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임자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제신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년에 온천에 행행하려 하니 대신은 멀리 내보낼 수 없다. 사은사(謝恩使)는 종실(宗室)이나 부마(駙馬)로 차송하고 싶은데 갈 만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니,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부마 가운데 갈 만한 사람은 청평위(靑平尉)가 있고, 종실 가운데는 회원군(檜原君)이 있습니다."
하자, 상이 청평위를 보내라고 하였다.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을 사은 겸 진하 상사로, 김시진을 부사로, 성후설을 서장관으로 삼았다.
동부(東部)의 성균관 관비(館婢)가 한 번에 아들 둘, 딸 하나를 낳았다.
12월 2일 계축
대사헌 박장원 등이 아뢰기를,
"비국과 빈청의 좌기(坐起)나 일차(日次) 이외에 인견하는 거조가 있게 될 경우에는 양사의 입시 여부를 정원이 당연히 계품해야 하는데 어제 빈청에 제재(諸宰)들을 입시하라는 명이 내린 뒤에 정원에서 양사의 장관은 패초(牌招)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곧바로 계달했으니, 상규(常規)에 어긋나는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뒤 폐단과도 관계가 되니 해당 승지를 추고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두 청사(淸使)가, 왜인의 조총(鳥銃) 2병(柄), 활 2장(張), 통아(筒兒) 2개(箇), 편전(片箭) 10부(部)를 요구했으므로 연접 도감(延接都監)이 진계하고서 주었다.
12월 3일 갑인
감시(監試)의 유생(儒生) 가운데 가자(加資)받은 것을 쓴 사람은 모두 발방(拔榜)시켰다. 이때 사습(士習)이 투박하여 유학(幼學) 가운데 감시에 응시한 자들이 모두 낭자(郞資)를 썼기 때문에, 이에 앞서 예조에서 금단할 것을 청하였고 승전을 받들어 중외에 분부하기에 이르렀으나 유생들이 이를 준행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가자(加資)받은 것을 쓴 사람이 참방(參榜)된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예조가 조사하여 발방할 것을 청하니, 상이 그렇게 하게 하고 계묘년031) 이후 식년시(式年試) 때의 예조 당상을 추고하게 하였다. 발방된 자는 모두 5인이었다.
12월 6일 정사
청사(淸使)가 돌아갔다. 이때 두 사신 이하 대통관(大通官) 등이 청구하는 물건이 끝이 없었으므로 그들이 거쳐간 주군(州郡)은 그 때문에 말할 수 없이 허모(虛耗)하게 되었다.
12월 10일 신유
성후설(成後卨)을 장령으로, 조형(趙珩)을 우참찬으로, 이연년(李延年)을 좌부승지로, 송시철(宋時喆)을 형조 참의로 삼았다.
형조의 문서를 정원에 유치했다가 잃어버린 것 때문에 그날 입직한 서리(書吏) 2인을 수치(囚治)하라고 명하여 모두 정배시켰다. 간원이 당해 승지를 추고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12월 11일 임술
계복일을 물리라고 명하였다.
처음에 정원이 이날 초복(初覆)을 실시하고 13일에 재복을 실시하고 17일에 삼복을 실시할 것으로 날짜를 잡아 들였는데 상이 감기 증세가 오랫동안 낫지 아니하므로 늦추어 행하라고 명하였는데 결국 시행하지 않았다.
달에 달무리가 지고 양이가 있었다. 흰 무지개가 햇무리를 가로질러 달을 가리켰다.
강도 유수 서필원이 상소하기를,
"신이 사람을 통해 듣건대, 공조 판서 이완이 신더러 전일에 청했던 모든 일을 낱낱이 배척하면서 신이 선조에 이루어 놓은 계획을 모두 무너뜨리고서 이로 인하여 강도의 임무를 대신에게 구관하도록 한다고 하니 매우 놀랍습니다. 신이 외람되이 중대한 분부를 받아 일을 그르치는 일이 이와 같이 극심하니 삼가 바라건대, 신이 진달하였던 전일의 사목(事目)을 다시 불태워 버리고 강도의 모든 일을 한결같이 전례에 의하여 시행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신을 옥리에게 내려서 망령스럽게 행동한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고 그 상소를 비국에 내렸다.
12월 12일 계해
사간 이정(李程) 등이 아뢰기를,
"사송(詞訟)에 관한 법규는 경외(京外)에 각기 장관이 있으므로 소재에 따라 관에 정소(呈訴)하여 송변(訟辯)하는 것이 본래의 국법입니다. 그런데 근래 엉뚱한 무리들이 연줄을 타고 곡경(曲逕)을 통하여 하리(下吏)들과 부화 뇌동해서 곧바로 형조에 정소한 다음 주현(州縣)에 이문(移文)하게 함으로써 기필코 자신들의 간계(奸計)를 이루고야 마니 그 폐단이 점점 확대되어 분란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지금부터는 경외의 취송인(就訟人) 가운데 진실로 본관에서 잘못 판결하여 신리(伸理)를 요구하는 경우가 아니면 각각 거처하는 고을에서 판결하여 주게 하고, 만일 전처럼 단계를 건너뛰어 정소하는 자는 일체 금단시키고 청리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지난번 선혜청(宣惠廳)의 강창(江倉)에서 쌀을 받아들일 때 어떤 군사가 쌀말이나 되게 훔쳐내다가 발각이 되자 낭청이 잡아들여 죄를 결단했는데 낮부터 밤에 이르기까지 결박하여 언 땅에 거꾸로 세워 놓았으므로 6일이 지나서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쌀을 훔친 죄는 다스려야 하는 것이지만 인명(人命)은 지극히 중한 것인데 죽음에 이르게 했으니 참으로 매우 놀랍습니다. 해당 낭청을 조사해서 죄를 부과하게 하소서. 병조는 사계(査啓)할 때 장형의 수가 많고 적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기한 내에 죽었으면 전례에 따라 죄를 청해야 하는데 그저 범연히 회계(回啓)하였으니 자못 상세히 핵실하는 태도가 부족했으며, 정원은 전혀 이를 살피지 않은 채 받아들였으니 또한 잘 살피지 못한 잘못을 면할 수 없습니다. 병조의 해당 당상과 정원의 해당 승지를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선혜청 낭청(宣惠廳郞廳)은 곧 김설(金卨)이다. 그의 아들 김우석(金禹錫)이 승지로 있으면서 그 일을 숨기려 했었는데 대관이 듣고 논계하여 실상을 조사해 내게 된 것이다. 김설은 이 때문에 수금(囚禁)되었으나 마침내는 우연히 살인한 율(律)로 논하여 고신(告身)만 빼앗았다.
12월 14일 을축
정언 이동직(李東稷)이 인피하기를,
"대각이 일을 논할 즈음에 품계하는 규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엊그제 본원(本院)의 계사에서 ‘법을 무시하고 단계를 뛰어넘어 정소하는 경우에는 이를 청리하지 말게 할 것으로 승전을 받들게 하라.’는 한 조항에 대해 ‘여하(如何)’로 결사(結辭)한 것은, 그날 동료들에게 간통(簡通)한 내용의 끝부분의 말로 서둘러 전서(傳書)하느라고 잘못 써 넣은 것을 미처 산정(刪正)하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듣건대 물의가 모두 그르다고 하는데, 어찌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사간 이정(李程), 헌납 최일(崔逸)도 모두 인피하였다. 지평 어진익·정재희가 처치하여 문자를 잘못 쓴 것은 바삐 서두르다 그렇게 된 것이므로 원래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출사시키기를 청하자, 동직(東稷) 등이 뜻밖에 출사하기를 청했다는 이유로 재차 인피하였다. 어진익과 정재희도 처치한 것이 부당하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응교 이민서 등이 처치하여 아울러 체직시키게 하였다.
밤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가고 화성(火星)이 태미원(太微垣) 왼쪽에 있는 집법성(執法星)으로 들어갔다.
12월 16일 정묘
이경억(李慶億)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12월 17일 무진
고양(高陽)에 사는 백성 최순일(崔順一)이 동생을 찾는다고 핑계하고 호지(胡地)로 들어가서 책문(柵門)에 이르러 체포되었으며, 또 어떤 여인(女人)도 동시에 체포되었는데 봉황성(鳳凰城)의 성장(城將)이 마음대로 결단할 수 없다 하여 아울러 심양(瀋陽)으로 들여보냈다. 동지사(冬至使) 김좌명(金佐明) 등이 이 일을 아뢰었다.
12월 20일 신미
정계주(鄭繼胄)를 사간으로, 홍만용(洪萬容)을 헌납으로, 정창도(丁昌燾)를 정언으로, 소두산(蘇斗山)·최관(崔寬)을 지평으로, 조한영(曺漢英)을 호조 참의로 삼고, 이경억(李慶億)을 발탁하여 우윤으로 삼고, 김만기(金萬基)를 발탁하여 동부승지로 삼았으며, 정만화(鄭萬和)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밤에 달이 태미원(太微垣) 안으로 들어갔다.
12월 21일 임신
흰 무지개가 해를 가로질렀다.
헌납 홍만용(洪萬容)이 아뢰기를,
"근래 백관들이 직무 수행에 태만하여 일을 하리(下吏)들에게 맡기고 있습니다. 후사(喉司)에서는 왕명의 출납을 오로지 관장하고 있어 대소 문서(文書)를 직접 스스로 간검(看檢)하는 것이 그 직분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번 입계한 문서를 잃어버린 것은 전에 없었던 큰 사건으로, 직책을 완수하지 못한 잘못을 어찌 추고만 하고 말 일이겠습니까. 해당 승지를 아울러 파직시키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오두인(吳斗寅) 등이 아뢰기를,
"종묘(宗廟)의 납향 대제(臘享大祭) 때 축사(祝史)인 견창령(甄昌令) 이직(李㮨)은 자신의 아우인 안창령(安昌令) 이억(李檍)을 대신 보냈고 봉조관(奉俎官)인 무겸 선전관(武兼宣傳官) 심시현(沈時顯)은 향(香)을 받은 뒤 날이 저물어서야 뒤늦게 도착했으니, 직과 억은 잡아다가 추문한 다음 정죄하고 심시현은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에 앞서 조정에서 제도의 군민(軍民) 가운데 징수할 데가 없는 조적(糶糴)과 신역(身役)을 정밀하게 조사하여 계문하라는 명이 있었다. 충청도의 전 감사 김시진(金始振)이 조사하여 책으로 만들어 보냈는데 그 숫자가 매우 소략했기 때문에 조정에서 다시 정밀히 조사하게 하였다. 그런데 시진은 이미 체직되고 임의백(任義伯)이 대임으로 부임하여 치계하기를,
"조사하여 감면한 것이 너무 많게 되면 백성들은 혜택을 받지만 국가의 저축은 감축되니 전후로 조사하여 책자 만드는 것을 아울러 우선 정지하고, 온 도내 54고을의 원곡(元穀)의 원수(元數)와 해조에서 으레 받아들이는 십분(十分)의 모곡(耗穀)과 상평창·진휼청에 회부(會付)된 원곡(元穀)은 모두 탕감시키지 마소서. 그리고 단지 상평·진휼의 금년 모곡을 덜어내어 일도(一道)의 도망하거나 죽은 자와 빈궁하여 상납할 수 없는 자들의 미수된 환자[還上]에 충당시킨다면 국가의 손해는 매우 적고 백성들이 받는 혜택은 실로 많게 됩니다. 만일 포흠(逋欠)의 숫자가 많아서 양청(兩廳)의 1년 모곡으로 충당시키기에 부족하다면, 또 신의 감영(監營)에 치부(置簿)되어 있는 곡식과 통영(統營)의 모곡을 옮겨서 그 숫자에 충당시켜 휴흠(虧欠)이 없게 하면 어찌 온편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는데, 일이 비국에 내려졌다. 회계하기를,
"아뢴 대로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22일 계유
이상일(李尙逸)을 우승지로, 송시철(宋時喆)을 좌부승지로, 이정(李程)을 부교리로 삼았다.
정언 정창도가 시사(試射)에서 분수(分數)가 없어 응당 추감을 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2월 23일 갑술
충청도 공산군(公山郡) 등 아홉 고을에 지진이 발생하였다.
함경 감사 민정중이 소장을 올려 임진란에 충성을 바친 사람이 정려(旌閭)나 상전(賞典)을 얻지 못한 자가 20인인데 그들의 성명을 기록하여 보고하고 포상을 줄 것을 청하니, 비국에 내렸다. 회계하여 이붕수(李鵬壽), 유응수(柳應秀) 등 10인에게는 증직하고 나머지는 아울러 복호(復戶)하기를 청하니, 따랐다.
12월 25일 병자
이때 우역(牛疫)이 크게 치성하여 전생서(典牲署)에서 기르던 검은 소 중에서 14두(頭)가 병으로 죽었다. 당시의 우역이 팔도가 모두 그러했는데 제주가 더욱 극심하여 희생(犧牲)을 제공할 수 없을 정도였다.
12월 26일 정축
도목 대정(都目大政)이 있었다. 이후산(李後山)을 승지로, 이세장(李世長)을 정언으로, 김우석(金禹錫)을 형조 참의로, 유원연(柳垣然)을 황해 병사로, 이민발(李敏發)을 전라 좌수사로 삼았다.
영중추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상차하기를,
"흰 무지개가 발생한 변은 참으로 매우 놀랍고 참담하기 그지없습니다. 신이 삼가 기억하건대, 금년 2월 초하루에 흰 무지개가 해를 가로지른 일이 있었는데 이날 사직에 대제를 지내는 날이었으며, 이번 21일에 있었던 것은 또 사직에 행사(行祀)가 있은 뒤였으니, 전후의 변이 모두 사직에 제사가 있을 때 있었습니다. 신의 혼모한 우견(愚見)으로는 감히 한유(漢儒)들처럼 부회(傅會)하여 말할 수 없습니다만 천지(天地)와 삼광(三光)의 변이 한 해에 중첩되게 발생하였고, 강상(綱常)과 윤기(倫紀)의 문란이 거의 금수(禽獸)의 지경에 이르렀으며 팔로(八路) 군민(軍民)들의 가슴에는 원기(怨氣)가 가득 찼으니, 하늘이 견책을 보이지 않았더라도 진실로 이미 써늘한 두려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큰 변이가 잇따라 나타난 것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는데 말해 뭐하겠습니까. 호미를 무기로 삼아 떼 지어 반역하는 것은 원망이 누적된 데서 연유되지 않는 경우가 없는데 숲속에서 무리를 이루는 조짐이 이미 보였으니, 이를 좀도둑으로 여겨 하찮게 볼 수 있겠습니까.
지금의 융정(戎政)은 외관상으로는 잘 수거(修擧)된 것 같지만 그 근본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옛말에 백성이 모두 군병(軍兵)이라고 했습니다.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삼군(三軍)의 무리를 모두 제대로 쓸 수 있지만 백성의 마음을 잃으면 백만의 무리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른바 근본이란 것은 인정(仁政)을 행하는 것인데, 인(仁)이란 것이 어찌 구구한 작은 혜택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나라에 일이 없을 때는 인정을 행하여 은택을 베풀고 호오(好惡)를 똑같이 함으로써 민심을 얻고, 일이 있을 때는 상벌(賞罰)을 공평하게 하고 호령(號令)을 엄숙하게 하여 윗사람을 친애하는 백성을 몰고 나아가 나를 위하여 쓰이게 한다면 어찌 무너져 흩어질 걱정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백성이 부역(賦役)에 시달려 추워도 옷을 입지 못하고 굶주려도 밥을 먹지 못하여 공사(公私)의 부채를 있는 힘을 다해도 갚을 수가 없는가 하면 인족(隣族)의 침징(侵徵)으로 피를 빨고 살을 도려내는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모두들 떠나 흩어질 마음을 품고 있으니, 어떻게 급할 때 백성의 힘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돌아보건대, 여러 창고(倉庫)를 중첩되게 건립하였는데 거기에 미곡(米穀)이 모두 가득 차 있었고 병조·호조의 포목(布木) 또한 가득 차 있었지만 이것이 토목의 역사(役事)로 들어간 것이 많았는데, 백성들은 말할 수 없이 가난하여 전야(田野) 가운데서 춥고 배고픔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적현(赤縣)032) 과 대부(大府)에는 죄수가 옥에 가득차 있는데 세시(歲時)가 박두한 지금 울부짖는 원망이 길에 가득한 실정입니다. 성상(聖上)께서 어찌 백성에게 인정(仁政)을 베풀려 하지 않겠습니까마는 봉행하는 자들이 우러러 부합되게 하지는 못하면서 오직 뒷날의 죄책(罪責)만 면하려 하고 있으니, 백성을 위하여 고통을 감수하고 나설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아, 죄가 있어 뇌옥(牢獄)에 오래 갇혀 있는 것도 옛사람은 오히려 위로 화기(和氣)를 손상시키게 된다고 했는데 더구나 이 호소할 데 없는 곤궁한 백성이 굶주린 나머지 수화(水火)에 빠져 허덕이는데도 질곡(桎梏)과 침학(侵虐)을 가하는 데야 말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신의 의견에는 위에서 특별히 은혜로운 윤음(綸音)을 내려 속히 제도의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곤궁하여 굶주리는 자, 의지할 데 없는 노약자, 인족으로서 침징을 당하는 자들은 아울러 즉시 탕감시키고 그 헛된 장부(帳簿)는 불사른 다음 유사(有司)에게 송부하는 일이 없게 건강(乾剛)으로 결단한다면 이것이 또한 재이를 없애고 화기를 부르게 하는 데 하나의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옛날 성철(聖哲)한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던 방법은, 검소하게 하고 근면하게 하는 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검소하지 않으면 용도가 과분하여 재물을 손상하니 토목 공사를 일으키고 복완(服玩)을 사치하는 해가 천재(天災)보다 심하여, 근면하지 않으면 마음이 게을러져 일을 폐기하고 안일만을 취택하게 되니 궁첩(宮妾)과 환시(宦寺)를 친하는 때는 많고, 훌륭한 사대부(士大夫)들을 인접하는 때는 적게 되어 점차 온갖 일이 추폐(墜廢)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이는 실로 임금이 크게 경계해야 될 점인 것입니다. 우리 성상께서 잘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뜻이 지극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도 국사가 날로 잘못되고 조정이 존엄해지지 않음은 물론 궁가(宮家)의 복식(服飾)에 이르러서는 옷깃과 소매를 희게 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찬품(饌品)도 전에 제공하던 것과는 아주 다릅니다. 여항(閭巷)에서도 전하기를 ‘이는 궁중에서 하는 것을 본받은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런 재이를 만난 때를 당하여 위에서 다시 더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날로 더욱 면려하실 것은 물론 육책(六責)033) 으로 자책하시고, 조금만 상의 건강이 회복되면 부지런히 강연(講筵)을 여시고 하루에 세 번씩 강관(講官)을 접견하시어 부지런히 잘 다스려지기를 도모하시면서 군신(群臣)들에게 솔선하신다면, 위가 이렇게 하는데 아래에서 스스로 새롭게 하지 않는 자가 어찌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차자의 내용에 경계한 것이 간절하여 내가 감탄하고 있다. 마땅히 유념하여 삼가도록 하겠다. 의논하여 조처할 일은 묘당(廟堂)과 함께 채택하여 시행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12월 27일 무인
도목 대정(都目大政)이 있었다. 홍만용(洪萬容)을 이조 정랑으로, 최일(崔逸)을 헌납으로, 남이성(南二星)을 이조 좌랑으로, 이정(李程)을 부응교로 삼았다.
상이 춘향 대제(春香大祭)의 제관 단자(祭官單子)로 하교하였다.
"이 단자를 보니 영녕전(永寧殿)의 초헌관을 2품관으로 차정하였는데 1품 중에 어찌 합당한 사람이 없겠는가. 이조 당해 당상과 낭청을 아울러 무겁게 추고하고 제관 단자는 다시 내보내서 개정하여 들이도록 하라."
좌의정 홍명하가 첫 번째 정사하니, 상이 명하여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하였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제신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와 우상 허적이 아뢰기를,
"천재(天災)가 거듭 발생하는 것이 지금보다 더 심한 때가 없어서 1년에 흰 무지개가 두 번이나 태양을 가로지르는 변이 있는 데에 이르렀으니 놀랍고 두려운 마음을 어찌 다 진달할 수 있겠습니까. 위에서 재이를 없애는 방도에 대해 지극하게 하지 않는 것이 없어 민역(民役)을 견감하고 원옥(冤獄)을 신리시키는 등의 일을 이미 다 시행하였습니다. 따라서 신들을 책면시킨다면 하늘에 응하는 도리에 가합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한 일이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킬 만한 것이 없었으니, 오늘날의 재이를 어찌 경들에게 책임지울 수 있겠는가."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상께서는 깊숙한 궁궐에 계시기 때문에 비록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외지에 있는 자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신의 구구한 바람은 지금 원자(元子)께서 점점 장성하고 있으니 상께서 항상 원자를 교회(敎誨)하여 제반 행사에 있어 원자가 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일 경우 위에서도 하지 않으시면 어찌 매우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부제학 조복양(趙復陽)이 아뢰기를,
"대신은 마땅히 성상을 보필하고 상께서도 대신을 책려하셔서 군신 상하가 서로 힘쓴다면 모든 일이 제대로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정의 기강이 엄하지 않은 것이 오늘날의 가장 큰 걱정이다."
하자, 복양이 아뢰기를,
"이른바 기강이라고 하는 것은 엄한 형벌과 까다로운 법으로 진작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처사가 합당하면 기강은 저절로 확립될 것입니다."
하였다. 태화가 이단하의 소장을 주달하면서 아뢰기를,
"이 상소는 조정에서 정문부(鄭文孚)를 포장하여 증직시켜 주기를 바란 것입니다. 임진 왜란 때 북도(北道)의 백성들이 왕자를 잡아가지고 주군(州郡)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켜 왜적에게 항복했을 적에 문부가 북평사(北評事)로서 의병을 창도하여 역적을 치고 주군을 회복시켰고, 그 공으로 길주 목사(吉州牧使)에 초배되었는데, 얼마 후에 당로자(當路者)의 비위에 거슬려 끝까지 쓰여지지 못했습니다. 혼조(昏朝)에 이르러서는 주현(州縣)에 은거하고 있다가 반정(反正)한 뒤 곧바로 전주 부윤(全州府尹)에 제배되었으나 얼마 후 모상(母喪)을 당하였습니다. 그때 어느 훈신이 조문을 갔다가 그 여막의 벽에 쓰여져 있는 전에 지은 영사시(詠史詩)를 보고서 다른 사람에게 전설(傳說)했는데 급기야 역옥(逆獄)에 연루되어 체포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석방되려 할 즈음 대간(臺諫)에서 그 시의 뜻이 지적한 것이 있다고 하여 다시 형신할 것을 청하였고 드디어 장하(杖下)에서 죽었습니다. 고 상신 조익(趙翼)이 당시 문사 낭청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을 상세히 알고 있었는데 항상 억울하다고 말하였습니다."
하고, 복양은 아뢰기를,
"문부가 혼조 때 한찬남(韓纘男) 등에게 빌붙지 않았기 때문에 현직(顯職)에 기용되지 못했습니다. 반정한 뒤 박홍구(朴弘耉)의 옥사에 그의 이름이 역적의 입에서 나와 체포되었는데, 홍구의 아들 박지장(朴知章) 등의 공사(供辭)에 ‘문부는 장재(將才)가 있기 때문에 뜻을 두고 찾아가 만났으나 말을 하지 못했다.’ 하였습니다. 신의 아비 익(翼)이 문사 낭청으로 있으면서 그가 억울하다는 것을 위관(委官)에게 극력 말을 하여 일이 거의 풀리다가 그만 시어(詩語)에 좌죄되어 죽고 말았습니다. 신의 아비가 매양 그가 억울하다는 것을 말하였으므로 신도 들었었습니다."
하고, 허적은 아뢰기를,
"문부가 임진년에 세운 공은 사람들의 이목에 살아 있으며, 그의 죽음이 죄에 걸맞지 않다는 것을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는 문부가 창원 부사(昌原府使)로 있을 때 지은 것으로 계해년 전의 일이며 또 그가 스스로 회포를 읊은 것인데 국가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시에 무슨 말이 있었는가."
하였다. 태화가 그의 시(詩)에서, ‘초나라가 비록 삼호이나 역시 진나라를 멸망시키리라는 남공(南公)의 말이 반드시 타당한지 모르겠다. 한번 무관(武關)에 들어가자 백성들의 바람이 끊어졌는데 잔약한 손자는 무슨 일로 또 회왕이 되었는고’라는 구절을 외니, 상이 이르기를,
"시어(詩語)에 다른 뜻은 없는 것 같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그와 함께 일을 한 사람들은 이미 추증(追贈)되었으니 이 사람에게도 특별한 은전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허적은 아뢰기를,
"함께 일을 한 사람이 이미 2품에 증직(贈職)되었으니, 이 사람은 1품을 추증해도 됩니다."
하고 복양은 아뢰기를,
"또한 그의 자손을 수록(收錄)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품계를 뛰어 증직시키고 자손들을 녹용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서필원(徐必遠)이 품달한 강도(江都)에 변통할 일을 탑전에서 정탈할 때에 이완은 외지에서 돌아오지 않았었는데, 급기야 이완이 조정에 돌아와서는 필원이 새로 제시한 사목은 선조(先朝) 때 품정한 내용과 크게 서로 틀리다고 했기 때문에 필원이 이를 이유로 인혐하여 사면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완에게 하문하였다. 이완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선조(先朝) 때 곤수를 역임한 적이 있는 사람을 강화 중군으로 차송하여 군정(軍政)을 일체 위임하게 하였는데 지금 기필코 이를 파기하고 도사(都事)로 그 임무를 대행시키려 합니다. 도사는 양향(粮餉)을 주관하고 있는데 어떻게 중군을 검행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첫번째 불가한 것입니다. 필원은 기필코 별파진(別破陣)을 다 파기하고 단지 약간의 사람만 남겨 포(砲)를 쏘는 데 쓰려고 하나, 강도에 장치해 놓은 대포는 소포(小砲)에 견줄 것이 아니어서 대포 하나에 탄약을 장진할 때 5, 6인을 써야 하기 때문에 선조(先朝)에서 별파진을 강도로 내려보내어 도표(圖表)에 의거해 교습시키기에 이르렀는데, 이제 이미 연습시켜 재기(才技)을 완성시키지 못하고서 도리어 쓸데없다고 하면서 파기시킬 것을 청하니, 이것이 두 번째 불가한 것입니다. 그리고 정포진(井浦鎭)을 교동(喬桐)으로 옮기려 하고 있는데 교동의 형세는 신이 소상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곳은 매우 좁은 데다가 본디 시초(柴草)가 없으니 진(鎭)을 옮긴들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또 강도의 방어를 철수하여 쓸모없는 지역에다 옮기는 것이 무슨 의도인지 신은 모르겠습니다. 월곶(月串)·용진(龍津)·초지(草芝) 세 개의 진은 선조(先朝) 때 처음 수군 첨만호(水軍僉萬戶)를 두어 강나루의 요충지를 막았으니 우연한 뜻이 아니었는데 지금 병마 첨만호(兵馬僉萬戶)로 고치려 하고 철곶은 더욱 강도의 요충지이므로 결코 옮길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세 번째 불가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말한 중군·별파진과 진을 옮기는 등의 일은 과연 쉽사리 고쳐서는 안 되겠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이완과 서필원이 서로 인혐하고 있으니 이것이 가장 난처합니다."
하고, 허적은 아뢰기를,
"국사는 한 사람의 사삿일이 아니니 각기 이기기 좋아하는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 필원을 불러서 이완과 함께 서로 가부에 대해 의논하여 익히 강론해서 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송준길의 소장을 가지고 묻기를,
"상소 중에 진달한 일을 지금 의정하고 싶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이 소장은 오로지 신역(身役)을 견감시키고 포흠을 탕척시키자는 것이 골자입니다. 갑진년034) 이전의 미수된 숫자를 지금 이미 조사하여 왔는데 어떻게 조처해야 하겠습니까."
하고, 복양이 아뢰기를,
"각도(各道) 사계(査啓)에 다과가 같지 않아서 경상도는 9백 동(同), 전라도는 2백 동, 충청도는 1백 50여 동입니다."
하고, 허적은 아뢰기를,
"이는 감사의 능부(能否)에 관계된 것입니다. 김시진(金始振)이 이 일로 논박을 받기는 했어도 각 고을에서 감히 헛되이 숫자를 증가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그 숫자가 가장 적은 것입니다."
하고, 복양이 아뢰기를,
"경상도 지방의 백성이 전라도보다 조금 많은데 조사하여 아뢴 숫자는 배가 될 뿐만 아니니 지금 이 숫자에 의거 탕척시킨다면 어찌 너무도 고르지 못한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연조(年條)를 따지지 말고 탕척시켜야 된다. 갑진년 이전으로 한정한다면 병오년 이전의 것도 다시 이와 같이 될 것이다. 타도의 것은 장계(狀啓)에 의거해 모두 탕척시키게 하고 경상도는 다시 조사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충청 감사 임의백(任義伯)이 이미 신역(身役)을 조처하였으니 사계(査啓)가 장차 올라올 것입니다. 이 소장에서 진달한 포흠에 관한 일은 그 사계를 기다려 조처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강릉(江陵)의 강상(綱常)에 관한 옥사는 아직 실정을 알아내지 못했으니, 경차관(敬差官)을 보내어 안문(按問)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집의 오두인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해에 호남(湖南)에 사명을 받들고 나간 적이 있었는데, ‘을미년에 각사의 노비를 추쇄한 후에 허위로 기록된 숫자가 매우 많았는데 감사 민유중(閔維重)이 담양에 허위로 기록된 것을 계문하여 이미 탕감시켜 주는 은혜를 입었으나 기타의 여러 고을은 아직 두루 은택을 입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는 실로 왕자(王者)가 천하를 똑같이 보아 고루 사랑하는 뜻이 아니니, 각 고을도 일체 똑같이 탕척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마땅히 다시 추쇄(推刷)한 연후에 행해야 된다."
하였다. 두인이 또 아뢰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사치의 해는 천재보다 심하다.’ 하였습니다. 삼가 듣건대, 한 공가(公家)에서 표피(豹皮)로 교자를 장식하고 모피 장막을 사용하였다고 하니 진실로 한심합니다. 외지에 있는 사람들이 다 말하기를 사치의 습성이 궁중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하니 어찌 성덕에 손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공주가 출입할 때에 옥교 및 포장을 상방(尙方)에서 으레히 제급해 주는데 여러 궁가에서는 반드시 내려준 물건이라 하여 그대로 쓴 것이다."
하였다. 복양이 아뢰기를,
"전례는 비록 이렇다 하더라도 이후로는 궁가를 경계하여 쓰지 말도록 하소서."
하고, 복양이 또 아뢰기를,
"송시열·송준길·이유태·윤문거·윤선거 등은 모두 집이 가난한 데다 흉년을 만났고 유계(兪棨)는 죽은 뒤에 처자들이 호우(湖右)에서 떠돌이 생활하며 생계를 이어가지 못하니 마땅히 양식을 제급해 주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전라도 산군에 대동법을 타파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대동법을 실시한 후에 백성들은 대부분 편리하다고 하는데 대호(大戶)는 일시에 쌀 내는 것을 어렵게 여겨 모두 불편하다고 하자, 조정의 논의도 대부분 혁파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상이 감사 민유중에게 명하여 백성들의 실정을 상세히 물어서 보고하게 하니, 민유중이 드디어 백성들이 불편해 한다고 말하고 산군과 연해의 제군에 대동법을 혁파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연신에게 물으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도신의 뜻은 산군과 연해를 모두 혁파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들은 바로는 연해 지방의 백성들은 자못 편리하게 여기고 있다 하니 지금 거론할 것이 없겠고 산군의 경우는 백성들이 불편하게 여기고 있다 하니 결코 그대로 둘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이 이미 마땅히 혁파해야 하는지 헤아려 보았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비단 비국 제신과 상의했을 뿐만 아니라 좌상 및 영부사 이경석도 다 산군은 혁파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대동법은 본래 백성을 편하게 하고자 해서 실시한 것인데 지금 도리어 백성에게 해되는 것이 이와 같으니 어찌 혁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논의하는 자들이, 혹은 ‘대동법은 백성들의 부역을 고르게 하기 위한 것인데 산군의 백성들이 비록 불편하게 여긴다 하더라도 연해의 백성들이 이미 편리하게 여기고 있으니 산군 백성들의 실정만을 따를 수 없다.’고 하는데 이 말은 그렇지 않은 면이 있습니다. 연해 지역의 대동법은 단지 12두만 거두어도 쓰기에 충분한데 산군과 병행하기 때문에 13두를 받습니다. 이것으로 말한다면 부역을 고르게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연해 지역의 해가 되는데 어찌 혁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또 입시한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이완과 유혁연 등이 모두 말하기를 마땅히 혁파해야 한다고 하니, 상이 산군의 대동법은 혁파하고 연해 지역에는 수미 1두를 감하라고 하였다. 조복양이 아뢰기를,
"대동법을 이미 혁파하고서 규정을 정하지 아니하면 열읍이 그전과 같이 하여 반드시 함부로 하는 폐단이 많을 것입니다."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청컨대, 감사에게 분부하여 규정을 정해서 보고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기장(機張) 사람 박시귀(朴蓍龜)가 상소하여 시폐(時弊)를 진달하고 또 말하기를,
"원컨대, 불러주시면 직접 뵙고 구궁진(九宮陣)과 차전법(車戰法)을 진달하겠습니다."
하니, 그 말이 심히 망령스러웠다. 상이 초야(草野)의 말이라 하여 너그럽게 답하고 양국(兩局)의 대장으로 하여금 불러보고 그 진법(陣法)을 시험해 보게 하였다.
12월 29일 경진
사방이 캄캄해져서 먼지가 내리는 것 같았다.
집의 오두인, 지평 최관이 아뢰기를,
"근래 뇌물주는 것이 풍조를 이루어 곤수(閫帥)의 무리가 꺼리는 것이 없으니 진실로 한심합니다. 황해 병사 홍순민(洪舜民)은 세시(歲時)에 으레 보내는 선물을 인하여 감히 중한 물건을 거실(巨室)에 보냈는데 그 집에서 깜짝 놀라 즉시 퇴출시켰습니다. 이를 보고 들은 사람은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잡아다가 추문하여 정죄하소서. 도민(都民)의 생업은 오로지 공물에 있는데 방납(防納)의 이익이 궁가로 돌아간다면 백성들이 생업을 잃게 되는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삼가 듣건대,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이 내사(內司)에 바치는 용천(龍川)의 포(布)와 공물 수백 석(石)의 이익을 멋대로 빼앗았다고 하니, 생업을 잃고 원망하는 자들이 불쌍할 뿐만 아니라 뒷날의 폐단을 더욱 엄히 방지해야 됩니다. 복창군 정을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정(楨)은 추고하라고 명하고 순민의 일은 윤허하지 않다가 다시 아뢰니, 이에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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