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13권, 현종 6년 1665년 7월

싸라리리 2025. 12. 4.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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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을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이경억(李慶億)을 도승지로, 이상일(李尙逸)을 우승지로, 오정위(吳挺緯)를 형조 참판으로, 박장원(朴長遠)을 대사헌으로, 박정(朴烶)을 집의로, 윤순거(尹舜擧)·민여로(閔汝老)를 장령으로, 신명규(申命圭)·홍주국(洪柱國)을 지평으로, 이유(李秞)를 헌납으로, 오두인(吳斗寅)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강학청이 응당 행해야 할 절목(節目)에 대해서, 본조가 조사해 볼 만한 문적(文籍)이 난리를 겪는 사이에 전부 없어져 버렸으므로 본조에서 일시적인 문견으로 경황없이 정할 수 없습니다. 인종 대왕께서 원자로 계시던 때와 인조조 계해년 초의 원자 보양 절목을 춘추관으로 하여금 《실록》에서 찾아내도록 한 다음에 여쭈어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호조가, 좌참찬 송준길에게 이달 월봉 및 쌀과 반찬을 보냈다. 송준길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는데, 상이 다시 보내게 하였다.

 

7월 2일 병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가 밤에는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장령 박정이, 대사헌 박장원은 곧 그의 조카라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7월 3일 정해

도목 대정(都目大政)이 있었다. 이유를 집의로, 송규렴을 부수찬으로, 이정기를 개성 유수로, 윤변을 헌납으로, 이상진을 대사간으로, 이행진을 예조 참판으로, 김만기를 부응교로, 남용익을 우윤으로, 박정을 사간으로, 이민서를 응교로, 조복양을 예문 제학으로 삼았다.

 

좌참찬 송준길이 상소하여 온천에 가서 목욕할 것과 또 죽은 아들의 소상에 맞추어 돌아가서 지극한 정을 다하고자 한다고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의 소를 살펴보니 내 마음이 매우 슬프다. 비록 예경에 가르침이 있긴 하지만 임시 방편도 있는 법이니, 후일 등대할 때에 면대하여 하유하겠다."
하였다.

 

강원 감사 이만영(李晩榮)이 치계하기를,
"영동의 9개 고을은 가뭄이 특히 더 심하므로 구휼하는 대책을 미리 세우지 않아서는 안 되겠는데, 본도는 최근 몇 년간 계속 흉년이 들어 공사(公私)간에 비축된 것이 하나도 없어 손을 쓸 길이 없습니다. 곡식을 옮겨 구제하는 방도를 묘당으로 하여금 미리 강구하게 하소서."
하니, 비국이 회계하기를,
"경자년005)  의 예에 따라 타도(他道) 고을 중에 가까운 거리에 있는 지역의 곡식을 옮겨 구제하되, 신임 감사로 하여금 내려가는 대로 가뭄으로 입은 피해의 정도와 수송할 곡식의 양을 헤아려 보고하고 여쭈어 처리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자전이 편찮으셨으므로 상이 의관(醫官)에게 명하여 궐내에 머물러 숙직하도록 하였는데, 제조(提調)들도 교대로 숙직하겠다고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7월 4일 무자

지평 홍주국이 집의 이유와 처친(妻親)이므로 상피 관계라 하여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7월 5일 기축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정언 이익상·권두추가 아뢰기를,
"지방에 재변이나 상서가 있으면 도신(道臣)은 즉시 보고하여야 합니다.충청도 공산(公山) 땅에 나무의 결이 글자의 형태를 이룬 일이 있었는데 감사 김시진(金始振)은 끝내 보고하지 않고 있다가 지난번 온천에 거둥하셨을 때에 수행했던 벼슬아치에게 사람을 시켜 그 나무 조각을 보여주었습니다. 처음에 곧바로 보고하지 않고 있다가 사사로이 말을 퍼뜨리고 보여준 것은 너무도 해괴한 일입니다. 김시진을 엄중히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강화부에 전염병이 극심하였다.

 

7월 7일 신묘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7월 8일 임진

신후재(申厚載)를 지평으로 삼았다.

 

헌납 윤변 등이 아뢰기를,
"삭주 부사 이수방(李綬邦)은 일찍이 운산 군수로 있을 때에 백성을 속여 원망을 받아가면서 끝없이 영리를 추구하였습니다. 어떻게 전에 이미 탐욕스럽고 교활한 짓을 하였던 관리에게 다시 수령의 임무를 맡겨 거듭 변방 백성들에게 해를 끼쳐서야 되겠습니까.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간원이 조경의 월봉을 환수하는 일로 간쟁한 지 한 달이 넘었는데, 상이 끝내 윤허하지 않자, 이때에 이르러 정계하였다.

 

상이 좌참찬 송준길을 인견하고 하유하기를,
"경의 지극한 마음은 내가 이미 잘 알고 있는데 경의 상소 중에 예경의 가르침을 인용하였기에 ‘일에는 임시 방편이 있다.’고 말하였었다. 최근에 날씨가 매우 더워 안질이 재발할 염려가 없지 않고 또 다리의 통증으로 움직이기에 불편한 점이 있어서 강학을 중지하였고, 또 자전께서 편찮으셨기 때문에 오랫동안 폐하게 된 것이다. 지금은 자전의 병환도 점차 회복되고 있고 날씨도 서늘해지고 있으므로 곧 다시 경연을 열려고 하는데, 경이 아니면 누구와 함께 강론하겠는가. 게다가 경은 현재 원자를 보양하는 책임을 맡고 있는데 어찌 차마 버리고 떠난단 말인가. 또 이렇게 더운 날씨에 노인네 근력으로 길을 나섰다가 병을 얻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다.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 경이 부모의 묘소를 옮기기 위하여 내려가려 하였으나 선왕께서 끝내 윤허하지 않으셨다. 지극한 정이야 억제하기 어렵겠지만 어찌 임시 방편이 없겠는가."
하자, 준길이 아뢰기를,
"신은 노병이 날로 심하여 글뜻도 잊어버린 것이 많으니 서울에 남아 있는다 하더라도 어떻게 경연에 출입하면서 도움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선조 때 신이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선왕께서는 분발하여 훌륭한 정치를 도모하느라 국사를 송시열에게 위임하고 신으로 하여금 함께 일하게 하고자 했습니다. 신이 남아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시열은 오지 않는데 유독 신만 머물러 있게 하니 나라에 무익할 뿐만이 아니라 신의 마음도 편치 못할 일입니다. 신이 아직도 원자를 뵙지 못하였으니 그리운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신이 처음 왔을 때 윤선도의 상소를 만났고, 다시 왔을 때는 조경의 상소를 만났습니다. 급한 나머지 미처 사퇴하지 못했던 것이지 어찌 신이 있고 싶었던 바이겠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다행히 그런 일이 없습니다. 비록 휴가를 받아 간다고 하더라도 신이 어찌 감히 완전히 물러가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한 동안만 보지 못해도 비린(鄙吝)한 마음이 다시 생긴다.’ 하였으니, 경이 만일 내려가면 나도 그럴텐데 내가 어찌 차마 경을 놓아 보낼 수 있겠는가."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어찌 감히 이 분부를 감당하겠습니까. 상께서 만일 경연을 자주 열고 또 보양관으로 하여금 날마다 원자를 모시게 하고자 하신다면 중외의 모든 사람이 기뻐할 것입니다. 만일 요즘같이 일을 폐기하고 세월만 보내신다면 신이 비록 머물러 있는다 하더라도 하는 일 없이 밥만 축낼 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날씨가 점점 서늘해지고 있으니 어찌 이런 지경에야 이르겠는가."
하였다.

 

7월 9일 계사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어떤 왜인이 몰래 배 1척에다 유황을 싣고 와서 용초도(龍草島)에 정박하고 피 봉사(皮奉事)와 임 주부(林主簿)를 찾는다고 경상 감사 임의백(任義伯)이 보고하였다. 이른바 피 봉사와 임 주부는 곧 상인 피기문(皮起門)과 임지죽(林之竹)으로 전부터 왜인과 유황을 몰래 매매해온 자들이다. 비국이, 동래 부사 및 통영으로 하여금 두 사람에게 분부하여 비밀리 교역하도록 하고, 또 이후로는 밀무역하는 상인을 일체 엄금하도록 동래 부사에게 신칙하기를 청하니, 따랐다.

 

7월 11일 을미

동래에 있던 관왜가 본국으로 돌아가다가 폭풍을 만나 되돌아와 다대포(多大浦) 앞바다에 정박하였다. 편의에 따라 육로를 택하여 관(館)으로 돌아가려 하자, 다대포 첨사 하종한(河宗漢)이 군인을 풀어 길을 막았는데, 군인 윤난상(尹難祥)이 잘못하여 왜인 한 사람을 다치게 하였다. 그러자 왜인들이 노하여 곧장 첨사의 처소로 가서 온갖 방법으로 협박하자, 종한이 그 때문에 난상을 매질하였다. 난상이 손이 닳도록 빌자, 왜인이 그제서야 배를 타고 관으로 돌아갔다. 관에 있던 왜인들이 일제히 성을 내어 공갈하는 말을 매우 심하게 하니, 동래 부사 안진이 역관과 군관(軍官)을 연달아 보내어 여러모로 달랬지만 여전히 소란을 피웠다. 그러자 안진이 졸지에 변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치계하기를,
"속히 신을 파직하지 않는다면 국가를 욕되게 하는 일이 없으리라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종한의 죄도 빨리 다스려 저들의 노여움을 풀어주도록 하소서."
하니, 비국에 내려보냈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종한은 잡아다가 심문하여 처벌하고 난상도 본부로 하여금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왜인이 배로부터 관중의 양식을 가져가는 것은 수로(水路)를 왕래하기가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이후로는 육지로 다니도록 허락해 주고, 군인의 수를 정하여 방비하게 함으로써 여염에 출입하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자, 따랐다.

 

강화부에 심한 바람이 3일 동안 불어 벼와 곡식이 큰 피해를 입었다.

 

7월 12일 병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간원이 아뢰기를,
"각조와 각사에서 면신(免新)이란 이름으로 침학하는 폐습에 대해 일찍이 본원의 계사로 인하여 금지시켰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금부 낭청 및 성균관, 승문원, 선전관, 부장, 수문장 등이 금령을 지키지 않고 다시 구습을 행한다고 합니다. 해당 관원들을 아울러 무겁게 추고하여 일체 금지하게 하소서."
하니, 더욱 심한 자를 거듭 조사하여 엄금토록 하라고 답하였다.

 

전라도 회령포(會寧浦)의 방군(防軍) 28명과 동남 동녀(童男童女) 10여 명이 바다에 나갔다가 배가 전복되어 10여 명이 빠져 죽었고, 가리포(加里浦) 방군 28명이 입방(立防)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배가 전복되어 14명이 빠져 죽었다. 감사가 보고하니, 본도로 하여금 구휼하는 은전을 베풀게 하였다.

 

7월 14일 무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7월 15일 기해

청나라 사람 20여 명이 상토진(上土鎭)의 파수하는 막사에 돌입하여 지키던 사람을 몰아내고 군량을 약탈해 갔다고, 평안 병사가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비국이, 상토진의 변장이 평상시에 제대로 검찰하지 못한 죄를 다스리고 각처의 파수를 더욱 엄격하게 하도록 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7월 16일 경자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7월 17일 신축

평안도 강서현에 우레가 치고 비가 쏟아져 사람이 떠내려가고 가옥이 물에 잠겼으며 무학산(舞鶴山)이 무너져 4명이 깔려 죽었다고 감사가 계문하니, 구휼하는 은전을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광주(廣州)에 해일과 태풍이 있었다.

 

7월 18일 임인

이만영(李晩榮)을 동부승지로 삼았다.

 

전라 감사 민유중(閔維重)이 치계하기를,
"본영(本營)에 소속된 아병(牙兵)은 총 6천여 명인데, 전부터 이들에게 한 사람당 포 1필씩을 거두어 영내에 소요되는 경비를 충당해 왔습니다. 그러나 항오(行伍)에 관한 법이나 기예를 익히는 일은 제쳐두고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만약 변란이 생긴다면 어떻게 힘을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금년 11월부터는 그들에게 거두던 포를 면제해 주는 대신 돌아가며 번을 서게 하되, 매년 봄과 가을에 합동 군사 훈련을 시키고자 하는데, 새로 만드는 일이라서 감히 이렇게 아룁니다."
하니, 이 일을 병조에 내렸다. 병조가 회계하니, 따랐다.

 

황해도 수안군(遂安郡)에 비바람이 심하게 몰아쳐 산언덕이 붕괴되는 바람에 8명이 깔려 죽고 2명이 물에 빠져 죽었는데 감사가 보고하니, 구휼하는 은전을 베풀라고 명하였다.

 

충청도 공산(公山) 지역의 모과나무를 나무꾼이 도끼로 찍었더니 속의 나뭇결이 ‘상화하목(上和下木)’이라는 네 글자를 이루고 있었는데, 빛깔은 검은 빛이 감도는 자주색이었다. 감사 김시진이 즉시 보고하지 않고 있다가 대간의 논의가 나오자, 비로소 나무 조각을 올려보내어 보고하였다.

 

충청도 아산(牙山)·신창(新昌) 등지에 해일이 있었다.

 

7월 19일 계묘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정원이 아뢰기를,
"경상 감사 임의백이 선산부의 도적 등에 관하여 조사하여 올린 장계를 보니, 김충윤(金忠胤)이 무고하여 농간을 부린 정상이 구구절절이 놀랍습니다. 추관(推官) 안응창(安應昌)은 충윤이 하는 말만 믿고 무고한 백성을 가두어 심문하였고, 의백은 이미 응창이 옥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알았으면서도 단지 중고(中考)를 시사하였고, 토포사(討捕使) 박승건(朴承健)은 충윤에게 기만을 당해 사실인지 거짓인지를 따져보지도 않았고 거론하지도 않았으니, 도신의 체통을 잃었습니다. 감사 임의백을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집의 이유가 이어서 안응창은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고 박승건은 엄중히 추고하기를 청하니, 역시 따랐다.
충윤은 개령(開寧) 사람이다. 처음에 파당을 지어 도적질을 하다가 이윽고 그 파당을 개령에 고발하면서 평소에 미워하던 사람들까지 모두 도적으로 무고하여 1백여 명을 죽게 만들었는데, 그 가운데 태반은 양민이었다. 충윤은 그 공으로 첨지에 제수되기에 이르렀고, 아울러 도적에게서 몰수한 장물을 받았다. 충윤이 그 후로 사람을 무고하여 잡아 넣는 것을 일삼았으므로 분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 때에 이르러 또 선산(善山) 사람 김입선(金立先) 등을 무고하여 상주 목사 박승건(朴承健)에게 밀고하니, 승건이 그대로 믿고 선산 부사 안응창(安應昌)으로 하여금 은밀히 체포하여 추문(推問)하게 하였다. 입선 등이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충윤에게 뇌물을 주자, 충윤이 그것을 받고 비로소 그들이 억울하다는 것을 응창에게 말하였는데, 응창이 충분히 조사해 보지도 않고 석방해 주자고 청하였다. 감사 임의백이 의심하여 김충윤을 추고하여 전후의 범죄를 밝혀내어 보고하였다. 형조가, 다시 본도로 하여금 엄중히 심문하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충윤이 세 차례 심문을 받고 비로소 자백하니, 장 일백 유 삼천리에 처하라고 명하였다.

 

7월 21일 을사

오두인(吳斗寅)을 교리로 삼았다.

 

대사헌 박장원 등이 아뢰기를,
"의금부의 살인죄에 관계되는 옥사는 설사 질병이 있다 하더라도 원래 보석으로 석방하는 전례가 없습니다. 그런데 죄인 이온을 보석으로 석방하는 일을 판의금이 출사하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다른 당상이 지레 계품하였으니, 해당 당상을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먼저 체차한 다음에 추고하도록 명하였다.

 

수원(水原)·인천(仁川)·남양(南陽)·안산(安山) 등지에 해일이 있었다.

 

7월 22일 병오

이에 앞서 제주 군관 김원상(金元祥)이 상을 치르기 위해서 제주로부터 돌아오다가 거센 바람을 만나 휩쓸려 표류한 나머지 일본 차아도(嵯峨島)에 닿았다. 섬에 사는 왜인이 지극히 후하게 대우하여 오도(五島)로 옮겼다가 장기(長崎)를 거쳐 대마도로 옮겨 보냈는데, 모든 섬 사람들이 음식과 의복을 후하게 보내주었고 대마도에서는 차왜(差倭) 평성진(平成辰)을 차출해 호위하여 동래로 돌려 보냈다. 조정에서 박순(朴純)을 접위관(接慰官)으로 삼아 성진을 접대해 우대하는 뜻을 보였다.

 

7월 23일 정미

우찬성 송시열이 상소하기를,
"신의 집안이 대대로 국은을 받아 작록과 벼슬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우리 인조 대왕께서는 신에게 연이어 소명을 내려 간절한 뜻으로 타이르셨고 우리 성고(聖考)의 세대에 이르러서는 신이, 임금과 신하가 있은 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그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전하께서 또 잘못을 너그러이 용서하는 큰 도량으로 신의 목숨을 보전하게 해 주셨으니, 동등한 관계 이하에도 어떻게 보답해야 할 지 몰라해야 할 터인데 하물며 임금에게 있어서이겠습니까. 신은 마땅히 전하께 몸바쳐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할 것을 기약하겠습니다. 그런데 신은 본래 미약한 몸으로 근거없는 소문에 휩쓸리고 심한 비방에 놀라 오직 벼슬을 버리고 물러갈 것만을 생각하여 감히 베풀어 주신 은혜를 저버렸으니, 이는 성상의 조정에 죄를 지었을 뿐만이 아니라 실로 선조(先朝)의 죄인입니다.
신이 스스로 헤아려 보건대, 위태로운 처지가 서리 맞은 풀과 같을 뿐만이 아닙니다마는 그래도 믿는 것은 성상께서 위에 계시면서 유죄와 무죄를 제대로 살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시골 생활에 만족하고 편히 지내면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렇게 여생을 마치는 것도 크나큰 성은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기에는 충분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마는 오직 아침 저녁으로 삼가 엎드려 바라는 것은 그저 성상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직명을 체차하도록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마음에는 걱정이 없고 몸은 비방을 면하게 되어 마치 사슴이 풀밭에서 자유롭게 풀을 뜯는 것과 같을 것이니, 이는 실로 성명의 조정에서 나이 많은 신하를 우대하는 큰 은혜이며 일을 처리하는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그런데 성명께서는 끝까지 허락해 주지 않으시니, 이는 어쩌면 ‘그가 심히 말을 듣고 있기는 하지만 나의 도리로서는 어찌 비호해서 그를 여러 신하들의 대열에 들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여기신 것은 아닙니까.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성명께서 신을 위해주시는 계책이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신은 전일 진달한 것 외에 또 당한 것이 별도로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고 불상스러워서 감히 말씀드리고 죄를 청하지 않았으니, 신은 실로 답답합니다.
대체로 여느 집안에 있었던 좋지 않은 말을 이웃 사람이 거리에서 수군거리더라도 이미 겁이 나고 부끄러워서 문을 나가고 싶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비난하는 자가 보통 사람 정도에 그치지 않고 있으며, 점점 확대시키고 내용을 바꾸어 가며 추호(秋毫)만한 일을 태산(泰山)보다 크게 만들어대고 있는데 신이 오히려 죄가 없다고 자처하고 맑은 조정에 무릅쓰고 나갈 수 있겠습니까.
아, 신의 잘못이 산처럼 쌓여 있으니, 비록 신에게 쓸 만한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세상에 스스로 설 수 없을 것인데, 더구나 신은 애당초 조그마한 장점도 갖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성상께서는 끝내 버리려 하지 않으시니, 이는 보잘것없는 신이 처음부터 전혀 알 수 없는 점일 뿐만이 아니라 지식이 있는 자들은 누구나 다 의아해 하는 점입니다. 혹시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의심과 노여움이 모두 가라앉고 시비가 모두 사라져서 여러 대부들과 국민들이 다 신을 용서해도 된다고 한다면 신 또한 스스로 연마하여 장구(章句)에 대한 진부한 지식을 가지고 다시 전하를 가까이에서 모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은 넓고 깊은 도량으로 어찌 나의 간절한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가. 이는 실로 내가 경에게 있어서 성(誠)이란 글자가 미덥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아, 경의 나아감과 물러감은 실로 음양이 사라지고 자라는 기미에 관계되는 것임을 경은 생각하라. 경의 마음은 내가 알고 있고 나의 마음은 경이 알고 있을 터인데, 세월이 지나도 서로 신뢰하는 실상을 보지 못하고 있으니, 나는 진실로 한밤중에 일어나 탄식하며 옛날의 임금과 신하의 일에 대해 매우 부끄러움을 느낀다. 경은 나의 지극한 뜻을 잘 살펴 떠나려는 마음을 속히 돌려 나의 기대에 부응하라. 또 원자를 보양하게 하겠다는 뜻을 전에 이미 하유하였으니, 내가 기대하는 바가 더욱 간절하다는 것을 경은 깊이 생각하라."
하고,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게 하였다.

 

함경 감사 민정중이 장계를 올려 양전(量田)을 실시하였다. 초기에 정중이 사사로이 함흥(咸興)의 전부(田賦)를 측량하였는데, 일을 마친 뒤에 경기를 양전할 때의 사목(事目)에 따라 도(道) 전체의 전정(田政)을 균등하게 할 것을 청하자, 호조가 민정중으로 하여금 그 일을 주관하여 거행하게 하도록 청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정중이 도사(都事)와 평사(評事)로 하여금 남도와 북도를 나누어 주관하게 하고, 회령(會寧) 이북 및 삼수(三水)·갑산(甲山) 등 고을은 함흥 사람인 전 군수 주목(朱楘)·한우기(韓友琦), 전 참봉 정시원(鄭時元)으로 하여금 나누어 살피게 하면서, 갑술년006)  의 예에 따라 그들을 종사(從事)로 가칭(假稱)하여 그 일에 신중을 기할 것을 청하였는데, 호조가 그대로 시행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북도는 토질이 척박한데 양전을 한 뒤에 요역과 부세가 전보다 가중되었으므로 백성들이 불편하게 여겼다.

 

7월 24일 무신

이때 장마가 그치지 않아 벼와 곡식이 손상되었으므로 사문(四門)에 기청제(祈晴祭)를 지냈다.

 

헌납 윤변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듣건대, 혜성의 변고가 발생한 뒤에는 가장 혹심한 재변이 따른다고 합니다. 말하는 자들은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라고 하는데, 지금이 어찌 군신 상하가 태연스럽고 한가하게 있을 때이겠습니까. 신하들 중에 전후로 말씀을 올려 조정의 득실을 논한 자가 한둘이 아니지만, 신은 유독 민생이 곤궁하여 초췌한 것이 오늘날의 근본적인 근심거리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고을의 군병에게 징납하는 포역(布役)은 실로 나라를 망치게 하는 일입니다."
하고, 인하여 청하기를,
"전국 군병의 1년 치 번포(番布)를 특별히 면제해 주어 군민(軍民)으로 하여금 국가의 비상한 은택을 흠뻑 입게 하소서. 또 각 아문(衙門)에 축척되어 있는 은과 포를 풀어 곤궁에 시달려온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소서. 경기의 대동미는 2말을 견감하여 호서와 똑같게 하고, 상평창에 쌓여 있는 곡식을 대량으로 풀어서 잡역에 관계되는 모든 것을 모두 상평창으로부터 지급함으로써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경기의 백성을 구제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가 정성을 다해 진언(進言)한 것을 가상히 여긴다. 아뢴 일은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비국이 탑전에서 여쭈어 의논하기를 청하였으나, 대신이 모두 어렵게 여겼으므로 일이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평안도에 홍수와 해일이 있었다. 거센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히고 지붕이 날려 갔다고 감사가 보고하였다.

 

경상 좌병사 성익(成釴)이 올린 어영군의 번을 교체하는 장계에, 착오된 곳에 추가로 써 넣은 것이 있어서 정원이 추고하기를 청하니, 상이, 막중한 군정을 만홀히 하여 직무 수행을 제대로 하지 못한 행위에 대하여 추고만하고 말 일이 아니라 하여 잡아다가 문초하고 죄를 정하라고 명하였다.

 

7월 25일 기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7월 28일 임자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전라도 영광(靈光) 등 16읍에 해일(海溢)이 있었다.

 

7월 29일 계축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금년 농사가 꽤 기대할 만했는데 갑자기 풍재와 수해를 만나 곡식이 상했으니 몹시 염려됩니다."
하고, 좌의정 홍명하가 아뢰기를,
"혜성이 겨우 사라졌는데 풍재와 수해가 또 이와 같으니, 원컨대 성상께서는 더욱 공구 수성하소서.
영동 지방의 가뭄은 매우 참담한데 강릉은 특히 더 심하다고 합니다. 이미 감사로 하여금 직접 살펴본 다음 보고하여 구휼할 근거를 삼도록 하였습니다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는 백성이 없지 않을 듯하니, 아직 처결되지 않은 본도의 옥사를 일일이 아뢰게 한 다음 형조로 하여금 소결(疎決)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형조 판서 김좌명이 아뢰기를,
"김근행이 납부한 은밀히 사들인 유황(硫黃)에 관한 일을 지금 마땅히 품달하여 처리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수가 얼마나 되는가?"
하자, 좌명이 아뢰기를,
"전에는 1만 5천여 근이었는데 지금은 2만 7천 근입니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이 일은 처음에 정부의 노예를 면천시켜 주기 위한 계책이었는데 잠무역한 이래로 고 상(故相) 원두표(元斗杓)가 비국으로부터 역관(譯官)에게 분부하여 은밀히 상인으로 하여금 저들 나라에 가서 규약을 맺게 하였던 것입니다."
하니, 호조 판서 정치화가 아뢰기를,
"잠상(潛商)에 대해서 저들 나라에서는 엄금하고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 시행하는 행위에 대하여 왜관에서 환히 알고 있을 터이니 어찌 국가의 체모에 손상되지 않겠습니까. 신은 이후부터는 단단히 금지시켜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예조 판서 이일상이 아뢰기를,
"대왕 대비전에 풍정(豊呈)을 올릴 일을 부부인의 상제(祥制)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품정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제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곧 거행하라. 그런데 의주(儀注)는 어떻게 하기로 결정하였는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정유년에 진연(進宴)할 때는 집안 사람이 하는 예에 따라 하였으니 풍정에 비하여 조용하게 치루었던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도 여기에 의거하여 거행하라. 그러나 정유년에는 단지 대왕 대비전에만 설행한 것이었고 이번에는 양전(兩殿)에 행해야 한다. 일찍이 듣건대 인조 갑자년에 인목 대비를 위하여 풍정을 올렸는데 인헌 왕후가 연주 부부인(蓮珠府夫人)으로 있었기 때문에 각각 설행하지 않았던 것이니,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이번에도 같이 설행하게 된다면 왕대비전에 예를 행하는 절차가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예를 행하는데 과연 문제가 있을 듯합니다. 정유년 예에 따라 행하되 두 번을 설행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자, 상이 여기에 의하여 시행하라고 하였다. 치화가 아뢰기를,
"고 교리 윤집(尹集)은 화의를 배척하였다가 청 나라로 잡혀가 굴복하지 않고 죽었는데, 그가 청 나라로 떠나던 때에 인조 대왕께서 윤집을 인견한 자리에서 ‘노모와 처자를 돌보아 주겠다.’라고 하교하셨고, 그후 매달 쌀을 그의 집에 지급하게 하셨습니다. 지금 듣건대 그의 처는 죽고 집안이 매우 궁핍하다고 하니, 3년 동안은 쌀을 계속 지급해 주어 제사에 필요한 물건을 마련하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듣건대 아직 장례를 치르지 않았다고 하니, 상을 치르는데 필요한 물건을 지급해 주어야 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이조 판서 김수항이 아뢰기를,
"신은 원자 보양관의 직임을 맡고 있으면서도 아직 배알하지 못하였으니, 아랫사람된 자로서 심정이 매우 답답합니다. 또 《실록》을 지금 이미 베껴 왔으니 여쭈어 결정해야 할 일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실록》에서 베껴온 것은 매우 소략하다. 태종조에는 원자부(元子府)라 칭하고 관속(管屬)은 시학관(侍學官)으로 칭하였는데, 중종조에는 곧장 세자로 칭하였으니, 지금도 마땅히 태종조에 칭호한 대로 준행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수항이 아뢰기를,
"조종조의 고사(故事)에는 시강하는 관원을 여러 명 차출하였는데 중종조에는 심지어 대신으로 정하기도 하였습니다. 인조조에는 당상관은 강학관, 당하관은 시학관이라고 불렀으니, 지금 다 차출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송준길의 뜻은 이렇게 하였으면 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서로 만나보게 하고자 한 지가 오래인데, 원자가 근래에 병을 앓고 있으니 병이 조금 나으면 경들과 서로 만나보게 하겠다."
하였다. 태화가, 예판 및 보양관으로 하여금 상의하여 절목(節目)을 정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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