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22권, 현종 10년 1669년 11월

싸라리리 2025. 12. 6.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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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경인

윤심(尹深)을 헌납으로, 이윤조(李潤朝)를 검열로, 윤리(尹理)를 사서로, 이경억(李慶億)을 좌부빈객으로, 유혁연(柳赫然)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유혁연은 무장(武將)으로서 상의 사랑과 신임을 받았기 때문에 특별히 제수된 것이다.

 

부제학 이민적(李敏迪), 수찬 이규령(李奎齡), 부수찬 김만중(金萬重)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번쩍번쩍하는 번개와 우레가 양월(陽月)인 10월 안에 두 번이나 발생하였는데, 이어서 또, 은진현(恩津縣)에서 암탉이 수탉으로 변한 이변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하늘의 재앙과 사물의 변괴가 한꺼번에 일어나니, 나라에 무슨 위태로운 일이 있어서 하늘이 이토록 경고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옛날의 현명한 임금들이 재변을 만나 덕을 닦은 것으로는 상상(祥桑)059)  이나 운한(雲漢)060)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근래의 일만을 가지고 말해보더라도, 임진년에 암탉이 수탉으로 변한 이변이 있자 효종 대왕께서 크게 마음을 가다듬으시고 즉시 대신과 삼사의 2품 이상을 불러 재변을 없앨 방도를 물으셨는데 그 말씀이 하도 간절하여 정말 몸에 있는 고질을 없애려는 것과 같았고, 또 을미년에는 흰 무지개가 해를 꿰는 이변이 일어나자 즉시 만수전(萬壽殿)의 역사(役事)를 정지시켰습니다. 하늘을 대하는 정성과 경외하는 마음이 진심에서 우러나와서 정치에 시행을 한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시경》에 ‘조심하는 마음으로 하늘을 잘 섬기네.[小心翼翼昭事上帝]’라고 하였는데, 우리 선왕이 바로 그렇게 하신 분입니다.
지금 상께서 편찮으시어 조용히 조섭을 하고 계시는 중이기는 합니다만, 뉘우치는 말씀이 조정에 들리지 않고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나온 정치가 백성들에게 베풀어지지 않습니다. 위아래가 그저 덤덤하게 평일과 다름없이 지내고 있으니, 이와 같은 기상으로 하늘의 노여움을 풀어 하늘의 마음을 돌아오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만수전의 역사도 우리 선왕께서는 정지를 시켰었는데, 법제를 넘는 공주의 집을 지으면서 상께서는 양사의 계청을 따르지 않으시어, 하늘의 이변을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여기시고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을 것 없다고 여기시는 것이 한결같이 이러하시니, 이 한 가지 일만 가지고 보더라도 이것이 어찌 두려운 마음으로 반성을 하는 뜻이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궁금(宮禁)의 엄숙함이 점점 해이해지고 있으며, 환관들이 점점 방자해지고 있으며, 백성들이 점점 자기의 직업을 잃고 있으며, 유사들이 점점 긁어모으는 풍조를 이루어가고 있으며, 옛 제도는 점점 무너져 가고 있으며, 온갖 일들이 점점 잗달아지고 있습니다. 이 몇 가지 조짐들은, 그 처음을 보고야 누가 위태해지고 망해갈 염려가 있다고 여기겠습니까마는, 미세한 데에서부터 드러나게 되고 적은 것이 쌓여서 큰 것이 되면 마침내는 사방에서 무너져내려 손을 쓸 수가 없는 지경에 바로 이르게 됩니다. 작은 일에서부터 조심하여 일찌감치 분변할 방도를 어찌 생각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신들이 전에 우레의 변고를 인하여 몇 가지 일들을 대략 진달하였는데, 성상께서는 의논해 처리하겠다고 답을 이미 하시고도 차자를 안에다 둔 채 처분이 없으시니, 아마 성인이 아래의 말을 잘 가려 받아들이는 의리가 아닌 듯하며, 언로(言路)가 순탄하지 못하다는 것도 알 수가 있습니다.
첨군(簽軍)과 양전(量田)은 한꺼번에 아울러 거행해서는 안 되므로 양전을 정지하여 조금 곡식이 여물기를 기다리게 하기를 청하였고, 또 신포(新砲)와 별대(別隊)를 둘 다 다그쳐 책정하기 때문에 인심이 흉흉하고 백성들이 명을 감당하지 못하므로 신포를 정지하여 묘당의 본의를 살리기를 청하였는데, 상께서는 우활하다고 여기시어 염두에 두지를 않으십니다. 그러나 온통 재해를 당해 백성들이 사방에서 고통을 겪고 있어서 보고 듣는 일마다 걱정스럽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해서(海西)의 고을들은 바닷가에 있는 것이 절반이 넘고 호서(湖西)는 절반이 바닷가나 강가에 있는데, 농사가 제대로 된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백성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걸식을 하는데, 하루하루 목숨을 겨우 이어가기도 힘듭니다. 바야흐로 백성 진휼하는 일을 의논해야 하는 때에 크나큰 역사를 하고자 하시니, 이것이 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올해의 군액(軍額)은 예년에 비하여 두 배나 됩니다. 연례적으로 충정을 하는 것은 결코 줄일 수 없겠습니다만, 정초군(精抄軍) 한 부대가 늘어났고 별대(別隊)가 또 한 부대 늘어났으며 신포보(新砲保)가 또 그대로 한 부대입니다. 양정(良丁)은 한정이 있는데 군액을 한꺼번에 늘렸으니, 장차 어느 백성에게서 뽑을 것입니까. 또한 별대를 설치한 것은 다만 어영군(御營軍)의 규모처럼 해서 포수가 점점 줄어드는 것을 보충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서 별대를 차츰 채우고자 했던 것입니다. 애당초 두 군대를 함께 존속시키고자 했던 것도 아니며 또한 한꺼번에 충정을 하고자 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조정의 거조가 당초의 뜻을 크게 어기고서 포보를 채운 뒤에 또 별대를 충정하여 저쪽에다가는 늘려놓고 이쪽에서는 그만큼 줄이지를 않으니, 이것이 또한 신들이 이해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들이 올린 앞뒤의 두 차자에 대해서 속히 대신과 유사로 하여금 의논해서 처리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차자가 올라간 지 나흘 만에 상이 답하기를,
"그대들이 나를 깨우치는 말이 이러하니, 느낀 것이 많아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앞에 올린 차자에서 말한 몇 가지 일은, 비답을 내린 뒤에 바야흐로 대신들과 의논하여 처리하려던 참이었는데, 내가 병이 심하여 의논해 처리하지 못하였다. 그대들에게 무슨 혐의할 것이 있겠는가. 앞뒤의 차자에서 한 말은, 뒷날 등대했을 때에 아울러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공주의 집을 짓는 일은 이미 어제 우선 정지하도록 하였다."
하였다.
이때에 공주 집을 짓는 일을 정지할 것에 대해서 양사가 계청을 하였는데도 상께서 매양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는데, 옥당에 내린 비답에서 비로소 우선 정지시키라는 분부를 하였으니, 대간의 논계로 인하여 일이 정지된 것이 아니었다.

 

형조가 ‘이은상(李殷相) 등을 조사하는 일’에 대하여 아뢰기를,
"대각의 논계가 이미 정지되었으니, 우선 당초 대간이 아뢰었던 대로 함문(緘問)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2일 신묘

장령 정중휘(鄭重徽), 지평 홍만종(洪萬鍾), 정언 이단석(李端錫)·유상운(柳尙運)이, ‘공주의 집을 짓는 일을 이미 정지시키고도 이틀 동안의 논계에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을 하셨으니, 모두가 신들이 있으나마나 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라고 하면서 인피하였는데, 처치하여 모두 출사시켰다.

 

부교리 김석주(金錫胄)가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보건대, 오늘날 나랏일의 염려스러움이 하루하루 심해지고 있습니다. 하늘의 경고가 달마다 이토록 자주 있으니 이것이 염려스럽고, 백성들의 원망과 저주가 사방에서 들끓고 있으니 이것이 염려스럽고, 인재가 아주 모자라 온갖 법도들은 해이해졌고 재용이 텅 비어 경비가 바닥났으니 이것이 염려스럽습니다. 그런데도 인심은 투박함에 젖어 있고 물정은 요행을 바라며 안락에 빠져 있는 것이 또한 오늘날만큼 심할 수가 없습니다. 전일에 일찍이 깜짝 놀라 하늘을 두렵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들을 지금은 점점 태연히 꺼리지 않으며, 전일에 일찍이 어려워하고 삼가며 백성들을 진휼치 않을 수 없었던 것들을 지금은 점점 서슴없이 돌아보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이 진실로 신이 이른바 하루하루 심해져 가는 근심거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배와 잣을 가지고 갔던 사신[梨柏差員]의 보고가 마침 또 이 즈음에 이르렀는데 북방 소식이 자못 위태합니다.
오늘날의 계책은, 내실있는 덕을 닦으며 은혜로운 정사를 펴 우선 인심을 굳게 뭉치게 하고, 경박한 논의를 억제하며 충실을 숭상하여 우선 인재들을 거두어들이고, 쓸데없는 비용을 줄이고 역사를 일으키는 것을 신중히 하여 우선 백성들의 역량을 온전하게 기르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상벌을 내릴 즈음에는 더더욱 마음을 써서 상을 반드시 때맞춰 내리고 벌은 친하다고 하여 면제되는 일이 없게 하고 하나하나의 거조를 다시는 전일처럼 고식으로 귀결되는 일이 없게 하신다면, 자강의 길이 반 이상은 이룩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병 때문에 게을러진다거나 위험을 걱정해 의지가 꺾이지 마시고 늘 이것을 생각하시어 원대한 계책을 넓혀 나가소서. 그러면 오늘날의 근심거리들이, 나라를 일으키고 성세(聖世)를 여는 하나의 큰 기틀이 될 것입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본관 신료들이 올린 차자 안에 신초(新抄)와 별대(別隊)에 대한 일을 갖추어 진달하였습니다만, 신이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이 듣건대, 군정을 닦는 도는 정선(精選)을 귀히 여기고 많은 것을 귀히 여기지 않으며, 교대로 번서는 것[更番]을 편하게 여기지 오랫동안 번드는 것[長征]을 편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얼마 전에 훈국이 병제를 바꾸자고 의논드린 것은 곧 정선에 힘쓰려는 계획이며 바로 교대로 번서는 방법이었습니다. 놀고 먹는 자를 줄여 경상의 비용을 넉넉하게 하며 늙고 게으른 자들을 제거하고 건장하고 용맹스런 자들을 모으는 것을 누가 급선무라 이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원래 군적에 편입되어 있던 군졸들은 급작스런 감원에 대해 원망하기 쉽고, 새로 모집된 병사들은 보충시키는 군사에 채워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니, 반드시 많은 세월을 두고 차츰 바꾸면서 새롭게 해야 거의 조용하게 잘 변혁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일을 주관하는 신료들이 여러 영문(營門)에 임시로 소속되었던 자들을 찾아내 이속시키는 외에도 또 각도로 하여금 일시에 정장(丁壯)을 찾아내도록 하여, 중외의 소요가 끊이지 않으니, 신은 잘못이라 생각합니다. 지금으로서는 이미 얻은 숫자를 가지고 서서히 단결시키고 차츰 채워나가면서, 정선을 힘쓰고 교대로 번서게 하려던 본의를 잃지만 않는다면 될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런 강제책을 서둘러 백성들을 못살게 한단 말입니까.
또 신이 일찍이 듣건대, 국가의 경비가 저축은 점점 축나고 새로 거두어들이는 것은 차츰 적어져서 한번 흉년이라도 만나면 곧장 바닥날까 걱정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꾸어서 생활해야 하는 것을 면치 못하는 중인 이하 가정의 형편과 같은 것입니다. 하물며 약자로서 강자와 이웃하고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와 이웃해 있으므로 금이나 비단을 갖다 바치느라 힘을 허비치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이 때문에 일찍이 ‘나라에서 재물을 누가 절약치 않겠습니까만 오늘날 우리 나라는 재물을 더더욱 절약치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대로 편안한 날이 오래되다 보면 변고가 반드시 생겨납니다. 만에 하나 이웃 나라에 잇달아 일이 일어나게 되면, 명나라 말년에 모수(毛帥)061)  가 주둔한 섬에 군량미를 보냈던 일이나 청나라에 을유년062)  에 바다로 쌀을 운송해 보냈던 일들은 우리 나라가 이미 겪은 고역이었는데, 모르겠습니다만, 이러한 때에 국가가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지금 다만 국경의 분쟁이 눈앞에 닥쳐 있지 않고 궁실 안에서의 오락이 마음을 빼앗기에 족하기 때문에 조정을 다스리는 예의가 차츰 번거로워져 가고 궁금의 사용 물품들이 날로 사치로 흐르고 있습니다. 옛 사람이 말한 ‘송나라 왕실이 남쪽으로 쫓겨간 뒤에 태평을 가장하고 사기를 꺾으면서 단지 사대부들로 하여금 호수며 산에서 노래와 춤을 탐닉하도록 만들었다.’고 한 말에 또한 불행하게도 가깝습니다. 진실로 나라가 이런 것들에 대하여 한결같이 답답하게 그냥둔 채, 혼미하여 개혁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신의 생각으로는, 백성은 시들고 나라는 파리해져 점차 위태하고 쇠약한 데로 빠져들어서 이른바 백성의 역량을 완전하게 길러 자강을 도모하는 계책이 끝내 이루어질 기약이 없을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소가 들어가자 안에 둔 채 내려보내지 않았다.

 

11월 3일 임진

신정(申晸)을 지평으로, 김만균(金萬均)을 교리로 삼았다.

 

11월 4일 계사

영의정 정태화가 열 한 번째 사직소를 올리자, 상이 승지를 보내 도타이 유시하였다.

 

함경도 온성(穩城)의 세미(稅米)·대두(大豆)·노비 신공(奴婢身貢)과, 홍원(洪原)·명천(明川)·경성(鏡城)의 우황 세폐(牛黃歲幣)와 의사(醫司) 약재가(藥材價)를 모두 감해주고 인삼 가포(人蔘價布)는 반을 감해주며, 종성(鍾城)·경흥(慶興)·삼수(三水)·갑산(甲山) 등 네 고을의 세미·대두·노비 신공도 반을 감해주도록 명하였다. 이때 북로(北路)에 흉년이 들었는데 본도 감사의 장계로 인해 이 명령이 있게 된 것이다.

 

온성에 귀양가 있던 죄인들을 남도(南道)로 배소를 옮겼다. 함경 감사 홍처후(洪處厚)가 장계를 올려 ‘북로에 흉년이 들었는데, 정배 죄인을 모두 북로로 보냄으로써 주객이 함께 곤궁해지는 폐단이 빚어진다.’고 갖추어 진달하자, 상이 묘당에 의논하였는데 온성이 더욱 심하게 재앙을 입었다고 하여 이 명령이 있게 된 것이다.

 

평안도 위원(渭源)·이산(理山)·벽동(碧潼)·창성(昌城) 등은 거두어들일 쌀의 본 수량 6두 중 4두를 감하고, 강계(江界)·삭주(朔州)·삼등(三登)·강동(江東)은 3두를 감하고, 의주(義州)·용천(龍川)·선천(宣川)·곽산(郭山)·정주(定州)·가산(嘉山)·안주(安州)·숙천(肅川)·순안(順安)·평양(平壤)·중화(中和)는 5두 중 반을 감하고, 그 나머지 구성(龜城) 등 20읍은 6두 중 2두를 감했다. 재해를 입은 경중에 따라 차등있게 감해준 것이다.

 

11월 5일 갑오

양사가 다시, 공주 집의 칸 수와 집터의 크기를 모두 정해진 법제대로 해야 한다고 논계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장령 정중휘(鄭重徽)와 지평 홍만종(洪萬鍾)이, 공조 판서 유혁연(柳赫然)을 육경(六卿)에 합당하지 않다고 논핵하며 체직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대간의 논박을 괴이하고 망령되다고 배척했다. 정중휘 등이 잇따라 인피하였다.

 

상이 양심합(養心閤)에 나아가자 약방이 들어와 진료하였다. 이조 판서 조복양(趙復陽)이 대면을 청하여 입시하였다. 복양이 아뢰기를,
"신이 연일 서연(書筵)에 드나들고 있는데 세자의 문의(文義)가 날로 진취되고 있습니다. 이때를 놓치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크게 통달할 것입니다. 찬선의 직책은 정3품인데, 이유태(李惟泰)가 시묘살이를 마쳤고 이 직임에 합당하고 다른 사람은 의망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단망(單望)으로 계하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옥당과 양사의 차자를 꺼내어 허적에게 보이면서 이르기를,
"대신 및 여러 신료들과 상의하고자 한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충청도에 양전(量田)이 고르지 않아 백성들의 원성이 적지 않으므로 신이 영상과 함께 등대할 때에 여쭈어 처리하려고 합니다. 군사를 선발하는 한 가지 일은, 훈국(訓局)이 비록 백성들을 해치는 일은 없지만, 받들어 시행하는 사이에 지방의 소요와 원성이 없지 않으니, 옥당의 차자가 옳습니다."
하였다. 복양이 아뢰기를,
"함경 감사의 장계를 보니, 육진(六鎭)의 백성과 전가 사변(全家徙邊)된 죄인들이 주인과 손이 함께 곤궁함을 면치 못해 어린아이를 버리고 도망치는 자까지 있다하니, 지극히 놀랍고 참혹스럽습니다. 이 무리들을 관대하게 처분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나라에 기강이 없어, 변방으로 유배된 자들이 방면받을 심산으로 농사를 짓지 않아 굶주리는 지경에 빠지게 되어 결국 주인과 손이 함께 곤궁해지는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년 가을을 기한으로 하여 다른 도로 나누어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복양이 아뢰기를,
"근래 인심이 좋지 못하고 법금(法禁)이 날로 치밀해짐으로써 법망에 걸려든 자들이 더욱 많아지고 있습니다. 원통함을 풀어주고 죄수들을 소결하는 것은 참으로 하늘에 복을 빌어 나라의 운명을 영원하게 하는 근본입니다."
하였다. 이때 호적에 누락된 죄로 전가 사변되는 자들이 길에 연달아 원성이 날로 심해졌기 때문에 복양이 이같이 말한 것이다. 허적이 아뢰기를,
"재변이 근년처럼 심한 적이 없는데, 북로(北路)에 연달아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하므로 전부터 식견있는 자들은 북쪽 변방을 근심스럽게 생각해 왔습니다. 복양이 이 때문에 말씀드린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함경도만 소결해야겠는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팔도에 일체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담당 관청을 설치하여 소결하라고 명하였다.

 

11월 6일 을미

간원이 논계하기를,
"이조 낭관이 압반(押班)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잘못된 전례를 혁파하소서."
하고, 또 논계하기를,
"감찰 이집성(李集成)은 일찍이 장흥 직장(長興直長)으로 있을 때에 사창(私娼)을 가까이하여 직소로 끌어들여 밤마다 함께 지낸 죄가 있습니다.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모두 따랐다.

 

11월 7일 병신

헌납 윤심(尹深)이, 서필원(徐必遠)을 논계하는 일에 대하여 다른 의견을 내세우며, 구차스럽게 동조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인피하였다. 정언 유상운(柳尙運)과 이단석(李端錫)이, 업신여김을 당했다는 이유로 잇달아 인피하였다. 대사헌 유철(兪㯙), 지평 홍만종(洪萬鍾), 대사간 강백년(姜栢年)도 일찍이 서필원을 삭출하자는 논계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감히 처치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인피하였다. 장령 이하(李夏)가 처치하여, 윤심은 체직하고 유상운, 이단석, 유철, 홍만종, 강백년은 출사시키게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 정랑 남궁옥(南宮鈺)을 보내, 길재(吉再)와 김장생(金長生)의 서원에 액호(額號)를 내렸다.

 

함경도에 흉년이 들었다는 이유로 도내 각 고을과 삼영(三營)의 월과(月課)를 내년 9월까지 정지시켰다.

 

밤에 크게 우레와 번개가 치고 우박이 내렸다.

 

11월 8일 정유

정원이 아뢰기를,
"근래 재변의 발생이 거의 없는 달이 없는데, 지난 밤에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 천둥과 번개의 변고가 있었습니다. 소리가 들어가 숨어야 하는 이 달에 하늘의 노여움이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입니까. 이것을 없애는 것은 일상적이고 형식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해낼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성상께서 편찮으신 때이니 비록 정전(正殿)에 나아가 널리 신료들을 맞이할 수는 없겠지만, 의당 와내에서 간단한 예절만을 차려 공경이나 시종들로 하여금 돌아가며 입시토록 해 자주 자문의 말씀을 내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의 고생으로부터 시정(時政)의 잘잘못까지를 낱낱이 말하게 해서 채택하신다면 성인의 교화에 도움이 어찌 적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밤새 일어난 바람과 우레의 이변으로 놀라 혼이 달아나 참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지금 계사를 보니, 마음에 가상하게 여겨진다. 마음에 새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사간 신명규(申命圭)도, 일찍이 서필원을 삭출시키자는 논의에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면서, 재변의 참혹함과 기강의 무너짐을 극력 말하고,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분발하려는 의지가 적고 신료들은 최선을 다하려는 의리를 잊고 있습니다. 간관을 형식적으로만 만들어 놓고 항상 싫증을 내며 박대하는 거조만 있으며, 궁금은 엄숙치 못해 덕에 의해 깨끗하게 다스려지는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조정에는 사사로운 뜻들이 횡류하고 높은 벼슬아치들은 자신을 위한 일만을 합니다. 상께서 편찮으신 지가 오래되어 신료들의 접견이 오랫동안 막혀 있고 대신은 들어가서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성상의 몸을 조섭하고 보호할 방도와 위험을 없애고 시대를 구제할 방책들을 황급히 강구하여 밥먹을 겨를도 없어야 마땅할 터인데, 오히려 태연하게 지내며 두려워할 줄을 모릅니다. 이와 같은데 하늘의 노여움을 돌릴 수 있겠으며 나랏일을 해볼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어제 바람과 우레의 변고로 정신이 아득하여 스스로 안정을 찾을 길이 없었는데, 그대의 말을 보니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이 매우 가상하다. 그대는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헌부가 처치하여 출사시켰다.

 

영의정 정태화가 사직장을 올리고 오래도록 출사하지 않았다. 상이 하교하기를,
"아, 어젯밤 천둥과 우박의 변고로 마음과 혼이 달아나, 스스로를 안정치 못하겠다. 이런 시기에는 덕이 높은 대신들과 구제할 방책을 함께 의논해야 하는데 도리어 들어가서 출사하지 않고 있으니, 생각이 이에 미치면 나도 모르게 한심해진다. 경이 만약 나오지 않으면 내가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속히 출사하여 도를 논함으로써 목마르듯 기다리는 나의 바람에 부응토록 하라."
하였다. 그래도 정태화는 신병이 중하다고 하며 출사하지 않았다.

 

좌의정 허적이, 우레의 변고로 상차하여 면직(免職)을 청하는 한편, 또 수성(修省)하는 도리를 진달하자, 상이 답하기를,
"아, 어젯밤 천둥 번개의 변고로 마음이 써늘하고 뼛속까지 놀라 밤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이제 차자를 보니 경계하고 깨우치는 뜻이 간략하면서도 지극하다. 마음에 새겨두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늘날의 재앙은 실상 과인에게서 말미암은 것이니,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고, 지금의 어려움을 구제토록 하라."
하였다.

 

충청도에 소 돌림병이 크게 번졌다.

 

11월 9일 무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니, 약방(藥房)이 들어와서 진료하였다. 호조 판서 김좌명(金佐明), 예조 판서 박장원(朴長遠), 부제학 이민적(李敏迪), 응교 이민서(李敏叙), 교리 김만균(金萬均), 수찬 이규령(李奎齡), 부수찬 김만중(金萬重)이 면대를 청하여 입시하였다. 좌의정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크게 잘못하신 일이 없는데도 하늘의 재변이 이토록 참혹합니다. 만약 잘못하신 일이 있다면 신들이 어찌 아무 일 때문이라고 지적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박장원이 아뢰기를,
"하늘의 변고가 일어나는 것이 혹 하늘을 대하는 정성에 미진한 바가 있어서가 아닌가 염려됩니다. 성상께서는 근본에 관계된 일에 유념하소서. 일을 논하는 신하에게 괴이하고 망령되다고 배척을 하신 것은 실로 화평한 기상이 아니기 때문에 감히 아룁니다."
하였다. 도승지 권대운(權大運)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제왕이 예사롭지 않은 변고를 만나면 반드시 크게 반성하고 조심하는 거조를 하였습니다. 지금 성상께서 편찮으시니 비록 신료들을 널리 만나보실 수는 없겠습니다만, 때때로 와내(臥內)로 불러 만나시어 조용히 일을 의논하신다면 이것이 바로 재변을 만나 반성을 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
하고, 민적이 아뢰기를,
"변괴가 일어나는 것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만, 올해에는 우레치는 변고가 한겨울에 여러 차례 일어났고, 암탉이 수탉으로 변한 변괴는 전대의 역사로 볼 때 위망의 조짐이었습니다. 오늘날 재변을 없앨 방책으로는 민력(民力)을 잘 기르고 민폐를 덜어주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상진(上進)하는 물품을 줄이고 곧은 말을 할 길을 열어서, 무릇 백성을 해치고 정치를 해치는 일을 모두 혁파하소서.
지난번에 올린 신들의 차자에 진달한 일들에 대해서 대신들이 어떻게 결정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올해에는 농사가 흉년이 들었으니, 양전(量田)을 정지하는 일과 목화밭을 급재(給災)하는 일을 모두 서둘러 거행해야 합니다. 민폐가 있는 별대(別隊)와 첨정(簽丁)의 일도 정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만중이 아뢰기를,
"조종조로부터 내려오는 법은 따르지 않을 수 없으며 재변을 만난 때에는 더욱더 준수해야 하는데, 공주 집의 칸 수를 옛 법제대로 따르지 않으시니, 참으로 옳지 않은 일입니다. 전에 《대전(大典)》의 법을 잘 거행하라는 명을 내리시고 담당 관청을 설치하기까지 하시어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들 우러러 보았는데, 그 뒤에 폐지시켜 이름만 있고 실상이 없게 되었습니다. 공주 집을 짓는 데에 구애되는 바가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옛날 송나라 희풍(熙豊) 때에 삼부족설(三不足說)063)  이 있었는데, 논자들은 나라가 망할 조짐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공주의 집을 짓는 일에 대해서 위아래가 서로 버티면서 이미 여러 달을 보내고도 정해진 제도대로 한결같이 따르지 않으시니, 조종조도 본받을 것 없고 사람들의 말도 들을 것이 없다는 삼부족설과 불행히도 가깝습니다. 재변을 만나 크게 반성을 해야 하는 이 때에 또 정해진 제도를 따르지 않는다면, 희풍 때와 다를 바가 없고 태무(太戊)가 상상(祥桑)의 재변을 만나 선왕의 정치를 되살려 행하던 것과 거리가 멉니다. 신은 법전(法典)을 잘 수선하여 거행하는 것이 하늘에 응답하는 첫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좌명이 나아가 아뢰기를,
"만중의 말을 깊이 유념하셔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에 이르기를,
"절실한 말이다."
하였다. 좌명이 또 아뢰기를,
"황해도의 양전(量田)을 다시 하는 네 읍에 대해서, 전삼세(田三稅)는 신결(新結)로 받아들이되 수미(收米)는 우선 구결(舊結)을 따라 받아 상납을 하고 도내 각읍에 양전이 끝난 뒤에 수미를 신결대로 거둘 일로, 본도 감사의 장계를 인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충청도의 양전을 다시 하는 읍에 대해서도 해서(海西)의 예대로 받아들이라고 각읍에 분부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이 비록 위를 덜어 아래에 더해주는 정치이기는 하나 백성들이 전례를 삼게 되면 양전이 끝날 때까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였다. 좌명이 아뢰기를,
"호서(湖西) 선혜청(宣惠廳)의 저축이 이미 바닥이 났습니다. 무신조(戊申條) 제용감(濟用監) 정포가미(正布價米) 1천 9백 14석 가운데 1천 석은 이미 호조로 수송하였으나, 기유조(己酉條) 세폐가(歲幣價) 대동미(大同米) 2백 30동 44필은 전혀 아직 수송하지 않았습니다. 올해의 세폐는 호조에서 겨우겨우 마련하여 보냈으니, 아직 수송하지 않은 정포작미(正布作米) 9백 14석과 세폐가 대동목(大同木) 2백 30동 44필은 모두 감면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사신은 논한다. 상이 비록 사냥이나 오락에 빠진 잘못은 없지만 기강이 퇴폐되어 있는데도 진작시키려는 의지가 없고, 간관(諫官)을 설치해 두고 있으면서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아름다움이 없고, 어진 마음을 가졌으면서도 혜택이 백성에게까지 미치지 못해 나라의 근본이 이미 흩어졌다. 위에서는 도로써 사물을 헤아리지 않고 아래에서는 법을 지키지 않아서 한 가지 일도 믿을 만한 것이 없었으니, 하늘의 노여움은 진실로 이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그런데 허적은 정승 자리에 있는 몸으로 부인네며 환관들이나 하는 충성을 하려 하고 장부 정리나 하는 것으로 직무를 삼았다. 비상한 재변을 만나 탑전에 입시하여, 상에게는 잘못한 바가 없다고 진달하였으니, 탄식스럽기 그지없다.


【태백산사고본】 22책 22권 4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2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과학-천기(天氣) / 정론-정론(政論) / 재정-진상(進上) / 군사-군정(軍政) / 농업-양전(量田) / 구휼(救恤) / 역사-고사(故事) / 역사-사학(史學)


[註 063] 삼부족설(三不足說) : 송나라 신종(神宗) 때에 왕안석(王安石)이 신법(新法)을 만들어 시행하려 하자 여기에 반대하는 사마광(司馬光) 등이 "하늘의 재변도 두려워할 것이 없고, 사람들의 말도 들어볼 것이 없고, 조종조의 법도 지킬 것이 없다고 여긴다."는 이른바 삼부족설로 조정을 비판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상이 비록 사냥이나 오락에 빠진 잘못은 없지만 기강이 퇴폐되어 있는데도 진작시키려는 의지가 없고, 간관(諫官)을 설치해 두고 있으면서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아름다움이 없고, 어진 마음을 가졌으면서도 혜택이 백성에게까지 미치지 못해 나라의 근본이 이미 흩어졌다. 위에서는 도로써 사물을 헤아리지 않고 아래에서는 법을 지키지 않아서 한 가지 일도 믿을 만한 것이 없었으니, 하늘의 노여움은 진실로 이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그런데 허적은 정승 자리에 있는 몸으로 부인네며 환관들이나 하는 충성을 하려 하고 장부 정리나 하는 것으로 직무를 삼았다. 비상한 재변을 만나 탑전에 입시하여, 상에게는 잘못한 바가 없다고 진달하였으니, 탄식스럽기 그지없다.

 

황해와 충청 양도에 아직 양전을 끝내지 못한 고을은 내년 가을까지 정지토록 명하고, 또 삼남(三南)의 목화밭을 급재(給災)하라고 명하였으며, 또 명하여 경기도에 내년 봄 거둘 대동미(大同米)를 매 결(結)당 2두를 감해주게 하였다. 옥당이 올린 차자로 인해 대신과 의논해서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전 찰방 송형구(宋亨久)가 상소하여, 내년 윤달이 잘못되었음을 말하고 또 시헌력(時憲曆)의 오차를 논하자, 상이 그 상소를 예조에 내려 관상감으로 하여금 의논해 아뢰게 하였다. 본감이 형구로 하여금 본감의 관원 송이영(宋以穎)과 논란토록 하였는데, 송이영이 형구의 말이 옳지 않다고 해 결국 시행하지 않았다.

 

개성부에 이달 7일에 천둥 번개가 쳤다.

 

11월 11일 경자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의금부와 형조의 당상을 인견하여 현재 갇혀있는 죄인들을 소결(疏決)하였다. 중죄인은 귀양보내고 죄가 가벼운 죄인은 석방하였다.

 

11월 12일 신축

대사헌 유철, 대사간 강백년(姜栢年), 사간 신명규(申命圭), 정언 이단석(李端錫)·유상운(柳尙運), 지평 홍만종(洪萬鍾) 등이 모두 인피하였다. 헌납 윤심(尹深)이 서필원에 대한 일에 이론을 세운 뒤에, 대간들이 인피하여 여러 날을 지연시키다가 대신에게 비난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헌부가 처치하여, 유철·명규·만종은 체직시키고 백년·단석·상운은 출사시켰다.

 

소결청(疏決廳)을 설치하고 좌의정 허적(許積)을 도제조로, 이경억(李慶億)·민희(閔熙)·이만영(李晩榮)·이원정(李元禎)을 당상으로 삼았다. 뒤에 다시 김좌명(金佐明)·조복양(趙復陽)·오정일(吳挺一)·정지화(鄭知和)·권대운(權大運)을 당상에 추가하였다.

 

각도의 감사들에게 하유하여, 죄수를 소결하여 아뢰게 하였다.

 

대마도에서 보낸 차왜 귤성진(橘成陳)이 동래에 도착했는데 볼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면서, ‘접위관(接慰官)을 만나 말하겠다.’고 하였다. 동래 부사가 계문하니, 정화제(鄭華齊)를 접위관으로 삼아 보냈다.

 

11월 13일 임인

예조가 부묘(袝廟)와 입학(入學)과 관례(冠禮)의 경사로 별시 초시(別試初試)의 액수(額數)를 품정하여 서울과 외방을 나누어 6백 인을 뽑도록 하였다.

 

지평 신정이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관직을 가진 채 시골에 내려갔기 때문이다. 이때 대각이 회피하는 자리가 되어, 체직되고자 하는 자들은 대각에 임명되었다는 말을 들으면 바로 도성 문밖 수십 리 길을 나가서는, 관직을 가진 채 고향으로 내려갔다며 곧장 인피하여 체직되기를 꾀했다. 식자들이 한심해 하였다.

 

집의 윤변이 재변을 인하여 상소하여, ‘삼남(三南)의 수전(水田)에 분수재(分數災)를 주고 목화밭에도 급재(給災)하며, 호서의 양전(量田)을 하는 고을에 그대로 구결(舊結)을 쓰도록 해줄 것’을 청하고, 또 훈국의 별대가 가진 폐단, 각 고을 조적(糶糴)을 탕감해 주는 문제, 안민창(安民倉)의 역사가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는 점, 산골과 바다 근처 여러 고을들을 일체 쌀로 거두는 것의 편리함, 내탕(內帑)과 각 아문의 은포(銀布)를 꺼내 백성의 부역을 보조해야 하는 마땅함을 말하였다. 소가 올라간 지 여러 날 만에 상이 그 소를 내려,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하게 하였다.

 

11월 14일 계묘

도승지 권대운(權大運), 우승지 이정(李程), 우부승지 박세견(朴世堅), 동부승지 이지익(李之翼) 등이 상소하여 체직을 청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헌부가 유혁연(柳赫然)을 체직하라고 논계했을 때 상이 괴이하고 망령스럽다고 배척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정언 유상운이 상소하여 정원이 복역(覆逆)하지 않은 잘못을 논박했기 때문에 대운 등이 사직한 것이다.

 

전라도에 10월 28일에 천둥 번개가 쳤다.

 

11월 15일 갑진

동지춘추 강백년, 봉교 조사석(趙師錫)을 강화에 보내, 종묘 각실(各室)의 시책(諡冊)을 베끼게 하였다.

 

대사성 남구만(南九萬)이 상소하여, 부묘는 큰 경사이니 별도로 한 번 과거를 열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고, 또 군사를 긁어모으는 일을 빨리 정지하고 베를 징수하는 것을 헤아려 감해주도록 청하였다. 상소가 들어간 지 4개월이 지나서야 상이 답하였다.
"과거는 중대한 일인데, 어찌 아무 사람이나 증설(增設)을 청하여 후세에 무궁한 폐단을 끼쳐서야 되겠는가."

 

11월 16일 을사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니 약방이 들어와 진료하였다. 이때 상의 오른쪽 턱 아래 응어리진 곳이 곪은 지 이미 오래되어 곧 저절로 터져나올 기세였는데, 의관들은 여전히 혹인가 의심하고 있었다. 도제조 허적이 침의(鍼醫)와 약의(藥醫) 여러 의원들을 거느리고 입시하였다. 상이 여러 의원들에게 차례로 들어와 진찰해 보도록 하였다. 약의들은 모두가 ‘침으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침의 가운데 어떤 의원은 ‘곪은 것이 아니고 담수(痰水)라.’ 하였고, 어떤 의원은 ‘이미 완전히 곪았으니 바로 따버려야 한다.’고 말해 의논이 일치하지 않았다. 이에 허적이 큰소리로 말하기를,
"의관(醫官)들이 의원이라는 이름만 지녔지 무슨 소견이 있겠습니까. 담핵(痰核)은 침으로 건드려선 안 된다고 하지만 이미 고름이 잡혔으니, 어찌 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며칠 더 살펴보다 침으로 따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도승지 권대운(權大運)이 나아가 아뢰기를,
"이미 대각의 신하들에게 배척을 받았으니, 참으로 감히 버젓하게 공무를 볼 수가 없습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대각의 논계를 괴이하고 망령되다고까지 한 것은 지나칩니다만, 그러나 이제 대각의 신하들이 봉환하지 않았다고 정원을 허물하는 것도 온당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대운이, 근일 형옥(刑獄)의 문서가 대부분 지체되고 내려지지 않고 있음을 말하고 물러났다.

 

경상 좌병사 이상경(李尙敬)을 파직하였다. 좌의정 허적이 입시했을 때에 상께 아뢰기를,
"이상경이 속오군(束伍軍) 도망자를 사목(事目)을 칭탁하고 먼저 목을 벤 다음에 계문을 올렸으니, 일이 매우 놀랍습니다. 병신년에 영장(營將)의 장계를 인하여 복계할 때에, 그 안에 효시하라는 말이 있기는 하였습니다만, 적을 앞에 두고 군대를 움직일 때와는 다름이 있습니다. 먼저 목을 벤 다음에 계문을 올리는 길을 가벼이 열어서는 안 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잡아다 추문하기를 청하고자 합니다만, 병조 판서 홍중보는 ‘파직시키는 것이 옳다.’고 하고, 비국의 다른 당상들은 ‘일이 군대에 관계되는 것이어서 만약 무거운 죄를 주면 군정이 허술해질 것이니 추고하는 것이 옳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먼저 목을 벤 다음에 계문을 올리는 것은, 군대를 운용할 때에 길이 아주 멀어서 품정을 하는 사이에 일의 기미가 바뀌게 되기 때문에 마지못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다. 사목에 있지도 않은 일을 멋대로 처리하였으니, 이것으로 죄목을 삼아 상경을 파직하라."
하였다.

 

이상진(李尙眞)을 대사헌으로, 이유태(李惟泰)를 찬선으로, 박증휘(朴增輝)를 사간으로, 박세당(朴世堂)을 헌납으로, 유하익(兪夏益)·이명익(李溟翼)을 지평으로 삼았다.

 

집의 윤변, 장령 이하(李夏)가 논계하기를,
"죄인 유흘(劉忔)은 토병(土兵)을 위협하여 죄없는 사람을 생매장하였으니,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사형을 감하여 정배하도록 한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다. 여러 달 동안 쟁집하였으나 상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또 논계하기를,
"온성 부사(穩城府使) 최관(崔寬)은 국경을 넘나드는 것을 엄하게 금지하지 못한 죄가 있으니, 잡아다 추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고, 또 논계하기를,
"전라 우수사 이간(李旰)은 일찍이 온성 부사로 있을 때에 탐학한 자취가 낭자한 죄가 있으니, 잡아다 추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였다. 모두 누차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11월 17일 병오

상이 집상전(集祥殿)에 나아가 종기를 터뜨렸다. 도제조 이하가 숙직하였다. 이날 상의 종기가 난 부분의 증세가 더욱 악화되자 약방에 명하여 침으로 따버릴 것인가를 의논하게 하였다. 약방이 여러 의원들과 들어가서 진찰해보고 결정할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허적 등이 입시하였다. 상의 종기는 크기가 작은 병만하였는데, 여문 부분은 색이 몹시 붉었으며 상의 신색도 매우 좋지 못했다. 약의(藥醫)들은 하루 이틀 더 기다리자고 하고 침의(鍼醫)들은 고름을 따버리자고 하는 등 의견이 일치되지 않자, 상이 큰 소리로 이르기를,
"길가에 집을 지으면 3년이 되어도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의원들이 이렇게 많으니 의논이 어떻게 일치되겠느냐. 고름 따는 것을 지체하다가 만일 두통이나 오한이 있게 되면 어쩌려고 하느냐. 속히 침 놓을 기구를 갖추고 오도록 하라."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물러나 여러 대신들에게 이 의논을 통지하는 한편 여러 기구들을 갖추어 다시 입시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러다가는 시간이 늦어질까 염려된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막중한 일을 어찌 밖에 있는 대신들에게 알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온 머리가 지끈거리는데다가 또 정수리 부위에 조금씩 통증이 오는데, 날씨가 추워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허적이 물러가기를 청하자, 도승지 권대운이 아뢰기를,
"임금의 병환은 밖에 있는 대신들에게 알리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여, 마침내 물러났다.
이때 상의 핵환(核患)이 갑자기 심해졌는데, 여러 의원들이 증세를 파악해내지 못했다. 조정의 의논은 모두들 의원들의 말을 가벼이 믿고서 경솔하게 침을 댈 수 없다고 하며 의논들이 여러 가지였고 인심이 흉흉하였으며, 약방의 여러 신하들도 얼굴에 핏기가 없었다. 다시 입시하여 침반(鍼盤)을 올리자, 상이 겉옷을 벗었다. 침으로 따려 하자 얼굴색이 변했는데, 대개 그것은 여러 의원들이 이에 앞서 혹에는 침을 대선 안 된다고 말하여 상의 마음에 의심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의관 윤후익(尹後益)이 침으로 따자 고름이 거의 한 되 가량 나왔다. 상이 낯빛이 비로소 온화해지며 시원하다고 하자, 도제조 이하가 기뻐 자신들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 몹시 땅겼기 때문에 침으로 딸 생각을 정한 것이다. 종기를 따버리고 나니 마음이 아주 시원하여 매우 기쁘다."
하였다.

 

경상도 합천(陜川)에 10월 28일 지진이 발생했다. 경주에 이달 3일 태풍이 불어 모래가 날리고 돌멩이가 굴렀다. 안개 같기도 하고 먼지 같기도 한 기운이 천지를 꽉 메워 햇빛이 점점 어두워져 사람을 분별할 수 없었고, 검은 기운이 태양을 가린 채 날이 저물었다.

 

11월 18일 정미

햇무리가 지고 양이(兩珥)가 있었다. 햇무리 위에 관(冠)이 있고 관 위에 배(背)가 있고 좌우에는 극(戟)이 있었다. 그 빛이 모두 안쪽은 붉고 바깥쪽은 푸른빛이었다. 무지개와 같은 흰 기운이 양이로부터 나와 비스듬히 북쪽을 가리켰는데, 길이는 각기 수십 장(丈)이고 너비는 각기 한 자쯤이었다.

 

날씨가 추워졌으므로 해조로 하여금 빈 가마니[空石]를 숙위하는 군사들에게 지급하게 하고 옷이 얇은 자들에게는 동옷[襦衣]을 지급하게 했다.

 

집의 윤변과 장령 이하(李夏)가, ‘조율을 잘못하여 대신에게 공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정언 이단석(李端錫)이 처치하여 출사시키자고 청하였는데, 윤변 등이 또 ‘구차하게 출사를 청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단석도 처치가 잘못되었다고 인피하여, 모두 체직되었다.

 

평안도에 이달 7일에 우레가 있었다.

 

11월 19일 무신

상이 집상전에 나가 침을 맞았다.

 

11월 20일 기유

지평 이명익(李溟翼)이 논계하기를,
"부호군 권집(權諿)은 전임 안동 부사 시절에 가까이 지내는 장사치에 물금첩(勿禁帖)를 만들어 주어 황장목(黃腸木)을 3천여 판(板)이나 베게 했는데, 대간의 논계로 인해 조사받을 때에 그의 아들을 보내 사사로이 청탁을 하여 마침내 죄에서 벗어났습니다. 잡아다 추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고, 또 논계하기를,
"안동 부사 이동명(李東溟)은 그의 사사로운 청탁을 받고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으니, 파직하고 서용치 마소서."
하였는데, 모두 따르지 않았다.

 

이날 헌부가, 서필원의 관작을 삭탈하라는 논계와 유혁연을 체직하라는 논계를 정지하였다.

 

11월 21일 경술

옥당이, 지평 이명익이 혼자서 서필원에 대한 논계를 정지시킨 것을 논하여 차자를 올려 파직을 청하며 아뢰기를,
"양사가 한꺼번에 빈 때를 엿보아, 양사가 같이 발의한 논의를 앞장서서 혼자 정지시켰으니, 기회를 틈탔다는 혐의가 있을 뿐 아니라 또한 방자하고 거리낌없는 조짐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11월 23일 임자

밤에 달이 태미원(太微垣)으로 들어갔다.

 

지평 유하익(兪夏益)이 권집과 이동명(李東溟)의 일을 연계하니, 상이 일체 잡아들여 신문하라고 명하였다.

 

11월 24일 계축

신명규(申命圭)를 집의로, 변황(卞榥)을 장령으로, 신정(申晸)을 지평으로, 윤지선(尹趾善)을 정언으로, 정영(鄭韺)을 경상 우병사로, 권도경(權道經)을 충청 수사로, 조성보(趙聖輔)를 평산 부사(平山府使)로 삼았다. 조성보는 대각에 있으면서 논의가 단정하지 못했고 또한 서필원을 논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는데, 이조 참의 김만기(金萬基)가 그의 청망(淸望) 길을 막자 조성보가 마음이 편치 못하여 힘껏 외직을 구하여 보임된 것이다.

 

11월 25일 갑인

상이 집상전에 나아가 왼쪽 턱 아래 응어리진 곳에 침을 맞았다. 약방 제조 홍중보(洪重普)가 상에게 아뢰기를,
"훈련 별대(訓鍊別隊)를 자원병으로 모집하란 명이 이미 내렸는데, 경주 영장(慶州營將) 목임기(睦林奇)는, 사람들이 응모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소속된 각 고을에 분부하여 강제로 숫자를 정해, 뽑아 배정하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은 도감의 본래의 의도가 아닙니다. 멋대로 호령을 내려 인심을 소요스럽게 하였으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충청도의 백성들도 이 일로 인해 한창 소란스럽습니다. 옥당의 여러 신료들도 모두들 말하고 있으니, 이같은 무리들은 보이는 대로 중죄로 다스려 나머지 사람들을 격려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좌의정 허적이 자못 목임기를 신구하는 말을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목임기는 무겁게 추고하라. 강제로 배정하지 못하게 할 일로 엄하게 신칙하라."
하였다.
이때 상주 영장(尙州營將) 민섬(閔暹)은 신중히 봉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붙잡혀 신문을 당하였는데, 목임기는 백성을 소란스럽게 했으면서도 단지 추고만 당했으므로 인심이 심복하지 않았다.

 

11월 26일 을묘

집의 신명규(申命圭) 등이 아뢰기를,
"서필원에게 죄를 주라고 아뢴 것이 이미 여러 달이 지났으니 비록 청한 것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공의(公議)는 이미 펴진 것이므로 한결같이 오랫동안 버틸 필요는 없습니다만, 전 지평 이명익(李溟翼)은 양사가 함께 발의한 논계를 혼자서 정지시켜 뒤폐단을 열었으니 파직하소서."
하였다. 여러 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논계하기를,
"지평 유하익(兪夏益)은 명익이 멋대로 정계한 뒤 끝내 다시 논계하지 않았으니, 대각의 체모에 어긋납니다. 체차하소서."
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다시 서필원의 관작 삭탈을 논했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11월 28일 정사

장령 정중휘(鄭重徽)가 사직소를 올리면서, 뭇 벼슬아치들을 면려시키고 언로를 널리 열며, 가까운 시종신들을 자주 접견하여 묻고 강론하며, 탁전(度田)과 군사 충원[簽軍]을 시기를 헤아려 천천히 거행함으로써 인심을 위로하며, 어사를 파견하여 벼슬아치들의 출척을 분명히 할 것을 청하였다. 사직소가 들어간 지 한 달 남짓이 되어서야 상이 답하였다.
"그대의 진언한 정성을 가상히 여긴다. 사직하지 말라."

 

행 대사간 강백년(姜栢年)이 사직소를 올리면서, 공구수성할 것을 청하자, 상이 따뜻한 말로 답하였다.

 

공조 판서 유혁연(柳赫然)이 탄핵당한 뒤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박한 말을 굳이 혐의할 것 없다.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장령 정중휘가 ‘일찍이 유혁연을 논박했고, 또 병조 당상의 조율이 합당함을 잃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1월 29일 무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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