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무오
승지 이지익(李之翼)이 소장을 올려 사직하고 또 판의금 김좌명과 도승지 장선징을 논척하기를,
"장오(贓汚)의 죄를 범한 사람을 형추하라는 윤허가 내린 뒤에 갑자기 그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아뢰었으니, 이는 후일의 폐단에 관계될 뿐만이 아닙니다. 또한 의도는 저쪽을 구원하는 데에 있으면서, 들어가 진료하겠다고 먼저 청하였으니, 매우 온당치 못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박이명이 공초한 내용 중에는 다 실토하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형추하는 것은 마땅한 일인데, 개좌를 정지하고 죄인을 구호하기에 급급하였으니, 신은 임금의 세력이 펴지지 못하고 권세가 아래에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인가 염려됩니다. 기쁨과 슬픔을 국가와 함께해야 할 신하가 오히려 사사로움을 앞세우고 공적인 일을 뒤로 한다면, 그 나머지야 다시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으나, 지익은 끝내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처음에 김좌명 등이 입진(入診)을 인하여 상께 아뢰기를,
"박승후(朴承後)가 다른 사람을 끌어대어 그 자취를 증명하였으니, 실상을 알아낸 뒤에야 형추할 수가 있는 것인데, 지레 먼저 판하하셨으니 성상께서 의도하신 바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날에 필시 다른 공사가 있어서 혼동하여 계하한 것이다."
하였다. 장선징이 아뢰기를,
"그 날에 박이명 형추 공사를 역시 판하하셨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두 사람의 원정(原情) 공사를 다시 들이라."
하였다.
당시에 박이명에 대해서 이미 형추하라고 판하하였는데, 약방이 입진한 뒤에, 그 공사도 또한 다시 들이라고 명하였다. 그래서 이지익이 ‘김좌명 등이 박이명을 위해서 구해(救解)한 것’이라고 의심을 하여 이렇게 상소하여 배척한 것이었다.
3월 2일 기미
헌납 이하(李夏)가 직책을 띤 채로 고향에 내려갔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3월 3일 경신
이만영(李晩榮)을 대사간으로, 김석주(金錫胄)를 이조 좌랑으로, 이익(李翊)을 이조 참의로, 강백년(姜栢年)을 호조 참판으로, 홍주삼(洪柱三)을 응교로, 이혜(李嵆)를 부교리로, 신정(申晸)을 수찬으로, 정화제(鄭華齊)를 헌납으로, 정유악(鄭維岳)을 설서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정유악은 정뇌경(鄭雷卿)의 아들이다. 정뇌경은 필선(弼善)으로 소현 세자(昭顯世子)를 배행하여 심양(瀋陽)에 들어가 정명수(鄭命壽)를 죽이려고 꾀하다가 【정명수는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오랑캐에게 잡혀가 우리 나라에 대한 일을 주관한 자인데, 온갖 일로 침해하여 사람들이 고생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죽이려 한 것이다.】 박로(朴𥶇)에 의해 누설되어 참혹하게 죽음을 당했다. 그래서 나라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비통하게 여긴다. 정뇌경이 죽을 때에 대구(對句) 한 구절을 부채에 적어서 사람을 시켜 정유악에게 주게 하였는데, 대개 아들이 세상에 나와 벼슬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도 정유악은 장성하자 어미의 뜻이라고 핑계대고 과거 공부를 폐하지 않더니, 벼슬길에 올라서는 출세하기에 급급하여 경박하고 줏대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천박하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22책 22권 28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14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논한다. 정유악은 정뇌경(鄭雷卿)의 아들이다. 정뇌경은 필선(弼善)으로 소현 세자(昭顯世子)를 배행하여 심양(瀋陽)에 들어가 정명수(鄭命壽)를 죽이려고 꾀하다가 【정명수는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오랑캐에게 잡혀가 우리 나라에 대한 일을 주관한 자인데, 온갖 일로 침해하여 사람들이 고생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죽이려 한 것이다.】 박로(朴𥶇)에 의해 누설되어 참혹하게 죽음을 당했다. 그래서 나라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비통하게 여긴다. 정뇌경이 죽을 때에 대구(對句) 한 구절을 부채에 적어서 사람을 시켜 정유악에게 주게 하였는데, 대개 아들이 세상에 나와 벼슬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도 정유악은 장성하자 어미의 뜻이라고 핑계대고 과거 공부를 폐하지 않더니, 벼슬길에 올라서는 출세하기에 급급하여 경박하고 줏대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천박하게 여겼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대신에게 묻기를,
"차왜(差倭)가 굳이 왜관(倭館)을 옮기려고 하는 것은 무슨 일인가?"
하니,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배를 댈 곳이 이전과 다르고 뱃길이 순탄치 못하기 때문에 왜인들이 절박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 요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이 차왜(差倭) 무리들이 잇달아 나올 것이니, 접대하기가 필시 어려워질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바라는 곳은 어디에 있는가?"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저들의 의도는 웅포(熊浦)를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관을 웅포로 옮긴다면 왜인을 접대하는 일은 어느 고을이 주관하게 해야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왜관을 옮기면 웅천(熊川)이 담당을 해야 하는데, 마땅히 부사(府使)로 승급시켜야 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어 왜인들의 기사(騎射) 솜씨에 대해서 물으니, 호군 민정중이 아뢰기를,
"왜인들은 말을 잘 타지 못합니다. 말 등자가 한쪽이 떨어져 나갔으니 보기에 우습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대마도가 살아가는 방도에 대해서 물으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땅이, 곡식이 자라기에 적합하지 않아서 토란을 먹습니다. 우리 나라 덕으로 살아갑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인은 사치가 아주 심한데, 대개 토산품인 금은(金銀) 때문에 그런 것이다."
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 사람이 청나라에서 무역해 오는 백사(白絲)가 모두 왜관으로 들어가는데, 바로 큰 이익을 얻기 때문입니다. 백사 1백 근(斤)을 60금(金)에 무역해 와서 왜관에 가서 팔면 값이 1백 60금이나 됩니다. 이런 큰 이익이 있기 때문에 백사는 비록 수만 근이라도 모두 팔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민정중이 새로 청나라에서 돌아왔기 때문에 상이 청나라의 형세에 대해서 물었다. 민정중이 아뢰기를,
"북경(北京)에 머무는 군대는 10여만 명인데, 이 때문에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산해관(山海關) 밖은 무인지경과 같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산해관 안은 충실하던가?"
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명나라 때에는 병력을 모두 이 땅에다 두었었기 때문에 태평 시절에는 북경보다 번성했습니다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요동(遼東) 이후로는 연대(烟臺)가 수없이 설치되어 있는데 천하의 물력(物力)이 아니면 이같이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적을 제어하지 못했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국경의 방비만으로는 적을 막을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하였다. 상이 또 왈가(曰可) 【왈가는 북쪽 오랑캐의 한 종족 이름이다.】 일을 가지고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군병을 징발할 근심이 있지 않겠는가?"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근심이 없을 수는 없을 듯합니다."
하고, 민정중이 아뢰기를,
"이들이 바로 나선(羅先)입니다."
하였다. 당시에 북쪽 오랑캐 왈가가 북방을 노략질하였는데, 청나라 군대가 가서 공격하다가 전체가 몰살을 당하였다. 그래서 상이 이것을 걱정한 것이다. 상이 이르기를,
"갇힌 몽고왕이란 자는, 문견 사건으로 보건대, 이주(伊州) 부락 사람이 아니다."
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청나라 사람들은 이주 부락이라고 하나, 다른 사람은 몽고 40종족 가운데 이들이 통솔하는 우두머리라고 하는데, 이 말이 옳을 듯합니다. 평양 사람으로서 잡혀가서 중이 되었던 자가 와서 전하였는데 매우 자세하였습니다. 역관(譯官) 조동립(趙東立)이 심양에 들어가니 심양에서는 ‘몽고가 곧 들이닥칠 것이다.’라고 하면서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북경에 들어가니 조용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가장 겁내는 자는 서량(西凉) 서쪽에 있는 몽고족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서량 몽고에 대해서는 청나라에서 금백(金帛)으로 뇌물을 많이 주었다고 합니다. 또 혜성이 서쪽에서 출현하였기 때문에 저들이 또한 이것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예조 판서 박장원이, 지난번에 계품하였던 ‘세자 관례 후에 진하하는 일’로 다시 계품하니, 상이 정미년의 예에 의하여 행하라고 명하였다. 대전, 대왕 대비전, 왕대비전, 중전에 진하하고 세자궁은 전교를 인하여 권정(權停)했던 것이 바로 정미년의 예였다. 예조가 또 ‘궁관(宮官)의 진하에 대한 일’로 계품하니, 상이 또한 정미년의 예에 의하여 행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관례 때에 빈찬(賓贊)이 명을 받은 뒤에는 어느 문으로 나가는가?"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교서(敎書)는 정문(正門)으로 나가고 빈(賓)은 협문(挾門)으로 나가야 합니다. 예를 행할 때에는 시민당(時敏堂)의 집영문(集英門)과 진수당(進修堂)의 진현문(進賢門)이 응당 동문(東門)과 서문(西門)이 되어야 하고, 빈(賓)과 주(主)를 나누어 모두 정문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또 ‘빈이 자(字)를 진헌하는 절목’에 대해서 묻기를,
"어째서 두 번 절한다고 썼는가?"
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사관례(士冠禮)에는 빈이 자(字)를 지어주게 되어 있습니다만, 지금은 신료들이 감히 자를 지어주지 못하고, ‘성상의 전교를 받아 한다.[奉敎]’는 말이 있습니다. 이른바 두 번 절하는 예[再拜禮]는 사관례(士冠禮)라고 하여 그대로 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전교를 받아 아무라고 자를 지어준다.[奉敎字某]’고 일컫는다면 세자는 두 번만 절을 해서는 옳지 않고, 만약 두 번 절하는 예를 행하려면 ‘전교를 받든다.[奉敎]’라고 일컫는 것은 옳지 않다. 이러한 뜻으로 대신들에게 의견을 물으라."
하였다.
3월 4일 신유
정언 홍수하(洪受河)가 ‘동료들과 상회례(相會禮)를 하기로 약속을 하고도 병이 있어 그 모임에 나가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3월 5일 임술
좌참찬 송준길이 외방에 있다가 들어오니, 상이 양심합에서 인견하였다. 상이 준길을 위로하며 안부를 물으니, 준길도 상의 기거에 대해서 문안하고 또 세자의 학업 성취에 대해서 물었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이제 왔으니, 세자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준길이 또 아뢰기를,
"소신의 자급이 외람되이 높습니다. 겸대 시강원 찬선으로서 빈객(賓客)의 윗자리에 있게 되니, 실로 타당치 않습니다. 찬선을 체직하고 본직만으로 관례에 들어가 참여하게 해 주신다면 어찌 온편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본직의 직임으로 들어가 참여하는 것이 찬선의 직임을 띠고 들어가 참여하는 것만 못하다. 그러나 경의 말이 이와 같으니,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사는 곳이 전라도와 충청도 사이에 있어 그곳의 여론을 모두 들어 알고 있는데, 전 감사 김징(金澄)의 일을 모두들 원통하게 여겼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징은 지금 갇혀 있다. 이 일이 어찌 사람들이 원통하게 여길 일인가."
하자, 준길이 대답하기를,
"그러나 대각이 듣는 풍문이 어찌 정확할 수 있겠습니까. 호남의 공론이 모두들, 대간의 계사는 열에 여덟 아홉은 사실과 다르다고 합니다. 자고로 어미를 위해 수연을 베푼 일을 장률(贓律)로 처리한 일이 있었습니까. 이같은 처리는 실로 효리(孝理)에 손상을 주므로 식자들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전에 정온(鄭蘊)이 감사가 되어 그의 어버이 회갑연을 열었는데 그때 수령 중에 성의있는 예물을 바치지 않은 자가 있자, 정온이 그의 색리(色吏)를 죄로 다스렸다고 합니다. 그의 의도는 폐물을 받고자 한 것이 아니라, 부하의 도리로서 이같이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김징이 베푼 잔치는 원두표(元斗杓)·이경여(李敬輿)·이태연(李泰淵) 등에게 견주면 훨씬 적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로써 죄를 받게 되었으므로 마음이 공평한 자는 모두 한심하게 여깁니다. 지금의 의논이 야박하니, 지금 만약 상께서 ‘부모를 위해 잔치를 베푼 것이 어째서 장죄가 되겠는가?’ 하신다면, 경박한 의논들이 안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만,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시면 매우 시끄럽게 될 염려가 있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김징이 어미를 위해서 잔치를 베푼 것은 사부들이 흔히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김징은 향곡(鄕曲)의 한미한 족속으로 갑자기 방면(方面)의 자리에 올라, 그의 뜻이 오로지 어미를 위해 크게 한바탕 잔치를 벌이는 데에 있었다. 그래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까지 널리 초청하여 예물로 가져오는 물건들을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이것이 당시의 사람들이 해괴하게 여긴 이유였다. 그리고 자신의 역량도 헤아리지 못하고, 대각에 있을 때에 거침없이 탄핵을 해대어 권력을 가진 공경(公卿)들로서 그의 탄핵을 받은 자가 수십 명일 뿐만이 아니었으며 그를 원수로 여기는 자가 세상에 가득하여 사람들이 모두 눈을 흘겼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런 일을 보자 드디어 그를 미워하는 감정이 더욱 증폭되어 비방하는 의논이 시끄럽게 일어나 그치게 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모두 그가 자초한 것이니 괴이하게 여길 것도 없겠으나, 수연(壽宴)의 사치스러운 정도를 논란하고 예폐(禮幣)의 물건들을 계산하여 반드시 ‘어미의 잔치를 빙자하여 뇌물을 챙긴 도적[憑藉贓盜]’으로 죄를 삼으려 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이 모두들 그것이 그에 대한 원한에서 나온 것임을 알았다.
3월 6일 계해
이후(李煦)를 정언으로, 윤리(尹理)를 지평으로, 김만기(金萬基)를 대사성으로 삼았다.
경상도 안음(安陰)과 거창(居昌)에 윤2월 16일에 지진이 있었다. 초계(草溪)에 윤2월 28일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새알만하였다.
3월 7일 갑자
경상도에 염병(染病)이 크게 번졌다.
3월 8일 을축
예조가 ‘왕세자 관례 때의 조알(朝謁)에 대한 일’로 계품하였다. 상이 명하여, 신묘년의 예에 따라 하도록 하였다.
찬선 이유태(李惟泰)가 고향에서 올라왔다.
이조 좌랑 김석주(金錫胄)가 김징(金澄)을 앞장서서 논핵하였는데, 김징을 구원하는 사람들이 많자, 이에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신이 삼가 의금부에 있는 김징과 박이명 두 사람의 공초 문서를 보니, 비록 꾸며대어 부인한 내용이 있었지만, 그의 최종 자백서는 역시 낭자한 자취를 감추기 어렵다고 하겠습니다. 대체로 잔치 자리에 사용되는 물품과 술과 음식의 비용은 비록 백 동이의 술과 천 마리의 쇠고기가 들더라도 이는 남과 함께 즐긴 재료이니, 과시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혹 할 수 있는 일입니다만, 바로 공관의 저축을 꺼내어 서울 집에 실어 보내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물품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모두 그의 집으로 들어 갔다고 하였는데, 그는 시장에서 무역하였다고 했습니다. 설사 김징이 말한 것처럼 2동(同) 9필(匹)의 영목(營木)005) 외에는 터럭만큼도 더는 없다 하더라도, 선조(先朝) 때에 죄를 받은 윤책(尹策)·한기(韓墍) 등이 범했던 것에 비교한다면 어찌 배나 많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김징은, 본래 잔치에 참여하지 않은 병사(兵使)가 실어 보낸 것에 대해서는, 선물 상자의 짐바리가 적지 않았는데도, 체모에 차이가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받았으며, 자기의 관할이 아닌 통제사가 보낸 것에 대해서는, 명주·목면·목화 등의 선물이 명분이 없는 것인데도, 높은 사람에게 주는 예물이라고 하면서 받았습니다. 이런 것도 모두 받았으니, 그가 어떤 것인들 받지 않았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이 다시 남쪽에서 온 사람들이 김징을 공박하는 말을 자세히 들었는데, 진실로 무고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은쟁반 작은 것 한 쌍을 만들었고 그 외에 또 주발과 수저가 있었는데, 그것을 담당하여 만든 색리(色吏)는 성은 백씨(白氏)이고 늙은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계사 중에 추가로 넣었는데, 지금 김징이 공초한 내용을 살펴보니, 은그릇에 관한 일은 완전히 숨겼고, 또 비단에 관한 것을 근거없는 말이라고 하였습니다. 김징이 자신을 위해 하는 말은 이같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만, 속담에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고 하였습니다. 수레꾼들이 전하는 말이 어찌 전연 근거가 없이 한 것이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지금 한두 친우들이 애석히 여기는 논의를 전개하면서 심지어 박이명과 유비연을 지균(指囷)의 의리006) 에 견주고, 김징을 백이 숙제의 절개에 비교하려고 하면서 ‘선물을 준 것도 예의이며 받은 것도 예의이다.’라고 하며 그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려고 하니, 신의 생각에는 그것이 옳은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박이명의 공초는 더욱 간사합니다. 그가 범연히 말한 10여 가지의 물건이란 어떤 물건이며 어떤 종류인지 알 수가 없지만, 이미 의심할 만한 것이고, 또 군목(軍木)이라는 명칭을 고쳐 본색(本色)이라고 하였으니, 곳곳에서 농간을 부린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두 바리의 군목이라고 한 것은 바로 여러 달 떠들썩했던 말로서, 연달아 교대로 실어 나른 것을 역로에서 모두들 말하였고, 마지막에 이명의 공초에 나왔는데, 그가 스스로 공초한 것이 면주(綿紬), 백목(白木) 및 이른바 본색목(本色木)이라고 한 것을 합치면 50필에 이릅니다. 이 밖에 별도로 이보다 더 많은 진짜 수량이 있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그리고 이명의 일만 그러할 뿐이 아닙니다. 김징이 유비연의 편지를 장선징에게 보내어, 자기가 요구한 사실이 없었음을 스스로 밝히고, 또 보낸 목필(木匹)이 매우 적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얼마 후 유비연이 그의 종형인 유혁연(柳赫然)에게 답장을 보내면서 ‘사실 김징이 편지를 보냈으나 수연의 기일만을 통고했을 뿐이었습니다. 제가 보낸 것은 정목(正木) 30필과 목화(木花) 50근 및 기타 물건 몇 가지였을 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듯 앞뒤의 수효가 계속 변하니, 피차의 정상이 천 리를 한 길로 가듯 마찬가지입니다. 아, 이것이 김징이 말한 바 난삽한 것을 꺼려서 스스로 간소하게 치루어 도리어 이전의 선배들이 했던 것에는 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하고, 이어서 사인 이단하와 문학 윤계 등 여러 사람들을 들어 증인으로 삼으면서, 춘방(春坊)의 겸임을 체직시켜 줄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3월 9일 병인
세자(世子)의 관례(冠禮)를 행하였다. 진시(辰時)에 상이 원유관(遠游冠)과 강사포(絳紗袍) 차림으로 인화문(仁和門)을 통하여 나와서 인정전(仁政殿)으로 나아갔다. 문·무 백관이 모두 자리를 잡았다. 고취(鼓吹)를 하고, 시위(侍衛) 행렬을 의절(儀節)대로 진설하였다. 빈(賓)인 좌의정 허적(許積)과 찬(贊)인 예조 판서 박장원(朴長遠)이 들어와 자리에 나아가 절을 하고 꿇어 앉았다. 집사(執事)가 교서(敎書)를 상[案]에 얹어 뒤따라 들어왔다. 전교관(傳敎官)이 교지를 읽기를,
"이제 원자(元子)에게 관례를 행하노니, 경들은 이 일을 시행하라."
하였다. 읽기를 마치자 빈과 찬이 절을 하고 나가서 시민당(時敏堂)으로 【곧 세자가 있는 당(堂)이다.】 갔다. 교서를 앞서 가게 하였다. 상이 다시 대내로 들어가자 백관들이 파하고 나갔다. 사(師) 영의정 정태화, 찬선 송준길, 빈객 민정중·이경억·조복양 및 주인(主人) 낙선군(樂善君) 이숙(李潚)이 먼저 시민당으로 가서 모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왕세자가 시민당의 뜰 남쪽에서 북쪽을 향하여 있었다. 빈이 교서를 받들고 들어가서 교서를 읽었다.
"왕은 이른다. 왕세자 이돈(李焞)에게 교시하노라. 길일에 관례를 행하는 것은 옛 법식을 따르는 것이다. 이에 좌의정 허적에게 명하여 동궁에 나아가 예식을 행하게 한다.
나는 생각건대, 예(禮)는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요 관례는 예를 행하는 시초이다. 하늘을 본뜬 것이 관(冠)의 제도이고 성인이 되게 하는 것은 관례의 뜻이다. 관례를 행한 뒤에야 인도가 갖추어지고 인도가 갖추어진 뒤라야 예의가 서게 된다. 이 때문에 옛날 성왕들이 관례를 중요하게 여겼다. 하물며 너는 임금의 후사이다. 종묘 제사를 받들게 될 것이므로 만백성들이 바라보고 있으니, 관례를 행하는 예가 중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너 세자 돈은 천성이 순수하고 기질이 청명하였다. 어릴 때부터 늠름하기가 장성한 자와 같았고, 스승이 힘써 가르치지 않아도 모든 행동을 반드시 법도에 맞게 하였다. 겨우 옷을 지탱할 만한 나이에 세자로 정하였더니, 공부가 날로 진보되고 글 솜씨도 날로 빛났다. 나를 따라 종묘에 알현케 하였더니 몸가짐을 스스로 엄숙하게 하였고, 나아가 배움에 있어서는 예의에 어긋남이 없었다. 나이는 비록 어리나 덕기(德器)가 이미 드러났다. 이에 너의 관을 갖추고 너의 의복을 갖추고, 술을 내리고 자(字)를 내려 아름다운 일을 이룬다. 나의 기쁨이 매우 깊지만, 너의 책임은 더욱 커졌다.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어찌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체로 사람에겐 여러 가지 행실이 있으나 효제(孝悌)보다 앞서는 것은 없으니, 지극한 덕과 긴요한 도리는 성현의 가르침에 환히 드러나 있다. 타고난 좋은 자질을 바탕삼아 힘써 행하여, 군친(君親)에게 사랑과 공경을 독실히 하고 동기(同氣)에게 화락을 극진하게 하라. 이를 온 나라에 미루어 나가면 인륜의 기강이 설 것이다. 요순의 도도 이것일 따름이다.
그러나 반드시 배워서 밝혀야만 능히 행하여 실천할 수 있다. 배우는 방법의 요점은 이치를 궁구하여 성품을 다하고 공경을 주로 삼아 성심을 보존하는 데 있는데, 심법(心法)으로 서로 전한 것이 책 속에 다 들어 있다. 너는 힘써 처음부터 끝까지 이 공부를 게을리 말라. 《전(傳)》에 ‘대인은 어린아이 때의 마음을 잃지 않는다.’고 하였고, 《주역(周易)》에 ‘대인은 천지와 덕이 합치되고 일월과 밝음이 합치된다.’고 하였다. 대인이 천지 일월과 합치될 수 있는 것은 어린아이 때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는 이제 어린 나이에 바르게 길러졌고 천리가 완전하여 외부의 유혹이 섞이지 않았다. 이런 근본을 바탕으로 굳게 지켜 확충해 나가서, 지(知)와 행(行)이 서로 극진해지고 습(習)과 성(性)이 함께 이루어지면 그 진취의 정도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아, 우뚝한 관으로 머리를 장엄하게 하고 옷을 갖춰 몸을 감싸는 것은, 화려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실행을 책임지우려는 것이다. 예식만 행하고 그 도리를 행하지 못한다면 어린아이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너는 유념해야 할 것이다. 이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이 예의를 공경히 하여 의관을 단정히 하고 시선을 바르게 가지며, 어진이와 덕있는 이를 공경하고 예우하며 성인의 학문에 몰두하되, 밤낮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조금도 안일과 나태가 없게 하라. 그러면 하늘의 축복을 받아 길이길이 끝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교시하니, 다 알아들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교서 읽기를 마치자 세자가 올라가서 당중(堂中)에서 관례를 행하였다. 상방관(尙方官)이 익선관(翼善冠)을 받들고 서쪽 계단으로 올라가 빈에게 주니, 빈이 받아 받들고 올라가서 세자의 자리 앞에 동쪽을 향하여 섰다. 축원하기를,
"좋은 달 좋은 날에 비로소 관을 씌우니, 어릴 때의 뜻을 버리고 성인의 덕을 삼가 닦으소서. 오래오래 장수하시어 큰 복을 받으소서."
하고, 꿇어앉아 관을 씌웠다. 세자가 관을 쓰고 일어서니, 빈이 읍하였다. 세자가 동서(東序)의 장막 안으로 들어가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나오니, 빈이 또 읍하였다. 세자가 자리에 앉으니, 빈과 찬이 꿇어앉아 처음에 씌웠던 관을 벗기었다. 상방관이 원유관(遠遊冠)을 올리니, 빈이 받아서 세자 앞에 나아가 서서 축원하기를,
"좋은 달 좋은 때에 아름다운 관(冠)을 거듭 올립니다. 위의를 공경히 갖추니 위의가 밝아졌습니다. 만년토록 장수하고 길이 복을 받으소서."
하고, 꿇어앉아 관을 씌웠다. 빈이 읍하였다. 세자가 장막 안으로 들어가 강사포(絳紗袍)를 입고 나오니, 빈이 읍하였다. 세자가 자리에 앉았다. 빈과 찬이 꿇어앉아 두 번째 씌웠던 관을 벗겼다. 상방관이 평천관(平天冠)을 올리니, 빈이 받아 세자 앞에 나아가 서서 축원하기를,
"좋은 해 좋은 달에 관복을 모두 입히니, 그 덕을 이루소서. 만수무강하시고 하늘의 축복을 받으소서."
하고, 꿇어앉아 관을 씌웠다. 빈이 읍하였다. 세자가 들어가니, 보덕(輔德)이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세자가 면복(冕服)을 입고 나와 자리에 나아가 남쪽을 향하고 앉았다. 빈이 술을 받아 세자의 자리 앞에 나아가, 북쪽을 향해 서서 축원하기를,
"맛좋은 술을 정성껏 올리니 향기롭습니다. 절하고 받아 제사지내어 상서로움을 정하소서. 하늘의 아름다움을 받들어 오래도록 잊지 마소서."
하고, 꿇어앉아 술잔을 올렸다. 세자가 술잔을 받아 제사지내고 술을 마셨다. 필선(弼善)이 세자를 인도하여 서쪽 계단으로 내려와서, 서편 계단 아래에서 동남쪽을 향하였다. 빈이 조금 앞으로 나가 자(字)를 전하기를,
"관례가 이미 갖추어졌으니 좋은 달 좋은 날에 자(字)를 고합니다. 군자에게 마땅한 바이고 복 받기에 마땅하오니, 받아서 길이 보존하소서. 교지를 받들어 명보(明普)라고 지었습니다."
하니, 세자가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내 비록 어리석으나 감히 공경히 받들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관례를 마치고, 빈과 찬이 대궐에 가서 복명하였다.
장령 경최가 ‘법을 무릅쓰고 사사로이 나간 일’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대마도 태수(對馬島太守) 평의진(平義眞)이 차왜(差倭) 평성상(平成尙) 등을 보내 왔다. 이들이 서계(書契)를 가지고 와서 경접위관(京接尉官)을 보내 줄 것을 청하였다. 왜관을 옮기기 위해서였다. 수찬 신정(申晸)을 접위관으로 차정하여 내려 보냈다.
3월 10일 정묘
상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세자의 조알(朝謁)을 의식대로 받았다. 세자가 동편 뜰 절할 자리에 나아가 북쪽을 향하여 예를 행하였다. 예방 승지(禮房承旨) 정익(鄭榏)이, 앞으로 나가 꿇어앉아, 교서를 읽겠다고 상에게 아뢴 다음 세자의 자리 앞에 나가 서쪽을 향하고 섰다. 교서를 읽기를,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기고 아랫사람을 사랑으로 대하라. 사람을 의로써 부리고 은혜로써 기르라."
하니, 세자가 절을 하고 조금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비록 명민하지 못하나 감히 정성껏 받들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예를 마치고, 대왕 대비전·왕대비전·중궁전에 가서 조알하니, 삼전(三殿)이 내전에서 조알을 받았다. 상이 이에 중외에 교서를 반포하여 사면령을 내리고 백관들에게는 자급을 하나씩 더해주었다. 그 교서는 이러하다.
"왕은 이른다. 영구한 계책은 진실로 원량(元良)에게 달린 것이라 일찍 세자로 책봉했고 가례(嘉禮)의 일은 관례보다 더 중한 것이 없는지라 성인의 책무를 주었다. 어찌 조정 군신들만의 즐거움이랴. 마땅히 온 백성과 경사스러움을 함께해야 한다. 생각건대, 하찮은 내가 큰 왕업을 이어받았는데, 다행스럽게도 세자가 뒤를 이어 선조의 사당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세자는 명민한 자질이 어릴 적에 드러났고 효성과 우애가 독실히 마음에서 우러났다. 학문은 가르침에 번거로움이 없었고 행동은 조금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하늘로부터 타고난 훌륭한 자질은 실로 조종의 영령 덕분이고 날로 장성하기를 바라는 것은 항상 간절한 부모의 소원이었다. 왕위를 이을 세자에 책봉되니 중한 덕을 모두들 함께 노래하였고 비로소 학교에 들어가는 의식을 행하니 삼선(三善)007) 을 크게 선양하게 되었다. 덕기(德器)가 점점 성취되는 것을 보고 어린 생각을 벗어버리게 됨을 기뻐하였다. 옷을 지탱할 만한 나이에 이미 뭇 사람들이 목을 늘이고 기대를 하였는데, 단정하게 복색을 갖추어 몸을 바루는 방도를 따랐다. 예가 삼가(三加)에서 더욱 높으니 귀한 바는 끝이 처음 하기에 달려 있다는 것이고 나이가 바야흐로 10세에 이르니 화합하여 음으로 양을 이루는 것이다. 봄날 좋은 때를 점쳐서 옛 제도에 있는 관례를 시행하였다. 이미 올해 3월 9일에 명을 내려 동궁에 가서 예를 행하게 하였다. 훈계하고 축원하는 의식이 갖추어지고 술을 내리고 자를 지어주는 일이 시행되었다. 자리에 오르고 계단을 내려가니 선왕의 절문에 차서가 있었고 머리를 장엄하게 하고 용모를 온화하게 하니 성인(聖人)의 예법을 볼 수 있었다. 의관이 더욱 빛나니 세자의 지위가 더욱 중해졌다. 사람을 세우는 도는 인(仁)과 의(義)이니 덕업(德業)이 더욱 빛나기를 바라며 하늘의 보살핌을 받들어 수를 누리며 번창할 것이니 기본이 길이 견고하기를 기대한다. 공경 대신들이 반열에 있으니 기뻐하는 정성이 고루 깊고 사방 사람들이 즐거워하니 사랑으로 떠받드는 뜻을 알 수 있다. 이 성대한 의식을 시행하는 날에 어찌 은택을 넓히는 일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달 10일 이전에 죄를 지은 자는, 잡범으로서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사면한다. 아, 삼대의 장구했던 안녕을 추모하여 화합의 시대를 열고 온 백성과 함께 새로이 시작하여 길이 좋은 날을 보전하고자 한다. 그래서 이렇게 교시를 하니, 의당 잘 알았으리라 생각한다."
부제학 이민적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들이 춘궁(春宮)의 관례일에 삼가 보건대, 찬선 송준길과 이유태가 모두 머리 허연 원로 신하로서 배종하고 주선하는 반열에 와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신료들이 보고서 흐뭇해 하며 성대한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지금 들으니, 두 신하가 모두 내려갈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이 두 사람은 두 조정에서 알아줌을 받아 은혜와 예우가 갖추어 지극하였으니, 어찌 갑자기 무심하게 떠나버릴 생각을 하였겠습니까. 신들의 생각으로는, 성상의 병환이 아직도 완쾌되지 않아서 진강(進講)은 기약이 없고 조정의 기상이 진작될 형세가 없어서가 아닌가 염려가 됩니다. 산림의 선비가 거취를 결정하는 것은, 단지 간곡하게 내리는 은혜만 보고 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겉모양만 간곡하게 하는 것은 현인을 불러오는 방도가 아닙니다. 성상께서는 속히 그들을 인접하시고 간절한 뜻으로 말씀하셔서 오래도록 서울에 머물러 있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너그럽게 답하였다.
3월 11일 무진
이하(李夏)를 장령으로 삼았다.
상이 명하여, 송준길에게 쌀과 고기를 잇대어 보내게 하고 이유태에게 먹을거리를 제급하게 하였다.
장령 이휴징(李休徵)과 지평 윤리(尹理)가, ‘포도 대장이 도적을 잡아 다스리지 못하여, 그 일을 논핵했었는데, 일이 사실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정언 김덕원(金德遠) 등이 아뢰기를,
"가산 군수(嘉山郡守) 유휘(柳徽)가, 자기 첩의 친정 큰 조카 사인(士人) 이(李) 아무개의 아내와 간통하였는데, 주고받은 편지가 본 남편에게 발각되어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니, 사실을 조사하여 그 죄를 바루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잡아다 추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12일 기사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여러 의원들로 하여금 들어와 진료하게 하였다. 제조도 입시하였다. 진료가 끝나고, 도제조 허적이, ‘산골짝에 유민(流民)이 많으니 양정(良丁)을 역사시키지 않아도 정돈하여 부대를 만들 수 있다.’고 많은 말로 진달하였다. 제조 김좌명도 부대를 만드는 것의 편리함을 말하였다. 상이, 본현(本縣)으로 하여금 유민들을 모집하여 뽑아 정하여 항상 돌보아 주고 은혜와 위엄을 아울러 보여서 원망하며 반란을 일으킬 생각을 갖지 못하게 하도록 하였다. 산골짝 유민들로 부대를 만든 것이 대개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그 뒤에 유혁연 등이 산골짝 안에다 널리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그 장정들을 모집하였는데, 정돈하여 군대를 만든 것이 수십 둔(屯)이었다. 또 대흥 산성(大興山城)을 쌓아서 여러 둔(屯)을 관할할 바탕을 삼았다. 그러나 이것이 호복(胡服)이 난을 일으키는 빌미가 되었다. 유혁연과 허적이 반란죄로 복주된 뒤에도 이전대로 따르며 혁파하지 않았다.
3월 13일 경오
정언 김덕원·이후 등이, 유휘(柳徽)의 죄를 논계할 때에 간음한 여자를 함께 논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한 뒤에 아뢰기를,
"사족의 부녀가 남과 간음하면 적용하는 국법이 있으니, 실상을 엄밀히 조사하여 그 죄를 바루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휘가 간음한 여자, 이영구(李穎耉)의 아내도 아울러 잡아다 문초하여 법에 따라 죄를 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그 뒤에, 서찰을 주고받은 것은 드러났으나, 간음한 자취는 밝혀지지 않았다. 유휘와 그 음란한 부인을 모두 멀리 유배하였다.
3월 14일 신미
양사가 이미 서필원(徐必遠)을 논죄하는 논계를 정지하였는데, 서필원이 상소하여, 총융사(摠戎使)의 직임을 체직시켜 달라고 청하며 아뢰기를,
"고금 천하에 어찌 신처럼 배척을 당하고도 행공을 한 자가 있었겠습니까. 만약 신의 탐욕스러움이 대각의 논계와 같고, 욕심이 대각의 논계와 같고, 염치 없음이 대각의 논계와 같고, 성상의 총애를 업고 있는 것이 대각의 논계와 같다면 조정에 다시 들어갈 수 있는 이치가 결코 없는 것입니다. 밝으신 성상께서는 비록 ‘군병을 거느리는 관원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분부를 내리셨으나, 만약 끝내 저의 계청을 들어주지 않으신다면 어쩔 수 없이 제 마음대로 그만두는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죄에 빠진 뒤에 죄를 논열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일찍 물러나게 해서 목숨을 보전하도록 해주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조정에서 경에게 총융사의 직임을 맡긴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닌데, 경이 이에 부신(符信)을 반납하고 물러나 돌아가겠다니,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나이어린 경박한 무리들의 논핵을 굳이 혐의할 것이 없으며, 위태로운 국가의 일을 유념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경은 굳이 사직하지 말고 군정이 허술해지는 폐단이 없게 하라."
하였다.
서필원은 겉으로는 순박하고 정직한 듯하였으나 안으로는 계교하는 것이 많아서 성상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다. 그리고 허적, 김좌명과 깊은 친분을 맺어 서로 추천을 하였다. 그 때문에 그가 말을 하는 것과 일을 하는 데에 있어서 믿고 기탄이 없는 것이 이러하였다.
사간 윤변이, 응당 천거했어야 하는데 천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이 삼가 들으니, 후원(後苑)에 영선(營繕)하는 거조가 있다고 합니다.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이 말이 정말입니까? 아, 전하께서는 오늘날이 어떠한 때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늘이 노여움을 보이고 백성들이 원망을 품고 있으니, 지금은 바로 군신 상하가 함께 덕을 닦고 근면하여 하늘의 노여운 마음을 돌리고 백성들의 원한을 풀어야 할 때입니다. 아마도 밝으신 성상께서는 필시 이익이 없는 일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만,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속히 정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의 진언하는 정성을 가상하게 여긴다."
하고,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3월 15일 임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여러 의원들로 하여금 들어와 진료하게 하였다. 제조 김좌명이 아뢰기를,
"상의원(尙衣院) 노비 신주(奴婢身紬)를 흉년으로 인해 헤아려 줄여서, 바치는 것이 겨우 수백 필이니, 상방(尙方) 세공(歲供)의 숫자를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지부(地部)에 저축해둔 주(紬) 5백 필을 해마다 갖다 쓰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진료를 마치고, 상이 좌참찬 송준길, 찬선 이유태를 인견하였다. 이유태가 아뢰기를,
"하찮은 신이 특별한 은혜를 거듭 받아 심지어 가까이 모시는 신하를 신에게 보내어 성상의 유지를 전하게 하기까지 하셨으므로 신은 다만 은혜로운 명에 사례하고 세자의 관례를 보기 위하여 올라왔을 뿐입니다. 물러나 돌아가는 것을 허락해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가 머물기를 바라는 나의 뜻이 전후로 지극히 간절하고, 세자를 도와 가르치는 책임은 참으로 궁관(宮官)에게 있는 것이니, 돌아가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유태가 이어 이전에 올린 상소가 시행되지 않았음을 진달하고, 또 아뢰기를,
"신은 지금 마땅히 돌아가야 하는데, 진달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조정의 큰 기강이 서면 여러 세부 사항들은 절로 잘 되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단지 눈앞의 일만 염려하시고 멀리 내다보는 계책이 없기 때문에 나라 일은 점점 흩어져서 마치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심해지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비록 생각을 정성스럽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더라도,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가지고 보면 여러 신하들은 혹 실천을 하시는 데에 실상이 없는 것이 아닌가 염려가 됩니다. 오늘날 국가가 우선은 형세로 유지가 되고 있습니다만, 만약에 사변이 있게 되면 인심이 흩어지고 일을 어찌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들은 반드시 교화를 근본으로 삼았습니다. 전하께서는 진부한 말이라고 하여 소홀히 여기지 마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달한 말이 모두가 좋은 말이다. 내 마땅히 마음 깊이 새기겠다."
하였다. 송준길이 또 질병을 이유로 물러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경에게 번잡한 직무를 맡기지 않겠다. 의약으로 몸조리를 하면서 서울에 머물러 세자를 도와 가르치도록 하라. 이것이 나의 소망이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지난해 소대(召對) 때에 상께서 분부하시기를, ‘여러 공주들의 집을 지금 새로 지어야 하겠는데, 칸 수를 얼마로 하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대전(大典)》을 상고해 보니, 사우(祠宇)와 행랑(行廊)을 제외하고 50칸이었습니다. 그 뒤에 신이 또 입대하여 ‘중문(中門) 안을 50칸으로 해야 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근래에 대간의 논계가 해를 넘기도록 그치지를 않으니,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대간이 논쟁하는 것이 무엇이기에 상께서 오래도록 따르지 않으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이 논쟁하는 것은, 사당과 행랑을 50칸의 숫자 안에 넣어서 한도를 정하려 하는 것이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상께서 만약 법전의 뜻으로 분명하게 분부를 내리신다면 대간이 무엇 때문에 반드시 끝까지 쟁집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대간의 논계가 바야흐로 한창인데 궁가(宮家)를 짓는 일은 그치지 않아 거의 일이 다 끝나가니, 이것은 대각의 잘못은 적고 전하의 잘못은 큰 것입니다. 정해진 한도를 잘 깨우쳐 주어서 논계를 정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준길이 또 아뢰기를,
"신이 망령되이 김징(金澄)의 일을 진달하여 이처럼 소란스럽게 되었으니, 이것은 신이 말을 삼가지 못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나 수연(壽宴)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일인데 장률(贓律)로써 논핵한다면, 효도를 장려하여 다스리는 정치에 실로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김징이 일찍이 대간으로 있을 때에 매우 많은 사람들을 탄핵하여, 원수를 맺은 사람이 세상에 널려 있어서 이들이 선동하고 무함을 하였는데, 대간은 그 떠돌아다니는 말만 듣고 논핵한 것입니다."
하였다. 도제조 허적이 아뢰기를,
"김석주(金錫胄)의 상소에 있는 이른바 ‘정상을 참작해야 한다.’는 말은, 조정 신하들 가운데 이렇게 말하는 자가 많을 뿐만 아니라, 신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애당초 잘못이 없다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과연 대간이 아뢴 것처럼 군목(軍木)을 두 바리나 실어갔고 은포(銀布)를 많이 꺼내 썼다면, 실로 죄가 있는 것입니다."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진달한 바는 조정의 대체를 가지고 말한 것인데, 대신이 이와 같이 진달하니, 신이 어찌 다시 말하여 일의 체모를 손상시키겠습니까."
하였다.
3월 17일 갑술
밤에 달이 심성(心星) 큰 별을 범하였다.
찬선 이유태가 상소를 올리고 도성을 나갔다. 상이 사관으로 하여금 따라가서, 머물기를 권하는 뜻으로 유지를 전하게 하였다.
3월 18일 을해
정재숭(鄭載嵩)을 승지로, 유연(柳㝚)을 지평으로, 신명규(申命圭)를 부수찬으로, 김수항(金壽恒)을 지경연으로 삼았다.
3월 19일 병자
지평 윤리(尹理)가, 하리(下吏)가 구속되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안태사(安胎使) 민점(閔點)이 아뢰기를,
"두 공주의 태(胎)를 봉안할 때에 백성의 전답 약간이 금표(禁標) 안에 들어가 올해부터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관둔전(官屯田)으로 보상해 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안태(安胎)하는 제도는 고례(古禮)에는 보이지 않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반드시 들판 가운데의 둥근 봉우리를 선택하여 그 위에다가 태를 묻어 보관하고 태봉(胎峰)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곳에 표식을 하여 농사를 짓거나 나무를 하는 것을 금지하기를 원릉(園陵)의 제도와 같이 하였다. 성상에서부터 왕자와 공주에 이르기까지 모두 태봉이 있었으니, 이러한 우리 나라 풍속의 폐단에 대해서 식견있는 자들은 병통으로 여겼다.
생원 윤서적(尹叙績) 등이, 좌참찬 송준길이 돌아가려 한다는 일로 상소하여, 머물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너그럽게 답하였다.
3월 20일 정축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강화 유수 김휘(金徽)도 입대하여, 갑진년008) 이전의 조곡(糶穀)으로서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탕감시키기를 청하였다. 영의정 허적이, 군향(軍餉)이라는 이유로 어렵게 여기니, 상이, 각년의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나열해 기록해서 다시 품계하여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좌참찬 송준길이, 물러나 돌아가게 해주기를 간곡하게 청하니, 상이 위로하며 윤허하지 않았다.
예조가, 기우제를 지내자고 아뢰었다.
3월 21일 무인
남구만(南九萬)을 병조 참지로, 성후설(成後卨)을 승지로, 이지온(李之馧)을 우윤으로, 최후상(崔後尙)을 지평으로, 권격(權格)을 필선으로, 신석번(申碩蕃)을 사업(司業)으로 삼았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좌참찬 송준길을 인견하였다. 상이 준길에게 이르기를,
"어제 이미 내 뜻을 유시하였는데, 들으니 오늘 서연에서 또 물러나 돌아가겠다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지금 경을 인견한 것은 반드시 경을 머물게 하고자 해서이다."
하니, 준길이 사례를 하고 이어 아뢰기를,
"세자가 바야흐로 공부를 해야 하는 날을 만났으니, 잘 가르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옛사람도 이르기를, ‘홀로 배워서는 이루지 못하고, 고루하여 문견이 적게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만약 사대부가의 준수한 자제들을 가려서 함께 지내게 한다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실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주장했던 교육 방법이었고, 우리 나라에서도 건의를 올린 자가 있었는데, 다만 우리 나라는 규모가 좁아서 끝내 시행되지 못했을 뿐입니다."
하고, 승지 남이성(南二星)이 아뢰기를,
"옛날에는 왕세자가 8세에 소학(小學)에 입학하고 15세에 대학에 입학하여 일반 백성들 가운데서 뽑은 준수한 자들과 함께 지냈으니, 역시 이러한 뜻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준길이 또 아뢰기를,
"신이 고향에 있을 때에 전하는 말을 들으니, ‘조정이 존엄하지 않고 체통이 엄숙하지 않은 것이 해마다 더욱 심해져서 장차 수습할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지금 와서 보니 그 말이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반드시 사론(士論)을 넓게 펴지게 하고 공론(公論)을 크게 행해지게 한 뒤에야 나라를 다스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대개 상께서 해를 넘기도록 편찮으시어 신료들을 접견하시는 것이 드물기 때문에 아랫사람들이 맥이 풀리어 이 지경이 된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된 까닭을 살펴서 오늘 한 가지 일을 하고 내일 한 가지 일을 하여 점차로 고쳐나간 연후에야 일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완(李浣)은, 비록 질병은 있으나, 여러 대를 섬기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라를 다스려온 자인데, 지금은 산지(散地)에 있으면서 한 사람의 군관(軍官)도 없으니,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상께서는 깊이 생각하시어 한 지역을 다스리는 임무를 제수하소서. 신의 이 말은 실로 예사롭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였다.
3월 25일 임오
지평 유연이 아뢰기를,
"올해의 가뭄은 전에 없던 바라서 서울에서는 이미 기우제를 지냈습니다만, 외방에는 늘 겨를이 없어서 지내지 못합니다. 지난 무신년 봄에 경연 신하의 건의를 인하여, 민충단(愍忠壇)·강화(江華)·토산(兎山)·금화(金化)·쌍령(雙嶺) 등지에 전쟁에서 죽은 장사(將士)들을 위하여, 거의 모두 특별히 근신을 보내어 치제를 하였습니다만, 임진년 난리에 남원(南原)·금산(錦山)·진주(晉州)·달천(㺚川)에서 전쟁으로 죽은 자들에 대해서는 유독 제사를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사전(祀典)에 있어 매우 큰 흠이 되었습니다. 더구나 재변을 만난 때이니 의당 폐기했던 법전을 다시 거행하여야 됩니다. 근신을 보내어 날을 가려 치제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김징(金澄)의 일은 낭자하게 전파되었으니, 대간이 논계한 것은 바로 그들의 직분일 뿐입니다. 이조 좌랑 김석주는 일찍이 간관으로 있을 때에 홀로 앞장서서 논핵을 하였으니 그 강직한 풍도는 참으로 숭상할 만하나, 자기의 말을 실증하려고 여러 사람들을 끌어다 대었으니, 이런 일은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일의 체모를 크게 손상시켜 물의가 비난을 하니, 김석주를 체차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김석주에게 거론당한 여러 신하들이 다투어 상소하여 변명하기를 마치 송사를 하듯이 하였는데, 정원이 멍청하게도 그것을 받아들였으니, 매우 부당합니다. 해당 승지를 추고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3월 26일 계미
우의정 홍중보, 예조 판서 박장원을 보내어 순릉(純陵)의 봉분을 다시 만들게 하였다. 순릉은 바로 도조(度祖)의 비(妃) 순경 왕후(順敬王后) 박씨(朴氏)의 능인데, 함흥부(咸興府)의 동쪽 30리에 있다.
지평 유연이, ‘승지를 추고하기를 청하면서, 상소 올린 사람을 아울러 논핵하지 않아서 물의에 비난을 당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한 뒤에, ‘도승지 장선징, 사인 이단하(李端夏), 문학 윤계(尹堦) 등이 서로 소장을 올려 다투어 변명한 잘못’을 논핵하면서 추고하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3월 29일 병술
도둑이 명정전(明政殿) 어탑(御榻)의 장막을 훔쳐 갔다. 수직한 군사들이 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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