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21권, 현종 10년 1669년 10월

싸라리리 2025. 12. 6.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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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신유

신덕 왕후를 태묘에 부묘하고, 대신을 보내 제사를 섭행케 했다. 중외에 사면령을 내리고 백관을 가자하였다. 백관들이 전(箋)을 받들어 축하했다.

 

신덕 왕후(神德王后)의 휘호(徽號)를 소급해서 올린 옥책문(玉冊文)은 다음과 같다.
"삼가 생각건대 떳떳한 의전이 오랫동안 빠졌기에 이에 배향하는 성대한 의전을 거행합니다. 아름다운 옥책문을 소급해 올리니 다행히 드물었던 예전을 양양하게 거행하여 선왕의 뜻 이에 이으니 우리 왕가의 예절 또한 마땅하게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신덕 왕후께서는, 복록이 무궁한 귀한 문벌에서 태어나 성조의 짝이 되시어, 가까이서 용비(龍飛)의 왕업을 도우셨으니 난신(亂臣) 안에 부인이 있는 것과 같았습니다.053) 도산(塗山)의 덕화054) 소릉(昭陵)의 슬픔055)   일찍 존귀한 왕비로 바로 계시어 천자로부터 고명(誥命)을 받으셨으니 모두들 도산(塗山)의 덕화를 바랐는데, 어느덧 소릉(昭陵)의 슬픔이 맺히셨습니다. 이에 덕을 빛낼 시호(諡號)를 올렸으니 모든 일이 이미 끝난 것이었습니다. 마땅히 종묘에 배향되시어 궤연(几筵) 함께 해 백세토록 불천위(不遷位)되어야 했습니다. 순임금 순행 길에 돌아가시자 끝내 주나라 묘정에 함께 배향되지 못하셨습니다. 이는 의논 드린 신하의 잘못으로서 길이 짝이 되신 깊은 생각 본받지 못한 것이거늘, 여러 조종 답습한 채 효성 빛낼 승부(陞袝)를 미처 겨를하지 못해, 드디어 신리(神理)의 억울함 빚어 내었으니 실로 모든 백성들이 탄식하던 바였습니다.
오직 서책들에 증거가 있어 그래도 아름다운 말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향 드릴 장소가 없으니 근본을 보답코자 생각함에 편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떳떳한 도리에 흠결이 있는 것이니 이어받은 후사의 입장에 있어서 감히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옛 사적을 고증하고 인정과 예문(禮文)을 참작해서, 능침을 새롭게 수리하자 감춰있던 빛 비로소 빛납니다. 돌아가신 영령들께서도 모두 종묘에 모이시어 밝으신 영혼 거의 위로가 될 것입니다. 백성들의 마음 살펴볼 수 있으니 진실로 억조 백성의 바람에 부응한 것이며, 하늘의 도는 반드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니 3백 년이 지나서 이에 행해진 것입니다. 성대한 의식을 처음과 같이 베풀고 휘호를 올리오니 감회가 더욱 일어납니다. 삼가 신하 아무 관직의 아무를 보내 옥책문을 받들어 휘호를 올려 순원 현경(順元顯敬)이라 합니다. 돌아오시어 밝게 보시고서 가녀린 정성 굽어 살피소서. 보배로운 옥첩(玉牒) 향기를 드리워 하늘과 땅처럼 오래하고, 아름다운 글 경사가 넘쳐 후손들 더욱 번창케 하소서."

 

중외에 내린 교서에서 일렀다.
"선대 조상을 뒤미쳐 부묘하는 의식을 거행하느라 태묘(太廟)에 일이 있었는데, 온 나라와 경사를 함께 하는 뜻을 각 지방에 고하노라.
본래 인정의 편안한 바에 따라 한 것이니 정말 천도(天道)는 반드시 회복될 때가 있도다. 우러러 생각하면 옛 우리 왕후께서는 실로 나라를 세우신 어지신 왕비이다. 중궁의 자리에 바르게 계시어 천자의 명을 빛나게 받으셨고, 동방의 모후(母后)로 임어하시어 풍화의 기틀을 맨 먼저 천명하셨느니라. 비록 세대가 몇 차례 바뀌었으나 아직도 덕스런 말씀 쟁쟁하고, 경계하고 간하신 말씀들 뒤미처 생각하니 성조(聖祖)의 애달픈 비통 깊게 느껴지노라. 산릉(山陵)을 공경히 받들었으니 헌묘(獻廟)056)  의 효성 지극히 갖추어짐이니라. 배향이 끝내 세실(世室)에서 빠지고 천향(薦享)할 재실(齋室)마저 마련되지 못했는데, 잘못된 의논은 조정의 신료들에게서 처음 발의된 것이었지 선왕의 뜻은 참으로 아니었다. 대개 한 왕후여야 한다는 옛 제도를 따른 것이었는데 마침내 여러 조정이 인습하게 되었다.
살아서는 짝이 되시는 높은 자리에 올라 명호(名號)까지 이미 정해졌건만 돌아가셔서는 궤연을 함께해 흠향하지 못했으니 떳떳한 법도에 흠결이라 하리로다. 종묘와 관계되어 참으로 막대한 일이기는 하지만 신령이 의탁할 곳 없으니 어찌 인정이나 예절에 편안할 수 있겠느냐. 우선 능묘에 의장들을 닦아 세우고 기록들을 다시 전적(典籍)에서 고증했노라. 한제(漢帝)가 대의(大義)057)  를 깊게 고민한 것은 세상이 함께 칭송하는 바요, 송후(宋后)가 원풍(元豊) 연간에 비로소 승부(陞袝)된 것058)  은 때를 혹 기다렸던 듯하다. 큰 효도는 뜻을 잘 이어받는 것을 귀중한 것으로 생각하고 마땅하게 변통하는 것을 더욱 귀중히 여긴다. 선유(先儒)들도 부묘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니 어찌 전후의 차이가 있겠는가. 이는 진실로 나의 큰 책무이니 더욱이 지엄한 윤리와 관계됨에 있어서랴. 이미 이달 29일에 책보를 올리고 존호를 더하여 순원 현경 신덕 왕후(順元顯敬神德王后)라 하고 10월 초하루 종묘에 부묘하여 제향하였다.
종묘 모습 바라보니 광채 더욱 일어나고 예용(禮容)을 펴노라니 감회가 절로 인다. 돌아가신 영령 여기에 모이셨으니 하늘에 계신 조종들 마음에 위안이 있을 것이고, 사람들의 마음에서도 읽을 수 있으니 온 나라 신민의 바람에 응답함이라. 감춰졌던 광채 다시 빛을 발하니 다행히 3백 년 동안 어두워지지 않았고, 떳떳한 법도 이에 빛나니 천만세 후대까지 이야깃거리로 전해지리라. 전에 없던 성사로 영원히 기억되리니 어찌 아래에 미치는 큰 은혜를 빠뜨리랴. 이달 초하루 새벽 이전의 잡범으로 사죄 이하에 해당하는 온갖 범죄들을 모두 용서해주고, 벼슬에 있는 자들은 각기 한 자급씩 올려주되 급을 더 이상 올릴 수 없는 자들은 대신 가자하도록 하라.
아, 이 먼 조상을 추념하는 정성을 미루어 백성들의 풍속이 두터워지기를 기대하며,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을 펴 모든 백성들과 더불어 유신(維新)을 도모코져 하노라"
사신은 논한다. 신덕 왕후께서 고명(誥命)을 받고 중궁의 자리에 올라 한 나라의 모후(母后)로 계셨으니, 신의 왕후(神懿王后)와 적서(嫡庶)의 구분이 없었다. 그런데 방석(芳碩)의 난으로 인해 마침내 깎아내려야 한다는 의논이 생겨났으니, 그 당시 의논을 제기했던 신료들의 죄를 이루 다 꾸짖을 수 있겠는가. 능묘를 버려둔 채 돌보지 않았고 제사드리는 예절을 빠뜨리고 거행하지 않은 지 거의 3백 년이 되었다. 바른 논의가 한 번 제기되자 중외가 똑같이 주장하여 능묘를 수축하고 정자각을 건립하는 일들을 차례차례 거행하고, 마침내 종묘 제향까지 윤허하여 다시 인륜이 바로잡히니, 3백 년 동안 신령과 백성들이 가졌던 분한 마음을 풀어준 일로서 천하 후세에 전해질 것이다. 식자들은 사직의 장구함이 반드시 이 일에서 힘입을 것이라고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52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689면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종사(宗社)


[註 056] 헌묘(獻廟) : 태종의 능호.[註 057] 한제(漢帝)가 대의(大義) : 이는 한 고조(漢高祖)의 비인 여후(呂后)와 박희(薄姬)에 대해, 광무제(光武帝)가 박희를 정비로 인정해 종묘에 그 신주를 올려 모시고 여후를 한나라를 위태롭게 한 황후라 하여 종묘에서 끌어내려 원(園)으로 따로 모신 것을 이른 말인 듯하다. 박희는 한나라의 3대 왕인 효문제(孝文帝)의 모후(母后)이다 《후한서(後漢書)》 광무제기(光武帝紀) 중원(中元) 원년조.[註 058] 송후(宋后)가 원풍(元豊) 연간에 비로소 승부(陞袝)된 것 : 이는 송(宋)나라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원풍 6년에 종묘에 배향되지 못하고 별묘(別廟)에 모셔져 있던 선대 황후들을 종묘에 배향한 것을 이른다. 《송사(宋史)》 신종기(神宗紀) 원풍(元豊) 6년조.
사신은 논한다. 신덕 왕후께서 고명(誥命)을 받고 중궁의 자리에 올라 한 나라의 모후(母后)로 계셨으니, 신의 왕후(神懿王后)와 적서(嫡庶)의 구분이 없었다. 그런데 방석(芳碩)의 난으로 인해 마침내 깎아내려야 한다는 의논이 생겨났으니, 그 당시 의논을 제기했던 신료들의 죄를 이루 다 꾸짖을 수 있겠는가. 능묘를 버려둔 채 돌보지 않았고 제사드리는 예절을 빠뜨리고 거행하지 않은 지 거의 3백 년이 되었다. 바른 논의가 한 번 제기되자 중외가 똑같이 주장하여 능묘를 수축하고 정자각을 건립하는 일들을 차례차례 거행하고, 마침내 종묘 제향까지 윤허하여 다시 인륜이 바로잡히니, 3백 년 동안 신령과 백성들이 가졌던 분한 마음을 풀어준 일로서 천하 후세에 전해질 것이다. 식자들은 사직의 장구함이 반드시 이 일에서 힘입을 것이라고 하였다.

 

전라도 진사정동오(鄭東五) 등 2백 55명이, 송(宋)나라의 세 현인과 우리 나라의 두 현인을 문묘에 종사하자고 청했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3일 계해

박증휘(朴增輝)를 사간으로, 이민서(李敏敍)를 사인으로, 강호(姜鎬)를 원양 감사로 삼았다.

 

평안도의 무사 시재(試才)에서 입격한 73명을 모두 직부 전시(直赴殿試)케 하라고 명했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삼을 캐는 사람들의 일을 묻자, 영의정 태화가 대답하기를,
"감사가 효시를 청하였으니 법대로 베는 것이 옳겠으나, 금법을 범한 정상이 가벼운 편이고 또 법이 평소부터 정해져 있던 것도 아니니, 우선 한 등 낮은 율로 다스리고 이 뒤로는 결단코 용서해 주지 않는 것으로 정식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 머리를 깎고 감옥을 넘어 도망친 사람은 베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강화 유수 김휘(金徽)가 아뢰기를,
"본부의 나룻배가 썩어 쓸 수가 없습니다. 지금 바꾸었으면 하는데 본부의 물력으로는 마련해 낼 길이 없습니다."
하자, 상이 본부의 모미(耗米) 4백 섬을 내주어 배를 바꾸라고 명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평안도의 시재 무사들에게 이미 직부 전시(直赴殿試)할 수 있는 자격을 주셨는데, 직부전시는 으레 식년시(式年試)에 응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들에게는 이번 정시(庭試)에 응시케 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 박장원(朴長遠)이 아뢰기를,
"정릉(靖陵)의 정자각(丁字閣) 수리를 이미 끝냈으니 경릉(敬陵)의 정자각을 앞서 의논한 대로 중건해야겠는데, 겨울철이 임박하여 일을 시작하기가 어렵습니다. 내년 봄까지 기다렸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공조 판서 민정중(閔鼎重)이 아뢰기를,
"안민창(安民倉) 조운 사목(漕運事目)에 ‘4월 30일로 기한을 정해 기한 전에 원산(元山)의 차원(差員)에게 점고(點考)받은 것은 경강(京江)으로 바로 보내고, 기한을 넘겨 원산에 도착된 것은 안민에 보관시켜 그것을 차례로 조운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올 여름에 조운했던 일로 본다면 기한이 급박한 듯합니다."
하니, 상이 5월 10일까지로 기한을 개정하라고 명했다. 정중이 또 아뢰기를,
"안민 창고 근방에 있는 고을들은 육로로 운송해서 본 창고에 직접 납부하는 것이 사목이지만 백성들이 불편하게 여깁니다. 배를 삯내어 경창(京倉)에 직접 납부하려는 자들에게는 또한 마땅히 소원대로 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승지 박세견(朴世堅)이 아뢰기를,
"판부사 송시열의 상소가 들어온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지금까지 내리지 않고 있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세견이 또 아뢰기를,
"제주 목사 이인(李𡐔)이 바다 밖에서 임무를 수행하다가 죽었으니, 생각해 주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의 상여가 지나는 도(道)로 하여금 담꾼을 차출해 호상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박장원이 아뢰기를,
"고 부제학 이단상(李端相)이 죽은 뒤 그의 처자식들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제사를 지내지 못하니 구휼해 주시는 은전이 있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해조로 하여금 장례에 드는 물품을 지급하라고 하였다. 이조 판서 조복양(趙復陽)도 단상의 발인 때 담꾼을 지급할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부제학 이민적(李敏迪)이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가까운 곳에서 모시고 있으니 감히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상께서 병을 앓으시는 것에 대해서 바깥 사람들은 혹 전하께서 섭생(攝生)을 삼가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마음을 맑게 지니고 욕심을 줄이는 것이 병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의 첫 번째 공부입니다. 전하께서는 유의하소서."
하였다.

 

경기에 소 돌림병이 크게 퍼졌다. 9월 28일에 우박이 떨어져 각종 곡식이 손상되었다.

 

전라도의 갯가에 사는 백성 입이(立伊) 등 21명이 2월 28일에 표류하여 유구국(琉球國)에 도착하였다가 유구국으로부터 일본에 보내졌는데, 이때에 대마도주가 차왜(差倭)를 보내 거느리고 왔다.

 

밤에 우레와 번개가 쳤다.

 

10월 4일 갑자

우레가 치고 우박이 내렸다.

 

좌의정 허적이 상차하여 체직을 청했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10월 5일 을축

정원이 아뢰기를,
"순전히 음만 있고 양은 사라져 모든 동물이 겨울잠에 드는 이때에 갑자기 우르릉 천둥이 치고 비가 내렸습니다. 하늘이 보이는 위엄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큰 재변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도 공경과 두려움으로 하늘을 대하시며 마음에 놀라움을 일으키는 것이 반드시 평일의 배는 되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잡고 놓는 것이 일정하기 어려워 변고를 만난 초기에는 두려워하다가도 조금 지나게 되면 그 마음이 차츰 해이해져 으레 그러려니 하면서 편안해 합니다. 그러다 마침내는 위험과 어지러움에 빠져 구원할 수 없게 되니, 경계해야 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두려워하는 마음을 재변을 만난 처음과 같이 항상 지녀 처음부터 끝까지 해이됨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하신다면 우레가 치는 것으로 인해 두려워해서 도리어 복을 이루는 기회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재앙을 만난 근심 때문에 앉으나 누우나 편치 않다. 지금 아뢴 말을 보건대 경계와 가르침이 간절하기 그지없으니 내 마음이 매우 기쁘다. 마음에 두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 상이 여러 달째 건강이 좋지 못했는데 재변까지 속출하였으므로 여러 사람들이 걱정하고 두려워하였다.

 

이산군(理山郡)의 국경을 넘나든 죄인 김유례(金有禮)를 국경에서 효시하였다. 미처 유배지에 보내기 전에 감옥을 탈출해 도망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가 붙잡혔기 때문이다.

 

예조가 아뢰기를,
"신덕 왕후의 부묘례를 이미 마쳤습니다. 왕후의 부모들을 추봉(追封)하는 의전과 관향의 호를 승급시키는 등의 일을 해조로 하여금 품지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이번 신덕 왕후의 부묘례는 수백 년이 지난 뒤에 거행된 것입니다. 이미 진하례도 치루었고 사면령도 반포하였으니, 과거를 보여 선비들을 뽑음으로써 온 나라와 경사를 함께 하는 뜻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예전의 규례를 상고해 보니 혹 다른 경사와 합해서 별시(別試)나 증광시(增廣試)를 보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번에도 다른 경사와 합쳐 시행하라고 하였다.

 

부제학 이민적(李敏迪), 응교  남이성(南二星) 등이 재이로 인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올해 여러 도의 해일과 양남(兩南)의 수재 또한 작은 재변이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10월에 천둥 번개가 번쩍번쩍하며 조용하지를 않습니다. 하늘은 진노해 있고 백성들은 괴로워하며, 어진 보필들은 산속으로 도망쳐버리고 언로(言路)는 꽉 막혀 있습니다. 그런데도 게으르고 태연히 지내며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뜻이 없고, 토목 공사를 한창 일으키며 너무도 태평한 기상을 갖고 있습니다. 내 쪽에서 마음을 닦고 잘못을 성찰함이 이와 같고 보면 능히 상제와 귀신들로 하여금 위엄과 노여움을 거두어들이게 하여 화기(和氣)로 되돌릴 수 있겠습니까.
근래 옥후가 편치 못하여 오랫동안 조회를 보지 않으셨습니다. 신이 지난번 입시하여 우러러 옥용(玉容)을 뵈오니 크게 수척하여 옛날과 매우 달랐습니다. 신자(臣子)된 자의 근심이 어느 곳인들 미치지 않겠습니까. 어리석은 소견에 치미는 바가 있어 외람되게도 섭생을 삼가하시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보잘것없는 천한 정성이지만 성상께서는 유념해 주소서. 신들이 가까운 자리에 있는데 한가로이 계실 때 모시면서 때로 좋은 말씀을 드리게 된다면 반드시 환관이나 궁첩(宮妾)들보다는 나은 점이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혹 틈나는 대로 인견해 주신다면 전하께 미치는 효과가 또한 적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베로 걷는 역(役), 곡식으로 걷는 역, 인력을 동원하는 역이 있는데 군자는 그중 한 가지만 쓰고 두 가지는 풀어주어야 한다. 두 가지를 아울러 시행하면 굶주려 죽은 백성이 있게 되고 세 가지를 아울러 시행하면 부자(父子)가 흩어지게 된다.’고 했습니다. 지금 수만의 군사 선발과 양도의 양전(量田)을 한꺼번에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비록 그만둘 수 없는 정사이겠지만 두 가지 큰 역을 한꺼번에 실시하니, 백성들이 어떻게 소요스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처럼 하늘이 노여워하고 백성이 원망하며 재변이 거듭되는 시기를 당해서는 더욱 백성의 힘을 아끼고 길러 인심을 수습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찌 이기기나 좋아하고 자랑이나 늘어놓는 일을 마음껏 행하며 백성을 위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호서(湖西)의 수재와 해서(海西)의 해일은 모두가 등한히 볼 재앙이 아닙니다. 우선 양전하는 일을 중지시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듯합니다.
또 군사를 선발하는 일에 대해서 논하겠습니다. 당초에 묘당의 의논은 본시, 경병(京兵)이란 오랫동안 군역(軍役)에 종사해야 하는 곤란한 점이 있기 때문에 정원이 줄어도 채우지 않으면서 번상(番上)하는 제도로 변통코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연례의 포수(砲手) 정원을 줄이지 않은 채 별도로 뽑아 채우려 하여 또 다시 시끄러워졌습니다. 이는 실상 두 가지를 아울러 함께 존속시키는 것이니 어찌 이것이 오랜 군역을 변통시켜 번상하게 한 본뜻이겠습니까. 신들의 어리석은 의견으로는 별도로 뽑아 채우는 것을 그만둘 수 없을 것 같으면 연례의 포수 정원을 그대로 보충시켜선 안 될 것이라 여깁니다."
하니, 상이 관대하게 비답하였으나 끝내 채택해 시행하려는 뜻은 없었다.

 

황해도 장련(長連) 등의 고을에 9월 29일 우박이 내려 곡식이 손상되었다.

 

밤에 화성(火星)이 태미원(太微垣) 단문(端門) 안으로 들어갔다.

 

10월 6일 병인

헌납 이휴징(李休徵)이 계사 초고를 고쳐 물의에 비난을 당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0월 7일 정묘

정시를 베풀어, 문과에 한태동(韓泰東) 등 7명을, 무과에 안후길(安厚吉) 등 1백 41명을 뽑았다.

 

평안도 창성(昌城)에 우박이 내려, 늦곡식이 모두 손상되었다.

 

10월 8일 무진

장령 변황이 동료와 상의도 하지 않고 지레 전계한 잘못을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장령 이세화(李世華)가 처치하여 출사를 청했다. 그런데 세화가 또 처치를 잘못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자, 변황이 다시 인피하여, 모두 체직되었다.

 

10월 9일 기사

정언 김덕원(金德遠)을 특별히 체직시켰다. 상소가 들어온 지 석 달이 되었는데, 이때 이르러 이 명이 있은 것이다. 정원이 아뢰기를,
"말이 채용할 만하면 채용하고 채용할 만하지 못하면 제쳐두어, 관대하게 용납하는 것이 언로를 넓히는 길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것은 바로 제쳐두는 뜻이다."
하였다. 대관이 간쟁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니, 약방이 들어와 진찰하고 이어 뜸을 떴다. 도제조 허적이 아뢰기를,
"9월의 천둥도 극히 염려스러운 것인데 10월의 큰 천둥이 심상하지 않은데다 겸하여 우박의 재변까지 있으니, 공구 수성(恐懼修省)이 진부한 말이지만 이외에는 우러러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신처럼 보잘것없는 사람이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니, 옛 일에서처럼 책임을 지워 면직시킴으로써 하늘의 견책에 답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허물은 실상 나에게 있다. 어찌 경들에게서 연유된 것이겠는가."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지금 현재 다른 것은 논할 것이 없고 상께서 임금의 굳건함을 떨치지 못하고 계시므로 죄를 두려워하여 직책을 다하려는 마음을 가진 신하가 없으니, 이것이 참으로 민망스러운 것입니다."
하였다. 병조 판서 홍중보(洪重普)가 아뢰기를,
"근래 외방이 한정(閑丁)을 찾아내는 일로 인해 매우 소란합니다. 강도(江都)와 광주(廣州)로 이속시킬 수군(水軍)이 4백여 명에 이를 것인데, 경기도 내의 약간 고을에서 일시에 채우기에는 그 형세가 어렵습니다. 변통하는 방법이 있어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3년을 기한으로 채우게 하라고 하였다. 승지 홍만용(洪萬容)이 아뢰기를,
"정언 김덕원(金德遠)의 말이 비록 신중치 못했으나 대관을 특별히 체직하는 것은 언로에 방해되는 점이 있으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영의정 정태화가 겨울 천둥으로 인해 차자를 올려 면직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재변이 생긴 허물은 실상 나에게 있다. 경이 사직할 것이 뭐 있겠는가. 안심하고 속히 출사하여 나랏일을 구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판부사 송시열의 사직 상소가 들어온 지 한 달이 되었는데, 이때 이르러 상이 비로소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사관을 보내 유시하였다.

 

좌참찬 송준길이 예를 의논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겸하여 경계하고 깨우치는 뜻을 아뢰었는데, 상이 답하기를,
"경계하고 깨우쳐주는 말들이 절실해서 내 깊이 감탄했다. 성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부알(袝謁)하는 예는 이미 차자의 말대로 시행하였다. 나의 병이 심해 부묘례를 직접 행할 수 없었으니, 마음의 불안을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경은 나의 뜻을 몸받아 속히 마음을 바꾸어 지극한 바람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고, 사관을 보내 전유하였다. 이때 상의 병이 오래되어 모든 일을 지체했으며 크고 작은 소장에 즉시 비답을 내리지 못했는데, 인하여 관례가 되어버렸으므로 여러 신료들이 더욱 해이해졌다.

 

대사간 이익(李翊)이 직임을 띤 채 고향에 내려갔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우박 피해가 매우 심한 평안도의 고을에 급재(給災)하였다. 감사 민유중(閔維重)의 청을 따른 것이다.

 

평안도 철산(鐵山)에 9월 26일 우박이 내려 늦곡식이 많이 손상되었다.

 

10월 11일 신미

이조가 아뢰기를,
"신덕 왕후 어머니의 성씨가 나타나 있는 곳이 없습니다. 《실록》을 상고해 보아야 그 성향(姓鄕)을 찾을 수 있을 듯합니다. 《실록》을 상고해 내어 봉증(封贈)을 거행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원양도(原襄道) 영월(寧越)과 경기 여주(驪州) 등 여섯 고을에 이달 4일에 우박이 내려 곡식이 손상되었다.

 

영의정 정태화의 사직소에 불윤 비답을 내렸다.

 

10월 13일 계유

장선징(張善澂)을 대사간으로, 이하(李夏)·정중휘(鄭重徽)를 장령으로, 박세당(朴世堂)을 헌납으로, 이후징(李厚徵)을 지평으로 삼았다.

 

고 판삼사사(判三司事) 강윤성(康允成)에게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상산 부원군(象山府院君)을 추증하였다. 신덕 왕후의 아버지였다. 신덕 왕후의 성향 곡산군(谷山郡)을 승격시켜 부(府)로 삼았다.

 

예조 정랑 강복선(姜復先)을 보내 이종학(李種學)·유희춘(柳希春)·박순(朴淳) 등의 서원에 사액(賜額)하고 치제(致祭)하였다.

 

10월 14일 갑술

홍문관이 혼천의(渾天儀)와 자명종(自鳴鐘)을 올렸다. 앞서 상이 이민철(李敏哲)에게 명해 물의 힘으로 돌아가는 혼천의를 만들게 하고, 송이영(宋以穎)에게는 자명종을 만들게 하고 홍문관으로 하여금 맡아 감독케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민철 등이 완성하자 옥당이 만드는 방법을 글로 적어 올렸다. 상이 이르기를,
"두 사람이 몸과 마음을 기울인 공로가 결코 적지 않다. 해조로 하여금 참작해 논상토록 하라."
하였다.

 

10월 15일 을해

대사간 장선징이 인피하며 아뢰기를,
"신이 지난해 본직에 있으면서 망령스런 논의를 드렸었는데, 요사이 조정의 의논이 그 허실을 의심해서 해를 넘긴 지금 비로소 조사케 하였습니다. 신의 말이 믿음을 얻지 못하고 있는 정상이 이미 드러났으니, 감히 다시 대각에 들어갈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하고, 또 지금 추고받는 중에 있음을 이유로 사직하니, 처치하여 체직시켰다.

 

충청도에 소 돌림병이 크게 번졌다.

 

10월 16일 병자

권대운(權大運)을 도승지로, 이지익(李之翼)을 승지로, 신명규(申命圭)를 필선으로 삼았다.

 

10월 17일 정축

사간 박증휘(朴增輝), 지평 이명익(李溟翼)이 참알(參謁)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피했는데, 지평 이후징(李厚徵)이 말을 엮어 출사를 청했다. 그런데 증휘 등이 재차 인피하자, 후징이 처치가 잘못되었다는 이유로 역시 인피했는데, 모두 체직되었다.

 

10월 18일 무인

천둥이 쳤다.

 

동지 정사 민정중(閔鼎重), 부사 권상구(權尙矩), 서장관 신경윤(愼景尹)이 청나라로 갔다.

 

10월 19일 기묘

전라도 남원(南原)·고부(古阜) 등 고을에 9월 29일과 30일에 우박이 내려 각종 곡식들이 많이 손상되었다.

 

개성부에 소 돌림병이 크게 번졌다.

 

10월 20일 경진

밤에 천둥과 번개가 쳤다.

 

좌의정 허적, 관상감 제조 민희(閔熙), 예조 참의 이준구(李俊耉)와 정랑 조치중(曺致中), 선공 봉사(繕工奉事) 안찬(安燦) 등을 보내 헌릉(獻陵)을 봉심(奉審)하고 사초(莎草)를 갈아 입혔다.

 

평안 감사 민유중(閔維重)이 치계하여 아뢰기를,
"강가의 백성들이 국경을 넘어가 삼(蔘)을 캐는 것은 큰 이익이 있어서입니다. 사람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금령(禁令)을 범하여 만분지 일의 요행을 바라는 계책을 내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그러나 신이 삼가 삼 캐는 것을 금지하는 절목을 보건대, 부질없이 번거롭고 가혹하게만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편안히 본업에 종사할 수 없게 하고, 죄를 범한 것이 발각된 뒤에 미쳐서는 또 모두를 법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본업을 잃고 주림과 추위에 시달리게 되면 무슨 짓을 하지 않겠으며, 국법이 엄하지 않으면 간계와 악행이 징계되는 바가 없으니 무슨 죄를 범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국경을 넘어가는 일을 막아 없애고자 한다면 그 요점은, 백성들을 권해 농사에 힘쓰게 해서 그들의 생활을 풍족하게 해주며 죄를 범했을 때는 법대로 시행해 그 금법(禁法)을 엄하게 하는 데 있을 따름입니다.
농사철을 빼앗지 않는 것은 왕도정치에서 최우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강가의 각 고을들이 4월부터 9월까지 매달 여섯 번씩 관문(官門)에 모아 점고하고 또 차사원(差使員)이 불시에 벌이는 별도의 점검이 있습니다. 백성들이 농사철에 닥쳐 있으면서도 도로에 바쁘게 오가는 것이 거의 빈 날이 없으니, 비록 농사를 짓고 싶어도 실상 겨를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밭을 갈아두고서 파종치 못하는 사람도 있고 파종하고서 김을 매지 못하는 자도 있어, 가을이 된 뒤에는 밭에 풀만 무성해 수확이 드문 형편입니다. 굶주림에 먹을 것을 얻지 못하며 추위에 옷마저 얻지 못하고 보면, 비록 국경을 넘어 삼을 캐는 일이 반드시 죽는 일이란 것을 알지만 극도의 추위와 굶주림에 어쩔 수 없이 법을 범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 정상이 또한 애처롭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이후로는 5일에 한 번씩 점고하는 규정을 바꿔 매달 세 번씩만 점고하도록 하여 오가는 폐단을 없애 농사에 전력할 수 있게 해주고, 또 수령들로 하여금 농사를 특별히 권장케 하여 그들이 의식(衣食)의 근본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게 하소서. 그리고 파수꾼을 둔 곳에도 늘 엄히 단속시켜 법을 범하고 국경을 넘어 삼을 캐는 자가 있으면 그때마다 바로 계문해서 국경에 효시케 하소서. 또 그 마을의 이장(里長)이며 통장(統長)들을 엄한 형벌로 무겁게 다스려서 많은 백성들을 경계시킨다면, 거의 본업에 안주하고 살아가는 것에 재미를 붙여 전처럼 자신을 내팽개치고 죽음의 길을 밟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염려되는 것은 국법이 비록 엄하더라도 상이 없으면 시행되지 않는 점입니다. 무릇 국경을 넘는 자들을 붙잡아 아뢰는 사람들에게는 수령과 변장(邊將)과 군교(軍校)를 막론하고 그중 공이 으뜸인 자를 뽑아 상을 내리되 사나운 큰 도적을 붙잡은 것과 같게 하소서. 그러면 상과 형벌이 밝아지고 금령이 저절로 엄해져 간특한 백성이 반드시 국경을 넘지 못할 것이고, 혹 국경을 넘는다 할지라도 감추어 주는 폐단이 없어질 것입니다. 묘당에 내려 헤아려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의논해 아뢰기를,
"국경을 넘어 삼을 캐는 것을 금지시킨 것이 엄하고 분명하지만 큰 이익이 있기 때문에 죽음을 무릅쓰고 금령을 범하는 것이니, 탈을 낼 근심이 십분 염려스럽습니다. 이번에 민유중이 순시 길에 강가에 도착해서 일의 형세를 목격하고 조목조목 이렇게 아뢰었으니, 이 뒤로는 각 수령들로 하여금 특별히 농사를 권장케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농사에 힘써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고, 파수하고 기찰하는 일들도 십분 엄히 단속하여 법을 범하지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 5일에 한 번씩 점고해도 오히려 틈을 보아 강을 넘어가는데, 지금 만일 10일로 정한다면 어리석은 백성들이 조정의 농사를 권장하려는 본뜻은 모르고 도리어 요행심을 가질 것이니, 종전의 규례를 갑자기 바꾸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의주 부윤 이동직(李東稷)이 장계를 올려 보고하였다.
"배[梨]·잣[栢]·꿀[淸]을 가지고 갔던 차사원(差使員) 인산 첨사(麟山僉使) 김득선(金得善)과 청역(淸譯) 최후원(崔厚元)이 돌아와 소문을 전하기를 ‘심양의 성중에 따로 성(城) 하나를 쌓고 있는데, 모양은 봉화대처럼 생겼고 높이는 대여섯길쯤이며 위에는 가시덤불로 둘러쳐져 있었다. 그 까닭을 물어보았더니 청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몽고는 옛날부터 제어하기가 어려웠으므로 기미책을 쓸 심산으로 일찍이 황제의 딸을 그 나라 왕에게 시집보내 처로 삼아주었기 때문에 몽고 왕은 순치 황제(順治皇帝)의 매부(妹夫)였다. 그 뒤로 몽고의 왕은 제후의 법도를 지키지 않았고 순치 황제가 죽었을 때도 북경에 조문오지 않아, 노여움을 쌓아둔 채 속으로 참아온 것이 오래였다. 지난해에 몽고 왕의 처가 죽었는데 화장할 때 그 나라의 풍속은 으레 평소의 옷가지며 보물들을 불태워 왔는데 이 왕비의 것을 불태우지도 않았고, 또 북경의 장가들라는 허락을 기다리지도 않고서 죽은 형의 처를 후처(後妻)로 삼았다. 그리고는 전처의 옷가지며 보물들을 그대로 주었으므로 이로 인해 더욱 분노를 샀다. 올 6월에 계책을 써 북경으로 초치했는데, 처음에는 남쪽 지역에다 안치시키려 했으나 이른바 황태후란 분의 간청으로 중지하고, 별도로 심양에다 감옥을 만들어 수금(囚禁)시키고 그 아들을 봉해 몽고 왕으로 삼았다. 8월 사이에 그 아들과 몽고의 다른 왕 너댓 사람이 술이며 안주를 싣고 심양에 함께 왔었는데, 지키는 장수가 서로 만나는 것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의 아들이 화를 내고 돌아가면서 수많은 공갈을 했다. 이로 인해 심양이 웅성거리면서 반드시 무사하지 않을 것으로 여기고 있다.」 했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북경 대신(北京大臣) 속사하(束沙河)와 반부을어궁(半夫乙於弓)이 박두리궁(薄豆里弓)과 틈이 있었는데, 지난해 가을 박두리궁이 두 사람을 참소하여 죽였다. 속사하의 부자(父子) 세 사람이 그때 동시에 죽임을 당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서평왕(西平王) 오삼계(吳三桂)의 사위였다. 삼계가 딸에게서 그 자세한 내막을 듣고서는 두 번씩이나 소장을 올렸으나 번번이 박두리궁에게 저지당했다. 그래서 삼계가 따로 계책을 생각해 내어 올 7월에 치계하기를 「신의 지방에 장수에 합당한 자가 있으니, 원컨대 황상(皇上)께서 불러다 보시고서 진퇴를 결정하소서.」 하니, 그의 말대로 불러다 만났다. 그러자 그 사람이 품속에서 오삼계의 밀소(密疏)를 꺼내 직접 바치고, 속사하 등이 참소를 입고 원통하게 죽은 사유를 낱낱이 말하는 한편 또 박두리궁이 전후 상소를 막은 상황을 호소하니, 바로 정예의 군대로 박두리궁의 집을 애워싸고 붙잡아 왔다. 처음에는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선대에 공훈이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감면하여 안치(安置)시켰다. 그 두 아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으며 그밖에 관련되어 죽은 대신이 4명이다. 또 올해부터 군사의 훈련이 전과 훨씬 달라졌다.’고 하였습니다.
득선은 우리 나라에서 포로로 잡혀가 몽고에서 중이 된 사람과 우리 나라에서 포로로 잡혀간 이름이 최정립(崔貞立)이란 사람에게 들었고, 후원은 요동의 호송(護送) 군사에게 들었다 했습니다."

 

10월 21일 신사

강백년(姜栢年)을 대사간으로, 이민서(李敏叙)를 부응교로, 신명규(申命圭)를 사간으로, 홍주국(洪柱國)을 부수찬으로, 윤지선(尹趾善)·홍만종(洪萬鍾)을 지평으로, 유상운(柳尙雲)을 정언으로 삼았다.

 

경기 유학(幼學) 이창령(李昌齡)이 상소하여 송(宋)나라의 세 현인과 우리 나라의 두 현인을 문묘에 종사하자고 청했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23일 계미

영의정 정태화가 일곱 번째 사직소를 올리자, 상이 승지를 보내 도타이 유시하였다.

 

충청도 각 고을에 이달 4일에 우박이 내려 곡식이 손상되었다.

 

평안도 위원(渭原)의 내노(內奴) 예현(禮玄)의 집에 정문(旌門)을 세워주었다.
예현의 아비 일립(日立)이 곰에게 물리자 15세인 예현이 몽둥이로 곰을 후려치니 곰이 그 아버지를 놓고 예현을 물었다. 여러 사람들의 구원으로 죽음은 면했으나 이로 인해 병이 나 결국 죽었다. 감사 민유중(閔維重)이 아뢰자 정표(旌表)하도록 명한 것이다.

 

10월 24일 갑신

헌부가 이은상(李殷相) 등을 조사하는 문제에 관하여 굳게 논계한 지 4개월이 지났으나 상이 끝내 따라주지 않자, 이때에 이르러 정계하였다.

 

충청도 은진현(恩津縣)에서 암탉이 변해 수탉이 되었다.

 

장령 정중휘(鄭重徽), 지평 홍만종(洪萬種)이 선산 부사(善山府使) 홍성귀(洪聖龜)를 논핵하기를,
"일찍이 선대의 허물로 무겁게 대간의 탄핵을 입었는데, 감히 신구할 계책을 내어 장황하게 꾸며 천총을 무망했으므로 물의가 진실로 이미 놀랍게 여겼습니다. 따라서 성귀의 도리로는 오직 문을 걸어 닫고 들어앉아 통렬하게 스스로를 다스려 선대의 허물을 덮고자 했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조사를 멈추고 이에 본직을 제수하자마자, 감히 공의를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부임하여 아무 일도 없는 보통 사람처럼 하였으니, 그 염치를 무릅쓰고 함부로 군 무식한 정상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고, 누차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10월 26일 병술

영의정 정태화가 상소하여 면직을 빌자, 상이 허락하지 않고 다시 사관을 보내 전유(傳諭)하였다.

 

10월 27일 정해

평안도 정주(定州)·곽산(郭山)에 이달 17일 천둥 번개가 쳤다.

 

어사 권격(權格)을 수원(水原)에 보내 무사들을 시재(試才)케 하였다. 입격한 장수와 제 부대의 군인들에게는 전일 강도와 남한 산성의 시재에서 내린 상격처럼 미포(米布)와 궁전(弓箭)을 차등 있게 지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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