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경자
헌납 윤형성이 아뢰기를,
"해마다 온천에 행행하면서 은상(恩賞)이 외람되어 전에 대간의 아룀으로 인하여 제수한 관직과 자급을 거의 모두 환수하였습니다. 지금 또 어가를 호위하였거나 도성에 머물러 있던 여러 신하들에게 상을 주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지난해의 잘못된 규례를 성상께서 이미 잘 살펴서 회수하였으니, 오늘 은전을 내린 것이 어찌 성대한 조정에서 상을 베푸는 도리에 허물이 되지 않겠습니까. 일체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상이 원임 상신(原任相臣) 허적의 시골집에 어의(御醫)를 파견하여 병을 살펴보도록 명하면서 하교하였다.
"초겨울에 판부사 허적이 계속 병중에 있다가 잠시 차도가 있기에 내가 기뻤었다. 이제 추위가 이미 다 지나가고 따뜻한 봄날씨가 점차 다가오는데 평안한지 여부를 듣지 못하여 내가 염려가 된다. 오랫동안 시골에 있어서 약을 쓰기가 참으로 어려울 것이니, 다시 어의 권유(權愉)를 파견해서 병을 살펴보게 하라."
1월 2일 신축
양 대비전에 올리는 정조(正朝)의 진하(陳賀)를 대신의 상 때문에 물려서 행하였다.
다시 양근군(楊根郡)을 설치하였다. 일찍이 강상(綱常)의 변으로 인하여 고을을 혁파해서 지평(砥平)에 소속시켰는데, 이 때에 이르러 기한이 차서 다시 설치한 것이다.
정태화(鄭太和)를 영의정으로 삼았다. 이때 삼공 자리가 모두 비어 있었으므로 전의 복상 단자(卜相單子)를 들이도록 명하고서 다시 정태화를 영의정에 제수한 것이다. 박장원(朴長遠)을 대사헌으로, 이태연(李泰淵)을 대사간으로, 민정중(閔鼎重)을 부제학으로, 윤집(尹鏶)을 호조 참판으로, 정재숭(鄭載嵩)을 교리로, 변황(卞滉)을 지평으로 삼았다.
1월 3일 임인
해조에 명하여 한원 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趙昌遠)의 천장처(遷葬處)에 묘막(墓幕)을 전례에 의거하여 만들어주게 하였으며, 장생전(長生殿)의 외관판(外棺板) 2부를 역시 내사(內司)에서 보내주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상소하기를,
"신은 죄명이 아주 무겁고 공의가 지엄하여 마음이 항상 떨렸었는데, 뜻하지 않게 다시 영의정에 제수하는 명을 받았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반드시 놀라워할 것이니, 속히 체직하여 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 해마다 흉년이 들어 국사가 몹시 어려운데 막 대신의 상을 당한 데다가 객사까지 들어오게 되었으니, 걱정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경의 재주와 덕은 진실로 시망(時望)에 맞으니, 어찌 지난날의 일로 다시 인혐해서야 되겠는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고 속히 나와서 공무를 집행하여 조야(朝野)의 바람에 부응하라."
하였다.
1월 4일 계묘
영의정 정태화가 다시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승지를 보내어서 돈독하게 유시하라고 명하였다.
1월 5일 갑진
이익(李翊)을 좌부승지로 삼았다.
1월 6일 을사
정언 조위봉(趙威鳳)이, 전에 금화(金化) 수령으로 있을 때 관소를 마음대로 떠났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헌납 윤형성(尹衡聖)이, 동료가 상의하지도 않은 채 갑자기 홍우익(洪宇翼)에 대한 아룀을 정지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였으며, 사간 심유(沈攸)가, 이미 경솔히 한 잘못이 있는데 또 동료의 지적을 당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고서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다음날 정언 이휴징이 처치하여 윤형성은 출사시키고 심유와 조위봉은 체차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1월 8일 정미
정석(鄭晳)을 사간으로, 임상원(任相元)을 정언으로 삼았다.
영의정 정태화가 다섯 번째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이조 판서 김수항이 상소하여 사직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김수항은 오랫동안 이조 판서를 맡고 있었는데, 일찍이 엄한 전지를 받고서 상소하여 간절하게 사직한 것이 여러 차례였다. 이 때에 이르러 또 병으로 사직하자, 체직한 것이다.
1월 9일 무신
흰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대사헌 박장원(朴長遠)이
"본인이 행행하였을 때의 상격(賞格) 중에 들어 있어서 본부에서 그 명을 환수하라고 아뢰는 데 참여하기가 곤란하다."
는 이유로 인피하니, 체차하였다.
1월 10일 기유
박장원(朴長遠)을 이조 판서로, 김수항(金壽恒)을 대사헌으로, 이정영(李正英)을 도승지로, 윤비경(尹飛卿)을 우승지로, 신후재(申厚載)를 사서로 삼았다.
영의정 정태화가 출사한 다음에 빈청에 나아와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어제 오시(午時)에 무지개가 태양을 꿰뚫었다고 하는데, 또 신이 그릇 영의정에 제수된 후였으므로 신은 더욱 두렵고 놀랍습니다. 이에 대궐에 나아와 스스로를 탄핵하는 것이니, 속히 신의 직을 체차하소서. 또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다시금 더욱더 마음을 가다듬고 항상 하늘을 공경하는 마음을 지니시어 재변을 해소시키는 근본으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 국사가 날로 잘못되어 가고 재변이 한꺼번에 나타나니, 걱정을 잠시도 늦출 수가 없으며 답답함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다만 재변이 일어나는 것은 실로 내가 덕이 부족한 소치이니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 것이며 또한 대죄하지도 말고 더욱더 덕을 힘써서 나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라. 나 역시 더욱더 하늘을 공경하는 마음을 가져 조금이나마 하늘의 노여움에 답하겠다."
하였다.
장령 경최(慶㝡)가, 온천에 행행한 데 대해 내린 상격(賞格)에 삼촌 조카가 포함되어 있는데도 흐리멍덩하게 논계에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체차하였다.
1월 11일 경술
장령 최문식 등이, 민진익(閔震翼)을 파직하고서 서용하지 말라고 거듭 청하니, 상이 단지 파직하라고만 명하였다.
승지 이준구(李俊耉)·윤비경(尹飛卿)·심재(沈梓)·정륜(鄭錀)·오두인(吳斗寅) 등이 아뢰기를,
"음산한 무지개가 해를 꿰뚫는 이변은 더욱 참혹한 변괴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삼양(三陽)이 시작되는 정월달에 나타났는데이겠습니까. 근래에 이러한 변이 없는 해가 없었는데 지금 또 정월 상순에 나타났으니, 나라에서 무슨 하늘에 죄진 것이 있어서 이와 같이 간절하고도 급하게 견고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수성(修省)하는 실제에 있어서 반드시 모든 방도를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시행하는 즈음에 크게 경동되거나 크게 진작시키는 거조는 보이지 않은 채, 상하가 모두 태연스럽게 여기면서 예전의 투식만 따르고 있는바, 맹자가 말한 ‘게으르고 느슨하며 말만 많다.’는 것에 불행히도 가깝습니다.
임금이 다스림을 구하는 도에 있어서 반드시 신하들의 도움을 받는 것은 참으로 한 사람의 총명에는 한계가 있어서 혼자서는 운용할 수 없어서인 것입니다. 성상께서 임어하신 이래로 신하들을 드물게 인견한 것이 대개 옥후가 편치 않은 탓에서이기는 하나, 아랫사람들이 답답하게 여겨온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시험삼아 오늘날의 일을 가지고 말해보겠습니다. 지난 겨울에 계복(啓覆)한 이후로 지금 이미 한 달이 지났는데도 비국의 여러 신하들이 한 차례도 나아가 뵙지 못하였으며, 옥당의 관원들도 하나의 쓸데없는 관원이 되어버렸습니다. 더구나 여러 업무가 적체된 뒤끝에 상신(相臣)이 마침 출사하였으니 물어보고 토의하는 거조를 더욱 하루라도 늦추어서는 안되는데이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가상히 여기고 받아들였다.
찬성 송시열이 상소하여 치사(致仕)시켜 주기를 청하였는데, 그 대략에,
"송나라의 태상 소경(太常少卿) 공승공(孔承恭)은 61세에 치사하기를 청하였는데 태종이 허락하면서, ‘이는 세도(世道)를 격려시키기에 충분하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신은 공승공보다 나이가 한 살 더 많습니다. 그리고 또 공승공은 조정에 있으면서 애를 쓰고 있었으니 그가 떠나는 것이 애석할 만했는데도 태종은 오히려 그의 청을 따라주었습니다. 지금 신이야 재야에 있으면서 하는 일도 없이 직명만 헛되이 띠고 있으니 마땅히 삭제하여야 됨을 또한 어찌 공승공에 비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온화한 말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으며, 인하여
"봄기운이 따뜻해지면 곧 올라오라."
고 유시하였다.
1월 12일 신해
오정위(吳挺緯)를 도승지로, 이은상(李殷相)을 좌윤으로, 김좌명(金佐明)을 판의금부사로, 이숙달(李叔達)을 장령으로, 이전(李淀)을 경림군(慶林君)으로 삼았다. 【이전은 공신의 적장자(嫡長子)로 승습한 것이다.】 이여발(李汝發)을 특별히 제수하여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헌납 윤형성이 아뢰기를,
"지금 이 온천에 행행한 데 대한 상전(賞典)에 신의 동성 삼촌 질녀서(同姓三寸姪女壻)도 그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날 동안 도로 거두라고 논계하여 청하면서도 조금도 혐의롭게 여기지 않았던 것은, 망령된 생각에, 대각의 체모를 존중하고 공론을 무겁게 느껴서였습니다. 전 장령 경최가, 그의 조카가 그 가운데 들어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습니다. 그러니 신이 어찌 감히 스스로를 옳다고 여겨 잠시라도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체차해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장령 최문식, 지평 변황이 무지개의 변을 인하여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들이 전하를 보건대, 재변을 만난 처음에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주 깊으며 삼가하는 마음이 매우 지극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루 이틀 지나면서 이 뜻을 계속 지니지 못하여 며칠이 지나지 않아 태만한 마음이 생겨났으니, 어찌 실제적인 것으로 하늘에 응답해야 하는 뜻에 부족함이 없겠습니까. 전(傳)에 이르기를, ‘지성껏 하여 쉬임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삼가 덕을 닦아 오래도록 쉬임이 없게 하고, 성심을 다해 하늘을 공경하여 조금도 간단이 없게 한 다음에야 하늘의 노여움을 돌이킬 수 있고 재변을 늦출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즈음 오랫동안 경연을 폐한 것이 비록 날씨가 몹시 춥고 옥체가 편치 않아서이긴 하나, 생각건대, 번잡한 중에 조금 성취했던 학문마저 잃어버리게 될 걱정이 없지 않고, 한가로운 즈음에 하루 세 번 신하들을 만나보는 뜻이 태만해질까 염려됩니다. 지난번에 간관이 아뢰어 청하자 자못 들어주시는 뜻을 보이셨는데, 봄이 이미 다 되었는데도 경연을 열지 않고 계시니, 신들은 전하께서 한갓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인다는 이름만 취하고 채용하는 실제는 없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부드러운 덕은 지나치시고 강건한 덕은 부족하십니다. 이에 개과 천선하는 뜻에 있어서는 용감하지 못하고, 말을 받아들일 즈음에는 결단이 부족합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임금의 덕은 하늘을 본받는데, 하늘의 덕은 강건함을 주로 한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지건(至健)한 의리를 체득하시고 강극(剛克)의 도리를 극진히 하시되, 자신의 생각대로 하는 것을 강(剛)으로 여기지 말며 다른 사람의 말을 거부하는 것을 강으로 여기지 마소서. 그래서 기강을 진작시키고 여러 신하들을 격려시키면 하늘의 도리에 부합할 수 있을 것이며, 수성하는 일 가운데 한 가지가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지사 김좌명이 아뢰기를,
"듣건대, 오부(五部)의 기민(飢民)들이 날마다 죽을 끊여주기를 바라고 있으며, 경기 지방도 역시 그렇다고 합니다. 그러니 2월 2일부터 죽을 끓여주어 진구하는 것이 마땅하며, 경기 감사에게도 분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김좌명이 또 아뢰기를,
"재변을 당한 충청도의 21개 고을 가운데서 가장 심한 8고을에 대해서는 가을철의 수미(收米)를 이미 전부 감해주었습니다. 그러니 그 다음으로 심한 7고을도 1두를 감해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이조 참판 조복양이 아뢰기를,
"바깥 의논들이 ‘감사가 정밀하게 구별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이른바 재변을 당한 고을들은 그 정도가 크게 차이 나지 않는데, 혹은 전부 감해주고 혹은 1두를 감해주는 것은 아주 균등치 않습니다. 그 정도가 두 번째로 심한 7고을도 똑같이 전부 감해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김좌명이 아뢰기를,
"호서 지방에 재결(災結)을 이미 4만여 결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수미를 전부 감해줄 경우, 세입(稅入)을 헤아려보면 앞으로 이어 쓸 수 없을 것입니다."
하고,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그렇다면 7고을의 수미를 2두씩 감해주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형조 판서 이경억(李慶億)이 아뢰기를,
"두 차례 소송하여 신원(伸寃)하였던 것은 청리(聽理)하지 말도록 하는 일에 대하여, 뒷날 등대(登對)할 때에 품의하여 처리하라는 전교가 있었습니다. 지난번에 장례원이 격쟁(擊錚)한 자로 인하여 회계하면서 양쪽이 부당하니 속공하라고 청하자, 당상과 낭청을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는 명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형조가 또 격쟁한 자로 인하여 회계하면서 속공하기를 청하였는데, 아뢴 대로 하라고 판하하셨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 하나를 지목하여 품의해 정하는 일이 있어야겠습니다."
하니, 김좌명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이후로 이와 같은 일에 대해서는 송관(訟官)이 복계(覆啓)하는 문서에 자신의 의견으로 곡절을 상세히 진술하되 ‘정식을 감히 바꾸지 못한다.’는 것으로 맺음말을 쓰고서 상의 결정을 기다리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자, 이경억이 아뢰기를,
"혹 상의 하교로 인하여 청리(聽理)하는 바가 있으면 새 법을 변동시킴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속공에 대해서는 비록 법전에 실려 있다고는 하나, 별판부(別判付)로써 속공하는 것은 사체에 있어서 온당치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생각으로는 속공 역시 청리에 관계되니, 지금 이후로는 속공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정식을 삼아 시행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사간 정석이 아뢰기를,
"지금 이 천변은 모두가 음(陰)이 성하고 양(陽)이 미약한 소치입니다. 무릇 임금의 한 생각이 선하냐 악하냐에 따라 문득 음과 양이 나뉘어집니다. 임금의 덕이 양강(陽剛)하면 소인은 떠나고 군자가 와서, 군자의 도가 자라나 태평의 운이 점차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임금의 덕이 음유(陰柔)하면 태평의 시대가 가고 비색의 시대가 와서, 군자의 도가 소멸되어 어지러운 형세가 이루어집니다. 강명하고 정직한 신하는 곧 양에 속하고 아첨하고 간사스런 사람은 음에 속합니다. 그리고 어진 사대부들을 접견하는 때가 많으면 양에 속하는 것이고 궁첩이나 환관들과 지내는 때가 많으면 음에 속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한 생각의 공사(公私)나 사정(邪正)에 이르러서도 음과 양으로 나뉘어 속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의 큰 근본을 말한다면, 그것은 전하의 뜻을 세움이 어떠하냐에 있습니다. 전하께서 임어하신 이래로 경연에 드물게 나갔는데, 모두들 성상의 몸이 편치 않은 탓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여깁니다. 연이어 온천에 행행하여 걸핏하면 여러 날을 보내고, 가끔씩 능에 행행하여 밤을 무릅쓰고 환궁하며, 혹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몸소 관사(觀射)하기도 하고, 혹 냉전(冷殿)에 납시어 몇 시간 동안 계복(啓覆)하기도 하시었습니다. 이것으로 보면 아마도 경연을 열 만한 틈이 없지 않은데, 다만 성상의 뜻이 굳세지 못하여서인 듯합니다. 지금 이후로 더욱더 성상의 뜻을 가다듬어서 지난날과 같이 하지 않는다면 실제적으로 하늘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달한 말이 좋다. 깊이 유념하겠다."
하였다. 교리 이규령이 이상진(李尙眞)·조수익(趙壽益)·홍처량(洪處亮)·민유중(閔維重)·이단상(李端相)·김휘(金徽) 등이 시골로 물러나 있는 일에 대해 언급하자, 상이 이르기를,
"김휘는 무슨 일로 또한 내려갔는가?"
하였는데, 이는 대개 김휘를 경시하여 그렇게 하교한 것이다. 이어서 충청 감사에게 명하여 찬성 송시열과 찬선 송준길에게 음식물을 넉넉하게 주도록 하였으며, 전 참의 이유태, 전 집의 윤선거, 전 참판 윤문거 등에게도 음식물을 내려주도록 하였다. 해은군(海恩君) 윤이지(尹履之)와 도정(都正) 윤정지(尹挺之)에게는 나이가 90이라는 이유로 전 참판 이경(李坰), 전 판결사 이전(李淀)과 함께 똑같이 가자(加資)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모두가 조복양의 아룀으로 인한 것이었다.
1월 13일 임자
사간 정석이 아뢰기를,
"지금 이 온천에 행행한 데 대한 상격을 도로 거두기를 청한 것은, 대개 조정에서 상을 신중히 내리게 하고자 해서일 뿐, 애당초 한두 사람을 지적해서 발론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감히 한집안이라는 혐의로써 혐의를 삼아 잇달아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지난번에 헌납 윤형성이 마땅히 피혐해야 하는데도 피혐하지 않아 물의가 의아스럽게 여긴다는 이유로 인피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이 어찌 감히 스스로 잘못이 없다고 하면서 동료를 처치할 수 있겠습니까. 체차해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정언 이휴징이
"대체를 보존하려고 힘썼으니 풍채가 가상하고, 공적인 논의를 함에 있어서 어찌 작은 혐의를 돌아보겠는가."
라는 등의 말로 처치하면서 윤형성과 정석을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1월 14일 계축
헌납 윤형성과 사간 정석이 "본원에서 처치한 것이 헌부에서 결정한 것과 다르고, 또 풍채가 가상하다느니 하는 등의 말은 기롱하는 뜻이 현저하다."
는 이유로 인피하니, 정언 이휴징이 처치가 어긋났다는 이유로 또 인피하였다. 다음날 지평 변황과 장령 최문식이
"지난번에 처치하여 장령 경최를 체차시켜 이런 시끄러움을 일으켰으니 처치가 어긋남을 면키 어렵다."
는 이유로 인피하고,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집의 여성제가 처치하여 윤형성과 정석, 이휴징은 출사시키고 변황과 최문식은 체차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1월 15일 갑인
대사헌 김수항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국가의 형세가 위태롭고 하늘의 재변이 거듭 닥쳐오는 것이 오늘날보다 더 심한 때가 없어서 우러러보고 굽어봄에 기가 막히고 가슴이 서늘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흰무지개가 태양을 꿰뚫는 이변이 또다시 새해 첫달에 나타났습니다. 어떤 화의 기미가 어두운 가운데 숨어 있어서 하늘이 경계를 보임이 이토록 참혹한지 모르겠습니다. 지난날의 징험은 그림자나 메아리처럼 조금도 어긋나지 않고 말할 수 없는 걱정은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가 모두 똑같으니, 어찌 크게 두려워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신이 크게 두려워하는 것은 하늘의 재변이 혹심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전하께서 실제적인 것으로 하늘에 응답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가령 전하께서 홀로 계시는 은미한 곳에서도 마음을 달리하지 않고 정령(政令)을 내리는 사이에도 실제적인 것을 다하려 힘써서, 재변이 지나간 뒤에도 한결같이 이것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어찌 재변이 다시 나타나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임금의 덕은 정무에 부지런하고 학문에 힘쓰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상의 뜻이 확립되지가 않아 뭇 일들이 두서없이 번잡해졌고 성상의 학문이 진보되지 않아 경연이 오래도록 폐해졌는바, 식자들이 깊이 걱정하고 탄식함이 항상 여기에 있었습니다. 진작시키는 뜻을 크게 분발하시어 반드시 편안함과 게으름을 경계하고, 재상과 시종하는 신하들을 접견하여 치도를 강구하고, 초야에 묻혀 있는 큰덕을 지닌 신하들을 불러와서 학문을 닦으소서. 그러면 장차 끊어지려는 국가의 맥을 이을 수 있고, 몹시 노한 하늘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1월 16일 을묘
사간 정석이 아뢰기를,
"이여발(李汝發)은 재주와 명망이 부족하고 또 경력도 없는데, 병조 참판에 특별히 제수하는 명이 사람들의 뜻밖에 나왔습니다. 무신(武臣)으로서 이 직에 제수된 자는 거의 없었으니, 전혀 조정에서 명기(名器)를 아끼는 뜻이 아닙니다. 속히 개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교리 정재숭·이규령, 부교리 윤심, 수찬 김만중·오시복 등이 흰무지개의 이변으로 인하여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오늘날 수성(修省)하여 하늘에 응답하는 실제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성상께서 먼저 큰 뜻을 세우고서 강건(剛健)한 덕으로 채우는 데 있습니다.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 임어하신 지 이미 오래인데도 예전대로 따르기만 하고 있으며, 임시 방편으로 때우면서 그럭저럭 시간만 보내고 있습니다. 즉위하신 이래로 재변이 일어나지 않는 해가 없었는데, 하늘의 경고가 처음 내리던 때에는 경동하여 마음을 가다듬고서 혁연히 분발할 것을 생각하시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예전과 마찬가지로 폐기해 버린 채 한결같이 고식적으로만 하고 있습니다. 이번의 이 흰무지개가 해를 꿰뚫는 경고에 대해서는 성상께서도 또한 경동하고 계실 것입니다만, 뒷날에 지금 예전을 보는 것만도 못하게 될지 어찌 알겠습니까.
현재 국가의 형세가 쇠약해져서 집이 무너지고 기물이 기우는 것과 같아서 바로잡고 지탱시키기를 조금도 느슨히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깊은 궁궐 속에 태평히 계시면서 그럭저럭 날짜만 보내며 한 가지 일도 조처하지 않고 한 가지 정사도 거행하지 않아 곧장 위태로운 지경으로 나가고 있으니, 신들은 성상을 위하여 애석하게 여깁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장주(章奏)의 출납에 있어서 대부분 지체시키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전례에 따라 가하다고 할 것은 한 번 성상께서 보시고 잠깐 사이에 결말지어야 하는데도 혹 여러날 동안을 안에다 놓아두기도 합니다. 이러한 따위의 일 등은 성상의 생각을 수고롭게 할 만한 것이 못 되는 데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더구나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켜서 제대로 정사를 펴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조종조에서 상참(常參)을 설치하고 윤대(輪對)의 규정을 둔 것은, 대개 사대부들을 자주 접견하여 그 사람됨을 살피고 일에 대해 묻고 말하는 것을 보아 그 재능을 살펴서 조정에는 요행으로 들어온 자가 없고 정사에 있어서는 거행되지 않는 것이 없게 하고자 해서였습니다. 선왕(先王)의 법은 이보다 요체가 되는 것이 없는데, 10년 동안에 일찍이 다시 거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신들은 가까이서 전하를 모시고 있는데도 오히려 자주 전하의 얼굴을 볼 수가 없는데, 더구나 소원한 뭇 관원들이겠습니까. 이것은 모두가 성상께서 평소에 편안하게 지내려는 마음이 승하고 떨쳐 일어나려는 뜻이 없어, 나른한 습성이 이미 이루어지고 강건한 체모가 확립되지 않음으로써 매번 일과 맞닥뜨릴 때마다 고식적으로 꿰어 맞추기만을 힘쓴 소치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한 원제(漢元帝)의 부드럽고 인자함은 좋은 것이었으나 그것이 화란의 바탕이 되었음을 사신(史臣)이 기롱하였으며, 당 문종(唐文宗)의 검소함은 아름다운 것이었으나 그 떨쳐 일어나지 못하였음을 선유(先儒)가 기롱하였습니다. 무릇 사람이 극기(克己)를 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치우친 곳에서부터 스스로 힘쓴 다음에야 공효를 거둘 수 있는 법입니다. 오늘 신들이 감히 이런 내용으로 진달드리는 것은 실로 홍범(洪範)에 있는 삼덕(三德)의 의리001) 에 부친 것입니다. 전하께서 한번 찾아서 읽어보시면 신들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깊이 장려하면서 받아들였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충청도 청주(淸州)에 사는 박임정(朴林挺)이 그의 증조부 박홍구(朴弘耉)가 역옥(逆獄)에 죽었다는 이유로 신원하고자 하여 지난해 10월에 상언하였는데, 본부에 계하되었습니다. 그런데 현재 박임정이 본토(本土)로 내려가서 그 호적을 살펴볼 수 없으며, 또한 일이 역옥에 관계되어 가볍게 논의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시행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박홍구는 광해조 때 상신(相臣)이다. 사람됨이 어리석고 비열하며 탐욕스럽고 더러웠는데, 흉론(凶論)에 부회하여 오랫동안 정승 자리에 있었다. 그러다가 인조 반정 때 조정(趙挺)과 함께 죄를 받았다. 갑자년 이괄(李适)의 난 때 그의 아들인 박내장(朴來章)이 앞장서서 역적들을 맞이하고 종사관(從事官)이라 칭하면서 성 안을 횡행하였는데, 박홍구 역시 광주(廣州)에서 군복을 입고 말을 달려 경성으로 오다가 이괄이 패배함으로 인하여 도로 시골로 돌아갔다. 박내장은 역적에게 붙었기 때문에 옥리에게 내려졌으나 유근(柳根)의 말에 힘입어 석방되었는데, 박홍구 등은 스스로 온전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역모를 꾀하였다.
이 당시 대란(大亂)이 막 평정되어 인심이 들떠 있었다. 이에 장만(張晩)이 정사 공신(靖社功臣)들과 의논하고서 남이흥(南以興)으로 하여금 스스로 역모를 꾀하는 자처럼 꾸미고서 의심스러운 사람들을 염탐하게 하였다. 그러자 박홍구의 조카인 박윤장(朴允章)이 그것을 믿고서 역모 사실을 말하였다. 이에 남이흥이 김인(金仁)과 심일민(沈逸民)을 시켜서 발론하게 하고 박홍구 부자 및 박윤장을 체포하였다. 그리고는 그의 적형(嫡兄)인 박성장(朴成章) 등을 아울러 국문하였는데, 박윤장·박성장과 박홍구의 아들인 박지장(朴知章)이 모두 자복하고서 사형되었다. 박홍구 역시 두 차례 형신한 후 자진(自盡)하도록 특별히 명하였으며, 재산은 적몰되었고 여러 아들과 조카들도 모두 죽어서 남은 후손이 없었다. 그런데 이 때에 이르러 박임정이 감히 신원할 계책을 내어 상언하기까지 하였으며, 해당 부(府)에서도 또 범범히 아뢰었는데, 기각된 것이다.
1월 17일 병진
심유(沈攸)를 장령으로, 이명익(李溟翼)을 지평으로, 경최(慶㝡)를 정언으로, 남구만(南九萬)을 형조 참의로, 김좌명(金佐明)을 좌참찬으로, 김경(金鏡)을 전라 병사로 삼았다.
태학에 감을 하사하였다. 대제학 김수항을 불러 시제를 내어 시사(試士)하였다. 진사 서문상(徐文尙)이 수석을 차지하였는데 전시(殿試)에 직부하게 하였다.
밤에 달이 태미원(太微垣)의 단문(端門)으로 들어갔다.
1월 18일 정사
대사헌 김수항이 아뢰기를,
"본부가 현재 온천에 거둥한 일로 내린 상전(賞典)을 환수하기를 청하고 있는데, 신의 형 수홍 역시 상을 받는 속에 있어서 신은 이 논계에 도리상 참여하기가 곤란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대각에서 이상한 의논을 새로 내어, 명분은 대체를 보전한다고 하나 실제로는 법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어찌 한때의 처치를 바꿀 수 없는 법조문처럼 여기며 이름을 지목하지 않았다고 핑계대고서 태연히 논핵할 수 있겠습니까. 체차하여 주소서."
하고,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사간 정석, 집의 여성제, 정언 이휴징, 헌납 윤형성이 모두 이상한 의논을 새로 만들어 내었다는 배척을 받았다고 인피하고,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다음날 옥당이 상차하여 ‘혐의가 있어서 아뢰는 데 동참하기가 곤란하다.’는 이유로 김수항을 체차시키고, 정석 등 여러 사람들에 대해서도 ‘규례에 어긋나게 처치하였다.’는 이유로 모두 체차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밤 4경에 달이 태미 동원(太微東垣)의 세 번째 별을 범하였다.
1월 19일 무오
거제(巨濟) 땅에서 동(銅)이 산출되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동이 나지 않다가 지금 처음 얻은 것이다.
1월 20일 기미
이상진(李尙眞)을 대사헌으로, 심유(沈攸)를 집의로, 권격(權格)을 헌납으로, 변황(卞榥)을 정언으로, 여성제(呂聖齊)를 사간으로, 유거(柳椐)를 장령으로, 정석(鄭晳)을 수찬으로, 박장원(朴長遠)을 지경연사로, 윤이지(尹履之)를 판돈녕부사로 삼았다.
경상도 청송(靑松)에 큰 바람이 불고 불이 나 관청과 민가 2백여 호가 불탔으며, 원양도(原襄道) 강릉(江陵)에 지진이 있었는데, 감사가 모두 아뢰었다.
1월 21일 경신
정언 경최, 장령 이숙달이 모두 상가(賞加)를 환수하라는 논계에 혐의가 있어서 동참하기가 곤란하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체차하였다.
1월 22일 신유
김수항(金壽恒)을 예조 판서로, 강백년(姜栢年)을 병조 참판으로, 민유중(閔維重)을 충청 감사로, 최문식(崔文湜)을 장령으로, 오시복(吳始復)을 정언으로 삼았다.
민유중은 앞서 경연 석상에서 편견을 가지고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친다고 김좌명에게 면박당하였으므로 정적(情迹)이 편안치 못해서 시골로 물러가 있었다. 그러다가 이 때에 이르러 이 제수가 있었는데, 두 번 상소하여 간절히 사양한 다음에 부임하였다.
1월 23일 임술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요즈음 상격을 환수하라는 논계로 인해 대간들이 인피하여 몹시 소란스러우니, 정해진 규식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부자와 형제, 삼촌 숙질 외에는 피혐하지 말라."
하였다. 예조 판서 김수항이 아뢰기를,
"왕세자가 종묘에 알현하는 예를 지난 봄에 여리(閭里)가 깨끗하지 못하여 거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외간에 전염병이 아직도 돌고 있으니, 장차 어떻게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직까지 알현하지 못한 것은 예에 있어서 온당치 않으니, 2월 그믐 사이에 다시 품의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세자가 8세에 입학하는 것은 옛 예이며 조종조에서도 이미 행한 예입니다. 지금 왕세자가 바로 입학할 나이가 되었으며, 아랫사람들의 마음도 모두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반드시 미리 결정한 다음에야 입학 절목을 바야흐로 의논해 정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 예는 그러하다만 나의 생각으로는 내년 봄에 행하였으면 한다."
하자, 이조 참판 조복양(趙復陽)이 아뢰기를,
"8세에 입학하는 것은 삼대(三代)의 성대한 예인데, 어찌 폐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1년을 물린다 하더라도 무슨 방해가 되겠는가."
하였다. 조복양이 아뢰기를,
"함경도 내의 노인들에게 이미 노인을 우대하는 예를 시행하였으니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누군들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재신(宰臣)과 시종하는 여러 신하들 중에도 연로한 부모가 있는 자가 많으니, 효(孝)로 다스리고 계시면서는 이런 사람들도 찾아내어 음식물을 하사하여 특별히 우대하는 뜻을 보이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몇 살로 한계를 정해야겠는가?"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평소에는 80세로 한계를 정하지만 지금 이 거조는 특별한 은혜에서 나온 것인데, 아래에서 어떻게 감히 한계를 정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상관 이상과 당하관으로 시종하는 사람의 부모 중 나이가 70세 이상인 자를 서계하라."
하였다. 호조 판서 김수흥이 아뢰기를,
"각도의 조곡(糶穀)을 받아들이지 못한 수령에 대해서는 으레 해유(解由)에서 월등(越等)하는 법이 있는데 7등(等)에서 그칩니다. 그런데 황해도의 경우에는 서필원(徐必遠)이 감사로 있을 때 포흠의 폐단을 없애고자 하여 2등을 월등하는 경우 모두 해유장을 내주지 말도록 청하였는데, 장계대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일찍이 해서 지방의 수령을 지낸 자는 대부분이 폐고(廢錮)되었습니다. 이 법이 한 도에서만 행해지고 있는 것도 이미 타당치 못한 것이며, 앞서의 7등을 월등하는 법도 가벼운 것이 아니니, 변통하는 방도가 있어야 합니다."
하고, 정태화가 아뢰기를,
"아문(衙門)이 배로 늘어났고 법망이 날로 치밀해져서 수령들의 해유에 구애되는 곳이 많습니다. 2등을 월등한 자에 대해서 해유를 내주지 말라는 것은 단지 한때에 폐단을 바로잡기 위한 일이니, 영원히 항식으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전대로 7등을 월등하는 것으로 한계를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 박장원이 상소하여 본직과 겸임하고 있는 경연관을 사직하고, 이어 흰무지개가 해를 꿰뚫는 변고에 대해 논하면서 상에게 편전에서 강독을 하면서 어진 선비들을 자주 접견하라고 권하였는데,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1월 25일 갑자
청 나라 사신 두 사람이 서울로 들어왔다. 상이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 맞이하였으며, 인정전(仁政殿)에서 칙서를 반포하였다.
대개 청 나라 임금이 순치주(順治主)를 천단(天壇)에 배향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에게 존호(尊號)를 올렸으므로 사신을 보내어 칙서를 반포한 것이다.
상이 차(茶)를 내어 삼작례(三爵禮)를 행하고 파하였으며, 다음날 사면을 반포하였다.
대사간 이태연 등이 아뢰기를,
"평릉 찰방(平陵察訪) 유수창(柳壽昌)은 배사(拜辭)한 뒤에 별도로 차비문(差備門)에서 기거 단자(起居單子)를 바쳤습니다. 그의 무식하고 외람된 것이야 말할 만한 것이 못되지만 사사로이 기거 단자를 바치는 것은 뒤폐단에 관계가 있습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밤에 유성이 대각성(大角星) 아래에서 나와 성성(星星) 아래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바리와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4, 5척 가량 되었으며, 색은 붉고 빛이 땅을 비추었다.
1월 26일 을축
이정영(李正英)을 형조 참판으로, 성진병(成震丙)을 지평으로 삼았다.
부제학 민정중이 충주에 있으면서 또 상소하여 병을 이유로 사면시켜 주기를 청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초저녁에 흰기운 한 줄기가 서쪽 하늘가에서 하늘 복판을 향해 뻗었는데, 모양은 혜성과 같고 꼬리의 길이가 몇 장(丈)이나 되었고, 넓이가 1척 남짓 되었으며 얼마 뒤에 없어졌다.
1월 27일 병인
박장원(朴長遠)을 동지성균관사로 삼았다. 이때 박장원이 이조 판서로 있었는데 미처 직무를 보지 못하였으므로 겸직을 잇달아 제수한 것이다.
1월 28일 정묘
영의정 정태화가 구전(口傳)으로 아뢰기를,
"듣건대, 북사가 밤에 백기의 이변을 보았으므로 오늘 일관(日官)을 불러 무슨 징조인가를 물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이변이 무슨 조짐인지는 분명히 알지 못하겠으나, 병란의 상인 듯합니다. 북사에게 그대로 고할 수는 없으니, 흉년이 들 조짐이라고 말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들 가운데도 역시 일관이 있어서 숨길 수 없을 듯하지만 일단 이에 의거해서 말해주는 것이 무방하겠다."
하였다.
대사간 이태연, 헌납 권격, 정언 변황·오시복이 재변을 인하여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조참(朝參)과 상참(常參)의 구례를 닦아 나라의 기강을 엄숙하게 하고, 상과 벌을 신중히 내려 권장하고 징계하는 뜻을 보이며, 궁금(宮禁)을 엄하게 하여 사사로운 길을 막고, 수령을 잘 가려 혜택을 베풀며, 별군직(別軍職)을 파하여 헛된 낭비를 줄이소서."
하였는데, 상이 가납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재변이 일어난 이래로 삼사가 번갈아 상소를 올렸는데, 그 가운데는 역시 현재의 폐단에 꼭 들어맞는 것도 있었다. 그런데도 우악한 비답만 내리고 실제로 채택해 시행하였다고는 듣지 못하였으니, 그러고도 어떻게 하늘의 뜻을 감동시키고 사람들의 마음을 감복시키기를 바라겠는가.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35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595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왕실-의식(儀式) / 군사(軍事) / 과학-천기(天氣) / 인사-관리(管理) / 사법(司法)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논한다. 재변이 일어난 이래로 삼사가 번갈아 상소를 올렸는데, 그 가운데는 역시 현재의 폐단에 꼭 들어맞는 것도 있었다. 그런데도 우악한 비답만 내리고 실제로 채택해 시행하였다고는 듣지 못하였으니, 그러고도 어떻게 하늘의 뜻을 감동시키고 사람들의 마음을 감복시키기를 바라겠는가.
대사간 이태연 등이 또 아뢰기를,
"담양 부사(潭陽府使) 홍성귀(洪聖龜)는 자신의 몸에 세루(世累)가 있는데도 근신할 생각을 하지 않은 데다가 사나운 아내를 두어 가도(家道)가 어그러졌습니다. 본직에 제수됨에 미쳐서는 인근 고을의 사창(私娼)을 데리고 살고, 송사를 처리할 즈음에 청탁을 행하였습니다. 이에 원근 사람들이 모두 욕하고 있으며 물정이 놀라고 있습니다. 파직한 다음 서용하지 말도록 명하소서. 새로 제수된 영흥 부사(永興府使) 이민발(李敏發)은 성질이 패려스럽고 전에 아전으로 있을 때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는 소문이 있었으며, 지금은 나이가 많습니다. 잔약해진 것을 소생시키고 폐단을 개혁하는 책임을 결단코 이와 같은 사람에게 맡겨둘 수 없습니다. 체차하도록 명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홍성귀에 대한 아룀은 이미 어제 발론되었는데, 세차례 아뢴 다음에야 따랐으며, 이민발에 대해서는 경연 석상에서 체차하도록 명하였다.
1월 29일 무진
상이 눈병으로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은 후에 약방 제조 등을 인견하였다. 도제조 정태화가 아뢰기를,
"상의 눈병이 혹 찬바람을 쐬어 도진 것은 아닙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밤에 높은 곳에 올라가 백기를 바라보려고 하다가 도진 것이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백기는 그 형체가 혜성과 비슷한데 일관도 무슨 별인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대개 그 뿌리를 보지 못해서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에도 해가 지는 것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는가?"
하자, 약방 제조 홍중보가 아뢰기를,
"강화에 해가 지는 것을 볼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그렇다면 일관(日官)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여야 합니다."
하자, 상이 일관 두 사람을 내일중으로 출발시키라고 명하였다. 이에 일관 황효공(黃孝恭) 등이 역말을 달려 갔으며 측후관(測候官)인 사서 신후재(申厚載)도 뒤따라 갔다.
밤에 흰기운이 서쪽 하늘가에 나타났는데, 천원성(天苑星) 둘째 별을 지나 구주 수구성(九州殊口星)을 가리켰으며, 길이는 5장(丈) 남짓하고 넓이는 한 자 가량 되었으며, 5경에 하늘 서쪽으로 사라졌다.
1월 30일 기사
상이 침을 맞았다.
밤에 흰기운이 서쪽에 나타났다. 구주 수구성을 꿰뚫고 천원성 둘째 별을 가리켰으며, 또 조금 북쪽으로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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