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기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좌의정 허적이 홍제원(弘濟院)으로 청나라 사신을 마중나가면서 구전(口傳)으로 아뢰기를,
"신이, 권대운(權大運)이 파주(坡州)에서 보낸 보고를 보니, 편전에서 칙서를 전할 때 상께서 전후로 네 번 절하는 예식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상께서는 발에 병이 있으니 결코 이 예를 행할 수 없습니다. 신이 지금 홍제원에 가서, 청나라 사신에게 힘껏 말하여 이 예를 행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하였다.
다음날 허적이 홍제원에서 돌아와서 면대를 청하니, 상이 집상전(集祥殿)에서 인견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홍제원에 가서 통관(通官)을 시켜 청나라 사신에게 말을 전했더니, 현관례(見官禮) 및 연례(宴禮)는 설행하지 말게 하였습니다. 또 ‘상이 병환이 있어서 교외에서 맞이하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하니, 청나라 사신이 말하기를, ‘교외에서 맞이하는 일은 우리들이 알 바가 아니나, 국왕이 과연 실제로 병환이 있소?’ 하기에 신이 병환의 실상을 자세하게 진달하고, 편전에서 접견하기로 강정하였습니다. 또, 전(殿) 아래로 내려가서 지영(祗迎)하는 일 및 선후의 네 번 절하는 예를 행하기 어렵다고 말하니, 청나라 사신이 ‘편전에서 접견하는 예의 예수(禮數)가 어떠하냐?’고 물었습니다. 신이 대답하기를, ‘편전 서쪽에 어막(御幕)을 설치하고 동쪽에 사막(使幕)을 설치하며 편전 안에 칙서를 전하는 상(床)을 설치합니다. 칙사께서 황제의 칙서와 하사한 물품을 받들어 상 위에 갖다 두면 국왕께서 앞으로 나아가 꿇어앉아 세 번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합니다. 그 예를 마치고 칙서를 전달 받아 받들고 나오며 내관은 하사한 물품을 받들고 나옵니다. 그런 뒤에 상이 편전으로 나아가 칙사에게 다례(茶禮)를 행하기를 청합니다. 의식 절차가 이와 같습니다.’ 하였습니다. 복장은 미처 저들에게 의논하여 결정을 하지 못했으나 익선관에 곤룡포 차림을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옳다고 하였다.
동빙고(東氷庫)와 내빙고(內氷庫)의 얼음을 다시 저장하라고 명하였다. 처음 얼음을 저장할 때 날씨가 따뜻했으므로 저장한 것이 모두 얇은 얼음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몹시 추워 강의 얼음이 다시 굳게 얼었는데, 상이 동빙고의 얼음은 바로 제사에 쓰일 얼음이라 매우 중요하다고 하여 이 명이 있게 되었다.
전 판서 조계원(趙啓遠)이 죽었다. 계원은 여러 도의 감사를 역임하고 벼슬이 육경에 이르렀으며, 나이 칠십이 된 뒤에는 보령(保寧)에 물러가 살다가 죽었으니, 일생의 마감을 잘하였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조정에 있을 때에는 깨끗하게 몸단속을 하지 못했고, 고향에 살면서도 근신하지 않았으므로 비방을 받아 대간의 탄핵을 당하기까지 하였다.
2월 2일 경신
청나라 사신이 서울에 들어왔다. 상이 희정당(熙政堂)에서 접견하였다. 지영(祗迎)하는 것 및 사배례는 행하지 않았다. 두 사신을 전(殿) 안으로 들게 하여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예를 마친 뒤에 두 사신이 물러나가, 인정전에서 조칙(詔勅)을 반포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대궐에 들어올 때 전도(前導)가 잘못 인도하여 인정전으로 먼저 들어가게 하여 의식을 잘못하게 하였으므로, 정원이 아뢰어, 도감(都監)의 당상과 해당 낭청을 추고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낭청은 특명으로 잡아다 문초하여 죄를 주고, 잘못 인도한 역관(譯官)도 잡아다 추고하게 하였다. 지평 홍만종(洪萬鍾)이, 도감 당상이 잘 검칙하지 못한 실수를 논핵하여 파직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무겁게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호조 판서 권대운과 관반 박장원이 모두 논핵을 당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들어가버리자 도감의 사무가 많이 적체되었다. 대신이 이를 탑전에서 진달하고 외부에서도 말하였다. 그런데 홍만종이 한 번 논계하고는 바로 그쳤으므로, 물의가 비난하였다.
2월 3일 신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청나라에서 경축을 반포한 일로 인하여, 중외에 사면령을 내리고 백관에게 가자(加資)하였다.
상이 집상전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관반(館伴) 및 호조 판서가 바야흐로 대각의 논박을 받고서 모두 인피하고 들어갔으니, 이처럼 일이 많은 때에 일이 매우 낭패입니다. 상께서 이미 추고하게 하셨으니 대간도 필시 생각을 깊이 하겠습니다만, 나이 어린 사람들이 때와 형세를 헤아리지 못하고 그 논계를 실증하려고 할 것이어서 이것이 염려가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쟁집할 일이 아니다."
하였다. 상이 태화에게 이르기를,
"이번에 온 청나라 사신이 더욱 추잡스러운데, 나이가 많아서 그런 것인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상사(上使)는 몽고 사람이기 때문에 청나라 사람과 다릅니다."
하였다. 형조 판서 이경억이 아뢰기를,
"상사가 비록 이러하기는 하나 내대신(內大臣)이라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대신이란 어떤 직책인가?"
하였다. 좌상 허적이 아뢰기를,
"내대신은 본디 높은 품계가 아니고 또 맡은 직무도 중요한 일은 아닌데, 다만 황제와 가까이 지내면서 여항에 떠도는 말들이나 여러 신하들의 잘잘못에 대해서 모든 일을 들어가서 아뢰기 때문에 비록 관직이 높은 자라고 해도 모두들 두렵게 여긴다고 합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강화 유수가 도사(都事)를 혁파하기를 청하였습니다만, 영의정 정태화는 ‘선왕께서 설치를 한 데에는 뜻이 있을 것이니, 비록 폐단이 있다고 하더라도 갑자기 혁파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군기(內軍器)를 바야흐로 강도(江都)에 두고 도사로 하여금 주관을 하게 하고 있으니, 혁파해서는 안 된다. 그대로 두되 다만 군사에 관한 일만 관장하게 하고 백성 다스리는 일은 관여하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형조에 사송(詞訟)이 적체되어 있어서 염려가 됩니다. 판서 이경억이 바야흐로 반송사(伴送使)가 되었는데, 반송의 임무를 체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명하여, 병조 판서로 정초 제조(精抄提調)를 삼았다.
2월 4일 임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지평 홍만종이, 도감 당상을 파직시키라는 논핵을 한 번 아뢰고 즉시 그침으로써 물의에 비난을 당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대각의 논계를 정계하는 문제는 오직 일이 어떠한가를 살펴서 하면 되는 것이다. 한 번 아뢰었느냐 두 번 아뢰었느냐 하는 것은 의논할 바가 못 된다. 경박스런 물의를 혐의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장령 이하(李夏)가 아뢰기를,
"탄핵하는 논계는 애초에 잘 살펴 신중히 해야 하고, 파직 추고하는 것도 가벼운 벌이 아니니, 그가 발론한 것이나 정계한 것이 모두 경솔한 짓입니다. 체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대통관(大通官) 김삼달(金三達)이 도감(都監)에게 청하여, 사과 및 이름을 알 수 없는 두 종류의 과일을 진상하고자 하여, 도감이 계품하니, 상이 일렀다.
"그가 정성으로 바치는 것이니, 물리치지 말도록 하라."
전 부사 정승명(鄭承明)이 집에서 겁도(劫盜)에게 피살되었다. 승명은 대구(大丘) 사람이다.
2월 5일 계해
이익(李翊)을 대사간으로, 송규렴(宋奎濂)을 이조 좌랑으로, 이상(李翔)을 진선으로, 유헌(兪櫶)을 지평으로, 김덕원(金德遠)을 정언으로, 이단석(李端錫)을 사간으로, 홍주삼(洪柱三)과 이합(李柙)을 교리로, 신정(申晸)을 수찬으로, 이후징(李厚徵)을 지평으로, 김석주(金錫胄)를 헌납으로 삼았다.
병조 참판 장선징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신이 전에 이은상(李殷相)과 오정위(吳挺緯)의 일을 논했었는데, 조사를 마치고 나니 그들이 스스로 해명했던 말이 너무나 딱 들어 맞았으며 제복(題覆)한 계사에도 많은 말을 끌어대었습니다. 그리고 판하하여 내린 비답에도 ‘조사를 하여 실상을 찾아내지 못했다면 일이 실상이 없는 것이다.’라고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또한 이은상의 함사(緘辭)를 보니, 장황하게 말을 꾸며서 신을 오로지 공격하였습니다. 신은 두 사람에 대해서 좋게 생각하며 나쁜 감정은 없습니다만, 재상의 직책을 띠고 있는 몸으로 스스로 검속을 하지 않아서 사람들의 말이 갈수록 더하고 진신의 반열을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당하게 한 것이 두 사람과 같은 자가 없으니, 스스로 자초한 바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은상은 전혀 스스로 반성은 할 줄을 모르고 감히 조사한 일을 틈타서 불쑥 자기의 속마음을 드러내어서, 밀포(蜜布) 및 허동립(許東岦) 등의 말을 끌어내어 자신을 변명하고 신을 무함할 계책을 삼았습니다. 곳곳에서 방납(防納)을 한 것은 사람들이 말이 많습니다. 허동립이 전라 병사(全羅兵使)가 되어 그 집에 가서 사례하니 이은상이 이에 표피(豹皮) 방납을 청하기에 사람을 시켜 따라가게 하여 먼저 그 값을 지불하게 하였는데, 값을 보낸 뒤에 표피를 보내지 않자 허동립이 속은 것을 분하게 여겨 늘 드러내놓고 욕을 하였습니다. 신이 들은 바를 가지고 질정을 하였더니, 참으로 믿을 만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우연히 사사로운 자리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그 집안에 오욕을 끼친 것에 대하여 개탄하며 애석하게 여긴 것이지, 애당초 이 일을 따다 취하여 뒷날 탄핵을 할 자료를 삼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논계한 다음날 신은 은대(銀臺)에 제수되었는데, 사간 김징(金澄)이 이에 다른 동료들과 함께 신의 이전 계사를 고쳐 스스로 조목지어 논열하면서 밀포에 대한 이야기는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신이 어떻게 간여하였겠습니까. 신이 이미 이은상으로부터 온갖 배척을 받았는데, 신을 두고 용심을 부려 얽어 무함하였다고까지 하였습니다. 신의 직책을 삭제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고 이르기를,
"대간에게는 풍문을 듣고도 논핵할 수 있도록 허락을 하였으니, 경이 무슨 혐의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밤에 유성이 자미서원(紫微西垣)으로 들어갔고 북두성(北斗星) 위로 들어갔다.
2월 6일 갑자
예조 판서 박장원이 병을 이유로 관반을 사직하니, 형조 판서 이경억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2월 7일 을축
이조 판서 조복양이 차자를 올리기를,
"왕세자가 장차 관례를 하게 되어 온 나라의 백성들이 귀를 기울이고 눈을 닦고서 성대하고 아름다운 의식을 시행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대부 집안에서도 그 아들의 관례를 치르게 되면 또한 반드시 널리 친구들을 부르니, 바로 그 일을 경건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춘궁(春宮)의 관례는 나라의 중요한 일입니다. 산야에 있는 훌륭한 학자로서 예를 아는 사람들을 모두 불러다가 이 아름다운 일을 잘 치루어 내는 것이 옳습니다. 세자부 송시열, 찬선 송준길과 이유태는 모두 태자를 보도하는 직책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로서 고향에 물러나 지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대한 예를 치루면서 만약 모두 나와서 반열에 있게 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흠이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특별히 불러오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차자의 말이 참으로 내 생각과 같다. 정원으로 하여금 즉시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2월 8일 병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2월 9일 정묘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휘돌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오례의》에, ‘왕세자의 관례일(冠禮日)에 필선이 밖의 일이 다 준비되었다고 아뢰면 왕세자가 시복(時服)으로 나온다.’라고 하였습니다. 현재의 시복은 바로 용포(龍袍)인데, 용포와 익선관(翼善冠)이 초가(初加)하는 복색입니다. 이미 용포 차림으로 나오면 초가하는 의식을 베풀 수가 없게 됩니다. 어릴 때에 입던 동계옥잠(童髻玉簪)과 아청단령(鴉靑團領)과 흑화자(黑靴子) 차림으로 좌석에 나옴으로써 순서대로 세 번 가복(加服)할 수 있게 해야 마땅하겠는데, 일이 변례(變禮)에 관계되니,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오례의》에 ‘왕세자가 세 번 가복(加服)하는 예를 마치면 인의(引儀)가 빈(賓)을 인도하여 내려와 서쪽 계단의 서쪽에 서게 하고, 필선이 왕세자를 인도하고 서쪽 계단에서 내려와 서쪽 계단의 동쪽에 서게 하고, 빈이 조금 앞으로 나아가 자(字)를 준다.’고 하였습니다. 기일 전에 날을 잡아 왕세자의 자를 의논해 정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관례(冠禮) 때 입을 시복(時服)에 대해서 대신들이 모두 해조의 계사대로 해야 마땅하다고 하여, 다음날 탑전에서 품정하였다.
차통관(次通官) 장효례(張孝禮)가 그의 어머니가 경기 지방에 살았는데, 가서 뵙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도감(都監)이 아뢰니, 쌀과 누룩 및 어육(魚肉)과 술을 지급하여 가져다가 그 어미에게 주게 하라고 명하였다.
2월 10일 무진
호조 판서 권대운이, ‘통관이 상이 교외에 나가서 맞이하지 않게 된 것을 자신들의 공로라고 하여 뇌물을 요구하는 것이 절도없이 한다.’는 이유로 면대를 청하니, 상이 집상전에서 인견하였다.
평안 감사 민유중(閔維重)의 계청으로 인하여, 용강(龍岡)과 함종(咸從) 두 곳의 둔전(屯田)을 평양 서원(平壤書院)에 떼어주어 유생(儒生)들을 먹이는 데에 쓰게 하라고 명하였다.
2월 12일 경오
약방 도제조 허적(許積) 등이 의관들을 데리고 집상전에 가서 상을 진료하였다. 응어리진 곳이 곪아서 이에 침을 놓았다. 그 일을 마치고 영상, 우상, 호조 판서 권대운, 예조 판서 박장원을 인견하였다. 권대운이, 청나라 사신들에게 줄 뇌물에 대해서 품정하였다. 대개 청나라 사신 및 통관(通官) 무리들이 마음에 바라는 것이 매우 커서 전례대로 주는 물건을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고 특별히 더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 때문에 상이 은그릇을 별도로 주라고 명하고 또 인삼, 표피, 호초 등을 주게 하였다. 준 백금(白金)도 2천여 냥이나 되었다. 박장원이, 세자 관례를 할 때에 처음 입고 나올 시복의 복색에 대해서 여쭈니, 상이 이르기를,
"시복이라고 하는 것은 곧 평소에 입는 옷이니, 흑단령(黑團領)은 알맞은 옷이 아닌 듯하다. 나는 신묘년002) 관례 때에 아청직령(雅靑直領)과 조대(條帶)를 처음 입고 나오는 옷으로 삼았었다."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 예에 의거하여 행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관례 때의 주인(主人)은 이조에서 계하하였습니다마는, 빈(賓)과 찬(贊)은 아직 초기(草記)가 내리지 않아 미처 계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빈은 영의정이 맡아서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오례의(五禮儀)》에는 범연히 의정(議政)이라고 칭하였는데 하필 영의정으로 계하할 것이 있겠습니까. 신은 각병(脚病)이 있어 맡을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허적을 빈으로 삼았다. 허적이 아뢰기를,
"왕세자 관례 때에 쓰일 교서(敎書)의 글은 《오례의》에 실려 있는데, 지금 들으니, 《오례의》에 실려 있는 교서는 빈이 세자에게 읽어 전하고, 또 사신(詞臣)을 시켜 별도로 교서를 짓게 하여 읽지 않고 바로 세자에게 준다고 합니다. 이는 두 개의 교서가 있는 것으로 예문과는 크게 어긋납니다. 《오례의》에 실려 있는 교서를 빈이 읽어 전한 뒤에 그대로 왕세자에게 주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오례의》 절목(節目)이 매우 분명하니, 별도로 교서를 지어서 거듭 사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고, 정태화 및 우상 홍중보가 모두 《오례의》에 의거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그 뒤에 《오례의》에 실려 있는 교서의 내용 안에 말을 조금 더 첨가해 넣어 짓도록 명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세자 관례 때에 예석(醴席)은 본래 남쪽을 향하여 설치하며 세자가 자리에 나아가서도 남쪽을 보고 앉는데, 내려와 절을 할 때에 있어서 《오례의》에 ‘서쪽을 향해 절을 한다.’라고 되어 있으니, 이것은 필시 남(南) 자가 서(西) 자로 잘못된 것입니다. 《의례(儀禮)》에 ‘관자(冠者)는 자리 서편에서 절하고 술잔을 받으며, 빈(賓)은 동쪽을 향하여 답배(答拜)한다.’라고 하고, 그 주석(註釋)에 ‘자리의 서쪽에서 절한다는 것은 남쪽을 향해 절하는 것이다. 빈이 서쪽의 위치에 돌아와 절하는데, 동쪽을 향한다는 것은, 이제 성인이 되어 예를 하는 것이 주인에게 답배하는 것과 다름을 밝힌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문의 본뜻이 이렇게 명백한데도 《오례의》의 서(西) 자를 따라 한다면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 인조(仁祖) 때에 유신 정경세(鄭經世)가 이에 의거해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았는데, 그 뒤에 다시 《오례의》대로 하였습니다. 이번에 인조 때에 이미 행했던 대로 남쪽을 향해 절하는 예로 결정하여 쓰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태화와 중보가 아뢰기를,
"신들의 생각도 이와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대로 거행하라."
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오례의》에, 사(師)·부(傅)·이사(貳師)는 자리가 관석(冠席)의 북쪽이고 빈객의 자리는 관석의 동쪽이라고 하였습니다. 관석은 서쪽을 향하여 설치하는데, 빈객의 자리를 그 동쪽에 두면 바로 세자의 뒤에 있게 됩니다. 이것은 예에 있어서 부당하니, 이 동(東) 자는 필시 남(南) 자를 잘못 적은 것일 것입니다. 일찍이 정경세의 말을 따라 고쳐서 바로잡았었는데, 지금 시강원에 있는 관례도(冠禮圖)를 가지고 보면 또한 알 수가 있습니다. 지금 이 의주(儀注)는 전례대로 《오례의》를 베껴내어 써서 들인 것입니다. 고쳐 부표하여 들이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대명회전(大明會典)》을 가져다 조사해 보니, 모두 태자가 관례를 마친 뒤에 종묘에 알현하는 예가 있는데, 《오례의》에는 빠졌습니다. 그리고 관례 후에 백관이 황제 및 태자궁에 진하하는 글이 있는데 《오례의》에는 역시 빠졌습니다. 이것은 모두 불완전한 법전입니다."
하고, 태화와 중보가 아뢰기를,
"중묘조(中廟朝)의 예에 의거하여 행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13일 신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청나라 사신이 돌아갔다. 민희(閔熙)를 반송사(伴送使)로 삼았다.
세자의 관례를 행한다는 일로 사관을 보내어 행 판중추 송시열, 행 대사헌 송준길, 찬선 이유태에게 특별히 유시하여 올라오게 하였다. 시열 등이 사양하고 오지 않았다.
사간 이단석, 헌납 김석주가 아뢰기를,
"작년 가을에 전라 감사 김징(金澄)이 그의 모친을 위해 회갑 잔치를 베풀었는데, 온 도의 재력을 고갈시켜 풍성하게 준비했고 두루 영남의 수령에게까지 요구하여, 지위를 빙자하여 탐욕을 부린 짓이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잔치하는 날의 행사가 지극히 사치스러웠고, 또한 도내 수십 명의 수령들로 하여금 주렴을 향해 뜰에서 절하게 하였으니, 벼슬하는 사대부들에게 큰 욕을 끼친 것입니다. 이처럼 흉년으로 재정이 고갈된 때를 만나 풍정(豊呈)을 올리는 것도 없앤 터에, 지방 장관이 감히 방종하고 탐욕을 부려 무엄한 짓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교동(膠東)의 색부(嗇夫)가 어버이를 위하다가 오명을 받았던 일003) 과는 다릅니다. 옛 허물을 염두에 두지 않고 덮어준 조정의 은전을 크게 저버린 것입니다. 그의 죄는 실로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파직시키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김징이 잔치를 열었을 때 도내의 병사(兵使)·수사(水使) 및 각 고을의 수령들을 모두 불렀는데, 감영에 모인 수령이 무려 30여 명에 이르렀고, 비단과 선물 상자를 실은 짐바리가 매우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영광 군수(靈光郡守) 홍석기(洪錫箕)는 가져온 것이 더욱 많았고 그 밖에 아첨을 부린 자취도 매우 놀라웠습니다. 파직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대청에 올라가 상수(上壽)하는 것은 수연(壽宴)에서 으레 행하는 절차입니다만, 뜰에서 절하고 꿇어앉기까지 하는 것은 곧 하인들이나 하는 천박한 예입니다. 이를 행한 것도 수치스런 일이고 이 예를 받은 것도 분수에 어두운 짓입니다. 요전 호남의 수령들이 감사의 잔치 자리에 참여하였을 때, 지식이 있는 약간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주렴을 향하여 술잔을 올렸으며 뜰에 엎드려 몸을 굽히고 조심스럽게 굽신거렸으니, 비굴한 자세로 서로 다투어 아첨을 부린 실상이 실로 놀랍습니다. 많은 수령들을 일시에 논죄하여 다스릴 수는 없겠습니다만, 남쪽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모두들, ‘금산 군수(錦山郡守) 정재후(鄭載厚)가 앞장서서 주
장하였다.’ 하며, 비난하는 말이 자자합니다. 파직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전라 좌수사 이간(李旰)은 부안(扶安)의 전선(戰船)을 살피러 왔다는 핑계로 감영의 잔치 자리에 참여하였고, 화폐(貨幣)를 가지고 와서 뜰에서 절하고 꿇어앉았습니다. 지방 병영의 지휘관인 몸으로 하인들과 같은 짓을 하였으니, 무식한 무부(武夫)라고 하여 덮어둘 수는 없습니다. 파직하소서."
하였다. 두 번째 아뢰니, 상이 모두 따랐다.
양사가 서필원을 논핵한 것이 오래도록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이때에 와서 정계하였다.
좌의정 허적이 차자를 올려, 세자 관례 때의 빈(賓)의 직임을 맡으라는 명을 사양하며, 수상에게 제수하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수상은 각질(脚疾)이 있고, 《오례의》에 의정(議政)이라고 범칭하였고 꼭 수상을 차임해야 한다는 글이 없다.’는 이유로, 사양하지 말게 하였다.
2월 14일 임신
윤계(尹堦)를 문학으로, 이정기(李廷夔)를 우부빈객으로, 김우형(金宇亨)을 대사간으로, 이혜(李嵆)를 부교리로, 윤지완(尹趾完)을 겸설서로, 맹주서(孟胄瑞)를 승지로, 이유(李濡)를 사서로 삼았다.
상이 집상전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재상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세자가 관례를 할 때에, 2품 이상의 관원이 행례를 하면 세자가 답배를 하는데, 백부(伯父)와 숙부(叔父)에 대해서는 계단을 하나 내려서는 절차가 있습니다. 오직 대군이라야 이 예를 받을 수가 있는데, 왕자군(王子君)에게도 혹 행하였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대군은 없고 보면 남아 있는 세 왕자에게 이 예를 행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상이 명하여, 별시 무과 초시에서 서울과 외방을 통틀어 8백 명을 뽑도록 하였다. 이조 판서 조복양이,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제사를 받드는 후손이 후사없이 죽었으니 후사를 세울 것’을 청하니, 상이 명하여, 해당 부서에서 품지하여 후사를 세우도록 하였다. 조복양이 또 아뢰기를,
"고 판서 이일상(李一相)의 동생 이가상(李嘉相)이 일찍이 과거에 올라 정축년 난리에 절효(節孝)를 지키다 죽었는데 아들이 없습니다. 일상이 살았을 때에 그의 둘째 아들로 동생의 후사를 삼으려고 했었는데 지금은 부모가 모두 죽어서 전례를 따라 후사를 세울 수가 없습니다. 감히 이것을 아울러 아룁니다."
하니, 상이 모두 품지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상이 분부하기를,
"일찍이 헌부의 금란 과조가 남잡하여 헌부에 명하여 묘당과 금제 조항을 의논해 정하게 하였는데, 지금 이미 3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거행하지 않고 있다. 지금 헌부를 신칙하여, 장관이 있으면 굳이 세 사람을 갖추지 말고 장관이 없으면 세 사람을 갖추어 속히 거행하게 하여 지난날처럼 지연시키는 일이 없게 하라."
하였다.
세자빈(世子嬪)을 간택하는 일로, 사족 가운데 응당 간택 대상에 해당되는 자들을 모두 혼인을 금지시켰다. 당시에 부마(駙馬)도 일시에 간택을 했는데 숨기는 자들이 많았다. 상이 그 가장(家長)들을 조사하여 죄를 주게 하였다.
왕가(王家)의 혼인은, 반드시 이름있는 집안에서 간택을 하는데, 그 집안의 법도를 보고 그 덕과 행실을 살필 뿐이었지, 여항의 여자들을 수색해 모아서 궁중으로 불러들여 얼굴을 보며 간택을 하기를 우리 조정에서 하는 것처럼 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선정신 이이(李珥) 및 선조조(宣祖朝) 때의 여러 유신들이 모두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도 변화시키지를 못하였으니, 대개 좋지 않은 습속이었다. 식견있는 자들은 한탄을 하였다.
부제학 이민적(李敏迪)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제왕(帝王)의 가례(家禮)가 사서인과는 다르나 성인(聖人)도 혈기는 보통 사람과 같습니다. 왕세자가 타고난 자질이 숙성하고 드높으나 나이로 말하면 겨우 10세인데, 어찌 아내를 둘 나이라고 하겠습니까? 신들도 대례(大禮)의 차례는 절목이 번잡하여 왕세자의 합방(合房)이 올해에 있지 않을 것임을 압니다만, 명호(名號)가 일단 정해져 절차를 진행시킨다면 2, 3년을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송(宋)나라 철종(哲宗) 때에 유모 10명을 구하였는데, 범조우(范祖禹)가 태황태후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천금의 재산이 있는 집안에 13세 된 아들이 있어도 오히려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도록 하는데, 더구나 만승(萬乘)의 임금에 있어서이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어릴 때의 혈기는 장년이 되어서야 왕성하게 되는 것이니, 범조우의 말은 장구한 앞을 내다본 염려라고 하겠습니다. 13세에 여색을 가까이 하는 것도 경계로 삼았는데, 왕세자의 춘추가 얼마나 되었기에 갑자기 이런 의논을 한단 말입니까?
신들은 감히 고사를 멀리 인용하지 않겠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선조 대왕과 인조 대왕은 모두 잠저(潛邸)로 대통을 이어받았는데 혼인을 모두 어린 나이에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라를 다스린 것이 혹은 40년이 넘고 혹은 30년 가까이 되기도 했습니다. 채침(蔡沈)의 무일편(無逸篇) 서문에 ‘문왕(文王)을 상세히 말한 것은 눈과 귀로 직접 보고 들었기 때문이다.’ 하였는데, 신들도 삼가 이 뜻을 붙여 감히 이렇게 아룁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들이 걱정하는 것을 내가 어찌 생각하지 않겠느냐. 그대들은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2월 15일 계유
이경억(李慶億)을 우참찬으로, 오시수(吳始壽)를 전라 감사로, 경최(慶㝡)를 장령으로 삼았다.
헌납 김석주(金錫胄)가 아뢰기를,
"통제사 유비연(柳斐然)이, 전라 감사 김징의 어버이 회갑 잔치 때 해물(海物)을 요청한 일을 인하여, 비단·목면 및 기타 완호 물품들을 실어 보냈으니, 파직하소서."
하고, 또 논하기를,
"전라 병사 박이명(朴而㫥)은 실어 보낸 폐물이 비단 외에도 수십 필의 명주와 모시, 두 바리의 군목(軍木)이 또 있었습니다. 잡아다 문초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여러 번 아뢰자 모두 따랐다.
충청도에 염병이 크게 번져 죽은 자가 80여 명이었다.
정원이 아뢰기를,
"왕세자의 관례 때에 교서안(敎書案)을 들고 가는 집사를 충찬위(忠贊衛)로 차출한다고 《오례의》에 실려 있습니다만, 오늘날의 충찬위는 옛날과는 달리 모두 비천한 자들입니다. 신이 어제 예행 연습을 보았는데, 궁전 안의 지엄한 곳에 출입하면서 일을 보는 임무는 이런 자들이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조정의 관원으로 가려서 차출하게 하소서. 그리고 교서를 읽을 때는 전교관(展敎官)이 있어야 하는데, 이번에 왕세자에게 교서를 읽을 때의 전교관을, 《오례의》에는 실려 있지 않으니, 역시 해조로 하여금 차출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16일 갑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하교하기를,
"인평위(寅平尉) 묘산(墓山)에 물이 고인 곳이 있으니, 역군 1백 명을 8일 동안 부역하게 하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당시에 왕자 및 부마의 집안에서 모두 내관(內官)으로 차지(次知)를 삼아 무릇 길흉사나 할 일이 있을 때에 모두 상께 사람을 청하여 하였는데, 한정된 절도가 없었다. 심지어 농사철에 장정을 뽑아다가 여러 날을 부역을 시키기까지 하니, 맹자가 말한 ‘농사철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한 교훈에 아주 어긋나는 일이었다. 모두가 후세에 법을 삼아서는 안 되는 일들이었다.
2월 17일 을해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2월 18일 병자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집의 이단하(李端夏) 등이 아뢰기를,
"이번에 청나라 사신이 서울에 들어올 때 가마를 타고 구경하는 부녀자가 거리에 북적거려 보기에 놀랍고 이상하였습니다. 지나간 일은 검칙하지 못했으나 앞으로는 금지시켜야 할 것입니다. 이뒤로는 사신이 올 때에 만약 또 다시 구경하는 사족의 부녀자가 있으면 해당 부서를 시켜 적발하여 본부에 보고하게 하여, 그 가장(家長)을 논죄할 수 있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성 남구만(南九萬)이 상소하기를,
"왕세자가 입학한 뒤에 예조가 과거를 베풀어 선비들을 뽑을 것을 의논했었는데, 이듬해 봄에 또 관례를 해야 하기 때문에 두 가지 경사를 합쳐서 육백관시(六百館試)를 강경 시험을 빼고 시행하기로 품정하여, 이미 전교를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신덕 왕후(神德王后)를 태묘(太廟)에 부묘한 경사가 있었습니다. 조종조를 빛나게 한 경사로는 이보다 큰 것이 없으며 조정에서 온 나라에 이 기쁜 경사를 드러내 보이려면 다른 일보다 나은 행사가 있어야 합니다. 얼핏 들으니, 예관이 세 가지 경사를 합쳐서 그대로 육백관시를 설행할 것으로 품정을 하였다고 합니다. 어리석은 신의 소견으로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조종조에서 행하고자 하면서도 못했던 것을 지금 비로소 행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조종조의 본의를 밝히고 부모의 뜻을 이어 큰 효행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를 마친 뒤에 위아래가 경사를 함께 나누는 뜻을 드러내는 일이 여기에서 그치고 만다면, 어찌 뒷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잘못된 일을 대충 덮어두려고 했다는 깊은 의심을 갖게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조정에서 지난번에 우레의 변고가 있었다는 이유로 옥사를 소결하고 부세를 줄여주는 일을 거행하였습니다만, 생각건대 일반 백성들의 근심은 바로 신역(身役)이 괴롭고 무거운 데에 있습니다. 올해 목화(木花)가 흉년이 든 것은 또한 조정에서도 아는 바입니다. 백성들의 고생을 덜어주려 한다면 마땅히 신역 문제를 우선으로 삼아야 하는데, 의논하여 줄여주라는 명을 내렸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때에 민정(民丁)을 크게 조발하여 이미 구액(舊額)을 채웠는데, 또 신군(新軍)을 창설하여 온통 물난리나 불난리가 난 것처럼 소란스럽습니다. 오늘날 위로는 성스럽고 밝은 덕을 지닌 임금이 있고 아래에는 각박하게 수탈을 하는 신하가 없으며 나라에는 아랫사람들을 돌보는 명령이 있고 관리들은 법 이외의 부세를 거두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잔약한 백성들이 마음을 파내고 뼈를 깎는 고통은 여전합니다.
군대를 긁어모으는 일을 즉시 정지하고 징포(徵布)의 부역을 헤아려 줄여주어 눈앞에 닥친 백성들의 고통을 풀어주고 하늘의 심한 노여움을 위로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2월 19일 정축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대신 및 육조 참판 이상과 관각(館閣)의 당상이 빈청에 모여서 왕세자의 자(字)를 의논하여, 명보(明普)라고 정하였다.
장선징을 도승지로, 어진익(魚震翼)을 정언으로, 정지화(鄭知和)를 형조 판서로 삼았다.
예조가, 전 재신(宰臣) 이민구(李敏求)가 죽은 일로, 조제(弔祭)와 치부(致賻)를 할 것을 전례대로 청하였다. 도승지 장선징 등이 아뢰기를,
"민구는 죄가 종사에 관계되어 마땅히 죽어야 하는데도 죽지 않았으니, 나라가 실형을 한 것이 이보다 큰 것이 없어서 공론의 울분이 아직도 풀리지 않았습니다. 목숨을 보전하여 집에서 편안히 늙어서 죽었으니 그에게는 대단한 다행인데, 어찌 전례를 따라 이러한 조제를 내릴 수 있겠습니까. 비록 계하를 하신 일이더라도 일의 이치로 헤아려볼 때 결코 그대로 시행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죄가 비록 그러하나 이미 직첩을 주었으니 또한 전혀 모른 체할 수는 없다. 치부(致賻)하는 일만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민구는 고 재상 이수광(李睟光)의 아들이다. 집안 대대로 문장으로 나라 사람들의 칭송을 들었다. 민구와 그의 형 이성구(李聖求)는 모두 외과(巍科)에 발탁되어 좋은 벼슬에 올라 명예가 매우 융성하였다. 병자년 난리 때에 민구가 검찰사(檢察使)로서 강도(江都)를 지키면서 술에 빠져서 방비를 하지 않고 있다가 많은 적군이 갑자기 쳐들어오자 넋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결국 한 섬이 온통 어육이 되고 종묘 사직이 없어졌으며 빈궁 및 대군이 포로로 잡혀갔다. 일이 안정된 뒤에 조정의 공론이 모두 분통스럽게 여겨 군율(軍律)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는데, 다행히 사형을 면하여 먼 변방에 유배되었다. 그전에 민구가 일찍이 정명수(鄭命壽)의 처제를 첩으로 삼았는데, 그 형세를 바탕으로 조정을 위협하여 내지로 이배되었다. 인조가 그를 죽이지 못한 것을 통분스럽게 여겼다. 세월이 오래되자 조정에서도 혹 그의 글재주를 아깝게 여겨 거두어 서용하자는 의논도 있었으나 번번이 공론에 부딪쳐 저지되었다. 폐기된 지 수십 년이 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죽었다. 그 사람됨이야 참으로 논할 것도 없으나 시문(詩文)은 모두 그의 무리에서 탁월하게 빼어났으니, 역시 근래에 드러난 자였다.
2월 21일 기묘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2월 24일 임오
예조가 아뢰기를,
"왕세자 관례 뒤에 진하하는 일에 대해서 이미 결정을 내렸습니다만, 신들이 중국의 전례(典禮)를 고찰해 보니, 황태자의 관례를 마치면 백관이 모두 조복(朝服)을 입고 봉천전(奉天殿)에 가서 하례를 올리고 예를 마친 뒤에 공복(公服)으로 갈아 입고 동궁에게 가서 하례를 올린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중국의 하례하는 예입니다. 우리 나라의 고사로는, 중종 실록 가운데 인종(仁宗)이 세자로서 관례를 할 때에 권정례로 진하하고 사면을 내렸고, 그 뒤 세자 책례(冊禮) 및 건강을 회복한 뒤의 진하는 모두 대전, 대왕 대비전, 왕대비전, 중궁전에 예를 행하였고 세자궁에는 권정(權停)하였습니다. 지금은 의당 이 예에 의하여 대전, 대왕 대비전, 왕대비전, 중궁전, 세자궁에 진하를 해야 하겠습니다만, 어떤 예를 따라야 합당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때에 가서 다시 계품하라고 하였다.
장령 경최가 ‘전임 영천 군수(永川郡守)로 있을 때에 유군포(留軍布)를 거두어 바치지 않아서 조사를 받고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2월 25일 계미
집의 이단하(李端夏)와 장령 이하(李夏)가, 문서를 살피지 못한 일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사간 이단석, 헌납 김석주가 인피하며 아뢰기를,
"전 전라 감사 김징이 사치스런 잔치를 베풀어 선물이 폭주하였으므로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여 갈수록 더욱 들끓는데, 신들은 그 죄를 가볍게 처리하여 파직시킬 것만을 청해서 윤허를 받았습니다. 통제사 유비연(柳斐然)은 보낸 물건이 박이명에 비하여 조금 적었으므로 죄를 청할 때에도 박이명보다 조금 가볍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금방 대석에서 장관이 말하기를, ‘이미 주어서는 안 될 것을 주었다면, 많고 적음을 논할 것 없이, 남에게 증여한 죄를 범한 것은 다름이 없다. 그리고 증여한 자는 당연히 죄주어야 하지만, 받은 자도 유독 가벼이 할 수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당초에 너무 가볍게 법을 적용한 실수가 드러났습니다. 신들을 체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 때 대사간 김우형(金宇亨)이 또 죄를 더 주어야 한다고 발론하였는데, 단석 등이 인피하고는, 물러나 물론을 기다리지 않은 채, 드디어 연명으로 모두 잡아다 문초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2월 26일 갑신
신석번(申碩蕃)을 장령으로, 윤리(尹理)를 정언으로, 임유후(任有後)를 병조 참판으로, 신정(申晸)을 수찬으로, 이박(李璞)을 전라 우수사로, 이집(李鏶)을 전라 병사로 삼았다.
2월 27일 을유
대사간 김우형, 헌납 김석주 등이 유비연(柳斐然) 등을 모두 잡아다 문초할 것을 계청하고, 또 아뢰기를,
"김징이 범한 죄는 매우 외람되고 문란한 것인데, 어버이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비록 논핵을 하였으나 오히려 그의 죄를 가볍게 하여 파직시킬 것만을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의 말이 그치지 않고 죄상이 더욱 드러나, 참으로 파직만으로 그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김징이 부임할 당초에, 벌써 그의 내행(內行)을 위하여 짐바리를 싣고 귀가하였기 때문에, 자못 검소하지 못하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잔치를 베풀고 소용될 물품들을 마련함에 미쳐서는, 의복 및 노리개를 마련하느라 은자와 비단을 많이 꺼내 썼고 공장(工匠)을 한 달이 넘도록 그치지 않고 사역시켜, 감영의 저축을 탕진하고 온 도의 재력을 허비하였습니다. 그가 하는 일이 일마다 사치스러웠는데, 또 격서를 보내 부르고 서찰을 보내 요구한 것이 수십 고을일 뿐만 아니라, 곤수(閫帥)·영장(營將)·무인(武人) 및 안면도 없는 자들까지 모두 불러, 사람마다 빈손으로 오는 자가 없고 물건마다 하찮은 것이 없어 비단과 화폐를 실은 수레가 폭주하도록 하였습니다. 심지어 지난 겨울 전최(殿最)를 매길 때 중하(中下)의 고과를 받은 고을 수령들은 대부분 선물이 적었기 때문이었는데, 서로 공공연히 지목하게 되어 온 도에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김징은 평소에 이미 금(金)을 우송해 보낸 사건으로 한바탕 오욕을 당하였는데, 지금껏 조금도 자제하지 않은 채 방종하고 교활함이 여전했습니다. 그의 허다한 탐욕스런 실상이 매우 놀랍습니다. 잡아다 문초하여 죄를 주소서."
하니, 상이 박이명과 김징을 모두 잡아다 문초하라고 명하였다.
2월 29일 정해
내국 도제조 허적 등이 의관을 거느리고 집상전에 들어가 진료하였다. 진료가 끝나고 허적이 나아가 아뢰기를,
"비국의 아룀으로 인하여, 유군포를 거두지 않은 수령을 조사해 내니, 5백 필 이상인 자가 거의 20여 명이고 그 이하인 자가 40여 명입니다. 이미 조사를 하였으니, 죄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거두지 않은 것의 많고 적음에 따라 혹은 정배(定配)하고 혹은 혁직(革職)하고 혹은 결장(決杖)하도록 하라."
하였다.
경상 감사가 치계하여, 왜관의 선창(船倉)을 수선하여 쌓아서 왜인들로 하여금 왜관을 옮기기를 바라는 마음을 아예 먹지 못하도록 할 것을 청하였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현종개수실록22권, 현종 11년 1670년 3월 (0) | 2025.12.06 |
|---|---|
| 현종개수실록22권, 현종 11년 1670년 윤2월 (0) | 2025.12.06 |
| 현종개수실록22권, 현종 11년 1670년 1월 (1) | 2025.12.06 |
| 현종개수실록22권, 현종 10년 1669년 12월 (0) | 2025.12.06 |
| 현종개수실록22권, 현종 10년 1669년 11월 (0) | 2025.1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