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신묘
상이 양심합(養心閤)에 나가니, 약방(藥房)이 들어와 상의 기후를 진찰했다. 좌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신덕 왕후의 시책을 의논해 결정한 다음에는 옥(玉)을 캐고 책문(冊文)도 지어야 하는 일들이 있으니, 속히 의논해 결정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처음 시호를 올릴 때 반드시 ‘삼가 신하 아무를 보내 아무 시호를 올립니다.’라고 했을 것인데, 지금의 신덕(神德)이라는 시호는 전일에 올렸던 것이다. 지금 만일 ‘시책이 없어 바꾸어 올립니다.’라고 한다면 시책의 법도가 아닐 것이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고사(告辭)처럼 해야 한다고 말한 것도 그런 까닭에서입니다. 각 신실의 빠진 시책을 차례로 소급하여 보충시키려면 지금 우선 신덕 왕후(神德王后)부터 거행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미 잃어버린 시책을 억지로 소급하여 보충하는 것이 어찌 옳은 일이겠는가. 시책을 갖추는 법식으로 보자면 시책이 빠진 여덟 신실(神室)에 일시에 거행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 신덕 왕후에게만 시책을 소급하여 올린다는 것은 옳지 않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세자가 입학할 때 많은 선비들이 모두 모여 다들 기뻐하였습니다. 그들을 위하여 정시를 베풀되 취인(取人)할 필요없이 직부(直赴)를 허락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기쁨을 길이 기억시키는 일환으로 나온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많은 선비들이 모두 와서 모였으니, 유생들에게 정시를 베풀도록 해조에 분부하라."
하였다. 나중에 경연 신하의 진달로 인하여 취인하기로 결정되었다.
허적이 노쇠해서 임무를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새로 제수된 경상 병사 민진익(閔震益)을 아뢰어 체직시켰다. 병조 판서 홍중보가 이전에 품정한 대로 수원에 시재 어사(試才御史)를 뽑아 보내자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행 대사헌 정지화가, 또 공주들의 집 문제에 있어서 감히 참여하여 논계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장령 구음이 아뢰기를,
"형조 판서 서필원의 상소 내용은 참으로 두서없는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가 끌어대어 비교한 말들은 모두 근거가 없는 바로, 시끄럽게 지껄인 것이 모두 허물을 꾸미는 내용이 아닌 게 없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의혹하고 듣는 사람들이 모두 놀랍게 여기니,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하고, 또 사간 조성보(趙聖輔)가 여러 말을 허비해 가며 인피한 뒤에 단자(單子)를 올려 일을 회피한 잘못을 논하며 파직을 청했는데, 상이 따르지 않으며 이르기를,
"서필원의 일에 관해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온당한 줄 모르겠고 끝부분의 일은 대간의 체면을 잃은 듯하다."
하였다. 구음이 성보의 파직을 청하는 계문(啓文)의 끝에 벼슬과 성명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상의 하교가 이렇게 내린 것이다. 이때 논자들은, 필원이 논박을 당한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삭판(削版)이란 형벌은 정경(正卿)에게는 시행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계문도 조어(措語)가 모양을 갖추지 못했으므로 전해가며 비웃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구음이 대청에 출사할 때 곤드레가 되도록 크게 취해 계문을 전달하는 즈음에 곁에서 보는 사람들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 구음은 이로 인해 청망(淸望)이 막혔다.
당시에 북병사(北兵使) 이만영(李晩榮)이 행영(行營)037) 의 성지(城池)를 수축할 것을 장계로 청했었다. 이때 이르러 함경 감사 홍처후(洪處厚)가 북도(北道)의 참혹한 천재(天災)와 온성(穩城)에 우박이 내린 변고로 인해 계청하기를,
"기왕 시작한 일은 비록 정지시킬 수 없겠지만 단지 헐고 무너진 곳들만 수리하게 하고, 개축해서 성첩을 마무리 짓는 일은 우선 그만두게 하소서."
하니, 비국이 회계하여 허락했다.
9월 2일 임진
장령 구음이 엄한 비답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했는데,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구음이 이어서 장령 어진익과 전에 아뢴 내용을 연계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고 조성보만을 체직시켰다.
응교 이단하(李端夏) 등이 상차하기를,
"지난번 유현(儒賢)이 조정에 나와 국사를 담당했을 때 상하가 서로 미더워 말을 들어주고 계책을 시행해 주었으니, 이는 참으로 천년에 한번이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서필원(徐必遠)의 괴이한 상소로 인해 판부사 송시열이 마침내 물러나기를 결행하였습니다. 이에 공의가 일제히 일어나고 양사가 함께 일어나 필원을 쫓아내라고 논하여 반년이 지나서야 겨우 멈추었습니다. 따라서 필원의 도리로는 당연히 통절히 자신을 뉘우치고 책망해야 할 터인데 그렇지 아니하였습니다. 대론(臺論)이 한창인데도 서울 집에서 편안히 지내다가 서용의 명이 내리자마자 바로 서추(西樞)038) 에 출사하여 사은하였습니다. 그 멋대로 행동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꼴이란 사람들에게 진실로 놀라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가 추관(秋官)의 장관에 제수되자 이에 비로소 장황하게 소장을 올려 마치 전연 잘못이 없는 사람처럼 하면서 자신의 분수를 헤아리지 않고 선배들의 일을 엉뚱하게 끌어다 대어, 묘당의 한 마디 말을 빌려 출사의 계책으로 삼으려는 데 급급하였습니다. 그 잘못을 꾸미고 끝까지 고집하여 조정을 무시하고 공의를 멸시하려는 태도가 갈수록 한층 더 심해졌습니다.
필원은 이전부터 도리에 어긋난 짓을 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만, 조정이 애써 용서해주며 깊이 죄를 내린 적이 없어 멋대로 굴고 꺼림이 없도록 하였습니다. 놀라운 일을 볼 때마다 번번이, 그 사람은 본래 그런 사람이라 말하고, 전하께서도 또 그 뒤를 이어 총애하고 신임하기를 꼭 부모가 교만한 자식을 기르는 것과 같이 하셨습니다. 총애를 믿어 교만 방자하다고 송시열이 말한 것은 대체로 이런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자 필원은 등통과 한언의 일을 이끌어다 그들과 같지 않음을 스스로 밝혔는데, 그 말하는 태도가 더욱 거만하여 조금도 공손한 태도가 없었습니다. 아, 또한 놀랍고도 우스운 일입니다.
이런 자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공론이 시행될 길이 없을 것이고 조정이 존엄해질 수가 없으며, 세도에 해가 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속히 그의 벼슬을 삭제한 다음 엄히 벌을 내리도록 명하여 징계의 터전으로 삼으소서."
하였다. 차자가 올려진 지 6일 만에 상이 차자의 내용을 알았다고 답하였다.
9월 3일 계사
예조가 아뢰기를,
"왕세자의 입학례를 이미 거행했으니, 관례상 마땅히 과거를 베풀어 선비를 뽑아 사방에 경사를 함께 한다는 뜻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을유년039) 의 예에 따라 별시를 설행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년 봄 관례(冠禮)를 거행한 뒤에 설행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시책을 소급하여 보충하는 문제를 가지고 전교대로 대신과 유신들에게 물어 의논하였습니다. 영부사 이경석은 말하기를 ‘세대가 이미 오래된 분을 새롭게 높여 받들려 하니 의장(儀章)이 갖추어지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이는 대체로 능히 갖출 수 없어서가 아니라 감히 갖추지 못해서입니다. 억지로 하는 일치고 예에 합당한 일은 보지 못했습니다.’ 하였고, 영의정 정태화는 말하기를 ‘신덕 왕후에게 처음 시호를 올릴 때 반드시 시책이 있었을 터인데 그 당시의 책문(冊文)을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만일 이제 와서 소급해서 갖추겠다는 뜻으로 새로 글을 짓는다는 것은 실로 시책의 정당한 법도가 아닙니다. 또 생각해 보건대, 임진 왜란 이래로 여러 차례 변란을 겪어 종묘 안의 1실(室)에서 8실까지 옥책(玉冊)이 하나도 남아 있는 것이 없으니, 신덕 왕후의 시책이 없는 것도 이와 다를 것이 없다고 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이번 부묘 때에는 새로 정한 휘호(徽號)의 책보(冊寶)만을 먼저 받들어 올리고 시책은 종묘 각실의 없는 옥책들과 함께 일시에 조용히 의논해 결정하는 것이 옳은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좌의정 허적은 말하기를 ‘신덕 왕후에게 시호를 올리던 처음에 만일 책문이 있었다면 반드시 태조 대왕의 명에 의해 제체(齊體)040) 라는 말을 썼을 것이며 묘(廟)에 고한 다음 시행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소급하여 갖춘다면 또한 미안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번에 뒤따라 올리는 휘호에는 책문도 있고 보(寶)041) 도 있으니, 의장의 절차가 또한 갖추어지지 않았다고는 못할 것입니다. 또 신이 삼가 듣건대, 종묘의 1실에서부터 8실까지 열성(列聖)의 책보가 여러 차례의 변란을 겪어 하나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훗날 마땅히 인조(仁祖)의 수교(受敎)를 받들어 의논해 결정하는 일이 있을 것이니, 신덕 왕후의 시책을 소급해서 갖추느냐의 여부도 그때 다시 의논하는 것이 또한 하나의 방법일 것입니다.’ 하였고, 판부사 정치화는 말하기를 ‘당초 시호를 올렸을 터인데 세대가 오래되다 보니 옥책(玉冊)이 없어진 것이니, 종묘 각실의 책보가 없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지금 와서 소급해서 올리는 것은 곤란한 일인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좌참찬 송준길은 말하기를 ‘개국(開國) 초기에는 문물제도가 갖추어지지 못했을 터이니 시책 문자(文字)가 있었다고 참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가령 있었는데 잃어버렸다고 하더라도 수백 년 동안 결여되었던 전례(典禮)를 다시 닦아야 하는 때를 만난 것이므로 그에 관계된 예절이며 의장들이 일상적 법규와는 모두 다르니, 후하게 해야지 박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일 「종묘 중에도 불행히 미비된 신실(神室)이 많은 터에 하필 신덕 왕후만 갖추어야 하겠는가.」 한다면 그것은 사리상 매우 옳지 않은 듯합니다. 미비된 신실들을 이번 일에서 비롯하여 갖추는 것이 옳은 일이지, 마땅히 갖추어야 할 이번 일을 저쪽의 없는 종묘의 일을 따라 갖추지 않는다면 어찌 옳은 일이겠습니까. 사신(詞臣)에게 명해 사실을 낱낱이 기록한 글을 지금에라도 짓게 하는 일은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그 글 속에서 말을 적절히 구사하는 문제는 글짓는 자의 솜씨에 달려 있는 것이니, 두루 자상하면서도 원만하게 하여 어색한 말이 없도록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 하였습니다. 판부사 송시열에게는 병 때문에 수의(收議)하지 못하였습니다. 대신과 유신들의 의견이 이상과 같으니, 상의 결재를 청합니다."
하니, 상이 대신들의 의견에 따라 시행하라고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신덕 왕후(神德王后)의 위패를 제주(題主)할 장소 문제로 대신과 유신들에게 의논하였더니, 영부사 이경석,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허적, 판부사 정치화는 모두 말하기를 ‘입주(立主)할 장소로서 의거하여 시행할 만한 곳이 없으니 아마 능침(陵寢)을 놔두고 다른 곳에서 구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하였고, 좌참찬 송준길은 홀로 말하기를 ‘오늘의 예를 《고사촬요(故事撮要)》에 실린 바와 《실록》에 기록된 바에서 고증해 보건대, 태조 대왕이 서울을 옮긴 날짜와 신덕 왕후의 장례를 끝마치고서 안인전(安仁殿)으로 반혼(返魂)하고 3년 뒤 안인전에 영정을 모신 일들은 매우 명백한 것들입니다. 안인전의 옛터가 경복궁 안에 있었다는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듯하니, 신덕 왕후께서 평소 거처하시던 곳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신이 명(明)나라 제도를 고증해 보니, 악전(幄殿)을 쓴 전례가 있었습니다. 지금 이 전례대로 경복궁 옛터 안에 악전을 만들어서 신주(神主)를 받들어 쓰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능소(陵所)에 가서 제주한다는 것은 신으로서는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판부사 송시열은 병 때문에 수의(收議)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좌의정 허적이 입시하였다가 인하여 아뢰기를,
"준길의 수의 안에 ‘이미 돌아온 혼이니 묘소에 가서는 안 된다.’고 한 말이 있는데, 신들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안인전의 터를 기왕에 찾을 수 없다면 의거할 곳이 없는 것보다는 차라리 능소에 가서 제주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신들이 그렇게 헌의했던 것입니다. 준길의 장전(帳殿)을 설치하자는 의논에 대해서는 신들도 역시 이런 의논이 있었습니다. 경복궁이 그 당시 계시던 곳이니 이곳에서 제주하는 것이 진실로 좋습니다만, 시어소(時御所)에 있어서는 불편한 점이 있습니다. 신들의 뜻은 이곳에서 행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안인전의 터를 기왕에 모른다면 준길의 의논대로 경복궁에 장전을 설치하고 제주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그 뒤 강녕전(康寧殿)의 터를 【태조 대왕이 평상시 계시던 곳이다.】 찾아서 그곳에 장전을 설치하고 제주하였다.
장령 구음은 서필원을 사판에서 삭거하자는 논핵이 물의에 비난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장령 어진익(魚震翼)도 역시 이를 이유로 인피하고, 집의 신명규(申命圭)는 즉시 서필원을 논핵하지 않아서 물의에 비난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모두 체직되었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예조 판서 박장원이 아뢰기를,
"종묘 각실의 잃어버린 책보(冊寶)들을 만약 한꺼번에 채우려 하신다면 신덕 왕후의 시책은 마땅히 부묘하는 날 우선적으로 채워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각실의 시책문 여러 문집에 기록된 것들을 상고해 내어 의논해서 결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홍문관으로 하여금 상고해 내도록 하였다. 응교 이단하(李端夏)가 아뢰기를,
"각실의 빠진 책보를 상세히 안 뒤라야 상고해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문집의 기록은 아마 《실록》의 상세함만 못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문집과 《실록》을 아울러 상고해 내라."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평안도의 별시에서 입격은 했지만 정원에는 들지 못한 무리들을 이미 불러 왔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숫자가 몇이나 되는가?"
하였다. 좌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5백여 명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관무재(觀武才)의 예대로 시재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정언 이단석(李端錫)이 한석중(韓碩重)의 일을 연계하자, 상이 이르기를,
"피차의 말을 모두 믿을 수 없으니, 이 내용으로 조사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무릇 부묘할 때에는 묘정에 부알(祔謁)하는 예가 있어, 대왕은 서쪽 뜰에서 왕비는 동쪽 뜰에서 설행하는데, 이번 신덕 왕후의 경우는 단지 태조의 제1실에만 거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적체(適體)의 신주를 뜰 가운데서 부알하는 것도 역시 온당하지 않습니다. 신의 뜻으로는 대(臺) 위 제1실 앞에 신좌를 만들어 놓고 예를 행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신의 뜻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예이니 널리 의논을 물어야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제주(題主)할 곳은 분부대로 봉행해야 하겠습니다만, 제주한 뒤의 설전(設奠), 입묘하기 전의 봉안할 곳, 봉안한 뒤에 제사지내는 것, 그리고 먼저 휘호(徽號)를 올리고 제주를 뒤에 해야 그 순서가 당연하겠습니다만 지금은 먼저 제주하고 뒤에 책보(冊寶)를 올리지 않을 수 없으니, 이런 것에 관련된 절목들을 마땅히 속히 의논해 정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예관에게 수의(收議)하여 품처하라고 명했다.
소통사(小通事) 김건(金建)을 국경에서 효시(梟示)하였다. 귀양지에서 도망쳐 본토로 되돌아와서는 다른 사람을 대신 귀양살게 한 죄 때문이었다.
9월 4일 갑오
윤문거(尹文擧)를 대사헌으로, 김경(金鏡)을 경상 좌병사로 삼았다. 문거는 사양하고 오지 않았고, 김경은 훈국(訓局)의 계사로 인하여 체직되었다.
9월 6일 병신
밤에 번개가 쳤다.
9월 7일 정유
상이 양심합(養心閤)에 거둥하니 약방 도제조 허적 등이 의관을 거느리고 들어와 진찰하고는, 이어서 처방을 의논하여 들이겠다고 청했다. 의관들이 물러가자 허적이 능풍군(綾豊君) 구인기(具仁墍)의 병이 중함을 아뢰자, 상이 이르기를,
"인기는 훈신(勳臣)으로 아들이 구일(具鎰) 하나뿐이다. 그 아들 구일을 홍주 영장(洪州營將)에서 체직시켜 죽기 전에 서로 만나보도록 하라."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인기의 병이 이와 같으니 구일을 영장에서 체직시킨다 하더라도 교대하는 시일이 걸려 생전에 서로 보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일찍이 인조조(仁祖朝)에 이수광(李睟光)이 병을 앓을 때 그 아들 성구(聖求)가 전라 감사였는데, 인조가 그로 하여금 올라와 병을 돌보게 하였습니다. 이번에도 그 일처럼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형조의 일이 폐기되어 염려스럽습니다. 서필원을 삭판하자는 논의는 극히 놀라우니, 육경(六卿)에게 이러한 벌을 적용시킨 적이 언제 있었습니까. 그러나 필원의 상소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모두 대각의 논계가 없을 수 없다고 말하니, 속히 처리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우선은 체차하도록 하라."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이조 판서 조복양이 상소를 올리고 인피하고 들어가버려 오랫동안 공무를 보지 않고 있습니다. 복양이 신의 말 때문에 출사하지 않고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복양의 명망이 어찌 이 직임에 부족하겠습니까. 다만 일찍이 대답을 잘못한 과실이 있었기 때문에 신의 생각에 벌이 없을 수 없다고 여겨 과연 이조 판서의 후보에 한번 의망(擬望)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복양의 인망을 적합하지 않다고 여겼다면 신이 비록 형편없지만 그 뒤에 어찌 다시 의망할 리가 있겠습니까. 속히 상소에 대한 비답을 내려 그로 하여금 공무를 보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였다.
9월 8일 무술
대사간 이민적(李敏迪)이 추고를 받고 있는 중이라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9월 9일 기해
이조 판서 조복양(趙復陽)이 다시 상소를 올려 체직을 청했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9월 10일 경자
정지화(鄭知和)를 형조 판서로, 이익(李翊)을 대사간으로, 이민적(李敏迪)을 부제학으로, 박세견(朴世堅)을 승지로, 박증휘(朴增輝)를 집의로, 정화제(鄭華齊)·변황(卞榥)을 장령으로, 이민서(李敏叙)를 부응교로, 윤심(尹深)을 부교리로, 이규령(李奎齡)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헌납 이휴징 등이 아뢰기를,
"서필원은 어진 이를 방해하고 나라를 병들게 했다는 죄목으로 삭출해야 한다는 논박을 거듭 당했습니다. 공의가 지엄했으니 필원의 도리로서는 당연히 잘못을 성찰하고 새로워지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터인데 서용을 입은 뒤에 염치를 돌아보지 않고 서추(西樞)에 임명하는 명에 바로 사은하였고, 추조(秋曹)에 제수됨에 미쳐서는 거만스레 상소를 올려 인용에 부당한 고사를 인용하며 장황한 말을 늘어 놓아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고 변명하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심지어는 묘당에 물어볼 것을 청하여 마치 유현(儒賢)이나 대각(臺閣)과 서로 승부를 다투듯이 하였으니, 방자하고 거리낌없는 작태가 이보다 더할 수 없습니다. 조정을 가볍게 보고 공의를 무시한 그의 죄는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삭탈 관작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과거를 열어 사람을 뽑는 것은 관계된 바가 매우 중대하니, 구차하고 공평하지 않는 일을 거행해 거자(擧子)들로 하여금 국가를 원망하게 해선 안 됩니다. 이번 세자가 입학할 때 많은 선비들이 모여든 것을 인해서 특별히 정시(庭試)를 보여 그들을 위로하는 터전으로 삼은 것은 매우 성대한 뜻입니다. 그러나 단지 서로(西路)의 무사들만을 유생의 대거(對擧)로 과거를 보인다면 일의 체모로 헤아려 볼 때 매우 온당하지 못합니다. 더구나 지난 겨울 파방(罷榜)한 뒤 그들의 낙심을 상상할 수 있는데 이번 선비들을 시험보일 때 경외(京外) 무사들에게 또 아울러 응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실망이 또 어떻겠습니까. 날짜를 조금 물려 서로는 물론 서울에 모여 있는 무사들에게 일체 응시를 허락하는 것이 참으로 사리에 합당할 것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다시 묘당에 의논하여 품처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예조가, 대간이 아뢴 무과의 일을 가지고 묘당에 의논하여 이달 17일에 무과 초시를 실시하기로 정하였다. 병조가 계품하여 을미년042) 의 전례대로 정시의 초시를 두 곳에서 각기 백 명씩을 뽑기로 하였다.
9월 11일 신축
장령 정화제(鄭華齊)가, 서필원을 삭탈하라는 논계가 과중하므로 구차하게 찬동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집의 박증휘와 장령 변황은 화제가 물의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인피했다. 간원이 처치하여 화제는 체직하고 증휘와 변황은 출사시켰다.
평안도에 전염병이 돌아 전후로 죽은 사람이 47명이었고, 소도 돌림병으로 죽은 숫자가 1백 55마리였다.
9월 12일 임인
집의 박증휘 등이 서필원의 삭탈 관작을 연이어 아뢰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필원은 우직한 사람으로 자처하면서 생각나는 대로 바로 행동에 옮긴 까닭에 좋은 점도 있었지만 단점도 또한 많았으므로 인정하는 자는 적고 인정하지 않는 자는 많았다. 그러나 시기하고 미워한다는 것은 그의 본정이 아니며 나라를 병들게 한다는 것도 그의 마음이 아니었다. 양사가 굳게 논계하면서 말을 헤아리지 않았으므로 끝내 필원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였다.
경평군 이늑이 고성(高城)에 갔던 길에 금강산을 유람하며 매우 많은 폐단을 끼쳤는데, 원양 감사(原襄監司) 정익(鄭榏)이 치계하여 소환시켜 줄 것을 청하자, 상이 일렀다.
"비록 폐단이 있다 하더라도 번신(藩臣)의 도리상 어떻게 감히 바로 소환을 청한단 말인가. 감사 정익을 무겁게 추고토록 하라."
9월 13일 계묘
판부사 정치화(鄭致和)와 형조 판서 정지화(鄭知和) 등에게 명해 평안도 무사들을 시재(試才)하게 하였다.
예조가 신덕 왕후를 부묘할 길일(吉日)에 상께서 친히 제사할 것인가의 여부를 계하하여 달라고 하자, 상께서 몸이 좋지 않으므로 친히 행하기는 어렵다고 답하였다.
9월 15일 을사
상이 양심합에 거둥하니 약방이 들어와 진찰하였다. 의관들이 물러가자 도제조 허적이 신덕 왕후의 제주(題主) 길일을 25일로 당겨 정한 일을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이번은 일반적 규례와는 다르다. 휘호(徽號)를 올리는 일이 제주한 다음에 있다면 제주한 다음에 바로 휘호를 올리는 것이 옳다. 제주하고서 4일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휘호를 올린다면 온당하지 못하지 않겠는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제주하고 나서 휘호를 올리기 전에 청시(請諡)와 고묘(告廟)의 절차가 있기 때문에 영의정이 당겨 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반드시 시호를 올리는 날에 청시해야 한다면 같은 날 시행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그렇지 않다면 28일 사이에 청시의 예를 행한다 해도 어찌 안 될 일이 있겠느냐."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보책(寶冊)을 들인 뒤에는 내관이 받들고 나가 승지에게 전해주고, 승지가 영의정에게 전해주면 영의정이 받들어 행합니다. 그러므로 한낮에 제사를 드려야 할 듯합니다."
하고, 허적이 또 아뢰기를,
"청시는 제주하기 전에 행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청하는 것이 아니고 고하는 것이다. 휘호를 올리는 일과 제주하는 일은 같은 날 행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마땅히 이렇게 분부하겠습니다만, 제주(題主)한 뒤 임시로 봉안할 곳은 어디로 정해야 하는지요?"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좌참찬의 의견은 제주한 곳에 임시로 봉안하는 것이 온당하겠다고 말했다 한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시어소(時御所)에는 임시로 봉안해선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좌참찬의 의논대로 제주한 곳에 임시로 봉안하라."
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정언 김덕원(金德遠)이 상소를 진달한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아직도 비답을 내리지 않고 계십니다. 성상께서 필시 그의 말을 온당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만, 대관의 상소에 대한 비답을 이와 같이 지연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한 일인 듯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전 군수 허각(許恪)은 일찍이 흥해(興海)의 수령으로 있을 때 날마다 탐학을 일삼아 백성들이 그 재앙을 입었으며, 고을의 여종을 데리고 살면서 많은 추악한 짓들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다 인사 고과에서 아랫 등급을 받자 원망하고 화를 내며 관아 안의 집들을 부수는가 하면 심지어는 차원(差員)이 봉해 놓은 창고를 멋대로 열어 곡식을 훔쳐내기까지 하여,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고 원망하는 말이 길에 널려 있습니다. 이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난잡하고 교활한 풍조를 징계해 바로잡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 붙잡아다 신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부묘할 때 알묘(謁廟)043) 하는 절목, 제주한 다음 전(奠)을 지내는 일, 종묘에 들이기 전 봉안할 처소, 봉안한 뒤 제사드리는 일, 제주와 보책(寶冊)을 올리는 선후 문제들을 대신과 유신(儒臣)에게 의논해 보았더니, 영부사(領府事) 이경석(李景奭)은 말하기를 ‘대(臺) 위에 신좌(神座)를 설치해서 제1실 앞에서 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으나, 제주한 뒤에는 전(奠)이 있어야 할 듯하고, 종묘에 들이기 전 봉안할 처소로는 대궐 안의 전각 중 빈 곳에 봉안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며, 봉안한 뒤 제사를 지내는 일도 늦추어서는 안될 듯합니다. 또 제주를 먼저 하고 책보를 뒤에 하는 것이 또한 사세상 당연할 것입니다.’ 하였고, 판부사 정치화의 의논도 똑같았습니다. 좌참찬 송준길은 말하기를 ‘지금 이 변례(變禮)의 절차에 대해서 여러 대신들이 갖추어 모두 진달했으니, 신이 달리 의논 드릴 것은 없습니다. 오직 임시로 봉안하는 처소에 있어서는, 신이 일찍이 듣건대 병자년044) 난리 뒤에 종묘 열성의 여러 신주들을 대궐 안의 빈 전각에서 다시 제주하였다 하니, 그때 반드시 임시로 봉안한 처소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번에도 그곳을 사용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대신들의 의논대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덕 왕후의 부묘 때 거행할 절목들을 모두 섭행하는 것으로 마련했으니, 친히 제사지낼 때 백관들이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만, 지금의 부묘 의절은 막중한 일이니 제사를 지낼 때 백관들이 나아가 참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를 분부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9월 16일 병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이단하(李端河)를 사간으로, 이세화(李世華)를 장령으로, 김우형(金宇亨)을 병조 참지로, 송기후(宋基厚)를 지평으로 삼았다.
9월 17일 정미
목성(木星)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예조가 아뢰기를,
"각전의 삼명일(三名日) 방물(方物)과 물선(物膳)을 흉년으로 인하여 임시로 줄인 지 벌써 10여 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올해는 각도의 농사가 조금 풍년이 들었으니 옛날대로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올 동지부터 옛날대로 봉진(封進)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우선 전에 임시로 줄였던 대로 하라고 하였다.
사간 이단하가 아뢰기를,
"여러 공주들의 집에 관한 일을 양사가 굳게 간쟁한 지가 이미 여러 달이 되었는데 전하의 허락은 막연하여 따라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금 듣자니 이미 건축한 집의 칸수가 법전(法典)에 비춰볼 때 두세 배 정도가 아니라고 하니, 신은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조종(祖宗)들께서 법을 만들고 제도를 정해 후세에 드리운 것은 금석(金石)처럼 따라 지키라는 뜻에서입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조종의 뜻을 본받지 않고 조종의 법을 따르지 않으신 채 단지 사사로운 은혜를 위해 이러한 지나친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더구나 대각의 논계가 한창 일어나고 있는데도 한쪽에서는 집을 지어 법제를 준수하지 않고 간쟁을 돌보려 하지 않으니, 이같이 하면서 능히 그 나라를 다스린 자는 있지 않습니다.
이미 건축한 공주들의 집에 대해서 법제를 넘는 칸수는 다시 철거하고, 아직 짓지 않은 집들은 법제를 한결같이 준수하여, 사치스럽고 분수에 넘치는 폐단을 막으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9월 18일 무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약방이 들어와 진찰하였다. 상이 사관에게 명해 영의정 정태화를 불러 입시케 하였다. 상이 좌참찬 송준길이 부알(祔謁)하는 데 있어서 제주(題主)할 때 친히 참석하고, 시책(諡冊)을 소급하여 보충시키며, 그리고 부묘(祔廟) 때 친히 제사 드려야 한다고 논한 소장을 내보이고는 읽어보도록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평상시의 예의를 가지고 말한다면, 왕비는 적체(適體)의 예가 있고 군신 사이의 의식을 쓰는 일은 없다. 준길이 소장 안에서 부알할 때 열성들의 마음이 불안할 것이라고 한 말은 그럴 듯하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일단 입묘(入廟)를 고한 뒤 알묘하는 예는 빼더라도 예에 있어 무방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臺) 위에 나아간 뒤 고묘하는 예가 있어야 하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신여(神輿)가 신문(神門)에 들어온 뒤 고합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만약 고알하는 예를 없앤다면 고하는 말에 있어서 ‘부알(祔謁)’이라고 칭할 수 없으니 ‘승부(陞祔)’로 고쳐 고한 뒤 입묘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아울러 따랐다. 상이 이어 부묘할 때 예를 집행하는 관원은 친히 임하여 지내는 예와 일체 같게 하라고 명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이는 구애되는 점이 있습니다."
하였다.
전라도 해남(海南) 사람 김유남(金有男) 등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왔다. 처음에 유남 등 남녀 14명이 표류하다가 일본 살마주(薩摩州)에 도착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대마도 주가 차왜(差倭)를 정해 서계(書啓)를 지니고 호송해 왔다.
9월 19일 기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사간 이단하가 인피하며 아뢰기를,
"신이 이미 건축한 공주들의 집 중에서 제도를 넘는 칸수는 도로 철거해야 한다는 말을 앞서의 계사 속에 첨가시켰습니다. 지금 듣자니 숙안 공주(淑安公主)045) 의 집은 이미 세운 정침(正寢)이 27칸이고, 숙명 공주(淑明公主)046) 의 집은 정침과 딸린 집들이 33칸이라 합니다. 앞으로 계속 세울 집들이 몇 칸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현재 이미 세운 칸수를 법전과 비교한다면 두세 배 정도가 아니라고 한 말은 사실과 어긋남을 면치 못한 것입니다. 신이 잘못 듣고 경망하게 논한 실수가 이에 드러났으니, 신을 체직하소서."
하고, 집의 박증휘도 이 문제로 인피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공주의 저택을 한결같이 정해진 법제에 따를 것을 양사가 날이면 날마다 굳게 논계한 지 이미 넉 달이 지났다. 상하가 서로 버티는 것은 이미 치세(治世)의 일이 아닐 터인데 한쪽에서는 대각이 논계하고 한쪽에서는 집을 지어 갔으니, 대각을 둔 이후로 없었던 일이다. 대각의 관원으로서는 마땅히 이를 바르게 말하고 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벼슬에서 물러나야 할 것이었다. 이렇게 하지는 않고 매번 전에 아뢴 것을 가지고 와서 전하여, 정계도 않고 윤허도 안 되어 국가의 체면만 손상시키니, 식자들이 애석해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48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687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사법-법제(法制) / 인사-관리(管理) / 왕실-비빈(妃嬪) / 주생활(住生活) / 역사-사학(史學)
[註 045] 숙안 공주(淑安公主) : 효종의 둘째 공주.[註 046] 숙명 공주(淑明公主) : 효종의 세째 공주.
사신은 논한다. 공주의 저택을 한결같이 정해진 법제에 따를 것을 양사가 날이면 날마다 굳게 논계한 지 이미 넉 달이 지났다. 상하가 서로 버티는 것은 이미 치세(治世)의 일이 아닐 터인데 한쪽에서는 대각이 논계하고 한쪽에서는 집을 지어 갔으니, 대각을 둔 이후로 없었던 일이다. 대각의 관원으로서는 마땅히 이를 바르게 말하고 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벼슬에서 물러나야 할 것이었다. 이렇게 하지는 않고 매번 전에 아뢴 것을 가지고 와서 전하여, 정계도 않고 윤허도 안 되어 국가의 체면만 손상시키니, 식자들이 애석해하였다.
전 부제학 이단상(李端相)이 졸하였다.
단상은 이조 판서 이명한(李明漢)의 아들이고, 좌의정 정귀(廷龜)의 손자이다. 집안이 대대로 문장과 복록(福祿)으로써 온 세상에 성대하게 일컬어졌다.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재주 있다는 칭찬이 점점 성해졌는데, 방랑을 좋아하는 문사의 습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효묘(孝廟) 말년에는 신병을 핑계로 출사하지 않고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 지역에 물러나 있었다. 비록 간간이 고을에 임명되었지만 역시 오랫동안 있지 않았다. 글을 읽어 뜻을 구하고 담박하게 스스로를 지켰으며 또 사우(師友)의 도움으로 나날이 개발되었는데, 대체로 그의 사람됨이 총명하고 올바랐기 때문에 혼미한 벼슬길에서 스스로 벗어나 인고하면서 뜻을 돈독하게 지녀, 마침내 확립하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그가 강론한 견해는 대부분 명확하고 투철하였으므로 한 때의 사류들에게 존중을 받았다. 불행하게 일찍 졸하였으니, 애석하다. 임종할 때 유소로 훌륭하고 덕있는 이를 초치하고 큰 사업에 더욱 힘쓰라고 상에게 권하였으며, 또 장식(張栻)의 말을 인용하여 남을 믿어 맡길 때는 일신의 편견을 막고, 남을 좋아하고 미워할 때에는 천하의 이치에 공변되게 하라 청하였고, 아울러 약을 하사한 은전을 사양하였다.
9월 20일 경술
목성(木星)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부제학 이민적(李敏迪) 등이 상차하기를,
"신들이 삼가 듣건대, 신덕 왕후의 제주(題主) 때 예관(禮官)이 책보(冊寶)를 올리지도 않고 먼저 순원 현경(順元顯敬)이란 휘호를 쓰기로 정했다 합니다. 이는 참으로 앞뒤의 차례를 크게 잃은 것입니다. 《오례의(五禮儀)》에 실린 바를 가지고 말한다 하더라도 대행(大行)047) 에게 시호를 올리고 그 다음에 우주(虞主)048) 를 쓰니, 이것이 마땅히 행해야 할 차례라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상례(喪禮)와 추존(追尊)이 절목이 같지 않은 점이 있겠지만 먼저 책보를 올리고 뒤에 신주를 쓰는 것은 선후의 차례에 있어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신들의 어리석은 견해로는, 먼저 길일(吉日)을 가려 신덕(神德)이란 시호 두 글자를 제주한 뒤 별전으로 옮겨 봉안하였다가, 또 다른 날짜를 잡아 책보를 받들어 올리고 이어 고쳐 제주한다면, 선후도 문란해지지 않고 인정과 예문(禮文)도 갖추어질 것으로 여깁니다. 또 의논하는 자들 가운데 혹 제주를 바꾸는 것을 중대한 일인 것처럼 생각하는 자가 있으나, 예전부터 부묘 때 각실의 제주를 바꾼 예(禮)가 있었습니다. 왜 유독 지금의 일만 중대한 것으로 의심한단 말입니까. 또 혹 제주한 뒤 별전에 오랫동안 봉안하는 것을 미안스럽게 생각하기도 하나, 며칠 동안 임시로 봉안하는 것과 벼락치기로 예를 행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미안하겠습니까? 대신과 예관(禮官)들로 하여금 다시 상고한 다음 결정하게 하여 큰 예절에 미진한 점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 차자를 부묘 도감에 내렸다.
옥당이 이단하(李端夏)와 박증휘(朴增輝)를 처치하기를,
"이번 공주들의 집은 토목 공사를 크게 일으켰고 집터를 넓히는 데 힘써 민원이 헤아릴 수 없습니다. 칸수가 지나치게 많게 될 것이어서 귀신의 시샘이 두려워할 만합니다. 정침과 부속 건물이 이미 수십 칸에 이르렀다면 곁채와 창고 등을 합치면 반드시 백여 칸에 가까울 것이니, 법제와 비교해 보건대 두세 배에 이른다는 말은 진실로 잘못된 말이 아닙니다. 우선 건립한 약간의 건물만 언급하면서 앞으로 하나도 더 지을 게 없는 것처럼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자못 알지 못하겠습니다. 또 성상의 뜻이 막연하기만 하여 당시 한번도 제도를 준수하라는 명이 없었고 보면 궁가의 시설을 또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데도 법제를 준수하여 어김이 없다고 말하면서 들은 바에 따라 즉시 논계한 대관을 갑자기 체직시킨다면, 참으로 나라의 체면에 손상이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 처치를 보건대 더없이 놀랍고 이상하다. 만일 소회를 말하고 싶으면 끄트머리에다 말을 하는 것이 또한 옳을 것이며, 처치한 내용에 이르러서도 인피한 말들에 대해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어떻게 감히 멋대로 결정내리기를 이같이 방자하고 거리낌없이 한단 말인가. 아울러 체직토록 하라."
하였다. 정원이, 특별히 체직시키도록 한 명을 빨리 중지하고 온당하지 못한 비답을 회수하라고 청했는데, 두 번이나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자 부교리 김석주(金錫胄), 부수찬 김만중(金萬重) 등이 죄를 청하며 사직했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9월 21일 신해
부묘 도감이 아뢰기를,
"이번 신덕 왕후의 제주(題主)는 우주(虞主)와 연주(練主)049) 가 있는 절차와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올릴 휘호(徽號)를 신주에 먼저 써 두고서 바로 책보를 올리는 것은 실로 일의 형편상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당초 예조가 절목을 마련해 올릴 때 신들도 더불어 함께 의논했습니다. 지금 옥당이 차자를 올려 선후의 차례를 잃고 있다고 말하며 ‘우선 길일을 택해 신덕이란 시호 두 글자를 제주하고서 또 다른 날짜를 잡아 책보를 받들어 올리고, 이어 다시 제주하는 것이 그 선후의 차례에 맞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주의 예는 매우 중대한 일입니다. 절차를 만들어 내고자 하여 금방 제주했다 금방 바꾸는 것과, 휘호를 먼저 제주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온당한지 모르겠습니다. 신들도 감히 억견으로 경솔히 논의하지 못하겠으니 예관으로 하여금 대신들에게 널리 물어 품처케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부제학 이민적(李敏迪)이 상소를 진달하여 사직했는데, 그 대략에,
"삼가 본관의 차자에 대한 비답의 내용과 대간을 특별히 체직하라는 명을 보건대, 참으로 매우 놀랍고 걱정이 됩니다. 공주들의 집을 옮겨 지어주는 이것이 참으로 친애하는 지극한 뜻이라 하더라도, 칸수에 있어서 규정된 제도는 참으로 철석과 같은 오래된 법입니다. 천리와 인정이 비록 그 사이에서 모순없이 나란히 운행된다 하더라도 공공의 법은 항상 사사로운 은애를 이기는 법이니, 임금의 위엄도 때에 따라서는 법을 지키려는 논의에 굽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금의 공통된 의리입니다. 게다가 높다란 저택은 귀신이 시샘하는 것이니 벌써 궁가의 복이 아니며, 재물을 낭비하여 원망을 초래하는 것 또한 화목을 도모하는 방법이 아닌 만큼, 대간의 말은 지극한 충성과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또 무릇 일을 논할 때는 반드시 그 대체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번의 경우, 달이 넘게 논쟁하고 있는데도 오히려 윤허를 아니하시고 짓는 역사가 한 편에서 한창 일어났으며 대지가 지나치게 넓고 규모도 점점 커지고 있으니, 처음 세운 칸수에 있어서 비록 들은 것이 혹 차이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는 한때의 조그만 잘못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대의는 자못 좋았던 것인 만큼 또한 이것을 이유로 언관을 가볍게 죄줄 필요는 없었던 것이니, 본관의 처치는 조정을 위하여 이런 대체를 존속시키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흔쾌히 따르지 못하시고 또 부드럽게 용납하지도 못한 채 엄한 내용으로 배척하시어 특별히 체직시키라는 분부를 내리셨으니, 화평한 기상을 크게 잃으신 것이고 한쪽에 편파적으로 한 흠을 면치 못한 것입니다. 신들은 참으로 애석하게 여깁니다.
만약 성조(聖朝)였다면 옛 법을 한결같이 따라 끝내 50칸의 한계를 넘지 않았을 것이며, 대각의 신하가 논한 것이 정말로 망령되이 들은 결과였다 하더라도 역시 용납하여 너그럽게 용서해주어, 언로를 부지했을 것입니다. 천지와 같이 위대하신 성상께서 어찌 두세 신하와 말꼬투리를 잡아 서로 승부를 다투는 것처럼 하십니까.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온당하지 못한 비답과 특별히 체직시키라는 명을 도로 거두시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힘쓴다는 뜻을 본받으소서. 이렇게 해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고, 이어 비록 처치하는 차자에 동참하지는 못했지만 출사를 청하는 뜻은 참여하여 들었으므로 태연히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사직했는데,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라고 답했다.
9월 22일 임자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중건하던 정릉(靖陵)의 정자각(丁字閣)이 낙성되었다.
대사헌 윤문거(尹文擧)가 신병을 핑계하고 사직을 청하고 나오지 않으니 체직하였다.
9월 24일 갑인
유철(兪撤)을 대사헌으로, 이정(李程)을 승지로, 남이성(南二星)을 사간으로, 윤변(尹抃)을 집의로, 이규령(李奎齡)을 수찬으로 삼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도감의 계사를 대신들에게 의논했더니, 영부사 이경석은 말하기를 ‘먼저 아뢰고 뒤에 책보를 올리는 것이 절차로는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일은 변례(變禮)에서 나온 것이니, 변례에 변통이 없을 수 없음은 부득이 한 것입니다. 절목이 이미 우주와 연주가 있는 예절과는 다르니 비록 앞서 고하고자 하더라도 어디에다 의거할 곳이 없으며, 억지로 안배한다면 비록 다른 날짜를 잡는다 하더라도 금방 제주했다 금방 바꾸어야 하니, 유독 미안한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허적, 판부사 정치화의 의논도 경석과 같았습니다."
하니, 상이 의논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또 아뢰기를,
"강화 사고(江華史庫) 안에 임신년050) 의 추숭 의궤(追崇儀軌)가 없으며 《실록》을 상고해도 역시 청시(請諡)와 고묘(告廟)에 대한 절목이 수록된 곳이 없었습니다. 이번 신덕 왕후의 청시와 고묘의 의절은 근거할 만한 것이 없어 결정짓기 어렵습니다. 신들의 의견으로는 태만하게 절차를 무시하고 빠뜨리기 보다는 차라리 청시와 휘호를 소급해 올린다는 뜻을 종묘 예고제(預告祭)051) 의 축문 안에 첨가시키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중대한 일이니 여러 대신들에게 속히 의논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영부사 이경석,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허적, 판부사 정치화 등이 모두 말하기를,
"이미 의거해 시행할 수 있는 전례가 없으니 예조가 아뢴 말대로 행해야 합니다. 다만 신덕이란 시호 두 글자는 바로 초상 때 올린 바이니, 지금의 고사(告辭)에 ‘청(請)’ 자를 쓰는 것은 부당합니다. 전일의 시호와 소급해서 올리는 휘호로 제주해서 부묘한다는 뜻을 넣어 짓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부제학 이민적(李敏迪) 등이 상차하여 공주들의 집을 짓는 일에 대해 아뢰기를,
"분명한 교지를 빨리 내려 《대전(大典)》의 옛 법제대로 칸수를 따르되, 대간의 논계가 그칠 때까지 우선 공사를 중지시켜 나라의 체면을 유지시키소서."
하니, 상이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상이, 내달 2일에 한원 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趙昌遠)의 집에서 영시연(迎諡宴)을 여는 일로 인해 해조로 하여금 선온(宣醞)하고 일등 풍악(一等風樂)을 하사하도록 하였다.
평안도 평양부(平壤府)에 이달 14일 밤에 지진이 발생했다. 큰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가 났으며 집들이 흔들흔들 곧 넘어질 듯했는데 이렇게 세 차례나 일어났다. 순안(順安)과 숙천(肅川)에도 같은 날 지진이 발생했다. 평양·함종(咸從)·영유(永柔)에 13일 우박이 내려 곡식들이 손상을 입었다.
9월 25일 을묘
재신(宰臣)을 보내 신덕 왕후 부묘 고유제(袝廟告由祭)를 종묘와 영녕전(永寧殿)에 지냈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사간 남이성(南二星)이 또 공주 집의 칸수에 대한 논계에 감히 동참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정언 이단석(李端錫)이, 의견이 이단하 등과 차이가 없었는데 단하가 특별히 체직되었으므로 감히 태연히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인피했는데, 처치하여 출사시켰다. 장령 이세화(李世華)가 논계하여, 공주들의 집을 《대전》에 정해져 있는 대로 따르라 청하고, 또 한편에서는 논계하고 있는데 한편에서는 짓고 있는 것이 온당하지 못하다고 논했는데, 상이 따르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공주들의 집 문제에 있어서는 내 뜻이 굳게 정해진 지 이미 오래 되었다. 절대로 윤허할 리가 없으니, 억지로 떼를 써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참으로 가소롭다."
하였다. 세화가 엄한 분부를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했는데, 처치하여 출사시켰다.
9월 26일 병진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장령 변황(卞榥)이 전 집의 박증휘와 의견이 차이가 없었는데 증휘가 특별히 체직되었으므로 감히 태연히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헌납 이휴징(李休徵) 역시 이를 이유로 인피했는데, 처치하여 출사시켰다.
양근(楊根)의 유생 채시경(蔡時鏡) 등이 상소하여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와 고 대사성 김식(金湜)의 서원에 사액해 달라고 청했는데, 소를 해조에 내렸다.
이조 판서 조복양(趙復陽)이 다시 상소를 올려 체직을 청했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황해도의 진사 김창춘(金昌春) 등이 상소하여, 송나라의 양시(楊時)·나종언(羅從彦)·이동(李侗) 및 우리 나라의 이이(李珥)·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하자고 청했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밤새도록 번개가 쳤다.
9월 27일 정사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신덕 왕후의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희정당(熙政堂)에 봉안하였다. 도제조 정태화 이하가 조복(朝服)을 의식대로 갖추어 입고 인정전(仁政殿)의 뜰까지 모시고 나아가 중사(中使)에게 청하였다. 도제조가 꿇어앉아 금보를 올리니 중사가 꿇어앉아 받들어 상서원(尙瑞院)의 관원에게 전해주었다. 상서원의 관원이 이를 받들고 앞서서 가고, 옥책을 모신 채련(彩輦)이 뒤따라가 희정당에 봉안하였다.
9월 28일 무오
신덕 왕후의 옥책과 금보를 받들어 경덕궁 읍화당 중문 밖 악차(幄次)052) 에 모셨다. 비로 인해 춘추관(春秋館)으로 옮겨 모셨다가 비가 개자 다시 악차에 봉안하였다. 예관과 지키던 도감의 관원이 물러나왔다.
남이성(南二星)을 응교로, 신명규(申命圭)를 사간으로 삼았다.
밤에 천둥과 번개가 쳤다.
9월 29일 기미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니 약방이 들어와 진찰하여 뜸 뜨는 일을 의논하여 정지하였다. 의관이 물러가자 도제조 허적이 나아가 아뢰기를,
"평안도 무사들의 시재 단자(試才單子)를 아직까지 계하(啓下)치 않고 계시는데, 정시(庭試) 때 명을 내리시고자 해서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합격한 사람이 60명인가?"
하자, 답하기를,
"73명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미 명관(命官)을 보내 시재(試才)해 놓고 만일 보통 때의 상격(賞格)으로 시상한다면 반드시 낙망할 것이므로, 정시 때 모두를 급제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하니, 답하기를,
"신의 생각도 그와 같았으나 그것은 은전이기에 감히 청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예조가, 부묘한 뒤 음복연(飮福宴)을 열 것인지 물어 왔다. 음복(飮福)의 의미는 친히 제사를 지낸 뒤 복을 받고 돌아와 여러 신료들과 경사를 함께 한다는 뜻이다. 친히 제사 지내지 못하고 섭행시켰는데, 음복의 예를 어디에 근거해 묻는단 말인가. 해조에 물으라."
하였다. 파할 무렵에 허적이 나아가 아뢰기를,
"전일 정시를 품정한 뒤 합문(閤門)을 나서자마자 탑전에서 한 말들이 벌써 중외의 사람들에게 전파되어 있었습니다. 이번 서로(西路) 무사를 시재하여 급제시키는 일은 특별 분부에서 나온 것인데 만일 신이 아뢴 것이라고 전파된다면 매우 온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승지로 하여금 사관에게 분부하여 절대로 말을 전파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러겠다고 하였다.
사간 신명규(申命圭)가 추고받는 중이라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9월 30일 경신
도망쳐 돌아온 사람인 최길(崔吉)이 몽고(蒙古)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몽고의 왕은 심양(瀋陽)에 붙잡혀 있고 태자는 북경(北京)에 나가 있어 금령(禁令)이 해이하였다. 그래서 기회를 틈타 도망쳐 왔다."
하고, 또 저들의 사정을 말하기를,
"몽고의 왕은 바로 순치 황제(順治皇帝)의 매부이다. 그의 처가 살아 생전에 왕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은 뒤에는 심양에 가지 마십시오. 가셨다간 반드시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고 했다. 처가 죽자 왕이 그 말을 생각하고 한번도 심양을 찾지 않자, 청나라가 사람을 보내 꾸짖기를 ‘심양에는 그대 조상의 무덤이 있는데 어찌해서 한번 와 성묘하지도 않는가.’ 하니 왕이 부득이해서 찾아갔다. 청나라 사람들이 덫을 놓아 사로잡아 구류시키고서는 그 아들을 세워 왕을 삼게 하였다. 그 아들의 나이는 16세였는데 당당하게 말하기를 ‘죄도 아닌 것으로 부왕(父王)을 구류하고 있는 것은 불가한 것이며, 아비에게 죄를 주고 자식을 세우는 것도 불가한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청나라의 서울로 달려갔다. 몽고의 12부(部) 중에 왕의 부가 가장 어른인데 12부가 각기 정병 수십만을 거느리고서 ‘일이 잘 끝난다면 우리들도 일을 벌이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군사를 일으키겠다.’고 말하고 있다. 몽고 왕의 나이가 비록 어리지만 출중하게 뛰어나다."
하였다. 그 뒤 최길을 청나라에 압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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