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을미
우승지 이정(李程)이 무과 전시소(殿試所)에 나가야 하는 해방 승지로서 아뢰기를,
"어제 대각의 계사로 인하여 문과를 이미 파하였으니, 오늘의 무과 과장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례를 상고하여 품처하라."
하였다. 이정이 복계하기를,
"병인년001) 의 별시에서 문과는 대각의 논계로 인하여 파방했지만, 무과는 파하지 않은 채 정시에 합하여 시행했습니다. 이번 정시도 계속 시행해야 하는지의 여부를 해조로 하여금 속히 품처하게 하소서."
하니, 병조가 아뢰기를,
"일찍이 병인년 별시에서 문과를 파방한 뒤 정시를 특별히 설행했는데, 무과는 별시에서 뽑은 사람으로써 문과에 대거(對擧)하였습니다. 과거는 중요한 일인 만큼 대신들에게 의논하소서."
하였다. 영중추부사 이경석은 아뢰기를,
"선조에서 파방의 폐단을 염려하여, 죄가 시관에게 있으면 시관을 죄주고 죄가 응시자에게 있으면 응시자를 죄주는 것으로 법령을 정했습니다. 지금 대각의 계사로 인하여 문과를 파방했으니, 무과를 아울러 파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하물며 병인년의 일로 말해 본다면, 문과를 대각의 계사로 파방한 뒤 정시를 특별히 시행했는데, 무과는 별시에서 뽑은 사람으로써 그대로 대거했으니, 무슨 의심할 만한 일이 있겠습니까."
하고, 영의정 정태화는 아뢰기를,
"문과를 일단 파방한 이상 무과만 남겨둔다는 것은 매우 구차한 일입니다."
하였다. 좌의정 허적과 행 판중추부사 정치화는 태화의 의견과 같았다. 상이 다시 행 판중추부사 송시열에게 수의하라고 명했는데, 시열이 아뢰기를,
"무과 역시 파한다면 무사들이 억울하다고 칭할 것이니 참으로 염려할 만합니다. 그러나 듣건대, 초시 때부터 뇌물을 쓰고 합격한 사람이 많다는 설이 자자했는데 전시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이 짓이 멈추어지지 않고 있다 합니다. 따라서 합격해야 하는데 떨어진 사람도 있을 것이고 떨어져야 하는데 합격한 사람도 있을 것이니, 합격한 사람들의 억울함이 비록 염려가 되기는 하나, 떨어진 사람의 억울함도 역시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비록 파한다 하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파방해야 한다면 안타깝고 불쌍하다고 해서 다른 의논을 두어서는 안 된다. 다만 생각건대, 비록 뒤섞여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전시를 파한다는 것도 나라의 체면에 있어 온당한 것인지 모르겠다. 인조조 때 이미 행한 전례에 따라 그대로 시행하고 파방하지 말라."
하였다.
1월 2일 병신
판중추부사 송시열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신이 외람되게 두터운 은혜를 입어 세자를 접견할 수 있었는데, 하늘의 해와 같은 모습이니 봉황과 같은 자태니 하는 말로도 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진실로 종사와 생민의 영원한 복이었습니다. 신이 용솟음치는 기쁨을 견딜 수 없어, 이제는 충분히 선왕에게 보답할 수 있겠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고 스스로 여겼습니다.
다만 신이 예관의 의주(儀註)를 보니, 사부와 빈객이 마루에 올라 절을 한 뒤 즉시 물러나오게 되어 있었습니다. 신이 세자를 처음 접견함에 충애의 마음이 물씬물씬 일어나 차마 문득 물러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삼가 생각건대 ‘옛 사람들이 서로 접견할 때는 반드시 대화를 나누어 서로 권면하고 경계했기 때문에 그 의식이 엄숙하고 치밀하며, 그 정의가 흐뭇하고 화열했다. 그래서 《의례(儀禮)》에서 여(旅)제사를 지내면서 대화를 나눈다고 했던 것이다. 게다가 군신이 처음 만난 즈음에 별안간 발을 돌리면서 끝내 한마디 말도 없다면 위의가 촉급하고 의사가 쓸쓸하지 않겠는가.’고 여겨졌습니다. 그리하여 신과 빈객 민정중이 세자와 잠깐 대좌하고 몇 마디 주고받았으며, 대화를 마치고 나서는 또한 그냥 물러날 수 없으므로 또 절을 하고 나왔습니다. 이것이 비록 의리에 있어서는 그다지 잘못이 아닙니다만, 조정의 의식을 위반한 것이니, 잘난 체한다는 비난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인하여 돌아가겠다고 청했는데, 상이 답하기를,
"어제의 일은 인정과 이치로 헤아려 볼 때 아름답게 여겨야 할 일이지 잘못되었다고 여길 일이 아니며, 또한 전례도 있다. 경은 무엇 때문에 불안하게 여기는가. 차자 끝부분의 돌아가겠다고 한 내용은 이 무슨 말인가. 경이 성안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나를 무슨 물건 버리듯이 내버리고 이렇게 돌아가려고 한단 말인가. 나의 성의가 미덥지 못한 것이 더욱 부끄럽다. 그러나 나랏일이 매우 어려워 근심이 눈 앞에 가득하니, 지금은 참으로 함께 구제책을 도모해야 할 때이다. 경이 어찌 차마 버리고 떠날 수 있단 말인가. 모름지기 나의 지극한 뜻을 체득하여 영영 가버리려는 계획만 세우지 말고, 안심하고 머물러서 지극한 소망에 부응하라."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병으로 사직서를 올리니, 상이 불윤 비답(不允批答)을 명했다. 이때 송시열 등이 조정에 있으면서 변경하는 것이 많았다. 태화가 수상이 되어 구차히 동조하고 싶지도 않은데다 또 이론을 세우고 싶지도 않아 다리의 병을 핑계로 들어갔다. 송준길이 태화에게 이르기를,
"밖의 의논들은 공이 국사를 담당하지 않는다고 비난하기도 하는데, 공은 어째서 이런 말들이 있게 하십니까?"
하니, 태화가 웃으며 말하기를,
"나에게 자신하지 못하는 병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것입니다."
하였다.
1월 3일 정유
중신을 보내어 북교(北郊)에서 기설제(祈雪祭)를 지냈다.
이조 참판 이경휘(李慶徽)를 이조 판서로 특별히 제수하였다. 경휘는 당시에 인망이 있었기 때문에 올려서 발탁한 것이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 및 삼사(三司)를 인견하였다. 좌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정언 김세정(金世鼎)이 계사에서 ‘지난해 감해 준 제반 신역(身役) 및 징수를 늦춘 관청 대출 곡식[官糴]을 지금 모두 일시에 납부하도록 독촉하고 있으므로 백성들이 지탱할 수 없어 심지어는 전택을 팔고 있습니다. 유난히 더욱 가난하여 장만하도록 책임지울 수 없는 빈민이나, 흩어지고 죽어서 없어진 가호에 대하여 그 대신 이웃과 일가붙이들에게 징수하는 것들을 일일이 조사해 내어, 모든 납부를 일체 정지하도록 하고 풍년을 기다려 추후에 징수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관청 대출 곡식의 건은 반으로 감하여 거두라는 명이 이미 있었고, 흩어지고 죽어서 가호가 없는 경우는 으레 뒤섞여 부실한 폐단이 많으므로 잠시 그냥 두었지만, 여러 해 거두지 못한 신역의 경우는 일시에 징수하기가 진실로 어려운 형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러 해 거두지 못한 것을 일시에 독촉해 받기란 그 형편상 쉽지 않을 것이다. 먼저 어느 해에 얼마나 거두지 못했는지 조사하여 몇 해로 나누어 시한을 정하여 거두어 들이라."
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북로(北路)는 재해가 매우 심한 지경에 이르지 않았는데도 도신의 계문으로 인하여 전세로 내는 쌀·콩을 반으로 감하고, 공물도 모두 전액 감하였습니다. 그런데 영남은 월과미(月課米)와 육군(陸軍)의 조련을 중지시킨 일 이외에는 별로 줄여준 일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남 의 제반 신역도 헤아려 감하라."
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올해는 노비를 추쇄하는 식년(式年)입니다. 차원(差員)이 각 고을의 노비를 순검하여 관아 문에 소집시키는데, 그 폐단이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경상 좌·우도의 재해를 입은 고을의 추쇄는 우선 정지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최문식에 관한 일은, 이단하의 전후 상소로 보건대 그간의 곡절이 매우 명백하며, 또 형조의 조사 문서를 살펴보아도 문식은 죄가 없는 듯합니다. 방금 큰 사면령을 내렸는데, 문식만 유독 용서받지 못한 채 차가운 옥방에 오래 체류되어 있는데 질병 또한 심하니, 은혜를 미루어 용서해 주는 길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파직하고 풀어주도록 명하였다.
대사간 윤집이, 이전에 아뢰었던 평안 병사 구문치(具文治)를 파직하라는 일은 잘못 청한 것이었다는 이유로 체차를 청했는데, 상이 체차하라고 했다. 윤집이 또 탐장죄를 범한 박형(朴泂)의 죄를 감형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라고 청했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번의 무과에 대해서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고 원망과 비방이 떠들썩합니다. 문과를 파방한 뒤에 무과만 파하지 않는다면 매우 구차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초시가 난잡스러웠다고 말한다면 초시를 파방해야 된다. 초시를 일단 파방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초시가 말이 많다고 하여 전시를 그만두겠는가. 또 병인년에도 무과를 파하지 않았으니 은미한 뜻이 있었던 것 같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병인년의 정시는 지방의 응시자들이 많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시행했던 것이지, 파방 때문에 시행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해조의 계사가 잘못되었다."
하였다. 집의 김징(金澄)이 아뢰기를,
"과거는 지극히 엄중한 것인데, 지금 만약 고식적인 조처를 취한다면 반드시 뒤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양사의 의견이 똑같은가?"
하였다. 김징이 아뢰기를,
"소신도 역시 동료들과 상의하여 막 논계하려던 참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듣자니 병인년의 정시가 별시를 파방했기 때문에 시행한 것이 아니라고 하니, 지금 다시 특별히 시행해서는 안 되겠다. 게다가 초시 때 뇌물을 자행했다는 설이 있다고 들었으니, 공정하지 못함이 막심하다. 파방해야 되겠다."
하였다. 김징이 또 아뢰기를,
"지난번 설날 문안할 때 대신과 재신들이 대정에 모여 앉아 있었는데, 승지들이 서로 미루며 나와 대기하려고 하지 않으니 중관이 나왔다 다시 들어가기를 두 번이나 하였습니다. 그러다 대신이 누차 재촉한 뒤에야 비로소 나와서 대기했으니, 조정의 존엄하지 못함과 체통의 엄정하지 못함은 바로 이런 태만한 행동에서 연유하는 것입니다. 해당 승지를 추고하소서.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은 지난번 대정의 엄숙한 반열에서 승지가 오랫동안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화를 내면서 먼저 나가버리고는 문안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일의 체모를 손상시켰을 뿐 아니라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니,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호조 판서 민정중이 아뢰기를,
"활쏘기를 대신 해준 응시자들은 으레 수군(水軍)에 충정했습니다. 근래에는 전가 사변(全家徙邊)시키고 있는데, 매번 심리할 때마다 용서를 받습니다. 옛 전례대로 수군에 충정시키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지금부터 전가 사변된 무리들에 대해서는 심리할 때 거론하지 말게 해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허적이 아뢰기를,
"민정중에게 다시 대사성을 겸임하게 한 것이 비록 사유(師儒)의 자리를 무게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만, 그러나 정중이 비국과 호조·상평청·진휼청 등의 임무를 지금 바야흐로 겸임하고 있으니, 신경이 두루 미치기 어렵습니다. 대사성은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차임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사성에 합당한 자가 누구인가?"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이민적의 재주가 비록 한 지방을 맡아 다스리는 데에는 소략하지만, 그의 평소 명망으로 볼 때 참으로 이 직임에 합당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민정중의 대사성 직임을 바꾸어 차임하라."
하였다. 상이 정중에게 이르기를,
"새로 과거에 합격한 자들이 알성(謁聖)할 때 유생들이 멋대로 방해하지 못하도록 한 선조의 수교가 분명하게 있다. 그런데 지난번 새로 급제한 자들이 알성할 때 또 다시 저지했다. 애초에 이미 벌을 풀어주어 과거에 응시하게 해놓고는 등제한 뒤 알성을 허락하지 않다니, 이 무슨 이치인가. 이 뒤로는 대사성이 관할하고 있으니 유생들이 만약 다시 예전과 같이 군다면 조정에서 대사성을 죄줄 것이고, 대사성 또한 유생들에게 벌을 베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내용으로 정식을 삼아 거행토록 하라."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휴가 중에 있을 때 서북 지역의 수령을 대신에게 물어 차출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신이 진실로 형편없지만 대신의 체모로 말씀드린다면, 대신은 정관(政官)을 가려 임명해야 하는 것이지 수령을 차출하는 일은 그 임무가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예전처럼 해조에서 가려 차출하되 만약 합당하지 못한 자가 있으면 검칙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상의 기후가 미령하시어 오랫동안 종묘에 친히 제사드리지 못하였는데, 송시열의 차자로 인하여 특별히 전알(展謁)을 행하려 하시니 매우 기쁘고 다행한 일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만약 거둥을 대로로 한다면, 여염에 돌림병이 많으니, 궐내로부터 북신문(北神門)을 지나 출행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시종 및 시위하는 장수는 북신문을 지나 배위하여 가고, 백관은 먼저 종묘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눈병이 아직 고통스럽다는 이유로 아침 일찍 예를 행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자, 허적이 아뢰기를,
"시열의 뜻도 밤을 무릅쓰고 제사를 행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상께서 전알을 행하라는 것뿐이니, 전알을 굳이 새벽에 행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전알례를 행하는 것일 뿐이라면 매월 초하루마다 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는 매월 초하루에 전알하는 것으로 해조에 분부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사간 박세견(朴世堅)이 인피하여 아뢰기를,
"장관이 전계(前啓)를 처리하는 것에 관하여 신에게 묻기에, 신이 구문치의 일은 정계하는 것이 온당하겠다고 했으며, 이당규 등의 일은 장관이 정계하려고 하기에 신이 갑자기 정계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장관이 탑전에서 구문치를 체차하자고 논계하여 윤허를 얻었으며, 이당규에 관해서는 연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는 논하고 하나는 논하지 않은 것이 신과 논의한 것과 모두 다릅니다. 대각의 체모와 관례가 신으로 말미암아 실추되었으니, 체직하소서."
하였는데, 대사간 윤집도 인피했다. 간원이 처치하여, 세견은 출사시키고 윤집은 체직시켰다.
1월 4일 무술
조성보(趙聖輔)를 정언으로, 김좌명(金佐明)을 예조 판서로, 홍주국(洪柱國)·최유지(崔攸之)를 수찬으로 삼았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소대하고 《심경》을 강했다. 참찬관 이민적(李敏迪)이 음을 읽고 글뜻을 해석하며 설명했다. 판부사 송시열과 좌참찬 송준길이 번갈아 나머지 뜻을 강했다. 시열이 아뢰기를,
"소신이 전일에 차자로 진달한 내용이 자세하지 못했습니다. 이른바 전알(展謁)은 세속에서 말하는 신주에 절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평상시의 큰 제사에 질병으로 인하여 묘정에 가지 못했으므로 마음이 매우 한스러웠다. 지금 만약 전배(展拜)만 행하는 것이라면 비록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라 하더라도 역시 할 수 있다. 그래서 어제 인견할 때도 이렇게 분부했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어제 예조가 진달하여, 왕세자가 먼저 태묘를 전알한 뒤 입학례를 거행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영부사 이경석의 뜻은 반드시 대로를 따라 가고자 하는 것이었지만, 전하께서 이미 북신문을 거쳐 나가기로 하셨으니, 세자가 함께 가서 예를 행하는 것도 권의(權宜)의 도에 부합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뜻도 역시 그렇게 여긴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종묘의 예에 대하여 이미 단서를 일으킨 이상 신에게 생각이 있습니다. 일찍이 선조 때 진달하고자 했지만 하지 못하였습니다. 신덕 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는 태조 대왕의 비입니다. 승하한 뒤 정릉(貞陵)에 묻혔는데, 국초에는 고려의 예제를 여전히 사용하였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재(齋)를 베풀며 태조께서 매우 간절하게 추모하시어 매번 정릉의 경쇠 소리를 들은 뒤에야 수라를 드셨다고 하니, 두터웠던 태조의 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능침이 파묻혀 일반 능보다도 못하며 또 태묘에 배식(配食)되지도 못하고 있으니, 예에 있어서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처음에 무슨 일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는가?"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태조께서 개국한 뒤 정도전(鄭道傳) 등이 태종을 무함하고 신덕 왕후의 자식을 세자로 세웠습니다. 일이 실패하여 신덕 왕후의 두 아들은 비명에 죽었고 능침은 성밖으로 옮겨졌습니다. 이 때문에 태묘(太廟)에 배식되지 못한 것입니다. 고려 때에는 서울과 지방에 아내를 각각 두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태조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 신덕 왕후가 서울의 아내였는데, 사랑과 예우가 극진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태묘에 배식되지 못하고 있으니 진실로 온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조정 신하들에게 널리 의논하시어 태묘에 배향하고 능묘를 다시 봉토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서서히 다시 생각한 뒤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시열이 또 아뢰기를,
"신이 지난 겨울 장단(長湍)에 갔다가 개성부(開城府)를 방문하여 태조 대왕의 잠저 때 집을 보았습니다. 이른바 목청전(穆淸殿)인데, 매우 황폐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문 밖에는 또 예전 집터가 있었는데 주민들이 침범하여 살고 있었으므로 터를 알아볼 수가 없어 매우 미안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예조에 명하여 관원을 보내 간심하고 본부로 하여금 수리하게 하였다. 시열이 또 아뢰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토지 제도가 우선입니다. 법제에 20년마다 한 번씩 측량하게 되어 있는데, 경기는 이미 다시 측량했고, 충청도도 현재 다시 측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적임자를 얻은 뒤에야 그 일을 잘 마무리지을 수 있습니다. 현재 감독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 고을 양반으로서 차출된 자들인데, 그들에게 단지 일을 시키기만 하고 다른 장려하는 일은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가장 우수한 자를 가려 재주에 따라 선발하여 임용함으로써 권장하는 터전이 되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해조에 명하여 선발해서 수용하게 하였다. 시열이 또 아뢰기를,
"토지 정책이 일단 바로잡힌 뒤에는 반드시 보오법(保伍法)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비록 전국 시대 진(秦)의 상앙(商鞅)이 시행한 제도이기는 하지만, 환난을 서로 구원하도록 하는 것은 바로 백성들의 풍속을 두텁게 하는 바로, 대체로 주공(周公)의 제도에 근본을 둔 것입니다. 만약 보오법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민중을 정돈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호적을 다시 정리하는 때를 만났으니, 보오법을 차례로 거행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이상진이 경상 감사로 있을 때 호적에서 누락된 자들은 비록 피살을 당했더라도 그 살인한 사람을 살인죄로 죄주지 말자고 청했는데, 이 말이 어떠한가?"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그것은명나라 태조의 법입니다. 반드시 이런 법이 있은 뒤에야 호적에서 누락되는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만, 사람의 목숨은 매우 중한 것입니다. 이렇게 법을 제정한다면 호적에서 누락된 자들은 모두 죽임을 면치 못할 것이니, 이것이 염려해야 할 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렇게 한 뒤에야 사람들이 죽임을 두려워하여 호적에서 빠지는 자가 반드시 없게 될 것이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지난해 양전(量田)한 뒤 공공의 부세가 매우 무거웠는데, 김수흥(金壽興)이 광주 부윤으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 혜택을 입었습니다. 지금 원망과 괴로움이 뼈에 사무쳐 모두 살아가고자 하는 뜻이 없으니, 대체로 해묵은 적곡(糴穀)을 갖추어 납부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위급한 때 힘을 얻어야 하는 지역에서 그곳 백성들의 화합을 잃고 있으니, 매우 염려해야 할 점입니다.
신이 수어사 김좌명과 상의했더니, 갑진년002) 이전의 적곡은 받아들일 방법이 만무하다고 했습니다. 빈 장부만 끼고 있으면서 이렇게 백성들의 마음을 잃으니, 조양자(趙襄子)가 말한 바 백성들의 고혈을 짜서 창고를 채운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풍환(馮驩)이 설공(薛公)을 위해서 문권(文券)을 불태워 버려 민심을 얻었는데003) , 지금 만약 탕감해 준다면 좋을 듯합니다."
하였는데, 말이 매우 간절했다. 상이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였다. 시열이 또 아뢰기를,
"결혼을 할 때에는 동성을 취하지 않는 것이 바로 옛 예법입니다. 나라 풍속이 비록 동성이지만 본관이 다르면 피하지 않고 결혼을 하니, 일이 매우 형편없습니다. 지금부터는 금지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시열이 또 아뢰기를,
"놀고 먹는 백성 가운데 승니(僧尼)가 가장 심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전에 성상께서 성안의 절을 철거하셨으니, 이는 참으로 예전에 없던 탁월한 조처였습니다. 그러나 성밖에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있으니, 또한 마땅히 금지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의논하는 자들이 혹 소란이 일어날까 염려했기 때문에 과단성있게 금지하지 못했다."
하였다. 시열이 또 아뢰기를,
"고 상신 심지원(沈之源)이, 양자 익선(益善)이 있는데도 자기 소생 익상(益相)으로 하여금 제사를 맡게 하였으니, 크게 예제에 어긋났습니다. 애초에 대관이 개정하라고 계청했을 때 허락하지 않으시다가, 어제 적통(嫡統)을 빼앗았다고 논핵하자 따르셨습니다. 성상의 거조가 어찌 그렇게 전후로 차이가 나십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조정에서 바로잡고 인하여 일정한 제도로 삼아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주자가 말하기를 ‘종법(宗法)은 우선 명문가의 집에서부터 시행해야 본보기가 되어 비로소 아래로 사대부의 집에서도 행하게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지원이 대신으로서 왕가와 혼인 관계를 맺고 있으니, 어찌 일반 백성들의 본보기가 될 자가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받들어 시행하는 사이에 장애가 없겠는가?"
하자, 시열이 아뢰기를,
"장자가 제사를 받드는 것은 천리와 인륜에 있어서 순한 일이 어찌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준길과 호조 판서 민정중이 잇따라 거듭 청하자, 상이 다시 일정한 제도를 만들어 바로잡으라고 명했다. 시열이 또 아뢰기를,
"지난번 요사스런 무당의 일에 대하여 신이 그 이름을 잘못 알았는데, 바로 배덕(倍德)이었습니다. 이 일은 신이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는데, 나라에 기강이 있다면 진실로 이미 죽였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알지 못하여 금하지 않는 것입니까, 아니면 알고서도 금하지 않는 것입니까? 매우 우려할 만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실성한 사람이 있기에 쫓아낸 지 오래 되었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듣건대, 이미 나가서 안산(安山)에 있는데 아직도 백성들의 습속을 의혹시키고 있다 하니, 참으로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로 하여금 가두고 죄를 주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시열이 또 아뢰기를,
"하루를 조정에 있어도 진실로 생각이 있으면 모두 진달드려야 하기 때문에 진달드린 것입니다. 만약 받아들여 주신다면 신이 비록 물러나 있어도 조정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겠습니다. 신에게 돌아가 죽을 수 있게 해 주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차자의 비답에서 유시했다. 경이 진달한 것은 모두 의리에 부합하니, 내 마땅히 채용할 것이다. 어찌 물러나야 할 일이 있겠는가."
하였다. 시열이 또 아뢰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반드시 인재를 수습하는 것으로 우선을 삼습니다. 조복양(趙復陽)이 죄에 걸린 것은 혼미하여 잊어버렸던 것이지 사실 고의는 없었습니다. 지성으로 나라를 걱정하고 있으니 오랫동안 폐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박장원(朴長遠)도 과오로 죄에 걸렸는데, 그의 효성과 우애, 그리고 깨끗함과 삼감은 조정 인사들의 모범입니다. 나이준(羅以俊)은 영남의 독서한 사람인데, 공직에 관한 격식 때문에 의망하지 못하고 있으니, 변통해야 될 듯합니다. 이단상(李端相)은 시골에 물러나 있는데, 뜻을 기울여 독서한 사람이니, 역시 탁용하여 경연에서 모시게 해야 될 것입니다. 김만기(金萬基)는 지방의 고을을 오랫동안 맡고 있는데, 밖을 중시하고 안을 경시한다는 탄식이 없지 않습니다. 속히 소환해야 할 것입니다. 김익경(金益炅)은 조정의 정사에 간섭했다는 이유로 아직도 폐기되어 있습니다. 인물을 진퇴할 즈음에는 삼사(三司)가 으레 가부를 논해 왔는데, 이것 때문에 죄를 입었으니 진실로 지나칩니다. 이민적(李敏迪)은 사람들의 기대가 쏠려 있는 사람이니, 탁용해야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은 공심에서 나온 것이니 따라서 시행하겠다."
하였다.
살피건대, 신덕 왕후는 성이 강씨(康氏)이고, 태조(太祖)의 둘째 비였는데, 임신년004) 에 현비(顯妃)가 되어 방번(芳蕃)·방석(芳碩)을 낳았다. 태조가 총애하여 세자를 바꾸려는 뜻을 가지고 군신들에게 물으니 쟁집하는 자가 있었는데, 왕후가 병풍 뒤에서 소리내어 통곡하였다. 병자년005) 8월에 죽었다. 정축년 정월에 취현동(聚賢洞) 북쪽 언덕006) 에 장사지내고 정릉(貞陵)이라 호칭하였다. 공정 대왕(恭靖大王)007) 이 즉위하여 정릉의 수호군(守護軍) 백명을 줄였다. 태종 대왕 6년에는 정릉의 주위 백보 밖에는 사람들이 들어와 사는 것을 허락하였고, 9년에는 성안에 능이 있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여 사한리(沙閑里)008) 기슭으로 천장하고 단지 봄 가을로 2품관을 보내어 제사지내게 하였고, 10년에는 돌아간 날에 조회를 정지하는 전례를 파하였고, 12년에는 돌아간 날에 재계와 제사를 대리 주관하여 행하게 하였다. 세종조에는 능의 제사 및 돌아간 날의 재계와 제사를 국가적 차원으로 지내기가 마땅치 않다는 예조의 계사를 인해, 5결의 전답을 주어 그 족친으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선묘조에 이르러서 삼사(三司)가, 예를 상고하여 태묘에 배향하자고 처음으로 청하였는데 따르지 않았다. 임오년009) 에는 직제학 김우옹이 별묘(別廟)를 짓자는 의논을 내었는데 당시의 논의가 이견을 내세운다고 허물하였고, 삼사가 합하여 3년간 논하다가 비로소 정지하였다. 능침(陵寢)을 수리하고 태묘(太廟)에 배향하는 일은 마땅히 행해야 할 예전이었는데 여러 대의 조정이 답습하면서 거행하지 않았으므로 식자들이 한탄해 왔다. 이때 이르러 시열이 진달하자 여론이 기쁘게 여기면서 고무되었다.
세자부 송시열이 서연(書筵)에 나아가 참여했다. 서연의 규례는 회강(會講)이 아닌 경우 사부가 입강하는 일이 없는데, 이날 세자가 서연을 열려고 할 때 시열이 들어와 상규에 구속되지 않고 입강하고자 했다. 시강원이 즉시 세자에게 진달하여 찬선 송준길, 좌부빈객 민정중 및 궁관들이 함께 들어가 진강하였다. 시강원이, 부(傅)가 입강하여 상규와 다르니 출입할 때 세자는 계단을 내려가 영송해야 하고, 이 뒤로 부가 별일 없을 때에는 서연에 참석케 하겠다는 뜻으로 상에게 아뢰었는데, 상이 답하기를,
"부가 참석하고자 하는 것은 지극한 정에서 나온 것이니, 보도하여 성취해 주기를 내가 바라고 있다. 계사대로 하라."
하였다.
1월 5일 기해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소대하였는데, 시독관 민시중이 《심경(心經)》을 강하였다. 판부사 송시열이 아뢰기를,
"《대학》의 치국평천하장에서는 재물을 오로지 말했는데, 대체로 사람이 미혹되는 것 중에 여자와 재물이 가장 경계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하니, 좌참찬 송준길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조광조(趙光祖)는 기묘 명현(己卯名賢)입니다. 하루는 밤에 앉아서 독서하고 있는데, 이웃집 처녀가 그의 모습을 사모하여 담을 넘어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광조가 예가 아니라고 꾸짖으며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고 보냈으니, 그의 신독(愼獨) 공부를 알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광조가 껌껌한 방안에서 여자로 하여금 머리를 빗게 하여 자신이 지니고 있는 학력의 깊이를 시험해 보았습니다. 우리 나라에 비록 학문이 있었지만 광조에 이르러 크게 구비되었습니다."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 유현 중에서 바탕이 아름답기로 광조와 같은 자가 없었습니다. 광조는 정신이 밝은 달과 같았으며, 기타 거조와 행동도 모든 것이 옛 예법에 맞았습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군신간의 즈음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천고의 한이 됩니다.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의 죄는 죽여도 시원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광조의 일에 대해서 신이 갖추어 진달하겠습니다. 중묘의 반정 공신들은 계해의 훈신과는 달리 대부분 무부(武夫)로 교만하고 멋대로 구는 일이 많았습니다. 광조가 개연히 그들의 숙청을 자신의 책임으로 여기자 못된 무리들의 시기와 질투가 이미 심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궁액(宮掖)과 짜고 궁궐의 수풀 나뭇잎 위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써놓아 현혹시키는 계책으로 하였으며, 또 희빈의 아비 홍경주(洪景舟)와 서로 안팎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중묘께서 밀지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광조가 하루 아침에 누런 옷을 몸에 걸치는 왕이 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자, 인하여 군소배들이 틈을 타 밤에 신무문을 열어 놓고는 밀고하는 자가 있는 듯이 하여, 장차 화가 헤아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이 울면서 끝까지 간언하였지만 임금의 노여움은 거듭 일어나 옷을 떨치고 일어났는데, 광필이 소매를 잡아 끌며 온 힘을 다해 간쟁하여 마침내 죽음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광필이 정승에서 체직되고 남곤이 대신 임명되자, 현인들이 차례로 죽음에 나아갔던 것입니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애초에 박원종(朴元宗)이 거의하려고 하면서 신수근(愼守勤)에게 묻기를 ‘매부를 폐하고 사위를 세우면 옳겠는가.’ 하였는데, 수근은 바로 중종비 신씨의 아버지이자 연산군비의 오빠입니다. 수근이 답하기를 ‘상이 바야흐로 피똥을 누는 병환을 앓고 있으니 어찌 오래갈 수 있겠는가.’ 하였으니, 이는 곧 따르지 않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자 원종이 사람을 시켜 그를 쳐죽였습니다. 중묘가 즉위한 후 원종 등이 죄인의 딸은 한 나라에 어머니로 임할 수 없다고 군부(君父)를 윽박질러 신씨를 폐하고 계비를 들였으니 바로 장경 왕후(章敬王后)였습니다. 장경 왕후가 승하한 후 김정(金淨)·박상(朴祥) 등이 상소하여 신씨의 복위를 청하였는데, 이는 실로 정론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종의 논의는 ‘만약 신씨를 복위한다면 원자(元子)010) 를 어떤 지위에 둘 것이냐?’고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근거없는 논리였습니다. 김정과 박상이 모두 이 때문에 죄를 입었는데, 광조가 정언이 되자 김정 등의 논리를 세워 다른 의견을 누르고 시비를 밝히니, 논의가 비로소 대립되어 끝내는 사화를 빚어내었습니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이 뿐만이 아닙니다. 광조는 아는 것은 무엇이든지 말하고, 말하면 무엇이든지 끝까지 다 말하였으므로, 중종께서 수작하기가 싫어서 용상에서 때때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고 합니다. 그가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하라고 청하면서 밤새도록 간쟁하자 중묘께서 부득이하여 따랐는데, 그 부득이하여 따른 것은 매우 한심한 일입니다. 임금이 부득이하여 따르면 일은 벌써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기묘 제현들이 그날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광필의 힘이니, 그분은 사림에 큰 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정태화의 선조인데, 정씨가 지금 잇따라 세상에 명성을 떨치는 것에 대하여 사람들은 광필의 음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을사년의 화는 더욱 참혹했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마음이 아프지 않을 때가 없습니다. 중묘께서 승하한 뒤에 간흉 윤원형(尹元衡)·정순붕(鄭順朋)·이기(李芑)·임백령(林百齡) 등이 ‘사림들이 어진 임금을 가려서 세우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큰 옥사를 얽어 만들었습니다. 인묘(仁廟)께서 승하하심에 명묘(明廟)께서 차적(次嫡)의 자리에 있으니 정통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런데 간신들이 이것을 가지고 화를 얽어내어 하루에 세 대신을 죽였으니,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 가운데서도 송인수(宋麟壽)가 가장 심하며, 그밖에 곽순(郭珣)·정희등(鄭希登)도 같이 억울하게 죽은 자들입니다. 신이 일체 증직해 주시길 청하고자 했습니다만, 아직 청하지 못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인수에게 증직한 것은 어느 때에 있었는가?"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선조 때 건의했던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에 말하여,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상고해 내어 품처토록 하라."
하였다. 준길이 또 양재벽서(良才壁書)의 화를 진달하여 아뢰기를,
"흉인 정언각(鄭彦懿)이 양재역의 벽에 쓰여 있는 글을 보았는데 ‘여자 임금이 정권을 잡는다.[女主執政]’는 등의 말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죄를 입은 사람들이 한 짓이라고 지목하여 벽을 헐어 짊어지고 가서 고발했는데, 당시 사류들이 모두 참혹한 화를 입었습니다. 그 뒤에 언각은 말에서 떨어져 하루종일 짓밟히다가 죽었으니, 천도가 어김없이 보답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근래의 일로 말해 보더라도 김자점(金自點)이 강씨의 옥사를 얽어냈는데, 그의 집안이 주륙되어 죽은 게 강씨의 집안과 서로 같았으니, 이 또한 순환하는 이치로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헌납 김만중이 박형(朴泂)의 형량을 감하라는 명을 거두라는 일로 연계하자, 상이 따랐다. 만중이 또 아뢰기를,
"새로 급제한 자들이 알성(謁聖)하던 날 유생들이 민암(閔黯)을 배척하여 참여하지 못하게 했는데, 이당규(李堂揆) 등은 애초부터 민암과 서로 관련도 없으면서 막중한 전알의 예를 괜히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상소를 진달하여 이의를 제기한 일에 있어서는 잘못을 꾸미는 결과가 됨을 면치 못하였으니, 상소에 참여한 이당규 등을 모두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시열이 또 아뢰기를,
"정릉(貞陵)에 관한 일은 신이 어제 이미 진달했습니다. 송(宋)나라 때에 전씨(錢氏)의 능묘가 풀이 무성하므로 지나는 사람들이 안타까워했는데, 당시 고을 수령이 조종에 청하여 묘를 수리해 주고 사당을 세워 주었습니다. 하물며 신덕 왕후는 위호가 바뀌지도 않았는데 능묘가 황폐한 경우이니, 일의 체모상 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예조로 하여금 봉심한 뒤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고, 태묘에 배식(配食)하는 것은 어렵게 여겼다. 시열이 아뢰기를,
"상께서 만약 선조에서 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어렵게 여기신다면, 중묘조(中廟朝) 때 소릉(昭陵)을 복위한 한 가지 일이 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노산군(魯山君)이 해를 당했을 때 시신을 아무도 거두어 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 고을의 아전 엄흥도(嚴興道)란 자가 즉시 가서 곡림하고 스스로 관곽을 준비하여 거두어 묻었으니, 지금의 이른바 노묘(魯廟)입니다. 흥도의 절의는 사람들이 지금도 칭찬하고 있는데, 신이 전조(銓曹)를 맡고 있을 때 그 자손들을 녹용하고자 했으나, 그 유무를 알지 못해 실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듣건대 그의 자손이 본 고을에 있기도 하고 괴산(槐山)에 있기도 하다는데, 그 절의를 장려하는 도에 있어서 녹용하는 은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해조에 명하여 찾아 녹용하게 하였다. 시열이 또 아뢰기를,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는 매번 서북 지역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북로에는 지난번 이미 과거를 베풀었으나 서로는 아직까지 거행하지 않았으므로, 본도의 사람들이 매우 실망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겨울이 되기 전에 빨리 시행하도록 해조에 말하라."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왕세자의 입학례를 올봄에 거행한 뒤 과거(科擧) 등의 일을 차례로 거행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먼저 관례를 거행한 뒤에 입학례를 거행해야 할 듯하다. 예관으로 하여금 품처케 하라."
하였다.
1월 6일 경자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소대하였다. 시독관 민시중이 《심경》을 진강하고, 판부사 송시열과 좌참찬 송준길이 글뜻을 강론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주자(朱子)께서 ‘지금의 시세는 대승기탕(大承氣湯)을 쓰고 육군자탕(六君子湯)을 써야 한다.’고 말했는데, 대체로 송나라가 남쪽으로 천도한 이후 시들해져 떨쳐 일어나지 못한 채 하는 일이 느슨한 것을 말한 것입니다. 오늘날의 형세도 이와 같으니, 너무도 한탄스럽습니다."
하니, 좌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이 말이 극히 옳습니다. 정령을 시행하는 데 있어 매양 나태하고 느슨한 것이 걱정인데, 이는 신들이 잘 봉행하지 못한 죄이지만 또한 상께도 관계가 있습니다. 위가 느슨하면 아래가 게을러지는 것은 당연한 형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매년 한식 때에는 정릉도 역시 제사를 지낼 것으로 써서 들이라. 알지 못하겠다. 이전에 사초(莎草)를 갈아 입힌 적은 없었는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일찍이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정자각(丁字閣)이 없기 때문에 한식제는 장막을 치고 지내야 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종묘에 배향하는 일은 비록 가볍게 행할 수 없지만 정자각을 세우고 사초를 갈아입히는 등의 일은 속히 거행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옳습니다."
하자, 상이 예관에게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호조 판서 민정중이 안흥(安興)에 포구를 파는 일로 아뢰기를,
"대신이 지금 입시하고 있으니 속히 의논하여 정해야 합니다."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조운선이 해마다 난파되고 죽는 사람이 잇따르기 때문에 고 상신 김육(金堉)이 포구를 팔 수 없다면 창고라도 설치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신은 포구를 파는 일의 이해를 알지 못합니다만,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고 하는 자는 민정중이고, 반드시 성공할 수 없다고 하는 자는 이완입니다. 포구를 파기로 의논하여 결정되면 이완은 죽기살기로 간쟁하려고 할 것입니다."
하니, 정중이 아뢰기를,
"포구를 파는 일을 어렵게 여기신다면 우선 창고라도 설치해야 좋을 듯합니다."
하자, 상이 따랐다. 상이 하교하기를,
"호적에 누락된 자들에 대한 죄는 일체 《대명률(大明律)》에 의거해야 된다. 호적에 누락된 자들이 자수한 경우에 관하여 거행할 조목을 한번도 명백하게 써서 내린 적이 없으니, 지방에서 어떻게 알아 거행할 수 있겠는가. 자수할 길을 열어주어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들어오게 해야 된다. 올해 호적을 만약 잘 정리한다면 거의 정돈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비록 누락된 자들이 있다 하더라도 호적을 고칠 때 자수하게 한다면 누락되는 근심은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1월 7일 신축
달무리가 목성을 둘렀다.
상이 정원에 명하여 숙령 옹주(淑寧翁主)의 녹봉을 삼년 동안 지급할 일로 해조에 분부토록 하였다.
1월 8일 임인
판부사 송시열이 차자를 올려 지방의 노비공(奴婢貢)을 본도에 남겨두어 비용에 쓰게 하자고 청했는데, 상이 강구하여 시행하라고 답했다.
1월 9일 계묘
장선징(張善澂)을 도승지로, 이단상(李端相)을 승지로, 김만기(金萬基)를 대사간으로, 이유상(李有相)을 부응교로, 이민채(李敏采)를 설서로 삼았다.
단상은 전에 전한(典翰)을 맡은 사람으로 시골에 있었으며, 만기는 광주(廣州)의 수령으로 한창 재직하고 있었는데, 시열의 말을 따라 이 제수가 있었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소대하였다. 시독관 이규령(李奎齡)이 《심경(心經)》을 진강하고, 판부사 송시열이 시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호조 판서 민정중이 아뢰기를,
"어제 경연에서 판부사 송시열이 비용을 줄이자는 뜻으로 진달하자, 각사의 공물 가운데 두드러지게 지나친 것을 가려 내어 품처하라는 분부가 있었으므로 써 왔습니다. 산삼과 도라지 등의 가미(價米)가 8백 60여 석이니, 쓸데없는 비용이 많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선조 때 도라지 등의 가미가 수백 석이라는 뜻으로 상달하자 선왕께서 듣고는 놀라워하시고, 계획서를 써 들이라고 명하여 변통하는 터전을 삼으려 하셨는데, 미처 써 들이기 전에 문득 국휼을 만났던 것입니다. 신의 뜻으로는 한 해의 정해져 있는 원래 쌀로 수를 계산하여 안에 들이면 안에서 바꾸어 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수백 석의 쌀만 안에 들이고 그 나머지는 감하라."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수백 석은 혹 부족할 근심이 없지 않을 것이니 8백 석 가운데 반을 감하여 안에 들이고 나머지는 종족들에게 나누어 주어 친목의 의리를 두터이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상이 따랐다. 정중이 또 아뢰기를,
"태안(泰安)에 창고를 설치할 일을 이미 의논하여 정했으니, 3월부터는 공사를 시작해야 되겠습니다. 그동안 지장이 될 일에 대하여 조정에서 미리 대처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일을 시작한 뒤 반드시 여러 의논이 분분할 것입니다."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창고를 설치하는 것은 바로 김육의 뜻이었습니다. 김좌명으로 하여금 내려가서 도신과 더불어 상의하여 해나가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자, 좌명이 아뢰기를,
"조정에서 신에게 명한다면 신이 어떻게 감히 사양하겠습니까."
하고, 이어서 안면도(安眠島)에서 목재를 가져오되 수사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자고 청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였다.
당시 평안도에서 자모 산성(慈母山城)을 수축하고 있었는데, 정중이 아뢰기를,
"산성의 공사가 지금 이미 완료되었습니다. 이 일이 비록 도신의 지휘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하더라도 감독한 김세귀(金世龜)에 대해서 포상해야 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공개적으로 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 번거롭게 소문이 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정축년011) 이후로 조정이 청나라를 두려워하여 양서(兩西)의 성지(城池)를 완전히 포기했으며, 모든 일동일정에 있어서 저들에게 소문이 날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이 하교가 있었던 것이다. 시열이 아뢰기를,
"신이 세자부를 맡고 있는데, 진강하는 것을 보니, 세자 앞에서 나아가 앉아 글자를 짚어 주면서 수업을 하였습니다. 지금은 세자가 문장의 뜻에 대하여 이미 상당히 공부가 되었기 때문에 외람스럽지만 변통하여, 진강하는 관원이 각각 책을 들고 자리에서 떨어져 읽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졌습니다. 옛 사람이 스승과 제자의 자리 사이가 함장(函丈)이라고 했는데, 무릎을 맞대고 앉는 것은 온당하지 않을 듯했습니다. 신이 억견으로 고쳤으니, 매우 황공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정언 조성보(趙聖輔)가 아뢰기를,
"행 호군 조계원(趙啓遠)이 연로한 중신으로서 시골에 물러나 있으니 마땅히 법을 삼가 지켜야 하는데, 밭을 널리 점유하여 백성들의 원망을 초래하였습니다. 그가 휴직한 관원으로서 물러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전연 경계시키는 도리가 없어서는 안 되니,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선 무겁게 추고하라."
하였다. 그 뒤 누차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계원이 보령(保寧)에 살면서 몸가짐을 단속하지 않아 비방을 초래했기 때문에, 헌납 김만중(金萬重)이 발론하여 탄핵하려 하다 다른 일로 체직되었으므로, 성보가 혼자 아뢴 것이었다. 성보가 또 아뢰기를,
"이번 정시에서 무과의 난잡은 계축년012) 이후로 없었던 바입니다. 서로 내통하여 간악함을 부린 시관과 거자들을 만약 적발되는 대로 무겁게 다스리지 않는다면 폐습을 막을 수 없습니다. 시관 최원봉(崔元奉)과 차비관 이하 및 거자들을 나문하고, 출방할 때의 시관과 감시관 이하는 모두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시독관 이규령과 검토관 홍주국(洪柱國)이 아뢰기를,
"본관의 관원이 월과(月課)를 짓지 않아 파직된 사람이 셋이나 되니, 매우 온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정이 있었던 듯하니 세 사람의 파직을 취소하라. 이제부터 월과를 잇따라 세 차례 짓지 않을 경우만 추고하라."
하였다.
1월 10일 갑진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소대하였는데, 참찬관 이민적(李敏迪)이 《심경》을 진강했다. 좌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안흥에 창고를 설치하는 일에 대하여 물러가 생각해 보았는데, 시행하기 어려운 점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호조 판서 민정중과 함께 입시하였습니다."
하고, 불편하다는 뜻을 들어 논란하여 아뢰기를,
"각년의 패몰된 배에 대해서 상고해 보니 봉상진(奉上津)에서 패몰된 것이 많았고 안흥에서 패몰된 것은 적었습니다. 이는 대체로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져 일찍 배를 띄우지 않아, 경강(京江)에 이를 때에는 장맛비가 불어 배를 제어할 수 없어서 패몰되는 것입니다. 지금 만약 새로운 창고에 봉입하여 머물려 두었다가 또 옮겨 싣고 온다면, 반드시 시기가 늦어지게 되어 경강에서 패몰되는 배가 반드시 더 많아질 것입니다. 병조 판서 및 영상에게 물어 처리하소서."
하니, 판중추 송시열이 아뢰기를,
"신이 영의정 정태화에게 물었더니 그의 뜻은 어렵게 여겼습니다. 신이 진달한 것은 죽어가는 인명이 안타까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설령 백곡(百斛)의 쌀을 잃는다 하더라도 한 사람의 죽음을 구할 수 있다면 전하께서 반드시 쌀을 애석하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성상의 분부가 매번, 경비가 줄어드는 것은 아까워할 것이 없지만 인명이 빠져 죽는 것이 불쌍하다고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인정(仁政)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고한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서 빠져 죽게 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일을 따지지 않고 이 조처를 취하게 된 것이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이 일을 불가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또 들어가는 비용을 아까워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이 뒤로 패몰되는 배가 더욱 많아지고 백성의 폐해가 더욱 심해질 것이기 때문에 감히 진달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또 포구를 파는 일의 편리 여부를 정중에게 묻고는 망설이며 결정하지 못하자, 시열이 아뢰기를,
"두 가지를 결정하는 사이에 부질없이 인명이 빠져 죽는 것만 보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선 창고를 설치하여 시험해 보고 패몰되는 배가 여전하면 비로소 포구를 파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도라지와 산삼 등의 공물을 이미 줄였는데, 각사(各司)의 공물들을 차례로 혁파한다고 합니다. 공물가(貢物價)는 비록 매우 지나치지만 도성 백성들로 하여금 여기에 힘입어 보존되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만약 모두 혁파한다면 폐해는 제거하지도 못한 채 먼저 도성 백성들에게 원망만을 취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통은 대대적인 조처인데 신은 애초부터 알지 못하였고 빈청에 이르러 비로소 알았습니다. 영상도 아마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는 허적이, 시열이 자신에게 묻지 않은 것에 화가 나서 이 말을 한 것이다. 시열이 아뢰기를,
"도라지와 산삼을 감하는 데 무슨 불가한 점이 있겠습니까. 각사의 공물을 모두 혁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너무 지나친 것만 혁파하는 것입니다. 남겨두는 것도 많으니, 그 무리들이 또한 힘입어 보존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공물 주인들의 이익은 국가의 해입니다. 이런 무리들의 원망을 무슨 돌아볼 것이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이런 일들을 모두 혁파하지 않는다면 끝내 나라꼴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도라지 등을 감한 것은 신도 좋은 일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지금 들으니 각사의 공물을 모두 혁파할 뜻이 있는데, 도성 사람들의 원성이 길에 가득찰 것입니다. 이해의 즈음에 있어서 확실하게 결정하여 시행할 수 없는데 먼저 도성 백성들에게 원망을 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호조 판서는 대신에게 물어 의논하지 않았는가?"
하니, 정중이 아뢰기를,
"우선 써서 들이라는 하교가 있었기 때문에 단자를 써서 올린 것이지, 애초부터 변통하려는 뜻에서 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이는 정중이 독단적으로 처리한 것이 아니고, 단지 대신에게 뜻을 미처 묻지 못한 것일 뿐입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써서 들이라는 하교가 있었기 때문에 인하여 감한 것입니다. 정중이 만약 독단적으로 처리한 일이 있었다면 신이 또한 죄주기를 청하였을 것입니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조정의 논의가 이와 같이 여러 갈래이니, 무슨 일을 이루겠습니까. 공물 주인은 편안히 앉아서 나라의 곡식을 훔쳐 먹으니, 모두 놀고 먹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나라를 다스리고자 한다면 어떻게 놀고 먹는 사람으로 하여금 원망하지 않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정중에게 이르기를,
"어제의 단자는 매우 지리하고 번거로우니, 간략하게 써서 들여 관람하기 편하게 하라."
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이번 녹봉을 더해준 일에 대하여 신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여깁니다. 지금 비록 2석의 녹을 더 지급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관리들의 염치를 면려할 수 있겠습니까. 일년에 지급해야 할 숫자가 합계하면 1만 석이라고 하니, 나라의 비용이 많아질 것입니다."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녹봉은 생업을 대신할 수 없으니, 보태어 지급하게 한 조처는 진실로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경비가 부족할까 염려된다니 이 말도 혹 일리가 있습니다."
하였다. 정중이 아뢰기를,
"녹을 보태어 주도록 한 것은 바로 신이 건의한 것입니다. 조정이 그르게 여긴다면 어떻게 감히 스스로 옳다고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백관들의 녹이 매우 적은 것을 내 항상 안타깝게 여겨 오다가 호조 판서의 말을 듣고는 그 비용을 계산할 겨를도 없이 따랐던 것이다. 이번은 이미 보태어 지급했으니 우선 한 해 동안 살펴보고 처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병조 판서 홍중보가 아뢰기를,
"구문치(具文治)를 평안 병사에서 이미 체직시켰으니, 주었던 가자(加資)도 마땅히 환수해야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는데, 시열이 아뢰기를,
"문치는 본래 유술(儒術)을 공부하던 선비였는데 선조(先朝)께서 무술을 익히게 하였으니, 대개 병권을 위임하고자 해서였던 것입니다. 비록 병사에서 체직되었다 하더라도 그의 자급을 굳이 개정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뜻이 진실로 좋다. 개정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집의 김징(金澄)이 아뢰기를,
"최근에 화순(和順) 사람 서득생(徐得生) 등이 본부에 정장(呈狀)하기를 ‘대대로 양민의 역[良役]을 진 사람으로 족속 중에는 새로 선발된 정병(正兵) 등의 역에 속한 자가 매우 많다. 그런데 감사 민점(閔點)이 자기 일가붙이인 이광윤(李光胤)·홍신(洪愼)의 부탁만을 듣고 서충립(徐忠立) 등을 감영에다 잡아들여 곤장을 쳐 죽이고, 그 족속들을 아울러서 이광윤 등에게 주었으며, 군안(軍案)에 이름이 속한 15명을 심지어 사고로 계문하였다.’ 하기에, 본 화순현에 공문을 보내 자세히 조사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서득생 등은 그 5대조 학년(鶴年) 이하로 3대 동안 연이어 양역을 치렀으니, 바로 법전에서 이른바 ‘3대를 연이어 양역을 치렀으면 천역으로 되돌리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는 경우입니다. 그리고 일이 이미 지난 임진년 전에 있었으니, 또한 법전에 이른바 ‘조상의 노비라 하여 송사를 할지라도 60년 전의 일이면 당사자가 현존하지 않을 경우에는 송사를 심리하지 않는다.’는 기한을 경과하였습니다. 충립 등이 곤장 아래에서 죽었음이 또한 명백합니다.
민점은 방백의 신분으로 방면을 맡긴 뜻을 생각지 않은 채 ‘3대를 계속 양역을 치르면 천역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치 않는다.’는 규정을 무시하고, 60년의 기한을 따지지 않고서 양민을 위협하여 억지로 사천(私賤)을 만들었으니 이 일만 해도 극히 근거가 없는 처사인데, 법을 왜곡하여 마음대로 죽였으니 더욱 해괴합니다. 잡아다 심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법을 무릅쓰고 청탁한 광윤 등의 죄는 본도 감사로 하여금 율에 따라 죄를 주고, 학년의 자손은 일일이 양민의 호적으로 되돌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진실로 매우 해괴하다. 다만 방백의 사건을 수령으로 하여금 조사하게 한 것은 일의 체모에 합당하지 않다. 본도 감사로 하여금 상세히 조사하여 보고하게 한 후 처리하라."
하였다. 그 후 민점이 법관에게 나아가 조사를 받았는데, 금부가 ‘보고 내용이 잘못되었다.[奏事錯誤]’는 율을 적용하자, 상은 속(贖)을 받아들이라고 명하였다. 또 아뢰기를,
"구문치(具文治)의 가자(加資)를 대신의 진달에 의해 그대로 주었습니다만, 구문치가 이미 서쪽 곤수(閫帥)의 직임에서 체직되었는데 그대로 그 자급을 주었으니 바로 이른바 ‘가죽이 없는데 털이 어디에 붙겠는가.’라는 것과 같은 셈입니다. 환수를 명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애당초 개정을 따랐던 것은 이 때문이었는데, 대신의 뜻도 좋았기 때문에 그 자급을 그대로 둔 것이다."
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상께서 종묘에 전알(展謁)할 때 세자가 행할 예에 대하여 대신에게 의논했더니, 그 가운데 판중추 송시열은 《가례(家禮)》의 자식을 낳았을 때 사당에 알현하는 의식으로 헌의하였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하니, 상이 헌의대로 시행하라고 명했다. 예조가 또 아뢰기를,
"세자가 종묘에 전알하는 예를 만약 송시열의 의견대로 거행한다면, 상께서 종묘에 들어가 예를 행한 뒤 왕세자가 비로소 동문 밖 장막에서 묘정에 이르러 전알하고, 상께서는 그동안 판위(板位)에 서서 왕세자의 전알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어서 배례를 행하고 나와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대로 거행하라."
하였다.
공사천(公私賤)의 양처 소생에 대하여 모역(母役)을 따를 것으로 제도를 세워 정식을 삼으라고 명했다.
이에 앞서 판부사 송시열이 상에게 아뢰기를,
"이경억(李慶億)이 충청 감사로 있을 때 상소하여 공사천의 양처 소생은 남녀를 논할 것 없이 일체 모역(母役)을 따르게 할 것을 청했는데, 이는 바로 선정신 이이(李珥)의 논이었습니다. 그 당시 묘당이 방계하여 시행하지 못했습니다만, 지금 양민이 나날이 줄어들고 있는 것은 진실로 이 법이 행해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속히 제도를 확정하여 변통하소서."
하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했다. 영의정 정태화는 시행하기 어렵다고 여겼으나 병으로 의논에 참여하지 못했고, 판부사 정치화도 역시 다른 의견을 제시하였는데, 좌의정 허적이 법을 정해 시행해야 한다고 하자, 상이 따르면서 이날부터 시작하게 하였다.
1월 11일 을사
이해(李澥)를 공조 판서로, 윤집(尹鏶)을 대사헌으로, 윤변(尹抃)을 헌납으로, 경최(慶㝡)를 정언으로, 권격(權格)을 보덕으로, 김만중(金萬重)을 사서로, 서필원(徐必遠)을 총융사로, 이숙(李䎘)을 등급을 뛰어넘어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정지화(鄭知和)를 판윤으로, 이홍연(李弘淵)을 승지로, 이여발(李汝發)을 평안 병사로 삼았다. 이때 조정에서 서로(西路)를 근심하여 구문치(具文治)를 체직시키고 여발을 택하여 보냈다.
사간 박세견(朴世堅) 등이, 통제사 이도빈(李道彬)이 일찍이 평안 병사를 맡았을 때 직무를 일삼지 않았다고 논핵하며 파직을 청했는데 누차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1월 12일 병오
남구만(南九萬)을 승지로, 강호(姜鎬)를 호조 참의로, 유철(兪撤)을 호조 참판으로, 이규진(李奎鎭)을 정언으로 삼았다.
홍문관이 아뢰기를,
"성균관에 종향된 열위(列位)의 명호(名號)와 위차(位次)에 있어서 의심스러운 점을 널리 상고하라는 명이 내렸습니다. 믿을 만한 전기로는 《논어(論語)》·《맹자(孟子)》·《 사기(史記)》·《가어(家語)》·《문헌통고(文獻通考)》·《공자통기(孔子通紀)》·《두씨통전(杜氏通典)》·《운회(韻會)》·《궐리지(厥里誌)》 등의 책보다 나은 것이 없으며, 시왕(時王)의 일대 대전(大典)으로는 《대명회전(大明會典)》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균관이 이미 이것들의 고증을 상세히 하였으니, 신들이 다른 책들을 어떻게 다시 상고할 수 있겠습니까. 시왕의 제도는 준수해야 하는 것으로 가볍게 고쳐서는 안 됩니다. 전기에 잡다하게 나오는 것을 그 많고 적음에 따라 또 위아래 글뜻을 참고하여 각각 조목별로 기록하여 별도의 문서로 올립니다.
이 일은 체모가 중대하니, 신들의 고루한 견해로는 또한 감히 단정적으로 말하거나 망령되이 논할 수 없습니다. 예관으로 하여금 다시 품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예관이 지방에 있는 유현(儒賢)들에게 물은 뒤 품처하겠다는 뜻으로 진달하자, 상이 윤허하였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심경》을 강하였는데, 시독관 민시중이 진강했다. 강이 끝나자 개성 유수(開城留守) 홍처량(洪處亮)과 하직하는 수령들을 인견하였다.
1월 13일 정미
판중추 송시열이 분황(焚黃)하겠다고 휴가를 청했는데, 상이 소대하고 면유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1월 14일 무신
이에 앞서 예조 참의 이준구(李俊耉)와 정랑 조정우(曺挺宇)를 보내어 정릉을 봉심하게 하고, 재실(齋室)을 중건하고 능을 수축하는 등의 일을 대신에게 의논하였는데, 영부사 이경석과 판부사 정치화는 아뢰기를 ‘이 일은 중대한 일입니다. 만약 옛 능처럼 회복하고 재실을 중건한다면 수직(守直)과 수호(守護)의 일도 빠뜨릴 수 없을 듯합니다.’ 하고, 좌의정 허적은 아뢰기를 ‘정릉을 무너져내린 대로 내버려둔 채 수호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참으로 나라의 막대한 흠전(欠典)입니다. 재실을 중건하고 능관을 차출하고 수호군을 충정하는 일들을 한결같이 다른 능들과 마찬가지로 하는 것은, 성상의 조상을 추모하는 정성에 있어서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의논대로 하라고 명했다.
1월 15일 기유
상이 세자를 이끌고 종묘 및 영녕전(永寧殿)에서 전알하는 예를 행하였다. 상은 익선관과 곤룡포 차림으로 가마를 타고서 종묘 북문을 경유하여 동문 밖의 임시 처소로 들어갔고, 세자는 궁료들을 이끌고 가마를 타고서 수행하였다. 승지·사관·옥당·시위 제신들은 걸어서 따라갔으며, 문무 백관은 먼저 와서 기다렸다. 상이 막차(幕次)에 들어가니 도승지 장선징이 아뢰기를,
"왕세자가 막차에서 영녕전으로 나아가기는 꽤 먼길이니, 결코 걸어가기는 어렵습니다. 가마를 타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종묘 안에서 가마를 타는 것도 임시 조처에서 나온 것인데, 종묘 앞에서 가마를 탄다는 것은 더욱 온당치 못하다."
하였다. 세 차례 아뢰자, 상이 예방 승지로 하여금 대신에게 물어 보게 하였다. 영부사 이경석, 좌상 허적, 판부사 정치화의 의견은 정원과 같았는데, 판부사 송시열은,
"세자가 종묘 문앞으로 걸어 나아가다 힘이 혹 부치면 가마를 타도록 품의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아갈 때는 걸어 가고, 돌아올 때에 만약 기력이 부치면 가마를 타도 좋다."
하였다. 상은 면복(冕服)을 갖추어 입고 규(圭)를 잡고서, 걸어서 동문을 거쳐 태묘에 들어가 동쪽 계단 아래에 서쪽을 향해 서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 판위(板位)에 섰다. 세자는 면복을 갖추어 입고 규를 잡고서, 동쪽 협문으로 들어와 종묘 뜨락의 남쪽에 서서 북향 사배를 하였다. 그리고 나서 상이 세자와 다시 사배를 하고 나갔다. 상은 가마를 타고, 세자는 걸어서 영녕전에 나아가 배알의 예를 행하였다. 막차로 돌아올 때 세자가 가마를 탔다. 오시에 환궁하였다.
집의 김징(金澄), 지평 조원기(趙遠期)가, 민점(閔點)을 체포하라고 청할 때 전주 부윤 안진(安鎭)을 아울러 논하지 않아 물의에 비난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모두 체직되었다.
좌참찬 송준길이 상차하여 병의 상황을 아뢰면서 겸직을 해임해 주기를 청하고, 이어서 세자의 관례 날짜를 정월에 길일을 가려 올리도록 청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 명하고, 관례는 차자의 말대로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1월 16일 경술
민정중(閔鼎重)을 동지성균(同知成均)으로, 남구만(南九萬)을 이조 참의로, 남이성(南二星)을 응교로, 오상(吳尙)을 장령으로 삼았다.
예조 판서 김좌명으로 하여금 태안(泰安)의 창고를 설치할 곳을 가서 살피게 하였다. 좌명이 떠나려 할 때 정원이 아뢰기를,
"세자의 관례가 이달 안에 시행하기로 되어 있으니, 예관의 장이 멀리 나가서는 안 됩니다. 기다렸다가 관례가 지난 뒤 가게 하소서."
하였다. 좌명이 청대하여 체직되어 가겠다고 청했는데, 상이 이르기를,
"날씨가 이와 같이 차가우니 10여 일 안으로는 관례를 행하기 어려울 듯하다. 경은 직책을 띤 채 갔다 와도 된다."
하여, 좌명이 명을 받들고 출발하였다.
예조가 왕세자 관례의 길일을 택하여 이번 달 27일에 예를 행하도록 청하니, 상이 일렀다.
"지금 봄추위가 아직 풀리지 않았는데 큰 병을 치른 뒤 노천에서 관을 벗는다는 것은 참으로 온당하지 않다. 다시 생각해 보건대 따뜻한 2월에 정한 날짜대로 시행하는 것이 낫겠다."
원양 감사(原襄監司) 정익(鄭榏)이 올린 장계로 인하여, 본도의 동래(東萊)에 상례로 납부하는 응연(鷹連)을 파하고 그 가격을 호조에 직송하게 하였고, 또 인제(麟蹄)·양구(楊口) 두 읍의 도감 둔전(都監屯田)을 파하였고, 제반 신역 중 징수할 대상이 없는 것을 조사하여 탕감하였다. 영동(嶺東)·울진(蔚珍)·평해(平海)·강릉(江陵)·양양(襄陽) 등 7개 고을에는 추수할 때까지 서북민 쇄환을 정지하라고 하였는데, 재해를 특히 심하게 입었기 때문이었다.
1월 17일 신해
밤에 달이 태미원(太微垣) 우액문(右掖門) 안으로 들어갔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소대하였는데, 참찬관 이민적이 《심경》을 강하고 판중추 송시열이 글뜻을 해석하였다. 강이 끝나자 민적이 나아가 아뢰기를,
"임금의 학문은 유사의 학문과는 다릅니다. 지금 비록 《심경》을 진강하고 있지만, 흥망치란이 역사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으니, 역사서는 임금이 가장 절실하게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서의 학습에 있어 《강목(綱目)》은 바로 주자가 만년에 《춘추》를 본받아 지은 것이니, 더욱 마음을 써야 할 것입니다."
하고, 시열이 아뢰기를,
"《심경》이 비록 매우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역사서에 수록되어 있는 것들은 모두 역대 치란의 자취이니, 겸하여 익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옥당의 관원으로 하여금 두 종류의 책을 가지고 입시하게 하여, 《심경》의 수업량은 줄이고 《강목》을 겸하여 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병조 판서 홍중보가 영흥(永興) 출신 송계남(宋繼男)의 계본을 가지고 상께 아뢰기를,
"계남은 일찍이 정묘년에 사신 군관으로 청나라에 들어가 의를 지키며 굽히지 않았는데 그 당시 은전을 받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흠전입니다. 그의 아들 중현(仲賢)이 현재 병영에 있는데 장관으로 10여 년이나 근무하여 또한 노고가 있으니, 격려하는 도가 있어야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계남에 대해서는 해조에 말하여 증직하고, 중현도 재주에 따라 수용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중보가 또 아뢰기를,
"영흥(永興) 사람 유득청(劉得淸)은 일찍이 임진년에 싸움에 참가하여 왜인에게 사로잡혔는데 굽히지 않고 죽었으며, 그의 아들 종일(宗一)도 병자년에 힘껏 싸우다 죽었습니다. 부자가 모두 나랏일에 죽었으니 충의가 가상합니다. 기려 증직하는 은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모두 증직하라. 그 자손들도 송계남의 예에 의거하여 재주에 따라 수용하라."
하였다. 민적이 아뢰기를,
"나라에서 서북 양로를 똑같이 보는데, 북로에는 인재를 수용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관서에도 무력이 쓸 만한 사람이 많습니다."
하고, 시열이 아뢰기를,
"서로에도 북도의 예에 의거하여 시행하면 좋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신은 노병이 이미 심하여 나라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매번 고향으로 돌아가 책이나 읽으면서 남은 해를 보내고자 하였는데, 성상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전후로 내린 온유한 유시는 신이 감히 감당할 바가 아닙니다. 어제 분황(焚黃)할 일로 진달드렸는데, 이는 신의 절박한 사정입니다. 또 생각건대, 신의 신병이 이와 같으니 어느 날 갑자기 죽어 조상의 영령에게 미처 고하지도 못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세자의 관례가 멀지 않았으니, 경이 지방에 있다 하더라도 오히려 불러올 터인데, 하물며 경이 여기에 있는데 어떻게 갑자기 돌아가도록 허락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송시열이 또 아뢰기를,
"어영(御營)·정초(精抄)의 두 군대는 실로 좋은 제도이니, 훈련 도감군의 제도 역시 이에 의거해 변통해야 합니다. 우리 나라는 본디 작은 나라인데 월급으로 7천의 병사를 양성하고 있으니 나라 비용이 고갈됨은 실로 이 때문입니다. 이미 어영·정초의 군대를 추가로 설치하였으니, 훈련 도감의 군병은 빠지는 대로 보충하지 않는다면 자연 줄어들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별군직(別軍職) 역시 빠지는 대로 보충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일곱 번째 정사(呈辭)하였는데, 상이 승지를 보내어 도탑게 유시하였다.
1월 18일 임자
사간 박세견(朴世堅), 정언 경최(慶㝡)는 ‘대사헌 윤집(尹鏶)이, 이당규(李堂揆)를 죄주라 청하고 관학의 유생들은 죄주지 아니한 간원의 잘못을 상소하여 배척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고, 정언 이규진(李奎鎭)은 당규에 대한 논핵에 이견이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으며, 윤집은 세견의 인피하는 말 가운데 기롱하는 말이 있었다는 이유로 역시 인피하였다. 옥당이 처치하여, 세견과 경최는 출사시키고, 규진과 윤집은 체직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사간 박세견, 정언 경최가 홍양 영장(洪陽營將) 구일(具鎰)을 갑자기 승진시킨 것을 개정하라고 청했다. 누차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구일은 정사 공신(靖社功臣) 능풍군(綾豊君) 구인기(具仁墍)의 아들이었다. 과거에 급제할 때 사람들의 말이 많았으며, 사람됨이 어리석었으므로 특별히 임용할 만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훈구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과거에 급제한 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갑자기 이 직임에 제배되었으므로 여론이 온당하게 여기지 않았다.
1월 20일 갑인
정지화(鄭知和)를 대사헌으로, 송규렴(宋奎濂)을 지평으로, 정화제(鄭華齊)를 정언으로, 박경지(朴敬祉)를 좌윤으로, 윤집(尹鏶)을 공조 참판으로, 박증휘(朴增輝)를 집의로, 강호(姜鎬)를 승지로, 윤심(尹深)을 교리로, 조위봉(趙威鳳)을 사서로, 강백년(姜栢年)을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이조가 아뢰기를,
"새로 제수한 예조 정랑 김왕(金迋)은 일찍이 충청 도사였을 때 과거장에서 사사로움을 부린 일이 낭자하게 드러났으므로 마침내는 형벌을 받아 정배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제 의망할 때 전연 기록을 살피지 못한 채 수망(首望)으로 의망하여 비점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남궁(南宮) 낭서(郞署)의 직임에 그대로 둘 수 없으니 개정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소대하였는데, 시독관 이민서(李敏敍)가 《심경》을 진강하고, 판중추 송시열이 글뜻을 해석하였다. 강이 끝나자, 송시열이 아뢰기를,
"김왕은 인조조 때 벼슬 없는 선비로서 소를 진달하였으니, 비록 그의 말은 쓰이지 않았지만 그 절의는 가상합니다. 그런데 예조 낭관으로서 체직을 당한 것은 충청 도사로 있을 때의 일 때문입니다. 죄를 줌은 진실로 당연하지만, 절의를 수립한 것이 귀중합니다. 이조의 계사는 신으로서는 불가하다 생각합니다."
하니, 이조 판서 이경휘(李慶徽)가 아뢰기를,
"전일에 차출해 제수한 사람도 신이고, 금일에 체직을 청한 사람도 신입니다. 김왕이 절의를 수립한 것은 진실로 귀중합니다만, 그가 범한 일을 들으니 매우 해괴했습니다. 법을 무시하고 일을 잘못한 죄가 있는데 어떻게 예조에 앉혀놓을 수 있겠습니까."
하자, 시열이 아뢰기를,
"신이 이조를 무식하다 하면 지나치겠습니다만, 매우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경휘가 대신에게 배척당했다고 하여 사직하자, 시열이 아뢰기를,
"송(宋)나라 때 한기(韓琦)·범중엄(范仲淹)·부필(富弼)이 임금 앞에서 다투며 의견이 각각 달랐습니다만, 물러난 뒤에는 양쪽 다 화평을 잃지 않았습니다. 관리들끼리 서로 규계하는 것은 본디 아름다운 일인데, 신의 말 때문에 사직까지 하니, 이와 같이 한다면 서로 규계하는 일이 없어질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의 말에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니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도승지 장선징이, 경휘가 탑전에서 사직하여 사체를 손상시켰다 하여 추고할 것을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김왕은 영남 사람이다. 인조조에서 청나라에 군사를 빌려줄 때, 성균관 유생이 상소하였는데 김왕이 상소의 맨앞 서명자였다. 그러나 사실은 주장한 일이 없었으며 사람됨이 용렬하고 비루하여 취할 만한 것이 없고 일을 잘못한 죄가 있었다. 그러므로 경휘가 그를 예조에 차임하였다가 곧바로 아뢰어 체직시킨 것이다.
지평 최후상(崔後尙)이 아뢰기를,
"경조(京兆) 자리의 명망은 육조에 버금가므로 아무 사람이나 함부로 무릅쓰고 차지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무변(武弁)으로서 이 자리에 제배를 받은 자는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박경지(朴敬祉)는 용렬한 무부로서 좌윤의 자리에 임명을 받았으므로 여론이 놀랍게 여기고 있습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으며 이르기를,
"사람을 임용하는 도는 재주에 따라 수용하는 것이다. 어찌 굳이 문무에 구속되겠는가."
하였다.
예조 참판 정만화(鄭萬和)가 죽었다. 만화는 태화의 아우로, 사람됨이 자잘하고 각박했으므로 본래 취할 만한 점이 없었다. 부형의 음덕으로 내외직을 두루 거치다 갑자기 재경(宰卿)의 반열에까지 이르렀다.
1월 21일 을묘
조참(朝參)를 행하였다. 상이 익선관·곤룡포 차림으로 가마를 타고 인화문(仁和門)을 지나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갔다. 승지와 사관이 동서로 나누어 들어가서 제자리로 간 다음 백관이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판부사 송시열이 반열에서 나와 아뢰기를,
"옛말에 ‘선비는 백성의 말을 전한다.’고 하였습니다. 유생(儒生)은 하찮은 백성이지만 소회가 있으면 아뢰는 법인데, 더구나 이 많은 관료 가운데에는 소회를 진달하고자 하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나와서 아뢰게 하소서."
하니, 상이 옳게 여겼다. 시열이 아뢰기를,
"호위하는 군사라 하더라도 어찌 진달드리고 싶은 생각이 없겠습니까."
하니, 좌의정 허적이 나아가 아뢰기를,
"백관들에게 소회를 진달하라고 명하신 것은 매우 성대한 뜻입니다. 다만 예전부터 조참(朝參) 때에는 단지 참배만 하고 물러났습니다. 지금 백료들이 갑자기 명을 받았으니, 반드시 미처 대답할 일을 생각하지 못할 것입니다. 후일 조참할 때 소회를 진달하게 하소서."
하자, 상이 따랐다. 시열이 아뢰기를,
"임금이 종족을 후대하는 것은 친친(親親)의 의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접견은 때맞추어 하고 하사해 주는 것에는 제한이 없었던 것이 옛날의 도였습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종실을 접견하는 예가 전연 없기 때문에 시열이 이와 같이 진달한 것입니다. 아무 때나 사사로이 접견하는 것은 진실로 안 되지만 예로 접견하는 것은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선조(先朝) 때에는 친히 임하여 강서(講書)하는 규례가 있었는데, 종실들에게 이로써 가자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도 선조의 고사를 알고 있다. 마땅히 이 예에 의거하여 하겠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대전(大典)》을 수찬하는 일에 관하여 일찍이 진달드렸는데 오래 되었지만 아직 찬수하지 않고 있습니다. 조회를 보고 계신 지금 이때, 이조 판서 이하로 하여금 각각 육전(六典) 가운데 시행해야 할 일을 진달하게 하시어, 즉시 거행해야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대전》과 전후 속록(續錄) 및 수교(受敎)는 서로 방애되는 것이 많기 때문에 바로잡으라는 분부가 일찍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이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아직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법제를 익히 아는 사람을 뽑아 회의하여 바로잡게 하소서."
하자, 상이 옳다고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신래(新來)을 침학하는 것은 잘못된 습속인데 면신(免新)하는 즈음에는 더욱 난잡한 폐단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은화(銀貨)를 걷는 자까지 있어 가난한 사람은 벼슬에 나아가지 못하는 일도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일체 통렬히 금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옳다고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나라가 숭상하고 장려해야 할 것은 오직 도학과 절의입니다. 송나라가 망하려 할 때 풍파가 일고 있는 가운데에도 바다의 배에서 오히려 학문을 익혔던 것은 도덕을 장려한 효험이었으며, 한나라가 망하려 할 때 조조(曹操)가 정권을 수십 년이나 잡았으면서도 찬탈할 수 없었던 것은 절의를 숭상한 효험이었습니다. 홍익한(洪翼漢)·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 등 세 사람의 절의는 숭상할 만한데 유독 포증(褒贈)을 받지 못했으니, 진실로 흠전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몇 년 전에 모두 증직을 했고, 정표는 번거롭겠기에 하지 못했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임금의 도는 반드시 먼저 집안 사람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근래 궁가들이 전토를 점유하는 것이 매우 민폐가 되고 있습니다. 양서(兩西)는 변방 지역인데도 궁가의 전토가 없는 곳이 없으니, 어떻게 전하의 집안 사람으로 하여금 백성과 전토를 다투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양서는 엄하게 신칙해서 금지해야 되겠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신의 뜻은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예전에 점유한 곳도 모두 혁파하도록 명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시열이 아뢰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명분을 바로잡는 데 있습니다. 익평위(益平尉) 홍득기(洪得箕)가 살고 있는 집은 바로 선왕께서 즉위하시기 전에 거처하던 곳이니, 결코 신하가 감히 들어가 살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동평위(東平尉)와 인평위(寅平尉)의 집은 대궐의 옛 터이니, 국가에서 비록 집을 지어 주었다 하더라도 부마들이 어떻게 감히 태연히 살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익평위가 살고 있는 집은 애초 성종 대왕께서 즉위하기 전에 살던 곳인데 공주에게 하사한 것이며, 동평위와 인평위의 두 집도 또한 선조(先朝)께서 내려준 것이니, 어찌 다시 의논할 수 있겠는가."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시열의 말이 옳습니다. 명분은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홍중보의 말을 들으니, 자식으로 하여금 【중보는 바로 익평위 홍득기(洪得箕)의 아비이다.】 다른 집에 나가 살게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의 말이 비록 이와 같다고 하더라도 내 마음이 매우 편하지 못하다."
하자, 시열이 아뢰기를,
"나라에서 다른 집을 다시 지어 준다면 사리가 매우 순조로울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창고를 설치하는 일에 관하여 충청 감사가 크게 불편하다고 여기는 것이 다섯 가지였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그의 말이 소견이 없지 않습니다만, 조정의 체모에 있어 어찌 중신을 막 파견하여 형세를 살펴보게 해놓고 또 중도에서 멈출 수 있겠습니까. 우선은 예조 판서 김좌명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다시 결정하겠다는 뜻으로 분부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사간 박세견(朴世堅)이 연계하여, 구일(具鎰)을 영장으로 임명한 명을 환수하라고 청했는데, 상이 이르기를,
"사람을 쓰는 도는 단지 재주가 어떠하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어찌 일정한 규례가 있는 것이겠는가."
하고, 따르지 않았다. 허적이 구일을 승진시켜 발탁한 것은 시열의 뜻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하자, 시열이 아뢰기를,
"구일의 재주가 어떠한지는 몰랐습니다만, 나라를 위하는 정성을 자못 지니고 있고 또 훈척의 집안이었기 때문에, 신의 뜻으로는 조정이 후대해 주었으면 싶었습니다."
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김익훈(金益勳)이 비록 젊어서 몸을 단속하지 못한 잘못이 있기는 하지만, 대간의 계사는 실상을 잃은 것입니다. 재주가 있는 사람이니 만약 거두어 서용한다면 어찌 임용할 곳이 없겠습니까."
하니, 상이 거두어 서용하라고 명했다.
어떤 사람이 허적에게 묻기를 ‘익훈은 누차 중한 논박을 받은 음관(蔭官)인데, 공은 무엇 때문에 탑전에서 서용을 청해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가?’ 하니, 허적이 말하기를 ‘내 어찌 재주가 있음을 알았겠는가. 우암이 【시열의 호이다.】 권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였는데, 듣는 사람들이 웃었다.
윤집(尹鏶)과 이준구(李俊耉)를 정릉 중건청(貞陵重建廳) 당상으로 삼았다.
강릉 등 세 고을에 도감(都監)의 염(鹽)·선(船)·무(巫) 세 가지 세금과 둔전에서 생산된 각종 곡물로써 진휼의 자금을 보충하게 하고 영동(嶺東)의 전세(田稅)를 정지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는 본도의 장계로 인한 것이었다.
경상 좌도가 흉년이 가장 심하여, 진휼하고 남은 쌀 1천 4백 40여 석과 피곡(皮穀) 2천 8백 20여 석과 첩가미(帖價米) 2천 5백 80여 석을 나누어 주어 진휼할 밑천에 보태게 하였다.
평안 감사 이태연(李泰淵)이, 작년 예에 의거하여 모미(耗米) 4천 3백여 석을 얻어 진휼하는 일에 쓰기를 원한다고 청하였다. 사안을 비국에 내렸는데 진휼하는 일이 너무 이르다는 이유로 3백 석만 지급하여 떠돌며 걸식하는 자들을 진휼하게 하였다.
1월 22일 병진
형조 판서 서필원(徐必遠)이 상소하여 고 상신 한흥일(韓興一)의 제사 받드는 것을 그가 낳은 아들이 주관하게 해주도록 청하였다. 애초에 흥일이 아들이 없어서 후사를 들여 손자를 보았었다. 그런데 나중에 맞은 아내가 아들을 낳자 자기 아들로 제사를 주관하게 하고 싶어 일찍이 필원에게 부탁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조정에서 후사로 삼은 아들로써 제사를 주관하게끔 규식을 개정하자, 필원이 소를 진달하여 해조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도록 청하니, 상이 그 말대로 하였다. 사간 박세견, 정언 경최가 아뢰기를,
"후사를 세운 자는 비록 자기가 난 자식이 있더라도 반드시 후사를 삼은 자로 하여금 제사를 받들게 하도록 바로잡은 하교가 있은 이상, 후사가 비록 죽었더라도 뒤를 이를 손자가 있다면 그가 전중(傳重)해야 하는 법임은 다시 의논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의리가 매우 분명하니 한 사람의 사사로운 뜻을 받아들여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필원은 고 상신 한흥일이 생전에 부탁한 말을 감히 상소하여 상께 아뢰고 심지어 예관이 다시 의론하기를 청하였으니, 일의 체모에 있어 매우 외람됩니다. 필원을 무겁게 추고하고, 해조로 하여금 시행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자, 상이 그 추고하라는 말을 따랐고, 해조 또한 방계(防啓)하였다.
1월 23일 정사
상이 안질 때문에 침을 맞았다. 끝난 뒤 대신과 비국의 제신들을 양심합에서 인견하였다. 상이 대장 이완(李浣)에게 묻기를,
"훈국(訓局)의 군병을 내가 변통하려 하는데, 경의 뜻은 어떠한가? 어영군의 제도는 경이 설행한 것이다. 지금 다시 어영군의 규모와 같은 하나의 국(局)을 설치한다면, 한정(閑丁)을 쉽게 얻을 수 있고 또 월급을 주는 폐단도 없을 것이다."
하니, 이완이 대답하기를,
"한정을 모집해 얻기는 지극히 어렵습니다. 조정에서 단지 이미 만들어진 어영군의 제도만 보고는 일이 수월하다고 여기어 군사 모집의 어려움은 생각지 않으니, 신으로서는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훈국의 군대는 이미 훈련된 군사이니 파하는 것이 아까울 뿐만 아니라, 이 군대가 지방에서 승호(陞戶)013) 되어 올라올 때 집안의 재산이나 전토를 모두 팔았으니 지금 만약 파해서 돌려 보낸다면 장차 어떻게 살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여러 차례 물었으나 이완이 끝내 곤란하게 여겼다. 병조 판서 홍중보(洪重普)가 아뢰기를,
"정릉 수호군은 조천(祧遷)한 능의 예대로 30명을 배정해야 하는데, 전에 수호군을 새로 배정할 때면 으레 기병과 보병에서 차출하여 배정해 주었습니다.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반은 보병으로 배정하고, 반은 본릉에서 점차 충원하도록 하라."
하였다.
경상도 병영에 합동 훈련과 영장(營將)들이 순시하는 것을 정지하도록 명하였는데, 흉년이기 때문이었다.
함경도 안변(安邊) 사람인 조논생(趙論生)의 집에 불이 났는데 그 어미가 불 속에서 나오지 못하자, 논생이 화염 속으로 뛰어들어가 어미를 안고 함께 죽었다. 이 일을 보고하니, 정표(旌表)하라고 특별히 명하였다.
1월 24일 무오
김만중(金萬重)을 부수찬으로, 조한영(曺漢英)을 경기 감사로, 심지명(沈之溟)을 수원 부사(水原府使)로 삼았다.
1월 25일 기미
정릉 중건청(貞陵重建廳)이 아뢰기를,
"본릉을 수리하는 일을 중건청에서 배설한다면 각릉의 제도에 의거하여 세워야 될 것 같은데, 예조의 회계 및 대신의 수의(收議) 가운데에서는 정자각(丁字閣)을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게 의논하여 정탈(定奪)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헌부가, 수원 부사 심지명(沈之溟)이 나이가 많고 또 명망도 없다는 이유로 체직을 청했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1월 27일 신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갔는데, 약방이 들어가 진찰하였다. 평안 병사 이여발(李汝發)과 광주 부윤 이숙(李䎘)을 인견했는데, 호조 판서 민정중도 청대하여 입시했다. 도제조 허적이 아뢰기를,
"평안도의 별시 시관(試官)을 지금 차출하여 보내야 하는데, 육경 가운데 합당한 사람이 없습니다. 김좌명을 보냈으면 좋겠는데 현재 안흥(安興)에 가있는 데다가 또 신병이 있으며, 민정중이 스스로 가겠다고 청하는데 탁지의 장이므로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서는 안 되며, 정지화는 너무 엄하다고 바깥 의논이 염려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화는 일찍이 본도의 감사이지 않았는가?"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일찍이 감사였는데 다스리면서 엄한 것을 숭상하였습니다. 그가 내려 간다는 것을 들으면 거자(擧子)들이 반드시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래서 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지나치게 엄하다 하더라도 지나치게 느슨한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정중은 현재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으므로 그 성과를 이루어 내도록 책임지워야 하니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게 할 수 없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그렇다면 지화를 보내야 하겠습니다. 해조의 택일을 보건대 농사철과 마침 겹쳐 있으므로 과거를 베풀면 폐단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2월 20일 정도로 당겨 정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전라 감사가 부윤(府尹)을 겸하는 일에 대해서 신의 뜻으로는 온당하지 않다고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남 뿐 아니라 팔도도 모두 이렇게 만들고자 한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서북(西北) 양도는 감사가 가족을 이끌고 가며 부윤을 겸한 지 이미 오래입니다. 지금 팔도의 감사들도 모두 가족을 이끌고 가게 된다면 폐단이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하니, 정중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북도의 감사로 있었는데, 4년 만에 체직되었는데도 도내의 이해를 아직 다 파악하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하물며 1년 만에 체직된 자이겠습니까."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구임(久任)은 뜻은 매우 좋지만 가족을 거느리고 가는 것은 폐단이 있습니다. 하필이면 가족을 거느리고 간 뒤에야 24개월로 근무 기한을 삼겠습니까. 대신들에게 물어 처리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접때 경연에서 호적 사목(戶籍事目)을 의논해 정하는 일 때문에 한성 판윤을 속히 차출하도록 명하셨는데, 근래 육경(六卿) 중 남아 있는 인원이 매우 적어 해조에서 의망을 갖출 길이 없습니다. 변통하는 방법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종2품 가운데 적합한 사람을 대신들에게 물어 의망하도록 명하였다. 허적이 인하여 전 판서 박장원(朴長遠)·조복양(趙復陽), 전 참찬 조형(趙珩), 전 판윤 오정일(吳挺一) 등을 서용하도록 청하니, 상이 따랐다.
민정중이 공물(貢物)을 줄인 단자(單子)를 올리니, 상이 이르기를,
"어공(御供)하는 물품이 비록 작은 것이라도 그 값이 배나 되는 것은 필시 그 연유가 있을 것인데 아마도 도성 백성들을 구제하려는 뜻에서 나왔을 것이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그렇게 해야만 공물 주인(貢物主人)이 역(役)에 응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이때 판부사 송시열이 민정중과 함께 경비를 줄이는 데 뜻을 기울여 각사(各司)의 어공(御供) 물건 중 너무 과한 것은 감하고자 하였다. 이에 안팎에 원망과 비방이 크게 일어났기 때문에 상이 이와 같이 하교한 것인데, 허적 역시 상과 백성의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이 말을 고하였다. 상이 이여발을 앞으로 나오게 하고는 변방을 공고히 하고 무비를 닦는 방책에 대해 물었다. 여발이 대답하기를,
"형세를 보아 군병을 훈련시키고 기계를 수리하되, 소문이 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하자, 상이 좌우에게 누설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허적이 철옹(鐵甕)의 약산 산성(藥山山城) 수축 건을 가지고 진달하기를,
"이 성은 험한 요새이어서 적병이 공격하여 함락시키기가 실로 어렵고, 큰길에서 20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완은 ‘병사(兵使)가 큰길에다 진(鎭)을 두고 적병을 막아야지 10리 밖으로 물러나 지켜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만, 신의 의견으로는 여기에서 변란을 대비할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맞이하여 헛되이 예봉을 맞닥뜨릴 것이 있겠는가 생각됩니다."
하였다. 여발이 아뢰기를,
"신이 약산 산성의 형세를 보건대 적을 막을 수 있습니다만, 안주(安州)와는 30리, 박천(博川)과는 50리이므로 만약 사변을 만나 약산으로 물러나 진을 친다면 반드시 적을 피하였다는 비방을 불러올 것입니다."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여발은 무장(武將)이므로 그 말이 실로 이러하지마는 만약 정병(精兵)들이 칼날 앞에서 모두 죽고 나면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약 초반에 모두 죽는다면 다시금 버텨낼 형세가 없을 것이다."
하자, 여발이 아뢰기를,
"만약 안주(安州)의 성지(城池)를 수축하지 못한다면, 성상의 하교대로 약산 산성에 들어가겠습니다."
하였다. 이때 조정에서 몽고가 청나라와 틈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화가 전가될까 염려하여, 여발을 평안 병사로 차출하였다. 그가 조정을 떠나갈 때 상이 인견하여 방책을 의논해 정하였는데, 대체적인 요지는 적을 피하여 산성의 험함을 이용하자는 것뿐이었다.
이숙이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수어사로 종사했기 때문에 본주의 일을 대체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곡(糶穀) 8만여 석 안에 3만 석은 나누어 주었다가 아직 거두어들이지 못했는데, 죽거나 도망간 자가 매우 많으므로 결코 받아들일 길이 없습니다. 군향(軍餉)에 관한 일은 중대한 문제이니 다른 일 때문에 거두어 들이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신이 마땅히 내려가서 뽑아 내어 계문하겠습니다. 형편이 되면서도 갖추어 납부하지 않는 완악한 백성들까지 일체 탕감한다면, 그들의 간악한 습성만 길러주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조사하고자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허실이 서로 섞이는 폐단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정중이 아뢰기를,
"지금 분명하게 조사하여 1만 석을 한도로 하여 탕척해 준다면 좋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함릉 부원군(咸陵府院君) 겸 공조 판서 이해(李澥)가 치사를 간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이해는 정사 공신(靖社功臣)으로서 70세 이후에 치사를 간청하는 소장을 연달아 올렸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었다. 이때에 이르러 간청이 더욱 절실하자 좌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이해가 엊그제 소장을 진달한 이후로는 다시 소장을 올리지 않고 있으니 오직 조정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해는 젊어서부터 벼슬하기를 즐거워하지 않았는데, 그 평소의 뜻이 칭찬할 만했습니다. 나이를 이유로 물러나기를 청한 지도 오래 되었으니, 지금 팔십의 나이에 이르러 어찌 다시 나와 벼슬하려 하겠습니까."
하고, 도승지 장선징, 호조 판서 민정중도 모두 아뢰기를,
"늙어 물러나기를 청한 지 오래 되었으니, 그의 청을 특별히 허락하심은 실로 국가가 노신을 우대하는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예로써 은퇴를 허락할 줄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인조조의 정훈(正勳)으로는 단지 이 사람만 남아있기 때문에 사랑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지금 들으니 나이가 팔십에 가깝고, 조정의 의논도 은퇴를 허락하는 것이 노신을 우대함이 된다고 하므로 특별히 그 청을 허락한다."
하였다. 나이가 차면 치사하는 것이 예경(禮經)에 수록되어 있으나, 세상에 시행되지 않은 지가 오래였다. 이해는 선조 때부터 연달아 소장을 올리다가 마침내 청을 허락받고야 말았으니, 그 만족할 줄 알아 물러나는 뜻과 확고부동한 절조는 참으로 숭상할 만하다. 명을 내리자 조야가 영광스럽게 여겼다.
판중추부사 송시열이 상차하여, 신덕 왕후(神德王后)를 종묘에 배향하자고 청하면서 선묘조(宣廟朝)의 태학생 채증광(蔡增光) 등의 상소와 권근(權近)이 지은 정릉 흥천사(興天寺) 기문(記文)014) 을 반입시켜 상이 읽어보시게 하였다. 그 차자에 아뢰기를,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것은 큰 인륜을 밝히고 큰 법을 세우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큰 인륜이란 부자·군신·부부요, 이른바 큰 법이란 세 가지 사이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다만 세 가지 중에서 하나라도 밝혀지지 않는다거나 세 가지 사이에서 행하는 방법이 하나라도 미진함이 있으면, 중국이 이적으로 떨어지고 인류가 금수의 지경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성인께서 스스로 행하는 바와 사람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모두 이것을 우선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개국 초에 간신 정도전(鄭道傳) 등이 위험한 말로 선동하고 사악한 꾀를 비밀리에 행하여, 태조 대왕으로 하여금 천위(天位)를 헌신짝처럼 버리게 하고 소도(昭悼)015) 를 포함한 이공(二公)016) 을 요절하게 만들었으니, 간신의 죄를 어찌 다 벌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우리 태종 대왕께서는 성대한 덕과 순일한 효성이 천고에 탁월하셔서 요임금이 전하고 순임금이 이어받듯 질서가 정연하였으니, 사변에 대처한 방법이 당시에 유감이 없었고 후세에 할 말이 있었습니다만, 유독 신덕 왕후에 대해서만 능침의 의절에 손상이 있고 배향하는 예가 오래도록 결손되었습니다.
이는 당시의 예관이 예의 뜻을 몰라 이렇게 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옛것을 구차하게 답습하여 오늘날에 이르렀으니, 맑은 태묘[淸廟]에 음악이 울려퍼지고 옥그릇에 술이 올려진다 하더라도, 태조 대왕의 영령께서는 필시 속이 상하고 진노하실 것이며, 태종 대왕께서도 필시 불안하여 움추리고 좌우를 오르내릴 즈음에 어쩔 줄을 몰라 하실 것입니다.
다행히도 오늘날 성상께서 타고난 효성으로 대왕 대비와 왕대비를 받들어 모시는 것이 정성과 도리를 다하여 사람들이 이러니저러니 하는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조상을 추모하는 두터운 마음에다 미루어 근본을 길이 생각하시어 예관에게 특별히 명해 정릉을 봉심하게 하시고 수릉군(守陵軍)이나 재사(齋舍)를 차례대로 설치하시니, 어찌 조종의 신령들만이 어두운 데서 흐뭇해 하시겠습니까. 온 누리의 백성들이 너나없이 느꺼워 눈물을 흘리며 성상의 효도를 우러렀습니다. 이는 사람에게 있는 천리로서,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묘 배향의 의론에 대해서는 여전히 주저하고 계십니다. 신은 물론 성상의 의도가 계신 줄을 알고 있습니다만, 능의 제사와 종묘의 제사가 예에는 다름이 없는데 저것은 두고 이것은 폐한다면 일에 떳떳한 근거가 없습니다. 이왕 예가 아니라고 한다면 오십보나 백보나 큰 차이가 없으며, 그 지극함을 논한다면 진미한 것이 진선한 것보다 못한 법입니다.
지금 성조조(聖祖朝)017) 태학생의 소장을 보건대, 당시 조정의 의론이 일제히 터져 나왔음을 알 수 있는데 그 말이 매우 상세하고도 절실합니다. 또 신이 권근이 왕명에 응하여 지은 흥천사 기문을 삼가 보건대, 태조께서 애도하여 시호를 추증한 뜻과 명나라의 태조 황제께서 칙서를 내려 조문하고 위로하신 은전을 알 수 있습니다. 고사와 여론을 착착 징험할 수 있으므로 감히 반입하오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한가하신 틈에 상세히 살펴보시고, 특별히 예관으로 하여금 종묘 배향의 의전을 아울러 의논하게 하신다면, 태조 대왕의 영께서 기뻐 흡족해 하시고, 태종 대왕 또한 ‘내가 계지술사(繼志述事)할 줄 아는 후손을 두었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반드시 자손이 번성하고 효성을 영원히 전하는 경사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 일은 중대하므로 이제 와서 경솔하게 시행할 수 없다. 뒷날 등대할 때 상의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1월 28일 임술
윤문거(尹文擧)를 대사헌으로, 강백년(姜栢年)을 형조 참판으로, 김징(金澄)을 문학으로, 김우형(金宇亨)을 병조 참의로, 조복양(趙復陽)을 판윤으로, 신명규(申命圭)를 장령으로, 남구만(南九萬)을 승문원 부제조로 삼았다.
복양은 끝까지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으며, 문거는 신병을 핑계로 오지 않았다.
이조 판서 이경휘가, 김왕(金迋)의 일로 대신에게 배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사직했지만 상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또 사직 단자를 올리자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명했었다. 이때 이르러 병조 판서 홍중보와 상피해야 하는 사돈간으로 양전(兩銓)을 각각 관장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며 전례를 이끌어 상소하고 체직을 또 청했는데, 상이 그 소를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법 밖의 것으로써 계청했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자, 상이 따랐다. 중보도 소장을 올려 사직했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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