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일 을축
응교 남이성(南二星), 교리 이규령(李奎齡), 수찬 홍주국(洪柱國) 등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지난번 대간이 민점(閔點)을 논계한 일로 인하여 조사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일의 허실이야 올라올 공사(公事)에서 자연 밝혀질 것이니, 지금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송사를 처리하는 관원이 윗 관사의 뜻을 그저 순종하여 임의로 판결한 것이 진실로 간원이 말한 바와 같다면, 안진(安縝)의 죄는 민점보다 더 큰 것입니다. 따라서 민점의 일만 조사하고 안진은 조사하지 않는다면, 일의 체모로 헤아려 보건대 절대로 이럴 수 없는 것입니다.
전 집의 김징(金澄) 등이 이미 이런 이유로 체직되었는데, 지평 최후상(崔後尙)은 언관의 자리에 있는 몸으로 이어서 논계하지 않고 지체하며 가만히 있기를 무려 열흘 동안이나 하였습니다. 그러다 비로소 인피하면서 기다렸다고 핑계대며 신중하게 처리하려고 했던 것처럼 하였습니다. 애초에 조사 대상은 단지 민점이었으니 안진의 일에 대하여 기다릴 바는 원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신중함이라는 것이 어찌 이렇게 지연시키고 구차하게 구는 풍조를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물정이 모두 그르게 여기고 있는데 장령 오상(吳尙)은 이에 출사시키기를 청하였으니, 참으로 뜻밖이었습니다.
경최(慶㝡)가 오상의 출사를 청하고 정화제가 경최의 출사를 청한 것에 있어서는 앞뒤의 조어가 한가지 투식에서 나온 듯한데, 겉으로는 신중함을 가장하면서 속으로는 구차하게 처리할 생각을 품고 있었으니, 대각의 풍도가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 더구나 오상과 정화제 등이 이른바 ‘비록 물의가 있다 하더라도 그다지 혐의할 것이 없다.’는 등의 말은 참으로 사리를 크게 해치는 말이었습니다.
사간 박세견(朴世堅)은 처치할 때 비록 미처 연명은 하지 않았지만 사적인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의견이 이미 같았으니, 또한 구차한 결과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지평 최후상, 장령 오상, 정언 경최·정화제, 사간 박세견을 모두 체차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때 후상 등이 사소한 일로 시끄럽게 인피하면서 구차한 태도가 현저했다. 그래서 옥당이 차자를 올려 논핵한 것이었다.
이홍연(李弘淵)을 승지로, 김징(金澄)을 사간으로, 조원기(趙遠期)를 지평으로, 최상익(崔商翼)·신정(申晸)을 정언으로, 이규진(李奎鎭)을 장령으로, 정지화(鄭知和)를 평안도 별시 시관으로 삼았다.
2월 3일 병인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 및 좌참찬 송준길을 인견하였는데, 태안(泰安)의 창고 설치할 곳을 가서 살펴보고 온 김좌명도 입시하였다. 상이 좌명에게 이르기를,
"창고를 설치할 곳의 형세가 어떠하던가?"
하니, 좌명이 대답하기를,
"신이 예전의 포구를 파던 곳을 보았는데, 별로 완성하지 못할 일은 없었습니다만, 육지가 30여 리쯤 되는데, 이미 파놓은 뒤에는 남북의 물이 서로 왕래하다 보면 자연 흙이 메꾸어 질 것이니, 이른바 파면 파는 대로 메꾸어진다는 것입니다. 창고를 설치하는 일도, 한꺼번에 크게 일으키지 말고 조금씩 시험해 보면서 형세를 살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좌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신의 뜻으로는, 이 일은 단지 백성들에게 크게 피해만 된다고 여깁니다. 세미(稅米)를 남쪽 창고에 들인 뒤 또 북쪽 창고로 옮긴다면 많은 손실이 있을 것이니, 형세상 백성들에게 추가로 거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창고를 설치한 뒤에는 패몰되는 배가 반드시 더 많아질 것이라고 신이 전에 말했는데, 민정중은 가을이 된 뒤 운반해 오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 알지 못한 말입니다. 대체로 백성을 부리는 데에는 편안하게 해주는 것을 우선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매해 잇따라 거둥하는 이때 백성을 동요시키는 것은 매우 온당하지 못합니다. 신의 소견이 이와 같은데, 조정이 이미 창고를 설치하기로 결정하여 중간에서 멈출 수 없다면, 우선 좌명의 말대로 조금 시험해 보면서 형세를 살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좌명이 아뢰기를,
"그곳 사람들이 모두 북창도 설치하지 않아서는 안 되니, 운반하였다가 다시 운반하고 계량하였다가 다시 계량한다면 감축되는 것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들을 때마다 다르고 볼 때마다 다르니, 당초에 이렇게 어려운 것인 줄은 몰랐다."
하였다. 좌명이 아뢰기를,
"신이 어제 판부사 송시열을 만났는데 ‘성교(聖敎)가 인명을 아끼어 이처럼 창고를 설치하려고 하시니 뜻을 받들어 이루기에 겨를이 없어야 한다. 만약 일시에 모두 거행하기 어렵다면 일부만이라도 시험하여 보는 것이 해로울 것이 없다.’고 하였고, 판부사 정치화(鄭致和)는 ‘우선 적게 시험하여 보자.’고 하였고, 영의정 정태화(鄭太和)는 ‘어떻게 하여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하였으며, 영부사 이경석(李景奭)의 뜻도 역시 매우 어렵게 여겼습니다."
하였는데, 허적이 아뢰기를,
"당초에 반드시 할 수 있다고 한 사람이 시열인데 그의 뜻 역시 적게 시험하려고 하니, 우선 이 건의에 따라서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창고를 설치하기로 정하여 놓았으니 칸수는 그 중에서 반을 감소하여 40칸으로 하라."
하였다. 좌명이 아뢰기를,
"안흥(安興)의 옛 진은 형세가 매우 좋았는데, 첨사가 새 진으로 이주하여, 불편한 일이 많고 토병들도 원망하며 괴롭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안흥의 첨사는 옛 진으로 옮기고 별장은 혁파하며, 조적(糶糴)하는 일은 태안 군수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면 좋겠습니다."
하자, 상이 재가하였다. 김좌명이 남한 산성의 조적이 포흠(捕欠)된 일을 가지고 진달하기를,
"신이 올라올 때 광주 부윤 이숙이 신에게 편지를 보내, 기축년018) 이전 무인년019) 이후의 받아들이지 못한 조적이 매우 많다고 말했는데, 변통하는 도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송 판부사가 말하기를, 김만기의 말을 듣건대 포흠은 쉽게 탕척해 주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시열이 간악한 민심을 알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한 것입니다."
하니, 좌참찬 송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기축년의 포흠을 듣고 마음이 매우 개연했는데, 지금 듣건대 무인년 이후의 포흠이 지금까지 장부에 있다 하니, 그들의 간악함을 책한다고 해서 어찌 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관리는 백성들이 납부하지 않는다고 노여워하고 백성은 관원이 봐주지 않는다고 원망하니, 나라가 위급할 때 힘입어야 하는 지역에서 백성들의 화합을 거듭 잃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형조 판서 서필원이 아뢰기를,
"간사하고 흉악한 백성들이 탕척해 주는 것에 습관이 되어서, 갚을 수 있는 자들까지도 해가 오래 되어 탕척해 주기만을 바라며 차라리 죽을지언정 납부하지 않으니, 쉽게 탕척해서는 안 됩니다. 신의 뜻으로는 결코 탕척해서는 안 된다고 여깁니다."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어찌 미워할 만한 백성이 없겠습니까마는, 그러나 미워할 만한 백성은 적고 불쌍히 여길 만한 백성이 많으니, 어찌 한두 미워할 만한 사람 때문에 허다한 불쌍한 백성을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기축년 이전의 것만 우선 탕척하라고 명했다. 준길이 아뢰기를,
"지난번 소대하였을 때 신이 종묘에 배알하는 일과 입학하는 예에 관하여 진달하였는데 상께서 관례를 먼저 행하려 하시므로 정월에 행하기를 청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시강원에서 소를 올려 입학하는 예를 먼저 행하기를 청하였다 합니다. 그 뜻이 진실로 좋습니다마는, 옛날에 제후는 12세에 관례를 행하였으니 여기에 의거하여 행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러한 일들은 매번 조종조의 고사를 따랐다. 인종 대왕이 7세에 관례를 행하였고, 나 역시 신묘년020) 에 관례를 행하고 임진년021) 에 입학하였다. 지금 상고하지 못한 것은 문종조의 《실록》이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정릉의 일도 《실록》을 상고하라는 명이 계셨는데, 문종조 《실록》을 상고하는 일이 매우 급하니, 춘추관 당상으로 하여금 함께 가서 상고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평안도 시관 정지화가 지금 내려가야 하는데, 그 안에 장애가 되는 폐단이 없지 않으니, 변통해야 될 것 같습니다."
하니, 지화가 아뢰기를,
"근래 유언비어가 매우 많은데, 양서가 가장 심합니다. 시험을 보여 인재를 취하는 일이 마침 이런 즈음에 있게 되었으니, 신의 뜻으로는 그 규정을 엄하게 하여 선발 숫자를 적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뭇 사람들의 뜻은 이런 때 과거를 베푸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고 하여 혹 연기해 행하고자 합니다만, 신의 뜻으로는 애초에 하지 않았다면 모르거니와 이미 베풀기로 결정하여 문인이나 무인이나 모두 기뻐하는데 지금 중간에서 멈춘다면 유언비어가 반드시 이로 말미암아 더욱 일어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규정도 어찌 굳이 지나치게 엄하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떠들썩하는 말이 있다면 우리도 할 말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함경도에서 시재(試才)한 숫자에 의거하여 뽑으라. 그리고 급제자를 발표하는 일도 함경도의 전례에 의거하여 하라."
하였다. 송준길이 정릉의 일로 상께 아뢰기를,
"누대에 걸쳐 행하지 못하였던 일을 시열의 한마디로 윤허하시니, 군신간에 뜻이 맞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이 광평 대군(廣平大君)의 집에 소장된 책을 보니, 임자년에 위로 삼공에서부터 아래로 낭서(郞署)에 이르기까지 수개월을 복합(伏閤)하여 다투었으나 마침내 한식절에 제사 한 번 지내는 것으로 윤허하였습니다. 중간에는 와전된 말로 지금의 정릉이 본릉이 아니라 하므로 자손에게 지석(誌石)을 파서 보게 하였는데 지석은 비록 찾지 못하였으나 국릉(國陵)인 것은 확실하였습니다. 제문 중에 ‘《실록》이 떨어지고 문드러져 상고할 수 없다.’는 말이 있으니 지금 비록 《실록》을 상고한다 하여도 자세한 것은 찾기 어렵습니다. 신의 뜻은 부묘(祔廟)하는 일은 《실록》을 상고한 뒤에 논의하여 결정하고, 정자각을 중건하는 일은 매우 긴급하니 우선 거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어렵게 여기는 것은 오직 부묘하는 일이다. 이미 참봉(參奉)을 뽑았고 또한 재실(齋室)도 지었으니 정자각을 우선 창건하게 하라."
하였다. 김좌명이 또 아뢰기를,
"원산도(元山島) 목장의 말을 대산곶(大山串)에 옮겨 두고 충청 수군 우후를 원산에 진주하게 하여 풍화(風和)한 철의 변에 대비할 바탕으로 삼고, 또 조선(漕船)이 올라올 때 점검하여 올려 보내게 하는 것이 편리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김좌명이 아뢰기를,
"호서(湖西)의 양전(量田)이 이미 시작되었으나 형편상 농사철 전에는 양전을 마치기가 어려울 듯하니 매우 염려됩니다. 신이 민유중의 말을 들으니 ‘몸에 질병이 있고 공무가 매우 많아서 제대로 들녘에 나다니며 직접 둘러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감사를 체임하거나 혹 균전사(均田使)를 별도로 차출한다면 맡은 일을 수행하는 데 뜻을 오로지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중이 이미 이 일을 시작하였으니 감사의 체직을 허락하고, 그에게 양전하는 일을 전담하게 하라."
하였다.
상이 판윤 조복양(趙復陽)이 지방에 있다는 이유로 체직시키고, 인하여 종2품 가운데서 의망하여 차출하라고 명하였다.
2월 4일 정묘
사간 김징이 아뢰기를,
"신이, 전 정랑 김왕(金迋)이 일찍이 충청 도사가 되었을 때 시관(試官)을 맡고서 사사로움을 행하여 형을 받고 멀리 귀양갔었는데 지난번 예조 낭관으로 임명되었다고 듣고는 마음으로 매우 옳지 않다고 여기던 중, 우연히 이조 판서 이경휘(李慶徽)를 만나 그 주의의 잘못됨을 말하였습니다. 그것은 신이 다만 김왕의 나중의 죄과만 알았고 지난날 한 장의 상소로 인한 명의(名義)가 지중한 줄은 진실로 생각지 못하였던 까닭입니다. 그리하여 경휘 역시 신의 말을 옳게 여기고 즉시 계달하였던 것인데, 대신이 경연에서 면박을 하면서 말뜻이 준엄하였습니다. 경휘의 낭패가 사실은 신 때문이었으니 대신의 공척을 신이 받아야 마땅합니다. 또한 신이 현재 추감(推勘)을 받고 있으니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헌부가 처치하여 체차하였다.
2월 5일 무진
상이 양심합에 나아갔다. 약방이 들어와 진맥을 하였다. 도제조 허적이 아뢰기를,
"전후의 수교(受敎)를 조사하여 바로잡는 일에 관하여 일찍이 정탈(定奪)했는데, 반드시 아무 대신이 관장하라는 명이 있어야 당상을 차출하여 거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살펴 하고, 당상은 넉넉하게 재가를 받아 상의할 터전으로 삼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그전에 상이 훈련 도감의 병제(兵制)를 변통하고자 하였는데, 여러 의논이 모두 한정(閑丁)을 얻기가 어렵다고 하므로 상이 각도의 감영·병영·수영의 영장(營將)에 임시로 소속되어 있는 한정의 숫자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허적 등이 물러가 각도의 성책(成冊)을 상고한 결과 합계가 5만 4천여 명인데, 직책이 있거나 역무(役務)가 있는 자와 공사천(公私賤)을 제외하면 한정의 수는 1만 1백 58명이었다. 그 중에서 또 서북 양도(兩道)의 사람을 제외하면 한정의 실제 수는 6천 6백 65명인데, 이 숫자를 가지고 어영청의 예에 의하여 13번으로 나누면 매번의 수가 5백 12명이었다. 이 수를 도감으로 이송한 다음 뽑아내어 번에 오르게 하는 것을 어영청의 제도처럼 하라고 청하자, 상이 각도의 계본(啓本)을 성책(成冊)과 함께 도감으로 이송하여 처치하게 하였다.
이 때 도감의 군병이 실용에는 보탬이 없고 한갓 국고만 소비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꼬리가 크면 휘두르기 어렵듯이 병사가 많으면 지휘하기 어렵지 않을까 하고 우려하였다. 이단하가 경연에서 맨 먼저 발론하였고 그 후 송시열이 상에게 말하여 어영청의 규모에 의거하여 국(局)을 설치하고 인하여 훈련 도감을 혁파하자고 하였다. 상이 새로이 1군을 설치하는 것은 좋아하면서 구군(舊軍)을 혁파하는 것은 어렵게 여겨 이완에게 문의하니, 이완이 훈련군을 혁파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극언하고 또 1군 신설의 어려움을 말하였으나, 허적과 유혁연(柳赫然)이 극력 찬동하며 신군의 명칭을 훈련 별대(訓鍊別隊)라 하였다.
혁연이 자원 모집하면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자, 상이 힘써 행하면서 훈국 군병의 도망한 자를 여전히 충정하니, 시열이 건의한 뜻과 크게 달랐다. 군병을 모집할 때 원망과 비방이 떼로 일어나 사람마다 그 때문에 말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나 허적과 혁연은 시종 찬성하였는데, 대체로 상이 군무에 마음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해(李澥)를 봉조하로, 송시철(宋時喆)·박세성(朴世城)을 승지로, 홍만용(洪萬容)을 대사간으로, 이유(李秞)를 사간으로, 이숙(李䎘)을 충청 감사로 삼고, 민희(閔熙)를 특별히 판윤으로 제수하였다. 상이 종2품 중에서 판윤을 차출하라고 이미 명하였는데, 허적이 경연에서 상께 아뢰기를,
"아경(亞卿)을 정경(正卿)으로 초배(超拜)하는 것은 신 한 사람의 독천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종2품 중 합당한 사람으로는 오직 민희(閔熙)가 있는데 신에게는 인척이 되므로 감히 의망할 수 없습니다. 상께서 적임자를 특별 제수하소서."
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전교를 받았으니 적임자를 선택하여 의망하면 될 것인데 하필이면 특별 제수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정사를 열고 보니 상이 민희를 특별 제수하였다. 민희가 아경으로 승급된 지 수개월도 못 되어 갑자기 정경으로 승진되자, 허적이 물정을 어기고 인척을 천거하여 민희가 재주도 없으면서 갑자기 승진되었다고 여론이 시끄러웠는데, 민희는 마침내 논박을 당하였다.
군자 주부(軍資主簿) 이성철(李誠哲)은 문순공 이황의 봉사손인데, 월등(越等)이 있어 녹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좌의정 허적 이 판부사 송시열의 말로 인하여 상에게 아뢰니, 상이 특명으로 월등을 탕척하여 현인을 숭상하는 뜻을 보이게 하였다. 대간이 법을 어긴 것이라고 간쟁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동부승지 이단상(李端相)이 승진 발탁된 뒤 재차 현도(縣道)를 통하여 사직하자 상이 분의로써 타일렀다. 단상이 세 번째 상소하여 허리가 굽어 벼슬에 종사할 수 없는 상황임을 극구 진달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체직을 허락하였다.
부제학 이민적(李敏迪) 등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천하의 일이란 전일에 폐지되었다가 뒷날에 거행되는 경우도 있으며 한때는 굴하였으나 만세에 펼쳐지는 경우도 있으니, 그 일의 옳으냐 그르냐의 여부만을 살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정에 편안하지 못한 것이라면 오래된 일이라고 하여 내버려두어서도 안 되며, 빠트릴 수 없는 천리라면 조종(祖宗)이 행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여 어렵게 여겨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는 분명한 사리이며 역대의 공통된 논리입니다.
이번 신덕 왕후(神德王后) 능묘에 관한 논의는 대신이 이미 그 단서를 발론하였고 성명께서도 그 말에 감동하셨습니다. 원릉(園陵)의 제도에 있어서 관리의 설치 및 사물의 비치를 여러 능묘에 견주게 하니, 성인의 넓으신 효성을 누구인들 흠앙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삼가 듣건대 성상께서 종묘 제사에 관한 절차를 아직도 어렵게 여기는 뜻을 경연에서 보이셨다 합니다.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신덕 왕후는 신의 왕후(神懿王后)가 별세한 후 성조(聖祖)께서 건국할 때 천자(天子)의 고명(誥命)을 받고 일국의 국모(國母)가 되어 중곤(中壼)의 자리에 있은 지 10여 년이 되었습니다. 지금 선유 이색(李穡)이 찬한 정릉비(定陵碑)를 상고하면 역시 ‘먼저 모씨에게 장가들고 후에 모씨에게 장가들었다.’ 하여 원(元)과 차(次)의 분별이 없으며, 권근(權近)이 찬한 흥천사비(興天寺碑)에도 역시 봉함을 받아 곤위에 있었던 실상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용비어천가》는 세종조에 만들어진 것인데도 역시 신덕 왕후라고 쓰여져 있으니, 위호가 바뀌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이것이 또한 분명한 증거인데 어찌 다시 증거를 상고한 후에야 알 수 있겠습니까. 승하한 후에 존호와 시호를 올리는 일을 예관(禮官)들이 폐지하지 않았고 제사를 모시던 의식과 축판이 아직도 향실(香室)에 있으며 태종 대왕이 친히 향축(香祝)을 전하였으니, 그 위호와 축식의 존융함은 지금까지 바뀌지 않았으며 원릉 석물(石物)의 설비 역시 극히 높여 거행했습니다. 살아서는 정비(正妃)가 되었고 죽어서는 존호를 받았으며 중국으로부터 고명을 받아 성조와 짝하였으니, 유독 태묘(太廟)에 배향되지 못한 것이 어찌 인정에 거역되고 천리에 괴리되어서 성조의 궐전(闕典)이 되고 천고의 유한이 되지 않겠습니까. 선조조(宣祖朝) 14년 신사 연간에 대신과 삼사가 역시 건의하였으나 성대한 예를 거행하지 못하였으므로 언젠가는 거행해야 할 일이니, 이는 실로 오늘날 성조의 책임인 것입니다.
소릉(昭陵)022) 의 복위 문제는 여러 조정을 지나 중종 때 비로소 거행하였으니, 조종이 거행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하여 일찍이 어렵게 여기지 않았으며 또한 오래된 일이라고 하여 내버려두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비록 고사를 가지고 말한다 하더라도 한·당 이래로 송나라의 가법(家法)이 가장 순정(純正)하다고 하는데 원우 황후(元祐皇后)023) 의 복호는 정자(程子)도 옳다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지금 신덕 왕후는 존호가 바뀌지 않았고 정릉의 의물(儀物)도 아직까지 왕후의 법제로 되어 있으니, 소릉의 개봉(改封)이나 원우의 복위처럼 중대하고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다만 빠뜨린 전례를 소급하여 거행하고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상세하게 정문(情文)을 마련하면 될 뿐이니, 이렇게 한 다음에야 천리에 합하고 인정이 순응하게 될 것입니다.
국가의 전례는 관계됨이 매우 중하고 논의가 이미 발론되어 여론을 막기가 어려우니, 의리로 헤아려 결단하여 행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2월 6일 기사
겸보덕 남이성(南二星), 설서 이민채(李敏采), 겸설서 홍만종(洪萬種)이 상소하여, 왕세자의 관례를 어린 나이에 일찍 행하는 잘못을 진달하기를,
"《예기(禮記)》에 ‘옛 예에 남자는 스무 살이 되면 관을 썼다.’고 하였으며, 주자(朱子)가 관례를 정하여 지을 때 ‘남자는 나이 열다섯부터 스무 살에 이르기까지 모두 관을 쓸 수 있다.’고 했으며, 사마광(司馬光)의 말에는 ‘옛날에는 스무 살이 되어야 관을 씌웠으니, 성인의 예를 요구하는 것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의례(儀禮)》 관의(冠儀)에 ‘천자와 제후는 열두 살에 관을 쓴다.’는 글이 있는데, 해설하는 자가 ‘임금이 일찍 관을 쓰는 것은, 임금이 왕교(王敎)의 근본이므로 어린아이의 도로써 다스릴 수 없기 때문이다.’고 하였습니다. 또 공자가 ‘천자의 원자(元子)도 사(士)와 같다.’고 했는데, 그 소(疏)에 ‘이는 세자의 관례가 사의 관례와 같음을 밝힌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무릇 천자나 제후가 열두 살에 관을 쓰는 것도 해설하는 자가 오히려 이르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사의 관례에 의거해야 하는 세자의 관례를 열 살도 채 되기 전에 행하는 것이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경연의 신하가 관례를 먼저 치루고 입학례를 나중에 치루는 것은 부당하다는 뜻을 진달드렸는데, 상께서는 관례를 치루지 않고 입학을 먼저 한 열성(列聖)은 계시지 않았다고 말씀하시고 또 인종 대왕(仁宗大王)의 전례로 분부를 하셨다고 하는데, 신들은 또한 그렇지 않다고 여깁니다. 옛날에는, 왕이나 공(公) 이하는 모두 여덟 살이 되면 소학에 입학하고 열다섯 살이 되면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유래가 있는 확정된 법이었으며, 왕이나 공은 열두 살이 되면 관을 쓰고 사는 스무 살이 되면 관을 쓰는 것이 또 확정된 예였던 만큼, 왕이나 공이 소학에 입학할 때는 관을 쓰지 않은 상태이고 사가 대학에 입학할 때도 역시 관을 쓰지 않은 상태인 것입니다. 인종 대왕이 여덟 살에 관을 쓰고 같은 해에 입학한 것이, 신들은 옛 예법에 합치되는 것인지 또한 알지 못하겠습니다. 대신과 유신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문묘조(文廟朝)의 《실록》을 상고해 낸 뒤 처리하라."
하였다.
전 판중추부사 조경(趙絅)이 죽었다. 조경의 자는 일장(日章)으로 인묘조 초에 장원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화직과 현직을 두루 거쳐, 지위가 총재에 이르렀으며 문형을 잡기도 했다. 만년에는 이웃 청나라의 떠들어대는 말로 인하여 변방에 유배되었으며, 풀려나서도 거두어 쓰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조정에 서지 못하였다. 어버이를 위하여 고을 수령을 원하여 회양 부사(淮陽府使)가 되었으며 체임된 뒤에는 포천(抱川)에 은퇴하여 돌아갔다. 계모를 효성으로 섬겨 소문이 났으며 나이 80에 상을 만났는데 예를 그래도 부지런하게 지켰다. 기로(耆老)로 조정에서 우대하여 특별히 1품의 품계를 더해주고 월름(月廩)을 하사했는데, 이때 이르러 84세로 죽었다. 조경은 문장이 화려하고 행실이 있어서 세상에 칭송받았으나, 강퍅하고 자신의 의견대로 하였으며 논의가 매우 편벽되었다. 병술년024) 강씨의 옥사가 있었을 때, 조경은 대사헌으로서 시골에 있으면서 상소를 진달하여 《춘추(春秋)》의 군친(君親)에게는 반역을 일으킬 수 없다는 의리를 인용하였는데, 현저하게 임금의 뜻에 영합하는 작태가 있어서 누차 총애를 입어 발탁되었으므로, 사론(士論)이 이미 더럽게 여겼다. 경자년025) 에 이르러 윤선도가 상소하여 예론을 무함했다가 죄를 얻어 쫓겨났는데, 조경은 상소를 올려 구원하면서 심지어는 효묘를 위하여 선도의 견해에 동의하겠다는 말까지 하였으므로, 온 세상이 비로소 그의 간악한 실상을 믿게 되었다. 갑인년026) 이후 간흉들이 정권을 도둑질하고는, 조경이 예론에 공로가 있다 하여 묘정에 배향했는데, 여론이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감히 말하지 못한 것이 여러 해였다. 경신년027) 정권이 바뀐 이후 공의가 다시 펴져 묘정에서 내쫓겼다.
경상좌도에 기근이 들어 통영(統營)에서의 합동 군사 훈련을 중지하고 각각 자기 영의 앞바다에서 훈련을 행하게 했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심경(心經)》과 《강목(綱目)》을 강하였다. 좌참찬 송준길이 시강(侍講)하였는데, 문의(文義)를 강론하여 아뢰기를,
"격물·치지는 지(知)이고, 성의·정심·수신은 행(行)이며, 제가·치국·평천하는 몸으로부터 미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성의는 지와 행을 일관하여 말한 것입니다. 후세의 임금은 좋은 자질을 갖고 있더라도 학문하는 공이 없어서 그 자질을 제대로 확충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비록 기질의 병통이 있더라도 과연 참으로 알고 힘써 행한다면 기질을 변화시킬 수 있는데, 그렇게 못한 것은 다만 참으로 알고 힘써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강목》의 강론에 미쳐 준길이 아뢰기를,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사서(史書)는 열정적이며 경서(經書)는 이지적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비록 두 가지를 모두 강론하지만 경중을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니, 시독관 이민서(李敏叙)가 아뢰기를,
"경서가 학문의 근본이지만 사서(史書)에서 고금의 치란(治亂)과 제왕의 잘잘못을 상세히 기록해 놓았으니 그 중 모범으로 삼을 만한 선(善)과 경계할 만한 악(惡)을 하나하나 체득한다면 어찌 학문에 유익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함릉 부원군 이해에게 치사(致仕)를 이미 허락하셨는데, 매우 아름다운 일이었습니다. 옛사람들의 치사는 근력을 헤아려 하였으니, 구양수(歐陽修)는 63세에, 범진(范鎭)은 53세에 치사했습니다. 조정 인사 가운데 병약하고 잔약하기가 신과 같은 자는 없으니, 신의 치사를 허락하셔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70세에 치사하는 것도 오히려 허락을 어렵게 여겼는데, 경의 나이는 아직 70세도 안 되었으며 또 내가 경에게 아침저녁으로 뛰어다니라고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경이 치사를 이렇게 빨리 구하다니, 나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옛말에 ‘신을 조정에 남겨두어야 무슨 도움이 되는 일이 한 가지라도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바로 신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두터운 말로 유시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검토관 홍주국(洪柱國)이 아뢰기를,
"고 참판 유계(兪棨)는 학문과 절행이 있어 선조(先朝)께 중임을 받았습니다. 죽은 뒤 그의 아들 명윤(命胤)이 호서에서 어미 상을 만났는데, 형제 두 사람이 염병으로 한꺼번에 모두 죽었습니다. 집안이 청빈하여 장사에 쓰일 물품을 마련해낼 계책이 없는데, 명윤도 일찍이 시종을 지낸 사람입니다. 휼전을 거행하는 조처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에 말하여 상례에 필요한 물품을 지급하라."
하였다.
익산(益山)의 영장(營將)을 옮겨 여산(礪山)에 다시 설치하라고 명하였다. 익산 군수 송시도(宋時燾)가 탑전에 입시하여 영장의 폐단을 진달하니, 상이 병조에 말하라고 하였고, 병조가 여산에 영장을 도로 설치하라고 청했던 것이다. 시도는 미관말직인 수령으로서 영장의 폐단을 외람스럽게 진달했고, 병조는 또 시도의 말로 인하여 옮겨 설치하기를 청했으므로 물의가 비난했다.
지평 조원기(趙遠期)가 아뢰기를,
"전주 부윤 안진(安鎭)은 서득생(徐得生)의 송사에서 왜곡하여 감사의 뜻에 따라 국전(國典)을 무시하고 임의대로 높이고 낮추었습니다. 심지어 삼대를 연이어 양역(良役)을 하여 60 년의 기한이 지난 사람을 공공연하게 이광윤(李光胤) 등에게 결급(決給)하였으니, 그 죄범이 매우 놀랍습니다.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소서."
하였는데, 누차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판윤 민희(閔熙)가 별안간 승급한 것의 잘못을 발론하여 개정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형조 판서 서필원이 상소하여 창고 설치의 불편함을 논하기를,
"어제 경연에서 창고 설치가 편리한지의 여부를 토론하였는데, 조선(漕船)은 근래에 하나도 침몰된 것이 없음이 분명하고 사선(私船)도 역시 모아서 감독하기로 결정하였으니, 창고를 설치하여야 할 일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리저리 반복한 끝에 마침내 반만 설립하여 편리한지의 여부를 시험하기로 하였으니 신은 몹시 개탄하는 바입니다. 무릇 일을 시행해도 좋을지 시험한다는 것은 이해를 분별할 수 없거나 편리의 여부가 자세하지 않을 때 하는 것인데, 지금은 공선(公船)이 침몰되지 않음이 이미 보장되었고 사선(私船)도 이미 변통하기로 결정하였는데 무슨 대략 설치하여 시험할 일이 있겠습니까.
신하로서 일을 논의하는 도리에 있어, 이해(利害)를 잘 알지 못하고서 마땅히 행하여야 한다고 범범하게 말한 경우는, 그 잘못이 다만 이해를 알지 못한 데 있었으니 어쩌면 용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옳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감히 쟁집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어정쩡하게 따른다면 마침내 불충으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어제 좌의정 허적과 예조 판서 김좌명이 옳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감히 쟁집하지도 않은 채 반은 가하다 하고 반은 불가하다 하며 반은 편리하다 하고 반은 불편하다고 하다가 마침내 대략 설치하여 가부를 시험하자는 논의로 결정하였으니, 불충한 죄를 어찌 모면할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일의 이해가 자세하지 않다면 어쩔 수 없지마는 이미 그 이해가 분명하다면 단연코 그만두어야 합니다. 이것 역시 용단(勇斷)의 한 도리이니 한 고조가 인장(印章)을 새겼다가 그 인장을 없애버린 일을 어찌 되돌려 생각해 보지 않으십니까. 삼가 원컨대 성상께서는 마음을 결정하시어 빨리 정지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나의 뜻은 등대하였을 때 이미 유시하였으니 다만 그 성취되는 것이 어떠한가를 볼 뿐이다. 생각한 바를 진달하는 것은 본래 아름다운 일이나 말이 간혹 지나치다."
하였다. 이때 창고를 설치하자는 의논이 송시열에게서 나왔는데 영의정 정태화는 속으로 옳지 않은 줄 알았으나 질병을 이유로 논의에 참여하지 않았고, 영부사 이경석은 결코 행할 수 없다고 하면서 허적이 애써 다투지 못하는 것을 큰 소리로 말하였다. 허적도 옳지 않다고 여기면서도 이의를 제기하는 것을 혐의스럽게 여겨 그만두자고 청하지를 못하였다. 민정중은 시열의 의견을 따랐으며 김좌명은 실행 여부를 시험해보자고 청하였으나, 뭇 의견이 모두들 창고 설치가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다. 때문에 서필원이 광직(狂直)함을 스스로 떠맡고 분연히 상소를 올려 앞에 나서서 대립하며 대신을 불충하다고 배척했다. 시열은 이 때문에 불안해서 돌아갔고, 필원은 마침내 엄중한 논박을 받았다. 그 뒤에 재물을 허비하고 백성을 병들게 하며 창고를 지었는데,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불편하다고 중지했으므로 식자들이 탄식하였다.
예조 판서 김좌명이 상소했는데, 그 대략에,
"태안(泰安)에 창고를 설치하는 일의 이해에 대해서는 이미 모두 진달드렸습니다. 신이 매우 염려하는 것은 단지 조정의 계책이 한 달을 유지하지 못하는 점에 있습니다. 만약 굳게 정해져 있어 변하지 않는다면 비록 한두 가지 곤란한 일이야 있겠지만 굳이 완성하지 못할 리는 원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찮은 신의 소견을 남김없이 모두 진달드려 성상의 재결을 기다립니다.
형조 판서 서필원이 ‘반은 가하고 반은 불가하다 하며 반은 편리하고 반은 불편하다 하여, 그 불가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쟁집하지 않았다.’고 신의 죄안을 삼고, 끝내는 또 불충하다고 지목하였는데, 신은 참으로 해괴하다고 여깁니다. 무릇 천하의 일이란 이해가 반반씩 있는 것도 있으며, 이가 많고 해가 적은 것도 있으며, 이는 적고 해가 많은 것도 있는 법으로 백번 만번 할 때마다 타당하고 완전한 것은 신이 참으로 아직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번 창고를 설치하는 일도 이가 많고 해가 적다고 할 수 있으니, 오직 그 양끝을 잡아 헤아려 시행 여부를 결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필원이 이른바 ‘반은 가하고 반은 불가하다 하며, 반은 편리하고 반은 불편하다 한다.’는 것은, 대체로 이해를 아울러 진달하는 설을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소견은 각자 같지 않고 그 소견이 환한 곳에도 또한 깊고 얕은 차이가 있는 법이니, 옳다 그르다 시비하는 것은 그래도 괜찮습니다만, 불충하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대체로 신하가 거짓을 품고 잘못을 꾸미면서 임금의 명을 받들어 따르고자 힘쓰는 자라야 비로소 이렇게 단죄할 수 있는 것이니, 신이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남들이 신을 불충하다고 하였으니, 어떻게 감히 스스로 이런 일이 없다고 여기며 태연히 있겠습니까. 신의 직임을 갈으시고, 이어 신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깊이 혐의할 필요없다. 무엇 때문에 사직하는가.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2월 7일 경오
공조 참판 윤집 등을 보내어 정릉 정자각의 터를 살펴보게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13번째 정사(呈辭)하였는데, 승지 박세성을 보내어 돈유하였다.
판중추 송시열이 차자를 올리기를,
"이번에 서필원이 태안(泰安)에 설치하는 창고의 일을 가지고 이견을 제시하는 것은 좋았으나 대신을 불충하다고까지 배척하였는데, 불충이란 신하의 극죄입니다. 비록 일반 벼슬아치에게라도 감히 이러한 말을 할 수 없는데 더구나 대신에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전하께서는 도리어 너그럽게 포용하는 뜻을 보이셨으니, 대신이 비록 넓은 도량으로 자처한다 하더라도 조정의 체통이 여지없이 손상되었습니다. 이제부터 대소 신료는 서로 받드는 도리가 없어지고 총애받는 자는 함부로 날뛰는 형세가 있을 것이니, 신은 삼가 근심이 됩니다. 다만 그 창고를 설치하자는 의논이 신에게서 시작되어 점점 확대되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신은 황공함을 견딜 수 없어 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한 어공(御供)을 변통하자는 의논도 역시 신이 선왕의 말명(末命)으로 인하여 약간 시험하여 보고자 한 것인데, 이것은 중국 조정의 제도이며 선정신 성혼(成渾)이 선조조에 청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서리들이 말을 만들고 사부(士夫)들이 호응하여 음험하고 악독한 말이 날마다 신의 몸에 모일 뿐만 아니라, 이 일을 담당하였던 민정중에게도 연루되어 자칫 견디어 내지 못하게 될 줄은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신이 함부로 국가 대계를 논의함에서 비롯된 것이니, 스스로 뉘우치고 책망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고, 인하여 질병도 이미 고질이 되었으니 직명을 체차해 달라고 청하자, 상이 답하기를,
"필원이 상소한 말이 광망(狂妄)됨을 내 어찌 모르겠는가. 방금 경의 차자를 보고 내가 체통을 세우지 못한 잘못을 바로 깨달았다. 아, 오늘날의 인심과 세도가 한심스럽다고 말할 만하다. 경의 차자 말미를 보건대, 조정의 체통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나는 몹시 놀랍다. 경은 안심하고 더욱 조섭을 잘하여 나의 뜻에 부응하라."
하였는데,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였다.
2월 8일 신미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대신의 체면은 특별하여 사람마다 가볍게 탄핵할 수 없는 것인데, 이번에 형조 판서 서필원이 불충하다고 탄핵하였으니 그 말이 매우 이치에 맞지 않다. 비록 그의 본성이 그렇다 하더라도 일의 체통으로 보아 경책(警責)하는 도리가 없을 수 없으니, 필원을 무겁게 추고하라."
하였는데, 상이 송시열의 차론으로 인하여 이러한 명을 내린 것이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심경》과 《강목》을 강하였다. 좌의정 허적이 서필원을 추고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는 뜻으로 계달하니, 상이 이르기를,
"체통으로 말한다면 옳지 못하기 때문에 추고하는 것이다."
하였다. 시독관 이민서(李敏叙)가 아뢰기를,
"본관(本館)이 신덕 왕후를 부묘하는 일로 차자를 올렸는데, 상께서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을 내리시니, 여러 신하들이 민망스러워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선조(宣祖) 때 조정의 의논이 일제히 발론하였으나 선조께서 어렵게 여기셨으니 아마도 뜻이 있어서일 것이다. 선대에 행하지 않았던 일을 어찌 선뜻 거행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민서가 아뢰기를,
"2백 년 동안을 거행하지 못하였던 크나큰 전례(典禮)를 지금 와서 거행한다는 것이 비록 조심스럽고 어려우나, 당연히 행하여야 할 예를 끝내 폐기하는 것은 더욱 온당하지 않습니다."
하니, 검토관 김만중이 아뢰기를,
"선조조에 이미 거행하지 못했던 일이니 바로 오늘날 해야 할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옥당의 차자를 잘못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어렵게 여기는 것도 옳은 것이며, 옥당 역시 차자를 한 번 올려서 허락을 받을 수 있는 일은 아닌 것이다."
하니, 김만중이 아뢰기를,
"2백여 년을 행하지 못하였던 전례이니 상께서 어렵게 여기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성상과 같은 참된 효심을 가진 분으로서 만일 태조 대왕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는다면 신들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단연코 거행하실 것입니다."
하였다.
제도(諸道) 감사의 과한(瓜限)을 2년으로 정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판부사 송시열이 맨 먼저 이 논의를 발하면서 권속을 데리고 갈 수 있도록 하자고 청하였다. 좌의정 허적은 ‘권속을 데리고 가면 폐단이 있다.’ 하였고, 영의정 정태화는 ‘오직 합당한 인재를 얻는 것에 달려 있다.’고 하였으며, 영부사 이경석과 판부사 정치화는 모두 ‘임기를 오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상이 송준길에게 물으니 준길 역시 그렇다고 하므로 이러한 교명이 있었는데, 그 후에 여러 의논으로 인하여 삼남 지방의 감사에게만 권속을 거느리고 갈 수 있게 하였다.
조복양(趙復陽)을 우빈객으로, 박장원(朴長遠)을 우참찬으로 삼고, 정재숭(鄭載嵩)을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초배하고, 감만균(金萬均)을 집의로, 이후(李煦)를 지평으로, 정석(鄭晳)을 수찬으로 삼았다.
2월 9일 임신
예조의 계사로 인하여 이날 춘당대(春塘臺)에서 관무재(觀武才)할 때 문신 정시를 대거(對擧)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함릉 부원군(咸陵府院君) 이해(李澥)가 이미 치사했는데 법전을 상고해 보니, 당상관으로서 치사한 이에게는 매월 주육(酒肉)을 준다는 것이 예전(禮典) 혜휼조(惠恤條)에 실려 있습니다. 법전대로 거행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형조 판서 서필원이 상소했는데, 그 대략에,
"신도 작년에는 역시 이해를 따져보지 않은 채 창고를 설치하자는 의논을 망령되이 주장했는데, 사람들의 말을 듣고 비로소 전의 의논이 그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창고를 설치하는 일의 이해를 따져보기로 저만한 사람은 없다고 신은 항상 여겼습니다. 그래서 감히 이것을 발언하고 상소로 진달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신이 어떻게 감히 알지 못하는 것을 억지로 하여, 이미 정해진 의논을 동요시키겠습니까.
나무와 돌을 끌어오고 채찍질해 가면서 독촉한다면 창고가 반드시 완성될 것이며, 헛된 비용을 따지지 않고 온 힘을 다하여 교대로 실어 나른다면 쌀을 운반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못할 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관곡(官穀)은 비록 편하다 하더라도 사곡이 갑자기 떨어진다면 도성의 백성들은 점점 곤궁하게 될 것이니, 이 한 가지 사항에 대해서는 그날 김좌명도 신의 말을 옳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윽고 또 대략 설치해서 가능한지 시험해 보자고 하여 뜻을 받들어 따르는 것은 무슨 의도란 말입니까. 근래 듣건대 상신 정태화 등도 모두 불가하게 여긴다 합니다. 전하께서는 왜 여러 신하들을 불러 편리 여부를 익히 강구해 보시지 않으십니까. 변통해야 할 일이라면 불에 타고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듯이 급히 해야 하는 법인데, 좌명은 조정의 계책이 한 달을 유지하지 못한다며 유감으로 삼으니, 신은 매우 안타깝게 여깁니다. 불충 두 글자에 있어서는, 신도 가볍게 남에게 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대신과 중신에게 가한 것은, 요컨대 말을 엄하게 하여 상의 마음을 움직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근래 도성 안 공물 주인들이 실업으로 인하여 원망과 비방이 길에 가득합니다. 신이 훗날 경연의 말석에서 모실 수 있게 된다면 또 소회를 진달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의 말을 쓰지 않아서 매번 시끄러움을 초래하느니 일찌감치 신을 물리쳐 조금이나마 소요가 일어날 폐단을 미리 없애는 것이 어찌 낫지 않겠습니까.
국가에 요즘 들어 변괴가 연달아 있으니 진실로 진정시키고 안무하기에 힘써야 할 것인데, 안으로는 도성 백성이 까닭없이 대대로 전해오던 생업을 잃고 밖으로는 호서(湖西) 백성이 까닭없이 토목의 역사에 곤경을 치르니, 신은 이것을 못내 통탄하고 있습니다. 역로(驛路)의 은(銀)을 감소하니 유적(流賊)이 기승을 부렸고, 유적이 기승을 부려 명(明)나라가 망하였으니, 중국의 지난 일을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사직했는데, 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송시열이 진언하여 몇 종류의 물건을 줄이려고 하였는데, 공물(貢物)을 혁파한다는 설이 먼저 전파되어 도성의 백성들이 크게 동요하여 원성과 비방이 길에 가득하였다. 그래서 서필원이 연달아 두 번째 상소를 올렸는데, 크게 시의에 배척을 받았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소대(召對)하였다. 좌참찬 송준길이 《심경》의 내용을 강하고, 인하여 나아가 상께 아뢰기를,
"장사숙(張思叔)이 하인을 꾸짖자 정자(程子)는 오히려 왜 참지를 못하느냐고 하였으니, 임금이 신하를 욕하고 꾸짖는다면 어찌 임금의 덕에 해롭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마땅히 유의하셔서 깊이 경계하소서."
하니, 상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좌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이번 온양(溫陽)의 행차에 자전도 거둥하십니까? 신이 약방(藥房)과 태복(太僕)의 임무를 맡고 있으므로 미리 알아 거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전이 한 번 목욕한 후로 3년 동안 여름과 겨울에 기체후가 안녕하셨으니 이는 실로 목욕한 효험이다. 이번에도 당연히 거둥하실 것이다."
하고, 다음달 10일에서 15일 사이에 날을 택하게 하고, 호조 판서 민정중을 정리사(整理使)로 차출하였다. 정언 최상익(崔商翼)이 아뢰기를,
"사람을 논하는 것과 일을 논하는 것은 그 본체가 같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을 논할 때는 그 죄상을 밝혀 바로 죄를 청해야 하는 법이고, 일을 논할 때는 단지 타당성 여부만을 분변하며 그 타당한 것을 얻고자 힘쓰는 것입니다. 형조 판서 서필원은 감히 창고를 설치하는 일의 타당성 여부를 논하면서 대신을 불충하다고 바로 배척했습니다. 불충이란 신하의 지극한 죄인데, 한 가지 일을 논하는 것으로 인하여 뒤섞어 아무렇게나 가했으니, 그 말의 두서없음과 의도의 아름답지 못함이 체통을 돌아보지 않은 잘못에 그칠 뿐만이 아닙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소한 일로 끊임없이 상소를 진달하면서 말이 참으로 두서가 없구나. 내가 특별 추고한 것은 뜻이 범연한 것이 아니다."
하고, 따르지 않았다. 상익이 또 아뢰기를,
"월천군(月川君) 이정엄(李廷馣)은 선묘조(宣廟朝)의 명신입니다. 증손 정(靖)이 적장자로서 봉군(封君)을 이어받았는데, 무신으로서 승지에 제배되기까지 했으나 자식이 없이 죽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홀로 있을 때 정의 숙부 경성(慶成)이 임시로 정엄 부자의 신주를 옮겨갔는데, 그 뒤 정의 아내가 양자를 세웠지만 경성의 아들 저(竚)는 계속 그 제사를 맡았습니다. 적통을 빼앗은 것이 환해서 가릴 수 없으니, 저가 비록 죽었다 하더라도 그 아들 여주(汝柱)의 종통을 돌려주지 않는 죄를 무겁게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사로 하여금 가두고 죄를 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해조로 하여금 여주를 가두고 조사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판부사 송시열이 짤막한 차자를 올려 돌아가기를 구했는데, 상이 사관을 보내어 ‘내 마땅히 면유하겠다.’고 유시하였다.
2월 11일 갑술
강백년(姜栢年)을 대사간으로, 김세정(金世鼎)을 지평으로, 박세채(朴世采)를 장령으로, 홍만용(洪萬容)을 병조 참의로, 조수익(趙壽益)을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승지망(承旨望)에 대하여 추가로 의망하라고 명했는데, 이조 참의 남구만이 독정(獨政)하여 외임(外任)으로 아울러 의망하여 계청하자, 상이 하교하기를,
"어찌 의망할 사람이 없겠는가. 서울에 있는 사람으로써 의망하라."
하였다. 구만이 ‘예전부터 의망해 오던 사람이 아니면 독정할 때 감히 멋대로 의망할 수 없다.’는 이유로 외임으로써 아울러 의망하기를 다시 청했는데, 상이 하교하기를,
"명을 하면 의망하는 이것도 또한 전례이다. 어찌 이와 같이 번거롭게 아뢰는가. 앞의 비답에 의거하여 의망하라."
하였다. 이리하여 구만이 목내선(睦來善)을 의망하여 들여 비점을 받았다.
내선은 사람됨이 괴팍하고 또 국휼 때 창기를 끼고 놀았던 일로 대간의 탄핵을 무겁게 입어 공의에 버림받은 지 오래였다. 이때 이르러 상이 억지로 의망하게 하여 끝내 은점(恩點)을 내렸는데, 물정이 흡족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 뒤 장령 신명규(申命圭)가, 괴이하고 망령된 사람을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고 배척하고 전조가 내선을 잘못 의망했다고 아울러 논하다 사직하여 체직되었으며, 이조 참의 남구만도 인구하고 출사하지 않았다.
판부사 송시열이 또 차자를 올려 돌아가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연달아 차자를 보니 사정의 절박함을 알 만하다. 봄 추위가 매우 심하고 질병도 쾌유되지 못하였으니, 경은 안심하고 조리하라. 천천히 날씨를 보아 등대하였을 때 내 마땅히 다시 유시하겠다."
하고,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였다.
2월 12일 을해
응교 남이성 등이, 판부사 송시열이 돌아갈 뜻을 가진 것으로 인하여 뵙기를 청하니, 상이 양심합에서 인견하였다. 이성이 나아가 아뢰기를,
"듣건대 송시열이 행장을 꾸려 떠나려 한다고 하니, 국가에서 지성으로 불러왔는데, 지금 그를 까닭없이 물러가게 할 수는 없습니다. 상께서 만류해야 하겠기에 뵙기를 청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하여 돌아간다고 하던가?"
하였다. 이성이 아뢰기를,
"무슨 일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대개 근일에 건의하여 시행하는 것을 저해하는 논의가 있어서 그런 듯합니다. 상께서 송시열을 불러온 지 이미 여러 달이 되었는데 비록 위임하는 뜻은 있어도 굳게 다져 함께 다스리려는 성의가 없다면 역시 허례일 뿐입니다.
근래에 비록 강론하여 시행하는 일이 있다고 하지마는 혜정(惠政)을 하나 시행하거나 폐단을 하나 개혁한 것도 없는데, 그간에 근거없는 논의가 또한 덩달아 저해하며 흔들고 있습니다. 임금께서 만일 위임하려고 한다면 근거없는 논의에 흔들리지 않아야 사업을 이루어 내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근거 없는 논의에 흔들려 그의 말을 채용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일을 행하는 것은 하루이틀에 갑자기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결정하여 행하고 있는 것도 있고, 또 논의하고 미처 시행하지 못한 것도 있는데 어찌 갑자기 돌아갈 수 있겠는가. 내 성의가 부족한 소치이나 지금 과연 돌아간다면 섭섭함이 어떠하겠는가."
하였다. 남이성이 아뢰기를,
"일을 하는 도리는 위에 확고한 뜻이 있다면 시끄러운 논의가 생겨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우레와 바람처럼 떨쳐 일어날 뜻이 없다면 의지가 확고하지 못하여 끝내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근일의 묘당 논의는 창고의 설치와 공물(貢物)의 재급(裁給) 이 두 가지 일인데, 서필원이 이 두 일을 논박하여 ‘도성의 백성이 대대로 전해오던 생업을 잃었다.’고까지 하였습니다. 한 나라를 소유한 임금도 오히려 만백성의 힘을 다 써서 자신을 봉양할 수 없는데, 어떻게 온 나라의 힘을 쏟아 공물 주인(貢物主人)의 미려(尾閭)028) 를 채울 수 있겠습니까. 만일 국가에 기강이 있다면 이러한 말은 반드시 주상의 앞에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서필원이 갑자기 이러한 말을 하였으니, 사람들이 근거없는 논의로 선동하는 것이 당연하며, 일을 담당한 신하가 불안해 하는 것도 형세상 당연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백 년 된 일을 변혁하는 것이니 어찌 잘잘못을 따지는 논의가 없겠는가. 비록 시끄러운 논의가 있다 하더라도 도외시하고, 할 일만 해나간다면 떠도는 논의는 자연히 종식될 것이다."
하였다. 상이 입시 승지 목내선에게 이르기를,
"나의 뜻으로 판부사에게 가서 유시하기를 ‘지금 돌아갈 뜻을 이미 결정하였다는 말을 들으니 내가 매우 섭섭하다. 승지를 보내는 것은 범연한 뜻이 아니니 내일 일찍 들어와 나로 하여금 만날 수 있게 하라.’고 하라."
하였다.
2월 13일 병자
오정일(吳挺一)을 공조 판서로, 민유중(閔維重)을 대사성으로, 허적(許積)을 이정청(釐正廳) 도제조로, 김좌명(金佐明)·오정일(吳挺一)·민정중(閔鼎重)·장선징(張善澂)을 제조로, 남구만(南九萬)·이민적(李敏迪)을 부제조로 삼았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와 삼사를 인견하고, 판부사 송시열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송시열에게 이르기를,
"경은 어찌 갑자기 돌아가려고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분황(焚黃)의 휴가를 앞서 청하였고 근일에 또 손자를 잃었으니 일신의 사정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분황은 진실로 그만둘 수 없는 일이지만 날씨가 아직 추우므로 즉시 허락하지 않았다. 지금 상의하여 시행할 일이 있으니 돌아가더라도 온양(溫陽)의 행차 때에 다시 서로 만나 보게 된다면 다행이겠다."
하니, 대답하기를,
"그때 만일 질병이 없다면 감히 오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시열이 인하여 아뢰기를,
"신이 전날 조참(朝參) 때 진달한 여러 궁가(宮家)의 일에 대해서는 위에서 분명한 하교가 있었습니다만, 또 내수사의 일을 진달하였는데 하답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신의 뜻은 혁파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내수사가 이름은 비록 이조에 소속되어 있으나 내관이 주장하고 있으니 이것이 온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 부마에게 새로이 집을 지어 주는 일에 있어서도 의리상 불안한 점이 있으니, 지금 변통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참 때 경이 이 말을 하였는데 말이 길어서 매듭짓지 못하였고, 그 후로 경이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내 생각을 다 털어놓지 못하였다. 선조(先朝)께서 부마들에게 제택(第宅)에서 편히 살게 한 것이 10여 년인데 나에 이르러 일시에 거두어 옮기게 한다면 내 마음이 편하겠는가."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선조께서 말년에 ‘만일 사사의 폐단을 없애려고 한다면 먼저 내게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였으니, 지금 성상의 효성도 역시 선왕의 뜻을 계술하는 것에 있습니다. 비록 공주에게 거처를 옮기게 하더라도 어찌 살 만한 곳이 없겠습니까. 청평위(靑平尉) 등의 집이 궁궐 터에 있는데 이것은 매우 온당하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경복궁(景福宮)의 옛터에다 모두 여러 궁가의 집을 짓게 하시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그렇겠는가. 선왕도 이것을 염려하시어 정침(正寢)의 터만은 비워두게 한것이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이미 성지(聖智)가 운운한 말이 있으니 어찌 헐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지는 광해 때의 중이다. 일찍이 ‘인왕산(仁王山) 아래 왕자의 기운이 있다.’고 하였으므로 광해가 인경궁(仁慶宮)을 창건하였는데, 인조 말년에 헐고 그 터를 비워 두었다가 효묘조 때 부마의 제택을 지었다.】 홍중보가 익평위(益平尉) 홍득기(洪得箕)에게 옮겨서 나오게 하려는 것은 그 의사가 옳은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중보가 잘못이라고 여긴다. 불안하다면 선조 때 사양할 일이지 그때는 묵묵히 있다가 지금 와서 거처함이 부당하다고 하니, 나는 실로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줄 모르겠다. 앞으로는 공주의 집을 축조할 때 모든 것을 《대전(大典)》에 의거하여 행하겠다. 그런 다음에는 내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시열이 또 아뢰기를,
"《논어》에 ‘천승(千乘)의 국가를 다스리되 쓰임새를 절약하고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매번 쓸데없는 비용을 절약하라고 진달하였는데 크게 줄인 것이 없습니다. 송엽(松葉), 도지(桃枝), 도판(桃板), 춘번(春幡), 인승(人勝), 세화(歲畵)를 진배하는 등의 일은 역시 쓸데없는 비용으로 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을 혁파하기가 어찌 어렵겠는가."
하고, 명하여 모두 혁파했다. 집의 김만균(金萬均)이 아뢰기를,
"김응하(金應河)는 바로 천하에 절의를 세운 사람입니다. 사우(祠宇)는 건립하였으나 아직 시호를 내리지 않았는데, 비록 시장(謚狀)은 없더라도 특별히 시호를 내리시어 절의를 장려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김만균이 또 아뢰기를,
"병자년의 난리에 정세규(鄭世規)가 충청도 감사로 참전하였는데, 전쟁에 패하였을 때 황박(黃珀)이란 사람은 당상관으로서 지키던 곳에서 전사하였으니, 본도에 물어서 포장하여 증직하여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송시열이 아뢰기를,
"이것은 직산(稷山)에 도착하였을 때 방문하여 포장하여 증직한다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다. 또 김만균의 말로 이시직(李時稷)의 자손을 녹용(錄用)하게 하였고, 또 교리 윤심(尹深)의 말로 정백형(鄭百亨)에게 증직(贈職)을 명하였다. 시직과 백형은 모두 강도(江都)에서 사절한 사람이었다. 만균이 또 아뢰기를,
"태안(泰安)과 안흥(安興)은 강도의 요충지이므로 군량과 무기를 비치한 것이 많은데 만일 변란이 있을 때 적의 수중에 떨어지게 된다면 비단 군량과 무기만을 잃을 뿐만 아니라 강도의 뱃길이 막힐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곤수(閫帥)를 지낸 사람을 군수로 삼는 것이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송시열이 아뢰기를,
"김만균의 부친 김익희(金益熙)가 매번 이것을 염려하였습니다."
하였다. 허적이 앞으로는 이것에 의하여 차견하자고 하니, 상이 따랐다.
지평 김세정(金世鼎)이 아뢰기를,
"국가를 다스리는 도는 현인을 신임하여 의심하지 않는 것보다 큰 것이 없고, 현인을 신임하는 방법은 간사한 이를 망설임 없이 제거하는 것보다 먼저할 것이 없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유현(儒賢)을 등용하여 그의 말과 계획을 듣고 채용하여, 베풀고 설치하는 모든 것이 지극한 이치가 아님이 없으니 온 나라 안이 눈을 닦고 치화(治化)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형조 판서 서필원은 본래 학식도 없이 한갓 거칠은 견해만 믿고 겉으로 광직(狂直)함을 칭탁하고는 몰래 간사한 계책을 펴고 있으니, 그는 전부터 윤리를 망치는 논의로 청의(淸議)에 죄를 지은 지 오래였습니다.
지금 한두 가지의 일을 헤아려 변통하는 일로 인하여, 이득을 잃은 간민과 무식한 사부(士夫)들이 얽혀 선동하여 뜬 소문이 나날이 불어나 유현을 모함하면서도 누구도 감히 먼저 발하지 못하고 있는데, 서필원이 바로 이러한 때에 감히 사론(邪論)을 아뢰어 앞장서서 깃발을 세워 조정에 편안히 있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 음험한 마음씀과 현인을 방해하고 나라를 병들게 하는 작태를 분명히 분변하여 통렬히 배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필원의 관작을 삭탈하여 문외 출송하소서."
하니, 상이 파직을 명하였다. 또 집의 김만균이 안진과 민희 등에 관한 논계를 갑자기 멈춘 잘못을 거론하여 체차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누차 계문하니, 이에 따랐다.
2월 14일 정축
판부사 송시열이 차자를 남겨두고 떠났는데, 상이 차자에 답한 비답에 이르기를,
"경의 차자 내용을 보건대 나도 모르게 마음이 놀랍고 부끄럽다. 어제 면유할 때 말주변이 변변치 못해 나의 뜻을 잘 전달하지 못했는데, 경의 대답도 역시 떠날 뜻을 결정하겠다는 말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경의 사정이 비록 간절했지만, 나의 말을 근거없다 여기지 않고 혹 일기가 따뜻해지면 다시 청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지금 길을 나섰다는 보고를 듣고 보니, 정신이 아득해졌으며, 평상시 경에게 믿음을 얻지 못했음을 비로소 탄식하게 되었다. 경이 만약 나의 정성과 예우가 부족하다고 여겨 거취를 결정했다면, 내가 부끄러워하고 반성할 겨를이 없을 것이니 그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러나 만약 사정 때문이라고 한다면 어찌하여 조용히 돌아갈 것을 말하지 않았는가. 경은 나의 말을 이해하여 면대를 허락한 뒤 거취를 결정하라."
하고, 이어서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라고 명했다.
도승지 장선징, 좌승지 송시철, 우승지 이익, 우부승지 박세성, 동부승지 목내선, 응교 남이성, 교리 윤심·이규령 및 부수찬 김만중 등이 뵙기를 청하니, 상이 양심합에서 인견하였다. 장선징이 아뢰기를,
"어제 송시열을 인견하고 상께서 면유하셨으므로 떠나려는 마음을 돌린 줄로 여겼는데 아침에 남긴 차자를 보니 진실로 놀랍고 섭섭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듣건대 이미 출발하였다고 하니 놀랍고 섭섭함을 말할 수 없다."
하였다. 장선징이 아뢰기를,
"들으니 어제 경연에서 송시열이 여러 궁가의 일을 진달하였다고 하는데, 이미 분수에 넘치는 것이라고 진달하였다면 비록 상께서는 차마 할 수 없는 바가 있더라도 공주들이 끝내 그대로 거처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왕이 제도에 벗어난 궁가들을 철거해야 한다고 하교했다 하는데, 이는 그렇지 않다. 그들이 안주하여 살아온 지 혹 10년이 지났고, 혹은 7, 8년이 지났다. 지금 사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하여 옮기게 한다면 혹시 그러할 수 있다. 그러나 선조(先朝)에서 지어준 것이 부당하다고 하여 하루아침에 철거하고 옮기게 한다면 내 마음이 어떻겠는가."
하였다. 김만중이 아뢰기를,
"충신은 국가를 떠나면서 자기 이름을 깨끗이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송시열이 떠남이 비록 분황(焚黃)에 있다고는 하나, 궁가(宮家)의 일에서 충분히 거취를 결정했을 것입니다. 상께서 홍중보가 지금 와서 거처를 옮기게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셨는데, 중보가 선조(先朝) 때 사양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고 오늘날 옮기고자 하는 것은 옳은 일인 만큼, 전하의 이 말은 남의 개과 천선하는 길을 막는 것이 되니 실로 온당하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노하여 이르기를,
"만중의 말이 옳은지 나는 모르겠다. 중보가 만일 선조 때라고 한다면 어찌 감히 자기의 자식이라고 하여 그에게 옮기라고 하겠는가. 결코 입 밖에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만중이 나를 두고 천선(遷善)의 길을 막는다고 하니, 무슨 뜻인가. 너는 어질고 나는 혼미하여 모른다는 것인가."
하자, 좌우가 모두 상의 하교가 온당하지 못하다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보가 선조 때 사양하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하는 것을 만중이 덮어주면서 잘못이라고 하지 않고 도리어 천선이라고 하니, 천선이 어찌 이런 것이겠는가."
하였다. 상이 이익을 보내 송시열에게 타이르기를,
"얼마 전에 이미 나의 생각을 차자의 비답에서 대략 언급하였다. 어제 면유할 때 경이 돌아갈 뜻을 결정한 줄 몰랐고 또 경연에서 단서를 발하여 놓고 다하지 못한 것이 있으므로 후일에 다시 생각한 바를 다하리라고 여겼는데, 지금 들으니 갑자기 돌아가기를 결정하였다고 하니, 비단 나의 마음이 허전할 뿐만 아니라 나랏일이 앞으로 와해되게 되었다. 떠나려는 마음을 돌려 나로 하여금 조용히 서로 면대할 수 있게 하라."
하였는데, 이익이 전교를 받고 출발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송시열이 효종 대왕의 지우를 받고 산림에서 일어나 국사를 담당하자 한 때의 사람들에게 중망을 받았다. 기해년에 물러간 후로 상이 계속해서 불렀지만 시열이 죄를 자책하고 나오지 않았다. 무신년 가을에 상이 온천에 행차하니, 시열이 행궁(行宮)에 와서 뵈었다. 상이 그와 함께 조정으로 돌아와 다시 대석(台席)에 두었으나 시열은 강 건너 있으면서 도성을 떠나기로 스스로 결정하니, 상이 부득이 체직을 허락하고는 들어와 국사를 논의하게 하였다. 그런데 시열의 일처리는 조용하게 헤아려보는 뜻이 적고 의견을 세울 때 험하고 급하게 하는 습성이 있어서 싫어하는 자가 많았다. 상이 비록 예우는 융숭하게 하였으나 고식적인 것에 안주하여 진작하는 뜻이 없었으며, 대신도 함께 힘써 같이 일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이 때문에 물러가기로 결심하고 인사도 하지 않고 돌아간 것이다. 대체로 시열은, 뜻은 크나 재주가 치밀하지 못하였으므로 끝내 성취함이 없었다. 시열이 올라왔을 때 이경휘(李慶徽)가 찾아가 시열에게 말하기를 "공(公)의 집에 출입하는 사람으로 어느 누가 정직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마는 공은 선입견을 주장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왕정(王庭)에 올리는 말은 모두 중요한 것이겠지만, 공은 대체를 잡아 논의하고 사소한 것은 생략하여 인정에 알맞게 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이때 김익훈(金益勳)과 김익렴(金益廉)이 모두 행실이 나빠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고 있었는데 시열과의 사이가 매우 친밀했기 때문에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시열은 또 선입견을 주장하는 병통이 있었기 때문에 이경휘의 말이 이러하였다. 시열은 그 말을 옳게 여기면서도 제대로 쓰지를 못하였다. 시열이 중한 이름으로 조정에 있으면서 당시의 국사를 담당하니 일 꾸미기를 좋아하는 이들이 날마다 찾아오고 명예를 구하는 이들이 날마다 몰려왔다. 김징(金澄)과 같은 무리는 항상 자리를 뜨지 않았는데 이민서(李敏叙)만은 홀로 가지 않으면서 ‘이름이 있는 곳에는 선비는 삼가 피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38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654면
【분류】왕실-비빈(妃嬪) / 인사(人事) / 인물(人物) / 주생활(住生活) / 정론(政論)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논한다. 송시열이 효종 대왕의 지우를 받고 산림에서 일어나 국사를 담당하자 한 때의 사람들에게 중망을 받았다. 기해년에 물러간 후로 상이 계속해서 불렀지만 시열이 죄를 자책하고 나오지 않았다. 무신년 가을에 상이 온천에 행차하니, 시열이 행궁(行宮)에 와서 뵈었다. 상이 그와 함께 조정으로 돌아와 다시 대석(台席)에 두었으나 시열은 강 건너 있으면서 도성을 떠나기로 스스로 결정하니, 상이 부득이 체직을 허락하고는 들어와 국사를 논의하게 하였다. 그런데 시열의 일처리는 조용하게 헤아려보는 뜻이 적고 의견을 세울 때 험하고 급하게 하는 습성이 있어서 싫어하는 자가 많았다. 상이 비록 예우는 융숭하게 하였으나 고식적인 것에 안주하여 진작하는 뜻이 없었으며, 대신도 함께 힘써 같이 일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이 때문에 물러가기로 결심하고 인사도 하지 않고 돌아간 것이다. 대체로 시열은, 뜻은 크나 재주가 치밀하지 못하였으므로 끝내 성취함이 없었다. 시열이 올라왔을 때 이경휘(李慶徽)가 찾아가 시열에게 말하기를 "공(公)의 집에 출입하는 사람으로 어느 누가 정직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마는 공은 선입견을 주장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왕정(王庭)에 올리는 말은 모두 중요한 것이겠지만, 공은 대체를 잡아 논의하고 사소한 것은 생략하여 인정에 알맞게 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이때 김익훈(金益勳)과 김익렴(金益廉)이 모두 행실이 나빠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고 있었는데 시열과의 사이가 매우 친밀했기 때문에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시열은 또 선입견을 주장하는 병통이 있었기 때문에 이경휘의 말이 이러하였다. 시열은 그 말을 옳게 여기면서도 제대로 쓰지를 못하였다. 시열이 중한 이름으로 조정에 있으면서 당시의 국사를 담당하니 일 꾸미기를 좋아하는 이들이 날마다 찾아오고 명예를 구하는 이들이 날마다 몰려왔다. 김징(金澄)과 같은 무리는 항상 자리를 뜨지 않았는데 이민서(李敏叙)만은 홀로 가지 않으면서 ‘이름이 있는 곳에는 선비는 삼가 피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상이 송시열의 질병이 쾌차하지 않아서 돌아가는 길에 덧날까 염려하여 어의(御醫)을 보내 약물을 가지고 가서 간병(看病)하게 하였다.
사간 이유(李秞), 정언 신정(申晸)이 아뢰기를,
"서필원이 앞서는 말을 두서없게 한 잘못이 있고 뒤에는 의도적으로 저지한 죄가 있는데, 신들은 단지 파직만을 청하였습니다. 헌부가 그의 정상에 근거하여 호오(好惡)의 태도를 분명하게 보였으니, 참으로 법을 지키는 논입니다. 신들은 연약했던 잘못을 면하기 어려우니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했다. 처치하여 출사를 청했다.
지평 조원기(趙遠期)가 아뢰기를,
"서필원의 전후 상소가 진실로 사악한 논을 주장하여 유현(儒賢)을 동요시키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라면 삭출(削黜)의 법을 시행하는 것이 지나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않고 시비를 논하는 즈음에 말이 경솔하며 말하는 투가 과격해서 초래된 것이라면, 무거운 율로 죄주는 것은 있지도 않은 죄악을 미리 더듬어 적용하는 데 가까운 것입니다. 신이 어떻게 감히 그 과중함을 알고도 말없이 가만히 있으면서 구차히 동조하겠습니까.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지온(李之馧)을 형조 참판으로, 이상일(李尙逸)을 호조 참의로, 이단하(李端夏)를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2월 15일 무인
상이 선정전에 나아가 종실 유생들의 강경(講經)에 친히 임하였다. 종실 동원부정(東原副正) 이집(李潗) 등 6명에게는 모두 가자하고, 영창부수(靈昌副守)>이익철(李翼哲) 등 10명에게는 각각 한 계급을 승진시키고, 그 아래 사람들에게는 차등있게 상을 내리고, 유생 강산두(姜山斗) 등 3명에게는 아울러 직부 회시하도록 명했다.
승지 이익(李翊)이 판중추 송시열에게 전유하고 돌아왔는데, 상이 시열이 돌아올 뜻이 없다는 것을 듣고, 이에 하교하기를,
"말을 지급하여 호송할 일로 양도의 감사에게 하유하라."
하고, 승지 박세성에게 "너는 가서 나의 서운한 마음을 전유하라."고 명하였다.
지평 김세정이 서필원의 일에 조원기가 이의를 세웠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2월 16일 기묘
사간 이유, 정언 신정·최상익 등이 감히 처치하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잇따라 인피하였다.
2월 17일 경진
영의정 정태화가 18번째 정사하니, 상이 승지를 보내어 돈유하였다.
호조 판서 민정중이 병을 이유로 사직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민정중이 송시열과 함께 일을 하였는데 시열이 물러나 돌아가자, 거취를 함께 하고자 하였으므로 사직하였다.
태학의 유생 윤성교(尹誠敎) 등과 사학의 유생 신희징(申喜澄) 등이 송시열을 머물게 하도록 청하는 일로 서로 잇따라 상소를 진달했는데, 상이 답하였다.
"나의 서운한 마음을 더욱 이길 수 없구나. 너희들의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을 가상하게 여긴다. 내 마땅히 정성과 예를 더욱 쏟겠다."
홍문관 응교 남이성(南二星) 등이 양사를 처치하기를,
"서필원은 거치른 마음과 편벽된 견해로 총애를 믿고 기세를 펼쳐 사건을 논의한다고 빙자하여 고의적으로 저해하고 동요하였으니, 현인을 방해하고 국가를 병들게 한 죄를 바로잡고자 하는 것은 과중한 율법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평 조원기는 광간솔직하다며 필원을 장려하고 궤휼과격하다며 탄핵한 사람들을 폄하하였으니, 억양하고 두루 막는 그 태도가 가증스럽습니다. 대각(臺閣)의 논의는 한결같이 공의(公議)를 따르는 것이고 보면 가벼운 데에서 무거운 데로 들어감은 옳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지평 조원기를 체차하고, 지평 김세정, 사간 이유, 정언 신정·최상익은 출사케 하소서.
또한 근래에 일을 회피하는 풍조가 대각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어, 무릇 의논이 있을 때면 그 난이도를 보아 교묘하게 나아가거나 회피하고 있으니 그 습성을 자라게 해서는 안 됩니다. 장령 이규진(李奎鎭)은 직책을 제수받은 후로 잠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 두드러지게 회피하여 이틀 밤이 지나 대각의 처치를 하게 하였으니, 연약하고 구차하여 대직에 그대로 있게 할 수 없습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18일 신사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심경》과 《강목》을 강하였다. 지평 김세정이 탑전에서 서필원을 삭출하라고 청했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 감사 민점(閔點)에 관한 일은 이미 이전의 계사에서 다 말했습니다만, 본도 감사의 조사 보고서를 보건대, 민점이 편파적으로 친척의 청탁을 들어 주느라 법을 어기고 사사로움을 따르면서 인명을 함부로 죽인 정상이 구구절절 놀랍습니다. 그리고 이광윤(李光胤) 등이 법을 범하면서 청탁하여 비리를 저지르고 침탈한 죄는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민점은 나문 정죄하시고 광윤 등은 본도로 하여금 율에 의거하여 죄를 정하게 하고, 학년(鶴年)의 자식 지(枝)는 계속 양인의 호적에 소속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전주 부윤(全州府尹) 안진(安縝)을 파직 추고할 일로 연달아 아뢰니, 상이 우선 추고만 하라고 하였다. 또 수원 부사(水原府使) 심지명(沈之溟)을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라고 청하면서 아뢰기를,
"기보(畿輔)는 중요한 지역이어서 결코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대계(臺啓)가 거듭 발한 후에 버젓이 하직하였으니, 염치없는 모습이 더욱 놀랍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령은 소를 올려 사면하지 못하는 만큼 그 형세가 하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니, 논핵할 죄가 없다. 비록 노쇠한 것을 가지고 말을 하지마는 진실로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면 나이가 아무리 젊더라도 불가하며, 만일 합당하다면 늙었다 해서 무슨 손상이 있겠는가. 전일에 체차하라는 논의가 본디 옳지 않았기 때문에 대신이 비록 체차를 윤허하라고 청하였지만 특별히 부임하게 한 것이다. 지금 어찌 버젓이 하직하였다는 것으로 죄를 줄 수 있겠는가. 지명이 얼마 전에 양주(楊州)를 맡아서 이미 치적이 있었는데 노쇠하였다고 논핵하니, 그 의도를 모르겠다. 사람을 논하는 도리가 어찌 이렇듯이 업신여길 수 있단 말인가."
하니, 세정이 엄한 분부를 받았다 하여 인피하고 나갔다. 교리 이규령이 아뢰기를,
"세자를 보도하는 책임은 마땅히 노성한 숙유에게 맡겨야 하니, 앞으로 행차가 있을 때 찬선(贊善)을 서울에 머물게 하여 세자를 보도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너의 말이 내 뜻과 딱 맞다."
하였다. 인하여 송준길에게 머물러 있으라고 유시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어찌 감히 감당하겠습니까."
하고, 인하여 질병이나 사정으로 보아 머물기 어려움을 진달하고, 또 아뢰기를,
"송나라 때 범중엄(范仲淹)이 도성을 떠나자 윤수(尹洙)가 거취를 같이 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신이 이 의리를 모르는 것은 아니나 행차할 때 거가를 모시고 돌아가는 것이 매우 편리하겠기에 번거롭게 진달하지 않았습니다. 보도의 책임은 조복양(趙復陽)이 있으니, 이 사람에게 위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이규령 및 이민서가 모두 돌아감을 윤허하여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진달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지금 송시열이 돌아갔는데 신은 그가 떠나야 할 만한 의리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반드시 돌아가야 할 의리가 없었는데 갑자기 물러났으니, 내가 매우 서운하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옛 군자는 기미를 보고 일어나 종일토록 기다리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시열이 무슨 기미를 보고 돌아간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뒤로 상께서 학문과 사공(事功)을 모두 도에 맞게 한다면 사람들은 모두 시열이 떠난 것을 지나치다고 할 것이지만, 만일 전일의 공업을 모두 폐하고 새로운 소득이 없다면 비단 오늘날뿐만 아니라 후세의 사람들도 모두 시열이 떠난 것을 잘했다고 할 것입니다. 서필원의 일로 인하여 삼사가 거듭 발론을 하는데, 필원의 장단점은 신이 진달한 바이나, 의도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의 본뜻이 아닙니다."
하니, 민서가 아뢰기를,
"필원이 반드시 유현(儒賢)을 쫓아낼 의도를 지녔다는 것은 아니나, 사람됨이 집요하고 일하는 것이 어긋나서 마침내 유현으로 하여금 조정에서 불안하게 하였으니, 헌부의 논의가 지나친 것이 아닙니다. 위아래가 서로 오래 버텨서는 안 되니, 속히 따르셔서 좋아하고 싫어함을 분명하게 보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그의 관직을 혁파하였는데도 계사의 내용이 너무 지나치므로 따르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시열처럼 함께 국사를 이룰 만한 이도 앞질러 물러갔습니다. 신 같은 사람은 마땅히 물러나야 하는데도 물러나지 않고 있으니,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다시 세자의 서연(書筵)을 이유로 권면하여 머물게 하였다.
사간 이유 등이 아뢰기를,
"서필원이 하나의 일을 논의한다는 핑계로 의도적으로 저지하였으며, 가부를 논할 때는 짐짓 다른 의견을 내고 상소할 때는 패려함을 공공연하게 부리더니, 마침내 불충이라는 죄를 대신에게 함부로 가하였습니다. 또 여염간의 선동하는 말로 장황하게 기치를 세워 상을 동요시켜, 마침내 국가의 체모를 존엄하지 못하게 하고 어진 보필이 서울을 떠나게 하였으니, 공의가 일제히 격동되어 놀라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만일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뜻을 분명히 보여 허풍을 치고 현혹시키는 죄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기탄없이 현인을 방해하는 습성을 징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관작을 삭탈하여 문외로 출송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승지 박세성이 아뢰었다.
"신이 탑전에서 하교한 뜻으로 송시열에게 전유했더니, 시열이 말하기를 ‘신이 지은 죄는 매우 큰데, 삼가 듣자니 서필원이 매우 무겁게 논핵을 입고 있다 하니, 두려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필원과 신은 서로 알고 지낸 지가 매우 오래 되어 필원을 아는 사람으로는 신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필원이 어찌 신을 쫓아내려는 뜻이 있었겠으며, 신이 어찌 필원 때문에 돌아온 것이겠습니까. 단지 필원은 일에 밝지 못하여 남에게 오해를 받고 사람들에게 의심을 당하는 것이니, 매우 탄식할 만한 일입니다. 신의 팔자는 매우 기구하여 한번 몸을 돌리기만 하면 제 자신이 낭패를 당할 뿐 아니라 반드시 타인에게까지도 누를 끼칩니다. 신이 이미 도성문을 나왔으니 조정 일은 신이 감히 말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만, 필원의 일은 신이 실로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감히 무릅쓰고 진달합니다.’ 하였습니다."
2월 19일 임오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소대하고, 《심경》과 《강목》을 강하였다. 좌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정릉의 정자각을 중건할 때 정부에서 봉심하는 거조가 있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예조에 분부하라고 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수원 부사 심지명(沈之溟)이 이번에 또 대론(臺論)을 입었으니, 부임하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이런 거둥이 임박한 때에는 즉시 체차하여 모든 일에 군색한 걱정이 없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계에 이른바 ‘버젓이 기탄하는 것이 없다.’는 말은 진실로 터무니없다. 그러나 사세가 이러하니 체차하라."
하였다. 병조 판서 홍중보가 청하기를,
"경기의 기병과 보병의 모자라는 숫자를 3년의 기한을 주어 각읍으로 하여금 충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명하기를,
"각읍의 쇠잔하고 융성한 형편에 따라 수를 정해 보충하게 하되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자는 무거운 벌을 주어라."
하였다. 홍중보가 또 평안도의 인재를 뽑는 일로 아뢰기를,
"북도의 예에 의거하여 3백 명을 뽑아야 합니까?"
하니, 상이 1백 명을 더 뽑으라고 하였다. 중보가 판의금의 체직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도승지 장선징, 교리 이규령이 춘당대(春塘臺)에서 시재(試才)할 때 문과 시험을 유생들에게도 거행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좌우에게 물으니 모두가 좋다고 하는데, 좌의정 허적은 불가하다고 하였다. 좌참찬 송준길이 힘껏 청하였으나 허적이 끝까지 ‘명령을 내린 후 중도에 변경할 수 없다.’고 하니, 상이 마침내 허적의 말을 따랐다.
신명규(申命圭)를 장령으로, 홍주국(洪柱國)을 지평으로, 박증휘(朴增輝)를 집의로 삼았다.
영의정 정태화가 상소하여 사직했는데, 상이 답하기를,
"나랏일이 이와 같은데 경이 인피하여 들어간 지 이미 석 달에 이르고 있다. 적체된 일이 어찌 한두 가지이겠는가. 선조의 예우와 과인의 의지가 깊고도 무거우니, 의리상 나 몰라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속히 나와서 도를 논하여 나의 목이 마른 듯한 소망에 부응하라."
하고, 사관을 보내어 전유했다.
사간 이유 등이 김세정의 출사를 청하며 아뢰기를,
"한때 재촉하는 조정의 명이 있다 하더라도, 염우(廉隅)로써 꾸짖은 것은 또한 불가한 점이 없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실상을 잃었다고 하교하자, 정언 최상익이 먼저 인피하고, 사간 이유, 정언 신정이 이 때문에 잇따라 인피하였다.
사간 이유 등이 신덕 왕후(神德王后)를 태묘(太廟)에 제사지내는 일로 상차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신덕 왕후는 성조(聖祖)가 등극하던 날에 중국에서 내려주는 고명(誥命)의 은총을 받아 중전의 자리에 올라서 한 나라의 국모로 지내시기 10여 년이었으며, 승하하신 후에는 예관이 휘호를 올리고 원릉에 의물(儀物)을 갖추었습니다. 당시 높이 받드는 예는 신의 왕후(神懿王后)와 차등이 없었고, 잠언(箴言)이 유익하다는 칭송과, 좋은 보좌(輔佐)를 잃은 것 같다는 탄식이 분명하게 비문에 실려 있습니다. 나라를 세운 정비(正妃)의 존귀함으로 문왕(文王)의 비(妃)처럼 훌륭한 덕의 아름다움을 간직하여, 살아서는 책봉을 받았고 죽어서는 아름다운 칭호를 더하였는데도 아직 태묘에 배향하는 의전을 거행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성조(聖朝)의 불행이며 천고의 유한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는 이미 대신의 논의를 받아들여 능묘(陵廟)의 제도를 회복하였으니 차례로 행하여야 할 의례를 무엇을 꺼려 아직도 결정하지 않으십니까. 선조 때에 관계된 일이라는 이유로 어렵게 여기는 뜻이 있어서입니까. 신들이 삼가 유첩(遺牒)을 살피건대 태종 대왕이 신덕 왕후를 섬긴 것은 지성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봉양은 평소에 효성을 다하였고 몸소 향축(香祝)을 전하여 제사를 올리는 데 경의를 다하였으니, 생전과 사후에 섬기는 예가 진실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단지 한때 제신의 잘못으로 인하여 전례가 폐하여 이륜(彛倫)이 행해지지 못하고 묘의(廟儀)가 결손되어 인정이 수심에 차 있게 되었으니, 이것을 생각하면 몹시 마음이 아픕니다.
지금 듣건대 장차 《실록》을 상고해 내게 했다고 하니 대체로 그 일을 중히 여겨서입니다. 일찍이 선묘조에 대신이 건의하고 삼사는 대궐 뜰에 엎드려 청하였으며 아래로는 낭서(郞署)와 위포(韋布)에 이르기까지 대궐에 달려와서 아뢰자 역시 《실록》을 상고하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끝내 그 의식을 거행하지 못한 것은 오늘날처럼 지나치게 신중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인심은 갈수록 더욱 격동되고 온 나라 모든 사람들이 기가 막혀 3백 년을 하루같이 눈물을 짓고 있으니 인정이 같다는 것을 여기에서 징험할 수 있습니다.
임금의 계술하는 도리는 의리의 합당함을 얻는 것에 있지 오로지 옛일을 고수하는 것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선유(先儒)의 말에 ‘준수할 것을 준수하는 것이 본디 계술하는 것이지만, 변통해야 될 것을 변통하는 것도 역시 계술이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준수하는 것이 계술인 줄만 알고 변통하는 도리를 알지 못한다면, 무왕(武王)의 정벌은 문왕(文王)을 잘 계술하지 못한 것이 되며 성왕(成王)이 선공(先公)을 높인 것도 역시 무왕을 잘 계술하지 못한 것이 되니, 어찌 준수 한 가지만을 가지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 중종 대왕이 의리의 정당함에 매우 밝아서, 고치지 않았었다는 혐의에 구애되지 않고 소릉(昭陵)의 억울함을 하루아침에 풀어 주어, 1백 년이 된 오늘날까지도 오히려 사람의 입에 전송되고 있으니, 이것은 실로 오늘날 전하께서 본보기로 삼아야 됩니다. 어찌 선조(先朝)에서 행하지 못하였던 일이라 핑계대고 한결같이 망설이고 있습니까.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속히 대신과 예관에게 명해 빨리 의정하여, 대례를 완비해서 여정(輿情)을 위로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2월 20일 계미
유철(兪撤)을 호조 참판으로, 이단상(李端相)을 병조 참의로, 김만균(金萬均)을 필선으로 삼았다.
행 대사간 강백년(姜栢年)이 신병을 이유로 상소를 진달하였는데, 옥당이 논하여 체직시켰다. 이규진(李奎鎭)이, 대각이 일을 회피한다는 말을 했기 때문에, 백년이 또한 불안하여 인피한 것이다.
2월 21일 갑신
크게 바람이 불었다.
지평 김세정(金世鼎)이 패초에 나오지 않은 뒤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수원 부사 심지명(沈之溟)은 본래 재주나 식견도 없이 한갓 잘 섬길 줄만 아는 사람으로, 이전부터의 이력이 모두 인망에 차지 못했습니다. 당초 대각의 논계에서 공의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번 조정의 명을 듣고는 관을 털고 즉시 출사하였으니, 신이 논한 바는 그릇이 적당하지 못해서였을 뿐만 아니라, 실로 염우(廉隅)를 장려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명께서 이해하지 못하시고 말씀을 엄하게 하시니, 신은 진실로 민망하여 스스로를 용납할 여지가 없습니다. 신이 앞서는 망언한 잘못이 있고 뒤에는 명을 어긴 죄가 있으니, 신을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근래 잘못을 꾸미며 스스로를 옳다고 하는 버릇이 풍조를 이루고 있으니, 진실로 한심한 일이다. 이 일은 애초 조정의 명령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고 한 것이라면 혹 그럴 수도 있으나, 조정 명령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수령을 죄주려고 하니, 어찌 놀랍지 않은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옥당이 처치하여, 정언 최상익, 사간 이유, 정언 신정, 대사간 강백년, 지평 김세정을 출사시키라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세정은 패초를 받고 또 나오지 않았다.
판중추부사 송시열이 상소했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신은 임금을 섬김에 예가 없어 인사도 하지 않고 지레 돌아와 죄가 적지 않았으므로 다만 엄한 견책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뜻하지 않게 성명께서는 세 번이나 따뜻한 유지를 내리셨고 다시 태의를 보내주셨으며, 아울러 도신에게 호송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이 어찌 죄가 심할수록 은혜를 더욱 더해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본직과 겸직을 아울러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이 서울을 떠난 지 이제 10년이 되는데, 다행히 지난 가을 비로소 다시 들어와 함께 나랏일을 다스렸으니, 나의 깊은 기쁨은 서로의 접견이 드문 것이 오히려 한이었다. 어찌 오늘처럼 갑자기 떠날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나랏일이 엉망이 되고 사람들 마음이 크게 놀라워하니, 내 매우 부끄럽고 한스러워 무어라고 말을 할 수가 없다. 경이 비록 서울을 떠났더라도 모름지기 이 심정을 몸받아 안심하고 잘 조리하여 면대할 기약을 어기지 말라."
하고,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였다.
2월 23일 병술
김좌명(金佐明)을 판의금으로, 조복양(趙復陽)을 대사헌으로, 김만중(金萬重)을 헌납으로, 조세환(趙世煥)을 지평으로, 민시중(閔蓍重)을 초배하여 수원 부사로, 이동직(李東稷)을 초배하여 의주 부윤으로 삼았다.
관원을 보내어 전곶(箭串)의 목장에서 마조제(馬祖祭)를 지냈다.
2월 24일 정해
홍주국(洪柱國)을 장령으로, 이규령(李奎齡)을 지평으로, 홍만형(洪萬衡)을 이조 좌랑으로, 윤비경(尹飛卿)을 병조 참지로, 강백년(姜栢年)을 동지춘추로, 김만균(金萬均)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갔는데, 약방 도제조 허적 등이 의관을 거느리고 들어와 진맥하였다. 이어 침을 맞았는데 눈병 때문이었다. 침을 맞은 뒤 병조 판서 홍중보, 충청 감사 이숙을 인견하였다. 제조 김좌명이 아뢰기를,
"태안에 창고를 설치하는 일은, 신이 단지 소견을 진달드린 것일 뿐이고, 대신도 역시 이렇게 건의했습니다. 그런데 서필원이 상소하여 배척한 뒤 대신이 조정을 떠났으니, 신이 어떻게 스스로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일찍이 수사 신여철(申汝哲)과 상의하여 수군을 창고 밑으로 옮기게 했는데, 지금 만약 이미 설치하기로 했다가 도로 정지한다면, 백성들에게 신의를 크게 잃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군과 육군, 그리고 시노비(寺奴婢)를 아울러 1백 호를 옮기되 셋으로 나누어 숫자를 정해 수군은 20호, 시노비와 육군은 각각 40호를 옮기게 하는 것이 적절하겠다."
하였다. 좌명이 또 아뢰기를,
"계성묘(啓聖廟)를 창건하는 일이 이미 결정되어 성균관이 본조에 이첩했는데, 묘 안에 들여야 할 사람이 누구누구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 밖의 절목도 갑자기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지금 거둥이 눈앞에 닥쳐 있으니,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허락했는데, 그 뒤 거행하지 못하였다. 상이 장선징에게 이르기를,
"모든 부마의 제택에 관해 지난날 옥당이 청대했을 때 비록 진달한 말이 있었으나 그렇잖은 것이 있으니, 나의 주관은 결코 변경할 수 없다. 선조(先朝)의 의도가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나는 아름다운 취지를 준행할 뿐이다. 지금 와서 내가 어찌 차마 바꾸겠는가. 만일 이러한 뜻을 알리지 않는다면 역시 매우 부당한 일이다. 이 뜻으로 모든 부마에게 패초하여 유시하라."
하였다. 상이 충청 감사 이숙에게 유시하기를,
"내가 질병 때문에 해마다 행차를 하고 있으니 비록 폐단을 줄이려고 애쓰고 있으나 내 마음이 어찌 편하겠는가. 경도 폐단을 줄이는 것에 충분히 마음을 쓰도록 하라."
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공산 현감(公山縣監) 정영한(鄭榮漢)을 가자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번 가자는 단지 빠진 군액을 충정하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하였다. 누차 아뢰었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이 때 정영한이 공산을 재차 맡으면서 모자라는 군액 3백 명을 일시에 충정하였고 또한 치적이 있었는데, 허적 등이 말을 하여 상이 특별히 가자를 명했다.
유생의 관복(冠服)을 분포단령(粉袍團領) 및 일상시의 유건(儒巾)으로 정하였다. 이에 앞서 상이 홍문관에게 유생의 관복을 상고해 내게 하니, 본관이 《대명회전》과 본관에 소장하고 있는 여러 가지 유건 제도와 《의례문해(疑禮問解)》 등 서적을 상고하여, 유복(儒服)을 논한 것을 뽑아내어 별도로 기록하고 도식을 갖추어 올리자, 상이 예관에게 품처하게 하였다. 후에 경연의 자리에서 상이 유생의 관복에 대하여 송준길(宋浚吉)에게 자문하여 분포 단령(粉袍團領) 및 일상시의 유건으로 정했는데, 입학할 때 해조가 제대로 봉행하지 못하여 마침내 폐지되었다.
2월 25일 무자
사간 이유 등이 아뢰기를,
"부마들의 제택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일을 대신이 이미 건의하여 아뢰었으니, 그 뜻이 비단 칸수가 제도를 벗어난다는 데에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삼가 듣건대 패초하여 전유하라는 명이 어제 있었다고 하니, 신들은 못내 개탄스럽습니다. 성상의 이번 거조가 진실로 친애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지만 대신이 논의한 바가 이미 정당한 의리에 근거하였다면, 지켜야 할 법의 도리상 성상께서 결코 어겨서는 아니 되며, 지켜야 할 분수의 도리상 신자 또한 태연히 들어가 살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대신이 조정을 떠나 막 수문(修門)을 나서자마자 그가 건백한 것을 허투로 돌려버린다면, 비단 자만하는 모습이 성덕에 흠이 될 뿐만 아니라 법제를 밝히는 뜻이 이로 인하여 폐기되어 뭇 심정이 허전해 하고 공의가 더욱 침울하게 될 것이니, 모든 부마들은 제택에 그전대로 들어가 살라는 명을 거두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 인심의 곱지 아니함이 어쩌면 이렇게까지 되었는가. 계사를 보건대 대신이 조정을 떠난다는 이하의 끝 부분 17자는 감추어진 속뜻이 있으니 내 매우 한심스럽게 여긴다. 임금과 신하의 사이는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귀중하므로 면유할 때 내 뜻을 솔직히 털어놓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그대들의 말이 비록 이러하나 내 어찌 마음을 동요하겠는가. 내가 선왕의 뜻도 봉행하지 못하고 있는데 법을 무시한다고 하니, 그 밖의 것이야 어찌 말할 게 있겠는가. 내가 주장하는 것이 우연한 뜻이 아니니, 어찌 그대들의 말을 염려하겠는가."
하였다.
정언 최상익(崔商翼)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여러 부마들에게 집을 지어 준 것이 일찍이 선조(先朝) 때 있었으니, 성상의 뜻은 어버이의 일을 고치지 않는다는 효에서 나온 것임을 진실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들어가 살아서는 안 된다는 논이 이미 나왔으니, 비록 성상의 유시가 있다 하더라도 과연 부마들의 마음에 편하겠습니까. 집에 일정한 제도가 있는 것은 역시 국조의 아름다운 법이니, 어떻게 성상의 뜻이 이미 정해졌다고 하여 논열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성상께서 유현(儒賢)을 등용하시어 성의와 예우를 극진히 하셨고 시행하는 일들이 모두 지극한 이치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유현이 갑자기 서울을 떠나 조정이나 재야나 모두 실망하고 있는 이 마당에 마침 부마들에게 전유하라는 명이 있은 것입니다. 신이 언책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을 조금이나마 나타내다가 수고롭게 엄한 비답을 내리게 하였으니, 신의 직을 전삭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 계사를 보건대 참으로 괴이하구나. 저것을 물었는데 이것을 답하다니, 의도가 어디에 있는 줄 모르겠다. 집은 일정한 제도가 있다는 등의 말은 앞서의 계사에 있지 않았고 내가 말하지도 않은 것이니, 그 마음의 소재를 참으로 헤아릴 수가 없구나.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2월 26일 기축
사간 이유, 정언 신정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여러 부마들의 집은 칸수가 제도를 넘었을 뿐만이 아니니, 그 분수와 의리에 있어서 결코 편안히 들어가 살기 어렵습니다. 또 이 논은 애초 대신의 건의에서 나왔는데 불러 계속 들어가 살라는 이 명이 문득 대신이 조정을 떠난 직후에 나왔으니, 듣는 사람들이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들이 끝부분에 언급했던 것인데 그 말을 꼬투리잡아 엄하게 분부하시니,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신들의 직을 전삭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대사헌 조복양(趙復陽)이 일찍이 정시(庭試)에서 글제를 중복되게 출제한 일로 탄핵을 입었는데, 이때 이르러 상소하여 사직하니, 기왕의 일을 이제 와서 깊이 인책할 필요는 없다고 답했다.
지평 김세정(金世鼎)이 인피하며 심지명(沈之溟)이 염치를 무릅쓰고 태연히 하직한 잘못을 극언하고, 또 공사를 조율하면서 글자를 빠뜨린 잘못이 있다고 스스로를 논열했는데, 상이 답하기를,
"이 피혐하는 내용을 보건대 단지 웃음 거리만 늘리고 있구나. 비록 자신을 변명하고자 하나 도리어 허투로 돌아가고, 자신을 옳다고 하나 더욱 허물만 증가시키다니 말이다. 장황한 연설을 끝내 이해하지 못하겠다.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집의 박증휘(朴增輝)가 민희(閔熙)를 개정하라는 논을 정지하여 물의에 비난을 당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지평 이규령(李奎齡)이 처치하여, 정언 최상익, 사간 이유, 정언 신정, 지평 김세정, 집의 박증휘를 출사시키라고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끝나고 나서 좌참찬 송준길이 뵙기를 청하고, 입시하여 아뢰기를,
"신이 노쇠하고 무능한 몸으로 머물러 있으면서 다른 도움은 없고, 오직 허물을 없애며 빠트린 것을 줍는 것으로 직분을 삼고 있습니다. 근래에 《심경》 정심장(正心章)의 ‘분노함이 있으면…’이라는 뜻을 잇따라 강론하였는데, 며칠 사이에 상께서 말씀하실 때 자못 불평하는 의사가 있으니 공부가 미진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까. 신은 중화(中和)의 지극한 공효로 전하께 바랐는데 바라는 바와 다르므로 감히 아뢰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세정이 심지명을 논핵할 때 처음에 염우(廉隅)로 책망한 것은 혹 조정의 명령이 있었던 것을 알지 못하고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하교한 후에 인피하면서 자신이 옳다고 하므로 내가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간원의 처치에 대하여 잘못되었다고 내가 비답한 것은, 간원의 관리는 내가 하교한 것을 참고하여 처치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아니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정의 명이라고 하면서 버젓이 기탄함이 없다고 남을 논핵하므로 내가 그렇게 하교했던 것이다."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김세정이 심지명을 논핵한 것은 본래 합당하지 않았으나 전하께서 김세정에게 내린 비답도 역시 딱 맞는 말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세정이 잘못을 꾸미며 변명하는 말이 있으므로 그렇게 비답하였던 것이다."
하였다. 송준길이 또 아뢰기를,
"어제 대계에 내린 비답을 보았는데 더욱 온당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일의 자초지종을 전하께 자세히 진달하겠습니다. 지난 선조(先朝)때 어떤 이가 부마들이 불안해 한다는 뜻으로 진달하니, 선왕이 ‘내 생각으로 편리하겠기에 노성(老成)한 신하에게 문의했더니 모두 합당하다고 하므로 그렇게 하였다.’고 하였는데, 노성한 신하란 바로 조석윤(趙錫胤)·김익희(金益熙)·이시방(李時昉)이었습니다. 선왕이 이 세 신하에게 문의하니 시방과 익희는 옳다고 하고 석윤은 탑전에서 다툴 수 없어 물러나 소를 올려 옳지 않다고 하였는데, 선왕이 조석윤의 말은 듣지 않고 익희 등의 말을 따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뿐만은 아니다. 선왕이 대신에게 논의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하였다. 도승지 장선징이 아뢰기를,
"선왕이 김육·이시백·원두표에게 논의했는데 김육은 정전(正殿)의 터에는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자, 준길이 아뢰기를,
"그때 신과 시열이 시골에 있으면서 이 일을 듣고 매우 온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며 익희가 잘못 대답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후 민응형(閔應亨)이 대사헌이 되어 상소하여 이 일을 논하였는데 끝난 일이라는 핑계로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신은 국가 궁궐의 터에 신자가 거처해서는 안 된다고 여깁니다. 만약 그럭저럭 지나간다면 혹 그럴 수도 있겠지마는 사단이 발한 후이니 그대로 두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왕조부터 이미 운운한 말들이 있었는데 내가 어찌 오늘날에 와서 변통할 수 있겠는가."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선왕조 때 발단이 되었으나 미처 하지 못한 것이 어찌 한 가지 뿐이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곳이 비록 궁궐의 옛터라고 하나 비워둔 지 이미 오래 되었고 경복궁(景福宮)의 터와는 다르다. 여러 공주의 가옥을 한 곳의 공한지에 나란히 들이는 것이 여염집을 빼앗아 넓게 차지하는 것에 비하여 그 폐단이 어떠한가. 당초 선왕의 뜻이 폐단을 줄이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니 선조의 아름다운 뜻을 나는 변경하지 않고자 할 뿐이지 다른 것을 위해서가 아니다. 송 판부사도 역시 나의 말을 잘못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나의 주된 뜻이 이러한 것인데 대계는 ‘대신이 도성을 나가자마자 뒤집었다.’고 말을 하니, 이것이 내가 ‘사람 마음의 곱지 못함이 어쩌면 이 지경이 되었는가.’라고 말했던 까닭이다."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십니다. 그러므로 신도 역시 대관의 말이 적중하기 어렵다고 여겼습니다. 그렇다고 하나 상께서 내리신 비답도 역시 온당치 못하였습니다. 상께서 자전께 사뢰어 공평한 마음으로 헤아려 합당하게 처리하여야 할 것이고, 위아래에서 질질 끌기를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됩니다. 전하께서 비록 공주의 저택을 헐어 옮기는 일을 불편하게 여기시지만 물정이 불안해 한다면 성상의 마음도 편안하실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깊이 생각하여 보았으나 나의 의견이 잘못되었음을 알지 못하겠으므로 어제 대계의 비답에 이미 나의 의사를 보였다."
하였다.
좌의정 허적과 예조 정랑 조치중(曺致中)을 보내어 정릉(貞陵)을 봉심하였다.
2월 27일 경인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지사 정지화를 보내어 평안도에 과거를 설행하고, 예문 제학 강백년을 패초하여 글제를 내어 보냈다. 그 후 양현망(楊顯望) 등 4명을 뽑아 급제를 하사하였다.
장령 신명규(申命圭)가 소를 올려 체직시켜주기를 청하고, 인하여 생각을 진달하면서 서필원을 공척하고, 또 목내선의 사람됨을 공척하여 전조(銓曹)가 내선을 승선에 의망한 잘못을 극언하니, 상이 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은 자못 가상하나 목내선의 일에 있어서는 매우 의아스럽다. 내선이 좌우에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대개 그 사람됨을 볼 때 비록 출중한 재주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실로 가까이 할 수 없다는 점은 보지 못하였다."
하고, 원소(原疏)에 계(啓) 자만 찍어 내렸다. 정원이 그것이 옳지 않다고 진달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영의정 정태화가 22번째 정사하니, 상이 행차가 가까운 시일에 있어 논의하여 결정할 일이 많다며 도승지 장선징을 보내어, 속히 정고(呈告)를 멈추고 기력이 차츰 나아지기를 기다려 들어와서 상의하자는 뜻으로 유시하였다.
좌의정 허적이 행차 때 승지와 사관에게 말을 줄 것을 청하니, 상이 일렀다.
"왕자와 대신 및 승지와 사관에게 모두 말을 주라."
행 대사헌 조복양이 현재 추감(推勘) 중에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지평 이규령이, 박증휘의 출사를 청하여 물의에 비난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증휘가 이 때문에 또 인피하였다.
2월 28일 신묘
장령 홍주국(洪柱國)이 민희(閔熙)의 제수를 개정하라는 논계를 멈추는 논의에 기왕에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행 대사간 강백년은 민희와 사돈간이어서 혐의를 피할 관계에 있으므로 감히 헌부를 처치하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이원정(李元禎)을 좌윤으로, 이시술(李時術)을 초배하여 병조 참판으로, 윤심(尹深)·김만중(金萬重)을 이조 좌랑으로, 김득신(金得臣)을 장령으로, 이규령(李奎齡)을 수찬으로, 조성보(趙聖輔)를 지평으로, 송규렴(宋奎濂)을 헌납으로, 홍억(洪億)을 사서로 삼았다.
사간 이유가, 대사헌 조복양, 장령 홍주국(洪柱國)과 더불어 모두 한 집안인 혐의가 있어서 감히 처치하지 못하겠다고 인피하였다.
교리 윤심(尹深), 부교리 이민서(李敏叙) 등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근래 판부사 송시열이 조정에 머문 지 오래지 않았는데, 건청한 바를 조금이라도 시행한 것이 있다는 것을 또한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일찍이 경연에서 진달한 것으로, 쓸데없는 비용을 절감하며 용렬한 군사를 줄이고 법전을 수거하고 기강을 정돈하는 등의 일은 그 뜻을 대체로 알 만합니다. 강석에서 올린 말은 음사의 사사로움을 내치고 의리의 공정함을 밝힌 것이 아닌 게 없는데, 군왕을 바르게 인도하고 일을 바로잡는 대의에 더욱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평소 뜻이 잘 맞았고 극진히 예우하셨던 성상께서 만일 제대로 그 말을 음미하여 실행에 의심하지 않고 성지를 분발하여 위에서 주장하여 널리 여러 선을 모아 뒤에서 윤색하시어, 먼저 이미 말한 것을 따르고 말하지 아니한 것까지 차례로 미루어 행하여 시종 견지하신다면, 그 몸은 비록 잠시 서울을 떠났다 하더라도 그 말은 제때 사용되지 아니함이 없어서 국가가 영원히 힘입을 것이니, 어찌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부마 제택의 논의는, 대신이 이미 말한 의논을 거듭하여 신자로서 감히 분수상 할 수 없다는 것을 밝혀 성조(聖朝)의 전유(傳諭)가 잘못되었음을 단지 바로잡고자 한 것이니, 대관의 책임을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명께서는 내용 중의 말을 꼬투리 잡아 엄하게 질책하셨고 더구나 우매(愚昧)란 두 글자는 신자로서 차마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성명께서는 일찍이 경연에서 역시 이러한 하교로 말하는 이의 입을 막았으니, 어쩌면 제갈무후(諸葛武侯)가 말한 ‘자신을 하잘것없이 여겨 충성스러운 간언을 막는다.’는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국가에서 대간을 두는 것은 그에게 시비를 쟁론하게 하는 것이니, 정령의 잘못과 거조의 잘못됨을 쟁집하고 논박하는 것은 모두 대각의 직책인데, 지금 성상의 의견이 ‘네 비록 말하고 있으나 내가 무엇을 염려하겠는가.’ 하신다면 형식적으로 간의(諫議)의 직책을 설치하고 구차하게 집법(執法)의 관리를 둘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선왕조에 축조한 뜻을 유념하시어 당초에는 차마하지 못하셨으나, 신자가 분수상 불안하게 여기는 것을 인하여 그 후에 흔쾌히 따르신다면, 이는 아름다운 덕에 광채가 더할 뿐이지 은혜와 사랑에 무슨 손상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계를 진달하는 말은 우애(憂愛)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니 가상하게 여긴다만, 차자 끝의 말은 매우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하였다.
2월 30일 계사
홍문관 부교리 이민서가 양사를 처치하여, 대사헌 조복양과 집의 박증휘를 체직하고, 장령 홍주국, 대사간 강백년, 사간 이유를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대마도(對馬島)주(主) 평의진(平義眞)이 다시 차왜(差倭)를 보내어 관(舘)을 옮겨주기를 청하니, 조정이 예조 참판 강백년으로 하여금 그 서신에 허락하지 않는다고 답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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