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2월 1일 무자
형조가 ‘옥리(獄吏)가 죄인과 짜고서 다른 사람을 대신 가두고 그 죄인을 사사로이 풀어준 일’로 죄인과 옥리 및 대신 갇혔던 자를 모두 형추하기를 청하고, 또 옥관(獄官)을 추고하기를 청하니, 상이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윤2월 2일 기축
약방 도제조 허적 등이 의관들을 거느리고 집상전에 들어가 진료하였다. 이어 상이 침을 맞았다. 허적이 아뢰기를,
"유군포(留軍布)를 허록(虛錄)한 일로 죄를 받을 수령이 매우 많습니다. 재임 기간 10개월을 한계로 하여 그 나머지는 따지지 않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달 수로 한계를 삼는 것은 또한 부당하다. 응당 봉납해야 할 날이 재임기간 안에 있었다면 비록 10개월이 차지 않았더라도 죄를 주어야 한다. 만약 11월에 임지에 도착하였다가 이듬해 9월에 체직되어 돌아왔다면 비록 10개월을 지났더라도 그의 죄가 아니다."
하였다. 대개 10월이 봉납을 하는 달이었기 때문에 상의 분부가 이와 같았다.
윤2월 3일 경인
치사(致仕)한 함릉 부원군(咸陵府院君) 이해(李澥)가 죽었다.
사신은 논한다. 이해는 인조 때의 정사 공신(靖社功臣)이다. 이해가 일찍이 부친의 상을 당했을 적에, 그 질부(姪婦)의 저주 때문이라고 의심하여 관청에 고발하기까지 하였으나 마침내 사실이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훈신 최명길(崔鳴吉) 등이 이해를 위해 변명해 주었으나 이 때문에 청의(淸議)에 홀대를 받았다. 그러나 이해는 공훈이 있는 귀족으로 능히 겸손으로 자신을 지켰기 때문에 권력 있는 직위에 쓰이지 않았다. 귓병을 칭탁하고 여러 해를 한가롭게 지내다가 나이 70이 된 뒤에 연달아 소장을 올려 치사하기를 청해 끝내 윤허를 받았으니, 근세의 사대부들이 하지 못하던 바였다.
【태백산사고본】 22책 22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12면
【분류】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논한다. 이해는 인조 때의 정사 공신(靖社功臣)이다. 이해가 일찍이 부친의 상을 당했을 적에, 그 질부(姪婦)의 저주 때문이라고 의심하여 관청에 고발하기까지 하였으나 마침내 사실이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훈신 최명길(崔鳴吉) 등이 이해를 위해 변명해 주었으나 이 때문에 청의(淸議)에 홀대를 받았다. 그러나 이해는 공훈이 있는 귀족으로 능히 겸손으로 자신을 지켰기 때문에 권력 있는 직위에 쓰이지 않았다. 귓병을 칭탁하고 여러 해를 한가롭게 지내다가 나이 70이 된 뒤에 연달아 소장을 올려 치사하기를 청해 끝내 윤허를 받았으니, 근세의 사대부들이 하지 못하던 바였다.
윤2월 4일 신묘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윤2월 5일 임진
민정중(閔鼎重)을 대사헌으로, 이흥발(李興浡)을 집의로, 정시성(鄭始成)을 장령으로, 홍수하(洪受河)를 정언으로, 송준길(宋浚吉)을 좌참찬으로, 정두경(鄭斗卿)을 공조 참판으로 삼았다.
간원이 ‘사재 주부(司宰主簿) 안진익(安震翊)이 저주(詛呪)의 술법을 가지고 여러 사람들을 혼란시켰으니, 이와 같은 요괴스럽고 망령된 사람은 벼슬아치의 반열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사판에서 삭제할 것을 청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니, 상이 파직하라고만 명하였다.
윤2월 7일 갑오
자산군(慈山郡)에 있는 최춘명(崔春命)·홍명구(洪命耉)의 사당에 ‘의열(義烈)’이라고 사액(賜額)하였다.
최춘명은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의 사람이다. 자산 부사(慈山副使)로 있을 때에 몽고(蒙古) 군대가 포위를 하고 공격을 하였는데, 최춘명이 굳게 지키면서 항복하지 않다가 마침내 절의를 지키고 죽었다. 숭정(崇禎)갑술년004) 에 감사 홍명구가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올렸다. 그 뒤 병자년 난리 때에 홍명구도 사절하여, 아울러 그 사당에다 함께 모셨다. 이 때에 이르러 감사 이태연(李泰淵)이 사액하기를 계청하여 드디어 이 명이 있었다.
원주목(原州牧)에 있는 원충갑(元沖甲)·김제갑(金悌甲)·원호(元豪)의 사당에 ‘충열(忠烈)’이라고 사액(賜額)하였다.
원충갑은 고려(高麗) 사람이다. 일찍이 향병(鄕兵)을 모집하여 합단(哈丹)을 격퇴하였는데, 일이 《고려사(高麗史)》에 실려 있다. 임진년 난리에 김제갑은 원주 목사였고 원호는 방어사(防禦使)였는데, 모두 힘껏 싸우다가 굴하지 않고 죽었다. 이때에 이르러 원주의 유생들이 상소하여, 묘액(廟額)을 내려주기를 청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윤2월 8일 을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동지사(冬至使) 민정중(閔鼎重), 부사(副使) 권상구(權尙矩), 서장관(書狀官) 신경윤(愼景尹) 등이 청나라로부터 돌아왔다. 상이 집상전에 나아가 여러 의관들로 하여금 들어와 진료하게 한 뒤에 민정중 등을 인견하였다. 상이 청나라의 사정을 물으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청나라 임금이 보정(輔政)이 죄를 얻은 뒤로부터 아랫사람들을 의심하여 모든 일을 반드시 몸소 세밀하게 살피므로, 나라 사람들이 매우 괴롭게 여기면서 공공연하게 원망하고 욕을 하는데 조금도 기탄이 없습니다. 성품이 또 사냥을 좋아하니 필시 내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경(南京)과 운남(雲南)에 각각 1만 명의 군대를 두고 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남경에 청(淸)병(兵)과 몽(蒙)병(兵) 각각 5천 명을 두고 또 운남에도 많은 군대를 두고서 진지를 지키는 연습을 하며 정경(鄭經)을 방어하고 있는데, 간혹 토적(土賊)이 있으면 또한 이 군대로 격멸을 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묻기를,
"정경은 과연 어느 곳에 있으며 군대의 숫자는 어느 정도인가?"
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바다속 섬 안에 있는데 그 무리가 어느 정도인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묻기를,
"저들이 해선(海船)을 모두 거두어들인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전에는 조운선(漕運船)은 오고갈 수가 있었는데, 지난해부터는 조운선도 운행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물가(物價)가 오르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묻기를,
"다른 나라의 사신도 온 자가 있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다만 회회국(回回國) 사신 세 사람이 왔는데, 복색은 몽고인과 같고 모두 푸른 눈이었습니다."
하였다. 서장관 신경윤이 문견 사건(聞見事件)을 올려 아뢰기를,
"옥전현(玉田縣)에서 사인(士人) 왕공탁(王公濯)을 만났는데, 영력 황제(永曆皇帝)의 일에 대해서 물으니, ‘영력 초에 기대어 의지할 사람이 손가망(孫可望)과 이정국(李定國)이었는데, 이정국이 전쟁에서 패배하여 죽고 손가망은 청나라에 항복하자, 영력이 면전국(緬甸國)으로 도망갔다. 면전의 사람들이 청나라 군대가 이동을 하여 공격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영력을 죽여서 청나라에 바쳤다.’고 하였습니다.
북경(北京)에서 박순(朴順)이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박순은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포로로 잡혀가서 군병이 된 자였습니다. 청나라의 군병 제도에 대해서 물으니, ‘고산(高山)이 모두 여덟인데 그 하나는 황제가 직접 거느리고 일곱은 친왕척속(親王戚屬)이 거느리다가 팔왕(八王)과 구왕(九王)이 죽은 뒤에는 황제가 세 고산을 아울러 거느리고 있다. 또 이른바 하(蝦)라는 자가 1천 명이고 또 이른바 좌은대(佐銀大)라는 자가 5, 6백 명인데, 모두 황제의 호위 친병이다. 다른 고산은 각각 하(蝦) 20명을 거느린다. 한 고산이 거느리는 군대는 통틀어 2천여 명인데 그 가운데 포(砲)를 쏘는 자가 2백 명이거나 3백 명이다. 또 파야다(巴野多)라는 자가 있는데 아주 엄밀하게 선발된 정병(精兵)을 일컫는 이름이다. 이것이 한 고산에 1천 명씩 있다. 보병(步兵)은 1년에 지급하는 은(銀)이 24냥인데 공을 이루면 더 준다. 마병(馬兵)은 48냥을 주는데 공을 세우면 역시 더 준다. 마병과 보병에게 각각 농지 15일경(十五日耕)을 지급하여 그 세금을 거두어서 먹게 한다. 장교(將校)의 1년 봉급은 혹 은 3백 50냥, 혹 1백 80냥, 혹 1백 50냥이다. 옛날에는 단지 여덟 고산만 있었는데 지금은 또 몽고병과 한(漢)병(兵)으로 두 고산을 만들었고 뒤에 점점 증가하여 이제 24고산이 되었다. 매년 2월 15일에 군대를 모아 시험하는 일을 시작하고 5월 1일에 그 일을 마쳤다가 7월 15일에 또 시험을 보여 10월 1일에 마친다. 활쏘기에서 세 발을 맞추지 못하면 태형(笞刑) 25대를 친다. 포쏘기도 또한 그렇게 한다.’ 하였습니다.
경중(京中)의 백성 숫자에 대해서 물으니, ‘경성(京城)은 동서남북이 모두 10리쯤 되고 궁궐이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고 관사가 또 3분의 1이다. 장정의 숫자는 실로 동국(東國)의 도성에 미치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또 정경(鄭經)에 대한 일을 물으니, ‘복건(福建)의 해도(海島) 가운데에 있다. 모두 72개의 섬이 있는데 그중의 한 섬이 길이가 수백 리이고 너비가 70리이다. 이곳이 바로 정경이 있는 곳이다. 지난해 5월에 대신을 보내어 타일렀더니, 「만약 한 성(省)을 떼어서 봉해주고 또 체두(剃頭)를 하지 않고 의관(衣冠)을 입는 것을 조선(朝鮮)처럼 할 수 있게 해 준다면 복종하겠다.」고 하였다. 매양 바닷가 고을에 나와서 노략질을 하기 때문에 바닷가 3백 리가 텅 비어 사람이 없다. 이른바 상왕(相王)이라는 자가 군대를 거느리고 복건에 주둔하여 뜻밖의 사태를 방비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바닷가 일대에는 일체 배를 타고 고기잡는 일을 금지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 몽고 부락의 명칭에 대해서 물으니, ‘영원위(寧遠衛) 북쪽 1백여 리 되는 곳에 곽자공(郭子公)이 있고 광녕(廣寧) 북쪽에 색론공(色論公)이 있고 또 이주옥(伊州玉)이 있고 이주(伊州) 북쪽에 독릉공(獨凌公)이 있고 또 그 북쪽에 답속한(答束汗)이 있고 또 그 북쪽에 환단공(丸單公)이 있고 또 그 북쪽은 오룡강(烏龍江)이다. 그 밖의 부락은 자세히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윤2월 9일 병신
밤에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휘감았다.
관상감이 아뢰기를,
"올 윤2월 16일에 월식(月食)이 있습니다. 네 편의 산법(算法)으로 추론해 보니, 대명(大明) 역법(曆法)에는 월식이 없고 내편법(內篇法)에는 월식의 시작이 유초(酉初) 3각(三刻)에 있으며 외편법(外篇法)에는 월식의 시작이 유정(酉正) 초각(初刻)에 있으며 시헌법(時憲法)에는 월식의 시작이 유정(酉正) 1각(一刻)에 있는데, 세 역법에 월식의 시작이 모두 해가 질 무렵에 있습니다. 달이 뜨면서 월식이 시작되면 보는 대로 구식(救食)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감의 관원으로 하여금 남산(南山)에 올라가 자세히 살피고 있다가 월식을 보면 방화(放火)하게 하여, 즉시 궐정에서 구식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윤2월 10일 정유
통제사(統制使) 유비연(柳斐然)을 잡아다 추문하라는 간원의 논계에 대해서, 오래도록 따르지 않다가 이 때에 이르러 먼저 파직하고 뒤에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지평 이후징(李厚徵)이, ‘부평 부사(富平府使) 최효건(崔孝騫)이 그 읍에 사는 사인(士人) 정재빈(鄭載賓)을 위하여 그 족인(族人)의 전토를 빼앗아 주었으니, 사사로움을 따르고 직무를 제대로 보지 못했음’을 논핵하여, 파직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정재빈은 장령 정시성(鄭始成)의 아들이다. 정시성도 이 일로 인피하였는데 말이 매우 잡스러웠다. 그 뒤에 이후징이 또 ‘정시성이 피혐한 말에 자신을 공격한 것이 있다.’고 하면서 인피하기를, ‘처음에 정시성을 곧바로 논핵하지 않았으니, 대각의 체모를 잃었습니다.’라고 하고, 곧바로 ‘정시성이 아들로 하여금 남의 전토를 빼앗게 한 죄’를 논핵하여, 파직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최효건의 일을 두 번째 아뢰니, 먼저 파직하고 뒤에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면천(沔川)의 노비 계원(戒元)과 옥천(沃川) 사람 옥금(玉今)을 정표(旌表)하였다.
계원은 얼음이 꺼져 물에 빠진 그의 아우를 구하려고 물에 뛰어들었다가 함께 빠져 죽었고, 옥금은 나이 열일곱으로 그의 집에 불이 나자 어미를 구하려고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 속에 뛰어들어 어미를 업고 나오다가 함께 타 죽었는데, 도신이 치계하여, 정려(旌閭)한 것이다.
부호군(副護軍) 이유태(李惟泰)와 이상(李翔)이, 세자 관례 때에 특별한 부름을 받은 일로, 감당할 수 없다는 뜻을 상소로 진달하였는데, 상이 굳이 사양하지 말고 속히 올라오라고 명하였다.
윤2월 11일 무술
오시(午時)부터 저녁 무렵까지 사방이 깜깜하여 마치 먼지가 내리는 것 같았다.
평안도에 여역이 크게 번졌다.
윤2월 12일 기해
상이 집상전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제조 김좌명(金佐明)이 아뢰기를,
"경상도 수령 가운데 유군포(留軍布)를 바치지 않은 자에 대해서, 10동 이상은 잡아다 추문하여 죄를 정하고 9동 이하는 경중을 나누어 결장(決杖)하라고 이미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1, 2동을 거두지 않은 자는 장(杖) 60을 치고 3, 4동은 장 80을 치고 7, 8동은 장 90을 치고 9동을 거두지 않은 자는 장 1백을 치되 지방 관직에 있는 자는 영문(營門)에서 장을 치고 서울에 있는 자는 금부(禁府)로 하여금 장을 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헌납 김석주(金錫胄)가, ‘전에 안진익(安震翊)을 논핵할 때에 들으니, 안진익이 일찍이 전 참봉 박승후(朴承後)와 원한 맺은 일이 있어서 항상 해치려고 하였으며, 저주(詛呪)를 하기까지 한 것이 사람들에게 발각이 되었는데, 그 글씨가 적힌 종이쪽지가 바야흐로 박승후의 손에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도 박승후를 잡아다 추문할 것을 아울러 계청하지 않았으니, 일을 논한 것이 소루하였다.’고 하면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그 뒤에 사간 이단석(李端錫), 정언 윤리(尹理), 대사간 김우형(金宇亨)도 이 일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윤2월 13일 경자
강백년(姜栢年)을 예조 참판으로, 민정중(閔鼎重)을 우부빈객으로, 송규렴(宋奎濂)을 부교리로, 경최(慶㝡)를 장령으로, 황준구(黃儁耉)를 가자(加資)하여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김경(金鏡)을 통제사(統制使)로 삼았다.
정릉(貞陵)을 수개(修改)한 공로로, 호조 판서 김수흥(金壽興)에게 자급을 올려주고 그 나머지에게는 혹 말을 하사하기도 하고 승진시켜 서용하기도 하여 각각 차등있게 논상하였다. 혼각(魂閣) 및 재실(齋室)을 중건(重建)한 일로, 예조 참판 윤집(尹鏶), 참의 이준구(李俊耉)에게 모두 자급을 올려주고, 낭청(郞廳) 및 감조관(監造官)은 혹 승진시켜 서용하기도 하고 혹 직책을 옮겨주기도 하였다. 내관 서후행(徐後行)에게도 자급을 올려주었다.
내관이 각종 영선(營繕)을 감독하는 일은 본래 옛 법례가 아니라 근래에 생긴 말세의 폐단이다. 그런데 도감(都監)의 여러 신하들과 상을 같이 받았으니, 더욱 외람된 일이다. 이 당시에 환관들이 자못 설치어, 명을 받고 나오면 조사(朝士)들을 깔보고 억눌렀으며 심지어 삼공(三公)과 대등한 예를 행하기까지 하였다. 공경(公卿) 가운데 무식한 자들은 그에게 정성을 바쳐 잘보이려고 하는 자도 있었고, 온갖 관사가 그들의 기세를 외조(外朝)의 공경 재상들보다 더 두렵게 여겼다. 환관들이 일을 꾸미는 조짐이 꼭 여기에서 비롯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신덕 왕후(神德王后)를 태묘(太廟)에 부묘할 때의 초헌관(初獻官) 허적(許積)에게 안구마(鞍具馬)를 하사하고, 아헌관(亞獻官) 이하에게는 각각 말을 하사하고, 여러 집사(執事)들에게는 모두 차등있게 논상하였다. 부묘 도감 도제조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에게는 안구마를 하사하고, 제조 판서 박장원(朴長遠)·정지화(鄭知和)·민정중(閔鼎重), 도청(都廳) 이민서(李閔敍)·남이성(南二星), 제주관(題主官) 오정일(吳挺一)에게는 모두 자급을 더해주고, 그 아래의 여러 집사들에게는 모두 차등있게 논상하였다.
윤2월 14일 신축
지평 이후징이, ‘정시성(鄭始成)을 죄주기를 청할 때에 말이 마땅함을 잃어서 물의에 비난을 받았다.’고 하면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윤2월 16일 계묘
월식이 있었다.
윤2월 17일 갑진
이익(李翊)을 대사간으로, 윤변(尹抃)을 사간으로, 송규렴(宋奎濂)을 헌납으로, 김덕원(金德遠)을 정언으로, 홍억(洪億)을 지평으로, 김우형(金宇亨)을 예조 참의로, 이지무(李枝茂)를 형조 참의로, 김석주(金錫胄)를 수찬으로 삼았다.
정언 홍수하(洪受河)가 다시 아뢰기를,
"전 주부 안진익(安震翊)은 파직시키는 벌만으로는 그의 죄를 징계하기에 부족하고, 만약 그가 무함을 당한 것이라면, 박승후(朴承後)에게는 자연 남을 무함한 죄가 있게 됩니다. 안진익과 박승후를 모두 잡아다 문초하여 그들의 죄를 바루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윤2월 18일 을사
상이 집상전에 나아가 명하여, 여러 의원들을 들어와 진료하게 하였다. 약방 제조들도 입시하였다. 제조 김좌명이 아뢰기를,
"상께서 일찍이 각도의 군병의 숫자가 얼마인지를 하문하셨었는데, 성상의 뜻이 사람들에게 조총(鳥銃)을 지급하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전임 병조 판서로 있을 때에 각도에 조총을 지니지 못한 군사에 대해서 질문을 보냈는데 각도에서 이제 모두 보고를 올려왔기에, 그 가운데 마땅히 더 만들어 나누어 주어야 할 자들에게는 병조로 하여금 외방의 장수(匠手)를 불러모아 만들어서 지급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의 생각으로는, 삼남(三南)의 장수(匠手) 중에도 아주 기술이 정밀한 자가 많으니, 굳이 서울에서 만들어 보낼 것은 없다고 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도 병사(兵使)로 하여금 몇 자루를 정밀하게 제조하여 보내게 해서 간품(看品)하여 선택하도록 하고, 도감(都監)에서 이미 일을 시작한 것은 서울에서 만들어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당시에 대동법(大同法)이 이미 시행되어 월과 조총(月課鳥銃)의 값을 모두 대동청에서 지급하고 각도에서는 일정한 숫자의 월과 조총을 만들어내야 했는데, 각 도감이 그 조총 값을 이익으로 여겨 매양 청하여 서울에서 만들어 보내고 그 값을 대동청에서 받았다. 그 때문에 김좌명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
상이 승지 장선징에게 이르기를,
"송 판부사(宋判府事), 송 삼재(宋三宰), 이 찬선(李贊善)이 모두 오지 않았으니, 지금 다시 ‘세자의 관례(冠禮)를 이미 물렸으니 반드시 빠른 기한 내에 올라오라.’는 뜻으로 특별히 사관을 보내어 유지를 전하게 하라."
하였다.
상이 유신(儒臣)들을 높여 예우하였기 때문에 모두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았으니, 뜻이 매우 성대하다. 그러나 이유태 같은 사람은 경학(經學)과 행의(行誼)가 송시열에게 견줄 바가 못 되었는데도 존중하여 예우함이 뒤섞여 베풀어졌으니, 사람들이 분수넘는 일이라고 하였다.
윤2월 19일 병오
상이 집상전에 나아가 뜸을 맞았다.
윤2월 21일 무신
상이 또 뜸을 맞았다.
윤2월 22일 기유
이휴징(李休徵)을 장령으로, 안진(安縝)을 판결사로, 이정기(李廷夔)를 대사성으로 삼았다.
윤2월 23일 경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여러 재상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예조 판서 박장원에게 이르기를,
"경상 감사가 조금 전에 ‘백수증(白受繒)을 증직(贈職)하고 정려(旌閭)하고 그의 자손을 녹용(錄用)할 세 가지 일’로 예조에 청하여, 이미 복계를 하였다.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박장원이 아뢰기를,
"신이 젊을 때에 영남(嶺南)에 오가면서 그 사람을 보았는데, 등 뒤에 새긴 글자가 여전히 있었습니다. 세 가지 일은 비록 허락치 않더라도 각별히 포상(褒賞)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병조 판서 김좌명이 아뢰기를,
"이미 충신으로 정려가 되었으면 자손은 절로 녹용이 됩니다. 세 가지 일을 모두 허락하는 것은 지나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단지 정려하는 것만 허락하였다.
이보다 앞서 경상 감사 민시중(閔蓍重)이, 백수증이 절의를 지킨 데에 대한 정장(呈狀)을 치계하기를,
"백수증은 양산(梁山) 사람입니다. 열 아홉 살 때에 임진년 난리를 만나 적에게 잡히게 되자, ‘차라리 이씨 왕조의 귀신이 될지언정 개돼지 같은 놈들의 신하가 되지는 않겠다[寧爲李氏鬼不作犬羊臣]’라는 열 글자를 등에다 새겼습니다. 적이 항복시키고자 하여 끓는 물에 담그며 위협을 했으나 끝내 굽히지 않자, 왜인(倭人)들이 의롭게 여겨 석방하여 돌려보냈습니다. 광해조 때에는 길에서 흉소(凶疏)의 통문(通文)을 만나자, 곡을 하면서 찢어버렸고, 인조조 때에 경연 신하의 계달로 인하여 자여 찰방(自如察訪)에 제수되어 죽었습니다."
하였었는데, 이 때에 박장원이 그 정장을 상께 계품하여 이 명이 있었다.
이조 판서 조복양이 아뢰기를,
"통진(通津)의 사인(士人) 민성(閔垶)은 곧 여양군(驪陽君) 민인백(閔仁伯)의 아들입니다. 병자년 난리 때에 절의에 죽은 자가 12명이나 되는데도 민성 하나만 정표를 받았고 그 나머지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 고을 사람들이, 증직하지 않은 것과 자손을 녹용하지 않은 것을 허전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민성의 자손을 거두어 서용하라."
하였다. 조복양이 또 아뢰기를,
"고 참판 윤집은, 정릉 중건청(貞陵重建廳) 당상으로 죽은 뒤에 가자하는 명이 있었습니다. 이전부터 이러한 경우에는 으레 품계를 올려 증직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품계를 고쳐 추증(追贈)하라."
하였다.
충청도 정배 죄인 손진축(孫震軸) 등 5명이 배소에 이르기 전에 사면령이 있었다. 감사 이숙(李䎘)이, ‘사면하는 글 가운데, 배소에 이르지 않은 경우는 모두 사면한다는 글이 있다.’고 하여, 방면하는 명단에 넣었는데, 형조가 복계하여 계문대로 석방시키자고 청하니, 상이, ‘배소에 이르지 않은 자에 대해서 도신이 석방을 청할 수 없다.’고 하여, 특별히 명하여 감사 이숙을 파직하고 형조의 당상과 낭청을 추고하게 하고서 손진축 등은 모두 그대로 정배하였다.
윤2월 24일 신해
경기 교동(喬桐)에서 이달 21일에 지진이 있었다.
윤2월 25일 임자
이정기(李廷夔)를 대사헌으로, 오정위(吳挺緯)를 우윤으로, 이단하(李端夏)를 사인으로, 강백년(姜栢年)을 대사간으로, 이홍연(李弘淵)을 충청 감사로, 남이성(南二星)을 승지로 삼았다.
호조가 아뢰기를,
"지난해에 태안(泰安)의 남쪽과 북쪽에 안민창(安民倉)을 설치하고 두 창(倉)에 영운 감역(領運監役) 두 사람을 차견하였고 또 본조의 낭청 한 사람을 보내어 받아들여 배에 싣는 것을 검칙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대개 처음 시작할 때의 점검을 위한 것이었지 해마다 매번 보내고자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올해에는 낭청을 파견하지 마소서. 또 조선(漕船)이 원산(元山)에서 점검을 받는 것을 5월 10일까지로 이미 날짜를 물렸으니, 영운 감역은 그 때에 가서 파견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윤2월 26일 계축
눈이 내렸다. 오시에 우박이 내렸다.
판중추 송시열, 좌참찬 송준길, 찬선 이유태가 모두 소명을 사양하였다. 상이 다시 사관을 보내어 올라오라고 유시하였다.
윤2월 28일 을묘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약방으로 하여금 의관을 거느리고 들어와서 진료하게 하였다.
이준구(李俊耉)를 예조 참의로, 이단하(李端夏)를 겸보덕으로, 홍주국(洪柱國)을 겸필선으로, 신익상(申翼相)을 겸설서로, 김석주(金錫胄)를 겸문학으로, 이하(李夏)를 헌납으로, 송규렴(宋奎濂)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송규렴은 홍문록에 든 일로 서필원에게 논박을 당한 뒤로, 옥당과 전조에 여러 차례 제수되었으나 받지 않고 시골 고향에 있은 지가 여러 해였다.
경기 통진현(通津縣)에서 이달 23일에 지진이 있었다.
윤2월 30일 정사
시강원(侍講院)이 아뢰기를,
"왕세자의 관례 뒤에 백관들이 하례를 드리게 되어 있는데, 궁관(宮官)들만 이 예가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또 《대명집례(大明集禮)》를 상고하니 ‘황태자가 관례를 마치면 궁관이 동궁에 나아가 하례를 드린다.’는 글이 있습니다. 이번에도 이 예를 거행해야겠는데, 백관이 하례드리기 전에 궁관이 먼저 하례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해조로 하여금 품의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현종개수실록22권, 현종 11년 1670년 4월 (0) | 2025.12.06 |
|---|---|
| 현종개수실록22권, 현종 11년 1670년 3월 (0) | 2025.12.06 |
| 현종개수실록22권, 현종 11년 1670년 2월 (0) | 2025.12.06 |
| 현종개수실록22권, 현종 11년 1670년 1월 (1) | 2025.12.06 |
| 현종개수실록22권, 현종 10년 1669년 12월 (0) | 2025.1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