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정해
경상 감영(慶尙監營)의 이사(吏舍)에 불이 나서 오래 물려 내려온 문서가 모두 불탔다. 서울의 각사로 하여금 경상도와 주고받았던 문서를 등사해내서 그 도의 감영에 보내주도록 하였다.
도승지 장선징이 전에 ‘총융사 서필원(徐必遠)이 여러 차례 상소를 올리고 출사하지 않아서 군정(軍政)이 오래도록 폐기되어 염려가 된다.’고 상의 앞에서 진달하였는데, 그 뒤 서필원의 사직 상소에 ‘척리(戚里)에게 청탁을 했다는 비방을 받았다.’고 하였다. 장선징이 이에 상소하여 면직시켜 달라고 청하였는데,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충청도에 전염병이 크게 번졌고, 황해도에는 큰 가뭄이 들었다.
4월 2일 무자
좌참찬 송준길이 상소하여 시골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청하였는데, 상이 부드러운 말로 답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당시에 김징(金澄)의 일로 인하여 논의가 날이 갈수록 더욱 떠들썩해졌는데, 준길이 앞장서서 김징을 구원했었기 때문에 스스로 불안하여 물러가기를 청한 것이다.
4월 3일 기축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니, 약방이 들어와 진료하였다. 눈병 때문이었다.
평안 감사의 치계를 인하여, 중화(中和)의 침몰한 배의 쌀과 콩 5백 30석, 양덕(陽德)의 받아들이지 못한 조곡 2백 60석을 탕척하였다.
4월 4일 경인
장령 이휴징(李休徵)이, ‘도둑을 놓친 포도 대장 이여발(李汝發)의 죄를 지난번에 논핵하였는데, 해조가 조사를 한 뒤에 「대각의 논계가 실상을 잃었다.」고 하였다.’라고 하면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4월 5일 신묘
제주(濟州)에 전염병이 크게 번졌다.
4월 7일 계사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평안도 창성(昌城)·선천(宣川)·이산(理山)·박천(博川)·가산(嘉山) 등의 고을에 3월 25일 서리가 내렸다.
4월 8일 갑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4월 9일 을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으로 들어갔다.
민정중(閔鼎重)을 형조 판서로, 정창도(丁昌燾)를 장령으로, 윤지선(尹趾善)을 지평으로, 이규령(李奎齡)을 교리로, 최후상(崔後尙)을 부수찬으로, 정적(鄭樍)을 사서로, 윤가적(尹嘉績)을 설서로, 김만균(金萬均)을 사인으로, 김우형(金宇亨)을 승지로, 장시규(張是奎)를 경상 좌수사로 삼았다.
또 이옥(李沃)을 지평으로 삼고, 장령 정창도를 개성 경력(開城經歷)에 잉임시키고, 이섬(李暹)을 장령으로, 정익(鄭榏)을 예조 참의로 삼았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여러 차례 기우제를 지내어 비록 조금 비가 내리기는 하였으나 농사에는 이익됨이 없으니 매우 염려가 된다."
하니, 우상 허적이 아뢰기를,
"요즈음 내린 비로 양맥(兩麥)이 겨우 소생하였으나 파종[付種]은 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금부에 죄수들이 많이 정체되어 있는 것을 걱정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기우재계(祈雨齋戒) 때문에 비록 개좌(開坐)할 수는 없으나, 회계(回啓)하는 공사(公事)는 속히 처결하시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였다. 병조 판서 김좌명이 아뢰기를,
"경상도 유군포(留軍布)를 군사들에게 상을 주는 데에 사용하고 있는데, 매양 30동씩을 각 영장(營將)에게 나누어주어, 순시할 때에 포(砲)를 쏘아 명중시킨 자에게 상으로 주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계속 잇대기도 어렵고 착실하게 거행하는 효과도 없습니다. 이제 3동을 나누어주어, 두 발 이상을 명중시킨 자에게만 상으로 주게 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우참찬 이경억(李慶億)이 아뢰기를,
"전일 평안 감사의 장계에 ‘강변의 육진(六鎭) 및 의주(義州)에 보충되어 입방(入防)을 하는 자들 가운데 시노(寺奴)가 많으니, 한결같이 북도처럼 하여 신공을 면제하소서.’ 하였는데, 그 장계가 오래도록 계하되지 않아 감히 여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평안도는 북도와는 차이가 있으니 절반만 줄여 주라."
하였다.
대사간 이만영(李晩榮), 장령 이하(李夏) 등이, ‘공주 집의 칸 수와 집터의 크기를 한결같이 정해진 제도에 따라서 할 일’로 연계하여 힘껏 쟁론하니, 상이 이르기를,
"50칸으로 제도를 정하는 일은 결코 할 수가 없다. 비록 1년 내내 쟁집을 하더라도 따르기 어려울 듯하다. 신궁(新宮)이라면 의당 대신들과 더불어 다시 의논하여 제도를 정할 것이다."
하였다. 좌참찬 송준길이 아뢰기를,
"전일 성상의 분부에 ‘사당과 창고를 제외하고 50칸으로 제도를 정하겠다.’고 하셨는데, 오늘의 전교는 어찌하여 이전과 같지 않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의 일의 형세가 이전과 다르기 때문이다."
하였다. 대개 성상의 뜻은, 선조의 공주는 신공주(新公主)와 제도를 같게 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여러 신하들이, 제도를 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을 힘껏 진달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문 안을 50칸으로 제도를 정하였다면 비록 한두 칸 제도를 넘은 것이 있더라도 안 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내외의 행랑 이외에는 다시 더 짓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송준길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별로 덕을 잃은 일이 없는데도 하늘의 재앙이 극심하고 또 이토록 가뭄이 들었으니, 어찌 매우 두려워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일이 모두 하늘의 뜻에 맞았다면 재변이 이와 같을 리가 없습니다. 나라 일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대신에게 한번 물어보시고, 성상께서도 그 잘잘못을 스스로 헤아려 보소서. 신이 일찍이 장로(長老)의 말을 들으니, ‘세종대왕께서는 「5, 6일을 신하들을 만나지 않으면 임금과 신하 사이에 정의가 미덥지 못하게 된다.」고 하시며 신료들을 인접하시기를 거의 하루도 거른 날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경연도 열지 않으시고 신료들을 인접하시는 것도 드무니, 실로 조종의 덕에 부끄러움이 있는 것입니다."
하고, 부제학 이민적(李敏迪)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들으니, 금중(禁中)에 토목(土木)의 역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대간이 비록 이미 진달하였습니다만, 과연 이런 일이 있었다면 하늘을 두려워하며 반성을 하는 도리가 전혀 아닙니다. 그리고 호적에 빠진 수천 명은 모두가 무식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인데, 일시에 변방으로 이사를 시킨다면 가는 길에 엎어져 죽는 노약자들이 필시 많이 생길 것입니다. 살리기 좋아하는 덕에 있어서는 더욱 측은하게 여겨 돌보아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정처없이 귀양을 가는 자들이 이와 같이 많은 것도 역시 국가의 복이 아닙니다."
하였는데, 정태화가 아뢰기를,
"호적에 빠진 자들에 대해서 아직 문서를 상고하지 못했습니다. 소결청(疏決廳)으로 하여금 문서를 가져다 상고하여 속히 품정하여 결정을 짓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얼마 전에 사면령을 반포하였으나, 가뭄의 재앙이 이와 같으니, 경옥(京獄)에 현재 갇혀 있는 죄수들을 소결하고자 한다. 금부와 형조의 당상들은 각각 문서를 가지고 내일 와서 기다리게 하라."
하였다.
4월 10일 병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경옥의 죄수들을 소결하였다. 입시한 사람은, 대신, 삼사, 금부, 형조의 당상이었다. 상이 판의금 김좌명(金佐明)을 시켜 죄인들의 문안(文案)을 읽게 하였는데, 영선(英善)의 일에 이르러 의금부 당상들이 각자의 소견을 진달하자 상이 대신들에게 물었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유휘 첩의 어미가 밤낮없이 올라와 뇌물을 주었다는 말을 사람들이 모두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만약 서찰을 서로 주고받은 일이 없었다면 무엇 때문에 올라와 뇌물을 쓰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남녀가 서로 간음했는지는 비록 알 수 없으나 서찰을 서로 주고받은 일은 있다고 여겨집니다. 사인(士人)의 아내로서 어찌 얼숙모(孼叔母)009) 의 남편과 서로 서찰을 주고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좌상 허적이 아뢰기를,
"사족의 부녀로서 음란한 행실이 있는데 요행히 죄를 면한다면 이는 형법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는 것이며, 그런 일이 없는데 누명을 쓴다면 이는 지극히 억울한 일입니다. 명백하게 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영선의 사람됨을 물으니, 김좌명이 아뢰기를,
"사족의 부녀같지 않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영선의 사람됨을 물은 것은 그 사람이 필시 단정치 못하기 때문에 남에게 의심을 받아 이런 근심을 초래했을 것이라고 여겨서이다. 진실로 음란한 행실이 있었다면 반드시 남에게 발각되었을 것인데 간음한 것을 직접 본 자가 없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였다. 한광(韓洸)의 일에 이르러 상이 대신들에게 물었다. 영중추 이경석이 아뢰기를,
"죽은 자의 죽음이 한광 때문이었기는 하나, 그 실정을 살펴보면 죽이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목숨으로 보상케 한다면 어찌 옳은 일이겠습니까."
하였다. 태화 및 판중추 정치화의 뜻은 이경석과 같았다. 허적이 아뢰기를,
"의도가 있었든 없었든 살인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법으로 논한다면 의당 살인한 죄로 죄주어야 하지만 사형을 감해 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하고, 좌참찬 송준길은 아뢰기를,
"영선의 옥사에 대해서는 허적이 진달한 것이 신의 생각과 같고, 한광의 일에 대해서는 정치화가 진달한 것이 신의 생각과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금부 당상과 삼사에게 물으니, 다들 죽이는 것은 부당하다고 아뢰었다. 상이 사형을 감하여 정배시키라고 명하였다. 김징의 일에 대해, 이경석이 아뢰기를,
"부모를 위해 잔치를 베푼 자가 장죄(贓罪)를 받기까지 한다면 지나친 일입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에는 김징이 필시 하늘의 재앙을 받은 것이라고 여깁니다. 전하께서 위로 두 자전(慈殿)을 위해 잔치를 열려고 할 때에 그가 발론하여 정지시켰는데, 지금 자기 어미의 수연은 크게 베풀었으니, 어찌 신명이 벌을 내리지 않겠습니까."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김징이 부모를 위해 잔치를 베푼 것으로 죄를 받는다면 부당한 일입니다만, 그렇다고 조금도 과실이 없다고 한다면 불가한 일입니다."
하였다. 송준길이 아뢰기를,
"김징의 일에 대해서는 신이 이미 진달하였습니다만, 참으로 억울한 일입니다. 김징이 평소 강직하였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많은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얽어 무함하고 선동하여 일시에 떼 지어 공격을 해대는 것입니다. 대간이 들은 풍문도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전에는 어버이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가 죄를 얻은 자가 없었습니다. 삼가 성스러운 조정을 위해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하고, 우참찬 이경억이 아뢰기를,
"풍문은 다 믿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차라리 장법(贓法)에 실형(失刑)을 할지언정 효리(孝理)의 교화를 손상시켜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다들 깊이 죄주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허적이 홀로 아뢰기를,
"사람들이 들은 것이 각기 달라, 김징을 공격하는 말과 김징을 구원하는 말이 크게 다릅니다. 그러나 군목(軍木) 두 바리를 사용한 것은 매우 옳지 못한 일입니다. 어찌 전연 죄가 없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참작하여 법을 쓰기가 과연 쉽지 않다."
하였다. 송준길이 아뢰기를,
"상께서 이런 일에 대해서 이처럼 어렵게 여기신다면 시비와 사정(邪正)에 이보다 큰 일이 있을 때에 어떻게 변별하시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어렵게 여기는 것은 은백(銀帛)과 군목에 대한 말이 허실이 분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그렇다면 조사가 끝나기를 기다려 처리하는 것이 옳겠습니다만, 신이 향곡에서 들은 바로는, 은백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가 무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은 우선 파직시켜 놓아 보내고, 조사가 끝나기를 기다려 처리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여러 신료들이 모두들 그렇게 하자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파직시켜 놓아 보내고 조사한 보고서가 올라온 뒤에 회계하라."
하였다. 박이명의 일에 이르자 상이 김징과 마찬가지로 논죄할 것을 명하고, 그 나머지 죄수들은 파직시키기도 하고 삭직시키기도 하여 놓아 보냈다. 금부 당상이 물러나자 형조 당상을 입시하도록 하였다. 죄수를 소결하여, 방면된 자가 30여 명이었고, 죄가 중한 자는 정배하였다. 부제학 이민적(李敏迪)이 아뢰기를,
"지금 재변을 만나 두려워해야 하는 날에 화기(和氣)를 손상시킬 만한 일이 있기에 감히 아뢰겠습니다. 강석규(姜錫圭)는 살인죄를 짓고 사형이 면제된 자로서 죄명이 비록 무거우나, 여러 해 먼 외방에 유배되어 있는 동안 잇달아 부모의 상을 당하였는데도 장례를 치르지 못하였습니다. 들은 자들이 불쌍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여러 대신들에게 물어서 처리하소서."
하였는데, 준길 및 여러 대신들이 모두들 관대한 은전을 베풀어야 한다고 하자, 상이 이르기를,
"특별한 은전을 써서 석방하도록 하라."
하였다. 송준길이 또 아뢰기를,
"신도 아뢸 일이 있습니다. 송지렴(宋之濂)은 화순 현감(和順縣監)으로 있을 때에 사람을 죽인 추관(推官) 때문에 죄를 받아 일찍이 제주도에 귀양을 갔는데, 여러 해 뒤에 비로소 양이되었습니다. 이것은 직접 살인을 한 것과는 다르니, 이렇게 널리 은전을 베푸는 날에 조금이라도 용서해 주어야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감등시키라고 하였다. 대사간 이만영(李晩榮)이 아뢰기를,
"서울의 각 아문과 외방의 감영·통영에 비축되어 있는 각 곡물을 묘당으로 하여금 시급히 방법을 강구하여 즉시 방출시켜서, 곤궁한 백성들이 농사를 그르쳐 굶어죽는 시체가 구렁을 메우게 될 근심이 없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호서의 양전(量田)한 여러 고을이 낼 대동미(大同米)를 우선 예전 결수(結數)에 따라 거둬들이게 한 것은, 실로 위를 덜어 아래에 더해주려는 아름다운 정치에서 나온 것이니, 수령된 자는 의당 백성을 위하려는 조정의 뜻을 체득하여 신중히 봉행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새로 양전한 여러 고을에 간혹 새 결수에 따라 거둬들인 자가 있다고 합니다.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명확하게 조사하여 보고하게 한 뒤 무겁게 죄를 결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박이명이 마음대로 군목(軍木)을 꺼내어 김징(金澄)에게 보낸 일은 이미 자복하였으니 국법으로 논죄한다면 만장(滿贓)일 뿐만이 아닙니다. 이는 받는 자와는 죄질이 아주 다르니, 완전히 용서해 줄 수 없습니다. 박이명은 다시 율문을 상고하여 죄를 결정하소서."
하니,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비록 대간의 말이지만 잘못되었습니다. 받은 자가 명분이 있었다면 준 자만 유독 명분이 없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김징을 장률로 죄주지 않았는데 박이명만 장률로 다스린단 말인가? 법에 준 자와 받은 자는 죄가 같다는 조문이 있다. 박이명의 죄가 김징보다 무겁다고 말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하였다. 파하고 나간 뒤에 상이 이르기를,
"대사간 이만영은 박이명의 일에 대하여 논의가 괴이하다. 일의 체모로 헤아리건대 놀라울 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폐단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체차하라."
하였다. 정원이 그 명을 도로 거둘 것을 계청하였으나, 상이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일렀다. 이경석(李景奭)이 차자를 올려 또한 이를 말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그날 경도 함께 그의 말을 들었다. 그것을 과감히 말하는 것이라고 하겠는가? 체차시키는 것은 진실로 가벼운 벌이다."
하였다.
응교 홍주삼(洪柱三)을 충주(忠州)에, 교리 이훤(李藼)을 금산(錦山)에 보내, 전사한 장졸들을 제사하게 하였다.
지평 이옥(李沃)이 직함을 띠고 고향에 내려갔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상이, 가뭄이 너무나 심해 상규(常規)만 지키고 있을 수는 없다고 하여, 특별히 대신을 보내어 종묘 사직 및 북교(北郊)에 기우제를 지내게 하였다.
4월 11일 정유
비가 올 듯한 형세가 그치지 않으므로 기우제를 정지하였다.
사간 윤변 등이 아뢰기를,
"이번 김징과 박이명의 죄는 의당 그 허실을 살펴서 명백하게 처리해야 하는데, 어제 소결에서 파직시키고 석방하라는 명이 있기까지 하였습니다. 조사 보고서가 올라오지 않아 죄명이 명백하지 않은데 지레 먼저 감옥에서 내보내는 것은, 실로 옥사를 처리하는 체모가 아닙니다. 조처가 마땅함을 잃었고 뒤폐단에 관계되니, 김징과 박이명을 파직시키고 내보내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비망기를 보건대, 대사간 이만영을 특별히 체직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준 자와 받은 자는 죄가 같아 본래 차별이 없는 것인데도 유독 박이명에게 대해서만 율을 상고하여 죄를 주자고 청하여, 창졸간에 일을 논하면서 비록 잘 살피지 못한 흠이 있기는 합니다만, 성상께서 대간을 대우하시는 도리에 있어서는 너그럽게 포용해 주어야 참으로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견하는 자리를 파하자마자 갑자기 노여움을 발동하여, 괴이하다고 지척하시고 또 특별히 체직시키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평소 성상께 소망하던 바이겠습니까. 언관을 꺾어버리는 것은 실로 청명한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대사간 이만영을 특별히 체직한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는데,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4월 12일 무술
신명규(申命圭)를 집의로, 윤리(尹理)를 지평으로, 이익(李翊)을 참지로, 이유(李柚)를 보덕으로 삼았다.
장단(長湍)의 유생 김광적(金光績) 등이 상소하여,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 이색(李穡), 문경공(文敬公) 김안국(金安國), 고 참판 김정국(金正國) 등을 함께 향사하는 서원의 액호(額號)를 청하였는데, 상이 그 일을 해조에 내렸다.
중일(中日) 유엽전(柳葉箭) 쏘기에서 다섯 발을 명중시킨 겸사복 김진익(金振益)을 전시에 곧바로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4월 13일 기해
사간 윤변이 인피하며 아뢰기를,
"신은 어제 동료들과 함께 이미 대사간 이만영을 특별히 체직한 명을 환수하기를 청하였는데, 동료들의 의논이, ‘이미 환수하기를 청하였으면 또한 그 논계하던 것을 연계해야 마땅하다. 박이명과 김징은 다르게 논해서는 안 된다. 조사가 끝나기도 전에 가벼이 먼저 석방하는 것은 체례로 보아 불가한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대사간의 의논을 옳게 여긴 것이 아니라 말하는 자를 기를 꺾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단지 환수하게 하고자 했을 따름인데, 동료들의 의논이 거듭 발론되어 신이 제 주장을 지키지 못하고 이에 동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들으니, 물의가 모두 그르게 여깁니다.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헌납 정화제도 인피하며 아뢰기를,
"김징과 박이명을 석방시키라는 명을 환수하라는 계청을 신이 동료들과 함께 어제 이미 논계하였는데, 또 들으니 바깥 의논이, ‘대사간 이만영이 탑전에서 아뢴 것은 크게 간관의 체모를 잃은 것이니, 특별히 체직하는 명이 없었더라도 오히려 논박하여 바로잡아야 마땅한데, 환수하기를 강청하였으니 아주 구차한 일이다.’하였습니다. 일을 논한 것이 잘못되었으니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정언 김덕원(金德遠)도 이것으로 인피하였다. 헌부가 모두 체차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각의 처치가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 매우 놀랍고 괴이하다."
하였다. 이에 지평 유연, 장령 이섬(李暹)·이하(李夏) 등이 엄한 비답을 받았다는 이유로 서로 잇따라 인피하였다.
4월 14일 경자
부제학 이민적(李敏迪) 등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이만영의 말은 오르락 내리락하여 의논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김징 등을 논하는 일은 마침 크게 사면하는 때를 당했으니 굳게 고집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처치한 말이 참으로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지는 못했으나 대의는 좋은 것입니다. 비록 엄한 비답을 받았으나 이것으로 혐의해서는 안 됩니다. 헌관 유연 등을 출사시키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간원의 여러 신료들에 대해서 체차할 것인지 출사시킬 것인지가 정해지지 않아 아직 명백한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속히 지휘를 내리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지금 처치한 것을 보건대, 말이 아주 형편없으니, 매우 놀랍고 괴이하다. 대각의 논의와 소결하는 논의는 예로부터 합치되지 않았다. 이것을 일러 굳게 고집한다고 하여 체차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오늘날의 일은 참으로 한심하다. 김징과 박이명은 두 죄수일 뿐인데, 어째서 삼사의 논의가 하나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그 까닭은 알 수 없다. 정화제와 김덕원은 출사케 하고 나머지는 모두 체차하라."
하였다. 그 뒤에 정화제와 김덕원도 모두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경기의 양주(楊州) 등 여덟 고을에 이달 6일 우박이 내려, 밀과 보리가 손상을 입었다.
평안도 위원(渭源)에 3월 26일에 이틀 밤을 연이어 서리가 내렸고, 영원(寧遠)에 이달 6일에 서리가 내리고 눈이 왔으며, 평양(平壤)·은산(殷山)·삼등(三登)·성천(成川)·중화(中和)·순천(順川)·순안(順安)·강동(江東) 등의 고을에 이달 7일에 우박이 내려서 싹이 튼 각종 곡식과 삼[生麻]·목화들이 모두 손상을 입었다.
4월 15일 신축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4월 16일 임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이유태(李惟泰)를 이조 참의로, 심유(沈攸)를 사간으로, 조한영(曺漢英)을 우윤으로, 이수언(李秀彦)을 검열로, 김좌명(金佐明)을 지경연으로, 윤원거(尹元擧)를 진선으로, 박세당(朴世堂)을 지평으로, 경최(慶㝡)와 이광적(李光迪)을 장령으로 삼았다.
4월 17일 계묘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금군(禁軍)이 가지고 있는 관마(官馬)와 사마(私馬) 6백 35필과 별군직(別軍職)의 말 13필에 대해서, 병조가 아뢰어, 1개월 마초가(馬草價)로 포(布) 1천 9백 44필을 지급하였다.
좌참찬 송준길이 하향하였다. 정원이 아뢰니, 상이 하교하기를,
"들으니, 좌참찬이 이미 강을 건넜다고 한다. 마음이 놀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승지는 속히 도착한 곳에 가서 나의 뜻으로 유시하여 들어오게 해서 내가 면대하여 처리할 수 있게 하라."
하였다.
4월 18일 갑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달무리가 지고 달이 남두성(南斗星)으로 들어갔다.
중일 기추(中日騎芻)에서 다섯 발을 명중시킨 겸사복 이득승(李得承)과 유엽전(柳葉箭) 쏘기에서 다섯 발을 명중시킨 한량(閑良) 양계홍(梁戒弘)에게 모두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좌참찬 송준길이, 상이 특별히 승지를 보내어 부른 것에 대해서 상소를 올려 사례하고 아뢰기를,
"신은 글귀나 다루는 하찮은 사람으로 여러 조정을 모시고 강론하였으나, 어찌 일찍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만한 의논, 은미하고 오묘한 것을 밝혀내는 학문, 잘 깨우쳐 인도하는 공효가 있었겠습니까. 지금 우리 세자는 훌륭한 자질이 어릴 적부터 드러나 학문의 성과가 일찍 떨쳐져 시강하는 여러 신료들이 매양 물러나서는 서로 축하를 합니다. 신도 역시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어찌 차마 갑자기 사퇴하여 영원히 서연(書筵)에서 멀어져, 덕기가 완성되고 학업이 성취되는 것을 보지 않겠습니까. 다만 천박한 신은 머물러 있어도 이익될 것이 없고 떠나가도 손해될 것이 없는 몸인데, 노병이 이토록 심하여 엎어지며 길을 나서게 된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자세히 살피시고 어서 신의 직명을 체직하시어 신으로 하여금 편한 마음으로 머물러 몸조리하며 마음놓고 처신할 수 있게 해 주소서."
하니, 상이, 한번 만나고 싶다는 뜻으로 다시 승지를 보내어 유지를 전하게 하였다.
4월 19일 을사
경상도 의성(義城)·의흥(義興) 등지에 이달 8일에 서리가 내렸으며, 의흥에는 9일에 우박이 내렸다.전라도 금산(錦山)에 서리가 내렸다. 양남이 모두 심하게 가물었다.
4월 21일 정미
장령 이광적(李光迪)이 직책을 띤 채 하향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좌참찬 송준길을 인견하였다. 상이 준길에게 이르기를,
"내가 이미 경에게 병이 있음을 알지만, 만난 지 오래지 않아 갑자기 또 물러갔기 때문에 억지로 머물도록 하고자 한 것이다."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사례를 하지 않고 떠나면 마음에 편치 않을 것이기 때문에 지금 신이 다시 들어왔으니, 단지 직접 뵙고 사례를 하고 떠나고자 한 것입니다. 몸은 초야에 있으면서 이름이 조적(朝籍)에 올라 있으면 나라의 체모로 보아 옳지 않습니다. 신의 직명을 체직하여 신으로 하여금 편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 주소서. 이것이 신의 소망입니다."
하였다. 상이 또 재삼 머물기를 권유하였으나 준길도 머물 수 없다는 뜻을 힘껏 진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마음에 매우 실망스럽다만, 경이 이미 돌아가기로 결심하였으니, 비록 만류를 하더라도 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승지 장선징이 아뢰기를,
"준길이 바야흐로 세자를 보도하는 책임을 맡고 있으니, 이것을 이유로 만류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또 준길에게 이르기를,
"경이 있을 때에는 세자에게 개발되는 도움이 있는 듯하였다. 이런데도 좀더 머물지 못하겠는가?"
하였다. 준길은 끝내 병을 이유로 머물수 없다고 하였다. 장선징이 아뢰기를,
"패초에 나오지 않은 대간을 체직하지 않는 것이 비록 폐단을 바루고자 하는 것이나 도리어 소란만 일으켜 폐단이 날로 심해집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미 나오지 않은 죄를 범하고서 이에 도리어 나오지 않은 다른 사람을 조감(照勘)하는 것은 또한 염치를 손상시키는 것입니다. 지금 이후로는 패초에 나오지 않은 자는 전례대로 파직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른 관원들과 같이 일체로 추고하라."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무릇 직책을 지닌 채 고향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2, 3일 길을 가는 것을 말한다. 더러 교외로 가기도 하고 더러는 강 밖으로 나가기도 하는데, 이것으로 대간을 체직하는 것은 일이 매우 부당하고 뒤폐단에도 관계가 있다. 지금 이후로는 가까운 경기 지방으로 나가서 직책을 띤 채 하향하였다고 핑계대며 인피하는 것은 봉입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4월 22일 무신
민점(閔點)을 승지로, 박장원(朴長遠)을 지경연으로, 박세당(朴世堂)을 헌납으로, 이규령(李奎齡)을 집의로, 유헌(兪櫶)·홍수하(洪受河)를 지평으로, 윤지선(尹趾善)을 정언으로, 정중휘(鄭重徽)를 장령으로, 신명규(申命圭)를 교리로 삼았다.
집의 이규령이, ‘일찍이 공주의 집을 짓는 일로 논란하던 때에, 탑전에서 망령되게 법에 벗어나는 말을 진달하여 대간의 탄핵을 거듭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4월 23일 기유
전라도 운봉(雲峰)·장수(長水) 등지에 밤마다 계속 서리가 내려 각종 곡식을 손상시켰다.
4월 24일 경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좌참찬 송준길(宋浚吉)을 인견하였다. 이때 여러 승지들이 모두 면대를 청하여 입시하여 준길을 만류하고자 하였다. 도승지 장선징이, 세자를 보도하는 일이 급하니 지금 준길이 떠나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니, 상이 이르기를,
"개인의 사정이 절박하기 때문에 거듭 그러한 뜻을 참아가며 허락을 해야겠다."
하니, 준길이 사례하며 아뢰기를,
"신이 외람되이 여러 조정의 은혜를 입었고 산림에서 고고하게 지내는 처사는 아닌지라 세자가 관례를 하는 때에 마지 못하여 올라왔습니다만, 질병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조금도 억지로 머물 수가 없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예전에 선조(宣祖)께서 이황(李滉)을 부르자, 기대승(奇大升)이 아뢰기를, ‘이황이 오면 특별한 예우를 지나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반드시 마음이 편치 못하여 오래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상께서는 은혜와 예우가 천고에 뛰어나시니 이 때문에 더욱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러나 신이 어찌 영원히 폐하를 사직할 뜻을 가지겠습니까."
하였다. 파하려 함에 상이 명하여 술을 내렸다. 준길이 나가니, 상이 두 도(道)로 하여금 말을 지급하게 하고, 내의(內醫)로 하여금 약물을 싸가지고 따라가게 하였다.
살피건대, 효종 이후로 산야의 처사를 우대하는 것이 전고에 뛰어나, 특별한 예우를 진실로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준길이 마음이 편치 못하여 이러한 청을 한 것이다. 예전에 선조 대왕께서 선정신 이이(李珥)에게 하문하시기를, ‘성혼(成渾)의 사람됨이 어떠한가?’라고 하자, 이이가 대답하기를 ‘혼자서 경제(經濟)를 담당하는 것이라면 잘할 것이라고 감히 말하지 못하겠으나, 그로 하여금 경연에 출입하며 상을 보도하게 한다면 보탬이 어찌 적겠습니까.’ 하였다. 성혼도 그러하였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겠는가. 세속이 자세히 살피지 못하고 왕왕 배해(裵楷)같이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요구하니, 이 때문에 준길 등이 조정에 있는 것을 더욱 불안하게 여겼다.
4월 25일 신해
홍만용(洪萬容)을 대사간으로, 김만균(金萬均)을 집의로, 홍처대(洪處大)를 병조 참의로, 신익상(申翼相)을 주서로, 민정중(閔鼎重)을 동지경연으로 삼았다.
정언 윤지선(尹趾善)이 아뢰기를,
"병조 참판 임유후(任有後)는 비록 글재주가 있으나 일찍이 집안의 변고를 만나 크게 신상의 누가 되었으며, 조정에 나와서도 이력이 없었습니다. 병조의 참판이 된 것도 이미 매우 분수에 지나친 것인데, 성균관과 사간원의 장관에 의망되기까지 하여 사람들이 놀랍게 여깁니다. 체차하소서. 이조의 담당 관원을 아울러 추고토록 명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고 이조만 추고하라고 하였다.
4월 26일 임자
대사간 홍만용이, 본원이 지금 공주 저택의 일을 논핵하고 있는데 그의 아비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의 집 규모도 국가의 제도를 넘었기 때문에 감히 동참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4월 27일 계축
다시 중신을 보내어 종묘·사직·북교(北郊)에 기우제를 지냈다.
4월 28일 갑인
강백년(姜栢年)을 대사간으로, 홍만용(洪萬容)을 호조 참의로 삼았다.
남편을 죽인 죄인 애상(愛相)이 자복하고 처형되었다. 죄인이 살던 양주(楊州)의 전 목사 박정(朴烶)을 파직하였다. 능침이 있는 고을이기 때문에, 읍호를 강등하지는 않았다.
원양도(原襄道) 원주(原州) 등 여섯 고을에 우박의 재난이 있었다.
4월 29일 을묘
평안도에 가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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