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9권, 현종 5년 1664년 7월

싸라리리 2025. 12. 10.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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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경인

헌부가 간원을 처치하여, 정언 신후재(申厚載)·정륜(鄭錀)은 체차하고, 헌납 장선징(張善澂), 대사간 이홍연(李弘淵), 사간 이준구(李俊耉)는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따랐다.

 

7월 2일 신묘

우창적(禹昌績)을 지평으로, 정창도(丁昌燾)·윤심(尹深)을 정언으로 삼고, 전 판관(判官) 이상검(李尙儉), 전 현감(縣監) 이태선(李泰先)·원장길(元長吉)·안시성(安時聖)·강탁(姜逴), 전 현령(縣令) 이경의(李敬義)를 통정(通政)의 품계에 가자하였다. 이에 앞서 상이 하교하여 나이 80세로서 누락된 자를 해조로 하여금 찾아 아뢰게 하였기 때문에 이 여섯 사람을 뽑아 아뢴 것인데, 모두 가자를 명하였다. 윤심을 제주(濟州) 시재 어사(試才御史)로 삼았다.

 

이조 좌랑 이유상(李有相)을 하옥하였다. 이에 앞서 유상이 병을 앓고 있었고 본조에 다른 낭관(郞官)도 없어 끝내 숙직을 거르게 되자, 상이 정원에 하교하여 그 병세의 위중 여부를 물었다. 동부승지 이원정(李元禎)이 아뢰기를,
"유상의 병세를 신이 직접 볼 수 없어 하리(下吏)에게 물은 결과, 한질(寒疾)은 조금 차도가 있으나 계속 이질(痢疾)을 앓아 출입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성 안에 있는 사대부 병세의 위중 여부는 실로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닌데, 하리의 말만 믿고 알 수 없다고 하니 너무 나태하다. 또 이질이란 것이 다리를 절어 기동할 수 없는 증세인가."
하였다. 원정이 또 추고한 다음 재촉하여 임무를 보게 할 뜻으로 아뢰니, 상이 금부에 분부를 내린 것이다.

 

동부승지 이원정을 하옥하고 상이 정원에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일렀다.
"나라의 기강이 비록 해이해졌다 하나 어찌 오늘날처럼 극심한 적이 있었겠는가. 이조 낭관의 일을 두세 번 하문하였으나 끝내 실상을 모른다고 대답하였으니, 임금을 기만하고 국법을 무시함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다. 이를 다스리지 않으면 뒤 폐단을 막기 어려우니 해당 승지를 나문하여 조처하라."

 

도승지 남용익(南龍翼), 좌승지 권대운(權大運), 우승지 이경억(李慶億) 등이 아뢰기를,
"이번에 이원정이 하문을 받고 즉시 실상으로 대답하지 못한 것은 실로 그 까닭이 있습니다. 대개 원정은 시골에서 성장하고 계속 외임에 나가 있었으므로 이유상과 본래 생소하여 병의 경중을 실로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두세 번 하문한 후에 끝내 하리의 말로 대답한 것은 비록 진실치 못한 감이 있으나 그 본심을 따져 보면 필시 다른 뜻이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기만으로 죄목을 만들어 나문까지 하라고 하시니 이 어찌 성세(聖世)의 과중한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화평한 마음으로 위엄을 풀고 나문의 하명을 도루 거두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원정은 비록 이유상과 생소하다 치더라도 온 나라 사람이 모두 이유상과 생소하단 말인가. 번거로이 말하지 말라."
하였다.

 

헌릉(獻陵)의 정자각(丁字閣)을 중건하였다.

 

7월 3일 임진

대사간 이홍연은 이행진(李行進)의 일을 논하지 않아 대간의 체면을 떨어뜨렸다는 이유로, 장령 이유(李秞)는 처치를 마땅하게 못하였다는 이유로 모두 인피하자, 헌납 장선징, 사간 이준구, 지평 장건(張鍵) 또한 잇따라 피혐하였다. 장령 이관징(李觀徵)이 처치하여 모두 체차할 것을 청하자, 상이 따랐다.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홍명하(洪命夏)·허적(許積)이 모두 이원정의 억울한 실상을 말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우부승지 김수흥(金壽興)이 상소하기를,
"근래 조정의 체통이 크게 무너져 공의가 펴지 못하고 게을리 빈둥거리며 구차히 시일만 보내고 있습니다. 위에서는 문서 처리를 차질 없게 하는 것을 유능하다 하고 미세함을 세밀히 살피는 것을 숭상하고 있으며, 밑에서는 무사 안일을 제일로 삼고 구차히 죄벌을 면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대부분 원대함을 경영하는 생각이 없고 억지로 미봉하는 정책이 많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강건한 성상의 힘을 분발하시어 뭇 관리를 격려하고 대신(大臣)을 신임하고 대각(臺閣)을 선임하여 시들어 가는 습속을 일신함으로써 조정이 스스로 존엄해지게 하고 기강이 스스로 진작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너의 정성스런 성의를 내 몹시 가상히 여긴다. 진술한 일은 마땅히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조치하게 하리라."
하였다.

 

7월 4일 계사

허적(許積)을 호조 판서로, 심재(沈梓)를 부수찬으로, 오두인(吳斗寅)을 집의로, 김수흥(金壽興)을 대사간으로, 정륜을 헌납으로, 홍만용(洪萬容)을 지평으로, 윤순지(尹順之)를 좌참찬으로, 김수항(金壽恒)을 우참찬으로, 김만균(金萬均)을 부교리로, 송시철(宋時喆)을 사간으로, 윤원거(尹元擧)를 장령으로, 윤비경(尹飛卿)을 좌부승지로, 강유(姜秞)를 우부승지로 삼았다.

 

대사간 김수흥이 추고를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경상 감사 이상진(李尙眞)이 치계하기를,
"신은 진휼의 어려움을 경험하고 나서 나라에 비축이 없는 것이 큰 걱정이 됨을 알았습니다. 진휼하는데도 그러한데 불행하게 병난을 만나 군량이 없으면 어떻게 제도하겠습니까. 더구나 이 남쪽 변방은 따스한 바람이 불어올 때 외적의 환이 있는 법인데, 여름철에 쌀을 다 방출한다는 것은 더욱 원대한 계책이 아니고 국사에 관계되므로 실로 작은 일이 아닙니다. 만약 현재의 곡식에서 그 절반씩만 저축하면 군량과 진휼에 있어서도 뜻밖의 일에 대비하여 쓸 수 있고, 민간에서 항상 괴롭게 여기는 많은 방출미의 폐단도 함께 없앨 수 있습니다. 명년부터 절반은 방출하고 절반은 창고에 유치하는 일을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조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복계하여 치계에 의해 시행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경상도 각읍의 진휼에 쓸 미곡에 대해 특명으로 세미를 견감해 주고, 주리고 병든 백성에게 받을 조적(糶糴)에 대해서도 모두 모곡(耗穀)을 면제해 주었다. 감사 이상진의 청을 따른 것이다.

 

7월 5일 갑오

행 호조 판서 허적이 네 차례나 호조의 장(長)이 됨을 혐의로 들어 체직을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7월 6일 을미

이경휘(李慶徽)를 대사간으로, 윤집(尹鏶)을 이조 참의로, 민유중(閔維重)을 교리로 삼았다.

 

7월 8일 정유

이준구(李俊耉)를 집의로, 오두인(吳斗寅)을 수찬으로, 홍만용(洪萬容)을 교리로, 김수흥(金壽興)을 병조 참지로, 이진(李𥘼)을 호조 참의로, 장건(張鍵)을 지평으로, 김익경(金益炅)을 좌부승지로 삼았다.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희정당(熙政堂)에서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전라 감사의 장계를 보니, 전주 등의 고을에 수재가 혹심하여 익사자가 50여 명에 이른다고 하니, 전토의 손실은 이를 미루어 알 만합니다. 또 전주부 안의 사직단(社稷壇) 근처에 땅이 무너질 염려가 있다고 하니 더욱 놀라고 두렵습니다. 성상께서도 필시 놀라셨을 것입니다만, 특별히 더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시라는 뜻을 진달하고자 요상(僚相)과 의논하려고 빈청(賓廳)에 모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재가 난 곳이 한 군데뿐만이 아니나, 전주(全州)·진안(鎭安) 등 고을이 더욱 참혹하여 한두 읍의 인명 피해가 이렇게까지 많으니 몹시 마음이 아프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이는 재변중에서도 큰 재변인데 풍재·수재는 그 반응이 가장 빠릅니다. 재이를 막는 방법은 경계하여 방심하지 않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재변이 없는 풍년에도 방심할 수 없는데, 더구나 흉년이 든 이 때를 당하여 재변이 이와 같으니 어찌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어사를 파견하는 일에 대하여 일찍이 묘당(廟堂)이 의논하여 조처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만, 서관(西關)뿐만 아니라 여러 도에 파견하지 않은 지 또한 오래되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이 어사에 적합한 사람을 뽑아 써서 들이라."
하였다. 명하(命夏)가 아뢰기를,
"경기는 대동 사목(大同事目)을 반포한 후에 파견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러면 서도에 먼저 보낼 것인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결정하여 보내소서."
하고, 태화가 또 아뢰기를,
"김수항이 북도에서 시재(試才)하는 일로 근래에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남도가 인물이 가장 번성하니, 사명을 받은 신하가 남도에 머물러 문무 과거 응시자를 모으면 자연히 물정을 탐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에 들으니 변방을 순시하는 것으로 말한다 하는데 소문이 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감사에게 내린 교서(敎書) 중 ‘변방의 성을 순시하라.’는 말을 ‘모든 인재를 시취(試取)하라.’는 것으로 고쳤으니, 인재를 시취할 때 또한 물정을 탐지하여 올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경상 감사 이상진의 장계 중에 ‘동래(東萊)에서 대구(大邱) 사이에 성을 쌓을 만한 곳에 쌓고자 하였는데 신이 체직되어 돌아가게 되었으니, 새 감사가 내려간 후 그로 하여금 참작하여 조처하게 하기를 청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일이 몹시 중대하므로 상진이 올라오기를 기다려 서서히 의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밀양(密陽)은 예로부터 방어사(防禦使)를 두었고 성지(城池)의 수축도 몹시 수월하므로 무신(武臣)을 차임하여 보내고자 하나 갑자기 무신을 보낼 수는 없습니다. 문관 중에서 선택하여 보내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진주성(晋州城) 안은 물이 매우 부족하기 때문에 병사 황도창(黃道昌)과 상의하여 살펴본 다음, 곡성(曲城)을 개축하고 돌을 파 물을 끌어들여 물이 부족한 염려가 없게 하고자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새 감사 및 병사에게 분부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인동(仁同) 천생 산성(天生山城)을 폐지하였으면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신 또한 그 산성을 보았는데 지세가 높고 물이 없어 수비할 만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하니, 상이 그곳의 형세를 물었다. 동지(同知) 유혁연(柳赫然)이 아뢰기를,
"행군할 때 숙박할 수는 있으나 오래 머물 수는 없습니다."
하고, 병조 판서 김좌명(金左明)은 아뢰기를,
"이미 축조한 성이라 버리기 아깝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잠시 숙박하더라도 급박할 때 사용할 수 있을 것인데 버릴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병영(兵營)을 영천(永川)으로 옮기자고 청한 의도는 왜경(倭境)과 좀 멀리 떨어진 데다가 설치하려고 한 것입니다만 신의 생각에는 적을 방어하는 방법은 비록 변방에 병영이 있더라도 군사를 조련하여 굳건히 지키면 된다고 봅니다. 어찌 반드시 내지로 끌어들여야만 막을 수 있겠습니까. 병영의 이동 설치는 부당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적이 만약 병자년처럼 날뛴다면 비록 좀 먼 곳으로 옮기더라도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질병가(疾病家)038)  를 짓는 것이 만약 부당한 일이라면 애초부터 짓지 말았어야 하고, 이것이 만약 할 만한 일이라면 대신(臺臣)의 일시적 아룀으로 인하여 그 일을 도로 중지하는 것은 부당한 처사인 것 같습니다. 그대로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만수전(萬壽殿)을 지을 때 기둥 한 개, 돌 한 개 옮겨 쓰는 것을 어찌 모두 정원(政院)에 말한 적이 있었던가. 근래에 궐 안에 질병이 잦아 3전(三殿)의 나인들이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오느라 도로에 줄지어 있으므로 부득이 이 계책을 세운 것인데, 대신이 불가하다고 하는구나. 나는 미세한 일로 욕을 본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민시중(閔蓍重)이 질병가를 짓는 것이 불가하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만약 상의 명령이라면 모두 정원을 거쳐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니, 그의 의도 또한 그르지 않습니다."
하였다.
예조 판서 홍중보(洪重普)가 상의 핵환(核患)이 차도가 있다 하여 고묘(告廟)의 예를 행하자고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조 판서 박장원이 아뢰기를,
"신은 견문이 고루한데다가 마침 동석(同席)이 모두 비어 있는 때를 당하였습니다. 그래서 주의(注擬)할 적마다 늘 인재의 결핍에 고심했는데 가선(嘉善)에 이르러는 결핍이 더욱 극심하여 도목 정사에 임해 구차하니 마땅히 변통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뽑아 아뢰어 승진시킨 전례가 있으니 당상 중 적합한 사람을 대신으로 하여금 뽑아 아뢰게 하라."
하고, 상이 홍중보에게 이르기를,
"신풍 부원군(新豊府院君)의 묘소를 이장할 때 예장(禮葬)에 관한 모든 일을 전례에 의거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경상 감사 이상진이 도내 요새에 성을 구축할 것을 논하였는데 그 대략에,
"동래에서 대구 사이에는 하나의 성지(城池)도 없습니다. 적이 만약 상륙하게 되면 그 형세는 마치 무인지경처럼 쳐들어올 것이니, 이것이 임진년과 정유년에 혹독한 병화를 입은 원인입니다. 동래의 일은 앞서 이미 계문하였거니와, 동래에서 곧장 1백 20리 거리에 밀양부(密陽府)가 있습니다. 부성(府城)의 소재가 실로 상류 지역의 요충으로 지형이 험절하며 강물을 끼고 있는데, 그 방수(防守)의 형세가 산성(山城)에 비할 만합니다. 비록 성안에 식수가 부족하나 남문의 좌측이 바로 강 언덕이므로 성벽이 끝나는 곳을 파서 하나의 숨은 수문을 만들어 놓고 물을 끌어 저장하면 물은 언제나 도도히 흘러들어 끊임이 없을 것입니다. 지세가 이와 같은데도 버린 채 설비하지 않으니 이 얼마나 애석한 일입니까. 그 다음은 경주읍(慶州邑)이 또 하나의 요해처이니, 마땅히 관방을 설치하여 울산(蔚山)에서 상륙하는 적의 길을 막아야 합니다. 그 다음은 영천군(永川郡)으로서 경주와의 거리가 70리이고 밀양과의 거리가 1백여 리인데, 그 읍이 산기슭에 있어 식수가 풍족하고 사면의 형세는 방어할 만한 곳이니 만약 여기에 성을 쌓는다면 또한 관방(關防)이 되기에 족한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대구부(大丘府)는 사통 오달(四通五達)의 땅이니 비록 평지에 있으나 큰 관방을 만들 수 있습니다. 성을 견실하게 쌓고 못을 깊이 판다면 어찌 평지라 해서 지키지 못하겠습니까. 동래·밀양·경주·영천에 모두 성진(城鎭)을 만들어 바둑과 솔밭처럼 포진하여 서로 의지하는 형세를 만든다면, 남쪽 변방의 대비는 이보다 더 나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또 논하기를,
"좌병사(左兵使)는 울산에 바다를 끼고 진을 설치하였지만, 각 고을의 군병이 멀리 배후에 있으므로 이들이 모이기 전에는 곧 군사가 없는 장수입니다. 갑자기 적을 만나게 되면 오직 단신으로 당해내야 하므로 부질없이 죽거나 도망칠 뿐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병영을 영천으로 옮기고 이어 관방을 만드는 것이 병법에 맞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묘당(廟堂)이 주저하다 시행되지 않았다.

 

비국이 종부시 정 김만기(金萬基), 사복시 정 오시수(吳始壽), 교리 민유중(閔維重), 부교리 홍만용(洪萬容), 이조 좌랑 여성제(呂聖齊), 병조 정랑 박세당(朴世堂), 헌납 정륜, 부사직 신후재(申厚載) 등 8인으로 어사의 감을 뽑아 아뢰라는 명에 응하였다.

 

7월 10일 기해

상이 목뒤에 조그마한 부스럼이 나서 양심합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7월 11일 경자

어제 의관(醫官) 유후성(柳厚聖)이 선조의 묘소에 사초하기 위해 휴가를 청하니, 상이 말을 내주라는 명을 내렸다. 이날 좌부승지 윤비경(尹飛卿)이 아뢰기를,
"후성이 품계는 비록 높으나 이는 의관에 불과합니다. 의관에게 말을 내리는 것은 전에 없었던 법이니 오늘날 비로소 창출할 수 없습니다. 하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말을 하사하는 일은 실로 한 때의 은전에서 나온 것이다. 무슨 지장이 있겠는가."
하였다.

 

대신이 뽑아 아뢴 당상 중에 승탁에 적합한 자는 다섯 사람이었다. 이는 전일 인견할 때 이조 판서 박장원이 종2품에 사람이 없다고 아뢰자, 상이 묘당에 명하여 뽑아 아뢰게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이유태(李惟泰)·이경휘(李慶徽)·이정기(李廷夔)·김수흥(金壽興)·이진으로 하명에 응하였다.

 

정지화(鄭知和)를 도승지로, 이구원(李久源)을 우윤으로, 이경휘를 부제학으로, 남용익(南容翼)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구원은 광해군 때 흉적에게 붙어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였다. 이에 이르러 연로하다고 승진시켜 이 직을 제수하니, 물의가 해괴하게 여기었다.

 

7월 14일 계묘

정언 윤심(尹深)이 소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 상소에 아뢰기를,
"신이 고루한 소견만 고집하다 시론에 적응할 줄을 몰랐습니다. 조성보(趙聖輔)가 서필원(徐必遠)의 파직을 청할 때 신이 처치하여 체직을 청하였으며, 그가 외임에 보직되었을 때에는 신이 또 환수(還收)하자는 의논을 정지시켰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거듭 시론에 거슬리고 많은 물의를 초래하여 재차 탄핵을 당하였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전의 일은 이미 끝났으나 여론이 아직도 격렬하여 시배(時輩)들이 보고 미워합니다."
하였다.

 

충청도의 석성(石城)·이산(尼山)·부여(扶餘)·은진(恩津)·연산(連山) 등의 고을에 소의 역질이 다시 번져 1백여 두가 죽었다.

 

함경 감사 서필원이 무상으로 곡물을 지급하여 도내의 주린 백성 1만 5천 3백여 인을 구제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원정(李元禎)에게 줄 장형을 면제하라고 명하였다. 원정이 하옥된 지 10여 일에 금부가 장 팔십 도 이년(杖八十徒二年)으로 죄를 결정하였으나, 도(徒)는 공무상 실책한 죄라고 속죄해주고 장형만 적용하였다. 영상 정태화, 우상 홍명하가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원정이 승지로서 구속된 지 이미 반달이 지났는데도 아직 장형을 감해주는 은전을 입지 못하였으니, 측근을 우대하는 뜻에 결함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장형을 면제하라고 명한 것이다.

 

7월 15일 갑진

용담현(龍潭縣)에 큰물이 져서 개울물이 넘쳐서 산골의 전토가 모두 패이고 묻혔으며, 열두 채의 가옥이 떠내려 가거나 묻히고 언덕이 무너져 사람들이 깔려 죽었다.

 

7월 16일 을사

정치화(鄭致和)를 대사헌으로, 조수익(趙壽益)을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수익은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깨끗하게 하는 사람으로서 일찍이 소를 올려 윤선도(尹善道)와 조경(趙絅)을 신구하다가 당시 무리들의 비위를 크게 거슬려 심한 탄핵을 입었다. 이로부터 여주(驪州)의 강가에 은거하여, 비록 직명이 내려도 번번이 병으로 사양하고 나오지 않았다.

 

7월 17일 병오

헌부가 박형(朴泂)에 대해 의논해 처분한 명령을 도로 거두라고 계속 아뢴 지 한 달이 넘었는데, 이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윤허를 받았다.

 

7월 18일 정미

대신의 건의로 광해(光海) 때의 재신(宰臣) 임연(任兗)의 관직을 회복하였다. 임연은 본래 탐욕스런 자로 형제와 집안에서 재물 싸움을 하여 심한 지탄을 받고 사람들에게 천시를 받았다. 광해가 임해군(臨海君)을 죽일 때 임연은 당시 대관(臺官)으로서 공로를 세워 익사(翼社)의 훈공에 책록되고, 또 현명한 재상 이덕형(李德馨)을 공격하기에 힘을 아끼지 아니함으로써 그 뒤에 품계가 올라 풍안군(豊安君)에 봉해졌다. 무오년039)  에 명나라 군사를 도와 건주(建州)의 오랑캐를 토벌할 때 임연이 광해의 뜻에 영합하여 윤휘(尹暉)와 함께 화의를 주장함으로써 사람들이 몹시 분개하였다. 계해년040)   초에 대신(臺臣)이 그를 추론하여 관작을 삭탈하고 윤휘는 양사(兩司)가 함께 발론하여 멀리 귀양보내자고 청하였으나 겨우 중도(中道)에 정배되었다. 뒤에 다시 방면받아 서용되자 또 권력자에게 아부하여 관직이 판서에까지 이르러서 죽었다. 임연은 신원되지 못하고 40여 년 동안 죄안에 있다가 이에 이르러 그 아들 임의백(任義伯)이 경상 감사로 부임하면서 소를 올려 원통함을 호소하니, 상이 그 소를 하달하였다. 이조 판서 박장원(朴長遠)이 대신에게 문의하게 하였다. 대신 정태화·홍명하가 모두 아뢰기를,
"임연과 윤휘는 그 죄가 동일한데 윤휘는 즉시 서용의 은택을 입었으나, 임연은 이미 죽었다고 하여 그 죄명이 아직 죄인 명부에 남아 있습니다. 우로(雨露)의 은택을 내림에 있어 죽은 사람과 살아있는 사람에게 차이를 두지 않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의론에 따를 것을 명하였다. 의백이 태화와 친밀하여 그의 문객이 되고, 또 명하와도 인척 관계로 친하기 때문에 임연에게 관작이 회복된 것이었다.
사신은 논한다. 윤휘가 당초 수용된 것이 이미 공의가 아니었으니, 어찌 윤휘로 본을 삼아 임연에게 다시 과오를 범해서야 되겠는가. 전후 제신이 모두 사정에 이끌려 청의(淸議)를 끊어버린 일을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9책 9권 4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424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 역사-편사(編史)


[註 039] 무오년 : 1618 광해 10년.[註 040] 계해년 : 1623 광해 15년.
사신은 논한다. 윤휘가 당초 수용된 것이 이미 공의가 아니었으니, 어찌 윤휘로 본을 삼아 임연에게 다시 과오를 범해서야 되겠는가. 전후 제신이 모두 사정에 이끌려 청의(淸議)를 끊어버린 일을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7월 19일 무신

처음에 대관(臺官)이 내관(內官) 김희안(金希顔)의 직을 파할 것을 청하자, 상은 추고만 하라고 명하고 또 송인(訟人) 이충준(李忠俊)을 형조에 이송하여 형조로 하여금 엄히 조사할 것을 명하였다. 또 형조의 계목(啓目)에 의하여 특별 재결을 내린 것이 극히 준엄하여, 담당 당상·낭청을 모두 무겁게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충준 및 궁노(宮奴)의 공사(供辭)가 들어가자, 상이 또 궁노의 공사 중 ‘충준이 궁가에 돌입하여 비복들을 끌어내고 명관(名官)에게 청탁하였다.’는 등의 말을 거론하고 특별 재결을 내려, 각별히 엄형을 가해 실정을 알아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문서를 의심이 없다고 판결해 주었다 하여 담당 당상과 낭청을 추고하라 하고 숙녕 옹주(淑寧翁主)의 집을 관장하는 내관을 뽑아 서용하게 하였다. 이에 충준(忠俊)·계생(繼生)이 함께 형신을 받았고, 전 형조 참판 김휘(金徽)와 참의 강유(姜秞)가 모두 죄를 잘못 판결하였다 하여 고신(告身)을 빼앗겼다. 그 후 충준이 실토하자, 계생은 한 차례의 형신에 죽었고, 충준은 그 정상이 간악하다고 하여 네 차례의 엄형을 받다가 죽었다.
살펴보건대, 일개 내비(內婢)의 일은 아주 미세한 것인데 유사에게 맡겨 처리하지 않고 성색(聲色)을 높히면서 연달아 지휘하여 형관을 독촉하며 유사의 소임을 행하고 궁가의 일을 따라 주었으니 어찌 임금의 덕에 누가 되지 않겠는가.

 

동래 부사(東萊府使) 안진(安縝)의 밀계(密啓)에,
"왜선이 야음을 타고 가덕진(加德鎭)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상인 임지죽(林之竹) 등이 백금(白金) 6천 9백여 냥으로 석유황(石硫黃) 1만 1천 3백 근과 흑각(黑角)·장조총(長鳥銃)·장검(長劍) 등의 물건을 무역하였습니다. 그리고 왜인이 특별히 지죽에게 기증한 장검(長劍)·단검(短劍)·장창(長槍) 및 석유황은 감히 사사로이 쓰지 않고 모두 조정에 바쳤으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또 들으니, 전 도주(島主) 평의성(平義成)이 살았을 때 강호(江戶)에 만금(萬金)의 부채를 졌는데, 의성이 친애하던 권대부(權大夫)란 자가 도주 의진(義眞)에게 극력 권하여, 섬의 여러 왜인들이 이익을 취하는 길을 막음으로써 그 부채를 갚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들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관(舘)에서 거래하는 물화는 모두 도주가 판매하는 물건이며, 섬의 여러 왜인들이 마음대로 출입하면서 사사로이 판매하지 못하게 금하고 또 강호로 왕래하지 못하게 하므로 섬의 사람들이 모두 원망하고 있는데 이와 같이 마지않고 한다면 반드시 큰 환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변방의 상황과 관련되기에 함께 치계합니다."
하였다. 대개 유황(硫黃)과 병기(兵器)는 지난 해 문위 역관(問慰譯官)이 섬에 들어갔을 때 왜인과 은밀히 약속하고 그들로 하여금 가덕도에 정박하여 서로 무역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비국이, 밀양(密陽)에서는 배로, 선산(善山)에서는 말로 운반하고 충주(忠州)에 이르러서는 다시 배에 실어 서울로 운반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앞서 박형(朴泂)을 수십 차례 형장(刑杖)을 가하며 신문하였다. 상이 금부에 명하여 그에 대해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대간(臺諫)이 그 명령을 도로 거둘 것을 계청하여 한 달 이상 쟁집하니, 비로소 윤허하였다. 금부가 드디어 형장을 가하고 아뢰자,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전일 판부(判付)에서 이미 의논해 처리하라는 명을 내렸고, 대간의 계사에도 형장을 가하라는 청은 없었다. 설령 형장을 가하여 신문한다 하더라도 의당 다시 계청했어야 할 것인데, 지금 어찌하여 먼저 형장을 가하여 신문하고 나서 입계하였는가? 물어서 아뢰라."
하니, 금부가 대답하기를,
"박형은 형장을 사용하여 신문을 해야 할 죄인입니다. 그런데 형장을 사용한 신문을 정지한 것은 의논해 처리하라는 명령으로 인한 것이고 보면, 대간이 그 명령을 도루 거두기를 계청하여 윤허를 받은 뒤에는 의당 전과 같이 형장을 가하여 신문해야 하기 때문에 어제 치죄하는 자리에서 전례에 따라 신문한 것이고, 특별히 계문한 것은 또한 신중히 다루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교를 받고 나서, 비로소 먼저 신문하고 뒤에 계문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황공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후일에는 이를 전례로 삼지 말라."
하였다. 금부가 다시 전례에 의해 신문할 것을 계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헌부에 비답을 내릴 때 박형의 일이 누락되었으니 전의 판부에 의해 시행하라."
하고, 헌부가 올린 계사에 대한 비답 중에서도 박형의 일을 윤허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비망기(備忘記)를 고쳐서 정원에 내렸다.
살피건대, 박형은 재물을 탐한 죄가 낭자한 사람인데 상이 이처럼 끝까지 옹호하였다. 대개 박형이 병자년 난리 때 홍명구(洪命耉)의 군관으로서 손수 그 시신을 거두었는데, 이로 인해 익평위(益平尉) 홍득기(洪得箕)의 집안과 은정이 몹시 두터웠다. 그가 구제하고자 여러모로 힘을 기울였으므로 사람들은 자못 그 사이를 의심하였다고들 한다.

 

이행진(李行進)이 죄로 하옥되었다. 행진이 전에 호조 참판으로 있을 적에 판서 정치화(鄭致和)가 인피하고 들어가자, 멋대로 10읍의 해유장(解由狀)을 주어 대간이 탄핵하였으나 추고만 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판서 허적(許積)이 대간의 계문으로 인해 조사하여 아뢰니, 상이 잡아다 신문하라 명하였는데, 마침내 고신(告身)을 빼앗았다.

 

영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양호(兩湖)에서 수재를 보고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호남이 보다 심하고 호남 중에도 전주가 더욱 심합니다. 아, 호남은 국가의 근본이고 전주는 또 왕업의 근거지입니다. 하늘이 다른 곳에 재앙을 내리지 않고 이 곳에 유독 혹심하게 내렸으니, 이는 우리 전하를 사랑하여 경동시키는 것임에 분명합니다. 이것을 심상한 변고로 여겨 소홀히 대처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우매한 생각에는, 상께서 특별히 애통의 하교를 내리고 묘당의 신하들에게 자문하시어 재앙을 막고 억울함을 풀어주는 방법을 강구해야지 한갓 목전의 형식만 취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호남에 대해서는 도신(道臣) 및 읍재(邑宰), 그리고 향대부(鄕大夫)·사자(士者)로 하여금 가장 지탱하기 어려운 역을 조목별로 나열하고 각각 그 소회를 진술하게 한 다음, 경감해 주기도 하고 탕감해 주기도 하여 허탈에 빠지는 탄식이 없게 하고 다른 도에까지 미루어 시행하소서. 예를 들면 북도(北道)와 서관(西關)의 감당할 수 없는 가혹한 납세 같은 것도 모두 그 방백으로 하여금 가장 긴급한 일을 가려 치계하게 하여 채택하는 바탕으로 삼아 먼 지역의 쇠잔한 백성이 조금이라도 소생하게 하소서. 그러면 하늘에 실지로 응하는 도리에 어찌 조금이나마 도움이 없겠습니까.
신은 듣건대, 백관이 조정에서 화목하면 백성들은 전야에서 화목하고, 대각(臺閣)이 그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면 나라의 기강이 힘입어 서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론(士論)이 분리되어 조정이 조용하지 못합니다. 근일에 있었던 한 가지 일로 말하면, 민시중이 처음 군부(君父)를 뵙던 날 간쟁의 책임을 부여받아 그가 논열하는 것은 오직 일에 따라 규명하는 데에 있었으니, 이는 마땅히 가상히 여겨야지 꺾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그가 대간에 의망되자 낙점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성명께서는 거스리지 않는 아량을 넓혀 반드시 직언하는 신하를 얻어 대각에 두어, 똑바른 사람과 보필하는 선비가 국맥을 부지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부덕한 사람이 즉위한 이래 하늘이 불쾌하게 여겨 이변이 거듭 나오고 수재 한재가 계속되니 걱정되는 마음이 가슴 속에 떠나지 않는다. 더구나 호남의 수재는 실로 전에 없었던 큰 재변인데 어찌 편안한 마음으로 예사로운 일처럼 보아넘기겠는가. 지금 차자의 말을 보니 더욱 조심스러워진다. 두려운 마음으로 유념하리라. 차자 중에 의논해 처리하라는 일에 대해서는 또한 묘당에 물어 조처하겠다."
하고, 차자를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차자 중에 이른바 재변을 막고 억울함을 풀어주는 방법을 강구하라는 것은 예사로운 문자처럼 복계할 바가 아니니 사대(賜對)하는 날을 기다려 직접 품의하여 시행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 호남(湖南)·북로(北路)·서관(西關)의 요역(徭役)·징공(徵貢) 등의 일은 바로 차자의 말에 의해 시행해야겠으니, 정원(政院)으로 하여금 이 차자의 뜻으로 내용을 만들어 제도 감사에게 하유하게 하고, 그 계문을 기다려 의논해 처리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전라도 전주 등 14개 읍에 소의 역질이 극성하였다.

 

헌부가 호조의 담당 당상·낭청을 파직하는 일로 계속 아뢰다가, 이 때에 이르러 정지하였다.

 

이두진(李斗鎭)·홍주삼(洪柱三)을 금부에 하옥하여, 두진은 고신을 빼앗고 주삼은 특명으로 도배하였다. 두진이 충청 병사로 서원 객사(西原客舍)의 담장 밖에 피접(避接)해 있었다. 현감 홍주삼이 공도회 시관(公都會試官)으로 객사에서 선비들을 시험보이는 중 응시자들이 시끄럽게 떠들자 두진이 노하여 가리개를 높게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관리를 곤장치고, 또 응시자들을 몰아내었는데, 응시자들이 도망치며 흩어질 즈음에 구타를 당한 자도 있었다. 이에 선비들이 모욕을 당하였다는 이유로 방을 붙이고 과장을 나가버렸다. 주삼이 감사에게 보고하면서 두진을 몹시 헐뜯자, 두진 또한 주삼을 비방하며 말하기를, ‘유생들이 과장을 파한 것은 주삼의 격동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하니, 주삼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우상 홍명하가 주삼이 상관을 모욕하였다는 것으로 상에게 아뢰어 체포하여 심문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두진과 주삼을 함께 하옥하였는데 그 원서(原書)에서 서로 다투어 힐난하자, 상이 두 사람을 대면시켜 확인하게 했다. 이에 승지 이경억(李慶億) 등이 ‘두진은 품계가 당상이고 주삼은 일찍이 경악(經帷)의 시종을 거친 자 입니다. 진신(搢紳)을 모욕하고 국가 체면을 손상함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다.’고 아뢰고 도로 명령을 거둘 것을 청하니 상이 이에 따랐는데 뭇 의논이 모두 옳게 여기었다. 그 후 대사간 이홍연(李弘淵) 등이 ‘법률 적용의 가부는 유사(有司)가 할 일입니다. 이미 율문에 비추어 결정해 들였는데, 정배의 명이 뜻밖에 내리니 국가가 법률을 준용하는 뜻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법이 한번 흔들리면 훗날의 폐단이 무궁할 것입니다.’라고 아뢰고, 주삼의 정배를 도로 거둘 것을 누차 아뢰었으나,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7월 21일 경술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홍명하가 약방(藥房)으로 입시하여 함경도 취재(取才) 때의 성적 순위, 합격자 발표 등의 일을 품의하여 정하고자 하였는데, 영상 정태화가 마침 궐내에 있었으므로 상이 불러들이게 했다. 태화와 명하가 상의 앞에서 의논한 다음 문과는 3인만 취하고 무과는 남북도를 합쳐 3백 인을 취하되, 문과는 시험 답안지와 성적 순위를 올려 보낸 후, 김수항(金壽恒)은 그대로 머물러 무재(武才)를 시취하고, 합격자 발표가 내려오기를 기다려 함흥(咸興)에서 합격자 발표를 하는데, 사화(賜花)와 홍패(紅牌)는 선전관(宣傳官)으로 하여금 유지(有旨)를 가지고 내려 보냄으로써 사기를 고무시켜 주자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7월 22일 신해

행 대사간 남용익(南龍翼) 등이 아뢰기를,
"근래에 조정이 존엄하지 못하고 국위가 근엄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어영 대장 유혁연(柳赫然)과 총융사 구인기(具仁墍)가 한 장수의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투면서 상소를 올려 변명하기까지 하여 마치 송사에 변론하듯 하였으니, 사체를 손상시킴이 큽니다. 청컨대 무겁게 추고하소서.
한성 우윤 이구원(李久源)은 나이가 90에 가깝고 또 시골에 있습니다. 제수한 지 여러 날이 되었으나 아직 직무를 수행할 기약이 없으니 체차하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23일 임자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약방 도제조 이하가 입시하고, 이어 대신·비국 제신·강화 유수 조복양(趙復陽)을 인견하였다.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앞서 박형(朴泂)을 품의하지 않고 신문한 것은 신이 실로 잘못하였습니다. 성상의 하교를 번거롭게 하였으되 여기까지 밝게 살피시니, 황공하면서도 즐거운 마음 또한 깊습니다. 신하에게 실수가 있을 때마다 즉시 경계하고 단속하시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이때 음관(蔭官) 이제현(李齊賢)이 일찍이 훈국 낭청(訓局郞廳)이 되었을 적에 대장에게 고하지 않고 사사로이 수백 금을 남에게 대출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체포되었는데, 허적이 이때 판의금(判義禁)이 되어 사형으로 논죄하였다. 상이 허적에 묻기를,
"제현에게 적용한 법은 다른 법에 비유해 적용한 것인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전량(錢糧)을 멋대로 대출한 조항에 대한 율문이 이와 같으니 해당 법률입니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유사(有司)의 법 집행을 이렇다 저렇다고는 할 수 없으나 사형을 적용하는 것은 지나친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논죄에 있어 마땅히 그 본정을 참작해야 하는 것이니 사형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상이, 황당인(荒唐人)을 잡아 가두었다는 남병사(南兵使) 의 장계를 꺼내 보이니, 태화가 아뢰기를,
"일찍이 청국(淸國)이 글을 아는 사람을 영고탑(靈古塔)에 내다 두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게 그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가 입은 의복으로 보면 중국 사람 같기도 하고 또 오랑캐 같기도 한데, 혹시 우리 나라의 일을 탐지하려는 자인지 모르겠습니다. 서울로 잡아다가 신문한 후 북경으로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이때 원임 대신 이경석(李景奭)·정유성(鄭維城)이 서울에 와 있으므로 상이 이들을 불러들이게 했다. 태화가 경석의 차자를 앞에 펴 놓고 아뢰기를,
"백성의 질고를 나열하여 아뢰게 하라는 일에 대해서는 이미 하유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중 애통의 하교를 특별히 내리라는 한 가지 일과, 귀양간 사람들과 송사 중에 억울한 일이 없지 않다고 한 것 또한 마땅히 품의하여 조처해야 합니다만, 이른바 억울함을 풀어주고 죄인을 용서한다는 것은 본도부터 먼저 해야 할 것입니까?"
하자, 경석이 아뢰기를,
"신의 뜻도 본도를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유성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 도도 아울러 묻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조정이 백성을 교화시키는 정치가 없어 민심과 세도가 이와 같은 데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경석 및 여러 대신이 모두 입시하였으니, 교화의 방법을 자문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경석에게 물었다. 경석이 대답하기를,
"임금이 정치를 할 때 만약 인의(仁義)를 버리면 반드시 무지한 금수의 경지로 들어가게 됩니다. 반드시 서울로부터 향당(鄕黨)에 이르기까지 순순히 효제 충신(孝悌忠信)의 도리로 유도해야만 백성들이 나아갈 방향을 알아 교화가 유행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태화에게 이르기를,
"경의 의사도 말하라."
하니, 태화가 대답하기를,
"신이 어찌 교화의 방법을 알겠습니까. 경석이 전부터 열심히 《소학(小學)》으로 교도의 방법을 삼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대개 옛날에는 이 책으로 어린아이들을 가르쳤고 예조의 강학에도 또한 이 책으로 하였으나 지금에 와서 점차 폐지하였습니다. 인조조(仁祖朝)에서 유생을 정시(庭試)할 때 차상(次上) 이상에게 《소학》을 반사하여 사대부 집에는 지금까지 소장한 자가 있습니다. 양남의 감사로 하여금, 《소학》 1책을 많이 간행해 보내게 하여 중외에 반포하소서."
하니, 상이 재가하였다. 대사간 남용익이 아뢰기를,
"전일 박형(朴泂)에 대한 헌부의 계사에 대해 성상께서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하였는데, 중관(中官)이 이를 전달하지 않아 이처럼 형을 받기에 이르렀고 본다면, 성상께서 명하시지 않았는데도 피살된 자가 또한 없지 않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혹시라도 잊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중관이 전달하지 않았다면 어찌 죄가 없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잊었다. 중관이 전달하지 않았다면 내 어찌 처벌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용익이 아뢰기를,
"이충준(李忠俊)의 일에 대해서는 심지어 명관(名官)에게 청탁하였다고 하교하시었습니다. 성상께서 어떻게 알아 이와 같은 하교를 하셨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청탁했다는 말은 그 문서 중에 있었다. 매양 어찌 왜곡되게 의심하겠는가."
하였다. 용익이 아뢰기를,
"신은 그 문서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일이 비록 이와 같더라도 성상께서는 이와 같이 하교해서는 안됩니다."
하였다.

 

박장원(朴長遠)을 예문 제학으로, 김수흥(金壽興)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7월 26일 을묘

우부승지 김익경(金益炅)이 글을 올려 일을 논하다가 성상의 뜻에 거슬려 삭직되었다. 그 대략에,
"지난번에 삼가 이충준에 관한 형조 문건에 대한 재결 내용을 보니, 말씀의 취지가 지극히 엄하고 논죄가 지나치게 성급하였습니다. 그 당시 쟁집하지 못한 신의 죄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그 가슴 조이는 마음을 끝내 억제할 수 없어 이에 감히 우러러 전하를 어지럽힙니다. 처음 충준의 입안(立案)을 만들어 낼 때 그의 조카 계생(繼生)의 이름으로 써 넣었습니다. 비록 그 까닭은 알 수 없으나 대개 이 일의 분변이 비국 사목(備局事目)의 유무와 본관 입안(本官立案)의 진위에 달려 있어서 이 사람인지 저 사람인지는 논할 바가 아니라면 이름을 바꾼 죄는 깊이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궁가에서 난동을 부렸다는 말에 이르러서도 궁노의 문초에서 나온 것인데 추문을 기다리지 않고 성급히 엄형을 가하였습니다. 선왕의 후궁 집에서 난동을 부린 일은 매우 큰 죄인데 그 허실을 캐보지도 않고 바로 논단한단 말입니까. 또 재결 중에 명관에게 청탁하였다는 하교는 더욱 미안합니다. 대신(臺臣)이 일을 논할 때 풍문으로 해도 된다고 허락하였고 보면 자고로 대신의 계문은 반드시 모두가 목격한 것이 아니요 대개가 소문에 의한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상께서는 이미 이목의 임무를 부여해 놓고 또 청탁을 했다는 말에 의심을 갖으시니 애석하게도 전하께서는 너무나도 말씀을 신중히 하지 않으십니다.
삼가 듣건대, 대사간 남용익이 그저께 인견할 때 이 일을 진달하자, 전하께서는 형조의 문건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였다고 하니, 신은 성상께서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형조의 문건은 다만 각 사람들의 공초를 봉입할 뿐 사실을 밝히는 결론이 있지 않고 보면 비록 그 문건에 청탁의 말이 있다 하더라도 이는 송자(訟者)들이 헐뜯으며 매도하는 말에 불과한 것인데, 곧장 이 말로 단정지어 청탁한 죄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문건을 해조로 하여금 밝게 조사하여 처결하게 하지 않고 다만 공초한 말에 의거하여 특별히 지휘하고 계시는데, 어찌 임금의 지존으로 아래 유사의 소임을 행할 수 있단 말입니까. 성상의 생각대로 결단하여 이와 같이 규례 밖의 조치가 있으니, 삼가 사체에 큰 손상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신은 그때 대방(代房)으로 문건을 출납하면서 소회를 진달하고자 하였으나 주저하다가 기회를 놓쳐 성명의 그릇된 거조가 중외에 소문이 나게 하였으니, 이것이 모두 신이 직무를 수행하지 못한 죄입니다. 삼가 신의 직을 삭탈하고 이어 신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상이 크게 노하여 계(啓)자를 찍어 내려보냈다.
익경의 말이 옳기는 하나 대방(代房)이 되었을 때 사건을 근거로 논열하지 않고 지금에서야 소를 올려 진술하니 진실로 때가 늦었다. 그러나 성상이 직언을 받아들이는 도리에 있어서는 다만 그 말의 타당한가 살필 뿐이지, 시기의 빠르고 늦음은 논할 바가 아니다. 그런데 끝내 성상의 마음을 거슬려 그 직이 삭탈되고 용서받지 못하였으니, 언로에 어찌 방해가 되지 않겠는가.

 

완원군(完原君) 이만(李曼)이 죽었다. 이만은 참의        이목(李莯)의 아들이다. 나이 24세에 별시 장원으로 급제하고 갑신년041)                  에 장령(掌令)으로 일을 말함으로써 인조가 승지로 발탁해 장려하였다. 공신의 장손으로서 회맹연(會盟宴)에 참여하고 품계가 올라 군(君)에 봉해졌다. 조경이 이조 판서로 있을 때 그를 이끌어 대사헌에 제수하였고, 효묘(孝廟) 초년에 영남 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묘당이 군사를 훈련하는 데에 뜻을 두어 왜정(倭情)이 우려된다는 구실로 청나라에 고하고 성지(城池)를 수축할 것을 요청하면서 동래 부사(東萊府使)        노협(盧協)과 이만의 장계를 인용해 말하였다. 청나라 사람이 의심하고 노하여 사신을 보내 힐책하니, 화가 닥쳐올 조짐을 예측할 수 없었다. 이때 노협은 겁에 질려 말하지 못하였으나, 이만은 상대하여 분명히 말해 실수하는 일이 없으므로 시배들이 처음에는 모두 칭찬하였다. 그런데 청나라가 수상(首相) 이경석에게 죄를 돌려 사형의 율에 처하였다가 뒤에 위리 안치로 낮추었다. 이 때문에 시배들이 다시 이만이 책임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고 경석이 죄를 받게 했다고 하여 드디어 나라를 팔아 자신이 살기를 도모했다고 논박하여 하옥되었다가 귀양갔다. 그뒤 오래지 않아 방면되었고 이내 서용되어 4도의 장관을 역임하고 이에 이르러 병으로 아산(牙山) 촌가에서 죽었다. 이만은 명민하여 판결을 잘 하고 재주와 명망이 남보다 뛰어나 당시 사람들이 가장 그를 꺼리었다. 항상 배격을 받아 그의 능력을 다하지 못하고 나이 60에 죽었는데,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기었다.

 

무주현(茂朱縣)에 큰비가 내려 시냇물이 갑자기 불어나는 바람에 세 사람이 일시에 익사하였다. 상이 휼전(恤典)을 시행할 것을 명하였다.

 

7월 27일 병진

대사간 남용익(南龍翼), 정언 정창도(丁昌燾)·윤심(尹深)이 창원 현감(昌原縣監)의 파직을 논할 때 대간의 체통을 어겼다고 모두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도승지 정지화(鄭知和)가, 김익경(金益炅)을 삭직한 일이 미안하다고 진달하였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7월 29일 무오

집의 이준구(李俊耉) 등이 아뢰기를,
"전 승지 김익경은 그 직책이 성상과 근밀한 지위에 있어 이와 같이 소를 올린 것이니, 실로 소회가 있으면 반드시 진달해야 한다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요, 또 우리 임금을 허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소장의 말단에 으레 쓰는 말로 인하여 갑자기 중벌을 내리니, 보고 듣는 바에 당혹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익경의 직을 삭탈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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