변이 달마다 발생하고 나타나지 않는 날이 없는데, 모두 위태로운 현상임을 경험하였으므로 사람들의 걱정하는 마음이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 천둥의 변괴는 또한 어찌 그리도 놀랍게 한단 말입니까. 초하루이자 입동절(立冬節)인 날을 당하여 천둥 소리가 여름철보다 심하여 마치 잘못을 범한 인사에 대해 서로 경계를 보여 주는 듯하니, 모르겠습니다마는 국가가 무슨 도리에 어긋난 잘못을 저질러 어느 정도의 재앙이 보이지도 않는 가운데 잠복해 있기에, 하늘이 정녕하게 경계를 보여 준 것이 여기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지금 재앙을 해소시킬 수 있는 방법은 결코 세세한 일과 말단의 일로 있는 그대로 따라서 대응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군신 상하가 크게 두려워하고 크게 분발하여, 위로는 하늘의 노여움에 답하고 아래로는 민심을 위로하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공구 수성하는 방법을 논한다면 역시 학문에 힘쓰고 덕화의 정치를 하도록 힘쓸 뿐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여러 해 동안 몸이 불편하셔서 경연에서의 강학을 드디어 전폐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가, 다행히 하늘이 묵묵히 도와주어서 하루 아침에 말끔히 나았습니다. 그리하여 법연을 다시 개최하고 유학자들이 다시 진출하여 성학을 강론하게 되니, 온 나라 백성들이 기뻐하며 바라는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경연에 나아가 강학하는 경우가 드물어서 두어 달 사이에 불과 5, 6일 정도였으니 비록 성상의 건강이 좋을 때가 항시 적어서 뜻대로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어찌 할 만하데 하지 않은 때가 없겠습니까. 비록 조섭할 때라도 내전에서 접견하여 자주 강론을 하게 하신다면 마음을 맑게 하고 병을 다스리는 데 역시 도움이 될 것입니다. 경연의 규례는 반드시 구애받을 것이 없으니 또한 어찌 변통하기가 어렵겠습니까. 소수의 천박한 기예도 전일하지 못하면 이루어내지 못하는 법입니다. 하물며 제왕이 덕에 나아가고 성스러움을 이루어내지 못하는 법입니다. 하물며 제왕이 덕에 나아가고 성스러움을 이룩하는 것이 어떤 공부인데 이렇게 하다가 말다가 해서야 성취되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임금으로 하여금 하루 사이에 현사와 대부를 접견하는 때는 많고 궁첩과 환시를 가까이할 때는 적게 해야 한다.’ 하였으니, 만약 이것으로 말한다면 전하께서 사대부를 접견하시는 때가 소원하다고 하겠습니다. 깊은 궁중에서 보내는 한가로운 때에 모르겠습니다마는 전하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임금의 마음을 공격하는 자는 많고 천리(天理)와 인욕(人慾)은 그 사이가 터럭 하나도 용납할 수 없을 만큼 엄밀하여서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서 존망(存亡)이 결정되고, 공경하느냐 태만히 하느냐에 따라서 길흉이 좌우되는데 두려워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심경》이란 책은 여러 성현들의 주요 취지를 채록해 놓은 것으로 위미정일(危微精一)이란 말은 만세토록 성학의 연원이 되고 존성주경(存誠主敬)의 공부는 또한 음미해 볼 만한 주요 골자로써 실마리를 찾아 극치점에 나아가는 방법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것이 없으며 자신을 수양하고 남을 다스리는 도리가 다 여기에 있습니다.
이는 곧 전하께서 현재 강론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진실로 전일한 뜻을 갖고서 깊이 음미해보고 실지로 그 힘을 쏟아서 쉬지 않고 용감하게 실천해 간다면 의리가 밝아져서 수많은 일을 대처하는 데 천덕(天德)과 왕도(王道)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총명 예지한 자질을 가지신 전하께서 성공(聖功)을 조금만 들이신다면 어찌 옛 성왕에 미치지 못하겠습니까. 자질의 아름다움은 한정이 있고 학문의 유익함은 무궁합니다. 그러나 세월은 잘도 가고 사업은 막중하니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유의하셔서 맹렬하게 살피소서.
아, 세도(世道)가 우활한지의 여부와 풍속(風俗)이 아름다운지의 여부는 오로지 임금의 호오(好惡)가 어떠한지에 달려 있으니 호오를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체로 호오란 교령(敎令)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동작에서 징험한 후에 사람들이 알게 됩니다. 마음 깊은 곳에 진실로 치우친 바가 있다면 귀신이 알고 신하들이 친화되는 법입니다. 하물며 색사(色辭)로 따르고 상벌(賞罰)을 주는 경우이겠습니까. 왕도를 시행하는 자의 동화시키는 권한은 하늘과 그 도가 같아서 표적을 위에서 세우면 국내가 자연히 교화되는 것이지 어찌 집집마다 일러주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겠습니까. 취사(取捨)가 정해지고 호오가 밝혀지면 세상이 모두 모여들어 감히 뜻을 넘어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부터 훌륭한 임금은 모두 먼저 호오를 제시하여 세상을 교도하고 상을 주어서 권장하고 형벌을 주어서 위엄을 보이며 하찮은 웃음까지도 신중을 기해왔습니다. 지금 성상께서 좋아하고 싫어하시는 것을 신들이 감히 알 수는 없습니다마는 대체로 처리하시는 일로 보면 전하께서 호오하시는 것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일찍이 간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상을 주지 않아서 불쾌한 기색을 문득 대각에 베푸시니 올바른 사람과 정직한 선비가 날로 조정을 떠나고 관록이나 유지하려고 아양떠는 신하가 먼저 총애를 받습니다. 백성을 보호하고 폐단을 개혁하려는 논의는 문득 저지를 당하고 세금을 각박하게 거두어 들이고 적은 것을 주는 것도 아끼는 논의를 하는 자들이 조정에 들붙어 있으니 중외의 기꺼이 추종하는 자는 모두 만만한 자들이며 강직한 사람들은 경계를 합니다. 호오(好惡)가 이와 같으므로 사기는 없어지고 충직한 말은 들을 수 없으며, 기강이 무너져서 세도가 날마다 없어지니 이렇게 나아가면 끝에 가서 그 재앙을 모면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군사(君師)의 책임을 맡으시어 세도(世道)의 권한을 주관하고 계시는데 개정하여 속히 구원할 일을 생각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전하께서 진실로 전에 좋아하셨던 것을 반성하시어 정직하고 신실하며 과감히 말하는 선비를 너무 폄하하지 말고 참언하고 아첨하는 사람을 너무 장려하지 말며 나약한 자를 노성(老成)이라 하여 그 위치를 높여주지 말며 용렬한 사람을 체를 얻었다 하여 예를 후하게 하지 마소서. 사사로운 길이 정치를 해친다는 것을 미워한다면 법으로 제지하여 그 조짐을 막을 것이며 환시들이 총애를 가탁하는 것을 미워한다면 위엄을 보여서 그 싹이 자라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온 나라의 신하들로 하여금 전하의 호오가 공사와 의리를 분간하고 왕직과 사정을 구별하는 데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면 한 세상을 고무하고 풍속을 전환시켜서 사기를 진작하고 다스림의 도를 넓히는 것을 다른 데에서 구하기를 기다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훌륭한 사람들을 진퇴시키는 문제가 문득 음과 양의 소장하는 기미가 되니 임금이 거조 용사에 대하여 마땅히 근면해야 할 일이 무엇이 이것보다 크겠습니까. 오늘날 인물 중에 2, 3명의 재야의 유신보다 특출한 사람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돌봐주고 예우하시어 먼데 있다고 간격을 두지 아니하셨으나 결국 다시 쓰지 않았으니 조야가 실망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다행히 이미 나왔던 신하가 지금 또 낭패를 당하고 물러가려 하는데, 더구나 나오지 아니한 두어 명의 신하가 나오기를 어찌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천재(天災)가 지극히 참담한 이때를 당하여 마땅히 협조를 구하고 맡기기를 도모할 자를 여기에서 말고는 다른 데에서 구할 수 없으니 또한 어찌 이미 물러가서 나오기를 어렵게 여긴다 하여 아예 어진 사람을 구하려는 뜻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전하의 성의가 어떠하냐에 달려 있습니다. 저 두어 신하가 모두 과연 세상을 잊어버린 자가 아니라면 어찌 지성을 보이는데도 마음을 바꾸려 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성교를 분명하게 내려서 성의를 다하여 부르되 반드시 이르러 오기를 기약하고서야 말게 하신다면 송나라 때 전에 재집(宰執)을 지낸 자에게 물었던 고사에 따라 먼저 실지로 상소하여 들려오게 한다면 반드시 처치할 만한 말이 있을 것이며 재변을 해소시키는데 도움이 될 만한 말이 있을 것입니다. 윤선거 등은 일찍이 대헌으로 부름을 받았던 자이니 아울러 일체로 물어보시기에 합당합니다.
왕자의 정치는 백성들을 편하게 다스리는 것보다 우선할 것이 없으니 소공이 백성들을 편하게 하는 것으로 하늘에 영원한 천명을 비는 근본으로 삼았고, 맹자가 왕도를 논한 것도 세금을 가볍게 하고 형벌을 줄이는 것뿐이었습니다. 오늘날을 주목해 보건대 백성들의 고초가 이미 심합니다. 십수 년 이래로 해마다 기근이 들어 떠돌며 살다가 죽어갈 뿐이고 조금이라도 곡식을 거둔 때가 한 해도 없습니다. 금년 봄 여름 사이에 풍년들 기대가 있었는데 초가을 이후로 큰 바람이 불고 음산한 비가 내림으로 해서 곡식이 손해를 입어 이삭이 되었다가 결실을 맺지 못하였으며 콩과 목면도 다 같이 흉년이 들었으니 백성의 불행이 어쩌면 이렇게 심하단 말입니까. 대체로 은혜를 베풀고 부세를 감면해 주는 정치를 서둘러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년 전세의 콩을 조정에서 현재 견감시켜 줄 것을 의논하고 있는데, 신들은 삼가 밭농사의 흉년이 이미 저와 같은데 콩으로 내는 세금 외에 다른 부역도 오히려 많으니 단지 콩세만 면해 주어서는 오히려 혜택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여깁니다.
평상시 급재(給災)의 규약이 밭에 미치지 아니한 것은 모맥(牟麥)과 두숙(豆叔)은 한 해에 두 번 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맥의 종자는 반드시 좋은 밭을 가려야 하는데 민간에는 좋은 밭은 적고 척박한 밭만 많으므로 재차 심을 밭이 3, 4분의 1도 못 됩니다. 지금 전에 없던 흉년을 당하여 상규를 그대로 지키기 위하여 전지에 대해 급재해 주지 아니하고 전적으로 흉년든 밭에서 요역을 내놓으라고 책망하는 것은 결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번에 외지에서 연분(年分)에 따라 이미 양안(量案)을 만들었으므로 밭마다 다시 검징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그러나 밭마다 흉년든 것이 모든 도가 같다면 비록 답험해보지 않더라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각읍의 전안을 토대로 하여 한전(旱田)은 제외하여 아울러 반을 급재해 준다면 두루 미치는 실질적인 혜택이 될 것입니다. 밭에서 거두어 들이는 것이 없으므로 해서 백성의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세입이 감축되어 경비에 흠결이 있는 것을 어찌 따질 수 있겠습니까. 콩의 적곡을 경기 지역은 이미 대납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아울러 모든 도로 하여금 일체 시행하도록 하는 것을 또한 그만둘 수 없습니다.
겨울에 적곡을 거두어 들이는 제도는 실로 백성들에게 있어서 큰일이므로 비록 보통 해에 있어서도 오히려 병으로 여기는데 금년에는 무논이 한전에 비추어 볼 때 조금 낫기는 하나 재해를 입어 결실을 하지 못한 것이 심합니다. 기읍의 가장 흉년이 든 곳은 가을과 겨울이 교차되는 시점에 이미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으므로 평상시처럼 거두어 들이기가 매우 어렵다고 합니다. 남한산성과 강화도 등의 허다한 적곡을 일시에 징수해 들인다면 백성들이 어떻게 감당해내겠습니까. 신축년 등의 연례에 의하여 수량을 적당량 감하여 주고 흉년들 때를 기다려 거두어 들인다면 곤궁한 백성들이 목숨을 보존하는 큰 일이 될 것입니다.
호서 산군에 대동미를 작목(作木)하라는 일에 대해서는 또한 맡은 관청의 수용에 관계되지만 목화(木花)가 해마다 귀해짐으로 인하여 면포의 가격이 현재 치솟고 있습니다. 해당 관청에서 모두 닷 되의 쌀로 1필의 값을 치고 있으나 민간에게는 실로 배(倍)을 징수하는 셈이어서 백성들이 반드시 원망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도신의 계사로 인하여 그 반을 감하여 주었으나 그 나머지 반도 수량이 심히 많습니다. 이미 그것이 백성들을 병들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모두 정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호남 좌도는 베값이 치솟아 호서와 비교할 바가 아니니 그곳 백성들이 원망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 가격을 헤아려 더 보태주는 일을 그만둘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전일에 간신(諫臣)이 갖가지 군보에 베를 진수하는 유속을 견감하고 각 아문에 비축해 둔 것으로 그 비용을 대신하기를 청하였는데 그 당시에 비록 시험하지는 못하였으나 오늘날 백성을 구제하는 큰 단서로서는 이것을 마땅히 가장 급하게 여겨야 합니다. 유사가 보통 때 비축해 두어야 하는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는 없으나 임금이 축적하는 본 뜻은 바로 재해를 대비한 것이니 이와 같은 규정 밖의 백성을 구제하는 일에 대해 신들은 성상께서 특별히 지시를 내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주목해 보건대, 오늘날 면포가 가장 희귀하여 백성들은 모두 헐벗고 있는데 병조에 비축해 둔 것이 그 수가 오히려 많으니 군포를 반으로 줄여주는 것이 불가할 것은 없으며 혹시라도 지급해 주지 않더라도 각 아문에서 충분히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체로 국가를 다스리는 도는 그 귀함이 균일한 데 있으니 공자가 말하기를, ‘적은 것을 걱정하지 말고 균일하지 못한 것을 걱정하라.’고 하였습니다. 옛날의 훌륭한 임금은 지대한 천하를 가지고도 그 정사를 하는 데 있어서는 모두 균평 정제하여 질서 정연한 법이 있었으니 더구나 천리나 되는 나라로 백성은 모두 순박하고 일은 모두 나의 일인데 그 법제를 한결같이 하지 아니하고 그 혜택을 균일하게 하지 아니한다면 이것이 어찌 왕정(王政)의 체제라 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근래에 균일하지 못한 일 두어 가지를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명께서는 속히 결단을 내려 국가의 제도를 바로 잡아서 백성들의 원망을 풀어 주소서.
첫번째로는 경기의 대동 수미에 관한 일입니다. 경기에는 갖가지 잡역(雜役)이 모이는 곳이므로 도리상 휼전을 넉넉히 주어야 하는 데도 수미를 도리어 호서 지방에 더하시니 이것이 균일하지 못한 것 중에서 큰 것입니다.
둘째는 갖가지 양민의 신역입니다. 대부분의 부역에 임하는 백성들이 후박이 있는 것이 아닌데, 혹은 서로 몇 배나 되어 힘겹고 쉬운 것이 현격하게 다르니 이것이 더욱 균일하지 못한 것 중에서 큰 것입니다.
셋째는 담양의 각사 노비를 추쇄할 때 허위로 기록된 자를 다행히도 연신의 진달로 인하여 분명하게 조사하여 탕척하라고 특별히 명했는데 다른 도에서는 그렇게 행할 수 없게 하였으니 이것이 더 균일하지 못한 것 중에 큰 것입니다.
넷째는 전라 감영(全羅監營)의 아병(牙兵)에게 베를 거둔 것을 도신이 계문하여 영원히 견감하여 수척한 군졸에게 혜택을 주었으니 이는 실로 백성을 얻는 훌륭한 정치입니다. 그러나 제도에 두루 통행될 수 없으니 이것이 또한 균일하지 못한 것 중에 큰 것입니다.
대체로 이 네 가지는 모두 병사와 백성의 이해와 법제의 득실에 관계되므로 이것을 균일하게 행하는 것은 특별히 전하께서 한번 들어서 행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쌀을 거두는 일에 관한 것은, 전일에 의논하는 자가 이미 그것이 불가하다고 진달하였는데 후일을 기다리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법의 폐해와 백성의 고초를 조정에서도 이미 통촉하셨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특별히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그 말수를 견감하여 호서 지방의 법규와 같이 하여서 근본이 되는 도를 보살펴 준다는 것을 보이소서.
양역(良役)에 관한 일은 대신이 이미 그 단서를 발명하여 반드시 호보(戶保)로 하여금 그 보(保)를 더 얻은 뒤에 베를 감하게 하려는 것입니다만, 신들은 삼가 보를 얻는 것이 베를 내는 것보다 더 어려운 듯하여, 이 혜택이 백성들에게 실행되는 것을 기대할 수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유사에게 분명한 하교를 내리시어 보수가 정해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먼저 균일하게 2필을 거두는 제도를 행하셔서, 논쟁을 벌이며 사물에 얽매이는 논의에 끌려가지 마소서. 이렇게 하면 백성들이 모두 피하지 아니할 것이며 뒤에는 반드시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추쇄한 후에 각읍에서 허위로 기록한 폐단에 관하여 말하는 자들이 더욱 많은데 가장 급히 서둘러 변통해야 될 일은 각영과 병영의 아병에게 베를 거두는 것이니 이것은 단지 해당 관서에서 사사로이 쓰는 것입니다. 양서(兩西) 영북(嶺北)의 경우에는 영속(營屬)이라고 칭하여 그 수가 더욱 많은데 병사라고 명목을 지어 각박하게 세금을 거두니 참으로 애통합니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특별히 분명한 전교를 내리셔서 제도의 감영·병영으로 하여금 한결같이 호남에서 이미 행한 일에 따라 소속 군사들의 수포를 영원히 면제하여서 훈련에 근면하게 하소서. 무릇 이 네 가지 일을 만약 흔쾌히 시행해 주신다면 국내의 원망을 태반은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백성을 병들게 하고 재정을 손상시키는 원인은 모두 법제가 좋지 못한 데 있는데 그중에서 공안(貢案)의 폐단에 대해서는 말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공안이 불편한 단서가 대개 네 가지가 있습니다. 공안을 상세하게 정한 것은 처음 연산조에 있었는데 대대로 인용만 하고 수정을 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중을 가리지 않아 교란 외잡한 우려가 있으니 그 폐단이 하나이며, 물산(物産)의 귀천은 모두 풍토에 적합한 것이 있는데 각읍에 분정(分定)한 것은 대부분 토산품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비록 미세한 물품일지라도 진실로 생산되지 않는 곳에서는 백성들이 10배의 비용을 내어야 하니 그 폐단이 둘이며, 한 종류의 물건을 각읍에 분배하면 한 읍의 곡물은 대부분 수십 가지에 이르러서 명색(名色)이 이미 다르며 작목(作木)과 인정(人情)에 관한 제반 비용이 있게 되니 그 폐단이 셋이며, 계묘년 양전(量田)할 때에 겨우 병난을 지냈으므로 당시 전결에 따라 공안을 결정하였습니다. 그 후에 전결을 개량하여 계묘년과는 판이하게 달랐는데도 공안을 그전대로 하여 고치지 않았으므로, 혹은 전결은 많은데 곡물이 적고 혹은 전결은 적은데 곡물이 많아서 경중과 고헐(苦歇)이 현저하게 다르니 그 폐단이 넷입니다.
오늘날 민력을 손상시키는 것이 다 여기에 있으니 지금 성명께서 만약 변통하고자 하신다면 대단하게 고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백성의 노력은 아마 10분의 5, 6은 감할 수 있를 것입니다. 진실로 일을 맡은 신하로 하여금 위로 상상께서 백성을 돌보시는 지극한 뜻을 받들게 하여 오늘날 공안에 실려 있는 대강의 수효를 도회(都會)에 통산하여 대단히 균일하게 하고, 그 토산의 유무에 따라 그 명색을 정하고, 각읍의 물력이 풍부한지를 참작하여 그 다과를 등분한 다음 한 읍이 바치는 곡물로 하여금 두서너 가지 물종에 지나지 않게 하여, 동쪽에 있는 물건을 옮겨 서쪽에 모이게 하소서. 이렇듯 작은 것을 모우고 큰 것을 나누는 것이 각각 조리가 있어서 서로 섞이지 않게 한다면 실로 행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매우 큰 은혜가 될 것입니다. 더구나 이 일은 선대왕이 일찍이 유의하여 행하려 했던 일이니 그때에 이미 성상의 재가를 받아 강정한 절목을 바야흐로 실행하려던 참이었는데, 백성들이 복이 없어 드디어 정지하고 말았던 것이 문득 오늘날에 유한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지금 성명께서 과감하게 행하신다면 어찌 선왕의 뜻을 계승하고, 사업을 이어간다는 의리에 빛이 나지 않겠습니까.
조정의 거조는 상세하게 그 처음을 살피지 아니하여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미 발표한 모든 교령(敎令)을 중외에 반포한 후에는 또한 임의대로 폐지해서 큰 성과를 이룰 수 없게 해서도 안 됩니다. 근세 이래로 조정이 엄격하지 못하여 기강이 크게 무너져서 품달하여 윤허받은 일이 내외에 반포되면 유사(有司)의 신하와 주현(州縣)의 아전이 세월만 보내면서 실지로 이루어 놓은 정사가 없으니 진실로 한심한 일입니다.
신들이 삼가 두려워하는 것은 이와 같이 계속 한다면 조정이 비록 날마다 훌륭한 법과 아름다운 정치를 시행한다 하더라도 난리를 다스리는 수에는 도움이 안 될 뿐만 아니라 임금의 명령은 날마다 가벼워져서 국가의 체모가 크게 무너질 것이니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성명께 바라고자 하는 것은 정원 및 비변사와 육조로 하여금 전후로 반포 시행한 갖가지 조건들을 상고해내서 중외의 크고 작은 일을 물론하고 일제히 추론하여 안으로는 유사를 엄하게 단속해서 착실히 봉행하게 하되, 법을 집행하는 관리로 하여금 그 태만한 습성을 규찰하게 하고 밖으로는 관찰사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여 고과(考課)하게 하되, 자주 어사를 파견하여 행실을 안찰하고 일을 다스려서 실추시키지 않도록 하소서. 이것이 옛날 성왕이 자주 살펴서 그 공을 이룬다는 뜻입니다.
근일에 여러 신하들에게 내린 상전(賞典)에 대하여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불가하다고 말합니다. 양사의 논열도 이미 다하였는데 성명께서는 오히려 윤허하지 않으시니 신들은 삼가 의혹을 느낍니다. 신들이 일찍이 듣건대, 국조의 열성께서는 상전을 가장 중하게 여겨서 이순신(李舜臣)의 한산 대첩(閑山大捷)과 권율(權慄)의 행주 대첩(幸州大捷)에 대해서도 단지 1급만을 더해주었다고 하는데 지금의 여러 신하들은 단지 한 때에 수행했을 뿐입니다. 유직(留直)과 약방(藥房)도 서울에 남아 있는 여러 신하들과 일반인데 어찌 그 사이에 구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상을 알맞게 주지 않는 데에서 뭇 의심이 발생되는 것이니 거리에 나도는 말을 돌아보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양사의 청을 흔쾌히 따르셔서 일제히 환수하소서.
전일에 이무(李堥)가 죄를 받은 일에 대하여 신하들은 모두 미안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지금 세월이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전후하여 죄를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다 해를 넘기지 아니하고 서용되었는데 이무만 유독 아직도 죄적에 있으니 어찌 언로(言路)의 방해와 조정에 누가 되는 것으로 가장 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당시 연신인 어떤 사람은 이무가 실성했다고 말하는 자도 있었습니다만, 이에 앞서 이러한 명목으로 말하는 자에게 타격을 준 일은 없었습니다. 말이 재상에 미쳤다 하여 처벌을 심하게 하면 위로는 국체에 관계되고 또 뒤 폐단을 열어 주게 됩니다. 사람이 하찮다 하여 소홀하게 여겨서는 아니됩니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흔쾌히 은유(恩宥)를 내려서 언로를 열어 주소서.
옥(獄)이란 백성의 대명(大命)입니다. 근래에 옥을 다스리는 체재가 원정(原情)을 핵실하는 것으로써 일을 삼지 아니하고, 단지 형벌과 심문으로 일을 삼고 있으므로 내외의 죄수가 대부분 지체되는 것에 대한 우려를 하고 있으니, 이는 장석지(張釋之)가 이른바 ‘한갖 형식에만 치우치고 측은하게 여기는 실상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조정에서 옥을 맡은 관리를 잘 가려서 뽑는다면 국가의 대체를 진실로 사람에게 맡기고 법에 맡기지 아니하여 삼가고 불쌍하게 여기는 뜻이 항상 법조문을 벗어나 행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 후에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이 아래에까지 미치게 될 것이니,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유폐의 실상을 특별히 살피셔서 유사에게 밝은 하교를 내리시고 비록 전지를 맡은 옥사라 하더라도 의심스럽거나 원한이 개입된 상태라면 형벌을 청하는 일반적인 예에 구애받지 말고 주달하여 심리하게 하소서. 외방인 경우에 대옥(大獄)과 대송(大訟)에 대하여 감사와 수령이 늑장을 부리고 소결(疏決)하지 아니한 채로 교묘하게 비방만을 피하고 있어, 심지어 10여 년을 지낸 자도 있습니다.
패선(敗船) 조군(漕軍)인 경우엔 그 친족들이 모두 신문을 받고 징책을 받는 자들이 심히 많으니 그 사이에 원한이 넘치되 다시 분석되지 못한 자가 전후로 얼마나 되겠습니까. 해마다 감옥에서 늙어가니 원망의 기운이 충색되어 천하를 해칠 만합니다. 국가에 비축해 놓은 곡식이 비록 아까우나 백성들의 목숨이 더욱 중하니 때에 미쳐 재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명께서는 각도의 도신에게 엄한 분부를 내리시어 기간을 정하여서 소결한 후에 조정에 알리도록 하여, 죄가 있는 자는 속히 처단하고 죄가 없는 자는 신원(伸冤)하게 하소서.
그리고 외지의 관리들이 모두 혹독하고 급박한 것으로 일삼고 심지어 무장(武將)까지도 엄하고 사나운 것으로 일을 삼아 대부분 형벌을 함부로 내림으로 해서 인명을 거듭 손상시키고 있습니다. 그전부터 조정에서 전지를 내려 엄금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도 다시 두려워하지 않고 있으니, 그 폐단이 더욱 심합니다. 마땅히 각도 수령으로 법외에 대장(大杖)을 남용한 자와 병사·수사의 영장이 군법이 아닌데도 망령스레 곤장을 사용한 자와 기타 사명의 법을 어기고 형벌을 가한 자를 신칙하여 더욱 금지시키고 이것을 범한 자는 죄를 주어서 국가에서 형벌을 삼간다는 뜻을 보이소서.
인심이 흉하여 날로 비하되고 선비들은 장수(藏修)하는 행실이 부족하며 고을에는 효제의 풍속이 부족합니다. 의식(衣食)도 부족한데 기한(飢寒)이 몸에 절실하여 인심이 야박해지는 것이 갈수록 심하니 풍속을 해치는 경우를 한두 마디로 다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강상(綱常)의 변이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국가가 합당한 법으로 인도하지 않기 때문이니 백성으로 하여금 마음을 돌려 선에 나아가게 할 수가 없습니다.
입교(立敎)를 밝히는 조항은 백성을 교화시키고 풍속을 이루게 하는 것으로 이것이야말로 오늘날의 가장 급선무입니다. 전번에 이유태가 상소하여 향약을 시행하자고 하였는데 논의한 본말을 살펴보면 진실로 살펴볼 만한 것이 있으니,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깊이 유념하시고 속히 묘당으로 하여금 절목(節目)을 강구하여 잘 논의해서 시행하도록 하소서.
또 생각건대, 전하께서 위로 양궁(兩宮)을 모시고서 바야흐로 한 나라의 봉양을 융성하게 하여 이번에 잔치를 베풀려 하시니 실로 이것이 지극한 정에서 발로된 것이나, 흉년이 들어 하늘이 현재 노여움을 발하고 있으니 이러한 때에 풍악을 연주하고 잔치하는 도구를 베푸는 것은 진실로 두려움을 갖는 뜻이 아닙니다. 제왕(帝王)의 효도는 나라를 보호하고 백성을 편하게 하는 데 있으니 어찌 예절을 갖추고 물건을 갖추는 그런 사이에 있겠습니까. 신하들이 불안해 하는 바는 바로 하늘의 뜻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우선 잔치 베푸는 일을 미루고 다시 형편을 봐서 행하게 하소서. 이것이 실로 하늘의 경계를 삼가는 한 가지 일입니다.
아, 예로부터 부르지 아니하였는데 스스로 찾아오는 재앙은 있지 않았으며, 이미 나타났는데 상응하는 변고가 발생하지 않는 경우도 없었습니다. 저번에 혜성이 나타난 것은 변괴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 그 답응이 더딜수록 그 화는 더욱 큰 것이니 두려워할 일이 무엇이 이것보다 더하겠습니까. 처음 나타났을 때를 당하여 상하의 두려워하는 마음이 남아있는 재앙에 견줄 바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지난 뒤에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날마다 풀어지고 유유범범하게 서로 잊고마니 이렇게 한다면 국사를 어느 때에 할 수 있으며, 하늘의 재변을 어느 때에 누그러 뜨릴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 꾸지람은 하늘의 아껴주는 마음이 간절하다는 것을 더욱 알 수 있는 데도 대응하는 도리는 실지로 한 일이 없습니다.
대신이 면직을 청하는 상소도 규례에 따라 형식만 갖추는 데에 불과하며 전하께서 경계하는 정성도 미진한 바가 있습니다. 삼사의 제신도 뵙기를 청하곤 하나 끝내 최소한의 자리도 허락해주지 않았습니다. 군신 부자의 사이에 비록 편찮으시다 하더라도 또한 와내(臥內)에서 소환하는 일이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이렇게 세월을 보낸다면 다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신들이 더욱 안타까워 하는 바입니다.
진실로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큰 뜻을 진작하시어 스스로 책임지고 이미 지나간 잘못을 깊이 징계하셔서 전일에 하던 것처럼 하지 마소서. 천도가 높고 먼 곳에 있다고 하여 경외하는 마음을 늦추지 마시고 항상 상제(上帝)가 실지로 임한 것처럼 하소서. 백성의 일을 늦추어도 된다고 하여 보휼(保恤)하는 생각을 소홀히 하지 마시고 어린 아이를 가슴에 품고 있듯이 하소서. 유신(儒臣)이 이미 떠났다고 하여 학문에 힘쓰는 정성을 게을리하지 마시고 국가의 형세를 회복하기 어렵다고 하여 큰 일을 할 뜻을 철회하지 마소서. 이것으로써 신하와 백공을 책려하고 이것으로써 사물에 대응한다면 그 덕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닦아질 것이며 백성들은 기뻐하고 하늘의 뜻도 돌이킬 수 있을 것입니다.
신들은 모두 용렬한 자들로서 경악에 대죄하고 있으므로 재해의 참담함을 목격하고 두려운 마음을 견디지 못하여 어리석은 생각을 사대(賜對)하는 날에 진달하고자 하였으나 당폐(堂陛)가 지척인데도 나아가 뵙지를 못하였습니다. 이에 성상의 하교를 받들어 갑작스럽게 상차하게 되었으므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 말씀드리지 못하였습니다. 만일 성상의 건강이 회복되신 뒤에 직접 앞에 나아가서 그 말을 마치게 한다면 혹시라도 만에 하나 보탬이 될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명께서 신들이 둔하다고 하여 그 말을 폐기하지 않으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의 답이 양사에 내린 것과 같았다. 그 뒤에 대신을 인견할 때에 차자의 내용을 품정하니, 비록 한두 가지 채택하라는 명은 있었으나 다 실질적인 일은 없었다.
10월 11일 계해
헌납 윤변이, 대사간 윤문거가 바로 자기의 숙부라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0월 13일 을축
최일(崔逸)을 헌납으로, 이정(李程)을 부응교로 삼았다.
우의정 허적이 병 때문에 사면시켜 줄 것을 청하니, 상이 사퇴하지 말고 조리하라고 답하고, 내의를 보내어 병을 간호하게 하였다.
10월 14일 병인
오정일(吳挺一)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관무재(觀武才)의 입격자(入格者)를 모두 가자하였고 그 나머지 합격된 사람에게도 차등있게 상을 내렸다.
10월 18일 경오
장령 민여로(閔汝老)가 재이(災異) 때문에 상소하여 성궁(聖躬)의 궐실(闕失)·시정(時政)의 하자, 관사(官司)에서 심각하고 급박하게 하는 폐해, 백성들이 굶주리는 걱정, 군사들이 부역에 응하는 고통, 수령이 적격자가 아닌 데서 생기는 폐단을 지적하여 진달하고 나서 호남 대동미(大同米)의 두수(斗數)를 감하여 부역(賦役)을 고르게 해줄 것을 청하니, 상이 은혜로운 비답을 내리고 그 소장을 비국에 내렸으나 시행된 것이 없었다.
10월 19일 신미
예조 좌랑을 보내어 여조(麗朝)의 왕릉(王陵)을 간심(看審)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여조의 여러 왕릉이 투장(偸葬)당하고 집터가 되고 전지(田地)로 경작되는 걱정이 많이 있었으므로 3년에 한 차례씩 순심(巡審)하기로 정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예조에서 관원을 보내어 적간하기를 청한 것이다.
이에 앞서 좌의정 홍명하가 아뢰기를,
"북도에 있는 각릉의 봉심을 근년에 폐각하였으므로 일이 매우 미안스럽게 되었으니, 금년부터는 항식(恒式)을 정하소서."
하니, 상이 5년에 한 번씩 두루 봉심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금년에는 추운 계절이 이미 이르렀으니 내년부터 시작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오는 11월 15일은 중종 대왕(中宗大王)의 기신제(忌辰祭)인데 동지(冬至)와 서로 겹쳤습니다. 기제와 절제는 그 경중에 차이가 있는 것이니 기신제만 행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진연(進宴)을 내년 봄으로 물리고 진연청을 우선 파하게 하였으며 서울로 올라온 기녀(妓女)들을 파견(罷遣)하게 하였다. 재이 때문에 삼사의 말을 따른 것이다.
10월 20일 임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화성(火星)이 태미 동원(太微東垣)으로 들어갔다.
장령 김익렴이 아뢰기를,
"형조 판서 오정일(吳挺一)은 일찍이 본직에 제배되었을 적에 옥송(獄訟)을 결단하는 재능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말도 또한 많았습니다. 때문에 이제 다시 임용됨에 이르러서는 물의가 비등하고 있습니다. 신이 오늘 본원의 회좌(會坐)에서 체직을 논하자고 발언했더니 장관이 곤란하게 여기면서 버티었습니다. 신의 말을 그르게 여기지는 않았으므로 신 또한 장관에게 미더움을 받지 못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즉시 신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으니 신이 어찌 그대로 무릅쓰고 있겠습니까."
하고,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평안 감사 이정영(李正英)이 치계하기를,
"본도의 강변에 있는 각 진보(鎭堡)의 사졸(士卒) 수효가 적으니, 본도에 정배된 죄인을 각 진보에 나누어 배정하게 하고 형조와 각도의 죄인도 반을 나누어 정배시킴으로써 변지(邊地)를 채우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10월 21일 계유
대사헌 정지화가 아뢰기를,
"어제 본부의 회좌 때 동료가 형조 판서 오정일에 대해 논하려고 했습니다만, 신의 의견은 정일이 일찍이 본직에 차임되어 거의 1년 가까이 있었고 오래도록 사송(詞訟)을 처리하는 자리에 있노라면 어찌 실정을 벗어난 비난이 없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겠으며, 더구나 정경(正卿)을 논핵하는 것은 일반 관리들과는 구분이 있는 것이어서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신이 반복하여 헤아리다가 끝내 구차스럽게 동조하지 않았는데 동료도 주장을 고수하지 않은 채 마치 전계(前啓) 때문에 먼저 일어나서 예궐(詣闕)하는 사람처럼 하였습니다. 이보(吏報)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인피했다는 것을 알았는데 이에 그르다고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이유를 삼았으니 신은 삼가 의아스럽게 여깁니다. 신이 잘못된 의견을 돌리지 않고 고집함으로써 이런 시끄러운 단서를 야기시켰으니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오정일에게 사랑하는 기첩(妓妾)이 있었는데 전에 형조 판서에 제배되었을 적에 그 기첩이 뇌물을 받아들이고 재물을 요구했다는 비방이 있었기 때문에 김익렴이 탄핵하려고 했던 것이다.
정원에 하교하였다.
"어제 장령 김익렴의 피사를 살펴보건대, 오로지 사의(私意)에 의거한 것으로 그 태도가 아름답지 못했으나, 그 내용에 장관이 그르게 여기지 않았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우선 헌장(憲長)이 인피하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이제 헌장의 피사를 살펴보건대 익렴의 말과 크게 상반되니 참으로 놀랍기 그지없다. 아, 오늘날의 인심은 공심(公心)이 사심(私心)을 이겨내지 못하여 은혜와 원망에 있어 피차의 간격이 있고 비호하고 공척함에 있어 동이(同異)의 구별이 있는 탓으로 은연중 사의(私意)를 쓰고 몰래 간사한 일을 행하니, 이는 자못 정인(正人)의 태도가 아닌 것이어서 진실로 매우 가증스러운 일이다. 익렴을 체차시키라."
정원이 아뢰기를,
"김익렴이 형조 판서를 탄핵하려 한 것은 들은 얘기에 따라 서로 규계(規戒)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몰래 간사한 일을 행한다는 등의 하교로 지척하였으니, 이는 성조에서 대관을 예(禮)로 대우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대관의 피사는 의당 공의(公議)에 부쳐 처치가 어떠한가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요, 곧바로 호오(好惡)를 보여, 보고 듣는 이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는 조처입니다. 익렴을 체차시키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 계사를 살펴보건대 극력 두둔하는 정상이 진실로 놀랍기 그지없다. 습속을 변화시키기 어려운 것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하였다. 정원이 다시 아뢰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옥당이 처치하여, 헌부가 반복하여 어렵게 여김으로 해서 대관의 체면에 흠이 된다는 이유로 정지화를 체직시키라고 청하였다. 또 아뢰기를,
"대간은 한 때 규핵하는 책임을 맡고 있으므로 모든 자거(刺擧)024) 에 대해서는 그 시비(是非)와 종위(從違)를 일체 공의에 부치는 법이고 임금이 말을 듣는 도리는 진실로 공심(公心)으로 듣고 순리로 응해야 합니다. 진실로 그 형적(形迹)을 의심하여 느닷없이 최절을 가한다면 언로가 막히고 대직(臺職)이 광폐(曠廢)될 것이니, 이는 성조의 복이 아닙니다.
형조 판서 오정일은 전에 본직에 차임되었을 적에 이미 물의가 있었으니, 대신(臺臣)이 논집하려 하는 것은 바로 그 직분일 따름입니다. 그런데 장관이 범연한 말로 어렵게 여기면서 버틴 것은 끝내 구차스러움을 면할 수 없는 처사입니다. 그 시비는 실로 분변하기 어려운 것이 아닌데도 성명께서 이에 피차(彼此)와 동이(同異)로 의심하시어 아름답지 못하다느니 몰래 간사한 짓을 한다느니 하는 등등의 말로 하교하시고 특별히 체직시키셨습니다. 이것이 어찌 성명께서 대관을 대우하는 도리이겠습니까. 대각의 기상이 꺾이어 보고 듣는 사람들이 답답하게 여기고 있으니, 김익렴을 체차시키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처치한 일은 따랐다.
10월 22일 갑술
정언 홍만형이 아뢰기를,
"김익렴은 이미 말해야 할 지위에 있으므로 들은 대로 논핵한 것은 본디 직책상 당연한 것인데 전하께서는 너무 갑자기 의심하시고 너무 지나치게 공척하여 오로지 사의(私意)를 썼다고 단정하고 보호하고 공척함에 있어 이동(異同)이 있었다고 지목하면서 몰래 간사한 짓을 했다는 등등의 말을 가하였으니, 예(禮)로 대우해야 한다는 도리에 부족한 흠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대관에 대한 처치는 한결같이 공의(公議)에 맡기는 것이 본래 해오던 고사(故事)인데 지금 전하께서는 처치가 어떠한가를 기다리지도 않고서 곧바로 먼저 특별히 체직시켰으니, 중도(中道)를 어긴 데로 귀결됨을 면할 수 없습니다. 익렴을 체차시키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동지사 김좌명(金佐明), 부사 홍처후(洪處厚), 서장관 이경과(李慶果)가 청 나라에 갔다.
헌납 최일(崔逸)이 소장을 올려 변이(變異) 때문에 경계하는 말을 하고, 또 아뢰기를,
"임금이 현사(賢士)를 구하는 것은 천위(天位)를 함께 하여 천직을 다스리기 위한 것입니다. 지난번 이유태가 부름을 받고 서울에 들어와서 올린 소장의 내용은 모두 시행해야 할 것들이었는데 반년을 머물러 있는 동안 마침내 하나도 시행한 것이 없어 결국은 그만두고 돌아가게 하고 말았습니다. 금년에 송준길이 조정으로 나왔을 적에 접대한 예는 비록 융중(隆重)하였다고는 하나 겸허한 자세로 마음을 기울여 그의 간곡한 진언을 들어주고 지성으로 자문(諮問)하여 주획(籌畫)을 구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저사(邸舍)에 머문 지 5개월 만에 호연(浩然)히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진실로 이렇게 한다면 비록 현사(賢士)들을 뒤를 이어 이르게 하더라도 과연 무슨 유익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송시열이 오지 않는 것도 이런 것을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니 시골에서 학덕(學德)을 쌓은 현사들이 그 누가 허례를 위하여 달려오겠습니까.
원컨대, 전하께서는 스스로 변변치 못하다고 여기지 마시고 원대한 마음을 지니시어 참으로 제요(帝堯)가 큰 덕을 잘 밝혀 백성들의 덕도 고루 밝아진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삼으신다면 자신의 덕을 연마하는 도리에 있어 스스로 부족하게 여기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은 물론이고 백성들을 새롭게 진작시키는 것도 오늘날처럼 고식적인 것이 없게 될 것이며, 문왕(文王)이 밥 먹을 겨를도 없이 부지런하고 주공(周公)이 앉아서 날이 밝기를 기다린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삼으신다면 출치(出治)의 근본에 대해 조금도 게으름을 용납하지 않을 것은 물론 만기(萬機)에 수응(酬應)하는 것이 오늘날처럼 지체되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당요(唐堯)가 흙으로 계단을 만들고 띠풀로 지붕을 덮은 것과 한 문제(漢文帝)가 노대(露臺)를 짓지 않은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삼으신다면 궁실(宮室)을 웅장하게 짓는 일과 대사(臺榭)를 꾸며 다듬는 일에 대해 반드시 성념(聖念)이 미치지 않게 될 것이며, 하우(夏禹)가 거친 옷을 입고 거친 음식을 먹은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삼으신다면 상방(尙方)의 진기한 완호품과 팔로(八路)의 공헌(貢獻)을 참작하여 감손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문왕이 강공(康功)025) 과 전공(田功)026) 을 성취시킨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삼는다면 백성을 평안하게 하는 방도와 백성을 무양(撫養)하는 정치에 대해 조금도 완만히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왕자(王者)는 사사로이 하는 것이 없어서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을 똑같게 여긴다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삼는다면 의당 내탕(內帑)의 물품을 해부(該部)로 귀속시키게 하고 내옥(內獄)의 죄수를 유사(有司)에게 맡길 것입니다. 인의(仁義)가 있을 뿐인데 무엇 때문에 반드시 이(利)를 말하느냐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삼는다면 각 아문에서 재화(財貨)를 증식시키고 이(利)를 추구하는 일을 의당 즉시 금단시켜야 하고 각도의 둔전도 일체 아울러 혁파해야 하는 것이며, 자신의 의견을 버리고 남의 좋은 의견을 따르며 간하는 말을 어기지 않고 잘 따르는 것으로 마음을 삼는다면 대각에서 논한 것에 대해 의당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아름다움이 있을 것입니다.
대저 신이 아뢴 것은 모두 별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만 진실로 잘 행한다면 경성(警省)하는 방도에 있어 반드시 크게 유익할 것은 물론,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의 일에 부지런히 힘쓰는 요점도 진실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진계(進戒)함에 있어 은근하고 간절한 뜻이 글 밖에 넘쳐 흐르니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을 알 수 있다. 내가 마땅히 잊지 않고 유념하여 행하겠다."
하였다.
10월 23일 을해
박장원(朴長遠)을 대사헌으로, 정치화(鄭致和)를 판윤으로 삼았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제신들을 인견하였다. 응교 이민서, 수찬 홍만용도 뵙기를 청하고 입시하였다. 삼공(三公)이 모두 재이 때문에 면직시켜 줄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삼사의 차자에 대해 오늘 품달하여 논의하고자 합니다."
하니, 상이 차례로 나아와서 아뢰게 하였다. 태화가 먼저 옥당의 차자에 대해 주달하고, 조목에 따라 부첨(付籤)하여 아뢰기를,
"이 한 조항은 송나라의 고사에 의하여 초야에 있는 유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일입니다. 청컨대 정원(政院)으로 하여금 여기에 의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재해를 입은 전지에 대하여 세금을 면제해 줄 것을 청한 일에 대하여 태화 등이 아뢰기를,
"한전의 재실(災實)을 조사하기가 쉽지 않은데 평안도 한전의 경우는 더욱 부실하니 부세로 받는 콩을 전부 감면해 주거나 혹 반을 감해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평안도에서 부세로 내는 콩은 경기의 규례에 의하여 전부 감면해 주고 다른 도의 경우는 반을 감해 주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적곡을 대납하는 일에 이르러서 조복양이 아뢰기를,
"경기는 이미 대봉하게 했으니 제도도 일체로 대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경기의 관조(官糶)를 연한을 물리고 감하여 받아들이게 하라는 일에 이르러서 상이 이르기를,
"우선 앞으로 더 살펴보고서 조처해도 된다."
하였다. 호서 산군(山郡)의 쌀을 더 작목(作木)하지 말기를 청한 일에 이르러서 정태화가 아뢰기를,
"훈국의 포보(砲保)가 응당 상납해야 할 3필 가운데 1필을 감하게 하고 병조에 비축되어 있는 것으로 보충하여 지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경기의 대동미를 호서에 의거 10두(斗)로 하기를 청한 일에 이르러서는 상이 이르기를,
"이는 결단코 고칠 수 없다."
하였다. 각사 노비의 신공은 일제히 탕척시키자는 일에 이르러 정치화가 아뢰기를,
"만일 헛되이 기록한 것이라고 핑계대어 전수(全數) 탕척시킨다면 팔도의 공천(公賤)을 사세상 모두 잃게 될 것이니 실로 변통시키기가 곤란합니다."
하고, 전라 감영의 아병(牙兵)에게 군포를 거두지 말고 항상 연습을 하게 하자는 일에 이르러서 정태화가 아뢰기를,
"제도에 분부하여 일체 똑같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공안(貢案)을 개정하자고 청한 일에 이르러서 여러 대신들이 모두 개정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상전(賞典)을 환수하기를 청한 일에 이르러서 상이 처리하지 않았다. 이무를 풀어주자고 청한 일에 이르러서 상이 석방하여 성문 밖으로 축출하라고 명하고, 내외의 형옥을 상례(常例)에 구애받지 말고 주달하기를 허락해 줄 것을 청한 일에 이르러서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을 상규로 삼을 수 없다."
하였다. 외방의 죄수를 소결하는 일과 남용한 형벌을 금단시키자는 일에 이르러서는 상이 아울러 따랐다. 향약을 시행하자고 청한 일에 이르러서 여러 대신들이 모두 시행하기 어렵다고 말하였다. 진연 문제를 파할 것을 청한 데에 이르러 태화가 아뢰기를,
"이 일은 이미 정파하였으므로 다시 논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헌부의 차자를 진달하게 하면서 옥당과 중복된 곳은 재차 주달하지 말게 하였다. 태화가 주인이 없는 땅을 개간한 곳은 한결같이 입안(立案)의 선후에 따라 하고 여러 궁가에서는 함부로 빼앗지 못하게 할 일을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강원도에 궁가에서 개간한 곳은 이미 먼저 개간한 백성에게 환급하게 한 일이 있으니 이번에도 여기에 의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태화가 또 관원의 차자에 대하여 아뢰기를,
"이 한 조항은 훈국의 군제를 변통하기를 청한 일이니 이것은 국가의 대사이므로 갑작스레 개정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처리하지 않았다. 태화가 아뢰기를,
"한 집에 네 사람이 모두 신역(身役)을 받고 있는 자는 법규상 시정(侍丁) 한 사람을 면제해 주어야 하니 청컨대 각도로 하여금 신칙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명화가 10세 미만의 어린 아이를 초출하여 먼저 군포를 감해 주기를 청하니, 상이 역시 따랐다. 이조 판서 김수항이 아뢰기를,
"신이 북로에 봉사로 갔다 와서 백성들의 폐해에 관해 진달하고 대신으로 하여금 북로의 일을 주관하게 할 것을 청하여 이미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대신이 자청하기를 어려워하므로 아직도 시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신은 이미 늙었으므로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좌상 우상 중에 한 사람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소서."
하였다. 명화가 아뢰기를,
"신은 강도의 일을 주관하고 있으니 이 일은 우상이 마땅히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우상에게 주관하라고 명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근래 해마다 흉년이 들었는데 국가의 크고 작은 공역(工役)은 해마다 증가되고 있습니다. 삼가 호판(戶判)의 말을 듣건대, 이번 가을 석 달 동안에 소용되는 포목(布木)의 숫자가 매우 많다고 하니, 실로 절약하는 방도가 아닙니다."
하고, 정치화는 아뢰기를,
"석 달 동안 소용되는 것이 8백 80여 동(同)이나 되는데 별로 어공에 소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포수들이 중순(中旬)027) 과 갖가지 비용과 세폐에 드는 비용 및 각처에 드는 비용이 매우 번다하므로 몹시 민망합니다."
하고, 홍명하는 아뢰기를,
"내사(內司)의 재화(財貨)라 할지라도 또한 마땅히 준절(撙節)해야 합니다. 이는 모두 백성에게서 나온 것이니 어찌 절약해서 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정태화 등이 아뢰기를,
"원자의 책봉례(冊封禮)는 속히 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봄은 사시 중 맨 처음이므로 옛날에는 대례(大禮)를 대부분 연초에 실시했던 것입니다. 이번에도 명년 초봄에 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봄까지는 겨우 두어 달밖에 여유가 없어서 행례(行禮)하기가 어려울 듯하다. 한창 자라는 아이는 반 년 사이에도 성취되는 것이 자별한 법이니 가을쯤 가면 가능할지 모르겠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삼가 외정의 의논을 듣건대, 모두들 전하께서 분발하려는 의지가 적은 것을 걱정했는데 이것이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편안함[逸]이란 임금이 크게 경계해야 된다.’ 하였습니다. 일찍이 듣건대, 위에서 무일편(無逸篇)028) 을 병풍에 써서 항상 좌석 오른쪽에 두고 있다고 했는데 늘 스스로 경계하여 살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서경》에 이르기를 ‘무익한 일을 벌여 유익한 일을 해치게 하지 말라.’고 했으니, 위에서 공장(工匠) 등의 일에 유의하게 되면 어찌 유익한 일에 해롭지 않겠습니까. 또 이르기를 ‘총행(寵幸)의 길을 열어 모만하는 일을 초래하지 말라.’고 했는데, 삼가 오늘날 성상을 가까이 모시는 자들을 보건대, 간혹 너무 친압하는 데에 이른 듯하고 궁위도 엄격하지 못한 듯합니다. 다시 더욱 척렴하소서."
하고, 이민서(李敏叙)가 아뢰기를,
"삼가 여항(閭巷)의 비난하는 말을 듣건대, 모두들 궁금(宮禁)이 엄하지 못하여 조종조(祖宗朝) 때와 아주 다르다고 하였습니다. 왕자와 왕손을 너무 빈번하게 인접하고 출입하는 것이 절도가 없는 탓으로 궁중의 말이 외간에 전파된 경우가 많습니다. 만일 한번 사경(私逕)이 열리게 되면 뒤 폐단이 끝이 없기 때문에 군정(群情)이 모두 이를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실이 있으면 고치시고 없으면 더욱 면려하시는 일은 성상께서 스스로 반성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인조께서 말년에는 항시 몸이 불편하셨으므로 의관(醫官)들이 입진하는 횟수가 비록 잦았지만 승지와 사관이 함께 입시했었는데 지금은 의관이 홀로 입시하고 있으니, 이 또한 총행을 열어 모만을 초래하는 길인 것입니다. 들은 바에 의하면 한두 명의 의관이 오래도록 내시와 같이 거처하고 있으므로 약(藥)에 대해 의논하는 일을 약방이 참여하여 알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어찌 지나치게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총행의 길을 열어 모만을 초래하지 말라는 것과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힘쓰라는 것은 모두가 아름다운 말이다. 의관에 관한 말은 내가 아는 바 없다."
하였다. 민서가 아뢰기를,
"당(唐)나라 때의 이훈(李訓)·정주(鄭注)는 당초 의술(醫術)로 진출한 사람들인데 결국에는 난을 일으키기에 이르렀으니,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삼가 성덕의 치우친 곳을 살피건대, 대부분 안일에 지나쳐 스스로 진작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오늘날의 일을 가지고 말하건대, 본관(本館)의 차자에서 진달한 큰 일은 모두 시행되지 않고 단지 소소한 부역만 감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치도에 유익하겠습니까. 오늘날 대신들이 하는 행위가 신들은 진실로 이럴 줄을 알았습니다. 공안(貢案) 같은 한 가지 일을 변통시키는 것이 무슨 어려움이 있기에 경장(更張)을 꺼리기만 하고 백성을 편하게 할 방도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런데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명하가 거친 목소리로 아뢰기를,
"설사 공안을 고친다고 해도 어찌 세도(世道)를 만회할 수 있겠습니까. 옥당은 단지 학문을 논하고 임금의 덕을 보도하여야 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굳이 묘당의 논의에 참여하여 법제를 변경시키려고 하고 있으며 매양 탑전에서 일을 논할 적마다 오로지 대신을 공척하기만을 힘쓰니 대신이 된 사람이 또한 고통스럽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민서가 아뢰기를,
"고 참판 이응시(李應蓍)의 딸이 사인(士人) 이진면(李震冕)의 처가 되었는데 남편이 어미 상을 당하여 너무 슬퍼한 끝에 죽음에 이르게 되자 이씨(李氏)가 이에 장사를 치른 뒤에 글을 써서 부모에게 영결(永訣)을 고하고 나서 약을 마시고 죽었습니다. 그가 조용히 죽음을 택한 것은 옛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 정식(鄭植)의 자부(子婦)의 전례에 따라 똑같이 포정(褒旌)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만용(萬容)과 민서(敏叙)가 김익렴(金益廉)에게 내린 특별히 체차하라는 명을 환수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형조 판서 오정일은 기필코 행공(行公)할 이치가 없다는 이유로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부교리 김석주가 겨울 천둥이 거듭 발생한 일로 인하여 상소하여 경계할 것을 진달하였다. 하늘의 마음을 몸받아 하늘의 견책에 답함으로써 공구 수성하는 실상을 극진히 하고 이런 마음가짐으로 신하들을 면려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어서 줏대없이 사심에 끌리는 습성을 일변시켜 말끔히 씻고 진작 쇄신하는 큰 법으로 삼을 것을 청하고, 또 아뢰기를,
"국가에서 현재 새로 집을 지어 명년에 온천에 갈 계획을 세우고 자전께서도 멀리 가실 것이라고 합니다. 대체로 성상의 병환이 온천에 적합다하는 것은 말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지난 계묘년 여름으로부터 파발을 두어 물을 길러다가 조금 실험해 보았습니다마는 그 뒤에 증세가 한결같지 않아 그 근본을 따져보니 습열이 주된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의술에 종사한 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이 전혀 의심스럽지 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으며 침이나 약을 실험할 수 없는 연후에 이 의논이 결정되었습니다.
지금 자전의 병환이 반드시 온천에 적합하다는 것을 전혀 의심할 수 없는 것이 과연 지난날 성상의 증세와 같습니까. 여러 의원들의 논의를 비유해보면 승리에 익숙해져 있는 장수에게는 병사에 관하여 말하기 어려운 것과 같습니다. 소문이 나돌면 거기에 따라 쏠리는 자가 많으니, 보통 사람들도 발을 옮기는 사이에 오히려 삼가지 아니할 수 없는데 더구나 자전께서 수백 리나 되는 먼 곳에 가는 일이겠습니까. 뜻을 얻어 재차 가는 일에 대하여 소씨(邵氏)가 분명하게 경계하였으니 성상은 이 일에 대하여 또한 신중히 고려해 봐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국가에서 법을 각박하게 하고 뜻을 독촉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는 이유는 오직 누적된 포흠을 징수하고 기간을 늦추어준 부세를 받아들이는 데 있으니 어리석은 신은 이것이 과연 무슨 계책인지 모르겠습니다. 대체로 누적된 포흠의 폐단에 대해서는 전후 재신들이 누차 논의하였습니다. 탕감시키자는 의논이 일찍이 금년 봄에 한번 발론되었고 일이 거의 시행되게 되어 있었습니다마는 갑자기 다시 조절하라는 말 때문에 중도에 저지되고 말았습니다.
아, 그 문서를 남겨둔다고 해도 국가에서 곡식을 충분히 얻어 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없애버리면 민심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허위 장부를 견감시켜 실질적인 혜택을 베푸는 계책으로 이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허위 장부를 싸들고서 실질적인 원한을 불러 들이고 있으니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이 과연 국가에 무슨 이익이 되겠습니까.
기간을 늦추어 받으라고 한 일에 대해서는 그것이 처음엔 본래 백성에게 혜택을 주기 위한 것이었는데 결국에 백성에게 가장 큰 피해를 주게 되었습니다. 대체로 백성들이 이미 납부할 수 없게 되었는데 국가에서는 비록 백성에게 거두어 들이지 않더라도 오히려 지탱할 수 있으므로 이에 견감해 주려는 뜻이 있었으나 지금 이미 받아들이지 못했고, 또 차마 백성에게 버려두지도 못하므로 이에 기간을 물려 받으라는 명을 내린 것입니다. 이른바 납부할 기간을 물려준 것은 곧 오늘날의 빚입니다. 일찍이 소식(蘇軾)이 양주(楊州)를 맡고 있을 때에 빚에 관하여 논의한 상소에 이르기를 ‘풍년이 흉년만 못하다. 흉년에 백성은 옷을 감축하고 먹는 것을 절약하면 오히려 살아갈 수 있지만, 풍년에는 모두가 빚을 재촉하느라 관리는 문에 지켜 서 있고 곤장을 맞게 됨으로 죽으려 해도 죽을 수 없다.’라고 하니, 아, 이 두어 마디 말은 곤궁한 백성들의 실정을 잘 말한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백성들의 원망과 고통을 깊이 살피셔서 전일에 내렸던, 분명하게 조사하여 징수하라는 명을 거두시고 특별히 제도로 하여금 계묘년 이전 누적된 잡색의 흠액을 모두 견감시켜 주도록 하소서. 그리고 앞으로는 흉년이 들었을 경우에 감해줄 만하면 감해주고 감면해주지 않을 만하면 감면해주지 말아서 구차하게 기간을 물려주는 명이 없도록 하소서. 그렇게 한다면 백성들을 구제하는 도리가 어찌 이것보다 큰 것이 있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전번에 간신이 상소하여 서울의 아문에 은(銀)과 베를 취하여 한 해의 포역(布役)을 대신해 주기를 청하였으니 이 말도 역시 아름다운 것인데 끝내 시행하지 아니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오늘날 조정에서 현재 궁핍한 백성들의 입가에 남아 있는 것까지 취하여 누적된 포흠을 채우려 하는데, 또한 어찌 서울의 중심지에 저장된 것을 덜어 내어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려 하겠습니까. 신이 지난 가을에 병랑(兵郞)으로 있을 적에 마침 군포(軍布)를 관장하고 있었으므로 복심(腹心)인 경부(京府)의 저장 또한 헛된 데로 흘러나가는 것이 상당히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숙경 공주(淑敬公主)의 집을 지을 적에 토목 공사의 공역(功役)이 3년 만에 끝이 났는데 신이 삼가 공장(工匠)과 모역(募役)의 역가(役價)를 계산하여 보니 2백 14동(同) 남짓 되어 금(金)으로 환산하여도 7천, 8천 냥을 밑돌지 않는 숫자였고, 거기다가 다시 탁지(度支)의 양료(糧料)와 내사(內司)의 비용까지를 계산하여 본다면 반드시 1만 냥이 차고도 남을 것입니다. 진실로 하나의 궁(宮)을 짓는 데 드는 비용을 한 해 민포(民布)로 대신 옮겨 충당시킨다면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신은 여기에서 더욱 전일 간신(諫臣)의 소장 내용을 당초 행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의 진언이 성실한 것을 가상하게 여긴다. 진달한 말은 내가 마땅히 유념하겠다. 포흠에 관한 한 조항은 의당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겠다."
하고, 이어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포흠에 관한 한 조항은 이미 제도에 행회(行會)하여 조사해서 신보(伸報)하게 했으니, 완성된 책자가 모두 도착한 뒤에 일시에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양주(楊州)의 전부(田賦)를 다시 측량하였다. 이에 앞서 양전(量田)할 때 양주의 관리가 적격자가 아니어서 전결(田結)의 경중이 균일하지 않았다. 이에 백성들이 매우 고통스럽게 여겨 모두들 국가에다 원망을 돌렸기 때문에 다시 양전하라고 명하고, 호조 판서와 경기 감사가 구관(句管)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양전을 끝마쳤는데 줄어든 전결의 수량이 거의 1천여 결(結)이었으므로 백성들이 비로소 조금 소생될 수 있었다.
10월 24일 병자
정지화를 형조 판서로, 박장원·조복양을 원자 보양관으로, 이유태를 강학관으로, 윤선거를 요속으로 삼았다. 송준길이 일찍이 더 차출할 것을 청했었기 때문에 이조에게 대신(大臣)과 상의하여 노성인(老成人)으로 차출하라고 명하니, 대신이 네 사람을 차하(差下)하도록 청한 것이다.
전 감사 김시진을 특별히 서용하여 형조 참판에 제수하였다. 시진이 충청 감사로 부임하여 있을 적에 온천의 행행에 공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평 어진익이 아뢰기를,
"금산 군수(錦山郡守) 김종일(金宗一)은 연로하고 병이 심하여 아문의 좌기(坐起)를 전적으로 폐기하고 있으니,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외방에 있는 유신 송시열·송준길·이유태·윤선거에게 시무에 대해 자문(諮問)하라고 하유하였다. 이것은 옥당의 말을 따른 것이다.
원자가 영부사 이경석, 영의정 정태화와 상견례(相見禮)를 행하였다.
10월 25일 정축
전라도 곳곳에서 도적이 몰래 일어나 사람을 겁략하고 살해하였으므로 도신(道臣)에게 명해서 토포사(討捕使)에게 분부(分付)하여 계교를 내어 소탕하게 하였다.
별시(別試)를 설행하여 선비를 뽑았다. 임상원(任相元) 등 13인에게는 문과 출신(文科出身)을 내렸고 이예길(李禮吉) 등 30인에게는 무과 출신(武科出身)을 내렸다.
훈련 대장 이완이 말미를 받아 연풍(延豊)의 온정(溫井)에 가서 목욕하고 돌아오다가 음죽(陰竹)에 이르러 병이 위독하였다. 어의(御醫)를 보내어 약물(藥物)을 가지고 가서 구료하게 하라고 하였다.
10월 27일 기묘
상이 형조의 시수 죄인(時囚罪人)에 대한 문서를 조사하여 품달하라는 일로 하명한 지가 이미 오래인데 아직도 거행하지 않고 있다는 이유로 판서 정지화, 참판 김시진을 아울러 패초(牌招)하여 직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10월 29일 신사
남용익(南龍翼)을 우윤으로, 이정(李程)을 사간으로, 곽성귀(郭聖龜)를 장령으로 삼았다.
대사헌 박장원이 일찍이 문신 시사(文臣試射)의 시관(試官)으로서 사관(射官)의 명단 가운데 규례에 어긋나는 현탈(懸頉)한 잘못이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정치화(鄭致和)를 정리사(整理使)로 삼았다.
10월 30일 임오
송준길(宋浚吉)을 대사헌으로, 윤강(尹絳)을 판윤으로, 신후재(申厚載)를 정언으로 삼았다.
상이 옥당을 소대하였다. 부제학 조복양이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진강하였다. 옥당의 모양이 구간스럽다는 이유로 파산(罷散)되어 있는 박세당(朴世堂)·심재(沈梓) 이 두 사람을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나왔다. 박장원(朴長遠)을 원접사로, 김석주(金錫胄)를 문례관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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