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임술
동지성균관사 김좌명(金佐明)이 문묘에 나아가 분향하고 돌아와서 면대를 청하니, 상이 희정당에서 인견하였다. 좌명이 아뢰기를,
"전일 소를 진달할 때에 재임(齋任) 한 사람은 정거(停擧)를 받았고, 한 사람은 밖에 있다 상(喪)을 당해 현재 재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오늘 여러 유생들을 불러 상의 전교를 알리고 재임을 선출하게 하였는데, 여러 유생들이 답하기를 ‘비록 상의 전교로 재실에 들어가 문묘를 지키더라도, 재임을 선출하는 데 대해서는 감히 하지 못하겠다.’ 하였습니다. 이전에는 성균관을 비우고 나갔을 적에 조정에서 근신을 보내기도 하고 대신을 보내기도 하여 반드시 곡진하게 권면하고 효유하여 그들을 도로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지금 소를 올린 이 유생들도 이런 전례가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또한 곧바로 먼저 도로 들어갈 수 없는 형편입니다. 이미 벌을 시행하였으니, 마땅히 진정시킬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였다. 이때 영상 정태화(鄭太和)가 약방에 있었는데, 상이 주서(注書)를 시켜 영상을 불러오게 하여 유생들을 진정시킬 방법을 물었다. 태화가 아뢰기를,
"벌을 풀어주면 진정시킬 수 있으니, 마땅히 특명으로 벌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즉시 정거를 풀어 그들로 하여금 재실에 들어가게 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남양 부사(南陽府使) 이정(李晶)은 파주 목사(坡州牧使)로 있다가 남양으로 옮겨 제수되었는데, 파주에서의 임기가 만료될 시기에 남양으로 옮겨 제수되었기 때문에 전 벼슬 기간까지 통틀어 계산하면 머지않아 체직되어 돌아와야 합니다. 그래서 남양의 백성들이 매우 근심한다고 하니 그대로 재임시키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좌명이 아뢰기를,
"햇수를 한정하지 않는다면 자연 속히 체직될 것이니, 햇수를 한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바로 전부터 잘 다스리는 수령은 3년을 한정한 것이니, 재임시켜야 할 것이다."
하였다.
안성(安城)에서 소가 송아지를 낳았는데, 머리가 둘, 입이 둘, 귀가 넷, 눈이 넷이었다.
좌의정 원두표(元斗杓)가 병으로 면직을 빌었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경상 감사 이상진(李尙眞)이 각사(各司)·제궁(諸宮)의 노비를 계문하였는데, 임인년 이전의 신공(身貢)을 거둘 수 없는 자가 1천 5백 87명이었다. 호조가 복계하여 일족이 도망간 경우를 제외하고는 지적하여 징수할 곳이 없는 자를 초록해 특별히 탕척을 허락해 달라고 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였다.
5월 3일 갑자
함경도에 굶주린 백성이 1만 1천 8백 43인, 여역으로 사망한 자가 65인, 병으로 죽은 소와 말이 50여 마리였다.
평안도 영원(寧遠)·덕천(德川) 등의 읍에 우박이 내려 곡식을 손상시켰다.
5월 5일 병인
대사헌 유철(兪㯙)이 인피하기를,
"신이 지난번 간원에 있을 적에, 전관(銓官)이 벌을 받은 것은 실로 실정 밖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상께서 파직시키라는 명을 이미 거두셨을 뿐만 아니라 신임 이조 판서도 이미 차출하였으니, 서로 버티는 동안 단지 사체만 손상된다고 여겼으며, 이규령(李奎齡) 등의 일에 대해서는 신이 평일에도 과당하다고 여겼으므로 동료들과 서로 의논해 정계(停啓)한 것인데, 지금 듣자니 갑자기 정계한 것이 잘못이라고 물의가 일어났습니다. 더구나 신이 지난 겨울 별천(別薦)할 적에 사인(士人) 박순(朴錞)을 천거했습니다. 신은 그 사람이 강명(剛明)하고 민첩하게 일을 잘 처리하여 재주와 국량이 쓸 만하다는 점을 익히 알았기 때문에 감히 천거해 올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삭제해야 한다는 의논이 대석(臺席)에서 발의되었으니, 그를 천거한 장본인이 어떻게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신의 직을 체차하소서."
하였다. 정언 우창적(禹昌績)도 갑자기 의논을 정지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옥당이 처치하여 모두 체차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따랐다.
홍처량(洪處亮)을 대사간으로, 정중휘(鄭重徽)를 지평으로, 윤심(尹深)을 부교리로 삼았다.
5월 6일 정묘
강원도에서 염병으로 65인이 사망하였다.
5월 7일 무진
지평 심재(沈梓)가 인피하기를,
"신이 전일 동료와 상회례(相會禮)를 행했는데 동료가 천거된 사람들 가운데 유학(幼學) 박순이 자기 집안을 잘 다스리지 못한 일을 끄집어 내어 삭제하려 하고, 이어 천거한 장본인을 논했습니다. 신의 소견으로는 들은 바가 없을 뿐만 아니라, 마침 동료들이 일제히 다 모이지 않은 날을 당해 갑자기 별천에 서경(署經)을 하는 것은 혹 경솔한 일이 될까 염려되었기 때문에 잠시 뒷날 일제히 모일 때를 기다리자는 뜻으로 반복해 말하여 그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석에서의 말이 외방에 전파되기까지 하였으니, 일을 논하는 데 주밀하게 하지 못한 잘못을 신이 면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체척을 명하소서."
하였다. 교리 박세당(朴世堂) 등이 처치하여 출사하게 할 것을 청하자, 상이 따랐다.
5월 10일 신미
호군 송준길(宋浚吉)이 상소하기를,
"신이 일전에 전관(銓官)을 파직하고 추고하라는 명과 대신(臺臣)을 출척한 거조를 듣고 일이 심상치 않아 신이 바야흐로 혀를 차며 놀라고 의아해 하였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들으니 관학(館學)의 유생을 부황(付黃)하여 정거(停擧)시키라는 전교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실로 전고에 없던 일입니다. 당초 김만균(金萬均)의 상소는 그 실정이 참으로 긍휼히 여길 만한 것이었으니, 조정에서는 의당 공의에 부쳐 장점을 따라 선처했어야 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서필원(徐必遠)이 성을 내고 초계(草啓)하여 이미 들인 상소를 도로 내어주길 청하며 끝내 옥에 내려 다스리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적당하고 온편한 거조이겠습니까.
송시열(宋時烈)이 의리에 근거해 진달한 소장은 만균을 위한 것이 아니고 단지 세도를 위해 의리를 밝히고자 한 것일 뿐입니다. 필원의 도리로서는 오직 그 곡절을 진술해 남들의 말에 사죄했어야 할 것인데, 도리어 이치에 맞지도 않는 어지러운 말로 기세를 돋구어 장황하게 말을 하였으니, 이게 어찌 공평하고 화경하며 허물을 들으면 스스로 돌이켜 보는 사대부 사이의 도리이겠습니까. 결국 이리저리 불어나서 한 조정의 커다란 소란을 만들고, 거듭 성상의 잘못된 거조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비록 필원이 스스로 자기의 죄를 따져 보게 하더라도 속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태학은 공의가 있는 곳입니다. 국조 수백 년 동안 오로지 인재를 배양하고 붙잡아 세우는 것으로 임무를 삼았으니, 이전에 또한 어찌 연소한 유생들의 망령된 거조가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열성조께서 그들의 사기를 꺾어버린 적이 없이 한결같이 모두 너그럽게 용납하고 장려해 권면하였으니, 그 뜻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습니까. 근래 관학의 상소가 들어갔는데도 오랫동안 비답이 내려지지 않아 여러 유생들로 하여금 대궐 밑에서 밤을 지새우게 하였으니, 이미 조종조에서 선비를 대우하던 도리가 아닌데다가 오늘날에 이르러 부황하여 정거시키라고 하였으니, 아,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요즈음 전조(銓曹)의 여러 관원들은 대부분 연소한 명류로서 갑자기 은총의 발탁을 입었으므로 모두들 명절(名節)을 갈고 닦아 청탁을 구분하려고 하였으니 단지 정성스럽고 삼가는 것이 지극하다는 말만 들었을 뿐 자기들 마음대로 하는 일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성상의 전교에 운운하신 것은 노한 데서 발로된 것으로써 공정함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요즈음 ‘전관(銓官)을 파직하고 추고하라.’ ‘대신(臺臣)을 외직에 보임하라.’ ‘관학의 유생을 부황(付黃)하여 정거하라.’는 등의 명령이 갑작스런 노여움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그 일들에 대해 모두 밝은 전교를 내려 명령을 거두시고 뉘우쳐 사과하는 뜻을 흔쾌히 보이신다면 마치 일식 월식이 지난 뒤처럼 모든 사람들이 다같이 우러를 것이니, 임금의 덕에 다행함이 이보다 큰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소가 들어가자, 상이 오랫동안 안에 두고 답하지 않았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조복양(趙復陽)이 치계하기를,
"염병이 크게 번져 사망한 자가 매우 많습니다. 죽은 사람 중에 거두어 묻어 줄 사람이 없는 자에게는 거두어 묻어 줄 비용을 지급하고, 한창 앓고 있는 사람 중에 식량이 떨어진 자에게는 날짜를 계산해 식량을 지급하고, 구제해 치료할 약물을 해조로 하여금 내려보내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였다.
5월 11일 임신
이일상(李一相)을 대사헌으로, 유철(兪㯙)을 병조 참판으로, 이경억(李慶億)을 좌부승지로, 윤우정(尹遇丁)을 장령으로, 홍만용(洪萬容)을 정언으로 삼았다.
함경 감사 서필원(徐必遠)이 상소하기를,
"신이 결코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는 실정을 여러 차례 간절히 진달했는데도 전하께서 끝내 윤허하지 않으셨습니다. 신 때문에 곧바로 또 언관을 배척해 내쫓고, 전관(銓官)을 파직하고 추고하였습니다. 우러러 생각건대, 성명께서는 반드시 이로써 억제하고 진정하려고 꾀하셨지만, 사리상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지금 신이 논하는 것은 곧 공의가 다같이 그릇되게 여기는 바인데, 전하께서만 이렇게까지 곡진하게 비호하시니, 공의가 아래서 울적해 하고, 실정에 벗어난 비방과 배척을 신이 장차 면치 못할 것이니, 신의 낭패는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원컨대, 전하께서는 쾌히 신을 물리치시어 한편으로는 염치의 풍조를 붙들어 세우고, 한편으로는 공의를 위로해 답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경은 안심하고 직무를 살펴 조정을 저버리지 말라는 뜻으로 답하였다.
우찬성 송시열이 상소하기를,
"신이 말 한 마디를 함부로 한 것이 건드려서는 안 될 핵심을 찔러 대각이 서로 등지고 비난하며 선비들이 티격태격하는 화를 불러일으켰으니, 떨리고 두려운 마음 금치 못하겠습니다. 비록 대궐 아래로 달려가 엎드려 머리를 땅에 조아리며 스스로 속죄하고 싶지만, 그렇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얼른 신의 직책을 삭탈하고 신의 죄를 깊이 따져서 물의에 사과하여, 안정하지 못하고 일어나 다투는데 대한 경계로 삼는 것만 못합니다.
또한 신이 앞의 소장에서 인용한 유자우(劉子羽)의 일도 잘못 유공(劉珙)이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그 본뜻과는 그리 거리가 멀지는 않지만, 임금에게 고하는 말에 어찌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착오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성자(聖慈)께서는 신의 애절하고 간절한 청을 받아들이시어 일의 단서가 점점 자라나고 말이 점점 새어나가지 말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많은 말을 할 필요도 없이 경은 이미 짐작할 것이다.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소장이 들어간 지 여러 날 만에 비로소 비답이 내렸다.
판돈녕부사 윤경(尹絅)이 죽었다. 윤경은 나이가 98세였는데도 잘 걸어다니고 귀와 눈이 밝아 세상 사람들이 장창(張倉)에 비유했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경기 감사 이시매(李時楳)가 남한 산성의 쌀을 얻어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기를 원한다고 장계를 올렸습니다. 수어사(守禦使)로 하여금 창고에 남아있는 쌀 3, 4천 석을 참작해서 도신에게 주어 그 지역 백성의 다소에 따라 공평히 나누어주도록 하고, 그 석수(石數)는 책을 만들어 본사 및 수어청(守禦廳)에 보내 가을에 대조하여 거두어들이는 자료로 삼고자 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헌납 민여로(閔汝老)가 병으로 소명을 받들지 못하고, 상소하여 시정(時政)의 폐단을 진달하기를,
"조정에 화락한 기운이 완전히 소멸되고, 벼슬아치들 사이에는 논의가 모순되어 서로들 기치를 세우고 공격하기를 숭상하니, 이게 무슨 기상이란 말입니까. 이와 같이 그치지 않는다면 아마도 점점 더 격렬해져서 사림의 참혹한 화를 초래하고 나라도 따라서 망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충신(忠信)한 사람이 두터운 녹을 받는 제도가 예로부터 있었는데, 근래 흉년으로 인하여 줄이고, 깎아버린 것이 너무 지나쳐 녹을 타 먹고 사는 집안이 더욱 초라해져 썰렁하고 고달파 살아갈 방법이 없으니, 체면이 이로 말미암아 날로 훼손되고, 염치가 이로 말미암아 날로 손상됩니다. 사대부 집안에서 살기만을 도모하고 이로움만을 취하는 습관이 여기에서 말미암지 않았다고 기필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뭇 관원으로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자는 곤장을 쳐서 직무를 살피게 하니, 벼슬아치를 시가지에서 종아리치는 격입니다. 어찌 매우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는 천한 종으로 대우하는 것이지, 사대부로 대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게 어찌 염치를 닦게 하고 예로써 신하를 부리는 뜻이겠습니까."
하고, 또 영장(營將)이 군기(軍器)를 개수하는 일과 병사들이 원망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폐단에 대해 진달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진달한 말을 내 유념할 것이니, 그대는 사양하지 말고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5월 12일 계유
집의 민유중(閔維重)이 아뢰기를,
"옳고 그름을 분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마치 흑과 백이 혼합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지난번 함경 감사 서필원이 떳떳한 이치 밖의 별스러운 의견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이에 말하기를 ‘할아비와 손자의 관계는 삼강(三綱)에 들어 있지 않으니, 복제(服制)로 그 경중을 비교하고자 한다.’ 하였으니, 그 이치에 어긋나고 잘못된 점이 참으로 매우 심했습니다. 그런데 또 의리가 밝아질수록 나라에 더욱더 사람이 없어진다는 등의 말로, 자기 멋대로 장황하게 말했습니다. 설령 그의 의도가 별도로 목적한 바가 있더라도 그 곡절만 진달해야지 상경(常經)의 뜻을 망령되게 의논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개한 마음으로 이기기만을 힘써 경전을 부회해서 잘못을 문식하고 그릇된 것을 수식하며 기를 쓰고 남을 침해하였습니다. 혹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첨해 설을 왜곡되게 한다고 지척하기도 하고, 혹 파도를 일으키어 잔물결을 키우려는 격이라고 지척하기도 하여 앞뒤로 한 말이 구구절절 순서가 없었습니다.
대체로 처음의 거칠고 소루하고 무식한 점은 참으로 깊이 나무랄 것도 없지만, 끝내 치우치고 사사로우며 편벽되고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결단해 정론(定論)을 삼으려 한다면 그 해로움이 매우 크므로 실로 세교(世敎)에 관계됩니다. 조정에서 옳고 그름의 소재를 모르는 바 아닐 터인데, 일찍 조처하지 못함으로 인해 대각의 공의가 여러 차례 일어났다 여러 차례 저지되어 시비가 분분해져 안정되지 못함으로써 나라의 체모를 손상하였으니, 이는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 의리를 밝혀 사리에 어긋나고 일을 그르친 잘못을 바로잡지 않아서는 안 되니, 청컨대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처치하는 규정은 반드시 공의를 따라야 하는데, 지난번 이규령(李奎齡)·조성보(趙聖輔)가 인피하였을 적에 처치한 말은, 추론하여 소란을 야기시킨다고 핑계대기도 하고, 조어에 담긴 뜻을 끄집어내어 공론을 억눌러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일이 뒷날의 폐단에 관계되고 그 풍습이 아름답지 못하니, 청컨대 처치한 옥당의 관원을 아울러 체차하소서.
일을 말하는 관원을 먼 외지로 배척해 내쫓는 것은 결코 성대한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도로 그 명을 거두라는 의논을 양사에서 함께 제기하였으니, 공의가 있는 곳을 대체로 알 수 있습니다. 마땅히 정성을 다해 힘껏 간쟁해서 기어코 성상의 마음을 돌려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야 할 것인데도 두서너 차례 아뢰어 책임을 때우고 곧이어 즉시 정지하였습니다. 대간의 사체가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청컨대 그 당시 논핵을 정지한 대관을 아울러 체차하소서.
대관의 처신은 구차하지 않게 함이 귀한 것인데, 그 의논을 일으켜 놓고서 곧바로 인혐하고 들어갔다가 정계를 하자 다시 출사하였습니다. 나아가고 물러가는 데 근거가 없고, 패기가 없이 느슨한 모양 또한 심하니, 청컨대 지평 심재(沈梓)를 체차하소서.
서필원이 사리에 어긋난 주장을 하여 일을 그르친 죄를 바로잡지 않아서는 안 되었으니, 이규령·조성보 등이 대각에 몸담고 있는 신하로서 규핵하려고 했던 것은 곧 그들의 직책입니다. 그런데 외직에 보임하라는 명이 갑자기 뜻밖에 나와 사기가 이 때문에 저상되고 공론이 막혀 펴지지 않고 있으니, 성대한 덕에 누가 됨이 큽니다. 청컨대 그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는데,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이어 하교하기를,
"옛사람이 경계한 것은 혐의이고, 국가에서 미워하는 것은 당론이다. 지금 민유중이 아뢴 말을 보건대, 허겁지겁하여 여전히 스스로 담당하고 있으니, 참으로 매우 통분스럽고 놀랍다. 당초 조성보 등을 외직에 보임한 것은 정관(政官)을 파직시키고 추고하라고 하던 때에 있었다. 그 당시 정관은 유중과 어떤 관계이기에 이미 정지된 의논을 다시 일으켜 은연중 구제하면서 감히 공론이라고 한단 말인가. 서필원을 논핵하는 거조가 만약 공론이라고 한다면 서서히 여러 동료들을 기다린 뒤에 논핵함이 옳을 것이다. 지금 앞장서서 사적으로 비호하며 임금을 멸시하니, 이런 사람은 대각에 그대로 놔둘 수 없다. 집의 민유중을 먼저 체차하라."
하였다. 그 당시 정관이었던 참판 민정중(閔鼎重)은 바로 유중의 형이었다. 좌승지 홍처대(洪處大)와 우승지 권대운(權大運)이 아뢰기를,
"유중의 의논이 비록 중도에 지나친 듯하지만 자기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진달한 것에 불과합니다. 어찌 일찍이 임금을 멸시하는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엄한 교지를 내려 특별히 그의 직을 체차하기까지 하였으니, 참으로 성명의 지나치신 거조입니다. 체차해 물리치라는 명을 거두소서."
하니, 상이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처대 등이 다시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 당시 경기 지방의 흉년이 특히 더 심하였다. 겨우 양전(量田)이 끝나 백성들이 더욱 곤궁하고 초췌한데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올 무렵이었으므로 백성들이 식량이 떨어져 굶주리고 있는데도 진휼해주는 거조가 없었다. 감사가 남한 산성에 비축해 둔 수천 석의 쌀을 나누어 지급하자고 청하면서 형세상 허다한 굶주린 백성에게 두루 다 나누어주기가 어렵다고 하니, 진휼청이 아뢰기를,
"본청에 남아 있는 것이 아직 1만여 석이나 되니, 그중에서 반을 제해 내어 본도 감사로 하여금 받기를 원하는 각읍에다 참작해 나누어 주어서 눈앞의 위급한 상황을 구제하고, 가을이 되거든 모곡(耗穀)을 제외하고 도로 거두어서 조금이나마 은혜를 입는 바탕을 삼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였다.
대마도가 흥양(興陽)의 표류인 19명을 송환하였다. 예조로 하여금 편지를 써 그들의 호의에 답하게 하였다.
흥양현 백성 모주복(毛注福) 등 19명이 배를 타고 영해부(寧海府)로 교역을 하러 가다가 지난해 11월 4일 태풍을 만나 표류해 일본 은주(隱州)에 닿았다. 은주에서 장기(長畸)로 보내졌고, 장기에서 다시 대마도로 보내졌는데, 대마 도주가 귤성중(橘成重)을 보내 동래(東萊)로 거느리고 와 인계한 것이다.
5월 13일 갑술
지평 정중휘(鄭重徽)가 인피하기를,
"신이 병 때문에 미처 상회례(相會禮)를 행하지 못하였는데, 어제 동료가 함경 감사 서필원(徐必遠) 등의 일을 가지고 논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의 소견으로는, 필원의 일은 조정의 시비가 이미 밝혀졌고 대각의 논의도 이미 정해졌으니, 지금에 와서 추급해 탄핵하는 것이 결코 옳은지 모르겠으며, 기타 논한 바도 타당치 않으니, 곧바로 그 의논을 정지해야 마땅하나, 이처럼 성상께서 몹시 노해 그치지 않고 동료들의 자리가 모두 비어버린 시기에 한 번 아뢰고 곧바로 정지하는 것은 실로 대각의 예전 규례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처럼 신의 견해가 서로 어긋나 연계(連啓)를 할 수 없는 데다가 체례(體例)가 있는지라 또 홀로 정지할 수도 없으니, 신이 이 점에 대해 형세상 구차하게 무릅쓰고 있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하고, 인피하며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5월 14일 을해
수찬 남이성(南二星)이 상차하기를,
"정중휘는 동료가 특별히 체직된 뒤를 이어 핑계를 대어 교묘히 회피한 뚜렷한 흔적이 있습니다. 대각의 풍채상 어찌 이와 같이 구차할 수 있습니까. 청컨대 체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후(李垕)를 집의로, 박순(朴純)을 지평으로, 홍만용(洪萬容)을 교리로, 맹주서(孟胄瑞)를 정언으로 삼았다.
부호군 김수항(金壽恒)이 상소하기를,
"죄명이 지극히 무거워 감히 다시 대궐문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띠고 있는 여러 직함을 삭탈하고, 이어 조정의 명부에서 빼어버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사양하지 말고 올라오라고 명하였다.
부교리 장선징(張善瀓)이 상소하여 병으로 사직하고, 인하여 송시열(宋時烈)·서필원(徐必遠)의 일을 진달하면서 또 민유중을 극력 구제하였다. 상이 받아들이지 않고 조리하여 직책을 살피게 하였다.
부수찬 남이성이 상차하기를,
"조정의 신하 중 죄를 받은 사람이 지금 몇 사람이나 됩니까? 삼사가 모두 텅 비어 간쟁하고 논집할 사람이 없는데, 오직 민유중 한 사람이 조금이나마 논열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군상을 멸시했다는 등의 전교로써 현저하게 꺾고 억눌러 한 세상을 겸제하여 감히 다시는 말을 못하게 하셨습니다. 유중이 견책을 받은 것은 참으로 애석해 할 것이 없지만, 전하께서는 언로를 생각하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하였는데,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5월 15일 병자
좌상 원두표(元斗杓)가 병중에 상차하여, 서필원의 상소가 사리에 어긋나고 거칠며 전에 없던 설을 새로 만들어 내어 그 폐단이 장차 인륜의 기강을 무너뜨리고 인간의 도리를 궤멸하여 《예경(禮經)》의 대의로 하여금 다시는 천하 후세에 밝혀지지 못하게 하는 데까지 이를 것이라고 극언하였는데, 상이 단지 그의 질병에 대해 염려한다는 뜻으로만 답하였다.
5월 16일 정축
상이 침을 맞았다. 제조 홍중보(洪重普)와 부제조 남용익(南龍翼)이 입시를 청하였다. 중보가 아뢰기를,
"충청 감사 이익한(李翊漢)의 진달로 인해 제주에서 시재(試才)하는 일에 대해 이미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듣자하니, 바다를 건너 들어갈 시기는 가을이나 겨울의 서북풍이 불 때가 순조롭고 편리하다고 합니다. 더구나 지금은 농삿일이 한창 바쁠 때이니 시재를 할 때에 농사를 폐하게 할 걱정이 없지 않습니다. 청컨대 가을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들여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중보가 아뢰기를,
"당초 다른 유생들로 하여금 반궁(泮宮)으로 들어가게 하였기 때문에 신들은 이미 재실을 지키는 유생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약간의 외방 유생이 식당을 출입하는데 모두 이름도 없는 무리들이라고 합니다. 재임(齋任)을 선출하는 데 있어 아직까지도 차출하지 못하였다고 하니, 이는 성균관을 비운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정거(停擧)를 풀어주었는데, 무엇 때문에 들어가지 않는가?"
하였다. 중보가 아뢰기를,
"상께서 특명으로 정거를 풀어주신 뒤에 식견이 있는 선비들이 곧바로 들어가 재실을 지키려고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반궁의 규례가 이전부터 성균관을 비웠을 때에는 반드시 돈독하게 효유하기를 기다린 뒤에 도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정거를 풀어주는 명이 있었지만, 돈독하게 효유하는 거조가 아직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감히 도로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성균관으로 하여금 소를 올리는 데 참여한 유생들을 효유하여 도로 들어가게 하라고 하였다. 중보가 아뢰기를,
"조정에서 유생을 대우함은 조정의 선비를 대우하는 것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유생이 스스로 처신하는 도리도 구차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만약 본관(本館)에 분부하여 효유하게 한다면, 이는 본관의 아랫사람이 여러 유생들에게 알리는 데 불과할 따름입니다. 그러니 유생이 된 자들이 어찌 도로 들어가려 하겠습니까. 유생들이 한 짓이 애초 망령된 행동이긴 했지만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또한 매우 낭패입니다. 상께서 특별히 승지를 보내거나, 혹 예조의 당상관을 보내 도로 들어가도록 개유(開諭)한다면 여러 유생들도 반드시 명을 받들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으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하였다. 중보가 지성균관사로 하여금 개유하도록 하라고 청하자, 상이 알았다고 하였다.
이날 지성균관사 김좌명(金佐明)이 본관에 나와 유생들을 불러 모아놓고 면대해 효유하였는데, 당장(堂長) 박자진(朴自振) 이하가 모두 말하기를,
"조정을 마음대로 제압하는 것은 곧 신자의 막대한 죄입니다. 황공한 마음 오히려 지금까지 풀리지 않으니, 감히 재실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였다. 좌명이 그 말을 아뢰었다.
전라도에 염병이 크게 번져 75인이 사망하였다.
5월 17일 무인
대사헌 이일상(李一相)이 ‘신은 본부의 계사에 대해 감히 옳다 그르다 할 수 없는 혐의가 있다.’고 하여 인피하고 물러나 기다렸다. 교리 홍만용(洪萬容) 등이 상차하여 출사를 청하였는데, 따랐다.
동지성균관사 김좌명이 또 반궁으로 가서 유생들을 불러서, 성상의 전교를 따라 재실을 지키지 않아서는 안된다는 뜻으로 다시 효유하였다. 여러 유생들은 종적이 온편치 않아 감히 도로 들어갈 수 없다고 대답하고 물러갔다.
5월 18일 기묘
동지성균관사 김좌명이 아뢰기를,
"오늘 아침 식당을 개설하려 하였는데, 동·서 상하의 재실에 있는 유생들이 한 사람도 들어와 앉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복(守僕)을 시켜 그 이유를 물었더니, 유생들이 말하기를 ‘당초 상의 명을 듣고 성묘(聖廟)에 들어와 지키고 있는데, 지금 재실을 지키는 것이 허술하다는 꾸지람이 있다. 이는 방정한 품행에 관계된 것으로, 태연히 식당에 나아가 참여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또 수복을 시켜 두세 번 권유하고 다시 앞으로 이끌어 내어 반복해 개도하였습니다. 그들이 물러간 뒤에도 수없이 왕복하며 효유하였지만 유생들은 끝내 나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청컨대 예조로 하여금 좋은 쪽을 따라 아뢰어 조처해서 본관의 결원인 당상관을 곧 속히 차임하게 하여 잘 효유하는 입지점을 마련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대사헌 홍처량(洪處亮)이 병으로 사직하고 나오지 않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유생들이 성균관을 비운 뒤에 또 권당(捲堂)하는 거조를 행하였으니, 실로 이는 막대한 변고입니다. 지금 성균관의 초기(草記)에, 재실을 지키는 것이 허술하다는 꾸지람 때문에 유생들이 식당에 참여하지 않는 데까지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 이른바 허술하다는 꾸지람은 어디에서 나온 말이며, 무엇을 가리켜 말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약간의 유생까지 또 그 때문에 권당을 하니, 지금의 형세는 단순히 우려할 만한 정도일 뿐만이 아닙니다. 따라서 조정에서 처치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특별히 별도로 가까운 신하를 파견하는 조처를 취하여 상소에 참여한 유생이건 참여하지 않은 유생이건 간에 권당한 유생들에게 일체 돈독하게 효유하여 우대하는 뜻을 보인다면, 성균관의 많은 선비들을 진정시켜 번거롭고 소란스러울 근심이 반드시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알았다고 답하였다.
5월 19일 경진
홍중보(洪重普)를 동지성균관으로, 이홍연(李弘淵)·남구만(南九萬)을 승지로, 윤문거(尹文擧)를 대사간으로, 안진(安縝)을 동래 부사로, 송시철(宋時喆)을 사간으로, 이단상(李端相)을 인천 부사로 삼았다.
대사헌 이일상이 패초(牌招)에 나아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5월 20일 신사
예조 판서 홍중보가 면대를 청하여, 희정당에서 인견하였다. 중보가 아뢰기를,
"전부터 유생들이 성균관을 비웠을 때에는 본관의 관원들이 으레 모두 반궁을 지켰으니, 신도 당연히 곧 가서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신이 나아가더라도 만약 그들이 명을 받들지 않는다면 어떻게 개유(開諭)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권당한 뒤에 이어 또 성균관을 비웠는가?"
하였다. 중보가 아뢰기를
"단지 재실만 지킬 뿐, 식당에는 들어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예조의 초기(草記)에 따라 이미 돈독하게 효유하려고 하였다. 곧 예관을 보내 권유하라."
하니, 중보가 아뢰기를,
"소신은 예조의 당상관으로 있는데다 성균관의 관직도 겸하고 있으니, 청컨대 명을 받들고 가서 효유하겠습니다."
하여,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진휼청이 아뢰기를,
"식량이 떨어져 굶주리는 기전(畿甸)의 백성 문제에 있어서, 본청에서 진휼해주고 남은 쌀 6천 석을 가지고 받기를 원하는 각읍에 나누어주라고 본도에 알렸는데, 지금 본도에서 만든 책을 보니 도내 각읍에서 받기를 원하지 않는 데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한 읍에 나누어주는 몫이 많아도 3, 4백 석에 불과하고, 적게는 겨우 1백여 석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적은 양의 쌀을 가지고서는 허다한 굶주린 백성들을 두루 구제하기가 형세상 어렵습니다. 청컨대 6천 석 이외에 4천 석을 추가로 지급해 1만 석의 숫자를 채워서 먹여주기를 바라는 백성들로 하여금 실제적인 혜택을 입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예조 판서 홍중보가 성균관에 나아가 상의 뜻을 전달하고 여러 유생들을 효유하였는데, 여러 유생들이 말하기를,
"당초 엄한 교지를 받들었을 때 재임(齋任)이 벌을 받았으니, 소두(疏頭) 이하의 여러 유생들도 이치상 마땅히 죄를 함께 받아야 하기 때문에 감히 다시 인륜을 밝히는 곳[明倫之地]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뒤에 개유하는 명이 있기는 하였지만 인정과 사리를 드러내지 않아 종적이 온편치 못해서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고 오직 죄벌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상께서 신들이 다른 뜻이 없다는 것을 굽어 살피시고 특별히 예관을 보내 또 이렇게 권유하시니, 황공하고 감격스럽습니다. 성상의 교지를 받들고 즉시 도로 들어가겠습니다. 권당(捲堂)하던 유생들도 명을 받들고 저녁에는 식당에 참여할 것이라 합니다."
하였다.
5월 21일 임오
장령 장선징이 거듭 추감(推勘)을 당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경상도에 굶주린 백성이 17만 6백 4인이었고, 염병에 걸린 자가 1천 6백 17인이었다.
5월 22일 계미
함경 감사 서필원(徐必遠)이 치계하기를,
"도내에 허통을 받지 못한 서얼로 과거 시험에 나아갈 수 없는 부류의 사람들이 곡식을 바치고 허통하는 체문(帖文)을 받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전일 상평청에서 내려보낸 것은 이미 모두 나누어주고 곡식을 받았는데, 이외에도 허통첩을 받기를 원하는 자가 또 많다고 합니다. 진휼해 구제하기가 한창 급한 이때에 곡물은 또한 관계된 바가 매우 큽니다. 청컨대 해청으로 하여금 넉넉히 허통첩을 만들어 보내게 하소서."
하니, 일을 상평청에 내렸다. 상평청이 1백 장을 보내주기를 청하니, 허락하였다.
이에 앞서 이조 판서 박장원(朴長遠)이 여러 차례 소를 올려 체직을 빌었는데, 상이 허락치 않았다. 좌부승지 이경억(李慶億)이, 패초하여 직임을 살피게 하자고 청하였다. 장원이 패초를 받고 대궐 밖에 나아가 소를 갖추어 정원에 올리기를, 한편으로는 전의 직임에 잉임시켜 달라고 청하고 한편으로는 나아가 행공한다면 실로 방정한 품행에 관계된 것인지라 끝내 감히 들어가 사은할 수 없다는 것으로 말을 하였다. 정원이 대궐 밖에서 소를 진달할 경우 받아들이지 말라는 수교(受敎)가 있었다는 이유로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중신(重臣)의 사체는 일반 관원과 다른 점이 있다는 이유로 상에게 품계하니, 상이 이르기를,
"안심하고 직임을 살피라는 비답을 여러번 내렸으니 괜한 뜻이 아니거늘, 어찌 자잘한 혐의로 자리를 비워 직임을 이와 같이 폐치할 수 있겠는가. 그의 소를 받아들이지 말고, 그로 하여금 속히 들어와 정사에 참여하도록 하라."
하였다.
조복양(趙復陽)을 이조 참판으로, 홍중보(洪重普)를 대사헌으로, 김우석(金禹錫)·윤원거(尹元擧)를 장령으로, 신후재(申厚載)를 지평으로, 이유상(李有相)을 교리로, 장선징을 부교리로, 오두인(吳斗寅)을 부수찬으로, 정치화(鄭致和)를 동지의금으로, 김수흥(金壽興)을 병조 참의로, 권대운(權大運)을 예조 참의로 삼았다.
개성 유수 오정위(吳挺緯)가 치계하기를,
"본부는 기근이 매우 심하고 염병이 크게 번져 혹 열 집, 혹 수십 집, 혹 온 마을이 모두 염병을 앓고 있습니다. 각부에서 앓고 있는 사람이 모두 합해 6백 25인이고, 사망한 자가 40인이나 됩니다. 날마다 죽을 끓일 곡식을 청하는데, 쌀과 콩을 약간 모아 준 외에는 달리 손을 쓸 데가 없습니다. 장차 어쩔 수 없이 그 죽음을 뻔히 서서 보게 되었으니, 청컨대 해조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소서."
하니, 일이 호조에 내려지자 진휼청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청하였고, 진휼청은 청하기를,
"경기의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해준 예에 따라 본청에 있는 대미(大米) 3백 석을 본부로 하여금 수령해 가서 나누어 진휼케 하고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모곡(耗穀)은 제외하고 도로 경창(京倉)에 납입케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5월 25일 병술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대사헌 홍중보(洪重普)가 내국(內局)의 제조로서 입시하였다. 중보가 아뢰기를,
"영상이 병이 나 비국의 회계하는 공사가 이 때문에 많이 지체되고 있습니다. 전에는 대신이 만약 병이 있으면 또한 그에게 가서 의논하는 규례가 있었습니다. 비국의 당상관으로 하여금 영상의 집으로 나아가 회계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중보가 아뢰기를,
"강도(江都) 각 창고의 고자(庫子)와 색리(色吏)들이 어사의 번고(反庫)로 인해 수금된 자가 무려 1백여 인에 이른다고 하는데, 어사의 서계(書啓)가 아직까지 해당 관사에 내려지지 않아 처결을 할 수 없습니다. 강도의 물정이 지극히 근심스럽게 여기니, 청컨대 그 서계를 내려 속히 처결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근래 안질 때문에 서계를 읽을 수 없었다. 본 뒤에 마땅히 내려보낼 것이다."
하였다. 도승지 남용익(南龍翼)이 아뢰기를,
"근일 조정이 반쯤 비어 삼사(三司)가 일제히 모이질 못하고 있습니다. 옥당에서는 상번(上番)의 궐직(闕直)이 여러 날이나 되었고, 더구나 양사는 공무를 볼 사람이 없어 헌부의 추감할 일이 매우 많이 적체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조(銓曹)에서 대간을 차출할 적에 매번 사람이 부족한 것을 걱정합니다. 뭇사람의 의논에 어떤 사람은 ‘형조로 그 추함(推緘)을 이송해서 그들로 하여금 대조해 조사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어떤 사람은 ‘모두 써서 들여 성상께서 보시도록 갖추어서 경중을 나누어 탕척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지금 서울에 있는 대관으로는 또한 장령 김우석(金禹錫)과 지평 신후재(申厚載)가 있으니, 청컨대 모두 패초하여 그들로 하여금 오늘 안으로 개좌(開坐)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행 대사헌 홍중보가 아뢰기를,
"신은 함경 감사 서필원(徐必遠)을 파직하라는 의논과, 대간을 외직에 보임하는 명을 도로 거두어 달라는 의논에 대해 온편치 못한 형세가 있고 또 상피할 혐의가 있습니다. 그런데 단지 약방에 있다는 이유로 힘써 출사하였습니다. 오늘 탑전에 입시하였을 때에 단지 새로 제수한 대간에게 하유하기만을 청하고, 본부의 전계(前啓)에 대해서는 감히 전례에 따라 연계(連啓)하지 못하고 묵묵히 있다가 물러 나왔습니다. 규례를 어긴 점이 있어 물정이 그르게 여기니, 청컨대 체직하소서."
하고, 물러나 기다렸다.
지평 신후재가 인피하기를,
"신은 본부의 의논에 대해 저절로 피할 만한 혐의가 있습니다. 서필원의 상소 가운데 두서너 재신(宰臣)을 차례대로 들어 말하였는데, 신의 장인 허적(許積)이 바로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제 나아가 숙배한 뒤에 감히 인혐하는 소장을 진달하였지만 정원에 저지를 받아 끝내 들일 수가 없었으니, 신이 가볍게 여겨진 소치 아닌 것이 없습니다. 청컨대 체직하소서."
하고, 물러나 기다렸다.
장령 김우석(金禹錫)이 인피하기를,
"죄를 받고 폐치된 몸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갑자기 자리를 더럽혀 물정이 모두 놀라고 대단(臺端)이 오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절대로 일각이라도 그대로 무릅쓰고 있기 어렵습니다."
하고, 또 물러나 기다렸다.
함경도에 여역이 크게 성행하여 경원(慶源)·안변(安邊)·정평(定平)·단천(端川) 등의 읍에서 사망한 자가 37인이었다. 감사 서필원이 치계하여 약물을 청하자, 상이 의사(醫司)로 하여금 내려 보내게 하였다.
충청 감사 이익한(李翊漢)과 공주 영장(公州營將) 양일한(楊逸漢)을 추고하였다.
이때에 명화적(明火賊)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일한이 영장으로서 강도 김명금(金命金) 등 16인을 체포하여 옥에 가두고 죄를 다스려 자복을 받아 감사에게 보고하고, 익한은 그 장계를 가지고 치계하였다. 얼마 뒤 명금 등 6인이 곧바로 죽자, 익한이 또 아뢰었다. 우부승지 김익경(金益炅)이 아뢰기를,
"근래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는 강도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으니 잡아 죄를 다스리는 거조는 참으로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옥사를 다스리는 데에는 또한 나름대로 체모가 있으니, 토벌해 체포하는 한 가지 일은 토포사(討捕使)가 실로 오로지 관장하는 것이지, 영장의 자기 임무가 아닙니다. 지금 이 도적들은 영장이 민간인의 고발에 의해 체포해 보고한 것이니, 감사가 된 자는 마땅히 토포사에게 이송해 그로 하여금 법에 따라 추고해 치죄하도록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대로 영장으로 하여금 끝까지 신문하여 자복을 받아내게 하였으니, 이미 지극히 부당하고, 여러 곳의 장물(贓物)과 피살된 사람들에 대해서도 증거를 삼아 추핵(推覈)하지 않았으니 안핵하여 신문하는 체모를 크게 잃었습니다. 한 차례 추궁 신문을 받은 도적들이 며칠이 안 돼 일시에 곧바로 죽어버렸으니, 더욱 의심을 살 만합니다. 근일 거칠고 사나운 외방의 무부(武夫)들이 도적을 토벌해 체포할 즈음에 상과 가자(加資)를 바라고는 옥석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혹독한 형을 시행해 오직 많은 숫자의 자복을 받아내는 일만 힘쓰고 있습니다. 지금 일한의 이 일은 실로 놀랄 만한 지경에 이르렀고 감사의 처치도 매우 타당치 못합니다. 청컨대 아울러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5월 26일 정해
부수찬 오두인(吳斗寅)·남이성(南二星) 등이 상차하여 행 대사헌 홍중보, 지평 신후재, 장령 김우석을 아울러 출사시키라고 청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중보는 또 옥당이 출사를 청하는 것이 구차하다고 하며 다시 인피하고 물러나 기다렸다.
장령 김우석이 아뢰어, 함경 감사 서필원을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며, 옥당의 처치한 관원에게 모두 체차를 명하고, 이규령(李奎齡)·조성보(趙聖輔) 등을 외직에 보임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고, 행 대사헌 홍중보의 출사를 청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사사로움을 비호한 민유중의 의논을 무엇 때문에 굳이 창화(唱和)하여 다시 일으킨단 말인가. 나는 실로 그 의도를 모르겠다. 윤허하지 않는다. 처치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동부승지 남구만(南九萬)이 아뢰기를,
"신이 삼가 헌부에 내린 비답을 보건대 ‘사사로움을 비호한 민유중의 의논을 무엇 때문에 굳이 창화하여 다시 일으킨단 말인가.’라고 전교하셨으니, 신은 나름대로 놀랍고 의혹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서필원을 탄핵하자는 의논이 여러 차례 대각에서 일어났으니, 공의가 있는 바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민유중이 당초 논계한 것은 원래 사사로움을 비호한 말이 아니었고, 지금 헌부의 논계 또한 공의를 따른 것이지 실로 유중 한 사람의 말을 따라 답습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만약 이를 가지고 창화한 것이라고 하신다면 신은 나름대로 전하의 의심이 너무 지나치신 것이 아닌가 염려스럽습니다. 전일 비망기의 전교가 이미 매우 준엄하였는데, 이번에 내린 비답이 또 실상 밖에서 나왔으니, 대각의 신하를 대우하는 도리가 매우 부족합니다. 신이 근밀한 자리에 있으므로 복역(覆逆)하는 뜻을 나름대로 덧붙여 구구한 생각을 황공하게도 감히 아룁니다."
하였는데, 상이 사알(司謁)을 시켜 하문하기를,
"헌부의 비답을 문을 닫을 때에 내렸는데, 어느 곳에다 그것을 두었다가 삼경에 비로소 이런 계사를 하였는가?"
하였다. 구만이 아뢰기를,
"구구한 생각을 진달하려고 초안을 잡다가 그만 야심한 시각에 이르러 성상께서 굳이 하문하시게 하였으니 황공함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비답을 내린 뒤에 또 표신(標信)을 청하여 대간을 패초하고 그 다음날 아뢰었고 보면 이는 비답을 전한 뒤의 일이니, 임금에게 비답을 반려하는 계사가 이와 같은지 들어본 적이 없다. 초저녁에 비답을 내리고 삼경이 반쯤 흐른 시각이 되었는데, 아무리 생각한 것을 글로 쓰느라고 그랬다지만 1백여 자의 생각을 글로 쓰는 데 어찌하여 야심한 시각까지 이른단 말인가. 명예를 구하고 임금을 업신여기는 태도를 볼 수 있다."
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병으로 상차하여 본직 및 겸대하고 있는 직을 체직시켜 달라고 하면서 아뢰기를,
"신이 병중에 강화 유수 조복양(趙復陽)을 이조 참판으로 옮겨 제수한 사실을 삼가 들었습니다. 이조 참판 자리는 참으로 지극히 신중하게 선발하여야 하고, 강도(江都) 또한 등한히 할 곳이 아닙니다. 따라서 오랫동안 자리를 맡아서 책임을 달성하도록 해야지, 자주 바꾸어서는 마땅치 않습니다. 복양은 그곳의 임무를 맡은 지 다섯 달이 되어 약간 민정을 파악하고 한 부의 일에 대해 이제 겨우 두서를 잡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시점에서 갑자기 다른 직책으로 옮기는 것은 결코 마땅한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번고(反庫)를 겪은 뒤 다스려 바로잡고 폐단을 제거할 책임을 아무 것도 모르는 생소한 사람에게 대신시키는 것은 더욱 옳지 않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의 말이 참으로 옳다. 조복양은 그대로 전임에 제수하여 효과를 거두도록 책임지우는 것이 마땅하다. 경은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5월 27일 무자
장령 김우석이 아뢰기를,
"서필원을 규핵하자는 의논은 시비가 달려있는 것이라, 물정이 더욱더 격렬해지고 있습니다. 당초의 논계가 비록 민유중에게서 나왔지만 실은 온 세상의 공론입니다. 대각에서는 단지 공의에 따를 뿐이므로 이미 나온 의논을 갑자기 정지함은 마땅치 않은 법인데, 성상께서는 통촉하지 않으시고 엄한 교지를 갑자기 내리셨습니다. 상하가 서로 막힘이 어찌하여 한결같이 이런 지경에 이른단 말입니까. 청컨대 신의 직을 체차하소서."
하고, 물러나 기다렸다.
지평 신후재(申厚載)가, 고집스런 견해를 가지고 시종 변치 않아 패초가 내렸는데도 끝내 달려오지 않았으니 포만(逋慢)함의 벌을 스스로 피하기 어렵다고 하여, 인피하고서 물러나 기다렸다.
부수찬 남이성(南二星)·오두인(吳斗寅)이 상차하여, 장령 김우석은 출사시키고, 지평 신후재와 대사헌 홍중보는 패초하여도 나아오지 않았으니 모두 체차하라고 청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도승지 남용익(南龍翼)이 아뢰기를,
"임금을 업신여긴 것은 지극히 무거운 죄입니다. 신하로서 이를 범하였다면, 주벌로도 용서할 수 없는 죄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사기(辭氣)가 평온치 못한 김에 여러번 이와 같은 전교를 내리시어 아랫사람들을 벌벌 떨게 하고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니, 신은 항상 이 점을 애석하게 생각했습니다. 지난밤 본원의 계사가 비록 너무 늦은 잘못이 있지만 이는 실로 상세하고 신중하게 말을 만들다가 시각이 지체된 줄도 모른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이것을 가지고 잘못이라고 하고 또 엄한 전지를 내리셨으니 어찌 모든 것을 포용해주는 성인의 도량에 손상이 있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평온한 마음으로 너그럽게 살피시어 정원에 내린 비답을 도로 거두시고, 이어 묘당에 자문하시어 속히 안정시키는 계책을 정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번 진달한 것에 대해서는 내가 경의 뜻을 취하지 않겠다."
하였다.
동부승지 남구만이 지난 밤 엄한 전지를 받았다는 것으로 이른 아침 대궐 밖에 나아가 상소하여 죄를 청하였는데, 상이 사양하지 말고 직책을 살피라고 답하였다.
5월 28일 기축
함릉군(咸陵君) 이해(李澥)가 다시 상소하여 치사(致仕)를 빌었는데, 허락하지 않았다.
이해는 어려서부터 자유롭게 행동하였고, 기절(氣節)이 있었다. 집에 있을 적에는 독실히 실천하여 동생이나 조카들과 우애가 있었다. 원두표(元斗杓)와 사이가 좋았고, 둘 다 정사 공훈(靖社功勳)에 참여하였다. 두표는 권력을 탐하고 권세를 좋아했지만, 이해는 담박한 성품에 이록(利綠)을 즐겨하지 않았다. 벼슬이 경재(卿宰)에 이르렀지만 문정(門庭)의 쓸쓸함이 한사(寒士)와 같았다. 나이 70이 되어 여러 차례 소장을 올려 치사를 빌었지만 청을 허락받지 못하였다. 이해가 마침내 정기적인 녹봉조차 받지 않고서 사퇴의 뜻을 나타냈는데, 뒤에 연신(筵臣)의 진달로 인하여 호조에 명해 해마다 음식물을 내려주게 하였다.
이때 이르러 다시 소장을 진달해 전일의 요청을 꼭 이루려고 하니, 일을 이조에 내렸다. 이조가 회계하기를,
"이해가 나이를 이유로 물러나기를 구하였는데 일찍이 허락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또 간절한 말로 소장을 진달하였으니 그 뜻 또한 지극히 숭상할 만합니다. 그러나 조정에서 훈구신을 보살펴주고 대우하는 도리상 가벼이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아뢴 대로 시행하라고 하였다.
좌부승지 이경억(李慶億)이 소명(召命)에 나아가지 않고 상소하기를,
"삼가 살펴보건대, 근일 전하께서 비답하는 말 사이에 매번 임금을 업신여기고 멸시한다는 등의 전교를 내리고 계십니다. 임금의 말이 한번 전파되면 사방에 전해져 일컬어지고 사람들의 놀라움과 의혹을 불러일으키니, 이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 신이 근밀한 자리에 있으면서 이미 앞에서 능히 보도를 하지도 못하고, 또 뒤에서 널리 구제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죄가 이와 같은 데 이르렀으니, 어떻게 스스로 속죄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성명께서 평온한 마음으로 간언을 살펴 받아들이시어 뉘우치고 고치는 바가 있게 된다면 신이 비록 주륙을 받더라도 오히려 영광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진달한 말에 대해 내 마땅히 유념할 것이다. 그대는 사양하지 말고 직책을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5월 30일 신묘
정언 맹주서(孟胄瑞)가 상소하여 사직하고 인하여 민유중이 아무 죄도 없이 견책을 받았다고 극언하였는데, 상이 사양하지 말고 직책을 살피라고 답하였다.
대사성 민정중(閔鼎重)이 병으로 소명을 받들지 못하였다고 상소하여 스스로 논핵하고, 본직 및 겸대하고 있는 여러 직임을 체직시켜 달라고 청하였는데, 상이 사양하지 말고 올라오라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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