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21권, 현종 10년 1669년 8월

싸라리리 2025. 12. 6.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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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신유

대신이 2품 이상의 관원을 거느리고 빈청에 모여 전에 계청한 것을 다시 아뢰었는데, 상이 답하였다.
"계사의 내용에 대해서 내가 모르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신중을 기하려고 윤허하지 않는 것이다."

 

헌부가 다시 논계하기를,
"충청 병사 이동현은 버림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곤수의 직임에 제수되었으며 대간의 논계가 한창 일고 있는데 청탁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파직시키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재차 아뢰자 체차시키게 하였다. 세 번 아뢰고 정계하였다.

 

병조 참판 장선징이 상소했는데, 그 대략에,
"삼가 듣건대, 어제 탑전에서 대신이 오정위와 이은상이 애초에 탄핵을 입은 억울한 정상을 가지고 극력 신구했으며 급기야는 조사하라는 명이 있었다고 하니, 신은 매우 황송하고 놀랍습니다.
신이 지난해 언관의 자리에 마침 있었는데, 두 사람이 모두 거실(巨室)로서 그 몸을 깨끗하게 지니지 못하여 사람들의 말이 많은 것을 들었습니다. 이에 부질없이 직분을 조금이라도 다할 생각만 하고 범하기 어려운 시세는 생각지 않고 감히 논열함으로써 기휘를 망령되이 건드려,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 비방하는 의논이 답지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신의 첫 번째 죄입니다.
공경과 높은 벼슬아치들이 논핵을 입은 것이 어찌 한두 번이겠습니까. 그러나 아직까지 그 일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고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고지식함과 망령스런 말로 인하여 이전까지 없었던 일이 처음으로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또 신의 두 번째 죄입니다.
상신이 진달하여 자세하게 분석하면서 한편으로는 ‘어찌 대간의 논계와 같겠습니까.’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두 신하는 반드시 범한 실상이 없을 것입니다.’ 했습니다. 그렇다면 거짓으로 남을 논핵한 경우 자연 나라의 법이 있으니, 신은 죄명은 정해졌고 형벌만 아직 가해지지 않은 상태인 것입니다. 따라서 신은 조용히 움츠리고 있으면서 공손히 엄명을 기다려야 했으므로, 대신과 공경들이 날마다 부묘를 청하는 이런 때를 만나서도 감히 대부들의 뒷자리에 달려가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신의 세 번째 죄입니다. 신을 삭직하시고 이어 신의 죄를 다스려 주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영부사 이경석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신은 늙어 정신이 흐릿하니 물러나 쉬어야 마땅합니다. 물러나 쉴 수 없다면 분수에 넘는 말이라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세 조정을 내리 섬기는 동안 하늘과 같은 은혜를 받았으니 말이 비록 쓰기에 족하지 않다 하더라도 생각이 있으면서 말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신의 죄가 큰 것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신의 마음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생각이 있기에 곧 진달드렸던 것입니다.
지난번 입시했던 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의 충심은 오직 무너진 기강을 진작하고 출척(黜陟)을 분명히 하여 대정(大政)이 점점 지체되지 않기를 원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종언(羅從彦)의 격언인 ‘정직하고 충후하게 논란하라.’는 말을 외우면서, 충후하되 나약하지 않고 정직하되 각박하지 않게 해야지 하고 나름대로 기대했던 것입니다. 이은상과 오정위의 일에 있어서는 애초에 의도적으로 발언한 것이 아닙니다. 그날 공조 당상 자리가 비었는데 갖추어 의망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듣고는 신이 감히 ‘재주가 수용할 만한 사람을 한번의 배척으로 문득 폐기한다면 조정에 어찌 사람이 부족하지 않겠는가. 대간의 논계가 풍문에서 나와 때때로 간혹 실상과 어긋나 애매하다는 탄식이 없지 않다.’고 진달했던 것입니다. 우러러 진달드린 뜻은 대개가 이와 같은 것이었으니 어찌 감히 무함한 것이겠습니까.
삼가 병조 참판 장선징의 상소 내용을 듣건대 신의 뜻을 자세히 알지 못한 듯한데, 어찌 그리도 낭비하는 말이 많은지 애석합니다. 이 일은 신이 혐의롭게 여기지 않습니다만, 오직 분수에 벗어난 말을 한 것은 신의 잘못이므로 매우 황공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그때의 말은 별로 다른 뜻이 없었다. 경은 어찌하여 이처럼 지나치게 인혐하는가."
하고, 사관을 보내 전유하였다.

 

좌의정 허적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지난번 입진했을 때 영중추부사 이경석이, 조정의 인재가 떨어졌다는 탄식을 인하여 이은상과 오정위의 일에 말이 미치자 ‘필시 실제 범법은 없었을 것이고 그 재주가 아깝다.’고 하면서 이어 수용하자고 청했습니다. 이것은 본디 신이 아뢰고 싶었지만 미처 아뢰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의 견해는 이와는 조금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대체로 두 신하가 입은 논핵은 애초부터 관례적으로 서로 바로잡아 주는 내용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며 사람들이 억울하다고 말하고 있는 만큼, 재상의 반열에 있는 신하로 하여금 죄명을 뒤집어 쓰고 영원히 금고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과연 실상이 있다면 그들이 받아야 할 벌이 잠시 파직시켰다가 즉시 서용하는 정도에 그쳐서는 안 되니, 순전히 관대한 은전만을 행하여 바로 수용하는 명을 내린다면 조정 인사들이 석연하게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두 신하의 입장으로도 어찌 수용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일반 사람과 똑같이 굴겠는가 여겼습니다. 신이 굳이 먼저 조사부터 하고 싶었던 것은, 진실로 그 일을 중시하고 나라의 체면을 보존하려는 데에서 나왔던 것이었습니다.
삼가 병조 참판 장선징의 소장을 보건대, 기가 지나치게 성하고 말이 너무나 사나워 심지어는 ‘극력 신구하니 황송하고 놀랍다.’고 말하기까지 했는데, 신 역시 지극히 황송하고 놀랍습니다. 조사하여 실지가 있다면 신이야 진실로 억울하다는 설을 가볍게 믿은 잘못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지만,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또한 풍문으로 논핵할 수 있도록 허여된 대관에게야 조금도 손상되는 점이 없는 것입니다. 그날 반복해서 말씀드렸던 말은 여기에 있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전하께서도 역시 하교하시기를 ‘풍문이 잘못된 것이었다 하더라도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하셨으니, 생각건대 성명께서 반드시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선징의 상소에는 대각이 일을 논핵하는 데에 있어서는 풍문으로 할 수 있도록 허여되어 있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는 허다한 대화를 기사 안에 모두 실을 수 없어서 신의 본뜻을 서로 자세히 알지 못한 데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은 굳이 강변하여 서로 따지는 것처럼 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받아들이면서 허물로 삼고 묵묵히 며칠을 있었던 것입니다.
이어 대각의 계사를 보건대, 조사하는 일을 가지고 나라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것으로 여기면서 그 말이 더욱 심했습니다. 대각의 논계는 두 사람의 말과는 다른 것이니, 신이 어떻게 끝까지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노둔하고 형편없어 더욱 감히 조목조목 변명하여 도리어 체면을 손상시킬 수는 없지만, 그들이 이른바 국조 이래 있지 않았던 일이라는 것은 신이 이해할 수 없는 바였습니다. 조사하는 동안 대각이 논계를 잠시 정지하는 것은 즐비하게 있었던 일반적인 일입니다. 어찌 이로 인하여 공론이 엄해지지 않은 적이 있었으며, 어찌 이로 인하여 대각이 존중되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까.
만약 신이 탑전에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면 반드시 오늘과 같은 소란은 야기되지 않았을 것이니, 이 점은 아주 신이 자책해야 할 점입니다. 신의 직명을 체직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날 경의 말을 내 이미 알고 있다. 그 사이에 무슨 다른 뜻이 있었겠는가. 아직까지 있지 않았던 일이라는 말은 그것이 정확한 데서 나온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경은 어찌해서 그리 깊이 혐의하여 도리어 체면을 손상시키는가."
하고,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였다.

 

호군 이완이 신병을 이유로 사직하니, 상이 위로하는 내용으로 전유하고, 어의를 보내어 간병하게 했다.

 

경기의 수원 등 7읍에 7월 17일 해일이 있었다.

 

안동 부사(安東府使) 이동명(李東溟)을 가자하고 전 인동 부사(仁同府使) 권희(權曦)에게 말을 하사하였다. 동명과 권희는 모두 진휼 곡식을 특별히 비축했다는 이유로 준직을 제수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이조가 동명은 이미 준직을 역임했고 권희는 영장으로 제수되어 막 당상관으로 승진했다고 아뢰면서 다른 명을 여쭙자, 동명은 자급을 올려 주고 권희에게는 숙마를 주라고 하였다.
동명은 본디 청렴한 이름이 부족했는데, 그 이른바 비축한 진휼 곡식이라는 것은 모두 관아에 저축해 놓았던 것이었다. 일찍이 아장(亞長)을 거친 사람으로서 구차하게 승진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불쾌하게 여겼다. 그 뒤 대각의 논계로 인하여 동명의 자급은 도로 거두어졌다.

 

태학 유생 권상하(權尙夏), 사학 유생 홍수서(洪受叙) 등이 모두 상소하여 곡절을 조목조목 설명하고, 또 대사성 이민적(李敏迪)이 애매하게 추감을 입은 정상을 진달했는데, 상이 물러나 학업을 닦으라고 명했다.

 

8월 2일 임술

영부사 이경석, 영의정 정태화, 행 판부사 정치화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부묘하자는 청을 거듭 아뢰고, 종실 경평군(慶平君) 이륵(李玏) 등이 종실들을 모두 거느리고 아뢰었는데,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전라도 부안현(扶安縣)에 해일이 있었다.

 

황해도 신계(新溪)·평산(平山)·금천(金川)·토산(兎山)에 소의 돌림병이 크게 일어났다. 도내 각읍에 7월 21일 크게 비바람이 불어 각종 곡식이 피해를 입었으며, 서흥부(瑞興府)에서는 장맛비에 빠져 죽은 자가 4명이었다.

 

8월 3일 계해

대신이 백관들을 거느리고 앞서의 청을 거듭 아뢰었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황해도에 해일이 있었으며, 또 큰물이 졌다.

 

8월 4일 갑자

구음(具崟)을 장령으로, 이만영(李晩榮)을 호조 참판으로, 윤변(尹抃)을 헌납으로 삼았다.

 

상이 다리 부분에 저린 증상이 있어 걸음이 편치 못했는데, 도제조 허적이 어의들과 양심합에서 입진하였다. 상이 이어 침을 맞았다. 허적이 아뢰기를,
"세자의 입학일이 멀지 않았고 앞으로 의식 연습이 있으니 박사를 우선 차출해야 하겠습니다. 대제학이 으레 지관사를 겸하니 응당 박사가 되어야 하고, 찬선의 직임도 입학할 때 마땅히 참석해야 하고 부도 참석하지 않을 수 없으니, 판부사 송시열과 좌참찬 송준길의 거처에 하유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제학 은 차출하고, 두 신하의 거처에는 정원이 말을 만들어 하유하라."
하였다. 상이 세자가 학질을 앓은 뒤로 아직도 조금 회복이 덜 되었다고 여겨 입학을 9월로 미루어 행하고자 했는데,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물러나 예관들과 상의해 보겠습니다만, 9월은 너무 멀 뿐만 아니라 날씨도 매우 차가우니, 속히 행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정승 자리가 갖추어지지 않은 지 오래입니다. 신들은 견해가 고루하여 나랏일이 어려움이 많고, 또 입학할 때 대신도 배행해야 하니 때맞추어 뽑아야 할 듯합니다. 영상의 뜻도 역시 그러합니다."
하니, 상이 옳게 여겼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통제사 구문치(具文治)가 현재 어미의 병을 이유로 상소를 진달하고 즉시 부임하지 않고 있는데, 본영의 일이 참으로 염려가 됩니다. 그러나 곤수를 바꾸는 것은 뒤폐단과 관련이 있으므로 감히 체차를 청하지 못했습니다."
하니, 상이 체차하라고 명했다. 승지 남용익이 아뢰기를,
"부묘하자는 청을 합사로 연일 아뢰고 있으며 대신들이 백관을 거느리고 진계하고 있는데, 매번 윤허하지 않는다고 하교하면서 뜻을 나타내지 않으시므로 아랫사람들의 의혹이 불어나고 있습니다. 비록 즉시 윤허하여 따르지는 못하신다 하더라도 말을 만들어 답을 하셔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정부가 백관을 거느리고 앞서의 청을 거듭 아뢰고, 경평군 이늑 등이 종실들을 거느리고 계청했으며, 대사간 이익(李翊) 등이 합사로 재차 아뢰고, 응교 남이성(南二星) 등이 열세 번째 차자를 올려 논했으나,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예조 참의 권대운(權大運)을 보내 지릉(智陵)을 봉심했다.

 

8월 5일 을축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영중추부사 이경석,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허적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지금 청하고 있는 일은 백세토록 변하지 않는 떳떳한 도리로서 정당한 의리이고 중대한 인륜임을 전후 계사에서 이미 갖추어 아뢰었습니다. 어제 내리신 비답에 또 윤허하지 않는다고 분부하셨으므로 신들은 안타까운 심정 금할 수 없습니다. 당연한 의리이고 모두 동의하는 공론임을 전하께서도 이미 통촉하고 계신데 아직도 신중히 할 것을 주장하시면서 즉시 윤허하시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전하께서 신중히 여기시는 것이, 매우 오래된 일이므로 함부로 의논할 수 없기 때문이라 하신다면, 능침을 봉축하고 정자각을 중건하신 것도 전대에 거행하지 않았던 일을 행한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부묘하는 일에 대해서만 이처럼 어렵게 여기십니까. 조종들에 관계되는 일이라서 소급하여 의논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신다면, 《실록(實錄)》을 상고해 보더라도 당시 부묘하지 않았던 것이 조종들의 본의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능침의 제도와 부묘의 의식은 본시 차이가 없는 것으로서 순서대로 거행해야 할 예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시비와 가부를 결정지을 수 없는 일처럼 여기시니, 이에 대해서 신들은 의심스럽습니다. 바라건대, 망설이지 마시고 부묘하는 의식을 속히 거행하여 신명과 사람들의 기대에 보답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신중을 기하는 나의 뜻이 끝내 옳다고 자신할 수 없는 것이고 경들의 소청이 이와 같으니, 나의 주장을 버리고 애써 따르겠다. 아뢴 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경평군 이늑 등이 올린 계사에 내린 비답도 이러하였다. 대사간 이익 등이 합사하여 계청하자, 상이 답하기를,
"조정에 내린 비답에 이미 유시하였다."
하였다. 이날 예문관 봉교 조사석(趙師錫) 등도 상차하여 부묘의 예를 거행할 것을 청하였고, 감찰 한공필(韓公佖) 및 원양도(原襄道)의 유생 이모(李模) 등도 역시 상소하여 청했는데, 합사에 대한 비답과 같은 내용으로 답했다. 이때 부묘하자는 청을 오랫동안 따르지 않아서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답답해 하였는데, 윤허한다는 분부가 내려지자 온 나라 사람들이 기뻐하였다.

 

사관을 보내어 판부사 송시열, 좌참찬 송준길에게 세자가 입학할 무렵에 올라올 것을 특별히 유시하였다.

 

빈청이 아뢰었다.
"오늘 대제학을 권점할 때 전 대제학 조복양이 천거한 바가 세 사람이었는데, 오래된 의망 단자를 가져다 상고해 보건대 전 대제학을 도로 의망에 들인 일이 많았습니다. 이는 대체로 문형이 중임이어서 아무 사람이나 감당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고, 무릇 빈 자리가 생김에 그 대임자를 차출할 수 없을 경우에는 다시 그 사람을 의망하는 것이 정조(政曹)의 규례이기 때문입니다. 복양은 일찍이 문형을 거쳤는데, 그 스스로의 혐의로 인하여 누락시키고 의망하지 않았으니, 일의 체모에 있어 온당하지 않습니다. 신들이 그의 이름을 추가로 써서 권점하여 들입니다."

 

조복양(趙復陽)을 대제학으로, 남이성(南二星)을 사인으로, 유비연(柳斐然)을 등급을 뛰어넘어 통제사로, 윤천뢰(尹天賚)를 충청 병사로, 영의정 정태화를 부묘 도감 도제조로, 행 호조 판서 김좌명·예조 판서 박장원·형조 판서 정지화·공조 판서 민정중을 제조로, 사인 이민서·남이성을 도청으로 삼았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예조 판서 박장원, 호조 판서 김좌명을 보내어 정릉(靖陵) 정자각의 공사를 시작하게 하였다.

 

8월 6일 병인

이에 앞서 양사가 공주들의 집을 짓는 일에 대해 쟁집하여, 각자가 짓도록 하고 또 정해진 규정에 따라 짓게 할 것을 달이 넘도록 청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각자에게 짓게 하는 한 가지 조항은 빼고 정해진 규정을 한결같이 따르게 할 것만 연계했으나, 역시 따르지 않았다.

 

정원이 아뢰기를,
"신덕 왕후를 부묘하는 논의에 대해서 이미 윤허하셨습니다. 옥당이 올린 차자를 보건대 ‘고 권근(權近)이 지은 흥천사(興天寺)의 기문(記文)을 상고해 보니 「홍무(洪武) 병자년 8월 무술일에 우리 소군(小君) 강씨(康氏)가 승하하였다.」라고 씌여 있다.’ 하였는데, 사관이 지금 베껴 온 《실록(實錄)》에 병자년 8월 초하루가 무자일이라고 하였으니 갑자의 순위로 헤아려 보면 병자년 8월의 무술일은 11일이 됩니다. 그렇다면 정릉(貞陵)의 기신(忌辰)이 멀지 않습니다. 예관으로 하여금 자세히 상고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신덕 왕후를 부묘하는 일을 이미 윤허하셨으니 본릉의 기신 및 5명일(五名日)의 제향을 차례로 거행해야 합니다. 당초 사관이 《실록》을 등서해 왔는데 그 안에 ‘병자년 8월 무자 삭’, ‘무술일에 현비(顯妃)가 승하하였다.’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해 8월 초하루가 무자일이었다면 11일이 무술일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듯합니다. 이 밖에는 본조에 증거해 볼 만한 문서가 없고 정원이 아뢴 내용도 의견이 없지 않습니다.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정하소서."
하였는데, 대신들이 모두 의논 드리기를,
"《실록》에 기재된 것이 이처럼 명백합니다."
하였다. 이리하여 드디어 8월 11일을 정릉의 기신으로 정하였다.

 

8월 7일 정묘

상이 양심합에 나아갔다. 침을 맞으려고 했는데 다리의 환부가 조금 나아졌으므로 그만두었다. 약방 도제조 허적이 뵙기를 청해 입시하여 아뢰기를,
"형조에 옥송(獄訟)이 많이 밀렸는데 판서 오정일(吳挺一)은 병으로 직무를 수행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도승지 남용익(南龍翼)은 낙마하여 부상을 입었습니다. 적절한 조처가 있어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모두 체직시키도록 하였다.

 

8월 8일 무진

부묘 도감이 아뢰기를,
"이번 부묘할 때 신주(神主)를 만들고 휘호를 올리는 등의 절목을 미리 강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속히 예조로 하여금 취품하여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훈련 도감이 아뢰기를,
"도감의 천총 윤천뢰가 새로 충청 병사에 제수되어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본도에 있는 훈련별대를 단속하는 일을 이 사람에게 전임시켜 부대를 편성하게 하는 한편, 또 조정의 본의로 유시하여 자원 응모하는 길을 활짝 트이게 할 것을 분부하여 보내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행 대사헌 정지화가, 공주의 집을 짓는 일에 대해서 하문하였을 때 법에 의거하여 쟁집하지 못했으므로 지금 대간의 논계에 동참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집의 신명규 등이, 경상 좌병사 민응건(閔應蹇)이 멋대로 탐학한 짓을 하였다고 논계하며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말 것을 청했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세 번째 아뢰자 단지 체차시키게 하였다.

 

8월 9일 기사

강백년(姜栢年)을 도승지로, 윤집(尹鏶)을 대사헌으로, 서필원(徐必遠)을 형조 판서로, 이지원(李枝遠)을 북병사(北兵使)로, 이유(李濡)를 설서로, 이정영(李正英)을 우윤으로 삼았다.
상이 형조 판서를 가망(加望)하라고 하자, 이조 참판 이시술이 홀로 정사하여 조복양을 가망하여 들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가망(加望)하게 했는데 단지 복양 한 사람으로써 책임만 메우다니 매우 놀라운 일이다. 해당 당상과 낭청을 아울러 무겁게 추고하라."
하고, 그 망단자를 도로 내렸다. 이조가 이완과 서필원으로써 가망하자, 필원이 비점을 받았다. 이때 필원이 막 무거운 논핵을 입었기 때문에 전조(銓曹)가 처음에 비의하지 않았던 것인데, 상의 뜻은 필원에게 있었으므로 특별히 물리고 가망하게 했던 것이다.

 

지평 이후징(李厚徵)이 대사헌 윤집과 상피 관계라는 이유로 체직되었다.

 

신덕 왕후의 기신일을 다시 정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이번 신덕 왕후의 기신제에 대해서 정원이 아뢴 대로 대신들과 의논하여 8월 11일로 정했습니다. 신들이 《실록》을 등서해 온 초고를 다시 상고해 보았더니 ‘병자032)   추 팔월 무자’라고 기록된 아래에 ‘삭(朔)’ 자가 씌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 기록한 9월 병진일과 크게 틀려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있게 되었습니다. 즉시 관상감으로 하여금 날짜를 소급하여 계산해 보게 하였더니 그해 8월 초하루는 바로 병술일이었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무술일의 기신은 13일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실록에 경인년033)   8월 을미일에 ‘삭’ 자를 썼고 그 아래 갑진일에 ‘기신제를 파하고 정조(停朝)하였다.’ 하였고, 정미일에 ‘정(正) 윤흥제(尹興濟)를 흥천사에 보내어 기신의 재를 올리게 하였다.’ 하였습니다. 을미일에서 정미일까지가 13일이 되니, 더욱 확실한 증거가 될 듯합니다. 오랫동안 지내지 않았던 제사이므로 본조에는 달리 고증할 것이 없습니다. 지금 관상감으로 하여금 날짜를 다시 계산해 보게 하였으니, 내일 향축(香祝)을 받드는 일은 우선 정지하고 완전히 결정된 뒤에 보내게 하소서. 그러나 이 일은 중대한 것이니 속히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결정하소서."
하니, 상이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당초에 옥당이 무술일을 11일이라고 잘못 알았는데 정원이 잘못된 것을 그대로 따르면서 다시 고증해 보지 않고 삭(朔) 자를 덧붙였는가 하면, 해조와 대신도 자세히 살피지 아니하여 막중한 사전(祀典)을 잘못 거행할 뻔하였다. 예조가 대신들에게 수의(收議)하니 대신들이 다시 13일이 옳다고 하여, 8월 13일을 신덕 왕후의 기신으로 정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앞으로 부묘할 때 휘호를 올리는 절목에 대해서는 신묘년034)  에 부묘할 때 인열 왕후(仁烈王后)에게 휘호를 소급하여 올린 전례가 있으므로 그 예에 따라 거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신주를 만드는 절목에 대해서는 신들이 《오례의(五禮儀)》를 가져다 입주의(立主儀)를 상고해 보건대 ‘우제(虞祭) 때에는 산릉에서 입주하고 연제(練祭) 때에는 혼전(魂殿)에서 제주(題主)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모두가 초상과 관계되는 절목으로는 고증할 수 있으나 이번에 신덕 왕후를 부묘하는 일은 수백 년 뒤에 소급하여 거행하는 것이므로 신주를 만드는 처소를 미리 결정하기가 실로 어렵습니다. 사람들의 의논은 혹 산릉에 가서 시행해야 한다고 하는데, 사체가 중대할 뿐만 아니라 신들이 평소 예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므로 마음대로 결단할 수 없습니다. 대신 및 유신들에게 의논하여 속히 강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10일 경오

부묘 도감이 아뢰기를,
"《등록》을 가져다 상고해보니, 우주(虞主)는 국장 도감에서 만들고 연주(練主)는 봉상시에서 만듭니다. 이번의 의식 절차가 비록 일반적 전례와는 같지 않으나, 연주를 만드는 법을 따라야 할 것 같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전례를 상고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이조 판서 이경억이 세 번째 정사한 뒤 상소를 진달하여 체직을 청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대제학 조복양이 상소를 진달하여 사직했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8월 11일 신미

밤에 달이 남두성(南斗星)으로 들어갔다.

 

홍만용(洪萬容)을 승지로, 이명익(李溟翼)을 지평으로, 홍만종(洪萬種)을 사서로 삼았다.

 

헌부가 통제사 구문치(具文治)가 태연스레 상소를 올린 죄를 논핵하여 파직을 청했는데, 누차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간원이, 내관이 자기 식솔을 들여 보내 주지 아니한 선인문(宣仁門)의 문지기를 잡아다가 매를 때리기까지 한 것을 논핵하여 나문 정죄하라고 청했는데, 상이 먼저 파직하고 나중에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10여 차례를 아뢰었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고 인평위(寅平尉) 정제현(鄭齊賢)에게 한 계급을 가자했다.
상이 하교하기를,
"지난번 기쁜 경사로 인하여 모든 부마들에게 가자해 준 일이 있었는데, 유독 세상을 떠난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지난날을 돌이켜 보건대 마음이 매우 슬프니, 인평위 정제현에게는 특별히 소급해서 은전을 베풀어 나의 마음을 위로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자전이 온천에 거둥했을 때 여러 부마들에게 모두 가자했는데, 제현은 이미 죽어서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명이 있은 것이다.

 

8월 13일 계유

관원을 신덕 왕후의 능소에 보내어 기신제를 거행하였다.

 

8월 14일 갑술

간원이, 회령 부사(會寧府使) 이익형(李益亨)은 경력이 많지 않은 데다가 기록할 만한 공로도 없으므로 발탁하여 제수하기에 합당치 않다고 논핵하여 개정할 것을 청했는데, 여러 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시강원이 아뢰기를,
"세자가 문묘에 작헌례를 올릴 때 찬인(贊引)은 으레 필선으로 삼는 것이 《오례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을유년·임진년의 본원 일기 및 성균관 홀기(笏記)에도 모두 필선을 찬인으로 삼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번에 예조가 작성한 의주에는 상례(相禮)를 찬인으로 삼았습니다. 이는 근거가 없는 것이고 또한 전례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다시 부표(付標)하여 들이게 해야겠으나, 형세로 보아 겨를이 없으니 우선 《오례의》에 따라 거행하고 나중에 의주를 고쳐 들이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을유년·임진년의 전례에 따라 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 이경억이 누차 상소하여 사직했는데 상이 비국에 내려 처치하도록 하였다. 그 뒤 인견할 때 영의정 정태화가 경억의 병이 심하다고 진달하여 체직시켰다.

 

병조 판서 홍중보가 누차 상소하여 체직시켜 주기를 청했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평안도 평양에 지진이 있었다. 동쪽에서 일어나 서쪽에서 멈추었는데 소리가 천둥치듯하여 가옥이 모두 흔들렸다. 순안(順安)·영유(永柔)·중화(中和)·숙천(肅川)·강서(江西)·은산(殷山) 등지에도 같은 날 지진이 있었다.

 

평안도에 7월 27일 초경에 말[斗]만한 큰 별이 동북쪽에서 떨어져 서남쪽으로 흘러 갔다. 모양은 횃불 같았고 번쩍이는 빛이 땅을 비추어 밝은 대낮과 같았는데, 한참 후에야 사라졌다. 이어서 소리가 났는데, 큰 북을 치는 듯한 소리가 세 번 났고 천둥치는 듯한 소리가 한 번 났다.

 

전라도 옥구(沃溝)와 임피(臨陂)·영광(靈光)·장흥(長興)·함평(咸平)·영암(靈巖)·순천(順天)·강진(康津)·남해(南海)·나주(羅州) 등지에 해일이 있었다.

 

8월 15일 을해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니, 약방이 입진하였다. 도제조 허적이 아뢰기를,
"입진한 뒤에야 침을 놓을 것인지 뜸을 뜰 것인지 의논하여 결정할 수 있으므로 입진할 것을 청했습니다. 응어리의 환부는 전보다 덜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덜한 듯하다."
하였다. 입진이 끝난 뒤 대신과 비국의 재신(宰臣)들을 불러들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세자가 입학할 때 《소학》의 제사를 진강하라고 하교하셨습니다. 조종조 때에도 《소학》을 강론한 전례가 있기에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자고 의논드렸습니다. 그리고 조복양·박장원의 의논도 신의 의견과 같았으나 민정중은 《대학》을 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의논드렸는데 상께서 신들의 의논을 따르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외부의 의논을 듣건대 《대학》을 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니, 다시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문종(文宗)께서 8세 때 입학하셨는데 지금 세자는 9세이니 8세와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조종조 때 이미 행한 규례가 있어서 나는 그대로 시행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12세 때 입학하였으므로 《대학》을 강했던 것이다. 세자는 지금 《소학》을 배우고 있는데, 현재 배우고 있는 것을 강하지 않고 기어이 《대학》을 강할 필요가 있겠는가.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다. 의논한 대로 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세자가 출궁할 때 가까운 선인문(宣仁門)으로 나가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환궁할 때에는 도성 백성들이 우러러 볼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으니 큰길로 환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그리고 이완의 병이 위중한 것을 아뢰며 포도 대장의 직임을 체직시킬 것을 청하니, 이에 따르고, 이완에게 약물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또 삼공의 자리가 빈 것에 대해 말하며 속히 복상(卜相)할 것을 청했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부묘 도감이 취품하여 결정해야 할 일이 있는데 당상이 정릉(靖陵)을 수리하는 일로 나가 있기 때문에 오랫동안 아뢰지 못했습니다. 휘호를 올리고 나서야 옥책문(玉冊文)을 지을 수 있고, 옥책문을 지은 뒤에야 그 글자 수에 따라 공사 규모의 대소를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엇을 휘호라고 하는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태조 대왕으로 말할 것 같으면 태조는 묘호(廟號)이고 그 위의 네 글자가 휘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신덕의 위에 있었던 네 글자에 대해서는 상고해 낼 수 없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덕이란 내용으로 소급하여 시책(諡冊)을 지어 올려야 한다.’고 합니다만, 신의 생각에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그 당시 휘호를 올릴 때 이미 시책이 있었을 것이니, 지금 추급하여 시책문을 짓는 것은 난처합니다."
하자, 상이 그러하다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예조가 날짜를 계산하여 무자일이 초하루가 아닌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는 《실록》이 잘못 기록된 것인가, 사관이 등서할 때 잘못 쓴 것인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그것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만, 무자일이 초하루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하였다. 훈련 대장 유혁연이, 도감의 군사들 중 늙어서 병사 노릇을 할 수 없는 자들을 내보낼 것을 청하자, 상이 대신들에게 물어보고서 윤허하였다.

 

경평군 이늑이 영동(嶺東)의 산수를 구경하고 싶어 상소하여 고성(高城)의 온천에 가서 목욕하고 올 것을 청했는데, 상이 답하기를,
"옛 왕자들 중 경 한 사람만이 생존해 있다. 지금 경의 나이가 70세이고 가을날씨가 벌써 차가워졌으니, 이때 목욕을 하는 것은 기력만 더 손상시킬 것이다. 지금 사관을 보내어 경을 타이르니, 나의 뜻을 헤아려 떠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늑이 다시 상소하여 가게 해줄 것을 청하자, 상이 할 수 없어 윤허하고 휴가와 말을 지급하였다.

 

8월 16일 병자

조복양을 이조 판서로, 이경억을 우참찬으로, 서필원을 총융사로, 홍억(洪億)을 지평으로, 이여발(李汝發)을 우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집의 신명규, 장령 구음·경최 등이, 민응건의 일을 논핵한 계사에서의 조어 문제로 대신에게 논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모두 출사하도록 처치하였다.

 

형조 판서 서필원이 사직했는데, 상이 우대하는 내용의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8월 17일 정축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호조가 아뢰기를,
"공주들의 집 칸수를 정해진 제도에 따라 지어줄 것을 양사가 현재 논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집터에 대해서는 전에 ‘해조가 매입하여 주도록 하라.’고 분부를 하였습니다. 때문에 담당 중관(中官)이 본조의 색리를 불러 말하기를 ‘연석(筵席)에서 의논하여 결정한 대로 거행하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지금 값을 지급하여 터를 사도록 해야겠는데, 터의 칸수에 대해서 많고 적은 것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집터가 1천 5, 6백 칸이 될지라도 궁가가 말한 대로 사서 주어야 합니까? 앞으로 또 궁가들에게 집터를 사주어야 할 일이 있을 것이니, 일정한 제도를 만들어 훗날 준행할 근거를 마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이 초기(草記)에 기록된 숫자로 정식을 삼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좌참찬 송준길이 신병으로 소명에 달려오지 못하고, 상소를 진달하여 자신을 논열하며 체직해 줄 것을 청하기를,
"손 가운데 신에게 묻는 자가 ‘성상이 그대를 대우하기를 한결같이 성신(誠信)으로 하는데 그대는 명을 받들지 않으니, 성신의 도리에 있어서 어떠한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데 있어서는 오직 근력이 있을 때까지를 한도로 한다. 옛 사람들이 치사를 70세로 잡았던 것도 그 뜻이 역시 이것이다. 근력이 미칠 수 있다면 명을 받들어 분주히 하는 것이 진실로 성신이 되지만 근력이 미치지 못하는데도 오히려 임금의 명을 감히 어길 수 없다는 이유로 억지로 하면서 멈추지 않다가 마침내 길에서 죽는다면, 이것이 어찌 성신의 도리이겠는가. 그리고 이것이 어찌 성명께서 신하들에게 기대하는 것이겠는가.’ 하였습니다. 선정신 이황의 말 가운데 아주 좋은 말이 있습니다. ‘나아갈 만한 경우는 나아가는 것이 공경이고, 나아갈 만하지 않을 경우는 나아가지 않는 것이 공경이다.’고 했습니다. 지금 신도 역시 ‘명을 받들 만하여 명을 받든다면 명을 받드는 것이 성신이 되고, 명을 받들기 어려워 명을 받들지 않는다면 명을 받들지 않는 것이 성신이 된다.’고 말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비록 신을 의심하지만, 우러러 생각건대 성명께서는 반드시 신의 마음을 이미 통촉하셨을 것입니다. 신의 끊임없는 한 가지 생각은 길이 대궐에 있으니 어찌 말하고 싶은 것이 없겠습니까마는, 정신이 흐릿하고 어지러워 언어로 형용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격물·치지·성의·정심의 공부에 더욱 힘을 쓰시어, 역사에서 징험하고 마음에서 깨닫는다면, 주자께서 이른바 ‘오늘날의 일은, 마땅히 해야 할 것은 하고 마땅히 해서는 안 되는 것은 멈추는 것이다. 그렇다면 요(堯) 순(舜) 시대와 같이 청명한 태평 시대가 되어 하느님과 귀신이 위엄과 노여움을 도로 거둘 것이다.’는 것이 아마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신은 몸이 재야에 물러나 있는데도 이름이 조정의 명부에 기록되어 있으니, 하찮은 저의 분수에 있어서 감히 편안히 여길 수 있는 바가 더욱 아닙니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신의 형편을 불쌍히 여기시어 신의 본직과 겸직을 모두 체직해 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의 상소 내용이 어찌 이다지도 처음의 약속과 같지 않단 말인가. 대면하고 약속한 뜻을 장차 헛되게 하려는 것인가. 게다가 세자의 입학이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경이 찬선과 좨주의 임무를 지니고 있는 이상 모두 참석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그런데 지금 냉정하게 거절하니, 대면했을 때의 간절했던 말에 있어서 과연 어떻겠는가. 아, 경의 마음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리고 내 또한 어찌 경에게 근력을 다하여 직무를 수행하라고 바라겠는가. 이런 큰 대례에 경이 참석하지 않는다면 내 마음이 어떻겠는가. 가을 날씨가 선선하고 시원한 바람도 불고 있으니, 지금은 길을 떠나기에 아주 적합한 시기이다. 경은 나의 뜻을 유념하여 더이상 고사하지 말고 속히 길을 떠나, 나와 동궁이 밤낮으로 고대하고 있는 마음을 저버리지 말라."
하고, 사관을 보내 전유하였다.

 

병조 판서 홍중보가 네 번째 소를 올려 체직시켜주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8월 18일 무인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예조가 아뢰기를,
"정릉에 수호군 30명을 떼어 줄 것을 전에 이미 계하하여 병조가 거행하였습니다. 지금 부묘하는 예를 거행하기로 이미 결정하였으니, 불천지위(不遷之位)의 예에 따라 능침의 수호군을 40명을 추가 배정하여 70명의 원수를 채워야겠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처음 시행하는 것이니, 병조로 하여금 품지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병조가 회계하기를,
"부족한 40명에 대해서 반절은 가까운 고을의 보병을 옮겨 배정하고, 반절은 본도로 하여금 부근의 각 고을에 배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헌 윤집, 집의 신명규, 장령 경최·구음 등이 아뢰기를,
"집의 칸수에 대해서는 본시 정해진 제도가 있으므로 반드시 옛법을 준수하여 조종들의 훌륭한 뜻을 따르고 후대에 교훈을 남겨야 하는 것입니다. 신들이 당초 공주들의 집에 관하여 거행하도록 한 조항을 보건대, 상께서 하교하신 말씀이 실로 합당한 것으로서 그대로 시행하면 사치스럽거나 제도에 지나치는 잘못이 없고 조종들이 법을 만든 뜻에도 부합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전날에 하교하신 것을 버려두고 절감하시려는 의도가 아예 없으십니까.
그리고 신들이 호조의 계사를 보건대 ‘대지의 칸수가 1천 5, 6백 칸이 되더라도 궁가가 말한 대로 모두 사서 주어야 합니까.’ 하였는데, 상께서 ‘초기에 기록한 숫자대로 정식을 삼으라.’ 하셨으니, 신들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단지 제도에 벗어날 뿐만 아니라 지을 칸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입니다. 법전에는 집터에 대해서도 정해놓은 제도가 있는데, 어느 궁가가 이런 말을 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매우 한심스럽습니다. 칸수를 제도에 벗어나게 할 수 없는 것이라면 집터를 어떻게 그들 멋대로 이토록 널리 차지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공주들의 집 칸수와 집터를 한결같이 법전을 따르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으며 이르기를,
"오늘날 집을 옮겨 짓게 한 것은 나의 명령이었다. ‘어느 궁가가 이런 말을 하였는가.’라고 한 것은 매우 근거없는 말이다."
하였다.

 

정언 김덕원(金德遠)이 상소하여, 노산(魯山)·연산(燕山)·광해(光海) 세 폐군(廢君)에 대해서 입후하고, 성삼문(成三問) 등 6신을 정표하고 사당을 세우게 할 것을 청했는데, 소를 들인 지 몇 달이 지났으나 상이 비답을 내리지 않다가, 그를 특명으로 체직시켰다.
사신은 논한다. 노산군은 우리 임금의 적자로서 죄없이 자리에서 물러났으므로 충신 열사들이 지금도 눈물을 흘리고 있으니, 입후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는 것이 실로 옳은 것이다. 그러나 연산의 포악한 짓은 걸(桀)과 주(紂)보다 더하였고, 광해의 죄는 윤기(倫紀)에 관계되는 것이었는데 어떻게 노산과 더불어 입후할 것을 청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성삼문 등은 성사시키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하였으니, 그 충절이 지극하고 뜻이 비장하다. 중국의 고사에 따라 그들의 관작을 회복시켜주면 충분한 것이다. 정표하고 사당을 세우게 하는 문제는 본조에서 거론할 수 없는 것인데 덕원이 함부로 말하였으니, 식자들이 그르다고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39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683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윤리-강상(綱常) / 왕실(王室) / 풍속-예속(禮俗) / 인물(人物)
사신은 논한다. 노산군은 우리 임금의 적자로서 죄없이 자리에서 물러났으므로 충신 열사들이 지금도 눈물을 흘리고 있으니, 입후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는 것이 실로 옳은 것이다. 그러나 연산의 포악한 짓은 걸(桀)과 주(紂)보다 더하였고, 광해의 죄는 윤기(倫紀)에 관계되는 것이었는데 어떻게 노산과 더불어 입후할 것을 청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성삼문 등은 성사시키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하였으니, 그 충절이 지극하고 뜻이 비장하다. 중국의 고사에 따라 그들의 관작을 회복시켜주면 충분한 것이다. 정표하고 사당을 세우게 하는 문제는 본조에서 거론할 수 없는 것인데 덕원이 함부로 말하였으니, 식자들이 그르다고 하였다.

 

가주서 이유(李濡)가 판부사 송시열, 좌참찬 송준길에게 전유했는데, 시열 등이 병을 핑계대고 모두 오지 않았다.

 

8월 19일 기묘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대사헌 윤집, 집의 신명규, 장령 경최·구음 등이 인피하며 아뢰기를,
"신들이 어제 조방(朝房)에 모두 모여 이전에 아뢰던 일에 대해서 상의할 때 문득 해조가 품계한 것을 보았는데 ‘대지가 1천 5, 6백 칸이 되더라도 궁가가 말한 대로 모두 사주어야 합니까.’ 하였습니다. 신들은 이것을 보고 놀라 생각하기를 ‘이것은 필시 궁가가 말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궁가들이 말을 하지 않았다면 해조가 어떻게 이런 품계를 하였겠는가. 현재 칸수가 제도에 벗어나는 것에 대해서 양사가 4개월 동안 쟁집하고 있으나 아직 윤허를 받지 못했는데, 또 이처럼 많은 대지를 차지한다면, 듣는 사람들이 누구인들 놀라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이에 몇 마디 말을 대략 첨가하여 경계하는 뜻을 표시하고 아울러 법대로 제도를 정할 것을 청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신들의 말을 믿어주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집을 옮겨 짓게 한 것은 나의 명령이었는데 근거없는 말을 하였다.’고 하교하셨습니다. 신들은 매우 황공스럽고 의심스러울 뿐더러 참으로 석연치 않은 점이 있습니다. 신들이 언제 집을 옮겨 짓게 한 일이 상께서 하교하신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까. 그러나 대지의 칸수에 있어서는 ‘한결같이 궁가가 말한 대로’라고 한 말로 보건대 그 말은 궁가들이 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신들이 어떻게 그 말이 전하께서 명령하신 것이고 궁가들이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설사 대지의 평수 문제가 전하께서 명령하신 것이라 하더라도 이처럼 지나친 것이라면, 언관의 직책을 맡고 있는 몸으로서 입다물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조금이나마 법을 받들어 시행하려고 한 것에 불과할 뿐인데, 성의가 미덥지 못하여 갑자기 미안스러운 분부를 받들게 되었습니다. 신들이 어떻게 태연히 자리에 그대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어제 내린 계사의 비답에 무슨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단 말인가. 관가에서 집을 옮겨 지어주는 것인 만큼 시종 모두가 관가의 호령이니, 해조의 초기에서 궁가의 말이라고 한 것은 진실이 아닌 것이다. 어제의 논계에서 경들이 그 말을 믿고 있으므로 대략 말하여 의심을 풀어주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진실이 아닌 말을 도리어 믿고 있으니, 나는 몹시 부끄럽다. 다시 무슨 많은 말을 하겠는가."
하였다. 윤집 등이 물러나 물론을 기다리니, 간원이 출사하도록 처치하였다.

 

사간 조성보가 아뢰기를,
"간사스럽고 교활한 무리들이 남의 토지와 노비를 탈취하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내수사를 빙자하여 그들의 계책을 이루어, 먼 지방의 백성들로 하여금 생업을 잃게 하고 억울함을 호소하게 하니, 이것이야말로 매우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고(故) 청원위(淸原尉) 한경록(韓景祿)의 후손인 한석중(韓碩重)이란 자가 전주 옥야현(沃野縣) 회룡평(會龍坪)의 밭 석달 갈이와 논 2백 섬지기를 청원위의 사패지(賜牌地)라고 하여 전주의 백성들과 송사를 하였습니다. 그의 사패 문서는 바로 내수사가 작성한 것으로서 문정 왕후(文定王后)의 유교(遺敎)에 의해 절수(折受)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절수 문권에 자호(字號)·사표(四標)·결수(結數)도 쓰지 않았고 그저 옥야의 회룡평이라고 범범히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계갑 양안(癸甲量案)에는 옥야 일대가 모두 민전으로 되어 있고 청원위 집이 절수받은 곳은 아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까마득한 평야지의 즐비한 논밭 가운데에서 어느 곳을 지적하여 정확히 청원위가 절수받은 곳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석중이 두 번 송사에 지고난 뒤 세력에 의지하여 기어이 이기려는 계책을 꾸며 절수 문권을 새로 태어난 공주집에 팔았습니다. 이리하여 내수사가 호조에 계하하여 사실 여부를 묻지도 않고 곧바로 측량을 하게 하였으므로, 백여 명의 백성들이 대대로 전해온 생업을 빼앗기게 되어 그들의 원망이 그지없습니다. 더구나 두 번 송사에 진 자에 대해서는 그 소송을 다시 심리하지 않는 것이 수교(受敎)로 반행한 사목(事目)에 기재되어 있는데, 내수사가 어떻게 두 번 송사에 진 농지를 사들여 정해진 법을 혼란시키고, 석중을 대신하여 백성들에게 원망을 살 수 있단 말입니까.
바라건대 내수사가 매입한 농지를 현재의 소유자에게 빨리 돌려주도록 하여 생업을 잃고 원망하는 폐단을 제거하도록 하소서. 한석중이란 자에 대해서는 유사로 하여금 율법에 의거하여 엄중히 다스려서 그 농간을 부리고 국가에 원망이 돌아가게 한 죄를 징계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으며 이르기를,
"한석중의 일은 대간의 논계에 따라 본도로 하여금 사핵하여 처리하게 하였는데, 몇 년이 지났으나 아직도 깜깜 무소식이다. 대관이 조정의 명령을 봉행하지 않는 관리들을 탄핵하였다면 어찌 지금까지 지연되는 일이 있겠는가."
하였다. 성보가, 사핵하라고 한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거론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이번 신덕 왕후를 부묘할 때의 옥책문을 예문관으로 하여금 지어 올리게 할 것을 이미 의논하여 계하하였습니다. 신들이 외부의 의논을 듣건대 흑자는 ‘이번 부묘할 때에 시책문도 갖추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당초의 시책문은 태조 대왕께서 명하여 지은 것인데 그때 지은 시책문을 지금 찾아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책보(冊寶)를 소급하여 올리는 데 있어서도 또한 난처한 점이 많습니다. 지난 신묘년035)  에 ‘난리 때 잃어버린 종묘 각실(各室)의 책보(冊寶)를 물력이 조금 나아진 뒤에 만들어 보충해 놓아야 한다.’고 하교하셨는데, 이 일은 훗날에 하는 것이 옳은 듯합니다만, 신덕 왕후의 책보는 부묘할 때 먼저 추보(追補)해야 하는지의 여부를 신들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이 일은 매우 중대한 것이니 속히 대신 및 유신들에게 의논하여 정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정원으로 하여금 그날 탑전에서 의논하여 결정한 말들을 거행조(擧行條)에 상세히 써내게 하였다.

 

원양도 유생 이모(李模) 등이 상소하여, 송나라의 양시(楊時)·나종언(羅從彦)·이동(李侗)과 우리 나라의 선정신 이이(李珥)·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했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8월 20일 경진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대신, 정부의 서벽(西壁), 관각의 당상(堂上), 육조의 참판 이상이 빈청에 모여 신덕 왕후의 시호를 ‘순원 현경(順元顯敬)’으로 의논하여 정하였다. 자애롭고 온화하여 두루 복종하는 것[慈和徧服]을 순(順)이라 하고, 의리를 주장하여 덕을 실천하는 것[主義行德]을 원(元)이라 하고, 어진 행실이 세상에 알려진 것[行見中外]을 현(顯)이라 하고, 밤낮으로 조심하여 섬기는 것[夙夜恭事]을 경(敬)이라고 한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삼가 듣건대, 예조가 신덕 왕후의 시책보(諡冊寶)를 마련해야 하는지의 여부를 대신 및 유신들에게 물을 것을 초기(草記)로 아뢰자, 성상의 비답에 정원으로 하여금 그날 탑전에서 결정한 말들을 거행조로 써내라고 하셨다 하는데, 신은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이달 15일 등대했을 때 신덕 왕후의 시책을 추후 마련하는 데 있어 난처하다는 이유를 대략 아뢰고, 또 도감의 당상들이 모두 모일 수 없어 즉시 계품하지 못한다는 뜻을 언급하고 물러났습니다. 그 뒤에 도감의 여러 당상들과 함께 비국에 모여 이 일에 대해서 언급하자 모두가 말하기를 ‘해조가 품계하여 결정할 일이지 도감이 먼저 입계할 일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예조 판서에게 말하여 품계하여 결정하게 하였습니다. 신의 애초 생각은 시책을 마련하지 말 것을 곧이곧대로 청한 것이 원래 아니었고, 또한 성상께서 갖추지 말라는 것으로 즉시 정하여 거행조가 되어버릴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일을 아뢸 때 뜻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여 성상께서 잘못 들으시게 하였으니, 이것은 실로 신의 죄입니다. 이처럼 중대한 예절은 신 개인의 의견으로 갑자기 단정지을 수 없으니, 예조의 계사대로 대신 및 유신들에게 널리 묻게 하여 미진한 후회가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계사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사간 조성보가 아뢰기를,
"한석중이 내수사에 판 민전에 대해서 작년 봄 헌부의 논계로 인하여 본도로 하여금 사핵하여 계문하게 하였는데, 벌써 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사핵 계문하지 않고 있습니다. 태만스럽고 잘못을 덮어주려는 정상이 매우 놀랍습니다. 전라도의 전후 감사 및 조사관을 모두 무겁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21일 신사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상이 약방 도제조 허적에게 이르기를,
"만경 현령(萬頃縣令) 강윤형(姜允亨)의 일에 대해서 의심스러운 점이 없지 않다. 감사의 장계에, 재읍(災邑)의 수령을 염피(厭避)하는 자는 변쉬염피율(邊倅厭避律)로 논죄한다는 신축년036)   사목을 인용하여 윤형을 죄줄 것을 청했는데, 이조·형조는 모두 사목이라 칭하면서 금부로 이송했고, 금부는 또 잡아올 것을 청하였다. 그 당시 사목에 영원히 규칙으로 정한다는 말이 있었다면 그럴 수 있는 것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그 해에만 적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윤형을 잡아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감사와 해조·해부는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고, 이어 입시 승지에게 사핵하여 계문하게 하였다. 그 뒤 정원이 아뢰기를,
"신축년의 전라 감사가 올린 장계와 비변사가 회계한 것을 가져다 조사해 보았습니다. 재해를 입은 고을의 수령들이 구황(救荒)하기를 싫어하여 병을 핑계대고 면직되기를 도모하거나 또는 고의로 어떠한 사단을 일으킨 경우는 무겁게 논죄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모두 변쉬모피율을 적용하여 시행하기를 청하여 윤허를 받았는데, 영원히 규칙으로 정한다는 말은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매우 근거없는 일이다. 전의 사목을 잘못 인용한 감사와 사목에 따라 시행하기를 청한 해사는 책임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니, 중벌로 추고하라."
하였다.

 

형조 판서 서필원(徐必遠)이 세 번째 상소하여 체직시켜주기를 청했는데, 그 소에,
"당초에 판부사 송시열이 상차하여 신을 ‘임금의 총애를 받아 멋대로 행동하는 버릇이 있다.’고 공척하였는데, 이른바 임금의 총애를 받는다는 것은, 반드시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등통(鄧通)을 총애하듯, 무제(武帝)가 한언(韓嫣)을 총애하듯 한 뒤에야 그렇게 지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은 형편없는 인물이지만 과거에 급제하여 출신하였고 순서에 따라 승진하였을 뿐, 분수에 지나친 동(銅)이 나오는 산이나 전포(錢布)를 하사받은 적이 없고, 또한 자개로 장식한 띠를 두르고 연지분을 바르고서 임금을 친근히 하려고 한 일도 없는데 그런 말을 하였으니,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현(儒賢)의 한 마디 말은 태산보다 중한 것이니, 신이 어떻게 자신은 그런 일이 없다고 하여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뒤를 이어 대간들이, 간사스럽고 음흉하며 현자의 진출을 저지하고 나라를 병들게 한다는 등의 말로 온 힘을 다해 신을 공척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자신의 의견만을 고집하고 시세에 따라 부침할 줄은 모르지만 현인의 진출을 저해하는 일에 있어서는 원래 그런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으며, 신의 재주와 지혜가 부족하여 나랏일에 도움이 되지는 못해도 나라를 병들게 하는 데 있어서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비난하는 소리가 온 나라에 시끄럽게 퍼지고 있습니다. 아, 현인의 진출을 저지하고 나라를 병들게 한다는 것은 당(唐)나라 이임보(李林甫)와 같은 인물이 해당된다고 선유가 말했는데, 이임보의 죄를 지고 경(卿)의 반열에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에게 있어 불안할 뿐만 아니라 성스러운 조정에 있어서 또한 어떻겠습니까.
지난날 인조조 때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가, 강화(講和)하는 일 때문에 대간의 논핵을 당하자, 강외(江外)에 가 있으면서 소명을 계속 사양하다가, 나중에는 상차하여 선조조 때의 전례에 따라 묘당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상을 의논하게 할 것을 청했습니다. 이에 인조께서 그의 소장을 묘당에 내렸는데 당시 상신(相臣)인 윤방(尹昉)·신흠(申欽) 등이 서로 의논하고 회계하여 이귀의 마음을 환히 밝혔습니다. 이귀는 이 일로 인하여 또다시 대간의 논의를 겸제(箝制)한다는 비난을 받기는 했지만, 이렇게 한 뒤에야 출사하였습니다.
지금 신을 이귀에 비교하면 천양지차가 나지만 자신의 명예를 아끼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을 함부로 하지 않으려는 마음이야 어찌 오늘날이라 하여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인조조 때의 전례에 따라 묘당으로 하여금 신의 죄상을 의논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신의 정상이 용서할 만하다 한다면 신은 아침에 출사하여 저녁에 쓰러져 죽는다 하더라도 감히 명을 받들 것이고, 만약에 그렇게 해주시지 않는다면 신은 만 번 죽음을 당하더라도 결코 출사할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소를 비국에 내리자 회계하기를,
"형조 판서 서필원은 장주(章奏)할 때 간혹 말을 가려하지 않는 것이 그의 병통입니다. 그러나 전번에 올린 상소에 대해서 현인의 진출을 저해하고 나라를 병들게 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본정이 아닙니다. 조정에서 그를 수용하는 것은 범연한 뜻이 아니니, 지나치게 인혐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그로 하여금 속히 출사하여 직무를 수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8월 22일 임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8월 23일 계미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약방이 약을 처방하여 들였다.

 

부묘 도감이 아뢰어, 신덕 왕후의 신주 만드는 장소를 경덕궁(慶德宮)의 읍화당(浥華堂)으로 정하였다.

 

병조 참판 장선징이 여러 차례 소를 올려 사직하자, 상이 윤허하였다.
선징은, 그가 논핵한 이은상 등의 일이 결국 사핵을 받게 되었는데 대간이 한 달이 넘도록 논계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으므로, 불안하게 여겨 사직한 것이다.

 

8월 24일 갑신

이경억(李慶億)을 동지경연으로, 남용익(南龍翼)을 병조 참판으로, 남구만(南九萬)을 대사성으로, 민진익(閔震益)을 경상 좌병사로 삼았다.

 

이조 판서 김인후(金麟厚)에게 문정(文靖)이란 시호를, 능창대군(綾昌大君) 이전(李佺)에게 효민(孝愍)이란 시호를, 고 금산군(錦山君) 이성윤(李誠胤)에게 충정(忠貞)이란 시호를 내렸다.
인후는 인종조의 명현(名賢)이었는데 조정에 있을 때 절의를 지켰고, 전은 인조 대왕의 아우였는데 광해 때 억울하게 죽었다. 그리고 성윤은 종척(宗戚)으로서 광해가 모후를 폐위시킬 때 상소하여 간신 이이첨을 벨 것을 청했다가 끝내 유배되어 죽었는데, 이때 이들 모두에게 시호를 내린 것이다.

 

8월 25일 을유

왕세자가 유건복(儒巾服)으로 작헌례(酌獻禮)를 문묘에서 행하고, 또 유건복으로 명륜당에서 입학례를 행하였다. 박사 대제학 조복양이 중석(重席)에 앉아 《소학》의 제사(題辭)를 음석(音釋)으로 한번 읽자, 세자가 제자의 예를 갖추어 받아 읽은 뒤에 글뜻을 토론하였다. 궁관들은 세자의 뒤에 엎드려 있었고, 유생들은 좌우로 나뉘어 뜰 가운데 서 있었다. 이때 세자의 나이가 9세였는데 기질이 청명하고 행동이 의젓한 데다가 모두 법도에 맞았으며 강독하는 소리도 낭랑하였으므로, 교문(橋門) 밖에 둘러 모여 구경하는 사람들 모두가 감탄하며 기뻐하였다.

 

8월 26일 병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온천에 거둥할 때 배행했던 약방의 도제조 이하에게 차등있게 상을 내렸다.

 

사간 조성보가 피혐하며 아뢰기를,
"형조 판서 서필원이 지난번에 한 짓이 꼭 현자의 진출을 저해하고 나라에 해가 되게 하려는 마음에서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유현(儒賢)이 서울을 떠나가고 조정의 일이 그르쳐진 것이 참으로 그의 상소에서 연유한 것이라면, 그러한 짓을 했지만 그러한 마음은 갖지 않았다고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그를 삭직시키고 문외 출송할 것을 양사가 함께 논계하며 반 년이나 쟁집하였으니, 공의가 엄하다는 것을 대체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필원은 다시 서용되자마자 즉시 서추(西樞)의 임명에 사은하였으니 염치를 상실한 것이 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직에 제수되고 나서야 비로소 ‘염의(廉義)’란 말을 인용하여 기세를 부리며 소를 올려 묘당으로 하여금 자신의 마음을 밝혀주기를 청하였는가 하면, 현자의 진출을 저해하고 나라를 병들게 했다는 말에 대해서 장황하게 변명하며 자신은 전혀 그런 일이 없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꾸며대고 공의를 무시하며 조정을 경시하고 거리낌없는 이러한 행위가 어찌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여름에 헌부에 있으면서 그를 삭출시키라는 논계에 참여했는데 필원의 상소 내용이 모두가 당시의 대간을 비난하는 말이었습니다. 대간의 체모로 보아 그대로 자리에 있을 수 없으니, 체차하소서."
하였는데, 옥당이 처치하여 출사시켰다.

 

대사간 이익(李翊)이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이익이 김익렴(金益廉)의 사건이 있은 뒤로부터 비난하는 말이 끊이지 않자, 직위에 있는 것을 불안하게 여겨 제수의 명이 있을 때마다 사직하였다.

 

평안도 창성(昌城)에 이달 9일 우박이 내렸는데, 큰 것은 주먹만하고 작은 것은 계란만하였다.

 

8월 27일 정해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왕세자가 입학하여 작헌례를 올렸을 때의 사(師) 영의정 정태화, 좌빈객 박장원, 좌부빈객 민정중, 대사성 남구만에게는 모두 호피 한 벌씩을 하사하고, 박사 조복양에게는 숙마(熟馬)를 하사하고, 보덕 박세견(朴世堅)은 가자하고, 필선 이휴징(李休徵)에게는 망아지를 하사하였다. 그 밖의 춘방 관원과 익위사 관원 및 일을 도운 유생들에게는 차등있게 상을 내렸다.

 

대사헌 윤집, 집의 신명규, 장령 경최가, 세자가 입학할 때 미처 시위(侍衛)하지 않은 병관(兵官)들을 논핵하기 위하여 계초(啓草)를 갖추어서 대각에 나아갔는데, 시강원이 먼저 병관들을 추고할 것을 청하였다. 윤집·경최가 ‘추고하는 하찮은 벌을 중복되게 논계할 수는 없으니, 전계(傳啓)할 필요가 없다.’고 하자, 명규가 ‘대각에 나온 이상 중지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때 경최가 성상소(城上所)로서 명규의 회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 계사를 지레 뽑아버렸는데, 명규가 경시를 당했다고 먼저 인피하자 윤집과 경최도 잇따라 인피했다. 옥당이 윤집·경최는 체직시키고 명규는 출사하도록 처치하였다.

 

8월 28일 무자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이조 판서 조복양이 상소하여 본직 및 겸임한 대제학을 체직시켜주기를 청했는데, 상이 우대하는 내용의 비답으로 윤허하지 않았다. 이경억이 이조 판서가 될 때 허적이 복양을 의망하지 않았고, 또 그에 대해 비평하는 말을 하였으므로, 복양이 이 때문에 누차 사직하였다.

 

이민적(李敏迪)을 대사간으로, 박세당(朴世堂)을 교리로 삼았다.

 

8월 29일 기축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8월 30일 경인

정지화(鄭知和)를 대사헌으로, 어진익(魚震翼)을 장령으로, 이휴징(李休徵)을 헌납으로 삼았다.

 

함경도 홍원현(洪原縣)에 이달 18일 심한 비바람이 불어 곡식이 손상되었고, 명천부(明川府)에는 11일 우박이 내려 나뭇잎이 죄다 떨어지고 밭곡식이 모두 손상되었으며 새들도 죽었다. 그리고 경성(鏡城)·경흥(慶興)에는 수재가 났고, 종성(鍾城)에는 5일 바람과 우박의 재해가 있었으며, 온성(穩城)에는 9일 천둥·지진·바람·우박이 크게 일어 천지가 캄캄하였는데, 우박이 큰것은 주발만한 것이 있는가 하면 주먹만하기도 하고 오리알만하기도 하였으며 2, 3척까지 쌓였으므로, 사람과 가축이 많이 맞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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