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경오
상이 정전(正殿)으로 돌아왔다. 자전과 중전도 이날 정전으로 돌아왔다.
강화에 간 측후관 등이 서계하기를,
"고려산(高麗山)에 올라가 바라다 보니 해가 진 뒤에 흰기운 한 줄기가 전에 나온 곳에서 비로소 나타났는데, 근저(根抵)가 바다 속에 있어서 상세히 살펴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그 뒤 9일에 신후재가 다시 치계하기를,
"다시 성변(星變)을 살펴보니 하늘빛이 맑고 깨끗하여 흰기운이 있는 곳을 자세히 볼 수 없었습니다. 황효공이 말한, 근저에 있다는 별도 지금은 다시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는 생각건대, 달빛이 비추어서 형색(形色)이 아주 희미해진 것으로, 감히 그것을 소멸되었다고 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한성부 순장(巡將)들에게 여염의 불이 난 곳을 상세히 계문하도록 신칙하라고 명하였다. 이 때 대궐 안에서 여염에 잇달아 불이 난 것을 직접 바라보았으므로 이런 하교가 있었다.
2월 2일 신미
대사간 이태연 등이 아뢰기를,
"이번에 충의위(忠義衛)에 모속(冒屬)된 자를 조사할 때 혹 문서의 착오로 뒤섞여 도태된 자도 있으며, 분명히 충의위인데도 장부에 기입되지 않아 도태된 자도 있습니다. 을사년 이전에는 호적법이 몹시 해이하였는데 엄하게 단속하라는 명령이 또 병오년에 내려지자, 을사년 이전에 장부에 기입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갑자기 도태시키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비단 명령은 소홀히 하면서 적용만 각박하게 하는 것과 같음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미 공신의 자손임을 알면서도 그대로 여정(餘丁)으로 정한다면, 공신을 우대하는 뜻에 부족한 점이 없겠습니까. 더구나 종실(宗室) 충의위는 사리로 따져볼 때 더욱 도태시켜서는 안됩니다. 해당 부(府)로 하여금 다시 분명하게 조사하여 모속으로 잘못 분류된 자 및 계파가 분명한데도 을사년 이전에 장부에 기입되지 않은 자를 가려내도록 하여 단지 군적에서 빠진 데 대한 벌만을 실시해서 많은 사람들의 고할 데 없는 원통함을 풀어주게 하소서."
하니, 상이 해당 부로 하여금 다시 조사한 다음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시강원 보덕 이유 등이 【필선 경최, 문학 이관징(李觀徵), 사서 신후재(申厚載), 겸사서 이익상(李翊相), 설서 이윤조(李潤朝), 겸설서 신정(申晸).】 상소하기를,
"사람이 태어나 8세가 되면 왕공(王公) 이하에서부터 서민의 자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입학하는 예가 있습니다. 옛날의 제왕들이 모두 이 예를 따랐으며 우리 나라에서도 일찍이 행하였습니다. 신들이 보건대, 왕세자가 바로 입학할 나이가 되었으며, 자품이 뛰어나고 덕성이 숙성합니다. 종묘에 알현하는 예는 이미 품의하여 시행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어찌하여 유독 입학하는 예에 대해서만은 늦추십니까. 여러 사람들이 답답하게 여기고 있으니, 예조로 하여금 즉시 거행하게 해서 신민들의 목을 늘이고 고대하는 바람에 부응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들의 생각도 좋은 듯하나, 지난번에 의논해 정한 것은 실로 깊이 생각한 데서 나온 것이다. 그대들은 속히 하는 것만을 귀하게 여기지 말라."
하였다.
우찬성 송시열과 찬선 송준길이 상소하여 음식물을 사양하고 이어 해직시켜주기를 청하니, 상이 따스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으며, 또 속히 마음을 바꾸어 올라오라고 명하였다. 대사헌 윤문거(尹文擧)와 집의 윤선거(尹宣擧)도 상소하여 음식물을 사양하였는데, 모두에게 편안한 마음으로 받고 속히 올라오라고 유시하였다.
경기의 기민들에게 1일부터 죽을 쑤어주어 진휼하였는데, 남녀 노소가 모두 1천 5백 24명이었으며, 그 뒤에는 2천 8백여 명으로 불어났다. 활인서(活人署)의 막사로 나온 병자들에게도 신축년의 예에 의거하여 쌀을 지급해 주도록 명하였다.
밤에 흰기운이 희미해져서 살펴볼 수가 없었다. 2경에 유성이 헌원성(軒轅星) 위에서 나와 북두성(北斗星) 아래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 가량 되었으며 색은 붉었다.
2월 3일 임신
집의 심유 등이 아뢰기를,
"며칠 전에 어떤 초동(樵童)이 소를 끌고 와 땔감을 팔았는데, 도적이 유인하여 그 소를 빼앗고는 살해한 다음 항아리 속에 시체를 넣어서 몰래 장통교(長通橋) 아래에다 버렸습니다. 도성 내에 이러한 살인의 변고가 일어났으니, 이는 실로 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포도청에서는 평상시에 엄하게 신칙하지 못한 데다가 즉시 수색하여 체포하지 못하였습니다. 당해 포도 대장을 중한 쪽으로 추고하소서. 그리고 포도청으로 하여금 제때에 정범(正犯)을 체포하여 그 죄를 바루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이는 결당하여 횡행하는 것이 아니니 포도청에서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별로 추고할 만한 일이 없으니, 단지 제때에 체포하게만 하라."
하였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영의정 정태화가 이어 면대를 청하고 이조 참판 조복양과 옥당의 여러 신하들도 면대를 청하여 입시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황해도에 기근이 아주 참혹하여 모든 요역에 관계되는 것을 마련해 낼 길이 없습니다. 이에 관찰사가 장계하여 청하기를 ‘전세(田稅)로 납부할 것과 별수미(別收米)를 【모두 1만 6백 석이다.】 추후에 거두어들여서 강도(江都)에 곧바로 납부하도록 하고 우선 강도에 비축해 둔 쌀을 숫자에 준하여 서로 바꾸었으면 한다.’고 하였습니다. 전세는 정당하게 바쳐야 할 것이어서 가볍게 허락할 수 없으나, 별수미는 장계에서 말한 대로 물려 거두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조복양이 또 광주(廣州) 백성들이 굶주려 죽고 있는 상황을 진달하자, 상이, 본부의 군향미 2백 석을 우선 덜어내어 죽을 쑤어 진휼한 후 남쪽에서 보내온 쌀로 보충하도록 명하였다. 조복양이 또 아뢰기를,
"굶주린 백성들이 죽는 것은 광주 뿐만 아니라 경기 일로(一路)가 곳곳마다 모두 마찬가지이니 어찌 소홀히 볼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도에서 옮겨온 쌀을 1만 석을 한도로 나누어 주어 진휼하라."
하였다. 조복양이 또 아뢰기를,
"지난날의 흰무지개의 이변이 이미 몹시 놀라왔는데, 지금 이 흰기운은 비록 별의 몸체는 볼 수 없으나 혜성이 아니면 치우기(蚩尤旗)인 듯합니다. 이처럼 하늘의 재변이 참혹한 때 크게 경동하고 크게 진작시키지 않는다면 아마도 하늘의 마음을 누그려뜨려 재변을 그치게 하지 못할 듯합니다. 그러니 널리 인재들을 불러모아서 치도(治道)에 대해 물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에는 바깥에 있는 유신(儒臣)들도 일찍이 하유하여 불렀습니다."
하고, 교리 정재숭이 아뢰기를,
"조복양의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성상께서 유념하셔야 합니다."
하고, 수찬 김만중이 아뢰기를,
"언로가 점차 막히고 곧은 기운이 꺾인 것이 오늘날의 커다란 걱정거리입니다. 지난해 귀양갔던 여러 신하들이 이미 석방되었으나 아직도 폐기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조정에는 아무말 하지 않고 있는 것이 풍조를 이루어 올바른 말이 들리지 않고 있는바, 입다물고 있는 폐단이 끝내는 아부하며 영합하는 데 이를 것입니다.
집상전(集祥殿)을 짓는 것은 부득이한 데서 나온 일입니다. 그러나 호조 판서 김수흥이 차자에서 말한 ‘전각 하나를 짓는 것이 수성하는 도리에 크게 해로울 것이 없다.’고 한 것은, 그 당시에 그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한심스럽게 여겼는바, 이는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도리를 크게 잃은 것입니다. 또 듣건대, 전각 안기둥의 단청을 당주(唐朱)로 칠하라고 김수흥이 청하였다고 합니다. 만약 이 말이 옳다면 이는 임금과 신하 모두가 잘못한 것입니다. 옛날에 송나라 신하 채양(蔡襄)이 민중(閩中) 지방을 맡고 있으면서 건다(建茶)를 올리자 구양수(毆陽脩)가 ‘군모(君謨)002) 는 선비인데 어찌하여 이런 짓을 하였는가?’ 하였으며, 전유연(錢惟演)이 서경(西京)을 맡고 있으면서 모란꽃을 올리자, 소식(蘇軾)이 ‘낙양의 상공은 충효의 집안인데 가련하게 그 역시 요황화를 올렸네’라고 시를 지었습니다. 지금 김수흥의 일 역시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차자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겠으나, 단청에 대한 일은, 당초에는 번주(燔朱)를 쓰려고 하였는데, 호조에서 당주가 남아 있다고 하였으므로 안에서 분부한 것이지, 호조 판서가 청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또 왕세자의 입학례(入學禮)를 거행하기를 청하면서 아뢰기를,
"8세에 입학하는 것은 고례(古禮)로, 폐해서는 안됩니다."
하였는데,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밤에 흰기운이 나타나 점차 북쪽을 향해 가서 묘수(昴宿) 천원성(天苑星) 넷째 별을 범하고 곧바로 삼수(參宿) 군정성(軍井星)에 이르렀다. 길이는 6, 7장이 되었고 폭은 한 자 가량 되었으며, 달빛이 비치어서 형체와 색이 전보다 희미해졌다.
2월 4일 계유
호조 판서 김수흥이 두 번 패초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답하기를,
"세도(世道)가 한심하여 날마다 와언이 일어난다. 김만중이 들은 것이 어디에서 나온 말인지 모르겠으나 그가 공격하여 배척한 것은 모두가 사람들에게 아부하는 뜻이며, 끝부분에서 송나라 때 꽃을 올린 일 등을 말한 것은 너무 심하였다. 가령 김만중이 조금이라도 군자다운 마음을 가졌다면 어찌 뜬소문을 믿고서 사대부에게 간사하게 아첨한다고 지목하기를 이처럼 극도로 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그의 속마음을 엿볼 수 있다. 오늘날의 일은, 경은 청하지 않았고 나는 듣지 못하였으니, 어찌 깊이 혐의하여 사체를 손상시키겠는가. 청나라 사신이 관소에 머물고 있으니 하루도 직무를 폐해서는 안된다. 마음 편히 먹고서 사직하지 말고 속히 공무를 보라."
하였다. 대개 단청에 대한 일은 김만중이 들은 것이 실상이 아니었으므로 상의 비답이 이와 같았다.
가뭄이 심하여 우물물이 모두 고갈되었으며, 경기와 외방 곳곳에 거의 매일 화재가 일어났다.
일관이 또 강화에서 와서 아뢰었다.
"백기의 근저를 바라다보니 그 크기가 광주리만 하여 비로소 치우기로 정하였습니다. 치우기는 일찍이 무오년003) 에 나타났었는데 그 색이 처음에는 푸른 빛이 도는 흰색이었고 끝에 가서는 붉어졌으며, 40여 일이 지나도록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장차 없어지려 할 때에 또 혜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단지 백색이고 9일 동안 나타났다가 없어졌습니다. 【구름에 가리워져서 바라보지 못한 것도 여러날이다.】 그리고 잇달아 화재가 일어났는데, 무오년에도 그러했다고 합니다."
밤에 치우기가 서쪽에 나타났다.
2월 5일 갑술
오시복(吳始復)을 부수찬으로, 이숙달(李叔達)을 정언으로 삼았다.
상이 호조 판서 김수흥을 패초하여 직무를 살피게 하라고 명하였다. 김수흥이 대궐문 밖에 와서 상소를 올리니, 도로 내주고 속히 들어오게 하라고 명하였다.
관반(館伴) 이경억(李慶億)이 면대를 청하여 입시하였는데, 호조 판서 김수흥도 인견하도록 명하였다. 이는 대개 청나라 사신이 돌아가면서 한없이 요구하였으므로 뇌물로 줄 것을 탑전에서 의논해 정하고자 해서였다. 김수흥이 계속 사직하니, 상이 위로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정원이 백기(白氣)의 이변으로 인해 진계하면서 ‘신하들을 드물게 접견한다.’, ‘대간의 아룀을 따르지 않는다.’, ‘상소의 말을 채용해 시행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척연히 분발하고 항상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 수성(修省)하는 실제를 다하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밤에 치우기가 서쪽에 나타났다.
2월 6일 을해
청나라 사신이 돌아갔다. 상이 친히 서교(西郊)에 나아가 전송하였다.
대사간 이태연 등이 아뢰기를,
"근래에 삼상(蔘商)을 밀봉(密封)하는 폐단은 몹시 형편없는 짓입니다. 이른바 삼상에 대해서는 해조에서 액수(額數)를 정해 세금을 거둡니다. 그런데 도망하였거나 죽은 자의 대신을 해당 부(部)로 하여금 밀봉하게 하고는 각계(各契)에서 독촉해 받아들이게 하면서 마구 매질을 가하므로, 각계의 사람들이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억지로 아무나 가리켜 삼상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송도(松都)의 경우에는 해조가 체문(帖文)을 유수(留守)에게 직접 보내 다른 장사를 하는 자에게 삼세(蔘稅)를 독촉해 거두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잘못된 규례가 오랫동안 시행되어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더욱 심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같이 백성들이 궁하고 재물이 고갈된 때에는 변통하지 않을 수 없으니, 해조로 하여금 전의 규례를 혁파하게 하여 서울과 송도의 백성들이 원통함을 하소연하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훈국(訓局)의 포수(砲手)가 시장에 앉아서 장사를 하고 있는데, 이는 역(役)을 내는 시장 백성들과는 경중이 현격하게 다르므로, 지난해 겨울 인대하였을 때 변통하라는 뜻으로 진달하자, 상께서 평시서와 훈련 대장이 상의하여 세를 매기라고 허락하였습니다. 지금 듣건대, 평시서의 관원이 대장의 집에 다시 가서 의논해 정하려고 하였으나 대장이 즉시 거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몹시 타당치 않으니, 대장 이완(李浣)을 중한 쪽으로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뒤에 삼상에 대한 일은, 호조가 단지 한성부로 하여금 상세히 살펴 늑정(勒定)한 숫자를 제거하고 실제적으로 삼 장사를 하는 자로 고쳐 정하게만 하고, 끝내 변통하지 않았다.
상이 재이로 인하여 정전(正殿)을 피하면서 정원에 하교하였다.
"아, 오늘날의 국사가 위태롭고도 위태롭다고 하겠다. 위로는 하늘의 노여움이 몹시 심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일이 그지없이 애달파 걱정스럽고 두려운 생각을 마음속에서 조금도 늦춘 적이 없었다. 금년 봄 새해 초에 이미 무지개가 해를 꿰뚫는 재변이 있었는데 한 달도 채 못 되어 또 이런 괴이하고 놀라운 변이 있다. 자나깨나 이에 대해 생각하며 꿈속에서도 놀라니, 깊은 연못과 깊은 산골짜기에 빠진 듯한 마음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그 원인을 따져보면 실로 나의 덕이 부족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오늘부터 정전(正殿)을 피하여 지난날의 허물을 반성하고 하늘을 경외하는 마음을 더욱더 가져 조금이나마 하늘의 꾸지람에 답하겠다. 승지는 나를 대신해서 교서를 지어 널리 직언을 구하여 나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라. 너희 대소 신하들은 서로 협동하고 각자의 직분을 부지런히 수행하라. 인재를 선발하고 옥사(獄事)를 심리하는 것은 참으로 재변을 늦추는 데 있어서 급선무이니, 각 해당 관원들로 하여금 착실히 시행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반찬의 가짓수를 줄이고 음주를 금하는 등의 일도 해조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2월 7일 병자
정지화(鄭知和)를 형조 판서로, 홍만용(洪萬容)을 동부승지로 삼았다.
영중추부사 이경석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하늘을 경외하여 수성하는 날을 당하여 실제적인 덕을 힘쓰고 아름다운 말을 받아들이는 것은 마땅히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양사가 아뢴 상전(賞典)을 도로 거두라는 논계가 아직도 허락받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신은 삼가 걱정스럽고 답답하여 감히 품은 생각을 진달드립니다. 그리고 구언(求言)하고서도 쓰지 않으므로 그것을 형식적인 것이라 하고 있습니다. 과연 쓸만한 내용을 채용해서 헛되이 글을 올린 것이 되지 않게 한다면 어찌 이것이 형식적인 것이 되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정전(正殿)을 피하겠다는 전교를 내리고 구언한다는 전지를 내렸다고 합니다. 지금 만약 나이가 많아서 정치에 대해 물을 만한 외방에 있는 신하와 시골로 물러가 있는 유신(儒臣)에게 별도로 전지를 내려 구언한다면, 이것은 바로 옛날에 구언하던 예인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굽어살피소서."
하였는데,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렸다.
예조 참판 홍처량(洪處亮)이 네 차례 상소하여 간절하게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호조 판서 김수흥이 첫번째 정사(呈辭)하니, 상이 안심하여 사직하지 말고 속히 공무를 보라고 명하였다.
2월 9일 무인
집의 심유 등이 아뢰기를,
"황주 판관(黃州判官) 유진창(柳晋昌)은 부임한 뒤 오로지 자신을 살찌우기만을 일삼아 비루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외방에서 곤장을 쓰는 것은 단지 군정(軍政)을 위해서 설정한 것이지, 본래 일상적인 형벌에 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혹 가벼운 벌에도 이 형벌을 쓰므로 군인과 백성들이 원통함을 하소연하는 것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각도의 감사들로 하여금 솔선해서 이 법을 지키게 하고 각진이나 각고을에서 이 영을 범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남형죄(濫刑罪)로 논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 때 양사가 온천에 행행한 일로 내린 상격(賞格)을 도로 거두는 일을 가지고 연계(連啓)하였는데, 상이 약방에 내린 상격 이외에는 모두 헤아려서 처리하라고 답하였다.
병조 판서 홍중보가 면대를 청하여 아뢰기를,
"대간의 아룀으로 인하여 충의위 가운데 문서에 기록되지 않은 자를 다시 조사하라는 명이 있었으므로 지금 그에 대해 여쭈어 정하고자 합니다. 그 가운데 나이가 어린 자들은 법을 신칙하기 전이라 문서에 기입하지 않았으니, 혹 용서할 만한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숫자도 1천여 명이나 되니, 이처럼 흉년이 들고 재변이 나타나는 날을 당하여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소란스럽게 될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식년(式年)인 병오년에 군적에 들어 있지 않은 자는 태거(汰去)시켜 군역에 정하도록 하지 말고 1년간 포를 징수하여 그 벌을 시행하라. 그리고 구전(口傳)한 체자(帖子)는 그대로 나누어 주라. 거느리고 있는 아이들에 대해서도 포를 징수하지 말라."
하였다.
대사간 이태연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보건대, 전하께서 즉위한 이래로 재변이 일어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구언하는 교서를 여러 차례 내렸으나 전례에 따라 임시 방편만을 하여 진작시킬 기약이 없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하늘에 응답하는 것을 실제적인 것으로 하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곧고 올바른 말을 한 사람이 있었으나 교만한 기색을 보이어서 천리 밖에서 사람을 막았으니 전하께서 구언하신 것을 성의껏 하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로써 어진이를 초빙하여 오더라도 임용하는 정성이 처음만 못하니 무슨 뽑아 쓸 만한 특별한 인재가 있겠습니까. 비록 옥사를 자주 심리하더라도 죄를 결정하는 즈음에 경중을 잃으니, 어찌 번거롭게 소결(疏決)하여 요행의 길을 열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고, 또,
"정전을 피하고 반찬의 가짓수를 줄이는 것이 참으로 재변을 두려워하는 데 있어서 한 가지 일이기는 하나, 이미 실제적인 것이 없이 한갓 형식적으로만 하였으니, 전하께서 비록 한 달을 넘도록 한데 앉아 있고 날마다 한 가지 반찬만 올린다 하더라도 저 땅을 비추이는 하늘이 반드시 감동하여 마음을 바꿀 리가 없을 것입니다.
현재 간쟁하고 있는 온천에 행행한 데 대한 상격을 도로 거두라는 청은 온 나라의 공론입니다. 그런데 구언한다는 전교가 내리자마자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이 잇따라 내렸습니다. 신은 전하께서 구하시는 것이 다시 무슨 말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쫓겨났던 여덟 신하가 시골로 방환되어 지금 이미 1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서용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어찌 언로를 크게 여는 뜻이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오늘날 다시 직언을 구할 필요가 없이 단지 요즈음에 올린 여러 신하들의 상소와 차자를 모아서 여러 신하들을 불러서 조목조목 상의해 그 가운데서 시행할 만한 것을 일일이 뽑아 시행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 원통함을 신원시켜 주는 것은 조금도 아끼지 말고 물이 흐르듯이 시원스럽게 시행하며, 속히 양사의 청을 윤허하시고 죄를 받은 신하들을 서용해야 합니다. 성상께서 자신을 수양함에 있어서는 맹렬하게 마음을 맑게 하고 반성해 편벽되고 사사로운 마음을 제거하고 지극히 공정한 도를 넓히며, 일이 지나갔다 하여 해이해지지 말고 또한 보지 못하였다고 하여 소홀히 하지 말아 두렵게 여겨 부지런히 힘쓰고 성실을 다해야 합니다. 이상과 같이 하면 하늘에 응답하여 재변을 그치게 하는 방도에 있어서 조금은 보탬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또 나라의 근본이 견고하지 못하고 사치가 날로 심해진다고 말하면서 성상께서 몸소 실천하여 이끌어 줄 것을 요구했는데, 상이 칭찬하는 답을 내렸다.
사관을 보내어 우찬성 송시열과 찬선 송준길에게 아래와 같이 유시하였다.
"아, 지금처럼 재변이 겹쳐 나타나 국사가 어려운 때 조정에 큰 덕을 지닌 어진 선비가 있어서 좌우에서 보필한다면 국가의 형세가 얼마나 중해지겠는가. 더구나 경은 선조(先朝)에서 알아주신 은혜를 받았고 선조께서 부탁하신 중대한 임무가 있으니 그 책임이 크고도 무겁다고 하겠다. 그런데 한 번 비방하는 말을 들은 뒤로는 시골로 물러나 있을 마음을 굳게 지키어, 앞뒤로 올린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 내 뜻을 모두 다 말했는데도 마음을 바꿀 기약이 없으니, 내 마음의 답답함이야 참으로 말할 겨를이 없다고 치더라도, 국가의 불행이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전에 없던 이런 재변을 만나서 어찌 한결같이 시골로 물러나 있으면서 나와는 상관없다고 하면서 돌아보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현재 봄날씨가 점차 화창해지고 있으니, 모름지기 앞서 올린 소에 대한 비답의 뜻을 잘 인식해서 속히 올라와, 쓰러져가는 국세를 부지시키고 내가 밤낮으로 생각하고 있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하라."
승지를 충주에 보내어 행 판중추부사 허적에게 유시하였다.
"아, 재변이 겹쳐 나타나 국사의 어렵기가 지금보다 더 심한 때가 없었다. 그런데 조정에는 서로 협동한다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 물러나 있는 자가 많으니, 국사가 한심스러움이 어떠하겠는가. 경이 시골로 물러나 살고 있은 지가 이미 한 해가 다되었으며, 내가 그대를 생각함도 몹시 간절하다. 더구나 경은 선조(先朝)에게 세상에 드문 은총을 받았고 국가의 안위에 대한 중대한 책임을 맡았으며, 비록 원임(原任)이라고는 하지만 대신의 지위에 있으니, 이러한 때 무관심하게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신명께서 보살피시어 지난날의 병이 지금 모두 나았고, 봄날씨가 따뜻해져 뱃길이 이미 통하였다. 경은 모름지기 나의 지극한 뜻을 잘 인식해서 수로와 육로 가운데 편한 쪽을 택하여 속히 올라오라. 그리하여 위태로운 국세를 부지시키고 간절히 바라고 있는 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하라."
부호군(副護軍) 권우(權堣)가 상소하기를,
"신이 일찍이 북관(北關)을 안찰할 때 신명규(申命圭)가 함흥 판관(咸興判官)으로 있었는데, 일이 대부분 해괴하여 파출(罷黜)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의 아들의 【이름이 유(蹂)이다.】 추잡한 행실도 참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점차 확대되어 드디어 틈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거짓을 꾸미고 없는 것을 날조함이 그지없으며, 일가 인친과 친구들이 떼로 일어나 배척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지난해 김징(金澄)이 북도 암행 어사(北道暗行御使)가 되었을 때에 백성들이 추념하는 것을 가지고 도리어 욕을 하였으며, 서계에다 신명규의 말을 덧붙이며 도내에서 염문(廉問)한 듯이 하면서도 스스로 정태(情態)가 드러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들은 사람들이 모두 의아해 하고 있으며 밝게 보시는 전하께서도 반드시 통촉하셨을 것입니다. 서계 중에 문관(文官)으로 북병사를 차출해 보내주기를 청하였는데, 그 내용에 ‘권우가 본도 감사로 있을 때 청렴치 못했다는 소문이 지금까지 전파되고 있는데, 북쪽 백성들의 칭찬하는 소리는 오래되었는데도 그치지 않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어찌 이처럼 말뜻이 어긋나고 말이 안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암행 어사가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마는, 아마도 혐의가 있는 곳에 발을 들여 놓았다는 기롱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지난 정유년에 김징(金澄)이 장오죄(贓汚罪)를 저질러 수금되었을 때 신이 마침 전위사(餞慰使)가 되어 정주(定州)를 왕래하다가 그 사실을 상세히 듣고 사대부들에게 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찌 그것이 오늘날의 화의 모태가 될 줄 알았겠습니까. 대개 김징이 어천 찰방(魚川察訪)으로 있을 때 정주(定州)의 기생을 속신(贖身)하는 값을 역은(驛銀)에서 가져다 썼다가 후임관에게 발각되어 그가 장계를 올려 징수하기를 청하였었습니다. 서쪽 지방 사람들이 모두 그를 회금 찰방(懷金察訪)이라 하는데, 이는 기생에게 준 은이 옷상자 속에서 나왔기 때문이며, 또 그를 은징(銀澄)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그 은을 생으로 징수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이 말이 경외에 자자하였으므로 신이 조정 사대부들에게 이 말을 전한 것은 김징을 함정에 빠트리려는 데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김징은 스스로 불난 데 부채질한다고 하면서 10년 동안이나 분함을 품고 때를 틈타 헐뜯으며, 염문이라는 명분을 빌려 원한을 갚을 바탕으로 삼고 있습니다. 인심과 세도가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고, 또 전후로 고을살이하면서 관곡(官穀)을 매우 많이 저축해서 백성들의 요역에 보탠 상황을 말하였으며, 이어 법관에게 내려 실상을 조사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실상이 아닌 말을 어찌 깊이 혐의할 필요가 있겠는가.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라."
고 유시하였다.
2월 10일 기묘
종친부의 계사로 인해서 정신 옹주(貞愼翁主)를 천장(遷葬)할 때 초상(初喪)에 쓰는 여러 도구 외에 모두를 예장(禮葬)의 예에 의거해서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또 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霌)도 똑같이 예장하도록 명하였다.
대사간 이태연, 헌납 권격 등이 아뢰기를,
"행 부호군 권우가 범법했는지의 허실에 대해서는 신들이 비록 감히 알 수는 없으나, 상소를 올려 자신에 대해 해명한 말은 사대부의 염치를 크게 잃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 대해 의심하고 온갖 일을 주워모았으며, 추하게 욕한 말이 상놈과 같았으니, 어찌 이와 같은 재상이 있단 말입니까. 이와 같은 사람은 사신으로 차임해 보내서는 안됩니다.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하였는데, 이때 권우는 사은 부사(謝恩副使)에 차임되었었다. 상이 이르기를,
"우선은 중한 쪽으로 추고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유학 이유(李𣞗)는 바깥으로는 학행(學行)이 있다는 이름을 낚으면서, 안으로는 교활하고 음험한 마음을 품었으며, 전부터 재물을 탐하고 올바른 사람을 미워하여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아 왔습니다. 그의 숙부 이입신(李立身)이 후사가 없이 죽었으므로 입신의 처 구씨(具氏)가 이류의 형의 아들인 이삼재(李三才)를 수양 아들이라 하면서 후사를 맡기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류는 재산을 나누어 받지 못하는 것에 분을 품어 구씨를 그지없이 헐뜯고 욕하였으며, 같은 성 안에 살면서도 한 해가 다 지나도록 찾아보지 않고는 언문으로 긴 글을 써서 구씨의 죄를 나열하였으니, 조금도 사람의 도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삼재는 이류의 조카로서 집안의 변고에 잘 대처하지 못하여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류와 이삼재를 해조로 하여금 조사하여 율에 의거해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살펴보건대, 권우의 상소는 비방에 대해 해명하는 데에서 나왔으나, 말에 분함을 품고 있고 김징의 예전 허물을 덧붙여 넣어, 더욱더 사람들이 그르게 여겼다. 그러나 사판에서 삭제하라고 논한 데 이르러서는, 실로 적당한 율이 아니다. 대개 헌납 권격이 이 논계를 주도하였는데, 권격은 바로 김징의 당우(黨友)였으니 공의가 또한 옳게 여기지 않았다.
이때 경기 감사 장선징과 호군 민정중이 권우에게 배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서로 이어서 상소를 올려 자신의 죄를 말하였다. 장선징은 바로 신명규의 처사촌이고 민정중은 김징의 친우로 모두 일찍이 권우를 공척(攻斥)하였는데, 권우의 상소에
"인친과 친구들이 떼로 일어나 배척한다."
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집의 심유 등이 차자를 올려 수성(修省)하는 방도를 권하였는데, 다섯 가지에 대해 논하였다. 다섯 가지는 오랫동안 경연을 정지한 폐단, 자기 생각대로만 하고 간언을 따르지 않는 폐단, 각 고을에서 군기(軍器)를 별도로 마련하는 폐단, 여러 궁가에서 전장(田庄)을 설치하는 폐단이었으며, 나머지 하나는 조적(糶糴)을 독촉해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이었는데, 상이 가납하였다. 그 뒤에 군기를 새로 별도로 마련해 올리는 규정을 혁파하라고 명하였는데, 대개 이 말을 따른 것이다.
2월 11일 경진
이경억(李慶億)을 대사헌으로, 정재숭(鄭載嵩)을 부교리로, 신정(申晸)을 대교로 삼았다.
집의 심유와 장령 유거가
"행행하였을 때 어가를 호위한 관원과 서울에 남아 있던 여러 신하에 대한 상격(賞格)을 헤아려 처리하라는 전교가 있었던바, 이는 품의하여 처리하라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데도 경솔하게 정계(停啓)하여 물의가 크게 그르게 여긴다."
는 이유로 인피하니, 체직하였다.
재신(宰臣) 이하와 당하관인 시종 신하의 나이 많은 부모에게 가자(加資)하거나 아니면 음식물과 옷감을 내려주라고 특별히 명하였다. 이에 예조 판서 김수항 등이 전문(箋文)을 올려 사례하였다.
90세가 넘은 강화 백성에게 가자하고 음식물을 내려주라고 명하였는데, 유수인 서필원(徐必遠)의 청을 따른 것이다.
2월 12일 신사
북경에 간 부사(副使) 전 참판 이익한(李翊漢)이 북경에서 갑자기 죽었는데, 사신이 장계하여 아뢰었다. 상이 애도하는 교서를 내렸으며 삼도(三道)에 명하여 상구를 호송해 보내도록 하고 해조에서 장례 물품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익한이 좌참찬의 가함(假銜)으로 갔으므로 또 이를 인하여 이 직에 증직(贈職)하라고 명하였다.
대사간 이태연 등이 【사간 여성제, 헌납 권격, 정언 변황이다.】 재이(災異)로 인해 상차하면서 제주(諸主)가 대궐 안에 계속 머물고 있어서 여알(女謁)의 조짐이 있고, 종척(宗戚)들을 수시로 접견하여 바깥 말이 들어가고 있으며, 일에 대해 논한 자가 찬출되거나 견책을 받아 언로가 막히고 있다고 두루 논하였다. 인하여 상에게 성심을 열어 간언을 받아들이고 두려워하여 진작시킴으로써 경동하여 수성하는 근본으로 삼으라고 권하였다. 또 호서의, 봄에 받아들일 대동미(大同米)를 물려 거두는 일을 속히 의논해 정하여서 가난한 백성들의 거꾸로 매달린 듯한 위급함을 풀어주라고 말하였다.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렸으며, 물려 거두는 일은 해청에 명하여 즉시 품의해 처리하게 하였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은 후 비국의 여러 신하들과 충청 감사 민유중을 인견하였는데, 형조 판서 정지화 등도 추후에 입시하였다. 상이 치우기(蚩尤旗)에 대해 묻자,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송이영(宋以穎)은 【성관(星官)이다.】 ‘근저에 별이 있다는 것도 분명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마도 장성(長星)인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천문서(天文書)에 ‘꼬리가 짧은 것은 혜성이고 꼬리가 긴 것은 장성(長星)이다.’고 하였으니, 송이영의 말이 옳은 듯하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사은부사 권우가 현재 논박을 받고 있어 사신 가는 일이 점점 지연되고 있으니 우선 체차하고 다른 사람을 차임해 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고쳐 차임하라고 하였다. 좌참찬 김좌명이 아뢰기를,
"전에 대사간 이태연이 진달함으로 인하여 호서 지방의 수미(收米)를 반을 물려서 거두어들이는 일에 대해 품의해 정하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이는 간관이 기근이 든 것을 보고 아뢰었던 것인데, 조금 나은 16고을 외에 그 나머지 재변을 입은 고을에 대해서 반을 물려서 거두어들일 경우 그 숫자가 7천여 석이 됩니다. 경중(京中)은 우선 아무 곡식으로 옮겨다가 쓰는 것이 옳습니다."
하고, 이조 참판 조복양이 아뢰기를,
"반을 물려서 거두어들일 경우 나머지 반은 마땅히 상납해야 합니다. 그런데 본도의 진휼이 한창 급한데 다른 곡식이 없습니다. 상납해야 할 나머지 반으로 본도의 기민을 진휼하고 그 대용은 남한 산성의 쌀이 도착하기를 기다려서 충당해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김좌명이 아뢰기를,
"남한 산성의 쌀은, 전에는 각고을로 이전해서 가을을 기다려 도로 거두어들였는데 근년 이래로 이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서 경기 백성들이 많이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군량미에 쓰는 것이어서 참으로 가볍게 꺼내어 주기 어려우나, 이처럼 전에 없던 흉년을 당한 때에는 【이때 쌀 한 섬 값이 은 2냥이었다.】 일체의 법을 굳게 지키기만 해서는 안되고 마땅히 변통하는 방도가 있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도(江都)에 있는 쌀 1만 석은 이미 이전하도록 허락하였다. 남한 산성에 있는 쌀 5천 석도 이전하도록 하되, 각각 부근에 있는 고을부터 나누어 주라. 그리고 피곡(皮穀)은 굶주린 백성들이 종자곡을 구하지 못하였을 때를 기다려 나누어 주는 것이 마땅한 듯하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전에 조복양이 말한 포보(砲保)의 가포(價布)에 대한 일은 지체시켜서는 안되니 속히 결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응당 주어야 할 숫자가 얼마나 되는가?"
하자, 조복양이 아뢰기를,
"2백 60동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1백 60동은 호조에서 내어주고 1백 동은 병조에서 내어주되, 강도에 오랫동안 쌓아 둔 포목은 바꾸어 내어주어 묵은 것을 쓰고 새것을 보관하는 바탕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민유중이 아뢰기를,
"본도의 형세가 아주 위급한데 조정에서도 돌아볼 형편이 못되니, 앞으로의 일을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도 또한 생각하고 있는 방도가 있는가?"
하자, 민유중이 아뢰기를,
"수미(收米)를 물려 거두는 외에 상납해야 할 숫자를 그대로 남겨두어 쓴다면 일이 혹 편할 듯도 합니다. 다만 산간 고을의 쌀은 이미 작목(作木)하였으니, 또한 어찌 할 수가 없습니다. 도임한 뒤에 미곡의 숫자를 알아서 장계를 올려 처리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조 판서 박장원이 아뢰기를,
"삼가 비망기를 보건대, 인재를 선발하라는 하교가 있었는바, 신에게 구구한 소회가 있어서 이에 감히 우러러 진달합니다. 전부터 재변이 있는 때에는 번번이 별천(別薦)하는 일이 있었으나, 끝내는 실제로 등용해 쓰는 일이 없었습니다. 신이 병오년에 이 직임에 있을 때 별천하기를 건의했었는데, 단지 헛된 장부만 만들었을 뿐 버려두고 쓰지 않았습니다. 전례에 의거해서 대신으로 하여금 그 가운데서 다시 선발해서 재주에 따라 등용하는 바탕으로 삼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에 천거된 사람 역시 재주에 따라서 등용시키라. 그리고 다시 2품 이상과 【문신(文臣)은 일찍이 아경(亞卿) 이상을 지낸 자이고 무신은 병사(兵使) 이상을 지낸 자이다.】 삼사의 관원들에게 각각 세 사람씩 천거하게 한 다음, 대신이 비변사로 천주(薦主)를 불러모아 천거된 자의 현부(賢否)를 다시 상의해 취사 선택하여, 쓸만한 자는 각자 그 이름 아래에다 품평하여 등급을 매겨 놓고 천주의 이름을 함께 기록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지중추부사 이완이 아뢰기를,
"도감의 초관(哨官) 선귀영(宣貴榮)은 지난 기해년에 형조에서 송사(訟事)가 일어나자, 죄받을까 두려워하여 양주(楊州) 송산(松山)으로 도피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거느리고 있는 부하들을 보내어 체포하여 오는 도중에 또 몸을 빼어 도주하였습니다. 지금 듣건대, 사리에 어긋난 일로 송사 일으키기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장단부(長湍府)에 갇혀 있는 것을 공문을 보내어 잡아다가 경옥(京獄)에 가두었다고 합니다. 선귀영은 장관(將官)으로 있으면서 두 차례나 도망하였으니, 이와 같은 사람은 군법을 엄하게 밝혀 징계시키는 바탕으로 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군전(軍前)에서 효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러라고 하였다. 이완이 또 아뢰기를,
"훈국(訓局)을 설치한 것은 군문(軍門)을 중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병조 낭관이 금란(禁亂)한다고 하면서 서자적(書字的)004) 을 잡아다가 마음대로 곤장을 때렸으며, 또 포수(砲手)를 잡아다가 기대총(旗隊摠)을 윽박질러서 곤장을 때리게 했다고 하니, 일이 몹시 놀랍습니다. 추고하소서."
하고, 대사간 이태연이 아뢰기를,
"낭관이 금란으로 인하여 죄를 다스렸다면 이미 사사로이 한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훈국은 병조에 대해서 사체가 자연 구별되는데, 대장이 어떻게 곧장 추고하기를 청할 수 있겠습니까. 이완을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나온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병조에서 거론하는 일이 없었으니, 대장이 추고하기를 청하는 것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하자, 이태연이 아뢰기를,
"훈국의 도제조는 병조의 낭관을 추고하라고 청할 수 있으나 대장은 청할 수 없습니다. 이완의 일은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장은 추고하고, 병조 낭관은 파직한 다음에 추고하라."
하였다. 상이 이어 형조 당상을 입시시키라고 명하였다. 판서 정지화가 문안(文案)을 가지고 들어와 죄수들을 품의해 판결하였다. 이를 마치고, 또 아뢰기를,
"승복한 죄인 6명을 행형(行刑)할 일은 이미 계하하시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잇달아 꺼리는 일이 있어서 거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중한 죄를 진 자가 도망갈 폐단이 없지 않고 옥수(獄囚)가 지체되는 것도 여기에서 말미암으니, 한 차례 결정 하는 일이 없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하고, 정태화가 아뢰기를,
"오늘 장릉(章陵)의 제사가 파한 후에도 형벌을 쓰지 못하게 되어 있는데, 이 규정에 대해 신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종묘의 삭망제(朔望祭)나 대제(大祭) 및 각능의 절일 대제(節日大祭)외에 그 나머지 제사의 경우에는 제사가 파한 후 형벌을 시행해도 된다. 정원은 제사의 이름을 죽 기록해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조복양이 아뢰기를,
"신이 오랫동안 본직에 있으면서 여러 차례 낭패를 만나 동료들이 모두 체직되었는데 신만 유독 구차스럽게 모면하였으니 어찌 감히 스스로 편안할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체직된다면 편안한 마음으로 진휼청의 일에 전심 전력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정태화가 계속해서 본직을 체직하도록 허락하여 진휼하는 일에 전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진달하니, 상이 본직을 체차하라고 하였다.
호조 판서 김수흥이 면직되었다.
김수흥은 김만중에게 무겁게 배척을 당하였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 상소를 올렸는데, 상이 위로하면서 오랫동안 허락하지 않았다. 이 때에 이르러 상소를 비국에 내렸는데, 대신이 회계하면서 정세상 출사하기가 어렵다고 진달하자, 상이 이에 체직하도록 허락한 것이다.
2월 14일 계미
상이 침을 맞았다.
조복양(趙復陽)을 대사성으로, 심유(沈攸)를 사간으로, 이유(李秞)를 집의로, 송창(宋昌)을 장령으로, 여성제(呂聖齊)를 부응교로, 이선(李選)을 수찬으로, 신익상(申翼相)을 설서로 삼았다.
수찬 김만중이 첫번째 정사(呈辭)하니, 상이 그로 하여금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게 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김수흥의 상소에 대해 내린 비답이 몹시 엄준하여, 심지어는
"여기에서 그의 속셈을 볼 수가 있다."
는 등의 하교가 있기까지 하였으므로 김만중이 드디어 병을 핑계로 인피하여 들어가자, 상이 또 이렇게 명한 것이다.
대사간 이태연이 아뢰기를,
"어제 등대(登對)하였을 때 훈련 대장 이완을 추고하라고 청하였다가 병조의 낭관을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는 명을 내리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이 인피하지 않은 데다가 논집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물의가 그르게 여깁니다. 체차하여 주소서."
하였는데, 처치하여 체직하였다.
정언 변황이 아뢰기를,
"신들이 일찍이 충의위를 태거시켜 군보(軍保)로 정해서는 안된다고 논하자, 다시 품의하여 처리하라는 분부가 있었으므로 우선 논계를 중지하였습니다. 지금 듣건대, 성상께서 1년을 기한으로 하여 포(布)를 징수하라고 명하였다고 합니다.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았으면 속히 그만두어야지, 하필 1년을 기한으로 하여 포를 징수해서 1천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원통함을 하소연하는 폐단이 있게 한단 말입니까. 포를 징수하지 말아서 백성들이 원망하지 않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왕자·대신·공주·옹주·부마를 천장(遷葬)할 때에는 본디 다시 예장(禮葬)하는 규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난해 고 상신 신경진(申景禛)과 원두표(元斗杓)를 천장할 때에도 모두 특별히 명하여 단지 역군(役軍)만 주었을 뿐입니다. 이것은 근거로 삼을 만한 전례입니다. 지금 이 정신 옹주(貞愼翁主)와 달성위(達城尉) 서경주의 천장에 예장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옹주와 부마가 비록 존귀하기는 하나 어찌 대신보다 더 존귀하겠습니까. 이처럼 재정이 고갈된 때를 당하여서 민폐를 무겁게 끼칠 뿐만 아니라 또한 사체에 있어서도 한원 부원군(漢原 府院君)과는 차이가 있으니, 성명을 도로 거두고 한결같이 두 상신의 예에 의거해서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훈련 도감은 바로 병조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병조 낭관이 공사(公事)로 인해서 포수(砲手)를 치죄하지 못한다는 것은, 결단코 그런 이치가 없습니다. 대장이 감히 추고하기를 청한 것은 몹시 체모를 잃은 것이며, 간관이 대장을 추고하라고 청한 것은 참으로 일의 체모를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로 인하여 특별히 낭관을 파직하고 추고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일이 비록 미세하나 크게 체통을 손상시켰으니,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부교리 윤심(尹深) 등이 구언 전지에 응하여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하께서는 재변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있으나 재변을 그치게 할 실제가 없으며, 학문에 힘쓰려는 마음은 있으나 학문이 진보되는 공효가 없습니다. 그리고 정무에 힘쓰지 않은 적이 없으나 뭇신하와 함께 왕업을 이루는 아름다움이 전혀 없으며, 다른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은 적이 없으나 실제로 실천하여 공적을 이루는 효과가 전혀 없습니다. 또한 절검을 숭상하고 사치를 혁파하고자 하시나 몸소 실행하는 교화가 미덥지 못하고, 백성들과 화합하고 천명이 영원하기를 기원하고자 하시나 부지런히 경(敬)에 힘쓰려는 노력이 도탑지 못합니다. 높게 있으면서도 낮은 데의 소리를 듣는 하늘은 거짓을 용납하지 않으며, 지극히 어리석으면서도 신령스런 백성은 속일 수가 없는 법입니다. 이미 힘쓰지 않았는데 어찌 효과가 있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어 또 아뢰기를,
"김만중의 말은 품은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진달한다는 뜻에서 나왔는데, 전하께서 너무 심하게 배척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세장(李世長)이 진달한 ‘세 공주가 온천에 행행하는 데 따라 가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한 것에 대해 전하께서 이미 옳다고 하시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자못 그렇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상하간에 서로 미덥지 못하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렸다.
2월 15일 갑신
김좌명(金佐明)을 호조 판서로, 민정중(閔鼎重)을 이조 참판으로, 이은상(李殷相)을 대사간으로, 박세견(朴世堅)을 보덕으로, 민종도(閔宗道)를 지평으로 삼았다.
상이 침을 맞은 후, 약방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이때 상의 목 부분에 핵환(核患)이 있었는데, 현삼주(玄參酒)가 핵환을 치료하는 데 가장 좋은 것이었다. 영상 정태화가 이를 진어할지 여부에 대해 묻자, 상이 이르기를,
"본디 술을 못마시어 많이 마시지는 못하더라도 오히려 효험이 있을 듯하다."
하였다. 도승지 오정위(吳挺緯)가, 전 참판 박세모(朴世模)와 그의 아비 【전 정(正) 박호(朴濠)이다.】 및 처가 한꺼번에 죽어 관 세 개가 한집에 있으며, 전 참의 이진(李𥘼)은 단지 독자가 있었는데 한꺼번에 죽어 장사를 치룰 사람이 없는 상황에 대해 아뢰자, 상이 박세모와 이진에게 장례 물품과 담군(擔軍)을 제급해 주라고 명하였다.
2월 16일 을유
대사간 이은상이, 이름이 상격(賞格) 중에 들어 있어서 편안스레 논계에 참여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체차하였다.
장령 최문식(崔文湜)이, 일찍이 이석번(李碩蕃)의 죄에 대해 논계했는데 본도에서 조사해 아뢰어서 끝내 사실이 아닌 일이 되었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체차하였다.
2월 18일 정해
상이 침을 맞았다.
조복양(趙復陽)을 부제학으로, 이태연(李泰淵)을 대사간으로, 이은상(李殷相)을 좌윤으로, 윤형성(尹衡聖)을 장령으로 삼았다.
이조가 아뢰기를,
"조금 전에 내수사의 관원이 와서 공사를 바쳤는데, 그 중에 하나는 바로 명선 공주(明善公主)방(房)의 수본(手本)으로 곽산(郭山)의 방죽을 사노비(司奴婢)와 부근 고을의 연군(烟軍)을 뽑아내어 보축(補築)하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계하된 공사에 의거해서 이문(移文)하여 분부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다만 당초에는 본사(本司)의 노비만 뽑아 써서 폐단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궁(諸宮)의 노비와 부근 고을의 연군을 더 청하였습니다. 더구나 내노비(內奴婢)도 역시 백성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처럼 서로(西路)에 기근이 들고 청나라 사신이 막 지나가서 백성들이 쉬지 못하고 있는 때에, 한편에서는 진구(賑救)하면서 한편에서는 많은 연군을 조발하는 것은, 조정에서 굶주린 백성을 진휼하는 지극한 뜻에 어그러지는 점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선은 도로 중지시키고 추분(秋分)이 되거든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공역(功役)이 얼마나 되는지 본도에 물어본 다음에 품의해 처리하라."
하였다. 정원이 또 해조의 초기(草記)에 의거해서 가을이 되거든 시행하기를 계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정원이 아뢰기를,
"형관(刑官)이 탑전에서 계청한 바, 문선왕(文宣王) 석채(釋采)와 사직(社稷)·풍운(風雲)·뇌우(雷雨)·우사(雩祀)·삼각산(三角山)·한강(漢江)·선농(先農)·선잠(先蠶) 및 종묘(宗廟)·영녕전(永寧殿)·남별전(南別殿)을 수개(修改)할 때 먼저 사유를 고하는 것과, 춘추로 각 능을 수개할 때 먼제 사유를 고하는 것 및 이외에 수시로 지내는 별제(別祭)의 축문(祝文) 가운데 어압(御押)을 받는 제사와 기우제(祈雨祭)에 이르러서는, 사체가 모두 중하니 제사지내는 날에 형벌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치 않습니다. 그 나머지 목멱산(木覓山)·선무사(宣武祠)005) ·둑제(纛祭)·동남관왕묘(東南關王廟)·여제(厲祭)·성황 발고(城隍發告)·중류(中霤)006) ·개빙 사한(開氷司寒)007) 등의 절제(節祭)는 축문에 어휘(御諱)를 쓰지 않으니 앞의 제사에 비해 가벼운 제사를 지낸 후 형벌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이상과 같이 경중을 나누어서 정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분간해 나눈 것이 자못 명백한 듯하다. 형벌을 시행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이에 의거하여 거행하라. 그리고 그 가운데 외방에서 수개(修改)한 곳 등에 지내는 제사에는 비록 수압(受押)하는 규정이 있더라도 반드시 다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
하였다.
선혜청이 아뢰기를,
"정화 옹주(貞和翁主)·한원 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趙昌遠).】 ·완산 부부인(完山府夫人) 【최씨(崔氏).】 ·영의정 【홍명하(洪命夏).】 ·정신 옹주(貞愼翁主)·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霌).】 등 여섯을 지급해 주어야 하는데, 사람 숫자로 헤아려보면 2만 3천 1백 명이고 가미(價米)로 헤아려보면 1천 5백여 석이나 되어 본청(本廳)의 형세로는 채워 줄 길이 없습니다. 천장(遷葬)하는 네 상은 각각 담군(擔軍)을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묘를 만드는 역부(役夫)의 경우는 비록 겹쳐 주지 않더라도 역을 끝마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천장하는 네 상의 역부(役夫)는 각각 한 상(喪)에 필요한 만큼의 인원으로 마련하여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원 부원군의 두 상 외에는 이에 의거해서 하라. 그리고 지금 이후로는 각각 장사지내는 상이 아닌 경우에는 천장할 때의 역군(役軍)은 단지 한 상에 필요한 만큼의 인원만 지급할 것을 정식(定式)으로 만들어 시행하라."
하였다.
예조가 한원 부원군과 완산 부부인을 천장할 때 【상구를 옮겨 발인하여 안장하는 것이다.】 대왕 대비가 망곡(望哭)하는 데 대한 의주(儀註)를 마련하여 들였다.
가주서(假注書) 강석창(姜碩昌)이 회덕(懷德)에서 돌아와 서계하기를,
"신이 명을 받고 찬선 송준길에게 가서 유시를 전하니, ‘지난 을사년에 억지로 힘써서 조정 나아갔었는바, 신의 충성은 실로 있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울에 머무른 지 몇 달 만에 한갓 늠료만 낭비할 뿐 도움을 주는 바가 없음을 스스로 깨닫고는 드디어 시골로 돌아오기로 마음을 결정했었습니다. 지금 재변이 거듭 나타나고 근심과 걱정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어찰을 내려 멀리 있는 신을 부르시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은 비록 조정에 나아가더라도 진실로 도움을 주지 못했던 을사년과 같을 줄을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죽을 날이 멀지 않아 비록 스스로 힘써 나아가고자 해도 어찌할 방도가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찬성 송시열은 ‘병세가 한창 심하여서 유시하는 글을 받들 수가 없는바, 병이 조금 낫기를 기다려서 상소를 올리겠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동부승지 홍만용(洪萬容) 역시 충주(忠州)에서 돌아와 아뢰기를,
"명을 받고 판부사 허적에게 가서 유시를 전하니 ‘신의 정적(情迹)은 비록 감히 다시 조정에 서서 거듭 조정의 수치를 끼칠 수 없으나, 병든 몸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 조금이라도 서울 가까이 가 편안하다는 보고를 듣고자 합니다. 다만 신은 복창증(腹脹症)이 고질병이 되어 뜸과 약을 아울러 써 보았으나 조금도 효험을 보지 못하여서, 끊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단지 한 가닥 실날같은 목숨뿐입니다. 성밖으로 나아가 죽고자 하는 작은 정성도 이룰 길이 없어서 황송스러워 눈물만 흘리면서 아뢸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송준길이 을사년에 나왔을 때 오로지 상에게 강학(講學)할 것을 권하였는데, 상이 마침 질병으로 인해 자주 경연을 열지 못하였다. 송준길이 이에 시골로 돌아갔으므로 그의 말이 이와 같았다. 허적은 바깥으로는 비록 병을 이끌어 대어 말을 하였으나 나아가고자 하는 그의 뜻이 여기에서 은미하게 드러났다.
2월 20일 기축
상이 침을 맞았다.
대사간 이태연 등이 아뢰기를,
"춘천 부사(春川府使) 민승(閔昇)은 전에 고을살이를 할 때 한 번도 선정을 폈다는 보고가 없었으며, 지난해 가을에는 사사로이 양전(量田)하면서 새로 찾아낸 전결을 상사(上司)에 보고하지 않고는 화전(火田)의 결복(結卜)에다 포함시킨 다음, 세를 거두어 사사로이 썼습니다. 잡아다가 추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다가 여러 차례 아뢴 뒤에야 윤허하였다.
2월 22일 신묘
대사간 이태연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듣건대, 요즈음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 복평군(福平君) 이연(李㮒) 등이 항상 경기 지방의 산골짜기에 사냥을 나가 군복을 입고 말을 달리며 출몰하여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으며, 마을에 폐를 끼쳐 심지어는 사냥개의 먹이까지도 궁한 백성들에게 마련하도록 책임지워 도처에서 시끄러우므로 백성들이 고통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종실이 마음대로 먼 경기 지방까지 출입하는 것은 이미 법을 어긴 것이며, 이렇게 기근이 든 때 다 죽어가는 백성들이 또 궁노들의 침해에 시달리니, 일이 몹시 한심합니다. 모두 추고하소서. 그리고 이 다음부터는 왕자나 종실로서 사사로이 마을에 출입하는 자는 엄하게 금지시켜 나라의 제도를 중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23일 임진
김수흥(金壽興)을 좌참찬으로, 최유지(崔攸之)를 사간으로, 박세당(朴世堂)을 교리로, 이혜(李嵆)를 부수찬으로, 이인환(李寅煥)을 검열로 삼았다.
예조 좌랑 이옥(李沃)이 재이(災異)를 인해 상소하여 수성(修省)하는 도에 대하여 논하고, 이어서 자신이 편찬한 《역대수성편람(歷代修省便覽)》 두 책을 바쳤다. 이 책은 이옥이 재이의 현상들을 수집하여, 위로는 춘추 시대부터 아래로는 송(宋)나라에 이르기까지 그 군신(君臣)이 재변을 당하여 서로 수성하여 후세에 법이 될 만한 것과 재변을 대수롭지 않게 보고 법도를 무너뜨려 후세에 경계로 삼을 만한 것, 총 48조목을 모은 다음 각각 그 아래에다 자기의 견해를 덧붙여서 올린 것이다.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마장(馬裝)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2월 24일 계사
재상을 뽑도록 명하여 우찬성 송시열(宋時烈)을 우의정으로 삼고, 우상 정치화(鄭致和)를 서차에 따라서 좌의정으로 올려 제수하였다. 효종 말년에 송시열을 재상으로 삼아 국정을 맡기려고 하다가 미처 하지 못하였었다. 이 때에 이르러 상이 이렇게 명하였는데, 대개 효종의 유지(遺旨)를 받든 것이다.
좌참찬 김수흥과 예조 판서 김수항 등이 부상(父喪)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김수흥의 아비 김광찬(金光燦)은 바로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의 양자이다. 【생부(生父)는 바로 김상헌의 형인 부사(府使) 김상관(金尙寬)이다.】 어려서 글을 읽어 태학생(太學生)이 되었으며, 벼슬길에 나아가서는 주군(州郡)의 수령을 역임하였으며, 조정에 들어와서는 공조 참의가 되었다. 장수한 자로서 관질을 높여 주어 동지중추부사에 제배되었으며, 이 때에 이르러 나이 72세로 졸하였다. 이 당시에 수흥과 수항이 재지와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난 명재상이 되었으며, 두 사위도 명로(名路)에 있어서 자손들의 영달과 번창함이 세상에 드문 바가 되어 사람들이 모두 복이 많다고들 하였다.
우의정 송시열에게 사관을 보내어 속히 올라오라고 유시하도록 명하였다. 또 두 도의 감사에게 명하여 올라올 때 말을 주라고 하였다.
2월 25일 갑오
영부사 이경석(李景奭)과 동지사 홍헌(洪憲)에게 의복과 음식물을 제급해 주라고 명하였으며, 함릉군(咸陵君) 이해(李澥)와 전 경력 김경(金坰)에게 가자하라고 명하였다. 【이해는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를 가자하고 김경은 통정 대부(通政大夫)를 가자하였다.】 이때 시종신(侍從臣)의 부모로서 나이 70 이상된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의복과 음식물을 제급해 주는 일이 있었는데, 이경석과 홍헌은 시종신으로 있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참여하지 못하였었다. 이해는 나이가 많아 【이때 나이가 78세였다.】 관직에 나아가지 않으면서 여러 차례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김경은 바로 인조께서 잠저에 계실 때 친구였으며 나이 또한 같았다. 그러므로 도승지 오정위와 호조 판서 김좌명 등이 인대하였을 때 아뢰었으므로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또 영상 정태화(鄭太和)의 말로 인해서 무신(武臣)으로서 영장(營將) 이상을 지낸 자의 부모를 똑같이 뽑아서 아뢰라고 명하였다.
경기 백성들이 크게 굶주리고 있었으므로 죽을 쑤어 진휼하였다.
2월 26일 을미
상이 하교하였다.
"지금 노인을 우대하는 전례(典禮)에 있어서 유독 종척(宗戚)들만 빠뜨렸으니, 친한 이를 친하게 대우하는 도리에 흠이 있지 않겠는가. 종반(宗班) 4품 이상으로 나이가 많은 자 및 부모가 있는 자도 똑같이 서계하라."
상이 일렀다.
"국가가 불행하여 잇달아 흉년이 들어 굶어죽은 시체가 길에 널려 있고 죽는 자가 잇달아 있는바, 백성들이 어쩔 줄 모르고 있으니, 과연 위급하다고 하겠다. 지금 적간 단자(摘奸單子)를 보고 또 그 말을 들어보니, 몹시 애처롭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밥을 먹어도 목이 메어 내려가지 않는다. 본청(本廳)에 분부하여 지금 이후로는 별도로 신칙하여 십분 착실하게 거행하게 하라."
집의 이유, 장령 윤형성이 아뢰기를,
"크고 작은 군정(軍政)을 반드시 계문하여 품정(稟定)하게 한 것은 군정을 중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충청 병영(忠淸兵營)을 청주(淸州)로 옮긴 뒤 그 당시의 병사가 기수(旗手) 1초(哨)를 애당초 계품하지도 않고 마음대로 더 설치하고는 우후로 하여금 전적으로 맡아 수괄(搜括)하게 하였는데, 이를 지금까지 그대로 따라 왔습니다. 그러다가 전 병사 이원로(李元老)가 비로소 잘못된 것을 깨닫고 상의하여 혁파하였습니다. 그런데 현재 병사로 있는 유비연(柳斐然)은 감히 그대로 두자는 뜻으로 장황하게 치계하였으니, 사체를 잘 모름이 심합니다. 기수를 더 설치하였을 때의 병사와 우후는 조사하여 죄를 주고, 유비연은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그 후에 병사와 우후는 우선 먼저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영중추부사 이경석이 상차하여 노인을 우대하는 은혜를 베풀어 준 것을 사양하면서, 이어 서울의 부녀자와 노약자 및 시골의 병들어 누워 있는 사람들이 진소(賑所)에 나아가지 못하는 상황을 진달하였다. 또
"군자(軍資)로 보관해 관할하고 있는 콩이 현재 3만 5천여 석이 있는데, 봄에 도민(都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가 가을에 새 곡식으로 거두어들여 저축하는 것이 국법이니, 5천 석을 경외에 나누어 주는 것이 마땅하며, 남는 것이 있을 경우에는 산골의 가난한 백성들에게까지 나누어 주는 것이 마땅하다."
고 말하였는데, 상이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라고 답하였으며, 또 해조로 하여금 즉시 품의해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2월 28일 정유
진휼청이 상의 전교를 받들어서 굶주리고 있는 사족(士族)의 과부 90여 집을 뽑은 다음 4등급으로 나누어서 달마다 쌀과 소금을 주었다.
대사간 이태연 등이 아뢰기를,
"연해변의 소나무 벌채를 금하는 것은 그 뜻이 범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법망이 해이해져 삼남의 연해변이 거의 대부분 벌거숭이가 되었습니다. 나주(羅州)의 팔이도(八尔島)는 내수사에 소속되어 있는 곳인데, 소금을 구울 때 내수사의 수본(手本)으로 인해서 전례에 의거해 소나무를 가져다가 쓰라는 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바닷가에서 소금을 구울 때에는 비록 잡목을 쓰더라도 구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필 소나무를 베어 쓰도록 해서 무궁한 폐단을 열어놓는단 말입니까. 해조로 하여금 다시 내수사에 분부하여 소나무를 베어 쓰는 것을 허락하지 말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요즈음 변장을 뽑으면서 그 사람의 재주에 따라 제대로 뽑지 않은 채 모두 금군(禁軍)이나 혹은 각청(各廳)에서 일을 맡아본 지 오래된 사람을 뽑아 보냅니다. 그러므로 각 진보의 변장들이 대부분 적임자가 아니어서 제대로 역할을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첨사·만호·권관에 새로 차임된 자 가운데 조정에서 사은 숙배하고 부임하는 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양사(兩司)에서 하직 인사를 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그의 사람됨됨이를 살펴본 다음, 본 바에 따라서 병조에 이문하여 일일이 태거시키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근일의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은 몹시 성대한 거조이니, 그것을 듣는 사람들치고 그 누가 감탄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영장(營將) 이상을 지낸 바 있는 사람을 모두 뽑아 아뢰게 한다면 아마도 난잡하게 됨을 면치 못할 듯합니다. 무신들 가운데 당하관으로 있을 때 동서반(東西班)의 정직(正職)을 거치고 당상관이 된 후에는 실직(實職) 첨지(僉知) 이상을 지낸 자를 뽑아 아뢰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근래에는 서경(署經)을 받는 수령들도 제대로 사람을 뽑지 못하고 있으니, 지금 비록 서경한다 하더라도 별로 효과가 없을 것이다. 이미 영장을 지냈으면 이는 응당 정직(正職)을 제수받았던 사람이다. 그런데 무슨 구별할 일이 있겠는가."
하고, 모두 따르지 않으면서, 단지 소나무의 벌채를 금하라는 아룀만 윤허하였다.
형조에 명하여, 배를 파선시킨 죄인 권시담(權時談)을 당초의 사목대로 곧장 효시(梟示)하게 하였다. 형조 참의 남구만(南九萬)이 상소하여 쟁집하기를,
"시역(弑逆)하는 것은 크나큰 악이며 살인하고 재물을 빼앗는 것은 크나큰 죄입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승복받지 아니한 채 법을 집행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크나큰 악을 저지르고 크나큰 죄를 저지른 자에게도 시행하지 않는 율(律)을 배를 난파시킨 죄에 시행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권시담의 죄가 본디 물어 보지도 않고 효시해야 합당한 죄라면 그를 체포하였을 때 즉시 처형하는 것이 옳았습니다. 지금 이미 그렇게 하지 않고 법조(法曹)에 보내어 한 해가 다 지나도록 캐어물었는데, 지금 와서 형을 집행한다면 어찌 몹시도 명분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또 범중엄(范仲淹)이 고우수(高郵守)와 조중약(晁仲約)을 구원한 일을 인용하여, 옛사람이 가볍게 사람을 죽이는 것을 경계하고 뒤폐단을 염려하던 의리를 밝히었는데, 상이 따랐다.
밤에 유성이 호성(弧星) 아래에서 나와 남쪽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4, 5척 가량 되었다.
2월 29일 무술
정부(政府) 이하에게 명하여 영릉(寧陵)을 봉심하게 하였다. 지난해 10월에 예조 판서 정지화가 봉심한 후 아뢰기를,
"능 위의 석물(石物)을 서로 이은 곳에 바른 회에 틈이 생겨 혹 실금이 가기도 하고 혹 2푼 정도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얼음이 풀린 후에는 혹 도로 합쳐지기도 하니, 우선은 얼음이 풀리기를 기다려 다시 봉심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능관(陵官)이 봉심해보니 틈이 벌어진 곳은 전과 달라지지 않았으며, 또 사초(莎草)가 말라 손상된 곳이 있으므로 본조에서 전에 품의하여 정한 대로 봉심하기를 청하여서 이런 명이 있은 것이다.
경최(慶㝡)를 충주 목사(忠州牧使)로 삼았다. 이때 충주에 기근이 몹시 심해서 굶어죽는 백성이 있었는데, 새 목사인 정시성(鄭始成)이 임소(任所)인 영암(靈巖)에서 아직 부임하지 못하였다. 이에 진휼청이 정시성을 체차하고 다른 사람을 차임해 보내기를 청하였으므로 이렇게 제수한 것이다.
좌의정 정치화가 북경(北京)에서 돌아와 곧바로 광주(廣州)로 가서는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그의 형인 정태화가 막 수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상이 사직하지 말고 올라오라고 답하고 사관을 보내어 유시를 전하였다.
상이 판부사 허적에게 중사(中使)를 보내어 어찰(御札)을 내려 불렀으며, 또 두 도의 감사에게 명하여 그가 올라올 때 수로와 육로 두 길 가운데 편한 곳으로 호송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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