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19권, 현종 9년 1668년 4월

싸라리리 2025. 12. 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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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일 경오

종묘·사직과 북교(北郊)에서 기우제를 지내었는데, 크게 비가 왔다. 기우제를 지낸 대신에게 즉시 말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이경휘(李慶徽)를 부제학으로, 조수익(趙壽益)을 공조 참판으로, 권격(權格)을 장령으로, 조헌경(曺憲卿)을 지평으로, 민정중(閔鼎重)을 동지경연사로 삼았다.

 

우의정 송시열이 다시 상소하여 사직하니, 승지를 보내어 도타이 유시하라고 명하였다.

 

지사 이완이 병을 핑계로 상소를 올려 훈련 대장을 사임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대사간 이정영(李正英)이 상소하여 시폐에 대해 진달하였는데, 상이 너그러이 답하였다.

 

4월 3일 신미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은 뒤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예조 판서 조복양이 아뢰기를,
"영릉(寧陵)의 석물을 봉심해 보니, 상석(裳石)이 물러나온 곳은 술지(戌地)에서부터 손방(巽方)까지로 8, 9분이 물러나기도 하고 1촌 3, 4분이 물러나기도 하였습니다. 이곳은 바로 보토(補土)한 곳으로서, 상석은 으레 지대(地臺) 위에 배치하므로 쉽게 고칠 수 있습니다. 난간석(欄干石) 바깥의 전석(磚石)이 견고하지 못한 탓에 이와 같이 된 것이니, 이 돌을 치운 다음 견고하게 쌓고서 회로 채운다면 좋을 듯합니다. 석공(石工)에게 물어보니 역시 고치기가 어렵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다지면서 쌓는 것이 비록 미안스러운 듯은 하지만 여기에 구애되어 고치지 않는다면 이는 영구히 보전하는 계책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먼 뒷날을 위한 계책으로 말한다면 바깥의 전석을 치우고 광릉(光陵)의 제도와 같게 하는 것만 못하다. 그러나 쉽게 할 수가 없으니, 우선은 가을 추수가 끝나기를 기다려 처리하라."
하였다. 대사헌 이경억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비망기를 보건대, 말뜻이 간절하였는바, 신하들 치고 그 누가 감동하지 않았겠습니까. 그 뒤에 즉시 비가 내렸으니 감응하는 이치가 매우 신속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사태가 지나갔다 하여 성상의 뜻이 흑 해이해진다면 어찌 걱정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늘에 응답하는 도는 참으로 공구 수성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만약 폐단을 혁파하고 백성들을 구원하는 정책에 미쳐가지 않는다면 역시 끝내는 무익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각사(各司)의 노비 신공(奴婢身貢)을 각각 반 필을 감하여 이미 실제적인 혜택을 주었습니다. 한집안에 여자가 많은 자들도 변통해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또한 백성들 가운데 나이가 겨우 16세밖에 안된 자들은 반드시 신역(身役)을 스스로 마련하기 어려울 것이니, 혹 20세로 한계를 정한다면 타당할 듯합니다."
하고,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것은 효종조에 강구하였던 일입니다. 20세로 한계를 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호조 판서 김좌명이 아뢰기를,
"전년에 이미 반 필을 감해주었는데 지금 또 나이를 물린다면, 어떠할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와 같이 한다면 다른 군역(軍役)을 지고 있는 사람들도 반드시 그런 마음을 먹을 것이니, 다른 대신들이 나오기를 기다려서 여쭈어 처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이경억이 또 아뢰기를,
"재변을 당한 호서 지방 고을들의 제반 신역(身役)을 지난번에 관찰사 민유중의 장계로 인하여 반으로 감하였으며, 내노비(內奴婢)의 신공(身貢)도 똑같이 반으로 감해주었습니다. 경기·해서(海西)·원양(原襄) 세 도의 재변을 당한 고을의 노비 신공도 호서 지방의 예에 의거해서 시행하여 백성들의 어려움을 돌보아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이경억이 또 아뢰기를,
"이처럼 재변을 당하여 도움을 구하는 때에는 재야에 있는 유신(儒臣) 송준길·윤선거 등을 특별히 불러 오는 것이 마땅하며, 오랫동안 올라 오지 않고 있는 이상진(李尙眞)과 교외로 물러가 있는 이단상(李端相)의 경우에도 모두 징소하여 기어이 조정에 나오게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숙(李䎘) 등 8인은 이미 직첩(職帖)을 주었으니, 거두어 서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자못 받아들일 뜻이 있었다. 또 아뢰기를,
"승문원의 참하(參下) 중에는 적체된 자가 많아 40여 명이나 됩니다. 그러므로 서열이 아주 낮은 자는 6품으로 오를 기약이 없는데, 그 가운데 어찌 쓸만한 사람이 없겠습니까. 사일(仕日) 수가 많은 것을 기준으로 승천시키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고, 정태화가 아뢰기를,
"전에 성균관에 참하관이 몹시 많았으므로 한 도목(都目)에 두 사람씩을 승출(陞出)시켰습니다. 지금도 이에 의거해서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이조 판서 박장원이 아뢰기를,
"적체된 것을 해소시키기 위해서 승문원의 참하관을 찰방(察訪)으로 차출해 보내는데, 광흥창·사재감·제용감 등 세 곳의 참봉도 역시 문신 참하관의 자리입니다. 이번에도 실관(實官) 외에는 이 예에 의거해서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한 도목에 두 사람씩을 승출시키는 것도 성균관의 규례를 써야 합니다."
하니, 상이 모두 윤허하였다. 【성균관의 규례는 6월에는 두 사람을 승출시키고 12월에는 한 사람을 승출시키는 것이었다. 이조 참판 민정중이 뒤에 다시 아뢰어 이에 의거해서 거행하였다.】 김좌명이 아뢰기를,
"이경억이 진달한 인재를 불러쓰고 정신을 모우라는 말은 참으로 절실하고도 지극한 말입니다. 다만 허다한 여러 신하들을 위에서 어떻게 다 살필 수가 있겠습니까. 현재 참으로 죄가 없는데도 거두어 쓰지 않고 있는 자가 있는데, 이는 대개 조정에 당론(黨論)이 있어서 자기 편 의견만 주장하고 반대 편 의견은 배척해서이니, 어떻게 공론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인조조에는 전랑(銓郞)의 권한이 가벼웠는데, 지금은 권한이 낭관에게 있어서 주의를 할 즈음에 당상이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대개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일에 있어서 한쪽 편 사람들은 추존하고 한쪽 편 사람들은 배척하고 있습니다. 신 역시 색목(色目)을 면할 수 없어서 두 사람을 존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 이로 인하여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을 영구히 폐기해서야 되겠습니까. 현재 벼슬길이 막힌 자들이 매우 많습니다. 위에서 여러 신하들을 보는 것은 하늘이 만물을 굽어보는 것과 같으니, 어찌 치우치는 일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비록 대간으로서 말했다 하더라도 한 번 시의에 거슬리면 문득 폐기당합니다. 상께서 만약 어떤 사람이 무슨 죄로 벼슬길이 막혔는지를 물어본다면 무고하게 폐기당하였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박장원이 아뢰기를,
"근래에 마침 참판이 없고 단지 실랑청(實郞廳)만 있으나 김좌명의 말과 같이 권한이 중한 자는 없습니다."
하고, 조복양이 아뢰기를,
"붕당이라는 명목은 만력(萬曆)을해년008)  에 비롯되었는데, 이는 실로 전고에 없던 고질적인 폐단이었습니다. 그러나 계해년009)   이후로는 심한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으니, 어찌 의논을 달리한다는 이유로 거두어 쓰이지 못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쓸 만한데도 버림을 당했던 사람을 김좌명에게 물어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김좌명이 어찌 감히 말머리를 감춘 말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니, 김좌명이 아뢰기를,
"상께서 만약 물으신다면 일일이 대답하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붕당의 폐단이 점점 성해지는데 어찌 점점 쇠해진다고 말하는가. 조복양의 말을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조복양이 아뢰기를,
"전에는 한쪽 편 사람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으면 반대 편 사람들은 모두 물러났습니다. 그런데 계해년 이후로는 이쪽 편과 저쪽 편을 뒤섞어 써서 전과 같은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습니다."
하자, 김좌명이 아뢰기를,
"조복양과 박장원은 모두 면전에서 상을 속이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박장원과 조복양이 면전에서 속인다는 지척을 당하였다는 이유로 쟁변하기를 마지않았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좌명의 말은 몹시 불평스러우며, 조복양이 진달한 바도 타당치 않습니다. 색목(色目)에 대한 말을 어찌 임금 앞에서 할 수 있으며, 면전에서 속인다고 말한 것은 김좌명이 잘못한 것입니다."
하고, 이경억이 아뢰기를,
"김좌명이 면전에서 속인다고 한 말은 적당치 않으며, 조복양이 쟁변하는 즈음에도 불평스러운 말과 기색이 있었습니다. 사체에 있어서 모두 온당치 않으니, 아울러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에 조복양과 김좌명이 일어나 나가려 하자, 상이 모두 도로 앉도록 명하였다. 헌납 윤형성이 또 아뢰기를,
"부총관 조한영(曺漢英)은 이미 마음대로 직소(直所)를 떠난 잘못을 저질렀는데, 지난번에 기우제의 제관에 차임되어서도 또 병을 핑계대고 나아가지 않은 죄를 저질렀습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우선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4월 4일 임신

상이 눈병 때문에 양심합(養心閤)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정석(鄭晳)을 사간으로 삼았다.

 

좌의정 허적이 상소하여 사면시켜 주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에게 국가의 안위가 달려 있고 의리상 국가와 휴척을 함께 하여야 하니, 한결같이 사양만 해서는 안된다. 모름지기 나의 지극한 뜻을 체득해서 속히 출사하여 치도를 논하라."
하고, 이런 사관을 보내어 유시를 전하도록 명하였다.

 

4월 5일 계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정언 민종도가 아뢰기를,
"신이 엊그제 동료의 간통(簡通)을 얻어보니, 총관(摠管)이 숙직을 빠뜨린 일로 예조 참판 조한영(曺漢英)을 논계하여 파직시키고 호조 참판 윤집(尹鏶)을 추고하기를 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재차 보내온 간통을 보니 ‘윤집은 수당상(首堂上)과 교체하였는바, 지레 나간 잘못은 오로지 조한영에게만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상의해서 단지 조한영만 논하고 윤집은 논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성상소(城上所)로서 장관의 집에 가니, 장관이 ‘물의가 아울러 논계하지 않은 것을 그르게 여기고 있다. 그리고 기우제의 향(香)을 받을 때 복평군(福平君) 이연(李㮒) 역시 병 때문에 나아가지 않았는데, 탄핵장이 조한영에게만 미쳤다. 이것도 부당하다.’고 하였는바, 신이 제대로 살피지 못한 채 일에 대해 논한 잘못이 드러났습니다. 체차해 주소서."
하고, 헌납 윤형성은 아뢰기를,
"조한영을 파직하기를 청하는 논계는 신이 실로 먼저 발론하였는데, 당초에는 윤집도 아울러 논계하고자 하여 동료에게 간통을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듣건대, ‘윤집은 주사(廚司)로서 감선(監膳)하기 위해서 초기(草記)를 바치고 나아갔으며, 수당상이 윤집을 대신하여 입직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무단히 지레 나간 잘못은 오로지 조한영에게만 있고 윤집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상의하고서 단지 조한영에 대해서만 논계하였습니다. 기우제의 헌관(獻官)에 관한 일에 이르러서는, 복평군 연은 두환(痘患)으로 나아가지 않았으나, 조한영은 향을 전하는 것이 임박해진 뒤에도 끝내 들어오지 않았는바, 사체에 있어서 참으로 몹시 온당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복평군 연은 아울러 논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물의가 모두 그르게 여긴다고 하며, 동료가 이미 이를 이유로 인피하였습니다. 결단코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으니, 체차해 주소서."
하였다.

 

대사간 이정영이 아뢰기를,
"총부(摠府)에서 숙직을 교대할 때 조한영과 윤집 두 사람은 모두 지레 나가버려서 똑같이 잘못이 있는데, 한 사람은 논계하고 한 사람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복평군 이연은 조한영과 더불어 제관에 차임되고서도 나아가지 않은 잘못이 똑같이 있으니, 아울러 논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동료가 왔을 때 이런 내용으로 말하자, 스스로 당초에 아울러 논계하지 않은 것을 혐의롭게 여겨 서로 잇달아 인피하였습니다. 상께서 조섭하시는 중에 소란을 일으킴을 면치 못하였으니, 체차해 주소서."
하였는데, 상이 모두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다음날 사간 정석이
"당초에 상세히 살피지 못한 것은 그 책임이 돌아갈 곳이 있으며, 다시 상의한 것도 잘못한 바가 없다."
고 하면서 민종도와 이정영을 출사시키고,
"아울러 함께 논계하지 않은 것이 비록 의견이 있는 것이나 발론한 내용이 사실에서 벗어난 잘못을 면치 못하였다."
는 등의 말을 하면서 윤형성을 체차시켰다. 이에 민종도가
"당초에는 동참하였는데 결정이 서로 현격하게 다르다."
는 이유로, 이정영이
"당초에 논계에 참여하였다가 물러나 뒷말이 있었는데 어떻게 감히 스스로 동료와 차이가 있다고 하면서 태연스레 처치할 수 있겠는가."
라는 등의 말을 하면서 다시 인피하였다. 그러자 사간 정석이
"신의 처치로 인해서 여러 동료들이 또다시 인피하였으니, 감히 태연스레 있을 수 없다."
고 하고, 대사헌 이경억이
"지난번에 궐하(闕下)에 있을 때 헌납 윤형성이 신의 말로 인해서 윤집을 아울러 논계하지 않았는바, 논사(論事)를 소루하게 한 잘못은 실로 신에게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윤형성이 이미 이를 이유로 체차되었는바, 감히 태연스럽게 있을 수 없습니다."
고 하면서 역시 인피하고 아울러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지평 오시복이 처치하여 민종도·이정영·정석은 모두 체차시키고, 이경억은 출사시켰다.

 

4월 6일 갑술

좌의정 허적이 다시 상소하여 사면시켜 주기를 청하니, 승지를 보내어 유시를 전하라고 명하였다.

 

4월 8일 병자

좌의정 허적이 세 번째 상소하여 사면시켜 주기를 청하니, 상이 따스한 말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4월 9일 정축

이상진(李尙眞)을 대사간으로, 권격(權格)을 사간으로, 이관징(李觀徵)을 헌납으로, 정양(鄭瀁)을 장령으로, 정시성(鄭始成)을 정언으로, 정석(鄭晳)을 부수찬으로, 박세당(朴世堂)을 문학으로, 윤경교(尹敬敎)를 겸설서(兼說書)로 삼았다.

 

4월 10일 무인

부응교 여성제 등이 구언 전지에 응해 상차하여 여덟 가지 일에 대해 논하였다. 첫째는 뜻을 세울 것, 둘째는 정무에 힘쓸 것, 셋째는 용사(用舍)를 신중히 할 것, 넷째는 기강을 진작시킬 것, 다섯째는 궁금(宮禁)을 엄하게 할 것, 여섯째는 사치를 없앨 것, 일곱째는 둔전을 혁파할 것, 여덟째는 백성들을 돌볼 것 등이었는데, 그 말들 중에는 취할 만한 것이 많았다. 그런데도 상이 단지 장려하는 유시만 내리고 끝내 채택해 쓰는 실제가 없었다.

 

좌의정 허적이 네 번째 상소하여 사면시켜 주기를 청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예조 판서 조복양이 상소하여 사직하기를,
"지난번에 경연 석상에서 전하의 물음에 답하면서는 단지 실상만을 개진하였을 뿐, 감히 추호도 허망한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헤아릴 수 없는 배척이 뜻밖에 나왔으므로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랍고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런데 곧 뒤이어 말을 꺼냈던 신하가 자신의 실수를 스스로 진달한 것을 보았고, 성상의 분부가 정녕스럽기가 한집안의 부자간보다도 더 하였으므로, 신은 황공스럽고 감격스러워 감히 실상을 진달드리고 인혐하여 물러날 계책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조보(朝報)에 나온 대사헌 이경억이 추고하기를 청하면서 아뢴 것을 보니, 면전에서 속였다는 말은 실수한 것인 듯하다[似爲]고 말하였습니다. 무릇 ‘사위(似爲)’라는 말은 비슷하기는 하면서도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말입니다. 김좌명의 말이 만약 실수한 것인 듯한 데에서 그칠 뿐이라면, 신에게 전혀 그러한 죄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면전에서 속이는 것은 신하에게 있어서는, 극죄로, 죽어도 용서받지 못하는 죄입니다. 이 죄가 정해지지 않아 아직도 의심스러운 지경에 있는데, 어떻게 스스로 세상에 설 수 있겠습니까. 가령 신에게 참으로 이 죄가 없다면 애매하게 누명을 씌워서는 참으로 안되며, 조금이라도 이 죄가 있는지 의심스럽다면 곧바로 죄주기를 청하는 것이 바로 대간의 직분입니다. 그런데 이경억은 어째서 이렇게 모호한 말을 하여 죄명이 분명치 않게 하고 사람들이 승복하지 않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조보에 쓰여져서 사방에 전파되어 보고 듣는 중외의 사람들이 모두들 의아해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신이 비록 경연 석상에서 하신 전하의 말씀을 믿고서 아무 말없이 있고자 하더라도 그럴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조 판서 박장원 역시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그 대략에,
"면전에서 속이는 것이 어떠한 죄명인데, 감히 ‘사위’라는 두 자를 넣어 구차하게 모면하기를 꾀한단 말입니까. 신은 당초에는 추고받는 벌을 같이 받지 않아 조보에 이름이 쓰여지지는 않았지만, 배척당한 말을 따져보면 조복양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이조 판서의 직에 그대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모두에게 몹시 은근하게 위로하는 유시를 내렸으며, 끝내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행 대사헌 이경억이 인피하면서 아뢰기를,
"삼가 예조 판서 조복양과 이조 판서 박장원 등의 상소 내용을 보니, 신은 두려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지난번 등대(登對)하였을 때, 조복양 등이 갑자기 ‘면전에서 속였다.’는 지척을 당하였는데, 신의 생각으로는 ‘조복양 등이 창졸간에 성상의 물음에 답하면서,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말은 있을지언정 전하를 모신 자리에서 어찌 감히 속이려고 마음먹었겠는가.’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김좌명은 그것을 두고 면전에서 속인 것이라고 하였으므로, 글을 올려 추고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실상은 실로 성상께서 이미 다 알고 계신 바이며 여러 신하들도 같이 들은 바입니다. 어찌 추고를 청한 아룀에 조복양이 상소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의심하면서 결정짓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
그 후 거행 조건(擧行條件)을 보니 이른바 ‘사위’ 두 자는 신이 진달한 말이 아니고 실로 사관이 일을 기록하면서 잘못 쓴 것이었습니다. 조복양 등이 과연 신이 아뢴 바가 마음속에 거북하였다면 그 당시 말을 이미 친히 들었으니 즉시 탑전에서 따졌어야 마땅하지, 지금 와서 뒤늦게 허물을 따져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기사관이 잘못 기록한 것임을 알았다면 또한 신에게 허물을 돌려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이미 며칠이 지난 뒤에 이 몇 글자를 가지고 크게 인혐하는 단서를 삼아 서로 이어 글을 올려 다시금 시끄러움을 야기시켰으며, 심지어는 모호하다는 등의 말로써 직접 드러나게 배척하였으니, 또한 매우 이상합니다. 신은 이미 중신(重臣)의 배척을 받았으니, 어찌 감히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의 직을 체차하도록 명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으며, 처치하여 출사시켰다.

 

장령 이휴징 등이 아뢰기를,
"삼가 부호군 정두제(鄭斗齊)의 함답(緘答)을 보니, 장황스럽게 꾸며대었으며, 심지어는 ‘몹시 의아스럽고 어디에 근거하여 말한 것인지 모르겠다.’는 등의 말로 자신에 대해 해명하는 바탕으로 삼았습니다. 그날 정두제가 어로(御路)를 가로질러 지나간 상황은 풍문을 통해 들은 정도가 아니라 신들이 목도한 바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범한 것은 생각지 않은 채 이렇게까지 모욕을 주었으니, 파직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단지 추고하라고만 명하였다. 그뒤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4월 11일 기묘

우박이 내렸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은 후 경상 감사 심재(沈梓)를 인견하였는데, 병조 판서 홍중보 역시 입시하였다. 상이
"왜노(倭奴)를 잘 응접하고, 인재를 뽑아 올리라."
는 등의 말로 계칙하여 보내었다.

 

우부승지 오두인이 아뢰었다.
"신이 명을 받들고 우의정 송시열에게 가서 유시를 전하니, ‘형편없는 천한 신에게 제수의 명이 잘못 내려져 사관(史官)이 세 차례나 이르러 이미 몹시도 두려운데, 생각지 않게도 지금 또다시 정원의 신하를 보내어 멀리까지 유시를 전하셨습니다. 신의 가슴이 떨리는 것이야 우선 말할 것이 없다 하더라도 보고 듣는 사람들의 의혹이 어떠하겠습니까. 신이 삼가 성상의 비답을 읽어보니, 정녕스럽고 간절하기가 귀신도 눈물을 흘릴 만하였으며, 그 대의는 선유(先儒)가 소공(召公)에 대해 논한 말이었습니다. 한나라와 당나라 시대의 인물은 참으로 논할 것도 없으며, 비록 송나라의 한기(韓琦)·부필(富弼)·사마광(司馬光) 등 여러 신하들도 오히려 여기에 해당되지 못하는데, 하물며 그 나머지 사람들이겠습니까.
무릇 대신의 책임은 무겁기가 이와 같으므로 신과 같은 자는 감히 무릅쓰고 명을 받들어서 성대한 세상의 거조에 누를 끼칠 수 없습니다. 신의 지위와 재주가 만에 하나라도 현재의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데도 한결같이 물러나 있으면서 성상의 은혜를 저버리고 있다면, 귀신이 내려다 보고서 반드시 벌을 내릴 것입니다. 성상의 은혜가 융성하면 할수록 죄가 더욱 깊어지니, 신의 정세가 참으로 답답하다고 하겠습니다. 신은 끝내 감히 명을 받들어 나아가지 못하고 땅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면서 말할 바를 모르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4월 12일 경진

상이 침을 맞았다.

 

송규렴(宋奎濂)을 교리로, 정양(鄭瀁)을 장령으로 삼았다. 정양은 고 상신 정철(鄭澈)의 손자이다. 사람됨이 기절(氣節)을 숭상하고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으로 자처하였으나 실은 괴이하고 단정치 못하였다. 그런데도 지나치게 사류들의 추중을 받아 여러 차례 대간의 직에 제수되었다.

 

대사헌 이경억, 지평 조헌경이 탄핵하기를,
"좌참찬 조형(趙珩)은 근수(跟隨)가 정원을 초과하였으므로 병조에서 아뢰어 하리(下吏)를 잡아가두었는데, 특별히 추고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조형은 결속리(結束吏)010)  가 고소한 것에 대해 분노하여 색리의 정처(正妻)를 잡아가두어서 분을 풀려고 하였습니다. 재상의 반열에 있으면서 분의(分義)가 엄함을 생각지 않고 이런 놀라운 짓을 하였으니,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호조 판서 김좌명이 상소하여 사직하기를,
"신은 어리석고 정신이 온전치 못하여 계해년 이후 조정에 당론이 없는지 알지 못하였으며, 또 전조의 낭관이 마음대로 진퇴시킨 일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을 염려하여 어리석은 견해를 말하였다가 나라에는 도움이 되지 못한 채 스스로에게 비방만 불러들였습니다. 신은 참으로 부끄럽고 두려워서 손가락을 깨물어보지만 이제 어찌할 길이 없습니다. 무릇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말하고 자신의 죄를 자복한 신과 같은 자는 홀로 편안하게 있고, 조복양이나 박장원과 같이 스스로 마음에 조심하여 조금도 속이지 않은 사람은, 도리어 면전에서 속인 듯하다는 지척을 받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 누구의 허물이겠습니까. 모두가 신의 죄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잘 위로하였다. 김좌명이 한 번 수도(隧道) 문제로 탄핵을 받은 뒤부터 크게 송준길 등에게 유감을 품었으며, 기해년에 복제(服制) 문제로 양쪽 논의가 갈라진 뒤에는 지론(持論)이 윤선도나 조경과 같았다. 이때에 이르러 또 선정(先正)을 헐뜯은 사람의 현직(顯職) 등용을 허락치 않는 것을 몹시 그르다고 하면서 조복양 등을 공격하였다가 이런 상황에 이른 것이었다.

 

4월 13일 신사

상이 침을 맞았다.

 

좌의정 허적이 다섯 번째 상소를 올려 사면시켜 주기를 청하였다.

 

이조 판서 박장원, 예조 판서 조복양 등이 또
"김좌명의 상소 가운데서 말한 ‘면전에서 속였다[面謾]’는 말이 변하여 ‘속이고 가리웠다[欺掩]’로 되어 말뜻이 점점 더 심각해졌다."
는 이유로 상소하여 삭직시켜 주기를 청하고 또 죄를 내려 주기를 청하였는데, 조복양은 특히 조정에 당론이 없다는 말은 당초에 입에서 내지 않았음에 대해 진달하여 밝혔다. 상이 따스한 비답을 내려 위로하였으며, 이어서 비국의 모임에 와서 참여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상이 쌀과 콩 각 1만 곡(斛)을 경기의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진휼하고, 남쪽에서 운반해 온 쌀 4천 곡으로 충청·황해 두 도의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진구하며, 광주(廣州)는 수어사(守禦使) 김좌명으로 하여금 전담하여 진휼하게 하였다. 또 제궁가(諸宮家)가 절수(折受)받으면서 민전(民田)을 침범하는 폐단이 없도록 금하고, 조정 신하들의 장복(章服) 외에는 당물(唐物)을 쓰는 것을 금하도록 신명하였다. 이는 옥당의 차자 내용을 따른 것이다.

 

고 유신(儒臣) 교리 김인후(金麟厚)를 이조 판서에, 절사(節士)인 좌랑 강항(姜沆)과 의병장인 좌랑 김덕령(金德齡)을 제조(諸曹)의 참의(參議)에 추증하였다.
김인후는 자가 후지(厚之)이고 호가 하서(河西)이다. 대대로 호남의 장성(長城)에 살았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였고 문재(文才)가 숙성하여서 신동이라고 불리웠으며, 어른이 되어서는 경학에 밝고 행실이 뛰어났었다. 인종이 동궁에 있을 때 오랫동안 강관으로 있었는데, 아주 깊이 인정을 받았다. 인종이 승하하자 벼슬을 버리고 집에 있었는데, 여러 차례 옥당에 제수하여 불렀으나 끝내 나오지 않았다. 매번 인종의 기일(忌日)을 만나면 혼자서 산속으로 들어가 통곡하고서 돌아왔으므로 ‘해마다 7월이면 온 산중에 통곡소리’라는 시구가 있게 되었다. 논자들은
"을사 사화(乙巳士禍) 이후 사류로서 출처(出處)가 바르기로는 김인후만한 사람이 없다."
고 하였다. 졸함에 미쳐서는 선비들이 사당을 세우고 제사지내었다. 그가 지은 시문집이 세상에 전한다.
강항은 영광(靈光)에 살았으며 글재주가 있어서 어려서 과거에 급제하였다. 정유년011)  에 형조 좌랑으로서 재신(宰臣) 이광정(李光庭)의 종사관이 되어 바닷가 고을에서 군량미를 모으다가 온 집안이 왜적에게 잡혔는데, 여러 차례 죽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일본으로 잡혀가서는 몰래 납서(蠟書)로써 왜적의 동태를 알렸으며, 모습을 저들처럼 바꾸어 훼손시키거나 의관을 바꾸지 않은 채 지내었는데, 4년이 지난 경자년에 왜인들이 비로소 귀국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선조가 불러서 서울에 도착하자, 왜적의 정세에 대해 두루 물어보았으며, 이어서 술을 하사하고 말을 지급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라고 명하였다. 그 뒤에 회답사(回答使) 여우길(呂祐吉) 등이 일본에 갔을 때 왜인들이 그의 절의를 몹시 칭찬하였는데, 심지어는 소무(蘇武)와 문천상(文天祥)에게 비교하기까지 하였다.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이 이를 듣고서 가상히 여겨 탄식하였으며, 당로자에게 글을 보내어 그를 거두어 서용하기를 권하였다. 그러나 당론이 한창 성한 때라 끝내 폐기된 채로 생을 마쳤다. 그가 지은 《수은집(睡隱集)》·《간양록(看羊錄)》 등의 서책이 세상에 전한다.
김덕령은 광주(光州)에 살았는데, 신력(神力)이 있고 비할 바 없이 날래었다. 임진 왜란이 일어나자 상복을 벗고 의병을 일으켰다. 광해군이 남쪽 지방에서 군사들을 위무할 때 불러보고 격려하면서 익호 장군(翼虎將軍)이라는 호를 내려주었다. 선조가 형조 좌랑에 제수하고 또 군호(軍號)를 고쳐 초승(超乘)이라고 하였다. 이에 온 나라 사람들이 고무되어 신장(神將)이라고 하였으며, 왜인들도 듣고서는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적과 대치한 3년 동안에 끝내 적의 목을 벤 공이 없었으며, 성질 또한 술주정이 심하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였다. 병신년012)  에 일어난 호서의 적당(賊黨) 이몽학(李夢鶴)의 난013)  에 한현(韓絢)이 의병장으로서 동참하였다가 죽었는데, 여러 적도들이 김덕령 역시 함께 모의하여 서로 호응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이름이 한현의 밀서(密書) 중에 들어 있었다. 이에 상이 크게 놀라 승지 서성(徐渻)을 보내어 체포하게 하였는데, 서성이 도착하기 전에 김덕령은 조정의 명이 있었음을 들었으므로 먼저 스스로 나아갔다. 치대(置對)함에 미쳐서는 근거로 삼을 만한 증거가 없었으므로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유성룡(柳成龍)은
"이치상 반드시 살려둘 수 없다."
고 하였고, 여러 신하들도 감히 살리자는 의논으로 편들어주는 자가 없었으며, 판의금부사 최황(崔滉)이 또 속히 형신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마침내 곤장을 맞다가 죽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원통하게 여겼다.
이때에 이르러 교리 이단하(李端夏)가 상소하여 포상하기를 청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4월 14일 임오

상이 침을 맞았다.

 

장령 이휴징, 지평 오시복, 대사헌 이경억, 지평 조헌경 등이 자질구레한 일로 인피하여 모두 체직당하였다.

 

4월 16일 갑신

좌의정 허적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4월 17일 을유

상이 침을 맞았다.

 

이경억(李慶億)을 우참찬으로, 송준길(宋浚吉)을 대사헌으로, 이정영(李正英)을 이조 참판으로, 남용익(南龍翼)을 공조 참판으로, 윤형성(尹衡聖)을 장령으로, 이규령(李奎齡)·홍수하(洪受河)를 지평으로, 민정중(閔鼎重)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이때 민정중이 이조 참판으로 있으면서 성균관의 장을 겸임하고 있었는데, 경연 석상에서 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그러자 영상 정태화가
"민정중이 일찍이 대사성이 되어서 직무를 제대로 잘 거행하였으니, 본직을 체직하고 유생들을 가르치는 임무에만 전념하게 하여 성과가 있도록 책임지우는 것이 마땅하다."
고 하였으므로, 단망(單望)으로 올려 이 직에 제수한 것이다.

 

경상도 밀양부(密陽府)에 동혈(銅穴)이 있었는데, 어영청(御營廳)에서 좌병사 이집(李鏶)으로 하여금 채굴하여 제련한 다음 함석(含錫)을 섞어서 놋쇠[豆錫]를 만들게 하고, 이어 아뢰기를,
"좌병영에서 현재 조정의 명령으로 석유황(石硫黃)을 굽고 있어서 동철(銅鐵)을 제련하는 일에 전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황은 지금 이미 곳곳에서 구워내고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제련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동철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에 미쳐 급급히 제련하여 그 방법을 널리 알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사간 권격 등이, 예조 참판 조한영과 복평군 이연 등을 파직시키기를 청하는 아룀을 다시 아뢰자, 상이 우선은 중한 쪽으로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공조 판서 구인기가 상소를 올려 사직하자, 체직하였다.

 

4월 18일 병술

이정영(李正英)을 동지성균관사로, 오정일(吳挺一)을 공조 판서로, 이정(李程)을 좌부승지로, 오시복(吳始復)을 교리로, 이선(李選)을 문학으로, 성진병(成震丙)을 장령으로, 이인환(李寅煥)·신익상(申翼相)을 검열로 삼았다.

 

집의 이합이 아뢰기를,
"봉산(鳳山)에 사는 전삼해(全三海)가 그의 아비인 전의명(全義明)을 위하여 본부에 억울함을 하소연하기를, ‘군수 정동설(鄭東卨)은 아비가 데리고 잔 관비(官婢)와 몰래 간통하고는 질투심으로 인해 혐원을 품고 죄목을 날조하여 감사에게 거짓으로 보고해 엄한 형신을 받다가 죽게 하였다. 내가 감사에게 원통함을 하소연하였는데, 전 감사가 처리한 일이라고 핑계대면서 끝내 조사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과연 이것이 사실이라면 일이 몹시 놀랍습니다. 정동설을 잡아다 추문하여 죄를 정하고, 감사 김우형(金宇亨)도 중한 쪽으로 추고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19일 정해

사간 권격, 헌납 이관징 등이
"인망이 본디 가벼운데 갑자기 이조 참판에 제수되어 물정이 흡족해 하지 않는다."
는 등의 말로 이조 참판 이정영(李正英)을 체직시키기를 논하고, 또 아뢰기를,
"지난번에 그가 간장(諫長)이 되었을 때, 폐단에 대해 진달한 상소에서 이미 수령들이 탐장(貪贓)을 저지른 일을 거론하였는데, 행공(行公)한 지 며칠이 지나도록 끝내 탄핵하여 바로잡지 않았습니다. 대간의 체모로 헤아려볼 때 어찌 이럴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탐장을 저질렀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두루 캐물어서 처치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야 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으며, 단지 캐물으라는 청만 따랐다.

 

이유(李𣞗)의 패륜죄(悖倫罪)를 다스렸다.
이유는 성질이 간사하고 재물과 이끗을 탐하였으며, 의롭지 못한 짓을 많이 저질렀으므로 식자들이 몹시 미워하였다. 그러나 윤휴와 서로 친하게 지내면서 체결하였으므로 윤휴와 잘 지내는 자들도 대부분 그를 추켜올려주어 천거되기까지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그의 조카인 이삼재(李三才)와 몇 이랑의 밭을 놓고 다투어서 불미스러운 말이 사대부들 사이에 떠돌았으므로 대간이 이유와 이삼재를 잡아가두고서 치죄하기를 청하였다. 그런데 추문함에 미쳐서 또 숙모에게 편지를 보내어 욕을 한 죄가 드러났으므로 형벌을 받아 도배(徒配)되었으며, 이삼재 역시 숙부에게 불손하였다는 이유로 도배되었다.

 

4월 20일 무자

집의 이합이 아뢰기를,
"황주(黃州)는 바로 큰길가의 커다란 고을인데 수토(水土)가 나빠 관리들이 자주 바뀌어 날로 쇠락해지고 있습니다. 또 병사(兵使)가 목사를 겸임하고 가솔을 거느리고 감으로써 해를 끼침이 끝이 없어 낱낱이 거론할 수도 없습니다. 일이 백성들을 다스리는 정사에 관계되면 병사는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하고, 독촉하여 받아들이는 일에 이르러서는 ‘나는 목사를 겸임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에 호령하는 즈음에 혼단이 쉽게 생겨나고 공억(供億)하는 사이에 관곡이 점차 탕갈되어 백성들에게 마구 긁어들이므로 위태롭기가 물이나 불속에 있는 것과 같은바, 만약 이때에 변통하지 않는다면 버려진 고을이 될 것입니다. 병사가 가솔을 거느리고 가는 규정을 없애고, 예전 규례에 의거해 목사를 차출하여 병영과 주(州)를 분리시켜 고질적인 폐단을 혁파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라고 하였다.

 

4월 22일 경인

원양도(原襄道) 평강현(平康縣)에 우박이 내리고 인물(人物)에 벼락이 떨어졌다.

 

우의정 송시열이 또 상소를 올려 사면시켜 주기를 청하니, 상이 온화한 말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으며, 사관을 보내어 유시하였다.

 

4월 23일 신묘

남구만(南九萬)을 동부승지로, 이태연(李泰淵)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당초에 민유중·김만기·남구만으로 주의하였었는데, 이태연이 가망(加望)으로서 제수된 것이다. 이는 대개 민유중 등이 시망(時望)을 받고 있으면서 자못 청의(淸議)를 주장하였으므로 상이 그것을 싫어한 것이다.

 

조경(趙絅)에게 보국 대부(輔國大夫)의 품계를 더해 주었다.
조경은 문장에 능하고 가행(家行)이 있어서 젊어서부터 청명(淸名)이 있었다. 병술년014)  의 강씨(姜氏)의 옥사015)  를 당해서 죄상(罪狀)을 진달하면서 경전의 뜻을 끌어다 대어 상의 뜻에 영합하였다. 이에 드디어 발탁되어서 이조 판서와 대제학의 직에 올랐으므로 사론(士論)이 크게 천시하였다. 그런데 신축년016)  에 또 상소하여 예에 대해 논할 때에는 윤선도의 설을 편들면서 그보다 더 심하였으므로, 끝내는 이 때문에 공의(公議)에 죄를 얻었다. 이때에 이르러 그의 아들인 조위봉(趙威鳳)이 시종신으로 있었으므로 추은(推恩)하여 품계가 올라간 것이다.

 

집의 이합이, ‘봉산 군수(鳳山郡守) 정동설(鄭東卨)을 토민(土民)의 호소로 곧바로 잡아다가 추문하기를 청하였는데, 뒤폐단에 관계가 되어서 물의가 그르게 여긴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헌부가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사간 권격이 인피하여 아뢰기를,
"이조 참판 이정영이 폐단을 진달한 상소 중에 ‘경기의 수령이 진휼할 곡식을 사사로이 썼다.’는 말이 있었으니, 행공한 뒤에는 즉시 이름을 거론하여 논핵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 말없이 있더니 끝내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정영에게 물어보지 않으면 불법을 저지른 수령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정영이 이미 언관에서 체직되었으니 또한 캐묻는 데 무슨 거리낄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듣건대, 물의가, 뒤폐단에 관계가 된다고 하면서 몹시 그르게 여긴다고 합니다. 어찌 구차하게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체차하소서."
하고,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헌납 이관징(李觀徵) 역시 이를 이유로 인피하였다. 간원이 처치하여 모두 체차하였다.

 

정언 정시성(鄭始成)이 아뢰기를,
"이정영이 비록 언관의 직에서 체직되었다 하더라도 재직하였을 때의 일로 캐묻기까지 하는 것은 사체를 손상시키는 점이 있습니다. 도로 중지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24일 임진

집의 이합 등이 아뢰기를,
"대관의 사체는 보통 관원들과는 현격하게 달라 진정(賑政)을 겸하여 살필 수 없습니다. 대간의 직책이 체차되기 전에는 다른 낭관이 대신 살피게 하여 대간의 체모를 보존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문신 당상 이상과 당하 시종신 및 무신으로 일찍이 곤수(閫帥) 이상을 지낸 자의 부모로 나이가 70세 이상인 자에게 옷감과 음식물을 차등있게 하사하였다.

 

이은상(李殷相)을 형조 참판으로, 권령(權坽)을 우윤으로, 민정중(閔鼎重)을 좌부빈객으로, 윤형성(尹衡聖)을 헌납으로, 이세장(李世長)을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이조 판서 박장원이 상소하여 참판 이정영을 구원하고, 이어 사직하면서 아뢰기를,
"이정영은 일찍이 화요직(華要職)을 거쳤으며 삼조(三朝)를 두루 섬겼는데, 근실하고 염정(恬靜)하였음은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입니다. 그리고 전에 이미 이 직에 의망된 것이지, 신이 정사에 임하여 갑자기 의망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지금 이정영이 갑자기 대간의 논박을 받았으니, 신은 스스로 편히 있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대간의 논계가 근거가 없다는 것은 내가 이미 알고 있다. 경은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깊이 염두에 두는가.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지돈녕부사 이구원(李久源)이 말미를 받아 시골에 내려갔다가 병을 이유로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는데, 상이 조리하고서 올라오라고 명하였다.
이구원은 혼조(昏朝) 때 흉론(凶論)에 부회하였고 심지어는 폐모론(廢母論)에 참여하기까지 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다. 그런데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자급이 올라가서 이 직에 제수되고, 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므로 식자들이 괴이하게 여겼다.

 

응교 이단상이 병을 이유로 사양하고 올라오지 않았다. 이단상은 시골로 물러가 있으면서 나아가기를 즐겨하지 않아서, 여러 차례 삼사(三司)의 직을 제수하고 불렀으나 모두 오지 않았다.

 

4월 26일 갑오

상이 양심합(養心閤)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대신에게 이르기를,
"함경도에 재[灰]가 내린 이변은 몹시 놀랍다. 박승후(朴承後)가 상소 가운데 말하기를 ‘하늘 주위가 20여 곳이 터졌다.’고 하였는데, 좌상은 시골에 있을 때 그런 말을 들었는가?"
하니, 허적이 대답하기를,
"그런 말이 있었습니다. 동쪽 하늘이 갈라졌는데 빛이 화경(火鏡)과 같았고, 또 붉은 말이 서로 싸우는 듯한 모양이 있었다는데, 말을 전하는 자가 몹시 많았습니다. 다음날엔 북쪽에 붉은 기운이 있었고 또 다음날은 이상한 흰기운이 있었다는데, 하늘이 열리는 것은 태평의 기상이고 하늘이 갈라지는 것은 쇠란의 조짐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황해도의 병영에 병사(兵使)가 가솔을 거느리고 가는 것을 혁파하고 목사를 따로 차출할 일을 품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약 잘 변통하지 않으면 도리어 예전대로 두는 것만 못하다."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인재를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판관과 목사가 어찌 다르겠습니까."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할 점이 있습니다. 다른 도에도 목사를 겸임하는 경우가 없지 않은데 유독 황주만 폐단이 심하니, 설립한 처음에 잘못 구획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까. 본도로 하여금 먼저 폐단을 조사하게 한 다음에 변통하는 것을 의논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 본도에서 조사해 아뢴 것을 인해서 끝내 정지되었다. 정태화가 이정영은 형세상 편히 있기 어려움을 말하고 상께 그를 체직시키기를 권유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정영이 과연 이조 참판에 합당하지 못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어찌 그렇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가 체직을 허락하지 않는 것도 역시 그 때문이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이정영은 평온하고 고요함을 스스로 지킵니다. 만약 분주하게 교유하였다면 반드시 이런 탄핵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탄핵을 받았으니 억지로 행공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에 체직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정동설은 상사(上司)에 보고하고 형추하였으니 함부로 살해한 데 비할 것이 아닙니다. 고을 백성의 호소로 인하여 곧바로 잡아다 추문하기를 청하는 것은 일이 몹시 타당치 않습니다."
하니, 좌우 사람들도 대부분 그르다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본도로 하여금 조사해 아뢰게 한 다음에 처치하라."
하였다. 【그 후에 본도에서 전삼해 등이 무고한 상황을 조사해 아뢰자, 법에 의거해 죄를 정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법사에서 먼저 영을 정한 후 금지해야 백성들이 피할 바를 알게 되어 소요스런 폐단이 없게 됩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금령이 간혹 백성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데서 나오므로 여염에서 소요스러움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하고, 이어 몇 가지 일에 대해 진달하였으며, 여러 신하들도 이에 대해 말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금조(禁條)는 예전과 지금이 사의가 다르니 헌부와 한성부·형조로 하여금 묘당에 와서 의논해 옛 조문 중에서 삭제할 만한 것은 삭제하고 새 조목에 첨가할 만한 것은 첨가해 다시 정식을 만들어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그뒤 형조와 한성부의 금조(禁條)는 몇 달만에 이루어졌으나, 헌부는 3년이 지나도록 이루어지지 않았다.】 허적이 아뢰기를,
"전에 구언하는 전지를 내리면서 서로 화합하라는 것을 주로 말하였는데, 당론의 폐단에 대해 극언하면서 마치 조정에 당론을 펴는 자가 있는데도 대간이 논계하지 않는 것처럼 말하였습니다. 신은 전하께서 무엇을 가리켜 그렇게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가리키는 바가 있는 것이 아니라 대개 근래에 당론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데도 대관이 서로 논박해 바로잡는 일이 없으므로 그렇게 말한 것일 뿐이다."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당론이 날로 심해지는 것을 전하께서 이미 알고 계시니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습니까. 듣건대, 지난번에 경연 석상에서 김좌명이 당론의 폐단에 대해 진달하자, 조복양이 심한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다고 하였다 합니다. 서로 화합하라는 전교가 막 내렸는데 두 신하가 진달한 것이 이와 같았는바, 이쪽이 옳으면 저쪽이 그른 것이고 이쪽이 그르면 저쪽이 옳은 것인데도 성상께서는 옳고 그름을 분간하지 않았습니다. 임금은 비록 너그럽게 포용하는 것이 덕이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옳고 그름은 밝혀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하고 그만두시니, 신은 전하께 건강(乾剛)의 덕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염려됩니다."
하였다. 조복양이 아뢰기를,
"신은 그날 당론이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대개 계해년 이후에는 이쪽 편과 저쪽 편을 두루 등용하였음에 대해 아뢰고, 또한 요즈음엔 인재가 적체되지 않았음에 대해 말하였을 뿐입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계해년 이후에 두루 등용하였다는 말은 참으로 옳습니다. 그러나 당론이 오늘날처럼 심한 때는 없었습니다."
하고, 김좌명이 아뢰기를,
"신은 이미 거짓말을 하였으니 아무 말 않고 있어야 마땅합니다만, 그날 신이 인재 등용에 있어서의 편중된 폐단에 대해 진달하자, 조복양이 ‘이쪽 편과 저쪽 편을 두루 등용해서 당파에 치우친 폐단이 별로 없다.’고 하였으므로, 신이 경솔하게 조복양을 보고 ‘면전에서 속인다.’고 한 것입니다. 지금 조복양의 말을 들어보니 신의 뜻과 차이가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날의 대화에 대해서는 영상 역시 일찍이 들었을 것이다."
하니, 정태화가 대답하기를,
"조복양은 전혀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대개 계해년 이후로 두루 등용하였음을 말하였는데, 말을 끝내기도 전에 바로 ‘면전에서 속인다.’고 지척을 받은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조복양이 말이 빠르지 않기 때문에 김좌명이 단지 첫머리의 말만 듣고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하니, 허적이 말하기를,
"신은 다시 폐단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 화합시키고자 하는 것이니, 상께서도 참으로 신들을 계칙시키고, 신들 역시 서로 계칙해야 마땅합니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정영은 대단한 하자는 없었으나 청아한 명망이 물정에 흡족할 정도는 못 되었으니, 그를 논핵한 것이 괴이한 일은 아니다. 그러니 대신이 이정영을 위하여 두둔해 줄 경우에는 형세상 억지로 출사하기는 어려움을 진달하여 조정에서 재신(宰臣)을 예로 대우하는 체모를 보존하게 하면 된다. 그런데 지금 말이 이와 같으니, 그렇다면 종전에 이 직책에 있었는데도 대간이 논핵하지 않은 자들은 모두 분주하게 교유한 자들이란 말인가.  또 논한다. 허적이 정승에 제수되어 등대하면서 가장 먼저 이 일을 발론하여 조복양에게 무고죄를 가하려고 하였는데, 이는 대개 조복양이 당론에 몹시 준열하여 한쪽 편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허적은 처음에는 반드시 조복양을 임금을 속이고 당파를 비호한 죄에 빠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상의 뜻을 끝내 움직이지 못할 것을 안 다음에는 이에 다시 폐단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이 서로 화합시키는 데 있었다고 대답하였으니, 간사하고 변화무쌍한 작태를 여기에서도 볼 수가 있다.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7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608면
【분류】과학-천기(天氣)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司法) / 인사(人事) / 정론-간쟁(諫諍) / 정론-간쟁(諫諍)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논한다. 이정영은 대단한 하자는 없었으나 청아한 명망이 물정에 흡족할 정도는 못 되었으니, 그를 논핵한 것이 괴이한 일은 아니다. 그러니 대신이 이정영을 위하여 두둔해 줄 경우에는 형세상 억지로 출사하기는 어려움을 진달하여 조정에서 재신(宰臣)을 예로 대우하는 체모를 보존하게 하면 된다. 그런데 지금 말이 이와 같으니, 그렇다면 종전에 이 직책에 있었는데도 대간이 논핵하지 않은 자들은 모두 분주하게 교유한 자들이란 말인가.
또 논한다. 허적이 정승에 제수되어 등대하면서 가장 먼저 이 일을 발론하여 조복양에게 무고죄를 가하려고 하였는데, 이는 대개 조복양이 당론에 몹시 준열하여 한쪽 편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허적은 처음에는 반드시 조복양을 임금을 속이고 당파를 비호한 죄에 빠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상의 뜻을 끝내 움직이지 못할 것을 안 다음에는 이에 다시 폐단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이 서로 화합시키는 데 있었다고 대답하였으니, 간사하고 변화무쌍한 작태를 여기에서도 볼 수가 있다.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7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608면
【분류】과학-천기(天氣)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司法) / 인사(人事) / 정론-간쟁(諫諍) / 정론-간쟁(諫諍) / 역사-사학(史學)
또 논한다. 허적이 정승에 제수되어 등대하면서 가장 먼저 이 일을 발론하여 조복양에게 무고죄를 가하려고 하였는데, 이는 대개 조복양이 당론에 몹시 준열하여 한쪽 편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허적은 처음에는 반드시 조복양을 임금을 속이고 당파를 비호한 죄에 빠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상의 뜻을 끝내 움직이지 못할 것을 안 다음에는 이에 다시 폐단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이 서로 화합시키는 데 있었다고 대답하였으니, 간사하고 변화무쌍한 작태를 여기에서도 볼 수가 있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4월 27일 을미

이완(李浣)을 판윤으로, 이경휘(李慶徽)를 이조 참판으로, 홍처량(洪處亮)을 대사간으로, 남이성(南二星)을 부응교로, 이규령(李奎齡)을 교리로, 박세당(朴世堂)을 수찬으로, 신후재(申厚載)를 지평으로, 민종도(閔宗道)을 사서로, 이성징(李星徵)을 황해 감사로 삼았다. 좌상  허적이, 감사 김우형(金宇亨)이 술로 인하여 직무를 폐기하였다고 상께 아뢰어 체차시켰으므로, 전 목사 이성징을 규례를 깨뜨리면서 제수한 것이다.

 

집의 이합, 지평 홍수하가 ‘정동설을 잡아다 추고하라고 청한 일과, 금란(禁亂)하는 것이 난잡하다는 일로 대신과 중신에게 지적당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체차하였다.

 

4월 28일 병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이때 팔도에 전염병이 크게 퍼져 죽는 자가 잇달았는데, 천연두와 홍역으로 죽은 자가 더욱 많았다. 서울의 5부에서 보고한 사망자가 9백여 명이었는데, 실제로는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이 죽었다. 의원으로 하여금 약을 가지고 가서 구원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4월 29일 정유

예조 판서 조복양과 이조 판서 박장원 등이 상소하여 면직시켜 주기를 청하였는데, 좌상 허적에게 지적을 당하였기 때문이었다. 호조 판서 김좌명도 스스로 편안치 못하여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상이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남부 참봉(南部參奉)        박승후(朴承後)가 상소하여 요즈음의 재이(災異)와 5부 방민(坊民)의 폐단에 대해서 진달하였는데, 상이 따스한 비답을 내렸다. 재이에 대해 논하면서는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아, 오늘날 하늘이 어쩌면 이렇게까지 노하였단 말입니까. 새해 첫달 열흘 사이에 음산한 무지개가 태양을 꿰뚫었으며, 이(珥)가 있고 관(冠)이 있고 배(背)가 있었습니다. 이른바 배란 것은 등지고서 가는 형상인 것으로, 그 조짐이 몹시 흉한 것입니다. 계속해서 백기(白氣)가 서방에 나타났는데, 신은 천문에 대해서는 본디 전혀 깜깜합니다만 방서(方書)를 상고해 보니, 거기에 ‘오성(五星)의 정기가 흩어져서 요성(妖星)이 되는데, 병인일(丙寅日)에 나타난 것은 모두 형혹(熒惑)이 생겨나는 바이다. 그것의 이름은 7개가 있는데, 이름은 비록 다르지만 재변이 되기는 마찬가지로, 그것이 가리키는 곳에서는 그에 따른 재이를 당한다. 이른바 재이란 것은 수한(水旱)과 병상(兵喪)·기황(飢荒)을 말한다. 길면서도 큰 것은 재이가 심하고 오랫동안 내리며, 짧고 작은 것은 재이가 약하고 짧은 기간 동안 내린다.’고 하였습니다. 지난번에 서방에 나타난 백기는 그 이름이 한둘이 아니나 대개 혜성의 일종입니다. 혜성이란 것은 옛것을 없애고 새것을 펴는 것을 말합니다.
그 후에도 각종의 변고가 없는 날이 없었으며, 2월 23일 초저녁에는 온 하늘 사방에 거의 20곳이나 되는 곳이 일시에 갈라졌는데, 모양이 4, 5척 되는 장검을 세워 놓은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늘 남쪽 한 곳과 북쪽 한 곳은 처음에는 희미하다가 점차 커졌는데, 무지개의 빛과 같은 것이 푸르고 붉게 빛났고, 길이도 4, 5척 가량 되었으며, 잠시 뒤에 점차 희미해졌고 장검 같은 형상은 한참만에야 없어졌습니다. 이것은 신 혼자서만 본 것이 아니라 고을 사람들 중에 본 자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조보(朝報)에는 나오지 않았으니, 이곳에서만 보이고 저곳에서는 보이지 않은 것은 아닙니까. 신은 우러러 그 변고를 보고는 마음이 놀랍고 보기에 참혹하였습니다. 이에 방서를 상고해보니, 거기에 ‘하늘이 갈라진 것은 양(陽)의 기운이 부족한 것으로, 나라가 분열되려는 상이다.’고 하였습니다. 한 혜제(漢惠帝) 2년에 하늘의 동남쪽이 갈라졌으며, 진 혜제(晋惠帝)  원강(元康) 2년에 서남쪽 하늘이 갈라졌으며, 양 무제(梁武帝) 태청(太淸) 2년에 서북쪽 하늘이 갈라졌는데, 끝내는 모두 병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니 지금 하늘 사방이 모두 갈라진 것이 어찌 크게 두려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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