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13권, 현종 6년 1665년 6월

싸라리리 2025. 12. 4.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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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병진

장령 이유가, 집의 이정의 종제라 하여 인혐하여 체직되었다.

 

지평 조성보·어진익 등이 아뢰기를,
"좌승지 이성징은 전에 온양 행조(行朝)에 있을 때에 옷을 벗고 청에 누워서 떠들썩하게 농지거리하고 웃는 등 조금도 공경하고 삼가는 의사가 없었습니다. 그때에 대관(臺官)이 탄핵하려 하다가 그만두었는데도 태연하게 출사한 채 끝내 스스로 처신함이 없었습니다. 체면도 염치도 없는 그러한 행동을 그대로 두고 논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2일 정사

이섬(李暹)을 장령으로, 이정기(李廷夔)를 예조 참판으로, 이경억(李慶億)을 좌승지로 삼았다.

 

상이 승지에게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하라 명하였다. 도승지 남용익이, 동래 부사 안진이 올려보낸 왜인의 서계와 장계를 읽고 이어 아뢰기를,
"왜서(倭書)의 내용이 전규(前規)를 어긴 것이 많고 또 말이 극도로 패만하니, 변방의 신하된 자는 마땅히 의리를 들어 힐책하고 거절하여 받지 않음으로써 조정의 존엄함을 알게 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대로 올려 보내어 국가를 욕되게 하였으니, 안진을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일을 다 아뢴 뒤에 상이 옥당 관원에게 명하여 《심경》을 강하게 하니, 좌참찬 송준길이 글뜻을 강하였다. 용익이 아뢰기를,
"공사가 나날이 지체되고 있는데, 특히 승지의 분방 단자(分房單子)가 아직도 내려지지 않아 승지들이 어떤 일을 해야 할 지 모르고 있으니 이게 가장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고, 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지방의 서책이 많이 올라왔는데 반사 단자(頒賜單子)를 입계(入啓)한 지 몇 년이 지나도록 명이 내려지지 않아 심지어 책이 썩고 있다고 하니, 이 또한 지체하는 한 예라 하겠습니다."
하였다.

 

충청도에 염병이 극성하였다.

 

6월 3일 무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이때 예조가 상의 건강이 회복된 것을 종묘에 고하고 신하들의 하례를 받기를 청한 것에 대한 비답이 내려지지 않고 있었다. 좌의정 홍명하 등이 속히 윤허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명하가 아뢰기를,
"듣건대 송준길의 차자에서 원자를 보양할 것을 청하였다 하니, 그 뜻이 매우 좋습니다. 조종조의 고사대로 별도로 사부(師傅)를 두어 보필하고 인도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좌참찬 이 진달한 것은 조광조와 이언적이 했던 말이다. 대신과 의논하여 시행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온천에 거둥하셨을 때에 성상께서 비로소 논밭 및 농민의 거처와 의식의 양상을 보셨으니, 이후로는 백성을 염려하는 마음이 반드시 보기 전보다 더할 것입니다.
원자는 깊은 궁궐에서 태어나 외인을 접해보지 못했으니 무엇으로 말미암아 민간의 고통을 알겠습니까. 지금 만일 연석에 나와서 신하들을 친히 접하게 하시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광조도 경연을 열 때에 원자로 하여금 옆에 앉아 조정의 옳고 그름과 백성의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함께 듣도록 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나라의 큰 근본은 원자를 보양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지금 즉시 거행하여 전적으로 유신에게 이 책임을 맡긴다면 그 보양한 효과가 반드시 남보다 다른 점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지금 충청 감사의 장계를 보건대 과연 그의 말이 옳습니다. 평야 지대의 고을에는 논이 많고 산악 지대의 고을에는 밭이 많으니 세두(稅豆)의 견감 문제는 균등하지 못한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당초에 정한 대로 수미(收未) 2말을 견감하고, 경기에도 일체로 시행하라."
하였다.

 

6월 4일 기미

승지에게 공문서를 가지고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옥당 관원 및 좌참찬 송준길에게 《심경》을 강하도록 명하였다.

 

6월 5일 경신

집의 이정이 또 방목의 오서를 살피지 못했다는 것으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처음에 상이 온천에 거둥하면서 훈련 대장 이완에게 도성 안의 도적을 겸하여 살펴 통행 금지를 엄하게 하도록 명하였었다. 법금을 어긴 성균관 노비를 나졸이 성균관 식당으로 달려들어가 다리 안쪽의 하련대(下輦臺) 가에서 잡아갔는데 유생들이 이완이 데리고 있는 하인을 잡아들여 매질을 하자, 이완이 사람에게 모욕당했다고 상소하여 죄를 청하였는데, 상은 ‘나이 어린 부랑배들의 소행을 마음에 둘 것이 있느냐.’고 답하였다. 간원이 이완이 투소한 내용은 고발하는 것과 같다는 이유로 추고하기를 청하니, 상이 듣지 않았다. 유생들도 상소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변명하니, 상이 답하기를,
"자연히 조정에서 시비를 가릴 것인데, 그대들이 상소하여 스스로 해명한단 말인가. 그대들은 더욱 학업에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6월 6일 신유

간원이 전에 아뢰었던 임의백·이만영·박경지 등의 일을 이때에 와서 정지하였다.

 

6월 7일 임술

오시수(吳始壽)를 사인으로, 이선(李選)을 봉교로, 최후상(崔後尙)을 대교로, 조복양(趙復陽)을 부제학으로, 오두인(吳斗寅)을 집의로, 이상일(李尙逸)을 경상 감사로, 이준구(李俊耉)를 강원 감사로, 이시술(李時術)을 동부승지로 삼았다.

 

6월 8일 계해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소대하였다. 교리 박세당 등이 《심경》을 강하고, 좌참찬 송준길이 글뜻을 강하였다.

 

6월 9일 갑자

강원도  삼척(三陟) 등 7개 고을에 봄 이후로 가뭄이 극심하여 5월이 지나도록 모내기를 하지 못하였다고 감사가 보고하였다.

 

6월 10일 을축

대사헌 정지화 등이 아뢰기를,
"수령의 집이 근무지에서 가까운 곳에 있으면 민폐를 끼치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현재 대정 현감 유옥(柳沃)과 정의 현감 김여한(金汝翰)은 모두 집이 본도(本道)의 해안 고을에 있는 자들로 동시에 같은 섬에 임명되었으므로 여론이 다 부당하게 여깁니다. 모두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옥당의 관원 및 좌참찬 송준길을 소대하여 《심경》을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자가 등장하기 전에는 경서(經書)가 단지 원대문만 있었던가?"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주자가 등장하기 전에도 이미 제가의 주설(註說)이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정현(鄭玄)과 가공언(賈公彦) 등의 훈석도 꽤 명백하였는데 주자에 이르러 크게 정비되었으니 이것이야말로 후세에 대단한 공헌을 한 셈입니다."
하였다. 교리 심재(沈梓)가 아뢰기를,
"명나라 사람 양신(楊愼)은 주자의 주해를 비난하였습니다."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명나라 유학자는 대부분 육상산(陸象山)의 학문을 존경하여 숭상했기 때문에 논설마다 주자를 압도하려 했습니다마는 우리 나라는 본래 정자·주자의 정맥을 부지하여 왔습니다.
5현 중에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은 명망과 지위가 현저하지 못한 채 일찍이 혹독한 화를 당하였고, 조광조(趙光祖)도 일찍이 죽었으므로 미처 논설을 수립하지 못하였으나, 이언적(李彦迪)의 논저는 정자와 주자에 대하여 가장 요령있게 본받아 서술하였는데 이황(李滉)이 언적을 계승하여 정주의 학문을 크게 발명하였습니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도 이어 크게 발전시켰으니, 그들의 문집을 보면 학문의 탁월한 면모를 알 수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과거 공부에 빠져 있으면서도 오히려 정자와 주자를 존경할 줄 아는 것은 모두 이이와 성혼의 공입니다.
명나라 때는 설선(薛瑄)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학문이 가장 정당하였고 《독서록(讀書錄)》이란 책도 있어 참고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언적 등의 문집만은 못합니다. 이것은 모두 조종(祖宗)이 배양하신 결과인 것입니다. 전하께서도 심학(心學)에 힘쓰신다면 어찌 바람에 풀이 쏠리듯 하는 효과가 없겠습니까."
하였다.

 

6월 11일 병인

권령(權玲)을 형조 참의로, 윤문거(尹文擧)를 이조 참판으로, 이경휘(李慶徽)를 강화 유수로 삼았다.

 

6월 12일 정묘

사간 김만기, 정언 이익상·권두추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대사간 이연년과 상견례를 행한 다음 조경의 월봉을 환수하도록 연계(連啓)하자는 뜻으로 서로 의논하였는데, 연년이 강경하게 편견을 고집하며 공의(公議)를 막는 바람에 반복하여 논란을 벌였으나 끝내 의견을 일치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신들의 직책은 언론을 주관하는 것이므로 조정의 부당한 조처를 바로 잡으려 하다가 장관에게 저지당하였으니, 어찌 감히 태연히 있겠습니까."
하고,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대사간 이연년이 아뢰기를,
"동료들이 조경의 일을 가지고 연계하고자 했는데, 어리석은 신의 소견과는 어긋나는 점이 없지 않았습니다. 조경이 전에 파면되었던 직책이 바로 지금 그가 맡고 있는 군직이고 보면 월봉을 지급하는 데에 차이를 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소를 올린 한 가지 일을 가지고 반드시 논하고자 한다면 신은 삼가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 조경은 문학과 행실이 모두 뛰어나 평소 사대부 사이에서 존경을 받아왔으니 비록 문자에 관계되는 실수를 범해 죄를 얻었으나 서용하고 난 후에는 전과 다름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여야 너그럽게 포용하는 큰 도량에 해롭지 않을 듯합니다.
조경은 세 조정을 섬긴 구신(舊臣)으로 나이 80에 노모도 살아 있으며 집안이 너무나도 가난하여 끼니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는 형편인데, 이는 실로 조야(朝野)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성상께서 옛정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으로 선왕이 행하셨던 은전(恩典)을 미루어 베풀어 줌으로써 굶어죽지 않게 해주는 것이 과연 훌륭한 덕에 누가 되겠습니까. 신이 의논을 정지하고자 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동료에게 배척당하였으니 어찌 감히 그대로 있겠습니까."
하고, 인피하였다. 헌부가 마땅히 처치해야 하는데 대사헌 정지화, 집의 오두인, 지평 어진익·조성보는 만기 등을 옳게 여기고, 장령 남천택은 이연년을 옳게 여겨 모두 인피하였다.

 

예조가, 종묘에 고하는 등의 일을 다시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좌참찬 송준길이 원자를 보양하는 문제로 논하여 차자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이 우연히 선정신 조광조가 경연에서 진달한 말과 이언적이 8개 조항으로 진규한 것을 보았는데 그 중 몇 가지는 바로 오늘날 일과 서로 부합되었으며 그 논설에는 간절한 충성과 심원한 우려가 토론할 즈음이나 주고받는 사이에도 깃들어 있어 백세 후에 봐도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되니 만세토록 규범이 된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인하여 생각건대, 우리 조종조의 규범의 아름다움과 제도의 세밀함은 삼대 성왕의 법규에 비하여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데 반해 오늘날 보양하는 제도만은 허술하기 짝이 없으니 삼대에 부끄러울 뿐만이 아니라 우리 조종이 이루어 놓은 훌륭한 법과 아름다운 뜻마저도 따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이 이 시점에서 일어나는 한탄과 우려에 견딜 수 없어 이에 감히 외람됨을 무릅쓰고 두 현신이 진계했던 것을 등서해서 진달하여 상께서 보시도록 합니다. 신은 원하건대 성명께서 대신에게 물어본 다음 참작해서 가장 이상적인 것을 채택하여 쓰도록 하소서.
거듭 생각건대, 전하께서 수년 동안 건강 문제로 경연을 정지한 지가 이미 오래 되다 보니 신하들은 생기가 없고 기상도 화통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신명의 도움으로 성상의 건강이 회복되었으니 이제는 분발 진작하여 행여라도 미치지 못한 것이 있는 듯이 혹시라도 잃을까 염려하는 듯이 하며 날마다 새로운 사업을 하시고 수시로 새로운 공을 쌓아서 하늘이 보살펴준 복을 계승하고 백성들의 큰 바람을 위로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 매사를 지연시키고 법규를 무시한 채 그전 병환 중에 하던 전철을 답습한다면 중외의 실망이 훨씬 더할 것입니다. 인심의 향배 문제가 바로 여기에 달려있으니 신은 실로 두렵습니다.
지금은 무더운 계절인데다 다습한 장마가 지치게 하니 몸조리하시는 여가에 비록 법연에 자주 나아가 과로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수시로 공기가 상쾌한 아침과 더위가 가신 저녁에 유신을 소대하여 경사(經史)를 강론하되 매일처럼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덕에 나아가고 사업을 하는 데에 크게 유익할 뿐만이 아니라 답답함을 풀고 건강을 유지하는 도리에도 도움되는 바가 작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전하께서는 조종이 이미 시행하셨던 두 현인의 논설로 우리 원자를 가르치시고 또 이것을 가지고 스스로 경계하신다면 종묘 사직의 다행일 것이며, 백성들의 다행일 것입니다.
선정신 조광조가 경연에서 논설을 진달한 것은 우리 중종조의 일인데 광조는 당시에 부제학이었습니다. 그가 아뢰기를 ‘원자가 봄이 되면 5세입니다. 보통 아이의 예로 말한다면 겨우 말할 줄을 알 때입니다마는 원자는 기질이 특출하니 장차 대성인이 될 자질입니다. 대신이 비록 나아가 보기는 하지만 예경(禮敬)만을 위주로 하고 가르치는 실상은 다하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하고, 승지 김정국(金正國)이 아뢰기를 ‘세종이 홍문관 학사로 하여금 가서 세자를 모시게 하였으니 이는 매우 훌륭한 법이며 아름다운 뜻입니다. 오늘날 국가의 기본이 조금 장구해졌으나 신하로서 정의를 아는 자가 적으니 어찌 우려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광조가 또 아뢰기를 ‘원자를 가르치는 것은 그 일이 매우 어렵습니다. 재상 중에서 훌륭한 덕이 있는 자를 뽑아서 그로 하여금 가까이서 훈도하여 덕성을 이루게 해야 합니다. 상께서도 착한 일을 친히 가르치시고 군자와 소인이 진퇴하는 양상과 길흉과 안위가 소장(消長)하는 이치와 의리와 선악이 나뉘어지는 기미에 있어서도 반복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신다면, 비록 다 이해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보고 듣는데 익숙해져서 자연적으로 지혜도 함께 성장하여 은연 중에 이익되는 바가 매우 클 것입니다. 그리고 경연에서 자리 곁에 있게 하여 조정의 옳고 그른 것과 백성들의 애환을 직접 들어보게 하고 어려서부터 조정의 신하들을 친히 만나보게 해야 합니다.’ 하였습니다.
광조가 또 아뢰기를 ‘원자의 나이가 점점 들어 알아차리는 것이 평소와 같지 않은데 근래에 강학을 어떻게 하는지 듣지 못했으니 우려하는 마음이 실로 깊습니다. 보양관이 사신으로 가기도 하고 병이 나기도 하여 계속적으로 나아가서 보지 않는 듯하니 오늘날 국가의 크게 우려할 일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날 미리 후일 계승할 기반을 다져놓지 않으면 대대로 장구하게 쌓아온 왕업도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일 것입니다. 비록 동궁의 위상이 정립될 때까지 기다린다 하더라도 요속(僚屬)은 설치해야 합니다. 다만 훌륭한 재상을 뽑아 보양관으로 더 책정하고서 혹 승지이거나 사관이거나 홍문관의 연소한 관원으로 하여금 수시로 나아가서 노는 것을 보고 교도(敎導)하게 해야 합니다. 정자(程子)가 청하기를 「사대부의 어린 자식으로 태자를 모시게 한 것은 일찍부터 훌륭한 선비들과 친하게 지내도록 하려는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마는 그렇다고 급하게 서두를 것은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자의 학문을 어찌 잠시라도 폐기했겠는가. 그의 성품이 본래 오락을 좋아하지 않고 단지 글 읽는 것만을 좋아하니 이는 기쁜 일이다. 현재 읽고 있는 책은 《소학》이다. 전일 대신이 이해하기 쉬운 곳을 골라 가르쳐 주었는데 지금은 처음부터 끝까지 빠뜨리지 않고 읽어낸다. 보양 대신은 이미 결정하였다. 수시로 승지 등으로 하여금 가서 보게 한다면 과연 점점 친근한 마음이 들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광조가 아뢰기를 ‘옛사람이 정직한 사람으로 하여금 태자와 함께 거처하게 하려 했던 것은 태자에게 훌륭한 선비를 친애하는 마음을 길러 주고자 해서였습니다. 삼대 이후로는 태자를 제대로 보양하지 못했기 때문에 난리만이 서로 잇따르고 훌륭한 정치는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주역》에 이르기를 「어릴 때 정직함을 양성하는 것이 성인이 되는 공부이다.」 하였는데 더구나 이미 지각이 있는 시기이겠습니까. 대체로 자질이 특이한 것은 믿을 것이 못됩니다. 재주가 남다른 자는 선(善)을 행하기도 쉽지만 악(惡)을 행하기도 어렵지 않는 법이니, 염려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였습니다.
광조가 또 아뢰기를 ‘지금 듣건대 원자의 음성이 매우 인후(仁厚)하다고 하니 신은 기쁘기 그지 없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태자는 인후를 위주로 해야 한다.」 하였으니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원자의 교양 문제는 지나치게 서둘러서는 안 되고 조용하게 훈시해서 점차적으로 성취되도록 해야 하며, 때로는 후원에 나가 놀도록 하여 기력을 기르게 해야 합니다.’ 하였습니다.
이언적이 적어 올린 진수팔규(進修八規)의 일부입니다 ‘옛날에 태임(太任)은 문왕을 임신했을 때 태교한 법이 있었으므로 문왕이 태어나자 현명하고 성인다웠던 것입니다. 옛 성인은 자식을 가르치는 법을 처음 임신했을 때부터 실시하였는데 더구나 이미 태어나서 어릴지라도 지각이 있는 경우이겠습니까. 신은 삼가 생각건대, 원자가 지금 비록 강보에 있기는 하지만 남다르게 영리하고 숙성하여 반드시 평범한 사람보다 다른 점이 있을 것입니다. 교양하고 보익하는 도를 미리 대비해 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신이 삼가 《예경(禮經)》을 살펴보니, 대체로 삼왕이 세자를 가르칠 때 반드시 예와 음악으로 하였는데, 태부(太傅)와 소부(少傅)를 세워 보양하게 하고 태부는 앞에 있고 소부는 뒤에 있게 하여 들어오면 보(保)가 있고 나가면 사(師)가 있었던 까닭에 가르치기만 하면 덕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보부편(保傅篇)에 이르기를 「옛날의 제왕은 태자가 태어나면 예를 거행하여 유사가 재계한 다음 예복을 갖추고서 남쪽 들에서 뵙게 하는데 이것은 하늘에 알리는 것이며, 대궐을 지날 때는 수레에서 내리고 종묘 앞을 지날 때는 총총걸음으로 지나가게 하는 것을 효자의 도리이다. 그러므로 아주 어렸을 때부터 교육은 이미 시행되는 것이다. 주 성왕(周成王)이 어려서 강보에 있을 때 소공(召公)은 태보였고 주공(周公)은 태부였으며 태공(太公)은 태사였다. 보(保)는 신체를 보호하고 부(傅)는 덕의로 돌보아 주고 사(師)는 교훈으로 인도하는데 이것이 삼공의 직책이었다. 이 때에 소부와 소사를 두는데 이는 태자와 즐겁게 지내는 자이다. 그러므로 어려서 지각이 있게 되면 삼공(三公)과 삼소(三少)가 효(孝)·인(仁)·예(禮)·의(義)만을 발명하여 읽히게 하고 간사한 사람은 내쫓아 태자로 하여금 나쁜 행동을 보지 못하게 한다. 이 때에 천하에 아는 것이 많고 학식이 있는 훌륭한 선비를 뽑아서 돕게 해서 태자와 거처 출입을 함께 하게 한다. 그러므로 태자가 태어나서 바른 일만 보고 바른 말만 듣고 바른 도리만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전후 좌우에 모두 정직한 사람만이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정직한 사람과 거처하면서 익숙해지면 정직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마치 제(齊)나라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 제나라 말을 안 할 수 없는 것과 같고, 부정한 사람과 거처하면서 익숙해지면 부정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 마치 초(楚)나라에 태어나 자란 사람이 초나라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다.」 하였습니다.
공자가 이르기를 「소성(小成)은 천성(天性)과 같고 습관은 자연과 같다.」 하였는데 삼대가 장구할 수 있었던 것은 태자를 보익하는 데에 있어서 이러한 것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은 삼대 성왕이 제도를 모두 후세에 복구해야 한다고 봅니다. 더구나 이 태자를 보익하는 법은 더욱 종묘 사직과 백성의 안녕에 관계되는 데이겠습니까. 성명께서 위에 계시면서 이것을 행하기만 하신다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진(秦)·한(漢) 이래로 태자를 가르치는 일을 매우 등한시하여 도리가 아닌 것을 가르치고 법이 아닌 것을 가르쳐서 패망을 초래한 자가 많았으니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옛날 문왕이 태공으로 하여금 태자를 돌보게 하였는데, 태자가 포어(鮑魚)를 즐겨 먹자 태공이 주지 않고서 말하기를 「예에 포어를 밥상에 올리지 않는다 하였는데 어찌 예가 아닌 것으로 태자를 양육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니, 옛사람이 태자를 가르치는 데에 있어서 엄격하기가 이와 같았습니다. 예가 아닌 음식으로 태자를 양육하지 않았다면 정직하지 않은 사람과 정직하지 않은 소리도 보거나 듣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태자의 선행 여부는 조기 교육과 좌우에 있는 사람을 잘 가려 가르치는 데에 달려 있으니 좌우에 있는 사람이 정직하면 태자도 정직하게 됩니다. 이것이 어린 자를 정직으로 양육하는 도리인 것입니다.
신이 어리석은 것도 헤아리지 않고 감히 선왕의 법을 취해다가 오늘날에 시사하는 것은 조정을 위하여 올리는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명께서는 유의하셔서 다시 전편을 취하여 참고하신 다음 시행하소서. 그리고 보양하고 교육하는 방법은 삼대의 법대로 하되 시강원을 설치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일찍이 사(師)·보(保)·부(傅)를 정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하고 또 빈객(賓客)을 정해서 서로 교대로 입시하여 교육하는 직책을 다하도록 하소서. 남쪽 들에서 뵙는 것은 대개 옛날 천자가 행하던 예이므로 지금 거행할 수 없다 하더라도 대궐을 지나갈 때 수레에서 내리고 종묘 앞을 지나갈 때 종종걸음으로 하는 예는 신하된 도리를 보이는 것이니 오늘날 행할 수 있는 일입니다. 보모(保母) 및 부봉(傅奉)하는 사람의 경우는 온화하고 검소하고 너그럽고 인자하며 덕행이 있는 사람을 가려서 맡기고, 음흉하여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내쫓고 가까이 두지 말 것이며, 생활 용품과 의복과 노리개들도 모두 질박한 것으로 하고 사치스러운 물건은 보지 못하게 하고 천박한 말은 듣지 못하게 한다면, 교화가 마음과 함께 이루어져서 법도에 맞는 것이 마치 천성적으로 된 듯하고 성인의 자질이 이미 어릴 때부터 갖추어질 것입니다. 어느 정도 성장한 후에 좋은 말과 훌륭한 논설을 삼가 진달해서 순수한 자질을 양성하고 총명한 성품을 개발시킨다면, 습성과 지혜가 함께 성장하여 하나로 인하여 백 가지를 알게 되어 문왕같은 성인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니, 종묘 사직과 신민의 복이 바로 여기에서 출발하게 됩니다. 신의 마음은 간절합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현재 종묘 사직과 백성의 앞날을 위한 계책은 오직 성학(聖學)을 보도하는 데 있습니다. 그 중에서 태자를 교양하는 것보다 더 큰 일은 없으니 성덕이 이미 이루어졌으므로 경계의 도움이 필요없다고 여기지 말으시고 현재 어리다고 하여 보익하는 도리를 소홀히 하지 말으소서. 대체로 성인으로는 순(舜)만큼 훌륭한 성인이 없는데 우(禹)·고요(皋陶)가 일찍이 경계하기를 잊지 않았습니다. 소공이 또 말하기를 「어린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자신의 철명(哲命)을 스스로 결정짓지 않는 경우가 없는 것과 같다.」 하였는데, 대개 이 말은 자식이 처음 태어났을 때 교양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어리석은 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보통 사람도 삼가지 않으면 안 되는데 더구나 태자같이 중대한 분이겠습니까.’ "

 

6월 13일 무진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약방 도제조 허적,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홍명하 등이 아뢰기를,
"지금 성상의 병환이 쾌차하셨는데, 종기의 병환을 앓던 작년과 비교해 보면 매우 큰 효험을 보신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중외(中外) 사람들이 모두 종묘에 고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중의 마음은 거역하기 어려운 것인데 성상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니 신들은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하고, 허적이 또 아뢰기를,
"안질이 한창 위중하던 때에는 사람들이 모두 애태우며 근심하였는데, 이제 쾌차하셨으니 얼마나 기쁘고 다행스럽겠습니까. 뭇 신하들도 이와 같은데, 더구나 양 자전의 마음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마땅히 위로는 양 자전의 마음을 위로하고 아래로는 신하와 백성들의 기대에 답해야 할 것인데, 어찌 다만 겸양만 지킨 채 여러 사람의 마음을 저버리신단 말입니까."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반복하여 진달하자, 상이 허락하기를,
"경들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힘써 따르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처음에 좌참찬 송준길이 원자를 보양하는 일로 차자를 올렸는데, 오랫동안 비답을 내리지 않다가 이 때에 이르러 상이 송준길의 차자를 내보이면서 이르기를,
"차자에서 말한 일을 의논하여 정하고자 한다. 원자를 가르치고 인도하는 직책을 보양관이라고 부르는가?"
하니, 태화가 그렇다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고사를 살펴보니, 인종이 원자가 되어 보양관과 상견례를 행할 때 나이가 6세였는데, 예를 갖추지 않고 대신을 만날 수 없다는 이유로 관을 쓰게 되었다고 했다."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6세에 관을 쓰고 7세에 책봉하였습니다."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보양관이 상견례를 행할 때의 복색에 대해 일찍이 실록에서 베껴왔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김육(金堉)이 원손의 보양관이 되었던 때는 몇 품(品)으로 하였었는가?"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정 2품으로 하였습니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인조 초기에 소현 세자가 원자가 되었을 때 보양관은 정엽(鄭曄)·정경세(鄭經世)·이정귀(李廷龜)·오윤겸(吳允謙) 등의 신하들로, 모두 1품으로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송시열과 송준길 두 사람을 보양관으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람에게는 혹시라도 병이 있을 수도 있으니 두 사람만을 뽑아서는 안 된다."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김수항(金壽恒)과 김좌명(金佐明)도 합당한 사람입니다."
하니, 상이 이 네 사람을 계하하라고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새로 제수된 경상 감사 이상일(李尙逸)은 진실로 좋은 사람이기는 합니다마는 나이가 많아서 바쁜 업무를 전담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경상도는 물산이 많고 지역이 넓어서 노쇠한 사람이 감당할 곳이 아니니 마땅히 변통하는 조처가 있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이경휘(李慶徽)를 이조 참판 겸 대사성으로, 이유태(李惟泰)를 이조 참의로, 이정(李程)를 부교리로, 김휘(金徽)를 경상 감사로 삼았다.

 

6월 14일 기사

교리 심재(沈梓)가 상소하기를,
"삼가 간원의 계사를 보건대, 조경의 월봉을 환수하는 일을 아뢰면서 몹시 미워하고 헐뜯었습니다. 아, 조경이 어찌 간특한 마음을 품고 바른 자를 미워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오늘 양사(兩司)를 처치할 때에 말을 잘못 만든 잘못을 밝히고자 하였지만 동료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끝내 결론을 내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언론에 관계되는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 이미 진정시키는 방도를 잃었으니, 면직시켜 주소서."
하고, 부수찬 윤심(尹深)이 상소하기를,
"조경은 문장의 전아함과 깔끔한 지조로 인해 사람의 존경을 받고 있으며, 여러 조정을 섬겨오면서 남다른 우대를 받아왔습니다. 비록 일을 논하다 죄를 지어 벌을 받고 몇 년 동안 버려져 있었지만, 거두어 서용한 후에 다시 선조(先朝) 때와 같은 은전을 베푸셨으니, 잘못을 덮어주고 옛정을 생각하는 도리가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어찌 한 가지의 잘못을 이유로 간특한 사람이라고 단정짓고 선조의 옛 은혜까지 다 폐지해서야 되겠습니까. 신의 그릇된 소견이 이와 같았으므로 억지로 동의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감히 태연히 그대로 있겠습니까."
하고, 수찬 김석주(金錫胄)는 상소하기를,
"조경은 신의 조부와 50년 동안 교제한 친구로서 비록 한 장의 소로 인하여 공의(公議)에 죄를 얻었지만, 신이 어찌 차마 구차하게 동료들의 논의에 따라 선신(先臣)의 친우를 탓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부교리 박세당(朴世堂)과 이정(李程)도 논의가 일치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두 상소하여 사면하였는데, 상이 모두에게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라고 답하였다. 이정이 혼자서 양사를 처치하기를,
"월봉을 환수하라는 논의는 실로 여론을 따른 것이므로 편견을 가진 자의 반대에 부딪혔다고 인혐할 것이 못되며, 반드시 정계하려는 의도는 무척 구차한 것이어서 여론의 비난을 받고 있으니 그대로 자리에 있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옳고 그른 것을 그야말로 체통에 맞게 가렸으니, 동료들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은 것은 책임의 소재가 따로 있습니다. 고집만 부리고 의사를 돌이키지 않은 채 억지로 소요를 일으켜 결국 불분명하게 되고 말았으니 과실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사간 김만기, 정언 이익상·권두추, 대사헌 정지화, 집의 오두인, 지평 어진익·조성보는 출사하게 하고, 대사간 이연년과 장령 남천택은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15일 경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월식이 있었다.

 

6월 16일 신미

사간 김만기, 정언 이익상·권두추가 유신의 지척을 받았다 하여 인피하자, 헌부가 처치하여 출사하기를 청하니,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하례를 받는 의식을 행한 후에는 으레 각도의 방물(方物)과 물선(物膳)을 봉진하는 거조가 있었으니 각전에 봉진할 방물과 물선을 모두 동지 방물(冬至方物)의 수대로 봉진하라는 뜻으로 각도에 공문을 보내게 하소서."
하니, 상이 지금 한창 농삿일이 바쁠 때이므로 그 폐단이 극심할 것이라고 하여 봉진하지 말게 하였다.

 

평안도 귀성(龜城) 등 12개 고을에 바람이 심하게 불고 바리때와 쟁반만한 우박이 내렸다. 우박에 맞아 사람과 가축이 죽고 온갖 곡식과 초목이 꺾이고 부러졌으므로 휩쓸고 지나간 곳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6월 17일 임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이홍연(李弘淵)을 대사간으로, 이유(李秞)를 장령으로, 이상진(李尙眞)을 우윤으로, 서필원(徐必遠)을 강화 유수로,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김수항(金壽恒)·김좌명(金佐明)을 원자 보양관으로 삼았다.

 

사간 김만기 등이 아뢰기를,
"삼사(三司)의 관원은, 시비와 가부를 논함에 있어 일가 친척이라고 하더라도 진실로 법전(法典)에 상피하도록 규정된 경우가 아니면 감히 ‘개인적인 정리상 편치 않다.’라고 말하지 못하게 되어 있으니, 이것이 바로 벼슬하는 자가 지켜야 할 예절입니다. 그런데 부수찬 김석주는 조부의 친구라고 말하면서 소를 올려 아뢰기까지 하였으니, 매우 외람된 행동입니다. 그렇다면 정원은 마땅히 받지 않고 되돌려 보내야 했을 것인데 어리석게도 들여 보냈으니 그 또한 매우 부당한 일입니다. 부수찬 김석주를 체차하고 담당 승지를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체차하는 일은 따르지 않고 추고하는 일만 따랐다.

 

6월 18일 계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곽산(郭山) 사람 한경립(韓京立)의 처가 죽은 태아 하나를 낳았는데, 머리가 둘, 코가 둘, 입이 둘, 팔이 둘, 귀가 셋, 눈이 넷, 다리가 넷이었다.

 

6월 19일 갑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대신을 보내어 상의 눈병이 회복된 것을 종묘에 고하니, 백관이 전문(箋文)을 올려 4전(四殿)에 하례하였다. 사죄(死罪) 이하의 각종 죄수를 사면하고 백관을 가자한 다음 팔방에 교서를 반포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왕은 아래와 같이 말하노라. 과인이 불행하게도 병이 나서 오랫동안 약물의 효험을 보지 못하다가 하늘이 가이 없는 복을 주심으로 해서 온천물의 신속한 효험을 보았다. 이에 백관이 축하하는 날을 당하여 비로소 교서를 내려 은전을 반포한다. 돌이켜보면 나는 건강이 문제였는데 눈병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경자년 이후부터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고 작년과 재작년 동안에 많은 사무를 폐기해야만 했다. 침도 맞고 뜸도 뜨고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다 써보았지만 감기와 열병이 서로 타고들어 점점 고질병이 되어가고 있었다. 밤잠 못자는 것으로 어찌 자전의 걱정만 끼쳤겠는가. 어려운 시기를 만나 신하들의 소망을 위로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갖은 방법을 다썼던 것이지 어찌 내 몸 아끼자고 그랬겠는가. 이번 온천에서의 불제는 성조(聖祖)의 일에 견주어 보려고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내가 어찌 이 일이 즐거워서 대신에게 재삼 물었겠는가. 신명의 도움으로 만에 하나 효험을 볼까 해서였다. 가볍게 온천물로 씻고 나자, 다음날부터 차도를 느낄 수 있었다. 묵은 병이 자연히 가셔 몸에서 때를 밀어내는 것만 같았고, 두 눈을 환하게 해주는 것으로 보아 어찌 각막을 긁어내는 칼을 기다리겠는가. 종묘 사직의 크나큰 은덕인 것이니, 누가 산천의 기이한 반응이라고 하겠는가. 어가가 처음 돌아올 때 백성들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고, 경연을 다시 열어 책을 대하니 선명하였다. 비록 온 나라가 기뻐하기를 바랄 일이나 삼가는 마음을 풀어 놓지는 않았다. 밝은 뜰에서 하례를 받으려니 마음에 부끄럽고, 청결한 사당에 경건히 고하는 일만은 억지로 신하들의 뜻을 따랐다. 대덕(大德)은 다같이 사는 것이라서 뇌우(雷雨)의 은혜를 입게 되었고 백성들이 우러르니 감해 해와 달이 제 빛을 찾았다고 하겠다……. 아, 탕반(湯盤)에 새긴 일신(日新)의 명(銘)은 진실로 내가 힘써야 할 것이고, 주아(周雅)의 천지(川至)의 송(頌)은 백성들과 함께 기쁨은 나누어야 할 일이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는 것이니 마땅히 잘 알 줄로 믿는다."

 

6월 20일 을해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이민서(李敏叙)를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6월 21일 병자

사간 김만기 등이 아뢰기를,
"정배(定配)된 죄인이 군읍을 지나갈 때에는 단지 타고갈 말과 먹을 음식만을 주는 것이 상규(常規)입니다. 그런데 윤선도(尹善道)가 삼수(三水)로부터 유배지를 옮겨 가던 때에는 함경도 수령이 40여 명의 노비와 20여 필의 말을 제공하고, 또 가마꾼을 각 접경 지역에 대기시켜 두고 기다리도록 연로(沿路)에 통지하기를 마치 중앙 관원이 지방으로 출장갈 때에 미리 공문을 띄우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국법을 무시하고 민폐를 끼친 그 정상이 진실로 놀라우니, 맨 먼저 통지를 보냈던 수령과 연로의 수령을 감사로 하여금 조사해 내게 하여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하소서."
하니, 따랐다.

 

평양에 지진이 있었다. 우레가 치는 듯한 소리가 동쪽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옮겨갔는데, 집들이 다 흔들렸다.

 

6월 22일 정축

집의 오두인 등이 아뢰기를,
"효릉 참봉 조명한(趙鳴漢)은 온양 유생이 상소하던 때에 음흉한 마음을 품고 부정한 치사를 하였으니 파면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명한이 앞장서서 소를 올려 임유(林濡)의 죄를 들추어 내어 과방(科榜)에서 삭제되게 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파면되었다.

 

6월 23일 무인

권대운(權大運)을 도승지로 삼았다.

 

예조가, 상의 건강이 회복되었으므로 경과(慶科)를 시행하여 별시에서 인재를 뽑고 초시에서 6백 명을 뽑기를 청하니, 따랐다.

 

처음에 평안도 어사 민유중(閔維重)이 서계를 올리자, 조정이 함경 감사로 하여금 설한령(薛罕嶺)에 별도로 파수하는 초소를 두도록 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감사 민정중(閔鼎重)이 장계로 아뢰기를,
"설한령은 함흥에서 서북쪽으로 3백 리 떨어진 큰 산의 인적없는 곳에 있으므로 비록 방어하고자 하여도 매우 어려운 형편입니다. 또 함흥은 강계(江界)·삼수(三水)와 경계를 접하고 있으므로 장진강(長津江)에 별장을 두어 설한령 서쪽과 별해령(別害嶺) 북쪽의 불시 사태에 대비해 오다가 근래에는 폐지하고 사졸에게 포를 거두고 있으니 매우 부당한 일입니다. 올 가을부터 다시 장진에 별장을 두고 파수를 보고 삼을 캐어 가지 못하도록 지키는 등의 일을 별장으로 하여금 겸하여 살피게 하소서."
하였다. 이를 비변사에 내렸는데, 비변사가 회계하자, 따랐다.

 

6월 24일 기묘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6월 25일 경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지평 조성보가 아뢰기를,
"사인 오시수가 여론이 일고 있는데도 스스로 처신할 방도를 생각지 않고 태연히 공무를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은 언론에 관계되는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 즉시 바로잡지 못하여 거듭 여론의 비난을 받고 있으므로 감히 태연히 있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집의 오두인, 장령 이유·이섬, 지평 어진익도 이 일 때문에 인피하고, 사간 김만기, 정언 이익상·권두추도 논핵하지 않은 잘못이 헌부와 다르지 않다고 하여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6월 27일 임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부수찬 윤심(尹深)이 양사를 처치하기를,
"오시수가 사직소를 내고 출사하지 않은 지 벌써 10일이 넘었으니, 담당 관원으로서 자처함에 있어 이밖에 무엇을 더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에 와서 태연히 있다는 것으로 죄를 삼고 있으니, 너무 지나치다고 하겠습니다. 처음에 아울러 논하지 않은 것이 실로 생각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었고 보면, 헌부의 인피는 비록 스스로 편안하지 않아서 한 것이겠지만 달리 체직할 만한 잘못은 없습니다. 집의 오두인, 장령 이유·이섬, 지평 조성보·어진익은 체차하고, 사간 김만기, 정언 이익상·권두추는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김만기 등이 출사한 후에 다시 헌부가 이미 체직되었는데 구차하게 혼자 출사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자, 옥당이 상차하여 출사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6월 29일 갑신

간원이 아뢰기를,
"사인 오시수가 대관(臺官)으로 있을 때에 진달한 내용은 대단히 그릇된 것이었습니다. 환수해야 한다는 논의가 이미 제기되었으면 마땅히 자신의 허물을 반성하고 자처할 방도를 찾기에 여가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새로 제수된 관직에 취임하여 조금도 거리낌없이 여러 날 동안 근무하고 있었으니, 바로잡는 조처가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를 체차하소서.
며칠 전 부수찬 윤심이 올린 상소에 ‘조경이 일에 대해 논하였다가 죄를 얻었다.’고 하여 마치 조경이 직언(直言)을 하다가 뜻을 거슬러 부당한 벌을 받은 것처럼 말하였으니, 시비가 전도됨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체직을 청하는 때에 이르러서는 헌부가 의도적으로 말을 만들어 그를 감싸려 하였으니, 더욱 놀라운 일입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이조가 아뢰기를,
"원자 보양관에 대해 아문(衙門)의 호칭이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전례대로 강학청(講學廳)이라 부르고, 그밖에 응당 행하여야 할 절목들은 예조로 하여금 전례를 조사하여 여쭈어 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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