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18권, 현종 9년 1668년 3월

싸라리리 2025. 12. 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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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기해

기우제를 지냈다.

 

3월 3일 신축

집의 이유 등이 아뢰기를,
"고 능봉군(綾峰君) 이칭(李偁)이 살아 있을 때 양첩(良妾)을 데리고 살았는데, 딸을 낳기까지 하였습니다. 칭이 죽은 후 삼년상을 마치기도 전에 부상(父喪)을 당하였다고 하면서 지레 본집으로 돌아가서는 무부(武夫)인 전 군수 조시일(趙時一)에게 시집갔습니다. 그런데 칭의 적자(嫡子)인 이중번(李重蕃)이 마침 병 때문에 비접나가 있었는데, 조시일이 그 첩을 데리고 이중번이 비접해 있는 집에 가서는 집안 사람의 집이라고 하면서 궤연(几筵)과 상인(喪人)의 가속들을 몰아내었습니다. 그 음란하고 패륜적인 꼴이 원근에 전파되어 모두들 통분해 하며 놀라고 있습니다. 이에 본부에서 지금 그 첩을 잡아왔는데, 조시일도 조관(朝官)이니 패륜을 저지르고 염치없는 짓을 한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판에서 삭제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간 이태연 등이 아뢰기를,
"새로 제수된 변장들로 하여금 일일이 양사에게 하직 인사를 하게 하라는 청은 실로 변통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성상께서 ‘서경을 받는 수령들도 제대로 사람을 뽑지 못하고 있으니, 지금 비록 서경한다 하더라도 별로 효과가 없을 것이다.’고 하교하시었습니다. 서경과 하직은 차이가 있습니다. 서경은 그 의미가 그 사람의 문벌을 살펴보는데 있으며, 하직은 그 사람의 사람됨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로 제수된 수령을 반드시 서경받도록 하고 또 하직하게 하는 것은, 참으로 이 때문입니다. 변장은 수령과는 경중이 달라서 서경은 참으로 불가하나, 하직은 사람이 미천하고 관직이 낮다는 이유로 하지 않아서 뒤섞어 차임해 보내는 폐단이 있게 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이후로는 첨사·만호·권관 중 조정에서 사은 숙배하고 부임하는 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양사에서 하직 인사를 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듣건대 ‘경상도 비안(比安)에 사는 선비 집에 장성한 처녀가 있었는데 명화적(明火賊)에게 잡혀가 예천(禮泉) 땅 도적의 집에 있었다. 그런데 그 처녀가 몰래 부근에 사는 양반 집에다 자기가 잡혀온 사연을 말하자, 그 사람이 즉시 처녀의 부모에게 달려가 알렸다. 이에 계책을 세워 도적을 잡은 다음 비안현에다 가두어두고, 현감 이민도(李敏道)가 낱낱이 감사에게 보고하였는데 감사가 유의해 듣지 않고 전례에 따라 추치(推治)하여 단지 그 정범(正犯)만을 죽이고 같은 무리 4인은 모두 석방하였다.’고 합니다. 선비의 딸을 도적이 잡아다가 강간한 것이 얼마나 큰 변고입니까. 그런데도 감사는 보통 일로 보았고 옥을 다스리는 관원도 법에 의거해 따지지 않아 정범을 이미 법을 적용해 처형하지 못하였고 같은 무리도 법률에 의거해 처치하지 못하였으므로 원근에서 듣는 이들이 모두들 놀랍고 분통하게 여깁니다. 감사 남용익(南龍翼)은 먼저 파직한 다음 추고하고, 이민도는 잡아다가 심문하여 정죄하고, 같은 무리 4인은 다시 법률을 적용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으면서 남용익을 우선 중하게 추고하라고 하고, 이민도에 대한 아룀만을 따랐다.

 

좌의정 정치화가 다시 상차하여 사면시켜 줄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정치화가 광주(廣州)에 있으면서 사직하자 다시 사관을 보내어 불렀는데, 이 때에 성밖에 이르러 또 사직하자 비로소 체직을 허락한 것이다.

 

3월 4일 임인

정치화(鄭致和)를 판중추부사로, 이경억(李慶億)을 예조 판서로, 이경휘(李慶徽)를 대사헌으로, 조한영(曺漢英)을 예조 참판으로, 이합(李柙)을 필선으로, 오시복(吳始復)을 교리로 삼았다.

 

판중추부사 정치화가 복명하니, 상이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부사(副使)의 일은 몹시 참혹스럽다. 무슨 연유로 죽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별다른 병이 없었는데, 상마연(上馬宴)을 할 때 예부 낭중이 술 몇 잔을 권하여 마시고서 파한 후 술에 취해 잠들었다가 그대로 일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저들 나라에서 제문을 지었으며, 희생(犧牲)을 써서 제사지내었고, 또 음악을 베풀고 지전(紙錢)을 불에 태웠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청나라 임금의 현부에 대해 물으니, 답하기를,
"나이는 비록 어리나 자못 장대합니다. 지난해 궁녀 가운데서 아들을 낳은 자가 있으며, 금년에도 또 임신한 자가 있는데, 바깥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말하기를 몹시 꺼립니다. 이것은 대개 먼저 출생한 자가 장자(長子)가 되기 때문에 첩에게서 난 것을 혐의롭게 여겨서입니다."
하였다. 상이 또 표류한 한인(漢人)들에 대한 일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형부(刑部)에서 당연히 법에 의거해서 죄주기를 청할 것이나 많은 인명을 반드시 다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고 합니다. 김거군(金巨軍) 역시 ‘반드시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청나라 임금의 거조에 대해 물으니, 대답하기를,
"비단 놀기를 좋아할 뿐만 아니라, 몹시 사치스러워 말안장의 등자(鐙子)를 순금으로 꾸몄으며, 주전자와 그릇 등을 모두 황금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봉문(五鳳門)을 고쳐 지었는데, 한결같이 옛 제도를 따라 지어 수만 누금을 소비하였으며, 사람을 쓰는 즈음에도 뇌물을 주고받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또 묻기를,
"북경에서도 혜성이 보였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에서는 길이가 겨우 6, 7장이었다고 들었는데, 청나라에서 본 것은 길이가 수십 장이었고 백기(白氣)의 뿌리 부분에는 또 별이 있었으며, 그 모양이 광주리를 매달아 놓은 것과 같았습니다. 한인들이 모두 병란이 일어날 조짐이라고 하면서 걱정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청나라의 사정에 대해 물으니, 대답하기를,
"《진신편람(搢紳便覽)》을 구해보니 13성(省)의 포정사(布政使)를 모두 청인(淸人)으로 차견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보건대, 천하를 거의 대부분 차지한 것입니다. 오직 정경(鄭經)만이 남해(南海)의 섬을 점거하고 있어 청나라 사람들이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정경이 또 일찍이 일본에 군사를 청하였던 데다가 혼인을 하기로 약속하였는데, 일본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였다. 정치화가 이어 또 아뢰기를,
"요즈음 대간이 논계하면서 쟁집하는 것이 모두 옳은 것인데도 매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리니,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하고, 또 서로(西路)의 폐단과 만상(灣上)의 상고(商賈)를 금지시키는 일에 대해 진달하였는데, 채납해 시행한 것이 많았다.

 

3월 6일 갑진

호적에 누락된 충의위(忠義衛)에게 면포를 징수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는 일에 대해 비로소 대간의 아룀을 따랐다.

 

집의 이유, 장령 윤형성이
"어제 받든 성상의 비답에, 기수(旗手)를 새로 설치했을 당시의 병사(兵使)와 우후를 우선 추고하라고 전교하였는데, 신들은 잘못 헤아리고서 유비연(柳斐然)도 아울러 추고하기를 청하였다가 짐짓 정지하였으니, 제대로 살피지 못한 잘못을 면하기 어렵다."
는 이유로 인피하니, 체차하였다.

 

영의정 정태화, 예조 판서 이경억, 선공감 제조 정지화가 영릉(寧陵)을 봉심한 후에 아뢰기를,
"사초(莎草)는 현재 따로 고칠 일이 없으나, 석물(石物)의 경우 지난해 석회로 틈을 메운 곳이 서북쪽은 잘 메워져 틈이 나지 않았으나 동남쪽은 가느다란 틈이 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상석(裳石)을 서로 이은 한 곳이 바른 석회가 다 떨어져 나가 틈이 2푼 가량 벌어져 있으니, 비가 내리기 전에 석회로 틈을 메워 빗물이 스며드는 걱정이 없게 해야만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7일 을사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영상 정태화, 시독관 정재숭, 검토관 정석(鄭晳) 등을 불러보아 《중용(中庸)》을 강독하였다. 강독을 마치고 정태화가 아뢰기를,
"북경에서 온 자문(咨文)을 보니 ‘정관(正官)의 숫자를 30명을 넘지 않게 하라.’고 하였는바, 이에 의거해서 하여야 할 듯합니다. 그리고 별사(別使)의 행차에서 화원(畵員)이 가장 긴요하지 않으니 먼저 줄여야 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정태화가 또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북경에 갔다가 돌아올 때 짐바리가 아주 많아 수레와 말이 앞을 가려 보기에 몹시 부끄러웠습니다. 일찍이 듣건대, 대명(大明) 때 과거 시험의 책제(策題)에 ‘조선이 예의를 핑계로 화리(貨利)를 꾀하고 있는데, 끊는 것이 옳은가. 허락하는 것이 옳은가?’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대개 우리 나라에서 무역하는 습속은 전부터 이와 같았습니다."
하였다. 정언 변황 역시 입시하였다가 경상 감사 남용익(南龍翼)을 파직하라고 다시 청하였는데, 상이 처음에는 따르지 않았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감사가 이미 중한 논박을 받았으면 형세상 공무를 수행하기가 어려우며, 자리를 오랫동안 비워두는 것도 폐단이 있으니 우선 체차하느니만 못합니다."
하자, 상이 이에 체차하도록 명하였다. 이 때 함릉 부원군 이해(李澥)가 사은하기 위해서 대궐에 나아왔는데, 인견을 명하였다. 그리고는 그가 품고 있는 생각이 무엇인지 물으니, 이해가 아뢰기를,
"요즈음 대소 관원들이 모두들 직무를 게을리하여 관사(官事)에 마음을 다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데도 나라를 다스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대간의 말이 다 옳은 것은 아니지만 모름지기 양단을 잡아서 중도를 써야지, 꺾어서 모욕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하니, 상이 좋다고 하였다. 이해가 또 치사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경의 뜻을 들어주지 않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선조(先朝)의 훈구 신하로는 경 한 사람만 있으니 어떻게 물러가도록 허락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해가 파하고 나갈 때 어린 환관을 시켜서 부축하고 나가게 하였다.

 

밤에 유성이 자미원(紫微垣)의 단문(端門) 바깥에서 나와 서쪽으로 들어갔는데, 색이 붉었으며 빛이 땅을 비추었다.

 

3월 8일 병오

조형(趙珩)을 좌참찬으로, 이경억(李慶億)을 우참찬으로, 이경휘(李慶徽)를 이조 참판으로, 이상진(李尙眞)을 대사헌으로, 이정(李程)을 좌부승지로, 엄정구(嚴鼎耉)를 좌윤으로, 이은상(李殷相)을 우윤으로, 이준구(李俊耉)를 예조 참의로, 이합(李柙)을 집의로, 유거(柳椐)를 장령으로, 최관(崔寬)을 필선으로, 심재(沈梓)를 경상 감사로 삼았다.

 

예조가, 요사스러운 기운이 사라지고 측후(測候)하는 것도 정지하였다는 이유로 내일부터 정전(正殿)에 다시 임어하고 상선(常膳)을 회복하기를 청하니, 상이 일렀다.
"아뢴 대로 시행하라. 그러나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널렸고 백성들이 살아가기가 어렵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항상 슬퍼 밥을 먹어도 목에 넘어가지 않는데 무슨 마음으로 상선을 회복하겠는가. 이 한 조목은 우선 거행하지 말고 가을이 되기를 기다리라."

 

북경에 가는 원역(員役)들에게 으레 주는 사지마(私持馬) 1필 이외에 별도로 사지마를 더 주는 것을 금하고, 각처의 무역에 있어서 원래 정한 바릿수 외에 교묘히 명목을 만들어서 혹 감관(監官)이 들여보내는 것이라고 하는 따위를 모두 금단시키도록 하였다. 이는 판부사 정치화가 아뢰어서 그렇게 한 것이다.

 

관향 모곡(管餉耗穀)의 대미(大米)와 소미(小米) 1천 석과 피곡(皮穀) 2천 석을 풀어서 다시 양서의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하였다. 이 역시 판부사 정치화의 아룀을 따른 것이다.

 

정언 이숙달(李叔達)이
"어제 본원에서 헌부를 처치함에 있어서는 으레 가부에 대해 간통(簡通)을 보내는 일이 있는데, 동료가 끝내 간통을 보내지 않았다. 옛 풍도를 떨어뜨리는 것이 신에게서 시작되었는바, 태연히 있을 수 없으니 체차해 달라."
고 하고, 정언 변황(卞榥)과 대사간 이태연(李泰淵) 등이
"소대(召對)의 명이 있었음을 듣고서 대궐에 나아가기에 급하여 처치에 대한 조어를 깜빡 잊고 간통을 보내지 못하였다. 대간의 체모를 떨어뜨렸으니 감히 구차하게 무릅쓰고 있을 수 없다."
는 이유로 인피하였으며, 지평 민종도(閔宗道)는 "신의 아비 역시 온천에 행행한 데 대한 상격을 도로 거둘 대상 가운데 포함되어 있어서 감히 태연스레 대간 자리에 있을 수 없다."
는 이유로 인피하면서 모두 체차해 주기를 청하였다. 옥당이 처치하여 민종도·변황·이태연 등은 체차하고 이숙달은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우의정 송시열이 상소를 올려 사면시켜주기를 청하면서 아뢰기를,
"신은 묵은 병이 점점 도져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직명이 체직되기를 바라며 다시 상소장을 올리고는 두려움에 떨면서 비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달 27일에 홀연히 사관이 새 명을 전유하기에 신은 두려움으로 새파래져 끊어져가던 숨이 더욱 가쁘게 되었습니다. 이에 신은 속히 상소를 올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삼가 탄핵장이 이미 나왔으리라 여겨 감히 지레 올리지 못하고 3일 동안을 기다렸는데, 폐와 창자가 타는 듯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생각건대, 신이 만약 제수의 명을 마음 편히 받을 경우에는 바깥 사람들이 사방에서 놀라 비웃을 것입니다. 그런 경우 조정에 누를 끼침이 작지 않을 것이기에 죽음을 무릅쓰고 전하께 진달드리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속히 체차하라는 명을 내려 소문이 점차 멀리 퍼져 나가지 말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의 재덕(才德)과 학행(學行)은 참으로 보필하는 직임에 합당하다. 그런데 어찌하여 굳이 사양하기만 하는가. 내가 고대하고 있는 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모름지기 나의 지극한 뜻을 체득하여 마음을 바꾸어 속히 올라와 현재의 어려움을 구제하라."
하고, 이어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였다.

 

3월 10일 무신

내수사가 아뢰기를,
"이공주방(二公主房)의 평산 궁장(平山宮庄)에서 주인이 없는 가경전(加耕田)을 타량(打量)할 때 본면(本面)의 백성들이 불을 지르고 화살을 쏘아 본 고을의 하인들이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기도 하고 혹 불에 데어 거의 죽게 되었으며, 궁노들은 도망하여 겨우 살아났습니다. 변란을 일으킨 자들을 본 고을로 하여금 체포하여 처치하게 하고 전답은 전대로 타량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이조가 아뢰기를,
"변란을 일으킨 자들은 법에 의거하여 치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궁에서 차임한 자들도 반드시 세력을 빙자해 횡포를 부리면서 백성들의 전지를 빼앗는 일을 저질러서 이런 놀라운 변이 일어나게 하였으니, 그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사로 하여금 잡아 가두고서 조사해 내어 죄를 다스리게 하므로써 징계하는 바탕으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해조가 본도에 캐물은 다음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집의 이합이
"형인 이정(李程) 역시 온천에 행행한 데 대해 논상하는 데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무릅쓰고 있기가 어려운 혐의가 있다."
는 이유로 인피하니, 체차하였다.

 

3월 11일 기유

이정영(李正英)을 대사간으로, 이동로(李東老)를 집의로, 이혜(李嵆)를 지평으로, 박세당(朴世堂)을 정언으로, 이단하(李端夏)를 이조 정랑으로, 이경휘(李慶徽)를 동지경연사로 삼았으며, 조복양(趙復陽)을 발탁하여 예조 판서로 삼았다. 이때 조복양이 옥당의 장관으로 있었는데, 상이 대신에게 물어 종2품 가운데서 더 의망하라고 명하였으므로 이 제수의 명이 있었다.

 

정언 이숙달이 ‘직에 나온 후 해가 아직 남아 있었는데도 전계(前啓)를 정계하여 물의가 그르게 여긴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장령 유거(柳椐)가 처치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하였는데, 물의가 역시 그르게 여겼다. 이숙달과 유거가 이를 이유로 또다시 인피하니, 체차하였다.

 

3월 12일 경술

헌납 권격이 ‘죽은 아내를 장사지내느라 휴가 받은 기한을 넘겼다.’는 이유로, 행 대사간 이정영이 ‘본인이 온천에 행행한 데 대한 상격 안에 들어 있어서 감히 환수하라는 논계에 동참할 수 없다.’는 이유로 아울러 인피하니, 체차하였다.

 

판부사 허적이 충주(忠州)에서 올라와 강상(江上)에 도착하여 상소하기를,
"두 다리가 마비되어 전혀 운신할 수가 없어서 대궐에 나아가 사은 숙배할 길이 없습니다. 속히 직명을 체차해 주소서."
하였다. 이때 허적이 새로 군기시와 훈국의 도제조를 겸하고 있어서 아울러 해면시켜 주기를 청하였다. 상이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였는데, 말뜻이 매우 융숭하였으며, 심지어는
"맹자가 이른바 ‘큰 가뭄에 비구름 바라듯 한다.’는 것이 바로 오늘날을 두고 한 말이다. 굳이 사양하지 말고 속히 들어 오는 것이 마땅하다."
고까지 하였다.

 

판부사 허적이 입조(入朝)하였다. 상이 숙배를 하지 말도록 명하고 인견하였다. 그러자 허적이 상의 뜻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아뢰기를,
"신은 죄와 허물이 몹시 중한데도 돌보아주심이 더욱 융숭하여 염치를 돌아보지 않고 죽음을 무릅쓰고 올라왔습니다."
하니, 상이 몹시 은근하게 위로하였다. 허적이 이어 강원도 지방을 시급히 구휼해야 한다고 아뢰자, 상이 구휼할 물자를 내려주도록 명하였다. 허적이 또한 자신이 맡고 있는 제조(提調) 및 전후의 녹봉을 사양하니, 상이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승지 홍만용(洪萬容)이 아뢰기를,
"오랫동안 경연을 폐하던 끝에 소대한다는 명이 있었으므로 듣고 보는 사람들이 모두들 좋아하였습니다. 그런데 연이어 기우제의 재계(齋戒)를 만나 도로 정지하였으므로 모두들 실망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요즈음 몸이 편치 않은 일로 정지하여 나 역시 섭섭하다. 며칠 지난 뒤에 다시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자, 만용이 아뢰기를,
"옛날에 한 문제(漢文帝)는 선실(宣室)에서 음복(飮福)을 하면서도 가의(賈誼)를 불러 보았습니다. 비록 재계하는 중이더라도 유신(儒臣)을 불러들여 경서를 강론한다면 어찌 하늘을 공경하는 도리에 보탬이 없겠습니까."
하였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으로 들어갔다.

 

3월 13일 신해

민정중(閔鼎重)을 대사간으로, 김휘(金徽)를 형조 참판으로, 윤형성(尹衡聖)을 헌납으로, 이휴징(李休徵)을 장령으로, 오시복(吳始復)을 지평으로, 송규렴(宋奎濂)을 정언으로 삼고, 예조 판서 조복양(趙復陽)에게 그대로 대사성을 겸임하게 하였다. 조복양이 일찍이 대사성을 겸임하였었는데, 품계가 바뀐 뒤 법에 의거해서 당연히 체직되어야 했다. 그런데 해조가 고 유신(儒臣) 정엽(鄭曄)과 고 상신 이경여(李敬輿)의 예를 인용하여 품계하자, 그대로 겸임하도록 명한 것이다. 【두 신은 정2품에 오른 후에도 모두 그대로 겸임했었다.】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50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602면
【분류】인사-임면(任免)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여 진휼 정책에 대해 의논하였다. 이를 마치고 지평 이혜가 온천에 행행한 데 대한 상격을 도로 거두기를 거듭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온양에 행차했을 때 상격을 내린 일에 대해 매번 진달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첫해에는 전에 없던 데에서 나온 거조였고, 다음해에는 자전(慈殿)을 모시고 갔으므로 상격이 지나쳤더라도 사람들이 혹 놀랍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두 해와는 다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무리하게 군정을 거스른단 말입니까."
하니, 상이 묵묵히 있었다. 부수찬 김만중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행 판부사 허적이 시골에 내려가 있을 때 특별히 중사(中使)를 보내어 부르셨습니다. 정성을 다해 반드시 오게 하려는 성대한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만, 대신을 대우함에 있어서는 마땅히 예로 하여야 합니다. 정(旌)으로 우인(虞人)을 부른 것도 오히려 불가하다고 하였는데 더구나 중사를 보내어 대신을 부른단 말입니까. 이미 지난 일이나 뒤폐단에 관계가 있으므로 우러러 진달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을 대우함에 있어서는 마땅히 예로 하여야 한다는 것은 옳다. 그러나 정으로 우인을 불렀다는 말에 대해서는 내가 그 뜻을 모르겠다. 대신이 귀양갈 때 혹 중사를 시켜서 호송해 가게 하였는데, 인조 때에도 이런 규례가 있었다."
하자, 만중이 아뢰기를,
"불러오고자 할 경우에는 승지나 사관을 보내면 족합니다. 하필 별도로 중사를 보내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족(足)자의 뜻을 내가 이해하지 못하겠다. 중사를 보내는 것이 과중하다는 말인가?"
하자, 만중이 아뢰기를,
"승지나 사관을 보내면 부족하지 않다는 뜻이지 중사를 보내는 것이 과중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임금에게 고하는 말을 어찌 변동하는가. 중사를 보내는 것은 내가 처음으로 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지평 이혜가 아뢰기를,
"비록 승지나 사관을 보내더라도 대신이 명에 나아올 수 있는데 지금 내관을 보내었으니, 이는 외조(外朝)의 신하가 내관보다 도리어 가벼워진 것입니다. 김만중의 뜻은 이것이 온당치 않다고 여긴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의견이 바르지 못하면 말투에 자연히 드러나는 것이다. 만중의 말이 이처럼 간특하니, 그 족(足)자의 뜻을 네가 곧이곧대로 말하라."
하자, 승지 이정(李程)이 아뢰기를,
"만중은 자신의 생각을 말한 것일 뿐 단연코 다른 속셈은 없습니다."
하니, 상이 노한 목소리로 이르기를,
"만중의 말이 이와 같이 간특한데, 너 역시 이 자리에서 들었으면서도 이에 감히 비호한단 말인가. 몹시 외람되다. 이정과 만중을 먼저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
하였다. 이혜가 아뢰기를,
"두 신하를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는 명을 신이 환수하라고 청하여야 마땅한데, 이정은 바로 신의 종형(從兄)입니다. 혐의가 있어서 감히 논하지 못하겠으니, 신을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번의 이 거조는 온당치 못할 뿐만 아니라 허적에게도 방해로운 점이 있으니, 조금 위엄을 거두어서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정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조금 전에 듣건대, 입시하였던 승지와 옥당의 관원이 아울러 특별히 파직하라는 명을 받고는 인대가 끝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어수선하게 물러갔다고 합니다. 비록 상세한 곡절은 모르겠으나 이것은 반드시 성상을 가까이에서 모시므로 품은 생각을 진달하고자 한 것일 뿐입니다. 크나큰 천지는 모든 물체를 포용하며, 기뻐함과 노여워함은 중도에 맞게 하는 것이 귀중한 법입니다. 삼가 성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가 이미 친히 들었는데, 너희들이 어찌 감히 그 사이에서 비호하는가."
하였다. 또 다시 아뢰었으나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라도 나주(羅州)·창평(昌平)·영암(靈岩) 등 고을에 지진이 있었다.

 

3월 14일 임자

황해도 해주(海州)·서흥(瑞興) 등의 읍내에 불이 크게 났다.

 

경성(京城)의 남부(南部)에 불이 나 76호가 불에 탔다. 상이 하교하였다.
"요즈음 화재가 일어나지 않는 날이 없으니, 마음이 몹시 놀랍고 참혹하다. 본부(本部)의 보고를 보니, 불에 탄 집이 80호에 가깝고 또 4백 칸을 넘는다고 하는 바,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침에 참으로 몹시 참혹스럽고 애처롭다. 마침 흉년을 만나 굶주릴까 염려되니, 해조로 하여금 먹을 것을 참작하여 제급해 주게 하되, 요즈음 이와 같이 화재를 당한 자들에게도 똑같이 거행하게 하라."

 

헌납 윤형성이 아뢰기를,
"지평 이혜가 혐의가 있어서 논열하지 않은 것은 형세상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만, 혐의스러움이 없는 부분에 대해서도 논계하지 않았으니, 대간의 체모로 볼 때 그대로 자리에 있기 어렵습니다. 체차하소서. 무릇 대신에게 유시함에 있어서는 근시(近侍)의 신하가 있는데 특별히 중사를 보낸 것은, 그것이 비록 은근하고도 간절한 성상의 뜻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체모와 존경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일반적인 규례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경연의 신하가 진달한 바는 대개 이 때문이었는데, 말이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여 자세하게 말하지 못한 것입니다.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가 진달한 바에 이르러서 어찌 조금이라도 사사로운 뜻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이들이 아울러 성상의 위엄을 촉발시키자 갑자기 벌을 내렸으니, 이것이 어찌 대성인(大聖人)의 화평한 기상이겠습니까.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부응교 여성제 등이 차자를 올려 김만중과 이정 등을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는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어제 그들의 얘기는 내가 상세히 들었다. 평순(平順)한 뜻이 있었다면 내가 어찌 이런 벌을 내렸겠는가. 그 부정한 작태는 참으로 눈뜨고 볼 수 없었다."

 

함릉 부원군  이해가 차자를 올려 치사(致仕)시켜 주기를 거듭 청하였는데, 그 말이 몹시 절실하였다. 상이 위로하면서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대교(待敎) 신정(申晸)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작산(作散)되어 거관(去館)하였던 선임자가 수서(收敍)되었는데 현재 붙일 만한 자리가 없을 경우에는, 하급자가 직을 양보하는 것이 바로 사관(四館)의 전해져온 규례입니다. 본관의 관원으로서 수서된 자 세 사람은 모두 신보다 선임자인데, 전 대교 조사석(趙師錫)이 신이 자리에 있는 연고로 아직도 관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전례에 비추어서 처리해 주소서."
하였다. 일을 해조에 내렸는데, 체차되었다.

 

3월 15일 계축

박장원(朴長遠)을 좌빈객으로, 조복양(趙復陽)을 우빈객으로, 윤문거(尹文擧)를 우부빈객으로, 이합(李柙)을 필선으로, 이혜(李嵆)를 부수찬으로, 변황(卞榥)을 지평으로, 조사석(趙師錫)을 대교로 삼았다.

 

지중추부사 이완이 첫번째 정사(呈辭)하니, 내의(內醫)를 파견하여 병을 살펴보게 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영상 정태화, 시독관 이규령, 검토관 정석(鄭晳)을 소대하여 《중용》 귀신장(鬼神章)을 강독하였다. 상이 여러 신하들과 음양이 굴신(屈伸)하는 이치에 대해 논란하다가 이어 한 문제(漢文帝)가 가의(賈誼)를 불러 물어본 일에 미치었다. 지평 오시복이 온천에 행행한 데 대해 내린 상격을 도로 거두기를 다시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약방 외에는 모두 도로 거두라."
하였다. 또 김만중·이정 등을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고 한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고, 이정은 고찰(考察)만 하라고 명하였다.
이규령·정석 등이 다시 어제 차자를 올린 뜻을 거듭 말하면서 김만중을 구원하기를,
"성상의 노여움이 지나쳐서 듣기에 놀라운바, 성덕에 누가 되고 언로에 방해가 될까 삼가 염려스럽습니다."
하고, 정태화가 아뢰기를,
"그날 김만중의 말을 신은 아주 자세히 들었는바, 그의 속마음은 단연코 성상의 전교와 같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미 스스로 결단코 다른 뜻은 없다고 말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다른 뜻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전하께서는 필시 다른 속셈이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까. 지금 구언하는 때를 당해서 죄주는 것은 옳지 않으며, 허적도 반드시 불안해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의 말이 이와 같고 허상(許相)도 역시 불안해 할 것이라고 하니, 도로 거두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여염의 화재에 대한 걱정이 요즈음 들어 더욱 심하다. 병조로 하여금 기계와 군사를 갖추어 주고 한성부 관원으로 하여금 담당하여 화재를 금하게 하라."
하였다.

 

헌납 윤형성이 아뢰기를,
"온천에 행행한 데 대한 상격을 도로 거두라는 청에 대해서 약방 외에는 모두 허락하셨으니, 물 흐르듯이 간언을 따르는 아름다움을 누군들 흠앙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유독 약방에 대해서만은 한결같이 어려워하고 계십니다. 이미 상격이 지나치다는 것을 알고 계시니, 어찌 그 사이에서 구별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똑같이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3월 16일 갑인

상이 눈병 때문에 희정당에 나아가니 약방의 여러 신하들이 여러 의원을 거느리고 들어와 진찰하였다. 그 뒤에 영상 정태화가 왜인(倭人)의 서계에 회답할 내용에 대해 진달하였다. 대개 이때 왜인과 우리 나라 사람이 몰래 석유황(石硫黃)을 매매하다가 대마도주(對馬島主)에게 발각되었는데, 그 서계에 쓸 내용이 곤란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처음에 잘 기찰하지 못하여서 끝내 이런 일이 있게 되었으니 우리 나라에서 어찌 모르고 있었다고 말을 할 수 있겠는가.’라는 등의 말로 내용을 꾸미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그가 표류하여 와서 정박하였으므로 변경 사람들이 그가 잠상(潛商)인지 모르고 매매한 것이다.’고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승문원으로 하여금 몇 개를 짓게 하여 그 중에서 가려 쓰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대제학이 일찍이 주문(奏文)을 지어 왔으나, 김좌명(金佐明)이 전부터 이러한 글을 잘 지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로 하여금 한 편을 짓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상이 윤허하였다. 정태화가 또 아뢰기를,
"공작미(公作米)에 대한 일도 의당 역관 한시열(韓時說)에게 분부하여 왜인에게 ‘전에 일찍이 김근행(金謹行)으로 하여금 두수(斗數)를 줄이게 하라고 하였는데, 하지 못했다. 이에 조정에서 현재 죄를 주려고 하고 있다. 그러면서 나로 하여금 와서 말하게 한 것이다.’고 말하게 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봉목(捧木)을 허락하지 않기보다는 차라리 두수를 감하는 것이 낫다. ‘만약 두수를 감할 경우 영원히 허락하겠다.’는 뜻으로 쟁집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3월 17일 을묘

헌납 윤형성이 ‘혼자서 병조 낭관을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라는 논계를 정지하여 물의가 그르게 여긴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체차하였다.

 

우의정 송시열이 다시 상소하여 사면시켜 주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3월 18일 병진

서경(署經)하지 않은 수령이 많다는 이유로 바깥에 나가 있는 간원의 관원인 정언 박세당(朴世堂)과 송규렴(宋奎濂)을 체차하도록 명하였다.

 

조복양(趙復陽)을 대제학으로, 김좌명(金佐明)을 지춘추관사로, 이은상(李殷相)을 동지춘추관사로, 권격(權格)을 헌납으로, 윤형성(尹衡聖)을 필선으로, 유거(柳椐)를 장령으로, 민종도(閔宗道)·홍수하(洪受河)를 정언으로, 신익상(申翼相)을 검열로 삼았다. 이때 전 대제학 김수항(金壽恒)이 부모상(父母喪)을 당하니, 상이 대신 가운데서 일찍이 대제학을 지낸 자로 하여금 전례에 의거해서 천거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그런데 영부사 이경석이 병으로 인해 대궐에 나오지 못하고 상소하여 사직하자, 상이 또 집에 있으면서 천거하여 의망하게 하였다.

 

이때 가뭄이 심하여서 잇따라 기우제를 지내어 간혹 비를 얻었으나 여전히 흡족하지는 못하였다. 이에 계속 다섯 차례의 기우제를 지내도록 명하였다.

 

지평 오시복이 아뢰기를,
"온천에 행행하였을 때 여러 신하들에게 내린 상격을 이미 도로 거두도록 허락하였는데, 유독 약방에 대해서만은 어렵게 여기고 계십니다. 공이 없이 상을 준 것은 피차간에 차이가 없으며, 공론이 세차게 일어나는 것은 결코 그치게 할 수 없습니다. 똑같이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3월 19일 정사

산천단(山川壇)과 성황단(城隍壇)에 제사를 지내라고 명하였다. 또 중신(重臣)을 보내어 북교(北郊)에서 여제(厲祭)를 지내라고 명하였다. 또 근신을 보내어 험천(險川)·쌍령(雙嶺)·금화(金化)·토산(兎山)·강화(江華)에서 싸우다가 죽은 장사들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였는데, 험천 등 5곳은 병자년 난리 때 싸움터였던 곳이다. 이때 여역(癘疫)이 몹시 치성하여 중외에 죽은 자가 잇따랐는데, 교리 이규령(李奎齡)이 제사를 베풀어 기도하기를 청하고, 예조가 강화에는 본부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하라고 아뢰었는데, 상이 따른 것이다. 뒤에 강화 유수 서필원(徐必遠)이 모두 근신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기를 계청하자, 상이 허락하였다.

 

지평 변황(卞榥)과 헌납 권격이 일 때문에 서로 잇따라 인피하였다. 변황은 전에 간관으로 있을 때 부호군 권우(權堣)와 경상 감사 남용익(南龍翼), 비안 현감(比安縣監) 이민도(李敏道)가 옥사를 처리하면서 체모를 잃은 죄를 논핵할 때 참여하였는데, 권우가 그 함답(緘答)에서 언관을 심하게 헐뜯었고 또 남용익 등의 일이 사실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으며, 권격(權格)도 권우를 논계하는 데 참여하였으므로 아울러 이를 이유로 인피하였다. 헌부가 처치하여 변황은 체차하고 권격은 출사시켰다.

 

3월 20일 무오

세 번째 기우제를 지낸 뒤에 비가 조금 내렸으므로 제관(祭官)에게 상을 주라는 명이 처음 있었는데, 헌납 권격이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뒤에 대신의 말로 인하여 도로 거두었다.

 

예조 판서 조복양이 문형(文衡)의 직을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3월 22일 경신

박세성(朴世城)을 형조 참의로, 박세당(朴世堂)을 지평으로, 신정(申晸)을 설서로 삼았다.

 

집의 이동로(李東老), 장령 유거(柳椐), 지평 오시복(吳始復) 등이 탄핵하기를,
"공조 판서 구인기(具仁墍)는 당초 특별히 제수되었을 때 이미 대간의 논계를 불러 일으켰으니, 오랫동안 자리에 있을 수 없는 것이 명백합니다. 육부의 장관 자리가 이 얼마만큼 중한 자리인데 태연스레 행공하면서 스스로 처신하는 도리를 생각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체차하소서."
하였는데,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구인기는 단지 훈구 신하라는 이유만으로 육경에 제수되기까지 하였으며, 또 즉시 사직하여 체차되지 않았으므로 물의가 있었던 것이다.

 

정언 홍수하(洪受河)가 대사간 민정중과 응당 피혐해야 할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체차하였다.

 

판윤 오정일(吳挺一)이 병을 이유로 본직과 겸대한 비국 제조의 직을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수찬 김만중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허물을 지고 있는 신이 감히 다시 논사하는 직에 나아가서 명기(名器)를 더럽힐 수 없습니다. 체차하여 주소서."
하니, 체차하도록 명하였다.

 

3월 23일 신유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도성에서 10리 안의 사산(四山)에 소속된 곳은 한성부에서 금화(禁火)를 관장하고, 10리 바깥의 양주(楊州) 지역에 속하는 곳은 본주에서 금화를 관장하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게 하였다. 또한 민충단(愍忠壇)에 제사를 지내라고 명하였다. 민충단은 홍제원(弘濟院) 근처에 있는데, 임진 왜란 후에 명나라에서 동정(東征)한 장사(將士)들 가운데 싸우다가 죽은 자들을 위하여 단을 쌓고 제사를 지내었는데, 우리 나라에서 그대로 이어 제사를 지내다가 병자 호란 이전에 제사를 폐하고 지내지 않았다. 이 때에 이르러 호조 판서 김좌명이 다시 제사를 지내기를 청한 것이다. 상이 또 다음과 같이 하교하였다.
"옥사를 심리하는 일을 비록 자주 해서는 안되나 현재 가뭄이 이렇게 심하니, 해조로 하여금 현재 갇혀 있는 죄수들을 속히 관대하게 판결하도록 하되, 그 가운데 가벼이 의논하기 어려운 것은 국기(國忌)가 지난 뒤에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라."

 

대사간 민정중(閔鼎重)을 병을 이유로 면직시켰다.

 

3월 24일 임술

경상도에 전염병으로 죽은 자가 2백 30여 명이라고 감사가 보고하였다. 각도에서 보고해온 전염병으로 인해 죽은 숫자가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3월 25일 계해

민정중(閔鼎重)을 대사성으로, 이정영(李正英)을 대사간으로, 송창(宋昌)을 정언으로 삼았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영상 정태화 및 형관(刑官), 비국 당상,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여 죄수들을 소결(疏決)하였다. 집의 이동로가
"살인한 죄수 이세공(李世恭)은 여러해 동안 갇혀 있으면서 판결이 날 기약이 없으니, 이처럼 재변을 만나 신원해 주는 때를 당해서 소결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
고 하자,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살인에 관한 옥사는 가볍게 의논해서는 안됩니다."
하고, 권격은 아뢰기를,
"살인한 자를 오래 가두어 둔 채 판결하지 않아 끝내 반드시 석방되게 되었으니,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하고, 수찬 이혜는 아뢰기를,
"여러해 동안 수금되어 있었으니 의당 이온(李溫)과 같은 예로 율문을 논해야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이와 같으니 감사(減死)하여 정배하라."
하였다. 우참찬 이경억이 아뢰기를,
"살인은 중죄인데, 삼사의 신하들이 같은 말로 용서해 주기를 청하니, 몹시 옳지 않습니다."
하자,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이에 권격이 ‘미처 명을 도로 거두기를 논계하여 청하지 않았다가 중신(重臣)에게 논척당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상이 이르기를,
"너는 용서해 주기를 청하지 않았으니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이동로 역시 중신이 법에 의거하여 논척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권격이 또
"신은 성상의 분부가 정녕하여 물러나 물론을 기다리지 않았으니 즉시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했어야 하는데, 창졸간에 미처 논계하지 못하였습니다. 체차시켜 주소서."
라고 하면서 아울러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세공의 죄에 대해서 아래에서 감면해 주기를 청하는 것은, 일이 몹시 온당치 않은바, 이경억의 말이 옳습니다. 방면(放免)하는 명단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조 참판 이경휘가 병을 이유로 상소를 올려 다시 사직하니, 체직하였다.

 

각사(各司)의 노비 신공(奴婢身貢)을 각각 반 필씩 감하라고 명하였는데, 이조 정랑 이단하(李端夏)의 말에 따른 것이다.

 

3월 26일 갑자

민정중(閔鼎重)을 이조 참판으로, 이태연(李泰淵)을 좌부승지로 삼았다.

 

여제(厲祭)를 지낼 제관(祭官)으로 여성제(呂聖齊)를 험천(險川)에, 정석(鄭淅)을 쌍령(雙嶺)에, 이선(李選)을 금화(金化)에, 정재숭(鄭載嵩)을 토산(兎山)에, 남이성(南二星)을 강화(江華)에 보내었는데, 모두 옥당의 관원이다.

 

양사가 처치하여 권격과 이동로를 체차하였다.

 

재변을 입은 경상도의 18고을에서 응당 바쳐야 할 세폐(歲幣) 중 상목(上木) 1천 9백 필을 감하라고 명하였다.

 

전 지평 신경윤(愼景尹), 전 정  김익훈(金益勳), 전 참의 김익경(金益炅)을 모두 옥리(獄吏)에게 내렸다.
당초에 신경윤이 지평이 되어서 ‘몸가짐이 추잡하고 패려스럽다.’는 내용으로 김익훈을 탄핵하였는데, 그 뒤에 두 집안이 틈이 벌어져서 근거 없는 말이 매우 많았다. 김익훈이
"신경윤의 아비인 신영건(愼英建)은 일찍이 광해조 때 상소를 올려 모후(母后)를 폐하기를 청하여서 인조조 때 죄를 받아 북쪽 변방으로 귀양갔다."
고 하면서 신경윤을 흉인(兇人)의 아들이라고 지목하였다. 또 그의 동생인 김익경은 일찍이 신경윤이 청망(淸望)을 통할 때 또 다른 일을 이유로 저지하였으므로, 신경윤이 상소를 올려 스스로를 밝혔으며, 이어 김익훈 형제가 날조한 정상을 말하였다. 이에 일을 금부(禁府)에 내려 모두 잡아 가두고 면질시켰으며, 또 금부가 소장하고 있는 문서 가운데서 신영건이 죄를 받은 이유에 대해 조사해 내도록 하였다. 얼마 뒤에 금부가
"신영건의 이름이 계해 반정 이후의 도류안(徒流案) 가운데 들어 있으나 죄목이 드러나 있는 곳이 없다."
고 하였다. 한편 김익경이 공사(供辭)에 또 신경윤의 선대의 허물에 대해 극언하였으며,
"신경윤을 통청(通淸)할 때 신이 그의 행실을 들어 맞지 않는다고 말하였으므로 신경윤이 이 때문에 유감을 품고 있다."
고 하였다. 금부가 옥사가 오랫동안 결말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상께서 결단하기를 청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이미 관청의 명백한 문서가 없으니 사체에 있어서 갑자기 단안을 내릴 수가 없다. 신경윤은 방송하라. 김익훈은 그간의 소위가 몹시 형편없다. 김익경은 그 자리에 있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통청을 가로막고 사정(私情)을 따라 헐뜯으며 감히 입계하는 문서 가운데다 대서특필하였으니, 방자하고 거리낌 없음이 심하다. 단지 언관을 욕한 죄로만 죄주어서는 안되니 상세히 율문(律文)을 상고하여 중한 쪽으로 죄를 주어라. 김익훈은 참작하여 조율(照律)하라."
하였다. 그 뒤에 김익경은 대간의 아룀과 대신의 말로 인하여 직을 삭탈하고 풀어주었으며, 신경윤 역시 다시는 청직(淸職)에 제수되지 못하였다.

 

판윤 오정일(吳挺一)이 다시 상소하여 사직하니, 체직하였다.
오정일은 고 참판 오백령(吳百齡)의 손자이며, 판서 오억령(吳億齡)의 종손(從孫)이다. 억령 등은 선정신 성혼(成渾)의 조카가 되므로 평소에 성혼을 몹시 공경하였다. 그런데 오정일은 성질이 사특해 을해년에 태학생(太學生)들이 상소를 올려 성혼과 이이(李珥) 두 선현을 종사(從祀)하기를 청할 때, 그의 도당인 채진후(蔡振後) 등을 거느리고 상소하여 몹시 헐뜯었다가 드디어 사론(士論)에 죄를 얻었다. 그러나 과거에 급제한 뒤에는 삼사(三司)와 이조를 두루 역임하였다. 그가 이조 참판과 사헌부 대사헌으로 있을 때에는 당시의 요로에 있던 자들을 밤새워 찾아다녔으므로 사람들이 ‘화병(火病)을 얻었다.’고 비웃었는데, 이는 대개 횃불을 들고 다닌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집안에 있으면서는 몹시 사치스럽고 음란하여 전혀 검속이 없었다.
허적(許積)은 그의 친한 친구였다. 그런데 그가 관서 지방을 안찰(按察)할 때 허적이 정을 둔 기생을 보내주기를 청하였는데, 오정일이 한 번 보고는 좋아하여 데리고 살면서 보내지 않았다. 그 뒤 이조 참판이 되었을 때는 공공연히 청녕군(淸寧君) 한덕급(韓德及)의 집 행랑에 들어가서 그의 여종과 함께 자고서 갔다. 송시열이 이조 판서가 되어서는 그가 선현을 헐뜯었다는 이유로 청망(淸望)에 통하는 것을 막았다. 정경(正卿)에 올라서는 겨우 형조 판서와 한성 판윤을 지내는 데 그쳤다. 또 여러 차례 대간의 탄핵을 입었는데, 원망하는 기색을 얼굴에 드러내었다. 매번 비국 당상의 자격으로 입시하여서는 한마디라도 자신의 의견을 말한 적이 없었다. 그의 동생인 오정창(吳挺昌)은 더욱 음흉스럽고 불평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에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배회하면서 항상 그의 생질인 종실(宗室) 이정(李楨)·이남(李柟) 등과 더불면서 윤휴(尹鑴)의 무리와 결탁하여 사류들을 모함하고자 하였는데, 하지 못하는 짓이 없었다. 오정일이 이때에 이르러 또 병을 핑계로 극력 사직하자, 체직한 것이다.

 

3월 27일 을축

교서를 내려 구언(求言)하고 정전을 피하였으며, 반찬을 줄이고 음악을 철폐하였다. 이때 가뭄이 몹시 심하자 상이 수교(手敎)를 내려 이르기를,
"아, 오늘날 국가의 형세가 어찌하여 이처럼 극도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말과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참담해진다. 내가 임금답지 못한 자질로 임금 자리에 올라 하늘의 재앙과 백성들의 원망을 불러들임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한밤중에 스스로 돌이켜보며 몹시도 두려워하고 있다.
현재 가뭄이 몹시도 혹심한데, 지난 가을부터 겨울을 보내고 봄이 이미 다 지나갔는데도 간간이 가랑비만 내렸을 뿐 시원스럽게 비가 쏟아지지 않았으며, 햇빛은 쨍쨍 내려쬐고 스산한 바람만 불고 있다. 봄에 씨앗을 뿌리지 못하였는데 가을 추수를 어떻게 바랄 수 있겠는가. 참으로 애처로운 것은 봄보리가 다 떨어져 백성들이 모두 굶어죽게 된 것이다. 오늘날의 상황이 불행히도 가뭄에 대해 읊은 운한시(雲漢詩)의 내용과 비슷하니,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아, 죄는 나 한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백성들이야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나에게 재앙이 내리지 않고 지금 도리어 백성들에게 해가 미치는가. 아픔이 내몸에 있는 것만 같아 위급함을 무어라 말할 수 없는바, 차라리 아무 것도 들리지 않게 죽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아, 국사가 비록 이 지경에 이르렀지만 감히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하면서 스스로 나를 돌보아주는 하늘을 끊을 수 있겠는가. 정전(正殿)을 피하고 수성(修省)하는 것을 오늘부터 더욱 힘써 조금이나마 하늘의 꾸짖음에 답하도록 하겠다.
다만 생각건대, 조정의 신하들이 서로 협동한다는 말을 들을 수가 없고, 인심이 날로 투박해지고 조정의 의논이 날로 분열되어 사의(私意)가 크게 행해지고 공도(公道)는 전혀 없어졌다. 심한 자는 그 사이에서 시비를 현란시켜 반드시 사사로운 뜻을 이루고 있으니, 어찌 크게 한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전에 여러 차례나 서로 협동하라고 신칙하였으나 성과가 전혀 없었다. 대각(臺閣)에서 논박하여 바로 잡아주는 거조가 전혀 없는 것이 어찌 다른 이유에서이겠는가. 이미 서로 협동하지 못하는데 어느 겨를에 다른 사람을 논핵하겠는가. 내가 참으로 놀랍게 여긴다. 너희 대소 신민들은 국사의 어려움을 생각하고 내가 책려하는 지극한 뜻을 생각하여 서로 협동하도록 더욱 힘쓰고 각자의 직분에 더욱 부지런하여서 지난날과 같이 그럭저럭 지내지 말도록 하라.
교서가 이미 내렸는데도 올바른 말을 들을 수가 없는바, 이는 참으로 나의 실덕(失德)에서 말미암은 것이기에 몹시도 부끄럽다. 그러나 나의 임금은 어찌할 수가 없다고 하지 말라고 한 맹자의 가르침 역시 몹시도 엄절하니, 어찌 이를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땅히 전에 내린 전지(傳旨)를 준수하여, 나를 불초하다고 여기지 말고 좋은 말을 두루 진달해 나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라. 음악을 철폐하는 등의 일은 해조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열 줄의 윤음(綸音)이 말뜻이 간절하고도 애닯습니다. 항상 이런 마음을 간직하여 더욱 수성해서 하늘의 노여움을 돌이키는 것은 성상께서 얼마만큼 스스로 힘쓰느냐에 달렸습니다. 삼가 성상의 교시로 중외에 포고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글이 거칠고 졸렬하여 아픈 속마음을 만에 하나도 표현하지 못하였다. 승지가 나 대신 짓는 것이 마땅하다. 경계시켜 깨우쳐 준 말은 내가 몹시 가상하게 여기니, 감히 마음에 새겨 스스로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밤에 유성이 우성(牛星) 위에서 나와 방성(房星) 아래로 들어갔다.

 

3월 28일 병인

정원이, 성상의 분부를 중외에 반포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허적(許積)을 다시 좌의정으로 삼고, 우의정 송시열(宋時烈)로 세자부(世子傅)를 겸하게 하였다. 조계원(趙啓遠)을 한성 판윤으로, 이경억(李慶億)을 대사헌으로, 민희(閔熙)를 형조 참판으로, 이단상(李端相)을 응교로, 이합(李柙)을 집의로, 윤형성(尹衡聖)을 헌납으로, 이유(李秞)를 필선으로, 홍만형(洪萬衡)을 교리로, 김만중(金萬重)을 수찬으로 삼았다.

 

지평 오시복, 정언 민종도, 헌납 윤형성 등이 ‘어제 성상의 분부 가운데 전혀 바로잡아주는 일이 없고 서로 협동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는 이유로 서로 잇달아 인피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장령 유거 역시 성상의 분부 중의 그 말을 이유로 인혐하고, 또
"전 집의 이동로를 처치하면서 내용이 장황스러워 탄핵하는 것과 같은 점이 있어서 물의가 그르게 여긴다."고 하면서 인피하고, 지평 오시복이 또 이동로의 일을 이유로 다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다음날 장령 이휴징이 처치하여 유거를 체차하고 오시복을 출사시켰다.

 

정원과 옥당이 면대를 청하니,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인견하였다. 도승지 오정위가 분발하여 인재를 얻고 또 상참(常參)과 윤대(輪對)를 행할 것을 말하였고, 교리 윤심이 신료들을 자주 접견하고 먼저 사치의 폐단을 혁파하라고 말하였다. 수찬 이혜 역시 사치의 폐단에 대해 진달하고 또
"하직 인사를 하는 수령들을 친히 접견하여 이로써 수령들의 현부(賢否)를 살피는 것이 마땅하다."
고 말하였고, 수찬 오두인은, 오래도록 나라를 보전할 방도를 생각하여 종시토록 해이하지 말라고 성상을 권면하였다. 상이 또 ‘서로 공경하고 협심하며 각자 자신의 임무에 힘쓰라.’고 분부하니, 정석이 대답하기를,
"성상의 하교는 오늘날의 병통을 꼭 맞추었습니다. 신하들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서로 공경하고 협심하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신하들에게 그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근원이 맑으면 흐름이 깨끗한 법으로, 이것은 성상께서 어떻게 이끌어 가시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자,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오정위가 또 2품 이상을 인견하여 가뭄을 구제할 계책에 대해 묻기를 청하니, 상이 우선은 대신이 출사하기를 기다리라고 명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위에서는 분발하여 진작시키는 거조가 없고 아래에서는 마음을 다해 봉공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위에서 아래로 하교하고 아래에서 위에 고하는 것이 "각자의 직책에 부지런하라.""분발하여 이끌어 가라." 하는 말 뿐이었으니 그 요점을 얻지 못했다고 할 수는 없으나, 끝내 실효가 없었던 것은 맥이 풀린 채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는 것이 실로 오늘날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54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604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경연(經筵) / 정론(政論) / 과학-천기(天氣) / 역사-사학(史學)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사신은 논한다. 위에서는 분발하여 진작시키는 거조가 없고 아래에서는 마음을 다해 봉공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위에서 아래로 하교하고 아래에서 위에 고하는 것이 "각자의 직책에 부지런하라.""분발하여 이끌어 가라." 하는 말 뿐이었으니 그 요점을 얻지 못했다고 할 수는 없으나, 끝내 실효가 없었던 것은 맥이 풀린 채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는 것이 실로 오늘날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정평(定平) 향리(鄕吏) 김계조(金繼祖)의 아내인 양녀(良女) 계향(桂香)을 정표(旌表)하라고 명하였다. 김계조의 집에 불이 났는데 계향이 고모와 조부모의 신주(神主)를 구하고자 치솟는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가 신주를 안고 나오다가 미처 나오지 못해 끝내 불에 타 죽고 말았다. 감사가 이 사실을 아뢰자 상이 본도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거행하고 정표하라고 한 것이다.

 

3월 29일 정묘

상이 눈병이 있어서 양심합(養心閤)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의관 등은 입시하였으나 약방 제조와 사관은 희정당(熙政堂)에 있으면서 입시하지 못하였다. 그 뒤에도 모두 이와 같이 하였는데, 이것은 올바른 예법이 아니다.

 

종묘·사직·북교(北郊)에서의 7차 기우제를 대신을 보내어 지내라고 명하였다. 이때 가뭄이 심하여 잇달아 기우제를 지내었는데, 끝내 비올 기색이 없었으므로 또 이런 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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